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 이야기

2019. 3. 29. 09:57도자 이야기



청화백자 이야기 백자 / 도자기 

2013. 10. 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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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이야기 


 

     -  모방에서 창조로 세계 최고의 도자기가 되었다.

 

   중국은 2500년 전 진시황 때나 지금 시진핑 때나 세계사의 중심에 있는 크고 강한 나라다.그 동쪽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한국은 때로는 맞붙어 혼낸 적도 있지만 크게 보면 늘 중국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 온 작고 약한 나라다.

   모든 문물은 강국에서 소국으로 물이 흐르듯 내려간다.강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문화와 예술이 단순 모방에 그쳐 아류로 머무느냐 독창성이 가미돼 독자적 성공을 거두느냐는 그것을 받아들인 국가의 총체적 문화역량에 따라 판가름난다.한국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를 고려 조선의 도자산업이 보여주고 있다.고려청자는 송나라 절강성 월주요의 기술 이전을 받아 시작되었지만 지배계층의 수준 높은 안목과 도공들의 뛰어난 창의력은 천하제일의 비색과 세계최초의 상감기법을 창안해냈다.

 백자도 마찬가지다.조선 개국 후 한 세대가 지났지만 그때까지 조선은 퇴화한 고려청자의 기법과 회화적 문양이 강하게 남아 있는 상감.박지분청과 공예의장적 장식성이 강한 인화문 분청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분청박지연어문병,15세기 전반)


 

 

   세종.세조 시절엔 분청의 디자인과 제작기술이 최고조에 이르러, 상감분청의 유색은 전성기 청자에 가까웠고 박지문인화문분청의 문양과 형태는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조선적 특징이 만개하였다. 그런 사회 문화적 배경에는 한글창제와 각종 제도의 민본적 개정,과학의 발달 등으로 높아진 민족적 자신감과 창의력이 있었다.어느 국가나 자국의 정치사회적 안정과 문화적 정체성이 단단할 때 외래문물의 수용과 재창조가 잘 이루어진다.


   청화백자가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1380년대이성계가 고려의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있을 때 애용하던 청화잔을 왕이 된 후,성균관에 하사하여 보관케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제대로 된 청화백자를 접하게 된 것은 그후 4,50년이 지나 세종때인 1423년 이후 명이 보낸 선물과 요동에 가는 조선 상인들의 자기무역을 통해서였다. 당시 천하의 진귀품이었던 청화백자의 세련된 푸른 문양과 눈부신 백색은 조선건국의 이념적 바탕이기도했던 주자성리학적 가치관에 경도된 사대부들, 즉 조선 지배계층의 미감에 딱 들어오는 기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유입된 소량의 청화백자로는 지배계층과 부유층의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 밀무역이 왕성해지자 세종 30년(1448)에는 일체의 청화자기무역을 금하는 어명을 내린다.


   물론 조선전기 백자의 주류는 문양이 없는 순백자다.그러나 문양과 색깔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조선 초기 고급 순백자의 백색은 모든 색을 다 포함한 최상의 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격조 높은 색상과 형태를 자랑하고 있다.


 

 

                      (백자호,총높이 34cm,15세기,국보,남궁련소장)

 


 

   우아하고 단정한 형태에 아무런 문양과 채색 없는 백색만으로 최고급 백자를 만들어낸 기술력과 도자미학의 바탕 위에 명나라 청화백자가 조선에 유입된 것이다.


 중국의 청화백자 유입이 지배계층의 호응을 얻어 가던 시기,세종백자를 궁중 전용 기명(器皿),즉 어기(御器)로 지정하여 질 좋은 백자 생산을 독려한다.기존의 청자와 분청사기,상감백자,새로운 인기품목으로 떠오른 청화백자,그리고 성리학적 이상이 투영된 순백자가 동시대에 백가쟁명하는 상황을 정부가 나서서 정리한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시기 조선 초기백자의 상징으로 평가되는 눈처럼 흰 설백자의 탄생은 세종의 유별난 백자사랑이 낳은 또 하나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이 누군가? 그는 조선을 조선답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달려들었던 부지런한 천재지도자가 아니었던가? 정치 경제 과학 예술 전 분야에 걸쳐 창의 넘치는 아이디어와 식지 않는 열정으로 수많은 발명과 개혁을 이루어낸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당시 최고의 국가 전략산업이었던 도자분야에 그런 세종의 창의적 미학적 촉수가 미치지 않을 수 없다.청자에서 분청,분청과 백자의 공존에서 백자로의 정립은 세종치세의 그런 조건 속에서 시작되어 성종어간에 이르는 40여년 동안 완성된 것이다.

  

   세조3년 1457년, 회청(回靑)을 처음 수입한 정부는 8년 후인 1465년 마침내 최초의 화사기(畵沙器)제작에 성공한다. 처음으로 명에서 보내온 청화백자를 구경한 후 47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청화백자를 자체 기술력으로 구워낸 것이다.

   광주군 퇴촌면 일대초기 도요지 여러 곳에서 당시 청화백자의 실패한 파편들이 많이 수습되어 좋은 청화 발색을 내기 위해 고심했던 수십년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세계 최첨단 하이테크산업이었던 도자산업 육성에 관심이 컷던 세종과 세조의 전면적 지원의 결과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조선 최초이자 중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청화백자 번조에 성공한 세계도자사의 쾌거였다.


   3년 후인 1468년 세조말에는 국가지정 도자기 공장인 분원경기도 광주에 설립된다.분원은 설립되자마자 청화안료 구입에 골머리를 앓다가 마침내 다음해인 1469년에는 강진,밀양,순천,울산 등 여러 지방의 국내산 시료를 시험한 결과 전남 강진산 토청으로 청화 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물론 토청의 품질이 아라비아산 회회청(回回靑)엔 많이 못미쳐 원하는 정갈한 청색을 얻지 못했다. 이 안료 문제는 두고두고 숙제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결국 회청을 대체할 만한 관요용 고급 청화안료 개발엔 성공하지 못한다.


   조선전기 청화백자는 세조 때 기반이 쌓여 성종,중종(1469-1544)에 와서 조선색 완연한 세련된 분원백자 시대를 꽃 피우게 된다.물론 그 배경엔 왕실과 사대부들의 중국 청화백자에서 시작된 꾸준한 수요와 거상과 부호들의 자기과시적 청화백자 선호풍조가 있었다.성종 8년(1447)에는 돈 많은 부호들이 법을 무시하고 명나라 청화백자를 다투어 사용하는 등 그 폐해가 극단에 달하였으므로 화자기의 수입을 금한다는 왕명이 나올 정도였다.

 유행과 풍조는 쉽게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관요의 청화백자 생산량으로는 민간의 폭증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 상류층의 청화백자 애용은 일반화되었다는 게 역사의 기록이다.


   중종(1505-1544)때는 지방의 웬만한 호족들도 분원백자 구입에 열을 올릴 정도로 백자는 시대의 대표적인 생활자기로 자리잡게 된다.이 시기에 청화백자는 완전한 조선색을 갖추어 충분한 여백의 미와 고상한 품위가 넘치는 조선청화백자로 완성되었다.고려청자에서 보였던 모방과 창조라는 우리민족의 특출한 재질이 또 다시 발휘되었던 것이다. 

 한편 분원 설치후 왕실과 지배계층의 기명(器皿)이 백자 일변도로 바뀌어 가자 그동안 왕실에 납품하던 지방의 분청 가마들은 새로운 생존의 길을 찾아 정착하게 된다. 공납품 제작에 따른 각종 제한과 규격의 틀에서 벗어난 각 지역 도공들은 그후, 임진왜란으로 요업의 기반이 박살나기까지 백자와 분청이 공존하는 150여년간,자유롭고 해학적인 지방색을 구사해,후대에 한국미의 본질을 보여 준다는 찬사를 받는 철화,귀얄,덤벙분청을 남긴다. 


   임란은 왜인들이 도자기전쟁이라 명명했다시피 조선도자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분원의 숙련공들은 물론 전국의 한다하는 사기장인들은 대부분 일본에 끌려갔고 기술자 없는 공장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렸다

 임란 이후 백자는 서서히 제작기반이 살아났지만 분청은 급격히 질이 떨어지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를 도공의 부족에서 찾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정양모관장에 의하면 임란 때 포로로 끌려간 도공의 숫자가 7천명으로 엄청난 인원이었는데 그중 많은 숫자는 지방의 분청사기장들이었다는 것이다.


    광해군 10년(1617년) 궁중의례에 사용하던 화준이 전쟁통에 깨어져 남은 것이 없어 부득이 임시방편으로 백항아리에 그림을 그려 대신 사용하는가 하면 주둥이는 깨지고 뚜껑도 없어 속히 뚜껑을 구우 맞추라고 명했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였다.

 전쟁으로 손실된 인적,물적기반이 복구되어 정상적인 생산품이 가능해지기까지는 거의 7,8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하물며 원료는 물론 가장 까다로운 기술과 공정이 필요한 청화백자는 오늘날 변변한 유물을 찾기 힘들 정도로 철퇴를 맞고 말았다.


   1592년 임진왜란에 이은 1636년의 병자호란은 명에 붙느냐 오랑캐에 붙느냐는 노선 투쟁의 결과, 명에 붙은 죄로 또 한번 전국토와 전국민이 박살난 전쟁이다.그러나 오랑캐의 나라 청에게 죽지 못해 굴복 했지만 마음으론 승복하지 않았던 조선지도층은 그후 더욱 악화된 청과의 교역으로 숙종 무렵까지 청화안료의 수입 거의 끊긴다.이 두번의 난리로 청화백자는 아예 조선의 도자기 생산품 목록에서 사라질 정도로 희귀품이 된 것이다.


   1640년에서1658년까지 관요였던 광주 선동리(仙東里).송정리(松亭里)가마를 수십 차례 현지 답사한 정양모관장은 겨우 두세점의 청화백자 파편을 수습하는데 그칠 정도였다고 했다.수입청화의 품귀현상은 17세기 백자의 주류를 형성한 문양이 철화가 된 가장 큰 원인이다.물론 철화백자시대에 조선적인 흥과 해학이 두드러진 재미있는 유물이 많이 제작된 점은 그것대로 고맙고 흥미로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백자철화호록문호. 임란으로 요업이 망가진 시대에 만들어진 조선 철화문양의 대표작.

높이 28.6cm,17세기,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아뭏튼 비싸고 귀한 수입 회청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청화백자는 그 후 숙종.영조를 거치면서도 꼭 필요한 기명에 꼭 필요한 양만 사용되어 소슬하고 고상한 품격을 보여주는 최고급 도자기가 된다.  문화군주 영조 집권 초(1726년경)에 우천강변의 금사리로 옮겨진 관요에서는 여전히 고가였던 청화를 사용하여 늦가을의 정한(情恨)이 가득 느껴지는 초화문과 사군자문,산수문을 그린 각종 기명이 제작되어 지배계층의 큰 사랑을 받았다.금사리 청화백자는 세계도자사의 백미로 우윳빛 색택과 청화의 발색,문양과 그림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당시의 유물들 중 수십점의 명품들이 현재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의 대표작품으로 자리잡고 있다.백자 중의 백자,보물 중의 보물인 금사리 청화백자 최대 최고 소장기관인 것이다.

 그곳에서 눈만 뜨면 조선백자와 함께 지낸 이토 이쿠타로 관장은 이런 말로 조선백자의 색깔을 격찬했다."한국민은 백색에 대한 심미안이 날카롭고 미세한 색감의 차이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중기 백자의 흰색은 바로 한국민이 가진 가장 뛰어난 자질이 만들어 낸 색이다" 


   조상들의 훌륭한 유물을 외국의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게 만든 못난 자손들의 죄를 어떻게 씻어야 할 지 머리숙여 반성하고 기필코 되찾아 오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일단 이쯤에서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청화백자가 정치.경제.사회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공사립 박물관.미술관의 유물과 국내외 경매출품작을 중심으로 정리해 봤다.

 


 

 

(명나라 청화당초문항아리.높이 35.8cm 세종 때인 1430년대 작품)

 

 

 


(백자청화매죽문호.명의 영향이 많은 15세기 작품.국보.호암미술관.높이41cm)

 

 

 

 (15세기 전반의 명나라 접시.직경 37.7cm)

 

 

 

 

 (모란당초문으로 꽉 찬 15세기 후반의 백자청화모란당초문전접시.

입지름 22.7cm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홍치(弘治,1488-1505)연호의 명나라 용당초문대접.구경 15cm

 

 

 

명의 홍치명대접과 비슷한 16세기 전반 조선화한 백자청화용문병

(용의 발톱이 삼조로, 명의 오조용과 비교) 높이 25cm,보물,호암미술관

 

 

 

홍치2년명송죽문호.1489년으로 제작년대가 확실한 작품.형태와 문양에 조선적 체취가 풍기기 시작한다.

구례 화엄사 불전의 화병으로 전해진다.동국대 박물관의 간판스타.높이48.7cm,국보 

 



 

                   

            백자청화송죽인물문호,높이47.1cm.16세기 후반,보물.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489년 작인 동국대 것과 송죽문양과 형태가 유사하지만

거문고를 받들고 있는 동자와 시상에 잠긴듯한 선비가 추가되어 시대적인 차이를 볼 수 있다.

1550년 전후하여 1700년 경까지 유행한 소위 절파(浙派)계통의 화원의 솜씨임을 짐작케하는

이 도자기는 임란 이전인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중국식 의장이 많이 남아 있지만 형태와 회화성이 강조된 그림에서 조선색이 보이는 백자청화군어문호,

높이 24.7cm, 15세기 후반, 보물, 호암미술관

 

 

 

   중국도자기의 공예의장적 장식을 단순화하고 여유로운 여백처리와 활달한 매화 그림 등, 

조선빛으로 많이 변모한 백자청화매죽문호. 15세기 후반. 높이29.2cm, 국보, 호림박물관
 

 

 

완전히 조선화된 그림과 형태, 짙은 흑청색이 한국적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회화성 높은 작품.

백자청화梅鳥草花文壺, 16세기 중반,높이 16.5cm,국보,국립중앙박물관    ㅡ 土靑
 

 

 

                     백자청화매조죽문병,1505년,높이32.9cm 개인소장

 

이해라는 사람의 묘에서 나온 것인데 아래 부분에 산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지만 우아한 기품을 잃지않고 있다.

1465년(세조 10년) 처음 청화백자 번조에 성공하고 40년의 시간이 지나 이렇게 운치있고 단아한 조선청화백자 창조에 성공했다.

 

 

 

 

 백자청화초화칠보문명기 일괄(白瓷靑畵明器) 높이 4.2-7.2cm

{만력년제}명 청화백자접시 포함(1573-1619) 호암미술관)

 

김씨 성을 가진 상궁의 묘에서 출토된 명기다. 명기란 내세에 사용하도록 부장하는 기물로,

이처럼 청화로 온갖 초화문과 나비와 칠보문이 그려진 정교하고 다양한 기형은 매우 귀하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의 그림과 비슷한데 당시 상류층의 생활 수준과 여성용품들을 추정할 수 있다.

 

 

 


 

백자청화망우대명초충문잔탁, 입지름16cm. 남궁련 소장


중국한테 배웠으나 완연한 조선취향으로 완성된 16세기의 잔받침대다. 忘憂"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프하거나 노여워 말라?"

 이렇게도 갓맑고 청초한 잔받침위에 술잔을 놓았던 오백년전 조상들은 무슨 근심 어떤 걱정을 안고 살았을까?

북쪽오랑캐나 동쪽왜구가 쳐들어올까 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날까 봐?

쇠한 부모님이 돌아가실까 봐?


 패랭이꽃 몇송이 위를 날고 있는 벌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잉잉거리는 날개짓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선 초기 사기장인들은 중국에서 배운 기술로 이렇게 똑부러진 조선 물건으로 만들어 내셨다.

 

 

 

 

  

 

백자청화죽문각병, 높이 40cm, 국보, 호암미술관.

18세기 문예부흥기 사대부들의 칼칼한 미감과 정치한 요업수준을 보여주는 백자주병의 대표작.

 

 

 


18세기 주병 중 가장 선비적 서정이 잘 구현된 작품으로 백여년 후 추사의 세한도 가 연상된다.호림박물관

 

 

 


백자청화추초문각호(높이 13cm) 


                                     

조선미의 발견자요 열렬한 전도사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한발 앞서 조선도자기에 빠져있던 다섯살 연상의 아사카와 노리다케가 1914년 가을 선물한 도자기로 유명한 물건.


패랭이꽃이 소슬한 정한를 풍기는 소위 아키쿠사몬

(중기백자의 초화문을 일인들이 가을풀이라는 뜻의 추초문(秋草紋)으로 명명)


18세기 전반 금사리계청화백자의 대표작 중 하나다.

우윳빛 피부를 스며나온 보약의 얼룩이 약호로 사용된 증명인 듯,

고졸미와 무상한  세월,유한한 인생의 허무를 보여주고 있다.

야나기의 발품과 예술혼의 결정체 도쿄 일본민예관 소장. 

 

 




백자청화초화문각호,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소장.

금사리 관요의 대표문양인 패랭이꽃이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풍긴다.
국내에서는 본 적이 없다  

 


 

 

 

영조와 거의 같은 시기인 청 옹정제(1725년) 때 제작된 백자청화산수인물문접시.

중국과 얼마나 달랐는지 웅변하고 있다, 지름 51cm, 크리스티

 

 

 

 

비슷한 시기 일본 규슈의 이마리에서 제작된 일본색 완연한 화려한 채색자기.

임란으로 기술이전을 끝내고 100여년 지나, 이런 도자기로 유럽의 도자기 시장을 석권했다.

18세기, 높이 63.5cm, 크리스티


 

 

1650년 간지가 있는 통칭 아리타 도자기로 불리는 고이마리(古伊萬里)청화산수문접시,

100여년 후 완전 일본화한 위의 항아리와는 전혀 다른 문양과 채색이다.

임란을 일으켜 수천명을 잡아간 지 50년 정도 경과한 때라 조선 도공들의 솜씨와 취향이 짙게 남아있어

100여년 후,영조 때의 금사리 초화문도자기에 훨씬 가깝다. 지름 35cm

 

 

 


백자청화초화문각발, 높이 8.5cm, 18세기, 교토 국립박물관소장.

금사리요 제작으로 추정되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춘 희귀한 작품

 


 

 

  백자청화초화문호,18세기 전반, 높이 29.2cm,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전형적인 18세기 전반 금사리 가마초화문항아리다.



   울긋불긋 온갖 색을 칠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도자기가 중국과 일본을 뒤덮던 시절,조선은 이런 도자기를 만들었다.

 시대와 유행을 역행한 이런 도자기를 만든 영조금사리 도공들의 창의적 발상과 도자미학에 깊은 존경과 찬사를 바친다.


    금사리!그 한 시절만으로 다른 건 몰라도 도자분야에서는 세계 일등이었다.

1700년대 전반이었다. 그런데 이백년 후 일제강점기,우리 할머니들이 공장에서 찍어 낸 왜사기에 정신 나갔을 때

 눈 밝은 일본인들은 광이나 마루밑 먼지 구덩이 속에 뭍혀 있던 이런 물건 앞에서 '아키 쿠사' 고소메라며 꺼뻑 죽었다.

금싸라기같은 수입산 산화 코발트로 시문된 패랭이 꽃에서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일렁인다.


   이런 금사리 청화백자를 두고 은둔의 나라 고난의 민족이 빚어 낸 '비애의 미'어쩌구 그들은 옷깃을 여몄다. 

그래서 이렇게 정말 좋은 물건은 일본에 다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활짝 핀 분원백자 전성시대

 

 

    11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 왕이 된 남자 정조(1776-1800)는 선왕 영조그랬던 것처럼 분원 도제조를 지냈다. 도자기가 뭔지 요업이 뭔지 꿰뚫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명옷과 채식위주의 식단을 고집했던 영조처럼 근검 절약을 생활철학으로한 담박고졸한 공예관을 가졌던 정조는 당시의 화려하고 무절제한 청화백자의 범람을 보다못해 선왕의 뒤를 이어 갑번자기 번조 금지령을 내린다.

 사실 한 시대의 유행은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나선다고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18세기 후반은 북학파들이 새로운 사회 주도세력으로 떠오를 때였다.


    연암 박지원의 제자 박제가(1759-1805)와 이희경은 연경의 그 화려하고 매끈한 도자기에서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해 조선 도자기의 미숙한 기술과 문양의 촌스러움을 비판하면서 통상과 무역을 통한 선진기술 습득만이 조선 상공업 육성의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동도서기(東道西技)동도서기(東道西器)이기도 했다. 그것을 입증할 아주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을묘원행의궤도주관 화사정조의 총애속에 국민화가로 활약했던 화선(畵仙) 단원포의풍류도다. 



 

 


포의풍류도


 

   비교적 젊은 시절 단원의 자화상으로 공인된 그 그림 속에 청나라 가요자기가 버젓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풍속도와 실경에서 어떤 화가 보다도 조선적인 체취와 색깔을 자랑했던 국민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 좋은 조선백자를 어디다 두고 중국 도자기와 함께한 자화상을 그렸을까.청나라 문물의 선망 특히 도자분야의 사회 주도층의 선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실제 왕실 연회중국산 다채자기(多彩瓷器)가 사용되기도 했다.당시 조선 사람들은 중국이 신문물의 보고였기에 화려무쌍한 중국 도자기에 대한 선망은 지금 한국인들의 유럽 명품에 대한 선호 못지않았으리라 짐작된다.그러니 분원에서 생산되는 화기,즉 청화백자라도 갖고자 하는 상류층의 욕망이 만만찮았을 것인데 그래서 나온 부작용이 사번(私燔)이니 별번(別燔)이니 하는 것이었다.그렇게 과잉 생산된 제품이 암거래 뒷거래로 수요층에 흘러 들어갔다.


   갑번자기 금지는 생활철학에 반하는 사치풍조에 대한 경종과 함께,과부하에 걸린 국가 산업시설과 과로에 시달리는 기능인 보호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자는 조치였다.물론 예나 지금이나 수요공급의 원칙에 역행하는 그런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그리고 모든 기술과 예술은 역동적이고 풍요한 시대에 발전한다. 


   정조년간 도자기 산업은 더욱 다양하고 폭넓게 발전했다.중국풍 의장과 기법을 받아들여 주병과 항아리에 각을 치는 기물이 유행했고 온갖 길상문산수.초화문이 들어간 문방용구 번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도자기께나 안다는 사람들이 흔히 '상분원'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주로 영조 말기에서 정조년간의 분원과 그 시기의 기물을 통털어 일컫는 말이다. 상분원기(1752년-1800년경)금사리에서 장소만 이동했지 기술과 인력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제품의 질 또한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오늘날 박물관의 유물 전시장이나 경매장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백자제품들의 상당부분은 바로 상분원 제품이 차지하고 있는 이유다.


    순조 때는 전국에 80여 곳의 사기시장이 개설될 정도로 도자기 생산과 유통은 국가 기간산업이 될 정도로 활기를 띄었다. 의식주 각 분야의 수준이 높아져 7첩이니 9첩이니 하는 반상기가 많이 제작되는 등 생활자기의 질과 기종도 다양하여 사대부에서 서민까지 수요층의 요구에 부응했다.


   정조 때의 청화 금지령의 여파로 양각이나 음각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등 기형과 기종이 더욱 다양해진 시기이기도 하다.그러나 지나친 왕실 행사와 그로 인한 별번 비용, 각사에서 중간에 떼어 먹는 도자기 증가량까지 폭증하면서 받는 돈에 비해 턱없이 많이 구워내야하는 분원의 경영난은 가중된다.


    헌종(1835-1849)때의 별번은 극심했던 것같다.오죽 중간에 떼어먹는 도자기가 많았으면 조선초기 분청자 시절에 관사명을 인화문으로 도장 찍듯이 정(釘)으로 쪼아서 새기기까지 할 정도였다.그렇게라도 해서 유출을 막고 신속하게 전달 되도록 하고자 애쓴 눈물겨운 도난 방지책이었다.


    한편,수입 도자기의 선호는 더욱 심해져 헌종14년(1848) 진찬의궤화준을 보면 중국에서 들여온 오채자기가 버젓이 앉아있다. 당시 조선백자의 질이 형편 없었다면 일말의 이해라도 할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색과 문양은 나무랄 데 없는 수준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대에 젖은 지도층의 눈에 내것은 촌스럽고 물건너 온 것이 예뻐 보이는 걸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철종 때는 백자의 문양과 형태도 더욱 변화를 가져와 청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은 문방구와 접시나 항아리 등 생활자기많이 제작되었고 수요층이 더욱 확대 된다.정치적으론  안동김씨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부패구조가 고착돼 왕실 재정이 허약해지는 악순환에 들어서게 되고 따라서 왕실 도자기 공장인 분원의 운영은 더욱 악화된다.

 

   영.정조 때는 군왕의 직접적인 분원관리 정책에 따라 제작과 경영이 어느정도 합리적인 시스템하에서 돌아갔으나 순조 이후 어린 왕들의 시대 계속되면서 당대 최대 공기업이었던 광주국립도자기 공장은 임자없는 나룻배 신세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대로 된 제작과 운영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고종(1863-1897)으로 와서는 순조 때부터 증가한 별번 사번의 폐허는 극에 달했다. 천죽(만개)을 구워 달라고 주문하고 도자기 값은 백죽 값만 지급하는 지경으로 왕실에 돈이 말랐고 2천죽 납품 수량이면 중앙관서의 아전과 하인 등이 중간에 빼먹는 물량이 절반이었으니 분원의 도자기 제작과 납품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왕실에서 관장하던 분원의 실질적인 경영은 1870년대부터 몇몇 큰 상인 물주의 손으로 넘어간다. 동시에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명(器皿)의 수입산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고 부유층과 지도층의 도자기에 대한 선호가 화려한 당사기나 왜사기로 바뀌면서 분원은 경영도 어렵고 가장 큰 발주처와 후원세력도 잃게 되는 이중고 속에서 급속도로 위축된다.거기다 끝없는 희생과 고역에 시달리느라 새로운 기술과 디자인개발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던 장인들은 창의력을 잃어 갔고 그 결과, 갈수록 도자의 질은 떨어 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된 것이다.공식적으로 분원이 민영화된 해는 1884년이지만 실제적으로 제구실을 못하기 시작한 것은 10여년도 훨씬 이전이었다는 것이다.   


   영조의 금사리시대서 정점을 찍은 조선 백자정조의 상분원 시대에 마지막 절정의 꽃을 피우고 19세기 초인 순조.헌종때는 청의 영향을 받은 다종다양한 디자인의 제품으로 대중화를 이루지만 화려한 왜사기와 중국의 채색자기에 밀려 지도층의 선호도가 빠지면서 고종에 오면 마침내 방만한 운영과 연구개발 부족으로 조선백자의 정체성은 실종되고 저급한 품질로 이어진다. 결국 고종 후반에 와서는 왕실 재정의 피폐와 저가 왜사기의 시장점령으로 경영난에 못이겨 400여년 내려온 관요의 간판을 내리는 조선도자사의 비극,아니 한국도자사의 비극 맞게 되는 것이다. 


   민영화 이후,시설과 인력이 여주.이천을 위시한 전국으로 흩어지기까지 분원 사기가마의 불은 20여년을 더 이어갔다. 형편없이 쫄아들긴 했지만 왕실 소용 기명의 수요가 있었고 관요사기에 대한 국민적 요구도 아주 사라지지 얺아,한동안 우천강변은 전국에서 올라온 상인과 구매자들로 큰 사기장터가 형성되기도 했다.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자본의 도자기 공장들이 들어서고 왜사기가 본격 생산 되면서 품질과 가격경쟁에서 밀린 조선백자는 서서히 마지막 명맥이 끊어지게 된다.

 

   금사리 이후 분원 말기까지 국내외 박물관과 경매출품작 위주로 청화백자 몇 점을 소개하면서 엉성한 '청화백자 이야기'를 마감한다.

 

 





백자청화진사연화문호(조선도자기에 귀신들린 아사카와 노리다카 수집품. 종교적 경지의 신비스런 작품이라 찬탄한 물건)


 

    
백자청화진사연화문호. 높이 44.6cm,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청화진사연화문호.후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진사가 들어 있어 엄밀히 말하면 청화백자만은 아니지만 정조대를 대표하고 조선백자를 상징하는 대표작 중의 한 작품이라  소개한다.농익은 솜씨의 화원이 절제된 터치와 마춤한 공간 분할로 연잎과 꽃을 기면에 배치했는데,연꽃에만 진사로 포인트를 찍어 절묘한 도자화의 경지를 이룩했다.


   이 항아리는 수원의 용주사에 있었고 그림을 그린 화가는 단원이었다는 설이있다. 중국도자기를 끼고 있는 자화상을 그렸던 김홍도라고 조선 도자기에 그림 그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그리고 용주사는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를 기리는 원찰이고 그 절의 후불벽화단원이 주관하여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조선도자사상 최상급의 도자화인 이 그림의 작가가 단원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걸작 항아리는 일제강점기 아사카와 노리다카(1884-1964)가 소장했다는 기록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이다.다쿠미는 임업검사소 공무원으로 조선에 와 본업보다 조선의 공예.민속품에 혼을 빼았겨 조선도자와 조선소반 관련 책을 남길 정도로 조선의 예술과 조선적인 모든 것을 사랑했다.조선옷을 입고 다녀 일본 순사도 속을 정도로 반 조선사람이었던 다쿠미는 급성폐렴으로 41세에 죽으면서 조선에 뼈를 묻고 싶어했다. 망우리에 그의 무덤이 있다.


   노리다카는 '조선백자귀신'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우리 도자기를 좋아해 동생과 함께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와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경복궁안 집경당에 설립하는 주역이 된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인다는 진리에 따라 조선미에 눈뜬 일본사람 노리다카의 눈에 경성의 한 골동가게에서 눈 밝은 임자를 기다리고 있던 이 항아리가 들어왔던 것이다. 1920년 5월 경성에 와 있던 노리다카의 친구 야나기는 이 천하의 명품을 보자마자 엄청난 감동에 빠져 일기에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남긴다.


   "...도자기의 떠오르는 듯한 형태에는 조각의 멋이 있다. 때때로 그 형태는 인체의 아름다움마저 암시한다. 이 항아리는 유난히 부드럽다. 살갗의 아름다움엔 따뜻한 느낌이 살아 있다. 누구나 그것을 만져 보고 싶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둥그스럼한 모양이라거나 어깨를 따라 흐르는 선에서는 자연의 호흡까지도 들을 수 있다.더구나 그 살갗의 빛이 얼마나 희고 아름다운지 모른다.언제나 조선자기에서 볼 수 있는 조용한 푸르름이 베일처럼 걸려있다.


   이 단순한 흰빛에서도 우리는 민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여인의 모습처럼 다소곳한 내면에 숨은 부드러운 빛이다. 밖으로 드러나려는 어떠한 오만도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아름다움은 내부에 숨겨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지켜볼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봄날의 안개같은 하얀 피부에 그려진 것은 한 묶음의 연꽃이다. 부드러운 줄기 위에서 꽃은 자신의 조용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꽃잎은 분홍과 연두빛으로 평온하게 벌어져 있다. 오른쪽에는 한 송이 봉우리가, 왼쪽에는 긴 줄기가 휠 정도로 커다란 잎이 하나 그려져 있다. 이것들이 이른 아침의 이슬에 젖어 연한 안개 속에 떠올라 있다. 모든 것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소리도 없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연꽃은 그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마치 여인같은 미륵이 반가좌의 모습으로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한 정취가 감돈다. 어떤 도공이 이 영원한 작품을 낳았을까. 그는 수백 년의 조선이 마음 속에 품었던 사상의 극한을 여기에 그려낸 듯하다. 마음으로 그 것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정화되고 조용해져 피안의 세계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조용함 이것이야말로 불자들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정토(淨土)이리라. 적막과 쓸쓸함과 조용한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마음에 다가온다.(중략)

 이것은 조선시대의 작품 가운데서도 영원한 것 중의 하나다. 이처럼 종교의 영역에 도달한 작품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야나기 무네요시처럼 조선도자기를 깊이 알고 진정으로 사랑한 외국인, 야나기만큼 한국문화와 한국인을 정확하고도 진실하게 이해하고 존중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지금까지의 인식을 더욱 바꾸기 어려울 것 같다. 


   아뭏튼 이 기막힌 보물을 보려면 오사카에 가야한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가야 볼 수 있는 명품을 몇 점 더 보자.



 

           

백자청화초화문호


번잡스럽다 할 정도로 디자인 과잉이지만  

금사리 시대의 소슬한 정취는 살아있다. 18세기 후반, 높이 27.2cm


 

 

백자청화매조분재문호


매화분재를 얻기 위해 그림을 팔았다는 단원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18세기 후반 당시 지도층의 취미생활의 일단을 보여주는 작품



 

 

 백자청화창호석류문각병


요란한 다채색은 끝까지 배제하고 단아한 청화 일색만 고집한 색채미감 덕분에

기형과 시문에 중국풍이 많이 들어왔지만 조선미를 잃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높이 38.4cm)

 

 

 

 

백자청화산수문각병


18세기 후반. 겸재의 진경시대는 짧았고 다시 중국식으로 갔다.

그림동네의 뿌리깊은 중국바라기는 조선 끝까지 주욱 계속된다.

그래도 천하의 조선백자다.  


 

 

 

백자청화소상팔경문편병


18세기 말 19세기 초.

당시 화단을 휩쓸었던 소상팔경이 그려진 편병 정교한 필치와 상형으로 상류층의 고급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백자청화진사보상화문각병

위 각병에서 더욱 중국색이 진전된 19세기 작품






    백자청화영지문호

청자기를 본 따 뚜껑까지 문양으로 꽉찬 19세기 후반의 작품.그래도 아름답다.
이상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 

 


 

 



 백자청화파초문호

파초신선을 상징하는 식물로 문인 사대부들의 익숙한 그림 소재였다.
이 항아리의 그림은 정조의 '파초도'를 연상시킨다.
제작시기도 18세기 후반 정조년간으로 추정된다. 조선백자아취어린 문기가 넘치는 황금기의 명품이다.
높이 37cm, 4억에 낙찰, 서울옥션


 

 

 

백자청화송하신선호문호(松下神仙虎文壺)


소나무 아래 신선이 호랑이 꼬리를 잡고 장난을 거니까

호랑이가 째려 보는 상황이 화원의 필치로 그려져 있다.


까치호랑이가 시문된 비슷한 년대의 비슷한 물건이 경주박물관에 있는데 이것에는 턱도 못미친다.

2008년 12월 샌프랜시스코의 본햄 경매장에서 당시 가격으로 약60억에 일본인이 낙찰 받은 걸로 알려진 희귀품.

워렌이란 사업가가 한국에 왔다 사간 물건이 후손에 의해 출품됐다고 한다.

높이 40cm, 18세기 후반 상분원시대 작품



 

 

송하신선호문호의 하일라이트 그림이 그려진 다른 면이다.

신선이 마치 고양이랑 노는 듯, 호랑이 꼬리를 느긋하게 잡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백자청화오동신선문필통


(높이 13.3cm지름 14cm 2006년 k 옥션,6억)

19세기 초 소위 '분원백자' 전성기의 희다못해 푸른색이 비치는 문방구의 총아 필통이다.

조선초기의 새벽 햇살에 비치는 눈덩이같은 설백색에서 중기 금사리시대유백색을 지나 

분원의 기술력은 이런 청백색의 깔끔한 색조를 만들어 내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이정표가 된다.

 

 


 

 

백자청화초충문주병


위 필통과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다.

당시 선호하던 초충문이 한껏 부푼 화원의 기량으로 펼쳐져

자연친화적 조상들의 인생관을 들여다 보는 듯 하다. 높이 28cm.

 



 

 

백자청화운용문호


높이 55.6cm,전형적인 19세기 전반 용항아리


뭘 할 때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해 보는 국민들 기를 죽이시던 대통령이 계셨다.


마침내 그 분은 전문 분야인 줄 알았던 땅파기조차 제대로 못해 강물을 20조짜리 녹차라떼처럼 만들어 놓고도

그 강가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여러분! 강으로 놀러 오세요! 라고 국민들 염장을 마음껏 지르셨다.


 2010년 12월 이었던가.

선진20개국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장 사전 점검에 나선 그 각하께서 이것과 비슷한 용항아리를 보시고 한말씀 하셨다.

 이건 중국 거 잖아! 청자로 바꿔!

어쩌면 그렇게도 모든 세상사에 자신만만 할 수가 있을까. 더구나 그 대상이 예술품에 이르러서야...

위당 정인보 선생이 강의 중 어지러울 난(亂) 자를 써 놓고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난리는 무식한 자가 칼자루를 잡을 때 일어난다"



 

 

 

백자청화16각산수운용문접시


중국냄새가 폴폴나는 19세기 접시다.

청나라 연호가 적혀 있는 물건도 있다.

당시 지도층의 수입품 선호 풍조와 식생활의 일면을 보여준다.

 



 

 

백자청화화조문호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항아리 형태와 문양을 보여주는 분원말기의 작품.


자유분방한 민화의 필치가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안겨 주는데

열강의 각축장이된 조선의 왕 고종과 대원군, 그리고 명성왕후가 뒤엉켜

한치 앞이 안보였던 당시의 정치.사회 분위기는

이 항아리 그림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나오든 미소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 시기를 끝으로 분원의 조선관요는 물적,질적 기반을 잃고 

전국에 일본의 대규모 도자기 공장이 세워져 값싸고 삼빡하기까지한 왜사기의 시대로 급속도로 바뀌게된다.




[출처] 청화백자 이야기|작성자 movie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