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선일미(茶禪一味)’의 연원(淵源) 外

2018. 3. 28. 22:26차 이야기


      

[스크랩] 다선일미의 연원| 김완주 차문화 이야기
자운 | 조회 73 |추천 0 | 2009.10.23. 12:25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연원(淵源)

 

                                                            글쓴이:촌안(村顔)・박영환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동국대학 겸임교수)

 

   차를 마시는 일은 참으로 즐겁기도 하거니와

바쁘거나 또는 지루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이며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에게서의 ‘차 생활’이란

이미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처럼 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차를 마시는 여러 지인들의 생활 속에서도

어느덧 깊이 뿌리를 내리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기호품 내지는 취미생활로 정착한 모습을 자주 보곤 한다.

 

 이렇듯 차를 즐겨 마시는 이나 혹은 음차생활에 심취한 나머지

아예 차학(茶學)의 연구에 몰두하는 이들,

더 나아가 정식으로 다도를 전공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늘 차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 한구석에는

어느덧 찻잔 속에 피어나는 수연(水煙)처럼

어느새 알 듯 모를 듯 묘연한 화두로 뇌리 속을 맴도는 문구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20년 음차생활은 현실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숱한 번민으로부터

나를 편안하고 즐겁게도 해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끊임없는 정신세계로 향하도록

매섭게 채찍질하는 화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선일미(茶禪一味)――혹은 “선다일미(禪茶一味)”――였다.

 

비록 불가(佛家)에서 비롯된 화두이긴 하나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기본적인 음차생활에서부터 다도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인이라면 한번쯤은 반드시 짚어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많은 다인들이 ‘차 모임’을 갖거나 ‘차 문화행사’를 하거나

혹은 다도에 관한 연구 토론을 할 때면

심심찮게 자주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가(佛家)의 다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일반 다실에

“다선일미”라고 쓴 편액이나 족자가 걸려 있는 것을 아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의미를 알고 걸어 놓거나

또 그 실체를 진정으로 깨닫고 걸어놓은 이들은 오히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그 심오한 의미를 이해했거나 깨닫거나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심오한 뜻이나 깨달음은

각자의 개인적인 근기(根器)에 따라 맡기도록 하고,

필자는 단지 “다선일미”의 문구가 나오게 된 배경이라도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서툰 식견으로 감히 “다선일미”의 연원이나마 간략하게 살펴볼까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일반적인 상식 속에서 자주 거론되는

‘다선일미’는 대저 그 뿌리를 ‘일본다도’에서 자주 찾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마치 ‘일본다도’의 전유물인 것처럼 고정 관념화되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다도에 전문으로 종사하거나 연구하는 이들은 제외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일본이 동양 삼국(한․중․일) 중에서

 ‘다선일미’ 일구를 가장 널리 선양하고 체계화한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선일미’의 정신은

그 기원을 중국 송(宋)나라 때로 보지만,

그러나 사실 그 기원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당나라 때로 볼 수 있다.

 

 ‘다선일미’정신을 일본에 직접적 영향을 준 근원지는

 중국 절강성 항주시 여항(余杭)의 경산사(徑山寺)이다.

 

경산사의 ‘다선일미’ 정신은

다시 당나라 때의 고승이자

협산(夾山:湖南省 常德市 石文縣에 위치)의 개산종조(開山宗祖)이며

협산사(夾山寺)의 주지로 있던 선회선사(善會禪師)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선회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다선일미’의 정신은

 

 

송나라 때에 이르자 협산사에서 선회선사의 ‘다선일미’의 법통을 이어 받은

원오․극근(圓悟․克勤)스님에 의해 더욱 일어나게 된다.

 

원오․ 극근 선사는 20여 년간 협산사 주지로 있으면서

 ‘차(茶)와 선(禪)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마침내 ‘다선일미’의 참뜻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네 글자를 썼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선풍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원오선사의 문하에 크게 촉망받는 제자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1077~1136)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 선사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그 뒤, 남송(南宋) 소흥(紹興) 7년(1137년) ‘종고(宗杲)’선사는

승상 장준(張浚)의 추천으로 황명(皇命)을 받들어

항주 여항의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아울러 ‘다선일미’의 선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종고선사가 경산사의 주지로 온 이듬해 여름에는

설법을 듣고자 참가하는 승속(僧俗)이 무려 1,700여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을 위한 각종의 다연(茶宴)이 베풀어지고,

이에 따라 《선원청규(禪院淸規)》를 바탕으로 한

각종의 사찰다례의 의식 등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바로 그 유명한 ‘경산다연(徑山茶宴)’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또 일본에도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남송말년 일본다도의 비조(鼻祖)격인

에이사이(榮西禪師1141~1215)는 두 차례나 중국을 다녀가게 되고,

 

에이사이선사는 이때 원오선사가 지은

벽암록》과 함께 원오선사가 친필로 쓴

‘다선일미’의 묵적까지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뿐만 아니라 1191년에는 일본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

끽다(喫茶)양생기》를 저술하여

광범위하게 선도와 다도를 전파하였다.

 

해마다 일본의 많은 차문화답사단이

‘경산사(徑山寺)’를 잊지 않고 찾는 이유는

아마도 일본 다인들의 차생활을 통해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열정과

일본 다도의 최고경지로 일컬어지는

‘다선일미’의 발원지를 친견하고 싶은 흠모의 마음과 존경심의 발로가 아닐까?

 

 

 필자가 중국 유학시절 ‘다선일미’의 중흥조 격인 원오․극근 선사의 묘소를

어렵게 찾았을 때, 거기에도 어김없이 일본인 방문시찰단들이 몰려 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묘소를 돌보고 있는 스님의 말에 의하면

참배자들 중에 한국인은 필자 일행이 최초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솔직히 마음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다음에 또 지면이 허락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경산다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서울 불암산 자락에서 村顔・朴永煥 合掌

 
관련









다선일미의 정신이 양기방회로부터| 茶道古時


여민락 | 조회 19 |추천 0 | 2010.05.28. 10:46

 


화경청적 다선일미의 정신,양기방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다도의 정신으로 받들고 있는 다선일미와 和敬淸寂이라는 화두의 연원은 양기방회-백운수단과 원오극근선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연원을 밝히고자 중국 강서성 양기산 보통(普通)선사를 찾았다. 이 답사를 통해 일본 다도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다선일미란 말이 한국 선종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이 깊음을 알 수 있었다. 일본 다인들 뿐 아니라 한국 차인들까지도 다선일미란 말은 일본 차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이사이선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다선일미는 원오극근 선사가 일본인 제자에게 써 준 사자전결체라는 사실이 본지를 통해 밝혀지면서 다선일미의  전통이 뒤집어졌다. 연이어 다선일미의 연원이 양기방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일본 차문화계가 긴장하고 있다.

송대 선차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승은 양기방회였다. 한국 선종은 양기파로써, 다선일미나 화경청적을 만들어 낸 선승 모두 양기파에 속해  있다.양기방회는 임제-황룡-양기-백운수단-원오극근-호구소륭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종의 뿌리의 시작이었다. 양기파로 이어지는 한국 선종은 호구소륭을 거쳐 석옥청공에게 인가를 받고 돌아온 태고보우 선사가 차(茶)와 선(禪)이 한길이라고 설파한 뒤  중국 선차문화가 한국 땅에서  꽃피게 되었다. 송대 선차문화를 일으킨 양기방회의 다선일미 정신이 살아있는 현장,  양기산 보통선사를 지난 8월 6일 찾았다.

연꽃 봉우리를 품에 안은 듯한 양기산


   보통선사는 중국 강서성 평향시 상률구 양기향 양기촌에 자리잡고 있다. 양기산 보통선사는 양기방회(楊岐方會·992~1049)선사에 의해 임제종풍을  드높이면서 천하 사람의  눈을 열어놓았던 곳이다. 그래서 한국 선맥이 도도히 흐르는 한국선의 조정이나 다름없는 양기방회의 정신을 찾고, 그의 다선정신을 찾고자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이곳을 찾았다. 그런데 양기산에 도착하자 뜻밖에도 중국 다선의 조정이 바로 양기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였다. 이는 화경청적이니 다선일미니 하는 뿌리가 바로 양기산 보통선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법당이 무너진다’에 담긴 뜻

   보통선사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한 고행길이었다. 공안에서  나오는 세발 당나귀를 타고서야 갈 수 있는 길이라고나 할까. 그 정도로 길이 험했다. 그런데 양기사 가는 길목 곳곳에서 수고우를 끊고 풀을 먹이면서 유유자적하는 소녀와 천진무구한 양기촌 사람들을 만났다.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소년은 수줍은  듯 달아났다. 다시 차에 오르자  소년은 수고우 앞에 다가서서 고삐를 잡았다. 문득 『양기록』에 수록된 시가 생각난다.

 

양기산 방회 노스님


세다리 나귀를 타고
물빛 암소떼 속에 들어가
고삐 잡고 소를 끌었네
밭에 다 씨앗 뿌려
밥을 먹고
옥피리 비껴불며
밥과포(粟蒲)를 배불리 먹으니
사십년 이래로
총림에서 대단하게 여겼네

 

 이 공안을 떠올리면서 양기사를 찾아갔다. 산마루 중턱에 이르니 양기사를 가리키는 푯말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산문에 이르니 마치 연꽃이 겹겹이 둘러싸여 연화가 피어나는 듯하다.

 먼저 조전에 이르니 달마대사와 양기방회, 자명초원선사를 모시고 있고, 그 뒤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었다. 절의 주지인 환공비구니  스님에게 아미타불 오른손에 겹겹이 감싸고 있는 연꽃 봉우리의 내력에 대해 묻자 “이 절이 연화산이기에 연꽃을 형상화해서 그렇게 조성했다”고 말했다. 전각을 두루 살피다가 비구니  스님의 걱정스런 마음을 느꼈다. 4일 천둥번개로 인해 법당 뒤에 심어놓은 백수(柏水)가 내려쳐서 법당이 무너진 것이다. 공안에서 있을법한 일이다. 약산 유엄선사의 화두가 생각났다.

   유엄선사가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을 방장실로  불러 모았을 때다. 제자들이  모이자 선사는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법당이 쓰러진다. 법당이 쓰러져” 제자들이 뛰쳐나가 사방의 법당기둥을 힘껏 떠받쳤다. “이놈들 도대체 내 뜻을 모르는구나”  약산유엄은 그 말이 끝나자 곧 입적을 했다. ‘법당도료(法堂倒了)’라는 이 화두는 사람들을 질타하는 것으로 약산 유엄의 정신을 생각하게 한다. 

 전설에 따르면 당천보 4년 성관스님이 낙양에서 난을 피해  양기산에 은거할 때 백수(柏水)를 법당 뒷편에 심었는데 백수가 거꾸러지는 날 나는 다시 세상에 나온다는 말과 양기사가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온다. 
 
   환공비구니는 양기사가 앞으로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불교협회 회장인 일성방장은 “강서 선종의 전통은 ‘地靈人杰山靑水秀”라고 말하면서 강서선종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 한다. 그는 허운대사 이후 위앙종과 임제종 뿐  아니라 5종 가풍의 전통을 복구하면서 중국 선종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선일미의 연원, 양기로부터


  중국에 다선도량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은 양기방회의  법손들이다. 화경청적을 이끌어 낸 백운수단과 다선일미를 창안한 원오극근선사  등이 모두 양기파들인데,  양기사는 임제종의 발원지로 송대 이후 동아시아 선불교를 주로 해 온 임제종의 양기파를 말한다.
   양기방회 선사가 양기사로 입성하면서 다선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양기선사는 당대 고승 승광과 자명초원선사의 정신을 이어 크게  부흥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밑에 백운수단선사가 나왔는데, 그는 화경청적의 정신으로 다선을 이끌어 왔다. 이어 원오극근선사가 선다일미 사상을 펼치면서 임제종의 선다일미 정신은 중국 선불교 정신의 하나로 우뚝 선 봉우리가 되었다.

   그러면 양기방회는 누구인가. 그는 양기파의 창시자로 임제의 혈맥을 계승한 선승으로 이름은 방회요, 속성은 냉씨로 992년 북송 태종 순화3년  태어났으며 의춘(宜春) 사람이다. 그러한 연고로 의춘 근교인 평향 양기촌으로 들어가 선풍을 진작시켰다.

<연화북주에 연화차 향기 피어나고  ‘앉아서 차나 한잔 하시게’로 시작되는 양기방회의  다선정신은 양기산 곳곳에 스며있다.양기방회선사를 가리켜 말하되 “회해스님은 대기를 얻었고, 희운은 대용을 얻었지만 둘다 얻은 선승은 오직 방회 뿐”이라고  한다. 즉 회해와 희운 둘 다를  합친 법력이 바로 방회라는 것이다. 그만큼 양기는 양기파의 준봉을 높이 든 걸출한 선승이었다.


    양기산 조전에 앉아 연화산을 관망하니 겹겹이 쌓인 연잎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듯 했다. 그때였다. 캐나다 차동호회 회원이라는 곽하(郭夏)보살이 필자에게 다가와서 스님들이 저 멀리 보이는 동굴 속에서 연화차를 제다했다고 말한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양기사 스님들은 4월 말에서  5월 초에 딴 찻잎을 동굴 속에 넣어 두었다가 목욕재개를 한 다음 향을 피운 뒤 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같은 방식은 꽤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다가 그 명맥이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현재는 양기사 주변 천년고차수 나무에서 자란 차나무의 잎을 양기사 대중들이 먹는 양식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그 차가 바로 연화차로 향이 너무나 향기로워 선정삼매에 빠져든다고 한다. 양기사 스님들은 그 차 우려낸 물을 먹고 도(道)를 이루었다고 한다. 수많은 부도군이 이 절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말해준다.

   샘물로 우려내야 제맛이라고 말씀하는 보살을 따라 양기산 마을 산기슭으로 갔다. 양기사에서 20여분을 가니 정말 샘이 나왔다. 양기샘이다. 전설에 따르면 샘물이 계속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새벽 3시부터 6시까지만 나온다고 한다. 그 물로 차를 달일 때 제맛이 난다. 제호의 맛이 바로 그 맛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샘을 나와 양기사로 왔다. 환공비구니에게 찻잎 따는 광경  촬영을 부탁하자 성정부 관리에게 승낙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침 태풍으로 인한 법당전소 소식을  들은 성정부 관리가 양기사로 조사차 나왔다. 관리는 흔쾌히 승낙해 대중 10여 명이 바구니를 들고 차밭으로 갔다. 동자승이 앞장을 서고 할머니들과 꼬마들까지 대동하고 차밭에 가 찻잎을 딴다.  그들의 표정이 너무 아름답다.

   그들이 딴 찻잎을 양기샘의 샘물로  우려내자 사방에 연화차 향기가  풍긴다. 환공비구니는 “옛 선승들이 찻잎 우려낸 물을 마시고 도를 깨우쳤지요”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차향을 맡으니 다선일미가 이런 경지를 두고 말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양기방회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선 앉아서 차나 마시게.”

 양기사에서 맛본 차 한잔이 송대 치열하게 펼쳐진 다선일미의 정신을 문득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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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 2 - 다선일미의 근본 선禪 사상은 평상심시도| 2. 차, 다기 이야기

초인목   

 조회 99 |추천 0 | 2003.11.22. 02:37


ㅡ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연원(淵源)과 선사(禪師)-1 의 연결입니다.


다선일미의 근본 선禪 사상은 평상심시도 / (월간 다도. 2003. 10.)

 

   앞에서(본지 2003. 8. 호) 다선일미의 연원을 살펴보았는데 그것만으로는 다선일미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대단히 미흡하다. 왜냐하면 차와 선이 하나라는 참뜻을 이해하려면 그 기저에 있는 선사상을 깊이 있게 고찰해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다선일미>라는 네 글자에 주석을 다록 해석을 해보았자 그 본래의 의미를 규명할 수 없다. 다선일미를 관통하는 선 사상을 구체적으로 성찰하지 않은 결과, 다선일미에 관한 다음과 같은 곡해마저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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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하자면 <다선일미>는 완전히 참선구도의 일로 음차와의 관계는 매우 적다. 특히 음차를 일상생활 내지 여가활동 - 예컨대 다예시연 같은 - 으로 삼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지금 중국의 일부 도시의 많은 다관(茶館)과 다예시연에서는 모두 <다선일미>를 표방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실로 얼토당토않을 뿐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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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 보듯이 “다선일미는 완전히 참선 구도의 일로 음차와의 관계가 매우 적다”라는 류의 관점이 생겨난 것은 선림(禪林)에서 행해지는 차와 선의 관계를 올바로 통찰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럼 선가(禪家)에서 실천되고 있는 차와 선의 관계는 과연 어떠한가?

 

먼저 결론부터 말한다면 선문(禪門)에서 <다선일미> 혹은<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하여 차와 선을 동일시하는 사상이 성립한 것은 동아시아 선불교에서 6조 혜능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닌 위대한 대선장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선사가 설파한 “일상생활이 바로 진리다(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는 법문이 그 기저를 관통하는 선사상의 원류라고 사료된다. 마조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이 충격적이라 할 놀라운 법문을 설하였다. 그의 설법을 직접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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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나고 죽는다는 생각(生死心)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작위와 지향)을 더러움에 물든다고 하는 것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으며,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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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는 유명한 화두를 낳은 마조대사의 상당법어다. <평상심시도>는 조사선(祖師禪)의 핵심 선사상이기도 하다.

 

평상심이란 배고프면 밥먹고, 갈증나면 차 마시고, 졸리면 잠자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등의 일상생활을 이끌어 가는 평소의 소박한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평상심시도>는 매일 매일의 우리네 일상생활이 바로 진리고 불법(佛法)이며 도라는 얘기다. 마조의 평상심시도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 불교의 <종교개혁>선언 이기도 하다. 마조가 동아시아 선불교사에서 혜능조사에 비견되는 거목으로 추앙받는 것도 단적으로 말하면 이 화두 때문이다. 3)

 

마조의 “일상생활이 바로 진리다”라는 놀라운 의미를 지닌 그의 <평상심시도>는 그의 제자들과 문화 후예선사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었다.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마조의 3대 제자 중의 하나인 남천보원(南泉普願 :748-834)과 그의 애제자로 <끽다거(喫茶去)>화두로 유명한 조주종심(趙州從,言念, 778-897)의 오도 기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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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가 남전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시의 마음이 도(평상심시도)이다”
“그래도 닦아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려들면 그래도 어긋나버린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고에 속하지 않도다. 안다는 것은 헛된 지각(亡+女. 覺)이며,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지각도 없는 것(무기無記)이다.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지정으로 통달한다면 허공같이 툭 트여서 넓은 것이니, 어찌 애써 시비를 따지겠느냐?”
조주는 이 말 끝에 깊은 뜻을 단박에 깨닫고 마음이 달처렴 환해졌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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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가 깨달음을 얻은 이 화두를 <평상심시도>라 한다. 마조대사의 <평상심시도>라는 핵심 선사상은 이처럼 그의 뛰어난 후예인 남전과 조주의 선문답을 통해 극명하게 실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조의 사법(嗣法) 제자인 오설 영묵(五洩 靈黙: 747-818) 선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법거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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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주(越州)의 관찰사가 사람을 시텨 오설 영묵 선사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스님은 선(禪)에 의해 주지(住持)하십니까? 율(律)에 의해 주지하십니까?”
오설 선사께서 계송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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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寂寂)해서 율을 지키지 않고
도도(滔滔)해서 좌선도 하지 않는다.
차(茶)나 두서나 잔 달이고 있노라면
내 생각 주전자에게로만 쏠리누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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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두에서 월주 관찰사의 물음은 당신은 선사(禪師)인가 아니면 율사(律師)인가, 라고 묻고 있다. 아울러 이 질문엔 선승이라면 그 법이 어떠한가 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오설 선사의 답은 명쾌하다. 나는 율사도 아니고 선사도 아니다. 단지 그 어떤 것에도, 즉 율과 선에도 구애받지 않는 대자유인이다. 나는 차를 달일 땐 차 달이기에만 몰두할 뿐 아무런 잡념이 없다. 오설 선사는 마조에게 법을 인가받은 선승답게 스승 마조의 선지(禪旨)인 평상심이 바로 도임을 위의 화두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차 달이기에는 <조작이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다>. 이는 곧 차 달이기와 선이 하나로 체현된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선문답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승가의 차마시기는 다반사(茶飯事)라 일컬었듯이 통상적이고 흔한 일상사(日常社)이다. 그런데 선림의 차는 일반 세속인들이 행하는 음다(飮茶)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바가 있다. 그건 오도한 선사들은 물론이고 선수행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승들이 평상심시도의 차원에서 차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에는 차와 선이 한맛이라는 다선일미가 성립된다. 이는 재가자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선수행을 하고 평상심시도를 이해하고 체득하여 차를 마시면 그는 차와 선이 한맛인 다선일미를 실천하는 것이된다.

 

그러한 예는 중국의 유마힐이라 통칭되는 방거사(?-808)의 경우를 보더라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마조에게 인가받은 거사불교, 거사선(居士禪)의 비조인 방거사는 그의 계송에서 이렇게 읊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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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통과 묘용은
물 긷기와 땔나무 나르기이네.
神統倂妙用 運水與搬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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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와 방거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찻잎을 따고 차를 마시는 것은 그 자체가 평상심시도의 실천이요, 그게 바로 신통과 묘용이지도와 신통이 따로이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여, 승속을 불문하고 다인들이 차와 선이 하나라는 다선일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조사선의 핵심인 평상심시도가 그 본성 선사상임을 자세히 알고 온몸으로 체득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다선일미를 평상심시도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않을 경우엔 <다선인미는 참선구도의 일로 음차와의 관계가 매우 적다>는 대단히 빗나간 설익을 견해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의 많은 도시의 다관과 다예시연에서 표방하는 다선일미가 얼토당토않을 뿐>이라는 지적은 중국을 비롯한 한, 중, 일의 다계의 표피적이고 경박한 풍조를 비판한 것으로 이해된다.

요약하여 다시금 강조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승가든 세속이든 조사선의 핵심 선사상인 평상심시도의 차원에서 차를 만들거나 차를 마시면 그건 다선일미인 것이고 평상심시도를 알지 못하고 찻일을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은 세속인은 물론이고 그가 비록 먹물옷을 입고 선수행을 하는 자라도 그런 부류가 표방하는 다선일미는 한갓 구호에 지나지 않거나 실로 얼토당토않은 일이 될 뿐이다.

 

글쓴이/혜봉
혜봉 스님은 안동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있다가 출가했다. 현재 경기도 이천 지족암에 한거하며 한국불교 근현대사와 ‘불교와 차’관련 연구, 집필 활동중, 저서로는 <다성 초의선사와 대둔사의 다맥>, <일제하 불교계 항일운동>, <종정열전 1, 2>가 있다.  (초인목)

 

- 주 -

1) 진운군, <끽다거와 다선일미>, <차의 세계>2002.4월호. 66쪽

2) 선림고경총서2 <馬祖錄>, 장경각, 1989,27쪽

3) 이은윤, <일상생활이 바로 진리다-마조도일대사>, <중국 선불교답사기 3>, 자작나무,1998,42-43쪽.

4) <조주 어록>, 대승사, 1996, 11쪽

5) 한글 대장경 제 77책 <祖堂集> 제 15권 171쪽.

cafe.daum.net/choinmock/Ixuy/1702   초인목(艸人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