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

2018. 3. 15. 01:58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





고산유고 제6권 상 별집 / 시(詩)


가구가 수레보다도 적은 사람〔家具小於車〕

[DCI]ITKC_BT_0332A_0080_010_0070_2016_004_XML DCI복사 URL복사 




사람들 모두 문을 처닫고 집에서 편히 쉬는데 / 人皆重閉奠厥居
그대는 홀로 집도 없이 괴롭게 떠돌아다니고 / 子獨無家遷徙勦
사람들 모두 수레 만들어 육지 어디고 다니는데 / 人皆伐輪任行陸
그대는 홀로 닭장 같은 조그만 수레를 빌리는가 / 子獨借人鷄棲小
집 없이 수레 빌리는 것도 가련타고 할 것인데 / 無家借車尙可憐
수레 짐칸도 못 채우는 가구를 싣고 다니다니 / 況是載未盈箱家具了
천지가 유독 인색하게 굴었던 그 사람은 누구인가 / 乾坤偏慳彼何人
곤궁하면서도 눈동자 또렷했던 맹교(孟郊)였더라오 / 有窮者郊瞳子瞭
그대는 만로에서 내려 만승천자에 유세하여 / 君不能遊說萬乘脫輓輅
운대의 의표(儀表)로 당당하게 수레 소리 울리지도 못하였고 / 奄乘檻檻雲臺表
장검을 쥐고 서쪽으로 오랑캐를 치면서 / 又不能提携長劍西擊胡
많은 수레 이끌고 깃발을 선명히 하지도 못하였네 / 彭彭上建央央旐
그대는 산택의 구유가 부자의 딸을 구한 대로 / 君不學山澤癯儒求富女
푸른 깁 창 너머에서 금심으로 유혹하지도 못하였고
/ 綠紗窓外琴心挑
사마자장이 말한 다섯 번째 법술(法術)대로 / 又不學司馬子長五之術
관시에 복고하며 소를 민첩하게 끌지도 못하였네
/ 服賈關市牽牛肇
다만 문자를 집어삼켜 배 속을 잔뜩 채우고 / 但將文字拄腹復撑腸
〈함지〉 음악 묵요하게 목과 입술로 읊었나니 / 喉吻咸池音默窅
노새 타고 서울 가서 훈풍의 금곡(琴曲)에 화답하려 했으나 / 騎驢京國欲和薰風琴
대궐 문은 하늘 같이 아득히 오색 채운(彩雲) 속에 있었다네
/ 君門如天五雲杳
한 문자도 굶주림을 구해 주지 못하는데 / 一字不救飢
바다를 휘모는 문장인들 어디에 쓰리오 / 安用捲海詞
영문도 모른 채 만물이 횡포에 시달리자 / 源淼萬類困凌暴
뇌공이 하늘에 쌍조를 고자질했다나요
/ 雷公向天訐雙鳥
취허를 해도 노호를 뚫지도 못한 채 / 吹噓未見射魯縞
비바람 치는 영대에서 시름에 잠기기만 / 風雨靈臺愁緖繞
소금과 낙엽에 나그네 회포 느꺼워서 / 巢禽落葉感客懷
해 질 녘 아득히 동남쪽으로 머리 돌리네
/ 日暮回首東南渺
계수나무 장작에 진주 같은 쌀알이라 / 薪爲桂兮米如珠
간난신고가 연래에 참으로 여뀌 씹는 듯 / 辛苦年來眞食蓼
살림살이는 호미로 김맨 듯 썰렁하니 / 嗟哉活計似鋤剗
슬픈 얼굴로 청주 술잔 또 쥘 수 있으리오 / 慼容能復持淸醥
문원의 사벽을 빈궁하다 칭함은 잘못이요 / 文園四壁誤稱窶
옥천의 몇 칸 집 역시 작은 것이 아니거늘 / 玉川數間非爲少
집 빌리며 내 재산 가지고 따라가게 꾀한다면 / 賃屋仍謀我賄遷
사람들 입방아 찧으며 웃게 할 재료 제공하리
/ 供笑人家談舌掉
과하도 북린에서 저녁에 이미 빌렸지만 / 胯下已借北隣夕
녹두도 동린에서 새벽에 또 청했다던가 / 鹿頭又乞東隣曉
수재할까 두려우니 그대 바퀴살에 덧대고 / 員于爾輻恐輸載
양쪽 굴대 빗장도 빙 둘러 기름칠해야겠지 / 兩舝復用脂膏遶
이에 하인에게 가재도구 옮기게 하니 / 於焉戒僕輸家資
육요는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오귀일 뿐 / 惟有五鬼無六擾
먼저 먼지 이는 못 쓰는 화덕 같은 시루를 가져오고 / 先取生塵之甑若故竈
다음에 물고기 노니는 웅덩이 같은 가마솥을 내오네
/ 次出生魚之釜如廢沼
메추라기 매단 듯 백번 기운 솜옷이요 / 百結縕袍鶉倒毛
거북등 갈라지듯 남루한 겨울 갖옷이라 / 褸裂冬裘龜坼兆
술병은 율리처럼 완전히 비어 있고 / 甁如栗里已全空
바가지는 누항에 비해 반쯤 그을렸네 / 瓢比陋巷仍半燎
왕장의 덕석이라 할까 / 王章牛衣
손신의 짚 다발이라 할까 / 孫晨臥藁
진평의 거적문이라 할까 / 陳平門席
점검하노라니 사람의 안색 슬프게 하네 / 點檢令人顏色愀
있는 대로 끌어모아 줄 세워 모두 실어도 / 攢聚縱橫羅列而幷載兮
태창의 제미처럼 아직도 형편없다 할까 / 尙如太倉稊米眇
나뭇가지 끝에 둥지를 튼 뱁새라고 할까 / 又如鷦鷯棲木杪
수레는 짐이 가볍고 말은 수레가 가벼워서 / 車輕爾載馬輕車
관단이 길을 밟는 것이 요뇨와 같은지라 / 款段蹋路同騕褭
아이들이 길을 막고 일제히 손뼉을 치니 / 小兒攔街齊拍手
시옹의 시름겨운 마음 그 누가 알아주랴 / 誰念詩翁憂悄悄
듣건대 소인은 곤궁하면 못하는 짓이 없이 / 曾聞小人窮斯濫
담쟁이덩굴처럼 아무 데나 빌붙는다는데 / 附不擇所如蘿蔦
공이 이런 생활 감수함은 미조가 부끄러워서이니 / 我公甘此恥媚竈
고아한 지조 맑은 의표를 누가 이을 수 있으리오 / 雅操淸標誰得紹
다만 유감은 옛날 용모로 공경 사이에 노닐며 / 只恨古貌遊公卿
홍진 세상에 미련을 두고 경교하지 못한 채 / 尙戀紅塵失輕矯
다시 원한 맺힌 심정을 시율 속에 집어넣어 / 還將惋恨入詩律
고어가 천추토록 서책을 비치게 한 것이라 / 苦語千秋照緗縹
어찌하여 쟁기 싣고 전원에 돌아가서 / 何不載耒歸田園
삿갓 펄럭이며 호미로 김매지 않으시나 / 其笠伊糾其鎛趙
저지대 수레 가득 배 두드려 노래하면 / 汚邪滿車鼓腹歌
백승의 소찬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 百乘素餐眞可藐


[주-D001] 사람들 …… 쉬는데 : 
   춘추 시대 거자(莒子)가 궁벽한 자기 나라를 누가 탐내어 공격하겠느냐고 하자, 신공무신(申公巫臣)“용감한 사나이도 자기 집 문을 굳게 처닫고 지키는 법인데, 하물며 나라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勇夫重閉 況國乎〕”라고 충고한 기록이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8년에 나온다. 또 《서경》 〈반경 하(盤庚下)〉 “반경이 도읍을 옮기고 나서는 백성들에게 살 곳을 정하여 편하게 해 주었다.〔盤庚旣遷 奠厥攸居〕”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 곤궁하면서도 …… 맹교(孟郊)였더라오 : 
   한유(韓愈)가 자기의 절친한 벗인 맹교를 추천한 시에 “곤궁하게 지내는 시인 맹교가 있는데, 그는 재주를 품부받은 것이 실로 웅건해서, 말없는 가운데 고금의 일을 환히 살피고, 이 세상 밖에서 남은 모르는 기호(嗜好)를 좇고 있다.〔有窮者孟郊 受材實雄驁 冥觀洞古今 象外逐幽好〕”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2 薦士》 한유가 이와 같이 당 덕종(唐德宗) 정원(貞元) 11년(795)에 하남 윤(河南尹)으로 있던 정여경(鄭餘慶)에게 맹교를 추천한 덕분에 맹교가 그래도 율양(溧陽)의 위(尉)라는 자리에 부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맹자》 〈이루 상(離婁上)〉 “사람에게 있는 것 가운데 눈동자보다 진실한 것이 없으니, 눈동자는 그 악을 감추지 못한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또렷하고 가슴속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릿하니,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고 그 눈동자를 살펴본다면 어떻게 실정을 속일 수 있겠는가.〔存乎人者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則眸子瞭焉 胸中不正則眸子眊焉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 만로(輓輅) : 
    두 사람이 앞에서 끌고 한 사람이 뒤에서 미는 작은 수레를 말한다. 한 고제(漢高帝) 5년(기원전 202)에 누경(婁敬)이 수자리 살기 위해 농서(隴西)로 가던 도중에 낙양(洛陽)을 지나갔는데, 마침 그곳에 고제가 머물고 있었다. 이에 누경이 타고 가던 만로에서 내려, 양가죽 옷을 입은 채 제(齊)나라 출신인 우 장군(虞將軍)을 만나 “폐하를 알현하고 국가에 유익한 일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다.〔臣願見上言便事〕”라고 하여 고제를 만나 유세한 끝에 공신(功臣)으로 대우받으며 유씨(劉氏) 성을 하사받고 출세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9 劉敬叔孫通列傳》
[주-D004] 운대(雲臺) : 
명제(後漢明帝) 때 등우(鄧禹) 등 전대(前代)의 명장 28인의 초상화를 그려서 걸어 놓고 추모한 공신각(功臣閣)의 이름이다.
[주-D005] 장검(長劍)을 …… 치면서 : 
   당나라 왕한(王翰)“기린전 앞에서 천자에게 절을 하고, 말을 달려 임금 위해 서쪽으로 오랑캐를 치네.〔麒麟殿前拜天子 走馬爲君西擊胡〕”라는 말과 북송(北宋) 형거실(邢居實)“그대는 장검 쥐고 영무(靈武) 땅을 취한 뒤에, 용사를 지휘해서 비호(貔虎)를 몰아내지 않고, 어찌하여 양ㆍ송의 먼지를 발로 밟으면서, 종일토록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하는가.〔君不能提携長劍取靈武 指揮猛士驅貔虎 胡爲脚踏梁宋塵 終日飄飄無定所〕”라는 말을 발췌하여 인용한 것이다. 《唐詩品彙 卷25 飮馬長城窟行》 《宋藝圃集 卷15 李伯時畫圖》
[주-D006] 많은 …… 못하였네 : 
   《시경》 〈출거(出車)〉“왕이 남중(南仲)에게 명하되, 삭방(朔方)에 가서 성을 쌓게 하니, 수레를 낸 것이 많고 많으며, 깃발이 선명하기도 하도다.〔王命南仲 往城于方 出車彭彭 旂旐央央〕”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7] 산택(山澤)의 …… 못하였고 : 
   구유(癯儒)는 삐쩍 마른 선비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돈 한 푼 없이 소갈증(消渴症)에 시달렸던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말한다. 금심(琴心)은 비파 연주를 통해서 애모하는 자기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사마상여가 임공(臨邛)의 부호(富豪)인 탁왕손(卓王孫)의 딸인 과부 탁문군(卓文君)을 금심으로 유혹하여 함께 성도(成都)로 야반도주(夜半逃走)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08] 사마자장(司馬子長)이 …… 못하였네 : 
   행상(行商)이라도 해서 부모님을 잘 봉양해드리지도 못하였다는 말이다. 자장사마천(司馬遷)의 자(字)이다. 그가 임안(任安)에게 보낸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몸을 닦는 것은 지(智)의 부절이요, 베풀기 좋아함은 인(仁)의 단서요, 주고받음을 잘함은 의(義)의 표상이요, 치욕을 부끄러워함은 용(勇)의 과감함이요, 입명(立名)하는 것은 행(行)의 극치이다. 선비는 이 다섯 가지를 지녀야만 세상에 몸을 붙일 수가 있고 군자의 대열에 끼일 수가 있는 것이다.〔修身者智之符也 愛施者仁之端也 取與者義之表也 恥辱者勇之決也 立名者行之極也 士有此五者 然後可以託於世 而列於君子之林矣〕”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다섯 번째로 거론한 입명이란 효(孝)의 마지막이라 할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준말로, 《효경(孝經)》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말을 압축한 것이다. 복고(服賈)는 행상을 말한다. 《서경》 〈주고(酒誥)〉“민첩하게 수레나 소를 끌고 멀리 나아가 장사함으로써 효성스럽게 자기 부모를 봉양한다.〔肇牽車牛 遠服賈 用孝養厥父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 다만 …… 채우고 : 
   소식의 시에 “문자 오천 권 집어삼켜 배 속을 잔뜩 채울 필요 없이, 다만 대낮에 한잠 푹 자고 차 한 사발 늘 마셨으면.〔不用撑腸拄腹文字五千卷 但願一甌常及睡足日高時〕”이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8 試院煎茶
[주-D010] 함지(咸池) …… 읊었나니 : 
   맹교(孟郊)의 시문이 고대 제왕의 음악처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말이다. 묵요(默窅)는 혼묵요명(昏默窅冥)의 준말로, 유미(幽微)하고 심오(深奧)한 것을 뜻한다. 요묵(窅默)이라고도 한다. 함지〉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지었다는 고대의 음악으로, 고아(古雅)한 악곡이나 시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예기》 〈악기(樂記)〉“함지는 갖추어졌다는 뜻이다.〔咸池備矣〕”라는 말이 나오는데, 후한 정현(鄭玄)의 주(註)에 “〈함지〉는 황제(黃帝)가 만든 음악 이름인데, 요(堯)가 증수(增修)하여 사용하였다. 함은 모두〔皆〕의 뜻이고, 지는 베푼다〔施〕는 뜻이니, 덕이 베풀어지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지락(至樂)〉에도 황제가 동정(洞庭)의 들판에서 〈함지〉라는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유(韓愈)가 〈맹생시(孟生詩)〉라는 제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지어서 자기 친구인 맹동야(孟東野) 즉 맹교(孟郊)의 시를 평하였는데, 거기에 “시 삼백 수를 지었나니, 요묵한 함지의 음악이라.〔作詩三百首 窅黙咸池音〕”라는 표현이 보인다. 《韓昌黎集 卷5》
[주-D011] 노새 …… 있었다네 : 
한유(韓愈)의 〈맹생시(孟生詩)〉에 “노새 타고 서울에 가서, 훈풍의 금곡에 화답하려 했으나, 어찌 알았으랴 천자께서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 계시어, 문마다 백 명의 사나이가 지키면서,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을.〔騎驢到京國 欲和薰風琴 豈識天子居 九重鬱沈沈 一門百夫守 無籍不可尋〕”이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5》 훈풍(薰風)의 금곡(琴曲)은 덕정(德政)을 베푸는 성군(聖君)의 음악이라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남풍가(南風歌)〉를 지어 부르면서 “훈훈한 남쪽 바람이여, 우리 백성의 수심을 풀어 주기를. 제때에 부는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 주기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禮記 樂記》
[주-D012] 영문도 …… 고자질했다나요 : 
   한유(韓愈)의 〈쌍조시(雙鳥詩)〉에, 우레 귀신이 조물에게 고하기를 “두 마리 새가 우는 것을 그치게 하지 않는다면, 만물이 모두 시름겨워 할 것이요, 봄과 가을도 없어질 것이요, 해와 달도 정상적으로 운행하지 못할 것이요, 나라의 큰 정치도 홍범(洪範)의 구주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不停兩鳥鳴 百物皆生愁 不停兩鳥鳴 自此無春秋 不停兩鳥鳴 日月難旋輈 不停兩鳥鳴 大法失九疇〕”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두 마리 새에 대해서는 석가(釋迦)와 노자(老子),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혹은 한유 자신과 그의 벗인 맹교(孟郊)를 가리킨다는 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아무래도 한유와 맹교를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韓昌黎集 卷5》
[주-D013] 취허(吹噓)를 …… 채 : 
   한유가 맹교(孟郊)를 벼슬자리에 추천하는 등 애를 썼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취허는 입김을 불어넣어 준다는 뜻으로, 잘못은 덮어 주고 잘한 것은 추켜세우며 천거하는 것을 말한다. 노호(魯縞)는 옛날 노(魯)나라 땅 곡부(曲阜)에서 생산된 흰색의 비단으로, 촘촘하고 얇은 것으로 유명했다는데, 《사기(史記)》 권10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강한 활로 발사한 화살도 사정거리의 끝 부분에 가서는 노호를 뚫지도 못하고, 맹렬하게 부는 바람도 그 힘이 다하는 끝 부분에 가서는 기러기 털도 날리지 못한다.〔强弩之極 矢不能穿魯縞 衝風之末 力不能漂鴻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4] 비바람 …… 잠기기만 : 
   동한(東漢)의 제오힐(第五頡)이 낙양(洛陽)에 기거할 집이 없어 영대(靈臺)에서 기숙(寄宿)하면서 며칠 동안이나 불을 때지 못한 채 실의에 잠겼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後漢書 卷41 第五倫列傳》 한유의 시에도 “먼지 날리는 도성 거리의 봄이요, 비바람 치는 영대의 밤이었어라.〔塵埃紫陌春 風雨靈臺夜〕”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2 縣齋有懷》
[주-D015] 소금(巢禽)과 …… 돌리네 : 
   소금은 둥지로 돌아가는 새라는 뜻이다. 한유〈맹생시(孟生詩)〉 “아침에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를 보며 자기 신세를 슬퍼하고, 저녁에는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을 보며 고향에 돌아가고픈 생각에 잠긴다. …… 난초를 캐며 고향의 어버이가 못내 그리워서, 하염없이 동남쪽 하늘을 바라본다.〔朝悲辭樹葉 夕感歸巢禽 …… 採蘭起幽念 眇然望東南〕”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5》
[주-D016] 계수나무 …… 쌀알이라 : 
   도회지의 물가가 비싸서 생활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 “초나라의 곡식은 옥보다도 귀하고, 장작은 계수나무보다 비싸다.〔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라고 불평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주-D017] 살림살이는 …… 썰렁하니 : 
   한유(韓愈)의 시에 “꾀는 졸렬하여 날로 잎이 말라비틀어지듯 하고, 살림살이는 호미로 김맨 듯 남아 있는 것이 없네.〔謀拙日焦拳 活計似鋤剗〕”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4 崔十六少府攝伊陽 …… 》
[주-D018] 문원(文園)의 사벽(四壁) : 
   문원은 일찍이 효문원 영(孝文園令)을 지낸 한(漢)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그가 탁문군(卓文君)과 야반도주하여 성도(成都)에 살림을 차렸을 때, 집안에 살림살이가 하나 없이 사방에 벽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19] 옥천(玉川)의 몇 칸 집 : 
   옥천은 당(唐)나라 시인(詩人)으로 호가 옥천자(玉川子)인 노동(盧仝)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시에 “우리 옥천 선생은 낙양성 안에, 무너진 집 몇 칸뿐이라나요.〔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5 寄盧仝》
[주-D020] 집 …… 제공하리 : 
   집이라도 한 채 있어서 함께 살 여인을 구한다면, 그 여인이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집도 한 채 없이 빌려서 사는 주제에 수레만 가지고 와서 옮겨 가게 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는 말이다. 《시경》 〈맹(氓)〉“당신의 수레를 가지고 오세요, 내 재산을 싣고서 옮겨갈 테니까요.〔以爾車來 以我賄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1] 과하(胯下)도 …… 빌렸지만 : 
   한신(韓信)도 옛날에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수레를 빌려 탄 일이 있었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과하는 가랑이 밑이라는 뜻으로, 한나라 개국 공신으로서 삼걸(三傑)의 하나인 한신을 비유한 말인데, 그가 회음(淮陰) 땅에서 한 청년의 가랑이 밑을 엉금엉금 기어서 태연히 빠져나온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신이 제왕(齊王)이 되었을 적에 괴통(蒯通)이 찾아가서 유세하며 제위(帝位)에 오를 것을 역설하였으나, 한신이 유방의 여러 가지 은혜를 떠올리면서 “한왕(漢王)이 나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나를 자기 수레에 태워 주었고, 나에게 자기 옷을 입혀 주었고, 나에게 자기 밥을 먹여 주었다. 내가 듣건대, 남의 수레를 빌려 탄 자는 남의 근심을 같이 싣고 다니고,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자는 남의 걱정을 가슴에 품고, 남의 밥을 얻어먹은 자는 남의 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이익을 좇아 의리를 배반할 수가 있겠는가.〔漢王遇我甚厚 載我以其車 衣我以其衣 食我以其食 吾聞之 乘人之車者載人之患 衣人之衣者懷人之憂 食人之食者死人之事 吾豈可以鄕利倍義乎〕”라고 하고는 끝내 거절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22] 녹두(鹿頭)도 …… 청했다던가 : 
   앞으로 함께 살 여인에게 재산을 많이 가져오지 말고 조금만 가져오라고 간청했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녹두는 녹거(鹿車)의 앞머리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포선(鮑宣)이 자기 스승의 딸인 환소군(桓少君)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잣집에서 자라난 그의 처가 혼수품을 많이 장만해 오는 것을 보고는, “나는 실로 빈천해서, 그런 예를 감히 감당할 수가 없소.〔吾實貧賤 不敢當禮〕”라고 하면서 줄이도록 요청하자, 환소군이 그 말에 순종하여 시어(侍御)와 복식(服飾) 등을 모두 친정에 돌려보낸 뒤에 짧은 베옷〔布裳〕으로 갈아입고서 남편과 함께 녹거를 끌며 향리로 돌아온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4 列女列傳 鮑宣妻》 녹거는 사슴 한 마리를 겨우 실을 만한 수레라는 뜻으로, 소거(小車)와 같은 말이다.
[주-D023] 수재(輸載)할까 …… 덧대고 : 
   짐을 땅에 떨어뜨릴까 무서우니 떠나기 전에 완전하게 수레를 정비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수재는 수레의 짐을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을 말한다. 《시경》 〈정월(正月)〉“너의 보를 버리지 말고, 너의 바퀴살에 덧대고서, 너의 마부를 자주 돌아보면, 네 짐을 떨어뜨리지 않고, 마침내 아주 험한 데를 넘어가는 것이, 뜻밖에도 수월하게 이루어지리라.〔無棄爾輔 員于爾輻 屢顧爾僕 不輸爾載 終踰絶險 曾是不意〕”라는 말이 나온다. 보(輔)는 바퀴살을 보호하기 위해 바퀴의 양쪽 변죽에다 덧대어 묶어 두는 막대기로 덧방나무라고 한다.
[주-D024] 육요(六擾) : 
육축(六畜)과 같은 말로, 가축 일반을 가리킨다. 육축은 소, 말, 염소, 돼지, 개, 닭을 말한다.
[주-D025] 오귀(五鬼) : 
   한유(韓愈)〈송궁문(送窮文)〉에 나오는 오궁(五窮), 즉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종류의 궁귀(窮鬼)로서, 보통 액운(厄運)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26] 먼저 …… 내오네 :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에 범염(范冉)이 내무(萊蕪)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되어 가난하게 살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자, 사람들이 “범사운의 시루 속에서는 먼지만 풀풀 일어나고, 범 내무의 가마솥 속에서는 물고기가 뛰어논다.〔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라고 노래를 지어 불렀던 기록이 전한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冉》 사운(史雲)은 범염의 자(字)이다.
[주-D027] 메추라기 …… 솜옷이요 : 
   소식의 시에 “한(漢)나라 황제처럼 구슬 장식 수의(壽衣)와 옥으로 만든 관 속에 누워 만인의 전송을 받으며 북망산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메추라기를 매단 것처럼 일백 곳이나 꿰맨 옷을 입고서라도 홀로 앉아 아침 햇볕을 등에 쬐는 것이 그래도 낫다.〔珠襦玉匣萬人祖送歸北邙 不如懸鶉百結獨坐負朝陽〕”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4 薄薄酒》
[주-D028] 율리(栗里) :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살았던 마을 이름으로, 그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029] 누항(陋巷) : 
   판자촌이나 빈민굴처럼 누추한 동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안회(顔回)가 살던 마을을 가리킨다. 《논어》 〈옹야(雍也)〉“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칭찬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0] 왕장(王章)의 덕석 : 
   한(漢)나라 왕장이 출사(出仕)하기 전에 덮을 이불도 없을 정도로 집안이 가난해서, 큰 병에 걸렸는데도 우의(牛衣) 즉 덕석을 덮고 누워서 눈물을 흘리며 처자와 결별하다가, 처자로부터 나약하다고 배척을 당한 우의대읍(牛衣對泣)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6 王章傳》
[주-D031] 손신(孫晨)의 짚 다발 : 
   후한 손신의 집이 가난하여 “겨울에도 덮을 이불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면 짚 한 다발 속에 누워 자다가 아침에 거두었다.〔冬月無被 有藁一束 暮臥其中 旦收之〕”라는 고사가 전한다. 《三輔決錄 卷1》
[주-D032] 진평(陳平)의 거적문 : 
   한나라 진평이 소싯적에 가난해서 빈민가에 살았는데, 그 때 해진 거적으로 문을 쳤는데도, 문밖에 장자(長者)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는 석문궁항(席門窮巷)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6 陳丞相世家》
[주-D033] 태창(太倉)의 제미(稊米) : 
   작아서 보잘 것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태창은 서울에 있는 거대한 곡물 창고의 이름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중국이 해내 안에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좁쌀 한 알이 태창에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아니한가.〔計中國之在海內 不似稊米之在大倉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4] 나뭇가지 …… 뱁새 : 
장자》 〈소요유(逍遙遊)〉“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틀 때에도 하나의 나뭇가지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 관단(款段)이 …… 같은지라 : 
   조랑말이 신바람이 나서 천리마처럼 잘 달린다는 말이다. 관단은 성질이 본래 느려 빠져서 매우 천천히 걷는 말을 가리키고, 요뇨(騕褭)는 하루에 1만 리 혹은 5천 리를 치달린다는 고대(古代) 준마(駿馬)의 이름이다.
[주-D036] 소인(小人)은 …… 없이 : 
   논어》 〈위령공(衛靈公)〉“군자는 곤궁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태연히 처하는 데 반해, 소인은 곤궁하면 못할 짓 없이 멋대로 행동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7] 미조(媚竈) : 
   아궁이에 아첨한다는 뜻으로, 집권자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위(衛)나라의 실권자인 왕손가(王孫賈)“아랫목 귀신과 같은 왕에게 잘 보이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부엌 귀신처럼 실력이 있는 나에게 잘 보이라.〔與其媚於奧 寧媚於竈〕”라는 뜻으로 공자에게 말하자, 공자“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라고 대답한 내용이 《논어》 〈팔일(八佾)〉에 나온다.
[주-D038] 옛날 …… 노닐며 : 
   한유(韓愈)〈맹생시(孟生詩)〉“맹동야는 강해(江海)의 선비로서, 용모도 마음도 예스럽기만. 일찍이 옛사람의 글을 읽고서, 말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라고. …… 공경(公卿)들 사이에 왕래하며 노닐지만, 그에게는 관심도 보이려 하지 않나니, 참으로 헌면(軒冕)의 족속이 아닌지라, 응대해도 엉뚱하게 되기 일쑤라나요.〔孟生江海士 古貌又古心 嘗讀古人書 謂言古猶今 …… 朅來遊公卿 莫肯低華簪 諒非軒冕族 應對多差參〕”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5》
[주-D039] 홍진(紅塵) …… 채 : 
   경교(輕矯)는 속세의 일을 우습게 보고 세상 밖으로 초월하여 노니는 것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노부는 평생토록 득실(得失)을 똑같이 보면서도, 하찮은 관직에 미련을 두고 경교하지 못하노라.〔老夫平生齊得喪 尙戀微官失輕矯〕”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0 送杭州杜戚陳三掾罷官歸鄕》
[주-D040] 고어(苦語) : 
   맹교(孟郊)의 시어(詩語)가 고삽(苦澁)한 것을 말한다. “맹교는 시에 담고 있는 의리가 매우 깊어서 누구보다도 한유의 칭찬을 받았으나, 시사(詩思)가 고삽하였다.〔郊爲詩有理致 最爲愈所稱 然思苦奇澁〕”라는 기록이 전한다. 《新唐書 卷176 孟郊列傳》 또 소식(蘇軾)이 당나라 시인을 평하면서 “원진(元稹)은 경조부박하고 백거이(白居易)는 비천 저속하며, 맹교의 시는 한산(寒酸)하여 살풍경하고, 가도의 시는 살은 없이 뼈만 앙상하다.〔元輕白俗 郊寒島瘦〕”라고 논한 것이 있다. 《東坡全集 卷91 祭柳子玉文》
[주-D041] 삿갓 …… 않으시나 : 
《시경》 〈양사(良耜)〉“삿갓을 펄럭이며, 호미로 김을 매니, 잡초를 제거함이로다.〔其笠伊糾 其鎛斯趙 以薅荼蓼〕”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2] 저지대 …… 노래하면 : 
   크게 풍년이 들어서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며 태평가를 부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고지대 밭의 수확도 대바구니에 가득, 저지대 밭의 수확도 수레에 가득, 오곡이 모두 잘 여물어서, 집안에 가득 차게 해 주시기를.〔甌寠滿篝 汚邪滿車 五穀蕃熟 穰穰滿家〕”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 백승(百乘)의 소찬(素餐) : 
   하는 일 없이 녹봉만 축내는 벼슬아치라는 말이다. 백승은 병거(兵車) 100대를 낼 능력이 있는 자라는 뜻으로 대부(大夫)를 말하고, 소찬은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준말로 자격도 없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서 국록(國祿)을 축낸다는 말이다.





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

윤선도

동의어 약이, 約而, 고산, 孤山, 해옹, 海翁, 충헌, 忠憲 다른 표기 언어 尹善道
툴바 메뉴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출생 1587년
사망 1671년
경력 사부, 동부승지
유형 인물
관련 사건 인조반정, 병자호란
직업 문신, 문인
대표작 어부사시사, 고산선생유고,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성별
분야 문학/고전시가
본관 해남

요약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윤선도 종가 문적 중 산중신곡 오우가

≪고산유고≫ 권6에 수록되어 있는 1642년(인조 20)에 윤선도(1587∼1671)가 전라남도 해남의 금쇄동에서 지은 연시조 18수.

개설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아버지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윤유심(尹唯深: 윤선도묘비명에는 尹惟深)이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숙부 윤유기(尹唯幾: 윤선도묘비명에는 尹惟幾)에게 입양됐다.

생애 및 활동사항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 성균관 유생에게 시행하던 시험)에 1등을 했으며 향시(鄕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연이어 합격했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됐다. 그곳에서 「견회요(遣懷謠)」 5수와 「우후요(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인 1617년(광해군 9) 경상남도 기장(機張)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수됐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海南)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察訪)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됐다. 그 당시 법률로 왕의 사부(師傅)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형조정랑(刑曹正郞)·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5년간 역임했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禮曹正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星山)의 현감(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됐다.

그 뒤 해남에서 병자호란으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아름다운 섬인 보길도(甫吉島)에 은거하였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했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죄로 1638년(인조 16) 다시 경상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孝宗)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됐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 은거했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효종 8)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송시열(宋時烈)과 맞서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과 맞서다가 삼수에 유배됐다. 1667년(현종 8)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문집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의 세계관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상훈과 추모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고산유고기언고산연구』(이재수, 학문사, 1955)
  • 「윤선도의 자연관」(윤성근, 『문화비평』7·8, 1970)
  • 「윤고산론」(정병욱, 『월간문학』9, 1969)
  • 「고려말·이조초의 어부가」(이우성, 『성균관대학교논문집』9, 1964)
  • 「송강과 고산의 시경」(최진원, 『성균관대학교논문집』3,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