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6

2018. 4. 20. 18:54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6





옥담유고      ㅡ 이응희(李應禧)



유거[幽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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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를 멀리 떠난 지 오래 / 絶世離群久
태일의 언덕에 은거하노라 / 幽居太一阿
높은 집은 적막한 물가요 / 高齋濱寂寞
참된 경지라 무하에 드누나 / 眞境入無何
약초를 캐느라 숲을 다 뒤지고 / 採藥搜林遍
꽃을 옮겨 심느라 땅을 많이 판다 / 移花斸地多
소중에 한가한 흥취가 많아 / 消中閑興足
소나무 아래서 차를 달이노라 / 松下自煎茶


[주-D001] 태일(太一) : 
중국 종남산(終南山)의 이칭이다.
[주-D002] 무하(無何)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보이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가리킨다. 상대적인 세계인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이다.
[주-D003] 소중(消中) : 
소갈병(消渴病)의 이칭이다. 두보〈증왕이십사시어계사십운(贈王二十四侍御契四十韻)〉“소중에 단지 자신 건강을 아끼노니, 늦게 일어나매 쓸쓸해 누구와 친할꼬.[消中秪自惜 晩起索誰親]” 하였다.




  ***  이응희(李應禧)


1579년(선조 12)∼1651년(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綏), 호는 옥담(玉潭).

부친은 여흥령 이현(李玹)이고 모친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14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2년 후인 1594년(선조 27)에 조모상까지 당했다. 이후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업을 이어가며 학문과 예절에 정열을 다 쏟아 원근에서 그 덕망을 칭송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인목대비를 폐위하고자 꾀할 때 크게 상심하여 백의항소(白衣抗訴)로 간곡히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기도 과천 수리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학식이 고명함을 알고 중용하려 했으나 거듭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선조인 안양군(安陽君)연산군 때 원사(寃死)를 당하면서 유언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말라고 하여 그 유훈을 따른 것이라 한다.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는데 7형제가 모두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모두 두(斗)자 항렬이라 주위에서는 칠두문장가(七斗文章家)라고 칭송하였다. 생전에 저술이 많았는데, 병자호란 때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저서로는 『옥담유고(玉潭遺稿)』, 『옥담사집(玉潭私集)』 등이 있다. 고향에서 류순인(柳純仁)심부(沈溥)류우인(柳友仁)안홍제(安弘濟)송규(宋珪)이원득(李元得)이경일(李敬一)한덕급(韓德及)안중행(安重行) 등과 함께 시계(詩契)인 향로계(享老契)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묘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 195번지에 있었는데, 1993년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상기리로 이장하였다.


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    한국 역대인물 종합..



 

2018.01.24



             madangca.blog.me/221192289158   보현당의 묘지기행




이응희ㅡ 칠석| ◇ 漢詩 감상

주영기 | 조회 15 |추천 0 | 2018.01.12. 21:15

칠석(七夕)

李應禧(이응희1579~1651.호 옥담. 조선중기 문신)

天中七月七
織女會牽牛
歲歲橋頭別
年年河上遊
悲歡同一夕
離合幾千秋
此恨何時歇
天崩地拆休


칠월칠일 하늘 가운데서
직녀와 견우 만나네
해마다 오작교머리에서 이별하고
해마다 은하수 강위에서 노니네.
슬픔과 기쁨이 한저녁에 같이하고
이별과 만남이 몇천 년 이었던가
이 한은 어느때에 그칠건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 라져야 쉴 수 있을까.


ㅡ오늘이 음력으로 칠월칠석이다. 견우와 직녀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날이다.
일반적인 내용은 접어두고..
오늘 저녁 비가 내린다는 예보도 있다. 오늘 내리는 비는 기쁨의 눈물이다.
내일도 비가 오면 그건 당연 이별의 슬픈 눈물이다.
지방에 따라 통과의례가 있고 풍속도 먹거리도 특색있고 조금씩 차이가 난다.
빗물이 피부병에 좋다하여 빗물같은 폭포수에 나가 목욕도 하고, 떠나가는 여름을 아숴워하며...

기념하며 밀국수, 밀전병을 먹기도 한다.


   경북북부지방 우리고향 에서는 까마귀밥이라고 하는 밥을 담장 위에 올려 놓고 자손의 장수와 복을 비는 풍습이있다고 동국세시기에 기록이 있다.
오늘 젊은 선남선녀들, 옆에 있는 우리 반쪽들...서로 이별과 원망으로 한이 맺히지 않도록 좋은 날로 기억되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굿밤 굿데이.

cafe.daum.net/history-literature/gb5n/23   문화유산 체험과 고전문학





만물 280개를 시로 지은 이응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529]

  •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 [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 
     

     
     
     
       답답한 가슴을 수박 한 덩이로 씻을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위는 조선중기의 시인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 1579~1651년)의 시입니다. 그는 광해군 때 대과(大科)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지만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벼슬에 뜻을 접고 경기도 과천의 깊은 골짜기인 수리산 아래서 책을 벗하며 살았지요. 살림이 워낙 가난해 콩죽을 끓여 먹고 사는데 아내와 자식들이 밥상에 고량진미 없음을 한탄하자 “고량진미 말 할 것 무엇 있나. 고기반찬도 무상한 것을 모르냐?”는 시를 읊으며 지냅니다. 그의 시는 두보의 시를 닮았다고 할 정도로 자연을 소재로 한 빼어난 시가 많고 ‘숯장수의 고생[賣炭苦]’ 같이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 하층민의 고통을 시로 표현한 작품이 많이 전합니다.
     

     
     
    ▲ 답답한 가슴을 한 덩어리로 씼을 수 있는 수박(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뿐만 아니라 이응희가 지은 〈만물편〉이라는 280수 연작시는 백과사전를 방불케 하는 작품으로 여기에는 세상만물을 음양류(陰陽類)ㆍ화목류(花木類)ㆍ과실류(果實類)ㆍ곡물류(穀物類)ㆍ소채류(蔬菜類)ㆍ어물류(魚物類)ㆍ의복류(衣服類)ㆍ문방류(文房類)ㆍ기명류(器皿類-그릇)ㆍ악기류(樂器類)ㆍ재물류(財物類)ㆍ음식류(飮食類)ㆍ약초류(藥草類) 등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특히 어물류는 다시 동해산류(東海産類)ㆍ서해산류(西海産類)ㆍ강어류(江魚類)ㆍ천어류(川魚類)로 나누어 총 25류로 분류할 정도로 세분화된 사물을 오언율시로 표현한 사례는 한시사(漢詩史)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생선 가운데 <청어(靑魚)〉를 보면 청어 사진을 보는 양 자세하면서도 정감이 넘치는 게 이응희 시의 맛이지요.
     
     
     
     


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91219    신한국문화신문







옥담사집 (玉潭私集)    ㅡ 이응희(李應禧)


눈 내린 날 회포를 읊다[雪日詠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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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산골에 날씨가 추운데 / 天寒窮谷裏
초가집은 몹시 가난하여라 / 白屋正堪貧
방 안에서 무릎을 껴안고 있고 / 抱膝屛間客
붓을 쥐고서 벼루의 먹물 적신다 / 提毫硯北身
차가 끓으니 게 눈을 보겠고 / 茶騰看蟹目
눈이 떨어지니 용비늘이 보여라 / 雪落見龍鱗
돌길에는 아무도 오는 이 없으니 / 石逕無人到
그 누가 이 친척을 찾아줄거나 / 誰能問六親
[주-D001] 무릎을 껴안고 : 
큰 뜻을 펴지 못하는 선비가 울울한 심정을 품고 있음을 뜻한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출사(出仕)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를 지을 때 양보음(梁甫吟)이란 노래를 지어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채 길게 불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포슬음(抱膝吟)〉이라고도 한다.
[주-D002] 게 눈 : 
물이 막 끓기 시작할 때에 마치 게의 눈처럼 자잘하게 일어나는 기포(氣泡)를 말한다. 해안(蟹眼)이라고도 한다. 소식(蘇軾)의 시 〈시원전다(試院煎茶)〉에 “게의 눈을 이미 지나서 고기 눈이 나오니, 쏴아쏴아 솔바람 소리처럼 들린다.[蟹眼已過魚眼生 颼颼欲作松風鳴]” 하였다.
[주-D003] 용비늘 : 
소나무 껍질을 비유한 말이다.






용주유고 제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ㅡ  조경(趙絅)

임인년(1662, 현종3) 중양절에 울타리의 국화는 꽃술이 푸르고 가난하여 탁주도 없었는데, 부엌 종이 기장떡을 만들어 내오고 손자 아이가 차를 끓여 왔다. 술 대신 차를 마시며 마침내 절구를 짓고 한 번 웃었다.〔壬寅重陽籬菊靑蕊貧無白酒廚婢造黍餠餉之孫兒煎茶替飮遂吟絶句一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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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의 황국은 어찌 그리 늦게 피나 / 庭前黃菊開何晩
시골 늙은이 중양절에 너무 쓸쓸하네 / 野老重陽太寂寥
기장쌀을 푸욱 쪄서 쌀밥을 대신하고 / 黍米深蒸代雲子
햇차 조금 마시니 좋은 술에 버금가네 / 新茶細酌敵香醪
[주-D001] 중양절에 …… 없었는데 : 
9월 9일 중양절에 국화 꽃잎을 술에 띄워서 마시는 풍속이 있는데, 국화가 늦게 펴서 딸 꽃잎도 없고 가난하여 술도 없다는 뜻이다.



  *** 조경(趙絅) 1586(선조 19)  ~  1669(현종 10)


요약  :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김상헌(金尙憲)·이정구(李廷龜) 등과 교유했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대북정권하에서 과거를 포기, 거창에 물러가 살았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고,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교리·헌납 등을 역임했다. 이무렵 서인계 공신이 조정의 여론을 무시하며 정국을 좌우하자,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함께 맞서며 남인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지평으로 있으면서 같이 공부했던 김상헌과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탄핵하여 조야(朝野)의 지원을 받았다.

   1630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할 때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다.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에 군사를 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자고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거쳐 1643년 왜란 후 재개된 5번째의 일본사행(日本使行)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서 다녀왔다. 이때의 일을 〈동사록 東槎錄〉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이어 형조참의·김제군수·전주부윤·대제학 및 각 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50년(효종 1) 예조판서로 재직중, 효종의 북벌계획을 눈치챈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를 보내어 추궁하고 죄를 주고자 하는 등 위기에 처하자, 영의정 이경석과 함께 책임을 떠맡고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낸 후 은퇴했다. 이후 포천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살던 중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허목(許穆)·윤휴(尹鑴)·홍우원(洪宇遠) 등과 함께 서인의 의견을 반박하고 3년설을 적극 주장했다. 이 일 때문에 서인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뒤 행부호군(行副護軍)에 서용되었다.

   주자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문사(文史)에도 박학하여 진한(秦漢) 이후의 글을 모두 섭렵했다. 저서로 〈동사록〉·〈용주집〉이 있다. 1676년(숙종 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1681년 출향되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  <다음백과>





운양집 제2권 / 시(詩)○북산집(北山集) 계유년(1873, 고종10)에서 정해년(1887, 고종24)까지이다.  ㅡ 김윤식(金允植)


4월 9일 소산 도헌 옥거와 함께 읊다. 동려 임백희 댁에 이양애 최진김창강 택영 도 모였다〔四月九日與素山道軒玉居共賦 東黎 任百煕 宅李楊厓 最鎭 金滄江 澤榮 亦會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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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하게 지는 해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 支離消晷苦無能
정오 탑상에 선선한 바람 부니 졸음 쏟아지네 / 午榻凉颸睡瞢騰
운사에는 꽃 구석이 빈번하고 / 韻事便蕃花九錫
벼슬길은 술 세 되에 매어있네 / 宦情覊絆酒三升
자잘한 책에 벌레 물고기 주석 누가 견디랴 / 殘編誰耐蟲魚註
훌륭한 필력은 앵무필 능가한다 추대되었네 / 健筆已推鸚鵡凌
고아한 포부 중거와 같음을 그대 아나니 / 雅抱知君同仲擧
객이 와도 자리에 엉긴 먼지 쓸지 않네 / 客來不掃席塵凝

친지들과 어깨 걸고 함께 해를 보냈고 / 親知把臂摠經年
서늘한 모자 가벼운 적삼에 초파일을 맞았네 / 凉帽輕衫浴佛天
일찍이 함께 우저의 달빛을 읊었으니 / 曾共詠詩牛渚月
장차 누가 북산 안개 속으로 역말을 달릴까 / 誰將馳驛北山烟
네모 연못에 비가 풍족해 개구리가 장을 열고 / 方塘雨足蛙成市
작은 밭에 미풍 불어 나무들이 잠들려 하네 / 小圃風微樹欲眠
능금꽃 아래서 만나자던 약속 언제나 오려나 / 幾日來禽花下約
공연히 시든 꽃만 남아 시 읊는 곳에 이르네 / 空留殘蕊到吟邊
동려(東黎)와 능금 꽃 아래서 술 마시자고 약속했는데, 수일 간 비가 내려서 꽃이 이미 시들어버렸다.

깊은 방에서 초 심지 자르며 천천히 담소하고 / 剪燭幽軒笑語遲
병에서 나는 생황소리 들으며 찻잎을 끓이네 / 甁笙時聽煎茶
속세의 인연 따름이 신발을 잊은 것과 같고 / 生緣隨分如忘屨
세상재미 사람을 구속함이 실 물들이듯 쉽네 / 世味籠人易染絲
파초 잎이 점차 펴지니 글씨 쓸 만하나 / 蕉葉漸舒堪灑墨
해당화가 막 피었는데 시가 없어 한스럽네 / 海棠初發恨無詩
강마을 보리철에 복어가 올라오고 / 江村麥候河豚上
오늘 그대를 만나니 내 그리움이 곱절이네 / 今日逢君倍我思
양애(楊厓)를 가리킨 것이다.
[주-D001] 김창강(金滄江) : 
김택영(金澤榮, 1850~1927)으로,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ㆍ소호당(韶護堂)이다. 1903년(광무7)에 《동국문헌비고》를 증수할 때에 편찬위원이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황현(黃玹)ㆍ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가로 불렸다. 저서에 《한국소사(韓國小史)》, 《교정 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이 있다.
[주-D002] 꽃 구석(九錫) : 
당나라 나규(羅虯)가 제안한 모란을 꽂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이다. “1. 천장이 겹으로 된 휘장(바람을 막음) 2. 금착도(가지를 자름) 3. 감천수(거기에 담금) 4. 옥 항아리(거기에 꽂음) 5. 아로새긴 대좌(그 위에 놓음) 6. 그림으로 그리기 7. 곡으로 옮기기 8. 좋은 술(마시며 감상함) 9. 새로 지은 시(읊음)〔重頂幄 障風 金錯刀 剪折 甘泉 浸 玉缸 貯 雕文臺座 安置 畫圖 翻曲 美醑 賞 新詩 詠〕”
[주-D003] 술 세 되 : 
당나라 왕적(王績)이 술을 좋아하여 자신의 벼슬살이는 매일 지급해 주는 술 세 되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주학사(斗酒學士)라고 불렀다.
[주-D004] 벌레 물고기 주석 : 
벌레와 물고기에 대해 주석을 다는 것을 말한다. 고증가(考證家)가 고증(考證)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
[주-D005] 앵무필(鸚鵡筆) : 
후한(後漢) 예형(禰衡)이 지은 〈앵무부(鸚鵡賦)〉의 빼어난 문필을 말한다.
[주-D006] 중거(仲擧) : 
후한(後漢) 진번(陳蕃, ?~168)의 자이다. 강직하고 절의가 있었다. 일찍이 태수를 지낼 때 어떤 객도 만나지 않았는데 다만 은거하는 서치(徐穉)만을 존중하고, 특별히 한 걸상을 마련하여 서치를 맞이했다고 한다.
[주-D007] 생황소리 : 
원문의 ‘병생(甁笙)’은 병(甁)으로 차를 끓일 때 부글거리는 물소리가 마치 생황소리와 같다고 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김윤식

金允植

정세에 민감한 변신의 명수


요약 테이블
출생 1835년
사망 1922년

권력 앞에 굴절된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태어날 적에는 세도정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고, 그가 죽을 적에는 이른바 일제의 문화통치가 막바지에 이를 때였다. 우리나라에서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사람치고 평탄하게 산 사람이 드물겠지만, 김윤식은 때로는 주역으로, 때로는 막후의 인물로 득의와 좌절을 거듭한 정치가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고뇌와 정세에 약삭빠르게 대처하는 변신을 거듭했다. 그를 두고 민족주의계열에서는 교활하고 민족운동을 분열시킨 장본인으로 꼽았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는 “학의 머리칼과 은빛 수염[鶴髮銀髥]을 가진 신선과 같은 유학자”라거나 “중정온건(中正穩健)한 정치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로 보아 그가 어떤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김윤식

그는 영악한 처세술로 교활한 처신을 했다. 때로는 일제에 영합하는가 하면 짐짓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시늉을 하는 등 요리조리 명망을 누리며 이권을 낚았다.


   김윤식은 효종 때에 영의정을 지내고 실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김육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가계인 청풍김씨 문중은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별로 관계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헌종이 왕위에 오르던 해 서울 한강가 광주 땅 두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여덟 살 때 양친을 모두 잃고 숙부의 집이 있는 양근 땅 규천에서 자라났다.

   양근 일대는 예전부터 실학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을 전후해서 바로 실학의 맥을 이었다는 박규수와 유신환(兪莘煥)의 문하에 나아가 글을 익혔다. 그가 명사인 박규수와 유신환의 문하에 든 것은 숙부 김익정(金益鼎)의 주선이었으니 그의 숙모는 바로 박지원의 손녀로 박규수와는 사촌간이었다. 따라서 그는 박규수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고 뒷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가 한창 학문을 익히고 있을 적에 삼남을 중심으로 농민봉기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원인을 밝혀 민심을 진정한답시고 벼슬아치와 선비들에게 삼정문란의 개선책을 내놓으라고 일렀다. 이때 김윤식은 선비의 몸으로 경기도 광주 일대의 실정을 중심으로 그 개선책을 써서 올렸다.

   그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 개선책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부분적 개선을 위한 방안을 제시했고, 용어도 부드럽게 써서 온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선배인 강위가 쓴 《삼정책》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이때 김윤식이 쓴 삼정책의 내용은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가 정계에서 활약할 때에 언제나 타협과 온건한 방법을 구사한 점과도 상통된다 하겠다. 이때부터 그런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가 벼슬길에 처음 나선 것은 서른한 살 되던 해였다. 흥선대원군이 막 집권하여 당파나 문벌을 떠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할 때에 그도 여기에 든 것이다. 그는 화성 화산에 있는 건릉(健陵, 정조의 능)의 책임자가 되었다. 비록 미관말직이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 1년 동안 있으면서 거문고의 명인인 이원영(李元永)을 만나 그의 전기를 남기기도 했다.


친청개화파로 활약하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 되던 해인 1873년 여름, 양근의 집을 서울 북악산 밑 육상궁 근처로 옮겼다. 서울 양반대열에 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리고 과거공부에 몰두하여 다음해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때 박규수가 시관으로 있으면서 그를 뽑았다는 말이 있다. 그 뒤 암행어사, 승지 등을 거쳐 1880년에는 순천부사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대원군의 보살핌으로 첫 출사한 이래 민씨 세도 아래서도 순탄하게 벼슬자리를 얻었던 이 기간에 개항이 이루어지고 조정에서는 개화파가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고 있었다.

   1881년에 그는 영선사(領選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다. 겉으로는 38명의 학도와 공장(工匠)을 데리고 톈진에 가서 중국의 근대식 군사기계학을 배우게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은밀하게 벌인 일은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트기 위한 공작이었다.

   당시 그가 일본에서 가져온 청나라 사람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는, 청 · 일과 손을 잡고 친하게 지내며 미국과 연결하는 것이 조선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전통 유림들은 정면으로 격렬한 반대논의를 폈고, 개화파들은 이를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고종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이 비밀외교의 책임을 김윤식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막후 공작으로 1882년에 들어 마침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참으로 그동안 지탄해 마지않던 ‘서양 오랑캐’와 손을 잡게 되는 첫 순간이었다.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2개월 뒤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 군란은 구식 군대가 주동한 것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을 옹호하고 민씨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음모가 깔려 있었다.

   이때 그는 톈진에 계속 남아 있다가 군란의 소식을 듣고 청측에 대원군이 막후에서 군란을 주동했다고 공언하기도 하고 군란의 수습에 청군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청군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수습하고 이어 대원군을 압송해가도록 공작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민씨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김윤식은 이때 또 유폐되어 있는 흥선대원군을 정치적 재물로 이용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어찌 보면 변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친청노선이 더욱 명백해짐과 동시에 그의 권력도 더욱 단단해졌다. 이를 계기로 김윤식 일파(친청개화파)가 실권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요직을 차지했는데 김윤식은 처음에는 강화유수를 받아 판서의 반열에 올랐고 이어 내무 · 외교의 최고책임자가 되어 국정을 요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두 가지 일을 벌였다. 하나는 군대를 청국식 신무기로 무장시키면서 강화도에 5백 명의 정군(精軍)을 선발하여 배치시킨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다. 또 하나는 친일개화파를 누르고 청국의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미국 · 독일 · 프랑스 등과 외교 · 통상의 길을 더욱 넓히는 것이었다.

   이럴 즈음 1884년 친일개화파인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동이 되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친일개화파들은 일본군대를 동원, 왕궁을 호위하고 개화정권을 수립했다. 이때 김윤식, 김홍집 등은 원세개의 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창덕궁을 공격, 이를 물리치고 다시 실권을 회복했다. 같은 개화파요 또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김윤식과 김옥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원히 손잡을 수 없는 개와 원숭이의 사이로 갈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김윤식은 점진적 개화파로, 김옥균은 급진적 개화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김윤식의 반대세력은 친일개화파와 척사계열의 유생들이었다. 그의 반대파들은 개인생활의 비리와 관계에서 벌었던 부정 등을 들고 나와 그의 퇴진을 거세게 요구했다. 특히 민영익 등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등장시키려는 김윤식의 책동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귀양 보내도록 고종을 꼬드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면천(지금의 당진 지방)으로 정배되어 6년의 세월을 정배지에서 정계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며 보냈다. 그는 끊임없이 중앙 정계의 동정을 살폈고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운양집》의 〈면천행견일기〉 참고)

   그는 영원히 묻힌 인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운은 쉽게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고 이어 청일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세력의 지원으로 껍데기나마 다시 집권했고, 민씨 세력은 청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따위로 현상을 미봉하려다가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더욱 동학농민군의 동정과 일본의 득세에 대해 여러 정보망을 통하여 알아내는 등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를 보였다. 이런 틈새를 딛고 그는 강화부유수로 임명되었다. 이어 그는 친일 김홍집 내각에 참여해, 외무아문대신(外務衙門大臣)이 되어 갑오개혁을 주도했고, 이어 동학 토벌의 선봉에 나섰으며 일본의 이권침탈에 협조했다.

   어느새 친청파에서 친일파로, 온건개화파에서 참여개화파로 화려한 변신을 했다. 그는 외무대신의 자격으로 일본공사와 일본군에게 ‘동학 비도’를 철저하게 도륙 내라고 요구했으며, 관군을 향해서도 철저하게 토벌전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마지막 화려한 변신

   1896년 세상이 또 한 번 달라져 친러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민비의 살해사건을 사전에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했다는 혐의를 받고 제주도로 종신형의 유배에 처해졌다. 뒷날 지도로 옮겨졌다가 풀려날 때까지 11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 네살이었는데 정계에서 은퇴하고 능숙한 문장으로 저술에만 몰두했더라면 최소한 후세에 또 다른 오명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운양 김윤식 친필 시문

김윤식의 글에는 언제나 타협과 온건한 방법을 찾던 그의 인생관이 묻어난다.


   그는 한국통감부가 들어선 뒤 일제의 입김에 의해 황실제도국(皇室制度局) 총재, 중추원(中樞院) 의장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이미 일제의 놀림감이 되었거나 이용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그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정부를 대표하여 도쿄에 가서 애도를 표하고 이듬해 훈일등 태극장을 받은 따위는 그가 얼마나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종교로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 창시에도 가담하는 이율배반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명망을 이용하기 위해 대종교 창시 일원들이 그를 받아들인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그는 나철을 비롯해 서일, 박은식, 신규식 등 대종교 지도자들이 만주와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펼쳤는데도 국내에서 친일행각을 벌였기 때문이다. 뒤에 개천절이 10월 3일로 정해진 것은 그의 생일날에 맞춘 것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무렵 또 하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른바 한일합방을 앞두고 어전회의가 열려서 각기 의견을 냈는데 김윤식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하나는 “옳지 않소, 옳지 않소(不可 不可)”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찬성하오(不可不 可)”라는 뜻이다. 문자를 희롱하면서 남의 평판이나 후세의 기록을 의식한 교활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는 한일합방이 된 뒤에도 합방에 협력한 공로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감투도 얻었다. 작위와 은사금은 국왕이 준 것이라 하여 받으면서 중추원 부의장 자리는 끝내 거절했다. 또 한 번 교활한 행동을 보였다. 그러면서 앞에서 말한 대로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은근히 민족주의자들에게 추파를 보내기도 했다. 한편으로 일본제국 학사원의 회원이 된 것을 영예로 여겼고, 또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여 일본 학사원상을 받는가 하면 이어 일제에 어용이 된 유림단체 경학원의 대제학을 맡기도 했다. 그야말로 앞벽치고 뒷벽치고 요리조리 명망을 누리며 이권을 낚고 있었던 것이다.

1   919년은 우리 민족이 잊지 못할 해일 것이다. 3·1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서 일어나자 그의 처세술은 또 한 번 빛을 뿜었다. 그는 처음에는 민족대표에 이름 올리기를 거절했다가 한 달쯤 지나 일본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다. 또 영국 · 미국 기자들에게 독립을 주장하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글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에 따르면 “대한독립을 위하여 침실에서 만세를 외쳤다”고 씌어 있다. 왜 침실에서 ‘마스터베이션’하듯 만세를 부르나. 거리에 나가 불러야지. 이로 인해 그는 가벼운 심문을 받은 끝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도 한때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작위가 박탈되고 모든 직책에서 면직되었다.

   마지막 변신치고는 멋지고 화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뒤에도 그는 일제통치 아래에서 많은 글을 쓰면서 독립을 고취하기는커녕 음풍농월이나 일삼고 있었고 그의 스승 박규수의 문집과 선배 강위의 문집 등을 편집하면서는 곳곳에 손을 보아 변질시켜서 마지막 일제와 영합하기도 했다. 그는 여든여덟 살의 수를 누리고 살면서 영욕이 점철된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시세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권력에 곧잘 영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인간상은 옛 모습이 아니요, 오늘의 모습이다. 관 뚜껑을 덮고 나서 내리는 인간의 평가는 냉엄한 법이다. 한 지식인의 굴절은 오늘날에도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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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도 맡았다. <허균의 생각>,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등의 저서가 있다.접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역사인물들 중에서 꼭 알아야 할 100여 명을 엄선하여 생생하게 재조명한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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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

김 윤 식

동의어 순경(洵卿), 운양(雲養) 다른 표기 언어 金允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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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시대 근대
출생 1835년(헌종 1)
사망 1922년
경력 순천부사, 영선사,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 황실제도국총재, 강구회 회장, 흥사단 단장
유형 인물
직업 문신, 학자
대표작 운양집, 임갑령고, 천진담초, 음청사, 속음청사
성별
분야 역사/근대사
본관 청풍(淸風: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

요 약   1835(헌종 1)∼1922.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서울 출신. 아버지는 증이조판서·좌찬성 김익태(金益泰)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어려서 부모가 모두 사망하자 숙부 청은군(淸恩君)김익정(金益鼎)에게 의탁되어 그의 집이 있는 양근(楊根)에서 성장하였다. 유신환(兪莘煥)·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5년(고종 2) 음관(蔭官)으로 출사하여 건침랑(健寢郎)이 되었다.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암행어사·문학·시강원 겸 사서·부응교·부교리·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정부의 개항정책에 따라 영선사(領選使)로서 학도와 공장(工匠) 38명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들을 기기국(機器局)에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였다. 한편, 연미사를 위하여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7차에 걸친 회담을 하고, 그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청나라 체류 중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흥선대원군을 제거할 수 있는 방략 등을 제의, 청나라의 개입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오장경(吳長慶)·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된 후인 그 해 9월 종사관 김명균(金明均)과 함께 재차 청나라로 건너가 학도·공장 들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또한 각종 기기를 도입, 기기창(機器廠)을 설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군란 수습 후 중용되어 호군(護軍)·강화부유수에 임명되고, 규장각직제학을 겸임하였다. 강화부유수로 있을 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도움으로 500명을 선발하여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였다. 이 영군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중국식으로 훈련되었으며, 갑신정변 때 상경하여 궁중 수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설치되자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協辦統理內務衙門事務)로 임명되었고, 그 뒤 이 아문의 이름이 바뀌자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로 임명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金弘集)·김만식(金晩植)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친군좌우영병(親軍左右營兵)이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 정변을 끝냈다.

   정변 이후 병조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대외 관계를 담당하였다. 독판 재임 중 민씨 척족과 친일 급진 개화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도모하여 실현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새로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부임하자 그의 친청노선(親淸路線)은 한층 굳어졌다.

1886년 4월부터 반대파의 모략이 거세져 어려운 입장에 처했는데, 1887년 5월 부산첨사 김완수(金完洙)가 일상사채(日商私債)에 통서(統署)의 약정서를 발급하였다는 죄목으로 면천(沔川)으로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지내야 했다. 1894년 석방되었고, 강화부유수로 임명된 것은 그 다음 해 6월이었다.

김윤식이 등용된 것은 청일전쟁 직전으로, 일본 세력의 지원으로 민씨 척족 세력이 제거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 등용되어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갑오개혁에 간여하였고 독판교섭통상사무에 임명되었다. 그 해 7월 정부기구의 개편에 따라 외무아문대신(外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다.

갑오개혁의 입안자로 참여하는 한편, 일본에 의해 국권이 잠식당하는 굴욕적인 모든 조약이나 조처에 순응하였다. 1896년(건양 1) 2월(이하 양력임.) 아관파천사건이 일어나자 외무대신직에서 면직되었고, 을미사변과 관련해 탄핵을 받고 제주목(濟州牧)으로 종신 정배되었다.

1898년 1월 제주목에 유배되었으나, 그 뒤 민당(民黨)과 천주교인의 대립으로 민요(民擾)가 일어나자 1901년 6월 다시 지도(智島)로 이배되었다.

1907년 7월일진회(一進會)의 간청과, 정부의 70세 이상자에 대한 석방 조처에 따라 10년 만에 해금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뒤 황실제도국총재(皇室制度局總裁)·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등을 맡아 보았다. 1908년 정부가 주는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다.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강구회(講舊會)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이 회가 주최가 되어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가지는 등 정치 활동도 하였다.

   한편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해지자 기호학회(畿湖學會) 회장, 흥사단(興士團) 단장, 그리고 교육구락부(敎育俱樂部) 부장, 대동교총회(大同敎總會) 총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반도강점 후 일제가 중추원부의장직과 작위, 연금 등을 주었으나 이를 거절, 후에 고종과 순종의 권유에 따라 작위는 받았다. 1916년에는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두문 불출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었을 때 위호의정(位號議定)에 있어서 일본측이 ‘전한국(前韓國)’이라는 ‘전(前)’자를 고집하자 이에 항의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용직(李容稙)과 더불어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제출하여 저항하였다.

저술활동

저서로는 『운양집(雲養集)』을 비롯해 『임갑령고(壬甲零稿)』·『천진담초(天津談草)』·『음청사(陰晴史)』·『속음청사(續陰晴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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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친일파 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 『고종시대사』(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1970)
  • 「김윤식전집해제」(권석봉,『김윤식전집』, 아세아문화사, 1980)
  • 「대원군피수문제에 대한 재검토 상·하」(권석봉, 『인문학연구』3·4, 1976·1977)
  • 「영선사항에 대한 일고찰-군계학조사를 중심으로-」(권석봉,『역사학보』17·18, 196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