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집( 重峰集 )

2018. 4. 1. 23:39과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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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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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중봉 조헌(趙憲:1544~92)의 문집.

조헌(趙憲)

조헌 영정, 칠백의총기념관 소장

20권 10책(13권, 부록 7권). 고활자본. 조헌이 1574년(선조 7) 중국에 갔다온 뒤 쓴 〈동환봉사 東還封事〉 1권과 〈항의신편 抗義新編〉 2권을 안방준(安邦俊)과 유장(柳檣)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편찬했다. 이후 1666년(현종 7) 민유중이 원집 4권을 간행했는데, 이를 종합해 1698년(숙종 24)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하고, 그 명칭을 〈중봉집〉으로 일원화했다. 그뒤 다시 영조의 명으로 재편·증보하여 1748년(영조 24) 간행했다.

권두에 1613년 안방준이 쓴 〈항의신편서발 抗義新編序跋〉과 1615년 강항이 쓴 〈항의신편발〉, 목판으로 된 〈궁경양친도 躬耕養親圖〉·〈빈례사노도 賓禮師奴圖〉·〈지부복궐도 持斧伏闕圖〉·〈도보과령도 徒步過嶺圖〉·〈청참왜사도 請斬倭使圖〉·〈청주파적도 淸州破賊圖〉·〈금산사절도 錦山死節圖〉·〈칠백의총도 七百義塚圖〉 등 8점의 행사도(行事圖)와 안방준이 쓴 도판 게재의 내력과 총목록이 있다.

권1은 시 62수, 권2는 시 57수, 과체시(科體詩) 1편, 과체부(科體賦) 1편, 권3은 소(疏) 2편, 권4는 〈동환봉사〉의 일부인 〈의상십륙조소 擬上十六條疏〉, 권5~8은 소이며, 권9는 서(書) 29편과 잡저 1편, 권10~12는 〈조천일기 朝天日記〉, 권13은 일기 1편, 기(記) 1편, 제문과 축문 10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권1은 세덕(世德)·연보, 권2는 장록(狀錄)으로 송시열(宋時烈)의 행장, 권3은 김집(金集)의 시장(謚狀) 등, 권4는 비표(碑表) 6편과 유사(遺事) 17편, 권5는 저자가 죽은 뒤 주어진 각종 추모와 포상의 내용이고, 권6은 제문 3편과 애도어(哀悼語) 26수, 권7은 사원(祠院)에 관한 기록이다.

내용 중에 〈논향축소 論香祝疏〉는 1572년(선조 5) 6월 내입삭향급자수궁성수청봉향(內入朔香及慈壽宮星宿廳封香)의 그릇됨을 주장한 상소문으로, 이 상소로 인해 삭탈관직되었다. 〈질정관회환후선상팔조소 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는 〈동환봉사〉의 일부로서, 1574년 그가 성절사 박희립의 질정관으로 명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에 관한 견문을 8조로 나누어 보고한 것이다. 〈의상소 擬上疏〉는 민간의 질고와 내수외양을 주장한 것으로 토지도 없고 요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내용이며, 〈변사무겸론학정소 辨師誣兼論學政疏〉는 1586년 이발(李潑)·김홍민(金弘敏)·윤탁연(尹卓然) 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공격하자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진소회잉사직소 陳所懷仍辭職疏〉는 1587년 공주제독관으로 있을 때 동인의 상소인 망군오국지장(罔君誤國之狀)과 정여립(鄭汝立)을 공격한 만언소이다. 〈비왜지책 備倭之策〉은 호남지방을 지킬 것, 왜적이 피로할 때를 기다려 유격전술로 공격할 것 등 왜적을 물리칠 방법을 말한 것이며, 〈정대책 庭對策〉은 학교를 세워 영재들을 가르치고 교화를 돈독히 하며, 과거를 실시해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어진 임금이 하는 밝은 정치라는 내용이다. 규장각·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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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저작자 조헌(趙憲)
창작/발표시기 1615년(발간)
성격 문집
유형 문헌
권수/책수 20권 10책
간행/발행 안방준
분야 종교·철학/유학
소장/전승 규장각 도서, 장서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조헌(趙憲)의 문집.

내용

20권 10책. 활자본. 초간본은 조헌이 순절한 지 2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 동학 의병 동지였던 안방준(安邦俊)이 그의 유문(遺文)과 사적을 수집, 편찬하고, 이정구(李廷龜)의 서문, 강항(姜沆)의 발문, 그리고 자기의 발문을 붙여서 1615년에 발간하였다.

이 초간본의 원형은 봉사(封事)·잡저 등 6권, 청절왜(請絶倭)·거의병(擧義兵) 등에 관한 소장(疏章)·서격(書檄)·비문·언행 등을 묶어 엮은 ≪항의신편 抗義新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뒤 1740년(영조 16)에 본집 13권, 부록 7권, 도합 20권 10책으로 된 본이 나왔다. 이것을 ‘경신본’이라고 한다. 이 경신본을 대본으로 1934년에 황해도 연안 봉양사(鳳陽祠)의 기광도(奇廣度)를 대표로 15명의 사림이 발의, 전주광문당(光文堂)에서 중간하였다. 이 중간본을 ‘갑술본’이라고 하며, 이것이 ≪중봉집≫의 보급판이기도 하다.

널리 보급되었던 갑술본도 점차 구독하기 어려워지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손 건상(建相)이 갑술본을 6책으로 복제, 간단한 해제를 붙여 1973년에 발간하였다. 또한 조헌선생기념사업회에서 ≪중봉집≫을 번역, 출판하기도 하였다.

권1·2에 춘축(春祝)·만정상사군장(挽鄭上舍君章) 등 시를 모았고, 권3에 논향축소(論香祝疏)·질정관회환후선상팔조소(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 등, 권4에 의상십육조소(擬上十六條疏), 권5에 의상소(擬上疏)·변사무겸론학정소(辨師誣兼論學政疏) 등, 권6에 진소회잉사직소(陳所懷仍辭職疏)·청절왜사소(請絶倭使疏) 등, 권7에 논시폐소(論時弊疏)·청절왜사삼소(請絶倭使三疏) 등, 권8에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의진주변황조표(擬進奏變皇朝表)·의치서우유구국왕(擬致書于琉球國王)·의사유일본제도호걸유민부로등서(擬賜諭日本諸島豪傑遺民父老等書)·초포적사사의(剿捕賊使事宜)·의사일본적사현소평의지등처참죄목공사(擬賜日本賊使玄蘇平義智等處斬罪目公事)·비왜지책(備倭之策)·기병후소(起兵後疏)·청주파적후장계(淸州破賊後狀啓) 등, 권9에 서(書) 28편과 잡저 정대책(庭對策), 권10∼12에 조천일기(朝天日記), 권13에 북적일기(北謫日記) 외에 기(記)·제(題)·표(表)·장(狀)·상량문·축문·제문·격(檄)·서사(誓辭)·고유문(告諭文)·근왕시지로문(勤王時指路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권1에 세덕(世德)·연보, 권2에 송시열(宋時烈)의 행장, 권3에 김집(金集)의 시장(諡狀), 김상헌(金尙憲)의 신도비명, 송시열의 묘표, 권4에 윤근수(尹根壽)의 일군순의비명(一軍殉義碑銘)·유사, 권5에 포전(褒典)·찬술에 관한 기록, 권6에 제문, 권7에 사원(祠院)에 관한 축문·제문·고유문·상량문·유허비(遺墟碑)·막좌문생동일사절록(幕佐門生同日死節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절왜사소>를 비롯해 일본에 관한 상소가 11편이나 되어 임진왜란 직전의 일본의 동태와 조선의 대응책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조천일기>는 1574년(선조 7) 6월 1일부터 8월 25일까지 우리 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로서, 임진왜란 직전의 명나라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북적일기>는 1589년 4월에 올린 <논시폐소>로 말미암아 그 해 5∼6월까지 함경도 길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 쓴 일기인데, 저자의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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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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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544(중종 39), 경기 김포
사망 1592(선조 25)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정치적으로는 기호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평생을 직언으로 일관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그후 다시 의병을 모아, 8월 1일 영규의 승군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월 18일 왜장 고바야가와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조헌

조헌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조헌(趙憲)

조헌 영정, 칠백의총기념관 소장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정치적으로는 기호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고, 김황(金滉)·이지함(李之菡)에게도 배웠다. 1565년(명종 20) 성균관에 입학했다.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되었다.

1571년(선조 4) 홍주목교수(洪州牧敎授)에 임명되었는데, 이 시절부터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1572년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궁중불사(宮中佛寺)의 봉향(封香)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고, 이듬해 교서관저작이 되어 다시 같은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1574년 5월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1월 귀국하여 시무(時務)에 관한 '8조소'(八條疏)를 올렸다. 1575년 교서관박사에 오르고 이어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쳤다.

그뒤 통진현감이 되었으나, 내노(內奴)의 작폐를 다스리다 장살(杖殺)한 죄로 탄핵을 받아 1577년 부평으로 귀양갔다. 1580년 풀려나 이듬해 공조좌랑·전라도도사에 임명되었고, 1582년 보은현감이 되었다. 1584년 대간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옥천의 밤티(栗峙)에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1586년 다시 공주목교수 겸 제독관(公州牧敎授兼提督官)에 임명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음을 주장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는 등 5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동인의 전횡과 시폐를 지적하다가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으나, 그해 11월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일본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고 영·호남의 왜적방비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車嶺)에서 문인 김절(金節) 등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 그후 다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금산전투).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월 18일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대체로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이(理)의 일차성을 인정하면서도 기(氣)의 존재를 중시했다. 한편 그는 국내외의 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그에 대한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하여 여러 가지 경세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어,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이나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崔益鉉)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4충신으로 불린다.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고,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옥천 표충사(表忠祠),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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