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에서 종박으로 / 한겨레신문 기사

2013. 8. 2. 21:26잡주머니

 

 

한겨레21][정치의 속살]박근혜 정권기 '친박'은 무엇으로 사는가

보스가 결정하면 무조건 따라가는 행태

'독립 헌법기관' 자부심 갖고 소신 펼치길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 시모어 립셋은 저서 < 정치적 인간 > 에서 "안정적인 민주주의는 갈등 또는 균열의 표출을 요구한다"고 썼다. 그는 선거 또한 '민주적으로 제도화된 계급투쟁'이라고 규정한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갈등의 사회화' 모델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에서 립셋의 '제도화된 갈등'과 그렇게 표출된 갈등의 '민주적 통합' 과정의 의미를 언급하며 "갈등의 부재는 곧 사회의 특정 집단이 공공의 집합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당 민주주의 차원에서도 이 모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최근 새누리당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김무성 의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비공개 회의에서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가 과연 옳은지 의문을 제기한 남경필 의원을 향해 김 의원은 호통을 쳤다. 그리고 지난 대선 과정에서 대화록을 봤다는 사실과, 그 대화록의 내용을 유세 도중에 발설한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김 의원의 발언이 보도되자 이번에는 발설자를 색출한다며 한바탕 사달이 났고, 그 당사자로 지목된 김재원 의원은 충성맹세나 다름없는 수준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김무성 의원을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회의, 내부 이견을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합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물론 여당이 행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 집권 초반기라는 측면도, 반대 의견을 용인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고집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 권력자의 의지는 곧 '절대선'이다. 이건 민주주의도, 정당도 아니다. 차라리 종교다.

    새누리당에 계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집권 기간 내내 "친이도, 친박도 없다"고 외쳤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바람은 박 대통령 당선 이후에야 이뤄졌다. 이재오 의원 등 일부 친이계 인사가 남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순도 100%의 '친박당'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다. '친박'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시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2007년 경선 당시에는 치열한 계파별 줄세우기의 준거점이었다. 당내 경선 승리가 곧 청와대 입성이던 시절이었다. 이명박 정권 탄생 이후에는 여권 내 '저항세력'의 의미를 일정하게 부여받기도 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정치인 박근혜의 비전, 정책, 공약, 철학에 동의하는 정치인들이 비교적 동등한 지위에서 하나의 세력을 유지하는 게 친박이라면 지금 새누리당의 모습은 친박도 아니다. 보스가 결정하면 무조건 따라가는 행태는 친박이 아닌 종박이나 마찬가지다"라고 꼬집었다.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저서 <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에서 보수 진영이 반대 진영을 공격해온 논리적·수사적 공격의 틀을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 등 세 갈래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프랑스혁명부터 최근의 복지국가 논쟁까지, 어떤 식으로든 사회제도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대해 기득권 세력이 취해온 전략이 그랬다는 것이다. 조폭 집단과 다를 바 없는 경직성에 숨막혀하고 있을 새누리당 안의 일부 인사들은 최근 '김무성 사태'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반론을 제기하면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커져 국면은 더 악화될 것이다"(역효과 명제), "내가 뭐라고 해봐야 대통령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무용 명제), "문제를 일으키면 나만 다치는 게 아닐까"(위험 명제). 하지만 새누리당 소속 의원 모두가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종박'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은 대통령의 하수인이 아니다. '분립' 정신에 따라 행정부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독립 헌법기관이 아닌가. 부디 용기를 내시라.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