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차 團茶에 대한 한국문집의 글 ㅡ 2

2018. 3. 26. 20:58차 이야기



단차 團茶에 대한 한국문집의 글  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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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53권 / 예문지(藝文志) 12   ㅡ 한치윤(漢致奫)

우리나라 문(文) 2 첩(牒), 장(狀), 정문(呈文), 서(書), 기(記), 서(序), 명(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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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예빈성(禮賓省)에서 송(宋)나라 복건 전운사(福建轉運使)에게 보낸 첩문(牒文)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희령(煕寧) 2년(1069, 문종23)에 고려의 예빈성에서 복건 전운사 나증(羅拯)에게 첩문을 보내어 운운(云云)하였는데, 조서(詔書)를 내려서 허락하였다.” 하였다.

   중국 조정의 상인(商人) 황진(黃眞), 홍만(洪萬) 등이 와서 말하기를, “전운사가 폐하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려와 접촉하여 우호 관계를 맺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국왕의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국(當國)은 궁벽진 양곡(暘谷)에 살고 있으면서도 멀리 천조(天朝)를 연모하여 조상 때부터 항상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사신이 왕래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평양(平壤)이 요(遼)나라와 가까워 그들을 친근히 하면 화목한 이웃이 되고, 소원하게 하면 강한 적이 되곤 합니다. 이에 변방의 난리가 그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국력을 키우느라 경황이 없었으며, 오래도록 요나라의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마음을 품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술직(述職)을 어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상서로운 구름이 여러 번 중국에 드리워져 중국의 성세(聖世)를 아름답게 하였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장안(長安)의 옛길을 헤맬 것 같습니다. 좋은 운이 펼쳐졌으니 예를 갖추어 경축하고자 합니다. 대조(大朝)의 교화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도량은 넓어 먼 나라까지 포용하는 것이 마치 태산(泰山)은 미세한 티끌도 거절하지 않으며 바다는 가느다란 물줄기도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를 따라 장안에 빨리 나아가야 하겠으나, 천리 밖에서 전해 들은 소문이지 송나라 조정에서 직접 은혜롭게 알려 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이제 황진, 홍만 등이 서쪽으로 귀국하는 편에 공장(公狀)을 부칩니다. 답장을 받아 보고서 즉시 예를 갖추어 조공하겠습니다.”
  ㅡ 《송사》


   고려의 이자덕(李資德)이 진봉(進奉)하는 장(狀)

  《유환기문(游宦記聞)》에 이르기를, “선화(宣和) 6년(1124, 인종2)에 고려가 정사 이자덕(李資德)과 부사 김부식(金富軾)을 파견하였는데, 본조에 이르러서 사은(謝恩)하고 진봉하면서 올린 장에 각각 사륙문(四六文)의 글이 있어 중국의 체재를 모방하였다.” 하였다.

   발을 돋우고서 바라보다가 마침 강가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으며, 또한 이미 만나 뵙게 되어서 다행히도 당(堂) 위의 위풍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오타(五朶)의 구름을 보내 주고 특별히 천금(千金)의 폐백을 보내 주셨으니, 예에 있어서 절하고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마음은 부끄럽고 황공스럽습니다.
  ㅡ 《유환기문》


김부식(金富軾)이 진봉하는 장

   황제께서는 심사와 언행이 온화하신데 다행히도 여광(餘光)의 비침을 받게 되었으매 길가의 고인 빗물이라도 떠다가 마음을 표하는 정성을 형용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관대하게 대하시어 받아들여 주시는 은혜를 입었는데, 감히 비천하다고 하여 예를 폐할 수가 있겠습니까. 명품(名品)을 더럽히는 바이기에, 별도로 글을 써서 올립니다.
  ㅡ 《상동(上仝)》

조선의 유보(柳溥)가 국계(國系)를 변정(辨正)하기 위하여 명(明)나라의 예부에 올린 정문(呈文)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에 이르기를, “가정(嘉靖) 8년(1529, 중종24)에 조선의 배신(陪臣) 유보 등이 정문하여 말하기를, ‘본국 국조(國祖)의 아버지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 아닌데, 《황명조훈(皇明祖訓)》《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린 바로는 모두 이인임의 후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대명회전》을 중수하니 개정해 주기를 바라며, 건국(建國)의 시말을 진달드립니다.’ 하였는데, 예부가 이런 내용으로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하였다.

   가정(嘉靖) 8년에 조선국의 배신(陪臣) 이조 참판 신 유보(柳溥) 등은 말씀드립니다.
본국의 이씨(李氏)는 그 선조가 본국의 전주인(全州人)으로, 28대조인 이한(李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이한의 6대손인 이긍휴(李兢休)가 고려조에 들어왔으며, 13대손인 이안사(李安社)가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남경오천호소 다루가치[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가 되어 대대로 그 직책을 세습하였습니다. 원나라 말기에 병란이 일어나자 이안사의 증손과 그의 아들인 이성계(李成桂)가 난리를 피하여 동쪽으로 옮겼습니다.

  지정(至正) 신축년(1361)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 10년으로, 이때 홍건적(紅巾賊) 20만 명이 국경을 침범해 온 일이 있었는데, 이성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홍건적을 쳐서 공을 세워 무반직(武班職)을 제수받았습니다. 공민왕이 후사가 없어서 몰래 총신(寵臣)인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삼았는데, 만년에 포악하게 굴다가 폐신(嬖臣) 홍륜(洪倫) 등에게 시해되었습니다. 그러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이 홍륜 등을 시장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한 다음, 우를 세워 후사로 삼고, 그의 아들인 창(昌)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우 6년(1380)에 이성계를 발탁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습니다. 우가 장수를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침범하고자 하면서 이성계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는데, 출동하다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과 모의하여 상국(上國)에 죄를 짓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우가 두려워서 창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홍무(洪武) 22년(1389, 창왕1)에 선유(宣諭)하여 위성(僞姓)의 문제로 인해서 우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왕씨(王氏)의 후예인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로 하여금 국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이인임에게 죄를 내려 외방으로 쫓아냈습니다. 얼마 있다가 왕요가 또 의롭지 못한 짓을 하자, 나라 사람들이 분노하여 왕요를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고는 고황제(高皇帝)께 명(命)을 청하자 고황제께서 명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하고,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고쳤습니다.
    ㅡ 《춘명몽여록》


조선의 소세양(蘇世讓)이 출입을 금지하지 말기를 청하기 위해 명나라의 예부에 올린 정문

   가정(嘉靖) 13년(1534, 중종29)에 조선국에서 차임되어 온 사신 소세양(蘇洗讓) -살펴보건대, ‘洗’는 ‘世’의 잘못이다.- 등은 삼가 앞에서 말씀드렸던 일을 가지고 글을 올립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본국은 조금이나마 예의를 알아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대우하는 것이 내복(內服)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에 본국의 사신이 경사(京師)에 도착하면 스스로 마음대로 출입하여 구애받지 않으면서 지금에 이르렀는데, 공경하고 삼감이 더욱더 독실하여 별로 위반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부터 비로소 금지하기 시작하여 관문(館門)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공문서를 여쭙거나 받들 일이 있을 경우에도 단지 통사(通事) 한두 사람만 시간을 정해 놓고 출입하도록 허락하면서 관부(館夫)에게 명령을 내려 패쪽을 차고 함께 가도록 하고 있는데, 예전의 격식과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성화(成化) 6년(1470, 성종1) 2월에 본국의 배신(陪臣) 권함(權瑊) 등이 경사에 왔을 적의 일을 상고해 보니, 분예부(分禮部)가 발송한 방문(榜文)에, “해당 사안에 대해 성지(聖旨)를 받드니, 그 성지에, ‘회동관(會同館)의 금제(禁制)가 허술하다. 일체의 조공하러 온 사이(四夷)의 사객(使客)들이 출입하는 데 대해서는 예전에 금지하는 전례가 있었다. 지금 이후로는 까닭 없이 시가(市街)에 오가는 것을 금지한다. 해당 아문(衙門)에서는 잘 알아서 공경히 시행하라.’ 하였다.” 하였는데, 이달 11일에 무 도독(武都督)이 회동관에 도착해서 성지를 선유하고, 인하여 사객들의 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에서 온 사신들에 대해서만은 금령이 내려진 뒤에도 예전처럼 출입하게 하면서 즉시 방문(榜文)을 철거하였습니다.

   또 홍치(弘治) 13년(1500, 연산군6) 5월에는 회동관의 금제가 허술하여 여진(女眞)의 조합(早哈)이 일반 오랑캐 사람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병부(兵部)에서 성지를 받들고서 사유를 갖추어 방문을 낸 다음, 조공하러 온 오랑캐 사람들에게 효유해 관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본국에 대해서도 똑같이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예부 주사(禮部主事) 유강(劉綱)이 주본(奏本)을 올려 진언하기를, “해당 본부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사례를 조사해 본 결과, 조선은 평소에 예의를 지켜 조정을 공경히 섬기는 것이 다른 오랑캐들과 비교해서 같지 않았으므로, 진공(進貢)하러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본디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병부 등의 아문에서 회의하여 금약(禁約)을 정하면서 전항의 사례를 가지고 일체를 똑같이 혁파하여, 제독(提督) 관원이 엄하게 구금하면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전항에 대해서는 예전의 규례를 참조해 조선 사람들에 대해서만은 화매(貨賣)를 행하게 하는 것이 몹시 편리하고 이롭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성지를 받드니 “옳다. 공경히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본국의 사신들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허락하여 금지하는 법이 없었는데, 가정(嘉靖) 초년에 이르러서 주객(主客) 손 낭중(孫郞中)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구금하면서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가정 4년(1525, 중종20) 8월에 배신(陪臣) 정윤겸(鄭允謙) 등이 경사에 왔을 적에 전항의 절목에 대해 황제께서 준허(準許)하신 사리를 가지고 예전의 규례를 참조해서 마음대로 출입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전의 규례를 참조해서 마음대로 출입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예부(禮部)의 준고(準告)를 받아 이미 본관(本館)에 이문(移文)하여 알렸습니다. 그런 뒤에도 제독(提督) 진 주사(陳主事)가 자신의 소견을 고집하면서 이를 준행하지 않은 채 출입을 금함이 더욱더 엄하였는데, 오래도록 이를 말씀드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답습해 오고 있습니다. 이에 의(義)를 사모하는 바람이 멀어지고 있으니, 몹시도 실망스럽습니다. 이 때문에 구구하게 진달드리면서 스스로 입 다물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어찌 물품을 매매하는 데 뜻이 있어서 예전의 규례대로 회복하기를 도모하는 것이겠습니까. 금지하거나 허락하거나의 여부에 따라 손해나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천하를 똑같이 보는 어짊은 안팎의 구별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저희들로 하여금 쉼없이 관광하여 예의(禮儀)를 보고 문물(文物)을 상고하게 해서 교화를 받아 변화되어 크게 이로움을 열게 하소서. 이는 실로 어루만져 품어 주는 지극한 덕을 도타이 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지극한 정성을 장려하여, 멀리 떨어진 외방인 우리나라로 하여금 영원토록 총애하는 은택을 입게 하고 만대토록 먼 후일까지 중국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함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앞서 본국의 사신들이 조공하러 경사에 들어오면 항상 아랫사람들을 신칙하여 법도를 준수하도록 힘쓰게 하였고,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법령을 위반할까 두려워서 십분 삼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금제가 엄밀하기가 전에 비해서 더욱 심하여, 관소에 갇혀 있는 것이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는 예전에 시행하던 규례에 어긋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누대에 걸친 조정에서 우대하던 뜻이 아닌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전의 규례를 참조해서 마음대로 출입하도록 허락하여 성조(聖朝)에서 너그럽게 포용해 주는 뜻을 보여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ㅡ 《상동》


   조선의 김계휘(金繼輝)가 명나라의 대종백(大宗伯)에게 올린 글

   만력(萬曆) 9년(1581, 선조14)에 조선에서 주청사(奏請使) 김계휘 등을 파견하여 국계(國系) 및 전국(傳國)에 대한 무함(誣陷)을 씻어 주기를 청하였다.

   조선국에서 차임되어 온 사신인 형조 판서 신 김계휘(金繼輝) 등은 향을 피우고 목욕한 다음 두 번 절하고서 삼가 대종백 상공 합하(大宗伯相公閤下)께 글을 올립니다.
   이번에 우리 과군(寡君)께서 저희들을 파견하여 보낸 것은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국계(國係) 및 전국(傳國)에 대한 무함을 씻어주기를 요청하는 일을 참으로 그만두어야 하는지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으므로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모의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 소인(小人)들은 말하기를, “국조(國祖)가 무함을 입은 것에 대해서는 대개 누대에 걸쳐서 신원해 주기를 하소연해서 열성(列聖)들의 윤허를 입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이미 여러 차례이다. 그런데도 유독 지체되고 있는 것은 새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찬수가 끝나 반포될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반포될 시기가 되면 사신의 행차가 잇달아 있을 것이니, 이 일을 전담하는 사신을 보낼 필요가 없다. 전담 사신을 보냈다가 반포하는 시기가 혹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오랜 기간 지체하게 될 것인데, 머물러서 기다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을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자(君子)들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가계(家系)에 잘못 들어가 있는 것이 얼마나 욕된 것이며, 네 임금을 시해한 죄악에 빠지게 된 것이 얼마나 무함을 당한 것인가. 욕을 당하고 무함을 당한 것이 《대명회전》《황명조훈(皇明祖訓)》에 실려 천하 사람들의 이목에 유포되었으니, 그 원통함이 어떠한가. 원통함에 대해 여러 차례 하소연한 결과 상세히 살펴서 처리하라는 칙지가 내려졌으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감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명회전》이 새로 반포되지 않아 200년 동안이나 기다려오다가 《대명회전》을 마침 새로 찬수하게 되었는데, 장차 빠른 시일 안에는 얻어보지 못할 것만 같으며, 또 이미 완결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속히 전담하는 사신을 보내어서 명시(明示)하기를 청하지 않은 채 꾀어서 말하기를, ‘오가는 사신이 잇달아 있을 것이다.’ 하니, 이런 말을 차마 할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부자(父子)와 군신(君臣) 간의 일에 관련이 있는 경우이겠는가. 그리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예정(禮政)이 미치지 않은 바가 아니니, 이런 사실을 들으면 마음 편히 있지 않고 그것을 위해 밝힐 것이다. 천조가 우리나라에 대해 마음을 써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니 설령 전담 사신을 보내어서 《대명회전》이 완간되기를 기다리느라 오랜 기간 머물러 있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일상적인 규례에 구애되어 불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이 어찌 단지 그만두어서는 안 될 뿐이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과군께서는 소인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군자들의 의논을 따랐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과인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신으로 보낼 만한 적임자가 없어서 저희같이 못난 사람들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잔치를 하사해 주신 것이 특별히 후하였으며, 심지어는 옷을 벗어 입혀 주고 음식을 먹여 주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을 보내는 날에는 다시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고는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께서는 실로 선조(先朝)의 은혜로운 칙서를 받들었으니, 새로 반포된 《대명회전》을 보기만 하였다면 다시는 남은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돌아가시어 황천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계시다. 과인이 허락을 받은 것 역시 정녕하기는 하나, 유독 과인 때에 그 일이 완수된다는 보장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반드시 일을 완수하고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저희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직하면서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아뢰었습니다.

   소방(小邦)이 비록 몹시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임금이 신하를 부림에 있어서는 덕(德)으로써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의(義)로써 섬기어, 오직 속이거나 배반하지 않는 것으로써 떳떳함을 삼고 있습니다. 이제 과군께서 이미 일을 완수하라고 저희들에게 말하였으며, 저희들도 그러겠다고 과군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새 《대명회전》이 완간되는 날이 바로 저희들의 일이 완수되는 날입니다. 완간되는 날짜가 처음에 들은 것과 어긋나는 것이 염려되기는 하나, 또한 감히 사정(私情)이 절박하다는 이유로 그 사이에서 빨리 하고자 하여 서두르지는 못하겠습니다. 오직 머물러 기다리지 못하게 될 것만이 두려울 뿐입니다. 과군께서 주신 옷이 몸에 걸쳐 있으니 실낱같은 목숨은 이 옷이 해질 때까지 함께할 것이고, 과군께서 먹여 주신 음식이 뱃속에 들어 있으니 죽는 날까지 이것으로 배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추위와 더위가 열 번 바뀐다고 하더라도 머물러 있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머물러 있기가 어려운 것은 천자께서 먼 데 사람을 대하는 일상적인 규례를 가지고 너그럽게 조처해 주지 않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저희들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죽지 않고자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는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저희들이 이미 과군께서 보낸 자문(咨文)을 집사(執事)에게 바쳤는데, 그 주본(奏本)이 이미 내려져서 예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합하께서는 고명하고 인자하시니 상세한 내용을 이미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희들이 감히 이렇게 다시 덧붙이는 것은, 유독 집사가 저희들이 전담 사신으로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와 머물러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혹시라도 범범하게 살펴, 품복(稟覆)할 즈음에 대수롭지 않게 보아 만에 하나라도 빠뜨리고 말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우러러 하소연하여 일삼을 바가 없는 일에 대해서 마음을 쓰면서 외람된 짓인 줄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너그러이 용납해서 곡진히 이루어 주소서. 그리하여 소방의 소인들의 말대로 되고 군자들의 말대로 되지 않게 하시지 말며, 저희들이 돌아가서 과군께 보고할 말이 있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ㅡ 《명문기상(明文奇賞)》



김계휘가 다시 대종백에게 올린 글

   김계휘 등은 향을 피우고 목욕한 다음 두 번 절하고 삼가 대종백 상공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삼가 저희들이 과군께 명을 받아서 온 것은, 오로지 도하(都下)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 《대명회전》의 찬수가 끝나는 날을 기다리게 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번에 합하께서 섬돌 앞 몇 척의 땅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주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한 장의 서신을 하집사(下執事)에게 올리도록 용납하시었습니다. 그리고 합하께서는 또 못난 저희들을 물리치지 않고 면대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어 서로 응답하는 것이 마치 메아리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니 합하께서 먼 데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이미 너그럽습니다. 다만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은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합하께서는 종시토록 준엄하게 거절하면서 저희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렵고 글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우리 과군의 애통하고 절박한 심정을 대인 군자의 앞에서 끝내 다 드러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저희들의 죄입니다.

   저희들이 삼가 합하의 뜻을 유추해 보건대, 필시 ‘이 몇 가지 일들은 선조(先朝)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너그러이 허락하는 칙서를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 전후로 올린 주본의 정절(情節)에 의거하여 일체를 새로 반포하는 《대명회전》에 모두 실어서 이미 탈고(脫稿)하였다. 그러나 간행하여 반포하는 것은 그 시기가 아직도 멀었으니, 외국의 배신(陪臣)을 경사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비록 극히 어리석고 완악하기는 합니다만, 어찌 사체(事體)를 헤아려 보지 않고서 곧장 감히 집사와 서로 고집을 부리면서 버티겠습니까.

   과군께서 저희들을 보내고 저희들이 과군과 약속하면서는 모두 머물러 있기로 기약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일이 참으로 급하고, 그 정상이 참으로 슬퍼서 입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보고 아비라고 부르는 것은 천하의 지극한 치욕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것은 천하의 지극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참언(讒言)으로 인하여 그런 잘못된 내용이 서책에 실려 있어서 온 나라의 사람들로 하여금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 빠져 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깊은 원통함과 지극한 애통함은 수백 년이 지나도 하루와 같습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밝은 해가 하늘에 떠 만국이 모두 안녕합니다. 이에 천지의 사이에 있는 생물들치고 날벌레나 길벌레들까지도 모두 제 살 곳을 얻어서 희희낙락하면서 각자 자신의 천성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바다 한쪽 구석에 있는 우리 소방의 백성들만은 항상 햇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에 과군께서는 왕위에 오른 이래로 귀로 음악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눈으로 화려한 것을 보아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잠을 자면서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목을 빼어 서쪽을 바라보면서 성전(盛典)이 반포되기만을 바라며 지하에 계신 선조(先祖)와 선고(先考)의 풀리지 못한 유감을 위로하고자 한 지가 이제 10년이나 되었습니다. 합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이 떠나가든 머물러 있든 합하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중요치 않은 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방의 입장에서는 군신과 부자의 의리가 달려 있는 일이니, 이것이 어찌 가볍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머물러 있는 것은 과군께서 원하는 바이니, 의(義)에 있어서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떠나가는 것은 사신으로서 당연한 일이니, 예(禮)에 있어서 어길 수가 없습니다. 의에 있어서 저버려서는 안 되는데도 저버리는 것은 바로 의리를 해치는 것이고, 예에 있어서 어겨서는 안 되는데도 어기는 것은 바로 예를 해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명을 듣고 돌아온 뒤로 서성이고 돌아보면서 여러 차례나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에 있어서나 의리에 있어서나 끝내 편안할 길이 없으니, 오직 물러가서 한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삼가 합하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을 곡진하게 드리워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본다면 떠나가게 할 것이냐 머무르게 할 것이냐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며, 반드시 예를 해치거나 의를 해치는 데 이르지는 않고 마땅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합하께서는 과군께서 보낸 자문 안의 사정을 상세히 살펴보고, 겸하여 저희들의 간절한 말을 채납하시어, 품복(稟覆)할 즈음에 황제께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하찮은 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불쌍히 여기는 성천자(聖天子)의 은혜를 입게 된다면, 소방에서는 다시 주달하지 않고서도 수백 년 동안이나 신원하지 못하였던 원통함을 풀 수가 있을 것이며, 저희들 역시 임금을 섬기는 구구한 의리를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극에 달해 말을 가려서 할 겨를이 없어 황공스럽고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드립니다.
      ㅡ 《상동》


고려 김연(金緣)의 보문각연기(寶文閣燕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르기를, “고려의 연영전(延英殿)은, 왕이 시사(試士)하는 것을 관람하는 곳이다. 그 북쪽을 자화전(慈和殿)이라고 하는데, 역시 모여서 연회하는 곳이다. 앞쪽에 건립되어 있는 세 전각을 보문각(寶文閣)이라 하는데, 여러 열성(列聖)들이 하사해 준 조서(詔書)를 봉안해 두는 곳이다. 서쪽은 청연각(淸燕閣)이라고 하는데, 제사자집(諸史子集)을 간직해 두는 곳이다. 일찍이 그곳의 연기(燕記)를 적은 글을 얻었다.” 하였다.

   왕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실하고 빛나는 덕을 지니시고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을 흠모하셨다. 대내(大內)의 옆과 연영서전(延英西殿)의 북쪽과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각과 청연각 두 각을 지어 송나라 황제의 어제(御製), 조칙(詔勅), 서화(書畫)를 모셔 걸어 놓고서 교훈으로 삼았으며, 반드시 절을 한 뒤에 몸가짐을 엄숙하게 하고서 우러러보았다. 그러고는 한결같이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 양웅(揚雄) 이래 고금의 서적을 모아 놓고 날마다 늙은 스승과 학식이 높은 선비들과 더불어 선왕(先王)의 도를 토론하고 천명하면서 배우고 닦고 익히고 쉬니, 한 건물 안에서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교화와 성명 도덕(性命道德)의 이치가 사방에 흘러넘쳤다.

   금년 정유년(1117, 예종12) 여름 4월 2일 갑술일에 특별히 수 태부 상서령(守太傅尙書令) 대방공(帶方公) 신(臣) 보(俌), 수 태부 상서령(守太傅尙書令) 태원공(太原公) 신 효(侾), 수 태보 제안후(守太保齊安侯) 신 서(偦), 수 태보 통의후(守太保通義侯) 신 교(僑), 수 태보 낙랑후(守太保樂浪侯) 신 경용(景庸), 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위(偉), 문하시랑 신 자겸(資謙)ㆍ신 연(緣), 중서시랑(中書侍郞) 신 중장(仲璋), 참지정사(參知政事) 신 준(晙), 수 사공(守司空) 신 지화(至和), 추밀원사(樞密院事) 신 궤(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신 우지(宇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신 안인(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부족한 몸인데 하늘이 복을 내려 주신 덕택으로 종묘와 사직에 복이 쌓이어, 세 방면의 변방에 병란이 일어나지 않고, 문화는 중국과 같게 되었다. 무릇 정치를 하고 일을 하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막론하고 중국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숭녕(崇寧)과 대관(大觀) 이래로 시행하고 조처하는 방침을 정함에 있어서 문각(文閣)과 경연(經筵)에서 선비들을 맞아들여 물어보는 것은 선화(宣和) 때의 제도를 따른 것이요, 깊숙한 궁궐의 조용한 자리에서 대신들을 불러 보는 것은 태청(太淸) 때 연회하던 것을 법받은 것이다. 그러니 비록 예에 있어서 차등은 있다 하더라도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높이는 뜻은 매한가지이다. 지금 중국에 조회하러 들어갔던 진공사(進貢使) 이자량(李資諒)이 계향(桂香), 어주(御酒), 용봉차(龍鳳茶), 명단차(茗團茶), 진과(珍果), 보명(寶皿)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내가 기뻐서 경들과 함께 이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일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황송하고 송구스러워하면서 섬돌 아래로 물러가 엎드리고는, 고루한 몸이라 감히 훌륭한 예에 참여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러자 왕이 곧 도로 자리로 가서 앉도록 하고는 온화한 안색으로 대접하며 갖가지 음식을 갖추어 먹게 하였다.

   배치한 장막, 차려놓은 그릇, 술잔이나 접시에 담긴 음식, 가지가지의 과일 등은 모두 육상(六尙)의 이름난 진품과 사방의 맛좋은 것들로, 어느 것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다시 중국의 파리(玻璃), 마노(瑪瑙), 비취(翡翠), 서시(犀兕) 등과 같은 기묘한 완상품들을 상 위에 진열하여 놓았으며, 훈(塤), 지(篪), 강(椌), 갈(楬), 금(琴), 슬(瑟), 종(鍾), 경(磬) 등으로 평화롭고 즐거우며 고상하고 정대한 음악을 당 아래에서 연주하게 하였다.

   임금이 잔을 들고 근신(近臣)을 시켜 들도록 권하면서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오직 지성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각자 주량대로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마시라.” 하였다. 그러자 좌우의 신하들이 재배하면서 감사하다고 아뢰고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잔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받기도 하여 화락한 즐거움에 흡족해하였다. 술잔이 아홉 순배가 돌자 임금께서 잠시 물러가 쉬도록 하였다. 이어 중귀인(中貴人)으로 하여금 옷 한 벌씩과 보대(寶帶)를 가져다가 내리도록 하여 후의를 표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시 불러 자리에 앉기를 재촉하고, 먹고 마시기를 각자 편리한 대로 하도록 하였다. 이에 더러는 마음을 터놓고 담소하기도 하고, 더러는 눈을 한껏 뜨고 구경하기도 하였다.

   난간 밖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뜰에는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었는데, 오만 가지로 우뚝우뚝한 산과 사방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은 동정호(洞庭湖)와 오(吳)의 회계산(會稽山) 같은 그윽한 흥취를 불러일으켜, 잔치가 끝나도록 더위의 고통을 잊을 수가 있었으므로 취하도록 많이 마시다가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그러자 진신(搢紳)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흔연히 기쁜 기색을 띠면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는 인자함과 검소함을 보배로 삼아 넘치는 행동이 없으시며, 옷은 수놓은 비단옷을 입지 않고, 그릇은 조각한 것을 쓰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만을 염려하여, 날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노심초사하면서 가엾게 여긴다. 반대로 뭇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를 열어 대접함에 있어서는, 내부(內府)에 간수했던 진귀한 물품과 상국에서 특별히 하사한 것까지 모두 다 꺼내어서 하루가 다 가도록 놀고 밤까지 계속하신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하시니, 어진 이를 존경하고 예를 중하게 여기며 선을 좋아하고 높은 지위도 잊는 마음이 실로 역대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옛날에 노(魯)나라 임금이 천자의 예악(禮樂)으로 풍속을 교화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반궁(泮宮)에서 선생(先生)과 군자(君子)가 같이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와서, 반궁에서 술을 마시누나. 이 좋은 술 마셨으니, 길이 장수하리로다.[魯侯戾止 在泮飮酒 旣飮旨酒 永錫難老]” 하였고, 노침(路寢)에서 잔치하면서는 관료와 일반 선비들이 같이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잔치 차려 기뻐하니, 관료와 선비들도 즐거워하는도다. 나라를 이미 차지하였으니, 많은 복을 받으소서.[魯侯燕喜 宜大夫庶士 邦國是有 旣多受祉]” 하였다고 한다.

   우리 임금께서도 천자의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사랑으로 신하들을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공경대부들은 천보(天保)의 시와 같이 임금에게 보답할 뜻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을 본받아 따르면서 아유가빈(我有嘉賓)의 시를 읊었고, 악사(樂師)와 노래꾼들은 임금과 신하가 같이 즐기는 음악을 연주하여 기쁨을 서로 나누고 예의는 법도에 맞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사람과 신령의 화락함과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감응과 위에서 베풀어 주고 아래에서 보답함과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모두 화락하게 음식을 들며 웃고 떠드는 사이에서 나왔다. 어찌 길이 늙지 않는다든가 많은 복을 받는다든가 하는 데에서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억만년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며 천자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대양(對揚)할 것이다.

   신은 우매하고 졸렬한 사람으로서 태평한 시대를 만나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재부(宰府)를 맡고 있다. 신을 못났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특별히 글을 지으라고 명하시어, 이에 사양하다 못해 삼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억지로 기(記)를 짓는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 태보 겸 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 개국후 식읍일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侯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 신 김연(金緣)이 전교를 받들어 찬(撰)하고, 통봉대부(通奉大夫) 보문각학사 좌산기상시 상호군 당성군 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寶文閣學士左散騎常侍上護軍唐城郡開國男食邑三百戶賜紫金魚袋) 신 홍관(洪灌)이 전교를 받들어서 글씨를 쓰고 편액을 쓰다.
     《고려도경》


조선 최항(崔恒)의 황화집 서(皇華集序)

   선비가 천지 사이에 태어남에 있어서는 덕업(德業)을 이루는 것이 참으로 큰 것이며, 문장을 짓는 것은 여사(餘事)일 뿐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세도(世道)의 승강(升降)을 말하는 자들은 일찍이 문장의 성쇠를 가지고 점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글이란 말이 시문(詩文)을 이룬 것으로, 덕업의 꽃이다. 그러므로 화순(和順)함이 쌓이고 영화(英華)로움이 발하여서 가슴속에 쌓여 있는 재주와 덕이 저절로 바깥으로 드러나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재(人才)가 흥기하는 것은 실로 세도(世道)의 변천에 관계되니, 어찌 우연히 흥기하는 것이겠는가.

   천순(天順) 4년(1460, 세조6) 봄에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장공(張公)이 사신의 명을 받들고서 왔는데,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여가에 경치가 좋은 곳이나 특별한 일을 만나게 되면 문득 시를 지어 읊었다. 이에 찬란하게 아름다운 시가 시고(詩稿)를 담는 비단 주머니에 넘쳐흘러서 거의 권(卷)을 이루었다. 사신의 일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에 우리 전하께서는 공이 문아(文雅)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사신(詞臣)들에게 공이 지은 시문을 편찬해 영원히 전해질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실로 황제의 명을 공경한 것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신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서술하게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문운(文運)은 세상 운수의 소장(消長)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자들은 각 시대마다 그러한 사람이 있는바, 한(漢)나라나 위(魏)나라 이후로는 헤아려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문장은 비록 볼만하지만 혹 세상에서는 쓰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세상에 쓰이는 기회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문장을 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경우가 있는데, 매번 이 두 가지가 다 온전하기가 어려운 것이 걱정이었다.

   공경히 생각건대, 명나라가 황제의 자리에 임어하매 큰 교화가 널리 펴져 문운(文運)을 성대히 열었다. 이에 삼광(三光)과 오악(五嶽)이 완전해지고 수레와 글자가 똑같이 통일되었으며, 어진 이는 등용하고 착한 이는 높여 조정 안에 포진하게 되었다. 도와 덕을 품고 있거나 재주와 기예를 가지고 있는 자들 모두 이 기회를 타고 감응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을 펼치고 재주를 발휘하였으며 떨치고 일어나 아름답게 찬양하여 문명(文明)의 성대함을 찬란하게 서술하였다.
공은 재주와 학문이 넉넉하고 기국과 도량이 호탕하여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해 아름다운 이름을 드날렸으며, 드디어 황제의 인정을 받아 좌우에서 모시면서 성천자(聖天子)의 예(禮)를 의논하고 법도(法度)를 제정하는 정사를 보좌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사신의 명을 받들고 멀리까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우리나라는 비록 바다 바깥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예의를 지킨 지가 오래되어 대대로 황제의 은혜를 받았다. 이에 매번 조서(詔書)를 반포할 적마다 반드시 중국 조정 안에서 어질고 재주 있는 자를 가려 뽑아서 보냈으므로 단아한 선비들이 줄지어서 나왔다. 이번에 공이 나온 데에서 특별히 황제의 간택에 뽑혀 공손히 황제의 말씀을 듣고 나왔다는 것을 더욱 더 믿을 수가 있다.
사신의 행차가 중국을 떠나매 석목(析木)에 빛이 환해져 만리의 밖에서 윤음(綸音)을 전파하고, 구중의 궁궐에 여정(輿情)을 전달하매 상하 간에 서로 미더워지고 원근 간에 서로 화합할 것이다. 바다 모퉁이에 해가 떠오르매 길이 물결이 잔잔하고, 우리 명나라의 바다처럼 성대한 은택에 목욕함이 더욱 더 무궁하게 될 것이다. 이는 참으로 영걸찬 재주를 가지고 황제께 크게 인정을 받아, 나아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국사에 온 힘을 다바쳐, 한 사람이 사방에 일이 있으매 마치 거북점과 시초점을 치듯이 미덥게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공이 우리나라에 도착하여서는 사신의 일에 일정이 있음을 생각하여 매번 기일에 미쳐 완수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면서도 도(道)의 정통(正統)을 중시하여 기자묘(箕子廟)를 방문하였고, 교화의 근원을 높여 대성전(大成殿)을 알현하여 허물없이 예의로 이끌면서 대도(大道)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공을 접견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아, 비단 고아한 자태와 깨끗한 인품을 흠모할 뿐만이 아니었다. 덕업(德業)의 아름다움을 이로 인해 잘 알 수 있으니, 유독 공의 문장만을 숭상해서야 되겠는가.

   공이 문장을 짓는 것을 보면, 흥취가 일어나면 문득 지었는데, 마치 낭자하게 널린 곤산(崑山)의 옥을 좌우에 가져다 놓고서 참새를 맞추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말을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어찌 앞에서 이른바 세도(世道)의 변천에 관계되어서 나고, 세상의 쓰임을 만나서 발휘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뒷날에 우리나라의 세도가 올라가는 시점은 반드시 공이 우리나라에 온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지은 공의 시문은 역시 없어지게 하여 전해지지 않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대하고 선을 좋아하는 성심이 정성스러우시다. 이에 황제께서 돌보아 주심을 공경하여 드디어는 황제가 보낸 사신을 중하게 여기고, 황제가 보낸 사신을 중하게 여겨 마침내는 그가 지은 문장까지 중하게 여기는 성대한 뜻을 가졌다는 것을 이를 통하여 잘 알 수가 있다. 아, 이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해 여름 4월 하순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좌빈객 겸 성균대사성(知中樞院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左賓客兼成均大司成) 신(臣) 최항(崔恒)은 삼가 서(敍)하다.
     ㅡ 《봉사록(奉使錄)》


조선 허균(許筠)의 조선시선 후서(朝鮮詩選後序)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이 서문이 두 곳에 나뉘어 실려 있으므로 지금 한곳에 합하여 기록하였는데, 아마도 이는 전문(全文)이 아닌 듯하다.

   조선은 주(周)나라 태사(太師)의 예의(禮義)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문학(文學)이 찬란하다고 중국에서 일컬어졌다. 당(唐)나라 때 미쳐서는 현량과(賢良科)를 보기 위하여 최치원(崔致遠)이나 최광유(崔匡裕) 등의 무리가 모두 중국에 가 유학(遊學)하여 잇달아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해서 당시에 이름을 드날렸으며, 송(宋)나라와 원(元)나라 때에도 학문을 닦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황제(高皇帝)께서 하늘이 내린 명을 받들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성스러운 은택이 사방에 흘러 온 천하에 두루 퍼졌다. 그런데 우리 동방이 가장 먼저 직공(職貢)을 닦자 황제께서 장려하면서 내복(內服)과 같이 대해 주시어, 김도(金濤)와 같은 무리들이 중국의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홍무(洪武) 연간에 홍륜(洪倫)과 김의(金義)의 난(亂) 때문에 중지되었는데, 얼마 뒤에도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바로잡지 않았다. 이는 소방(小邦)으로서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 최치원이나 김도 등의 무리는 어쩌면 그리도 다행인가. 혹 이 편(編)이 성대해짐으로 해서 보는 자들이 어여삐 여겨 다시금 새롭게 고친다면, 삼한(三韓)의 선비들이 후하게 대우해 주는 데 대해 절할 것이다.

   옛날에 주관(周官)이 시를 채집하고 부자(夫子)가 시를 채집하면서 삼한에서는 채집하지 않았는데, 이는 멀어서 오지 못한 것이다. 천 년 전에는 빠졌다가 천 년 뒤에 만나게 되어 소방의 음(音)이 비로소 성주(成周)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자어(子魚)의 공이 참으로 성대하도다.
    ㅡ 《열조시집》


이원정(李元楨)이 경사(京師)로 돌아가는 중국 사신을 전송한 시의 서문

   강희(康煕) 기원(紀元) 17년(1678, 숙종4) 무오년에 상사(上駟)무비(武備) 두 대인(大人)대행 황후(大行皇后)의 존시(尊諡)를 우리나라에 반포하였는데, 당시에 불녕(不佞)이 사신을 접대하라는 과군(寡君)의 부탁에 잘못 뽑혀서 용만(龍灣)으로 달려가서 맞이하였으며, 인하여 사신의 행차를 호송해서 왕경(王京)까지 왔다. 두 대인께서 황제의 명을 전해 선포할 적에 과군께서 병이 있어 교영의(郊迎儀)를 정지하였는데, 앞서 사신이 회주(回奏)할 적에 소방의 임금과 신하들이 한편으로는 감격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였다.

   생각건대 이 음빙(飮氷)의 행차는 느긋하게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잠시나마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마침 큰 흉년을 만나 공사(公私) 간에 모두 비어 공억(供億)하는 예를 갖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두 대인께서는 이를 몹시 불쌍하게 여겨 괜한 낭비를 일체 혁파하도록 하였으며, 요구한 것은 오직 시문(詩文)과 서법(書法)뿐이었다. 이에 과군께서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혹 제술하거나 혹 글씨를 써서 요구에 응하였는데, 싸 가지고 가는 행낭이 쓸쓸하여 마치 가난한 선비의 행낭과 같았다.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무비공(武備公)이 이어 양조(兩朝)의 황제께서 유시하신 글을 꺼내어 불녕(不佞)과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쓴 것은 바로 선황제(先皇帝)의 어필(御筆)이며, 지금의 황제께서 손수 발미(跋尾)를 쓰신 것이었다. 또 ‘청신근(淸愼勤)’이라고 쓴 것은 지금 황제의 어필이었다. 그런데 마치 용과 교룡이 살아 움직이듯이 꾸불꾸불하고, 필력이 힘 있어 굳세고 강건하였는바, 참으로 조화(造化)에 참여하고 풍우(風雨)를 놀라게 할 만하였다. 그리고 발문에 쓴 말들은 구슬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하여 저절로 가릴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들은 대개 공이 대대로 공훈을 세워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아주 많은데, 그중에서도 이것을 가장 진귀한 보배로 삼아 강역을 나오면서 놓아두고 올 수가 없어서 가지고 온 것이라 한다. 해외(海外)에 사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불녕이 천사(天使)의 돌보아 주심을 입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이처럼 대단한 것을 구경할 수 있었겠는가.

   국경에 들어오면서부터 돌아갈 때까지 머문 기간이 총 42일이었는데, 불녕이 또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압록강(鴨綠江) 가에 이르렀다. 대인께서는 불녕에게 전송하는 시와 서문을 지어 주어 이 뒷날에 잊지 않을 자료로 삼게 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돌아보건대 불녕은 본디 문장을 잘 짓지 못하는 데다가 수십 년 동안 벼슬살이를 한 탓에 공문서를 처리하느라 시달려 글을 짓는 것을 포기하였으므로, 대인(大人)의 부탁에 부응하기에는 재주가 부족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이에 굳이 사양하였으나, 더욱 간절하게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강의 내용을 서술해 바치고, 겸하여 몇 편의 시를 지어 바쳐서 한번 보고서 웃음거리로 삼게 하였다.
반송사(伴送使)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대사성(行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大司成) 광주후인(廣州後人) 귀암(歸巖) 이원정(李元楨)은 쓰다.
   ㅡ 《지북우담(池北偶談)》


조선 이정귀(李廷龜)의 양경리생사비명(楊經理生祠碑銘)

   《균랑우필(筠廊偶筆)》에 이르기를,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일본이 몰래 황제를 칭하고 조선을 경유하여 쳐들어오려고 하였는데, 양창서(楊滄嶼) 선생이 경리의 명을 받들고 나가서 전공을 세운 것이 몹시 두드러졌다. 그런데 곧바로 참소를 받아 파직되어 돌아오자, 조선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여 사당을 세우고 비석을 세웠으며, 시가(詩歌)를 지어서 그 일에 대해 읊었다.” 하였다.

   명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250년 동안에 정치와 형벌이 밝아서 해내와 해외에까지 미쳤으므로, 원근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주인으로 섬기고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 오직 일본(日本) 한 나라만은 험하고 먼 것을 믿고서 성교(聲敎)를 받들지 않았다. 평수길(平秀吉)은 임금의 자리를 찬탈하여 스스로 서서는 오로지 폭력만을 써서 여러 섬을 삼켜 웅대해졌는데, 이미 흉악한 짓을 다해 패만함이 쌓여 허장성세를 부려 위협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신묘년(1591, 선조24)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보내면서 우리 측의 허실을 환히 알아내고는 장차 길을 빌려서 중국을 침범하고자 하여 패역스러운 말로 우리를 협박하였다. 이에 우리 소경왕(昭敬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내치는 한편 사유를 갖추어 중국에 알렸다. 그 다음 해에 왜적들이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동원해 쳐들어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편안히 지내면서 방비책을 해이하게 한 탓에 백성들이 전쟁이라곤 모르던 차에 갑작스럽게 미친 도적들을 만나 패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께서는 “추악한 무리가 하늘의 기강에 대항하여 아무런 까닭도 없이 다른 나라를 침입하였다. 이러한 패역은 주벌해야 한다. 속국(屬國)은 힘이 약하여 지키지 못할 것인데, 의리상 화란에 빠진 나라는 구원해 주어야 한다. 동방의 백성들 역시 나의 적자(赤子)이니, 수화(水火)에 빠진 것을 구해 주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고는 문무(文武)의 대신들에게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라고 명하니, 천자의 위엄이 멀리까지 퍼지면서 온 천하가 진동하였다.

   한번 패수(浿水)를 건너자 삼도(三都)가 안정되었으며, 제로(諸路)의 왜적들은 차례대로 도망쳤다. 왜적들은 남쪽 변경의 10여 군(郡)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소굴을 짓고 성채를 세워 오랫동안 싸울 계책을 하였으므로, 이들을 에워싼 군사를 몇 년 동안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병부(兵部)는 끝까지 무력만을 써서는 안 된다고 여겨 심유경(沈惟敬)의 계책에 따라 조서를 선포하고 봉공(封貢)을 허락하였다.

   평수길은 조서를 받들고서도 몹시 거만하게 굴었다. 이에 정유년(1597, 선조30)에 다시 군사를 징발해 바다를 건너와 한산(閑山)을 엄습해 깨뜨리고는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겁략(劫掠)하였다. 이 사실을 중국에 상주하여 아뢰었는데, 뭇 의논이 분분해서 오래도록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황제께서 혁연히 노하시고 결단을 내려, 문무의 재주를 갖춘 인재를 선발해서 동사(東事)를 맡기라고 명하였다. 이때 요양포정사 참정(遼陽布政司參政) 양공 호(楊公鎬)는 상을 당하여 사임하고 있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께서 특별히 조서를 내려 공을 기복(起復)시키고는 도찰원우첨도어사 경리조선군무(都察院右僉都御史經理朝鮮軍務)로 삼았다.

   이해 7월에 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평양(平壤)에 도착하여서 왜적들이 남원(南原)을 함락하고 곧장 올라와 선봉(先鋒)이 이미 경기 남쪽을 압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공은 우리 소경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 왕으로 하여금 경성(京城)을 잘 수리한 다음 동요하지 말고 굳게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그 즉시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군리(軍吏)가 가볍게 나아가지 말라고 간하였는데도 듣지 않았다. 드디어 9월 3일에 왕경에 들어와서 제독(提督) 마귀(麻貴) 이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국도(國都)의 남산(南山)에 올라가 군악(軍樂)을 연주하고 호령(號令)을 선포하였다. 그러고는 밤중에 정예로운 병사를 선발하고 각 군영의 날랜 장수를 모집하여 앞으로 가서 왜적들을 맞이하게 하였으며, 또 2000기(騎)를 보내어 후원하게 하였다.

   공은 우리 소경왕과 함께 동작진(銅雀津)을 건너가서 수어(守禦)할 형세를 살펴보았다. 7일에 여러 장수들이 직산(稷山)에서 왜적들과 맞닥뜨렸는데, 한 번 싸워서 대승을 거두어 수백 급(級)을 참수하였으며, 선봉으로 오던 적장을 쳐 죽였다. 이에 여러 왜적들의 기세가 크게 꺾여 곧장 바닷가의 소굴로 달아났다. 평행장(平行長)은 순천(順天)에 주둔하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울산(蔚山)을 점거하여, 동쪽과 서쪽의 열군(列郡)이 모두 적들이 주둔하는 곳이 되었다.

   공은 총독(摠督) 형개(邢玠)에게 글을 보내어 먼저 가등청정을 공격해 왜적들의 왼쪽을 끊어 버리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그러고는 제독 마귀 이하 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으며, 4만 명의 군사를 선발하여 보냈다. 12월 8일에 공은 단지 수백 명의 용감한 군사들만 거느리고 가벼운 옷차림에 두건을 쓰고는 빠른 속도로 조령(鳥嶺)을 넘었다.

   찬성(贊成) 신(臣) 이덕형(李德馨)이 공을 접빈(接賓)하여 국경에서 맞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공을 수행하여 항상 군중에 있었다. 의성(義城)에 도착하여서 공이 이덕형과 모의하여 먼저 항복한 왜적 여여문(呂余文)을 몰래 왜적들의 군영으로 들여보내어 그들의 형세를 정탐하였다. 이달 20일에 진격하여 경주(慶州)에 도착하였는데, 군성(軍聲)이 크게 진동하면서 바람과 번개처럼 신속하게 진격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은 뜻하지 않고 있던 차에 공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두려워하면서 더욱 더 명령에 잘 따랐다. 그리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우리나라의 여러 장관(將官)들과 수군과 육군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역시 공의 절제(節制)를 받았다.

   22일에 공이 드디어 왜적들의 보루에서 10리 떨어진 곳으로 진격하여 진을 쳤다. 그러고는 적은 숫자의 군사를 내어 왜적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모든 정예병을 내어 추격하였다. 공은 마 제독과 함께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합공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1000여 급을 참하고 왜장을 포로로 잡았는데, 왜적들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날이 저물어서 군영으로 돌아와 군사들을 휴식시켰다. 다음날 새벽에 공이 직접 진영에 올라가 독전하니 대포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깃발 무늬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각 병사들이 승세를 타고 고함을 치니 바다와 산이 모두 진동하였다. 비포(飛砲)와 화전(火箭)으로 왜적들의 군막을 불태워 마침내 반구정(伴鷗亭)태화강(太和江)의 두 성책(城柵)을 함락시켰는데, 불에 타 죽은 왜적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병장기와 군량은 모두 노획하였다. 가등청정은 겨우 제 한 몸만 빠져나가 도산(島山)으로 달아나 지키면서 죽을힘을 다해 항거하였다.

   도산은 성이 가파르고 험하여 군사들이 모두 개미처럼 기어올라가서 성을 공격하였는데, 성벽이 단단해서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공은 각 군영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나누어 공격시켜 번갈아 가면서 쉬게 하였으며, 몇 겹으로 포위해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 가운데 기갈(飢渴)이 들어 죽는 자가 많았다. 가등청정은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면서 여러 차례 항복을 청하며 공격을 늦추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속임수를 쓸 것을 염려하여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더욱 급박하게 공격해 모두 섬멸한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다.

   왜적들은 매일 밤마다 성 밖으로 나와서 땔감을 구하고 물을 길어 갔다. 공은 우리나라의 장수 김응서(金應瑞)를 시켜 왜적들이 나오기를 엿보고 있다가 남김없이 사로잡게 하였는데, 그 숫자가 날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와 같이 한 지 13일 만에 왜적들이 더욱 더 궁지에 몰려 위축되었다. 그러자 군리(軍吏)들이 앞 다투어 치하하면서 가등청정을 곧바로 포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날씨는 추운 데다가 큰비마저 내려 진흙탕이 무릎까지 차고,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으며, 군사와 말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죽는 자가 많았다.

   왜적의 구원군이 크게 이르러 장차 군영의 뒤쪽을 에워싸려 하였다. 공은 이러한 왜적들의 기미를 몰래 알아채고는 여러 장수들을 지휘해서 후퇴하게 하였는데, 자신은 맨 나중에 퇴각하였다. 왜적들이 추격해 오려고 하자 공은 말을 돌려서 돌격하여 수십 급을 베었다. 그러자 왜적들이 공의 위세에 눌려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이에 드디어 군사들을 거두어서 왕경(王京)으로 돌아온 다음,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군량을 저축하여 다시 거병하기를 도모하였다.

   군교(軍校) 가운데 공에게 죄를 지은 자가 있었는데, 이자가 찬획주사(贊劃主事) 정응태(丁應泰)에게 하소연하였다. 정응태는 평소에 공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이를 인해 주문(奏聞)을 올려 탄핵하였다. 이에 나라 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연명(聯名)으로 글을 올려 공의 억울함을 따졌으며, 우리 소경왕은 사실에 의거하여 주문을 올려 공을 머물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주문이 세 번이나 올라가 사신의 행차가 길에 줄을 이었다. 그러자 천자께서는 공이 명신인 데다가 중한 임무를 맡고 있어서 의리상 진퇴(進退)를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함께 모여서 조사하게 하였으며, 공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무술년(1598, 선조31) 여름에 공이 파직되어 돌아갔다.

   공은 하남인(河南人)으로, 호가 창서(滄嶼)이다. 천부적인 자질이 호탕하고 시원스러웠으며,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다. 기미에 임하여 적들의 형세를 살핌에 있어서는 마치 신부(信符)를 잡은 것과 같고 강하(江河)의 둑이 터지는 것과 같았다. 군중(軍中)은 숙연하여 빨리 내달리거나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이 중국으로 돌아갈 적에는 서울 안의 남녀노소가 모두들 울부짖으면서 가지 못하도록 끌어당겼고, 비석을 세워서 사모하였으며, 심지어는 깊은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맥빠진 모습으로 서로 위로하여 마치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니 참으로 어진 사람의 은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는 말을 믿을 만하다.

   공은 비록 천시(天時)가 돕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위세가 바닷가를 진동시키어 노적(老賊)의 기를 꺾었으니, 이는 근고(近古)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적중(賊中)에서조차도 서로 감탄하면서 천병(天兵)이 도산(島山)을 공격하는 그림을 그려서 일본에서 서로 전해 보았는데, 군용(軍容)의 성대함과 용병(用兵)의 장대함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능히 왜적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면서 성심으로 복종하게 하였으며, 남쪽 변경 여러 진의 군사들이 모두들 기세가 오르고 담이 커져서 두려운 마음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는 한 번 싸운 공이 실로 우리 동한(東韓)을 다시 세우는 기반이 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아 무함을 받은 채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 때문에 우리 동방 백성들이 비통해하고 울분을 터뜨리기를 가면 갈수록 더하여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소경왕께서는 공을 몹시 사모하여 연경(燕京)에서 공의 화상(畫像)을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구하지 못하다가 지금 왕께서 왕위를 이어받고서는 더욱 간절히 구하여 경술년(1610, 광해군2)에야 비로소 구하였다. 이에 드디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서 제사 지내고는 태사(太史)인 신 이정귀(李廷龜)에게 명해 그 일을 쓰도록 하였다. 신은 명을 받들고는 두려운 마음에 합문(閤門)에서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이 동정(東征)한 사적에 대해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는 명(銘)을 지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슬프다 지난날 임진년 그때 / 噫噫前歲
왜적들이 미친듯이 날뛰어서는 / 島賊狂猘
우리들의 빈틈 타고 쳐들어왔네 / 乘我不戒
중국까지 집어삼킬 생각을 하는 / 朶頤遼燕
왜적들의 그 기세는 하늘에 닿아 / 逆鋒滔天
조선쯤은 눈에 뵈지 아니하였네 / 目已無鮮
우리의 황제께서 혁노하시어 / 赫怒我皇
천자의 주벌 크게 펼치시어서 / 天伐用張
난 끝내고 망국 보존해 주려 했네 / 止亂存亡
평양성의 싸움에서 승리 거두자 / 勝之平壤
왜적들의 기세 이에 크게 꺾이고 / 賊乃大創
황제 위엄 멀리까지 드날리었네 / 皇威遠暢
왜놈 괴수 천자 주벌 벗어나서는 / 渠魁逋誅
남쪽 바다 구석진 데 소굴을 파고 / 窟彼南隅
다시 흉한 계책 펴길 도모하였네 / 再肆兇圖
군사들은 늙은 데다 피로하여서 / 師老而疲
승리했다 고할 날짜 기약 없는데 / 告功不時
왜적들은 되레 그 틈 타고 나왔네 / 賊反乘之
온 군사를 풀어 사방 노략질하고 / 悉衆四搶
그 기세를 몰아쳐서 북상을 하니 / 盡銳北上
그 기세가 몹시도 거세었었네 / 聲生勢長
이러한 때 공께서는 명을 받고서 / 公時受命
남의 위급 구해 줄 마음 앞서서 / 義先急病
군사 정책 한꺼번에 일신시켰네 / 一新戎政
도성 사람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 都人恟懼
공이 와서 어루만져 주길 바람이 / 望公來撫
큰 가뭄에 비 내리길 바라듯 했네 / 若大旱雨
느릿느릿 공 올 거라 여겼더니만 / 謂公于于
공께서는 질풍처럼 말을 몰아서 / 公疾其驅
바람 우레 같은 위세 길에 꽉 찼네 / 風霆載途
위태로운 성에서도 담소하면서 / 談笑危城
승패 가를 정해 놓은 계략 있어서 / 決敗筭成
가슴속에 온갖 병략 들어 있었네 / 胸萬甲兵
사나웁게 날뛰던 왜적들 모두 / 蛇豕其奔
위엄 겁내 후퇴해서 숨어 버리어 / 怵威退屯
나라 명운 다시금 보존되었네 / 國命再存
도산에 숨어 있는 왜적들쯤은 / 島山之賊
우리 쪽서 먼저 공격하기만 하면 / 曰宜先擊
순식간에 멸망시킬 수 있다 했네 / 滅此朝食
마귀(麻貴) 유정(劉綎) 그리고 이여송(李如松) 장군 / 麻劉與李
이들 모두 세 방면의 원수들로서 / 三路元帥
굳세어서 호시탐탐 노려보았네 / 桓桓虎視
공께서는 이들을 거느리면서 / 公惟咸領
병권을 굳건하게 잡고 있으니 / 繡鉞是秉
그 모습 당당하고 정연하였네 / 堂堂整整
군사들을 나누어서 가지런히 해 / 分兵齊擧
날카로운 그들 기세 떨어뜨리자 / 落其角距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였다네 / 莫敢齟齬
몸소 돌과 화살 사이 뚫고 들어가 / 親冒矢石
왜적들의 두 성채에 불을 지르니 / 火其
핏물 줄줄 흐르고 해골 쌓였네 / 血釃骸積
흉악한 왜적들은 혼이 달아나 / 兇賊褫魄
위축되어 살려 달라 간청하면서 / 乞命窮蹙
쥐새끼나 여우처럼 모두 숨었네 / 狐鼠竄伏
부상 땅에 위엄이 진동하였고 / 威振榑桑
관방의 형세 더욱 공고해져서 / 勢鞏關防
우리들의 무력을 드날리었네 / 我武維揚
공을 이룬 것이 실로 여기에 있어 / 功實在斯
장차 큰일 이룰 수가 있었건마는 / 將大有爲
이를 무너뜨린 자는 그 누구런가 / 壞之者誰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 동안에 / 公歸不復
공이 세운 공적 더욱 드러났는데 / 公績益白
망극하기 그지없는 참소당했네 / 被讒罔極
천자께서 말씀을 내리시기를 / 天子曰咨
오직 나와 너만이 알고 있나니 / 惟予汝知
너의 공은 생각할 만하다고 했네 / 汝功可思
어떻게 그 공적을 기리었던가 / 何以旌功
부절 내려 모든 군사 지휘케 하니 / 玉節摠戎
대장 깃발 높다랗게 펄럭이었네 / 大纛崇崇
아아 우리들의 양공이시여 / 猗歟我公
우리 동방 다시 세워 주시었으니 / 再造吾東
위대한 공 영웅다운 풍모이시네 / 偉烈英風
공께서 군사들을 거느리시매 / 公之治軍
엄정하고 번거롭지 아니하였고 / 不寬不煩
명령 은혜 엄숙하고 도타웠다네 / 令肅恩敦
공께서는 왜적들을 제압하시매 / 公之制敵
군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싸운 건 / 得人死力
충성과 의로움에 격발된 거네 / 忠義所激
공께서는 부하들을 단속하시매 / 公之束下
자신 먼저 검약하여 감화시키니 / 躬約以化
위엄 아니 보이어도 두려워했네 / 不威而怕
어찌하여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 云胡不思
공께서 실로 우릴 살려줬는데 / 公實生之
사모하나 추모할 길이 없었네 / 攀慕莫追
한양이라 이 성의 남쪽 지역에 / 漢城之陽
생사당이 세워져서 빛을 내는데 / 有祠輝煌
공의 화상 그 당에 모셔져 있네 / 公像在堂
백우선을 손에 들고 윤건 쓴 데다 / 白羽綸巾
머리카락 솟고 입은 굳게 다문 채 / 立髮嚼齦
탄식을 머금고서 펴지 못하네 / 含噫未伸
영명한 그 자태는 시원도 한데 / 英姿颯爽
우리 동방 억눌러서 보장됐으니 / 鎭我堡障
영원토록 바라보며 생각하리라 / 沒世瞻想
이런 사실 비석에다 새겨 놓으니 / 勒此貞珉
일과 이름 더불어서 새롭게 되어 / 事與名新
만고토록 그 정신이 전해지리라 / 萬古精神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서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빈객(行禮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書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 이정귀(李廷龜)는 찬(撰)하다.
     ㅡ《균랑우필》

[주-D001] 술직(述職) : 
제후가 천자에게 조근(朝覲)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 오타(五朶)의 구름 : 
당(唐)나라 때 위척(韋陟)이 초서(草書)를 써서 서명(署名)한 글자체인 오운체(五雲體)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서신(書信)을 말한다.
[주-D003] 대명회전(大明會典) : 
원문에는 ‘大明會傳’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04] 지정(至正) : 
원문에는 ‘至元’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05] 신돈(辛旽) : 
원문에는 ‘辛肫’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06] 위성(僞姓) : 
원문에는 ‘爲姓’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위성은 우왕(禑王)의 성씨가 고려 왕조의 성씨인 왕씨(王氏)가 아니라 신씨(辛氏)라고 하는 설을 말한다.
[주-D007] 권함(權瑊) : 
원문에는 ‘權咸’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권함은 성종이 즉위한 뒤 이조 판서로 있던 중 청승습사(請承襲使)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주-D008] 주객(主客) 손 낭중(孫郞中) : 
중국의 주객 낭중(主客郞中) 손존인(孫存仁)이다. 이때 역관(譯官) 김이석(金利錫)이 시장에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사려고 하였는데, 손존인이 우연히 그것을 보고는 “이 책은 외국 사람이 사서는 안 되는 책이다.” 하고, 이로 인하여 관소의 문을 닫고 바깥 출입을 금하였다.《국역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 386쪽》
[주-D009] 또 …… 들었다 : 
원문에는 ‘亦旣竊聞垂統矣’로 되어 있는데, 《간이집(簡易集)》 권4에 의거하여 ‘亦旣竊聞垂完矣’로 바로잡았다.
[주-D010] 그리고 …… 날에는 : 
원문에는 ‘遺之’로 되어 있는데, 《간이집》 권4에 의거하여 ‘遣之日’로 바로잡았다.
[주-D011] 오직 …… 뿐입니다 : 
원문에는 ‘惟不得留矣之爲懼耳’로 되어 있는데, 《간이집》 권4에 의거하여 ‘惟不得留俟之爲懼耳’로 바로잡았다.
[주-D012] 유독 …… 해서입니다 : 
원문에는 ‘獨恐執事者於鄙人等 所以不得不專來 不得留俟者 察之或泛 以容易於稟覆之際 以敢萬分有一缺誤也’로 되어 있는데, 《간이집》 권4에 의거하여 ‘獨恐執事者於鄙人等 所以不得不專來 不得不留俟者 察之或泛 而容易於稟覆之際 以致萬分有一缺誤也’로 바로잡았다.
[주-D013] 숭녕(崇寧)과 대관(大觀) : 
모두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이다.
[주-D014] 태청(太淸) :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연호이다.
[주-D015] 고루한 …… 사양하였다 : 
원문에는 ‘以固陋 不敢干盛禮’로 되어 있는데, 징강본(澂江本) 《고려도경(高麗圖經)》 권6에 의거하여 ‘辭以固陋 不敢干盛禮’로 바로잡았다.
[주-D016] 육상(六尙) : 
임금이 쓰는 일체의 일용품을 제공하는 여섯 가지 부서를 말한다. 송나라 때에는 상식(尙食), 상약(尙藥), 상의(尙衣), 상사(尙舍), 상온(尙醞), 상연(尙輦)을 두었다.《文獻通考 職官考》
[주-D017] 중귀인(中貴人) 
황제가 아주 총애하는 사람으로, 내시(內侍)를 가리킨다.
[주-D018] 각자 …… 하였다 : 
원문에는 ‘各自使’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6에 의거하여 ‘各自便’으로 바로잡았다.
[주-D019] 천보(天保)의 시 :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신하가 임금의 복을 빌어 주며 부르는 노래이다.
[주-D020] 아유가빈(我有嘉賓)의 시 : 
《시경》 녹명(鹿鳴)의 한 구절로, 잔치를 베풀어 주며 부르는 노래이다.
[주-D021] 삼광(三光)과 오악(五嶽) : 
삼광은 해, 달, 별의 빛을 말하고, 오악은 태산(泰山), 숭산(嵩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을 말하는데, 흔히 천지(天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22] 석목(析木) : 
중국의 유연(幽燕) 지역을 가리킨다. 본디는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십이진(十二辰)으로는 인(寅)이고, 이십팔수(二十八宿)로는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의 사이에 속하는데, 이곳은 유연의 분야(分野)에 해당되므로, 유연 지방의 대칭(代稱)으로 쓰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23] 한 사람이 …… 하는 자 : 
《서경(書經)》 군석(君奭)에 나오는 말로, 천자의 덕을 잘 보좌하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 사람은 천자(天子)를 가리킨다.
[주-D024] 마치 …… 맞추는 것 :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낄 줄을 모른다는 말로, 힘들이지 않고도 문장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한다는 뜻이다. 옥이 많이 산출되는 곤산(崑山)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옥돌을 던져서 참새를 잡는다고 한다.
[주-D025] 주(周)나라 태사(太師) :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주-D026] 홍륜(洪倫)과 김의(金義)의 난(亂) : 
명(明)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피살된 사건을 말한다. 공민왕 23년(1374)에 명나라 사신인 임밀(林密)과 채빈이 와서 말을 구하여 명나라로 돌아갈 적에 김의(金義)가 이들을 호송하여 갔는데, 명나라 사신이 김의를 못살게 굴자 김의가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러 채빈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납치한 다음, 군사와 공마(貢馬)를 거느리고 북원(北元)의 나하추(納哈出)에게로 달아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명나라 태조의 노여움을 사 고려와 명나라 간의 외교 관계가 냉각되었다.
[주-D027] 자어(子魚) : 
선조 30년(1597)에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나왔다가 우리나라의 시를 모아 《조선시선(朝鮮詩選)》을 편집한 오명제(吳明濟)의 자(字)이다.
[주-D028] 상사(上駟)와 무비(武備) 두 대인(大人) : 
이해에 사신으로 온 상사원(上駟院) 일등시위(一等侍衛) 가일급(加一給) 마(馬)와 부칙시위(副勅侍衛) 갈(噶)을 가리킨다. 이들은 청(淸)나라의 유우(鈕祐) 노씨(盧氏)의 시호(諡號)를 효소황후(孝昭皇后)로 올린 데 대한 칙서를 전하기 위해서 왔는데, 돌아가면서 우리나라의 문적(文籍)과 문장, 글씨 등을 달라고 요구하므로 각종 문집과 문장 및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로 쓴 글씨를 주었다.《국역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 355쪽》
[주-D029] 교영의(郊迎儀) : 
외국의 사신이 왔을 적에 국왕이 교외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하는 의식을 말한다.
[주-D030] 음빙(飮氷)의 행차 : 
사신의 행차를 말한다. 옛날에 섭공(葉公) 자고(子高)가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자(孔子)에게 말하기를, “아침에 사신으로 가라는 명을 받고는 저녁에 얼음을 먹었는데도 저의 몸 안은 근심으로 인해 타들어 갑니다.” 하였다.《莊子 人間世》
[주-D031] 공사(公私) 간에 모두 비어 : 
원문에는 ‘公和未立’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公私未立’으로 바로잡았다.
[주-D032] 동사(東事) : 
원문에는 ‘兵事’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月沙集)》 권45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33] 도찰원우첨도어사 경리조선군무(都察院右僉都御史經理朝鮮軍務) : 
원문에는 ‘都密院右僉都御史經理朝鮮軍務’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34] 앞으로 …… 하였으며 : 
원문에는 ‘前往剪賊’으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 권45에 의거하여 ‘前往迎賊’으로 바로잡았다.
[주-D035] 여러 …… 하였는데 : 
원문에는 ‘□諸將退舍’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 권45에 의거하여 ‘麾諸將退舍’로 보충해서 번역하였다.
[주-D036] 모두 …… 따졌으며 : 
원문에는 ‘咸合詞頌公冤’으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 권45에 의거해서 ‘咸合詞訟公冤’으로 바로잡았다.
[주-D037] 사신의 …… 이었다 : 
원문에는 ‘冠蓋給屬於道’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 권45에 의거하여 ‘冠蓋絡屬於道’로 바로잡았다.
[주-D038] 의리상 …… 이유로 : 
원문에는 ‘義不苟其進退’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 권45에 의거하여 ‘義不可苟其進退’로 바로잡았다.
[주-D039] 二 : 
원문에는 ‘三’으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 권45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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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에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아침을 3분의 1 드셨다. 유구 관생(琉球官生) 채세창이 그 나라 사람 정효덕(鄭孝德)과 함께 나란히 왔다. 지난번 방문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안부 인사〔寒喧〕를 마치자 채생이 시 한 수를 주었다. 제하여 이 선생(李先生 이휘중)의 부채 선물에 감사하며 존운(尊韻)에 화답하여 가르침을 구한다고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솔 부채 만든 것은 신의 솜씨요 / 製成松箑盡神工
훈현곡(薰絃曲) 한 수가 흰 비단 속에 있네 / 一曲薰絃白繭中
더운 날 기다렸다 흰 깃 부채 펼쳐 / 願待炎天舒素羽
온 자리에 어진 바람 일으키고 싶구나 / 試看滿座拂仁風

하고, 말미에 ‘중산(中山) 채세창 쓰다.’라 하였다. 한번 읽어보고는 훌륭한 솜씨라 하고, 이어서 정생(鄭生)의 나이를 물었다. 정생이 말하기를, “27세입니다.”라 하였다.
채세창이 말하였다.
“이적(夷狄)에 있으면 이적을 행하고, 중국에 있어서는 중국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조공(朝貢)을 행하는 나라는 이치로 논하자면 마땅히 천조의 제도를 삼가 쫓음이 옳거늘 지금 맑은 거동〔淸儀〕을 보니 조금 다름이 있습니다. 그 연고를 듣고자 합니다.”
내가 말하였다.
자사 선생이 천하의 같은 바를 논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수레와 글과 윤리입니다. 의관문물까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입은 바는 선왕의 법복이요, 내가 머리에 쓴 바는 명나라의 유제(遺制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입니다. 이제 천하가 바뀌었으니 내 어찌 구태여 저들에게 맞추며, 그들 또한 부화뇌동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채생은 “옳습니다.”라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귀국에서 바친 것은 어떤 물건입니까?”
“적동(赤銅 구리), 유황(硫磺), 백석(白錫 주석) 등의 물건입니다.”
“귀국을 개황(開荒 개척함)한 군주는 누구입니까?”
정효덕이 대답하였다.
“개국한 사람은 천손씨(天孫氏)입니다. 폐국(弊國 자기 나라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의 지방이 매우 좁으며 아울러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난 인물〔英物〕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지방이 몇 리이며 주현은 얼마나 되는가. 관제는 어떠하며 남방이 날이 더우니 농잠(農蠶)은 1년에 두 번 거둘 수 있는가?”
“지방이 매우 협소하나 몇 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36개의 섬이 속해 있고 농잠은 한 번 거둡니다. 관제는 중국과 같지만 그 명칭은 다릅니다.”
“인재를 등용할 때 역시 과거를 보는가, 두 사람은 선발되어 온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인가?”라 하니
“왕명을 받들고 왔습니다만 작문으로 뽑힌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액수를 갖추어 정해 보내는가?”
“오직 연기(年紀)를 봐서 보냅니다.”
“공사(貢士)라 칭하는 걸 보니, 마땅히 그 선비 가운데 우수한 자를 선발하는 구려.”
“우리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는 먼저 인품을 보며 행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연후에 문예(文藝)를 봅니다.”
“사환가의 자제를 뽑아서 보내는가?
“우리나라 왕법은 대대로 벼슬을 하며 대대로 녹을 줍니다.”
“이곳에 왔다가 귀국하면 어떤 보상이 있는가?
채세창이 말하기를, “보상이 있기는 하나, 미리 논하지는 못합니다.”
내가 말하였다. “국두성(國頭城)과 청하산(靑荷山)은 어떠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정효덕이 말하기를, “모두 우리 경내(境內)에 있지만 국두성이 아니라 국두기(國頭崎)입니다.”

   약과와 흑임다식(黑荏茶食), 전복, 육포〔脯肉〕 등으로 대접하였는데 그 이름을 일일이 물은 후에야 먹었다. 그러나 오직 전복만은 묻지 않았으니 아마 그 나라에서도 이것이 생산되나 보다. 다 먹고 나머지를 싸서 종인에게 주었다. 종인 또한 유구에서 온 자인데 미목(眉目)이 수려하여 되레 채생, 정생 두 사람보다 나았다. 정생이 만금단(萬金丹) 20편(片)을 주었는데 길이는 1촌이요, 넓이는 1분(分)쯤 되었으며 안과 겉을 금박으로 입혔다.
내가 말하였다. “무슨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까?”
대답하기를, “남자 여자 모두 과식으로 소화가 안 되어 복통이 있을 때와 중풍, 더위 먹음, 갑자기 혼절하거나 입이 열리지 않는 증세를 치료합니다. 또한 술독〔酒毒〕을 풀어주고 다치거나 맞아서 상처 입은 경우 안으로는 복용하고 겉에다는 바릅니다. 그러나 임신한 여자는 반드시 기피해야 합니다.”라 하였다.
“복용하고 바를 때 무슨 물을 써야 합니까?”
“모두 끓인 맹물〔白滾湯〕을 사용하여 먹으면 됩니다.”
“복용하는 양을 얼마만큼 해야 합니까?”
“경중(輕重)을 보지만, 구애받지 않습니다.”
“경(輕)한 곳은 얼마큼 쓰며, 중(重)한 곳은 얼마큼 씁니까?”
“경한 곳은 2편, 중한 곳은 3편에서 5편이면 무방합니다.”
채세창이 뒤축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며 말하기를, “시고(詩稿) 한 권입니다. 선생의 부삭(斧削 문장 수정을 바라는 것에 대한 겸사)을 부탁드립니다.” 책 위에도 그렇게 썼는데, 내가 받고는 말하였다. “수일 내로 의논하여 보낼 테니 우선 책상에 놓아두십시오.” “네 그렇게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이 함께 일어나 말하였다. “일이 있어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시오.” 하였더니 “어떤 이가 우리를 청해 술을 먹자고 합니다.”라 하고 문을 나섰다. 정사가 또한 맞이하여 갔다고 한다.



황명 진류(陳留) 《오잡조(五雜徂)》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유구국은 나라가 작고 가난하며 약하여 자립할 수 없었다. 비록 중국의 책봉을 받았으나 또한 왜국에 신복(臣服)하여 왜국 사신들이 끊임없이 이르니 중국 사신과 서로 섞였다. 대개 왜국과는 땅이 접해 있는 까닭에 왜국이 공격하기 매우 쉬웠으니 중국이 어찌 큰 바다를 건너 구원할 수 있었겠는가? 그 나라는 신을 공경하며 여인 가운데 수절하는 이를 시동(尸童)으로 삼아 ‘여왕(女王)’이라 일컬었다. 대대로 신이 뽑아 뒤를 잇게 하였는데 국왕 이하는 절하며 빌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삼가 밭에서 장차 수확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신에게 기도하고 신이 먼저 채집하여 두서너 이삭을 먹은 연후에 감히 수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채 먹으면 바로 죽었다. 재앙을 다스리고 환난을 막으매 여러 번 영험함이 나타났다. 중국 사신이 이르면 여왕이 종인 2, 3백 명을 거느렸는데 각기 정수리에 풀 띠를 두르고〔草圜〕 궁중으로 들어가 공억(供億 음식 접대)을 살폈으니 혹 독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여러 종인들은 모두 양가(良家)의 여인들이었는데, 신은 능히 그 여인들의 혼(魂)을 쥐고 갈 뿐이다. 중국사람 중 저들을 대신하여 음식을 다스리는 자가 있었는데 신이 강림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 소리가 우는 듯해 마치 모기와 같았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유구국이 비록 중국의 책봉을 받아 영화를 누렸지만 사신이 그 나라에 한번 이르면 공억을 강제로 다 빼앗고〔誅求〕 모두 비게 되면 심지어 왕비의 비녀와 귀고리까지 채워서 보낸다.

   또 장학례(張學禮)《중산기략(中山記略)》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유구는 바다 가운데 작은 나라로 토산(土産)이 오직 초포(蕉布)와 유황(硫磺)뿐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담배, 칼, 종이, 쥘부채, 칠기가 모두 일본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쌀과 보리가 있는데 단지 왕부(王府)에만 바칠 수 있다. 백성들은 모두 고구마를 먹는데, 모양은 마〔薯蕷〕와 같다. 빈객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는 매우 간소하여 고기 한 덩이, 술 한 통으로 몇 사람이 즐기니 친절함을 베풀 따름이며 한 자리에 한두 그릇뿐이다. 부부와 자녀들은 같은 자리에서 밥 먹는 법이 없고 먹고 남은 것은 모두 버린다. 손님이 방문하면 상하,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손님의 뜻대로 맡긴다.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번 머리를 조아리면 담배와 술과 차를 끓여 계속 내온다. 만일 손님이 돌아가려 하면 또 머리를 조아린 후 나간다. 주인은 송영(送迎)하지 않는데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한다. 벼슬하는 이의 집에는 모두 서실과 객실〔客軒〕이 갖추어져 있다. 뜰에 꽃과 대나무가 사시사철 벌여 있고 시렁에는 사서(四書), 당시(唐詩), 통감(通鑑) 등의 책이 진열되어 있는데 판을 뒤집어 보니 높고 넓게 그 나라 음으로 곁에 써 놓았다. 또 본국의 서책 또한 많은데 단지 어떤 일과 어떤 말을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설관(設官)의 법도는 당ㆍ송나라부터 원나라까지 되어 있다. 왕의 장자(長子)로서 작위를 세습해야만 하는 자는 중국에 이르러 국자감에 들어가 글을 읽고 예를 익히다가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비로소 귀국하여 책봉을 받는다. 홍희(洪熙) 연간에 왕래할 때 풍파의 위험을 예측할 수 없다 가엾이 여겨 특별히 면해 주었다. 36성(姓)을 각각 하사 받은 사람들이 36개의 섬을 다스리니 자손들이 대대로 통사(通使)의 직책을 세습하고 중국의 언어와 문자를 배웠다. 지금까지 사은(謝恩)과 조공에 봉해지기를 청한 이들은 모두 여러 성씨들의 후예이니 모두 성명이 있고 그 나머지는 비록 높은 벼슬일지라도 이름은 있지만 성(姓)이 없다.

   선비를 취하는 방법에 문(文)을 숭상하는 법이 없고 시험도 보지 않는다. 현량(賢良 어질고 착함)하며 바른 사람을 천거하면 수재가 되었다가 법사(法司 사법과 형옥을 담당하는 관리)를 맡는다. 관장(官長 고을의 관리)이 있지만 아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백성들이 돌아가며 직을 선다. 그 법을 집행함이 매우 엄하고 인정과 체면에 이끌리지 않는다. 관장(官長)의 부자(父子)나 형제(兄弟)라도 법을 어기면 죄가 가벼울 때는 도류(徒流)에 처하고 무거울 때는 사형에 처하여 터럭만큼도 편들고 감싸주지〔曲庇〕 않는다. 백성들은 관장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남녀가 모두 비녀를 뽑고 신발을 벗은 채 길가에 엎드려 자니 가기를 기다린 연후에 감히 갈 수 있었으니 조심하고 법을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풍속이 온후하여 태곳적의 풍속이 있다. 죄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대부가 법사를 통해 듣고, 법사는 그 원인과 곡직(曲直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펴 잘못한 자에게 죽으라고 명을 하면 감히 지체하지 않는다. 법을 범한 것이 중한 자가 있으면 끝내 스스로 목을 찌르거나 목매어 자살하게 하는데 감히 망녕되게 목숨을 구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배냇머리를 자르지 않으니 남자는 20세가 되어 아내를 맞이한 후에 정수리에 있는 머리카락을 깎아내고 단지 주변만 남겨 하나로 묶은 뒤 앞이마에 끌어 놓는다. 오른편에는 작은 여의(如意) 비녀를 꽂는데 여의는 귀천(貴賤)과 품급(品級 벼슬의 등급)에 따라 나뉜다. 국왕은 금에 꽃을 돋운〔起花〕 것을 사용하며 왕의 숙질과 형제는 광금(光金)만 사용한다. 삼법사(三法司)는 자금(紫金 적동(赤銅)을 달리 이르는 말)으로, 대부(大夫)들은 은에 꽃을 돋운 것을 사용한다. 대부와 통사(通使) 등의 직책은 광은(光銀)을 사용하고 백성들은 대모(玳瑁)나 명각(明角 우각, 즉 소뿔의 일종), 대나무로 된 비녀를 사용할 뿐이다. 부녀자 또한 그러하다. 의복은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겉옷에 허리에는 온폭〔全幅〕 비단을 매었는데 길이가 한 길 남짓 되며 양쪽에 부채, 담배 주머니〔烟袋〕, 작은 칼 등을 꽂는다. 발에는 굽이 없는 가죽신을 신고 관(冠)은 종이로 속을 만들고 주포(紬布 굵은 명주실로 짠 직물)로 감싼다. 귀천에 구분이 있고 길이는 7촌, 넓이는 2분으로 세 번씩 꺾어 돌려 한꺼번에 둥글게 만든다. 왕은 오색 화릉(五色花綾 오색의 꽃무늬 비단)을 사용하고 왕의 숙질이나 형제, 자질(子姪)은 황화릉(黃花綾)을 사용하며 종친은 황광릉(黃光綾)을 사용한다. 법사(法司)는 자화릉(紫花綾)을 사용하며 대부와 통사 등의 관리들은 홍모(紅帽)를 사용한다. 처음 왕부에 나아가 수재가 되면 홍광견(紅光絹)을 사용하며 왕부의 역인(役人) 및 잡직(雜職)들은 홍포를 사용한다. 백성들은 모두 청록포(靑綠布)를 사용한다. 이는 정해진 제도이다. 저 나라 사람들은 비록 제도가 중국과 같지만 언어는 크게 다르다. 금(金)은 ‘액니(額膩)’라 하고, 은(銀)은 ‘액난(喀難)’이라 한다. 아버지는 ‘안지(安知)’라 하며 크다〔大〕는 ‘왜포살(倭捕煞)’, 작다〔小〕는 ‘미살(彌煞)’이라 한다. 붉다〔紅〕는 ‘하갈살(呀噶煞)’, 희다〔白〕는 ‘십육살(十六煞)’이라 하며 남자는 ‘회경갈(會耕噶)’, 여자는 ‘회남궁(會南宮)’, 어리다〔幼少〕는 ‘와람벽(蛙藍壁)’ 부모는 ‘왜아(倭牙)’라 한다. 먹다〔吃〕는 ‘미소리(米小利)’, 밥〔飯〕은 ‘안반(安班)’, 술〔酒〕은 ‘살궤(薩几)’이다. 좋다〔好〕는 ‘우달살(優噠煞)’, 싫다〔不好〕는 ‘공살(控煞)’, 취하다〔醉〕는 ‘위제(威帝)’, 자다〔睡覺〕는 은제(殷帝)이다. 사람 이름 가운데 4, 5글자로 된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마란민달라(馬爛敏達羅)’, ‘객난고사고(喀難顧司姑)’ 류와 같은 것이다. 오직 아미다(阿彌多)와 야불소(夜弗蘇) 두 이름으로 불리는 자가 매우 많을 뿐이다.

   나라에 영은정(迎恩亭)이 있는데 중국 사신들이 배를 내리는 곳이다. 해구(海口 항만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 마을 거리가 서로 이어져 있어 인가가 조밀하다. 이곳을 지나면 중국 사신이 머무는 관소〔天使館〕이다. 예전부터 책봉(冊封) 원역들은 모두 내관에 머물렀는데 가운데 청당(廳堂), 낭방(廊房 청당 주위에 있는 방), 누각, 정원(亭園), 대사(臺榭), 서실(書室), 소헌(小軒)이 있고 주위가 넓어 북경의 보국사와 견줄 만하다. 관내에는 탁자〔卓〕와 의자〔椅〕, 평상〔牀〕과 장(帳), 주발과 접시〔碗碟〕 등의 물건들을 모두 중국 제도대로 만들어 놓고 전담하는 관리〔專司〕를 두어 곳집〔庫〕에 보관하며 중국 사신이 오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바야흐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관사는 비록 퇴락하였지만 뒤편의 누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때문에 명나라 사신 두삼책(杜三策)〈매화시(梅花詩)〉 100수를 벽에다 제한 것이다. 나머지 읊은 것들도 매우 많았다. 바깥에 편액이 있는데 자획이 모두 옛것으로 명나라 역대 명공들의 유적(遺蹟)이다. 관소 앞에는 빈 땅이 100무(畝)쯤 있는데 매일 오후에 여자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광주리를 이고 끌고 이곳에 모여 물건을 팔기 위해 실로 흥정을 한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이면 돌아가는 것이다. 그 사이에 또한 특색 있는 풍속도 있다. 여자들은 어려서부터 손가락 위에 검은 점을 새기는데, 해마다 하나씩 더 새겨 12, 3세가 되어 출가할 때쯤이면 결국 매화(梅花)가 완성된다. 늙고 쇠약해지게 되면 손등이 온통 까맣게 변해버린다. 머리 길이는 4, 5척이며 머리빗으로 빗어서 하나로 묶는데 기름처럼 윤기가 나며 먹빛처럼 검다. 눈썹과 살적은 다듬지 않고 비녀와 귀고리〔釵鐶〕도 하지 않는다. 깃이 큰 옷을 입는데 색은 흰색을 좋아한다. 때로는 손으로 치마를 끌기도 하고 때로는 옷으로 머리를 덮기도 하여 마치 쓰개 옷 모양 같기도 하다. 만일 남편이 있는 여인이 간음을 범하면 간음한 남자와 여자 모두 죽인다. 또 여자들 가운데 시집을 가지 않은 이가 있는데 끝내는 부모를 떠나 홀로 살면서 외도(外島)의 무역하는 이와 마음대로 접한다. 여자의 친척, 형제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외객(外客)의 친척들과 왕래하며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만약 이곳에 아내가 있는 자를 만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안남국 삼사신이 사행 길에서 지은 《소상백영(瀟湘百咏)》 1책을 보내며 우리나라 삼사신에게 서문을 써 달라 부탁하였다. 부사 여귀돈이 지은 것에 왕왕 경구(警句)가 있었다. 마침내 류군에게 작은 책자에 베끼라 분부하였다. 진휘밀과 여귀돈 또한 ‘왕(王)’ 자 운으로 각각 2편을 지어 화답시를 청하였다. 그러나 유독 부사 정춘주(鄭春澍)만 시(詩)가 없고 단지 끝에 이름만 썼을 뿐이니 아마도 우리 부사(副使 조광규)께서 그의 시에 화답하지 않은 것을 알리려 하였나보다.

   소서(小序)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뒤늦게 등화의 기쁨을 알려주시겠다더니 과연 보름 전 2일, 은혜롭게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손을 씻고 외우고 또 외우며 공경하고 공경하며 사모하고 사모하며 흠선(欽羨 공경하고 부러워함)하니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어찌 가히 우러러 받들겠습니까? 〈백설양춘(白雪陽春)〉이 진실로 화답함이 적다고 합니다. 다만 듣기로는, 아름다움은 추함이 아니라면 그 아름다움이 전해지지 않고 정밀함은 거침이 아니라면 그 정밀함을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감히 더러움으로 드리니 오직 다시 명하여 애오라지 마음에 품은 것을 기록하여 대신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시에 이르기를,

어찌 돌아가고픈 생각 없으랴만 간서(簡書) 두려워 / 豈不懷歸畏簡書
타향에서 지기(知己)의 흥(興) 어떠하리요 / 他鄕知己興何如
신교(神交)에 짧은 글로 경개(傾蓋)의 벗됨 기뻐하니 / 神交片語忭傾蓋
뜻 맞아 연이은 시로 패옥이 빛나는 듯 / 意會連篇耀佩琚
높은 명망 떠받침은 용령(龍嶺)의 밖이요 / 峻望高撑龍嶺外
맑은 모습 멀고 넓어 압록강 너머라네 / 淸標遠漾鴨江餘
이(李)ㆍ풍(馮) 이후 훈지(塤箎)의 정 적어졌지만 / 李馮之後塤箎少
시 주머니〔奚囊〕 잘 찾아서 벌여 놓았지 / 好索奚囊再列臚
인자한 이 어디 있어 몇 통의 편지 쓰나 / 惠人何處數封書
글자마다 주옥같아 그림보다 낫다네 / 字字珠璣畫不如
납마(納馬)와 호방한 재주 자산(子産)에게 부끄럽고 / 納馬豪才羞子産
조룡(鵰龍)과 염사(艶思)는 왕거(王琚)에게 양보하였네 / 鵰龍艶思讓王琚
천년 위로 벗을 사귈 수 없었으나 / 未能取友千秊上
오히려 다행히도 만 리 밖에서 사귀네 / 猶幸談交萬里餘
황궁에서 푸른 안개 바라보던 날 / 丹陛望纏靑靄日
훌륭한 시구를 계속 전해 주었지 / 擬摹佳句續傳臚

라 하고, 그 밑에 ‘안남 정사(正使) 동산(東山) 진휘밀’이라 썼다.

   또 소서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손을 씻고 꽃다운 글월을 받아보니 온후홍원(溫厚弘遠)하고 뜻과 맛이 흘러 넘쳐서 사랑하여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인이 이르기를, ‘반드시 천지의 호령(浩靈)이 붓을 얼음 사발 눈 잔 가운데 적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에서 서로 부합하는 바가 있으니, 마치 먼저 아름다운 제작을 유도한 것과 같습니다. 벽돌을 던져서 옥구슬을 끌어들였으니 그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은혜를 입어 서문 한 통도 바란 바대로 또한 이미 얻었고, 만남을 인연하여 외람되이 멀리서 편지까지 받자왔으니, 실로 격이 맞지 않음에 절로 얼굴이 붉어짐이요, 미처 얼굴이 익기도 전에 우정을 맺은 격입니다. 지위가 높으시고 미묘한 것을 의론하심에 호리를 다 분석하시고, 일기(一氣 한목에 내치는 기운)로 휘둘러 씻어 내심에 강을 기울여 협곡에 쏟은 것 같으니 실로 명유거공(名儒鉅公)이라 보통 인물이 아니십니다. 3번이나 보잘것없는 제 시를 돌아봄에 삿된 견해에 끌리고 묵은 말을 모아 놓은 지라 육손이와 같은데, 과분하게도 칭찬을 해주시니 다행이자 부끄럽습니다. 서문의 말미에 강례궁리(講禮窮理)로써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고 다정하고 친밀하게 권면해 주시니 감히 성대한 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편찬한 역사서가 참됨을 가려 뽑음은 구공(歐公 구양수(歐陽脩))의 《박고도(博古圖)》가 아니로되 사군의 글은 채군모(蔡君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서수관(鼠鬚管 쥐 수염으로 만든 붓), 용단차(龍團茶 용무늬가 찍힌 차)로써 윤필(潤筆)해 주신 대가를 드릴 수 없음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시 원운에 의거하여 욕된 글로써 올려드립니다.

시에 이르기를,

이역서도 뜻 합하면 같은 나라 사람이니 / 異方合志亦同方
학술이 예로부터 공자에 근본해서지 / 學術從來本素王
온갖 복에 함께 기뻐 오선(五善)을 구가하나 / 完福共喜歌五善
빼어난 재주에 나만 부끄러우니 삼장이 결핍하였네 / 逸才偏愧乏三長
측리지와 백추지에 시 써서 주고받아 / 側釐白硾交投贈
복식과 법제를 다투어 표창하였다 / 端委洪疇競表章
붓 가는 대로 고쳐 주셔도 종내 부족할 텐데 / 信筆雌黃終歉歉
찬란한 맑은 의론으로 과히 높혀 주셨네
/ 粲花淸欲過揄揚

위대한 재주 경위는 동방에 양보하니 / 韙才端的讓東方
의리의 연원이 백대 임금 관통하였네 / 義理淵源冠百王
사십 일 사귐에 매화 봄소식 무겁고 / 尙友四旬梅信重
2월의 상사(想思)에 버들가지 길어지네 / 相思二月柳條長
외람되이 문자로 이별의 한 이끌어서 / 枉因文字牽離恨
다시금 겸종 편에 짧은 글을 보낸다 / 還借傔從寄短章
풍정을 써 보려 하나 불초함이 꺼려지니 / 擬寫風情嫌莫肖
단대에서 가만히 맑은 그대 떠올린다 / 丹臺殷殷想淸揚

라 하고, 그 밑에 한 줄로 ‘안남 부사 연하(延河) 진휘밀’이라 썼다.

   아버지께서 몸이 불편하셔서〔愆候〕 저녁 진지를 조금만 드셨다. 화담탕을 그치시고 목미차(木米茶)를 드셨다. 지포 소리가 또 밤새도록 이어졌다.


[주-D001] 훈현곡(勳絃曲) : 
임금의 시문(詩文)을 비유한 말이다.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성냄을 풀어 줄 만하도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 자사 …… 윤리입니다 : 
《중용(中庸)》 27장, “지금 천하에 수레는 궤폭(軌幅)이 같으며 글은 문자가 같고 행동은 차서(次序)가 같다.[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3] 천손씨(天孫氏) : 
이규경(李圭景)《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사적총설(史籍總說)〉에 실린 ‘유구(琉球)’ 관련 기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유구가 개국하던 초기에 천손씨라는 자가 있어 25대를 전해왔다. 홍황(洪荒) 을축년에서부터 순희(淳熙) 13년에 이르러 역신 이용(利勇)이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자 순천(舜天)이 그를 토벌하여 죽였다. 이용이 죽고 나자 중의(衆議)에 의해 순천이 왕으로 추대되고 천손씨는 망하였다.”
[주-D004] 과식으로 …… 되어 : 
원문에는 ‘상식(傷食)’으로 되어 있다. 음식을 많이 먹어 비위(脾胃)가 손상되는데 이르는 병증을 말한다.
[주-D005] 오잡조(五雜徂) : 
사조제(謝肇淛)가 지은 16권의 책이다. 전체를 천(天)ㆍ지(地)ㆍ인(人)ㆍ물(物)ㆍ사(事)의 5부로 나누고, 자연현상ㆍ인사(人事)현상 등의 넓은 범위에 걸쳐서 저자의 견문과 의견을 항목별로 정리한 것이다. 원문에는 진류의 《오잡조》라 되어 있는데, 이는 오류인 듯하다.
[주-D006] 시동(尸童) : 
옛날에 제사 지낼 때 신위(神位) 대신으로 교의(交椅)에 앉히던 어린아이를 말한다.
[주-D007] 여러 성씨들의 후예 : 
여기서는 성(姓)을 하사 받은 36명을 말한다.
[주-D008] 도류(徒流) :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도형은 일정한 기간 지정된 장소에서 노역에 종사하게 하던 형벌이며 유형은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하는 형벌이다. 유배(流配)라고도 한다.
[주-D009] 나라가 …… 온후하여 : 
원문에는 ‘도불습유(道不拾遺)’라 되어 있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가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형벌이 준엄하여 백성이 법을 범하지 아니하거나 민심이 순후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한비자(韓非子)》에 나온다.
[주-D010] 목매어 자살하게 하는데 : 
원문은 ‘투환(投繯)’이다. 《후한서》 〈오우전(吳祐傳)〉에 “因投繯而死”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현(李賢)은 주(注)에서 “끈을 매어 던진 후 목을 매는 것을 말한다.[謂以繩為繯, 投之而縊也.]”라 하였다.
[주-D011] 여의(如意) : 
본래 ‘여의주(如意珠)’는 용의 턱 아래에 있다는 구슬로 영험함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여의주처럼 진귀한 구슬을 말하는 듯하다.
[주-D012] 삼법사(三法司) : 
형법을 관리하는 부서로, 명대와 청대에는 형부(刑部), 도찰원(都察院), 대리시(大理寺)를 일컬어 삼법사라 하였다. 여기서는 유구국 내의 형법을 관리하는 직종을 의미한다.
[주-D013] 대모(玳瑁) : 
패각 대신 쓰이는 귀갑을 지칭하며, 그것을 아주 얇게 갈아서 그 이면에 칠한 붉은 색이 표면에 비쳐 보이도록 하는 까닭에 복홍(伏紅) 또는 복채(伏彩)라고도 일컫는다.
[주-D014] 대사(臺榭) : 
대(臺)와 사(榭)를 통칭한 것이다. 높고 큰 누각이나 정자를 널리 칭하는 말이다. 대개 지면보다 높이 세우되 위를 평평하게 만든 것을 ‘대(臺)’라 하며, 높은 대 위에 나무로 지어 멀리 조망할 수 있도록 지은 것을 ‘사(榭)’라 한다.
[주-D015] 두삼책(杜三策) : 
산동 동평현(東平縣) 출신으로 자는 의재(毅齋)이며 천계(天啓) 연간(1621~1627)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주-D016] 부사 여귀돈 : 
원문에는 ‘여사(黎使)’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부사 여귀돈으로 번역하였다.
[주-D017] 부사 정춘주(鄭春澍) : 
원문에는 ‘정사(鄭使)’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부사 정춘주로 번역하였다.
[주-D018] 백설양춘(白雪陽春) : 
악곡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광(師曠) 혹은 제(齊)나라 유연자(劉涓子)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에 “손님 가운데 영(郢 초나라의 수도)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처음 부른 노래는 〈하리파인(下里巴人)〉이었는데, 나라 안에 모여서 노래에 화답하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였습니다.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를 때는 나라 안에 모여서 화답하는 자들이 수백 명이었습니다. 〈양춘백설(陽春白雪)〉을 부를 때는 나라 안에 모여서 화답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불과하였습니다.[客有歌於郢中者, 其始曰下里巴人, 國中屬而和者數千人. 其為陽阿薤露, 國中屬而和者數百人. 其為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不過數十人.]”라고 하였다. 이후로 〈백설양춘(白雪陽春)〉은 통속음악에 비해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고아한 음악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주-D019] 어찌 …… 두려워 : 
이 구절은 《시경》 〈소아 출거(出車)〉를 인용한 것이다. “어찌 돌아가고픈 생각이 없었으랴만, 이 간서가 두려웠느니라.[豈不懷歸 畏此簡書]”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주나라 장수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험윤(玁狁)을 정벌하여 평정하고 돌아오면서 부른 노래이다. 여기서 간서(簡書)는 단순한 편지글이 아닌 옛날, 임금이 장수를 전장에 내보낼 때에 내리는 명령서이다.
[주-D020] 경개(傾蓋)의 벗됨 : 
‘경개’는 수레를 멈추고 덮개를 기울여 잠시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본래는 경개여고(傾蓋如故)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하였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고 하여, 잠시 보았지만 의기가 통하는 사이를 말한다.
[주-D021] 이(李)ㆍ풍(馮) : 
조선의 이수광(李睟光, 1563~1628)과 안남의 풍극관(馮克寬, 1528~1613)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주-D022] 훈지(壎箎)의 정 : 
서로 가락이 잘 맞는 두 개의 관악기로서 보통 형제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 〈소아 하인사(何人斯)〉“형은 질나발 불고, 아우는 피리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뜻을 넓혀 형제처럼 돈독한 사이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주-D023] 시 주머니〔奚囊〕 : 
《신당서》 〈이하전(李賀傳)〉에 이르기를, “이하는 새벽마다 해가 뜨면 나귀를 타고 나갔는데 어린 노복이 따랐다. 이 노복은 등에 오래된 비단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이하는 마음에 드는 경치를 만나면 글로 써서 자루에 던졌다.[每旦日出, 出騎弱馬, 從小奚奴, 背古錦囊, 遇所得, 書投囊中.]”고 하였다. 이후로 ‘해낭(奚囊)’은 ‘시 주머니〔詩囊〕’라는 의미로 쓰였다.
[주-D024] 이역서도 …… 주셨네 : 
이 시는 여귀돈의 시집인 《계당시휘선(桂堂詩彙選)》에도 실려 있다. 《계당시휘선》에는 이 시의 말미에 시주(詩註)가 부기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남월에서는 해태(海苔)를 넣어서 종이를 만드는데, 그 결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으므로 ‘이지(理紙)’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측리’라 와전된 것이다. 백추지는 고려의 종이 이름이다. 보내온 시에 태백이 주나라 예복을〔端委〕입고 오나라를 다스린 고사를 들었기에, 나 역시 기자의 홍범구주 고사를 든 것이다. 硾는 ‘隊’와 발음이 같은데, 돌을 잘게 찧어서 종이로 만든 것이다.[南越以海苔為紙, 其理緒斜側號理紙, 訛為側釐. 白硾高麗紙名, 來詩舉泰伯端委治吳國故事, 我亦及箕子九疇故事. 硾音隊以石搗碎為紙.]”라는 항목이 있다. 그러나 《북원록》에는 시주가 부기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