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여 년 후를 예언하고 기다려 한 나라 수립의 정당성과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신기의 비기(秘記), 찬란한 문화를 간직했던 단군시대의 수 많은 유물 중 한 권의 서책이 천추(千秋)의 세월을 기다려 신생 조선 건국의 꿈을 이루고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했다.
이 예언서가 절대자의 비명(碑銘)에 새겨지고 또한 입을 모아 이를 칭송하고 노래(謳歌)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했으니, 이 뜻이 참 역사와 부합되었다면 한민족은 세세토록 영광을 받아 마땅하리라.
BC 2049년 기록된 비기 신지비사(神誌秘詞), 이를 인용한 비명(碑銘)과 용비어천가를 짓게 된 미로(迷路)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개연성을 살펴보자.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의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을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이 수천 년 동안 떠돌았는데 이제야 특별히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이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라 하여 권근(權近)은 건원능 신도비(建元陵神道碑銘)에 기록했다.
“이는 사람의 지혜로 구할 수 없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구변도 십(열)팔자(九變圖十八子)의 전설이 단군(檀君) 때부터 있어 수천 년을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징험할 수 있다.”고 병서(幷序)에 썼다.
▲건원능 신도비와 비문
이는 서운관(書雲觀)의 비기(秘記)와 지리산(智異山) 석굴로부터 이승(異僧)이 전한 것이 단군 시대에 나왔다는 것과 서로 부합된다고 했으니, 미어(謎語) 같은 기막힌 산술적 배합이 이제 풀리게 되었다.
비기(秘記)가 전하는 구변진단지도란 무엇인가.
6세 단군 달문(達門)께서 천제(天祭) 후에 신지 발리(神誌 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했다. 이 비기가 신지비사였으니, 조선 개국 3,441년 전의 일이다. 3천여 년 전 신지 발리가 지은 글을 사실적(史實的) 예언 기록인 것으로 비명에 기록한 것이 아닌가.
구변진단은 고조선, 삼조선,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치고 통일신라, 발해, 고려까지 국명이 9번 변했다는 뜻이다. 진단(震檀)은 진방(震方) 즉 진역(震域)의 단군조선을 일컫고 동방(東方)으로 목(木)을 상징한다. 여기서 비명(碑銘)에서 적시한 ‘建木得子’와 합을 이뤘다.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朝鮮卽震檀之說)...”의 ‘說’은 혀(舌)가 어원이다. 말(言), 말씀(語), 이야기(話)도 있다. 言은 그냥 입에서 나온 ‘말’이고, 說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전제한 ‘말’이다. 설(說, 舌)과 살(殺)은 한 치 차이로 항상 동행한다. 설은 얼마든지 살(殺)로 돌변할 수 있는 법이다.
‘說’에 대해 논어(論語) 구절에 사불급설(駟不及舌)이 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아무리 빨라도 혀에서 나온 말을 이길 수 없다”라 했다. ‘說’을 빙자하여 여론의 만세(萬歲) 파급 효과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2, 3장 두 구절에서 윗글을 다시 살펴보자.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라 하여 나무(木)를 대입하고 진방인 동방과 이(李)의 木을 절묘하게 이음질했으니, 비명의 구절과 닮았다.
“周國大王(주국 대왕)이 豳谷(빈곡)애 사샤 帝業(제업)을 여르시니... (주나라 대왕이신 고공단보께서 빈곡에 사시면서 제업의 기초를 닦으...)”라 하여 사대(事大)의 예를 다함을 밝혀 대국에 대한 종속 계념을 심어 놓았다.
BC 3,895년 배달국의 진서(眞書)인 녹도문(鹿圖文)과 3세 단군 가륵(嘉勒)께서 BC 2,181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 명하여 지은 가림토(加臨土, 正音 38字)가 훈민정음으로 재 창제되었으나, 고의적 또는 의도적으로 고조선과의 관계 설정은 배제했다.
용비어천가는 비사(秘史)를 매개로 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당위성 설정과 훈민정음의 실용성 여부를 실험했다. 조선건국이 하늘의 뜻임을 알려 민심(民心)을 조정에 귀의(歸依)시키고자 한 합리화(合理化)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설화를 소재로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절묘하게 인용하여 대입하는 치밀함을 보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신화적 배경이 용비어천가를 떠받드는 모태가 되었음이다.
▲세종 때 건국의 시조들을 찬양하고, 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여 노래한 용비어천가와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재위 45년) BC 2181년‘가림토’ 관련 원문.
▲경남 남해군에서 발견된 녹도 문자 / 중국의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서 발굴된 골각( 骨刻 ) 문자/ 평북 연변군 묘향산의 비석에서 발견된 녹도 문자
또한 훈민정음을 표기 수단으로 하여 그 존엄성을 확보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아악곡(雅樂曲)를 삽입했다. 이 곡이 곧 여민락(與民樂)이며 그 안에 위민(爲民)과 여민(與民)의 뜻을 담았다.
무릇 노래와 춤은 심중에 파고드는 감흥의 최대치이다. 시(詩)에 곡(曲)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춤추게 하여 인간의 원초적 감흥 즉 마음을 움직여 동질성을 이루게 한다. 소리와 몸짓이 상호 교감하므로써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
바로 서효사(誓效詞)의 서사적 시를 은유적으로 차용, 가미한 이유가 아닌가. 그 감화가 백성에게 까지 미쳐 함께 즐기게 될 것을 예상했음이다.
신지비사를 인용, 기록한 권근(權近 1352-1409). 권제(權踶 1387-1445), 권람(權擥1416-1465) 3대에 걸친 문헌이 보인다. 권근이 응제시(應製詩), 건원능 신도비명 병서에, 권제가 용비어천가에, 권람이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인용하여 다른 이름 9변도국(九變圖局)으로 썼다. 수 천 년 단군역사를 빌어 조선 건국의 역량을 증명하고, 당위성을 깨우치려 했다.
권근이 9변도국으로 고쳐 부른 역사인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행촌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한종유(韓宗愈 1287-1354)의 영향이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권근은 이암의 아들 이강(李岡)의 사위로 처조부라는 인과 관계에 있으며 양촌집(陽村集)에 이암에 관련된 시를 남겼다. 고려조 좌정승 한종유는 외조부로서 많은 문헌을 남겨 가풍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선대의 역사관과는 거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1412년 태종은 충주 사고(忠州史庫) 소장 서적 중 신비집(神祕集)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하고,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들이다.”하여 이를 불사르게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한 구절을 대비해 보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라고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친시 문무과 합행본명 초년 예통행 청사(親試文武科合行本命醮年例通行靑詞)에서 “선가(仙家)의 비기(秘記)를 상고하고 깨끗한 기도의 글을 구하여, 본명(本命)의 때를 당할 때마다 그것으로 오래 사시는 축원을 간절히 드리옵니다.” 라 하여 비기의 존재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 신지비사는 왜 불태워 졌을까?.
9변도국에서 보듯 고조선의 위치가 대륙 깊숙이 존재해 있었고, 이러한 근거가 명나라로서는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명의 속국 입장에서 상국(上國)에 대한 거슬림을 사전 예방하여 그 어떤 억압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설명한 내용처럼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 기록을 보자.
1485년(성종 16) 서거정(徐居正)은, “(상략) 고려(高麗)가 삼경(三京)·삼소(三蘇)라는 말에 현혹되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대중을 동원한 것이 거의 쉬는 해가 없었으나, 화란과 패망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런 글을 얻는다면 오히려 불살라야 마땅할 것인데, 하물며 하나하나 존숭하고 장황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라 하는 등 육조 대신들의 격론이 벌어진다.
태종에 의해 불태워진 신비집 즉 신지비사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서거정이 “불살라야 마땅할 것인데”라는 말은 이미 불태워 버린 책인데, 시시비비(是是非非)논할 가치도 없다는 뜻을 담고 있음이다.
신지비사가 구변(九變)을 거치는 동안 정서적, 정신적으로 민중(民衆)에게 미친 영향이 더없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구변 이후 태평성대를 암시하고 있다. 73년이 지난 성종조에 신지비사는 참위서라는 이름으로 다시 낙인찍히고, 불태워졌음이 서거정의 증언으로 재확인 되었다.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는 단군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뜻이고, 유구변진단지도(有九變震檀之圖)는 신지비사를 변용한 다른 이름이었다. 비사의 비결처럼 조선이 수립되었다는 위증(僞證)이 공개될까 두려워 참서(讖書)라는 이름을 붙여 금서(禁書)가 되고 불태워 고대사(古代史)의 고리를 절단했을 개연성이다.
신도비명에서 용비어천가로 이어지는 비사 설정은 진정 조선 건국의 불씨가 되었는가?. 상고(詳考)하고자 하나 고통만 가중될 뿐, 모양세가 처연하고 가슴 메이게 한다.
-‘古代史書는 불타고 있는가’ 12/6 강의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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