[스크랩] 천문도(天文圖)의 비밀, 단군을 삭제하라

2018. 3. 10. 19:14우리 역사 바로알기

누가 우주를 바꿨는가?
천문도(天文圖)의 비밀, 단군을 삭제하라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이름의 천문도(天文圖).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하늘이 점지해 준 사람만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염원의 징표(徵表)가 마침내 손안에 들어 왔다. 이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여 새 왕조의 권능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의 도움이었다. ‘어떤 이’가 한 본을 올린 것이다. 세계 최고(最古), 하늘의 형상을 담은 천문도(天文圖) 석본(石本)이었다. 이를 입수하기 위해 권근, 유방택, 권중화 등 12명의 천문학자들의 노고는 얼마나 컸던가. 수 년 간의 노력 끝에 대륙 단군조선의 하늘은 반도의 하늘로 개작, 재탄생되었고 그 꿈은 성취되었다.


권근(權近)은 ‘천문도(天文圖)의 지(誌)’에 그 경위를,
“천문도의 석본(石本)은 옛날 평양성(平壤城)에 있었는데, 병란(兵亂)으로 강물에 잠겨 유실되었으며, 세월이 오래되어 그 남아 있던 인본(印本)까지도 없어졌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어떤 이가 한 본을 올리므로, 전하께서는 이를 보배로 귀중히 여기고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돌에다 다시 새기게 하매, 본관(本觀)이 상언(上言)하기를,


“이 그림은 세월이 오래되어 별[星]의 도수가 차이가 나니, 마땅히 다시 도수를 측량하여 사중월(四仲月 음력 2ㆍ5ㆍ8ㆍ11월)의 저녁과 새벽에 나오는 중성(中星)을 측정하여 새 그림을 만들어 후인에게 보이소서.”
하니, “상께서 옳게 여기므로 지난 을해년(1395, 태조4) 6월에 새로 중성기(中星記) 한 편을 지어 올렸다. 옛 그림에는 입춘(立春)에 묘성(昴星)이 저녁의 중성이 되는데 지금은 위성(胃星)이 되므로, 24절기가 차례로 어긋난다. 이에 옛 그림에 의하여 중성을 고쳐서 돌에 새기기가 끝나자 신(臣) 근(近)에게 명하여 그 뒤에다 지(誌)를 붙이라 하였다.(하략)”

 

권근이 말한 옛날 ‘평양성(平壤城)’과 ‘어떤 이’ ‘별[星]의 도수가 차이가 나니’ 또 ‘마땅히 다시 도수를 측량하여’라는 미로(迷路) 같은 수식어를 동원했다. 숨겨진 그 이면을 고찰해 보자.


별자리 이동을 통해 단군조선의 형상을 지웠다. 고구려의 발원지가 한반도이며, 평양성이 그 도성(都城)인양 기묘하게 활용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일식기록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위치는 몽골 또는 내몽골지역을 넘는다.

단군세기, 단기고사에도 한민족의 터전은 대륙이었다. 그 터전 위에 섰던 대제국 고구려를 한반도에 축소 국한시키려는 눈물겨운 노력, 그 의도는 역성(易姓)의 당위성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49년) 기록을 살펴보자.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二年 春 遣將襲 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모본왕이 하북성과 산서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하북성 근처에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기록들이다. 북사(北史) 또한 이를 지적했다.


‘어떤 이가 한 본을 올리므로’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사실(史實)을 감추었다.
‘어떤 이’는 누구인가?.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서 그 연원을 찾아보자.


BC 2,087년 5세 구을(丘乙) 단군 때 혼천기(渾天機)를 제작했다.


3,508년이 흐른 1,421년 7월 세종실록은 짧고 간략하게 이 기록을 남겼다.
“盡入書雲觀所藏《天文秘記》于內 (서운관(書雲觀)에 간수했던 《천문비기(天文秘記)》를 궐내(闕內)로 옮겨 들이게 하다.)” 비기가 궐내로 들여온 12년 후인 1,433년 6월 혼천기(機)는 혼천의(儀)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고, 박연(朴堧) 등 3인이 새로 만들었다 했다. 1457년(세조3) 수거목록에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가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이후 13자(字)의 비밀스러운 이 기록은 조선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BC 2,049년 신지발리(神誌發理)가 지은 신지비사(神誌秘詞) 또한 서운관 소장 도서였다. 고구려의 대영홍(大英弘)이 재정리했다는 이 비사는 건원능 신도비와 용비어천가에 인용됐다. 단군조선 기록은 기자조선(箕子朝鮮)과 배치, 의도적으로 배재했음을 볼 수 있으며 단군조선의 천문 기록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권근의 “천문도의 석본(石本)은 옛날 평양성(平壤城)에 있었는데”라는 수식어, 바로 이를 염두에 두고 고구려라 했음이다. 단군시대의 ‘천문비기’들은 하나하나 조선의 치적(治積)으로 돌변했다. 


모방은 절대 복제가 아닌 것인가. 찬란했던 단군시대의 문명을 베껴왔으되 그것이 결국 내 왕조의 업적이 되도록 창조의 힘이 함께 작용된 것이라 여겼으리라. 어쨌든 옛 것에 대한 창조적 모방을 통해 건국 초기의 이념을 정비했다고 자위했을 터이다. 이로써 종교적 권능을 감지(感知)하게 하는 강력한 힘과 통찰력으로 가미되고, 길이길이 성군(聖君)의 지적인 노력으로 간주되었음이다.


BC 2,084년에는 감성관(監星官)을 두고 천체관측을 시행했다.
감성관 황보덕(皇甫德)은 임금께 “제가 천문을 관측한 지 50년이 되므로 천체의 대강을 추측하였습니다. 천체 중에 제일 큰 것은 북극성(北極星) 같은 항성(恒星)입니다. 그 다음은 태양의 종류이며, 다음은 수성 금성 지구성 화성 목성 토성 천명성 해명은성 명성 같은 행성이 있어 태양을 중추로 삼아 회전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역시 태양계의 하나인 행성입니다.”라 아뢴다. ‘천문을 관측한 지 50년’이라면 BC 2,134년 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천문관측은 단군시대 이전부터 계속 이어져 왔음을 뜻한다.


BC 1,916년 10세 노을(魯乙) 단군께서 감성(監星)을 설치했다. 감성대(監星臺)는 632년 신라 선덕여왕이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으로 바꿔놓았다.


1675년에 설립한 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天文臺)는 세계 표준시(標準時)의 기준이며, 1637년 덴마크가 코펜하겐에, 30년 뒤인 1667년 프랑스가 파리에 천문대를 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이들 천문대 역시 우리 보다 3,700여 년이 뒤진 것이니, 단군시대의 과학 문명이 얼마나 찬란하고 우수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세종의 치적으로 일부를 올린 천문기기들은 BC 1,836년 11세 도해(道奚) 단군 때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雷車), 조담경(照膽鏡) 등 26종의 발명품이 나왔다고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전하고 있다. 12개의 명산에 설치한 국선소도(國仙蘇塗), 염표문(念標之文)에 담긴 위대한 창조정신이 바탕이 되었을 터, 조선의 업적으로 남았다.


BC 1,733년 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신화로 치부되었고, 강단의 맹공이 이어졌다. 그러나 천문학자들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상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이’는 단군이다.
고려사를 반포하자고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상소한 해가 1,469년이다. 78년의 세월이었다, ‘고려사에 시시비비가 많다’는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의 고뇌어린 표현처럼, 위작 고려사에서 단군 기록은 백문보(白文寶 1303 ~1374)가 말한 단 한 줄 뿐이다. 다목적 개작, 역사의 줄기를 끊고자 안간힘을 다한 조선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고려사에서 단군을 삭제해야만 천문도의 개작 비밀이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음이다.


‘별[星]의 도수(度數)가 차이가 나니’ 또 ‘마땅히 다시 도수를 측량하여’라 했다.
단군 조선의 대륙 하늘을 한반도 하늘로 이식(移植)하기 위한 수순이다. 도수의 차이를 맞춰야 했다. 유방택(柳方澤 1320~1402)이 동원되었다. 여말선초의 천문학자로 경학(經學)과 천체 관측에 능했다.


1393년 태조는 ‘유방택은 일관(日官)으로서 천시(天時)를 점쳐 태조가 대위(大位)에 오르도록 권고한 공이 있으니 은전(恩典)을 주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렸고 포상을 받았다.


앞서 유방택은 돌에 1,467개의 별을 새겨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석각천문도」를 제작했다. 제작자 12인 중 권근(權近)은 글(記)을 짓고, 설경수(偰慶壽)는 글씨(書)를 썼다.


천문계산의 담당자였던 유방택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완성한 공적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서산군(瑞山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취령산(鷲嶺山)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다 생을 마쳤다.


지구촌의 자전축, 즉 북극은 2만5천8백년을 주기로 별들 사이를 서서히 옮겨가며 하늘에서 원을 그린다. 이 변화를 세차운동(歲差運動)이라고 한다. 이 점을 이용해 옛 천문도에 그려진 별자리들의 위치를 북극과 적도의 위치와 비교하면 그 천문도가 어느 시대의 밤하늘을 나타내는
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유방택의 은둔은 무엇을 뜻하는가?.
3,479년 전 단군시대 천문도를 보았을 터이다. 중성기(中星記)을 새로 계산하여 돌에 새겼다했다. 28수(宿)를 읽은 천문학자, 경학에도 밝은 천재 유방택은 분명 대륙 밤하늘의 세차운동을 계산했을 터. 이로써 대륙 깃점 우주(宇宙)는 한반도의 우주로 재탄생했다.


이를 기초로 제작한 석각도(石刻圖), 천손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가슴에 품지 못한 회한(悔恨)이 뼈저리게 작용된 것은 아니었을까?.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의 혁명을 합리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의 산물이다.


후대는 1,247년 남송(南宋)시대 1,433개 별자리를 그린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에 이어 세계 두 번째라 자찬하고 있다.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대(事大)에의 생명력은 잡초처럼 질기게 조선을 지배했다. 그리고 진행형이다. 권근은 ‘천문도(天文圖)의 지(誌)’ 말미에 글을 보탰다.

“이 그림을 정민(貞珉)에 새겼음에랴! 길이 자손만대에 보배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창고마다 서책이 가득하여 헤아릴 길이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 많은 사서(史書)는 어디로 갔는가?. 비기(秘記)의 분서(焚書) 및 수장(收藏)을 통해 백성의 눈을 철저히 가렸다. 신생 조선은 이를 활용, 새 왕조의 기틀로 개작했다.


역사왜곡은 당대에 머물지 않고 치유가 불가한 생체기로 남았다.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政毅) 초대 조선총독은 “새로운 논리로 다른 사서를 만드는 것이 첩경이며 그 효과가 클 것”이라고 했다. “조선인들이 역사와 전통을 모르게 하고 무능만 들추어내 가르쳐라”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됐고, 한국 고대사 말살에 나섰다.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 시작된 동북공정(東北工程) 또한 우리가 우리역사를 호도한 데 따른 업보(業報)이었음에랴.


식민사학과 동북공정, 언제까지 저들의 탓으로만 되 뇌일 것인가.
훔치고 고치고 불태운 선대의 부끄러운 발자취를 먼저 자성(自省)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하나하나 꿰매어 검증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역사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반드시 보복한다”는 교훈은 이에서 나왔음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일이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출처 : soo709
글쓴이 : 한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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