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9. 11:33ㆍ도자 이야기
명문이 새겨진 백자, 문화재로 지정 | ||||||
'청화산수문호'와 '청화수복문호' | ||||||
|
||||||
이 백자들은 서울시가 2010년 상반기에 ‘명문이 있는 백자’라는 주제로 실시한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 일괄공모를 통해 발굴된 것으로 신중한 도자사적 검토와 서지학적 검토를 거쳐 선정되었다. 문화재 지정에 대한 각계의 의견수렴을 위해 2010.10.28(목)부터 30일간 문화재 지정계획을 공고한 후 12월 중 문화재로 최종 지정할 예정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예정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산수문호’는 크기가 크고 당당한 형태의 19세기 백자호로 청화를 사용한 산수문과 두보의 시구가 쓰여 있는 구도와 배치가 독특하고, 산수문뿐만 아니라 대나무와 매화 그림의 필치 또한 뛰어난 우수한 작품이다. 구연부는 곧게 뻗어 위로 솟아 있고 상하(上下)에 둘러진 횡선문(橫線紋) 아래에 여의두문(如意頭紋)을 배치하여 장식하였다. 어깨부터 한껏 부풀려진 몸체의 앞면과 뒷면에는 산수문을, 산수문 사이에는 각각 대나무와 매화를 그려 넣었다. 산수문은 2중의 커다란 능화문창(菱花紋窓)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18세기와 19세기의 청화백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산수문은 앞면과 뒷면의 능화문창 안에 청화로 그려져 있다. 첫 번째 산수문은 근경(近景)에 소나무 숲과 누각(樓閣)을 배치하고, 중경(中景)은 화면 왼쪽으로 치우친 절벽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정면 상단 중앙에 배치된 원경(遠景)은 중첩된 산봉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화면의 가운데는 약간의 물결을 제외한 대부분을 비워 강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무표현의 표현인 여백의 미(美)로서 동양화의 공간감을 잘 살리고 있다. 또한 뒤에 설명할 두보 시구에 나타난 쓸쓸하고 깊은 오월의 강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즉, 입체감과 볼륨감이 살아있는 도자기에 고즈넉한 풍경을 배치하여 평면의 그림에 율동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화면과 시심(詩心)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원경 오른쪽에 배치된 한시(漢詩) 구절이다. ‘五月江深草閣寒(오월강심초각한)’이라 쓰여 있는데, 이는 두보(杜甫)의 한시<嚴公仲夏枉駕草堂(엄공중하왕가초당), 兼攜酒饌(겸휴주찬)>의 한 구절이다. ‘오월강심초각한(五月江深草閣寒)’은 구절은 명대(明代) 화제(畵題)와 조선시대 화원(畵員)의 화제로도 애호되었던 구절이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百年地辟柴門逈 五月江深草閣寒 평생 외진 곳에 살아 사립문 먼데 백년지벽시문형 오월강심초각한 오월의 강은 깊고 초가집 쓸쓸하네 看弄漁舟移白日 老農何有罄交歡 한낮에 고깃배 떠나는 것 바라보노라니 간롱어주이백일 노농하유경교환 늙은 농부 사귀는 즐거움 다 어디에 있는지 반대편 산수문은 물 위에 떠 있는 세 척의 배와 호젓한 다른 한 척의 낚싯배, 먼 산 위로 떠 있는 달을 그려 넣었다. 이는 중국 남부 후난성〔호남성 湖南省〕 둥팅호〔동정호 洞庭湖〕의 남쪽 샤오수이강[소수 瀟水]과 샹장강[상강 湘江]와 상수가 만나는 곳의 아름다운 여덟 가지 경치를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 둥팅호의 가을밤 풍경을 그린 ‘동정추월(洞庭秋月)’과 유사하다. 수평적 구도를 중심으로 근경과 중경, 원경의 거리에 차이를 두어 원근감과 공간감을 고조시켰다. 산수문을 그린 능화문 창의 좌우에는 각각 매화와 대나무를 배치하였다. 매화는 각을 이루며 위로 뻗은 굵은 줄기 뒤로 가늘고 곧게 올라가는 줄기를 배치하여 형태미의 대조를 이루면서 꽃봉오리를 그려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직선과 곡선의 대비, 줄기의 굵기가 대비를 이루면서도 잔잔하고 둥근 꽃봉오리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대나무는 반듯하게 올라온 줄기에 끝이 뾰족한 형태의 댓잎을 그려 넣었다. 수직과 수평이 대비되는 대나무 줄기와 잔잔한 댓잎의 형태, 과하지 않은 청화의 농담(濃淡)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대나무와 매화 아래에는 다시 횡선문을 두르고 여의두문을 배치하였다. 화풍으로 보아 분원말기(分院末期) 화원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 산수문호는 산수문과 한시의 구도와 배치가 독특하고 크기와 형태가 당당한 형태, 정선된 태토(胎土) 등 제작기법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산수문과 매화, 대나무 그림의 필치도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두보의 한시가 남아 있는 드문 예로서 19세기 도자사 연구에 좋은 자료로 주목된다. 병인가례시명백자청화수복문호는 둥근 공 모양의 몸체를 지닌 항아리로 한글 점각 명문에 의해 병인가례, 즉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연부는 위로 올라갈수록 밖으로 벌어지는 형태로 횡선문과 초문(草紋)이 청화로 그려져 있다. 비슷한 시기의 호와 비교해 볼 때 구연부가 높고 긴 점이 특징이다. 구연부와 몸체를 연결하는 어깨부분에는 진한 청화를 사용하여 여의두문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장식 하였다. 몸체의 형태는 공처럼 둥근데 19세기 호 중에서 크기가 크고 당당하다. 부풀어 오른 몸체의 사면에는 ‘壽(수)’자와 ‘福(복)’자가 도안화된 문자문이 그려져 있다. 진한 청화를 사용하여 여백이 많고 흰 백자의 바탕과 대조를 이루면서도 문양으로서 강조점이 되고 있다. 얕은 굽에는 역시 청화로 한 줄의 선을 둘러 장식을 마무리하였다. 굽바닥에 명문이 쓰여 있어 사용처와 제작연대를 알려준다. 중앙에는 청화로 ‘大’자를 써 넣어 대전(大殿)에서 사용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굽 주변에는 한글로 ‘병인가례시 큰뎐고간듕쇼이십듁’이라는 명문을 새겨 넣었다. 명문에 나타난 병인년(丙寅年)은 1806년, 또는 1866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당시 가례 기록을 살펴보면 고종3년, 즉 1866년에 거행된 고종과 명성후의 가례로 판단된다. 뒤에 나오는 ‘큰뎐고간’은 대전(大殿) 곳간을 뜻하며, ‘듕쇼’라는 명문은 大, 中, 小를, ‘이십듁’은 20죽(1죽은 10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항아리는 1866년인 병인년에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릴 때 대전 곳간에서 쓰인 대·중·소 200개의 그릇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 항아리는 왕실 가례에 쓰였다는 확실한 사용처와 ‘병인년’이라는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물자료로서 중요하다. 또한 19세기 청화백자 항아리로서 당당한 크기와 기형을 지니고 있으며, 청화의 발색과 광택이 좋아 도자사적으로도 가치가 커 19세기 백자 연구에 좋은 자료이므로 서울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한다. 따라서 앞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는 285점, 문화재자료는 41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출처 : 서울특별시 (http://www.seoul.go.kr) www.eswn.kr/news/articleView.html?idxno=1280 새마갈노
|
“이나리야마 쇠칼”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
조회 : 577
|
............... |
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4&wr_id=151409&page=0..
가생이닷컴
사이타마 현 이나리야마(稲荷山) 고분 철검 (1968)
일본백제
|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
|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은 1968년 사이타마 현 이나리야마(稲荷山) 고분에서 발견된 철검으로 1978년 X선을 이용하여 그 명문이 판독되었다. 칼의 앞뒤에 금으로 115자의 한자가 상감되어 있다. 1981년 중요문화재로, 1983년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사이타마 현립 사키타마 사적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앞면)
-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垝、其児多加利足尼、其児名弖已加利獲居、其児名多加披次獲居、其児名多沙鬼獲居、其児名半弖比、
(뒷면)
- 其児名加差披余、其児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来至今。 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
내용
신해년 7월에 적는다.
오와케-오미(乎獲居臣), 시조의 이름은 오호-히코(意富比垝), 그 아들은 타카리-스쿠네(多加利足尼), 그 아들의 이름은 테요카리-와케(弖已加利獲居), 그 아들의 이름은 타카헤시-와케(多加披次獲居), 그 아들의 이름은 타사키-와케(多沙鬼獲居), 그 아들의 이름은 하테히(半弖比), 그 아들의 이름은 카사헤요(差披余), 그 아들의 이름이 오와케-오미이다.
세세로 장도인(杖刀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봉사하여 왔다. 와카타키로-오키미(獲加多支鹵大王)를 모시어 시키-미야(斯鬼宮)에 있을 때 나는 천하를 다스림을 도와서 이 백련리도(百練利刀)를 만들게 하였으니, 내가 봉사한 근원을 적는다.
기타
와카타키로-오키미(獲加多支鹵大王)
고대 일본의 역사를 채록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456년부터 479년까지 즉위한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의 이름이 오하쓰세-와카타케루-미코토(大長谷-若建-命/大泊瀬-幼武-尊)라고 한다. 앞서 1873년에 구마모토 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발굴되었던 은상감 철검에는 '復□□□歯大王'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종래에는 반정천황의 이름인 미즈하(瑞歯)로 해석되었으나 이를 통해 '獲(加多支)鹵大王'으로 바로잡혔다.
- 신해년 7월에(辛亥年七月中)
이에 따라 신해년은 유랴쿠 천황의 재위 기간인 471년으로 비정되지만, 혹은 문구를 새겨넣은 것이 '봉사의 근원'을 추억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사후인 531년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또한 중(中)은 이두식 문법에 따라 조사 '~에'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 시키-미야(斯鬼宮)
- 백련리도(百練利刀)
칠지도의 명문에 '백련철(百練鐵)로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백련(百練)은 쇠를 두드려 만들던 당시의 기술에 의해 좋은 철을 수식하는 어휘로 추정된다. 리도(利刀)는 예리한 칼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편 한국칙에서는 많은 분들이 백제 盖鹵王으로 추정하고 있으며,후손들의 이름에 붙은 확고는 백제 지방장관 담로를 뜻한다함,
사학계의 계속 연구가 필요함,
blog.daum.net/kohwh/150 역사 탐방 k
일본, 삼한정벌은 백제역사(카페용)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왕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任那: 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4~6세기에 바다건너 한반도를 공략할 수 있을만한 강력한 권력이 없었다. 아직 부족국가의 형태를 띄우고 있었고, 한반도 삼국처럼 왕 중심의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일본이라는 국명도 사용하지 않았다. (스카이 데일리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
1968년 일본 도쿄 북쪽 56km 지점에 있는 교다시의 한 무덤에서 쇠칼이 발견됐다.
5세기에 만들어진 이 쇠칼에는 놀랍게도 11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1996년 교수직에서 퇴임한 후 백제사를 본격 연구해온 김영덕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는 칼에 새겨진 내용은 일본 야마도 지방 왕권이 책봉한 지방 호적의 족보라던 그 동안 일본 역사학계의 통념과 달리 이두로 다시 풀어보니 백제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남침한 서기 396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侯王)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일본 도쿄로 망명해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이야기가 칼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나리야마(稲荷山) 쇠칼의 글은 백제의 다무로(담로)가 5세기에는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세 곳에 있었으며, 이들 다무로들이 독립왕국으로 커져갔음을 의미했다.
다무로(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조직인데 군사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나리야마 쇠칼에 적힌 글은 고구려가 남침한 서기 396년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였다.
또 이나리야마 쇠칼, 그 유명한 칠지도, 이들 무덤의 형태와 부장품, 역사서 등을 연구하여 백제왕실과 일본왕실은 한 왕실에서 두 나라 왕통이 이어졌음을 알아냈다.
서기 397년에 세운 대왜에 머물던 백제 태자 도기는 그곳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백제에 와서 비유 임금이 되었다. 비유는 두 아들 가수리(개로왕)와 고니기(곤지왕)를 왜 땅에서 낳았고, 서기 427년에 백제대왕이 된 비유는 몇 해 뒤에 아들 가수리(개로왕)를 왜왕 ‘사이’로 앉힌다.
왜왕 ‘사이’는 서기 455년에 백제로 와서 부왕(父王)을 이어 개로대왕이 되며, 자기가 물러난 왜왕자리는 아우 ‘고니기’(곤지왕)에게 물려주어 그는 왜왕 ‘고오’가 된다. 왜왕 ‘고오’(곤지왕)의 다섯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이 훗날 백제 동성왕이 되고, 왜왕 ‘고오’의 뒤를 잇게 되는 사람은 개로대왕의 아들 ‘사마’(무령왕)로 왜왕 ‘무’가 된다. 그 후 왜왕 ‘무’가 동성왕의 뒤를 이어 서기 502년에 무령대왕이 된다. 무령왕이 되어 백제로 떠난 왜왕 ‘무’를 이어 왜왕이 된 이는 무령대왕의 사촌(남제왕)이자 왜왕 ‘고오’(곤지왕)의 아들이었다.
백제 개로왕도 왜 나라에 한 동안 있으면서 왜왕 ‘제’ 노릇을 했다. 왜왕 ‘무’가 송나라에 보낸 상표문을 보면 왜왕 ‘무’는 개로왕의 아들인데 왜왕 ‘제’를 자기 아버지라고도 하므로 왜왕 ‘제’는 개로왕이다. 따라서 개로왕도 백제로 돌아오기 앞서 한동안 왜 나라에서 왜왕 ‘제’로서 백제왕을 대왕으로 모셨을 것이라는 점이 입증되는 것이다. 당시 왜는 백제의 담로였던 것이다. 후나야마 고분이 있는 구마모도 마을도 담로임이 밝혀졌다.
백제는 중국 남조 당시 중국에 두 담로를 두고 있었다. 하나는
북경 가까이, 하나는 양자강 하류 가까이라고 한다. 중국이
서북쪽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아 분열상태에 빠졌을 때의 남중국 왕조들의 역사책에 이 기록이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불가사의 한 듯 하지만, 백제는 당시 해상 강국이었고, 어쩌면 장애가 많은 육로보다 뱃길이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백제는 지금의 일본 땅에도 이런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무령대왕 시대에는 중국 두 곳과 왜 나라에 규슈, 긴끼, 동북지방 담로 등 모두 22개의 담로를 거느렸다고 한다, 담로는 우리나라에도 있었고, 전라도에는 많은 담로가 있었으나 백제 수도가 부여로 옮겨 가면서 담로는 중앙 정권에 흡수 되었다.)
천관우와 이영빈 교수 등에 따르면 백제가 담로제도를 차리게 된 것은 4세기 중반 이후일 것이라고 한다.
일본서기 신공(진구)기에 따르면 4세기 중반 근초고왕시대에 왜군이 남강 일대를 침공하여 평정한 다음에 이 땅을 백제에 하사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371년에 이미 3만 대군으로 고구려와 싸워 이길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였던 백제였기 때문에 이 기사는 부당하며 따라서 백제와 왜를 바꿔야 사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 된다. (바로 이 점이 백제가 망한 이후 왜가 백제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정복 기사에 ‘남만(南蠻)인 치미다례(忱彌多禮 : 제주도)’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북쪽인 백제가 볼 때는 남만(南蠻)이지만 남쪽에 있는 왜(倭)가 볼 때는 남만일 수 없다. 나아가 성왕이 한말이 있는데, 일본서기 긴메이기 2년 대목에 ‘성명왕(백제)이 가로되 우리선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절에 아라와 가라와 탁순의 임금들이 사신을 보내와 우호를 다짐하고 자제가 되었다’ 라는 기사가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대에 이 고장들을 백제가 다스렸다는 뜻이다.
당시의 상황은 김성호 교수에 따르면 금강 하구를 떠난 모구라 근자의 백제군은 광양만에서 섬진강 바른 쪽 물가에 있는 광양 가라를 친 다음에 노량 해협의 탁순(남해)에서 왜의 중원군과 합류한다. (지도참조)
이 연합군은 사천 다라를 친 다음에 남강을 동진하여 함안 아라와 창원 독국을 거쳐 남가라(김해가야) 를 친 다음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창령비시벌을 친다. 그 다음에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헤나루(강진)에 이른 뒤에 치미다레(제주도)를 평정했다는 것이다.
고헤나루(강진)의 다른 이름이 돔고을 곧 담로인데 이미 이곳은 백제의 담로였고, 여기서 제주도를 정복하여 담로가 되어 담라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외고립된 네 고을 비리(전주), 비디(임실), 포미기(순창), 바라고(구례) 등 섬진강에 따라 있는 이들 고을도 항복하게 된다.
여기서 비시(창녕)와 다사기(하동)가 담로가 된 증거를 이나리야마 쇠 칼에 새긴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이나리야마 쇠 칼에는 개로왕의 백제를 섬긴 여덟 세대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가운데 세 곳은 고리가라, 다가비시, 다사기라는 이름을 가진 장수였는데 획가라는 직함이 있어 이들은 각각 함창, 성산, 창녕, 하동 등지에서 담로였음을 알 수 있으며 쇠칼에 새긴 글로 이 것이 백제의 담로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4세기 후반에 있던 일로 이로 써 이때 백제에는 담로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5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들 집안은 왜로 옮겨가 사이타마 고을에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백제의 담로를 차린다. 곧 왜나라 사이타마 고을 이나리야마 고분이 있는 곳인 가사바라에 담로가 생긴 것이다. 이 쇠칼에 새긴 대로 그들이 섬긴 획가이신 개로 임금의 이름은 규슈, 후나냐마 고분의 쇠 칼에도 새겨져 있으며 이 곳 역시 백제의 담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남강전투에 참가한 왜군은 누구인가? 칠지도에 관한 연구 끝에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들 백제 다무로 곧 담로 출신들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백제 대왕의 지시로 그 곳의 왜인 군사를 이끌고 남강 일곱 나라 평정에 함께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왜는 백제왕의 명에 의해 한반도로 병력을 파견해 연합작전을 수행한 것이었지만, 백제가 망하자 그들은 아예 일본서기를 쓸 때 역사를 바꾸었다. 백제의 역사를 아예 자신들의 역사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삼한 정벌에 나선 것처럼 꾸몄다. 왜는 백제의 담로국으로 백제의 왕실과 그 친족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와 왜는 한 나라였다. 백제가 망했을 때 담로국이었던 왜는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왜는 더 이상 백제의 담로국으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이제 담로국이란 명칭조차 장애가 되었다. 그들은 백제가 상국(上國) 이었던 흔적을 지워 나갔다. 백제가 망한 후 676년에는 한반도에 남아있던 당군도 물러가고 왜는 신라와 가까이 지나고, 덴무가 왜왕이된다.
백제 왕실은 왜 나라에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었고, 백제의 수 많은 유민이 왜로 유입되었다. 차제에 백제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자신들이 백제를 대신한다. 왜는 일본으로 이름을 바꾸고, 백제의 역사마저 자신의 것으로 탈바꿈 시키자니 일부 역사를 날조해야 했다.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백제에 대한 배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백제가 일본이란 이름으로 부활하고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반도를 향해 설욕전을 준비하고 공략에 나선다. 이제 그들은 한반도가 조상의 나라라는 것도 잊었을지 모른다. 임나일본부설, 칠지도 헌상설, 삼한정벌설 등 끊임없는 역사날조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blog.daum.net/leinsoo/12674557 들판
'도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름달 품은 조선백자의 꽃 ‘달항아리’ / 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0) | 2019.12.04 |
---|---|
청화백자 이야기 (0) | 2019.03.29 |
[스크랩] 김해 찻사발 재현의 외길을 걸어온 지암요 안홍관 (0) | 2018.04.19 |
다구의 종류와 사용 (0) | 2018.02.08 |
“650년전 신안해저선에서 신기한 보물창고가 모두 열렸어요!” [발굴 40주년 기념 특별전] (0) | 2018.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