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권근과 주원장이라.....
주원장의 어제시3편과 권근의 답시2?편은......
.../명나라가 '억지 표전문제'를 일으켜서 홀로서기[소중화]를 시도하는 조선의 개혁파(이성계,정도전 등)를 숙청하고 친명파(이방원,권근 등)로 교체시켜 조선을 중국(명나라)의 영원한 속국으로 규정하게 된 중요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결국, 이로서 '조선은 중국인인 기자의 후손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며,...그 전부터 조선인 모두가 굳게 믿고 있었던 ...'고조선의 단군, 삼성, 마고 등이 모두 허깨비'....가 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따라서 이후의 조선의 역사교육은 항상 기자로부터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이때 또 한가지 중요한 '조명간의 합의사항(일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명국경선을 서위압록 동위토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물론 여기서의 '압록은 현,동요하지류인 혼하'이며, '토문은 현,송화강지류인 휘발하'이며, '그 중간에 있는 산고개가 분수령'이 되는 것으로서 당시 장령이라고 했었던 현,길림합달령의 일부가 되는 능선이었던 것이다....즉, 최초의 조명국경협약은 현,요동반도와 현,남만주가 모두 조선의 땅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종 이후 세종이 현,요동반도지역에 4군을 설치하였었고, 현,남만주지역(송화강 이남)에 6진을 설치하였었는데,.. 명나라에서 야금야금 침식하다가 명나라가 세조반정을 인정해 주는 것을 기화로 압록을 현,압록강으로 옮김으로서 소위 서간도[=요하압록과 현,신의주압록의 사이인 요동반도]가 세조시기에 반상실[암묵적]되었었고, 동간도[=송화강휘발하+송화강+흑룡강과 현,두만강 사이의 남만주 및 연해주]가 청나라 목극등이 일방적으로 현,백두산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움으로서 반상실[암묵적]되었었는데,....백두산정계비설치시 토문강 위치의 애매성 때문에 '간도[=동간도=북간도]문제'가 대두되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일방적으로 간도를 중국에게 양보해 버림으로서 현,한중국경선이 정해지게 된 것이다....그래서 현재 중국측과 한국측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국경협약은 여전히 '권근과 주원장의 만남'에 의해서 결정된 '서위압록(현혼하)동위토문(현,휘발하)'만이 유일하게 유효한 상태이므로 지금이라도 우리는 중국과 이때의 협약에서 부터 출발하여 국경협약을 다시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 근거서류들은 아직도 중국측과 우리측 모두에게 깊게 쳐박혀져 방치된 서류뭉치 속에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권근과 주원장이 주고받은 '시편들'이 조선의 향후 운명을 결정 짓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므로 이때의 사건들을 확실하게 재조명하지 않으면 조선초 이후의 우리역사는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고 보인다. 이런측면에서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에 담긴 계략과 음모'를 잘 풀이해서 지적해 주신 한눌(2013-03-04 11:25:04)님의 탁견에 공감을 표하는 바이다....우리역사학계에서 '권근과 주원장이 주고받은 시들'만 제대로 잘 해석해도 5,000년 우리역사의 큰 흐름을 알수 있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