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라차 시배지 지리산(地理山)화엄사의 장죽전(長竹田)을 중심으로

2018. 4. 22. 02:26차 이야기

신라차 시배지 지리산(地理山)
화엄사의 장죽전(長竹田)을 중심으로

사광암(沙光岩) 차문화연구가


♤중구난방의 차의 시배지 기록들
한국 8경(八景)의 하나이며 1968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전남 구례군을 비롯, 전북 남원군, 경남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등 3도, 5개 군에 걸쳐 있으며 구례지역에는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하동지역에는 칠불암, 쌍계사, 산청지역에는 법계사, 대원사, 함양지역에는 벽송사, 영원사, 남원지역에는 실상사 등의 이름난 사찰이 산재해 있다.
<동국여지승람>진주목(晉州牧)조에 지리산(1,915m)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지리산(智異山)은 산세가 높고 웅거하여 수백 리에 웅거(雄據)하였으니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자는 유(留)자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의 시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의 주(注)'와 통감(通監) 집람(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 한 것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 산을 남악(南岳)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 둘레에는 십 주(州)가 있는데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요. 서쪽은 남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태을(太乙: 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이 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였다.
또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 '중국 전설에 동쪽 바다 복판에 있어 신선이 산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3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 일컫는데 지리산은 그 중의 방장산이다. 이 산자락에는 화엄사, 쌍계사, 칠불암, 연곡사, 천은사 등 큰절이 산재해 있다.'고 기록되었다.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를 심은 장소는 어느 지역인지 분명히 판명되지는 않았지만 이에이리는 <조선의 차와 선>에서 '정다산(정약용)은 이를 지리산 쌍계사 부근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즉 김명배는 '정약용이 지은 <여유당전서>나 <보유편>(補遺編)이도 그러한 기록은 없으며 고증이 안 된다'고 <한국차학회지>(1998-2)와 그가 지은 <다도학>에서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고증이 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쌍계사 입구에는 '견당사 김대렴 차시배추원비' 또는 '차시배지' 표지석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 건립되어 있어 차를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에게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는 '김대렴'이란 기록이 없으며 이 지역이 '신라차 시배지'라는 사실이 고증되지 않았다.
우선 '대렴이 가져온 차종자를 장죽전(長竹田)에 심었다'는 문헌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화엄사사적기>
<화엄사사적기>는 조선 선조(宣祖, 1567-1608)때, 승사(僧史)에 밝은 고승 중관(中觀) 해안(海眼)선사의 <대화엄사사적기>와 일제 때 화엄사 주지 만우(曼宇) 정병헌(鄭秉憲)스님이 지은 <해동호남도지리산 대화엄사적기>가 있는데 모두 '화엄사 창건조사인 연기(緣起)조사께서 인도로부터 차종자를 가지고 와서 시배하였기 때문에 그후 흥덕왕 때(828) 대렴이 가져온 차 종자도 왕명으로 화엄사 장죽전에 심게 하였다.'고 구례향토문화사료집(제7집) <다도문화연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확인 결과, 해안선사의 <대화엄사사적기>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정병헌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新羅之茶 始於智異山 緣起祖師 眞興王代(540-75) 創寺於智異山之陽 額曰華嚴寺 此智異山 有史之始 緣起以茶種 持來創寺同時 幷植于附近 此後之長竹田 而興德王 亦命植于此由是長竹田 竹露茶名 于國中湖南一帶 朝鮮之茶鄕也 老其古蹟則先以華嚴宗傳布地爲始而 後爲禪宗之 興故茶亦隨而植之遂爲茶 産本鄕也'
(신라의 차는 지리산에서 비롯되었다. 연기조사가 진흥왕대(540-575)에 지리산 양지바른 곳에 절을 짓고 현판에 '화엄사'라고 한 것이 지리산에 절이 서게 된 시초이다. 연기스님이 차씨를 가져와서 절을 창건함과 동시에 절의 부근과 뒤편의 긴대밭에 함께 심었다. 그리하여 흥덕왕 또한 이곳에 심도록 분부하였는데 이 때문에 긴 대밭의 죽로차는 나라안에서 이름이 났으니 호남일대는 조선차의 고향이다. 그 고적을 상고하면 화엄사가 처음이라고 하겠다.)
해안스님의 <대화엄사사적기>를 비롯, 각종 자료, 문헌에서 화엄사의 인도 및 중국 차시배에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을 보다 관심을 갖고 연구할 필요가 있고 본다.

< 조선의 차와 선 >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는 '화엄사의 긴대밭(長竹田)에는 죽로차라고 일컫는 차가 있다'는 것을 '전남 해안지방에서의 차의 조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당시 신라는 9주(州)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리산은 9주중에서 진주권(晋州圈)에 편입되어 화엄사도 진주 고을 안에 있었다는 것은 <동국여지승람>에도 있는 바와 같다. 또 흥덕왕 당시에 지리산 기슭에는 주민이 모이는 일이 지극히 드물어서, 사찰도 다만 화엄사 하나 뿐이었다. 화엄사는 연기, 원효, 의상 정행(正行)등의 고승(高僧)이 배출되었으며 지극히 훌륭하였으므로 차를 화엄사에 분부하여 심게 하였으리라. 특히 화엄사의 산림 안에 있는 긴대밭(長竹田)의 차는 경상. 전라의 양도를 통털어서 예부터 유명하여, 아마도 김대렴이 이 긴대밭에 차를 심어 그때부터 조선의 차가 보급된 것으로 화엄사는 조선의 차 발상지가 아닐런지(이 상황은 더 깊은 조사가 필요하다) 이 긴대밭이라는 곳을 실제로 보고 들었는데, 절에서 10정(1.9km)쯤 되는 기슭의 황전리 부락 부근으로, 길 오른쪽 골짜기의 시내를 건너서 2정(380m)쯤의 곳이다. 현재 이 땅은 마산면 황전리 같은 마을의 김경엽(金敬燁)씨 소유로 되어 있다. 면적은 3정보(29.757) 쯤인데 남서향으로 경사는 20°나 되고 2, 3년 전까지는 참대[苦竹]가 자라고 있었으나, 지금은 대나무를 벌채해 숲가에 조금 남아 있다. 초생지에는 차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베다 남은 대나무 그루에는 지름 한 치(3cm)가 못되는 대나무가 있었다. 초생지는 산 아래턱의 절반 정도가 개간되어 있다. 유서깊은 긴대밭의 황폐는 참으로 애석하여 군청의 관계직원에게 보존방책을 의뢰하였다. 지리산 쌍계사(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에 있다)에도 예부터 차나무가 있는데, 다산 선생은 이 쌍계사의 차를 김대렴이 옮겨 심은 차 종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쌍계사는 김대렴의 사후 1백 5십 년 후에 창건 된 절이므로, 이 설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절도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 차를 심을 이유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였다.

< 다도학 >
1984년에 발간된 <다도학>(김명배 저, pp171-173)에는 '대렴이 가져온 차씨를 심은 장소와 전래 시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치씨를 지리산에 심은 장소에 대해서 종래부터 구례 화엄사 입구의 긴대밭(長竹田)과 경남 화개장의 쌍계사에 심었으리라는 견해가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쌍계사 파종설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창건한 진감국사(774-850)가 심었음(고증이 않됨). ▷최치원(857-?)이 심었음(고증이 않됨), 지금도 차나무가 가장 많음(유력한 증거가 되지 못함). ▷흥덕왕이 쌍계사를 좋아하여 심게 했다(선강왕자는 남원 실상사에 있었다). ▷정약용이 고증했음(고증이 않됨). ▷흥덕왕대의 지리산에는 주민도 적고 절은 화엄사뿐이었음(구례의 천은사도 있었지만 공납은 절에서 감당할 수는 없음)
◆ 화엄사 파종설 ▷쌍계사는 대렴이 죽은 지 150년 뒤에 창건되었으니 절도 없는 심산유곡에 차씨를 심었겠는가?(838년에 창건되었다지만 차를 절에만 관련시킬 이유가 없음).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흥덕왕이 지리산의 긴 대밭에 심게하였다고 적혀 있음(기록이 없음). ▷지리산과 화엄사는 진주관내에 있었다는 것이 <동국여지승람>에도 적혀 있음(지배적인 이유가 되지 못함)
그리고 '차의 전래시기'는 <삼국사기>에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에 이르러 성행되었다'고 하였으나 '차공양 예법을 가진 불교의 전래시기를 감안한다면 차는 선덕여왕대 이전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 544년과 755년 등 화엄사의 건립 시기 논란
화엄사와 쌍계사의 역사를 간략히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동 쌍계사는 '신라 제 46대 문성왕(文聖王) 2년 (840)에 진감국사가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대사인 혜능의 초상화를 모신 영당을 세우면서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구례 화엄사는 신라 제 24대 진흥왕 5년(544) 인도승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스님이 세웠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79년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에 의하면 경덕왕 13년(754) 황룡사(皇龍寺)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건립하기 시작, 이듬해인 755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화엄십찰(十刹)을 전교의 도장으로 삼으면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석경(石經 : 화엄경석각)으로 둘렀다고 하는데 비로소 화엄경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고 한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당시 화엄사는 가람 8원(院), 81암자 규모의 대사찰로 소위 화엄세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후기신라 때 화엄종을 전교한 10대 사찰인 '화엄십찰'은 최치원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하면 '지리산(남악) 화엄사를 비롯, 공산(公山-팔공산, 중악)의 미리사(美理寺), 태백산(북악)의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와 보광사(普光寺), 웅주(熊州) 가야협의 보원사(普願寺), 계룡산의 갑사,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國神寺), 서울 부아산(負兒山-북한산)의 청담사(淸潭寺)' 등이 기록되어 있다.

♤ 구례 장죽전 녹차시배지 지방기념물 지정
-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138호
- 소유지 : 김영배(金英培) 외
- 소재지 :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산 30-1
- 규모 : 일원(27,576㎡)
- 지정년월일 : 1991년 7월 19일

차(茶)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10. 동12월 조에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케 했다. 당의 문종(文宗)은 (사신을) 인덕전으로 불러서 등급을 가려 잔치를 베풀었다.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에 이르러 성행했다.'는 내용이 최초이다.
만우(蔓宇) 정병헌(鄭秉憲; 1891-1969 화엄사 주지역임)이 쓴 <해동호남도지리산 대화엄사사적>(海東湖南地異山 大華嚴寺事蹟)에 '한국의 차는 진흥왕 5년(서기 544년), 인도의 연기(緣起)스님이 지리산에 들어와 화엄사를 창건할 때 차씨도 같이 심었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그 터 자리가 화엄사 아래 산기슭 장죽전(長竹田)이고 신라 흥덕왕이 중국에서 차 씨앗을 가지고 온 대렴에게 그 씨앗을 지리산에 심으라고 명령한 것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종합하여 볼 때 녹차의 '시배지'는 현 주민들이 '진대밭'이라 부르는 화엄사 밑 장죽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풍수사(風水師)들은 지리산의 주봉을 천왕봉이 아닌 문수봉(文殊峰)으로 보아 지리산은 전라도 산이라 한다. 지리산 산신제를 노고단이나 문수봉 아래에서 지낸 것도 이 때문이다.
지리산 장죽전은 황전리 화엄사 밑 산기슭에 위치한다. 관광시설단지를 지나 매표소로부터 약 80m지점에 인조목 휴게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맞은 편 계곡을 건너면 양지바른 산기슭 솔숲속에 주민들이 예부터 '진대밭'이라 부르는 대밭이 있다. 현재 마산면 단위조합에서는 황전리 부근에서 생산되는 차와 상사부락 일부에 조성되어 있는 차단지에서 연간 200㎏정도를 수매하여 시판하고 있다.
이 밖에도 천은사, 화엄사, 연곡사 등 사찰에서 지리산록 구례관내 30정보(町步)에서 나는 자연생 차잎을 따서 자가소비용을 생산하고 있다.

♤ 산재해 있는 지리산 차 유적지
지리산지역의 차 유적지는 화엄사의 효대(孝臺), 쌍계사의 진감(眞鑑)국사의 비석글(국보 47호), 실상사의 수철(秀撤)화상 능가보월탑비(893년 건립), 칠불선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화엄사 연기조사 효대
화엄사 각황전 왼쪽으로 올라가면 고대(高臺)가 있는데 이곳에 국보 35호인 4사자3층 석탑(속칭 孝臺)이 있다. 최범술 저 <한국의 다도> 차 유적지 편에 제일 먼저 소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례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개창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각황전 뒤 잔등에는 국보 35호로 지정된 4사자 3층 석탑의 석존(釋尊)사리탑이 있고 그 앞에 연기조사의 효대가 찻잔을 들고 사리탑을 받들고 있다. 이것은 연기조사가 그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찻잔을 들고 있는 것으로 연기조사 몰후(歿後) 약 100년 뒤에 자장율사가 이것을 기리어 만든 것이다. 이것은 이 지리산에 화엄사 창건시부터 차를 올리는 습속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석성우저 <다도>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는 신라 진흥왕(振興王) 4년 (543년)에 인도(印度)출신 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개산(開山)하여 절을 이루었다. 각황전(覺皇殿) 뒤 등성에 국보(國寶) 35호가 있다. 이름하여 4사자(四獅子) 3층석탑(三層石塔).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곳이다. 그 앞에 연기조사가 찻잔을 들고 있는 석상(石像)이 있다. 효대(孝臺)라 부른다. 이것은 연기조사가 그의 어머니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찻잔을 들고 있는 것으로 연기조사가 떠난 지 백여 년 뒤에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화엄사가 처음 창건될 때부터 차와는 깊은 인연을 맺은 듯하다' 하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 화엄사 연기조사 효대의 찻잔은 꾸며댄 이야기로 낙인이 찍히고 차관계 문헌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것은 1995년 <다담>(茶談)지 여름호에 '화엄종찰 화엄사 ㅡ차 유적으로 오인 받고 있는 화엄사 연기조사 효대' 제하의 기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연기조사가 들고 있는 것이 찻잔이라 하여 이것이 신라 차유적이라고 알려줬는데 잘못된 견해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 보면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아니고 자장율사 상이라 하며 석등을 이고 있는 승상이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찻잔이 아니고 사리 같은 것을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나와 있다. 1961년 3월 31일 발행한 '조선고적도보'권 4489면의 사진을 보면 당시 사진에는 둥그런 구슬 같은 것이 찻잔 같은 그릇 위에 올려져 있다. 그런데 언제인가 이 구슬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지금은 잔 같은 모양만 남아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말을 만들어 찻잔이라고 하고 연기조사에까지 소급시켜 찻잔 이야기를 꾸며내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고적도보와 사찰시리즈 화엄사의 연기조사 효대 사진까지 실증적으로 비교하고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아니고 자장율사 상이라고 명쾌하게 자료를 제시하여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 문제에 관한 필자의 조사. 확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효대의 인물 문제 : 일제가 조사 발간한 조선고적도보(1916)에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아니고 자장율사 상'이라는 기록은 잘못이다.
그 까닭은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화엄사조에 '중 연기(煙氣)는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데 이 절을 세웠다 한다. 석상(石像)이 있어 어머니를 이고 섰는데 이것을 속담이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하였고 판본(板本) 화엄 사적(寺蹟)에 신라 제24대 진흥왕 5년(544) 인도승 연기(緣起)국사가 세웠다고 하였으며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증축, 문무왕 10년(670)의상대사가 장육전을 짓고 경덕왕(742-765) 청자석으로 화엄경을 새기고(石經 : 화엄경 석각) 신라 말에는 도선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 <한국의 명산 대찰>애 '신라 때 작품으로 전하는 바로는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은공을 갚기 위해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탑 앞에는 아드님이 합장하고 선 효자탑인 석둥이 함께 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자장율사 상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 효대의 용기문제 : 찻잔일 가능성이 더 높다.
조선고적도보의 둥그런 물체는 '둥그런 돌을 올려놓았거나 용기에 붙여서 조각했을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는데 이 용기의 둥그런 돌은 사진 촬영할 때나 그 전에 올려져 놓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까닭은 현재 남아 있는 찻잔 같은 용기 내부에 둥그스런 구멍(壺)이 매끄럽게 파여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둥근 돌이 용기에 붙어 있었다면 깨어진 조각이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 기록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다음으로 제작 시기와 어머님께 공양하는 물건을 추정해 보면 경덕왕 때(755) 화엄사 효대를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면 당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차(茶)가 있었으며 석조(石造) 찻잔은 경덕왕 10년(751)에 조성된 석굴암의 무수보살상을 비롯, 영천 거조암의 5백라한상 중 찻잔 든 세 나한상 등과 탑전(塔前) 석조 공양찻잔은 신라 진흥왕 때 창건(553)하고 혜공왕 때 중수(776)한 법주사 미륵대불앞의 석조 희견(喜見)보살입상이 머리에 이고 있는 대형 석조다기(연화문)와 후기신라 때 탑신부에 조성된 전남 승주군 낙안 금둔사지 탑신 공양상 등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식 중 육법(六法) 공양물은 차, 향, 꽃, 과일, 등(騰). 음식인데 둥근 물건은 과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용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또 '사리(둥근 구슬 같은 것)같다'고 하였는데 3층 사리탑 앞에서 사리를 공양하는 것이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 쌍계사 진감(眞鑑)국사 대공탑비
신라 때 스님, 진감국사(774∼850)의 속성은 최(崔), 이름은 혜소(慧昭), 전주 금마(金馬) 사람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법을 구하려는 뜻이 간절하여 804년 배를 타고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신감(神鑒)에게 중이 되니 얼굴이 검다하여 흑두타(黑頭陀)라 불리우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앞서 당나라에 가 있던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다니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고 스님은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止觀)을 닦은 뒤에 길거리에서 짚세기를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다 830년 귀국하여 상주 노악산의 장백사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화개곡의 삼법(三法)화상 란야(蘭若)의 옛터에 절을 짓고 있었다.
838년 민애왕이 즉위하여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해조'라 호하고 다시 서울(경주)로 오도록 하였으나 가지 아니하였다. 소성왕의 이름을 피하여 '조'를 '소'로 고쳐 혜소라 했다. 뒤에 남령에 절을 짓고 옥천사라 하고 육조(六祖)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신라 문성왕 12년에 죽으니 나이 77세, 법랍 41, 현강왕이 시호-진감선사, 탑호ㅡ대공영탑이라 하다. 정강왕 때 옥천사를 쌍계사라 고치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세운 진감국사비(국보 228호)가 지금 쌍계사에 있다.
진감국사의 비석글에는 '다시금 중국차(漢茗)을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섶나무를 돌솥에 불때어 가루 내지 않고 달여서 이르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가를 가리지 않고 단지 배만 적실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진감국사는 대렴이 차씨를 가지고 온지 2년 후인 830년에 귀국하여 삼법화상 '란야의 옛터'에 절을 짓고 838년 이후에 남령에 절을 다시 짓고 옥천사(뒤에 쌍계사)라 하였으므로 흥덕왕 3년(828)에 화개 골짜기에는 절이 없고 절터만 남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흥덕왕은 대렴이 가져온 귀중한 차종자를 허허벌판인 쌍계사 계곡에 심었겠는가 또는 대 명찰인 화엄사 부근에 심었겠는가'를 고찰해 볼 때 화엄사 부근에 심었으리라는 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려말 목화를 수입한 문익점(文益漸 : 1329-1398)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에 이르렀고 사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통에 넣어 가지고 와서 심었고 그후, 장인 되는 정천익(鄭天益)에게도 심게 하였는데 이것이 잘 번식하여 우리나라 목화번식의 시초가 되었다.
문익점의 본관은 진주로, 지리산 동쪽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면화시배지 기념비와 목화전시관이 개설되어 있다.

♤ <삼국사기> 기록에는 김대렴은 없다.
신라 흥덕왕 3년(828) 12월 조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茶)씨를 가져오니 임금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성행되었다'고 기록된 <삼국사기>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위의 기록 중 선덕왕은 신라 제 37대 선덕왕(宣德王, 780-785)이 아니고 신라 제 27대 선덕영왕(宣德女王, 632-647)이다.
◆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덕왕(聖德王)은 선덕여왕의 오기이다.
◆ 견당사 대렴이 '흥덕왕 3년 12월에 당나라에 갔다가 문종의 연회에 참석하고 차종자를 가져와 임금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교통이 불편한 옛날 당나라의 수도 낙양(후기)에 1개월 내에 다녀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대렴은 그 전(흥덕왕 3년 2월)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비롯, 여러 문헌에 '김대렴'이라 창씨한 것은 잘못이다. '대렴'의 성씨는 '대'씨로 잘못 기록된 사실은 사실 그대로 수정되어야 한다.

♤ 화엄사 장죽전에 대한 고찰
◆ 대렴이 가져온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는데 문헌조사 결과, 그 곳은 화엄사 장죽전으로 판단된다. 그 까닭은 첫째, 정병헌스님의 <대화엄사사적>, 그리고 이에이리 가즈오의 <조선의 차와 선>의 기록에 화엄사 긴대밭(長竹田)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둘째, 828년 당시에는 쌍계사가 창건되기 전이며 절도 없는 심산유곡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귀중한 차씨를 심었을 까닭이 없다. 셋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을 통해서 신라 조정에서도 화엄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화엄사는 당시(743) 화엄 10찰 중의 하나로 고승대덕들이 주석, 왕명에 의한 기념식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 연기조사에 대한 고찰
◆ 지리산 구례 화엄사 효대의 석상(승상)은 자장율사가 아닌 연기조사로, 왼손에 받쳐들고 있는 용기는 찻잔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연기조사는,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의 발문에 '연기(緣起, 烟氣)는 황룡사의 승려였으며 경덕왕 13년(754) 8월 1일부터 화엄경 사경을 시작하여 이듬해(755)2월 14일에 완성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진흥왕 대(540-576)의 인물이 아니고 경덕왕 대(742-765)의 실존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연기가 창건했다'는 정병헌스님의 <대화엄사사적>을 비롯한 여러 문헌의 화엄사 창건 년대 기록은 오기임을 알 수 있다.
◆ <대화엄사사적기>에 기록된 '인도승려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짓고 나서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를 화엄사 장죽전에 심었다'고 기록되었으나 보다 신뢰성있는 자료와 연구가 요구된다. 즉 화엄사 창건과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를 심은 년대는 동일(755년 전후)하며 그리고 장죽전은 인도에서 연기조사가 가져온 차씨와 대렴이 828년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씨를 같은 장소인 장죽전에 심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 연기조사의 출신국에 대해 이상봉은 '한국의 차시배지연구'(한국차학회)에서 '연기법사는 의상대사의 제자로, 중국에서 화엄종을 수학한 의상대사와 연기법사의 연관성과 연기법사가 중국에 가서 화엄학 유학을 하고 돌아온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인도보다는 중국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연기법사가 화엄학을 배우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차종자를 가져 왔으며 화엄사를 창건하고 나서 장죽전에 심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타당성을 제기한 것으로 이에 대한 연구와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 우리나라 차의 전래와 전파 고찰
◆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에서 차종자를 가져와 김해 백월산에 심었다'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의 기록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 제2대 거등왕이 즉위년(199)에 제정한 세시에 술을 빚고 차(茶), 떡, 밥, 과일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이 오기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 한,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 호암 문일평은 백제의 차 전래는 거의 분명하나 사실을 밝힐 수 없음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 듯 하다. 백제와 중국과의 통로인 금강하구의 익산 웅포의 봉화산 차나무, 동진강하구에 위치한 부안군 개암사 뒷산에도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또한 비록 기록에는 없으나 고구려 차의 가능성도 벽화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황해남도 안악 3호분과 중국 집안의 무용총, 씨름무덤에서 다기와 차생활 모습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남아 있다.
◆ 828년 대렴이 차종자를 당나라에서 가져온 것 보다 약 100년 전에 '연기조사가 인도 차종자를 화엄사 장죽전에 심었다'는 기록과 '신라 차나무를 중국으로 가져가 구화산에 심었다'는 중국측 기록을 우리나라 차의 전래와 전파에 상호 연관지어 보다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차의 전래를 '대렴이 828년 당나라로부터 가져 왔다'는 <삼국사기>기록만 강조하기보다는 그 이전의 우리나라 차나무와 차문화에 대해 보다 다양하게 연구, 조사하고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 차시배 유래비 건립제의
문화는 관심을 갖고 알고 가꾸어야 발전된다.
하동 쌍계사일대의 차문화와 차산업이 발전된 이유 중의 하나는 비록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견당시 (김)대렴 차시배유허비'의 건립이 중요한 까닭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즉 전국의 차인이나 단체들을 비롯, 쌍게사 사찰, 현지주민들,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정지원을 하고있는 하동군이 연합하여 이루어낸 성과라고 평가되고 있다. 쌍계사보다 확실하게 신라 대렴공 차시배지가 화엄사임이 여러 자료를 통하여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구례지역에서도 이의 대해 관심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차시배지 유래비를 건립할 것을 본 연구결과를 정리하면서 제의한다.

♤ 기타 지리산에 관한 연구
◆ 지리산은 방장산으로 동방의 삼신산 중의 하나이다. 깊고 오랜 역사와 장엄한 산세, 광대한 면적에 걸쳐 있는 지리산과 그 주변지역의 문화를 상호연관 지어 종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중국 진나라 진시황의 사자 서시(徐市-徐福)가 불로초를 구하려 1천여 명의 동남동녀를 이끌고 구례 지리산(방장산) 이르러 '서시천'(西施川-소리나는 대로 기록)을 비롯 '지초봉', '지천' 등의 이름을 남겼다. 불로초인 영지(靈神芝)와 방사들의 선약 제료인 차(茶)와 관계를 보다 깊게 연구, 구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남악사 터(당터)-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의 당터는 본래 산동면 좌사리 당리(堂洞)에 사당을 세워 남악산(南岳山)의 산신을 모시다가 그 뒤 이곳으로 옮겨 해마다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제사를 지냈는데 1909년 12월에 폐사 되었다. 신라 때는 중사(中祀)로 하여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다가 조선 세조2년(1457)에 정전 3칸, 전사청(典祀廳) 4칸, 재실(齋室) 5간을 세우고 조정으로부터 향축을 내려 크게 제사를 지냈는데 헌관은 남원부사 및 이웃 수령, 초헌관은 진사(進士) 1인, 아헌관은 구례현감이 맡았다.
노고단은 좌사리에 속한 산이며 조선 때의 오악(五嶽)은 동-금강산, 서-묘향산, 남-지리산, 북-백두산, 중-삼각산으로 지리산 산제(남악제)는 이곳 전라도의 남원과 구례에서 지냈다.

♤ 제언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김해(창원)의 백월산에는 가야차 시배지, 지리산의 화엄사나 쌍계사지역은 신라차의 시배지로, 하동 쌍계사지역은 일찍부터 시배지 표석을 세우고 차산업을 적극 발전시킨 반면, 구례 화엄사지역은 위와 같이 유적과 기록 면에서 신라차 시배지 표지석을 세울만한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차종자를 가지고 온 사람은 '대렴'이라 표기해야 바른 표기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 같이 '김대렴'이라 기록한 표지석은 건립자가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료출처http://www.koreatea.or.kr/news/0307/1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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