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5

2018. 4. 19. 14:38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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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유집 제6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ㅡ 신익전(申翊全)


길에서 큰 눈을 만나다〔途中逢大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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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이른 황량한 남녘에 눈이 더욱 쌓여 / 春至南荒雪轉深
야밤에 나뭇가지 부러질 줄 어찌 알았으랴 / 那知一夜勢摧林
사방을 보니 들판은 흰 비단처럼 새하얗고 / 旁瞻原隰渾成縞
멀리 이어진 바위산도 옥처럼 늘어섰네 / 遠挹巖巒亦列琛
먼 길 가기 어렵다고 어찌 감히 말하랴 / 敢道征人長路澁
추위에 고생하는 수졸이 매우 가련하네 / 偏憐戍卒苦寒侵
역정에선 차 달이는 흥취가 전혀 없으니 / 郵亭絶少煎茶
율관(律管) 불어 추위 녹이려 생각할 뿐 / 吹律唯懷破涸陰
[주-D001] 율관(律管) 불어 : 
유향(劉向)의 《별록(别録)》에 “추연(鄒衍)이 연(燕)나라에 있을 때에 땅은 비옥하나 날씨가 너무 추워 오곡이 자라지 않는 땅에 살았는데, 추연이 율관을 부니 따뜻한 기운이 이르렀다고 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 신익전(申翊戰)  :  여만(汝萬), 동강(東江)   1605년(선조 38)  ~  1660년(현종 1)


요약 1605(선조 38)∼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만(汝萬).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영의정 흠(欽)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절도사 제신(濟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효종 때 호조·예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한성부의 우윤과 좌윤을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그의 관직생활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으로 미묘한 처지에 놓여 한때 위태로운 경우도 있었으나, 충신(忠信)을 생활신조로 삼아 큰 위난을 당함이 없이 자수(自守) 할 수 있었다. 『주역』을 애독하여 깊이 연찬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유집』 19권 3책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주집 전집 제7권 / 시(詩)○관동록(關東錄)    ㅡ 이민구(李敏求)



우통수를 길어서 차를 끓였다. 옆에 있던 소사가 “이 물을 마시면 총명해진다.”라고 하기에 웃으며 시를 쓰다〔取于筒水煎茶傍有小史曰飮此令人聰明笑而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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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런 물이 인성을 바꿔서 / 聖水移人性
탁한 성품을 맑게 한다네 / 能令濁者淸
찻잔 내려놓고 마시고 싶지 않으니 / 停甌不欲飮
나는 본래 총명함 싫어서지 / 我自厭聰明



  *** 이민구(李敏求)  :  자시(子時), 동주(東州), 관해(觀海)

요약 1589(선조 22)∼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 신당부수(神堂副守) 이정(李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검(李希儉)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며, 어머니는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612년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해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어서 예조·병조좌랑을 거쳐 1622년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 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였다.

   교리·응교 등을 거쳐 1623년(인조 1)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했고, 1624년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26년 대사간이 되고, 이듬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가 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그 해 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인 임천군수로 나갔다.

   1636년 이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기 위해 배편을 준비했으나, 적군의 진격이 빨라 왕이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자책을 하다가 1649년에 풀려났다. 그 뒤 부제학·대사성·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했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 한다. 저서로는 『동주집(東州集)』·『독사수필(讀史隨筆)』·『간언귀감(諫言龜鑑)』·『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남아있다.

  자료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주집 시집 제5권 / 시(詩)○철성록5(鐵城錄五)

곡우에 비로소 비가 내리다〔穀雨日始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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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니 봄바람 조이 부는데 / 拓戶條風好
처마 밑 거닐려니 곡우가 훼방하네 / 巡簷穀雨妨
차 달여 마시니 앓던 폐 생기 돌고 / 煎茶蘇病肺
술 걸러 들이켜 시름겨운 마음 달래노라 / 漉酒浣愁腸
갓 자란 싹에 오솔길 푸르러지고 / 徑綠抽纔嫩
막 피어난 꽃에 숲 붉어지네 / 林紅吐乍芳
지금 봄 이르니 / 卽今春事早
둥지의 제비야 서둘지 마라 / 巢燕莫須忙
[주-D001] 봄바람 : 
조풍(條風)은 팔풍(八風)의 하나로, 봄에 부는 동북풍을 말한다. 입춘 후 45일 동안 분다고 한다. 팔풍은 입춘의 조풍, 춘분(春分)의 명서풍(明庶風), 입하(立夏)의 청명풍(淸明風), 하지(夏至)의 경풍(景風), 입추(立秋)의 양풍(涼風), 추분(秋分)의 창합풍(閶闔風), 입동(立冬)의 부주풍(不周風), 동지(冬至)의 광막풍(廣莫風)이다. 《易緯通卦驗》




무명자집 문고 제3책     ㅡ  윤기(尹愭)


술 마시는 법〔飮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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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무지한 나는 술을 좋아하여 절제할 줄을 몰랐다. 열세 살에 《논어》ㆍ《맹자》를 접하고서야 음주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읽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술을 끊으며〔止酒文〕〉라는 글을 짓고 절대로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술을 끊겠다는 마음이 정해지자 술잔과 술동이가 아무리 눈앞에 어지럽게 널려 있어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狂藥)으로만 보였으니, 애써 멀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술이 싫어졌다.

   나는 본디 병치레가 잦고 허약하였는데, 서른 살을 넘겼을 때 의원이 내게 말하였다.
“얼굴에 혈색이 부족한 걸 보니 온몸에 기운이 고루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약을 쓰고 싶지만 가난해서 걱정이니, 술로 기운을 돌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치게 마시지만 않으면 괜찮을 테니 굳이 끊을 것까지야 무어 있겠습니까?”
이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였다.
‘지금 술을 마시더라도 주정을 부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게다. 한두 잔을 넘지만 않는다면 누가 억지로 들이붓기야 하겠는가?’

   결국 전처럼 술을 마시기로 하고 술이 있으면 조금 마셨다. 하지만 술이 없다고 시장에서 사오거나 남에게 구하지는 않았다.
늙은이가 된 지금도 술을 경계하는 마음이 있어 아무리 적은 양이라 해도 단숨에 들이키지 않고 천천히 마시곤 한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비웃으며 묻는다.
“술을 차처럼 마시면 무슨 맛이 있단 말이오?”
나는 이렇게 응수한다.
“술은 차처럼 마셔야 비로소 단맛 속에 쓴맛이 있고 쓴맛 속에 단맛이 있어 형언할 수 없이 지극한 맛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샘물 맛을 구분했다는 육우(陸羽)장우신(張又新)도 이보다 더 섬세하게 맛보지는 못했을 게요. 술잔을 기울여 단번에 들이켜 버리면 어느 겨를에 섬세하게 술맛을 느낄 수 있겠소?”

   마치 나는 남들이 모르는 음주의 오묘한 이치를 참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욱 비웃으며 억지라고 한다.
근래에는 곤궁함이 더욱 심하여 가끔은 몇 달 동안 술맛을 보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다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50이랑의 밭에다 차조를 심어 좋은 술을 빚고 아침에 한 잔, 낮에 한 잔씩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은 며칠 동안 밥도 짓지 못하여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찌 술 마시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오늘은 여러 날을 굶주리던 끝에 집사람이 실〔絲〕을 내다 팔아 돈 2문(文)을 받고 마을에서 막걸리를 사왔다. 그래서 막걸리 한 잔으로 밥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맛이 시어 터지고 몹시 떫었다. 나는 다 마시지 못하고 웃으며 말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처럼 마시지 않았을 것을. 단숨에 들이켰으면 맛이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일을 써서 나의 졸렬한 모습을 기록한다.
[주-D001] 술 마시는 법 : 
본서의 편차 순서로 보아 작자 나이 52세 때인 1792년 중후반기의 작품이다.
작자는 이 해에 문과에 급제하기는 했으나 아직 임용되기 전이라 궁핍한 생활은 오히려 더 심해졌으니, 문과에 급제하기 전에는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성균관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했지만 급제 이후에는 그마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無名子集 詩稿 冊5 憶昔行》 이듬해인 1793년 가난 때문에 화와(和窩)를 팔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고려하면, 작자가 이 글에서 “며칠 동안 밥도 짓지 못하여 굶어 죽게 생겼다.” “굶주리던 끝에 집사람이 실〔絲〕을 내다 팔아 돈 2문(文)을 받고 마을에서 막걸리를 사왔다.”라고 한 말은 실상이 상당히 반영된 말로 판단된다.
이 글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생활 중에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게 된 어느 날, 오랜만에 술맛을 보게 됨을 좋아했으나 시어 터지고 떫은 맛 때문에 평소의 음주법(飮酒法)에 대해 자조(自嘲)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구성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술을 절제할 줄 몰랐던 어린 시절, 경전을 접하고 술을 끊은 13세 이후 시기, 의원의 권고로 술을 조금씩 마신 30세 이후 시기를 순서대로 서술. 둘째, 이러한 과정 속에 형성된 남다른 음주법과 그에 대한 소신을 밝힘. 셋째, 궁핍한 생활 속에서 자신의 특별한 음주법에 대해 스스로 회의하는 장면 묘사.
첫째와 둘째 부분에서 작자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껏 고조되던 긍정적이고 밝은 분위기가 셋째 부분에서 냉혹한 현실 앞에 갑자기 꺾이는 구조로, 돈좌법(頓挫法)이 사용되었다. 음주라는 소재를 빌려, 작자의 소신이 궁핍이라는 현실 아래 무기력해지는 비참한 사태를 형상화하였다.
[주-D002] 사람을 …… 광약(狂藥) : 
송(宋)나라 범질(范質)이 재상으로 있을 적에 품계를 올려달라는 조카 범고(范杲)의 청탁을 받고 경계의 뜻을 담아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중에 “너는 술을 즐기지 말거라.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이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니, 근후(謹厚)한 성품을 바꾸어 흉험(凶險)한 사람으로 만든다.〔勿嗜酒 狂藥非佳味 能移謹厚性 化爲凶險類〕”라는 말이 있다. 《小學 嘉言》
[주-D003] 육우(陸羽) : 
733?~804? 당(唐)나라 때 차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여 다신(茶神)으로 일컬어진 은사(隱士)이다. 그는 차에 대한 제반 사항을 논술한 《다경(茶經)》을 지었으며, 아울러 차를 끓이는 물의 수질을 품평하여 천하의 물맛을 22개 등급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주-D004] 장우신(張又新) : 
당나라의 관료이자 시인으로, 차를 즐겨 마시며 물을 품평하여 〈차를 끓이는 물에 대하여〔煎茶水記〕〉를 지었다.

  * 원문

     飮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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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幼小無所識。甘酒不知節。至十三歲讀論孟。有感於戒飮之訓。遂作止酒文。斷不近之。此心一定。雖盃樽爛眼。視之以狂藥。不強而自厭。然素善病羸弱。三十後。醫者曰面少血色。氣不周體。欲投大劑。愍子之窶。惟有飮以行氣耳。無過自好。何必絶乎。余以其言頗有理。因自思今雖飮。庶不至於亂。但無過一二盃。則人誰強灌之者。乃復之而遇則小進。否則不沽於市。不索於人。今老矣而猶常存戒心。雖小許不敢一吸。倒盃徐徐呷之。人笑之曰。飮酒如飮茶。有甚滋味。余應之曰。飮酒如飮茶然後。方知甘中有辛。辛中有甘。自然有不可形之至味。雖陸羽,張又新之能辨泉味。未必過之。若一傾而盡。則何暇細嘗其味耶。若吾眞知飮酒妙理。他人不知也。人益笑之以爲強辨。近來窮益甚。或至數月不知味。亦不甚思之。而大抵若有五十畒秫則作佳釀。朝一盃午一盃則足矣。而今或數日不得炊。恒憂大命近止。豈望飮乎。今日屢空之餘。家人賣絲得二文。沽村中濁酒一盃以代食。其味酸惡蜇慘。余不能盡而笑曰。早知如此。不用吾飮茶法也。使一吸而盡。豈復知其美惡哉。因書此以志吾之拙態。


* 교감표점 원문
  飮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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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幼小無所識,甘酒不知節;至十三歲,讀《論》、《孟》,有感於戒飮之訓,遂作《止酒文》,斷不近之。此心一定,雖盃樽爛眼,視之以狂藥,不强而自厭。
然素善病羸弱,三十後,醫者曰:“面少血色,氣不周體。欲投大劑,愍子之窶,惟有飮以行氣耳。無過自好,何必絶乎?” 余以其言頗有理,因自思:“今雖飮,庶不至於亂。但無過一二盃,則人誰强灌之者?” 乃復之,而遇則小進,否則不沽於市,不索於人。
今老矣,而猶常存戒心,雖小許,不敢一吸倒盃,徐徐呷之。人笑之,曰:“飮酒如飮茶,有甚滋味?” 余應之曰:“飮酒如飮茶,然後方知甘中有辛,辛中有甘,自然有不可形之至味。雖陸羽張又新之能辨泉味,未必過之。若一傾而盡,則何暇細嘗其味耶?” 若吾眞知飮酒妙理他人不知也。人益笑之以爲强辨。
近來窮益甚,或至數月不知味,亦不甚思之。而大抵若有五十畝秫,則作佳釀,朝一盃,午一盃,則足矣。而今或數日不得炊,恒憂大命近止,豈望飮乎?
今日屢空之餘,家人賣絲得二文,沽村中濁酒一盃以代食。其味酸惡蜇慘,余不能盡而笑,曰:“早知如此,不用吾飮茶法也。使一吸而盡,豈復知其美惡哉?” 因書此以志吾之拙態。

  * 윤기(尹愭)  : 경부(敬夫), 무명자(無名子)


요약  : 1741(영조 17)∼1826(순조2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내용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 아버지는 광보(光普)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일서(一瑞)의 딸이다. 이익(李瀷)을 사사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20여년간 학문을 연구하였다. 1792년(정조 1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초사(初仕)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예조·병조·이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남포현감(藍浦縣監)·황산찰방(黃山察訪)을 역임하였다.

   이 후 다시 중앙에 와서 『정조실록』의 편찬관을 역임하였다. 벼슬이 호조참의에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무명자집』 20권 20책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담집 속집 제1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ㅡ 구봉령(具鳳齡)


호당에서 눈 오는 밤에〔湖堂雪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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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바람 흰 눈을 날리니 / 嚴風飄素雪
한밤중 처마 기둥에 걸리네 / 半夜拘簷楹
나그네 누워 잠들지 못하고 / 客臥不能寐
문득 창문의 소리를 듣네 / 却聞窓戶聲
희미한 빛 문틈으로 들어오고 / 餘光投孔隙
찬 기운 살갗을 파고드네 / 冷侵肌骨淸

일어나 뜬눈으로 밤 지새니 / 起來眄夜除
눈 아래 옥구슬이 나란하네 / 眼底瑤琚平
계곡은 고운 모습 머금었고 / 溪壑含姸姿
들판은 아름다운 빛을 발하네 / 原野發華榮
섬돌엔 백옥 벽돌 깔렸고 / 階墀甃白壁
무성한 숲엔 밝은 구슬이 매달렸네 / 林薄綴明瓊

잠깐사이 쓸어 낸 듯 개니 / 須臾劃開霽
별과 달이 찬란히 정기를 드리우네 / 星月燦垂精
싸늘한 빛 원근에 흩어지고 / 寒輝蕩遠近
호탕한 기운 맑은 하늘에 쏟아지네 / 浩氣射虛明
강산이 그림 속에 들어가고 / 湖山入畫圖
경계가 봉영에 이어졌네 / 境徼連蓬瀛

군옥부에 오른 듯 / 如登羣玉府
열두 누각이 치솟았네 / 十二樓崢嶸
삼청 길을 찾아간 듯 / 疑訪三淸路
부용성이 밝게 빛나네 / 晃朗芙蓉城
은 다리는 끝없이 반짝이고 / 銀橋炯無際
옥 누각은 높이 서로 버티고 있네 / 璆閣高相撑

누가 알겠나, 조화옹이 / 誰知造化翁
잠깐 사이 신공을 드러낸 줄을 / 頃刻神功呈
호당은 본래 경치가 좋아 / 湖堂本絶勝
천고에 성대한 명성 독차지했다네 / 千古擅盛名
길 위에서 세상을 초월하여 / 道上超物表
아득히 세상일에 얽힘이 없네 / 夐無紛累縈

이 밤 맑고 기이함 배가되니 / 此夜倍淸奇
광경이 어우러져 눈을 빼앗네 / 奪眼光景竝
대하고 보니 온통 고뇌에 싸여 / 對來渾被惱
감개함이 가슴속을 격동시키네 / 感慨激中情
서쪽 담장 도리나무 위에 뜬 달 / 西墻桃李月
휘영청 밝아 화려한 꽃이 핀 듯하네 / 爛熳堆繁英

한 번 쓸어버리니 다시 보이지 않고 / 一掃不復見
흩날리어 구렁에 가득하네 / 飄零溝壑盈
오렵송 길이 홀로 남아 / 獨有五鬣長
바람서리와 힘을 다투네 / 風霜能力爭
의연한 장부의 기상으로 / 毅然丈夫氣
홀로 곧게 우뚝 빼어났네 / 特秀負孤貞

진실로 나를 일으키는 자 상일러니 / 允矣起我商
참으로 평생을 의탁할 만하네 / 眞堪托平生
문득 마음이 깨어남을 알고 / 頓覺心慮醒
밤새도록 굳게 앉아있네 / 堅坐徹五更
옛날 사람을 상상하니 / 想像古來人
몇이나 조평에서 인정받았던가 / 幾許供朝評

양원에서 서간을 보내니 / 梁園授簡子
호방한 기개 부질없이 종횡으로 드러냈네 / 豪氣空縱撗
책상에 비친 눈빛에 애썼던 나그네 / 辛勤映榻客
맑은 이야기 마침내 어찌 이루었던가
/ 淸談竟何成
석 자 눈에 땔나무 끌어안고 / 三丈擁柴荊
높이 누워 꿈에서 깨지 않네
/ 高臥夢未驚

해진 신으로 땅 반을 밟고 / 敗屨半踏地
괴로운 회포에 경영을 쉬네
/ 苦懷息經營
파교 위에서 말 타고 읊조리고 / 吟驢灞橋上
산음으로 가는 낚싯배 탔네 / 釣艇山陰行
저 사람들 나름대로 운치 있으니 / 伊人各有致
우아한 운치가 시끄러운 소리 눌렀네 / 雅韻減鏗轟

어찌 알겠나 두 분 선생이 / 豈知兩先生
한 낮에 서서 기울지 않음을
/ 日午立不傾
지극한 정성 스승을 움직이고 / 至誠動函丈
빼어난 학문 이로 인해 맑고 밝았네 / 絶學賴澄晶
아 나는 말선의 무리로 / 嗟我襪線徒
남몰래 얼굴 항상 붉어진다네 / 竊添顔常赬

원하지 않노니, 금체시의 / 不願詩禁體
백전에 짧은 병기 버린 것을
/ 白戰去寸兵
원하지 않노니, 차 달이며 / 不願取煎茶
양고주와 경중 따지는 것을
/ 羔酒較重輕
원하는 건 구중궁궐 깊은 곳에 / 唯願九重深
천지의 원기 받은 임금님 미령하니 / 體元常靡寧

중화의 기운이 일신에 조화로워 / 中和運一身
무성하게 싹이 나와서 / 藹藹達句萌
남은 누리 천 척 땅속으로 들어가 / 遺蝗入千尺
볏단이 언덕처럼 높이 쌓이기를 / 秔稻積如京
작은 정성 근폭이 간절하니 / 微忱切芹曝
속마음 드러내 푸른 하늘에 울부짖네 / 披腹叫靑冥
[주-D001] 경계가 봉영에 이어졌네 : 
인간세상이 신선세계가 된 듯하다는 말이다. 봉영(蓬瀛)은 봉래(蓬萊)와 영주(瀛洲)의 병칭으로, 방장(方丈)과 함께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전하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바다를 말한다.
[주-D002] 군옥부(群玉府) : 
군옥산(群玉山)으로 서왕모(西王母)가 살았다는 전설상의 선산(仙山)이다. 《穆天子傳 卷2 註》
[주-D003] 열두 누각〔十二樓〕 : 
황제(黃帝) 때 곤륜산(崑崙山) 정상의 현포(玄圃)에 다섯 금대(金臺)와 열두 옥루(玉樓)를 짓고서 선인(仙人)을 기다렸다고 한다.
[주-D004] 삼청(三淸) : 
옥청(玉淸)ㆍ태청(太淸)ㆍ상청(上淸)으로,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선경이다.
[주-D005] 부용성(芙蓉城) : 
전설 속에 나오는 선경(仙境)을 말한다. 옛날에 석만경(石曼卿)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 하늘나라에서 부용성주(芙蓉城主)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說略》
[주-D006] 은 다리〔銀橋〕 : 
당 현종(唐玄宗) 초기에 나공원(羅公遠)이 현종을 모시고 월궁(月宮)을 구경가려고 계수나무가지 하나를 공중에 던지자 그것이 은빛을 내는 다리로 변하여 그 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수백 선녀(仙女)가 연출하는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관람하고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唐逸史》
[주-D007] 오렵송(五鬣松) : 
소나뭇과의 상록 교목으로, 잎은 다섯 개씩 모여서 나고 바늘 모양이며 씨는 ‘잣’이라고 하여 식용한다. 과송(果松), 백목(柏木), 유송(油松), 해송(海松)이라고도 한다.
[주-D008] 나를 …… 상(商)일러니 : 
공자가 《시경》을 가지고 자하(子夏)와 문답하면서 자하를 칭찬하여 “나를 흥기한 사람은 상이로다.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구나.〔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라고 하였다. 《論語 八佾》
[주-D009] 조평(朝評) : 
월조평(月朝評)을 말한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여남(汝南) 사람 허소(許劭)가 그의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인물을 평하는 데에 명망이 있었다. 그들은 향당(鄕黨) 인물(人物)들을 의논하기를 좋아하여 매월 그 품제(品題)를 고쳤기 때문에 그때 여남 지방의 풍속에 월조평이 있었다 하였다. 《後漢書 卷68 許劭傳》
[주-D010] 양원(梁園)에서 서간을 보내니 : 
한(漢)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이 토원(兎園)에서 노닐면서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서간을 보내〔授簡〕 자신을 위해서 눈에 대한 시를 짓도록 부탁한 고사가 남조(南朝) 송(宋)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소개되어 있다.
[주-D011] 책상에 …… 이루었던가 : 
진(晉)나라 손강(孫康)이 가난해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자 눈빛에 비추어서 책을 읽으며 고학(苦學)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蒙求 中 孫康映雪》
[주-D012] 석 …… 않네 : 
후한(後漢)의 현사(賢士) 원안(袁安)이 한 길 높이로 폭설이 내린 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밖에 나가서 양식을 구하지도 않고 차라리 굶어 죽겠다면서 혼자 집에 누워 있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주-D013] 해진 …… 쉬네 : 
한 무제(漢武帝) 때의 제(齊)나라 사람 동곽(東郭)이 공거(公擧)란 부서에서 오래도록 대조(待詔)하면서 매우 빈곤하여 옷은 낡아서 해지고 신발은 온전치 못했다. 눈길을 가는데 신발의 윗부분만 있고 밑창이 없어서 발이 땅에 닿으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東郭先生》
[주-D014] 파교(灞橋) …… 읊조리고 :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눈 속에 건려(蹇驢)를 타고 장안(長安) 동쪽의 파교(灞橋)로 가서 매화를 구경한 일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수재(贈寫眞何秀才)〉 시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느라 움츠린 어깨가 산처럼 솟은 것을.〔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고 하였다.
[주-D015] 산음(山陰)으로 …… 탔네 :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린 밤에 산음(山陰) 땅에 있다가 홀연히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져서 배를 타고 그 집 앞까지 갔다가 다시 배를 돌려서 돌아왔다는 고사를 말한다. 《世說新語 任誕》
[주-D016] 두 …… 않음을 : 
두 분 선생은 송(宋)나라 유작(游酢)과 양시(楊時)를 말한다. 두 분이 처음 정이(程頤)를 뵈었는데, 정이가 눈을 감고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스승을 공경한 나머지 물러간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어 그대로 모시고 있었다. 얼마 후 정이가 눈을 떠 두 사람을 보고는 “자네들 아직도 여기에 있었는가. 이제 나가게.”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그제야 나오니, 문 밖에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 한다. 《朱子語類》
[주-D017] 말선(襪綫) : 
촉나라 한소(韓昭)가 태학사(大學士)가 되어 거문고ㆍ바둑ㆍ글씨ㆍ활쏘기를 모두 할 줄 아는데, 이태하(李台瑕)가 평하기를 “그 사람의 재주는 떨어진 버선의 실 끝과 같으니, 한 치의 잘하는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주-D018] 금체시의 …… 것을 : 
옛날 특정한 어휘의 구사를 금하고 시를 짓게 했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읊어 본다는 뜻이다. 백전(白戰)은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 예컨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을 경우 눈과 관련이 있는 학(鶴)ㆍ호(皓)ㆍ소(素)ㆍ은(銀)ㆍ이(梨)ㆍ매(梅)ㆍ로(鷺)ㆍ염(鹽)ㆍ동곽(東郭) 등 어휘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소식(蘇軾)이 빈객들과 함께 이를 회상하며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시 가운데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 준수하라. 손으로만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안 될지니.〔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4 聚星堂雪》
[주-D019] 차 …… 것을 : 
송(宋)나라 도곡(陶穀)의 첩은 원래 당진(黨進)의 집 시희(侍姬)였는데, 뒤에 도곡의 첩이 되었다. 어느 날 눈이 내리자 도곡이 그 첩을 시켜 눈 녹인 물로 차를 달이라고 하면서, 당진의 집안에도 그러한 풍류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 첩이 대답하기를 “그들 녹록한 위인들이 어떻게 그러한 풍미를 알겠습니까.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다만 금색으로 장식한 화려한 장막 아래서 술을 넌지시 부어놓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해 가며 좋은 양고주(羊羔酒)나 마시는 것이지요.”라고 하여, 도곡이 부끄러운 기색을 가졌다고 한다. 《宋稗類鈔》
[주-D020] 남은 …… 들어가 : 
누리는 메뚜기 비슷한 것으로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벼에 큰 해를 끼치는 곤충인데, 눈이 많이 오면 이 곤충이 땅속 깊이 들어가서 나오지 못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소식(蘇軾)의 〈설후서북대벽(雪後書北臺壁)〉 시에 “남은 누리가 응당 천 자의 땅속으로 들어가리니, 하늘 닿게 자란 보리 몇 집이나 풍년을 맞을꼬.〔遺蝗入地應千尺, 宿麥連雲有幾家.〕”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12》
[주-D021] 근폭(芹曝) : 
옛날 미나리 맛이 기막히다고 임금에게 바쳤다는 헌근(獻芹)의 고사와, 따뜻한 햇볕을 임금에게 바치면 중상(重賞)을 받을 것이라며 기뻐했다는 헌폭(獻曝)의 고사가 있다. 《列子 楊朱》 《博物志


  *** 구봉령(具鳳齡) : 경서(景瑞), 백담(柏潭), 문단(文端) 
요약   : 1526(중종 21)∼1586(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문정공(文貞公) 구휘(具禕)의 8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좌승지 구중련(具仲連)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구겸(具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권회(權檜)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초상집례(初喪執禮)에서 어른을 능가해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외종조 권팽로(權彭老)에게 『소학』을 배워 문리를 얻고, 1545년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를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이르렀다.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해 수찬·호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정언·전적·이조좌랑·사성·집의(執義)·사간을 두루 거치고, 1573년(선조 6)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대사성·전라관찰사·충청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7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 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형조참의를 지냈다. 1581년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 해 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구봉령은 한때 암행어사로 황해도·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황(飢荒)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奇大升)과 비견되었고, 또한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죽은 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담문집(栢潭文集)』 및 그 속집(續集)이 있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참고문헌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선조실록(宣祖實錄)』
  • 『백담문집(栢潭文集)』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사집 제1권 /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ㅡ  성여신(成汝信)


청곡사에서 놀며 읊은 시 네 수〔遊靑谷寺四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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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뿐히 열자의 바람을 몰아 / 誰馭泠然列子風
석양녘에 오래된 절을 방문하는가 / 斜陽來訪古禪宫
옥나무 붉은 언덕 신선의 흥취 충분한데 / 琪樹丹崖仙興足
한잔 술로 마주하니 세속 인연 부질없네 / 一尊相對世緣空
쓸쓸한 절에 있는 벗을 방문하다

젊은 시절 학문 닦던 곳이 이 산중인데 / 少年磨劍此山中
나물 먹으며 형설한 공 헛되이 소모했네 / 暎雪啖蔬枉費功
모든 일이 이제 한낱 꿈이 되었으니 / 萬事如今成一夢
백발로 가을바람 대하기가 부끄럽구나 / 羞將白髮對秋風
절 창가에서 옛 일을 느끼다

친구의 집은 푸른 강 동쪽에 있는데 / 故人家在碧江東
태어나 어린 시절 같이 하고 뜻도 같았네 / 生少年同志亦同
슬프구나 지금은 황천길이 가로막고 있으니 / 惆悵如今泉路隔
저녁 까마귀 울며 흩어지고 백양나무에 바람 부네 / 暮鴉啼散白楊風
강동의 벗을 추도하다

인간 세상 평지에서 풍파가 일어나니 / 世間平地起風波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며 곡도 하고 노래도 하네 / 喜喜悲悲哭又歌
어찌하면 노승의 넉넉히 한가로운 뜻과 같이 하여 / 爭似老僧閒意足
흰 구름 일어나는 곳에 누워 차를 다릴까 / 白雲生處卧煎茶
산승의 한가로움을 참견하다
[주-D001] 청곡사(靑谷寺)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琴山面) 갈전리(葛田里) 월아산에 있는 사찰이다. 해인사의 말사로, 879년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1)에 중건하였다.



  *** 성여신(成汝信)  공실(公實), 부사(浮查), 야로(野老), 부사(桴槎)

요약   : 1546(명종 1)∼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查)·야로(野老)·부사(桴槎). 홍문관교리 성안중(成安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성일휴(成日休)이고, 아버지는 경기전봉사(慶基殿奉事) 성두년(成斗年)이다.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충순위(忠順衛) 변원종(卞元宗)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3년 8세에 신점(申霑)에게 글을 배웠다.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다가 1609년(광해군 1) 64세로 사마양시에 합격하였다. 성여신은 불세출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스스로 호를 ‘부사야로(浮査野老)’라 하였다. 특히 불교배척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이후 투박하고 문란해져가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과 퇴계동약(退溪洞約)을 본떠 이를 지방에 심는 데 힘썼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사집(浮査集)』이 있다.


참고문헌

  • 사마방목(司馬榜目)』
  • 『부사집(浮査集)』
  • 『순암문집(順菴文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術)』
  • 『고선책보(古鮮冊譜)』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산재집 제1권 / 시(詩)   ㅡ  김이안(金履安)


석실서원 연구〔石室書院聯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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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강 구비에 아름다운 모습 / 有美滄江曲
우뚝한 유궁이 장엄하구나 / 儒宮特壯夸 정례(正禮)

두 고을의 경계가 맞닿은 이곳에 / 二州連壤界
세 봉우리가 하늘 끝에서 떨어졌네 / 三峀落天涯 사의(士毅)

크고 넓으니 내와 들 광활하고 / 軒豁川原曠
높고 깊으니 토목공사 호사로웠네 / 崇深土木奢 정례

눈 안에는 뛰어난 경치 넉넉하고 / 眼中饒勝槩
세상 밖이라 속세의 번잡함 끊겼도다 / 世外絶塵譁 사의

주렴에는 남한산성이 한강에 높고 / 簾箔城浮漢
뜰에는 물이 파곶으로 흘러가네 / 堦庭水逬巴 정례

배는 남과 북으로 모두 통하고 / 船通南與北
객은 멀리서 가까이서 모여드네 / 客湊近兼遐 사의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사당을 존숭하니 / 夷夏尊祠廟
봄가을로 올리는 제물 정결하도다 / 春秋潔荔芭 정례

사람의 명성은 이미 아득하지만 / 風聲人已逖
선비의 예모는 여전히 아름답다오 / 禮貌士猶嘉 사의

글 읽는 소리 오랫동안 가득하고 / 絃誦長時滿
찾아오는 선비들 해마다 더욱 많다오 / 衿紳逐歲加 정례

지난 겨울 일찍이 책을 지고 왔으니 / 經冬曾負笈
익숙한 길에 어찌 수레가 필요하리오 / 慣路豈須車 사의

거침없이 눈과 얼음 헤치고 와서 / 率爾衝氷雪
편편히 수많은 선비들 모여 있네 / 翩然會弁丫 정례

큰 물결은 아득히 광활하게 흐르고 / 洪濤沿浩渺
옛 골짝은 입을 활짝 벌리고 있네 / 古壑越谽谺 사의

소나무 길 뚫고서 처음 나오니 / 松逕穿初出
높은 용마루에 이미 입이 벌어지네 / 翬甍望已呀 정례

마을 연기가 가는 곳에서 멀리 보이고 / 村煙行處遠
산의 해가 앉았노라니 서로 기우누나 / 山日坐來斜 사의

걸음을 쉬고 차가운 못가에 기대고 / 息屨依寒沼
난간에 기대 이슬과 꽃을 생각하네 / 凭軒想露葩 정례

숲이 에워싸니 절인가 의심스럽고 / 林廻疑佛宇
문을 여니 관아처럼 엄숙하도다 / 門闢儼公衙 사의

그림 벽엔 구름과 물이 가득하고 / 畫壁塡雲水
깊은 처마엔 새들이 앉지 못하네 / 幽簷禁雀鴉 정례

중당에 옷소매 나란히 하여 나아가고 / 中唐聯袂進
지난 자취에 비를 어루만지며 탄식하네 / 往躅撫碑嗟 사의

정삭을 바꾼 지 얼마나 오래 되었나 / 鳳曆多年紀
규룡 문양에 이끼가 반이로구나 / 虯文半土花 정례

훌륭한 공의 모습 어렴풋이 우러르니 / 典刑瞻髣髴
인색하고 고집스러운 마음 싹트지 않네 / 吝滯絶萌芽 사의

먼지 쌓인 문을 엄숙히 처음 여니 / 塵戶嚴初啓
신을 모신 자리가 정연히 차례 있네 / 神筵秩有差 정례

천추토록 제사 음식 함께 받으리니 / 千秋同血食
한 장막에 오사모 모습 늠름하도다 / 一帷凜烏紗 사의

적염 이기고 영령께서 돌아오시니 / 赤焰英靈返
중국에서 굳센 절의 아름다웠다오
/ 黃圖毅節姱 정례

남쪽 조정엔 오직 이자가 있고 / 南朝唯李子
북쪽 감옥엔 또 문야가 있다오 / 北獄又文爺 사의

진나라 땅에 푸른 바다처럼 컸고 / 秦地滄溟大
주나라 하늘에 일월처럼 빛났네 / 周天日月華 정례

형제의 덕 이웃되니 함께 배향함 마땅하고 / 德隣宜配位
학문이 깊으니 더구나 집안을 이어감에랴 / 學邃況承家 사의

백관들은 허리띠의 홀을 올려보고 / 百揆瞻紳笏
여러 경전은 공의 빗질을 기다리네 / 群經待櫛爬 정례

급류에 용퇴하니 신선이 멀지 않고 / 急流仙不遠
왕실 외척이나 흠 없는 옥이로다 / 戚畹玉無瑕 사의

오래된 사당은 높이 나는 새와 같고 / 舊社猶雲鳥
높은 행적은 이슬 머금은 갈대였다오 / 高蹤宛露葭 정례

풍도 들으니 마음이 취하기라도 한 듯 / 聞風心幾醉
공경을 표하여 자주 두 손을 모으네 / 展敬手頻叉 사의

제전엔 지금 오랑캐가 한창 성하건만 / 帝甸時胡羯
유림은 날로 시끄러운 싸움 소리뿐 / 儒林日黽蛙 정례

전란의 먼지 병자년에 겪었고 / 刦灰經丙子
당고의 화 기사년 부터였네 / 黨錮自黃蛇 사의

글 상자엔 방형의 척화 상소 있건만 / 箱篋邦衡草
금과 비단으로 박망후의 뗏목 오가네 / 金繪博望槎 정례

가만히 읊조리니 뜰에 나무가 있고 / 微吟庭有樹
멀리 바라보니 물이 모래와 연해 있네 / 遐矚水連沙 사의

달빛 비치는 골짝은 봄 물결 일어나고 / 月峽春生浪
구름 인 봉우리는 저녁노을 전송하네 / 雲岑晩送霞 정례

이름난 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니 / 名區成邂逅
어지러운 진세의 생각 잃어버렸네 / 塵慮失紛挐 사의

저물도록 읽노라니 닭 울음소리 들리고 / 暮讀聞咿喔
추운 집엔 깊숙한 아랫목이 기쁘다오 / 寒棲喜奧窪

촌의 벗들 내가 온 것에 놀라 / 村朋驚我至
한 말 술을 사서 보내왔네 / 斗酒送人賒 사의

창의 햇빛은 책을 뽑아보기에 좋고 / 窓昳容抽帙
화로의 향기는 끓는 차를 감싸네 / 爐薰繞煎茶 정례

독실한 공부 참으로 공경스러우나 / 篤工誠可敬
낮은 벼슬을 어찌 감히 자랑하랴 / 薄宦豈敢誇 사의

학문의 바다에선 뗏목을 보고 / 學海觀桴筏
문단에선 북과 피리 소리 듣네 / 詞壇閱鼓笳 정례

마음에 새길 것은 서책의 말씀이요 / 服膺須簡策
덕을 진전시킴은 좋은 벗에 있도다 / 進德在蓬麻 사의

훌륭한 조상의 풍열이 남아 있으니 / 名祖餘風烈
어린 후손 게으르고 못남이 부끄럽네 / 童孫愧惰窊 정례

시강원의 강설이 이제 시작되었으니 / 講筵方始爾
우리의 도가 다시 행해질 수 있을까 / 吾道復行耶 사의

물 뿌리고 청소함에 집이 가깝고 / 灑掃家仍近
오고 감에 길이 막히지 않았네 / 游洄路不遮 정례

세상에 나갈 마음 여기서부터 엷어지니 / 世情從此薄
물고기 새우를 짝하리라 길이 맹세하네 / 永矢侶魚鰕 사의


[주-D001] 석실서원(石室書院) : 
   18세기 중후반 노론의 교육 거점이자 저자의 아버지 김원행(金元行)이 문인을 양성했던 곳이다. 석실은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었던 마을 이름으로, 저자의 6대조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이기도 하다. 김상헌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 돌아온 후 은거한 곳으로, 김상헌이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에서 사망한 것을 계기로 1656년(효종7)에 창건하여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을 배향하고, 1663년(현종4)에 사액 받았다. 이후 김수항(金壽恒)ㆍ민정중(閔鼎重)ㆍ이단상(李端相)ㆍ김창협(金昌協) 등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주-D002] 유궁(儒宮) : 
학교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석실서원을 가리킨다.
[주-D003] 두 고을 : 
경기도 광주(廣州)와 양주(楊州)를 이른다.
[주-D004] 제물(祭物) : 
   저본의 ‘여파(荔芭)’는 여지와 파초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제사에 올리는 음식을 이른다. 한유(韓愈)〈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여지는 붉고 파초는 누르니, 안주와 채소들 분분히 후의 당에 올리노라.[荔子丹兮蕉黃, 雜肴蔬兮進侯堂.]”라는 내용이 보인다. ‘나지묘(羅池廟)’는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죽은 유종원(柳宗元)의 사당이다.
[주-D005] 글 읽는 소리 : 
   저본의 ‘현송(絃誦)’은 원래 현악(絃樂)에 맞추어 시를 노래했던 것을 현가(絃歌)와 현악 없이 시만 읊조린다는 말이다. 뒤에 ‘수업을 받다’, ‘글을 읽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논어》 〈양화(陽貨)〉 “공자가 무성에 가서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공자가 빙그레 웃고 말하였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子之武城, 聞絃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割雞焉用牛刀?]”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D006] 이슬과 꽃 : 
저   본의 ‘노파(露葩)’는 꽃을 먹고 이슬을 마신다는 ‘찬파음로(餐葩飲露)’의 준말로, 속세를 벗어난 신선 생활을 뜻한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열선전(列仙傳)》 〈적장자여(赤將子輿)〉 “자여(子輿)는 세속을 벗어나 꽃을 먹고 이슬을 마셨네.[子輿拔俗, 餐葩飲露.]”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07] 중당(中唐) : 
   대문에서 당까지 이르는 길로, ‘당(唐)’은 당도(堂塗)를 이른다. 《시경》 〈진풍(陳風) 방유작소(防有鵲巢)〉 “사당의 당도엔 벽돌이 있고, 언덕엔 맛있는 칠면조 있도다.[中唐有甓, 邛有旨鷊.]”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는 사당을 가리킨다.
[주-D008] 정삭(正朔)을 …… 되었나 : 
저본의 ‘봉력(鳳曆)’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7년 조 “나의 고조인 소호 지가 즉위할 때 마침 봉황새가 날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써 일을 기록하고 백관의 장(長)을 모두 조(鳥)로 명명하였으니, 봉조씨는 역정입니다.[我高祖少皞摯之立也, 鳳鳥適至, 故紀於鳥, 爲鳥師而鳥名, 鳳鳥氏, 曆正也.]”라는 담(郯)나라 임금의 말에서 유래하여 ‘책력’ 또는 역수(歷數)의 정삭을 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1636년(인조14) 12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일어난 병자호란 결과 조선이 명(明)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청(淸)나라의 제후국이 되어 청나라의 정삭을 따른 것을 이른다.
[주-D009] 규룡 문양 : 
저본의 ‘규문(虯文)’은 비석의 이수(螭首)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비석을 이른다.
[주-D010] 적염(赤焰) …… 아름다웠다오 :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저자의 6대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청나라의 관작도 받지 않고 청나라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고 하여 1640년(인조18) 11월에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가 이듬해 2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귀국한 것을 이른다. 김상헌이 심양에 억류되어 있을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던 최명길(崔鳴吉, 1586~1647)도 잡혀와 있었는데, 최명길이 “끓는 물도 얼음물도 모두가 물이요, 가죽 옷도 갈옷도 모두가 옷이라네.[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라고 읊자, 김상헌은 이에 화답하여 “성패는 천운에 달려 있는 것, 의리에 맞는가를 보아야 하리. 아침과 저녁 뒤바뀐다 해도, 치마와 웃옷을 거꾸로 입을 수 있으랴. 권도(權道)는 현자도 그르칠 수 있지만, 정도(正道)는 많은 사람들 어기지 못하리. 이치에 밝은 선비께 말하노니, 급한 때도 저울질 신중히 하시기를.[成敗關天運, 須看義與歸. 雖然反夙暮, 詎可倒裳衣? 權或賢猶誤, 經應衆莫違. 寄言明理士, 造次愼衡機.]”이라고 읊었다고 한다. 《遲川集 卷3 北扉酬唱錄 用前韻講經權》 《淸陰集 卷12 雪窖後集 次講經權有感韻
[주-D011] 이자(李子) : 
자세하지 않다.
[주-D012] 문야(文爺) :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3)을 이른다. 1276년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되자 단종(端宗, 재위 1276~1277)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편성하여 원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실패하고 포로가 되어 대도(大都)의 토굴에 3년 동안 갇혔다가 원나라 세조의 회유를 거절하여 참수되었다. 옥중에서 충렬을 노래한 〈정기가(正氣歌)〉를 지었으며, 저서에 《문산집(文山集)》이 있다.
[주-D013] 형제의 …… 마땅하고 : 
   저본의 ‘덕린(德隣)’《논어》 〈이인(里仁)〉“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鄰.]”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여, 덕 있는 사람이 서로 함께 모이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김상헌의 맏형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을 1654년에 김상헌과 함께 석실서원에 배향한 것을 이른다.
[주-D014] 학문이 …… 이어감에랴 : 
   김상헌 이후 저자의 증조 김창협(金昌協, 1653~1708)을 위시하여 6창(昌)이라고 일컫는 김창집(金昌集)ㆍ김창흡(金昌翕)ㆍ김창업(金昌業)ㆍ김창즙(金昌緝)ㆍ김창립(金昌立) 여섯 형제가 모두 유명한 문인임을 이른다. 이 시를 지을 당시 석실서원에는 김창협도 배향되어 있었다.
[주-D015] 허리띠의 홀 : 
저본의 ‘신홀(紳笏)’은 허리띠와 홀이라는 뜻으로, 관복을 이른다. 여기에서는 김상헌과 김상용의 관복 입은 모습을 가리킨다.
[주-D016] 여러 …… 기다리네 : 
빗질을 하여 머리의 때를 빼듯이 김창협(金昌協) 등이 경서를 꼼꼼히 정리한 것을 이른다.
[주-D017] 급류에 용퇴하니 : 
   저본의 ‘급류(急流)’는 ‘급류용퇴(急流勇退)’의 준말로, 벼슬에서 일찌감치 물러난 것을 이른다. 송(宋)나라 때 한 노승전약수(錢若水)를 보고 ‘주불득(做不得)’ 3글자를 부젓가락으로 쓰고서는 “급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말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전약수가 신선이 될 수도 없지만 벼슬살이에도 오래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뒤에 전약수는 벼슬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가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서 사사(賜死)되자, 사직하고 지금의 경기도 포천(抱川)인 영평(永平)에 은거한 것을 이른다. 이들은 1694년(숙종20)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아버지가 신원되면서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문장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39 技藝部 說相者 急流勇退》
[주-D018] 이슬 머금은 갈대였다오 : 
《시경》 〈진풍(秦風) 겸가(蒹葭)〉 “갈대가 무성하니, 흰 이슬이 서리가 되었도다.[蒹葭蒼蒼, 白露爲霜.]”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19] 마음이 …… 듯 : 
   깊은 존경심에 경도된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열자(列子)가 신무(神巫) 계함(季咸)을 만나보고 경도되어서 돌아오자 스승 호자(壺子)에게 고하였다. ‘처음에 저는 선생님의 도가 지극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선생님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列子見之而心醉, 歸以告壺子, 曰: 始吾以夫子之道爲至矣, 則又有至焉者矣.]”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D020] 전란의 …… 겪었고 : 
1636년(인조14)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지속되었던 병자호란을 가리킨다.
[주-D021] 기사년 : 
저본의 ‘황사(黃蛇)’는 기사년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소의(昭儀) 장씨(張氏) 소생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를 계기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출되고 남인이 서인을 몰아낸 1689년(숙종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이른다.
[주-D022] 방형(邦衡)의 척화 상소 : 
   ‘방형’은 남송(南宋) 호전(胡銓, 1102~1180)의 자이다.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으로, 호는 담암(澹庵),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소흥(紹興) 8년(1138) 8월, 진회(秦檜)가 왕륜(王倫)을 금(金)나라에 보내 칭신(稱臣)하며 화친을 청했다는 말을 듣고 유명한 〈무오상고종봉사(戌午上高宗封事)〉라는 글을 올려 고종에게 진회ㆍ왕륜ㆍ손근(孫近)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여기에서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척화 글을 가리킨다. 《청음집(淸陰集)》 권21에 훗날 심양 구류의 발단이 된 〈심양에 조력 군대를 파견하지 말 것을 청하는 소[請勿助兵瀋陽疏]〉 가 실려 있다.
[주-D023] 박망후(博望侯)의 뗏목 : 
   ‘박망후’는 한(漢)나라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박망후의 뗏목’은 여기에서는 청나라에 오가는 사신을 이른다. 전설에 따르면 장건은 한 무제(漢武帝)의 명으로 황하의 근원을 찾아 떠난 적이 있는데, 뗏목을 타고 한 달을 가다가 성곽이 관부(官府)와 같은 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베를 짜는 여자와 소를 끌고 강물을 먹이는 남자를 보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어보라며 ‘베틀을 괴는 돌[榰機石]’을 장건에게 주었다. 장건이 이것을 가지고 돌아와 성도(成都)의 엄군평에게 묻자, 직녀(織女)의 베틀을 괴던 돌로, 예전에 객성(客星)이 견우직녀성을 침범한 적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장건이 은하에 도달했던 때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에서는 왕명을 받고 청나라로 가는 사신 행렬을 이른다. 《苕溪漁隱叢話前集 杜少陵六》
[주-D024] 뗏목을 보고 : 
학문의 요점을 안다는 뜻이다.
[주-D025] 북과 피리 소리 : 
문단에서 글솜씨를 자랑하는 것을 이른다.
[주-D026] 좋은 벗 : 
저본의 ‘봉마(蓬麻)’봉생마중(蓬生麻中)의 준말로, 《순자(荀子)》 〈권학(勸學)〉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붙들어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는 좋은 벗들 도움으로 덕을 진전시킨다는 말이다.
[주-D027] 물고기 새우를 짝하리라 : 
   은둔한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 새우와 짝하고 고라니 사슴과 벗한다.[漁樵於江渚之上, 侶魚鰕而友麋鹿.]”라는 내용이 보인다.



  ***   김이안(金履安)  :  원례(元禮), 삼산재(三山齋), 문헌(文獻)

요약  :  1722(경종 2)∼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김창협(金昌協)의 증손자, 김원행(金元行)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당대의 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워 1762년(영조 38)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민이현(閔彝顯)·김두묵(金斗默)·조림(曺霖) 등과 함께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었고, 1781년(정조 5)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1784년 지평(持平)·보덕(輔德)·찬선(贊善) 등을 거쳐 1786년 좨주(祭酒)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 학자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를 맺어 실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문하에 출입하던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이직보(李直輔)·오윤상(吳允常) 등과의 교유 속에 전통적 성리학자로 더 알려졌으며, 또한 예설(禮說)과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어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계몽기의(啓蒙記疑)』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 『삼산재집(三山齋集)』 12권이 있다.


참고문헌


  • 『삼산재집(三山齋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장지연, 회동서관, 1922)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암집 제2권 / 시(詩)     ㅡ 권호문(權好文)


오천 후조헌에 이르러 장난삼아 짓다〔到烏川後凋軒戲作〕 이 아래는 청량산으로 유람 갈 때 읊은 것이다.


[DCI]ITKC_BT_0189A_0030_010_1560_2016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문화산은 저물녘에 바라볼 만하니 / 文華之山可晩眺
유람객이 네 가지 좋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네 / 所以遊人有四好
하나는 봉우리마다 구름이 밝은 것이고 / 一好群峯雲影明
하나는 늘어선 암자에 달빛이 흰 것이고 / 一好列庵月色皎
하나는 노승과 함께 차를 달이는 것이고 / 一好携老僧煎茶
하나는 신선과 도를 단련하는 것이네 / 一好與上仙鍊道
지금 나는 새 너머로 봉우들이 늘어서 있으니 / 今看衆嶠鳥外橫
시를 다듬으려 하지 않아도 절로 이루어지네 / 不欲裁詩自成稿
[주-D001] 오천(烏川) 후조헌(後凋軒) : 
안동시 예안면 오천리에 있었던 김부필(金富弼, 1516 ~1577)의 정자이다. 오천은 일명 ‘외내’라고 하고, 광산(光山) 김씨 세거지로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후조당 김부필,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형제들이 모여 살았으므로 ‘군자리(君子里)’라 하였다. 김부필의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凋堂),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전심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후조당집(後凋堂集)》이 있다. 후조당 건물은 1973년 안동댐 수몰지역에 들어가 광산 김씨 여타 건축물과 함께 2km 떨어진 곳으로 이건하여 ‘군자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오천1리이다.
[주-D002] 문화산(文華山) : 
청량산(淸凉山)의 이칭이다.



  ***  권호문(權好文) : 중(章仲), 송암(松巖)

요약  : 1532(중종 27)∼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학자.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안주교수(安州敎授) 권규(權稑)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지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안동의 송암서원(松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유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참고문헌


  • 『송암집(松巖集)』
  •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조윤제, 박문출판사, 1937)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전번역서 > 송암집 > 송암집 속집 제1권 > > 최종정보 


송암집 속집 제1권 / 시(詩)      ㅡ 권호문(權好文)


스스로를 읊조리다〔自詠〕 두 수는 원집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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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 깊은 곳에 황혼 무렵 달이 뜨니 / 萬山深處月黃昏
슬피 우는 망제 넋이 유독 가련하네 / 獨憐愁啼望帝魂
휘파람 불며 허공 보니 골짜기가 아득하고 / 淸嘯臨虛迷澗壑
노래하며 멀리 보니 세상이 좁구나 / 高歌眺遠隘乾坤
궁궐을 그리워한 두보를 마음에 두지 않고 / 不關杜子思龍闕
녹문산에서 늙어간 방덕공을 따르려하네 / 準擬龐公老鹿門
뱃속 가득한 온갖 생각을 쏟아내려 하는데 / 欲瀉撑腸無限意
누가 능히 나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할까 / 誰能爲我置芳樽
[주-D001] 망제 넋 : 
두견새의 이칭이다. 불여귀(不如歸)라고도 한다. 촉나라 망제(望帝)가 재상 별령(鱉令)에게 대규모 운하 공사를 맡기고 그의 아내와 간음하였다가, 뒤에 이 때문에 왕위를 뺏기고 달아나 두견새가 되었다. 이에 촉나라 사람들이 망제를 측은히 여겨 촉백(蜀魄) 또는 망제혼이라 하였고, 그 울음소리가 불여귀거(不如歸去)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하여 ‘불여귀’라고도 하였다. 《太平御覽》
[주-D002] 궁궐을 그리워한 두보(杜甫) : 
원문의 ‘두자(杜子)’는 당나라의 시인 두보를 가리킨다. 두보는 대궐의 임금을 그리워하며 우국애민의 시를 많이 지었다.
[주-D003] 녹문산(鹿門山)에서 늙어간 방덕공(龐德公) : 
녹문산은 오늘날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번시(襄樊市) 동남쪽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한(漢)나라 말기에 방덕공(龐德公)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곡한 초빙을 물리치고 세상을 멀리하여, 아내를 데리고 그곳에 들어가 약초를 캐어 생활하며 편안한 여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주-D004] 뱃속 가득한 : 
소식(蘇軾)의 〈시원전다(試院煎茶)〉 시에 “창자와 배를 채울 만한 문자 오천 권은 필요 없고, 항상 충분히 잠자고 해 높이 떠올랐을 때 차 한 잔을 원한다.〔不用撑腸拄腹文字五千卷, 但願一甌常及睡足日高時.〕”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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