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1

2018. 3. 14. 02:09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


  * 단차(團茶)에 이어서 돈차(전차 錢茶)를 한국고전종합DB에서 검색하여 보았으나, 돈차에 대한 기록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운양집> 주석에서 1회가 나올 뿐 전차(錢茶)에 대한 기록은 단 한건도 검색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돈차(錢茶)는 궁중이나 사대부간에는 통용되지 않았다기 보다도, 사농공상의 계급사회였던 조선조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돈 전(錢)자가 들어가는 돈차(錢茶)라는 용어를 기피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돈차(錢茶)라는 용어는 남도지방의 차산지에서 산간 불가(佛家)나 민간에서 속어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궁중이나 사대부가에서는 이 돈차(錢茶)를 삼국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단차(團茶)의 별종으로 보아 그냥 단차라고 통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한글로 <전차>라고 검색하였더니 전다(煎茶)를 언급한 고전문헌들이 여러 건 검색되었기에 아래에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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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19권 / 율시(律詩)   이곡(李穀) , 2006~2007년 발간

강릉(江陵) 객사(客舍)의 동헌(東軒)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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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차 때마침 가절인 데다 또 풍년 / 我行佳節更豐年
임영에 취해 쓰러지니 세상 밖 선경일세 / 醉倒臨瀛別洞天
산은 북에서 내려와 푸른빛 끝이 없고 / 山自北來靑未了
바다는 동쪽 끝에서 가없이 넓고 넓네 / 海爲東極浩無邊
경호에 술 싣고 가니 밝은 달빛 출렁출렁 / 鏡湖載酒搖明月
돌 아궁이 차 달이니 자색 연기 모락모락 / 石竈煎茶颺紫煙
맹호보다 사나운 정사 만나지만 않는다면 / 但自不逢苛政虎
고을 백성은 원래의 신선으로 되돌아가리라 / 州民元是一群仙

임영(臨瀛)은 강릉의 별호(別號)이다. 경포(鏡浦)와 한송정(寒松亭)에는 모두 옛날 선인들이 차를 달였던 돌 아궁이가 있다. 
[주-D001] 맹호보다 사나운 정사 : 
공자가 제자들과 태산(泰山)을 지나가다가 어떤 아낙네가 묘(墓) 옆에서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더니, 예전에 시아버지와 남편을 호랑이가 잡아먹었는데 이제는 아들까지 잡아먹었다고 하였으므로, 공자가 그렇다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묻자, 여기는 가혹한 정사가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사는 맹호보다도 사나운 것이니라.〔小子聽之 苛政猛於虎〕”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예기》〈단궁 하(檀弓下)〉에 보인다.







간이집 제7권 / 갑오행록(甲午行錄)   ㅡ  최립(崔岦)

우가장(牛家莊)의 샘물이 너무 나빠 도저히 마실 수가 없기에 눈 녹인 물로 대신 목마름을 달래려 하면서 동파(東坡)의 급강전다(汲江煎茶) 시에 차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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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대신 눈을 녹이는 걸 끓일 필요가 뭐 있으리 / 雪水當茶未要烹
촌교로 맑힐 수 없을 만큼 우물이 온통 흐리도다 / 井渾無賴寸膠淸
태결은 조정이 못 되는 건 일찍부터 알았다만 / 早知太潔非調鼎
난영인데 병들고 온 게 부끄러운 걸 깨달았소 / 俄覺難盈愧挈缾
심한 갈증에 생각만 해도 목젖이 벌써 촉촉한데 / 渴甚思令喉得潤
너무 차서 뱃속에 들어가 탈이 날까 두렵도다 / 寒多怕入腹爲聲
우가장의 금주(禁酒) 원칙 이상하게 생각마오 / 牛莊止酒應休怪
술에서 깨면 물 달라고 하인을 귀찮게 할 테니까 / 醒醉常煩僕屢
[주-C001] 갑오행록(甲午行錄) : 
선조 27년(1594)에 중국 군대의 파병과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책봉을 주청(奏請)하러 중국에 갔을 때의 시를 모은 것이다. 이때 주청사(奏請使)는 윤근수(尹根壽), 주청 부사는 간이(簡易) 최립(崔岦), 서장관(書狀官)은 신흠(申欽)이었다.
[주-D001] 급강전다(汲江煎茶) 시 :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43에 나온다.
[주-D002] 촌교(寸膠)로 …… 흐리도다 : 
우물이 마치 황하(黃河)처럼 흐려서 마실 수가 없다는 말이다. 《포박자(抱朴子)》 가둔(嘉遯)에 “얼마 안 되는 아교(阿膠)로는 흐린 황하를 맑게 할 수가 없다.[寸膠不能治黃河之濁]”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 태결(太潔)은 …… 알았다만 : 
태결 즉 너무 깨끗하다 보면, 조정(調鼎) 즉 솥에서 끓는 국물의 간을 맞추듯 국사(國事)를 멋지게 요리하는 재상(宰相)의 자격이 없다는 말로, 흐린 우물물에 대해 비유한 해학적인 표현이다. 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병석에 누운 재상 관중(管仲)에게 후임자로 포숙아(鮑叔牙)가 어떻겠느냐고 묻자, 그는 너무도 깨끗해서 재상의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莊子 徐无鬼》
[주-D004] 난영(難盈)인데 …… 깨달았소 : 
난영 즉 차고 넘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경계에 비추어 볼 때에는, 병에 하나 가득 담으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는 말이 나온다.


  최립 (崔岦 )   :     1539(중종 34) ~ 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대중국 외교문서 작성의 제1인자로 임진왜란 때는 여러 번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조 교섭을 했다. 시에도 탁월했다.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 아버지는 진사 자양(自陽)이다. 이이(李珥)에게 수학했다.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여러 외직을 거친 후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 재령군수 재직 때 기민 구제에 힘써 선조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그해 다시 주청사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84년에는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1592년 공주목사에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음해 주청사 질정관으로, 1594년에는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쟁 후에는 판결사·강릉부사·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즉위 후 대북정권이 등장하자 정계에서 은퇴, 평양에 은거했다.

   시에 탁월하여 초(草)·목(木)·화(花)·석의 40여 종을 소재로 시부 1편씩을 지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한호의 글씨, 차천로의 시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문집으로 〈간이집〉, 시학서로 〈십가근체시 十家近體詩〉·〈한사열전초 漢史列傳抄〉, 역학서로 〈주역본의구결부설 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이 있다.   /  <음백과>













계곡선생집 제28권 / 오언 율시(五言律詩) 150수   /  장유(張維)

유양의 최 사군 대용이 서간에서 노닐며 지은 시에 차운한 두 수[次韻維楊崔使君大容遊西澗有題二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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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 연이은 숲의 그림자 / 翳翳長林影
차디찬 시냇물 여기가 근원일세 / 泠泠古澗源
거문고 손에 들고 걷는 오솔길 / 携琴踏蘿逕
두건 위로 젖히고서 소나무에 기대 보네 / 岸幘凭松根
물고기 회 치자 은실처럼 떨어지고 / 斫膾銀絲落
차를 끓이니 우유 거품 보글보글 / 煎茶雪乳翻
누가 알리요, 공무 바삐 처리하며 / 誰知簿領裏
시끄러운 와중에서 높은 흥취 나는 것을 / 高興出塵喧

벼슬 집어던진 것도 아니언마는 / 不是抛簪笏
세속 티끌 벗어난 듯 느껴지누나 / 還如出世塵
복잡한 고을 살림 삼 년 동안 주관하다 / 三年領劇郡
하룻동안 한가한 사람이 되었고녀 / 一日作閑人
잔 돌려라 독촉도 사뭇 급한데 / 徵令飛觴促
나눠서 짓는 시운(詩韻) 신선도 하네 / 分題逸韻新
아 세상 부담 떨쳐버리고 / 何緣擺俗累
흥에 겨워 계곡 속에 노닐 길은 또 없을까 / 乘興到溪濱










인조 6년 무진(1628) 10월 22일(기유)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함

06-10-22[03] 침을 맞을 때의 내의원 도제조 김류 등에게 시상하라는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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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하기를,
“침을 맞을 때의 내의원 도제조 김류(金瑬)ㆍ이귀(李貴)에게 호피(虎皮) 1령(令)을 사급하고, 승지 유백증(兪伯曾), 사관 박일성(朴日省)에게 궁자(弓子) 1장(丈)을 사급하고, 어의(御醫) 신득일(申得一), 침의(針醫) 정대붕(鄭大鵬)ㆍ안효남(安孝男)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을 사급하고, 이영남(李英男), 이희헌(李希憲), 이락(李絡), 허임(許任)에게 각각 중치 표피(豹皮) 1령을 사급하고, 가평(加平) - 1, 2자 원문 결락 - 이유성(李惟聖)에게 표피 1령을 사급하고, 장무관(掌務官) 김경행(金景行)ㆍ윤홍임(尹弘任), 전다관(煎茶官) 김효남(金孝男)에게 궁자 1장을 사급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21년 계미 > 5월 19일 > 최종정보


인조 21년 계미(1643) 5월 19일(신해) 흐림


21-05-19[12] 도제주 김류 등에게 시상하라는 비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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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기에,
“도제조 김류(金瑬)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제조 이명(李溟)에게 숙마(熟馬) 1필을, 도승지 정태화(鄭太和)와 어의 최득룡(崔得龍)에게 각각 표피(豹皮) 1령(令)을 주라. 침의(鍼醫) 이형익(李馨益)과 박태원(朴泰元)은 모두 가자하라. 시종 입참한 사관(史官)과 어의 박군(朴頵), 장무관(掌務官) 김신성(金藎誠)과 정교(鄭僑), 전다관(煎茶官) 안지연(安志淵)에게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주고, 차를 끓인 하인에게도 해조로 하여금 상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 이상은 《내의원일기》에 의거함 -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23년 을유 > 8월 9일 > 최종정보


인조 23년 을유(1645) 8월 9일(무자) 맑음


23-08-09[02] 도제조 영의정 김류 등에게 시상하라는 비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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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기(備忘記)에,
“도제조 영의정 김류(金瑬)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에게 각각 안구마(鞍具馬) 1필을, 제조 남이웅(南以雄), 어의(御醫) 최득룡(崔得龍), 침의(鍼醫) 이형익(李馨益)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을, 부제조 윤순지(尹順之)와 김광욱에게 각각 표피(豹皮) 1장(張)을, 어의 박군(朴頵)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을, 침의 박태원(朴泰元), 어의 이희강(李希岡)ㆍ이락(李洛)ㆍ이호검(李好儉)에게 각각 아마(兒馬) 1필을 사급하고, 이형익과 박군은 서용하고, 침의 유호(柳萀)는 실직(實職)을 제수하며, 사관 이태연(李泰淵)과 홍명하(洪命夏), 침의 유후성(柳後聖), 장무관(掌務官) 조여로(趙汝櫓)와 유덕택(柳德澤), 전다관(煎茶官) 윤홍우(尹弘佑)에게는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사관 남중회(南重晦)에게는 부장궁(不粧弓) 1장을 사급하고, 고지기, 장무 서원(掌務書員), 전다 하인(煎茶下人) 등은 해조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마련해서 제급하게 하되, 고지기와 장무 서원은 전례의 유무를 상고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 《약방일기》에 의거함 -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25년 정해 > 6월 25일 > 최종정보



인조 25년 정해(1647) 6월 25일(갑오) 흐림



25-06-25[02] 도제조 김자점 등에게 시상하라는 비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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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기(備忘記)에,
“도제조 김자점(金自點)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 제조 정태화(鄭太和)와 침의(鍼醫) 이형익(李馨益)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 어의 최득룡(崔得龍)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 부제조 이만(李㬅)에게 아마(兒馬) 1필을 사급하라. 침의 김상성(金尙誠)은 실직에 제수하라. 사관 이홍재(李弘載)ㆍ정익(鄭榏), 전다관(煎茶官) 안경창(安景昌)ㆍ이주한(李柱漢), 장무관(掌務官) 박승형(朴升馨)ㆍ유덕택(柳德澤) 등에게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하라. 전다 하인(煎茶下人) 김인남(金仁男)ㆍ이수명(李守命)은 해조로 하여금 상포(賞布)를 마련해 제급하게 하라.”
하였다.
- 이상은 《약방일기》에 의거함 -






일성록 > 정조 > 정조 23년 기미 > 2월 2일 > 최종정보



정조 23년 기미(1799) 2월 2일(경인)


23-02-02[07] 칙사가 서울에 들어온 뒤에 청래 다례(請來茶禮)와 대신 다례(大臣茶禮)는 모두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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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반 정민시가 아뢰기를,
“이번에 칙사를 맞이한 뒤에 베푸는 다례에 관해 각 해당 관사에 통지해야 합니다. 숭정전(崇政殿) 다례, 그 다음 날의 관소 다례, 또 그 다음 날의 청래 다례, 칙사를 전송할 때의 전다례(餞茶禮) 등 네 차례 마련하는데 청래 다례와 전다례는 최근에는 대부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청래 다례는 최근의 규례대로 그만두라.”
하였다. 정민시가 아뢰기를,
“칙사가 서울에 들어오고 3일째 되는 날 대신이 다례를 행하겠다고 칙사에게 청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을묘년(1735, 영조11)의 등록을 가져다 살펴보니, 전부 칙사(傳訃勅使)의 경우 이 다례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만둡니까?”
하여,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역관으로 하여금 그것이 이전의 규례라고 말하게 하여 칙사로 하여금 이 다례는 받지 말게 하라.”
하였다.




薊山紀程卷之四 / 復路○甲子二月   ㅡ 조선 순조 때 동지사의 서장관 서장보(徐長輔)를 따라 연경(燕京)을 다녀온 필자 미상의 사행 기록.

二十三日 癸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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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二道井子五十里民人吳姓家午餐。白旗堡五十里旗下張姓家宿。
古家子途中
自小黑山行三十里。至古家子。自此始無山矣。二道白旗之間。水味惡。不堪煎茶。舊聞以銀匙掠水。色便渝黑云。
野遠歸雲懶。風殘逝鳥閒。廣原靑草嫩。春在馬蹄間。

23일(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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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이도정자(二道井子)까지 50리를 가서 주민 오가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백기보(白旗堡)까지 50리를 가서 기하(旗下) 장가(張哥)의 집에서 잤다.

고가자 도중에서[古家子途中]

   소흑산(小黑山)에서 30리를 가서 고가자에 이르니 여기서부터 비로소 산이 없어진다. 이도정자와 백기보 사이는 물 맛이 나빠 차를 다려 먹을 수가 없는데, 전에 들으니, 은수저로 물을 뜨면 바로 색이 시꺼멓게 변한다고 한다.

들이 멀어 구름 더디 돌아가고 / 野遠歸雲懶
바람 약해 새도 한가로이 날아가 / 風殘逝鳥閒
넓은 들판에 파란 풀이 고우니 / 廣原靑草嫰
봄은 달리는 말굽 사이에 있네 / 春在馬蹄間


謹齋集 卷一 / 詩  ㅡ 고려 말기의 문인 안축(安軸)의 문집.

寒松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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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仙曾會此,客似孟嘗門。
珠履雲無迹,蒼官火不存。
尋眞思翠密,懷古立黃昏。
惟有煎茶井,依然在石根。【松近爲山火所燒故云】

한송정에 제하다〔題寒松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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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이 예전에 여기에 모였을 때 / 四仙曾會此
식객들은 맹상군의 문도 같았네 / 客似孟嘗門
상객은 구름처럼 자취가 없고 / 珠履雲無迹
소나무는 불에 타서 남지 않았네 / 蒼官火不存
신선 찾으려고 푸른 솔밭 생각하고 / 尋眞思翠密
옛날을 생각하며 황혼에 서 있네 / 懷古立黃昏
오직 차 끓이던 우물만 남아 / 惟有煎茶
바위 옆에 그대로 있구나 / 依然在石根

근래에 소나무가 산불에 탔기 때문에 한 말이다.


大山集 卷三 / 詩   ㅡ 이상정(李象靖,  1711~1781 ), 1802년 간행

  * 이상정 :모친이 李玄逸의 손녀이자 李栽의 딸인 관계로 14세부터 외조부 李栽에게 사사하였다. 이로써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과 律呂 등의 제도문물과 경학에 침잠할 수 있었다. 1735년 25세 때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8년 28세에 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4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연구에 힘썼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退陶書節要》․《心動靜圖》․ 《理氣彙編》․《敬齋箴集說》 등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시묘하던 중 《四禮常變通攷》《約中編》을 편찬하였다. 1753년 43세에 延日縣監에 부임하여서는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재임 중이던 1755년 백성들을 위한 구휼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소금을 굽게 한 일이 사단이 되어 부임한지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직첩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로는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는데, 《心無出入說》, 《朱子語節要》, 《密庵先生年譜》, 《心經講錄刊補》, 《延平答問續錄》 등은 바로 이 기간에 완성된 저작들이다. 정조 즉위 후에 병조좌랑,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高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외조부 李栽를 사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李玄逸, 李栽로 이어지는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특히, 이황의 尊理的 입장을 견지하면서 《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해 기호학파의 理와 氣를 대등하게 보는 태도를 거부하였다. 다만,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主理論을 펴는 것을 반대, 理의 動靜과 理氣의 先後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뜻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性命理氣설에 집착하기 보다는 日用躬行의 실천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일상중의 평범한 도리라고 할 수 있는 儒學 본지의 회복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우인 李光靖南漢朝(1744 ~1809)를 통해 柳致明(1777~1861)으로 이어지고, 다시 李震相(1818~1886)에 이르러 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한말에 이르러서는 郭鍾錫(1846~1919)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이 일반의 평가이다.


高山雜詠 【幷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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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賢之一支,東出爲鼎嶺,分而爲南北二支。其南者,西走百十里爲松峴,北折爲夢峴,又東折爲圓秀峯。其北者,西北行爲葛蘿,爲兔嶺,爲月峯。至圓秀之東南,爲靜壽霽月日躋諸峯。霽月之下有翠壁,高可數十丈,廣如之,側柏䕺生其上,蒼鬱可愛。水發源兩山之間,並厓而下。至公山之南,則野盡山高,巖壑悄蒨。水中亂石齒齒,三折而至翠壁下,匯而爲潭,演漾泓渟,潔淸紺綠,可以方小舟。又三折而入于,前後爲曲者凡七。圓秀遂隤而南下,東轉爲中阜,正當第四曲。後高漸低,至盡處則左右微凹,中成小陀,前皆結以巖石,對壁臨流,最爲一山佳處。
余年三十時,嘗因事客過,愛其山高水深、風烟回合,窈然有遺世之想,便欲買山誅茅爲隱約盤旋之所,而力未能就,徒往來,於心不忘也。丁亥春,遂結三架八楹於土坂之上,同人李學甫金直甫始終幹其事。纔被茅而喪難悲遑,且二年矣。坂處地淸曠,近水多風,不可以久處,遂謀就移於中阜,村落稍邇,不愜雅韻。然襟抱周複,面勢均圓,占一山之中央,而巖巒、溪洞若拱揖環擁於前者。經始於十月之旣望,僅十數日而粗成。夫以三十年不忘于心,而始克經營,又三年而粗成。比堂室完而可入處,則又當若干月日矣。
余明年便已六十矣,未知受用能幾何歲月。然昔之客而過者,居然成我泉石矣,何其幸也?洞通名高巖,又別稱巖山,遂合而名之曰高山。蓋取《詩ㆍ宵雅》 “高山仰止” 之義也。
屋凡三間,中一間爲軒,曰靜春,取程子語也。室在南,曰凝菴,取《中庸》二十七章之旨。主人之所寢處在北,曰樂齋,取《魯論》首章之意,將以待遠近朋友之來也。
齋之北,有松三株,亭亭可愛。爲臺於下而名以歲寒。巖曰晩對,潭曰光影晩對之東,兩厓谽谺,中有一臺,曰靜樂。又其南爲䕺桂臺。鷗汀、鶻巖、釣磯、茶竈與夫一樹一石,皆足以供吾觀,而前後六曲,又其爲借景也。
季弟休文始與共此志,而今煢然持所后服,不能共其成。異日無事,當相與共其樂。子弟有願從者,亦不禁。然天之所以餉我者,不貧矣,何修而可以無負乎哉!
《詩》曰 “高山仰止,景行行止”,子曰 “詩之好仁如此。嚮道而行,中道而廢,忘身之老也,不知年數之不足也,俛焉日有孶孶,斃而後已”。夫仁之爲器重,其爲道遠。不識仁之爲何物,則無以知其好。知之矣,而不反之以踐焉,則無以有諸己;有之矣,而不孶孶以終其身,雖得之而必失之。中道而廢,與畫而不進者,同歸於不仁矣。
顔淵嘗喟然而歎夫子之善誘矣,曰:“博我以文,約我以禮。” 博而盡其知,約而踐其實,勉勉循循,而不已焉,則其至之有遲速,特係乎才之敏鈍與用力之淺深耳。雖然,欲速而急,則拘迫而難久;乍作而輟,則間斷而無成。雖有志焉,終莫能以自達矣。漸涵浸漬而徐乎其勿亟也;緝煕光明而懔乎其恐失也。守之以篤實而持之以悠久,俛焉以盡其力焉,庶可以充夫好仁之實而無愧於朝夕居此山矣。
有時讀倦意闌,振衣曳杖而出,則烟雲舒斂,花鳥駘蕩,巖宜於靜對,潭宜於淸臨。登高而發孤嘯,倚臺而遡遠風,坐磯觀魚,步沙狎鷗,萬象交貿於前,而吾之樂,與之無窮。是固閒居無用之日曆,然俯仰顧眄之頃,景與意俱與向所謂 “漸漬、緝煕” 之功者,脗然而默相契焉,則古者仁智之樂、風詠之趣,大抵皆是物也。嗚呼!是可以易言哉?
自今以往,非有疾病事故,必在於此。庶幾處靜養晦,兢存硏索,以少補旣往之愆,無負於天之所以餉我而不偶然者,又何其幸也?巖臺水曲輒有名,且爲圖詩以志其勝,樂與朋友來者共焉。歲己丑十有二月嘉平日,主人記。
九絶 【七言】

高山精舍
嶷嶷層巒儼自持,靑蒼一面當軒奇。孶孶嚮道終身事,俛仰中間有所思。【當,去聲。】

凝菴
至道洋洋自古今,妙凝元不外人心。明誠一部開門戶,努力工程惜寸陰。

靜春軒
冲融一氣轉洪匀,四序推移摠是春。倘得此心無欲靜,洪纖隨處露天眞。

樂齋
白頭爲學尙迷心,多謝諸朋肯遠臨。欲識古人眞樂處,習時須熟悅時深。

晩對巖
巉厓半面倚寒空,夕影離離元氣中。不管浮雲舒卷事,蒼然一色古今同。

光影潭
澄泓一道靜無埃,活水源頭滾滾來。萬象森羅眞體澹,碧空寒月夜深開。

䕺桂臺
幽幽䕺桂小山陰,憀慄秋風虎豹吟。歲暮王孫何處在?《反招》歌罷臥雲深。

靜樂臺 【用詩 “靜有山水樂” 之句名】
蒼厓中劈自成臺,千嶂陰陰一水回。隨處洋洋仁智樂,古人消息靜中來。

歲寒臺
萬木蕭條大地陰,貞姿不受雪霜侵。寒臺獨立空怊悵,歲晏何人共苦心?
十六絶 【五言】

釣磯
石面蔭荒苔,俯臨漪漪水。忘竿坐無言,洋洋潛躍理。

茶竈
傍水石開,天然自成竈。辨味吾未暇,功存導滯燠。陸羽辨水味,煎茶。○燠,熱在中,見號韻。】

鶻巖
蒼巖千仞高,中有寒棲鶻。月明一聲長,江天定欲裂。

鷗渚
天寒蘆葦宿,月明洲渚飛。浩蕩波萬里,自在無是非。

月艇
野人乘小桴,施罟聲濊濊。漁罷管無人,滿載峯頭月。

烟柳
臨風定依依,含烟更裊裊。何人弄輕吹?幽興轉未了。

南澗 【《雲谷二十六詠》有《南澗》】
南谷窈以深,泠泠瀉澗水。永念千載人,佳名偶相似。

北堰
野人解堰水,灌漑事耕耘。秋壠黃雲合,玉食供吾君。

廢塔
古塔定何年?如今半傾圮。佛宇變儒宮,文風從此始。

古井
隱隱巖際生,盈盈日夜息。果育吾當以,不食寧心惻。

石矼
村人爲樵采,列石峙水中。縱乏舟楫用,均之濟川功。

土墩 【卽《記》所謂 “土坂”】
小阜臨水止,面勢極淸曠。欲亭畏風多,間步候月上。

杉徑 【取種平海 越松亭
擢擢傲寒姿,移根自東海。精神分月寒,氣色參天黛。

石棧
石棧何年開?應勞六丁叱。騁目盡烟霞,倚策憇腰膝。

書館
蕭蕭松桂館,中有讀書人。時時來問字,多荷不孤鄰。

田家
茅茨三兩家,烟火疎籬隔。耘罷荷鋤歸,曖曖山日夕。
七曲詩 【七言】

一曲
公山南畔水幽幽,亂石參差易覆舟。惶恐一心能利涉,瞿塘從古是安流。

二曲
平郊欲盡水初渟,石棧苔磯繞曲汀。童冠暮春風浴罷,振衣高上洗心亭

三曲
蒼岸雙開一水深,烟雲朝暮暗平林。試向悠然臺上坐,千年誰識見山心?

四曲
水靜山深自一村,虛齋終日掩柴門。汀禽欲睡階花笑,一炷爐香坐不言。

五曲
尋春臺下水溶溶,老壁嵯峨古院空。一帶虹橋橫渡口,何人能辦濟川功?

六曲
斷麓逶遲面玉屛,石田荒草認遺亭。等閒聲色無人管,依舊山空水自淸。

七曲
野闊山開但平川,隔林籬落見人烟。奇遊欲盡重回首,去管壺中別有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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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산(普賢山)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정령(鼎嶺)이 되고, 갈라져 남북으로 두 줄기가 되었다. 남쪽 줄기는 서쪽으로 110리를 내달려 송현(松峴)이 되었고, 북쪽으로 꺾여 몽현(夢峴)이 되었으며, 또 동쪽으로 꺾여 원수봉(圓秀峯)이 되었다. 북쪽 줄기는 서북쪽으로 향하여 갈라산(葛蘿山), 토령(兔嶺), 월봉(月峯)이 되었고, 원수봉의 동남쪽에 이르러 정수봉(靜壽峯), 제월봉(霽月峯), 일제봉(日躋峯) 등이 되었다. 제월봉 아래에는 취벽(翠壁)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고 너비도 마찬가지이다. 그 위에는 측백나무가 무성히 자라 그 울창함이 사랑스럽다. 물은 두 산의 사이에서 발원하여 벼랑과 나란히 아래로 흐른다. 공산(公山)의 남쪽에 이르러서는 들판이 끝나고 산이 높은데, 산골짜기에는 초목이 무성하다. 물속엔 어지러운 돌들이 빼곡하며 세 번 꺾여 취벽 아래에 이르러서는 물이 감돌아 못이 되었는데, 넓고 깊으며 맑고 푸르러 작은 배를 띄울 만하다. 또 세 번 꺾여 낙동강(洛東江)으로 들어가는데 전후로 굽이진 것이 모두 일곱 곳이다. 원수봉이 마침내 떨어져 나와 남쪽으로 내려오고 동쪽으로 굴러 중간 크기의 언덕이 되는데 이곳이 바로 제4곡(曲)이다. 뒤는 높고 점점 낮아지다가 끝나는 곳에 이르러서는 좌우가 조금 움푹 들어가고 가운데는 약간의 비탈을 이룬다. 앞에는 모두 암석으로 뭉쳐지고 절벽을 마주 대하면서 앞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 이 산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내 나이 30세 때 어떤 일로 인해 여정으로 이곳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높은 산과 깊은 물, 그리고 바람과 안개가 감도는 것이 너무도 좋아 마음 깊이 이곳에 은거하려는 생각을 가졌었다. 바로 산을 사서 집을 짓고서 은거하며 소요하는 곳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그저 왕래하며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였다. 정해년(1767, 영조43) 봄에 드디어 세 칸에 여덟 개의 기둥으로 흙 언덕 위에 짓게 되었는데, 동인인 이학보(李學甫)김직보(金直甫)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띠를 얹자마자 상을 당해 슬픔에 경황이 없어 또 2년이 지났다. 언덕진 곳은 땅이 시원하게 툭 트였지만 물이 가깝고 바람이 많아 오래 거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언덕 안쪽으로 옮기기로 하였는데 촌락이 가까워 우아한 운치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물줄기가 만나 두루 감싸고 형세가 고루 원만하며, 산 전체의 중앙을 차지하여 바위 봉우리와 계곡이 마치 공읍(拱揖)을 하듯 그 앞을 둘러싸고 있다. 10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거의 십수 일 만에 대충 완성하였다. 30년을 마음에서 잊지 못하다가 비로소 공사를 하게 되었고, 또 3년 만에 대충 완성하였다. 당실(堂室)이 완성된 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따진다면 또 약간의 시일이 걸릴 것이다. 나는 내년이면 벌써 60세가 되니, 얼마의 시간을 누릴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예전 나그네로 지나던 곳에 엄연히 내가 살 산수의 집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골짜기는 고암(高巖)이라 통칭하고 또 별도로 암산(巖山)이라 칭하는데, 마침내 이 둘을 합하여 고산(高山)이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시경》 〈소아(小雅)〉의 “고산을 우러른다.〔高山仰止〕”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집은 총 3칸인데, 가운데 한 칸은 대청으로 만들어 정춘(靜春)이라 이름하였으니, 정자의 말을 취한 것이다. 방은 남쪽에 두었는데 이름을 응암(凝菴)이라 하였으니, 《중용》 27장의 뜻을 취한 것이다. 주인이 자는 곳은 북쪽에 두었는데 이름을 낙재(樂齋)라 하였으니, 《논어》 첫째 장의 뜻을 취하여 장차 원근의 벗들이 오기를 기다리려는 것이다.

   낙재의 북쪽에는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우뚝 솟은 모양이 사랑스럽다. 그 아래에 대(臺)를 만들고서 세한(歲寒)이라 이름하였다. 바위는 만대(晩對)이고, 못은 광영(光影)이다. 만대의 동쪽에는 양쪽으로 절벽이 휑하니 있고 가운데에 대가 하나 있는데 정락(靜樂)이다. 또 그 남쪽이 총계대(䕺桂臺)이다. 갈매기 노니는 물가, 송골매 깃드는 바위, 낚싯대 드리우는 바위, 찻물 끓이는 아궁이 그리고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까지 모두가 내가 보며 즐길 만하며, 앞뒤의 여섯 굽이는 또 어우러져 좋은 경치를 이루었다.

   막내아우 휴문(休文)이 처음부터 나의 이러한 뜻을 함께하였는데, 지금 외로이 소후가(所後家)의 상복을 입고 있어 완성하는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였다. 훗날 아무 일 없을 때에 마땅히 서로 이 즐거움을 함께할 것이다. 자제 중에도 함께하려는 자가 있다면 또한 막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나에게 누리게 한 것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닦아야 이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길을 행하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였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에서 인(仁)을 좋아함이 이와 같구나. 도를 향하여 가다가 중도에 쓰러지더라도, 몸이 늙음을 잊어 남은 연수가 부족한 줄을 모르고서 열심히 날로 부지런히 하여 죽은 뒤에야 그치는구나.”라고 하였으니, 인의 그릇이 무겁고 그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그 좋음을 알 수 없고, 알지만 돌이켜 실천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 소유할 수 없으며, 소유하였지만 부지런히 하여 자신의 몸에 종신토록 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얻더라도 반드시 잃어버리게 된다. 중도에 그만두는 것과 한계를 그어 나아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로 불인(不仁)으로 귀결된다.

   공자가 사람들을 잘 이끌어 주는 것에 대해 안연(顔淵)이 일찍이 크게 찬탄하며 말하기를 “문으로 나를 넓혀 주시고 예로 나를 단속하게 하신다.〔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하였다. 넓혀 지식을 다하고 단속하여 실제를 실천하되 부지런히 힘쓰고 순순히 따라서 그만두지 않는다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더디냐 빠르냐는 다만 재주가 얼마나 민첩한가와 힘쓰기를 얼마나 깊이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비록 그렇지만 빨리 이루고자 서두르면 얽매여 지속이 어렵고 잠깐 했다가 그만두면 중단되어 성과가 없으니, 비록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스스로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점차로 젖어 들어 천천히 행하면서 빨라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환하게 이어 밝혀서 두려운 마음으로 혹시 잃을까를 염려해야 한다. 독실하게 지키고 유구하게 유지하면서 부지런히 자신의 힘을 다한다면 아마도 거의 인을 좋아하는 실제를 충족하고 조석으로 이 산에 사는 데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이따금 책 읽기가 피곤하거나 뜻이 풀어졌을 때에 옷을 챙겨 입고서 지팡이 짚고 나가 본다면, 아지랑이와 구름이 펼쳐졌다 걷혔다 하고 꽃과 새는 한창일 것이며 바위는 고요히 바라보기 적당하고 못은 가만히 곁에 서 있기 적당할 것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 홀로 읊조리고, 대에 기대어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물가의 바위 위에 앉아 물고기를 구경하고, 모래밭을 거닐며 갈매기를 가까이한다면 세상 모든 모습이 눈앞에서 바뀌며 나의 즐거움도 그것들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한가로이 지내면서 쓸모가 없는 세월이겠지만, 위아래로 살펴보고 좌우로 돌아보는 때에 주위의 경관과 나의 뜻이 모두 앞에서 언급했던 점차 젖어 들고 이어 밝히는 데에 따른 공효와 꼭 들어맞아 은연중에 서로 부합한다면, 그 옛날 인자(仁者)가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가 물을 좋아하며, 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읊조리겠다는 흥취가 대개 이러한 것이리라. 아아, 이것을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후로 질병이나 일이 있지 않는다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종적을 감추고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을 연구하여 지난날의 허물을 조금이나마 보완한다면,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것을 누리게 한 것이 우연이 아님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니, 또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암대(巖臺)와 물굽이는 각기 이름이 있는데 또 그림과 시로 그 승경을 기록하여 즐거이 찾아오는 벗들과 함께하려 한다. 기축년(1769, 영조45) 12월 가평일(嘉平日)에 주인이 기록하노라.


구절 칠언 (九絶 七言 )

고산정사(高山精舍)
우뚝 솟은 첩첩 산 엄연히 제 모습 간직한 채 / 嶷嶷層巒儼自持
푸르른 한쪽 면은 집을 마주하여 기이하여라 / 靑蒼一面當軒奇
부지런히 도를 추구하여 종신토록 일삼으면 / 孶孶嚮道終身事
굽어보고 우러르는 사이에 드는 생각 있으리라 / 俛仰中間有所思

‘당(當)’ 자는 거성(去聲)이다.


응암(凝菴)

지극한 도 가득함은 예나 지금 그대로니 / 至道洋洋自古今
묘한 엉김 원래 마음 벗어나지 않는다오 / 妙凝元不外人心
명성 밝힌 한 권의 책으로 문호를 열어 / 明誠一部開門戶
공정에 따라 노력하며 촌음도 아껴야지 / 努力工程惜寸陰


정춘헌(靜春軒)

충융한 한 기운을 하늘이 전하여 / 冲融一氣轉洪匀
사시는 변화하여 모두 봄이 된다네 / 四序推移摠是春
이 마음 욕심 없이 고요할 수 있다면 / 倘得此心無欲靜
크건 작건 일에 따라 천진함 드러나리 / 洪纖隨處露天眞


낙재(樂齋)

늙어 학문이야 아직도 마음 어지러운데 / 白頭爲學尙迷心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 너무도 고마워라 / 多謝諸朋肯遠臨
옛사람의 진정한 즐거움 알고자 한다면 / 欲識古人眞樂處
익히기를 익숙히 하여 기뻐함 깊어야지 / 習時須熟悅時深


만대암(晩對巖)

가파른 절벽 한쪽 찬 허공에 기대고 / 巉厓半面倚寒空
저물녘 그림자는 원기 속에 늘어지네 / 夕影離離元氣中
뜬구름 피고 지는 일 상관하지 않고서 / 不管浮雲舒卷事
창연한 그 빛은 예나 지금 그대로네 / 蒼然一色古今同


광영담(光影潭)

맑고 깊은 한 줄기 고요하고 티끌 없이 / 澄泓一道靜無埃
맑은 물이 근원에서 끊임없이 흘러오네 / 活水源頭滾滾來
삼라만상 모든 일의 참모습은 담박하니 / 萬象森羅眞體澹
푸른 하늘 찬 달이 깊은 밤에 떠 있어라 / 碧空寒月夜深開


총계대(䕺桂臺)

그윽한 계수 떨기 소산은 그늘지고 / 幽幽䕺桂小山陰
싸늘한 가을바람 호랑이 우는 듯하네 / 憀慄秋風虎豹吟
세모에 왕손은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 歲暮王孫何處在
반초가 부르고 구름 깊은 곳 누웠어라
/ 反招歌罷臥雲深


정락대 주자 시의 “조용하여 산수의 즐거움이 있다.”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름한 것이다.靜樂臺 用朱詩靜有山水樂之句名

푸른 절벽 가운데 쪼개져 절로 대를 이루고 / 蒼厓中劈自成臺
일천 봉우리 그늘지고 한 줄기 물이 감도네 / 千嶂陰陰一水回
곳곳마다 가득한 인과 지의 즐거움이여 / 隨處洋洋仁智樂
옛사람의 소식이 고요한 가운데 찾아오네 / 古人消息靜中來


세한대(歲寒臺)

모든 나무 쓸쓸하여 대지도 음산한데 / 萬木蕭條大地陰
곧은 자태 눈서리의 침노를 용납 않네 / 貞姿不受雪霜侵
세한대만 홀로 있어 공연히 서글프니 / 寒臺獨立空怊悵
세모에 누구와 괴로운 마음 함께할까 / 歲晏何人共苦心



십육절 오언 (十六絶 五言 )


낚시터〔釣磯〕

그늘진 바위 위엔 이끼가 끼어 있는데 / 石面蔭荒苔
잔잔한 물가에 굽어보듯 자리하였네 / 俯臨漪漪水
말없이 앉아 무심히 낚싯대 드리우니 / 忘竿坐無言
가득하여라 잠기고 뛰어오르는 이치가 / 洋洋潛躍理


차 아궁이〔茶竈〕

물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어 / 傍水石窽?
천연적으로 아궁이 이루어졌네 / 天然自成竈
맛을 분별하기엔 겨를이 없고 / 辨味吾未暇
공은 막힘 열어 열기를 담을 뿐 / 功存導滯燠

육우(陸羽)는 물맛을 분별하여 차를 달였다. ○ ‘오(燠)’는 열기가 안에 있다는 것이다. ‘호(號)’ 자 운(韻)에 보인다.


송골매 깃드는 바위〔鶻巖〕

푸른 바위 천길 높이 솟았는데 / 蒼巖千仞高
그 안에 쓸쓸히 송골매 깃드네 / 中有寒棲鶻
밝은 달에 길게 한번 울어 대면 / 月明一聲長
강가 하늘 정히 찢어지려 하네 / 江天定欲裂


갈매기 노니는 물가〔鷗渚〕

추운 날 갈대숲에서 자다가 / 天寒蘆葦宿
달 밝은 밤 물가를 날아가네 / 月明洲渚飛
광대한 물결 만리에 퍼지는데 / 浩蕩波萬里
자유로이 아무 시비도 없어라 / 自在無是非


달빛 아래 작은 배〔月艇〕

시골의 어부 작은 배 타고 나가 / 野人乘小桴
그물 놓는 소리 전하여 오는데 / 施罟聲濊濊
고기잡이 끝나면 돌보는 이 없어 / 漁罷管無人
산봉우리 달빛만 가득 실었어라 / 滿載峯頭月


안개 낀 버들〔烟柳〕

바람을 맞아 한들거리다 / 臨風定依依
안개 머금고 나부끼누나 / 含烟更裊裊
누가 장난치며 살며시 부는가 / 何人弄輕吹
그윽한 흥취 다하지 않았어라 / 幽興轉未了


남쪽 시내 곡이십육영〉에 〈남쪽 시내〉가 있다.南澗 雲谷二十六詠有南澗

남쪽 골짜기 그윽하고도 깊어 / 南谷窈以深
맑고 시원한 시냇물 쏟아 내네 / 泠泠瀉澗水
길이 천 년 전 사람 생각하노니 / 永念千載人
고운 이름 우연히 비슷하여라 / 佳名偶相似


북쪽 방죽〔北堰〕

촌부들 저수지를 열어 / 野人解堰水
물 끌어와 농사를 짓지 / 灌漑事耕耘
가을 언덕 누런 구름 겹치면 / 秋壠黃雲合
귀한 음식 임금님께 바치네 / 玉食供吾君


부서진 탑〔廢塔〕

옛 탑은 어느 시절 것이런가 / 古塔定何年
지금은 절반이나 무너졌네 / 如今半傾圮
불사가 유궁으로 변했으니 / 佛宇變儒宮
문풍이 이로부터 시작이네 / 文風從此始


옛 우물〔古井〕

은은하게 바위틈에서 생겨나지만 / 隱隱巖際生
가득하니 밤낮으로 그치지 않네 / 盈盈日夜息
살펴서 과행과 육덕 행해야 하니 / 果育吾當以
먹지 않은들 어찌 맘에 슬프랴 / 不食寧心惻


돌 징검다리〔石矼〕

마을 사람 벌채를 위해 / 村人爲樵采
물속에 돌 줄지어 깔았네 / 列石峙水中
배와 노 사용함만 못하지만 / 縱乏舟楫用
내를 건너는 공 동일하다네 / 均之濟川功


흙 돈대 기문에서 말한 흙 언덕이다.土墩 卽記所謂土坂

작은 언덕 물에 닿아 그치어 / 小阜臨水止
그 모습 너무도 맑게 트였네 / 面勢極淸曠
정자 지으려다 많은 바람 두려워 / 欲亭畏風多
한가히 걸으며 뜨는 달 바라보네 / 間步候月上


삼나무 오솔길 평해의 월송정에서 종자를 가져온 것이다.杉徑 取種平海越松亭

우뚝하니 추위 아랑곳 않는 자태 / 擢擢傲寒姿
동쪽 바다에서 옮겨 심은 것이지 / 移根自東海
정신은 달의 찬 기운을 나눠 받았고 / 精神分月寒
기색은 하늘의 검푸른 빛과 같구나 / 氣色參天黛


돌 잔도〔石棧〕

돌 잔도는 어느 해에 열리었는가 / 石棧何年開
분명 육정을 부리어 만들었겠지 / 應勞六丁叱
멀리 바라보니 연하가 다하였는데 / 騁目盡烟霞
지팡이 의지한 채 허리 다리 쉬어 보네 / 倚策憩腰膝


서관(書館)

고요한 솔과 계수 사이의 서관 / 蕭蕭松桂館
그 안에 책 읽는 사람 있어라 / 中有讀書人
때때로 글을 물으러 찾아와 주니 / 時時來問字
외롭지 않게 이웃 됨이 무척 고맙네 / 多荷不孤鄰


전가(田家)

띠를 이은 두세 채의 전가 / 茅茨三兩家
밥 짓는 연기에 성긴 울타리 둘러 있네 / 烟火疎籬隔
김매기 끝마치고 호미 메고 돌아올 제 / 耘罷荷鋤歸
어둑어둑 산에는 해가 저무네 / 曖曖山日夕



칠곡시 칠언 (七曲詩 七言 )


일곡(一曲)

공산의 남쪽 가에 물은 그윽한데 / 公山南畔水幽幽
어지러이 돌 삐죽하여 배 엎어지기 쉬워라 / 亂石參差易覆舟
두려워하는 일념이면 물을 건널 수 있으니 / 惶恐一心能利涉
구당협도 예부터 평온히 흐르는 물이라네 / 瞿塘從古是安流


이곡(二曲)

들판 다하는 곳에 물이 처음 고이고 / 平郊欲盡水初渟
돌 잔도 이끼 낀 돌 굽은 물가 둘렀네 / 石棧苔磯繞曲汀
아이 어른과 늦봄에 바람 쐬고 목욕한 뒤 / 童冠暮春風浴罷
옷을 떨쳐입고 높이 세심정에 오르네 / 振衣高上洗心亭


삼곡(三曲)

푸른 언덕 양쪽으로 열리어 물이 깊은데 / 蒼岸雙開一水深
안개 구름 조석으로 평지 숲에 드리우네 / 烟雲朝暮暗平林
시험 삼아 유연대 위에 올라가 앉아 보니 / 試向悠然臺上坐
천년토록 뉘 알리오 산을 바라보는 마음 / 千年誰識見山心


사곡(四曲)

고요한 물 깊은 산에 절로 마을 이뤘는데 / 水靜山深自一村
텅 빈 서재 종일토록 사립문을 닫았어라 / 虛齋終日掩柴門
물가 새는 자려 하고 뜰의 꽃은 피었는데 / 汀禽欲睡階花笑
한 가닥 향로 향기에 말없이 앉아 있네 / 一炷爐香坐不言


오곡(五曲)

심춘대 아래에 물은 넘실 흐르고 / 尋春臺下水溶溶
우뚝 솟은 오랜 절벽 옛 사찰은 비어 있네 / 老壁嵯峨古院空
한 가닥 무지개다리 나루터에 걸렸으니 / 一帶虹橋橫渡口
누구런가 시내 건너는 공을 이루었어라 / 何人能辦濟川功


육곡(六曲)

끊긴 산기슭 구불구불 옥병풍 마주하고 / 斷麓逶遲面玉屛
돌밭의 잡초 사이에 정자가 남겨졌는데 / 石田荒草認遺亭
성색을 하찮게 여겨 돌보는 이 없으니 / 等閒聲色無人管
예전처럼 산은 비고 물은 절로 맑아라 / 依舊山空水自淸


칠곡(七曲)

넓은 들판 산도 트여 편평히 내만 흐르고 / 野闊山開但平川
숲 너머 울타리엔 밥 짓는 연기 보이네 / 隔林籬落見人烟
기이한 유람 끝날 적에 다시 고개 돌리어 / 奇遊欲盡重回首
호리병 속 별천지를 찾아가 누리리라 / 去管壺中別有天





東文選卷之一 / 辭

山中辭[李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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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之幽兮深深。欝蕭森兮潭潭。黃鵠尙不得過其顚兮。截然屹立乎嶄巖。邃莫覻兮山之陰。曖霜露兮濡霑。文豹玄猿兮迭出以嘷。飛禽回翔兮毛羽之毿毿。殷其雷奔于無底之竇兮。振蕩林莽翼之以飛廉。石出角以鉤衣兮。橫枝截路以相攙。立寂漠以無隣兮。怳祁招之愔愔。敻不可討兮山之中。東西冥迷兮氣奄奄。淙飛泉以瀉于崖兮。淸肺腑而味甘。掬之手中兮冰寒。照衰顔以是監。爰流憇以聽其聲兮。鏘玉佩之相參。將敲火而煎茶兮。鄙陸羽之口饞。羨盤谷之可沿兮。矧其文爲我之指南。續道緖於千載兮。乃命其溪曰濂。惟山中之無偶兮。尙摳衣於丈函。聞一言以悟道兮。洗利欲之貪婪。開心源之瑩淨兮。惟太極之泳涵。若有遇於介然之頃兮。諒天地其可三。胡唐虞之遺墟蔓草寒烟兮。吾道被于南。炎胡泓渟之而不霈兮。朔雪越嶺之交粘。信餘緖可以理天下兮。魯齋獨騁其征驂。然波及者靡不周兮。夫何恨於商參。惟後生之可畏兮。靑乃出乎其藍。幸其道之揭日月兮。吾依光兮心焉甘。將忘勢而內樂兮。日嘯倚於南櫩。苦相招而不止兮。忽軒眉而載瞻。欵初心之弗竟兮。終歲月以聊淹。


산중사(山中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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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산이 그윽하고 깊디깊어 / 山之幽兮深深
빽빽한 숲에 깊고 넓은 골짝이네 / 鬱蕭森兮潭潭
누른 고니도 그 꼭대기를 못 지나가누나 / 黃鵠尙不得過其顚兮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바위들 / 截然屹立乎嶄巖
굽어보니 아찔한 산 그늘엔 / 邃莫覻兮山之陰
서리와 이슬이 뽀얗게 젖어 있네 / 曖霜露兮濡霑
표범과 잔나비 번갈아 나와 울부짖고 / 文豹玄猿兮迭出以嘷
나는 새 감돌아 날제 털깃이 너울너울 / 飛禽回翔兮毛羽之毿毿
밑 없는 굴 속에 천둥 소리 우르르 / 殷其雷奔于無底之竇兮
수풀을 뒤흔들며 날개 치는 바람신[飛廉神] / 振蕩林莽翼之以飛廉
돌부리가 솟구쳐 옷을 걸어당기고 / 石出角以鉤衣兮
비낀 가지가 길을 막아 맞찌르네 / 橫枝截路以相攙
나 혼자 적막히 우뚝 서니 / 立寂漠以無隣兮
마치 말없는 기초 시 의 안화함인 듯 / 怳祁招之愔愔
멀어서 찾아갈 수 없어라 / 夐不可討兮山之中
이 산 속을 동ㆍ서를 분간 못해 기진맥진하였네 / 東西冥迷兮氣奄奄
나는 듯 벼랑에 쏟아지는 샘물이여 / 淙飛泉以瀉于崖兮
폐부를 맑게 하며 맛이 달기도 해라 / 淸肺腑而味甘
손으로 움키니 싸늘한 얼음같고 / 掬之手中兮冰寒
쇠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라 / 照衰顔以是監
게서 쉬며 그 소리 들으니 / 爰流憇以聽其聲兮
옥 패물을 쨍그렁 울리는 듯 / 鏘玊佩之相參
부싯돌로 불을 쳐 차를 달이려 하니 / 將敲火而煎茶
육우의 차맛 아는 것 시들하구나 / 鄙陸羽之口饞
부러워라 반곡에 놀 만하다고 한 / 羡盤谷之可㳂兮
한유의 그 글은 나의 길잡이로세 / 矧其文爲我之指南
도통을 천년 만에 이었으니 / 續道緒於千載兮
그 시내 이름이 염계로세 / 乃命其溪曰濂
산중에 짝이 없을망정 / 惟山中之無偶兮

모시고 섬길 스승이 있네(맑은 물을 말함) / 尙摳衣於丈函
한 말씀 듣고 도를 깨달아 / 聞一言以悟道兮
이욕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자 / 洗利欲之貪婪
마음 근원을 해맑게 열어 / 開心源之瑩淨兮
오직 태극에만이 함영하오리 / 惟太極之泳涵
잠깐 동안 금그은 듯이 만남 곧 있으면 / 若有遇於介然之頃兮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될 수 있으리 / 諒天地其可三
어찌하여 당(唐)우(虞)의 유허에 엉킨 풀, 차디찬 연기 되고 / 胡唐虞之遺墟蔓草寒烟兮
우리 도가 남방으로 간단 말고 / 吾道被于南
어찌하여 물이 고여 있기만 하여 비를 안 주고 / 炎胡泓渟之而不霈兮
삭방(朔方 북녘)의 눈과 월령의 독한 장기가 섞여 진창이 됐는고 / 朔雪越嶺之交粘
그러나 남은 그 여파(餘波)로 천하를 다스릴 만하여 / 信餘緖可以理天下兮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호)가 홀로 가는 말을 달렸네 / 魯齋獨騁其征驂
그 물결의 혜택을 온 천하에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으니 / 然波及者靡不周兮
참상을 어찌 한하리 / 夫何恨於商參
후생이 두렵다 했거니 / 惟後生之可畏兮
푸른 빛이 남에서 나오누나 / 靑乃出乎其藍
다행히 그 도가 해ㆍ달같이 걸렸으니 / 幸其道之揭日月兮
내가 그 빛에 의지하여 만족하네 / 吾依光兮心焉甘
세상의 권세를 잊고 안으로 도를 즐기어 / 將忘勢而内樂兮
날마다 남쪽 처마 밑에 휘파람 불며 기대었네 / 日嘯倚於南櫩
성가시게 날 자꾸 부르기에 / 苦相招而不止兮
눈썹을 들어 바라보기도 하나 / 忽軒眉而載瞻
어허 내 처음 마음 그지없거니 / 款初心之弗竟兮
일생을 두고 여기 머물러 있으려네 / 終歲月以聊淹



東文選卷之九 / 五言律詩

題寒松亭   /   안축(安軸) , 1478 간행
  *   안축(安軸)  : 고려 말기의 학자(1287~1348).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젊어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고 충렬, 충선, 충숙 세 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작품에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죽계별곡>, 저서에 문집 ≪근재집≫이 있다. ㅡ <다음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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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仙曾會此。客似孟甞門。珠履雲無迹。蒼官火不存。尋眞思翠密。懷古立黃昏。唯有煎茶井。依然在石根。松近爲山火所燒故云。

제 한송정(題寒松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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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축(安軸)

네 국선이 일찍 여기 모였으니 / 四仙曾會此
종자가 맹상군 문객만 하였으리 / 客似孟嘗門
구슬신 신은 분들 구름처럼 다 가고 / 珠履雲無迹
푸른 수염 난 관송은 불에 타 안 남았네 / 蒼官火不存
선경을 찾으려니 푸른 숲 그립구나 / 尋眞思翠密
옛날을 회상하여 황혼에 서 있네 / 懷古立黃昏
남은 것 오직 차 끓이던 우물唯有煎茶
아직도 돌 뿌리 옆에 그대로 있구나 / 依然在石根

[솔[松]이 근년에 산불[山火]로 타서 이렇게 말했다.]

東文選卷之十 / 五言律詩
閑齋同中慮偶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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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盡春光動。山圍暮色多。懶從生計薄。閑愛舊知過。古井初消凍。寒梅正結花。團圝風味足。賖酒更煎茶


한가한 서재에서 중려와 함께 우연히 읊음[閑齋同中慮偶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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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량(卞仲良)
변중량(卞仲良) :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춘당(春堂). 신의위보승산원(神義衛保勝散員) 변주(卞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찬성사(贈贊成事) 변원(卞原 또는 卞元)이고,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변옥란(卞玉蘭 또는 卞玉鸞)이며, 어머니는 전객서부령(典客署副令) 성공필(成公弼)의 딸이다.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형이며,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백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 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 발췌 ...... 

눈이 다 녹으매 봄빛이 움직이고 / 雪盡春光動
산이 둘렀으매 저문 빛이 많네 / 山圍暮色多
게으르니 생계는 박한 대로 / 懶從生計薄
한가로워 친구 찾는 것 기뻐하네 / 閑愛舊知過
옛 우물에는 처음으로 얼음이 녹고 / 古井初消凍
찬 매화는 방금 꽃을 맺네 / 寒梅正結花
단란한 풍미가 이만하면 족하거니 / 團圝風味足
술을 사고 또 차를 끓이네 / 賖酒更煎茶



東文選卷之六十六 / 記
泰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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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夫緣境而漸染者。人之情也。耳猒嘈哳而不聞淸溜之聲。目倦華靡而不矚靑山之色。則煩滯之心。有時而萌矣。然山水之勝。求諸遠則易。求諸近則難。故求之城中而未得。則之郊圻之外。之郊圻之外而未得。則尙無可奈何矣。惟其慕肥遁樂獨善高蹈遠遊者。然後得之也。是以愛山水之篤者。不可享富貴之樂。嗜富貴之深者。不得致山水之美。而兼之者鮮矣。今知奏事于公。居富貴之中。致山水之美。以帝城猶謂之遠。遂卜於帝闕之傍。是昔鄭員外所居也。當時茂苑殘莊而已。公得之。尋泉脉之攸出。築石而甃之。凡飮吸盥漱煎茶點藥之用。皆仰此井。因泉之汎濫者。瀦作大池。被以菱芡。放鵡鴨其中。至於風軒水榭花塢竹閣。無不侈其制。使三十六洞之景。盡入於朱門華屋之內矣。又何必肥遁遠遊。然後享山水之樂耶。公指崇丘之亞然者曰。此予之望闕臺也。予嘆曰。旨哉。公之名是臺也。今公以喉舌之任。朝夕密邇龍顔。猶謂之未足。居必近於帝闕。又尙以爲未足。而乃成望闕之臺。此眞古所謂心罔不在王室者也。又指岌然高者曰望月臺也。翼然如飛者曰快心亭也。因謂予曰。予之標榜也如是。予所未名者。子爲我名之也。予謹名其園曰芳華。井曰噴玉。池曰涵碧。竹軒曰種玉。皆言其狀也。揔而名其齋曰泰。易泰卦。有之曰。天地交而萬物通。上下交而其志同。今公當君子道長之時。佐王同志。財成輔相。使萬物大通而天地交泰。然後體逸心泰。得此優游之樂。則吾以泰名齋。不中的歟。先是公使內翰李眉叟。記快心亭。已書于生絹障子。立其亭之右。又使予作此記。欲對峙於其左。其好事如此。眉叟文之雄者也。狀物周悉。故於此略之。第敍所以名之之意耳。


이규보(李奎報)
   

권신의 압객인가 충신인가?

   이규보의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와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다. 백운거사라는 호를 통해 그가 산촌에 한가롭게 은거하면서 인생을 달관한 멋스러운 일생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삼혹호 선생이라는 호는 세 가지를 몹시 좋아하여 붙여진 것으로서 그 세 가지란, 거문고와 술과 글을 일컫는다.

   아버지 이윤수는 개성에서 지방 관리를 지낸 사람이었고, 그의 집안은 80여 명의 노비를 거느리는 등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기동(奇童, 기이한 아이)'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여러 가지 문헌을 두루 독파해냈고, 한 번 읽은 것은 끝까지 잊지 않는 재사(才士)로 통했다. 고려 명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오세재가 30년이나 손아래인 이규보와 교류했다는 사실은 그의 글재주가 그만큼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몇 차례나 소과(小科)에 응시하지만,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한시만을 좋아하고 의례적인 과거의 문체에 소홀한 탓인지 계속 낙방했다. 23세가 되어서야 진사에 합격하지만 말과(末科)는 기피하여 사양한 탓에 중용되지 못했다. 그 후로 그는 오랫동안 천마산 등지에서 은거하며 오로지 독서와 책 쓰는 일에만 힘을 기울였다.

   이규보는 10여 년에 걸친 은거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32세 때에 비로소 권력을 쥐고 있던 최충헌 부자의 눈에 띄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권신의 압객(狎客, 주인과 허물없이 터놓고 지내는 사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또 권신들의 무고와 배척을 받아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했다.

한편 그는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국난을 피하는 것은 사나이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자진하여 종군함으로써 용맹을 떨쳤다.

   1202년 남쪽 지방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나라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산관(散官, 직위만 있고 직무는 없던 관리)과 과거의 급제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이규보는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 관군에 가담하여 병마녹사 겸 수제라는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는 농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촌 생활의 비참함과 사회의 갖가지 폐단들을 직접 목격했다. 3년 후 봉기를 진압하고 개선한 수많은 장정이 너나 할 것 없이 논공행상을 벌였지만, 그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관직에 나아갔다가 물러나기를 거듭하던 이규보는 1231년, 원의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백의의 산관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그 무렵 고려에서 작성한 수많은 외교문서들은 모두 그가 초안을 잡은 것이다. 그 덕분에 고종의 신임을 받아 관직을 돌려받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고급 관직을 지냈다.

ㅡ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에서 발췌......


태재기(泰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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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

  대개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마음이다. 귀로는 새 우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맑게 흐르는 물 소리를 듣지 않으며, 눈은 화려하고 사치한 데 익숙해져서 푸른 산빛을 보지 않는다면, 번거롭고 막히는 마음이 때로는 싹트는 것이다.

   그러나 산수의 좋은 경치를 먼 곳에서 구하기는 쉬우나 가까운 곳에서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안에서 구하여 얻지 못하면 근교(近郊)와 경기(京畿) 밖으로 나가고, 근교와 경기 밖에서도 얻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은둔을 사모하고 독선(獨善)을 즐거워하여 세속과는 동떨어져 멀리 떠나 노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산수(山水)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은 부귀의 낙을 누릴 수 없고, 부귀를 깊이 즐기는 자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으니 이 두 가지를 겸(兼)하는 자가 적다.

   이제 지주사(知奏事) 우공(于公)이 부귀를 누리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얻으려 하는데, 황제의 성이 멀다 하여 마침내 황제의 대궐 옆에 자리를 정하였으니, 이곳은 옛날 원외랑(員外郞) 정공(鄭公)이 살던 곳이다. 당시에는 황무(荒蕪)한 정원과 망가진 별장이었는데, 공이 얻은 뒤에 샘줄기를 찾아 돌을 쌓고 우물을 만들어 마시며, 세수하고, 차 끓이며, 약 달이는 데 쓰는 물을 모두 이 우물물로 하였으며, 샘이 넘쳐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저수하고 큰 못을 만들어 연꽃을 가득하게 심고, 앵무새와 오리를 그 가운데 놓아 길렀다. 풍헌(風軒)ㆍ수사(水榭)ㆍ화오(花塢)ㆍ죽각(竹閣)에 이르러서도 그 제도를 사치하게 하였고 36동(洞)의 경치를 모조리 주문(朱門) 화옥(華屋)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은둔하고 멀리 떠나 노닌 연후에야 산수의 낙을 누리겠는가.

   공이 높은 구릉(丘陵)의 평평한 것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대궐을 바라보는 대(臺)이다.” 하였다. 내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공이 이 대를 이름지은 데에는 뜻이 있구나. 지금 공이 후설(喉舌 승지)의 책임을 맡아, 아침 저녁으로 용안(龍顔)을 가깝게 모시는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사는 곳을 황제의 대궐에 가깝게 하고, 그래도 또 부족하게 여겨 대궐을 바라보는 대를 이루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옛 사람이 말한, ‘마음이 왕실(王室)에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같다.” 하였다.

   또 우뚝 높이 솟은 것을 가리키며 망월대(望月臺)라 하고, 날개치며 나는 듯한 것을 가리켜 쾌심정(快心亭)이라 이르고 곧 내게 말하기를, “내가 표방(標榜)한 것이 이와 같으니, 내가 이름짓지 않은 것은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이름지으라.” 하였다. 내가 삼가 이름지어 동산[園]은 방화(芳華)ㆍ우물은 분옥(噴玉)ㆍ못[池]은 함벽(涵碧)ㆍ죽헌(竹軒)은 종옥(種玉)이라 하였으니, 모두 그 형상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 모아 그 재(齋)를 태(泰)라고 이름하였다.

  《주역》 태괘(泰卦)에 말하기를, “천지가 서로 사귀어 만물이 통하고 상하가 사귀어 그 뜻이 같아진다.” 하였는데, 지금 공이 군자의 도(道)가 자라는 때를 맞아 임금을 도와 뜻을 같이 하고 보좌하여 재물을 이루어 만물로 하여금 크게 통하고 천지로 하여금 사귀어 태평하게 한 다음에 몸과 마음이 편안한 것이니, 충분히 여유롭게 노는 즐거움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태로써 재의 이름을 지은 것이 적중하지 않았는가. 이보다 먼저 공이 내한(內翰) 이미수(李眉叟)로 하여금 쾌심정기(快心亭記)를 짓게 하여, 생견(生絹)으로 만든 병풍에 써서 정자의 오른쪽에 세우고, 또 나에게 이 기(記)를 짓게 하여 그 왼쪽에다 마주보게 세우려 하니 일 벌이기를 좋아함이 이와 같다. 미수는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라, 물건을 형상한 것이 치밀하고 상세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만 이름지은 까닭만을 서술할 뿐이다.


東文選卷之六十七 / 記  , 1478년 간행
王輪寺丈六金像靈驗收拾記
詳夫自佛法之波及三韓也。由中及外。列刹相望。至如像設。無寺無之。但諸佛一體也。凡像設所在。有顯靈應與不爾者。是凡夫思想未到處。其何以測之哉。雖然諸佛菩薩之於神通方便。遊戲自在。無可無不可。亦不可以色相求之者也。然則其不顯光靈。非不爲也。姑藏其用而已矣。若時乎應機赴感。有以顯其靈應。是亦自然方便所示。而盖至人之細也。然以世之凡眼見之。則安得不驚駭且異。而篤生精信之心耶。精信之心篤。則佛輒應之。而其靈應又益顯矣。是世所譁傳某寺某佛像。有大靈驗者之類是已。今夫都城之北。有寺曰王輪。是海東宗恒轉法輪之大伽藍也。寺有毗盧遮那丈六金像一軀。聞昔有二比丘。曰巨貧曰皎光。同發願欲鑄成金像。作俗諺所謂棟梁者。其所謂棟梁者。凡浮屠之勸人布施。營作佛事者之稱也。巨貧主其事。皎光佐之。巨貧忽一日謂佐者曰。事有不稱吾意者多矣。加之年亦老矣。必不能卒事。當入皆骨山。自焚而化。汝可拾吾舍利。持以勸人。則無有不樂施者。夫然后事可辦矣。言訖。入其山鍊道。至丙申八月十五日於摩訶衍方丈北岫。生茶毗其身。皎公依其言。收靈骨。盛于箱。自負擔歸京師。勸人檀施。則自上方至搢紳士庶人。無不施財。如山積焉。板方里有散將官。窮不能施物。有女年可十三。願以此納之。俾供使役。皎公不得已受之。時城南有將軍失其名。年老無息。願贖此女爲養息。因納布五百段。又星臺洞有寡婦。家貧無長物可捨。以所寶大鏡施之。因告曰。此鏡久歸於人。今猶未還。故不能以此時輟納。迨鎔金之日。方取而齎去耳。皎公唯諾。至其時。以日遠偶忘之。不告鏡主而鑄焉。及成。凡相好無不具足端嚴。唯心胷有虧缺處。僧甚恐之。方議補鑄。鏡主聞像之已成也。大懷嗟惋。然業已捨之。故遂將其鏡往納焉。有以鏡置佛胷之缺隙者。其隙與鏡甚穩當相銜。因假置之。遟明日欲銘之。然後塡補之。至曉見焉。則鏡已自合。宛若鎔鑄而了無痕迹矣。都城觀者如堵。無不駭異。此靈驗一也。像成。輦入于寺。是日欲妥於金堂。以戶庳不得容。期翌旦將去上之限木。然後納焉。及旦見之。則佛已端然入座矣。此靈驗二也。崔侍中精安。常痛敬丈六像。以其宅之在寺之南隣。故每上官之時。則到寺門輒下馬。禮拜而後去焉。及退公則至朝宗門。又下馬再拜。步過寺門。然後騎焉。凡所得新物。先奉之而後敢甞。又往往造于堂。手煎茶供養。如是者久焉。忽夢丈六告曰。汝事我誠勤矣。然不若寺之南里鷹揚府老兵之歸心也。公明日使人尋其家。果有一老兵在焉。公親往訪之問曰。聞汝之常敬某寺丈六。信然耶。其敬之也。又別作何般耶。對曰。老僕自中風莫興。凡已七年矣。但晨夕聞鍾聲。則向其處合掌而已。安更有餘事哉。公曰。如是則老夫所以事佛者。其不若汝誠之至矣。由是大重其人。每受祿。輒以一斛賜之。此靈驗二也。又侍中受祿之日。有緇褐僧。到門乞食。公賜以食。觀其飮啖。有異於常者。別炊飯一斗進焉。復喫了無遺。公大異之。以祿一斛施之。使蒼頭負之而隨。及出門。苦遣奴卽還。自負擔出歸。公聞之。急使人尋之。不得其迹。公親出追之。聞有負米一僧。入王輪寺門者。卽入寺尋之。又不知其所如。偶欲禮丈六入金堂見之。則有祿一斛。在佛香案上。於是大悟其僧。乃丈六權化也。此靈驗四也。是皆故首座僧傑。傳之於宗門大士正林者也。正林後亦爲僧統。皆釋門老匠。精信謹篤大和尙也。豈妄傳之哉。其古老所傳。章章播在人口者。則方丈六之入于寺也。以大車載之。輓者無慮百萬人。塡咽道路。有豚市商人輩。亦發隨喜心。倂力推轂。衆力如是。而車忽不行。典事僧恠之。登高岸望之。則有群豕夾轂而行。因悟惡業之爲礙也。禁其人不得與推輪。然後車乃得行。此靈驗五也。又以古今擧國人所甞親見者言之。國將有變。丈六先出汗示之。丈六出汗。則左右補處泥塑像及石刻華嚴經中。凡如來世尊佛菩薩字。亦皆霑濕。餘字則否焉。是亦丈六所以護我國家。先之以警曉者已。此靈驗六也。皎公鑄此像。自成廟御宇八年大宋端拱元年戊子始之。至丁酉歲凡十年乃成矣。按傑公所傳云。寺曾經回祿之災。凡文籍與丈六靈驗十餘條記。並爲煨燼。今貧道所傳。特遺漏之餘也。以是言之。則靈驗不啻此耳。後復有記其遺漏者。追附于此亦可也。唯崔侍中齋僧事。所說不同。傑公之言。則曰。有緇褐僧到門乞食云云。業門耆舊今之所說。則云公每趁日飯一僧。屬其奴曰。汝出求僧先遇者。是有緣僧也。必以是邀之。奴一日出求僧。有僧衣裳藍縷。形貌極醜。奴避而不邀。更覓他僧。則又其僧出見之。如是者數四。奴嫌其醜。便不肯邀之。還以狀白於公。公怒曰。是吾所謂有緣僧也。汝速去邀之。奴出見。又其僧在焉。則邀致於宅。公賜以食云云。此說未知孰是。兩皆有異。故存之。國家以丈六殿之頹殘。方命以修葺也。今相國淸河崔公。甚有力焉。公又聞佛盖與幢盖之多至殘毁。迺嘆曰。此皆梵儀之眉目也。不崇飾無以備佛儀之最巨者。尋命工營之。百寶光明。爛然奪目。眞古所未見也。公覽遺記。嗟嘆不已。但以其所記。皆方言俚語。而不可久其傳。故命予文之。小子敢再拜稽首爲之記。復讚之以頌曰。
淸淨一體。月映秋水。卽之朗然。攬之邈矣。毗盧境地。本絶思議。造像者夢。讚者亦爾。


왕륜사 장륙금상 영험수습기(王輪寺丈六金像靈驗收拾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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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

   살펴보건대 불법(佛法)이 삼한(三韓)에 파급되자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벌려선 사찰(寺刹)들이 서로 바라다보이며,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은 절이 없다. 다만 모든 부처는 한 몸인데 무릇 불상을 모신 곳 중에서 영험(靈驗)이 드러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은 범부(凡夫)의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그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여러 부처와 보살의 신통(神通)하는 방편(方便)은 자유자재로 변화하여 가능한 것도 없고 불가능한 것도 없는 것이니, 또한 눈에 보이는 빛깔과 형상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광명과 영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잠깐 그 작용을 감추었을 뿐이다. 때로는 기미에 감응하여 그 영험을 나타냄과 같은 것은, 이것도 또한 자연이 방편으로 보이는 바로서 세세한 사람의 일에까지 미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평범한 눈으로 본다면 어찌 놀랍고 또 신기하게 여겨져서, 깊은 신앙심을 더욱 두텁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실한 신앙심이 두터워지면 부처는 문득 이에 감응할 것이니, 그리하여 그 신령한 감응은 또 더욱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어느 절 어느 불상은 매우 영험이 있다고 소란하게 전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도성(都城)의 북쪽에 왕륜사(王輪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해동의 종파가 항상 모든 법의 힘을 전파하는 사찰(寺刹)이다. 이 절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장륙금상(丈六金像 높이 16척의 황금 불상) 하나가 있다. 들으니, 옛날 거빈(巨貧)교광(皎光)이라 하는 두 사람의 비구(比丘)가 있었다. 둘이서 황금 불상을 주조(鑄造)할 것을 발원(發願)하고 속된 말로 동량(棟梁)이란 것을 하였다. 동량이란 것은 무릇 중이 남에게 시주(施主)하기를 권유하여 불사(佛事 부처에게 봉사하는 일)를 영위(營爲)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거빈이 그 일을 주관하고 교광이 보조하였는데, 거빈이 하루는 갑자기 보조자 교광에게 말하기를, “일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다. 더구나 나이도 늙었으니 반드시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마땅히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서 스스로 분신(焚身)하여 죽어야 하겠다. 너는 나의 사리(舍利)를 수습하여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유한다면 즐겨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뒤라야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하고, 말을 마치자 곧 그 산에 들어가 도(道)를 닦았다.

   병신년 8월 15일에 이르러 마하연(摩訶衍) 방장(方丈)의 북쪽 봉우리에서 산 채로 그의 몸을 살랐다. 교공(皎公)이 그의 유언에 의하여, 사리를 거두어 상자에 담아 스스로 짊어지고 서울에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하니 위에서부터 높은 벼슬아치와 선비들과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재물이 산같이 쌓였다. 판방리(板方里)에 산직(散職 보직〈補職〉이 없는 벼슬)으로 있는 장관(將官)이 있었는데, 빈궁하여 재물은 시주할 수 없고 다만 13 세쯤 된 딸이 있었다. 이 딸을 바쳐서 심부름이나 시켜주기를 원하자 교공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때 성남(城南)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장군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속전(贖錢)을 바치고, 이 계집아이를 데려다가 양녀(養女)로 삼기를 원하고 베[布] 5백 필을 바쳤다. 또 성대동(星臺洞)에 과부가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시주할 만한 좋은 물건이 없어서 그가 보배롭게 여기던 큰 거울을 시주하면서 말하기를, “이 거울은 오랫동안 남에게 가 있어서 지금도 아직 돌려받지 않았으므로 당장에 갖다 바칠 수는 없습니다만 쇠를 녹여 붓는 날까지는 꼭 찾아다가 갖고 가겠습니다.” 하였다. 교공이 “좋습니다.” 하고 승낙하였다. 그런데 그 쇠를 녹여 붓는 때에 이르러서 그동안 시일(時日)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깜박 잊고 거울 임자에게 통하지 못한 채 쇠를 녹여 부었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모양이 잘 갖추어져서 만족할 만하며, 단아(端雅)하고 근엄(謹嚴)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오직 가슴에 이지러진 데가 있었다. 중이 매우 불안하여 마침내 채워서 녹여 부을 것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거울의 주인이 불상이 이미 주조되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한탄한 다음 이미 시주한 것이므로 그 거울을 갖고 가서 바치었다. 그 거울을 불상의 가슴에 있는 이지러진 자리에 가져다 놓아보니, 그 이지러진 틈이 거울과 더불어 잘 맞물렸다. 그래서 임시로 끼워두고 내일로 늦추어 글자를 새긴 뒤에 때워 넣기로 하였다. 그런데 새벽이 되어서 보니 거울이 이미 제 스스로 합하여져서 꼭 녹여 부은 것같이 조금도 흔적이 없었다. 도성에서 보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게 되었으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영험한 첫 번째 일이다.

   불상이 이루어졌으므로 절 안으로 들어가서 이날로 금당(金堂)에 안치(安置)하고자 하였으나 문이 낮아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을 기(期)하여 문 위의 중방(中枋)을 떼낸 뒤에 들여놓기로 하였다. 아침이 되어서 보니 불상(佛像)이 이미 단정하게 제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이것이 영험한 두 번째 일이다. 시중(侍中) 최정안(崔精安)이 항상 장륙금상(丈六金像)을 깊이 존경하였다. 그 집이 절의 남쪽 이웃에 있었으므로 매번 관아(官衙)에 출근할 때 절의 문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말에서 내려 불상을 향하여 예배(禮拜)한 뒤에 갔으며, 퇴근할 때 조종문(朝宗門)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고 걸어서 절문을 지난 뒤에 말을 타곤 하였다. 무릇 새로 나는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먼저 불상 앞에 바친 뒤라야 감히 맛보았고, 이따금 법당(法堂)에 가서 손수 차(茶)를 끓여서 공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홀연(忽然)히 꿈에 장륙금상이 이르기를, “네가 나를 섬기는 것이 진실로 정성스럽고 부지런하다. 그러나 절의 남쪽 마을 응양부(鷹揚府)에 사는 늙은 군사의 귀의(歸依)하는 마음만은 못하다.” 하였다. 공이 이튿날 사람을 시켜서 그 집을 찾으니 과연 한 명의 늙은 군사가 있었다. 공이 친히 가서 방문하고 묻기를, “네가 항상 아무 절의 장륙상(丈六像)을 존경한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또 그를 존경해서 특별히 어떤 일을 하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늙은 제가 중풍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지가 이미 7년이 되었습니다. 다만 저녁과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 그곳을 향하여 합장(合掌)할 뿐입니다. 어찌 따로 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늙은 내가 부처 섬기는 것이 너만큼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구나.” 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 사람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녹봉(祿俸)을 받을 때마다 문득 1곡(斛)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세 번째 일이다.

   또 최 시중(崔侍中)이 녹봉을 받는 날에 검정 베옷을 입은 중이 문앞에 와서 밥을 비는 것이었다. 공이 밥을 주어 먹게 하고, 그가 마시고 씹는 모습을 보니 보통 사람과 다른 데가 있었다. 그래서 따로 밥 한 말을 지어서 가져다 주니 다시 다 먹어 버리고 남기는 것이 없었다. 공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녹봉의 한 휘[斛]를 시주하고 하인을 시켜 지고 따라가게 하였는데, 문밖에 나가자 굳이 종을 돌려보내고 스스로 지고 돌아갔다. 공이 듣고 급히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으나 그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공이 친히 나가서 쫓아가는데 쌀을 짊어진 중 한 사람이 왕륜사(王輪寺)의 문으로 들어간 자가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 곧 절에 들어가 찾았으나 또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마침 장륙금상(丈六金像)을 예배하고자 하여 금당(金堂)에 들어가보니, 녹미(祿米) 한 휘가 불상의 향탁(香卓) 위에 있었다. 여기에서 그 중이 바로 장륙금상의 권화(權化)라는 것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네 번째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다 옛날의 수좌승 걸(傑)이 종문(宗門)의 대사(大士)인 정림(正林)이란 자에게 전한 것이다. 정림은 뒤에 또한 승관(僧官)이 되었으니, 다 불문(佛門)의 노장(老匠)들로서 신실하고 독실한 대화상(大和尙)이다. 어찌 이런 이야기를 망령되게 전하였겠는가. 그리고 옛 늙은이들이 전하는 것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입에 분명하게 전파되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장륙금상을 바야흐로 절에 모시려 할 때, 큰 수레에 싣고 끄는 자가 무려 백만 명이나 되어 큰길을 메웠다고 한다. 그중에는 돼지고기를 파는 상인(商人)들도 있어서 또한 수희심(隨喜心 남의 좋은 일을 보고 따라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힘을 모아 수레를 밀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힘이 이와 같건만 수레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일을 맡은 중이 이상하게 여겨 높은 언덕에 올라가 바라보니, 돼지떼가 수레바퀴를 잡고 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악업(惡業)으로 인해 장애(障碍)가 된 것을 깨닫고 그 사람들에게 수레를 밀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수레는 곧 움직여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다섯 번째 일이다.

   또 옛날과 지금의 온 나라 사람들이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나라에 장차 무슨 변고(變故)가 일어나려 할 때에는 장륙금상이 먼저 땀을 흘리게 되며 좌우의 진흙으로 빚은 보처(補處 장차 부처가 될 후보자인 보살)의 소상(塑像)과 돌에 새긴 《화엄경(華嚴經)》 속에 있는 모든 여래세존(如來世尊)ㆍ불(佛)ㆍ보살(菩薩)이란 글자도 또한 다 젖으나, 그 밖의 글자는 그렇지 않았다 한다. 이것은 장륙금상이 우리 국가를 수호(守護)하여 사전에 깨우쳐 타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영험한 여섯 번째 일이다. 교공(皎公)이 이 불상을 주조(鑄造)한 것은 고려 성종(成宗) 8년, 송(宋) 나라의 단공(端拱) 원년인 무자년부터 시작하여 정유년에 이르기까지 무릇 10년이 걸려서 완성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걸공(傑公)의 전하는 말에 따른다면, “절이 일찍이 화재를 만나 모든 문적(文籍)과 장륙영험기(丈六靈驗記) 십여 조항이 모두 불타버렸다. 이제 빈도(貧道 중이 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말)가 전하는 바는 다만 없어지고 빠져버린 나머지일 뿐이다.” 하였다. 이런 면에서 말한다면 영험은 이것만은 아닌 것이다. 뒤에 그 빠진 것의 기록이 발견되면 추가하여 여기에 덧붙여도 좋겠다.

   다만 최 시중이 중을 대접하였다는 이야기에 대하여는 말들이 같지 않다. 걸공(傑公)의 말에는 검정 베옷을 입은 중이 문 앞에 와서 밥을 빌었다고 하였고, 불도를 닦고 있는 늙은이들의 지금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공이 날마다 중 한 사람씩에게 밥을 대접하는데, 그의 종에게 시키기를, “네가 나가서 중을 찾아올 때는 제일 먼저 만난 중이 인연 있는 중이니, 반드시 그 사람을 맞아 오너라.” 하였다. 어느 날 종이 나가서 중을 찾는데, 옷이 남루하고 형상과 얼굴이 지극히 추(醜)하게 생긴 중이 있었다. 종이 그를 피하고 다시 중을 찾았으나 또 그 중이 나타났다. 이렇게 하기를 너댓 번 거듭하였으나 종이 그가 추한 것을 보고 싫어하여 선뜻 맞아오려 하지 않고 돌아와 상황을 공(公)에게 사뢰니, 공이 성내어 말하기를,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말한 인연 있는 중이다. 너는 빨리 가서 맞아오너라.” 하였다. 종이 속히 나가 보니 또 그 중이 있어서 즉시 집으로 맞아들이어 공이 음식을 준 것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두 가지가 다 이상한 데가 있으므로, 다 기록하여 둔다.

   나라에서 장륙상을 안치한 전각(殿閣)이 무너지고 낡았다고 하여 바야흐로 수리를 명하였다. 지금 상국(相國) 청하 최공(淸河崔公)이 매우 진력한 바 있다. 공은 또 불개(佛盖)와 당개(幢盖)가 많이 낡고 해졌다는 것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런 것들은 다 불교 의식(佛敎儀式)의 대표적인 것이다. 성대하게 꾸미지 않으면 불교 의식의 가장 큰 것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하고 곧 공장(工匠)에게 명령하여 짓게 하니, 온갖 보배가 빛이 나고 밝아서 찬란함에 눈이 부시었다. 정말 예전에는 보지 못하던 바이다. 공이 장륙금상의 영험에 대한 남은 기록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 기록이 다 방언(方言)과 상말로 되어 있어서 오래 전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 명하여 글로 쓰라 하였다. 소자(小子)가 감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記)를 쓰고, 다시 송(頌)을 지어 찬양(讚揚)하였다.

맑고 깨끗한 부처의 한 몸은 / 淸淨一體
달이 가을 물에 비친 것같다 / 月映秋水
가까이 가면 환하게 밝건마는 / 卽之朗然
잡으려면 멀도다 / 攬之邈矣
비로자나의 경지는 / 毘盧境地
본래부터 생각과 의논을 초월한 것이니 / 本絶思議
그 상을 만든 것도 꿈이요 / 造像者夢
그것을 찬양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 讚者亦爾


東文選卷之七十一 / 記
東遊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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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至正九年己丑之秋。將遊金剛山。十四日。發松都。二十一日。踰天磨嶺。宿山下長陽縣。去山三十餘里。蓐食登山。雲霧晦冥。縣人言遊楓岳者。以雲霧故不見而還。比比有之。同遊皆有憂色。默有禱焉。距山五里許。陰雲稍薄。日光穿漏。及登拜岾。天朗氣淸。山明如刮。所謂一萬二千峯。歷歷可數也。凡入此山。必由此岾。登岾則見山。見山則不覺稽顙。故曰拜岾。岾舊無屋。累石爲臺。以備憇息。至正丁亥。今資正院使姜公金剛。奉天子之命。來鑄大鐘閣。而懸之于岾之上。旁廬桑門。以主撞擊。屹然金碧。光射雪山。亦山門一壯觀也。未午。到表訓寺小憇。有一沙彌。導以登山。沙彌言東有普德觀音窟。人之隨喜。必先於此。然深且阻。西北有正陽菴。是我太祖所刱。而安法起菩薩尊相之所。雖陡高而稍近可上。且登是菴。則楓岳諸峯。一覽而盡。余謂觀音菩薩。何所不住。余所以來者。蓋欲觀此山之形勝耳。盍先往乎。於是。攀緣而登。果如所言。甚愜來意。欲往普德。則日已向晚。且不可留山中。遂由新林,三佛諸菴。沿溪而下。暮抵長安寺宿。翌早出山。自鐵原至山三百里。則距京實五百餘里也。然重江複嶺。幽深險絶。出入是山。其亦艱哉。甞聞此山。名著佛經。而聞于天下。雖絶遠如乾竺之人。時有來觀者。大抵所見。不如所聞。東人遊西蜀峩眉,南越補陁者有之。皆言不如所聞。余雖不見峩眉,補陁。所見此山。實踰所聞。雖畫師之巧。詩人之能。不可得其形容之髣髴也。二十三日。自長安寺度天磨西嶺。又至通溝宿。凡入山者。由天磨二嶺。登嶺則望山。故踰嶺入山者。初不以絶險爲虞。自山而踰嶺。然後知其爲艱也。西嶺差低。登降三十餘里。陡甚。謂之髮斷。二十四日。至淮陽府留一日。二十六日。踰鐵嶺關。宿福靈縣。鐵嶺。國東之要害。所謂一夫當關。萬夫莫開者也。故嶺以東江陵諸州。謂之關東。至元庚寅。叛王乃顔之黨哈丹等賊。奔北而東。自開,元諸郡。闌入關東。國家遣萬戶羅裕等。領其軍防護鐵關。賊劫掠和,登以西諸州人民。至登州。使登人覘之。羅公聞賊來。棄關而走。故賊如蹈無人之境。一國洶洶。人被其害。登山城入海島。以避其鋒。至乞師天朝。然後乃能殲之。今余所見鐵關之險。誠使一夫當之。雖千萬人仰而攻之。不可以歲月得入也。羅公眞小膽哉。二十七日。到登州留二日。今稱和州。三十日。早發和州。自鶴浦口登舟入海。觀國島。島去岸十里許。入自西南隅。水際白沙如練。其上平地五六畝。形若半璧。中有屋基。人言浮圖者所居也。其上山圍若玦。勢不甚高。蔓草覆之。又無樹木。視之一土坡也。舟而小西。崖岸稍異。其崖石。則皆方直櫛比而壁立。其岸石。則皆平圓排列。一面可坐一人。然不整齊也。行數百步。其崖高可數百尺。其石白色。方直長短若一。每一條其頂各戴一小石。若華表柱頭者。仰面而視。可竦可愕。有一小窟。撑舟而入。漸窄不能容舟。視其窟。深不可測。其左右束立之石。如外面。更整齊其上。石脚下垂者。皆平正如覆棋局。若一鉅而斷之者。以此觀之。則非惟外面如此。盡一島乃一束方石條也。其窟嶄嵓。使人魂悸。不可久留。回舟而北。又有一面如圍屛者。捨舟而下。徘徊攀緣。大槩石與窟無異。而崖不甚高。其下稍平易。其圓石排列者。可坐千人。遊觀者必憇息於此。有人留飮。慮其風作。且非烟火食者所住。傍崖而東南。又行數百步。崖石稍異。作方鐵網。盛水磨小圓石。長五六十尺。一條若一條。一面皆是。人謂鐵網石。此其國島之大槩者也。若夫奇絶恠異之狀。非筆舌所可髣髴也。誠不知造化者。何以至于此極也。旣還浦口。擧酒相賀。一以獲覩勝境。一以風浪不作也。自浦口棹舟而入所謂鶴浦者。登元帥臺。百頃澄湖。一螺孤嶼。亦一奇觀也。旣晚不可留。至縣館宿。九月朔。踰歙谷懸東嶺。欲入穿島。問其狀。島有竇通南北。風濤相透而已。然自穿島。絶海而南。可往叢石亭。其間八九里。又自叢石。絶海而南。可往金蘭窟。其間亦十餘里。舟中勝景。不可言也。是日。微有風不可舟。故不入窟島。沿海邊至叢石亭。崖州守沈君。相候於亭上。所謂四仙峯者。其石束立。其條方直。大槩如國島。但其色赭。其崖石亦參差不正耳。自其上臨視之。四峯離立峭拔。斷崖嶔崟。臨東溟萬里。對西嶺千重。竇關東壯觀也。舊有碑在崖上。今不見遺跡在耳。又於東峯。有古碣。剝落磨滅。無一字可識。不知何代所立也。人言新羅時。有永郞,述郞▣▣四仙童者。與其徒三千人。遊於海上。此碑碣。豈其徒所立者耶。亦不可得考也。臨四仙峯。有小亭。置酒其上。日已晚。至通州宿。通古金蘭縣。故城北隅。有石窟。人言金蘭窟。觀音菩薩所住之處。明日乘舟。並岸而入。望見之。微若菩薩形像。立於窟中。以其窟深且狹。故不可入。操舟者曰。吾居於此久矣。自元朝使華本國之卿士。仗節剖符於方面者。下至遊觀之人。無問貴賤。必欲來觀。每令吾舟而導之。吾實猒之。甞操小刳木。獨入窟中。窮而後止。別無所見。以手捫之。一面蘚石耳。旣出而回視之。則又髣髴其形像焉。噫。吾之誠有未至歟。抑其思想所致。若所謂思成者歟。余聞之。頗有領焉。窟東有石池。人言觀音浴處。又有岩石蔟蔟。方寸其大。多至數畝。皆欹側。人謂痛足岩。盖觀音菩薩。足踏而痛。岩爲之欹側也。自金蘭至林道縣宿。初三日。到高城郡。由通州至高城一百五十餘里。實楓岳之背。其山嶄嵓險絶。人謂外山。盖與內山爭奇恠。其東南有楡岾寺。寺有大鐘。與五十三佛銅像。人言新羅時。五十三佛乘此鐘。自西天竺泛海而來。泊高城海岸。旣又至楡岾而止焉。高城南。有憇房村。實山麓也。由憇房。陡上六十里而至楡岾。余始與同遊之人。約必至楡岾。觀所謂鐘與佛像者。行旣遠路且險。馬皆瘡背病蹄。或有落後者。故不復登山。初四日。早起至三日浦。浦在城北五里許。登舟至西南小嶼。穹窿一巨石也。其頂有石龕。龕中有石佛。俗所謂彌勒堂也。其崖東北面。有六字丹書。就視之則兩行行三字。其文曰。述郞徒南石行。其述郞南石四字。則明甚。其下二字。稀微不可識。昔州人苦其供給遊賞者。斲而去之。深至五寸許。字畫不滅。今其二字不明者。盖以是歟。旣而回舟登四仙亭。亦湖中一島也。徙倚環視。則所謂三十六峯。影倒湖心。湖可百頃。澄深瀰漫。實關東勝境。亞於國島者也。時無郡守。其州吏開小酌。不可以獨飮。命舟而出。人言此湖爲四仙所遊三十六峯。峯有碑。胡宗旦皆取而沉之。今其趺猶存焉。胡宗旦者。李昇唐之人也。來仕本國。出廵五道。所至輒將碑碣。或刮去其字。或碎或沉。至於鐘磬有名者。或鎔鐵以塞之。使之不聲。若於寒松,叢石亭,三浦之碑。鷄林府奉德之鐘之類。可見也。四仙亭。朴君淑貞存撫時所置。座主益齋先生。爲之記。自三日浦渡城南河。過安昌縣亭。宿明波驛。初五日。宿高城留一日。初七日。主人小酌仙遊潭上。過淸澗驛。登萬景臺小酌。宿仁覺村舍。初八日。泛舟永郞湖。日晚不得窮源。到洛山寺。謁白衣大士。人言觀音菩薩所住。山下石崖有竇。是觀音所入處也。晚至襄州宿。明日重九。又有雨。擧菊觴於樓上。十日。宿洞山縣。有觀瀾亭。十一日。宿連谷縣。十二日。江陵存撫使星山李君。候于鏡浦。方舟歌舞中流。日未西。上鏡浦臺。臺舊無屋。近好事者爲亭。其上有古仙石竈。盖煎茶具也。與三日浦相甲乙。而明遠則過之。以雨留一日。出江城觀文殊堂。人言文殊,普賢二石像。從地湧出者也。東有四仙碑。爲胡宗旦所沉。唯龜趺在耳。飮餞于寒松亭。亭亦四仙所遊之地。郡人猒其遊賞者多。撤去屋。松亦爲野火所燒。惟石竈,石池,二石井。在其旁。亦四仙茶具也。由亭而南。有安仁驛。日已西。不可踰嶺。遂留宿。明日。早發過驛。東峯甚險。至燈明寺。觀日出臺。遂並海而東。憇于江村。踰嶺宿羽溪縣。十二日。宿三陟縣。明日。登西樓。縱觀所謂五十川八詠者。出至交柯驛。驛去縣治三十里。於十五里臨海斷崖上。有元帥臺。亦絶景也。小酌其上。遂宿驛舍。十八日。宿沃原驛。十九日。到蔚珍留一日。二十一日。早發。蔚珍縣南十里。有聖留寺。寺在石崖下長川上。崖石壁立千尺。壁有小竇。謂之聖留窟。窟深不可測。又幽暗。非燭不可入。使寺僧執炬導之。又使州人之慣出入者先後之。竇口狹。膝行四五步稍闊。起行又數步。則有斷崖可三丈。梯而下之。漸平易高闊。行數十步。有平地可數畝。左右石狀殊異。又行十許步。有竇。比竇口益隘。蒲伏而行。其下泥水。鋪席以防霑濕。行七八步稍開闊。左右石益殊異。或若幢幡。或若浮圖。又行十數步。其石益奇恠。其狀益多不可識。其若幢幡浮圖者。益長廣高大。又行四五步。有若佛像者。有高僧者。又有池。水淸甚。闊可數畝。中有二石。一似車轂。一似淨缾。其上及旁所垂幡盖。皆五色燦爛。始意石乳所凝。未甚堅硬。以杖叩之各有聲。隨其長短而有淸濁。若編磬者。人言若沿池而入。則益奇恠。余以爲此非世俗所可褻玩者。趣以出。其兩旁多穴。人有誤入。則不可出。問其人窟深幾何。對以無人窮其原者。或云可達平海郡海濱。盖距此二十餘里也。初慮其熏且汚。借僮僕衣巾以入。旣出易服洗盥。若夢遊華胥。蘧然而覺者。甞試思之。造物之妙。多不可測。余於國島及是窟。益見之。其自然而成耶。抑故爲之耶。以爲自然。則何其機變之巧如是之極耶。以爲故爲之則雖鬼工神力。窮千萬世而亦何以至此極耶。是日。到平海郡。未至郡五里。有松萬株。其中有亭。曰越松。四仙之遊。偶過於此。故名焉。平海郡者。江陵道之南界也。北自鐵嶺。南盡平海。盖一千二百餘里也。平海以南。則慶尙道之界。予甞所往還者。玆不錄云。
[주-D001] 百 : 

   * 이곡(李穀)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원나라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했다. 또한 고려 말 고려에 충절을 지킨 것으로 유명한 이색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죽부인전(竹夫人傳)’과 문집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ㅡ <문학작가>에서 발췌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ㅡ <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동유기(東遊記)
  이곡(李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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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 9년 기축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14일에 송도(松都)를 출발하여 21일에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산밑 장양현(镸陽縣)에서 자니 산과의 거리가 30여 리이다. 이튿날 일찍 조반을 먹고 산에 오르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웠다.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 “풍악산(楓岳山)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번번이 있다.” 하였다. 동행들이 모두 걱정하는 빛이 있고 무언(無言) 중에 기도를 하였다.

   산과의 거리가 5리쯤 되자 어두운 구름이 차츰 엷어지고 햇빛이 새어나오더니, 절재[拜岾]에 오르니 하늘이 개고 날씨가 맑아 산의 또렷함이 마치 칼로 긁어낸 듯, 이른바 1만 2천 봉(峰)을 뚜렷이 셀 만하였다. 이 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재를 경유하는데, 재에 오르면 산이 보이고 산을 보려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므로, 이 재를, “절재”라 한다. 재에는 옛날에 집이 없었고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쉴 곳을 마련했었다. 지정 정해년에 지금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공(姜公) 금강(金剛)이 천자(天子 원제(元帝))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해서 종각(鐘閣)을 지어 재 위에 달고, 그 곁에 절을 지어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여 우뚝한 금벽(金碧)의 빛이 설산(雪山)을 쏘니,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壯觀)이다. 낮이 못 되어 표훈사(表訓寺)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한 사미(沙彌 동승(童僧))가 인도하여 산을 오르는데 그가 말하기를, “동쪽에 보덕관음굴(普德觀音窟)이 있어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그리로 가는데 길이 험하고 깊으며, 서북쪽에 있는 정양암(正陽菴)은 태조(太祖 왕건(王健))가 창건(刱建)한 절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존상(尊相)을 모신 곳으로 좀 높기는 하지만 비교적 가까와서 올라감직하며, 또 그 암자에 오르면 풍악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관음보살(觀音菩薩)이야 어느 곳엔들 안 계시랴. 내가 여기 온 것은 이 산의 뛰어난 경치를 보고자 함이니, 그 암자로 먼저 감이 어떠하냐.” 하였다. 이에 붙들고 기어서 올라가니, 과연 그의 말대로 매우 마음에 흡족하였다. 보덕관음굴에 가려 하였는데 날도 이미 저물어 가고 또 산속에서 묵을 수도 없기에, 신림(新林)ㆍ삼불(三佛) 등 여러 암자에 들러 시내를 따라 내려와 날이 저물어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러 잤다.

   이튿날 일찍이 산을 나오니, 철원(鐵原)에서 산까지가 3백 리인즉 서울과의 거리는 실로 5백여 리이다. 그러나 강이 거듭있고 고개가 첩첩하여 깊고 험절하니, 이 산에 출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의 이름이 불경(佛經)에 나타나 있고 천하에 널리 알려져 먼 건축(乾竺 인도(印度)) 사람도 때때로 와 구경하는 이가 있다.”한다. 대체로 보는 것은 듣는 것만 못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서촉(西蜀)의 아미산(峨眉山)과 남월(南越)의 보타산(補陀山)을 구경한 자가 있었으되 모두 말하기를, “들은 것만 못하더라.”한다. 나는 비록 아미산과 보타산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내가 본 이산은 실로 들은 바보다 나으니, 비록 화가의 재주와 시인의 재능으로도 비슷하게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23일에 장안사로부터 천마서령(天磨西嶺)을 넘어 또 통구(通溝)에 이르러 잤다. 모든 금강산에 들어가는 자는 천마의 두 고개를 경유하는데, 고개에 오르면 산이 바라보이므로 고개를 넘어 산으로 들어가는 자가 처음에는 험준한 것을 걱정하지 않으나, 산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본 뒤에야 길이 험난한 줄을 알게 된다. 서령은 조금 낮은데 오르고 내림이 30여리요, 몹시 험한 까닭에 발단령(髮斷嶺)이라 한다.

   24일에 회양부(淮陽府)에 이르러 하루를 묵고, 26일에 철령관(鐵嶺關)을 넘어 복령현(福靈縣)에서 잤다. 철령은 우리 나라 동쪽의 요새이니,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만 명이라도 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개 동쪽의 강릉(江陵) 여러 주(州)를 관동(關東)이라 한다. 지원(至元) 경인년에 배반한 왕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哈丹) 등 적(賊)이 패하여 도망하여 동쪽으로 와서 개(開)ㆍ원(元) 여러 군(郡)으로부터 관동에 마구 들어오니, 나라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관을 지키게 하였더니, 적이 화주(和州)ㆍ등주(登州)의 서쪽 여러 주의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등주(登州)에 이르러 그 고을 사람을 척후(斥候)로 보내어 엿보니, 나공(羅公)이 적이 왔다는 말을 듣고 철령관을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적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밟듯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들끓고, 인민이 그 해를 입어 혹 산성(山城)에 오르고 혹 해도(海島)에 들어가 그 적군의 칼날을 피하였다가 원 나라의 군사를 빌어 온 뒤에 섬멸(殲滅)할 수 있었다. 내가 본 철령관의 험함은 참으로 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면, 비록 천만 명이 우러러 공격하더라도 어지간한 세월로는 들어갈 수 없을 터이다. 나공은 참으로 대담하지 못하였구나.

   27일에 등주에 이르러 이틀을 묵으니, 지금은 화주(和州)라 한다. 30일에 일찍 화주를 떠나 학포(鶴浦) 어귀로부터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가 국도(國島)를 구경하였다. 국도는 해안(海岸)에서 10리 쯤에 있는데, 서남쪽 모퉁이로 들어간다. 물가에 흰 모래가 새하얀 비단을 깐 듯하고, 그 위에 평지(平地)가 5ㆍ6묘(畝)는 됨직한데, 모양이 구슬 반쪽 같고, 가운데에 집터가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이 살던 곳이다.”한다. 그 위에 산이 옥결(玉玦)처럼 둘러 있는데, 산세(山勢)는 그리 높지 않으며 덩굴풀이 덮여 있고 나무도 없으니 그저 한 개의 흙언덕이다. 배를 타고 조금 서쪽으로 가니 석벽(石壁)과 언덕이 차츰 달라진다. 그 석벽의 돌은 직방체(直方體)로 나란히 우뚝 서 있고, 그 언덕의 돌은 다 둥글게 배열되어 있는데, 한 면에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으나 가지런하지 않다. 수백 보를 가니 석벽의 높이가 수백 척쯤 되는데 그돌이 흰 빛이고, 바르고 곧으며 장단(長短)이 똑 같으며, 한 줄기마다 그 꼭대기에 각각 한 개의 작은 돌을 이고 있어 마치 화표주(華表柱)의 머리 같은데, 머리를 들어 쳐다보매 아슬아슬 떨리고 놀라왔다. 작은 굴(窟)이 하나 있기에 배를 삿대질하여 들어가니, 점점 좁아져 배를 댈 수 없고, 굴을 들여다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좌우에 묶어선 돌이 외면(外面)과 같되 더욱 가지런하고 그 위에 돌고 드름이 늘어진 것이 다 반듯하여 바둑판을 엎은 듯, 마치 한 톱으로 잘라 놓은 것 같으니, 이로 본다면 외면만이 이러할 뿐 아니라, 온 섬이 하나로 묶어진 모난 돌줄기이다. 그 굴이 깊고 험하여 정신이 떨려 오래 머무르지 못하겠기에 배를 돌려 북쪽으로 가니, 또 병풍을 두른 것 같은 한 면이 있다. 배를 버리고 내려가 서성거리며 만져보니 대개 돌이 굴과 다름이 없는데, 석벽이 그리 높지 않고 그 밑은 차츰 평이(平易)한데 둥근 돌이 널찍이 배열되어 천 명이 앉을 만하다. 구경 온 사람들이 반드시 여기에 앉아서 쉬되, 누가 머물러서 술을 마시면 풍파가 인다하며, 또 화식(火食)하는 자가 머물 곳도 아니라 한다. 석벽 옆으로 끼고 동남쪽으로 또 수백 보를 가니 석벽의 돌이 차츰 달라지는데, 네모난 철망(鐵網)을 이루어 물을 담아 조그만 둥근 돌을 가는데 길이는 5ㆍ6척이요, 줄기마다 똑 같이 한면이 다 그러하니 사람들이 철망석(鐵網石)이라 이른다. 이것이 국도(國島)의 대강의 경치인데, 그 기이한 모양은 도저히 글이나 말로는 그려낼 수 없으니, 참으로 조물주가 이처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포구로 돌아와 술을 들며 서로들 치하하였으니, 하나는 승경(勝境)을 보아서이고, 하나는 풍랑이 일지 않아서이다. 포구로부터 배를 저어 이른바 학포(鶴浦)라는 곳에 들어가 원수대(元帥臺)에 오르니, 백 이랑의 맑은 호수에 한 점 외로운 섬 또한 일대 기이한 장관이었다. 날이 저물어 머무를 수 없어 현관(縣舘)으로 돌아와 잤다.

   9월 초하룻날에 흡곡현(歙谷縣) 동령(東嶺)을 넘어 천도(穿島)에 들어가려고 그 형상을 물으니, 섬에 구멍이 있어 남북으로 통하는데 풍랑이 서로 드나들 뿐이라 한다. 그러나 천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총석정(叢石亭)에 갈 수 있는데 그 사이가 8ㆍ9리이고, 또 총석정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금란굴(金蘭窟)에 갈 수 있는데, 그 사이가 또 10여 리인데, 주중(舟中)의 승경(勝景)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다. 이 날에 약간 바람이 불어 배를 탈 수 없어서 굴(窟)과 섬에 들어가지 않고 해변을 따라 총석정에 이르니, 애주수(崖州守) 심군(沈君)이 정상(亭上)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사선봉(四仙峰)이란 것은 그 돌이 묶여 서 있고 그 줄기가 반듯하고 곧은 것은 대개 국도(國島)와 같은데, 다만 그 빛이 붉고 그 석벽(石壁)의 돌이 울퉁불퉁 가지런하지 않을 뿐이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니 네 봉우리가 따로 따로 우뚝 솟아 있고 절벽이 깎아지른 듯 동쪽 바다 만 리를 바라보고 서령(西嶺) 천겹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 실로 관동(關東)의 장관이다. 옛날엔 비(碑)가 석벽 위에 있었다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고 유적이 있을 뿐이다. 또 동봉(東峰)에는 옛 비갈(碑碣)이 있는데, 표면이 떨어지고 닳아져 한 글자도 알 수 없으니, 어느 시대에 세운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라(新羅) 때에 영랑(永郞)ㆍ술랑(述郞) 등 네 선동(仙童)이 그의 무리 삼천 명과 바닷가에서 놀았다.” 하니, 이 비갈을 그 무리가 세운 것일까. 역시 상고할 수 없다. 사선봉(四仙峰)에 가니 작은 정자가 있기에 그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해가 늦어서야 통주(通州)에 이르러 잤다.

   통주는 옛날의 금란현(金蘭縣)으로 옛 성(城) 북쪽 모퉁이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사람들이 금란굴이라 하며 관음보살이 머문 곳이라 한다. 다음 날 배를 타고 들어가 바라보니 어렴풋이 보살의 형상 같은 것이 굴 안에 있는데, 그 굴이 깊고 또 좁아서 들어갈 수 없었다. 뱃사공이 말하기를, “제가 여기에 산 지 오래입니다. 위로는 원나라 조정의 사화(使華)와 본국의 경사(卿士)들, 방백(方伯)ㆍ수령(守令)들로부터 아래로는 유람객들에 이르기까지 귀천을 막론하고 반드시 이 곳을 구경하려 하여 매양 저로 하여금 배로 인도하게 하옵기에 제가 실로 귀찮게 여겨 일찍이 조그만 통나무배를 만들어 혼자 굴 안으로 들어가 맨 끝까지 보고 나왔사온데, 특별히 보이는 것이 없기에 손으로 만져 보니 하나의 이끼가 낀 돌 뿐이었나이다. 그러나 나와서 돌아보니 또 무슨 형상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아, 저의 정성이 부족한 때문입니까. 혹은 마음 속에 늘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인 듯 보인 것입니까.”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이해되는 바가 있었다. 굴 동쪽에 석지(石池)가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음보살이 목욕하는 곳이라 하며, 또 바윗돌이 뾰족뾰족한데 그 크기는 사방 한 치쯤 되며 넓이는 몇 묘(畝)나 되고 모두 한편으로 기울어졌는데, 사람들이 통족암(痛足岩)이라 이른다. 관음보살이 발로 밟아 아팠으므로 바위가 그 때문에 기울어진 것이라 한다. 금란(金蘭)으로부터 임도현(林道縣)에 이르러 잤다.

   3일에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렀다. 통주로부터 고성까지는 1백 50리인데 실로 풍악산의 등으로 그 산은 깎아 지른 듯 험절하여 사람들이 외산(外山)이라 부른다. 이 산은 내산(內山)과 기이함을 다툴 만하다. 그 동남쪽에 유점사(楡岾寺)가 있는데, 그 절에는 큰 종과 53불(佛)의 동상(銅像)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라 때에 53불이 이 종을 타고 서천축(西天竺 인도(印度))에서 바다에 떠서 와 고성(高城) 해안에 정박했다가 다시 유점에 와서 머물렀다.” 한다. 고성 남쪽에 게방촌(憇房村)이 있으니 실로 그것이 산록(山麓)이다. 게방에서 60리를 올라가면 유점사에 이른다. 내가 처음에 동행자들과 반드시 유점사에 가서 이른바 종과 불상을 보리라 약속하였는데, 오는 길이 이미 멀고 험하여 말들이 다 등창이 나고 발굽이 아파 혹 뒤처지는 자가 생겨 다시 산에 오르지 못하였다.

   4일에 일찍 일어나 삼일포(三日浦)에 이르렀다. 삼일포는 성북쪽 5리 쯤에 있는데, 배에 올라 서남쪽 조그만 섬에 이르니, 활처럼 생긴 하나의 큰 돌이다. 그 꼭대기에 돌감실이 있고 그 안에 석불(石佛)이 있으니, 세칭 미륵당(彌勒堂)이다. 그 석벽 동북쪽에 여섯 글자 붉은 글씨가 있기에 가서 보니, 두 줄에 석 자씩 썼는데 그 글에, “술랑도 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 하였다. 그 술랑남석 네 자는 아주 분명하나, 그 아래 두 자는 희미하여 알아볼 수 없었다. 옛날에 고을 사람들이 유람하는 사람들을 대접하기가 괴로와서 쪼아 버릴 때 깊이가 5치쯤에 이르렀는데도 자획(字畫)이 없어지지 않았다 하니, 지금 두 자가 분명치 못한 것은 대개 그 때문이다.

   이윽고 배를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오르니, 이 또한 호수 가운데의 한 섬이다. 난간을 의지하여 빙 둘러보니, 이른바 36봉의 그림자가 호수 한 가운데에 거꾸로 되어 있는데, 호수는 백 이랑쯤 되고 맑고 깊고 넘실거려 실로 관동의 승경(勝境)으로 국도에 다음갈 만하다. 그 때에 마침 군수(郡守)가 없어 그 고을의 아전이 조촐한 술자리를 차렸는데, 혼자 마실 수 없어서 배를 명하여 나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호수가 사선(四仙)이 놀고 간 36봉이라 하며, 봉우리에는 비(碑)가 있던 것을 단(胡宗旦)이 모두 가져다 물속에 넣었다. 지금도 그 대석(臺石)이 여전히 남아 있다.”한다. 호종단이란 자는 이승(李昇)으로 당 나라 사람인데 우리 나라에 와서 벼슬하여 5도(道)를 순찰하면서, 가는 곳마다 번번이 비갈(碑碣)을 가져다가 혹은 그 글자를 긁어버리고, 혹은 부수고, 혹은 물속에 넣었으며, 종(鍾)ㆍ경(磬)으로 이름 있는 것들도 혹 쇠를 녹여 틀어막아 소리가 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한송정(寒松亭)ㆍ총석정(叢石亭)ㆍ삼일포(三日浦)의 비(碑)와 계림부(鷄林府) 봉덕사(奉德寺)의 종들에서 볼 수 있다. 사선정(四仙亭)은 박군(朴君) 숙정(淑貞)이 존무사(存撫使)로 있을 때 세운 것으로 좌주(座主)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기(記)를 지었다. 삼일포로부터 성남하(城南河)를 건너 안창현정(安昌縣亭)을 지나 명파역(明波驛)에서 잤다.

   5일에 고성(高城)에서 자고 하루를 묵었다. 7일에 주인(主人)이 선유담(仙遊潭) 위에 술자리를 베풀어 약간 마시고 청간역(淸澗驛)을 지나 만경대(萬景臺)에 올라 조금 마시고 인각촌사(仁覺村舍)에서 잤다.

   8일에 영랑호(永郞湖)에 배를 띄웠다. 해가 저물어 근원을 다 가보지 못하고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백의대사(白衣大士)를 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음보살이 머무르는 곳이다.” 하는데, 산 아래에 구멍이 있으니, 그것이 관음보살이 들어가는 곳이라 한다. 늦게 양주(襄州)에 이르러 잤다.

   다음날 중구일(重九日)에 또 비가 와서 국화 술을 누각 위에서 마셨다.
10일에 동산현(洞山縣)에서 잤는데, 관란정(觀瀾亭)이 있었다.
11일에 연곡현(連谷縣)에서 잤다.

   12일에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려주어 두 척의 배를 타고 중류에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날이 기울기 전에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대(臺)에는 전에는 집이 없었는데, 요즈음 호사자(好事者)가 정자를 지었으며, 그 위에 옛날 신선의 돌풍로가 있으니, 이는 차를 달이는 도구이다. 삼일포와 더불어 경치가 막상막하(莫上莫下)로되 명확하고 심원하기는 그보다 낫다. 비가 와서 하루를 묵고, 강성(江城)을 나와 문수당(文殊堂)을 구경하니, 사람들의 말이 문수(文殊)ㆍ보현(普賢) 두 석상(石像)이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으나, 호종단이 물속에 넣어버리고 오직 귀부(龜趺)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시니, 이 정자 또한 네 신선이 노닌 곳인데, 고을 사람들이 유람자(遊覽者)가 많음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 버렸고, 소나무도 들불에 타버렸으며, 다만 돌풍로ㆍ석지(石池)와 두 개의 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 역시 네 신선의 다구(茶具)이다. 정자를 지나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安仁驛)이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 고개를 넘을 수 없어 거기에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일찍 떠나 역을 지나니 동봉(東峰)이 매우 험하였다. 등명사(燈明寺)에 이르러 일출대(日出臺)를 구경하고, 드디어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강촌(江村)에서 쉬고 고개를 넘어 우계현(羽溪縣)에서 잤다.
12일에 삼척현(三陟縣)에서 잤다.

   이튿날 서루(西樓)에 올라 이른바 50천(川) 팔영(八詠)이란 곳을 마음대로 구경하고 나와서 교가역(交柯驛)에 이르니, 역은 현의 관아와 30리가 떨어져 있는데, 15리 지점의 바다를 임한 절벽 위에 원수대(元帥臺)가 있으니 이 또한 절경이었다. 그 위에서 약간 마시고 드디어 역사(驛舍)에서 잤다.
18일에 옥원역(沃原驛)에서 잤다.
19일에 울진(蔚珍)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21일에 일찍 떠났다. 울진현 남쪽 10리에 성류사(聖留寺)가 있다. 절이 석벽 밑 장천(長川) 가에 있는데, 절벽의 돌이 깎아지른 듯 천 척이요, 절벽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성류굴(聖留窟)이라 이른다.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또 어둑컴컴하여 촛불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절의 중을 시켜 횃불을 들고 인도하게 하고, 또 고을 사람 가운에 많이 출입한 자에게 앞서고 뒤따르게 하여 들어가 보았다. 구멍 어귀는 좁으나 4ㆍ5보쯤 기어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며, 일어나 또 몇 걸음을 가니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세 길쯤 솟았는데, 사다리로 내려가니 점점 평탄하고 넓어지며, 수십 보쯤 가니 평지가 있어 몇 이랑이 됨직 한데 좌우의 돌 모양이 이상야릇하고, 또 10보쯤을 가니 구멍이 있는데 구멍 어귀보다 더 좁았다. 엎드려 가니 그 아래는 흙탕물이 있었는데 자리를 깔아 습기를 막았다. 또 7ㆍ8보를 걸어 가니 조금 널찍한데 좌우의 돌이 더 이상야릇하여 혹은 당번(幢番)과도 같고 혹은 부도(浮圖 탑(塔))와도 같다. 또 십수 보를 가니, 돌이 더욱 기괴하고 그 모양이 더욱 여러 가지여서 이루 기록할 수 없으며, 그 당번과 부도 같은 것도 더욱 길고, 넓고, 높으며 크다. 또 4ㆍ5보를 가니 불상 같은 것도 있고, 고승(高僧) 같은 것도 있으며, 또 못물이 있어 매우 맑은데 넓이가 몇 이랑쯤 된다. 가운데에 두 개의 돌이 있는데 하나는 수레 바퀴통 같고 하나는 단지 같으며, 그 위와 곁에 드리워진 번개(幡盖)는 모조리 오색이 찬란하다. 처음 생각엔 석종유(石鐘乳)가 엉긴 것이어서 그다지 단단하지 않으리라 여기고 지팡이로 두들기니, 각각 소리가 나고 그 장단(長短)을 따라 청탁(淸濁)이 있어 마치 편경(編磬)과 같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하다.”하나, 나는 이곳은 세속 사람이 함부로 구경할 곳이 아니라고 여겨 어서 나가자고 하였다. 그 양 옆에 구멍이 많은데 사람이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한다. 그 사람에게 굴의 깊이가 얼마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무도 그 끝까지 가 본 자가 없습니다. 혹자는 ‘평해군(平海郡) 바닷가에 닿는다’고들 합니다.” 하니, 대개 여기서 20여 리이다. 처음 들어갈 때 검고 더러울까 하여 아이종의 옷과 건(巾)을 빌려서 들어갔다가, 나온 뒤에 옷을 바꿔 입고 세수하고 양치하니 마치 꿈에 화서(華胥)에서 노닐다가 화들짝 깬 듯하였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조물주의 오묘함을 대부분 헤아릴 수 없다고 여겼는데, 내가 국도(國島)와 이 굴에서 더욱 그런 줄을 알았다. 그것이 자연히 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인가. 자연이라 한다면 그 기변(機變)의 교묘함이 어찌 이렇듯 지극하며, 일부러 만든 것이라면 아무리 귀공(鬼工)이나 신력(神力)으로 천만세(千萬世)를 다하였기로서니 또한 어떻게 이런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는가. 이날 평해군에 이르렀는데, 군에 이르기 5리 전에 소나무 만 그루가 있고, 그 가운데 정자가 있어 월송정(越松亭)이라 한다. 네 신선이 노닐다가 우연히 이 곳에 들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평해군이란 곳은 강릉도(江陵道)의 남쪽 경계로, 북쪽 철령(鐵嶺)으로부터 남쪽 평해까지 대개 1천 2백여 리이다. 평해 이남은 곧 경상도의 경계로 내가 일찍이 갔다 온 곳이기에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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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


《정본 여유당전서》해제

송재소(宋載卲) 정본 여유당전서 편집운영위원장
심경호(沈慶昊)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황병기(黃昞起)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지형(李篪衡) 전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김언종(金彦鍾)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임재완(林在完)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연구교수
박종천(朴鍾天)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방인(方仁)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장정욱(張正郁) 경북대학교 강의교수
권태욱(權泰旭) 진주교육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
김태영(金泰永) 경희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손흥철(孫興徹) 한국국제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이주행(李柱幸)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종일(李鍾日) 전 한국법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조성을(趙誠乙) 아주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
양보경(楊普景)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김대원(金大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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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의령》 해제

김대원(金大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 개설
《의령(醫零)》은 ‘의학에 관한 영세(零細)한 내용’이란 뜻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본격적인 의서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했고, 이에 포함되지 않는 의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의령》에 담았다. 즉, 이 책은 의학에 대한 잡다한 자기 생각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2. 편찬 및 간행
‘의령(醫零)’을 풀어보면 ‘의(醫)와 관련한 나머지’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이것은 《의령》이 다른 의학 관련 책을 저술하고 난 뒤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아 저술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다산의 대표적인 의학 관련 저작인 《마과회통》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의문들이나 단상들을 정리하였을 수 있다.
《의령》에는 저술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러 곳에 저술 연대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 있다. 〈잡설칠(雜說七)〉에 “내 나이가 오십(五十)이 되지 않았는데 치통이 있다.”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다산의 나이가 50살이었던 1811년 이전에 저술되었음을 뜻한다. 〈집고팔(集古八)〉에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지리산에서 차가 많이 나는 유래와 곡우전(穀雨前) 차가 맛있다고 말하였다. 이는 그가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으로 짓고 그 호에 대한 설명으로 이 편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편의 저술이 다산초당으로 옮긴 후(1808년)였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의령》 내용 중에는 1808년과 1811년 사이에 저술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내용들은 정확하게 언제 쓴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원고상태가 미완성인 점을 생각해 보면 1811년 이후에도 계속 교정을 하면서 완성하려고 한 듯하다.

3. 판본
《의령》은 신조선사본(新朝鮮社本 이하 신조본(新朝本)) 이외에 사본으로는 장서각본이 있다. 그런데 신조본의 내용은 장서각본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구성에서 다르다.

   장서각본은 〈육기론(六氣論)〉, 〈육기론이(六氣論二)〉, 〈육기론삼(六氣論三)〉, 〈외감론일(外感論一)〉, 〈외감론이(外感論二)〉, 〈외감론삼(外感論三)〉, 〈이증론일(裡證論一)〉, 〈이증론이(裡證論二)〉, 〈허실론(虛實論)〉, 〈허실론이(虛實論二)〉, 〈탄산론(呑酸論)〉, 〈비풍론(非風論)〉, 〈뇌론(腦論)〉, 〈제량론(劑量論)〉, 〈시령론(時令論)〉, 〈근시론(近視論)〉, 〈인면창론(人面瘡論)〉, 〈반위론(反胃論)〉, 〈전약설(煎藥說)〉, 〈잡설(雜說)〉, 〈잡설이(雜說二)〉, 〈잡설삼(雜說三)〉, 〈잡설사(雜說四)〉, 〈잡설오(雜說五)〉, 〈잡설육(雜說六)〉, 〈잡설칠(雜說七)〉, 〈잡설팔(雜說八)〉, 〈제부자법(製附子法)〉, 〈집고일(集古一)〉, 〈집고이(集古二)〉, 〈집고삼(集古三)〉, 〈집고사(集古四)〉, 〈집고오(集古五)〉, 〈집고육(集古六)〉, 〈집고칠(集古七)〉, 〈집고팔(集古八)〉, 〈가알롱본초(加穵弄本草)〉, 〈약로기(藥露記)〉, 〈속집일(續集一)〉, 〈속집이(續集二)〉, 〈속집삼(續集三)〉, 〈속집사(續集四)〉, 〈속집오(續集五)〉로 총 43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신조본은 〈외감론(外感論)〉, 〈외감론이(外感論二)〉, 〈이증론이(裡證論二)〉, 〈허실론이(虛實論二)〉, 〈탄산론(呑酸論)〉, 〈뇌론(腦論)〉, 〈반위론(反胃論)〉, 〈전약설(煎藥說)〉, 〈가알롱본초(加穵弄本草)〉, 〈약로기(藥露記)〉 등이 빠져 총 3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신조본에 남아 있는 내용도 장서각본과 차이가 있다. 즉, 장서각본의 내용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다. 부분적으로 생략된 편은 다음과 같다. 〈육기론(六氣論)〉, 〈비풍론(非風論)〉, 〈제량론(劑量論)〉, 〈근시론(近視論)〉, 〈잡설(雜說)〉, 〈잡설이(雜說二)〉, 〈잡설삼(雜說三)〉, 〈잡설오(雜說五)〉, 〈잡설칠(雜說七)〉, 〈잡설팔(雜說八)〉, 〈제부자법(製附子法)〉, 〈집고일(集古一)〉, 〈집고이(集古二)〉, 〈집고사(集古四)〉, 〈집고오(集古五)〉, 〈집고칠(集古七)〉, 〈속집일(續集一)〉, 〈속집삼(續集三)〉, 〈속집오(續集五)〉 등이다. 생략된 내용은 장서각본의 상태 때문에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다. 장서각본은 10행 22자를 기본으로 하는데, 현재 양끝이 조금씩 찢겨 나가서 8행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다음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상황을 연출한다. 그럴 경우 신조본 편찬자는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문단은 빼 버렸다. 이 때문에 부분적으로 생략된 경우가 발생하였다. 또한 한 문단으로 내용이 이루어져, 중간에 빠진 대목이 있어서 내용이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항목이 전체가 빠진 경우도 발생하였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다산의 원래 의도가 아니고, 신조본 편찬자들이 임의로 삭제한 경우라 판단해서 장서각본에 따라 모두 살렸다.

   한편, 〈뇌론(腦論)〉은 난외주로 ‘당산(當刪)’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다산이 교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산이 이 원고를 계속 교정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원고가 계속 교정 중이었을 가능성을 말해 주는 또 다른 증거로는, 다산이 《내경(內經)》의 구절이나 《지봉유설》의 많은 내용을 정확한 출처를 말하지 않고 그냥 인용하였고, 곳곳에 붓으로 지운 흔적이 보이고, 장서각본은 두 권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다산이 〈자찬묘지명(自撰墓地銘)〉에서 《의령》 한 권을 저술했다고 밝힌 것과 배치되는 점이 있다. 〈뇌론〉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주제군징(主制群徵)》의 내용을 인용한 것을 그대로 베껴 놓은 것으로, 《의령》 전체 내용이 다른 이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자기 생각을 첨가하고 있는 상황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다산이 생각하기에 이 내용은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빼려고 했던 것 같다.

4. 구성과 내용
  《의령》은 의학이론 전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다룬 전반부와 약재와 처방에 대해서 다룬 후반부 내용으로 구분된다. 〈육기론(六氣論)〉은 육기 대신 한(寒)ㆍ열(熱)ㆍ조(燥)ㆍ습(濕)이란정(四情)을 제시한 내용을, 〈육기론이(六氣論二)〉는 상생상극 원리에 따른 병인론을 비판한 것을, 육기론삼(六氣論三)〉는 오행의 범주를 비판한 것을, 〈외감론일(外感論一)〉은 사기(邪氣)가 몸에 침투하는 경로를 비판한 것을, 〈외감론이(外感論二)〉는 12경락설에 문제가 있음을, 〈외감론삼(外感論三)〉은 표증(表證)에 대한 논의를, 〈이증론일(裡證論一)〉은 내상(內傷)에도 종류가 있음을, 〈이증론이(裡證論二)〉는 오장(五臟)이 상하면 얼굴에 오색(五色)이 나타난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허실론(虛實論)〉은 장부(臟腑)의 허실을 오행의 상생ㆍ상극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허실론이(虛實論二)〉는 오미(五味)를 오장(五臟)에 배속시킨 것이 잘못된 것임을 다루었다.
〈탄산론(呑酸論)〉에서는 토산증(吐酸證)에 대한 제가(諸家)의 설을 검토하였다. 〈비풍론(非風論)〉은 풍비(風痹)를 근육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제량론(劑量論)〉은 약 무게를 달 때는 기미(氣味)를 먼저 살펴야 함을, 〈시령론(時令論)〉은 겨울과 여름에 외기를 살펴서 약을 사용해야 함을, 〈근시론(近視論)〉은 근시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근시란 눈동자의 평돌(平突)에만 관계함을, 〈인면창론(人面瘡論)〉은 인면창이 귀신의 소행이 아님을, 〈반위론(反胃論)〉은 반위란 질병은 ‘서(徐)’와 ‘구(久)’ 두 글자를 염두에 두고 치료해야 할 질병임을, 전약설(煎藥說)〉은 기미(氣味)가 누설되지 않게 약재 달이는 법을 다루었다.
〈잡설(雜說)〉은 술이나 인삼을 달일 때 따로 다려야 함을, 〈잡설이(雜說二)〉는 신유혈(腎兪穴) 단련법을, 〈잡설삼(雜說三)〉은 청심환(淸心丸)을 과신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잡설사(雜說四)〉는 두창 치료에 두더지를 사용하는 이유를, 〈잡설오(雜說五)〉는 부종(浮腫)에 청소유(淸蘇油)를 복용하면 좋다는 것을, 〈잡설육(雜說六)〉은 인후의 종기와 흰사마귀 치료법을 다루었다. 〈잡설칠(雜說七)〉은 옛 처방은 간단한데 지금 처방은 많아지는 것과 함께 복잡해졌고, 한 가지 약재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다루었다. 〈잡설팔(雜說八)〉은 유모가 젖먹이에게 약 기운을 전하게 하려고 젖 아래를 움켜쥐는 어리석은 행위를 비판한 내용 등을, 〈제부자법(製附子法)〉은 부자(附子) 법제하는 법을 다루었다.
〈집고일(集古一)〉은 신가헌(辛稼軒)의 퇴산(㿗疝) 병 등에 대해, 〈집고이(集古二)〉는 무소뿔ㆍ유향ㆍ몰약의 가는 법에 대해, 〈집고삼(集古三)〉은 인중(人中) 등에 대한 논의를, 〈집고사(集古四)〉는 원두표(元斗杓)의 설사를 윤선도(尹善道)가 고쳐 준 이야기 등을, 〈집고오(集古五)〉는 정협(鄭協)의 심열(心熱)을 윤회주(輪回酒)로 치료한 이야기 등을, 〈집고육(集古六)〉은 각종 동물들 치료법 등을, 〈집고칠(集古七)〉은 풍질(風疾)을 면사자(免絲子)로 치료한 이야기 등을, 〈집고팔(集古八)〉은 우전차(雨前茶)에 대한 이야기 등을, 〈가알롱본초(加穵弄本草)〉는 고과말(苦果末)의 효능에 대해, 〈약로기(藥露記)〉는 의(醫)에는 내(內)ㆍ외(外)의 두 과가 있음을, 〈속집일(續集一)〉은 이롱(耳聾)ㆍ금창(金瘡)ㆍ후비(喉痺)의 치료법을, 〈속집이(續集二)〉는 산병(産病) 치료법 등을, 〈속집삼(續集三)〉은 기침 치료법을, 〈속집사(續集四)〉는 안식향(安息香)에 대한 이야기를, 〈속집오(續集五)〉는 나력(瘰癧)과 개창(疥瘡)의 치료법에 대해 다루었다.

5. 의의
   다산은 《의령》에서 한의학의 주된 개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는 한의학에서 사용되는 육기(六氣)를 부정한다. 육기는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를 말하는데, 그것 대신 풍열조습(風熱燥濕)의 사정(四情) 이론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으로 한의학의 모든 내용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즉, 그는 기존 한의학 이론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만족할 만하게 설명할 대안적인 체계는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의령》에서 한의학 전반에 문제 제기를 하였다는 것에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2012
ⓒ 다산학술문화재단 | 송재소(宋載卲), 심경호(沈慶昊), 황병기(黃昞起), 이지형(李篪衡), 김언종(金彦鍾),

임재완(林在完), 박종천(朴鍾天), 방인(方仁), 장정욱(張正郁), 권태욱(權泰旭), 김태영(金泰永), 손흥철(孫興徹),

이주행(李柱幸), 이종일(李鍾日), 조성을(趙誠乙), 양보경(楊普景), 김대원(金大源)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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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집(雪汀集)  ㅡ 이흘 (李忔)

구성과내용

   본집은 6권 3책으로, 권수에 宋穉圭가 1820년에 지은 序가 있으며, 각 권마다 목록이 실려 있다. 시는 금강산을 유람할 때와 진하사로 사신 갈 때 지은 것이 많으며, 春帖子와 月課로 지은 시 및 金尙憲, 鄭雲湖, 成汝學, 尹安國 등 지인들과 주고받은 시, 挽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은 賦(1), 五言絶句(16), 五言律詩(61), 五言排律(11), 五言古詩(9)이다. 〈反覆錦衾〉은 외면을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고 내면을 소박하게 가꾸며 살도록 婦德을 강조한 부이다. 오언 율시의 〈次壁上韻〉은 淮陽 府使로 부임하여 처마 벽에 걸려 있는 李廷龜의 시를 차운한 것이며, 〈安岳海邊逢風雨大作……〉ㆍ〈八月二十三日泊廣鹿値風雨……〉 등은 험난한 使行의 여정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오언 배율의 〈次韻送成鶴泉歸舊庄〉에서는 詩名이 높았던 成汝學이 귀향하자 아쉬운 송별의 정을 표현하였다. 오언 고시의 〈㶚橋騎驢〉는 당나라 시인 鄭綮善의 시구를 畫題로 삼은 騎驢圖를 소재로 하여 읊은 것이다.
권2는 七言絶句(118)이다. 〈八月二十三日發向楓岳〉 이하 여러 수는 금강산을 유람할 때 지은 것이고, 〈到黃州翌日至使尹先發……〉 이하 78수는 사신 갈 때의 작품이다.
권3은 七言律詩(99), 七言排律(7), 七言古詩(12)이다. 칠언 율시의 〈雪水煎茶〉 이하 11수는 月課로 지은 것이며, 〈敬次留相韻〉, 〈鄙生之出貳松都也……〉 등은 開城 經歷이 되어 留守 徐渻 등과 교류하면서 지었으며, 〈謹次大谷成先生四韻詩……〉는 인조반정 이후 은거하고 있는 黃謹中에게 成運의 시를 차운하여 보낸 것이다. 칠언 고시의 〈謹呈雪樵令案兼示蓬壺〉는 使行 시에 石多山 앞 바다에서 尹安國과 鄭之羽를 위해 지은 것이다.
권4는 封事(6), 書(2), 行狀(1), 序(2), 雜著(2)이다. 봉사의 〈戊申陳弊疏〉는 白川 郡守로 있을 때 공정하게 賦稅를 내도록 貢法 개정을 청한 것이며, 〈丁卯斥和疏〉는 강화도에 호종할 때 講和論이 일자 올린 것이다. 행장은 부친 李天一의 것으로 뒷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序의 〈送呂僉知奉使日本〉은 임진왜란 후 呂祐吉이 일본으로 사신 가는 것을 송별하는 내용이다.
권5는 箋(12), 祭文(33)이다. 제문은 〈祭白川客舍上樑神文〉을 비롯하여 각처의 祈雨祭文과 愼榮門ㆍ崔有源 등의 제문과 사신 갈 때에 풍랑을 만나 지은 제문 등이 실려 있다.
권6은 부록으로 勅書(2), 朝天行蹟, 諭帖(1), 祭文(2), 備忘記와 1662년에 宋時烈이 지은 行狀, 1788년에 5대손 李春老가 시호를 청하는 上言과 그와 관련된 吏曹 回啓 및 筵說, 黃景源ㆍ徐有隣이 지은 諡狀과 諡宴 때에 李敏輔ㆍ鄭櫶ㆍ李弘稷 등이 지은 시 5題가 있다.
권미에 6대손 李鍰, 李錫, 李鎤이 1820년에 지은 跋이 있으며, 끝 부분에 刊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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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집(松坡集)  ㅡ 이서우 (李瑞雨) 

  ㅡ 일부 복사

   권1~10은 詩이다. 시는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在所에 따라 묶어 편차하였는데, 모두 2,30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 권1의 〈閱古篆〉, 〈復次〉 등의 시를 통해 저자가 젊어서부터 篆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晝錦堂〉부터 〈竹樓〉까지는 課製로 지은 것이고, 〈避暑紙署示李夏卿〉부터 〈夜坐賞月分韻得淸字〉까지 17수는 紙署에 있으면서 李夏鎭과 酬唱한 작품이다. 挽詩는 兪柲, 申儀華, 柳命全 등에 대한 것이다. 권2의 〈驛樓〉부터 〈曲松詩次韻〉까지 37수는 1668년 처음 벼슬하여 成歡 察訪으로 있을 때 지은 작품들이고, 〈送鄭士希〉부터 〈送族人南還〉까지의 36수는 1669년 高山 察訪으로 있을 때 지은 작품들이다. 〈國島〉부터 〈贈豐悅上人〉까지의 37수는 1670년 고산 찰방에서 해직되어 서울로 돌아올 때 金剛山을 유람하고서 지은 記行詩이다. 〈普德新殿成 …… 願得僉尊指敎云爾〉, 〈香山僧道安 …… 用識佳尙之意〉 등은 1673년 龍岡 縣令으로 재직할 때 지은 작품이다. 이 중에는 〈佳人答問煎茶興〉 등 課製로 지은 시들이 다수 실려 있으며, 沈光洙, 吳挺一, 福寧君 李栯, 李絿, 閔弘道, 李德夏, 李景賢, 李知白, 鄭之虎, 魚震說 등에 대한 만시도 실려 있다. 권3은 丙辰燕行錄으로 152제가 실려 있는데, 1676년 書狀官으로 燕京에 다녀온 旅程 중의 견문을 읊거나 다른 이들과 酬唱하여 지은 작품들이다. 권4의 〈戲拈朱筆題句〉부터 〈十月望後燈下答鄕書有感〉까지 11수는 1677년 淸州 牧使를 지낼 때 지은 작품이고, 〈戊午秋 …… 唱和以識之〉부터 〈贈趙生〉까지 6수는 1678년 東萊에 敬差官으로 내려갔을 때 지은 작품이다. 〈官齋雜咏〉부터 〈大雪〉까지 23수는 1679년 東萊 府使로 있을 때 지은 작품들인데, 이 중 〈玉屛臺〉는 당시 사람들이 ‘東臺’라고 일컫던 누대를 보고 그 경치가 뛰어나므로 이를 ‘옥병대’라 개칭하고 읊은 시이다. 〈初到配所〉부터 권5 끝의 〈二月九日伏聞恩赦〉까지는 庚申換局으로 富寧에 유배된 1680년부터 석방된 1683년까지 4년 동안의 유배지 생활 중에 지은 작품들로, 주로 평소 교유하던 친구들과 수창하거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변화된 처지에 대한 우울함 등이 묻어나는 시를 썼다. 특히 소동파의 〈赤壁賦〉를 集字하여 지은 40수의 시를 통해 이러한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유배지라는 특성상 그곳의 풍토, 생활방식, 경물 등을 소재로 한 시들도 많다. 이 중 〈淸簟疎簾看奕棊〉부터 〈君家有綺樹〉까지의 7수는 代課한 것이다. 挽詩는 李敏政, 趙威明, 許穆 등에 대한 것이다. 권6의 작품들은 다시 복직되기까지 松坡에 칩거하던 시절에 지은 것으로, 친우들과 수창하거나 李袤ㆍ安如岳ㆍ慶㝡ㆍ李增ㆍ鄭錀ㆍ朴信圭ㆍ鄭洙賢ㆍ李元祿ㆍ權大載ㆍ尹義濟ㆍ姜碩耈 등에 대한 挽詩가 많고, 경물을 읊은 시나 詠物詩가 대부분이다. 이 중 〈長樂宮〉부터 〈方臯相馬〉까지의 9수와 〈龍池聞鸎〉부터 〈百子殿〉까지의 5수는 課作이다. 권7의 〈金城客舍次疎菴白洲韻〉부터 〈挽盧摠戎使〉까지 53수는 1690년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지은 작품이고, 〈周侍御買劍〉부터 〈驚秋〉까지의 35수는 해직되어 한가롭게 지낼 때에 지은 것으로, 唐詩의 近體詩에 차운한 작품이다. 이 시기 저자는 서울에 머물면서 주변 인사들에게 의례적인 送別詩와 挽詩를 주로 써주었는데 그 분량이 상당하다. 만시는 李宇鼎, 鄭樸, 晉善君 姜碩賓, 李沆, 柳以升, 權儔, 鄭洙碩, 盧鎤, 朴興文, 兪夏謙, 趙德純, 姜琛, 閔宗道, 南益熏, 朴鎭圭 등에 대한 것이고, 송별시는 安如石, 李震殷, 金文夏, 趙九輅, 沈枋, 金元燮, 權歆 등을 위한 것이다. 〈竹山次屛風韻〉부터 〈罷歸途中作〉까지의 35수는 1693년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 지은 작품으로 대부분 海印寺, 山陰, 晉陽, 河東, 咸安, 金海, 慶州, 月城 등 주변 지역을 다니며 지은 것이다. 이 중 〈與邑宰數人論民弊〉는 養楮ㆍ禁松ㆍ迎燈의 세 가지 민폐를 지적하여 고발한 시이다. 권8~10은 벼슬에서 물러나 과천 청계산 아래에서 여생을 마칠 때까지 지은 작품들로 특히 吳尙濂, 蔡彭胤, 李瀷, 金履萬, 李濈, 李井休, 權斗經 등 젊은 文士들이 방문하여 시를 배우는 과정에서 지은 次韻詩가 많다. 이때 저자를 방문해 사사받고 교유한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남인 문단의 宗匠으로서의 저자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지어진 만시는 宗兄인 李興雨, 洪萬遂, 權歆, 金聲大, 蓮塘 李媼, 吳始大, 金正夏, 金鼎台, 趙渭叟, 朴以文, 權大運, 兪夏益, 禹鼎來, 鄭重泰, 兪世重, 李東標, 呂聖擧, 韓後望, 鄭漢柱, 李聃命, 南尙熏, 尹以濟, 申㶅, 睦林奇, 朴世雄, 朴緻, 洪柱震, 柳命天, 金聲久, 睦來善, 李玄逸, 權愈, 李象賢, 李琩, 韓世弼, 柳命堅, 姜碩臣, 洪時疇, 李遂大, 李蓍晩, 韓命相, 李震休 등에 대한 것이다.  ㅡ 하략

ⓒ 한국고전번역원 | 서인숙(徐仁淑) | 2010





  ***  고전번역서 서지정보  (24)

 
(국역) 간이집 03 : 簡易集   ㅡ 최립 (崔岦 , 1539 ~ 1612) 저,  역자 이상현 (李相鉉 , 1950 ~ ) 권7~9




다부 : 茶賦 /   寒齋集  ㅡ  이목 (李穆 , 1471 ~ 1498) 저   역자 :  정영선 (鄭英善 , 1950 ~ )


제2부『다부(茶賦)』역해



다옥에 손님 오니 연기가 피어나네 : 紫霞先生詩集 


      / 警修堂全藁 ㅡ 신위 (申緯 , 1769 ~ 1845) 저,  자 : 권경열 (權敬烈 , 1968 ~ )  



[1] 졸음이 와서 睡醉自題-13
  • [2] 용척차를 끓이며 伊川人贈石銚 伊川人贈石銚 汲方斗泉 煮龍脊茶餠 有作-14
  • [3] 오난설에게 드림 寄謝吳蘭雪-15
  • [4] 붓 가는대로 雜題-16
  • [5] 초의가 준 보림차에 감사하며 艸衣次余贈錦舲詩韻 甚佳 故更用原韻 賦詩 詩艸衣爲其師玩虎大師建三如塔 乞銘詩於海居都尉 乞序文於余 而遺以四茶餠 卽其手製 所謂寶林白芽也 詩中幷及之-17
  • [6] 한보정 閑步亭-19
  • [7] 아침에 起-20
  • [8] 생활 속에서 居-21
  • [9] 지는 매화 (1) 落梅-22
  • [10] 졸리는 중에 眠-23
  • [11] 차를 끓이며 汲江煎茶用坡公試院煎茶韻-24
  • [12] 전학사 (錢學士)에게 翠微副使歸示錢金粟學士林近軆雜詩有論詩絶句又有題余懷人詩後二絶句故各用其意以竢冬使附寄金粟爲謝-26
  • [13] 숙직을 서며 西省直廬每申刻與秋史談藝至夜分得詩凡四首 其二-27
  • [14] 옥천사에서 次韻固城令玉泉寺-28
  • [15] 옥중전다 (1) 獄中煎茶 二絶句-29
  • [16] 옥중전다 (2) 獄中煎茶 二絶句-30
  • [17] 동자에게 贈童-31
  • [18] 바위틈 샘물을 길어다 汲南山石間泉煎茶茶味逈勝於井水-32
  • [19] 지는 매화 (2) 落梅-33
  • [20] 권진사를 애도하며 (1) 哭權米山進士永佐絶句 其一-34
  • [21] 권진사를 애도하며 (2) 哭權米山進士永佐絶句 其二-35
  • [22] 성주암 聖住菴-36
  • [23] 눈 오는 날에 再用禁體韻-37
  • [24] 비둘기 村鳩-38
  • [25] 답장 次韻答聖臨見寄-39
  • [26] 가을 느낌 秋懷-40
  • [27]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本月初二日 恭遇恩敍特授諫長家書先到故吟成四韻二首 其一-41
  • [28] 낙엽 園林葉-42
  • [29] 친구들을 그리며 肅命之翌日訪故雨蕉篠飮二侍郞宅始爲寢門之哭有作 五首-43
  • [30] 숭양주 생각에 余嗜飮崧陽紅穀桂露之和糖屑者非此不飮故崧陽人士必携而繼之近因士人之稀闊之酒悵然題此-44
  • [31] 남의 운을 따라서 次韻黃山尙書-45
  • [32] 발길이 닿는대로 散跡-46
  • [33] 초의선사에게 艸衣茶味太嫩故與舊所藏壑源茶知勻同貯一籠更俟陳新相入而用之也又成一詩將以示艸衣也-47
  • [34] 동쪽 우물물 (1) 東井水-48
  • [35] 동쪽 우물물 (2) 東井水-49
  • [36] 취해서 醉吟-50
  • [37] 구월 구일에 重陽日-51
  • [38] 술과 생강을 받고서 金馬졸鄭季鴻見餉酒壜嫩薑-52
  • [39] 반씨네 집에서 潘家莊-53
  • [40] 매화차를 마시며 啜梅-54
  • [41] 연초에 친구에게 歲初 送酒李東樊以詩要和-55
  • [42] 밤에 閏月中旬夜 卽事-56
  • [43] 뜰을 거닐며 碧蘆舫前庭 散步-57
  • [44] 찻잔을 선물 받고 謝人惠茶盃-58
  • [45] 친구를 보내며 送別徐稚嘉-59
  • [46] 그림에 시를 쓰며 (1) 戱用古人五六言詩意演成七絶自題畵四首 其一-60
  • [47] 그림에 시를 쓰며 (2) 戱用古人五六言詩意演成七絶自題畵四首 其二-61
  • [48] 칠석 七夕-62
  • [49] 벼슬아치가 쫓겨 가는 꿈을 꾸고서 夢一鉅公因一罣誤放歸田里以要余別語且乞余園中泉一罈覺而記之-63
  • [50] 눈 녹여 차 끓이며 早春煮雪點茶偶讀東坡病中大雪答趙薦詩遂次其韻-64
  • [51] 냉천정에서 冷泉亭-66
  • [52] 양수하에 이르러 東關驛至凉水河作-67
  • [53] 상아 다반 象牙茶盤-68
  • [54] 잠에서 깨어 晝寢夢遊仙扃得句云綠陰如水鶯聲滑芳草和煙燕影消覺來足成一詩-69
  • [55] 두실태사에게 斗室太史以書相邀曰兄不欲一吊我耶時斗室連哭二子此語絶可悲遂成短律奉贈-70
  • [56] 초의 스님에게 답하는 글 代書答艸衣師-71
  • [57] 섣달 그믐날에 壬寅除夕-72
  • 역주·해설
  • [1] 졸음이 와서 睡醉自題-75
  • [2] 용척차를 끓이며 伊川人贈石銚 伊川人贈石銚 汲方斗泉 煮龍脊茶餠 有作-77
  • [3] 오난설에게 드림 寄謝吳蘭雪-80
  • [4] 붓 가는대로 雜題-82
  • [5] 초의가 준 보림차에 감사하며 艸衣次余贈錦舲詩韻 甚佳 故更用原韻 賦詩 詩艸衣爲其師玩虎大師建三如塔 乞銘詩於海居都尉 乞序文於余 而遺以四茶餠 卽其手製 所謂寶林白芽也 詩中幷及之-83
  • [6] 한보정 閑步亭-86
  • [7] 아침에 起-88
  • [8] 생활 속에서 居-90
  • [9] 지는 매화 (1) 落梅-92
  • [10] 졸리는 중에 眠-94
  • [11] 차를 끓이며 汲江煎茶用坡公試院煎茶韻-95
  • [12] 전학사 (錢學士)에게 翠微副使歸示錢金粟學士林近軆雜詩有論詩絶句又有題余懷人詩後二絶句故各用其意以竢冬使附寄金粟爲謝-100
  • [13] 숙직을 서며 西省直廬每申刻與秋史談藝至夜分得詩凡四首 其二-102
  • [14] 옥천사에서 次韻固城令玉泉寺-104
  • [15] 옥중전다 (1) 獄中煎茶 二絶句-106
  • [16] 옥중전다 (2) 獄中煎茶 二絶句-107
  • [17] 동자에게 贈童-109
  • [18] 바위틈 샘물을 길어다 汲南山石間泉煎茶茶味逈勝於井水-110
  • [19] 지는 매화 (2) 落梅-113
  • [20] 권진사를 애도하며 (1) 哭權米山進士永佐絶句 其一-116
  • [21] 권진사를 애도하며 (2) 哭權米山進士永佐絶句 其二-118
  • [22] 성주암 聖住菴-120
  • [23] 눈 오는 날에 再用禁體韻-122
  • [24] 비둘기 村鳩-124
  • [25] 답장 次韻答聖臨見寄-127
  • [26] 가을 느낌 秋懷-130
  • [27]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本月初二日 恭遇恩敍特授諫長家書先到故吟成四韻二首 其一-132
  • [28] 낙엽 園林葉-135
  • [29] 친구들을 그리며 肅命之翌日訪故雨蕉篠飮二侍郞宅始爲寢門之哭有作 五首-137
  • [30] 숭양주 생각에 余嗜飮崧陽紅穀桂露之和糖屑者非此不飮故崧陽人士必携而繼之近因士人之稀闊之酒悵然題此-140
  • [31] 남의 운을 따라서 次韻黃山尙書-142
  • [32] 발길이 닿는대로 散跡-145
  • [33] 초의선사에게 艸衣茶味太嫩故與舊所藏壑源茶知勻同貯一籠更俟陳新相入而用之也又成一詩將以示艸衣也-147
  • [34] 동쪽 우물물 (1) 東井水-150
  • [35] 동쪽 우물물 (2) 東井水-153
  • [36] 취해서 醉吟-155
  • [37] 구월 구일에 重陽日-157
  • [38] 술과 생강을 받고서 金馬졸鄭季鴻見餉酒壜嫩薑-159
  • [39] 반씨네 집에서 潘家莊-162
  • [40] 매화차를 마시며 啜梅-164
  • [41] 연초에 친구에게 歲初 送酒李東樊以詩要和-165
  • [42] 밤에 閏月中旬夜 卽事-167
  • [43] 뜰을 거닐며 碧蘆舫前庭 散步-169
  • [44] 찻잔을 선물 받고 謝人惠茶盃-171
  • [45] 친구를 보내며 送別徐稚嘉-173
  • [46] 그림에 시를 쓰며 (1) 戱用古人五六言詩意演成七絶自題畵四首 其一-175
  • [47] 그림에 시를 쓰며 (2) 戱用古人五六言詩意演成七絶自題畵四首 其二-177
  • [48] 칠석 七夕-179
  • [49] 벼슬아치가 쫓겨 가는 꿈을 꾸고서 夢一鉅公因一罣誤放歸田里以要余別語且乞余園中泉一罈覺而記之-181
  • [50] 눈 녹여 차 끓이며 早春煮雪點茶偶讀東坡病中大雪答趙薦詩遂次其韻-183
  • [51] 냉천정에서 冷泉亭-191
  • [52] 양수하에 이르러 東關驛至凉水河作-193
  • [53] 상아 다반 象牙茶盤-195
  • [54] 잠에서 깨어 晝寢夢遊仙扃得句云綠陰如水鶯聲滑芳草和煙燕影消覺來足成一詩-197
  • [55] 두실태사에게 斗室太史以書相邀曰兄不欲一吊我耶時斗室連哭二子此語絶可悲遂成短律奉贈-200
  • [56] 초의 스님에게 답하는 글 代書答艸衣師-205
  • [57] 섣달 그믐날에 壬寅除夕-208


  •   
    (국역) 동문선 10 : 東文選, 중판 / 東文選 ㅡ 서거정 (徐居正 , 1420 ~ 1488) 등 편 ,

       역자 : 양주동 (梁柱東 , 1903 ~ 1977 )  속 권1~5, 속 권10
                  김달진 (金達鎭 , 1907 ~ 1989 ) 속 권6~9





    서지정보

    동문선 10


    서명(국역) 동문선 10 : 東文選, 중판
    원서명東文選
    저/편자서거정 (徐居正 , 1420 ~ 1488) 등 편
    저작시기15 세기
    분류사항집부(集部) 총집류(總集類)
    번역대본이 책의 국역 대본은 동문선 정ㆍ속편 합본인 필서체자 목판본(筆書體字木板本)의 영인본(影印本: 慶熙出版社刊, 1966)과 조선고서간행회본(朝鮮古書刊行會本)을 대본으로 함
    원문판수
    항x자
    역자양주동 (梁柱東 , 1903 ~ 1977 ) 속 권1~5, 속 권10
    김달진 (金達鎭 , 1907 ~ 1989 ) 속 권6~9
    교열성낙훈 (成樂熏)
    윤문
    해제작성
    색인/탈초작성
    번역주관기관한국고전번역원
    발행지서울
    발행처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발행년도1984
    초판발행년도1969
    형태사항958 p. ; 22 ㎝
    ISBN
    총서사항고전국역총서 ; 034
    번역형태완역
    원문수록방식권말 조판 수록
    판형국판 (206×148)
    번역문형태한자병기
    번역서본문(면)715
    원문(면)204
    주석(개)1,402
    기타

    국역 동문선, 재판

    발행 및 형태서울 : 민족문화추진회, 1982~1986 / 12책(색인포함)
    저자정보徐居正(1420~1488) 편
    역자정보梁大淵, 李翼成(1917~1986), 李???衡(1931~), 李英茂(1922~), 權泰益, 梁柱東(1903~1977), 辛鎬烈(1914~1993), 金達鎭(1907~1989), 李植(1905~), 李載浩(1920~), 曺圭喆(1911~1982), 李家源(1917~2000), 任昌淳(1914~1999), 河性在, 南晩星(1905~), 金龍國(1910~), 金益鉉(1966~), 任昌宰(1959~)

       《國譯 東文選》이 책은 삼국시대 후반부터 조선시대 중종대까지의 시인·문사들의 작품을 선별해서 편집한 시문선집을 국역한 것이다. 《東文選》은 조선시대 성종의 명으로 1478년(성종 9)에 133권 45책의 을해자 활자본으로 간행 하였는데, 이 책의 간행엔 당시 대제학이던 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盧思愼·姜希孟·梁誠之 등을 포함한 纂集官 23인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 책 이외에 申用漑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과 宋相琦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 등 세 가지가 있는데,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동문선》은 신라의 金仁問·薛聰·崔致遠을 비롯해서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약 500여명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단 하나의 작품으로 등장한 작가도 220여명에 이른다. 서거정은 서문에서 우리나라 역대의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글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 한문학 전통에 의한 대표적 문예집으로서 한국 문학 발전에 큰 자취를 남겼으며, 작품자체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이 간행된 이후 1713년(숙종 39)까지 9회에 걸쳐 飜刻된 것을 보더라도 이 책이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서 계속 애독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辭·賦·詩·詔勅·敎書·制誥·冊文·批答·表箋·啓·狀·露布·檄書·箴·銘·頌·贊·奏議·箚子·잡문·書牘·記·序·說·論·傳·跋·致語·辯·對·志·原·牒·議·잡저·策題·상량문·제문·축문·疏文·道場文·齋詞·靑詞·哀詞·행장·碑銘·墓誌 등 다양한 문체를 망라하여 많은 작품을 수록하였다. 문체의 종류도 55종에 걸쳐 있어 중국 《文選》39종보다도 많다. 더욱이 단 1편의 작품만 있는 露布와 같은 것도 있어서 당시로서 자료 여건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다량을 선취하려고 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당시 문헌의 인멸로 그들 작품의 전부가 전해지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우리 문학의 저변이 확대되었다고 인식하여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부분이 지배층에 관련된 의례나 의식이 반영된 글들이어서 사회 일부 계층을 위한 것이라는 것과 당시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館閣的 문학관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초까지 우리나라의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집대성하였다는 의의와 함께 한국의 문학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분리된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특히 신라·고려 시대의 기록과 도교·불교 관계 자료도 기록되어 그 다양성과 함께 풍부한 내용이 주자학 일색의 문장인 조선 후기의 여타 선집보다 월등하다. 국역본의 저본은 1966년 경희출판사간행 영인본과 7책본인 조선고서간행회본을 사용하여 제 1~11책으로 국역하고 12책은 색인으로 간행하였다. 주석은 각주와 간주를 병행하였으며 탈초한 원문은 각 국역서의 끝부분에 실었다. 이왕무(李旺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