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7

2018. 4. 20. 22:13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7




제호집 제2권 / 시(詩)○칠언고시(七言古詩)     ㅡ 양경우(梁慶遇)



대설시 기해년(1599, 선조32) 겨울 〔大雪詩 己亥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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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27년 중동의 어느 날 / 皇帝廿七之年仲冬日
천하에 눈이 크게 내렸도다 / 天下大雨雪
10일 전부터 현제가 포학하여 / 其前十日玄帝肆虐
까마귀와 솔개는 땅에 떨어지고 / 烏鳶阽地
사람과 짐승이 곧바로 죽어 / 人獸立死
털이 빠지고 살이 찢어졌네 / 毛碎而肉裂
해와 달은 망망히 빛을 잃었고 / 兩曜茫茫隔光輝
하늘엔 짙은 구름 만상이 어둡네 / 密雲垂天萬象昏陰霏
아홉 마리 용은 법수를 살피고 / 九龍按法水
만무는 운사를 정돈하여 / 萬婺整雲篩
하토에 일을 일으키려 하네 / 將有事下土
한두 점 공중에 흩어져 날리더니 / 初看一點兩點散漫空中飛
한 점 두 점으로부터 / 自一點兩點
천 만 일억 점이 되어 / 爲千萬億點
갑자기 순식간에 / 俄然瞥瞬間
높고 낮고 멀고 가까이 / 高者下者遠者近者
큰 눈송이가 허공 가득 하늘 가렸네 / 如手如席者彌空蔽天
성글다가 빽빽하게 내리고 / 疏疏密密
반듯이 내리다가 비껴 내리기도 하여 / 整整斜斜
어지럽게 돌고 돌아 천태만상이라 / 紛紜旋轉變態幾萬狀
밝고 맑으며 / 皚皚晶晶
흰 빛이 밝고 환하여 / 皎皎皓皓
현란한 빛이 호연하여 끝이 없도다 / 照耀眩澈浩然無一邊
사람들 말은 상제가 옥루를 세울 제 / 人言上帝起玉樓
우레 톱과 번개 도끼로 다듬다가 / 雷鉅電斧之所觸
나무토막과 톱밥이 인세에 내린다네 / 落柹飛屑散下人間九州
또 말하기를 옥룡이 서로 싸워 죽음에 / 又言玉龍相戰死
운무와 같은 발톱과 이빨로 치니 / 雲爪霧牙之所擊
상한 비늘과 가죽이 장공에 날린다네 / 敗鱗殘甲飄落長空萬里
초인이 형양에서 한나라 군대 포위할 때 / 楚人滎陽圍漢軍
대풍이 모래를 일으켜 하늘이 어두웠고
/ 大風揚沙天爲昏
수나라 궁전 삼월에 변하의 물가에 있는 / 隋宮三月汴河滸
수천 그루에 어지러운 솜털이 날렸었네
/ 亂絮紛飛幾千樹
처음엔 선단에 환화가 떨어지나 놀랐고 / 初驚幻花下禪壇
다시 무수한 별똥이 비처럼 떨어지는 듯 / 却似繁星隕如雨
높은 산과 언덕의 집 마루 회나무 꼭대기 / 危峯峻岸屋脊檜頂
깊은 구렁과 연못 그윽한 골짝과 도랑에 / 深坑凹池坳溝幽壑
존비고하로 두터움과 옅음 달리 않고 / 不以尊高卑下異厚薄
옥빛 뜰과 아름다운 어로와 궁정 / 瑤墀寶甎御路宮庭
썩은 흙과 개미구멍 더러운 변소에도 / 朽壤蟲穴穢溷溲堰
염정귀천에 빛과 모양 다르지 않도다 / 不以淨貴汚賤殊品色
수많은 집들이 문을 열어 / 萬戶開門
길을 내고 계단을 쓸며 / 斫路掃階
교인을 주궁패궐에 세우네 / 立鮫人於珠宮貝闕
천인이 옷깃을 나란히 하고 / 千人連袵
숲으로 함께 나아가니 / 旅行林藪
뭇 신선이 기화요초를 희롱하는 듯 / 戲群仙於琪花瑤草
태양은 서쪽으로 져 탄환과 같은데 / 日車西下如彈丸
희화는 채찍 재촉해 따스함 못 이루고 / 羲和促鞭不敢噓成溫
동쪽의 둥근 달은 비파 구멍 같아 / 月輪東來如瑟越
고토도 갑을 닫으니 어찌 빛을 다투리 / 顧兔掩匣安能競光娟
깊이는 세 길 넘어 밟아도 그대로요 / 深逾三丈踏不滅
칼바람이 깎는 듯 불면 더욱 굳어지네 / 銛風削掠吹益堅
선녀 같은 여인이 두건 모자 털고 / 仙姿有女拂巾帽
나막신으로 지나가니 소리도 맑구나 / 著屐而過聲琤然
천공이 하계를 마음껏 내려다보니 / 天工縱眼瞰下界
흰 구슬은 둥글게 창해에 점점하고 / 白璧團團點蒼海
찬 까마귀는 지는 해에 돌아가네 / 歸飛落日有寒鴉
옥 위에 청승 하나가 생기니 / 玉上靑蠅生一箇
시인 묵객이 애써 비유하고 견주어 / 騷翁賦客力比偶
만 가지 조롱과 해학을 셀 수 없구나 / 嘲謔萬變固難數
촉룡이 빛을 품은 듯 하니 / 燭龍含曜
아모와 옥배라고는 부를 만하지만 / 鵝毛玉杯之說差可謂
허공에 소금을 뿌린 듯하니 / 撒鹽空中
두개와 담복이라고는 칭할 수 없네 / 豆稭薝蔔之稱安足取
눈을 인해 느끼나니 옛 철인은 / 因物感前哲
예로부터 흥취가 한둘이 아니었네 / 古來非一趣
천리 길 채나라에 쳐들어가 오원제 잡았던 / 入蔡千里縛元濟
장군 이소처럼
씩씩하고 / 壯如將軍愬
십년동안 털을 먹으며 양을 돌보았던 / 看羊十年吮氈毛
중랑장 소무 같이 청고하구나 / 苦如中郞武
패교에서 나귀등에 어깨를 들고 읊었던 / 㶚橋驢背聳吟肩
맹호연처럼 맑고 / 淸如孟浩然
산음에서 흥이 다해 문득 배를 돌렸던 / 山陰興盡却廻舟
왕자유 같이 한가하구나 / 閑如王子猷
뜰아래 눈을 녹여 차를 다렸던 / 煎茶庭下拾爲水
도연명과 같이 청아하여라 / 雅如陶學士
누가 일 없이 빈집에 누웠었나 / 誰能無事臥空廬
우습다, 원안은 나처럼 청한하였네 / 笑殺袁生寒似余
돌이켜 이 세상을 생각해보니 / 還思此世中
고락이 또한 어찌 끝이 있으랴 / 苦樂又何窮
부귀한 공자와 오후는 / 貴游公子五侯家
금빛 휘장 여인에 싸여 술 마시고 / 銷金帳中淺斟圍綺羅
기창에 화로 끼고 연석으로 데우니 / 碁窓擁爐燕石自煖
미인은 나직이 양춘가를 부르네 / 美人低唱陽春歌
털가죽 입은 임금이 숙취가 막 깨어 / 氈裘之君宿醉初醒
장막을 나가 보곤 호탕하게 웃으니 / 開帷出看囅然而笑
수많은 장막에 오랑캐 말이 시끄럽고 / 萬幙胡語喧
천산에 말발굽 소리 요란하구나 / 千山馬蹄聲
숲과 늪 에워싸고 대막에서 사냥하니 / 包囊藪澤一打圍半大漠
쫓기다 죽은 돼지와 코끼리 산적하여 / 封豨景象走死山積
원습이 변해 붉은 빛이 되었네 / 原隰變成赤
찬 강의 어부는 낚싯대로 심야에 앉아 / 寒江漁父一竿坐深夜
걸친 도롱이에 석 자나 쌓인 줄도 모르네 / 不覺蓑衣身上已三尺
강촌에 길이 없으니 어디로 향할꼬 / 江村無路向何許
멀리 사립문에서 개가 짖는구나 / 遙識柴門犬吠處
감옥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은 간절히 / 圓扉抱痛之民引領
임금이 족쇄와 칼 풀어주길 바라며 / 君命洗枷鎖
손가락과 정강이 끊어지니 차마 말하랴 / 指墮脛絶那忍語
비틀걸음으로 뜰의 눈을 다투어 먹지만 / 蹣跚就庭爭俯喫
타들어 가는 오두의 간장은 씻을 수 없네 / 五斗肝腸爛不沃
슬프다 날래고 용맹한 병사들은 / 哀哉貔虎士
괴롭게 변방을 지키는데 / 辛苦戍邊地
등창에 한기 스미고 갑옷은 무거워 / 金瘡透寒鐵衣重
어두운 달빛 피리는 불어도 소리 없구나 / 月暗笳聲吹不起
남아의 공업은 정벌 전쟁에 있으니 / 男兒功業在征戰
만리 밖 제후에 봉해지려는 뜻 있네 / 中有封侯萬里志
나는 쓸쓸하여 명위가 백료의 아래이니 / 若余者蕭條名位百寮下
살아가는 이치가 끝내 춥고 굶주려 / 一任生理終寒餓
아내는 잠방이 자식은 저고리도 없으니 / 妻無複褌子無襦
사벽에 신음하며 긴 밤을 지새웠네 / 四壁呻吟通永夜
애써 주막 술을 사오려고 하지만 / 村醪更欲力貧沽
시루 깨졌고 주머니 비었으니 어찌하랴 / 甑破囊空計安可
글만 읽다 부질없이 백발에 이르니 / 窮經謾迫白首年
나를 속인 문장이 도리어 원망스러워라 / 却怨文章欺得我
아름다운 상서는 삼백에 있다는데 / 吾聞嘉瑞在三白
임금 어질고 때의 화평을 하늘이 아끼랴 / 主聖時平天豈惜
다만 원하건대 명년에 풍년이 들어 / 只願明年富農鳲
황충 알이 땅에 숨고 보리이삭 갈라지며 / 千尺遺蝗兩岐麥
이처럼 돈과 재물이 땅에 가득 쌓여 / 錢財委地同北物
나의 열 식구가 죽음을 면하기를 / 令我十口免溝壑
나의 고향은 멀리 하늘가에 있으니 / 吾鄕邈在天一涯
문득 강가로 돌아가 밭을 갈고 싶네 / 忽起歸耕江上思
납월에 동군의 소식 이미 가까우니 / 東君消息已近臘
들의 매화 눈이 몇 가지나 돌아왔나 / 野樹梅魂廻幾枝

[주-D001] 현제(玄帝) : 
   현은 북방의 색으로 겨울의 신을 가리킨다. 《예기》 〈월령(月令)〉 “초겨울 10월은 그 제는 전욱이고 그 신은 현명이다.〔孟冬之月, 其帝顓頊, 其神玄冥.〕” 하였다.
[주-D002] 법수(法水) : 
불가(佛家) 용어로, 불법이 모든 번뇌와 장애를 없애주는 것이 물이 티끌을 제거해 주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주-D003] 만무(萬婺) : 
무는 별자리 이름으로, 북방 현무(玄武) 7수(宿) 중 하나이다.
[주-D004] 초인이 …… 어두웠고 : 
   기원전 205년에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팽성(彭城)에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을 삼중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큰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와 나무를 뽑고 모래와 돌을 날리며 낮이 밤같이 어두웠다. 초나라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한왕은 이 틈을 타서 형양(滎陽)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팽성을 형양이라고 한 것은 착오인 듯하다. 《史記 項羽本紀》
[주-D005] 수(隋)나라 …… 날렸었네 :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이 즉위한 후 자신의 성이 양씨이기 때문에 변하의 물가를 따라 수많은 버드나무를 심었다. 봄이 되면 버들개지가 눈처럼 어지럽게 흩날렸다고 한다.
[주-D006] 희화(羲和) :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을 가리킨다. 요 임금 때에 천문을 맡았던 희씨와 화씨를 말하기도 한다.
[주-D007] 고토(顧兎) : 
달의 이칭(異稱)이다.
[주-D008] 청승(靑蠅) 하나가 생기니 : 
《시경》 〈청승(靑蠅)〉 “앵앵거리는 쉬파리 가시나무에 앉았도다. 화락한 군자여, 참언을 믿지 말지어다.〔營營靑蠅, 止于樊. 豈弟君子, 無信讒言.〕” 하였다.
[주-D009] 촉룡(燭龍)이 …… 듯 : 
   촉룡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짐승으로, 《산해경(山海經)》ㆍ《회남자(淮南子)》ㆍ《초사(楚辭)》 등에 보인다. 이 용이 눈을 뜨면 낮이 되고 감으면 밤이 된다고 한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시인 사혜련(謝惠連)〈설부(雪賦)〉 “태양이 아침에 빛나면 찬란하기가 촉룡이 빛을 머금고 곤륜산을 비추는 듯.〔白日朝鮮, 爛兮若燭龍銜耀照昆山.〕” 하였다.
[주-D010] 아모(鵝毛)와 옥배(玉杯) : 
아모는 거위 털로, 큰 눈송이를 비유한 것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 〈춘설(春雪)〉 “큰 눈송이는 거위 털이 떨어지는 것 같고, 빽빽하기는 옥가루가 흩날리는 듯하다. 〔大似落鵝毛, 密如飄玉屑.〕” 하였다. 옥배도 눈을 비유한 말인데 정확한 전고를 찾지 못하였다.
[주-D011] 허공에 …… 듯하니 : 
동진의 사안이 가족과 함께 모였는데, 갑자기 흰 눈이 내렸다. 사안이 묻기를, “어지럽게 날리는 백설이 무엇과 같은가? 〔白雪紛紛何所似〕” 하자, 조카 호아(胡兒)가 대답하기를, “공중에 뿌린 소금이 약간 비슷합니다. 〔撒鹽空中差可擬〕” 하였다. 《世說新語 言語》
[주-D012] 두개(豆稭)와 담복(薝蔔) : 
두개는 콩깍지로, 두개를 태운 재를 눈에 비유한다. 소식(蘇軾)의 시 〈설(雪)〉에 이르기를, “짙은 강 구름에 콩깍지 재가 떨어지려 하네.〔江雲欲落豆稭灰〕” 하였다. 담복치자나무의 하얀 꽃으로 눈에 견준다.
[주-D013] 채(蔡)나라에 …… 이소(李愬)처럼 : 
당나라 헌종(憲宗) 때에 회채(淮蔡) 절도사 오소성(吳少誠)이 죽자 그의 아들 오원제(吳元濟)가 세습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오원제가 반란을 일으켜 토벌전이 시작되었는데, 장군 이소가 폭설이 내린 날 기병(奇兵)을 이끌고 채주성(蔡州城)을 불시에 쳐들어가서 오원제를 사로잡았다.
[주-D014] 소무(蘇武) : 
기원전 140~기원전 80. 자는 자경(子卿)이다. 한나라 무제(武帝)의 명으로 흉노에 갔을 때, 선우(單于)가 복종을 강요했으나 굴복하지 않아 북해(北海)에서 19년 동안 유폐되어 양을 키웠다. 훗날 흉노와 화평하자 귀국하였다. 《漢書 卷54 蘇武傳》
[주-D015] 맹호연(孟浩然) : 
689~740. 당(唐)나라의 시인으로 호(號)는 녹문처사(鹿門處士). 녹문산(鹿門山)에 숨어 살면서 시를 즐겼다. 40세 때 장안(長安)에 나가 왕유(王維)ㆍ장구령(張九齡) 등과 사귀었다. 왕유의 시풍과 비슷하며, 도연명의 영향을 받았다.
[주-D016] 왕자유(王子猷) :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王徽之)의 자다. 어느 달밤에 혼자 술을 마시다 친구인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 즉시 배를 띄워 만나러 갔다. 집 앞까지 갔으나 흥이 식자 뱃머리를 돌렸다. 옆 사람이 이유를 묻자 그는 “흥을 타고 왔으니 흥이 다하면 돌아가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하였다. 《世說新語 任誕》
[주-D017] 원안(袁安) : 
후한(後漢)의 현사(賢士)이다. 그는 폭설이 내린 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밖에 나가 양식을 구하지도 않고 차라리 굶어 죽겠다면서 혼자 집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주-D018] 오후(五侯) : 
권세 있는 집안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왕씨(王氏) 다섯 사람이 동시에 제후로 봉해졌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19] 삼백(三白) : 
정월에 세 번에 걸쳐서 내리는 눈이다. 소식(蘇軾)의 시 〈희설(喜雪)〉 “장차 삼백을 볼 것이니, 절하고 춤추며 만세를 부르리라.〔行當見三白, 拜舞讙萬歲.〕” 하였다. 또는 납일(臘日) 전에 내리는 세 차례의 눈을 말한다. 양만리(楊萬里)의 시 〈上元節大雪卽晴〉“납일 전 삼백이 참으로 기특하구나.〔臘前三白已奇絶〕” 하였다.
[주-D020] 황충(蝗蟲) 알이 땅에 숨고 : 
소동파의 시 〈설후서북대벽(雪後書北臺壁)〉에 이르기를, “황충의 알이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고, 집집마다 보리가 구름 같기를. 〔遺蝗入地應千尺, 宿麥連雲有幾家.〕” 하였다. 눈은 보리에 좋고 황충을 물리쳐서 풍년의 징조라고 한다. 황충은 땅에 알을 낳는데, 눈 깊이가 한 자이면 황충은 한 길 땅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주-D021] 보리이삭 갈라지며 : 
보리이삭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후한의 장감(張堪)이 호노(狐奴)에서 전답을 개간하여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는 등 선정을 베풀자, 백성이 ‘보리이삭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麥穗兩岐〕’고 좋아하면서 칭송하였다. 《後漢書 張堪傳》
[주-D022] 이처럼 …… 쌓여 : 
원문 ‘同北物’의 ‘北’은 ‘此’의 오자인 듯하다.





제호집 (霽湖集) 양경우 (梁慶遇) 1568∼1630(?) (선조 1∼인조 8(?)) 字: 子漸, 號: 霽湖・點易齋・蓼汀・泰巖, 本貫: 南原| 한국문집해제-규장각본 
    
樂民(장달수) | 조회 24 |추천 0 | 2017.07.16. 03:19 

   
문집명제호집 (霽湖集)(17C)
간략서지霽湖 梁慶遇의 문집. 11권 5책. 〈奎 6210〉・〈奎 1365〉・〈奎 1494〉・〈奎 1496〉・〈奎 1564〉・〈奎 2862〉・〈奎 2966〉・〈奎 3443〉・〈古 4650-25〉
간략해제?霽湖集?은 宣祖∼仁祖 연간의 문신인 梁慶遇의 시문을 모아 편찬・간행한 문집으로 현재 3종의 이본이 전한다. 1647년(인조 25)에 목활자로 간행한 초간본(〈奎 6210〉), 18세기 중후반에 편찬한 필사본(〈奎 1365〉), 1799년(정조 23) ?梁大司馬實記? 권7∼권10 수록된 ?霽湖集?과 ?東崖集?을 合編하여 간행한 목판본(〈奎 1494〉・〈奎 1496〉・〈奎 1564〉・〈奎 2862〉・〈奎 2966〉・〈奎 3443〉・〈古 4650-25〉)이 있다. 초간본은 규장각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필사본은 규장각, 1799년의 刊本은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霽湖集? 이본의 편찬 및 간행 경위를 살펴본 뒤 본 해설의 저본인 초간본(〈奎 6210〉)의 체제와 주요 내용을 고찰한다. 양경우는 60세가 되던 1627년(인조 5) 겨울에 그동안 지은 시문을 刪節하여 시 2책, 문 1책으로 편찬하였다. 초간본은 손자인 梁燾가 조부 양경우의 自編原稿를 바탕으로 하여 일부 시문을 추가하고 권말에 아버지 梁振翮의 遺稿인 ?伊村集?을 附錄한 뒤 金瑬와 金尙憲의 서문을 받아 1647년에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10권 4책의 필사본은 편자 및 편년이 정확하지 않다. 초간본에 비하여 시문이 많이 증보되었고, 편차가 다르다. 권8의 「閑居箴」에 5세손 梁周翊(1722∼?)의 後識가 첨부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양주익이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양주익은 영조∼정조 연간에 활동한 문신이다. 1796년(정조 20) 8월 梁大樸과 양경우의 문집을 간행하라는 정조의 명에 따라 나온 1799년의 목판본과도 편차가 다른 부분이 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양주익이 편찬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1799년의 목판본이 나온 듯하다. 권수에 金尙憲과 金瑬의 序, 권1에 五言・七言古詩, 五言絶句, 六言, 七言絶句, 권2에 五言律詩, 권3에 七言律詩, 권4에 五言・七言排律, 권5에 「天兵留糧檄文」・「倡義從軍日記」・「擬倡義上疏草」, 권6에 詩話, 권7에 「頭流山雙溪靑鶴神興洞紀行錄」, 권8에 「座右銘」, 「閑居箴」, 「謹次呈沙溪先生」 등의 시, 권9에 「重修慶基殿碑」 등 문 15편, 권10에 「題霽湖鼓琴堂」 등의 시가 실려 있다. 부록에 鄭弘溟・鄭斗卿・申欽・車天輅 등 18인이 지은 시 26수가 수록되어 있다. 1799년에 간행한 11권 5책의 ?양대사마실기?에는 부친인 梁大樸, 동생 梁亨遇의 시문이 함께 실려 있다. 권1∼권6에는 양대박의 사적과 遺文, 권7∼권10에는 양경우의 시문과 家狀, 권11에는 양형우의 ?東崖集?이 수록되어 있다. ?霽湖集?은 권7에 五言・七言古詩, 五言・七言絶句, 六言絶句 등 191수, 권8에 五言・七言律詩 210수, 권9에 七言律詩, 五言・七言排律 89수, 「座右銘」・「閑居箴」・「自挽」 등의 雜著, 권10에 「天兵留糧檄文」, 지리산 기행문, 詩話 등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金尙憲과 金瑬의 서문, 현손 梁命辰의 家狀이 있다. 다음으로 1647년에 간행한 초간본의 체제와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 권수에 金瑬와 金尙憲이 지은 문집서가 있다. 권1에 오언고시 9제 26수, 권2에 칠언고시 8제 13수, 권3에 오언절구 15제 24수, 육언 1제 2수, 권4에 칠언절구 68제 103수, 권5에 오언율시 93제 122수, 권6에 오언배율 8제 8수, 권7에 칠언배율 8제 8수, 권9에 霽湖詩話, 권10에 雜著 15편, 권11에 지리산 기행록, 續集 권1에 시 32제 55수, 권2에 문 4편이 실려 있다. 말미에 梁慶遇의 발문이 있다. 시문의 편수에서 권2 權鞸・梁亨遇의 시 2수, 권5 梁亨遇・車天輅・張維・金瑬・鄭弘溟의 시 6수, 권8 金尙憲・金玄成・李植・申鑑・柳根・趙希逸의 시 7수, 속집 권1 睦大欽의 시 2수 등 次韻・原韻詩는 제외하였다. 附錄에 실린 아들 梁振翮의 ?伊村集?에는 「到鷹嶺驛」 등 시 33제 46수, 「擬皇朝總兵祖大壽廓淸關輔露布」 등 문 5편이 있고, 梁燾의 발문이 실려 있다. 시는 각지의 승경을 읊거나 權鞸・梁亨遇・車天輅・趙緯韓・趙纘韓・趙希逸・金瑬・鄭弘溟 등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가 대부분이다. 특히 1606년 朱之蕃과 梁有年이 조사로 왔을 때에 차천로・권필 등과 함께 製述官에 뽑혀 많은 시를 수창하기도 하였다. 문은 詩論・作家論・批評 등을 담은 霽湖詩話, 1618년의 지리산 기행록, 전라도에서 곡식을 모집할 때 지은 포고문, 慶基殿・廣寒樓을 중수할 때 지은 비문, 尹根壽・張經世・全中一 및 임진왜란 때 죽은 조선과 명나라의 장졸을 慰撫한 제문, 아버지 梁大樸의 贈職과 襃章을 청한 상소, 張良・鉤弋夫人에 대하여 논한 글 등이 있다.
편저자양경우 (梁慶遇)
저자개요1568∼1630(?) (선조 1∼인조 8(?)) 字: 子漸, 號: 霽湖・點易齋・蓼汀・泰巖, 本貫: 南原, 父: 大樸, 母: 高靈 申氏 漬의 女
저자내용양경우는 梁大樸과 申漬의 딸 高靈 申氏의 사이에서 1568년(선조 1)에 장자로 태어났다. 張經世에게 수학하였다. 동생은 亨遇・熙遇・信遇가 있고, 여동생은 全中一에게 시집갔다. 1592년(선조 25)에 부친을 좇아 의병을 일으켰고, 高敬命의 군막에 書記로 들어갔으나 이해 7월 珍山에서 부친이 돌아가셨다. 1595년 전라도에서 明軍의 군량을 모집하는 격문을 지어 7천여 섬을 모았다. 1597년에 참봉으로 別試 문과에 급제하였고, 1599년 4월에 명나라 遊擊의 접반관으로 차출되었으나 落馬하여 推考를 받고 竹山縣監에서 遞差되었다. 1601년 典籍에서 東坡驛丞으로 옮겼고, 1606년(선조 39) 明使 朱之蕃과 梁有年이 오자 원접사 柳根의 종사관으로 차출되어 시문을 수창하였다. 1607년 海美縣監을 지냈고, 1609년 車天輅와 함께 製述官에 뽑혀 義州에 갔으나 물의를 일으켜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13년(광해군 5) 朴應犀의 告變으로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1616년 重試에 선발되어 이듬해에 長城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618년 부친의 문집 ?靑溪集?을 간행하였으며, 仁穆大妃가 廢庶人되자 관직을 버리고 霽巖에 鼓琴堂을 짓고 霽湖라고 호로 지었다. 1623년(인조 1) 金瑬가 反正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錦江으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李适의 난 때에 인심을 미혹시켰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1626년 姜曰廣이 오자 김류의 종사관에 차출되어 조사를 영접하였고, 1627년에 자신의 시문을 산삭하여 문집을 自編하였다. 卒年은 정확하지 않지만 續集 권2에 실린 「盧公(月+函)墓誌銘」을 1630년에 지은 것으로 보아 1630년 이후에 죽은 것이 확실하다. 부인은 世文의 딸 興德張氏이고, 자식은 振翮・振翊・振翬이다. 1647년에 손자 燾가 문집 2책을 간행하였고, 1799년에 저자의 문집과 함께 부친 梁大樸의 ?靑溪集?, 동생 梁亨遇의 ?東崖集?을 합편하여 ?梁大司馬實記?로 간행하였다. 1796년에 이조참의에 贈職되고 旌閭門이 세워졌다.
내용제목霽湖集 내용개요청구기호〈奎 6210〉〈奎 1365〉〈奎 1494〉〈奎 1496〉〈奎 1564〉〈奎 2862〉〈奎 2966〉〈奎 3443〉〈古 4650-25〉
권제권제목:
霽湖集序 (1) 1647. 金瑬가 지은 梁慶遇의 문집 서문. 손자 梁燾가 조부의 유고를 수집하여 친구인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양경우는 唐詩에 뜻을 두었는데, 近體詩에 특히 뛰어났으며 중국의 사신들과 수창하여 명성을 날렸다. 비방을 입어 불우하게 지내다가 삶을 마쳤을지라도 그의 시는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霽湖集後序 (1) 1646. 金尙憲이 지은 양경우의 문집 서문. 양경우는 唐詩를 전범으로 삼았으며 의주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에 주눅이 들지 않고 빼어난 시를 지었다. 손자 燾의 요청에 따라 서문을 짓는다.
五言古詩: 雜興五首, 寄蟹友人戱詩, 次韻高上舍傅良詩, 苦雨, 次趙玄夫偶披山谷詩用贈翠岩師韻恭贈子漸足下韻, 挽崔監司東立-代人作, 出東郊監刈草示席上諸君-知海美縣時作, 鄭正字畸窩以計拙無衣食途窮仗友生爲韻寄詩十篇奉次以謝(十首), 江村歲暮五首
七言古詩: 六歌, 送神曲, 牧牛曲, 成別坐汝學母夫人挽詩, 大雪詩-己亥冬(1599), 送人赴京-代人作, 古城行, 用拙堂詩呈巡相閔令公聖徵
五言絶句: 萬福寺, 題畵帖(四首), 村夕, 高帝, 項王, 江上-生涯洞作, 靑裘白馬客四詩, 宿鵲, 生涯洞, 極目, 赴任海美自所峴上頭向西入向海上始與湖南路相背馬上有懷, 秋陰, 湖亭夜坐, 聽雨, 披香亭用石川韻
六言二首: 錦江(二首)
七言絶句: 寄金化倅具君公受, 立春日雪, 夜, 讀項羽傳, [題]友人壁, 宿觀音窟題僧軸, 花潭, 送馬汝麟南還, 仲春途中(二首), 古意二首, 題金剛老僧軸中(二首), 弘慶寺廢基, 村事, 雜詠(五首), 新正寄舍弟-東崖公, 舍弟村居, 卽事, 龜尾菴古臺, 歲暮, 題子發茅窩-東崖, 江上-生涯洞, 次九畹學士韻(二首), 東郊寓舍贈權石洲, 附次(權韠), 附謹次舍兄贈權石洲韻(梁亨遇), 夕詠, 途中題主人舍, 寄錦里-林懽丈, 寄海翁-林㤞甫, 題驛樓, 登九龍臺示五山, 統軍亭贈關西兵使, 八月二十一日夜無眠到曉, 暮春洪陽途中-知海美時, 暮春晦日憶舍弟-在海美縣時作, 五山寓所有海棠一朶賦詩, 登懸川嶺有感, 將向松山出東郭門, 憶鵬兒-振翊(五首), 湖上(二首), 秋日向霧隱庵途中有得, 湖上夜, 村居初夏, 次病栢吳天賚絶句韻, 縣齋獨居-在結城時, 淸夢堂八詠(前溪, 後山, 叢竹, 早梅, 梧桐, 芭蕉, 籬菊, 岸柳), 喜雨-在京作, 典祀健元陵, 答南主簿燧, 次旅館寒燈獨不眠韻(1616), 安淸途中-時知長城縣, 詠友人松石盆, 東郊-時爲籍田判官, 題友人畵軸, 古珍原途中, 霧隱庵示東崖, 題綾陽衙軒, 湖上雜詠(五首), 早秋舍弟谿堂, 霽嵒八詠(三疊粉壁, 百頃澄潭, 金灘錦石, 白浦明沙, 龜庵暮磬, 鴈嶺秋月, 孤舟夜燈, 亂松晴雪), 湖上夕, 元月旬九夜, 苔村草亭, 湖上卽事(四首), 完山酒席體察相公以余最後至罰大觥余辭以不飮相公曰急成一詩可以贖之授簡擊鉢遂賦一絶得免飮, 湖上題南村友人壁, 中酒院途中, 歇馬東坡老吏家有懷, 送玄谷學士往賞綾漢山城-東槎作, 錦江(望北渚, 憶霽湖)
五言律詩: 餘寒, 夜, 夜抵龍仁縣, 遊天磨山宿泰安寺贈一玄上人, 靈通寺大覺國師碑-前朝僧, 碧蹄驛戰場, 與李東广守歲以今夕是何夕爲起句(二首), 花鴨, 夜思, 深巷, 送眞覺上人還雙溪, 逾天嶺因誦先君十年前過此所製短律敬用其韻, 赤城途中望楊正郞舊宅, 挽安忠國, 夜, 到天嶺木村憶舊有感, 訪舍弟山居, 贈趙持世西灣翁, 次西灣韻(二首), 歲暮村雪, 隣家兒, 早春鶉津途中, 參禮途中, 題任鳴皐草齋, 送白善鳴歸湖南, 旅懷, 驟雨, 東郊唱酬, 附次霽湖兄韻贈石洲(梁亨遇), 自南陽向京口途中, 夏日卽事, 次鳴皐寄來韻(答鳴皐任寬甫, 憶五山車復元, 憶西灣趙持世, 憶權石洲汝章, 憶玄翁趙善述, 自述, 悼東城亡物), 有懷四首, 次鄭僉正池上小齋韻, 湖上値雨, 次五山碧蹄途中韻-此下八首東槎作, 練光夕望, 次五山箕子墓, 次使相贈定州牧使尹白沙韻, 次使相又用前韻, 次使相復用前韻, 次使相三月初吉發林畔館韻, 登九龍臺示五山, 任鳴皐作悼亡詩慰余余用其韻, 簡吳夢得, 禮山途中, 寓中有得書示趙監察素翁, 贈權石洲, 旅宦, 去縣發行之日祖席口占, 附次(梁亨遇・車天輅), 鄭氏林亭敍舊, 湖上夕, 將向完山三月三十日宿雲水縣, 過烏原驛, 自靑陽向定山途中作, 宿靑陽水館, 自枰城歸覲南原到靑陽途中口號-六月七日, 以事出東郊登神堂岾, 廣川院逢中, 炮手忘其名與吾同行至雪山縣西澗邊放火中得一鴨遂賦之, 題龜尾庵, 朝, 涵虛亭, 短律二首呈都巡察相公行軒(二首), 參禮途中, 草浦橋, 金上舍友伋溪亭唱酬, 次玄洲趙令公韻, 素翁玄洲曁吳敬差白蓮舍弟東崖四公遊靑鶴洞有唱和若干篇要余追和適余承差自寶城向高興取徑路捨陸而海發舡於海倉前行十里許卒遇大風高浪如山幸出沒無恙向夕始泊高興界用玄洲鴨綠峽韻, 浮槎郡客館用玄洲投鳳城韻, 石門次玄洲韻, 次東崖石門韻, 次玄洲雙溪寺韻, 次素翁佛日韻, 次東崖神興洞韻, 次東崖贈覺性上人韻, 金陵贈尹熙伯別, 送房伯升歸故園, 梁上舍士亨來訪分韻得音字, 與素翁東崖到鄕友金君家被索詩甚懇相與抽出杜詩中客睡何曾着一律因用其韻題壁上, 應門小僮忽然亡走累日不來戱吟, 苔村全氏茅亭, 七月十七日對月有懷, 房同知德驂挽詩, 費眼亭別張繡衣黙所巡沿海郡邑, 附留別霽湖詞伯(張維), 送雲峯黃太守秩滿歸鄕, 別庚兄柳鐵潭之洛(二首), 霽嵒精舍主人及座中諸公要余贈詩遂綴短律五首(奉聳壑, 奉海翁, 奉査翁, 奉玄洲, 奉雪峯), 畸庵學士北歸贈詩以別, 用拙堂十二詠(聖興山嵐, 帝錫村烟, 龍淵曉鍾, 熊浦晩潮, 南塘垂釣, 北郊觀稼, 蘆汀落鴈, 石橋行人, 五德斜陽, 七星新月, 野渡橫舟, 漁梁遠火), 次澤堂令公登練光亭寄示韻-此五首東槎作(二首), 夜來無夢獨坐到曉呈儐相閤下, 附次寄(金瑬), 附敬次使相韻(鄭弘溟), 登練光亭, 奉贈問安使宋參議令公駿
五言排律: 題象戱局背十二韻, 次竹陰發金郊口占二十四韻-此下五首東槎作, 次五山蔥秀山十韻, 次五山龍泉途中六韻, 次五山控江亭六韻, 次五山統軍亭十韻, 次晩翠堂韻贈白善鳴兄十六韻, 竹陰趙學士出守光州余往訪剪燭東閣旁有識字者輒令呼韻各操紙筆走成短律二十韻
七言排律: 尹閣老靑坡別墅二十韻, 送朴從事燁赴統營八韻, 題府伯黙好柳相公頭流錄長律四十韻, 車五山挽詩三十韻, 高城主別章十韻, 次碧波亭十韻, 巡察相公柳三湖穡挽詩十韻, 別崔城主明府山立秩滿還朝十韻
七言律詩: 嘲車五山負南城煮艾約, 七月夜(二首), 東城晩望, 曉發碧蹄館, 花潭, 東坡酒店, 懸嶺, 愁院, 初夏, 村事, 遊帶方僧舍, 夏, 呈巡相(三首), 赤城途中, 舍弟溪亭(二首), 長律二首, 夜, 題舍弟茅齋, 過皇華亭, 尹相國舊第有感, 贈石洲夜同宿, 過松京, 龍山寓舍夜與李汝仁有約不至, 八月十五日卽南原城隔之日夜坐哀吟, 近聞, 夕, 次鄭僉正池上小齋韻, 寄東萊府伯尹白沙令公(三首), 六月二十五日午後大風大雨俄頃止, 閑居, 翌日, 廣庭驛途中, 次五山坡山旅舍夜吟韻-此下十二首東槎作, 次使相臨津道上韻, 次五山滿月臺懷古, 次五山平山客館偶吟韻, 黃州客館, 次五山登控江亭韻, 次使相再用前韻, 次使相鐵山古城韻, 次竹陰踏靑日馬上口占, 次使相次申迎慰玄翁百祥樓韻, 次使相復用前韻, 送關西亞使辛子方還箕城, 贈石洲, 曉, 衙軒暮春-知海美縣, 瑞山途中, 縣齋雨中示同遊, 送舍弟護親堂行還鄕, 洪陽客舍有感示五山, 寓舍月夜書示五山, 夜窓有懷錄呈淸陰學士(二首), 附次韻二首(金尙憲), 復用前韻-七月望日(二首), 復用前韻寄呈淸陰學士(二首), 敬次西坰相公送臨瀛曹使君倬之任韻, 次最樂堂詩韻(二首), 寄呈完山令府伯康相公復誠(三首), 登俛仰亭示東岳令公, 次東岳韻, 次許正郞雨中所寄韻, 賀銓曺相公陞秩, 旅寓, 客裏, 良才驛憶洛中親舊有懷却寄, 枰城早秋有懷-時知結城縣作, 夜登永保亭, 鼎峴途中, 歲暮有懷, 復用前韻寄舍弟, 次病柏湖上留宿韻, 次舍弟東崖精舍韻(二首), 次南窓韻(二首), 附原韻(金玄成), 定天驛, 送笠澤歸浴川, 次錦城刺史金令公贈詩, 到站所候敬差之行有得, 夜宿村舍, 川原驛, 林咸陽㥠大夫人挽, 披香閣詠石川詩有感錄呈玄夫令公, 金陵縣客館用東崖鴨綠峽韻, 昇平客館呈府伯令公用素翁鳳城韻, 花開峽用東崖韻, 次東崖雙溪寺韻, 次玄洲神興洞韻, 到湖上是時亭舍新成(二首)-己未孟冬(1619), 次喚仙亭板上韻(二首), 次素翁韻別吳白蓮䎘敬差還朝, 次秋香帖中素翁韻, 次風詠亭板上韻, 姜佐郞沆挽詩, 奉次雙松壁上韻, 奉寄分戶曹令公, 贈飯牛翁尹頊別, 赴任後久未得到家山慨然賦詩, 領軍到金馬郡還時投宿橫灘村舍, 寄玉川太守李令公, 尹橘屋光啓挽詩, 題少弟茅齋, 次畸窩韻二首, 霽湖精舍與素翁分韻得秋字, 題東崖精舍, 挽崔汝允, 步虛亭舊基有感, 趙正郞素翁鄭正字畸窩房上舍元震吳上舍希道會于張僉知曾家寄長律五首請各相酬(贈素翁, 贈畸翁, 贈房上舍, 贈張兄主人, 贈吳上舍), 次西湖許丈韻(三首), 寄題吳上舍明谷山居, 晩悟堂次車五山壁上所詠韻(二首), 送梁士賢以冬至使書狀赴京, 病起, 奉別體察相公石樓爺還朝, 寄詩僧徽長老(二首), 任實太守李汝璧君挽詩, 奉贈洪學士得一二首, 送鄭內翰畸窩學士赴洛, 閣夜, 奉別鄭城主令公以吏曹參議承召上洛二首, 與二三友生登洛陽西城上, 晩出都下至漢江書示津丞, 訪安佐郞村居題壁上, 白波梁座首挽詞, 光牧竹陰令公觀漁景陽坊築有詩次韻, 翌日追賦寄呈牧伯(二首), 趙進士有詩用前韻贈我又次回謝, 蘇座首挽詞, 次二樂堂韻, 送李奉事月湖携家還洛, 次申秀才翊隆留別所贈之韻(敍別, 自述, 頌城主仁政), 鶉津途上用先稿吳體謾興韻, 寄題巡相閔令公用拙堂(二首), 題淸遠堂, 漫漫洞, 滿月臺懷古-此下至謝恩使別章皆東槎作, 玉溜泉次權學官尙遠韻, 百祥樓賦得吳體一首仰呈迎慰使鶴谷令爺求敎, 箕子墓, 次使相韻贈權學官, 次使相偶吟韻(二首), 附追用前韻答梁霽湖(李植), 奉次關西伯白沙令公韻(四首), 次澤堂令公登蛇浦後嶺韻, 坡山道中, 次江東羅使君萬甲詩韻, 謝恩使淸陰令學土別詩, 復用前韻, 自洛南還到懸川嶺有懷, 出都城, 次使君申城主鑑令公韻, 附原韻(申鑑), 復用前韻四首, 又次城主所贈韻, 携友生登廣寒樓府伯聞而寄詩敬次韻却呈, 謹綴長律呈申城主行軒(五首), 附寄題霽湖精舍(柳根), 附次(趙希逸)
詩話 (1)詩型・詩語・押韻・平仄・聲律・風格 등의 詩論, 작가의 생애 및 作詩의 배경 등과 관련된 逸話, 작품에 대한 批評 등을 담은 詩話集. 모두 55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론의 성격을 띠는 시론이 앞에 있고, 이어서 詩人・詩作에 대한 일화와 품평이 실려 있다. 시론으로는 唐詩와 宋詩에 대한 견해, 시의 格律・押韻・平仄・詩語・詩型・用事 등에 대한 논의가 있다. 그리고 杜甫・蘇軾 등의 중국 시인, 高敬命・李達・鄭士龍・李崇仁・權應仁・林悌・李山海・崔岦・車天輅・白光勳・朴枝華・權鞸・李春英・盧守愼・許篈・李安訥・成汝學 등 우리나라 시인과 관련된 일화 및 詩評이 실려 있다.
告道內募粟文 (1) 1595. 전라도의 士民들에게 軍糧을 내도록 권유한 布告文. 전란으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으며, 군량이 부족하여 군인의 사기가 떨어졌으니 전라도의 士民들이 군량을 내어 나라를 중흥시킬 토대를 마련하여 주기를 촉구하였다.
病栢堂記 (2)浴川 동남쪽 5리쯤에 있는 吳夢得病栢堂에 대하여 지은 記文. 오몽득에게 堂號를 병백당으로 한 연유를 묻자 사람은 사물에서 자신의 성품에 맞는 것을 취하여 이름을 짓는다고 한 뒤 자신의 집에 있는 잣나무는 병이 들어 匠人에게 베일 염려가 없어 그 본성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나는 이것을 취하여 堂號로 삼았다고 하였다.
重建廣寒樓通諭境內文-代府伯作 (3)남원 廣寒樓를 중건할 때 境內의 사람들에게 재물을 출연해줄 것을 요청한 通文. 광한루는 남원의 명승으로 중국의 黃鶴樓와 견줄 만하나 전란으로 불에 타서 터만 남아 있으니 남원의 백성들이 작은 재물을 내어 중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耆老所祭海平府院君文-爲耆老諸宰作 (5)海平府院君 尹根壽(1537∼1616)의 제문. 耆老所의 諸臣을 위해서 지은 제문이다. 윤근수의 學問과 文才, 忠義와 善政 등 덕행을 칭송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西湖許大兄(忄+登)祭文 (7)西湖 許(忄+登)의 제문. 허등의 자질과 문장을 칭송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自樂하던 삶을 회고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祭張公沙村經世文 (8)沙村 張經世(1547∼1615)의 祭文. 공은 孝友가 지극하고 物慾이 없어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어려서 스승으로 섬겼던 일을 회고하며 죽음을 애도하였다.
祭妹兄敎授全子精中一文 (9)매형 全中一의 제문. 매형은 총명하여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연달아 부모의 상을 만나 학업을 성취할 수 없었고, 道峯山에 은거하며 산수를 즐기며 살다가 나이 50도 채 못 되어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重脩慶基殿碑-代方伯作 (11) 1614. 全州의 慶基殿을 중수할 때 지은 碑文. 경기전은 太祖의 영정을 봉안하였던 곳인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탔고, 寧邊으로 영정을 옮긴 지 17년이 지난 1614년에 건물을 중수하고 다시 봉안하게 되었으니 나라와 臣民의 복이라고 하였다.
張良不從高帝入蜀論 (12)張良이 蜀의 漢中에 들어간 漢高祖를 따르지 않은 일에 대한 辯論. 장량이 漢中으로 들어가는 고조를 褒中에서 전송하고 동으로 간 것은 그가 不義하고 時勢를 추종해서가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한 뒤 이것은 項羽의 謀士인 范增과 대비된다고 하였다.
賜死鉤弋夫人論 (15)漢武帝가 鉤弋夫人을 죽인 일에 대한 辯論. 釣弋夫人은 漢武帝의 寵妃이자 昭帝의 어머니인데, 武帝가 그녀를 죽인 것은 昭帝의 皇位 계승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先見之明과 決斷之勇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만약 釣弋夫人을 죽이지 않았다면 昭帝를 보필하는 藿光을 죽여 태자의 지위도 위태롭게 되고 宮室도 환란에 빠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擬漢校尉習隆請立丞相諸葛亮廟於沔陽表-丙辰重試(1616) (16) 1616. 漢나라 校尉 習隆이 沔陽에 諸葛亮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한 일에 대한 擬表. 1616년 重試에서 지은 글이다. 제갈량은 漢室을 부흥시킨 인물로 마땅히 사당을 세워 충절을 기려야 한다고 하였다.
擬唐同平章事李絳請發內庫錢賜魏博軍卒以收一道人心表 (18)당나라 同平章事 李絳이 궁중의 금전을 내어 魏博의 군졸에게 내려주어 一道의 인심을 수습할 것을 청한 일에 대한 擬表. 승부를 결정함은 싸움에 있지 않고 인심을 수습함에 있으니 40년 동안 싸우고 있는 魏博에 금전을 내리고 그들을 慰撫하여 백성으로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였다.
上銓部尙書爲親乞郡啓 (19)吏部尙書에게 글을 올려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도록 郡守로 나갈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한 啓文. 노모가 홀로 집에 계시고 자신도 병이 들었으니 지방관으로 나가 봉양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다.
開衡雲賦 (20)韓愈의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를 제재로 하여 지은 賦. 관찰사가 도내의 선비들에게 시험을 치르려고 할 때 門生들의 요청에 따라 지은 것이다. 韓愈가 衡山에 올라가 사당에 제사를 지내며 구름이 걷히기를 빌자 구름이 걷혔던 일을 적고, 정성이 지극하면 천지도 이에 감응한다고 하였다.
擬上疏草 (22)부친 梁大樸(1544∼1592)에게 贈職과 襃章을 내려줄 것을 청한 上疏. 나라가 유지되고 기강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의병의 힘이었고, 나라에서 많은 이들에게 褒贈을 하였다. 그러나 신의 아비 양대박은 家財를 털어 의병을 모집한 뒤 高敬命과 왜적을 치려다가 珍山의 陣中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아직 증직과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를 시행하여 구천의 영령을 위로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 상소는 光海君 때에 公道가 시행되지 않아 임금께 올리지 않았다.
歷盡沿海郡縣仍入頭流賞雙溪神興紀行錄-戊午 (1) 1618. 長城縣監으로 재직하던 1618년 윤4월 15일부터 5월 18일까지 연안의 郡縣을 둘러보고 지리산 雙溪寺・神興洞 등지를 유람한 기행일기. 3월에 討捕使 趙纘韓과 함께 쌍계사 등지를 유람하려 하였으나 말미를 얻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趙緯韓이 유람 시편을 보내주었다. 마침 관찰사가 연해의 郡縣을 돌아보라는 명을 내려 윤4월 15일에 출발하여 南平, 靈岩의 月出山과 道甲寺, 南海, 珍島, 康津, 長興, 寶城, 興陽, 樂安, 順天 등지를 유람하였다. 5월 9일에 지리산을 향하여 출발하여 岳陽, 花開, 雙溪寺, 靑鶴洞, 神興洞, 紅流橋 등을 둘러본 뒤 和順, 南平을 거쳐 관아로 돌아왔다. 여정 중에 律詩 21수, 絶句 5수, 排律 1수 등을 지었는데, 나는 1591년에 부친을 모시고 지리산 북쪽 자락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挽尹察訪廷瑾, 湖上, 用先稿百丈寺韻, 辰巳年間慮有邊患朝野咸懼辰盡巳來無警報於西北民乃歡欣莫非聖朝備戎得策之致雖如老夫者不得一命之官而山野間閑居實聖主之恩信筆書一律時己巳新正初五日也(1629), 用玉連環體贈湖上友人, 寄題黃監司謹中別墅用壁上韻, 挽許平仲, 今上岳陽樓二十韻-課製代人, 南澗題詩二十韻-課製代人, 送谿谷台爺之任錦城(三首), 元師玉城君挽詞十韻-代人作, 以監刈到通津縣不得往拜江都留守李東嶽令公奉呈長律一首言志, 題寓舍壁-在通津縣, 送權學官尙遠甫以司馬新恩歸榮嶺南(二首), 七禽言(七首)-追附(1622), 鄭舍人畸翁登無盡藏有懷舊之詠谿谷相公屬而和之要我次其韻(呈畸庵學士, 呈谿谷相公, 懷舊, 自述), 送城主朴令公還朝, 奉次睦城主令公韻, 次晩翁韻(二首), 聽溪堂八景(方丈秋月, 蛟龍暮雲, 鴈峯殘照, 駱洞炊煙, 後谷採薇, 前溪釣魚, 竹塢淸風, 荷塘疎雨), 嘗百亭二十韻, 送李上庠志尹還洛, 綾原君改葬挽詩(二首)-代人作追附, 有懷令城主閤下, 次飯牛堂韻, 睦城主台爺約會費眼亭爲雨所戱竟不成詩以言志, 附次韻(睦大欽), 睦參議大欽來衙軒病未相訪寄詩, 附次韻(睦大欽), 睦城主秩滿移授咸鏡監司詩以仰呈以別, 次李巡相敬輿鳳岩亭舍韻(二首), 海美東閣新年祝詞-丁未春作(1607), 過南平南溪峽有感, 寄題凌波亭
盧公(月+函)墓誌銘 (1)盧(月+函)(1579∼1630, 字: 養源, 本貫: 豊川)의 墓誌銘. 노함은 士忠과 活의 딸 晉山 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丁酉再亂 때에 형제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 제사를 정성껏 지냈다. 부인은 訓의 딸 和順 崔氏로 2남 1녀를 두었다.
遣使祭張九齡文-課製代人 (2)使者를 보내어 張九齡을 慰撫한 제문. 唐玄宗이 張九齡의 계책을 썼더라면 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나 그대의 忠節과 先見之明은 남보다 빼어나니 지하에서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
祭古戰場文-爲宋府伯作 (2)임진왜란 때에 南原에서 전사한 명나라와 조선의 將卒 및 士民들을 위로한 제문. 祭天朝將官, 祭天朝軍卒, 祭我國使命將閫守宰, 祭我國軍卒, 祭本土士民男女 등 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座右銘 (4)不動心에 대하여 적은 5言 6句의 座右銘. 시끄럽거나 시름겨운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것은 쉬우나 고요하거나 즐거운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易學便覽-已下力綿姑闕之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다. 金長生<周易>에 관하여 토론한 것을 모아 편찬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힘이 달려 싣지 않는다고 하였다.

讀易會疑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다. 金長生<周易>에 관하여 토론한 것을 모아 편찬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힘이 달려 싣지 않는다고 하였다.

跋 (1) 1627. 양경우가 1627년 겨울에 문집을 自編하고 붙인 발문. 鄭士龍이 60세에 문집을 自編한 것을 예로 들며 나도 금년에 60세가 되었기에 시문을 刪削하여 시 2권, 문 1권으로 편찬하였다. 이것을 淨寫하여 후손에게 전해주려 하거니와 이후에 짓는 시문은 續集으로 編次하려 한다. (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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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집 제8권 /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ㅡ 양경우(梁慶遇)



청원당에 쓰다〔題淸遠堂〕 장성 사람 김경수(金景壽)가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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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담과 솔문은 들노인의 집 / 竹障松關野老居
치우친 땅에 즐겨 세상과 멀어졌네 / 地偏甘與世相疏
스님과 마주해 부엌에서 차 달이고 / 留僧靜對煎茶
손님을 보면 늘 종수 책을 논하네 / 見客常論種樹書
해질녘 마을 객점에 새들이 모였고 / 村店日斜禽鳥集
세모에 연못의 물안개 허공에 이네 / 陂塘歲晩水煙虛
산의 뜰을 지팡이로 느리게 걸으니 / 山庭緩步移斑杖
인간세상 네 필 말 수레보다 좋아라 / 絶勝人間駟馬車


[주-D001] 김경수(金景壽) : 
1543~1621.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백형(伯亨), 호는 오천(鰲川)이다. 전라도 장성 출생으로, 의금부 도사 응정(應井)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24) 정철(鄭澈)의 천거로 예조 좌랑이 되었으나, 정철이 강계로 유배되자 두문불출하였다. 임진왜란 때 장성에서 군량을 모아 의병장 기효증(奇孝曾)에게 보내고, 의병 800명을 모집하여 아들 극후(克厚)ㆍ극순(克純)에게 인솔시켜 고종후(高從厚)에게 보냈으나 모두 순절하였다. 정유재란 때도 의병을 모집하였다. 문집에 《오천집(鰲川集)》이 있다.







지봉집 제12권 / 학성록(鶴城錄) 학성은 안변(安邊)의 옛 이름으로, 등주(登州)라고도 일컫는다. 을사년(1605, 선조38)


정월부터 병오년(1606, 선조39) 3월까지이다.   ㅡ 이수광(李晬光)


즉사〔卽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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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의 나그네 계절 변화에 놀라나니 / 旅遊驚節序
시름과 병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지네 / 愁病坐相仍
약초 캐는 건 산골 노인에게 의지하고 / 採藥憑山叟
차 달이는 건 시골 중에게 시킨다오 / 煎茶倩野僧
풀숲 사이엔 벌레들이 밤이슬에 울어대고 / 草間蟲泣露
창가 아래엔 쥐들이 등잔불을 엿보누나 / 窓下鼠窺燈
고달프고 썰렁한 맛이 그지없었는데 / 多少酸寒味
가을이 온 뒤로는 갑절로 더하는구나 / 秋來一倍增

[주-C001] 학성록(鶴城錄) : 
지봉이 함경도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지은 시들을 엮은 시집이다. 지봉은 당시 이조 참의, 병조 참의, 대사성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시의(時議)를 거스르다가 마침내 외직(外職)을 청하여 안변 부사가 되어 나이 43세인 1605년(선조38) 봄에 임소에 나아갔다가 이듬해 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재임 당시에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의 전답과 가옥이 무수히 파괴되고, 북쪽 변방이 새로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수응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지봉이 요령 있게 무마한 덕분에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할 수 있었으니, 그 공로로 조정에서 표창하여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다. 《芝峯集 附錄 卷1 行狀》 참고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상고해보면, 1604년(선조37) 12월 26일 기사에 지봉을 안변 부사로 임명하였다는 내용이 보이고, 1605년 7월 22일 기사에 함경 안문어사(咸鏡按問御史) 이정혐(李廷馦)이 올린 계사(啓辭)에서 “안변 부사 이수광은 자상하게 다스리고 명령을 번거롭게 내리지 않아 경내의 백성들이 모두 소생되었습니다.[安邊府使李睟光, 慈詳爲政, 號令不煩, 一境之民, 皆得其蘇.]”라고 보고하자 선조가 표리 1습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宣祖實錄 37年 12月 26日, 38年 7月 22日》
[주-C002] 등주(登州) : 
안변의 별칭이다. 안변은 본디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으로 일명 천성(淺城)이라고도 하였는데, 이후 비열주(比列州), 삭정군(朔庭郡)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에 이르러 등주(登州)로 바뀌고, 현종(顯宗) 9년에 등주 안변도호부(登州安邊都護府)라 바뀌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9 咸鏡道 安邊都護府》
[주-D001] 고달프고 썰렁한 맛 : 
원문의 ‘산한(酸寒)’은 벼슬살이가 고달프고 썰렁하며 씁쓸하고 무료하다는 뜻이다. 당나라 한유(韓愈)가 율양 현위(溧陽縣尉) 맹교(孟郊)를 하남 윤(河南尹) 정여경(鄭餘慶)에게 천거한 시 〈천사(薦士)〉“고달프고 썰렁한 율양 위는, 나이 오십에 어찌 그리도 늙었는지.[酸寒溧陽尉, 五十幾何耄?]”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337 薦士》



 *** 이수광(李晬光) : 1563(명종 18), 경기 장단  ~  1628(인조 6)

요약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아버지는 병조판서 희검,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전적을 거쳐 호조와 병조의 좌랑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고, 1590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돌이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했다. 1597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진위사(陳慰使)로 2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안남(安南:지금의 베트남)의 사신과 교유했다. 1601년에 홍문관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했고, 이듬해 〈주역언해 周易言解〉를 교정했으며, 1603년에 〈사기〉를 교정했다. 1605년에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홍주목사로 부임했다. 1609년(광해군 1) 중앙으로 와서 도승지·예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을 청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3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유구(琉球)와 섬라(暹羅:지금의 타이)의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기록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사직했다가, 1616년 순천부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에서 살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관직에 복귀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했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갔으며,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죽었다.


정치사상

   이수광은 민본주의 정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임진왜란의 참화가 군대를 미리 양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만언에 이르는 장문의 시무책인 〈조진무실차자〉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① 권학지실, ② 정심지실, ③ 경천지실, ④ 휼민지실, ⑤ 납간쟁지실, ⑥ 진기강지실, ⑦ 임대신지실, ⑧ 양현재지실, ⑨ 소붕당지실, ⑩ 칙융비지실, ⑪ 후풍속지실, ⑫ 명법제지실12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허가 아닌 실을 강조함으로써 임진왜란 후 흔들리던 국정과 사회 전반에 걸친 시정의 폐해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보이는 그의 치세관은 덕치주의의 구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민에 대해 진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래의 주자학적 유교 이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학문경향 

   이수광의 학문은 일종의 백과전서인 〈지봉유설 芝峯類說〉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는 일본·안남·유구·섬라 등 동양 각국에 대한 소개뿐만 아니라 유럽에 대한 기술도 실려 있다. 즉 서양에 대한 새로운 지식, 이를테면 영국의 위치·기상·생활양식, 군함의 구조와 무기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소개하고 천주교 교리와 교황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천주교의 전래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책은 천문에 대한 것에서 인물·초목·금수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을 분류·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체제와 내용, 그것이 담고 있는 실사구시의 사상은 그후 실학자들의 저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학문은 양명학에서도 많은 시사를 받아 저서 곳곳에 양명학을 소개하고 치양지와 지행합일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의 학계와 정계를 진가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논리는 그의 학문이 양명학과 연관되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의 학문경향의 특징은 유교적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주자학의 기본문제에 뛰어들기보다는 구체적인 무실을 강조하는 실학적 정신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지봉집〉·〈지봉유설〉이 있다. 수원 청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 <다음백과>


고전번역서 > 지봉집 > 지봉집 제16권 > 속조천록 > 최종정보

지봉집 제16권 / 속조천록(續朝天錄) 신해년(1611, 광해군3) 8월부터 임자년(1612) 5월까지이다.   ㅡ 이수광(李晬光)

고한행. 사강락의 시에 차운하다〔苦寒行次謝康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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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켜켜이 얼음이 얼고 / 歲歲層氷合
어지러이 싸락눈이 내리누나 / 紛紛霰雪落
햇살은 깨끗한 빛이 사라지고 / 浮陽滅淸輝
겨울새는 슬픈 골짝에서 우네 / 寒禽叫悲壑
허기져도 밥 짓는 연기 일지 않고 / 飢爨煙不興
목말라도 길어올 물이 얼어버렸네 / 渴汲水枯涸
위는 강락의 시이다.

시커먼 구름 육합을 가리더니 / 黝雲蔽六合
눈꽃이 하늘에서 흩날리누나 / 雪花飄碧落
까마귀 얼어서 날지 못하고 / 陽烏凍不翔
토끼는 시름겨이 골짝에 숨었네 / 陰兔愁藏壑
붓 불어가며 시 쓰려 했건만 / 呵筆欲成詩
연지가 딴딴하게 얼어붙었네 / 氷堅硯池涸

세모에 잔뜩 구름이 끼더니 / 歲暮愁陰合
추워 손가락이 떨어지려 하네 / 天寒指欲落
긴 강물은 얼음 얼어 막히고 / 玄氷塞長河
깊은 골짝 눈 쌓여 봉해졌네 / 積雪封深壑
오직 하나 화지의 샘물만은 / 惟有華池泉
한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으리 / 窮冬亦不涸

중문이 대낮에도 굳게 잠겼는데 / 重門晝鎖合
스산하게 해는 서쪽으로 기우네 / 慘慘日西落
빈 숲엔 꽁꽁 언 참새 의지하고 / 凍雀依空林
깊은 골짝엔 칩거한 용이 우네 / 蟄龍泣幽壑
돌솥에 차를 한번 끓여보려고 / 石鼎試煎茶
얼어붙은 우물물 두드려본다오 / 獨敲氷井涸
[주-C001] 속조천록(續朝天錄) : 
지봉이 동지사 겸 주청사(冬至使兼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올 때까지의 시록(詩錄)이다. 당시 정사(正使)는 이상의(李尙毅), 부사(副使)는 지봉, 서장관은 황경중(黃敬中)이었다. 《光海君日記 4年 6月 7日》 《少陵集 左贊成少陵李公年譜》
[주-D001] 사강락(謝康樂) : 
사영운(謝靈運)이다. 남조(南朝) 송나라 문장가로 ‘강락(康樂)’은 봉호이다.
[주-D002] 육합(六合) :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으로, 온 세상을 의미한다.
[주-D003] 까마귀 : 
원문 ‘양오(陽烏)’는 태양 속에 산다는 삼족오(三足烏)이다.
[주-D004] 토끼 : 
원문 ‘음토(陰兔)’는 달에 산다는 토끼이다.
[주-D005] 연지(硯池) : 
먹물이 모이는 벼루의 오목한 곳으로, 묵지(墨池)라고도 한다.
[주-D006] 화지(華池) : 
신화 전설 속의 못 이름으로, 곤륜산(崑崙山)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