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6. 12:23ㆍ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3
근재집 제1권 / 시(詩) ㅡ 안축(安軸)
식객들은 맹상군의 문도 같았네 / 客似孟嘗門
상객은 구름처럼 자취가 없고 / 珠履雲無迹
소나무는 불에 타서 남지 않았네 / 蒼官火不存
신선 찾으려고 푸른 솔밭 생각하고 / 尋眞思翠密
옛날을 생각하며 황혼에 서 있네 / 懷古立黃昏
오직 차 끓이던 우물만 남아 / 惟有煎茶井
바위 옆에 그대로 있구나 / 依然在石根
- [주-D001] 한송정(寒松亭) :
-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동쪽 15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4 江原道 江陵大都護府》 또한 신라 때 술랑(述郞) 등 네 명의 선인이 노닐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해서 그 정자를 철거하였으며, 오직 ‘돌 아궁이〔石竈〕’와 ‘돌 못〔石池〕’과 두 개의 ‘돌 우물〔石井〕’ 등 사선(四仙)이 차를 달일 때 썼던 유적만 그 옆에 남아 있다고 한다. 《稼亭集 卷5 東遊記》
- [주-D002] 사선(四仙) :
- 신라 때의 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영랑(永郞)ㆍ안상(安祥)을 가리킨다.
- [주-D003] 맹상군(孟嘗君) :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공족(公族)인 전문(田文)의 군호(君號)로, 손님을 좋아하여 식객(食客)이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 [주-D004] 상객(上客) :
- 원문의 주리(珠履)는 구슬로 장식한 신발이란 뜻인데 전하여 귀한 손님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의 문객이 3000여 명인데, 그중 상객은 다 구슬로 꾸민 신을 신었다고 한다. 《史記 卷78 春申君列傳》
손 한장(孫翰長)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기증하다 [孫翰長復和。次韻寄之。]
- [주-D001] 은대(銀臺) :
- 승정원(承政院)의 별칭(別稱)으로,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담당하였다.
- [주-D002] 육의(六義) :
- 풍(風)ㆍ아(雅)ㆍ송(頌)ㆍ부(賦)ㆍ비(比)ㆍ흥(興)을 가리켜 말한다.
- [주-D001] 완부(阮孚)의……밀칠하리니 :
- 진(晉) 나라 완부가 나막신을 매우 아껴 항상 신에다 밀[蠟]을 칠하여 신고 다녔다. 《晉書 卷49 阮孚傳》
- [주-D002] 도퇴(桃椎)의 짚신 :
- 당 나라 주도퇴(朱桃椎)가 산 속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항상 짚신을 삼아 길거리에 갔다 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짚신을 보고 “주 거사(朱居士)의 신이다.” 하고 쌀로 바꾸어 갔다. 《新唐書 卷196 朱桃椎傳》
- [주-D001] 초신(楚臣)은……죽었는고 :
- 초신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 굴원(屈原)을 말한다. 그는 초 회왕(楚懷王) 때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다가 모함을 받아 귀양 간 후 이소경(離騷經) 등을 짓고 상강(湘江)에 투신 자살하였다. 《史記 卷84 屈原傳》
- [주-D001] 도잠(陶潛)의……창일까 :
- 도잠의 말에 “여름날 북쪽 창 아래 누워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였다. 《晉書 卷94 隱逸傳》
- [주-D002] 소공(召公)의……남쪽 나라에 밝았네 :
- 주(周)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善政)에 감격한 백성들이 그가 남순(南巡)할 때 일찍이 쉬고 갔던 곳의 팥배나무[甘棠]를 아끼면서 길이 사모한 나머지 마침내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감당(甘棠)편이다.
- [주-D003] 화두(話頭) :
- 종사(宗師)가 어떤 법을 말하여 후배를 지도하는 것이 마치 훌륭한 장인(匠人)이 재료를 마음대로 다루어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선(禪)을 참구할 때에는 종사로부터 크게 의문되는 한 법을 받아 일념으로 그 의문을 참구하여 심지(心地)를 깨닫게 하는 공부의 한 방법이다.
산이 둘렀으매 저문 빛이 많네 / 山圍暮色多
게으르니 생계는 박한 대로 / 懶從生計薄
한가로워 친구 찾는 것 기뻐하네 / 閑愛舊知過
옛 우물에는 처음으로 얼음이 녹고 / 古井初消凍
찬 매화는 방금 꽃을 맺네 / 寒梅正結花
단란한 풍미가 이만하면 족하거니 / 團圝風味足
술을 사고 또 차를 끓이네 / 賖酒更煎茶
청등 고옥에 추워서 잠 안 오네 / 淸燈古屋寒無眠
상머리에 이끼 돋은 낡은 병을 가져다가 / 手取床頭苔蘚腹
푸른 바다 같은 맑은 샘물을 쏟아 넣고 / 瀉下碧海冷冷泉
문무 화력을 알맞게 피우니 / 撥開文武火力均
벽 위에 달 떠오르고 연기 폴폴 생기네 / 壁月浮動生晴煙
솔바람이 우수수 빈 골짝에 울리는 듯 / 松風颼颼響空谷
폭포수가 좍좍 긴 내에서 떨어지는 듯 / 飛流激激鳴長川
뇌성ㆍ번개 한참 우루룽 땅땅 하더니 / 雷驚電走怒未已
급히 가던 수레가 덜커덕 넘어지는 듯 / 急輪轉越轘轅巓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자니 / 須臾雲捲風復止
물결이 일지 않고 맑고 잔잔하네 / 波濤不起淸而漣
바가지에 쏟아 놓으니 눈 같은 흰빛 / 大瓢一傾氷雪光
간담이 휑 뚫리어 신선과도 통함직 / 肝膽炯徹通神仙
천천히 마시며 혼돈 구멍을 뚫어내고 / 徐徐鑿破渾沌竅
홀로 신마를 타고 선천 세계에 노니네 / 獨馭神馬游象先
돌아보니 예전 마음속의 자갈밭 / 回看向來磎地
요마와 속념이 모두 망연해지고 / 妖魔俗念俱茫然
마음의 근원이 활짝 트이어 / 但覺心源浩自運
만물을 초월하여 하늘 밖에 노니는 듯 / 揮斥物外逍遙天
내 들으니, 상계의 진인은 깨끗함을 좋아하여 / 吾聞上界眞人好淸淨
이슬을 마시며 똥ㆍ오줌도 안 누어 / 噓吸沆瀣糞穢湔
먹고 옥을 먹고 장생을 하며 / 餐霞服玉可延齡
골수를 씻고 털을 베어 백년 동안이라지 / 洗髓伐毛童顔鮮
나도 세상에서 이러하거늘 / 我自世間有如此
어찌 고목과 오래 살기를 다투리 / 豈與枯槁爭長年
그대는 안 보았는가, 노동은 배고프면 삼백 조각을 희롱한 것을 / 君不見盧仝飢弄三百片
도덕경 오천 언은 부질없는 한만한 문자 / 文字汗漫空五千
곤궁한 시름은 나를 범하지 못하네 / 窮愁不我加
날 추우니 자주 술을 마시고 / 天寒頻飮酒
해 저무니 집 생각이 갑절 나누나 / 歲暮倍思家
홀로 연산의 눈을 마주해 앉아서 / 獨對燕山雪
멀리 대유령의 매화를 생각하네 / 遙懷庾嶺花
그윽한 삶이 더욱 맛이 있구나 / 幽居尤有味
돌솥에 차 달이기 좋기도 해라 / 石鼎好煎茶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 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 현재 경상북도 영덕)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색(李穡, 1328년 6월 17일(음력 5월 9일[1]) ~ 1396년 6월 12일(음력 5월 7일[2]), 경상북도 영해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劉敞)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이종학(李種學)의 아버지이고 박상충(朴尙衷)의 손윗처남이며 박은(朴誾)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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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모자 여우 갖옷은 물을 뿌린 듯하고 / 毳帽狐裘如潑水
잠깐 새에 눈보라가 공중을 몽땅 휩싸니 / 須臾雪勢欲包空
바다와 산은 분주히 어둠 속으로 돌아가네 / 海岳奔走歸溟濛
흐릿해진 수레바퀴엔 긴 고드름 드리우고 / 糢糊車轂垂長氷
말굽은 옥잔 같고 갈기엔 구슬이 주렁주렁 / 玉杯馬蹄珠綴騣
구릉과 골짜기는 깎아 놓은 듯 편평하여라 / 丘陵坑坎平如削
지척에서 넘어지는 것 어이 그리 잦은고 / 咫尺倒顚何數數
평생에 가장 좋아한 건 절집에서 잠잘 때 / 平生最愛僧窓眠
송죽엔 바람 불고 하늘엔 구름 가득할 제 / 松竹蕭蕭雲滿天
화롯불에 얼굴 발갛게 비추며 차를 달이어 / 煎茶爐火照面紅
조금 마시고 모기 소리로 조용히 읊음일세 / 淺斟低唱飛蚊同
이런 낙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나뿐이니 / 已知此樂天下獨
암곡에서 소요하며 늙는 것이 합당하거늘 / 便合逍遙老巖谷
누가 멀리 달려와 벼슬하길 배우게 했나 / 誰敎遠走學爲官
요컨대 세간의 행로 어려움을 알아야겠네 / 要識世間行路難
가벼운 천둥이 밤새 적막을 진동시켰네 / 輕雷一夜動潛虛
꽃 자기잔의 흰빛은 조반을 먹은 이후요 / 花瓷雪色朝飡後
돌냄비의 솔 소리는 낮잠을 잔 뒤로다 / 石銚松聲午睡餘
달을 희롱해라 완연히 친면을 본 듯하고 / 弄月宛然親面見
바람을 타라 마침내 소생함을 묻고 싶네 / 乘風欲問到頭蘇
하얀 귀밑머리에 누가 기심 잊은 자인고 / 鬢絲誰是忘機者
흉중의 수많은 글을 깨끗이 씻은 이로세 / 淨洗胷中書五車
차 향기 자리 가득코 창문은 공허했네 / 茶香滿座小窓虛
신심의 뭇 고통은 의당 다함이 없으나 / 身心衆苦知無盡
입속은 달콤하여 기쁨이 아직 남았다오 / 齒頰微甘喜尙餘
방달함은 도리어 이중을 찾아야겠지만 / 放曠却須尋二仲
문장은 하필 삼소를 배울 것이 있으랴 / 文章何必擬三蘇
문왕을 스승삼고픈데 지금 어디 있는고 / 欲師西伯今安在
곰 아닌 걸 점쳐 얻어 후거에 실었었네 / 卜得非熊載後車
- [주-D001] 달을 …… 듯하고 :
- 당(唐)나라 시인 노동(盧仝)이, 간의대부(諫議大夫) 맹간(孟簡)이 보내 준 월단차(月團茶)를 두고 지은 〈다가(茶歌)〉에, “봉함 열자 간의의 얼굴 완연히 보는 듯해라, 손으로 삼백 편의 월단차를 점열하네.[開緘宛見諫議面 手閱月團三百片]”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D002] 바람을 …… 묻고 싶네 :
- 역시 노동의 〈다가〉에, “첫째 잔은 목과 입술을 적셔 주고……여섯째 잔은 선령을 통하게 해 주네. 일곱째 잔은 마실 것도 없이, 오직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일어남을 깨닫겠네. 봉래산이 어디에 있느뇨. 나도 이 맑은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구나. 봉래산 위의 신선들은 하토를 다스리지만, 지위가 청고하여 비바람과 격해 있으니, 어떻게 알리요 억조창생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고통 받고 있는 줄을. 문득 간의에게 창생의 소식을 묻는다면, 마침내 창생을 소생시킬 수 있지 않겠나.[一碗喉吻潤……六碗通仙靈 七碗喫不得 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 蓬萊山在何處 玉川子乘此淸風欲歸去山上群仙司下土 地位淸高隔風雨 安得知百萬億蒼生 命墮顚崖受辛苦 便從諫議問蒼生 到頭合得蘇息否]”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D003] 사여(四如) :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에, “일체유위의 법칙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나니, 응당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 亦如電 應作如是觀]”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D004] 이중(二仲) :
- 한(漢)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양중(羊仲)과 구중(裘仲)을 합칭한 말이다. 은사 장후(蔣詡)가 일찍이 향리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형극(荊棘)으로 문을 막고 집안에 세 길[三徑]을 내어, 오직 양중과 구중하고만 종유(從遊)했다고 한다.
- [주-D005] 삼소(三蘇) :
- 송대(宋代)의 문장가인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을 합칭한 말이다. 송대에 삼소의 문장이 크게 행해져서 그 문장을 숙독(熟讀)하면 과거(科擧)에 급제할 수 있었으므로, 심지어 “소씨 글에 익숙하면 양고기를 먹고, 소씨 글에 서투르면 나물국을 먹는다.[蘇文熟喫羊肉 蘇文生喫菜羹]”는 말까지 있었다.
- [주-D006] 곰 …… 실었었네 :
- 주 문왕(周文王)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가면서 점을 쳐보니, 점사(占辭)에, “용도 아니요, 이무기도 아니요, 곰도 아니요, 말곰도 아니요, 범도 아니요, 비휴도 아니요, 얻을 것은 패왕의 보좌로다.[非龍非彲非熊非羆非虎非貔 所獲霸王之輔]” 했는데, 과연 위수(渭水) 가에서 강태공(姜太公)을 만나 그를 후거(後車)에 싣고 돌아왔던 데서 온 말이다.
그윽한 흥취 이끄는 건 스스로 소년이라네 / 幽興相牽自少年
낮에 서책 열람한 건 한가한 때의 일과요 / 縹秩晝翻閑裡課
소나무에 눈 날릴 땐 취하여 잠을 잔다오 / 蒼松雪落醉中眠
언덕 위의 긴 휘파람은 원량을 생각하고 / 登皐長嘯思元亮
동해 가던 높은 풍도는 중련을 상상하네 / 蹈海高風想仲連
돌솥에 차 끊인 게 삼절 중의 으뜸인데 / 石鼎煎茶三絶最
아이가 대 사이의 샘물을 막 길어오누나 / 小童新汲竹間泉
- [주-D001] 언덕 …… 생각하고 :
- 원량(元亮)은 도잠(陶潛)의 자인데,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한다.[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D002] 동해(東海) …… 상상하네 :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포악한 진(秦)나라를 증오하여 말하기를, “저들이 방자하게 황제(皇帝)가 되어 천하에 군림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가서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나라의 백성은 될 수가 없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찾아오는 친구가 적네그려 / 幸今朋友少過門
난국에 말을 다한 건 역사에서 징계하였고 / 盡言亂國徵齊史
위방에 들지 않는 건 논어에서 증험하였네 / 不入危邦驗魯論
역마 달리는 요서엔 백사장 달빛이 하얗고 / 馳驛遼西沙月白
관어대 아래엔 바다 하늘이 어두워지누나 / 觀魚臺下海天昏
백발에 비로소 노고가 병이 된 걸 후회하여 / 白頭始悔勞成病
나날이 차 달여 마시며 채원에 물을 주노라 / 日日煎茶灌菜園
차례 뛰어넘은 은총은 세상에 드문 바로세 / 越次恩榮世所稀
칼 패옥 차고 퇴청할 땐 꽃 아래서 헤어지고 / 劍佩朝回花底散
조서는 밤에 초하고 달빛 아래 돌아온다오 / 絲綸夜草月中歸
그늘 짙은 나무에선 꾀꼬리가 지저귀고요 / 陰陰夏木黃鸝語
아득한 연기 물결 위엔 백조가 날아다니네 / 渺渺煙波白鳥飛
한스러운 건 당시에 일찍 사직하지 못하고 / 恨不當時乞身早
사면의 풍진 속에 석양이 비끼려 함이로다 / 風塵四面欲斜暉
- [주-D001] 난국(亂國)에 …… 징계하였고 :
- 춘추 시대 제(齊)나라 대부(大夫) 국무자(國武子)가 어지러운 나라에서 할 말을 다하여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좋아하다가 끝내 제나라에서 죽임을 당했던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傳 成公17年》
- [주-D002] 위방(危邦)에 …… 증험하였네 :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 것이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가고, 도가 없으면 숨는 것이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泰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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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31권
/ 시(詩)
박 판서 밀양(朴判書密陽)이 찾아오다. [朴判書密陽見訪 ]
놀랍게도 문밖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네 / 忽驚門外有跫然
사방이 환한 배꽃 속의 조용한 모정에서 / 梨花開遍茅亭靜
돌샘의 물 길어 와 노비가 차를 끓였다오 / 老婢煎茶汲石泉
공은 칠순이 가까운데 여전히 확삭옹이라면 / 公近七旬猶矍鑠
나는 지금 병이 많아 구련과 같다고나 할지 / 我今多病似拘攣
주고 뺏는 하늘의 마음 역시 엿보기 어려워 / 天心與奪亦難料
벼슬길 먼저 채찍 들어 부끄럽기 그지없네 / 愧殺宦途先着鞭
- [주-D001] 확삭옹(矍鑠翁) :
- 원기 왕성하여 씩씩한 노인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에 뛰어올라 용맹을 보이자, 한 무제(漢武帝)가 “이 노인이 참으로 씩씩하기도 하다.[矍鑠哉是翁也]”라고 찬탄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 [주-D002] 구련(拘攣) :
- 신경이 마비되어 팔다리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병을 말한다.
- [주-D003] 벼슬길 …… 그지없네 :
- 목은이 먼저 조정에서 현달하여 고관이 된 것이 부끄럽다는 뜻의 겸사이다. 동진(東晉)의 유곤(劉琨)과 조적(祖逖)이 벗으로 지내면서 중원(中原)을 회복할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조적이 조정에 기용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유곤이 “나는 항상 그가 나보다 먼저 채찍을 들게 될까 걱정해 왔다.[常恐祖生先吾着鞭耳]”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62 劉琨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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