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0

2018. 4. 24. 09:32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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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使日本時聞見錄 / 五月     ㅡ 조명채(曺命采)


初十日癸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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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早食後離發。過大平川。橋制略似我國素沙之橋矣。至藤川村。村町殷盛。過此以後。從山峽而行。田疇屋廬。彷彿我國之峽氓。而䂨晒松枝。頗有鄕村意思。到赤坂村。見倭丁數十餘人。持竹杖。伏於路左。使通事問之。答以岡崎官家或慮路傍村人之失禮於使行。定送俺等。使之禁戢云。沿路之敬謹。從可知矣。行市閭間。歷數三里。至館所。卽土井伊豫守茶屋也。庭前多植丹楓,躑躅之屬。而撟揉裁翦如蓋如盂。其形非一。伊豫守來館所勞問後。有杉重之饋。分給下輩及轎夫。本守姓源名利信。食祿二萬三千石。中火後離發。桑柘蔽野。無一片眺望之隙。蓋國俗喜種樹。有用之木生於田畒之間。則不加翦伐。寧從樹間而種穀。不以害穀而去樹故也。至小坂井村。少休豐後守茶屋。行到吉田。海水一派。穿經閭里之中。而橫架板橋。市肆繁盛。入城門。抵館所。卽孤峰山悟眞寺也。寺本三十六寮。而館其一區也。庭有小池。蓮錢疊綠。花樹交紅。幽趣甚多。松平豐後守藤原資訓。食祿七萬石。送饋檜重。以檜造樻。重亦三層也。馬守亦送養命糖及朮肥湯。卽我國之所謂黑湯與引截味之類也。終日行行。多從人居中過。而男女塡咽。熏熱逼人。乍入松林之路。頓覺爽快。路見僧倭負一二層木藏而行。時於路邊稅藏而開其門。中有小佛金像。而寶龕,金塔奇巧炫煌。其僧擊腰佩之磬。誦念佛之言。倭人之過者無不投錢。有男倭之賤者。頭不剃髮。云是居士也。女倭之有過道者。而使一僮負席隨後。云是行娼也。其俗喜飮茶。雖盛熱。不飮冷水。必煎茶暖飮。故道傍市肆。多以熱茶盛小器而列置之。過者必投錢而飮。又喜澡潔。一日再三沐浴。故家家有浴室。浴桶市亦有之。而聞中官等所從倭人。至誠扶護。愛欲獻忠。則必勸沐浴云。是日行七十里。





10일(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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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일찍이 조반을 먹은 뒤에 떠났다. 대평천(大平川)을 건넜는데, 다리의 만듦새가 우리나라 소사(素沙)의 다리와 비슷하였다. 등천촌(藤川村)에 이르니, 거리가 풍성하였다. 여기를 지난 뒤로는 산골짜기를 따라가는데, 밭과 집 모양이 우리나라의 두메 백성의 동리와 비슷하고, 솔가지를 베어 말리니 자못 시골 맛이 있다. 적판촌(赤坂村)에 이르니, 왜인 장정 수십여 명이 죽장(竹杖) 들고 길가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이기에 통사(通事)를 시켜서 물으니, 답하기를,
“강기(岡崎) 관가에서, 길가에 사는 촌사람들이 사신 행차에 실례하는 일이 있을까 보아 염려하여, 저희들을 보내어 금하게 하였습니다.”
한다. 연로의 공경하고 조심하는 것을 이것으로 알 만하다.

   거리 사이를 2~3리 지나가서 관소(館所)에 이르렀는데, 곧 토정 이예수(土井伊豫守)다옥(茶屋)이다. 뜰 앞에 단풍ㆍ철쭉 따위를 많이 심었는데, 교정하고 가지 친 것이 일산 같기도 하고 사발 같기도 하여 그 모양이 여러 가지이다. 이예수가 관소에 와서 위문하고 나서, 삼중(杉重)을 공궤하였는데 하인과 교군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고을 수령의 성은 원(源)이고 이름은 이신(利信)이며 식록은 2만 3천 석이다.

   점심 뒤에 떠났다. 뽕나무가 들을 덮어서 바라보이는 곳에 조금의 틈도 없다. 아마도 이 나라의 풍속은 나무 심기를 좋아하므로, 쓸 만한 나무가 밭가에 나면 베지 않고 오히려 나무 사이에 곡식을 심으니, 곡식에 해롭다고 나무를 없애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소판정촌(小坂井村)에 이르러 풍후수(豐後守)다옥에서 조금 쉬고, 길전(吉田)에 가 닿았다. 바닷물 한 줄기가 거리 안을 꿰어 지나는데, 판교를 가로 걸쳤으며 거리가 번성하다.

   성문을 들어가 관소에 닿았는데, 곧 고봉산 오진사(孤峯山悟眞寺)이다. 절은 본디 36요(寮)이며, 객관은 그 한 구(區)이다. 뜰에 작은 못이 있는데, 연잎이 겹겹이 푸른데 꽃나무가 붉게 섞이니 그윽한 정취가 매우 많다. 송평 풍후수 등원자훈(松平豐後守藤原資訓)은 식록이 7만 석인데 이 회중(檜重)을 보내와 공궤하였는데, 회나무로 궤(櫃)를 만들었고, 역시 삼중이다. 마주수(馬州守) 또한 양명당(養命糖)과 출비탕(朮肥湯)을 보내 왔는데, 바로 우리나라의 이른바 흑당(黑湯)과 인절미의 맛과 같다. 종일 가다가 흔히 마을 가운데를 지날 적에는, 남녀가 길목을 메워 더운 기운이 다가오나, 또 곧 소나무 숲 사이 길로 들어가게 되면 문득 상쾌함을 느낀다.

   길에서, 왜인 중이 한두 층짜리 나무 장(欌)을 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마침 길가에서 장을 내려놓고 그 문을 여는데, 그 가운데에 작은 금부처가 있고 보감(寶龕)ㆍ금탑(金塔)이 기교하고 현란하다. 그 중이 허리에 찬 경(磬)을 치며 염불을 외니, 지나는 왜인들이 누구나 다 돈을 던져 준다. 머리를 깎지 않은 천한 왜인 남자가 있는데 이는 거사(居士)라 한다. 한 아이를 시켜 깔개를 메고 뒤따르게 하고서 길 가는 왜인 여자가 있는데 이는 행창(行娼)이라 한다.

   저들의 풍속이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한더위에도 냉수를 마시지 않고 반드시 차를 달여서 덥게 마시므로, 길가 전방에 흔히 더운 차를 작은 그릇에 담아서 벌여 놓았는데, 지나는 사람이 반드시 돈을 놓고 마신다. 또 몸 씻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두세 번 목욕하므로, 집집이 욕실과 욕통(浴桶)이 있고, 저자에도 있는데, 중관(中官)들에 딸린 왜인이 지성으로 모시어 충성을 바치려면 반드시 목욕을 권한다고 한다.
이날 70리를 갔다.




金東溟槎上錄 李澤堂批評 / [槎上錄]     ㅡ 김세렴(金世濂)

馬島十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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隔樹森森劍戟回。赤竿長翟更毰毸。須臾入跪花裙卒。知是門前島主來。右島主

其二
紫羅衣上綴硨磲。七寶袈裟梵字書。幢影乍分金扇出。衆髡齊擁兩筠輿。右二僧

其三
當階脫劍聳危冠。赤足陞堂拜上官。禮畢蠻童呈土物。六苞霜橘紫金盤。右行禮

其四
妖童彩服各相耽。五色花鈿艶翠嵐。一自秦船留不返。至今遺俗重童男。右小童

其五
頂赤猶存鬢後毛。無人不佩短長刀。南征健卒知誰是。半着花絲白戰袍。右奉行
其六
板簷丹檻淨朝暉。新起三門闢畫扉。上閣遍開金色障。中堂盡設紫羅幃。批云敍事逼唐○右正廳

其七
百尺棕櫚畫閣齊。小庭蒼柏舞山鷄。蠻人不屑溫房宿。金幕重重鎭水犀。右寢堂

其八
金盤獻食簇時新。方丈無非入海珍。忽有兩童擊玉椀。銀甁細瀉碧霞春。右振舞

其九
小爐添火沸金霞。赤頂山僧坐點茶。每日請呈新煎水。病中新瘦不宜多。煎茶

其十
沈沈帳幄曉光初。當戶夷官立起居。共說一行寒色滿。夜來微霰洒庭除。右問安

從事次韻
强戴猴冠首屢回。斷毛垂後羽毰毸。傳言跣足中門外。爲是逢迎漢使來。右島主

其二
蠻方文字重硨磲。故遣山僧管國書。萬里遠來迎使節。一雙金扇並籃輿。右二僧

其三
赤頂無簪不受冠。紫絲纏頂是高官。上堂再拜仍蒲伏。曳地花裙更屈盤。右行禮

其四
斷指相盟俗所耽。繡羅裁服翦雪嵐。爭言富貴非難得。執政于今盡美男。批云果如是則倭奴不足懼也○右小童

其五
視死從來等一毛。借交相報有霜刀。首功新得千金賞。身上皆穿五色袍。右奉行

其六
坐見扶桑上曉暉。建牙吹角敞重扉。朝臺自昔靑螺道。賓館如今設綉幃。右正廳

其七
板扉橫閉翠帷齊。臥聽蠻村唱曉鷄。異俗本來無燠室。辟寒爭致越中犀。右寢堂

其八
異俗盤飧觸眼新。烹鯄焦鼈是兼珍。金犁撓却雕胡飯。玉椀盛來麴米春。右振舞

其九
活火頻添起綵霞。山僧供客揀新茶。日將七椀蘇枯肺。却愧玆行負債多。煎茶

其十
每日夷官趁曉初。自言賓館不堪居。更將棕箒循階戺。恐有香塵爲掃除。右問安





마도에서 10절 [馬島 十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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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주(島主)-
숲새로 열을 지어 검극이 돌고 / 隔樹森森劍戟回
붉은 간대에 매달린 빛난 꿩꼬리 / 赤竿長翟更毰毸
꽃치마 두른 졸병 들어와 무릎 꿇으니 / 須臾入跪花裙卒
알괘라, 문 앞에 도주가 와 있다는 걸 / 知是門前島主來

2 -두 중[二僧]-
붉은 비단 옷에는 옥 구슬이 얽혀 있고 / 紫羅衣上綴硨磲
칠보 가사는 범 자가 씌어졌구려 / 七寶袈裟梵字書
당 그림자 나눠지고 금선이 나타나니 / 幢影乍分金扇出
뭇 중들이 나란히 두 수레를 옹위했네 / 衆髠齊擁兩筠輿

3 -행례(行禮)-
뜰에 당해 칼을 풀고 높은 관 쓰고서 / 當階脫劍聳危冠
맨발로 당을 올라 상관에게 절드리네 / 赤足陞堂拜上官
예가 끝나자 동자가 토산물을 올리는데 / 禮畢蠻童呈土物
육 포의 상귤을 붉은 금소반에 / 六苞霜橘紫金盤

4 -소동(小童)-
예쁜 아이 색동옷이 각기 서로 탐을 내어 / 妖童彩服各相耽
오색의 화전은 취람보다 곱구려 / 五色花鈿艶翠嵐
옛날 진선이 여기 머물게 되자 / 一自秦船留不返
이제껏 습속이 사내 아일 중히 아네 / 至今遺俗重童男

5 -봉행(奉行)-
정상은 깎았지만 귀밑머린 남아 있고 / 頂赤猶存鬢後毛
길고 짧은 칼 아니 찬 사람이 없네 / 無人不佩短長刀
남정하던 건졸들 이 중에 누구더냐 / 南征健卒知誰是
화사의 백전포를 거의 다 입었구나 / 半着花絲白戰袍

6 -정청(正廳)-
판자 처마 붉은 머름 아침 볕이 조촐한데 / 板簷丹檻凈朝暉
갓 지은 세 문간 화비가 열렸구려 / 新起三門闢畫扉
상각엔 금빛의 병장이 둘러 있고 / 上閣遍開金色障
중당엔 붉은 비단 휘장을 다 쳐놓았네 / 中堂盡設紫羅幃
비평에, “서사(叙事)가 당시(唐詩)에 가깝다.” 하였음.

7 -침당(寢堂)-
백 척의 종려나무는 화각과 가지런한데 / 百尺棕櫚畫閣齊
뜨락의 잣나무엔 산계가 춤을 추네 / 小庭蒼栢舞山鷄
온돌방 생활을 만인은 즐기지 않아 / 蠻人不屑溫房宿
겹겹의 금 장막에 수서를 깔았구려 / 金幕重重鎭水犀

8 -진무(振舞)-
밥 드리는 금소반에 철 것 새 것 다 오르니 / 金盤獻食簇時新
한 길의 고임 모두 해물의 진미로세 / 方丈無非入海珍
어느새 두 아이가 옥사발을 두들기며 / 忽有兩童擊玉椀
은병의 벽하춘을 조심조심 따르누나 / 銀甁細瀉碧霞春

9 -전다(煎茶)-
작은 화로 지핀 불에 금하가 끓어오르자 / 小爐添火沸金霞
머리 벗겨진 중이 앉아 차를 만드네 / 赤頂山僧坐點茶
날마다 새로 달인 그 맛이 좋지마는 / 每日請呈新煎水
병중의 여윈 몸은 많이 마셔 아니 되네 / 病中新瘦不宜多

10 -문안(問安)-
침침한 장막에 새벽빛 떠오르자 / 沈沈帳幄曉光初
관원이 문에 서서 문안을 드리누나 / 當戶夷官立起居
일행들이 모두 추위 탄다 말을 하며 / 共說一行寒色滿
밤사이 싸락눈이 뜨락에 뿌렸다고 / 夜來微霰洒庭除


종사관의 차운[從事次韻]

1 -도주(島主)-
억지로 관을 쓰니 머리 자주 돌리고 / 强戴猴冠首屢回
자른 터럭 뒤로 드리워 깃처럼 너불너불 / 斷毛垂後羽毰毸
들리는 말이, 문밖에서 맨발로 / 傳言跣足中門外
조선 사신 맞기 위해 왔다고 하네 / 爲是逢迎漢使來

2 -두 중[二僧]-
만방의 문자는 보옥보다 중하기에 / 蠻方文字重硨磲
일부러 중을 시켜 국서를 관장하네 / 故遣山僧管國書
만 리나 멀리 와서 사절을 마중하니 / 萬里遠來迎使節
한 쌍의 금선이 남여와 어울리네 / 一雙金扇並籃輿

3 -행례(行禮)-
머리를 깎았으니 잠이 어디 있겠는가 / 赤頂無簪不受冠
붉은 실로 이마 감은 저 자가 고관이란다 / 紫絲纏頂是高官
당에 올라 절드리고 이내 기어가니 / 上堂再拜仍蒲伏
꽃치마 땅에 끌려 끝이 다시 구겨지네 / 曳地花裙更屈盤

4 -소동(小童)-
손가락을 끊어 서로 맹세지으며 / 斷指相盟俗所耽
구름 같은 수비단 옷을 입었네 / 繡羅裁服剪雲嵐
부귀를 얻어내긴 어렵잖다 말하면서 / 爭言富貴非難得
집정은 지금 다 미남이 아니냐고 / 執政于今盡美男
비평에, “과연 이와 같다면 왜노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5 -봉행(奉行)-
죽음을 털끝 같이 가볍게 보고 / 視死從來等一毛
남의 원수 갚아 주는 비수가 있다네 / 借交相報有霜刀
수공 세워 천금 상을 새로 얻고서 / 首功新得千金賞
몸에는 모두 오색포 입었군 그래 / 身上皆穿五色袍

6 -정청(正廳)-
부상에 떠오르는 새벽 별 앉아 보며 / 坐見扶桑上曉暉
기 세워라 호각 불어라 겹겹 문 열리누나 / 建牙吹角敞重扉
조대는 예부터 청라의 길인데다 / 朝臺自昔靑螺道
빈관은 이제도 수장막을 설치했네 / 賓館如今設綉幃

7 -침당(寢堂)-
판자문 가로 닫고 푸른 장막 둘러치고 / 板扉橫閉翠帷齊
만촌이라 새벽에 닭소리 누워 듣네 / 臥聽蠻村唱曉鷄
이역의 습속은 따슨 방이 전혀 없고 / 異俗本來無燠室
추위를 막기 위해 월서를 깔았구려 / 辟寒爭致越中犀

8 -진무(振舞)-
이방의 반찬이라 눈에 들어 새로우이 / 異俗盤飱觸眼新
삶은 생선 구운 자라 모두가 진미로세 / 烹鯄焦鼈是兼珍
금 소반엔 조호반이 올라 있는데 / 金犂撓却雕胡飯
옥 사발국미춘을 담아 왔구려 / 玉椀盛來麴米春

9 -전다(煎茶)-
숯불이 한창 성해 채하를 일으키니 / 活火頻添起綵霞
산승이 차를 끓여 길손을 접대하네 / 山僧供客揀新茶
날로 일곱 잔을 청해 마른 창자 축이노니 / 日將七椀蘇枯肺
이 걸음에 빚이 많아 도리어 부끄럽네 / 却愧玆行負債多

10 -문안(問安)-
날마다 관원이 첫 새벽에 찾아와서 / 每日夷官趁曉初
빈관이 좋지 않다 스스로 말하네 / 自言賓館不堪居
빗자루를 다시 들고 뜨락을 두루 돌며 / 更將棕箒循堦戺
먼지가 낄까 싶어 소제를 하는 거래 / 恐有香塵爲掃除



 ***  김세렴(金世濂) : 도원(道源), 동명(東溟), 문강(文康)


요약   :  1593(선조 26)∼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김홍우(金弘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흥부사(永興府使) 김효원(金孝元)이고, 아버지는 통천군수 김극건(金克鍵)이며, 어머니는 양천 허씨로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허봉(許篈)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22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 1616년(광해군 8) 증광 문과에서 장원 급제해 예조좌랑이 되었으며,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겸임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1617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해 폐모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탄핵하다가 곽산으로 유배, 1년 만에 강릉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년 뒤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수찬·헌납(獻納)·교리(校理)를 거쳐, 이듬해 수의어사(繡衣御史)로 충청도를 살폈으며, 지평(持平)·교리·부응교(副應敎)를 역임하였다.

   집의(執義)로 있을 때 공신 이귀(李貴)가 이조판서로 자천(自薦)하는 방자함을 왕에게 아뢰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1634년 현풍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6년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할 때 부사로 선발되어 다녀온 뒤, 사간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38년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와 병조·형조·이조참의,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641년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해 안변도호부사·황해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근사(近思)』·『소학(小學)』·『성리자의(性理字義)』·『독서록(讀書錄)』 등을 간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1644년 평안도관찰사로 옮겼다가 대사헌으로 조정에 들어가 홍문관제학을 겸임했고, 바로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로 군현 방납(郡縣防納)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만년에는 경서 연구에 전력했고,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였다. 김세렴을 가리켜 김류(金鎏)는 ‘진학사(眞學士)’로, 정경세(鄭經世)는 ‘당대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해사록(海槎錄)』 등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세렴의 글씨〈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사진 출처 :<다음백과 >








山林經濟卷之二 / 治膳         ㅡ 홍만선(洪萬選), 미상



茶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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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宜焙不宜晒。神隱 茶宜嗽口不宜多啜。上同 煎茶[法]。須用有焰炭火滾起。便以冷水點。伺再滾起再點。如此三次。色味皆進。必用 湯不欲老。老則過苦。聲如澗水松風。不宜遽㵸。惟移甁去火。少得其沸止而㵸之。方爲合節。閑情
杞菊茶。用野菊花一兩。枸杞四兩。茶芽五兩。芝麻半升。同硏爲細末篩過。如喫時。用一匙入鹽少許。酥油不拘多少。以一滾沸湯調服。神隱
枸杞茶。至深秋。摘紅枸杞子。同乾麵拌和成劑。捍作餠樣。晒乾硏爲細末。每茶一兩。枸杞末二兩和匀。入煉酥油三兩。或香油亦可。旋添湯 成稠膏子。用鹽少許。入鍋煎熟飮之。甚有益明目。必用神隱
濕棗湯。大棗去核。用水熬汁。生薑汁和蜜。同將三味調匀。入磁罐內。令稀 得所。入麝香少。每盞挑一大匙。沸湯點服。上同
香蘇湯。乾棗一斗。去核擘碎。木瓜五箇。去皮穰搗碎。紫蘇葉半斤。同一處再擣匀。分作五分。將一分匀攤。在竹籮內燒滾湯。潑淋下汁。嘗瓜棗無味則去。却換好者一分。依上潑之。以味盡爲度。將淋下汁。慢火於砂石器內。熬成膏子。冷熱任用。上同
須問湯東坡居士歌括云。半兩生薑 乾用 一升棗。乾用去核 三兩白鹽 炒黃 二兩草。炙去皮 丁香木香各半錢。約量陳皮一處搗。去白 煎也好點也好。紅白容顏直到老。必用
氷芝湯。乾蓮實一斤。帶皮炒極燥。搗爲細末。粉草一兩微炒。右爲細末。每二錢。入鹽少許。沸湯點服。蓮實。搗至黑皮如鐵。不可搗則去之。世人用蓮實。去黑皮及澁皮幷心。大爲不便。黑皮堅氣。而澁皮住精。世人多不知也。此湯。夜坐過饑氣乏。不欲取食。則飮一盞。大能補虛助氣。必用
茴香湯。入炒茴香細末一兩。 香薑末少許。只看滋味如何。隨意加減。沸湯點服。神隱必用
杏酪湯。杏仁三兩半。浸百沸湯。蓋定候冷。如是五度。搯去皮尖。入小砂盆內細硏。次用好蜜一斤。煉至二三沸。看涌掇退候半冷。旋傾入杏泥。又硏和匀。必用
鳳髓湯。松子仁 柏子 胡桃肉。湯浸去皮。各一兩硏爛。次入好蜜半兩和匀。每用沸點服。上同
醍醐湯。烏梅一斤搥碎。用水兩大椀。熬作一椀澄淸。不犯銕器。次將縮砂碾半斤。蜜五斤同梅水。於砂石器內熬之。候赤色爲度。冷定。入白檀末二錢。麝香一字。上同寶鑑曰。烏梅肉另末一斤。草果一兩。縮砂白檀香各五錢。幷作細末。入煉蜜五斤。微沸 匀。磁器盛冷水調服
柏湯側柏 採取嫩葉線繫。垂掛大甕中。紙糊其口。經月視之。如未乾更閉之。至乾取出爲末。如不用甕。置密室中亦可。而但不及甕中者靑翠。此湯可以代茶。夜話飮之。尤醒睡。味太苦。則少加山芋尤妙。神隱
紫蘇湯。夏月。先作百沸滾湯。取紫蘇葉不拘多少。用紙隔焙。不得翻動。候香。以百沸湯入甁。仍將蘇葉投入。密封甁口則香倍。只宜熱用。冷則傷人。必用神隱
木瓜醬。木瓜一箇切下蓋。去穰盛蜜。却蓋了用簽。簽定入甑。蒸軟去蜜。不用削去其皮。別入熟蜜半盞。薑汁少許。搗硏如泥。以熟水三大椀 匀。濾去滓盛甁。井底沈之。上同
五味。五味子。滾湯浸一宿。取汁同煎。下濃豆汁。對當的顏色恰好。同爛熟蜜對入。酸甜得中。慢火同熬一時許。涼熱任用。必用
淸泉白石茶。用桃核松子肉。和眞粉成小塊如石狀。置茶中。倪雲林


[주-D001] 法 : 
底本無。甲乙本有。
[주-D002] 住 : 
[주-D003] 化 : 
[주-D004] 攬 : 
甲乙本作攪
[주-D005] 攬 : 
甲乙本作攪
[주-D006] 稠 : 
乙本作調
[주-D007] 許 : 
乙本無
[주-D008] 內 : 
乙本無
[주-D009] 檀 : 
乙本作擅
[주-D010] 攬 : 
甲乙本作攪
[주-D011] 攬 : 
甲乙本作攪
[주-D012] 渴 : 
甲乙本作湯





차와 탕(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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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는 불에 쬐어 말려야지 햇볕에 말리면 못 쓴다. 《신은지》
차는 입을 가실 만하면 되지, 너무 많이 마시면 못 쓴다. 《신은지》
차 달이는 법은, 차를 달이려면 반드시 이글거리는 숯불로 끓이다가 냉수를 찔끔 부어, 다시 끓기를 기다려 또 냉수 치기를 이렇게 세 차례 하면 맛과 빛이 훨씬 좋아진다. 《거가필용》

   물이 너무 끓지 않아야 되니 지나치게 끓으면 너무 쓰다. 끓는 소리가 석간수나 솔바람소리 같아야 한다. 갑자기 끓으면 좋지 않으니, 익힐 때 불을 빼내어 잠깐 끓다가 그치도록 해야 알맞게 된다. 한정록》

   기국차[杞菊茶]는, 들국화 1냥, 구기자(枸杞子) 4냥, 차싹[茶芽] 5냥, 참깨 반 근을 함께 곱게 갈아 체에 쳐서 먹을 때 한 수저에 소금 약간과 적당한 양의 소유(酥油)를 넣어 잠깐 한 번 끓은 물에 타서 마신다. 《신은지》

   구기차[枸杞茶]는 깊은 가을에 딴 빨간 구기자를 마른 밀가루와 반죽하여 떡같이 만들어 볕에 말려서 곱게 가루로 만든다. 차 1냥마다 구기자가루 2냥을 고루 섞고, 달인 화소유[煉花酥油]나 참기름 3냥을 끓은 물에 곧 타서 된 고(膏)를 만들어, 소금을 약간 쳐서 냄비에 끓여 익혀서 마시면 매우 보익하고 눈이 밝아진다. 《거가필용》 《신은지》

   습조탕(濕棗湯)은, 굵은 대추를 씨를 발라 물에 곤 즙에다 생강즙에 꿀을 타서 세 가지 맛을 고루 섞어 자기 항아리에 넣고 저어 묽고 되기[稀椆]를 적당히 하여 사향을 조금 넣는다. 한 잔에 큰 술로 하나씩 떠서 팔팔 끓는 물에 타서 조금씩 먹는다. 《거가필용》 《신은지》

   향소탕(香蘇湯)은, 마른 대추 한 말[一斗]을 씨를 발라 쪼개고, 모과[木瓜] 5개를 껍질 벗겨 짓찧고, 차조기잎[紫蘇葉] 반 근을 한데 넣어 다시 고루 찧어 5등분한다. 1푼으로 대고리 안에 고루 헤쳐 태워, 끓는 물을 흘려, 아래로 뿌려지는 즙을 맛보아 모과나 대추 맛이 없으면, 다시 좋은 것 1푼을 바꾸어 위와 같이 맛이 날 때까지 즙을 낸다. 흘러내린 즙을 사기그릇이나 돌그릇에 담아 뭉근한 불로 고아 고(膏)를 만들어 차게 하거나 뜨겁게 하거나 마음대로 쓴다. 《거가필용》 《신은지》

   수문탕(須問湯)은, 동파거사(東坡居士)가 노래로 부르기를 ‘생강 반 냥 말려서 쓴다. 대추 1되 씨를 발라내고 말려서 쓴다. 흰 소금 3냥 누런 빛깔이 나도록 볶는다. 감초(甘草) 2냥 구워서 껍질을 벗긴다. 정향(丁香)ㆍ목향(木香) 각각 반전(半錢)과 진피(陳皮 귤껍질) 흰 껍질은 없앤다. 조금을 한데 찧어 달여도 좋고 조각으로 만들어도 좋아, 붉고 흰 얼굴이 늙을 때까지 계속되느니라.’ 하였다. 《거가필용》

   빙지탕(氷芝湯)은, 연밥[蓮實] 1근을 껍질째 볶아 바짝 말려 찧어 곱게 가루를 만들고, 감초가루 1냥을 슬쩍 볶아, 이 두 가지 가루 2전(錢)에 약간의 소금을 쳐서 팔팔 끓여 조금씩 먹는다. 연밥은 검은 껍질이 쇠빛깔 같아질 때까지 찧다가 찧을 수 없거든 버린다. 세상 사람들은 연밥을 쓸 때, 검은 껍질과 떫은 껍질, 그리고 심(心)은 커서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검은 껍질은 기운을 튼튼하게 하며 떫은 껍질은 정기를 보존하게 하는 줄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이 탕(湯)은 밤늦도록 못 자서 너무 허기져 식욕이 없을 때 한 잔을 마시면 허함을 보익하고 기운을 돋우어 준다. 《거가필용》

   회향탕(茴香湯)은, 볶은 고운 회향(茴香) 가루 1냥에 단향(檀香)과 생강가루 조금을 넣되, 맛을 보아 적당히 가감하여 조금씩 먹는다. 《거가필용》 《신은지》

   행락탕(杏酪湯)은 살구씨 석냥 반을 팔팔 끓는 백비탕에 담가 뚜껑을 덮어 완전히 식을 때를 기다린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번 하고 나서 껍질 끝을 꺼내어 버리고 사기동이에 넣어 곱게 간다. 그리고 좋은 꿀 1근을 두어 번 끓도록 졸여, 반쯤 식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살구씨 간 것[杏泥]에 붓거나 또는 갈아서 고루 섞는다. 《거가필용》

   봉수탕(鳳髓湯)은, 잣ㆍ호도 알을 끓는 물에 담가 속껍질을 벗겨 각 1냥씩을 노그라지게 간 다음 좋은 꿀 반 냥을 넣어 고루 섞어 매번 팔팔 끓는 물에 타서 조금씩 먹는다. 《거가필용》

   제호탕(醍醐湯)은, 오매(烏梅) 1근을 짓찧어 큰 사발로 물 두 사발을 붓고 졸여 한 사발로 만들어 맑게 가라앉힌다. 이때 쇠그릇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축사(縮砂) 반 근을 매에 타서, 꿀 5근과 함께 사기그릇에 넣고 붉은 빛이 될 때까지 졸인다. 식거든 반드시 백단(白檀) 가루 2전(錢), 사향(麝香) 1자(字)를 넣는다. 《보감(寶鑑)》에는 “오매육은 따로 1근을 가루로 만들고, 초과(草果) 1냥, 축사ㆍ백단 각각 5전(錢)을 같이 곱게 갈아, 달인꿀 5근에 넣어 슬쩍 끓여 고루 저어, 사기그릇에 담아 냉수에 타 먹는다.” 하였다. 《거가필용》

   백탕(柏湯) 측백(側柏) 은, 연한 측백잎을 따서 끈으로 엮어 큰 항아리 안에 드리워 매달고, 종이로 항아리 입을 봉하여 한달쯤 지난 뒤에 열어보아 아직 마르지 않았거든 다시 덮었다가 다 마른 뒤에 꺼내어 가루로 만든다. 만약 항아리를 쓰지 않고 꼭 닫은 방안에 두어도 되지만 항아리 속에서 푸른색으로 마른 것만은 못하다. 이 탕은 차를 대신할 수 있으니 밤에 이야기하다가 마시면 한결 졸음이 가신다. 맛이 너무 쓸 때에는 마[山芋]를 조금 넣으면 아주 좋다. 《신은지》

   자소탕(紫蘇湯)은, 여름철에 먼저 백비탕을 끓여, 붉은 차조기를 적당량 따서, 움직이지 않게 종이로 격지 놓아 불에 쬐어 향기가 나거든 백비탕을 병에 붓고 이어 차조기잎을 속에 넣은 뒤, 병 주둥이를 꼭꼭 봉하면 향기가 갑절 난다. 이때 다만 뜨거워야 하니, 차게 되면 인체에 해롭다. 《거가필용》 《신은지》

   모과장(木瓜漿)은, 모과 한 개를 밑을 도려 씨를 발라내고 그 속에 꿀을 넣고 다시 뚜껑을 덮은 다음 대나무 바늘로 고정시켜 시루에 넣어 연하게 쪄 꿀을 빼되 그 껍질을 깎아버릴 필요가 없다. 따로 익힌 꿀 반 잔과 생강즙 조금을 섞어 노그라지게 갈아, 큰 사발로 끓인 물 세 사발을 고루 저어 밭쳐서, 찌꺼기를 없애고 병 안에 담아 우물 속에 저장한다. 《거가필용》 《신은지》

   오미갈수(五味渴水)는, 오미자를 팔팔 끓는 물에 담가 하룻밤 재워 우러난 뒤에 같이 달이고 진한 콩즙[豆汁]을 넣어 얼굴이 비칠 정도가 되거든 달인 꿀을 넣어 달콤새콤하게 맛을 맞춘다. 그리고 나서 뭉근한 불로 한 동안 졸여 그냥 먹거나 식혀서 먹는다. 《거가필용》

   청천백석다(淸泉白石茶)는, 호도[桃核]ㆍ잣을 까서 밀가루로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차 속에 넣는다. 《예운림집》

 *** 홍만선(洪萬選)  :  중(士中), 유암(流巖)

요약  :1643(인조 21)∼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중(士中), 호는 유암(流巖). 아버지는 예조참의 홍주국(洪柱國)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30세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내직으로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의금부도사, 공조의 좌랑·정랑, 익위(翊衛), 사옹원·사재감·장악원·사복시 등의 정(正)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연원찰방, 함흥·대구 등지의 판관, 대흥·합천·고양·배천·단양 등지의 군수, 인천·부평의 부사, 상주목사 등을 거쳤다.

   인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벼슬생활에서는 당대의 순량리(循良吏: 법을 지키면서 백성을 잘 다스리는 관리)로 꼽혔다. 당론(黨論)의 대립이 심하였던 당시 판단을 공정히 하여 많은 인사들이 그를 찾아 의견을 들었으며, 부족함이 없고 결점이 없는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연로할 때 지은 『산림경제(山林經濟)』 4권은 대표적인 향촌경제서로서 사대부의 산림생활의 지침서가 될 뿐만 아니라 농업기술에 관한 한 18세기 이후 새로운 농서(農書) 발간에 기여가 컸다.

   유형원(柳馨遠)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발전의 선구적 인물로 평가된다. 유중림(柳重臨)·서유구(徐有榘) 등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귀록집(歸鹿集)』
  • 「농서약사(農書略史)」(김용섭, 『농서』, 아세아문화사, 198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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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灘集 卷六 / 詩     ㅡ 이승소(李承沼)


奉和琉球國使自端上人詩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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征途風雪正蕭條,甁錫飄然再入朝。穩泛仙槎遊萬里,欣瞻瑞日上重霄。興來揮翰詩無敵,睡罷煎茶手自調。隨世應緣多伎倆,隱居休問爛柯樵。

漸覺春風動柳條,故園旋旆趁花朝。身隨蘆葉經三島,夢想仙韶下九霄。欲和《郢歌》那可得?自慙齊瑟不相調。舊房松已枝西偃,煮茗何時拾墮樵?



유구국의 사신 자단 상인의 시운에 받들어 화답하다〔奉和琉球國使自端上人詩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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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길 눈보라가 쳐서 정히 쓸쓸한데 / 征途風雪正蕭條
병석 들고 표연하게 다시 조정 들어왔네 / 甁錫飄然再入朝
신선 뗏목 띄워서는 만리 먼 길 유람해 와 / 穩泛仙槎遊萬里
상서로운 해가 중천 뜨는 거를 바라봤네 / 欣瞻瑞日上重霄
흥이 일어 붓을 들자 시는 상대될 이 없고 / 興來揮翰詩無敵
졸다 깨어 끓는 차를 손으로다 가늠하네 / 睡罷煎茶手自調
세속 인연 따르는 건 기량 많은 탓이거니 / 隨世應緣多伎倆
은거하여 도끼 자루 썩는 거를 묻지 마소 / 隱居休問爛柯樵

봄바람이 버들가지 흔드는 걸 알겠거니 / 漸覺春風動柳條
고향으로 가는 깃발 꽃 핀 아침 출발하네 / 故園旋旆趁花朝
몸은 갈대 잎을 따라 삼도를 다 지나왔고 / 身隨蘆葉經三島
꿈은 선소 생각하여 구소에서 내려왔네 / 夢想仙韶下九霄
영가 화답하려 하나 어찌할 수 있으리오 / 欲和郢歌那可得
제슬이라 서로 간에 안 어울려 부끄럽네 / 自慙齊瑟不相調
옛 선방에 솔은 이미 가지가 다 누웠는데 / 舊房松已枝西偃
어느 때나 차 끓이려 나뭇가지 주으려나 / 煮茗何時拾墮樵




松窩雜說  墍撰    ㅡ  이기(墍)

松窩雜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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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氏龍種也。雖孱孫末裔。一身某處必有鱗甲。俗傳禑之左肩上。有鱗如棊子大。禑常隱護不露。在臨瀛將死之日。袒而視之傍人曰。今若不示而死。則汝輩何知我之非辛乎。此雖不載於國乘。而臨瀛之人至今言之。
耘谷先生。與李崇仁鄭道傳等。司馬同榜。牧隱嘗謫寓驪興。公委往相見。多有唱酬之什。公聞禑廢謫江華。大書特書曰。國家以先王之子。爲辛旽之子。廢爲庶人。投之江華。仍有詩曰。祖王信誓應乎天。餘澤流傳五百年。分揀假眞何不早。彼蒼之鑑昭昭然。及聞昌廢之江華。禑自江華移於江陵。仍賜死。有詩云。先王父子各分離。萬里東西天一涯。縱使一身爲庶類。寸心千古不遷移。公以禑昌父子爲先王。而題詩哭之。
耘谷公。聞統制使崔瑩被刑。有寓歎三詩云。水鏡埋光柱石頹。四方民俗盡悲哀。赫然功業終歸朽。?爾忠誠死不灰。紀事靑篇曾滿秩。可矜黃壤已成堆。想應杳杳重泉下。掛眼東門憤未開。二云。獨立朝端誰敢干。直將忠義試諸難。爲從六道黔黎望。能使三韓社稷安。同列英雄顏更厚。未亡邪佞骨猶寒。更逢亂日誰爲計。可笑時人用事奸。三云。我今聞訃作哀詩。不爲公悲爲國悲。天運難能知否泰。邦基未可定安危。銛鋒已絶嗟何及。忠膽常孤恨不支。獨對山河歌此曲。白雲流水摠噫嘻。
魯山君遜于寧越郡。每於淸朝出大廳。着衮袍據榻而坐。見者無不起敬。一日禁府都事下去。自門隙望之。瞿然退縮。莫敢下手。日將暮。都事恐其有後時之責。與榻下小吏謀之。以長繩從坐後窓穴而引之。繩不足。繼以布帶而卒縊之。
魯山君殂于寧越。棺斂不具。只以蒿草爲殯。一日有年少山僧來哭甚哀。自言平生有通名蒙恤之分。留連數日。一夕負屍而逃。或云焚之山谷。或云投之江中。今之塚墓乃虛骸之葬也。二說未知孰是。若以佔畢齋之文觀之。則投江之說無疑。然則僧乃胡僧楊璉之流。而其奸臣所指揮者乎。天長地久。恨其曷旣。魂至今猶漂蕩。誠可哀哉。
牧隱大爲我 太祖所重。 太祖嘗請其字。及居室號。又請名其二郞。牧隱以爲。桂花秋皎潔。配桂莫如松。公之所重者節義。尙其不變也。故曰。字之曰仲潔。扁其居曰松軒。且三郞之名芳毅。故名二郞曰芳果。果毅相須者也。吟成一篇。着鞭樞府愧揚揚。同日摩肩入臺省。月滿海山何皎皎。歲寒松柏愈蒼蒼。友恭可見親情洽。果毅何憂敵勢强。願與一時諸大將。共師終始郭汾陽。
牧隱於高麗恭讓王己巳十二月。被謫出居長湍。庚午四月付處咸昌。五月逮至淸州獄。以水譴蒙宥還至長湍。壬申四月又貶衿陽。六月自衿陽又移驪興。居甓寺。有泛舟至鸕鶿岩等詩。詩止於此。革命之後朝廷將議置重典。 太祖特原之。自驪興流于長興府之南碧沙驛。其冬放還韓山。公不能安居一處。乙亥秋遊關東入五臺山仍留止。同年十一月 太祖屢以手書召之。公不得乘轎入覲。 太祖下榻相對以故舊之禮。願承一敎。勿以寡昧而棄之。公言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但當將此骸骨。歸葬故山而已。太祖知不可留。步出中門。相揖以別。丙子之夏。公懇求避暑驪興。五月初三日自碧瀾渡乘舟泝江。有護送中使亦來。初七日至驪興淸心樓之下流燕子灘。公沒於舟中。公之沒。人多疑之。蓋麗氏之子孫。多於舟中見處。此皆鄭道傳趙浚等之術也。衆人之疑不能無也。痛哉。
光廟丙子之亂。河緯地見法。其妻子在一善。朝廷議以連坐之律。遣禁府都事處之。緯地有二子。長琥。怳惚失措仆地無言。次曰珀。年未弱冠。略無懼色。動止自若顧謂都事曰。萬無亡命之理。願少緩之。不得已與母有告訣之言矣。都事聽之。珀入門跪告於其母曰。死不難也。父旣被殺。子不可獨生。雖無朝廷之命。猶當自決。但有一妹年將就笄。雖沒爲賤隷。婦人之義。猶當從一而終。勿爲狗彘之行於他日也。遂再拜出從容就死。人皆謂緯地又有子矣。
鄭校理鵬善山人也。以淸節自牧。門絶苞苴之物。時柳子光以敵愾佐理功。封爲武靈君。姦貪自恣。氣焰傾朝。公以表親之故。雖不廢問安之禮。婢子往。必以熟索牢結其臂。着署而送。返則解之。欲其覺痛急往急來。不使遲留於彼家也。公之入直。擧家絶食。公之夫人求貸於子光家。子光欣然謂曰。親戚之義。在於相恤。而校理過於剛愎。吾豈恝然乎。卽納米於帒盛醬於缸。令邱使載之騾子而送之。公出直見其玉粒之飯。問其所得之處。夫人直告之。公推案笑而起曰。入直之朝。買泡滓作粥饋我。我知其乏窘。而不爲措置。是我之失也。非家人之過也。遂發書於親舊。准其所用。並與本米而還之。其固窮不變如此。
申相公用漑。自少倜儻多大節。其父㴐。爲咸吉道監司。李施愛之亂。發於倉卒。無以應變。投入於廳上曲樓之隙。凶卒等之不得將去。有小吏指示所在之處。竟爲所害。公及長。慟父死於賊手。必欲報讎。交結洪裕孫累往咸吉道。審知小吏面貌姓名。一日其人以事來京。寓於中路人家。公時爲舍人。與洪裕孫乘昏挾斧徒步而往。使裕孫招出。似若以官事相告語者。公自其後斫而殺之而去。主家與同行之人。終莫知有何故。而爲何人之所害也。
申高靈叔舟之夫人尹氏。子雲之妹也。叔舟在 英廟朝。與於八學士之流。而尤與成三問最善。至 光廟丙子之難。三問等獄事發覺。其日之夕。叔舟還家。中門洞開而夫人不在。公歷探房廡。見夫人獨上抹樓。手持數尺之布。坐於樑下。公問其故。答曰君於平日。與三問輩相厚。不啻如兄弟。今聞三問等獄事已發。意君必與之同死。將俟君凶聞之及而自決。不圖君之獨爲生還也。公屈。悵然若無所容按此事蓋在於乙亥夏魯山遜位 光廟受禪之日搢紳間相傳以爲美談此錄言出於傳聞之未詳耳夫人卒於丙子正月而六臣之獄起於四月安得有云云之說也
李判書世佐之夫人某氏。某官之女也。 成廟朝將罪廢妃之時。公以代房丞旨持藥而去。其夕公還家與夫人同室而臥。夫人問曰。聞朝廷論廢妃不已。畢竟如何。公曰今已賜死矣。夫人愕然起坐曰傷哉。吾子孫其無遺類乎。母旣無罪而被殺。子無報復於他日乎。朝廷將置世子於何地。而有此擧措乎。至燕山甲子年間。公之子守貞殺死。公亦有東市之慘。一時執論搢紳者之子孫。皆盡無餘而國亦幾亡。夫人先見之智。實非諸臣之所能及也。
牧隱於麗季議立新君之際。獨以當立前王之子。赤幟於衆囂之中。禑之廢居江華也。公以微服嘗往省之。有對菊詩云。人情那似物無情。觸景年來漸不平。偶向東籬羞滿面。眞黃花對僞淵明。又云龍沙漠漠又秋風。衰草連雲落照紅。折得黃花誰上壽。海西千里是行宮。又有菊花詩云。數枚籬畔媚霜葩。潤色韓山牧隱家。此老豈知書甲子。門前碧柳帶烟斜。公之眷眷之意可見矣。
李判書耔。字次野號陰崖居士。吾韓山人也。能文章登魁科。嚴毅忠直。時人皆以遠大期之。與金安老有姻婭之親。且同學朱溪君。平生所爲。薰蕕相反。安老每有忮害之志。而以公守正。無可乘之隙。及正德己卯諸賢斥死之日。公亦罷黜居龍宮縣。至嘉靖丙申。安老以左議政受由掃墳于咸昌地。先送人於公。告以當於歸途歷晤疇昔云。而其實忌惡而探試之也。公先見其肺肝。將過之朝。乃以槐花湯沃面。擁衾而坐。與之相接。安老執手極其殷勤。垂淚告別。出而謂人曰。陰崖公已矣。無足慮也。君子之於小人。有時自晦而避禍。亦其一道也。
牧隱謫居長湍。寄省郞諸兒詩。一云。玄陵一代小人儒。揚歷中書諫大夫。得至侍中徼幸耳。斯文何事答相圖。一云。中庸大學學曾思。人道瀛王是汝師。長樂邇來非獨我。有誰重賦去來辭。一云。去年長子入黃泉。仲氏今朝謫海堧。聞說三郞方被劾。奈何天也奈何天。一云。世間榮悴似循環。松柏蒼蒼又苦寒。且學仲尼陳九卦。白頭身世付長湍。一云。官途今古足危機。何怪衰年惹是非。再拜聖恩天地大。滿山殘雪掩柴扉。一云。彈章大勢乍驚人。熟讀深思摠失眞。捉敗老翁惟四字。黜僧還恐似王倫。一云。長湍太守送纖鱗。晩食還驚味更珍。始識省郞恩深重。忍飢供職豈無人。一云。玄陵策士甲加寅。放榜辛朝始出身。坐數至今荒野去。滿庭靑紫絶無人。一云。天子呼來賜八珍。侍中光彩動朝臣。請看倚伏難逃處。寂寂荒村伴野人。一云。松軒當國我流離。夢裡何曾有此思。二鄭況今參大議。一家完聚果何時。一云。汝恃家門逞汝頑。那知汝父是氷山。彈文直欲殺無赦。尙幸並生天地間。一云。欲加之罪豈無辭。似毀疑褒世所知。畢竟有吾天不患。爛烹肥肉倒深巵。
牧隱寄呈松軒侍中詩。一云。臣罪當誅聖主恩。屛居關內得安身。問渠何以逢天幸。只爲松軒是故人。一云。白頭身世已殘陽。無職無田亦不妨。只有游山高興在。敢煩廊廟一商量。一云。秋入郊原淑景移。物華晴好雨仍奇。太平廊廟多高會。每趣看蓮又是誰。一云。三到咸昌興更新。依然黃鳥亦相親。韓山有我先墳在。欲及中秋拜兩親。一云。三韓迓命日方中。百折交情水必東。乖亂自消和氣動。只緣黃閣有淸風。
牧隱聞鄭圃隱被死。偶題詩云。省擊臺彈直到今。烏川奇禍駭人心。往來屑屑何妨事。更感松軒愛我深。萬曆戊子己丑間。健元陵上有哭聲。守護軍等往審之則無聞也。非徒守護軍聞之也。朔望之祭獻官執事之員。有時聞其主山有微哭之聲。不知有何故也。至壬辰之夏。倭賊渡海。 大駕西巡。 廟社邱墟。然後始知 聖朝陟降之靈。憂勞惻怛於冥冥之中。丁寧致懇於昭昭之際。而上下昏憒不知戒也。豈不痛哉。
朝家開國二百年。 世宗 成宗休養漸摩。燕山荒亂殺戮之餘。 中廟 明廟重煕寬恤。無大段兵革之慘。無九年七年之災。以至今 上之朝。黎民雖不無困於賦役之煩。而田野皆闢。有恒產而旣庶且富矣。上自朝廷下至閭閻匹夫。豪侈相尙。惟以好衣豐食爲務。物盛而衰。天道之常。數十年來癘氣流行。民多死亡。己丑之獄。鉤引鍛鍊。三年未畢。死者無慮千有餘人。至于壬辰倭奴擧國長驅。蕩殺殆盡。孑遺餘民。失業失農。城中及四方僵屍相枕。湖海兩西叛賊有告。有雖伏天刑。殘民受害亦多矣。加之以毒癘方熾之中。瘧鬼恣行。風魔雨怪諸般可愕之災。轉輾相煽。一染輒死。箇箇僅存之人。其何幾多日而不之盡乎。嗚呼。愛人而欲生之者。天之本心也。胡爲震怒不已。召倭肆暴。任鬼行凶。殺之又殺。至今彌甚。仁覆悶下之至德。果如是乎。無乃古人所謂殺運未訖而然耶。將盡殺一世之人。別生一副當人而然耶。使靑邱數千里之地。無復人理。變爲冤鬼之場而然耶。抑將亂甚否極。使人心悔過思治。然後復開泰和之運而然耶。天意之所在。固未可知也。
三國之時。禮文朴略。麗氏五百之久。其喪氣亦多草率。至于我國。節目大備。始有衰絰居廬之制。燕山荒亂。蕩滅禮法。遂立短喪之制。違者罪之。士大夫靡然從之。而亦有守禮心喪者。 中廟卽位。修復舊禮。至正德己卯年間。諸賢滿朝。講求朱子家禮。一時後進之輩爭先慕之。閭閻之間。斷指割股啜粥廬墓。特其餘事耳。或有毀疾成痼。猶不從權。因致殞軀者。亦多有之。孝雖根於天性。然不出於中情而出於勉强。其不得不變。乃其理勢之使然也。至于 明廟之朝。乃有一種假托自便之論。以爲守墓非家禮之本意。從權乃聖人之遺訓。遂爲之返魂。人無賢不肖。皆以爲知禮而從之。其間好古之士。力言我國與中國不同。不宜返魂之意而不能救也。自此之後喪紀日壞。爲喪人者。必奉几筵而還家。自稱有病處於深突。飮食接客。無異平日。壬辰倭變之後。朝廷有武士起復從軍之令。雖或從軍而自有起復服色。而或於卒哭之前。或於未練之時。食肉綵服。曾無難色。其在武夫。不足譏也。爲文官而居宰相之列者。亦多私自起復。或稱召募或稱義兵。不顧倫紀。專事肥己。儒士之自謂讀書。自稱學禮者。皆不服喪。一家之內上下大小無一行喪。其間愛禮執喪者。絶無而僅見。嗚呼。前日之不肯從權者何心。而今日之對人恣食者抑何心歟。所謂失其本心者也。夫三年之喪。天之經地之義。而民之彝也。故賢者以爲輕。而不肖者所當勉也。是何吾心本然惻怛罔極之天。一朝因醜賊之變。蕩然淪喪。陷爲禽獸而不自覺也。可歎也夫。可怪也夫。
萬曆壬辰夏倭賊渡海入境。連陷邊城。無復枝梧。長驅而至。李鎰之兵敗於尙州。申砬之軍沒於忠州。二十九日之夕。羽書忽至。翌曉 大駕奉廟社主。與東宮及中殿諸嬪。冒雨蒼黃行渡臨津。宿于東坡驛至開城。轉向關西。宗室及文武百官。中途逃散。多不扈從。至如僉知成世寧。前直長成世康。以士大夫與七品食祿之臣。安居城中。臣服於倭。世寧以孫女妻倭將得寵。一洞賴以安焉。宗親及士族等。初皆出避畿邑。觀世寧兄弟安便無事。還入城中者亦多。三醫司與各司書吏典僕。及雜色之類。皆服事於賊。出市交易。無異平日。日與賊徒杯酒相邀。賭博爲戱。尤可痛憤者。 大駕纔出國門。兇賊未入之前。都中之人爭入內帑。府庫之物互相奪取。三闕及六部大小公廨。一時衝火烟焰漲天。彌月不絶。原其設心。不啻慘於兇賊之利刃。甚可畏也。及天兵渡江。掃殲平壤之賊。賊徒自知勢窮。將欲退去。盡閉四門。獨開崇禮一門。乘夜焚蕩。驅其都人之老少而盡殺之。都人之得免者無幾。而其中僥倖脫身者。反爲變其邪說。以爲前日之留都不去者。姑待我兵之來。欲爲內應而然也。民情之反覆難測。其可畏又如此。
野人凡毛物進上之時。必看品於所屬邊將。邊將隨其多寡之數。各有徵取。名之曰上納人情。及到京城各該曹與政院下吏。亦皆有人情之物。萬曆丁丑冬余出刺楊州。余之子弟與下去野人。遇於路而同行。問曰汝之進上幾許。而受賞某物乎。野人曰。我之貂皮極好。初意望其得職。只受賞布而還矣。答曰。何以不得受職乎。答曰。人情不足故也。他人則皆給而未給承旨。故未得受職也。此言必指政院之下吏而發也。然邊將者。親受看品人情。故彼於各司之人情。皆以爲官員受之。噫我國人情之弊。其害及於遠人。而辱言遂至於朝廷近侍之列。痛哉。
成廟朝孫舜孝恩寵最隆。出爲關東方伯。一日入京肅拜。 成廟御便殿。引見賜酒。接語從容良久罷。舜孝卽日下直還去。兩司論其以藩臣未有召命。擅自上京。請罷其職。以懲無禮之罪。 成廟引兩司於便殿。而賜酒問曰。久離榻前。思戀其主。來見而去。人臣至情。而如是論之。罪之輕重。予未及知。須詳之。兩司踧踖而退。
順懷世子時。師傅賓僚之進見者。皆不稱臣。新授之員謝恩於東宮。不書臣字。非獨順懷然也。 仁廟在東宮之時。其禮亦然。凡春坊之官不曰東宮之臣。而謂之宮僚。蓋上有君父。國無二尊故也。今於蕩敗之初。執政者不究 祖宗累朝遵行之規。只據五禮儀稱臣之文。遽變其禮。凡進見之員必爲稱臣。謝恩單子及文書之間。皆書臣字。蓋己卯諸賢。講求禮文。靡有墜廢。非不知五禮儀稱臣之文。而其時不書臣字。其於改定論議必有成說。而今未得見。豈非恨也。
南師古蔚珍人也。累中鄕試能通陰陽諸書。又善於天文望氣之術。朝廷召授東班之職。未陞六品而卒於京邸。嘗曰。原州東南有王氣。人皆不信。至壬辰之夏。光海君爲王世子。然後其言乃驗。蓋恭嬪父母及先世所居。原州之東南一舍之地孫伊谷也。而其墳俱在其處。至是人始服其術之精也。
燕山荒亂之極。朴元宗成希顏柳順汀三大將。以異姓之卿。行伊霍之事。廢狂立聖。以成 中廟四十年太平之治。勳在社稷。功垂後世。三人之中。成希顏尤以文臣。取重於世。然希顏取燕山後宮。畜室而率居。噫君者天也。天可逃乎。所事之君將至亡國。則雖爲宗社。不得不已。而其於一身。乃萬古不幸之大變也。反取後宮而畜。是可忍也。孰不可忍也。希顏所成之功。不啻毫末。而所負之惡。塞乎天壤。與此等輩。可與事君也哉。彼哉彼哉。
龍灣一江相隔如帶。自此以西。語音不通。有似聾瞽。雖尋常說話。必憑舌官。遼東本高句麗之地。至唐貞觀末年。入於中國。其前必能爲我國之言。是知我國非不能華語也。習於所尙而然也。
深河驛之西。馬坡河之東。有渝關。乃宋與遼金相爭之地。金得之則鐵馬堅甲可長驅。宋失之則平灤等州不能守也。人言始皇使蒙恬築長城。以渝關爲限。是大不然。非但無城基可見。亦非作關限隔之處也。三汊河東謂之遼東。自渝關至三汊河。幾八百餘里。若至於渝關。則史氏必不曰起臨洮至遼東也。觀其形勢。參以己意。蒙恬之時。以石門嶺爲界。恐無疑也。或曰始皇一登鮑車之後。扶蘇見殺蒙恬伏劍。功未奏而害已至。渝關石嶺。想亦當時之未及畢也。余曰。史記及諸書俱無撤役之言。而趙高之殺蒙恬也。猶以告功不時爲罪。至於二世之末年。猶且發閭左之民。赴漁陽之戍。則安有役之未畢於當時乎。或者又曰。始皇之荼毒生靈極矣。而至于今賴之。若其有道守在四夷。則城之有無不必問也。如或不能長治。至於搶攘。則三里之城七里之郭。猶當謹守以禦暴客。況化外天驕之桀驁。豈無攘斥設驗。而爲關防之道乎。勞一時之人而安萬世之民。不可謂之非天意也。始皇雖暴戾之甚。豈能違天而成此巨役乎。其言近理。姑存之。
金安老廢黜居于豐德郡。閔壽千赴京而還。歷見安老而謂之曰。以令公之才華。年且未暮。不欲還朝。而終於此地乎。安老促席而密語曰。豈無還朝之意。但未得其路耳。閔曰當今三許兩沈共執國論。若此人等援之。則還朝甚不難也。謂許沆許洽許確沈彥慶沈彥光也。安老曰三許兩沈之欲爲者何事歟。曰欲雪己卯諸賢之冤矣。安老審知朝論所向。自此之後凡見人。必大言己卯之冤不可不雪之意。乃曰。我若還朝。則豈可如此媕婀度日而已乎。許等聞之。以爲與己意思一般。可以憑仗成事。欲爲援之。而難於爲名。安老之子延城尉。 仁廟之妹夫也。托以輔翼東宮爲言。而力援之。安老入朝。反其前言。益構己卯之賢。許沈等旣入其黨。反爲所使。或爲鷹犬或爲爪牙。朝綱濁亂。國勢將危。幸賴泰運方開。奸臣伏罪。三許兩沈或黜或斬。而壽千亦被追奪之律。小人投隙干進之幾。其初甚微。而同惡相濟之禍。至於此。可畏之甚也。
牧隱偶題詩。一云。玄陵將相幾人存。壁上圖形亦已昏。多病牧老頻仕已至今經濟獨松軒。一云。松軒忠義薄雲天。漢縫唐梁與比肩。欲識太平眞氣像。閉門高枕得安眠。一云。安眠喜我已無爲。浮世功名絶不思。只恨多生餘習在。時時遇興卽題詩。
牧隱自詠詩。一云。老翁身似晏嬰長。舍瑟還同點也狂。縱得乞歸何處去。桃花流水渺茫茫。一云。子思當日作中庸。極口稱揚乃祖風。世美韓山文字耳。只今詩句尙難工。
牧隱室人詩云。少年遊宦各天涯。夢裡相逢話所思。今日那知是前日。縱然心喜又心疑。卽事詩云。田字窓臨口字庭。炊烟朝暮鎖虛廳。出門可是舒長嘯。滿眼冠山分外靑。
佔畢齋過寧海府。有懷牧隱三絶。一云。無價庭中和氏璧。觀魚臺下北溟鯤。自從擺袖遊燕薊。雲夢區區不足呑。一云滄海東頭不識儒。千年間氣只塊蘇。先生一出爲人瑞。從此丹陽草木枯。一云。師友淵源絶後前。靑邱人物盡陶甄。如今始過軒渠地。恨不同時執一鞭。
高麗恭讓王時。王昉趙胖還自大明曰。禮部召臣等語之曰。爾國人有坡平君尹彝。中郞將李初。來訴于帝言。高麗李侍中立王瑤。瑤非宗室。乃姻親也。瑤與李侍中動兵。將危上國。宰相李穡等以爲不可。卽皆誅竄。其在貶宰相等。遣我來告 天子。仍請動天下兵來討。乃出彝初所記姓名以視之。臺諫鞫彝初之黨。繫李穡等于淸州獄。遣門下評事尹虎等鞫之。諸囚皆不服。忽雷雨大作。前川瀑漲。毀南門直衝北門。城中水深丈餘。漂沒官舍民居殆盡。客館門前有鴨脚樹數十株。獄官蒼黃攀樹以免。事聞。王下敎釋之。權陽村有詩云。流言不幸及周公。忽有嘉禾偃大風。聞道西原洪水漲。始知天道古今同。
金子粹韓山題詠云。東國文章集大成。稼亭父子冠群英。山川孕秀今猶古。且問何人繼姓名。趙啓生次其詩云。山傍熊津疊嶂成。終敎李氏稟其英。自從父子登科後。天下皆知此邑名。
食葉蠶聲。綠樹陰中洒秋雨。彈綿弓響。白雲堆裡動春雷。世傳魚無迹之詞也。今雖不能詳其是否。而眞有聲之活畫也。
世傳。耕牛無宿草。倉鼠有餘糧。萬事分前定。浮生空自忙。是不知爲何人之詩。亦可爲貪戀營營不守分者之戒也。
麗末詩僧禪坦。曉過松京東城門外。聞鷄聲有詩。其末聯云。千村萬落同昏夢。斷尾雄鷄不失時。斷尾坦自比。歎其國家之將亡。而衆人不能知也。
趙進士昱。字景陽號葆眞菴。晩節卜築於龍門山下。亦稱龍門居士。能文淸節一世之高士也。朝廷特擧爲報恩縣監。赴任未久。卽謝病而還。嘗訪原城盧處士不遇。有詩云。慶莊川上日斜時。立馬門前問牧兒。報道主人京洛去。一天風月恨無詩。
先祖良景公種善。牧隱之季子。墓在韓山牧隱墓下。公之孫坡。在 成廟朝。於尹妃廢死之時。爲禮曹判書。燕山追罪其時宰執與言官。坡見剖棺。公亦緣坐。夷其墓而平之。 中廟反正之後。久未起墳。左議政李惟淸。良景之兄種學之曾孫。乃從孫親也。一日之早馳到京家。問於余之曾祖奉化名長潤公曰。夢有毅然大人謂曰。家破雨漏。子孫力薄不能修改。門中惟君可以成之。望須顧念。覺來不覺汗沾背也。門中必有經變未遑之事。敢來探稟矣。奉化歷陳良景之墓。平土之後年久未復之由。相公大驚。遂與助力加土成墳。
燕山弘治戊午。史禍大起。金馹孫等殺死之後。燕山以爲旣失名文之士。當得其代。遂大擧聚會儒生於京城而試取之。殿試乃策一道也。科次之際。有一券措語拙澁。執筆官欲置次等。上考官以爲可入於三下。執筆官不肯。上官强之。參考諸官以爲。若置入格之類。則必登科榜。固不可也。互相爭勝。上考官强令必書三下。執筆官乘憤揮筆。橫抹三畫直下一畫。打點而出之。其實乃二下也。畢考後分等書啓。燕山落點於二等。雄文傑筆其在三上者皆見屈。只取金克成等六人。誤書二下。橫城訓導吳希曾也。乃得居末。豈非命乎。
鄭紹宗幼少時。夢有老翁書紹宗掌心云。禹跡山川外。虞庭鳥獸間。紹宗記之不忘。至燕山甲子冬別擧殿試。七言律詩。春放梨園閑閱放樂。乃燕山親題也。紹宗忽思少時夢中老人之句。各加二字而演成長句云。春濃禹跡山川外。樂奏虞庭鳥獸間。金慕齋以考官入參。上考官將置下列。慕齋以爲此實鬼神之語也。大加稱歎。遂置上等。崔世節通計他詩而居魁。紹宗居第四。改榜之後紹宗以恩門往謁。慕齋問其詩思之及此。紹宗因悉少時夢中之事。慕齋益加驚歎。藻鑑之名。自此始著。
安相公瑭。平生好食鼈。有時求諸三江之漁夫。亦有聞公之所嗜而來獻。公之未發禍之前。有小鼈如銅錢。於廡下抹樓及內外庭中。散行無數。不能盡除。置甕於庭中。拾而投之。滿則負甕放之於江。纔及周年。公之子處謙被誣而誅。公亦緣坐而死。禍之生非由鼈。而是亦鼇妖也。其家在昭格洞。武科李承宗所居。而壬辰之亂爲倭奴所焚。
武科趙賢範。爲慶州府尹。廚朝夕所供。乃鼈湯。而亦公之所嗜也。漁人至三四日闕獻。廚吏告于公。發文催促。然後持三大鼈而來。公使之連索封頂。授廚吏將爲明日之供。其夜夢之。有着枷三囚。同狀而訴曰。當初吾類寔繁。本無罪過而逐日被殺。迄于今三十餘年。而吾三人亦爲被囚。投伏於北廳抹樓之下。明府幸恕之。公旣覺卽招刑吏。自門隙問曰。同罪而被囚者某某歟。刑吏曰。囚徒中本無同罪之人矣。公招廚吏問三鼈所在。廚吏曰。置之官廳庫中而無之。今不知去處。公使之探諸北廳抹樓下。則封三鼈果在其下。公大驚怪之。卽發健差馳往漁人之處。今後勿復獵鼈。雖有所得。並令放之。其在官三鼈。公親往放江。自此不復食鼈。
尹茂朱鳴殷。家在興仁門內東學近處。門庭有老槐樹焉。鳴殷未筮仕時。嘗徒步往射亭友人家。過飮泥醉。乘昏獨還。倒臥路上。及覺擧頭望之。月落參橫。悄無人聲。但見有一丈夫坐於臥側。鳴殷不敢問姓名。沈困未蘇。慢步而歸。丈夫隨後而來。路逢一人與丈夫相語。問曰。何所往歟。丈夫曰。主人夜深未還。故往而迎之矣。至家槐樹下顧之不見。始知丈夫。乃庭中槐樹之神也。
萬曆丙戌冬。驪江漁夫鑿氷得一鯉魚。其大數尺。負而還家。其夜魚夢於主人曰。幸須見放。勿爲致害。主人怪之。不能烹而賣於隣人。隣人之夢亦如之。隣人不放。竟斫而烹之。其嘗一盃之羹者。無不臥痛。至於六七日然後始起。噫。若魚之神。能告急於漁者之夢。而不能避氷下之叉。又能致疾於食羹之人。而不能免饞者之烹。無乃神有所窮。智有不及而然耶。傷哉。
松江寺石碑有詩云。秘記相傳九百年。前人已去後人遷。三都白日來狐兔。五部靑春醉管絃。木落神嵩寒泣雨。草生宮苑曉生烟。皇恩寬宥深如海。坐使三韓再得全。石碑之有詩久矣。而發於今日。未知爲何人之詩也。甚可怪哉。
全羅監司啓本。光陽縣監牒呈。自前以來鐵塚稱名處有之。開見則無鐵物。但有誌石刻字云。東距十五里許有黃金塚。得之則其利萬倍。但子陵父。奴陵主。下陵上。僧亦笠。僧行俗事俗行僧事。儒生棄笔硯。織女棄機杼。農夫棄耒耟。壬辰國三分。癸巳還定。午未太平。入頭流山避亂第一。湖西少安。驪江血肉之地。還都漢陽當周八百。唐兵渡臨津。則加周二百云。蓋天之愛人至矣。非不欲常安而保全之。惟其感於人事之得失。氣數之消息。雖或至於衰亂。是豈天之本心哉。今以此說觀之。則國家治亂興亡。皆由於一定之數。天亦無可奈何。而抑不能容人力於其間耶。可怪之甚也。
世傳有人題一絶於人之門壁而過者。其詩云。我是新羅末葉人。年將八百又三春。行忙雨濕歸程遠。不與高門談笑然。人言崔致遠。作地仙入伽倻山。至今猶存。此必孤雲之詩也。以余觀之。天葩奎英之洒落。必不如是之朽俗。況孤雲之至今猶存。固未可信也。是不過狂童之一戱吟矣。
中廟朝正德年間。院驛壁上有題二絶。一云。風雨驚前日。文明負此時。孤笻遊宇宙。嫌鬧並休詩。一云。鳥窺頹院穴。僧汲夕陽泉。天地爲家客。乾坤何處邊。世傳鄭校理希良。在燕山朝知有甲子之禍。脫身而去。或云投江而死。或云托緇雲遊。此乃希良之詩也。今雖未見其信否。而亦必避亂遁世者之辭乎。
先祖稼亭年三十六。入元朝登制科二甲。前此東人未有登二甲者。爲華人之所稱。牧隱年二十七。就試制科。考官歐陽公大加歎美。欲置於魁。時議以外國人難之。屈置第二甲第二人。牧隱嘗言吾父子登科中國。天下皆知東國。之有韓山也。其詩云。自從父子登科後。天下皆知此邑名者。是也。
原州興原站。乃倭人水路往來之處也。站居水夫李一貞。私奴元有功等。能通倭語。與倭輩相厚。余招一貞問曰。倭之入寇之由。汝於平日已先知乎。答曰豈不知乎。歲在己丑之春。監司丁胤禧遞去。都事安重吉從行而來。監司乘船流下。都事姑留。其時倭使平調淵向京到泊。將食于站亭。以饌飯與酒肴不如式。結縛下人倒地。都事聞之。捉去鄕通事。使倭大怒曰。官員各有所掌之事。吾輩所食。乃會計減錄之物。非都事所可干也。吾欲如式。而都事之出位侵陵如此。遂推案不食。招我與有功。揮劍辟左右謂曰。我國之欲害汝國。非由我也。專由汝國之多失也。我國造船鑄劍。爲長驅之計今已三十餘年矣。明年國王使出來。則必於三四年之內。當大擧入來。國王使之來。多請鷹犬與雜物。皆探試汝國之深淺也。我國用刑。非如汝國之笞杖。若或失誤。則卽以小環刀。斷頭盛盤而示衆。故各自力戰。汝國萬無枝梧之理。汝等若聞大兵渡海。宜深避於吾輩未能往之處可也。我國之人有善者有惡者。如逢善者。使之隱避而不害。若逢惡者。則見卽殺之。吾非虛語而爲汝等情言也。小人與有功。雖不信其言。亦不能無疑於其間。一日告其語於牧使金纘光。牧使叱之曰。汝何妄言乎。彼雖有言。必不肯來。雖或入來。豈能當我國之兵甲乎。愼勿更發。其年國王使出來。求其鷹犬。往來一路多凌侮之氣。至第四年壬辰。賊兵渡海。處處焚掠。而賊類或有喜殺者。或有不殺者。一如平調淵之言。始信當初不我欺也。
咸鏡一道緣於野人。且有藩胡。朝廷自前以防戍爲重。南北兵使與北道大小守令。皆例以武夫差遣。加以朝廷絶遠。無所畏忌。爲守令者。專以箕斂酷刑爲事。而視民如土芥。民亦以晝賊目其守令。而視之如仇讎。間或擇遣文官稱望者絶少。有一北道村氓。初赴京城者。入自東小門至成均館前路。謂其伴曰此何郡府邑居。官舍之高爽如是乎。其伴曰汝不知乎。此非邑居。乃朝廷聚會晝賊而長秧之處。此言雖過於憤激。其情可矜。而聞之亦可怪矣。
箕子自中國率儒學禮樂。及技藝百工三千餘人。凡商家文物盡捲而東。都于平壤。初至。雎盱被髮。語音不通。畫地成字。始得通情。敎之以簠簋以食。籩豆以祭。生者有養。死者有葬。男婚女嫁。亦皆有禮。設八條之敎。興仁義之化。化盜爲良。變夷爲華。井田遺制。宛然猶存。至今千有餘年。東民之知三綱五常之德。存君臣父子之道。而得免於禽獸者。皆箕子之化也。雖家家尸以祝之豆以觴之。猶未足以報其德乎。
天有十日。人有十等。上自公卿下至輿臺。尊卑之序貴賤之分。天經地義固不可紊也。至於我國公私賤之法。實非聖王之政。均是同胞之民。而勒爲臧獲。拘以世傳。陷之賤類。不齒士族。甚無謂也。然箕子以三仁之聖。自中國而來。立中國所無之法。豈無所以然哉。蓋東方山形地勢。迂曲而險阻。人心習尙。剛偏巧黠。莫肯從令。反覆難制。非可朝令而夕禁。亦不可草雉而懲惡。故如奸盜賊贓之類。沒爲其家奴婢。使各統攝。以興於變之化。以致外戶不閉之盛。自此以後遂爲東方之赫世不易之大法。家家有君臣之義。人人知上下之分。國之逆臣。家之叛奴。與之同律。至今數千餘年遵守不變。禮讓之厚。刑政之美。非他外國之所可及者。故中國之人皆以禮義之邦稱之。或以小中華目之。此不同道而歸于治也。今有欲爲改絃易轍。變而通之。一如中國之制者。殊不知政由俗革。因俗成化之義。而適足爲大亂而已。必不可行也。
我國人心風俗之巧黠難化。必以湖南爲首。此非有德之言。若濟之以德。安有不化之人哉。但以南方尋常之物觀之。山蔬野蔌之味。溪漁園果之形。皆與東北不同。而鳥鵲之鳴鷄狗之聲。皆促高而且急。家畜之猪赤色者多。猫皆陰班靑灰。而白黑金班者絶無。道內皆然。物色之有異於他方如此。甚可怪也。
偶閱兩山所錄。盜跖之言曰。盜亦有道。妄意室中之藏聖也知可否。智也。入先勇也。出後義也。分均仁也。不存五者之道而能大盜者。天下未嘗有也。富翁之言曰。欲爲富先去五賊。不去五賊而能成大富。天下未嘗有也。所謂五賊。仁義禮智信也。盜者欲存五者之道。以成其盜。富者則以五者爲賊而必去之。以成其富。然則今之大富者。其甚於古之大盜者歟。陳公諷世之意至矣。陽貨所謂爲富不仁者。亦其一也。噫。中原永平府七家嶺之西五里許。高峯之上有墓若堂。塋域宛然。問於譯者。此何山而誰氏之墓歟。答曰幻爺山。曰幻爺之意何歟。昔有人生子不順。言東則向西。問北則指南。使之採薪則必負石而來。使之取水則必束火而至。其父病且死。謂其子曰。必葬我於高峰之上。蓋其意使之葬於平地。則必於高峯。故使之葬於高峯者。欲得便下藏風之地也。其子曰。臨死之言不可不從。葬之此處。行路之人至今言之。生前死後。無非變幻其父之志。此山之所以得名也。此與古之狼子。從其將絶之言。葬父於水中。築沙爲塋者一也。豈非不順子之戒乎。
古之明王。必愼守贓法不少饒貸。贓法不嚴而能保其國家者。未之有也。漢之光武。寬仁之主也。雖惻然於數千學徒守闕號哀。終不貸歐陽歙之罪。而竟死獄中。非獨光武然也。唐宋諸君之稍知治道者。亦莫不然。在我 祖宗之世。朝廷淸明。私邪不行。此 英成兩朝之治。後世不能及也。至于 中廟之初。雖經燕山昏亂之後。國家典章猶存。公議未泯。士夫之貪汙被譏者。皆不得側跡於朝著之間。而私用咨文紙一幅者。未免爲終身之累。其爲法禁之嚴可知矣。自六七年以來。權奸繼踵。紀律蕩然。貪婪之習。日以益盛。見棄公議。受人指點者。昂昂呼唱。從他笑罵。無復愧恥。非徒不爲擧法。反與之相效而從臾之也。如此而民生之不困。宗社之不亡。豈理也哉。
帝王之法。皆本於人情。必原於人情。而順於天理。然後不悖於行而無譏於後世矣。我國之法。其不可曉者有二焉。女之貞潔。雖極可奬。而年少寡女一切禁錮。改家之子。論以淫產。是果近於人情乎。宦者爲物。非男非女。朽腐凶穢實非人類。而娶妻居室。有同平人。妻或不謹。罪以失行。是合於天理乎。違情悖理莫過於此。恐非聖人之法也。
春亭卞季良。過崔瑩墓詩云。奮威匡國鬢星星。學語街童盡識名。一片壯心應不死。千秋永與太山橫。
麗氏之朝。惟以恤民爲重。以郞將等不習民事不治道。不授親民之官。雖以巨濟在海中倭奴初程。猶以文官之初陞六品者差送。李奎報作序以別。其文載於東文選。今可見矣。至忠烈王朝。因郞將等之訴。始有擇而交差之議。然而郞將之爲守令者亦罕。是時武擧所取只四人而已。此其五百年間。黎民安業。旣庶且富。列邑官庫亦得以充牣矣。我朝自 祖宗以來。亦有武弁勿差內地之令。而 靖陵中年以後。權奸繼踵。樂其苞苴。忽於防備。多以親厚年少武官。差授饒邑。恃勢縱恣。悅人肥己。無所不至。民心怨叛。而邦本病矣。
王宮法殿南向。聽治朝饗之正位。故政府樞府六曹諸省。皆列光化門之外。在東者西其向。在西者東其向。非徒公府然也。士大夫私居之室。其廳事則皆或東或西。而不敢南向者。雖處家之時。不得僭分而面南也。都中故家世族之室。碁布星羅。皆是北向。及 中廟朝以後。紀法漸解。人心日奢。犯分踰禮之事無有紀極。則家舍所向之南北。不暇問也。可見世道之漸降而人心之不古若也。
祖宗朝。惟 大殿及東宮嬪。則收取士大夫年歲單子。使之入闕而選擇。此外雖大君之妻。或令尙宮或令監察可氏。就其閭閻本家擇而議定。至于今 上朝。孼庶諸君之妻。亦皆收其單子。使之詣闕親自擇之。非徒失其先王世守之家法。僭分越禮之禍。亦自此始矣。
中國乃文明之地也。九州之外。國於四海之陬者。各有其號。南謂之蠻。蠻從蟲也。西謂之羗。羗從羊也。北謂之狄。狄從犬也。惟吾東方獨謂之夷。夷從弓從大。乃大弓也。言其善於弓矢而能射也。箕子之所封。俗仁而壽。有君不如之稱。夫子之欲居是也。且其竹箭矢栝。雖中國之廣。獨於荊州之衡山有之。而他州無有。故中國之人皆以木爲箭。我國則只於北方不生。而各道皆產焉。弓矢之勁利。士馬之驍健。乃天之所命也。隋煬唐宗。擧天下之兵而來。猶不能得意而去。今之見敗於倭奴。而莫敢枝梧者。非弓矢之才不古若也。只緣人心之離叛已久。而諸將之望風奔潰。不能進故也。痛惋痛惋。
天下之廣。風氣不齊。而習尙不同。故其禦侮戰陳之具。亦隨方各異。中國有中國之技。夷狄有夷狄之技。春秋列國。如秦楚之堅甲利刃。齊晉之旗旄劍戰。韓魏之廣輪韅靷。燕趙之鉤棘長鍛是也。勁弓强弩發無不中。我國之長技。妙於砲丸。慣於鎗劍。倭奴之長技也。善用兵者。諱我之長。誘彼所短。耀我之短。挫彼所長。奇正相乘。因敵制勝。此孫武三駟之法也。若厭我之舊。慕彼之新。則邯鄲之步。其可達乎。益習我長。兼彼所能。固無不可。然以余觀之。兩軍交緩。風馳電擊。追雲逐雨。不可呼吸。當此之時。進退揮槍之術。俯仰弄劍之法。必無所施。只可學鳥銃。而他不必效之也。
慈山公嘗戒子女曰。勤於自己之事。而懦於他人之役者。人情同然。藏獲之輩自少至老。逐日所役者無非他人之事。豈能事事致勤乎。汝輩但恕護。勿多詬怒也。聞者以爲名言。
鄭文翼公。在己卯年間爲首相。 中廟因災異延訪于思政殿。左右秩進。各陳弭災之策。韓忠進曰。 聖上雖勵精求治。鄙夫敢據首相之位。災變之作。必有所由。而治道之成。不可望矣。及退賓廳。右相申用漑作色大言曰。新進之士面斥相臣。此習不可長也。公顏色自若。揮手止之曰。渠知吾輩之不怒。發此言也。若少有忌憚。雖勸之必不肯也。於吾固無所害。而年少敢言之風。不宜摧抑之也。用漑服其言。而聞者以爲有大臣之量。
鄭文翼公。當淸流將設賢良科也。三司亦幷請之。公獨以爲不可曰。賢良之名雖善。在三代之下。固不可爲也。 中廟不聽。及諸賢斥死之後。所立善政。一切反之。擧朝請罷賢良科。公亦以爲不可罷也。 中廟謂公曰。設科之初。擧朝皆以爲可。而卿獨以爲不可設也。今之將罷。皆以爲當罷。而卿亦獨以爲不可罷也。卿之所見。每與時議相反何歟。公對曰。臣於當初。固言其不可爲。今旣設科給牌除職。安可罷乎。一設一罷。國家政令。不宜如是顚倒也。 中廟亦不聽。公之所言。雖未見施於前後。而直截難拔之氣。直無愧於古之大臣者矣。
崔錦山克成扶安人也。少孤事母色養。出身之後專以便養爲務。不喜進取。其母得病沈痼經年。百藥無效。醫云得燕肉餌可以見效。時方寒冱。四面雪塞。坐而假寐。憂慮轉輾。夜半便旋出門。有物打胸。公遽以手捫之。乃燕也。卽以和藥。宿疾忽愈。鄕隣莫不驚歎以爲孝感所致。此乃克成之侄謂之所傳。或云克成之兄必成。因其父病瘧。致蝙蝠自來取效之事也。
原州西南一舍之外。有仇破村。流民夫妻來居數年矣。嘉靖甲寅之冬至月之夜。惡虎破門而入。攬殺其夫。其妻出門號召。四隣無一人應聲者。虎曳其夫而去。其妻抱持夫腰。同出籬隙。以手搏虎曰。汝旣殺吾夫。屍則不可持去也。與虎終夜相鬪。虎或進或退。天將明乃棄去。其妻聚會隣人。依例葬埋。傾財奠酹之後隻影獨居。此女之所行。不下於古之烈婦。而隣保不告官府。故褒賞不及。而其從之來所往之處。皆莫知也。
通川郡邑內有窮民。冬月所着只破絮故褐而已。牽牛刈柴于楸池嶺之下。適其日風雪甚嚴。將暮所牽之牛空鞍獨返。其妻驚惶。意其爲惡獸所害。奔往尋之。至于中臺之路。其夫凍傷僵臥雪上。不成人事。其妻卽解衣合胷抱臥。庶望復蘇。而妻亦衣薄。騈首而死。翌朝在家二三小兒匍匐而往。呱呱於屍傍。聞者無不揮淚。郡守李應麟大加矜憐。牒於方伯。申之朝廷。恤其孤而復其家。事在萬曆癸未年間也。
金參判思齋。乃慕齋先生之弟也。爲海西方伯之日。民有告其子揮打致辱者。公卽發差拿致於庭。使之上堦而親問之。詬辱之狀。大槪已著。公大怒推案而立曰汝犯常刑。必死無赦。因言父母鞫養。罔極之難報。國家憲章。至嚴之可畏。恩如此法如此。汝何背恩而蔑法乎。其人若有愧色。叩頭而謝曰。村野之氓。有何知識。自幼及長。長在膝下。惟知親愛爾汝之成習。不思尊敬嚴畏之可憚。言談動止之間。抗詰乖悖之事。固已多矣。而今以後始知天倫之尊。國法之嚴矣。公飜然曰。此人自言無知犯法。且有服義悔罪之誠。安忍殺之。此而可殺非法義也。其人後卒爲孝子。此乃王奐不罰陳元而化之之意也。
臨瀛軍士三人。忘其姓名。萬曆丙戌年間。以哨官戍留塞北。適癘氣大熾。三人相次而病。先者未起。後者復臥。再三染痛。最後一卒竟至於死。兩卒相謂曰。吾三人以同土之人。同赴千里。同臥一幕。同病相救。遞相爲命。渠獨不幸。殞于絶域。生而同來。死而棄歸。吾等情理。實所難忍。遂各脫所着之衣。斂葬於戍幕之後。及其罷戍而還。兩人相遞負之。間關遠路。粮絶足繭。十生九死。彌月始返。其父旣痛其子之死。又感負來之恩。葬埋之後略備酒果。欲邀兩人而致謝。兩人終不肯曰。吾等非有所爲而爲也。若受一飯之恩。則當初相恤之意歸於虛地。竟不往也。上舍咸始和。見余言之如此。
慕齋先生好學樂善。爲己卯諸賢之領袖。平生爲學。以誠爲主。處事端的。不爲苟簡。諸賢斥死之後。公亦罷官退居于驪興之梨湖。構亭數椽。名以泛槎。二十年處約之中。專以訓掖陶甄爲務。諸生之執經問難者。自遠而至。凡於大小歌詠見物寓興。無非思君戀國之情。晩節還朝。遂典文衡。事大交隣之書。皆出其手。起草之時獨入書室。閉戶謝客。團誠究思。呻吟累日然後脫藁。故其文典雅明快。見稱於中朝。後之繼其任者。非徒學力不逮。無至誠爲國之心。以莫大 天朝表奏之製。置之於尋常輕忽之間。所以人材日下。而文不古若也。
鄭文翼公爲群小所搆。罷黜于懷德縣。朝夕甘滑有所未具。一日官人獵於前山。脫死之鹿。投入於公之所寓之籬。子弟等以爲天賜。而共逐捕之。設饌進之。主倅聞之以爲。罪人偸食進上之物。亦有罪也。發差徵之。立門督促。旣不能山行而得之。又不能貿之於場市。擧家遑遑。莫知所爲。適公之親族作宰於隣邑者。偶送一肩。從其所持之人。納之於官而解其怒。及公還朝。朝廷聞之。斥黜其倅。公以爲門蔭之怵於權勢。而亦出偶然。非其情也。不宜深責。力護復敍而終不得也。
鄭文翼公。蓍龜德望。蓋於一世。而安老特惡之。其遷改禧陵。專爲殺公而發也。擧朝爭之請置重典。 中廟聚會群臣於闕庭。各獻議。一二臣外皆曰可殺。 中廟特原之。遠竄于金海府。府與東萊郡接境。乃公之本貫而始祖墓在焉。公略備酒果。令子弟往而拜掃。時武夫爲縣令者聞之。欲取媚於安老。乃大言曰。鄭某以罪謫居。是乃庶人。只可祭其考妣而已。豈可遣其子弟。祭遠祖於越境之地乎。多發健卒。擧杖驅逐。使不得接跡。公之子弟等。在境上望而祭之。而縣令以鄕所等。與罪人同心容護子弟。其罪亦重。構以他事。送關於京在所請遞其任。其冬安老被死。公乃還朝。復爲京所堂上。而縣令之論關猶在。公以爲城主關文。不可久滯。卽令從其所指而遞送。縣令之奸譎。有甚於懷德之倅。而公略無辭色。子弟等亦不發言。故朝廷不能聞知。至於改品陞職。終保爵祿。公之盛德。眞不可及也。
田霖國朝名將也。稟性果敢。過於剛忍。然淸節冠世。博通經史。少時與二三同志。上寺讀宋史至秦檜矯詔班師。憤忿不能自已。持弓矢推窓而出。令沙彌脫其所着之巾。掛之沙門之上。彎弓引滿。連貫兩矢。還入而坐曰。今破檜賊之腦。庶可快活矣。其忠憤疾惡。因此可見。
思齋先生。又有寄黃書云。君之營作不輟之言。僕在京師聞之。果若人言。不如停之。靜處以順天耳。人生世間。稀年爲上壽。假令吾與君得享上壽。所餘不過十稔有零。何故勞心。以取呶呶者之詬乎。僕二十年處約之中。營屋數椽。產業數畝。冬絮夏葛各數件。臥外有餘地。身邊有餘衣。鉢底有餘食。挾此三餘。高臥一世。雖廣廈千間。玉粒萬鍾。綺紈百襲。視同腐鼠。恢恢乎處此一身而有裕。聞君之衣食第宅。百倍於吾。豈可更不知止。以畜無用之物乎。所不可闕者。惟書一架。琴一張。友一四。履一雙。迎睡一枕。納涼一窓。負暄一楹。煎茶一爐。扶老一笻。尋春一驢耳。此二五雖煩不可廢一。送了老境。此外何求。驅馳困苦之中。每念邱壑二五滋味。不覺歸興飛動。抽身無術。奈何奈何。惟吾知己亮之。
申企齋。於正德己卯爲大司成。尙相公震。以上齋色掌出入於明倫堂。及群賢斥死。公亦貶爲悉直府使。因罷黜。退去中原之達川二十年。尙公己卯冬登第。至嘉靖丁酉金安老被罪。戊戌春公還朝。復爲大司成。尙公時爲戶曹參判。相遇於道。驅軺至公之馬首而謂公曰。令公不識我乎。我乃己卯色掌生員尙震也。公曰其然乎。今若不言楚澤餘生。豈能記其舊時之面目乎。遂相揖而去。宦路飜覆自古猶然。積薪之喩不亦宜乎。
祖宗朝爲官擇人。雖尋常百執事。皆得其可合者。故無遺賢曠職之患。 光廟以後尙功不尙德。然至於大除拜。則猶不敢輕易授之。 中廟之初。雖經燕山昏亂之後。必擇一時之人望。其時相位有闕。合會衆坐之處。有言其誰可爲相者。申公用漑默數良久。顧謂文翼公曰。朝臣無如叔者。叔必陞矣。文翼果陞。用漑文翼之族侄也。其後一相又闕。亦有問之如初者。用漑良久不答。徐自語曰。無如我者。我必不免。用漑亦陞。此可見難愼必擇之意也。近世以來雖有卜相之名。而無卜相之實。惟以職品當次。有若尋常窼闕者然。他可知矣。
叛逆天下之大惡。不容於天地之間。先發告變論功者。重賞雖分茅裂土。在法當然。未爲不可。至於推鞫之官。只因各人招辭。盤問歸一啓稟定罪而已。未見有勳勞之可錄也。若以推官之善於鉤深摘隱爲功。則如今之顯然無可疑者。在所不論。若後世不幸。有涉於疑似難明。而被誣於其間者。豈能望其玉石之辨。而無乃迎於論其賞。無足怪也。近來之事與此不同。賊在於外。而發告亦在於內。爲推官者。只以依例隨參。皆得論功。而金吾獄卒亦以善於用杖。至蒙其賞。其於迂儒之左見。恐非王者蕩蕩平平之政也。
麗朝五百年之久。其萬目雖有不擧。而遵守祖憲。不敢僭分。以家舍一事言之。雖至末葉衰替將亡之時。以林堅味之權寵。辛旽之姦賊。雖極奢華。而不至於宏傑壯麗者。尙忌國法也。我 朝立法尤嚴。上自公卿下至庶人。家舍間閣皆有定制。如或僭濫。則漢城府有時巡檢。撒毀過制之數。余之表叔元上舍之家。在仁王山之下內贍之洞。其爲間數。以今揆之未爲過多。而嘉靖丙申年間。其數外之間屢見撤去。國法之猶存故也。自中葉以來。國不能禁。人不顧忌。雲簷露閣。跨巷越陌。公卿之家。擬諸宮闕。士庶之室。有同公廨。犯分越制。無有紀極。至于壬辰倭賊之難。都城大小廬舍蕩爲灰燼。破瓦殘礎。滿目慘然。物盛而衰。固其變也。
觀象監正李飜身。吾先祖文烈公之庶曾孫。而王父韓城君之從弟也陰陽地理卜筮算數律呂之學。無不通而尤精於天文。其所言皆有徵驗。隆慶年間。嘗過陋止。因與談天。余曰象緯之說。微妙難知。公曰何謂難知。災祥之應。無非感於人事之善惡。氣數之屈伸。昭示甚嚴。少無差謬。但衆人不察耳。余曰慕齋先生嘗言。我國之在天下。猶衿川之在東方。天必不爲衿川而降災祥也。慕齋以失言取譏於士類。此言何歟。公曰。日月之虧蝕。雖謂之如此。猶或可也。至於分野星辰之失度。朝晝雲霧之乖濁。不可歸之他國。甚可畏也。余曰當今象緯之逆順如何。而吉凶之應於後日者。亦如何歟。公顰蹙良久曰。厄會厄會不可言也。余曰所謂厄會者。無乃邊圉作釁。有陷城覆軍之患乎。公曰封疆之地。寧棘無常。或勝或敗何國不然。不可以此謂之厄會也。然則朝廷之上。交構角逐。有打盡士林之禍歟。公曰進退消長搢紳之常事。有國者之所不能免。亦不可以此謂之厄會也。余慘然更難爲言。問曰其驗在於何時歟。答曰天軆至重。積感旣久。其爲示怒不可期以朝夕。近在二十年之外。遠則三十年之內。厄會將迫。固非士夫冒進願立之秋也。余着之心胸而未嘗忘也。至萬曆己丑之獄。其言始驗。壬辰倭賊之亂。 大駕西巡。 廟社邱墟。然後其言益驗矣。天譴之可畏如此。而公之善於推步。今可見也。
中朝科擧之制。雖不可詳。而三年大比之外。絶無別擧之規。且其外方各道初試。則子午卯酉之年。京師會試殿試。則辰戌丑未之歲。年與月日。自 祖宗朝一定之後。雖有國家大故。不爲進退。取人之數亦有前定。至今二百餘年之久。遵守舊規少無撓改。此乃中國非褊小外國之所可及也。
余之萬曆己卯年赴京之日。盧蘇齋相公謂余曰。今乃順天府科擧之年。其規矩節目。幸須詳問而來。余於八月之初到北京。留玉河館二十六日。得見順天府榜目。擧人之數一百三十五人。而第一名馮加遇。直隷柏鄕縣學生也。各以專經懸錄於名下。詩經五十有三。易經三十有九。書經二十有八。春秋則九而禮經六也。其試取之規。令舌官探問於序班。則以爲所屬州府郡縣賓興有數。聚其數而更加沙汰。預於試庭。圍以簟席。各成一間。使不相通。筆硯名楮。及所啖餠茶之物。無不備置。溷器之具。亦爲俱設。試日之曉。一一搜挾。儒生單衣空手而入。對問而出。初場五經及四書疑義。中場則論表等文。終場則對策。皆間二日試之。本月初九日十二日十五日乃三場也。序班言之如此。而有聞於他人。其大槪亦不過如此而已。初擧及會試殿試之規。則無從聞知。可悵也已。
東方科擧取人之制。其在三國。則不必問也。麗朝五百年之久。其始未及詳知。而中葉之後。只有三年一取。三十三人之外更無別科。我 朝亦依前朝。有式年三十三人試取之規。而臨時取擇。或進或退。初無定日。至 英廟朝。右文興學。始爲幸學試製略干人。賜紅牌。自此之後遂成別規。漸至滋蔓。至燕山及 中廟朝。濫觴極矣。至 明廟朝。又有給分赴試通計之規。或直赴會試或直赴殿試。式年之外。或曰別試或曰幸學。或曰庭試。或因事而擧。或援例而設。或春秋而各擧。一月而再擧。或連歲而特設。或一歲而三擧。不告四方。不聚多士。唯以表箋數句。限其日時。名曰燭刻。一日之內便登高科。倖門大開。士皆奔波。抄誦短句。以謀靑紫。而三年大比通經製述之法。漸不如古矣。庭試放榜之後。滿眼皆是搢紳之乳臭。而林下邃學之徒。一不得焉。噫以今觀之。前朝之時科擧甚稀。宜其賢材多漏。而名公巨卿雄文大筆。皆由科目而出。及乎我 朝科擧甚數。宜其賢才之輩出。而才華賢德之士。絶無僅有。而閭閻鄕曲之間彬彬可用者。未免遺漏之歎。科擧愈煩。而士習益偸。人才日下。誠可恨也。
國家用人之道。文武兩科出身之外。生員進士。則以爲選人而用之。孝子順孫與文行之士。則以爲遺逸而擧之。至於吏任可當之人。則該曹因其薦擧試才入格。然後擇而收敍。故族係不明門地卑賤者。不得側於東西班正職之流。至 明廟朝。沈義謙李珥共執國論。托於用賢。始開蔭取之規。唯其所好。隨意登用。 祖宗舊制大變。而仕途漸至混雜矣。今則又因倭賊蕩亂之後。鄕曲寒賤。行伍輿卒。官府之隷。公私之孼。或以義兵。或以軍功。或以納粟。或以戰亡子孫。或以扈從子弟。不問賢愚。隨敍各司。同僚指點。典僕欺侮。上下陵替。事無統攝。衰亡之象。此其一也。
古語之無其實。而只傳其語者。如夜茶時之類是也。殿中之員。俱是臺官。本府不坐之日。臺長之爲城上所者。會諸殿中於某處。只分臺而罷。謂之茶時。言其啜茶而罷也。
祖宗朝。或宰相或下僚。有姦濫掊克貪汙不淸者。則諸殿中。乘夜茶時。於其家近處。數其貪惡。書之白板。掛于門上。以荊棘塞其門。牢封着署而去。其人遂廢錮於世。不復側於衣冠之列。永爲棄物。故逢造次搏擊之患。謂之夜茶時。此言至今猶然。
監察古之殿中御史也。糾檢百僚。必須儉朴自處。然後可以責人之貪婪冒濫而不法者。故麤衣陋色。朴馬破鞍。短帽殘帶。皆知其爲殿中也。其在麗朝雖未詳知。入我 朝百有七十餘年之久。雖貴族子弟有名文士。若爲殿中則其爲服色。遵守舊規不少變。至于 明廟末年間。昇平日久。人心奢侈。厭其陋麤。樂於侈肆。殿中等皆有變改之願。其時沈義謙朴淳朴應男等。執一時之論。遂令從他改之。自此殿中之服色制度。華美鮮明。倍 於侍從之服。古來霜臺舊風。一切掃地。存羊之意無復可見矣。噫改正朔易服色。爲國之大端。而不稟於上不咨於衆。擅自改之。而莫有言者。權臣之縱恣無忌如此。其爲手段眞可畏哉。
養漢的之名盛於中國。而我國則無也。蓋中國之養漢的。特出於恒岱之遺風。初非樂爲禽獸之行。實緣無父母之養。無族屬之托。迫於寒餓。相聚梳洗。爲悅人糊口之計。然各有本夫。而亦有高下輕重之價。夫之所不諾。價之不稱己者。亦不相奸。猶爲彼善於此也。我國雖無養漢的之名。淫風大熾。如路傍官娼不足言也。至於各家私婢閭巷賤女。苟以淫褻爲事者。則不問價之有無人之貴賤。晝夜奔忙。如醉如狂。其不爲河間之婦者幾希。此我國之淫風。有甚於中國也。爲人上而執敎化之權者。其可緩於防禦之策乎。
國俗以大便小便。謂之大馬小馬。余未知此言之緣何事。而出於何時也。偶閱兩山墨談。貴嬪家爲溷器。空其中而穹窿如馬形。背上有穴。據其背而便之。謂之獸子。然後始知其言出於中國。而以遺矢爲見馬者。亦無疑也。我國稱爲馬腰者。亦因獸子而言也。
成廟朝宰相李永垠李坤二人。共奸一娼妓。互相攘奪。言官論罪請罷者累日。 成廟終不允。兩人詣闕自明。相爲歸咎。各自爲是。再三陳 啓。 成廟答曰。自古士大夫相竊妻妾。乃衰世之事也。予不忍置斯世於衰亡。故不 允。臺諫之言。非以卿等爲無罪也。退而省之可也。於此可見當時君臣之間。不啻如父子。而聖主一言。凜然於斧鉞之誅。至哉。
梁南原在 成廟朝。久掌風憲。有銅臭之癖。無謇諤之節。一日於通宴。 成廟謂誠之曰。卿爲法官八年。向予一無拂戾逆耳之言。予甚多之。 聖主一言規諷而賤惡之意。深矣。
祖宗朝設官分職。官有所統。職有所掌。六曹統於政府。各司屬於六曹。官盛任使不患無備。如有吉凶軍賓之事。則該曹率其所屬各司而責成焉。大則入啓取旨。小則決於大臣。委任專以各盡其職。紀綱不紊而治道有緖。昇平日久。恬嬉成風。綜核之政日喪。文具之節漸繁。小有所事。必設都監。喪亂之後。紀律板蕩。百度草創。不責該司。務立新局。曰軍功曰粮餉曰募粟曰復讎曰訓鍊曰廳用曰砲手曰焰焇曰鑄成曰安集曰屯田。一時都監之說。紛紛難記。皆以一品衙門稱號。設局愈多。事愈無統。悠悠汎汎。誰肯執咎而任其成效乎。恢復之期日益迂遠。豈非人事之不盡。實由於天數之未至而然也。痛惋奈何。
平壤詠歸樓。在於南城含毬門外十里之地。所經之處有井田遺址。觀其壟畔溝域分明。東西之畝。經緯之路。皆方直不斜。井田形制宛然猶存。路上北邊民家墻外。有井▣。箕子之井。口小而中闊。其深不可測。當時八家所共之井。無處不有。千載之下。或塡塞不修。或猶爲居民之所食。而此獨以箕子爲名。無乃星言設于之日。一漱去國之愁。而見愛於遺民。有如召公之甘棠者耶。余問於府下吏曰。井田之制溝澮之分。必無大小而田形或廣或狹何歟。答曰時移歲改。寢失其眞。加以經界不理。豪猾侵奪。然而府藏杞案所載。結負輕重則無大小平均如一。故夫同田小者。至今以侵畔爭訟云矣。
佔畢齋聞鄕家書堂有賊破壁。盡竊書冊而去。有詩云。平生購聚纔千卷。公擇山房敢擬乎。蹤跡頗同樑上賊。詩書非是口中珠。學之爲己猶相恕。賣以求財豈我徒。不謹垣墉與扃鐍。惟當深罪守家奴。
余嘗於抄書中。見有唐詩五言一絶云。臨橋須下馬。有路莫乘船。未暮先投宿聞雞更看天。此詩人李瀣送其子遠行而言也。不然其訓戒之懇切。豈能至於如此之篤也。
耘谷公學問深邃。操履方直。早年喪室。慮其兒輩之失所。不爲後娶。亦不畜妾。索然獨居二十一年。待其長成以畢婚嫁。非守道固窮之君子不能也。公之詩云。失母兒童在眼前。困窮知分廿餘年。但憑架上推千卷。也任囊中欠一錢。到老不成新活計。殘生空憶舊寅緣。已終婚嫁無遺恨。方得安然向九泉。公之喪室之年。乃三十七也。
李判書賢輔。居禮安號聾岩。嘗曰外方之士立於朝者。非無晩節引退之志。只緣當初無遠慮。婚娶於京城。故至于暮年。雖欲退去。而爲情愛之眷顧。牽戀不能去也。公於在朝。子女婚嫁皆於同鄕。及年七十致仕而歸。構小室。名曰愛日堂。雲仍滿眼。齒德俱尊。人皆以郭汾陽裴司徒稱之。人間之樂。林泉之勝。安享最久。年八十九而終。
李先生希輔字伯益。號安分堂。學於朱溪君。天性穎悟。聰明過人。博覽强記。無書不通。與申企齋蘇贊成鄭湖陰。齊名於一時。人獨以公爲博物云。爲銓郞歷玉堂陞堂上。中年蹇滯。沈於閑局。專以訓誨後進爲事。士子之受業於公門。而成就者甚多。至其晩年。朝廷啓以斯文老成。數奇可惜。特陞嘉善授同知。年七十六而沒。
田禹治海西人也。不學而能文。詩語洒落。人皆以有道術役鬼神稱之。縣監李佶與禹治相知。佶之田莊在富平。嘉靖年間癘氣熾發。佶之奴與隣居十餘人。臥痛方劇。佶令禹治禳之。禹治許諾。仍問曰。其地有高邱可坐處乎。曰有林亭可坐矣。禹治曰。某日當往姑置坐席於亭上而候之。至其日禹治坐林下。發數聲若招號者。然四隣病者皆倏然起坐。一時俱應曰愈。自此疾平。無復傳染之患。
金河西麟厚。爲集賢校理。受由南歸。與方伯相遇於光山。方伯爲公開樽張樂。使三少妓各執盃而前。聽公自擇。公之所杯。其名勝楊妃也。酒半方伯使妓持牋求詩。公卽揮筆云。婥妁楊家女。千年汝敢優。鬟述方丈雨。眸轉漢宮秋。初作三盃戱。終成一笑留。誰爲好事者。傳勝付靑樓。公之諸詩精敏華麗。一時罕有及者。
王裒讀詩。至哀哀父母生我劬勞。未嘗不三復流涕。門人受業者。並廢蓼莪之篇。艮翁末年嘗讀小學。至人生百歲之中。有疾病焉有老幼焉。親戚旣沒。雖欲孝誰爲孝。身旣耆艾雖欲弟誰爲弟。故孝有不及弟有不時。不覺掩卷而流涕。終日慷慨不能自定。聖賢之言感人心之深。亦如此。
國恤三年之內。八音遏密。若於王后之喪。則臣子朞年之服已闋。猶可聽樂。而未參於宴樂之場者。以人主之方在憂恤之中。臣子情義有所不敢而然也。今我 仁聖王后之喪。朞雖已過。而祥制未盡。故內自京城。外到列邑。皆不敢擧樂。余之發行之後。各官之接遇非不至也。雖以海西箕京兩方伯之悃款。猶無異色之物。擧案行酒皆用小童。至安興館。與兵使主倅會話之夕。始有妓物短歌行酒。自此之後出站之處。皆以女人進止。至新安歌鼓並奏。至龍灣無異平日。豈非邊荒之地。其風聲禮法淪斁。習於俗而然耶。
昔有朴孝宗者居忠州。膂力絶人。少時有族家婢子問安而來。坐於柱礎之側。孝宗立於柱下。潛以一手擧柱。納其衣裔於其柱而壓之。婢初不知也。及其去也爲柱所牽。起而復坐者至再。慮其鬼物所執。惶惑失色。主夫人卽招孝宗而解之。孝宗平生如皮榛皮柏等物。皆以兩手挼按。吹去其皮而啖之。孝宗子恬膂力亦過人。能挽百介弓而不知一字。初試例必居魁而每屈於會試。適値除講書別試。人皆以恬爲壯元無疑。爭來致賀。試日將近。諸擧子皆以新絃强弓。請恬先試。恬自矜其力。不辭而皆試之。及其開場。雨臂浮痛。雖弱力不能挽。終未見試。是知天命不在。則不可以人力取之也明矣。
李相公浚慶。嚴毅峻直。孝友忠信出於天性。聲音如洪鍾。眼光如紫電。廉潔無私。人莫敢干。學問該博。遇事立斷。當 明廟昇遐之日。椒親用事。人心疑懼。公毅然不動。朝野賴以無憂焉。本朝賢相黃喜許稠之外。鄭光弼之後惟公一人而已。
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此古今之恒言也。其在中國。平原廣野四望無際。必千里然後風氣不同。百里然後習俗有異也。春秋十三國所尙之不同。考諸詩可見矣。我國則不然。水無千里。野無百里。一邑之間高山重疊。大村之內大江相縈。山之內外。水味之一鹹一苦。江之南北。風氣之或順或逆。處處皆然。風氣之厚薄。習性之美惡。難可以一槪言之。此觀民風者之所當留意也。
爾汝者輕賤之稱。其大於此者。亦不過呼之以畜生而已。中國人心順厚。余嘗奉使往來。一路所見。未嘗敢以暴怒言加人。我國則人心奸頑。不思禮讓。好爲慢侮。小或不愜於己。輒以我子呼之。或擧人之母與妻而詬辱之。甚至兒童走卒。尋常言語之間。醜言惡語無所不至。叱其器皿。必曰吾之子之物。怒其牛馬。必曰吾之子之牛馬。習以成性。至於如此。羞惡遜悌之風豈可見乎。余嘗聞諸先輩。此等羞惡之言。 祖宗朝絶無。至燕山之末 靖陵初。始發於湖南之靈光萬頃之地。而遂傳習於四方云。
原城治西一舍之外。有驛曰安昌館。館之南有江。江之東有山。俗號建登。謂王建之所登也。穹窿高大。如鳥舒翼。其上廣平。可坐百餘人。有冽泉雖盛旱不渴。世傳麗祖仕於泰封。領大軍伐百濟之日。駐左右軍於山之南北之野。而樹旗登臨之處。麗祖五百年之久。文物禮法。不爲不備。而不避始祖之諱。至以建登稱之。民俗之鄙野甚矣。
原城雉岳山之東。有覺林寺。其初數間茅舍。蕪沒於林藪之中。 獻陵龍潛之日。嘗往來棲息。寺之南三四里之許有龍湫。其上有臺岩。依山而立。 獻陵有時挾冊吟咏於岩上。登極之後特 命改構。遂爲巨刹。而居民以岩稱爲 太宗臺。壬辰倭賊之亂。寺盡焚蕩而臺岩猶屹然立焉。
麗季進士元天錫。余之外王父之高祖考也。號耘谷。文章富贍。學問該博。居原州之弁岩村。州之東北五里許。有寺曰靈泉。 獻陵龍潛之日。嘗投宿棲息。而咨於公。公之啓沃良多。蓋平昌郡穆祖之外鄕。考妃陵在於三陟府。 獻陵有時往來三陟也。及卽位馹問公之在否。其沒已久而公之子侗存焉。召至便殿。特授基川縣監。聖主不忘甘盤之舊如此。寺之廢壞。不知幾年而三塔兀然。至今猶存。
英廟朝。 光廟以首陽大君在潛邸。吉禮未定。初以貞熹王后之兄議婚。監察可氏至其家。主夫人奉處女而出與之對坐。貞熹年尙少。短衣童髮。隱於主夫人之後而觀之。主夫人推入之曰。汝之坐次尙遠。何敢出頭乎。可氏告於主夫人曰。其阿只氣像不凡。非尋常之比。請更觀之。嘉嘆不已。入闕啓之。遂與定禮。可氏知人之鑑至今稱之。
祖宗朝。宮中阿只氏出避之處。必於宗室。或內族之家。故諸君及翁主等避接之事。閭閻之人。絶不聞知。至于今 上朝。宮中閣氏與別監等操縱。謂某方某地最吉。某日某時可往某家。不意來到士族之家。付標於外門。督令卽日出去。主家蒼黃。家產器用什物。未及收藏。顚倒棄去。因致蕩失者多矣。又不能久留一處。或數旬或半月。輒復移他。騷擾之弊。怨無不及。而聖上不得聞知。可恨也已。
春坊下番入侍之員。於世子所受之書。與其左右講論之辭。出而記書於單子。以呈政院。轉啓 上殿。乃舊時規例也。 仁廟在東宮數三十年。聖學日躋。三時書筵之外。又有夜對。又有不時接見。下番窘於追記。持筆硯入侍。如上殿之有史官也。一日賓客任權告於東宮曰。書筵之言有所遺漏。固無所害。而簪筆入侍。乃 上殿事也。逼於 上殿之事。雖小不可僭也。自此持筆入侍之事。遂廢不擧也。
稼亭年三十六。中征東省鄕試第一名。入元朝遂擢制科。前此本國人雖中制科。率居下列。公所對策大爲讀卷官所賞。置第二甲。授翰林國史院檢閱。官至中書省左右司郞中。
先祖牧隱戊辰生。至正元年辛巳。松堂先生金光載掌試。公年十四中詩科。戊子國子監生員赴都入學。己丑在學。庚寅分學上都。冬還學。辛卯正月稼亭訃至。奔喪而還。癸巳夏憂制終。五月玄陵開科。益齋先生李齊賢知貢擧。陽坡先生洪彥博同知貢擧。公中第一人。秋中征東省第一名。甲午公年二十七。入元朝應制科。考官歐陽玄大加歎美。而初置於魁。時議以外國人難之。屈置第二甲第二名。授應奉翰林文學同知訓誥。兼國史院編修官。公嘗言自吾父子登科中國。天下皆知東國之有韓山也。
牧隱畫像藏於濟用洞宗家。乃妙帽紅袍犀帶。而權陽村著贊麗季立朝時像也。余之在槐院時。有博雅士子謂曰。聞諸先正。革命之後。公常着草笠白衣細條。爲居喪之服。其像遺在於都中。親見之云。余廣問而不得見。居常服膺未能忘也。於賊變之後。大姓巨室相傳文獻之具蕩然無餘。余之未見白衣之像決矣。可嘆。
黃翼成公喜。在麗季爲積城訓導。自積城向松京。路遇一老翁。牽兩牛一黃一黑者而耕焉。方脫耒耜息於林楚之下。公亦休馬於其側。與翁相語曰。問翁之兩牛皆肥大而壯實。其畊治之力。亦無優劣乎。翁趨進附耳低聲而答曰。某色者優而某者劣矣。公曰翁何畏懼於牛而如是隱語乎。翁曰甚矣。爾之年少而未有聞也。畜物雖不通人言。人言之善惡則皆知之。若聞以己爲劣而不及於他。則中心之不平。豈異於人乎。甚矣。爾之年少而未有聞也。公聞之不覺瞿然。其平生謙厚之量。自翁之一語而成。麗氏之將亡。君子之隱於耕稼者。翁其一也。
黃翼成公爲首相。將詣政府。有一老翁衣裳繿縷。曳杖而前。字翼成而謂曰我今要見而來。君何往乎。公駐車答曰。適有公事。不久當還。君到吾家。討飯姑留。翁至公之家。謂公之子弟曰。爾爺令我到家候之。作飯而來。如其言饋之。俄而公還。與翁入一室。偃臥數日。爾汝相語。其所論議之爲何事。則雖家人子弟亦莫知也。翁將去謂公曰。近患粮饌俱罄。君可周乎。公略以數種置諸橐。令邱史擔之。從公所往而與之。翁渡路梁至冠岳山底。迤邐而上至山腰。問丘史曰。汝朝食乎。曰未也。翁曰前途尙遠。不可不食。而仍指山下人家曰。彼家之主。吾與之素厚。汝往以我言求食。必厚飯之。我姑坐此樹下。待汝之還矣。丘史至其家致翁之言。其家叱曰。所謂翁者誰歟。汝何爲者而求食於我乎。擧杖而逐之。邱史茫然。還至翁之所留處。則翁與所擔之物皆無有。竟莫知所往也。
黃翼成當 英廟有爲之日。制禮作樂。論大事決大議。日思贊襄。而其於家事之大小。皆不關念。一日家婢相鬪喧鬨移時。一婢至公之前。叩榻而訴曰某女人與我相抗。所犯如是極爲奸惡。公曰汝言是也。俄而一婢又來。叩榻而訴亦如之。公曰汝言是也。公之侄某在公之傍。慍色而進曰甚矣。叔氏之䑃朧也。某也如彼而某也如此。此乃是而彼爲非也。甚矣。叔氏之䑃朧也。公曰汝之所言亦是也。讀書不輟。終無分辨歸一之語。
孫贊成舜孝。好古樂善。爲關東方伯。凡於孝子烈女之閭。必式而過焉。自原州向橫城十里之地。大路之上有麗朝元宗亮孝子碑。出巡之日適雨濕路濘。公至其下下馬。以蓑衣鋪地而拜之。旣拜見都事擁蓑直立。顧謂之曰。都事亦拜乎。答曰曾先拜之矣。聞者以爲不拜。猶或可也。而先拜之言眞可笑也。
李相公克培。賢德淸望。重於一時。其弟克墩亦在宰列。頗以貪婪取譏。一日克墩謂公曰。某日弟之初度也。家人將設小酌。望須暫枉。公許諾。及是日公自政府直向弟家。入外門。見廡下有熟麻新索延掛於短墻之上。公却立而問此索出於何處。而從誰得之乎。克墩不能隱。直告曰。司僕寺官員有相知者。使用於洗踏而送來矣。公怒曰。司僕寺之索。當繫司僕寺之馬。何爲掛於汝之庭乎。遂乘軒不顧而去。其爲家法之嚴可畏。而 祖宗朝宰相如此。生民安得不富庶。倉庫安得不豐盈乎。
近世名卿。以友愛見稱。惟安相公玹。李相公浚慶兩家而已。安相以敬爲主。於兄判書瑋。事之如嚴父。乘則下馬。坐則必趨拜於床。唯諾惟謹。李相以愛爲主。於其兄判書潤慶。友之如親朋。坐則接膝。臥則連枕。相對言笑爾汝爲戱。兩相家風雖不同。而皆爲一時搢紳之所欽慕。然潤慶之卒。相公制服悲慟。終始如一。安相之卒。瑋弔哭無異平人。似負相公平生之厚。瑋以此未免識者之譏。
趙判書士秀。登文科第一等。初授內資直長。時和歲豐。各司之員。用庫藏之物。任意多少不復顧忌。公之直宿之夜。二三友生步月而至。求嘗香醞酒味。公與之坐談良久。蒼頭自本家載崇酒肥肉而來。酬酢歡洽而罷。公之平生。廉潔不苟之節。凜然於發韌初。吁可尙也。
黃衡亦名將也。官至刑曹判書。好觀書史。不拘小節。嚴毅沈重。鈴下畏之。治居第。廳事抹樓作層而低之。爲郞僚而持公事進退者。雖文士必於下層拜之。不敢慢也。其不失上下體貌如此。
尹參判釜之。爲關東方伯。下界原州由平昌郡。至江陵府之月精寺。仍雨留宿。有庬眉老僧。氣槪醞豁。公使之坐而相語。仍問曰。汝久居路傍之寺。監司之所不爲者何事歟。僧曰貧道雖有可言。使相其能聽而信之。採而行之乎。公曰第言之。僧曰。願相公勿罰報狀使稽留之罪。公曰。頑慢之習。不懲可乎。曰不然。各官報狀使。例以貧寒官屬差之。衣不蓋軆食不充腹。凍餓顚仆。不能趨赴。常時尙然。況氷漲雪塞之日。其能飛渡江而凌樹抄乎。一日遲滯。責罰隨之。實非仁恕之政也。公曰。又有可言歟。僧曰。願相公巡行之日。必從先文。勿爲進退。公曰何以言之。僧曰。候吏之久留境上之弊。不足言也。而作粥烹麵。翹首以待。今日停行明日不來。經宿之物不可留用。奔走村野。求責甚急。民之受害亦大矣。公曰。又有可言歟。僧曰。願相公毋駄妓。公笑曰。師言及此抑有說乎。僧曰。尤物之妨政害治。固非山人之所可知也。而一妓之行必有房婢與從奴。列邑支供贈賂之煩。各驛卜駄輸轉之弊。有不可勝言矣。公曰諾。吾從汝言。公於一朞之內。寬簡爲治。務盡除弊。民至今稱之。
祖宗朝士大夫服色。以土紅爲上色。蓋以朱土沈水。淘去其滓。精鍊爲備。和膠染之。則其色爛然。國俗所謂土紅直領是也。及其末世。下吏之賤。皆着紅花之色。紅花乃利市也。所謂利市云者。言其價重也貴也。且唐絲交織之布。細密難成。其功百倍。宰相之外。堂下官以下不得着。持國法所禁也。嘉靖丙辰之夏。槐院正字鄭䃫。仕罷還家至鍾樓街路。見犯憲府禁亂吏。䃫乃故相鄭順朋之子。年少有名文官。而法吏尙不饒貸。國法之嚴可知矣。數十年來下賤之輩。皆着文綺絲羅。國不能禁之。習俗之僭濫一至於此。吁可歎也。
麗朝武擧之制雖未詳知。我 朝式年之規。則寅申巳亥之年。與文科設初試於京中及各道。各道有定額之數。隨其擧子矢數多少而出榜。翌年子午卯酉之歲。聚會入格初試之人。京試射六兩片箭。騎槍入格。然後考講將鑑博議武經中一書。四書中一書。與大典粗通以上者。矢數與講書之數。通融合計高下分等。只取二十八人。謂之會試。又以會試之人。親臨試才。定其坐次。謂之殿試。至 光廟卽位之六年庚辰。巡行四方所到之處。必設武科。不爲初試。不限規矩。隨其多寡而取之。一年通計只一千八百餘人。至今以武士之不能制馬。不能彎弓者。必謂之曰。庚辰年武科也。自此以後武選亦輕矣。然 成中兩廟之朝。別擧之規。必以六兩二十步騎射四中。講粗通然後參榜。故所取武士皆傑然可用。至萬曆癸未。北虜尼湯介寇邊陷城。其時李珥主兵。建議爲防戍赴戰之計。遂設別擧取武士六百餘人。而逐年所取不下各數百人也。 祖宗朝舊遠科擧規法。至此蕩然矣。雜色諸軍之稍解操弓者。皆得參焉。而王宮侍衛甲士別試衛定虜衛之類。及外方諸鎭。騎步兵水軍新選之額多闕。壬辰倭賊之變。 大駕西行。關西與黃海連歲設科。癸巳之秋。東宮所駐全州撫軍之所。嶺南都元帥之府。與各道所取甚夥。自癸巳 大駕還都。至丁酉五年之間。累設大擧。不爲講書。只取一矢之入格。名爲科擧。實同軍目。新恩放榜之日。戴花執牌着繩鞋而徒步者亦多。賊變以來。前出身無慮數萬。閑良士族之外。庶孼公私賤白丁之類。無不與焉。取人愈多。而將才益乏。殘劣愚騃。不能彎弓。不識一字者。比比皆是。以此欲禦强悍之賊。謀國者不思之甚也。
中廟在潛邸時。避寓於閭閻洞口。見有一鄕生。朝夕過門而往來者幾及浹辰。一日値雨。投入於 中廟所寓門內。 中廟使之上堂。仍問誰氏之子。以何事往來何處如是之勤苦乎。生自陳姓名。仍言此洞之內。有吏曹書吏。許我以甑山訓導。而久未下 批。故數往致懇矣。 中廟作簡授之曰。余知參議。若投此簡。必成所願。勿復勤苦。生受簡而退。初不知大君來寓之處也。不久朝廷反正。 中廟卽位之後。生傳簡於參議。其書辭有從所言施之。又有御諱。參議卽詣闕入啓。 中廟傳敎此余之手書。而其所言則忘之。問於其人。政院牌招問之。則乃求爲甑山訓導也。特命除之。
八渡河之北有畓洞。余嘗以爲中國之只有山稻。而無玉粒者。南方粤區之外。其餘皆大陸高燥。河水深廣不可灌漑而然也。及渡江歷觀所經之處。山勢盤回。水脈緩延。多有沮洳肥腴之地。況高麗之時。水田之作非不能也。以畓名洞至今猶然。然而猶無畓田者。豈非畊種鋤治之功。百倍於旱田。憚於勤苦而莫之爲耶。抑惟辟玉食。庶民不敢僭。而亦不敢種而然耶。是不可知也。且以農器觀之。我國所謂鋤者。柄長不過半尺。其刃狹而末銳有似鳥啄。坐於畝間。拔去稂莠。利於用耳。聞關內及南方有鋤之名。而其形亦異於我國之所謂刈子。柄長幾於二丈。其刃廣而且博。有似我國之鍤也。此皆宜於立治旱田。而不用於水田也。大抵中國則土厚。旱田之功不甚勤苦。我國則土瘠。加以水田之治。其勤動勞苦。必倍 於旱田。然後庶有所收。我國農民之苦。因可見也
兪㵢溪好仁。天性醇謹。文章富贍。 成廟最重之。公爲集賢校理。便養乞郡出守咸陽。公敏於講學而疎於吏治。日與諸生登學士樓。討論經史。有一村氓呼訴於壇外曰。投狀已久。迄無黑白。極爲悶望。案前小吏擧頭而問曰汝之所呈在幾日乎。氓曰今已三日矣。吏叱曰。五六日已前者尙無究決。汝何汲汲乎。姑退而待令可也。諸生相顧而笑。公曰人各有可笑汝輩笑我之政事。我亦笑汝之制述矣。按㵢溪咸陽人也豈有作本郡倅之理曾聞宰陜川郡而終此記者之誤
湖南邊山近處。有曺上舍稱號者居焉。隣有楊水尺者。貸用曺家之物久而未償。一日以刈柳至山下。見大虎委其四足。臥於岩底。蓋處食狗醉而困眠也。水尺望見以爲死虎。告於上舍曰。吾有未償之債。今得大虎。幸取用之。上舍聞之喜躍。與水尺相議。或載或曳恐致傷毛。乃作擔機。率壯奴五六。從水尺所指而往。上舍邐迤登岩上俯虎而坐。奴輩持機直至虎側。作聲置機。虎驚起咆咻。揚沙攫杪。聲振岩谷。踰嶺而去。上舍惶惑喪魂。墮落岩下。面目四體俱傷。不能乘馬。臥之機上擔而還家。時當仲春。上舍者黃色新布單衣。在家子弟出門望之。相顧指之曰。今此虎非斑文虎也。黃色虎也。及至見上舍呻吟臥機。擧家吐舌。上舍閉戶服藥。數月然後僅蘇。亦可爲貪得者之戒也。
鼻衄之證。眞墨呑下。犬傷之處。濃書虎字。馬咬之瘡。馬鞭燒付。鯁塞之喉。掛其魚網。仍呼鸕鶿。如此等方載在於醫書不一而足。其理實未可知也。
成廟朝。有宦官受由往還關西者。 成廟一日御便殿問曰。汝於一路。如有所聞所見無隱。對曰。臣別無見聞之事。但於來時。一日之內九渡菁川江。 成廟曰。何以至此乎。對曰。自嘉山將向安州。至菁川江登舟。有萬戶者自西邊任還者。率房直而來。初欲別於江邊。房直曰。安忍自此辭去乎。願至彼岸而告別。將及彼岸。萬戶曰。汝越江送我。我不可在此獨送汝也。遂回棹西岸。房直曰還來送別之厚我。我不可不答。與之同返。萬戶曰。隔江相別。本非我情。又與之同往。臣在舟中不得自由。同往同返。往來之數至於九渡。纔及下陸。日已昏暮。不能遠行。宿於江邊。因以萬戶姓名啓之。至于數年之後。其人參於邊將末望。 成廟微笑。此九渡菁川江者乎。遂揮筆落點。
仁山府院君洪允成。得幸於 光廟。屢參勳盟。位至首相。威權赫然。至 成廟初年。以先朝舊臣勢焰之盛。擧朝莫之敢攖。王子烏山君嘗欲挫辱之。因雨濕路濘。乘仁山詣闕將向迎秋門。烏山避隱於鍾閣隅石橋南。鋪藁席於路左。立於其上。仁山馳至見王子露立。不得已下車。烏山拱手揖之。仁山步過良久。泥淖沒靴。衣服盡汙。仁山面色如土。而觀者無不快之。及門改服而入。至差備門以啓烏山慢己之狀。貞熹王后大怒。召致烏山於大內以責之。對曰允成之訴不宜信聽。貞熹使人曳出之。
宋監司欽。暮年爲湖南方伯。其於尤物。不能忘情。每到無妓之官。臨夕必招訓導於房中。語及客枕無聊之意。訓導出與主倅相議。擇官婢之稍可者而薦之。公於一日巡到僻郡。亦招訓導。訓導疝症重發。不能屈伸。向曉扶曳而進伏於窓外。令小吏告曰。夕承召命。適患賤疾。幾死幸生。今始來矣。公曰。訓導其不知我之病者乎。夕訓導則與相接。曉訓導則本不喜見。退去可也。
金安老久據相位。姦貪自恣。賄賂多寡必形於辭色。黃琛爲忠淸兵使。以眞荏二十斗送于安老。及瓜滿遞還。凌晨投刺於安老之門。安老了無答辭。琛久立門外。疲困俯仰。進退無計。日將高。林千孫亦以忠淸水使遞來投刺。安老卽出廳事迎之。琛與之隨入。安老向千孫笑語款洽。多有德色。與琛則落落無一相慰之語。其後琛爲副摠管入摠府。千孫亦以三廳衛將向去。琛邀致相語。問頃者政丞向君。最致慇懃之意。必有所爲之事。願須無隱。千孫初諱其言。琛强要之。千孫笑曰。吾在水營之日。政丞委求婚需。遂令伐大木造巨船。凡所用要切之物。滿載並船送之。必以此爲喜也。此外更無所爲矣。琛拍手仆地曰。吾之二十斗之荏。投之大洋之中矣。蓋謂其些小之物。不滿其欲。無蹤跡可尋也。
祖宗朝。六曹直宿郞官等。月夜各雜娼物。會于光化門外之上。詩酒歌呼終夜談飮。是乃太平之事。非徒六部然也。薇垣之官亦以曲會爲事。入直之夜必携妓而宿。天將曉。掌務吏立於窓外而請謁者。欲令早出尤物也。其後世道漸淆。法禁漸密。六部上直之風頓變。薇垣夜飮亦廢。而獨於直宿之夜。掌務吏請謁古事猶存。
南小門洞有士族寡婦。自其先世多畜寶貨。聚其羅段錦繡等。別藏於一木櫃。其重十石。緘縢扃鐍甚固。置之樓上廡下。羣盜聞之欲取。則重不可移。欲探則堅不可開。相顧垂涎。無以爲計。有一賊作牡金十餘。大小不同。各異其制。一日乘主家沈眠。率管下數三人踰墻而入。歷試諸鑰。合而開之。盡探其藏。自着熊皮。入臥櫃中。使之封鎖如故。賊於櫃中。以所持牡金。爬切櫃內爲鼠囓之聲。婢僕等聞之。告于主母。明燈開之。賊自櫃中蒙熊皮作聲突出。婢僕等擲燈仆地。賊聳身揚臂。或投庭下或登廳上。爲百般鬼怪之聲。擧家驚惶。失魂半死。賊良久開窓遁去。其家天明探視櫃中。則空空無一物。以爲年久珍寶之物。必有所祟作此厲鬼而去。召巫迎盲祈禳度厄。冀免將來之禍。而不曾致疑於盜賊之術。賊謀之難測。至於如此。眞可謂大盜者也。
贈吏曹判書金公順初。余之槐院舊僚也。爲人忠信君子人也。爲原州牧使。壬辰倭賊之變。出於不意。公團聚州兵爲遮截東南。保守西路之計。余以號召勤王使。駐兵于州之興原倉。公入據加里嶺鴒原古城。余抄送精兵略干以援。及倭賊登城民兵潰散。公與夫人次子被害。州人斂襲。權葬于酒泉之東南山麓之間。癸巳倭退之秋。發靷于驪州之地。公之胤正郞時獻氏。强索挽詞。余辭不能。略草短律三章。書於薄楮委人馳送。一云。勤苦詩書業。才全德又純。時平唯樂志。世難却成仁。棄甲慚無將。當關喜有人。堂堂千古節。未必後張巡。一云。民哭還珠守。朝褒死節隆。雙成又有子。全美孰如公。凜凜呆卿志。乾乾王蠋忠。山河壯直氣。時有化長虹。一云。五載承文舊。二天宿契深。相從元有好。莫逆共知心。偲切千年調。壎篪百世音同期未同死。愧負淚盈衿。
無實之言。謂之虛言。言而不行。謂之虛言。昔者司命。以爲九天上帝之側。乃衆星所居之處。無實虛言。盛之三帒。投之下界。棄置路上。最其大帒則梨園老妓得之。其次路傍守令得之。又其次銓曹尙書得之。此乃世俗之恒言。而善爲托喩者也。然而余觀之此三人。雖地位不同。所行亦異。而其諾之不能一一皆實。乃其理勢之自至。不得不然也。虛言之譏。烏得免乎。
東皐李相公爲首相。都堂弘文錄會議時。初以幾圈爲定。及收圈將畢。公更爲加一圈。蓋公之子德悅入於初圈之中。故加一圈。前後數十年來。同參堂上等皆爲氣使心交。其乳臭子弟無不得圈。此權奸之所以縱恣也。相公雖違初約。其正大氣像不可及也。近者弘文錄揀擇之時。初以五圈爲限。收圈之後。左相尹力言五圈數少。減一圈四點以上用之。渠之子暄。吏曹參判姜之子弘立。俱以四圈參錄。其行事與東皐如何哉。
有朴永之稱名者。其根貫則余未詳也。僑寓于北部俊秀坊。與余所居不遠。故有時相見。爲人穩豁。不爲圭角。亦不混於流俗。嘗以補造草笠爲業。亦不致勤。衣食屢窘。不爲屑意。能通數學。所言多驗。中間消息。久致茫然。至萬曆丁戊年間。欣然來見曰。糊口關西幾至十年。今始還京。人心風俗。大異於前。上自朝士。下至韋布。皆有傲物自聖之習。土崩瓦解之勢已成。令公雖掌風憲。年少新進之輩必不聽信。若執我所見。則彼必立異。若屈己從渠。則反傷事體。不如退臥山廬也。余深服其言。而不能從也。其後逆獄之變。三年未畢。倭賊之禍。至今猶然。不識此人何處去。而其存其亡未可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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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와잡설(松窩雜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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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李墍) 찬

○ 왕씨(王氏)는 용(龍)의 종(種)이므로, 아무리 못난 자손과 먼 후손이라도 그 몸의 어딘가에 반드시 비늘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우(禑)의 왼쪽 어깨 위에 바둑돌만한 비늘이 있었는데, 우는 항상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임영(臨瀛 강릉)에서 죽음을 당하던 날에는 어깨를 드러내어 옆에 사람에게 보이면서, ‘지금 만약 보이지 않고 죽으면 내가 신(辛)가가 아닌 줄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나?’ 하였다.”
한다. 이 일이 비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임영 사람은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일찍이 여흥(驪興)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공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보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한 시편(詩篇)이 많았다. 공은 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대서특서(大書特書)하기를,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아들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에 내쳐버렸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시조왕의 신서가 하늘을 감동시켜 / 祖王信誓應乎天
남기신 은택이 오백 년을 내려오네 / 餘澤流傳五百年
진위를 어찌하여 일찍 분간 않았는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하늘의 실피심은 밝게 빛나네 / 彼蒼之鑑昭昭然

창왕(昌王)은 폐위되어 강화로 가고, 우왕은 강화에서 강릉으로 옮겼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시를 지었다.

선왕의 부자분이 각각 떨어져 / 先王父子各分離
동쪽 서쪽 하늘 끝 만리 길일세 / 萬里東西天一涯
몸은 비록 서인된다 하여도 / 縱使一身爲庶類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이와 같이 공은 우왕ㆍ창왕 부자를 선왕이라 하여 시를 쓰고 곡(哭)하였다.

운곡공(耘谷公)통제사(統制使) 최영(崔瑩)이 형(刑)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통탄하는 마음으로 시 세 편을 지었다.
1
맑은 빛 묻히고 기둥이 무너져 / 水鏡埋光柱石䫝
사방 백성 모두가 슬퍼하누나 / 四方民俗盡悲哀
빛난 공업 마침내 쓰러졌지만 / 赫然功業終歸朽
꿋꿋한 충성이야 죽은들 사그라지랴 / ?爾忠誠死不灰
역사에 기록할 일 편질에 가득한데 / 紀事靑篇曾滿秩
가엾게도 황토더미 벌써 되었네 / 可矜黃壤巳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에서 / 相應杳杳重泉下
동문에 눈을 걸어도 분 못 풀리 / 掛眼東門憤未開
2
조정에 홀로 설 제 뉘 감히 간여하랴 / 獨立朝端誰敢干
충의로써 어려운 일 꾀하였네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 백성의 바람 따라서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 사직을 편안케 했네 / 能使三韓社稷安
동료 영웅들은 낯이 어이 두터우뇨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간인들도 뼈가 서늘하리 / 未亡邪侫骨猶寒
어지러움 다시 오면 뉘 헤쳐 나가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세상 사람 하는 짓이 간사하다 / 可笑時人用事奸
3
내 지금 부음 듣고 애도의 시 짓노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 위한 슬픔보다 나라 위한 슬픔일세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의 비태도 알기 어렵고 / 天運難能知否泰
국가의 안위도 정해지지 않았네 / 邦基未可定安危
날카롭던 칼날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슨 소용 있으며 / 銛鋒已絶嗟何及
충성스러운 마음 늘 외로우리니 못내 한스러워라 / 忠膽常孤恨不支
산하를 홀로 대해 이 가락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다 서글퍼하여라 / 白雲流水摠噫嘻

노산군(魯山君)영월군(寧越郡)에 물러간 후에도 매양 아침이면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서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내려왔으나, 문틈으로 바라보고는 움찔하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날이 차츰 저물자 도사는 때를 늦추었다는 책망이 있을까 두려워, 걸상 옆에 있는 하리(下吏)와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노산군이 앉은 후면(後面)의 창구멍을 통해, 긴 끈으로 당기도록 하였다. 끈이 모자라자 베띠를 이어서 마침내 목을 졸라 죽였다.

노산군이 영월에서 죽으니, 관(棺)과 염습(斂襲 시체에 옷 입히고 묶는 일)도 갖추지 않고 짚으로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매우 슬프게 곡하며 말하기를,
“평소에 이름을 알고 지냈고, 보살핌을 받은 분의(分義)가 있노라.”
하고, 며칠을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밤에 시체를 지고 도망쳐버렸다. 어떤 사람은 ‘산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 하고, 어떤 사람은 ‘강물에 던져 버렸다’ 한다. 지금 무덤은 거짓으로 장사한 것이라 하니,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편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호)의 글로써 본다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렇다면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璉)의 무리로서, 간신(奸臣)이 지휘한 것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그 한스러움이야 어찌 다하랴? 혼은 지금도 의탁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닐 터이니, 진실로 애달프다.

목은(牧隱)은 우리 태조(太祖)가 크게 존중(尊重)한 사람이었다. 태조가 일찍이 자(字)와 당호(堂號)를 지어주기를 청하고, 또 둘째 아들의 이름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목은은, 계화(桂花)는 가을에 희고 깨끗하며, 계수나무의 짝으로는 소나무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중히 여기는 것이 절의(節義)이므로 변치 않음을 숭상한 것이다. 그래서 자를 중결(仲潔), 당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였다. 또 셋째 아들의 이름을 방의(芳毅)라 지었다. 전에 둘째의 이름을 방과(芳果)라 지었는데, 과(果)와 의(毅)는 서로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지었다.

추부에 들어서는 난 체하기 부끄러워하고 / 着鞭樞府愧揚揚
같은 날 어깨 겨루며 대성에 들어갔네 / 同日摩肩入臺省
달빛이 가득하니 산과 바다가 어찌나 밝던지 / 月滿海山何皎皎
겨울이 차가우니 송백 더욱 푸르구나 / 歲寒松柏愈蒼蒼

우애와 공순함으로 넉넉한 정을 보겠고 / 友恭可見親情洽
과단하고 굳세니 적의 형세강함을 어찌하여 걱정하리 / 果毅何憂敵勢强
원하노니 일시의 여러 대장들과 / 願與一時諸大將
종시토록 곽 분양을 스승으로 삼으소서 / 共師終始郭汾陽

목은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기사년(1389) 12월에 귀양을 당해, 장단(長湍)에 있다가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에 부처(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淸州) 옥(獄)으로 왔으나, 수재로 인해 용서를 받고 다시 장단에 와서 있었다. 임신년 4월에 또 금양(衿陽)으로 귀양갔고, 6월에는 금양에서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벽사(甓寺)에서 거처하면서 ‘배를 띄워 노자암(鸕鷀巖)에 갔다.’는 등의 시가 있는데, 시는 이것이 끝이다.
   혁명(革命)한 후에 조정에서 중형(重刑)으로 처치하려고 의논하였으나 태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여흥에서 장흥부(長興府) 남벽사역(南碧沙驛)으로 유배(流配)되고, 그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산(韓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은 한 곳에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을해년(1395, 태조 4) 가을에는 관동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 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해 11월에 태조가 친서(親書)로 여러번 부르므로 공은 부득이하여 교자(轎子)를 타고 들어가서 뵈었다. 태조는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친구간의 예로써 대우하면서,
“덕이 부족하고 식견(識見)이 어둡다 하여 버리지 말고, 한 말씀 가르쳐주시길 바라오.”
하니 공은.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서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하였으니, 다만 이 해골(骸骨)이나 고향 산천에 묻히기를 원할 뿐이오.”
하였다. 태조는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까지 걸어 나가서 서로 읍(揖)한 다음, 작별하였다.

   병자년 여름에는 공이 여흥으로 피서(避暑)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초3일에 벽란(碧瀾)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가는데, 호송(護送)하는 중사(中使)도 또한 와서 있었다. 초7일에 여흥 청심루(淸心樓) 하류 연자탄(燕子灘)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공이 죽었는데, 공의 죽음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였다. 대개 고려 왕씨(王氏)의 자손이 배안에서 많이 처치를 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의 술책이었으므로 공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여러 사람의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애통하도다.

○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變亂)에 하위지(河緯地)도 형을 당했다. 그 처자(妻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연좌법(連坐法)을 걸어 금부 도사를 보내서 처치하게 하였다. 하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하호(河琥)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고, 둘째 아들 하박(河珀)은 나이가 20이 못 되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행동이 평소와 같았다. 도사(都事)를 돌아보며,
“도망할 리는 없으니, 형(刑)을 조금만 늦추어 주십시오. 부득이 모친과 영결(永訣)하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니, 박이 문으로 들어가서 모친 앞에 꿇어앉아,
“죽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죽음을 당했으니, 자식으로서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自決)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비록 적몰(籍沒)되어 천한 종이 되더라도 여자의 의리로써는 죽을 때까지 한 지아비만을 섬겨야 할 것이니, 훗날 개돼지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
하고, 드디어 두 번 절하고 나와서 조용하게 죽음을 당했다. 사람들이 모두들 하위지는 훌륭한 자식도 두었다 하였다.

○ 교리 정붕(鄭鵬)선산인(善山人)이다. 깨끗한 절조(節操)로 자신을 수양하여, 그의 문간에는 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에 유자광(柳子光)은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으로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는데 간사하고 탐심(貪心)이 많으며, 또한 방자하여 기세가 조정을 휩쓸었다. 공은 유자광과 외가 친척이 되므로 비록 문안(問安)하는 예는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이 갈 때에는 반드시 숙마(熟麻 누인 삼 껍질) 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묶은 자리에 표를 해서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다. 그것은 묶인 곳이 아파서 그의 집에서 지체하지 않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게 하려 한 것이었다.
한번은 공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 공의 부인이 유자광의 집에 꾸어줄 것을 청하자, 유자광이 쾌히 말하기를,
“친척의 정의(情誼)는 서로 구휼하는 데에 있다. 교리가 지나치게 괴퍅하지만 내가 어찌 괄시하겠는가?”
하며, 곧 쌀을 자루에 넣고, 장을 항아리에 담아 종을 시켜 노새에 실려 보냈다. 공이 직소(直所)에서 나와서 옥같은 쌀밥을 보고, 얻어온 곳을 물으니, 부인은 사실대로 알렸다. 공은 상을 밀치고 웃으면서 일어나,
“입직하던 날 아침에 비지를 사다가 죽을 쑤어 주기에 나는 양식이 떨어진 줄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의 실수이지 집사람의 허물이 아니오.”
하고, 드디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워 쓴 만큼을 채우고 본디 쌀과 합쳐서 돌려보냈다. 그가 궁핍(窮乏)하여도 절조를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상공 신용개(申用漑)는 젊어서부터 의기가 구구하지 않고 큰 절조가 있었다. 그의 아비 신면(申㴐)이 함길도(咸吉道) 감사로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변란에 대처할 길이 없었으므로, 대청 위에 있는 작은 다락 틈에 뛰어 들어가서 있었다. 적졸(賊卒)이 감사를 찾지 못하고 가려는 참이었는데, 소리(小吏)가 그가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서,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공이 장성하자 부친이 도적의 손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반드시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홍유손(洪裕孫)과 친교를 맺고 여러번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모습과 성명(姓名)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하루는 그 아전이 일이 있어 서울에 오다가 중간에 인가(人家)에서 묵었다. 공은 그때에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타서 도끼를 가지고 그 사람이 유숙하는 곳으로 걸어서 갔다. 홍유손을 시켜 불러내어 관청일로 서로 고해 주는 척하게 하고 공은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인 다음 돌아왔다. 그러나 주인집과 동행하던 사람은 마침내 무슨 연고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였다.

○ 고령(高靈 고령은 고을 이름으로 봉호(封號)) 신숙주(申叔舟)의 부인 윤씨는 윤자운(尹子雲)의 누이동생이다. 숙주는 영묘(英廟 세종) 때에 8학사(學士)에 참여하였고, 성삼문(成三問)과는 더욱 친하였다.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 때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발각되었는데, 그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은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섬삼문 등과 서로 친교가 두터운 것이 형제보다도 더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것이라 생각되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自決)하려던 참이었소. 당신이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
하였다. 공은 말문이 막혀 몸둘 곳이 없는 듯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일은 을해년 여름 노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일로, 진신(搢紳) 사이에 미담(美談)으로 전해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 전해 듣고서 쓴 것이다. 부인은 병자년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그해 4월에 일어났으니, 이러저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 판서 이세좌(李世佐)의 부인 모씨(某氏)는 모관(某官)의 딸이다. 성묘(成廟) 때에 폐비(廢妃)에게 죄를 주려 할 적에, 공이 대방 승지(代房丞旨)로 사약(死藥)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공이 집에 돌아와서 부인과 함께 한 방에 누워 있었다. 부인이 묻기를,
“들으니, 조정에서 폐비를 논죄(論罪)한다더니 필경 어찌 되었소?”
하니, 공은,
“벌써 사사(賜死)되었소.
하자,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애달퍼라,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려. 어미가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으로서 훗날 보복하지 않겠소? 조정에서 세자(世子)를 장차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한단 말이오?”
하였다. 그후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에 공의 아들 이수정(李守貞)이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동쪽 저자[市]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에 폐비론(廢妃論)을 고집하던 벼슬아치의 자손들이 남김없이 모두 죽었고, 나라도 거의 망할 뻔하였다. 부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는 실로 여러 신하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목은(牧隱)은 고려 말기 새 임금을 세우려고 논의할 적에, 홀로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뭇 사람의 떠드는 중에서 주장하였다. 그후 우왕(禑王)이 폐위되어 강화(江華)에 있을 때에 공은 미복(微服)으로 가서 뵙고, 국화(菊花)를 보고 지은 시가 있다.

인정이 어이하여 만물처럼 무심하리 / 人情那似物無情
요즈음 경색 보니 마음 편치 못하여라 / 觸景年來漸不平
동리를 우연히 향하니 못내 부끄러워라 /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대했구나 / 眞黃花對僞淵明

막막한 용사에 추풍이 부니 / 龍沙漠漠又秋風
시든 풀 이어지는 구름에 낙조만 붉네 / 衰草連雲落照紅
국화를 꺾었으나 누구에게 바치리 / 折得黃花誰上壽
해서 천릿길, 여기가 행궁이네 / 海西千里是行宮


국화시가 있다.

울타리 옆 두어 가지 서리 맞은 꽃이 고와 / 數枚籬畔媚霜葩
한산 사람 목은의 집 빛나게 하네 / 潤色韓山牧隱家
이 늙은이 갑자 쓸 줄 어이 알리오 / 此老豈知書甲子
문앞에 푸른 버들 연기 띠고 늘어졌네 / 門前碧柳帶煙斜

공의 간곡한 뜻을 알 수 있다.

○ 판서 이자(李耔)는 자(字) 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거사(陰崖居士)이며, 우리 한산이 본관이다. 문장이 능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엄숙하고 충직(忠直)하여 당시 사람들이 뜻을 크게 펼칠 것을 기대하였다. 김안로(金安老)와는 인아(姻婭 동서)의 친분이 있고, 또 주계군(朱溪君 이름은 심원(深源))에게 함께 배웠다. 그러나 평생에 하는 짓은 향초와 누린내 풀처럼 서로 반대였다. 그리하여 김안로는 매양 공을 해칠 뜻이 있었으나 공이 올바른 도를 지키므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기묘년(1519, 중종 31)에 여러 현인이 내침과 죽음을 당하던 날에 공도 또한 파직되고 내침을 당해, 용궁현(龍宮縣)에 살고 있었다.
그후 가정(嘉靖 명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신년(1536, 중종 31)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휴가를 받고, 함창(咸昌) 지역에 와서 성묘를 하면서, 먼저 공에게 사람을 보내 돌아가는 길에는 옛 벗을 찾겠노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실상은 공을 꺼리고 미워하여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그의 심사를 미리 알았으므로 그가 온다는 날 아침에 홰나무 꽃물로 낯을 씻고는,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서로 대면하였다. 김안로는 공의 손을 잡고서 지극히 다정하게 대하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나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음애공(陰崖公)이 죽게 되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군자(君子)가 소인을 대할 때에 가끔은 스스로를 숨겨서 화를 피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도이다.
목은장단으로 귀양 가서 성(省)에 낭관으로 있는 여러 아들에게 시를 부쳤다.
1
현릉 일대에 소인 선비로 / 玄陵一代小人儒
중서성 간의대부 역임했노라 / 揚歷中書諫大夫
시중이 된 것은 요행이었지 / 得至侍中徼幸耳
사문에 무엇으로 맞먹게 보답하리 / 斯文何事答相圖
1
중용과 대학에서 증자ㆍ자사 배웠는데 / 中庸大學學曾思
사람들은 영왕이 네 스승이라 하네 / 人道瀛王是汝師
요즘 와서 장락이 나만은 아니리 / 長樂邇來非獨我
뉘 다시 귀거래사 지을것인가 / 有誰重賦去來辭
1
작년에 큰자식이 황천으로 갔는데 / 去年長子入黃泉
오늘 아침 중씨가 바닷가로 귀양갔네 / 仲氏今朝謫海堧
들으니 셋째 자식 탄핵을 당한다니 / 聞說三郞方被劾
어이한 하늘인가 어이한 하늘인가 / 奈何天也奈何天
1
세상의 성쇠는 돌고 도는 것 / 世間榮悴似循環
송백이 푸르러도 추위에 시달린다 / 松柏蒼蒼又苦寒
중니를 배워 구괘를 벌이고서 / 且學仲尼陳九卦
흰 머리 이 신세를 장단에 부쳤노라 / 白頭身世付長湍
1
벼슬길은 고금이 위태로운 것 / 官途今古足危機
늘그막의 시비됨이 무엇이 괴이하리 / 何怪衰年惹是非
성은에 감사하니 천지도 한없어라 / 再拜聖恩天地大
눈은 산에 가득한데 사립문이 닫혔네 / 滿山殘雪掩柴扉
1
탄핵 상소 큰 기세로 사람을 놀래지만 / 彈章大勢乍驚人
익히 읽고 생각하면 모두 진심 잃었구나 / 熟讀深思摠失眞
노옹을 잡아오라는 그 네 글자 / 捉敗老翁惟四字
쫓아낸 중이 도리어 왕륜 같을까 두렵구나 / 黜僧還恐似王倫
1
장단 태수 생선을 보내왔기에 / 長湍太守送纎鱗
시장할 제 먹어보고 그 좋은 맛에 새삼 놀랐네 / 晩食還驚味更珍
성랑에게 왕의 은혜 심중함을 알았노니 / 始識省郞恩深重
주리면서 공직할 이 어이 없으리 / 忍飢供職豈無人
1
현릉 갑인년 책사에 뽑히고 / 玄陵第士甲加寅
신씨 때 방이 붙어 출신하였네 / 放榜辛朝始出身
지금엔 황야에 물러나 있는 운수이니 / 坐數至今荒野去
온 조정의 귀인들이 한 사람도 없구나 / 滿庭靑紫絶無人
1
천자께서 부르시어 팔진미를 내리시니 / 天子呼來賜八珍
시중의 광채가 조정의 신하를 놀라게 했네 / 侍中光彩動朝臣
화복이란 피하기가 어려운 것 / 請着倚伏難逃處
적적한 시골에서 들 사람과 벗하였네 / 寂寂荒村伴野人
1
송헌은 정권을 잡고 나는 떠도는 신세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이런 일을 생각했으리 / 夢裏何曾有此思
두 정씨가 더구나 큰 논의에 참여했으니 / 二鄭況今參大議
한 집안 어느 때나 모여질런가 / 一家完聚果何時
1
너는 가문 믿고 너의 완악 부리지만 / 汝恃家門逞汝頑
아비가 빙산임을 네 어이 알겠느냐 / 那知汝父是氷山
탄핵문은 죽이고 용서하려 않는데 / 彈文直欲殺無赦
아직도 천지간에 함께 삶이 다행이라 / 尙幸竝生天地間
1
죄주려 하면 할 말이 어이 없을소냐 / 欲加之罪豈無辭
헐뜯는 듯 기리는 듯 세상이 다 아는 바네 / 似毀疑褒世所知
필경에는 하늘 믿고 걱정하지 않노라 / 畢竟有天吾不患
살진 고기 삶아 놓고 술잔이나 기울이리 / 爛烹肥肉倒深巵



목은시중(侍中) 송헌(松軒)에게 부친 시는 아래와 같다.
1
죽어 마땅한 신의 죄 성주의 인자로 / 臣罪當誅聖主仁
관내에 살게 되어 몸 편하다오 / 屛居關內得安身
어이 천행을 만났는가 물어 온다면 / 問渠何以逢天幸
송헌이 나의 친구여서라고 / 只爲松軒是故人
1
흰 머리 신세가 사양에 놓였으니 / 白頭身世已殘陽
직 없고 밭 없어도 상관 없어라 / 無職無田赤不妨
산에 노니는 흥취 있는데 / 只有游山高興在
낭묘에서 헤아려 주기까지 바라리까 / 敢煩廊廟一商量
1
들판에 가을 드니 경치 맑게 변하여서 / 秋入郊原淑景移
물화가 산뜻한데 비 또한 적셔주네 / 物華晴好雨仍奇
태평한 낭묘에 훌륭한 모임 많았는데 / 太平廊廟多高會
언제나 연 구경가는 이 그 누구이런고 / 每趣看蓮又是誰
1
세 번째 함창길 흥 다시 새롭구나 / 三到咸昌興更新
여전히 꾀꼬리는 친절도 하여라 / 依然黃鳥赤相親
한산은 나의 부모 산소가 있는 고을 / 韓山有我先墳在
중추에 맞추어 양친께 배례하리 / 欲及中秋拜兩親
1
삼한이 천명 맞아 날이 방금 한창인데 / 三韓迓命日方中
백 번을 꺾여도 사귀는 정 물이 동으로 흐르는 듯 / 百折交情水必東
난리는 저절로 사라지고 화기 동함은 / 乖亂自消和氣動
황각에 맑은 기풍 있어서이네 / 只緣黃閣有淸風


목은정포은(鄭圃隱)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우연히 시를 지었다.

성의 공격 대의 탄핵 지금까지 이르더니 / 省擊臺彈直到今
오천의 기화가 남의 맘을 놀라게 하네 / 烏川奇禍駭人心
오고 가며 마음을 쓰나 일에 무슨 방해되랴 / 往來屑屑何妨事
송헌이 날 사랑하는 것 다시금 느꺼워라 / 更感松軒愛我深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무자ㆍ기축년(1588~1589, 선조 21~22) 사이에 건원릉(健元陵 태조능) 위에서 곡성(哭聲)이 들려왔는데 수호(守護)하는 군사들이 가서 살펴보면 들리지 않았다. 수호하는 군사들만 들은 것이 아니라, 삭망제(朔望祭) 때에 헌관(獻官)과 집사원(執事員)도 가끔 주산(主山)에서 가느다란 곡성이 나는 것을 들었는데, 무슨 연고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왜적(倭賊)이 바다를 건너와서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가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성조(聖朝)의 혼령(魂靈)이 지하에서 걱정하고 애달파하여 이 세상에 정녕하고 간곡(懇曲)하게 가르쳐준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상하(上下)가 모두 어둡고 어리석어서 경계할 줄 몰랐으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 우리 나라가 개국한 지 2백 년이다. 세종(世宗)성종(成宗)이 백성을 편케 하고 은덕으로 보살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살육(殺戮)을 하였지만, 중종명종이 정사를 거듭 밝혀, 너그럽게 돌보았다. 대단한 병란으로 인한 참혹함도 없었고, 9년 홍수(洪水)와 7년 대한(大旱)같은 재앙도 없이, 금상(今上 현재 임금 즉 선조) 때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백성은 번거로운 부역(賦役)에 곤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야(田野)는 개척(開拓)되고 일정한 살림이 있었고 숫자도 많아지고 부유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朝廷)에서, 아래로는 여염집 필부(匹夫)까지 호사하기를 숭상하여, 오직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힘을 썼다.

   물(物)이 성했다가 쇠하여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상례이다. 수십 년 이래로 역질(疫疾)이 유행하여 백성이 많이 죽었고, 기축년 옥사에 죄를 얽어 만들어서 3년을 끌며 끝나지 않았는데, 죽은 자가 무려 1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임진년에는 왜노가 온 나라 군사를 몰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거의 다 죽였고, 간혹 남은 백성은 직업을 잃고 농지를 잃어 성안과 지방에 누워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아 있었다. 또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逆賊)이 있다는 고발이 있어, 그들은 비록 형(刑)을 받았으나, 서민(庶民)들도 또한 많은 해를 입었다.

   더구나 역질이 한창 성한 중에 학질(瘧疾)이 횡행하는데, 고약한 비바람에 여러 가지 놀랄 만한 재앙이 잇달아서 한번 전염되기만 하면 이내 죽으니, 겨우 살아남은 사람인들 그 어찌 며칠 안 되어서 다 없어지지 않겠느냐? 아! 인간을 사랑하여 살리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본심인데, 어찌하여 진노(震怒)하기를 그만두지 않는가? 왜노를 불러들여 폭행을 하게 하고 악귀가 흉한 짓을 하도록 맡겨두어 죽이고 또 죽여서, 지금 와서는 더욱 심하게 하니, 인(仁)으로 덮어주고 하민(下民)을 불쌍하게 여기는 지극한 덕이 과연 이와 같은가? 옛 사람이 말하는 죽을 운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온 세상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별도로 마땅한 사람 하나를 낳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청구(靑丘) 수천 리 지역에 다시는 인간이 없고 원귀(寃鬼)의 터로 변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어지러움이 심하고 비운(否運)이 극도에 이르게 하여 인심이 허물을 후회하고 다스림을 생각하도록 한 다음에 다시 태평한 운수를 열어주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늘의 뜻을 진실로 알 수 없다.
○ 삼국(三國) 시대는 예문(禮文)이 소박하고 간략하였으며, 고려도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였으나 상례(喪禮)가 간략함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왕조에 와서는 예절 조목이 크게 갖추어져서, 비로소 최질(衰絰 상복) 거려(居廬 상주가 여막에서 사는 것)하는 제도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예법을 탕멸(蕩滅)하여, 드디어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만들고 어기는 자는 죄를 주었다. 사대부(士大夫)가 휩쓸려 따랐으나 또한 예법을 지켜, 심상(心喪)하는 자도 있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예전의 예법을 회복하였고, 정덕(正德) 기묘년 무렵에는 여러 현인(賢人)이 조정에 가득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강구해서 당시 후진들이 앞을 다투어 따랐다. 그리하여 여염에서는 단지(斷指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죽어가는 부모에게 먹이는 것)ㆍ할고(割股 다리 살을 베어서 병든 부모를 살리는 것)ㆍ철죽(啜粥 삼년상 동안 죽만을 마시는 것)ㆍ여묘(廬墓) 사는 일은 흔히 있는 일들이었고, 혹 애훼(哀毁 지나치게 슬퍼함)하여 얻은 병이 고질이 되어도 오히려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아 그대로 죽는 자가 또한 많이 있었다.

   효도란 비록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나, 진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억지로 힘쓰는 데서 나온다면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치상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종 때에는 이에 한 가지 핑계로써 스스로 편리하게 하려는 의논이 있어, ‘3년 동안 여묘를 사는 것은 가례(家禮)의 본뜻이 아니고, 권도를 좇는 것이 성인(聖人)의 남긴 가르침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반혼(返魂 장사지낸 후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일)을 하게 되니, 어진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이거나 모두 예법을 하는 일이라 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 사이에 옛법을 좋아하는 인사(人士)가 우리 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으므로 반혼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는 뜻을 힘껏 말하였으나, 바로잡지 못하였다. 이로부터는 상례(喪禮)의 기강(紀綱)이 나날이 무너져 상주된 자가 반드시 궤연(几筵 영궤(靈几)와 혼백ㆍ신주를 모셔두는 곳)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병을 핑계하고 안방에 거처하면서 마시고 먹고, 손님 접대하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임진년 왜란 이후에 조정에서 무사(武士)에게 기복(起復 거상중에 나와 벼슬하는 것)해서 종군(從軍)하라는 명이 있었다. 비록 종군하더라도 기복의 복색이 저대로 있었는데, 졸곡(卒哭 삼우제 다음 지내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혹은 연상(練祥 소상)도 마치기 전에, 고기를 먹고 채색 옷을 입어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그 무부(武夫)에 대하여서는 나무랄 것도 못 되거니와, 문관(文官)으로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도 자기 스스로 기복한 자가 많았다. 혹은 모집을 핑계대고, 혹은 의병을 핑계하여 윤리와 기강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이롭게 하기만 일삼았다. 선비로서 스스로 글을 읽었다는 사람이나 예법을 배웠다고 자칭하는 자도 모두 상(喪)을 입지 않고 한 집안에 윗사람 아랫사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도 상례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 동안에 예법을 숭상하여 상례를 지킨 자는 아주 없고 겨우 몇만 볼 수 있었다. 아! 전일에 권도를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던 자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오늘날에 상주로서 남을 대하고 마음대로 먹는 자는 또한 무슨 심사인가? 이것이 이른바 본심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대저 삼년상이란, 천경지의(天經地義 하늘의 떳떳함을 얻고 땅의 마땅함을 얻은 도리. 즉 정당하여 바꿀 수 없는 도리)이며,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진 자는 삼년상도 가볍게 여기나, 못난 자는 마땅히 애써야 할 바이다. 이는 어찌 이와 같이 우리 본연(本然)의 애달파하고 망극하게 여기던 본심이 하루아침에 흉악한 왜적의 변으로 인하여 씻은 듯 없어지고,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져들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탄식할 노릇이고, 괴이한 노릇이다.

○ 만력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 국경에 들어왔다. 잇달아 변경 성(城)을 함락시키고, 별다른 저항을 받음도 없이 그대로 달려왔다. 이일(李鎰)의 군사는 상주(尙州)에서 패하고, 신립(申砬)의 군사는 충주(忠州)에서 함몰되었다.
29일 저녁에 급보가 갑자기 왔다. 이튿날 새벽에, 대가(大駕)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동궁(東宮)ㆍ중전(中殿)ㆍ여러 빈(嬪)과 함께 비를 맞으며 허둥지둥 나섰다. 임진(臨津) 나루를 건너, 동파역(東坡驛)에서 자고, 개성(開城)을 거쳐 다시 관서(關西)로 방향을 바꾸었다. 종실(宗室)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중도에서 도망쳐 흩어지고 대부분 호종(扈從)하지 않았다. 심지어 첨지(僉知) 성세령(成世寧)ㆍ전 직장(前直長) 성세강(成世康)같은 자는, 사대부로서 또는 7품 녹봉(祿俸)을 먹던 신하로서, 성안에 편하게 있다가 왜노에게 항복하였다. 성세령은 손녀(孫女)를 왜장에게 아내로 주어 귀염을 받아 그 덕에 온 동리가 편하였다. 종친 및 사족(士族) 등이 처음에는 모두 성문을 나서서 기내(畿內) 고을에서 난을 피하였으나, 성세령 형제가 평안 무사함을 보고 다시 성안에 들어간 자도 또한 많았다. 삼의사(三醫司)와 각 관청의 서리(書吏)ㆍ전복(典僕) 및 잡색(雜色) 무리도 모두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를 벌이고 물자를 교역(交易)하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방문하고 도박도 하였다.

   더욱이 통분(痛憤)한 것은 대가(大駕)가 막 성문을 나섰고, 왜적은 채 입성(入城)하기도 전인데, 성안 사람이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내탕 부고(內帑府庫)에 있던 재물을 서로 탈취(奪取)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 궁궐(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및 육부(六部), 크고 작은 관청에다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불탔다. 그들의 심사를 살펴보면 흉적(凶賊)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였으니, 매우 두렵다.
그후 중국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와서 평양에 있던 왜적이 섬멸(殲滅)되니, 왜적들은 저희들의 형세가 어려워짐을 스스로 깨닫고 물러가려고 사방 성문을 모두 닫고, 오직 숭례문(崇禮門) 하나만 열어두었다. 그리고 밤중에 분탕질하면서 성안의 늙은이 젊은이를 몰아다가 죽였으므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 중에 요행으로 빠져나온 자는 도리어 말을 요사스럽게 꾸며서, 전일에 도성에 남고 떠나지 않은 것은 우리 군사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내응(內應)하고자 해서였다고 하였다. 민정(民情)이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그 두려운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야인(野人 여진족)이 모든 모물(毛物)을 진상(進上)할 때에는, 반드시 소속 변장(邊將)에게 간품(看品) 받는데, 변장은 그 수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각 거둬들이는 것이 있으니, ‘상납(上納) 인정(人情)’이라는 명목이었다.
   서울에 오게 되면 각 해조(該曹)와 정원의 하리(下吏)에게도 또한 다 인정물(人情物)이 있었다. 만력 정축년(1577, 선조 10) 겨울에 내가 나가서 양주 원 노릇을 하는데 나의 자식이 돌아가는 야인을 길에서 만나 동행하면서 묻기를,
“네가 진상한 것이 얼마이며, 어떤 것을 상으로 얻었느냐?”
하니 야인은,
“우리가 진상한 담비 가죽이 극히 좋았으므로, 당초 생각으로는 관직(官職)을 얻게 될까 기대했었는데 다만 상으로 포(布)를 받고 돌아왔소.”
하였다.
“어찌하여 관직을 받지 못하였는가?”
하고, 다시 물으니,
“인정 쓴 것이 모자랐던 까닭이오. 딴 사람은 다 주었는데 승지(承旨)에게는 주지 못한 까닭에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이 말은 반드시 정원 하리를 지목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변장이란 자가 간품(看品)하면서 인정물을 직접 받았으므로, 저 사람들은 각 관청에 인정 쓰는 것은 모두 관원이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 우리 나라 인정 쓰는 폐단이 그 해가 먼 지방 사람에게도 미쳐, 욕된 말이 조정 근시(近侍)의 반열에까지 이르니, 애닯구나.

성종 때에 손순효(孫舜孝)는 아주 융성한 은총(恩寵)을 받았다. 관동 방백(關東方伯)으로 나갔는데, 하루는 서울에 들어와서 숙배(肅拜)하게 되었다. 성종은 편전(便殿)에 납시어 인견(引見)하고 술을 내리고 조용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기를 오랫동안 하다가 파하였다. 손순효가 그날로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양사(兩司)는 손순효가 번신(藩臣)으로서 소명(召命)이 없었는데도, 마음대로 서울에 올라왔다 하여 그를 파직시켜, 무례한 죄를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은 편전에 양사 관원을 불러 술을 내리면서 묻기를,
“오랫동안 탑전(榻前)을 떠나 있으면서 그 임금이 그리워서 와서 보고 갔다. 이것은 인신(人臣)으로서 지극한 정인데, 이와 같이 논하니, 죄의 가볍고 무거움은 나로서는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밝혀라.”
하니, 양사 관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물러났다.

순회세자(順懷世子 명종(明宗)의 아들로 세자였다가 요절함) 때에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로서 나와서 뵙는 자가 모두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새로 제수(除授)된 관원이 동궁에게 사은(師恩)할 때에도 신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았다. 순회 때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에도 예가 또한 그러하였다. 무릇 춘방(春坊) 관원으로서 동궁의 신하라 하지 않고 궁료(宮僚)라 하는 것은, 대개 위에 군부가 계시므로 나라에 두 지존(至尊)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라가 결딴이 난 나머지 집정자(執政者)가 조종(朝宗) 여러 대를 계속해서 준행(遵行)해 오던 법규를 강구(講究)하지 않고 다만 《오례의(五禮儀)》의 ‘신이라 칭한다.[稱臣]’는 조문에만 의거하여 그 예법을 갑자기 바꾸어 버렸다. 무릇 나와 뵈옵는 관원은 반드시 신이라 일컫고, 사은하는 단자(單子)와 문서에도 모두 신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 대개 기묘 제현(己卯諸賢 조광조 등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이 예법 조문을 강구하여, 잘못하거나 빠뜨린 것이 없었다. 그들도 《오례의》에 신이라 일컫는 조문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때에는 신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 논의를 고쳐 정할 때에 반드시 정설(定說)이 있었을 텐데 지금엔 얻어 볼 수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느냐?

남사고(南師古)울진(蔚珍) 사람으로 여러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음양(陰陽)의 여러 가지 방서(方書)에도 능통하였으며, 천문(天文)과 망기(望氣)하는 술법도 잘 알았다. 조정에서 불러서 동반직(東班職)에 제수하였으나, 6품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 집에서 죽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원주(原州)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았는데, 임진년 여름에 광해군(光海君)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의 말이 증명되었다. 대개 공빈(恭嬪)의 부모와 그의 선대가 살던 곳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 30리) 되는 지역인 손이곡(孫伊谷)이었고, 그들의 무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술법이 정묘(精妙)함에 탄복하였다.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혀 극도에 이르자,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세 대장이 성씨가 다른 경대부(卿大夫)로서, 이윤(伊尹)ㆍ곽광(霍光)이 한 일을 행하여, 광포(狂暴)한 사람을 폐하고 성왕(聖王)을 세워서,중종 40년 동안의 태평한 치적을 이루어 사직에 공업(功業)을 세우고, 명성이 후세(後世)에까지 드리웠다. 세 사람 중에서도 성희안은 더욱 문신(文臣)으로서 세상 사람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성희안은 연산군의 후궁(後宮)을 첩으로 삼아 데리고 살았다. 아! 임금이란 하늘이다. 하늘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섬기던 임금이라도 나라를 망치게 하면 종묘사직을 위하여 그만 두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일신으로는 만고에 불행한 변고인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삼았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랴? 성희안이 성취한 공이 그리 작은 것은 아니지만, 지은 죄는 천지에 가득하다. 이런 무리와 함께 임금을 섬길 것인가? 저 따위라니. 저 따위라니.

용만(龍灣 의주)은 강 하나가 띠[帶]처럼 서로 막고 있어, 여기에서 서쪽은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귀머거리나 소경과 같아 보통 하는 말이라도 반드시 역관(譯官)에 의탁해야 된다. 요동은 본디 고구려 땅이었다가 당(唐) 나라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649) 말에 중국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그 전에는 반드시 우리 나라 말을 능히 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도 중국말을 잘하지 못할 리가 없고 다만 오랫동안 익숙해지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심하역(深河驛) 서쪽과 마파하(馬坡河)동쪽에 유관(渝關)이 있는데 바로 송(宋) 나라요금(遼金)과 서로 쟁탈(爭奪)하던 곳이다. 금(金) 나라가 차지하면 철마(鐵馬)와 견갑(堅甲)으로 멀리 휩쓸 수 있고, 송 나라에서 빼앗기면 평주(平州)ㆍ난주(灤州) 등 고을을 지켜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시황(秦始皇)몽염(蒙恬)을 시켜,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유관을 한계로 하였다.”
하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성터로 볼 만한 곳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관문(關門)을 만들어서 한계로 할 만한 곳도 아니다. 삼차하(三叉河) 동쪽을 요동이라 하는데, 유관에서 삼차하까지는 거의 8백여 리가 된다. 장성이 만약 유관까지였더라면 《사기(史記)》에 반드시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렀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형세를 보고 나의 의견을 간추리면, 몽염석문령(石門嶺)을 한계로 한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어떤 이는,
“진시황이 한번 포거(鮑車)에 오른 뒤에 부소(扶蘇)가 죽음을 당했고 몽염(蒙恬)이 칼을 받았으니, 준공(竣功)이 되기 전에 벌써 살해된 것이다. 그러면 유관과 석문령이 모두 당시에 역사(役事)를 미처 마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기에 나는,
《사기》 및 여러 가지 서적(書籍)에는 모두 성 쌓던 역사를 철회했다는 말이 없다. 그리고 조고(趙高)가 몽염을 죽일 때에 오히려 준공을 제때에 못한 것을 죄로 삼았다. 이세(二世)의 말년에 와서도 오히려, 여좌(閭左 땅 이름)의 백성을 일으켜서 어양(漁陽) 수자리에 가게 하였으니, 그 당시에 끝내지 못한 역사가 어찌 있겠느냐?”
말했다. 어떤 이는 또,
진시황이 백성에게 해를 끼친 것이 극도에 달했지만, 지금까지 장성(長城)의 덕을 보고 있다. 만약 도(道)가 있어 사방의 오랑캐가 잘 지켜준다면, 성이 있고 없고는 따질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만약 영구히 다스리지 못하고, 몹시 어수선해진다면 3리 되는 성과 7리 되는 외성[郭]도 오히려 삼가 지켜서 난폭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데, 하물며 화외(化外)에 있는 천교(天驕 흉노)의 사납고 거친 것들이야 요해처(要害處)에 방어 시설(防禦施設)을 하고 막아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한 시대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만세(萬世)의 백성을 편하게 하였음은 하늘의 뜻이라 하니할 수 없다. 시황이 비록 포악하고 패려함이 심하다지만 어찌 능히 하늘을 어기면서 이런 거창한 역사를 완성하였으랴?“
한다. 그 말이 이치에 근사하기에 우선 적어두는 바이다.

김안로(金安老)는 폐출(廢黜)되어 풍덕(豐德)에 살고 있었다. 민수천(閔壽千)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안로를 찾아보고,
“영공(令公)이 뛰어난 재주로써 연세도 아직 높지 않은데,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마치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안로는 다가앉으면서 넌지시 말하기를,
“조정으로 돌아갈 뜻이 어찌 없으리오. 다만 그 길을 얻지 못하였소.”
하니, 민수천은 말하기를,
“지금 세 허씨(許氏)와 두 심씨(沈氏)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으니, 만약 이 사람들이 끌어준다면 조정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는 허항(許沆)ㆍ허흡(許洽)ㆍ허확(許確)심언경(沈彦慶)ㆍ심언광(沈彦光)을 말한 것이었다. 김안로가,
“세 허씨와 두 심씨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고 묻자,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김안로는 조정 논의가 지향(指向)하는 바를 자세히 알고 그후부터는 남을 보면 반드시, 기묘 제현의 원통한 일을 풀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크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만약 조정에 돌아간다면 어찌 이와 같이 어물어물 세월만 보내고 말겠는가?”
하였다. 허항 등이 이런 소문을 듣고 자기들의 뜻이 같으니, 김안로를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원하고 싶었지만 명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인종의 매부(妹夫)였으므로 동궁을 보도(輔導)한다는 핑계로 말을 만들어, 힘껏 성원하였다. 그런데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오자, 전일에 한 말을 뒤집어 기묘 제현의 죄를 더욱 꾸며댔다. 허(許)와 심(沈) 등은 이미 그 당파에 들어가 도리어 김안로의 부리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혹은 매와 개[鷹犬] 노릇을 하고, 혹은 발톱과 어금니[爪牙]가 되어 조정의 기강은 어지러워지고 나라의 형세도 위태로워졌다. 다행히도 태평할 운수가 열려서, 간신(奸臣)이 죄를 입게 되어 세 허씨와 두 심씨도 혹은 내침을 당하고 혹은 참형(斬刑)을 받았으며, 민수천도 역시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는 형을 받았다. 소인(小人)이 틈을 타서 진출(進出)하기를 구하는 기미(機微)가 처음에는 아주 하찮은 일이었으나, 악인끼리 서로 결탁하여 돕는 화가 이 지경에 이르니, 매우 두려운 바이다.


목은이 우연히 지은 시가 있다.

현릉의 장상이 몇이나 남았는고 / 玄陵將相幾人存
벽상의 도형 또한 침침하구나 / 壁上圖形赤已昏
병 많은 목은은 벼슬 그만두었고 / 多病牧老頻任已
지금의 정사는 송헌 홀로 맡았네 / 至今經濟獨松軒
1
송헌의 충의 하늘에 닿으니 / 松軒忠義薄雲天
한의 강후 당의 양공과 어깨 겨루리 / 漢絳唐梁與比肩
태평한 참 기상을 알고 싶거든 / 欲識太平眞氣像
문 닫고 베개 베고 단잠 자노라 / 閉門高枕得安眠
1
단잠 자며 내 이미 무위함을 기뻐하니 / 安眠喜我已無爲
뜬 구름같은 세상 공명 생각 끊었네 / 浮世功名絶不思
다만 한 되는 건 평소의 버릇 남아 / 只恨多生餘習在
때때로 흥이 나면 시를 짓는 것 / 時時寓興卽題詩


목은이 스스로를 읊조린 시가 있다.
1
이 늙은이 신장은 안영 같지만 / 老翁身似晏嬰長
비파 밀치니 증점처럼 뜻이 크구나 / 舍瑟還同點也狂
돌아감 청했으나 어디로 가리 / 縱得乞歸何處去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하기만 하여라 / 桃花流水渺茫茫
1
자사가 당일에 중용을 지으시고 / 子思當日作中庸
극구 칭찬했네 그 조부의 풍도를 / 極口稱揚乃祖風
대대로 아름다운 건 한산의 문자인데 / 世美韓山文字耳
지금엔 시구도 잘 짓기 어려워라 / 只今詩句尙難工


목은의 ‘실인(室人)’을 읊은 시가 있다.

젊어서는 벼슬하느라 하늘가에 떨어져서 / 少年遊宦各天涯
꿈 속에 서로 만나 그리움을 나누었소 / 夢裏相逢話所思
오늘도 전날과 같은 줄을 어이 알리 / 今日那知是前日
마음이야 기쁘지만 또 한편 의심되오 / 縱然心喜又心疑


○ 또 사물을 대하여 지은 시가 있다.
전 자로 된 창이 구 자 뜰에 닿는데 / 田字窓臨口字庭
조석으로 밥 짓는 연기 빈청에 가득하네 / 炊煙朝暮鎻虛廳
문에 나서서 긴 휘파람 불 만하구나 / 出門可是舒長嘯
눈앞의 관악산이 각별히 푸르러 / 滿眼冠山分外靑


점필재(佔畢齋)영해부(寧海府)를 지나다가 목은을 회상하여 지은 절구(絶句)가 세 편이 있다.
1
무가보 뜰 가운데 화씨의 구슬이요 / 無價庭中和氏璧
관어대 아래 북해의 곤어였네 / 觀魚臺下北溟鯤
소매 흔들며 연ㆍ계 지방 놀고부터는 / 自從擺袖遊燕薊
운몽호(雲夢湖)도 시시해서 삼킬 것이 못 되었네 / 雲夢區區不足吞
1
창해라 동쪽 끝에 선비를 몰라 / 滄海東頭不識儒
천 년의 간기가 다만 괴소였네 / 千年間氣只塊蘇
선생이 한번 나매 사람의 상서 되어라 / 先生一出爲人瑞
이로부터 단양엔 초목도 시들어지리 / 從此丹陽草木枯
1
사우의 연원이 전후에 뛰어나서 / 師友淵源絶後前
청구의 인물을 다 키워내셨네 / 靑邱人物盡陶甄
지금에야 비로소 즐기시던 곳 지나니 / 如今始過軒渠地
동시에 태어나 채찍 잡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 恨不同時執一鞭


○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에 왕방(王昉) 조반(趙胖)이 명(明) 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예부(禮部)에서 신등을 불러,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가 황제(皇帝)에게 나와서 호소하기를, 「고려 이 시중(李侍中)왕요(王瑤)를 임금으로 세웠으나, 왕요는 종실(宗室)이 아니고 인친(姻親)입니다. 그리고 왕요는 이 시중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서 상국(上國)을 위태롭게 하려 하므로, 재상 이색(李穡)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다가 곧 모두 죽음을 당하고 귀양도 갔습니다. 귀양간 재상 등이 우리를 보내, 천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하고 이어 천하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윤이이초가 기록하였다는 성명(姓名)을 내어보였다. 이리하여 대간(臺諫)에서 윤이ㆍ이초의 당(黨)을 문초하게 하는 한편, 이색등을 청주(淸州) 옥에 가두고 문하 평사(門下評事) 윤호(尹虎) 등을 보내서 문초하게 하였으나 여러 죄수는 모두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과 비가 크게 일고 앞 냇물이 급히 넘쳐 남문을 휩쓸고 바로 북문을 덮쳤다. 성안에 물 깊이가 한 길이 넘고 관사와 민가가 거의 다 떠내려가고 잠겨버렸다. 객사(客舍) 앞에 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들은 허둥지둥 나무를 부여잡아 죽음을 면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왕이 교서(敎書)를 내려 석방하였다.


권 양촌(權陽村)은 이런 시를 지었다.

떠도는 말이 불행하게 주공에게 미치니 / 流言不幸及周公
갑작스러운 큰 바람에 좋은 벼 쓰러졌도다 / 忽有嘉禾偃大風
듣건대 서원에 홍수가 넘쳤다니 / 聞道西原洪水漲
천도는 고금이 같음을 알았노라 / 始知天道古今同


김자수(金自粹)한산(韓山)을 제목으로 읊조렸다.

동국 문장을 집대성한 이로 / 東國文章集大成
가정 부자가 뭇 인재 중 첫째였네 / 稼亭父子冠群英
산천의 빼어난 정기 지금도 예와 같은데 / 山川孕秀今猶古
묻노니 어떤 이가 그 성명을 이을런고 / 且問何人繼姓名


조계생(趙啓生)이 그 시를 차운(次韻)하였다.

산은 곰나루를 끼고서 첩첩이 서 있는데 / 山傍態津疊嶂成
마침내 이씨가 그 영기를 받았구나 / 終敎李氏稟其英
부자가 과거에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이 고을 이름을 천하가 다 알았네 / 天下皆知此邑名


‘뽕잎 먹는 누에소리[食葉蠶聲]’에 대한 시로,
푸른 나무 그늘 속에 가을비 뿌린다 / 綠樹陰中洒秋雨

‘솜 타는 활소리[彈綿弓響]’에 대한 시로,
흰 구름 무더기 속에 봄 우뢰가 동한다 / 白雲堆裏動春雷

라는 것을 세상에서 어무적(魚無迹)의 시라 전해 온다. 비록 전해 오는 말이 옳은지는 지금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참으로 소리 있는 생생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시가 있다.

밭 가는 소에겐 밤 넘긴 풀 없는데 / 耕牛無宿草
광에 있는 쥐는 남은 양식 있구나 / 倉鼠有餘糧
만 가지 일에 분수 정해 있는데 / 萬事分前定
덧없는 인생 스스로 바빠하네 / 浮生空自忙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인지 알 수 없으나, 또한 재물을 탐내기에 급급하여 분수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경계가 될 만하다.


○ 고려 말엽에 시승(詩僧) 선탄(禪坦)이 어느 날 새벽에 송경(松京) 동쪽 성문 밖을 지나다가 닭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끝 연구(聯句)에,

천 마을 만 부락이 다 꿈속인데 / 千村萬落同昏夢
꼬리 빠진 수탉은 때를 잃지 않는구나 / 斷尾雄鷄不失時

했다. ‘꼬리 빠졌다[斷尾]’는 것은 선탄이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나라가 장차 망할 참인데, 여러 사람이 능히 알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었다.

○ 진사 조욱(趙昱)은 자는 경양(景陽), 호는 보진암(葆眞庵)인데, 만년(晩年)에 용문산(龍門山) 밑에 집을 짓고 용문거사(龍門居士)라 하기도 하였다. 능란한 문장과 조촐한 절조로써 한 세대에 훌륭한 인사였다. 조정에서 특별히 발탁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삼았으나,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곧 병을 핑계하고 돌아왔다. 일찍이 원성(原城) 노 처사(盧處士)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시를 지었다.

경장천 냇가에 해가 질 무렵 / 慶莊川上日斜時
문앞에 말 세우고 목동에게 물었더니 / 立馬門前問牧兒
주인은 서울 갔다 알려주누나 / 報道主人京洛去
온 하늘 풍월인데 시 못 지음이 한스러워 / 一天風月恨無詩


○ 선조(先祖)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목은의 막내 아들인데, 무덤이 한산(韓山) 고을 목은 무덤 아래 있다. 성종이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死藥)을 내릴 때에, 공의 손자 이파(李坡)가 예조 판서로 있었다. 연산군이 당시의 재상과 언관(言官)의 죄를 물을 때에 이파는 벌써 죽어 관을 쪼갬[剖棺]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緣坐)되어서 무덤을 허물려서 평평하게 되었다가 중종이 반정(反正)한 후에도 오랫동안 봉분(封墳)을 쌓지 못하고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이유청(李惟淸)은 양경공의 형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이니, 공에게는 종손(從孫)이 된다. 하루는 일찍 서울 집에 달려와서 봉화(奉化) 원을 지낸 나의 증조(曾祖) 이장윤(李長潤) 공에게 묻기를,
“꿈에 의젓한 어른이 말하기를, ‘집이 부서져서 비가 새어도 자손이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수리하지 못하는데, 문중(門中)에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으니,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꿈을 깨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젖었습니다. 우리 문중에 반드시 변을 겪은 뒤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봉화 어른께서 양경공의 무덤이 허물어진 뒤에 여러 해가 되도록 복구하지 못한 사유를 자세하게 말하니, 상공(相公)은 크게 놀랐다. 드디어 함께 힘을 합쳐 흙을 보태어서 봉분을 만들었다.

○ 연산 무오년(1498)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죽였다. 그후에 연산군은 명문(名文)을 짓는 선비를 이미 잃었으니 이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에다가 유생(儒生)을 크게 모아 시험을 치러 뽑았는데, 전시(殿試)에 책문(策文) 한 가지만 짓게 하였다. 과차(科次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차례)를 정하는 참인데, 한 시권(試券)은 말 꾸민 것이 졸렬하고 껄끄러워 집필관(執筆官)이 차등(次等 4등임)으로 정하려 하였다. 상고관(上考官)은 삼하(三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 3등 중 셋째 등급)에 들 만하다 하였으나, 집필관이 인정하지 않았다. 상고관은 계속 우겼고 고시에 참여한 여러 관원은,
“만약 이런 것을 입격(入格)시키면 반드시 과방(科榜)에 오르게 될 것이니, 참으로 불가하다.”
하여,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상고관이 삼하로 정하도록 강압하자, 집필관은 분이 나서 붓을 휘둘러 가로 세 획을 그은 데다가 바로 획을 내리긋고 점을 찍은 다음 나가버리니, 실제로는 이하(二下 2등 중 셋째 급)가 되어버렸다. 고사(考査)하기를 마친 후에 등수를 갈라서 서계(書啓)하자, 연산군은 2등에다 낙점(落點)하였다. 훌륭한 문장과 뛰어난 글씨로 삼상(三上)에 입격한 자는 모두 떨어지게 되었고, 다만 김극성(金克成) 등 6인이 뽑혔다. 그릇 이하(二下)로 적힌 자는 횡성 훈도(橫城訓導) 오희증(吳希曾)의 글인데, 말등(末等)에라도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운명(運命)이 아니냐?

정소종(鄭紹宗)이 젊었을 때, 꿈에 한 노인이 정소종의 손바닥에다,
우임금 발자취 있는 산천 밖이요 / 禹跡山川外
우 나라 뜨락의 새와 짐승 사이다 / 虞庭鳥獸間
라는 시구를 적었다. 소종은 그 시구를 기억하여 두고 잊지 않았다. 연산군 갑자년(1504) 겨울에 특별히 전시(殿試)를 보이는데, 칠언율시(七言律詩)로 하였다. 그 글제는, ‘봄에 이원(梨園)을 개방하고 한가롭게 기악(妓樂)을 본다.’라고 하였는데, 연산이 직접 낸 것이다. 정소종은 홀연히 젊었을 때 꿈에 본 노인의 시구가 떠올라 각각 두 자씩을 보태어, 글귀를 지었다.
봄은 우임금의 발자취가 있는 산천에 무르익고 / 春濃禹跡山川外
풍악은 우 나라 뜨락 새와 짐승 사이에 울린다 / 樂奏虞庭鳥獸間
그때 김 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가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석하였다. 상고관이 정소종의 글을 하등(下等)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모재가 이것은 실로 귀신의 말이라고 크게 칭찬하여, 드디어 상등으로 정했다. 그런데 최세절(崔世節)이 다른 시구와 통산[通算]하여 장원이 되고, 정소종은 넷째로 되었다. 과방(科榜)이 발표된 후에 정소종이 은문(恩門 과거 급제자가 시관을 일컫는 것)으로서 모재를 가서 뵙자, 모재는 시상(詩想)이 여기까지 미치게 된 것을 물었다. 정소종이 젊었을 때 꿈을 꾼 일을 자세히 말하였더니, 모재는 더욱 경탄(驚歎)하였다. 모재의 글을 알아보는 명성이 이로부터 나타났다.

○ 상공(相公) 안당(安瑭)은 평소에 자라 먹기를 좋아하여 가끔 삼강(三江) 어부(漁夫)에게서 구해 오고, 또한 공이 즐긴다는 말을 듣고서 가지고 와서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공이 화(禍)를 당하기 전에, 동전(銅錢)만한 작은 자라가 행랑 마루 안팎 뜰에 헤아릴 수 없이 흩어져 다녀 다 쓸어낼 수 없어, 뜰에 독을 두고 집어넣었다가 가득 차면 독을 져다가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런 후 겨우 1년이 되자, 공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무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되어 죽었으니, 화가 난 것이 자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또한 자라의 요변(妖變)이라 하겠다. 그의 집은 소격동(昭格洞)에 있었고, 무과(武科) 이승종(李承宗)이 살았는데, 임진년 난리에 왜적이 불태워 버렸다.

○ 무과 조현범(趙賢範)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부엌에서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것이 자라탕이었고, 공도 또한 그것을 즐겼다. 한번은 어부가 3~4일 이 지나도록 자라를 바치지 않자, 부엌일을 맡은 아전이 공에게 알려 공문을 띄워서 재촉한 다음에 큰 자라 세 마리를 가지고 왔다. 공은 자라목을 새끼로 잇달아 묶어, 부엌일을 맡은 아전에게 주고 내일 올리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칼[枷]을 쓴 죄수(罪囚) 세 사람이 한 소장(訴狀)으로 호소하기를,
“당초에는 우리 무리가 참으로 번성하였는데, 본디 죄과(罪科)도 없이 날마다 죽음을 당한 지 이제 30여 년이 되었고, 이제 우리 세 사람도 또한 잡혀 갇히게 되어, 북쪽 청사 마루 밑에 엎드려 있습니다. 총명하신 부윤께서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공은 꿈에서 깨어, 곧 형리(刑吏)를 불러서 문틈으로 물었다.
“같은 죄로 잡혀서 갇힌 자가 누구누구인가?”
하니, 형리는,
“갇힌 사람 중에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은 다시 부엌일을 맡은 아전을 불러서 세 마리 자라가 있는 곳을 물었다. 부엌일을 맡은 아전은,
“관청 광 안에 두었는데, 없어져서 지금은 간 곳을 모릅니다.”
하였다. 공이 북쪽 청사 마루 밑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목 묶인 세 마리 자라가 과연 그 밑에 있었다. 공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여겨, 곧 건장한 아전을 어부들이 있는 곳에 달려 보내어, 이제부터 다시는 자라를 잡지 말 것이며, 비록 잡히는 것이 있더라도 모두 놓아주게 하였다. 관아(官衙)에 있는 세 마리 자라는 공이 직접 가서 강에 놓아주고, 이날부터 다시는 자라를 먹지 않았다.

무주(茂朱 무주는 지명으로, 무주 원님을 나타내는 것) 명은(尹鳴殷)은 집이 흥인문(興仁門) 안 동학(東學) 근처에 있는데, 문간 뜰에 늙은 홰나무가 있었다. 윤명은이 벼슬하기 전에 한번은 사정(射亭)에 있는 친구 집에 걸어서 갔다가, 술을 너무 마시고 흠뻑 취하여 날이 어두워서 홀로 돌아오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술이 깨어 머리를 들어보니, 달은 지고 별은 엉성한데 고요하게 사람 소리가 없었다. 다만 남자 한 명이 자신이 누워 있는 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으나 윤명은은 감히 성명을 묻지 못하였다. 술이 덜 깨어서 느린 걸음으로 돌아오는데, 그 남자도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길에서 어떤 사람이 그 남자와 만나 서로 말하는데,
“어디를 갔었는가?”
하자, 남자가,
“주인이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가서 맞아 온다.”
하는 것이었다. 자기 집 홰나무 밑에 와서 돌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남자가 뜰에 있는 홰나무의 신(神)임을 알았다.

○ 만력(萬曆) 병술년(1586) 겨울에 여강(驪江)에서 어부가 얼음을 깨고 잉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크기가 두어 자나 되었다. 짊어지고 집에 돌아왔더니, 그날 밤에 고기가 주인의 꿈에 나타나,
“부디 나를 놓아주고, 해를 끼치지 말라.”
는 것이었다.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 삶아 먹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웃 사람의 꿈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나, 이웃 사람은 놓아주지 않고 마침내 잘라서 삶았다. 그런데 그 국을 한 종지라도 맛을 본 사람은 누워 앓지 않는 이가 없었고, 6~7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아! 고기의 신이 능히 어부의 꿈에 급한 신세는 알리면서, 얼음 밑의 낚시바늘은 피하지 못하였고, 또 국 먹은 사람에게 병을 줄 줄은 알면서 식탐 있는 사람에게 삶김은 능히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으로서도 궁(窮)한 바가 있고 지혜로는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안쓰럽구나.


송강사(松江寺) 돌비[石碑]에 이런 시가 있다.

비기를 서로 전해 9백 년인데 / 秘記相傳九百年
앞 사람은 벌써 갔고 뒷사람에게 옮겨지네 / 前人已去後人遷
삼도 한낮에 여우와 토끼 오는데 / 三都白日來狐兎
오부 봄날에는 젓대와 거문고에 취하네 / 五部靑春醉管絃
신숭에 잎이 지니 차가운 비 내리고 / 木落神嵩寒泣雨
궁원에 풀이 나니 새벽 연기 자욱하네 / 草生宮苑曉生煙
황은은 너그러운 바다같이 깊어서 / 皇恩寬宥深如海
삼한을 두 번이나 온전하게 하였네 / 坐使三韓再得全

비석에 이 시가 있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발견되었고, 또 누가 지은 시인지도 알 수 없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전라 감사(全羅監司)계본(啓本)에,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첩정(牒呈)에, 예전부터 쇠무덤[鐵塚]이라 부르는 곳이 있어 헤쳐 보았더니, 쇠붙이는 없고 다만 지석(誌石)이 있는데,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동쪽으로 15리쯤 되는 거리에 황금총(黃金塚)이 있는데, 이것을 발견하면 그 이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식이 아비를 업신여기고, 종이 주인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중도 삿갓을 쓴다. 중이 속인(俗人)의 일을 하고 속인이 중의 일을 하며, 유생(儒生)은 붓과 벼루를 버리고, 베짜는 계집은 베틀과 북을 버리고, 농부는 쟁기와 보습을 버린다. 임진년에 나라가 셋으로 갈라졌다가 계사년에는 도로 안정되고, 오년(午年)ㆍ미년(未年)에는 태평하여진다.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피난하는 것이 제일이고, 호서(湖西)가 조금 편안하고, 여강(驪江)은 혈육이 낭자할 지역이다. 한양(漢陽)으로 환도(還都)하면 주(周) 나라 같이 8백 년을 지날 것이고, 중국 군사가 임진강(臨津江)을 건넌다면 주 나라보다 2백 년은 더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다. 대개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다. 항상 편하게 보전코자 하건마는 오직 그 인사(人事)의 득실(得失)과 운수(運數)의 소장(消長)으로 감응(感應)하여 간혹 혼란하기에 이르기도 하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본심(本心)이겠느냐? 지금 이런 말로써 본다면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과 흥하고 망함이 모두 일정한 운수에 연유한 것으로써, 하늘도 또한 어찌할 수 없으며, 사람의 힘도 그 사이에 능히 용납되지 못하는 것인가? 매우 괴이한 일이다.

○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어떤 사람이 남의 문간 벽에다 절구(絶句) 한 수를 적어놓고 갔다.”
하는데, 그 시에,

나는 신라의 말엽 사람 / 我是新羅末葉人
나이가 팔백 하고 다시 세 살이로세 / 年將八百又三春
바쁜 걸음에 비는 오고 돌아갈 길 멀어 / 行忙雨濕歸程遠
당신과 더불어 얘기하지 못하오 / 不與高門談笑然

그런데 사람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선(地仙)이 되어,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고운(孤雲)의 시일 것이다.”
고 하였으나, 나는 고운의 시원스러운 문장으로써 반드시 이렇게 속된 시는 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물며 고운이 지금까지 생존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으니, 이것은 미친 아이가 한번 희롱삼아 읊조린 데 불과한 것이리라.


○ 중종조 정덕 연간(正德年間 정덕은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505~1521)에 원역(院驛) 벽에 절구 두 수를 적은 것이 있었다.
1
비바람이 지난날 놀라게 하여 / 風雨驚前日
문명이 이때를 저버렸다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에 노닐며 / 孤笻遊宇宙
시끄러움 싫어서 시마저 그만뒀네 / 嫌閙竝休時
1
새는 무너진 원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頽院穴
중은 석양의 우물물을 긷누나 / 僧汲夕陽泉
천지를 집 삼는 길손 / 天地爲家客
건곤 어느 곳에 끝이 있던가 / 乾坤何處邊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교리(校理) 정희량(鄭希良)이 연산 때에 갑자년의 화(禍)가 있을 줄 알고 몸을 빼쳐 가버렸다. 어떤 이는 ‘강에 빠져 죽었다.’ 하고, 어떤 이는 ‘중이 되어 구름처럼 떠돌아다녔다.’ 하는데, 이것은 정희량의 시이다.”
한다. 지금에 와서 비록 정말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나, 또한 난을 피해 은둔한 자의 말이리라.

○ 선조 가정(稼亭 이곡(李穀))께서 36세 때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 천자가 친히 시험 보이는 과거)에 이갑(二甲)으로 등과하였다. 가정 이전에는 동국(東國) 사람으로서 이갑으로 등과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27세 때에 제과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고 장원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외국 사람이란 이유로 논란이 있어 억울하게 이갑 제이인(二甲第二人)으로 정해지고 말았다. 목은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 과거에 오른 뒤에, 천하가 모두 동국에 한산(韓山)이란 곳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그의 시에,
부자가 중국 과거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천하가 이 고을 이름 모두 알게 되었네 / 天下皆知此邑名
라는 것이 이것이다.

원주(原州) 흥원참(興原站)은 왜노가 수로(水路)로 우리 나라에 왕래하는 곳으로, 참(站)에는 뱃사람 이일정(李一貞)과 사삿집 종[私奴] 원유공(元有功) 등이 있는데, 왜말을 잘 해서 왜인들과 서로 친하였다. 내가 이일정을 불러서,
“왜인이 쳐들어오는 이유를 너는 평소에 이미 알고 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기축년 봄에 감사 정윤희(丁胤禧)가 체직되어 떠나는데, 도사(都事) 안중길(安重吉)이 따라왔습니다. 감사는 배로 건너고 도사는 우선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왜의 사신 평조연(平調淵)이 서울로 가면서 여기에 배를 대었습니다. 참정(站亭)에서 식사할 참인데, 반찬과 술과 안주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하인을 결박하여 땅에 넘어뜨렸습니다. 도사가 이 소식을 듣고 향통사(鄕通事)를 잡아가니, 왜의 사신은 크게 성을 내며, ‘관원은 각자 맡은 일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먹는 것은 국가 회계(會計)에서 빼주는 물건이니, 도사가 관여할 것이 아니다. 내가 정식대로 먹겠다는데, 도사는 자기일도 아니면서 이와 같이 업신여기오?’ 하며, 상을 밀치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와 원유공을 부른 다음, 칼을 휘둘러 옆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를 해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오로지 너희 나라에 잘못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배를 만들고 칼을 주조하여 멀리 휩쓸어 버리려는 계획을 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다. 명년에 우리 국왕의 사신이 나오면, 반드시 3~4년 이내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너희 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국왕의 사신이 나와서는 배와 사냥개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많이 청구할 터인데, 이것은 모두 너희 나라 형편을 정탐하려는 것이다. 우리 나라 형벌은 너희 나라 태장(笞杖)과는 다르다. 만약 잘못이 있으면 곧 작은 환도(環刀)로 목을 자르고 쟁반에 담아 여러 사람에게 보이므로 각자 힘껏 싸우니, 너희 나라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너희들은 만약 우리 군사가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거든 우리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착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다. 착한 자를 만난다면 숨어 피하게 하여 해치지 않겠지마는 악한 자를 만난다면 보는 대로 곧 죽일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위해 진심에서 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소인이 원유공과 함께, 비록 그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또한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 말을 목사(牧使) 김찬광(金纘光)에게 알렸더니, 목사는 ‘너는 어찌해서 망령된 말을 하느냐? 저들이 비록 그런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꼭 온다는 것도 아니고, 비록 들어온다 하여도 어찌 우리 나라 군사를 당하겠느냐? 조심하고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고 꾸짖었습니다. 그해 왜국에서 사신이 나와 매와 사냥개를 청구하였고, 오가는 길에 우리를 업신여기는 기세가 많았습니다. 그후 4년이 지난 임진년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서 곳곳에 분탕질을 하였는데, 이들 중에 사람을 잘 죽이는 자도 있고, 죽이지 않는 자도 있어 평조연의 말과 꼭 같았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를 속이지 않았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함경도(咸鏡道)는 야인(野人)과 이웃하여 있고 또 번호(藩胡)도 있어, 조정에서는 예부터 방어(防禦)하는 일을 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남북 병사(南北兵使)와 북도(北道)의 대소 수령(守令)은 모두 무부(武夫)를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예(例)였다. 더구나 조정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수령이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이 오로지 가혹한 징수와 혹독한 형벌을 일삼았고, 백성을 초개(草芥)같이 여겼다. 그래서 백성도 또한 수령을 ‘낮도둑’이라 지목하여 원수같이 여겼다. 간혹 문관(文官)을 가려서 보내기도 하나 백성들의 기대에 걸맞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북도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 처음 온 자가 있었는데, 동소문(東小門)으로 들어와서 성균관(成均館) 앞길에 이르러서는 같이 온 사람에게,
“여기는 어느 고을 읍내(邑內)이기에 관사(官舍)가 이같이 높고 넓은가?”
하고 물으니, 같이 온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가? 여기는 읍내가 아니라, 조정에서 ‘낮도둑’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한 말로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듣기에 또한 괴이하다.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유학(儒學)과 예악(禮樂)을 아는 사람 및 기예(技藝)에 능한 온갖 공인(工人)들을 3천여 명이나 거느리고 왔다. 상(商) 나라 문물(文物)을 다 거둬 동쪽으로 와서 평양에 도읍했던 것이다. 처음 왔을 때는 미개해서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있었고, 말이 통하지 않아 땅에다 글자 써서 비로소 뜻을 통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보궤(簠簋)에 담아서 먹고, 변두(籩豆)에 담아서 제사(祭祀)지내도록 가르쳤으며, 살아있는 자를 봉양(奉養)하게 하고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였으며, 남녀 혼인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고 인의(仁義)의 교화(敎化)를 일으켜 도둑이 화하여 양민(良民)이 되고, 오랑캐가 변하여 중화(中華)가 되었다. 그가 실시하였던 정전(井田) 제도는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천여 년 동안에 동국 백성으로서 삼강 오륜(三綱五倫)을 알고 군신 부자(君臣父子)의 도리를 유지하여 금수(禽獸)와 같이 됨을 면한 것은 모두 기자의 교화이니, 비록 집집마다 그의 신위(神位)를 만들어서 축원하고 제사하여도, 그의 덕을 갚기에는 오히려 모자랄 것이다.

하늘에는 열 가지 날이 있고 사람에게는 열 가지 등급이 있으니, 위로 공경(公卿)에서 아래로 하인에 이르기까지 높고 낮은 차례와 귀하고 천한 분수는 천지의 떳떳한 의(義)로써 진실로 문란하게 할 수 없다. 우리 나라 공천(公賤)ㆍ사천(私賤)의 법은 실로 성왕(聖王)의 정사가 아니다. 다 같은 동포(同胞) 백성이건만 억지로 종으로 만들어서, 대대로 내려가며 천한 무리에 쓸어 넣어 사족(士族)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심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기자가 삼인(三仁 은(殷)의 세 어진 이, 즉 비간(比干)ㆍ미자(微子)ㆍ기자(箕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나와 중국에도 없는 법을 만들었으니, 어찌 그만한 까닭이 없겠는가?

   대개 동방은 산과 땅의 형세가 이리저리 꾸불꾸불하여 험하게 생겼고, 인심과 버릇이 억세고 간사하며, 법령(法令)을 잘 따르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여 제어하기가 어렵다. 아침에 내린 명으로 저녁에 단속할 수 없고, 또한 사형으로 악을 징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간사한 도둑이나 장물을 탐하는 무리는 잡아다가 그 집 노예(奴隸)로 삼아, 각자 도맡아 다스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좋게 변화시켜 대문을 닫지 않아도 되는 훌륭한 다스림을 이룩하여 이로부터 드디어 동방 대대로 바꾸어지지 않는 큰 법을 이루게 되었다. 집집마다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고, 사람마다 상하(上下)의 분의(分義)를 알았으며, 나라의 역적(逆賊)과 사가(私家)의 반노(叛奴)를 같은 법률로 다스렸다. 지금도 수천여 년을 그대로 따라 지켜서 바꾸지 않아 예양(禮讓)하는 후(厚)함과 형정(刑政)의 훌륭함이 다른 나라가 따르지 못할 바이다. 그런 까닭에 중국 사람이 모두 예의의 나라라 일컬었고, 혹은 작은 중화(中華)라고 지목하니, 이것은 중국과 같은 방법이 아니면서 결국 다스려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 제도를 바꾸어 중국과 꼭 같이 하려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정사가 풍속에 따라 변하고 풍속에 따라서 교화시키는 뜻을 모르는 것이다. 다만 크게 어지럽힐 뿐이니, 이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

○ 우리 나라에서 인심과 풍속이 교활(巧猾)하여 교화시키기 어려운 곳으로는 반드시 호남(湖南)을 첫째로 삼는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덕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니, 만약 덕으로써 인도한다면 어찌 변화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남방(南方)에 보통 있는 물건을 보더라도 산야(山野) 채소의 맛과 개울의 물고기와 과수원의 과일 모양이 모두 동북(東北) 지방의 것과 같지 않으며, 새ㆍ까치의 울음, 닭ㆍ개의 소리가 모두 앙칼지고 급하며, 집에서 기르는 돼지도 붉은 빛이 많고 고양이의 얼룩도 모두 어두운 청색이거나 회색이며, 흑백 바탕에 금색 얼룩무늬가 있는 것은 아주 없다. 도내(道內)가 모두 그러하니, 물색(物色)이 다른 지방과 다름이 이와 같으니, 매우 괴이하다.

○ 우연히 진양산(陳兩山)이 기록한 것을 보았다.
도척(盜跖)이 말하기를, ‘도둑질하는 데에 또한 도(道)가 있으니, 남의 방안에 있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성(聖)이고,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것은 지(智)이고,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고, 뒤에 나오는 것은 의(義)이고,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 도(道)가 없이 큰 도둑이 되는 자는 천하에 없다.’ 하고, 부자가 말하기를, ‘부자가 되고 싶거든 먼저 5적(賊)을 버리라. 5적을 버리지 않고 능히 부자가 되는 자는 천하에 없다. 5적이라는 것은 인ㆍ의ㆍ예ㆍ지ㆍ신(仁義禮智信)이다.’ 하였다. 도둑은 다섯 가지의 도를 보존하여 그들의 도둑을 이루려고 하고, 부자는 다섯 가지가 적이라 하여 꼭 버리고 부자가 되려 하니, 그렇다면 지금 큰 부자는 옛날 큰 도둑보다 심한 자들이다.”
하였으니, 진공(陳公)이 세상을 풍자(諷刺)한 뜻이 지극하다. 양화(陽貨)가
“부자가 되려 하면 어질지 못해진다.”
한 것도 또한 그 하나이다.

중원(中原) 영평부(永平府) 칠가령(七家嶺)에서 서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높은 봉우리 위에 당(堂)같은 무덤이 있는데, 경계가 분명하므로, 통역에게 묻기를,
“이 산이 무슨 산이며, 누구네 무덤인가?”
하니, 통역은,
환야산(幻爺山)입니다.”
라고 답했다.
“환야는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식을 두었는데, 공순하지 못하여,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고 북쪽을 물으면 남쪽을 가리켰으며, 땔나무를 하게 하면 반드시 돌을 져오고, 물을 길어 오게 하면 반드시 불씨를 받아왔다. 그 아비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자식에게, ‘나를 반드시 높은 봉우리 위에다 장사하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아비의 뜻은 평지에 장사하라 하면 반드시 높은 봉우리에다 장사할 것이므로 높은 봉우리에다 장사하라 한 것은 아래쪽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얻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그 자식은, ‘임종(臨終) 때의 말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곳에다 장사하여 길 가는 사람이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한다고 하며,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 그 아비의 뜻을 어기지 않은 것이 없다 하여, 이 산을 환야산이라 이름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것도 옛날 이리 새끼가 그 아비의 죽을 무렵의 말을 따라 물속에다 장사하고, 모래를 쌓아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과 꼭 같다. 불순(不順)한 자식을 경계하는 말이다.

○ 옛날 명왕(明王)은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지켜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하지 않고 능히 그 국가를 보존한 자는 있지 않았다. 한(漢) 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와 같이 너그럽고 어진 임금으로서도 수천 학도(學徒)가 궐문(闕門)에 서서 슬프게 부르짖음에는 비록 애달파하였지만, 구양흡(歐陽歙)의 죄는 끝내 용서하지 않아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광무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당(唐)ㆍ송(宋) 여러 임금으로서 조금이라도 다스림의 도를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조종(祖宗)의 세대는 조정이 맑고 밝아서 간사한 것이 행해지지 못하였었으니, 세종ㆍ성종 두 임금의 다스림은 후세에서 능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중종 초년은 비록 연산군의 혼란을 겪은 다음이지만 국가의 전장(典章)이 아직도 남았고, 공정한 논의도 없어지지 않아서 사대부(士大夫)로서 탐심이 많고 행실이 더러워서 남의 기롱을 당한 자는 모두 조정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자문(咨文)에 쓰는 종이 한 장이라도 개인적으로 쓴 자는 종신토록 누명(累名)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금법(禁法)이 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7년 이래로는 권력 잡은 간사한 자가 잇달아 기율이 없어지고, 재물을 탐내는 버릇이 나날이 성해져서, 공정한 논의에 의해 버림을 당해 남의 손가락질을 받던 자가 교만스럽게 큰소리를 치며, 남들이 비웃고 욕을 해도 다시 부끄러워함이 없다. 다만 법대로 거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서로 그 본을 받고, 더욱 그릇된 곳으로 유인하니, 이러고서 민생이 곤란하지 않고 종사(宗社)가 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 제왕(帝王)의 법이란 모두 인정(人情)에 근본하므로, 반드시 인정에서 근본하고 천리(天理)에 순응(順應)한 다음이라야 시행하는 데에 어긋남이 없고 후세에 나무랄 일이 없다. 우리 나라 법에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여자의 정절(貞節)은 극히 권장할 만한 것이나, 나이 젊은 과부를 일체 금고(禁錮)하고, 개가(改嫁)하여 낳은 자식은 간음(姦淫)하여 낳은 것으로 단정해 버리니, 이것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일까? 그리고 고자[宦者]라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흉하고 더러워서 실상 인류(人類)가 아닌데, 아내를 두고 가정을 이루어 일반 사람과 똑같이 살고, 혹 아내가 행실을 삼가지 못하면 죄를 주니, 이것이 천리(天理)에 합당할까? 인정에 어긋나고 천리에 거스림이 이보다 더함이 없으니, 성인의 법이 아닌 듯하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최영(崔瑩)의 무덤을 지나다가 시를 지었다.

위엄 떨치고 나라 구하느라 귀밑머리 희어졌네 / 奮威匡國鬢星星
말 배우는 아이까지 장군 이름 다 아누나 / 學語街童盡識名
한 조각 장한 마음 어이 없어질손가 / 一片壯心應不死
천추에 영원히 태산과 우뚝하리 / 千秋永與太山橫

○ 고려 조정은 오직 백성을 애호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낭장(郞將) 등은 백성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다스리는 도를 모른다 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은 제수(除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제(巨濟)는 바다 가운데 있어, 왜적이 우리 나라에 오는 첫 길목이지만, 오히려 문관(文官)으로서 6품에 처음 오른 자를 차임(差任)하였다. 이규보(李奎報)가 서문(序文)을 지어, 작별한 글이 《동문선(東文選)》에 기재되어 있어 지금에도 볼 수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낭장 등의 호소로 인하여, 비로소 선택해서 교대로 차임하겠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낭장으로서 수령(守令)이 된 자 역시 드물었고, 이때에 무과(武科)에서 뽑는 것이 다만 네 사람뿐이었다. 이리하여 5백 년 동안 백성이 생업을 편케 할 수 있었고 인구가 많아지고 또 부유하였으며, 여러 고을의 창고가 또한 가득 차게 되었다. 우리 나라도 대대로 무관은 내지(內地)에 차임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는데, 정릉(靖陵 중종의 능) 중년 이후에 권세가 있는 간신이 잇달아서, 뇌물만 좋아하고 방비하는 데에는 소홀하여, 친하고 나이 어린 무관을 부유한 고을 원으로 차임한 적이 많았다. 그 원들은 세도를 믿고 방자하여져서 남에게 환심을 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못하는 짓이 없어 민심이 원망하여 배반하고 나라의 근본이 병들어 버렸다.

○ 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조종 때에는 오직 대전(大殿)동궁빈(東宮嬪)만은 사대부 집 딸의 나이 단자(單子)를 거둬, 그들을 대궐에 들어오게 하여 선택하였고, 이 밖에는 비록 대군(大君)의 아내라 하더라도 혹 상궁(尙宮)을 시키거나 혹은 감찰각씨[監察可氏]를 시켜서, 여염집 처녀의 본집에 가서 선택하여 의정(議定)하였다. 금상(今上) 때에 와서 후궁(後宮)이 낳은 여러 군(君)의 아내도 모두 단자를 거두고 처녀를 대궐에 오게 하여 직접 선택하는데, 이것은 선왕 여러 대로 지켜 오던 가법을 어긴 것일 뿐 아니라, 분수를 넘치고 예도를 넘는 화(禍)도 또한 여기에서 시작된다.

○ 중국은 문명한 지역이다. 구주(九州) 밖의 사해 모퉁이에 있는 나라는 각각 호칭이 있으니, 남쪽을 만(蠻)이라 하는데, 만이란 벌레 같다는 것이고, 서쪽을 강(羌)이라 하는데, 강은 양[羊]과 같다는 것이고, 북쪽은 적(狄)이라 하는데, 적은 개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 동방만은 이(夷)라 하는데 이는 궁(弓)에다 대(大)가 있는 것으로 이것은 큰 활이니, 활을 잘 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지역으로서, 민속(民俗)이 어질고 오래 사는데 ‘이적(夷狄)에 임금 있는 것이 중국에 임금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고, 공자가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한 곳도 여기다. 또한 대살[竹箭]은 중국이 비록 넓다 하여도 오직 형주(荊州)의 형산(衡山)에서만 생산될 뿐 다른 고을에는 없는 까닭에, 중국 사람은 모두 나무로써 화살을 만든다. 우리 나라는 북방에서만 나지 않을 뿐이고, 각 도 모두에서 생산된다. 활이 억세고 화살이 날카로우며 사람이 날쌔고 말이 건장한 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수 양제(隋煬帝)당 태종(唐太宗)이 천하 군사를 일으켜 왔어도 능히 뜻대로 하지 못하고 갔는데, 지금 왜적에게 패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한 것은 활 재주가 예전 같지 못한 것이 아니고 다만 민심(民心)이 흩어져 배반한 지가 이미 오래였고 여러 장수가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서, 능히 진격하지 못해서이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 천하가 넓어 기후가 고르지 않고 풍속도 달라 외적(外賊)을 막아 싸우는 기구도 또한 그 지방에 따라 각각 다르다. 중국에는 중국의 장기가 있고 이적(夷狄)에는 이적의 장기가 있으니, 춘추 시대(春秋時代) 여러 나라를 보더라도, 진(秦)ㆍ초(楚)의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칼날, 제(齊)ㆍ진(晉)의 깃발과 칼ㆍ창, 그리고 한(韓)ㆍ위(魏)의 넓은 수레와 말배때끈과 가슴걸이[韅靷], 또 연(燕)ㆍ조(趙)의 굽은 창과 긴 목투구가 그것이다. 억센 활과 굳센 쇠뇌[弩]로 쏘는 것마다 맞추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기이고, 포환(砲丸)을 묘하게 쏘고 창검(槍劍)에 익숙한 것은 왜적의 장기이다.
   군사를 잘 쓰는 자는 나의 장점을 숨기고 적의 단점을 알아내고, 나의 단점을 닦고 적의 장점을 꺾는다. 그리하여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서로 기회를 틈타 적을 유인하여 승리로 이끄니, 이것이 손무(孫武) 삼사(三駟)의 법이다. 만약 예부터 전해 오는 나의 기술을 싫어하고 저들의 새 재주를 본받는다면 한단의 걸음[邯鄲之步]이 되니 잘할 수 있겠는가? 나의 장점을 더욱 익히고 적의 능한 것을 겸한다면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양쪽 군사가 어울려서 싸울 때는 바람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때리며, 구름을 따르고 비도 따르듯 하여 숨도 쉴 수 없다. 이런 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창을 휘두르는 기술과, 내려다보고 쳐다보면서 칼을 쓰는 방법은 반드시 쓸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조총(鳥銃)을 배울 것이요, 딴 것은 반드시 본받을 것이 아니다.

자산공(慈山公)이 일찍이 자녀(子女)를 경계하기를,
“자기 일은 부지런히 하고 남의 일에 게으른 것은 인정이 다 같다. 종들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날마다 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일마다 능히 부지런히 하겠는가? 너희들은 다만 너그럽게 보호할 것이요, 너무 꾸짖거나 성내지 말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마다 명언이라 하였다.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기묘 연간에 수상(首相)으로 있었다. 중종이 재변(災變)으로 인해, 사정전(思政殿)에서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문의하니, 좌우에서 차례로 나아가서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아뢰었다. 한충(韓忠)이 나아가서,
“성상(聖上)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구하시나, 비루(鄙陋)한 사람이 감히 수상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이며, 다스림도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물러나오자, 우상 신용개(申用漑)는 얼굴빛을 바꾸며 큰 소리로,
“신진의 사자(士子)가 면전에서 정승을 배척하니, 이 버릇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공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저어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들이 성내지 않을 줄 알고 이 말을 한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꺼리는 것이 있었다면 비록 권한다 해도 반드시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에게는 진실로 해로운 바가 없으니, 젊은 사람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을 것이 아니오.”
하였다. 신용개도 그 말에 탄복하였고 듣는 사람들도 대신(大臣)의 도량이 있다 하였다.

   정 문익공 당시에, 청류(淸流)들이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려 하였고, 삼사(三司)에서도 또한 청하였으나 공만은 옳지 못하다 하여,
“현량이라는 명목이 비록 좋으나 삼대(三代 하ㆍ은ㆍ주) 이후에 있어서는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중종이 듣지 않았다. 그후 여러 현인이 배척되고 죽음을 당하자, 그들이 시행하였던 좋은 정사도 일체 뒤엎게 되어, 온 조정에서 현량과도 없애도록 청하였는데, 공은 또 없앨 수 없다 하였다. 중종이 공에게 이르기를,
“현량과를 처음 시행할 적에 온 조정이 모두 좋다 했는데 경만은 시행할 수 없다 하였소. 이제 없애려 하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데 경만은 또 없앨 수 없다 하오. 어째서 경의 견해가 매양 여러 사람의 논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당초에 진실로 시행할 수 없음을 말하였거니와, 지금은 이미 과거를 설행하여 홍패(紅牌)를 주고 관직도 제수하였으니, 어찌 없앨 수 있습니까? 한번 시행하고 한번 없애는 데에 있어 국가 정령(政令)이 이와 같이 엎치락뒤치락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중종은 또 듣지 않았다. 공의 말이 비록 전후에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곧고 분명하여, 빼앗기 어려운 기개는 바로 옛날의 대신(大臣)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었다.

○ 금산(錦山) 원님 최극성(崔克成)부안인(扶安人)이다. 젊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을 항상 즐겁게 해드렸다. 출신(出身)한 후에도 오로지 편하게 봉양하기만을 힘쓰고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모친이 병이 나서,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위중하고 온갖 약이 효과가 없었다. 의원은 제비 고기를 구해서 약으로 쓴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나, 한창 추울 때여서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다. 앉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걱정하다가, 밤중에 밖으로 나가 배회하는데, 무엇이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공이 급히 손으로 더듬어보니 바로 제비였다. 곧 약을 지어 먹였더니 묵은 병이 금방 나았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감탄하여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최극성의 조카 최위지(崔謂之)가 전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최극성의 형 최필성(崔必成)이 그 아비가 학질(瘧疾)을 앓을 적에 박쥐가 저절로 온 것을 잡아서 효험을 본 일이라고도 한다.

○ 원주(原州)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밖에 구파촌(仇破村)이 있는데, 떠돌이 백성 내외가 와서 수년 동안 살고 있었다. 가정(嘉靖) 갑인년(1554, 명종 9) 동짓달 밤에 사나운 호랑이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그 지아비를 물어 죽였다. 아내는 밖에 나서서 소리쳤으나, 이웃집에서는 한 사람도 소리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 호랑이가 그 지아비를 끌고 가므로 아내는 지아비의 허리를 부여잡고 호랑이와 같이 울타리 틈으로 나가 손으로 호랑이를 치면서,
“네가 나의 남편을 죽였으나, 시체는 가져가지 못하리라.”
하고, 범과 밤새도록 싸웠다. 범은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그냥 포기해 버리고 갔다. 그 아내는 이웃 사람을 모아서 예대로 장사지내고 재물을 다 털어서 제사를 지낸 후에 외로이 홀로 살았다. 이 여자의 행실이 옛날 열부(烈婦) 못지 않았는데, 이웃에서 관청에 알리지 않아 포상을 받지 못했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지 모두 알지 못했다.

통천군(通川郡) 읍내에 가난한 백성이 있었다. 겨울에도 입은 것이라고는 다만 묵은 솜과 해진 굵은 베옷뿐이었다. 소를 몰고 추지령(楸池嶺) 밑에 나무하러 갔는데, 마침 그날은 풍설이 너무도 차가웠다. 날이 저물자, 몰고 갔던 소가 빈 길마로 홀로 돌아오자, 그의 아내는 깜짝 놀라서 몹쓸 짐승에게 해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달려가 찾았다. 중대(中臺) 길에 이르니, 그의 남편은 동상(凍傷)을 입고, 눈 위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내는 곧 옷을 벗고 가슴을 맞대어 안고 누웠다. 혹시 다시 깨어나기를 바란 것이나 아내도 또한 옷이 얇아,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었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있던 두세 어린아이가 기어가 시체 옆에서 울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수 이응린(李應麟)이 매우 불쌍하게 여겨,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 조정(朝廷)에 보고하여 고아(孤兒)를 구휼하고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 참판 김사재(金思齋 이름은 정국(正國)) 모재(慕齋 이름은 안국(安國)) 선생의 아우이다. 해서(海西) 감사로 있을 때, 아들한테 매맞고 욕을 당했다고 고발해 온 백성이 있었다. 공은 곧 관차(官差)를 보내서, 그 아들을 잡아 안마당으로 끌고 왔다. 섬돌에 오르게 하여 직접 문초하니, 꾸짖고 욕한 죄상이 대개는 나타났다. 공이 크게 노하여 책상을 밀치고 일어나며,
“너는 강상(綱常)을 범했으니, 반드시 죽고 용서함이 없으리라.”
하고 이어,
“부모가 낳아서 기른 은혜는 한이 없어 보답하기 어렵고, 나라의 법은 지극히 엄해서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은혜와 법이 이와 같은데, 너는 어찌 은혜를 저버리고 법을 업신여겼느냐?”
고 말하니, 그 아들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시골 백성이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장성하기까지 항상 슬하에 있으면서, 오직 가까이하고 너나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조심해야 하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에 대들고 행패를 부린 일이 진실로 많았는데, 이제야 천륜(天倫)의 높음과 국법(國法)의 엄함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공은 얼굴빛을 고치며,
“이 사람이 몰라서 법을 범하였다고 스스로 말하고, 또 의리에 감복하고 죄를 뉘우치는 정성이 있으니, 어찌 차마 죽이겠는냐? 이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법의 본뜻이 아니다.”
하였다. 그 사람은 그후부터 효자가 되었으니, 이것은 왕환(王奐)진원(陳元) 벌하지 않고 교화시킨 것과 같은 뜻이었다.

○ 성명을 알 수 없는 임영(臨瀛) 군사 세 사람이 만력(萬曆) 병술년(1576, 선조 9) 경에 초관(哨官)으로서 북방에 수자리를 살고 있었다. 마침 돌림병이 크게 일어나서 세 사람이 차례로 병들었다. 먼저 앓는 자가 아직 일어나지 못했는데 뒷사람이 다시 앓아누웠다. 재삼 전염되어 앓다가 최후에 한 사람이 급기야 죽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은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천리길을 같이 왔다. 한 막사에서 같이 누워 같은 병으로 서로 구호하면서 번갈아 서로 의지하였는데, 그만 홀로 불행히 먼 지역에서 죽었다. 살아서 같이 왔다가 죽어서 버리고 돌아가는 것은 우리들 정리로서 실상 참기 어렵다.”
하고, 입었던 옷을 각자 벗어서 염(斂)한 다음, 막사 뒤에다 장사하였다. 그후 수자리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두 사람은 그 시체를 번갈아 짊어지고서 먼 길을 고생스럽게 걸었다. 양식이 떨어지고 발이 부르터서 죽을 고비를 겪으며, 한 달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의 아비가 아들의 죽음에 애통하고는 또 시체를 지고 온 은덕에 감사하여, 장사한 후에 술과 과실을 약간 갖추고 두 사람을 초청하여 사례하고자 하니, 두 사람은 끝내 마다하면서,
“우리들은 대접을 받기 위하여 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한 끼 밥이라도 신세를 진다면, 당초에 서로 돌보던 뜻이 헛되게 됩니다.”
하고, 마침내 가지 않았다. 상사(上舍) 함시화(咸始和)가 나를 보고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모재(慕齋) 선생은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하여, 기묘 제현(己卯諸賢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영수(領首)가 되었다. 평생을 성실(誠實)을 주로 하여 학문을 하였고, 일에 대처함도 확실하여 소홀하지 않았다. 기묘 제현이 배척되어 죽음을 당한 후에 공도 또한 파직되어, 여흥(驪興) 이호(梨湖)에 물러가 살았다. 정자 두어 칸을 지어 범사정(泛槎亭)이라 이름하고, 20년 동안을 가난하게 살면서,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를 가지고 의심되는 곳을 묻는 사람이 먼 곳에서 왔다. 무릇 여러 가지 노래와 시에, 경물(景物)을 보고 뜻을 붙인 것은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그리워한 뜻이 아닌 것이 없었다.
   만년에 조정에 돌아와서 드디어 대제학을 맡았는데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초안을 잡을 때에는 홀로 서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서 정신을 모아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신음한 다음에 탈고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글은 전아(典雅)하고 명쾌하여 중국 조정에서도 칭찬하였다. 후일 그 임무를 이은 자들은 학력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어서, 막대한 천조(天朝 중국 조정)에 올릴 표문(表文)을 짓는 것도 평범한 일로 생각해 가볍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인재가 나날이 수준이 낮아지고 문장도 예전과 같지 못하다.

정(鄭) 문익공(文翼公 정시귀(鄭蓍龜))은 소인들의 모함을 받아, 파출(罷黜)되어 회덕현(懷德縣)에 있었는데, 조석 반찬도 갖추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하루는 관인(官人)이 앞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죽음에서 벗어난 사슴이, 공이 우거(寓居)하는 집 울타리로 뛰어들었다. 자제들은 하늘이 내는 것이라 하여 함께 쫓아 잡아서, 찬을 만들어 드렸다. 고을 원이 알고서,
“죄인이 진상(進上)할 물건을 훔쳐 먹었으니, 또한 죄가 있다.”
하고, 관차(官差)를 보내 그 사슴을 내놓으라며 문간에서 독촉하였다. 그러나 산에 가서 잡을 수 없고, 시장에 가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온 집안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 몰랐다. 그 때 마침 공의 친족으로서 이웃 고을에 원으로 있는 자가 우연히 사슴 한 마리를 보내와서 독촉하는 사람을 따라가 관가에 바치고, 원의 분노를 풀게 하였다. 그후 공이 조정에 돌아왔는데, 조정에서 이 일을 알고 그 원을 관직에서 쫓아내려 하였다. 공은,
“문음(門蔭)으로서, 권세잡은 사람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입니다. 또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며, 그의 본정은 아니므로, 심하게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여, 다시 관직에 서용(敍用)되도록 힘껏 변호하였으나, 끝내 되지 않았다.

정 문익공은 덕망이 온 세상을 뒤덮었으나, 김안로(金安老)만은 미워하여, ‘희릉(禧陵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을 옮겼다.’고 하였으니, 오로지 공을 죽이기 위한 발언이었다. 온 조정이 중형(重刑)으로 처단하도록 다투어 청하니, 중종은 여러 신하를 대궐 뜰에 모아놓고 각자 의논을 드리게 하였는데, 한두 신하 외에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중종은 특별히 용서하여 김해부(金海府)로 멀리 귀양을 보냈다. 김해부는 동래군(東萊郡)과 경계가 맞닿는 곳이었다. 그 고을은 공의 본관(本貫)으로, 시조의 무덤이 있었다. 공은 술과 과일을 간단하게 갖추어 자제들을 시켜, 가서 성묘하게 하였다. 그때에 무부(武夫)로서 동래 현령이 된 자가 이 소문을 듣고, 김안로에게 잘 보이고자 하여 큰 소리로,
“정모(鄭某)는 죄를 짓고서 귀양왔으니, 이는 곧 서인(庶人)이다. 그 부모에게만 제사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 그 자제들을 보내서 지경 너머에 있는 먼 조상에게까지 제사를 지내느냐?”
하고, 건장한 군졸을 많이 출동시켜 몽둥이를 휘두르며 몰아내어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공의 자제들은 할 수 없이 경계 위에서 무덤 쪽을 바라보며 제사지냈다. 현령은 또 ‘향소(鄕所) 등도 죄인과 마음이 같아서 그의 자제들을 보호하였으니, 그 죄 또한 무겁다’ 하고, 다른 일로 죄를 얽어, 관문(關文)을 경재소(京在所 서울에 둔 각 고을의 출장소)에 보내, 그 직임을 갈도록 청하였다.
   그해 겨울에 김안로가 죽음을 당하고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다시 경소 당상(京所堂上)이 되었는데, 동래 현령이 죄를 논란한 관문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공은 성주(城主 원)의 관문을 오랫동안 체류(滯留)시킬 수 없다 하여, 곧 그가 지적한 대로 소임을 갈아 보냈다. 현령의 간사함이 회덕(懷德) 원보다 심하였는데도 공은 말이나 얼굴빛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고, 자제들도 또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몰랐다. 그 현령은 품계(品階)가 높아져서 승진하였고 끝까지 관직을 보전하였으니, 공의 훌륭한 덕은 참으로 따라갈 수가 없다.

전림(田霖)은 국조(國朝 조선)의 유명한 장수이다. 성품이 과감하여 지나치게 굳세었다. 그러나 조촐한 절조가 세상의 으뜸이었고, 경서(經書)와 역사서에도 넓게 통하였다. 젊었을 때에 두세 동무와 함께 절에 올라가서 《송사(宋史)》를 읽었는데, 진회(秦檜)가 거짓으로 조서(詔書)를 꾸며 군사를 소환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분함을 능히 참지 못하여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창을 밀치며 나가서, 사미승에게 쓴 건(巾)을 벗어 절 문간 위에 걸어두게 한 다음 활을 힘껏 당겨서 화살 두 개를 잇달아 꿰어 맞혔다. 도로 돌아와 앉으면서,
“지금 역적 진회의 골을 깨고 나니, 조금은 시원하다.”
고 말하였다. 그의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와 악을 미워함을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사재(思齋) 선생이 또 황모(黃某)에게 부친 편지는 다음과 같다.
  “그대가 살림 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소.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그만 정지하고 고요하게 살면서 천명(天命)에 순응(順應)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70살이면 상수(上壽)이니, 가령 나와 그대가 상수를 누린다 하여도 남은 것은 불과 10년인데, 무엇 때문에 마음을 수고롭혀 가며 말 많은 자들의 욕을 먹는 것이오?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지(田地)를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 두어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옷을 입고서도 여벌 옷이 있고 주발 밑바닥에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을 편하게 지냈소.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같이 여겼고 이 한 몸 살아가는 데에 여유가 있었소.
듣건대, 그대가 입고 먹고 잠자는 것이 나보다는 더 좋다 하는데, 어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오?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적(書籍)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할 창 하나, 햇볕 쪼일 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하나,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이오.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나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오. 늘그막을 보내는 데에 있어 이 외에 더 무엇을 구하겠소?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자연과 벗하는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오만, 몸을 빼낼 술책이 없으니, 어찌하오. 오직 나의 지기(知己)만은 알아주기 바라오.”

신기재(申企齋 신광한(申光漢))는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기묘년(1519, 중종 14)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었고, 정승 상진(尙震)은 상재색장(上齋色掌)으로서 명륜당(明倫堂)에 출입하고 있었다. 여러 현인이 배척을 당하고 죽음을 받을 때에 공도 또한 벼슬이 좌천되어 실직부사(悉直府使 실직은 삼척임)가 되었다가 곧 파출(罷黜)되어, 중원(中原 충주의 옛 이름) 달천(達川)에 물러가서 20년을 지냈다. 상공(尙公)은 기묘년 겨울에 과거에 올랐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명종 16)에 이르러 김안로가 죄를 당하자, 무술년 봄에 공은 조정에 돌아와서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상공은 그때에 호조 참판으로 있었는데 길에서 서로 만났다. 초헌(軺軒)을 몰아, 공의 말앞에 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영공(令公)께서 나를 모르시오? 나는 기묘년에 색장이었던 생원 상진이오.”
하였다. 공은,
“그렇소? 지금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귀양에서 살아남은 목숨이 옛날의 얼굴을 어찌 기억하겠소?”
하고, 서로 읍한 다음 지나갔다. 벼슬길의 번복은 예부터 그러하니, 적신(積薪)의 비유가 또한 알맞지 않은가?

○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벼슬시킬 적에 사람을 가렸으므로, 비록 심상한 벼슬아치라도 모두 그 직에 합당한 사람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어진이를 빠뜨리고 관직을 소홀히 하는 근심이 없었다. 광묘(光廟 세조) 이후에는 공을 숭상하고 덕은 숭상하지 않았지만, 정승을 제배(除拜)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감히 경솔하게 제배하지 않았다. 중종 초년은 비록 연산군의 혼란을 겪은 뒤였지마는 반드시 한 시대의 신망을 받는 사람을 가렸다. 그때에 정승 자리가 비자, 여러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누가 정승이 될 만한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신공 용개(申公用漑)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문익공(文翼公)을 돌아보면서,
“조정 신하 중에 아저씨만한 사람이 없으니, 아저씨가 반드시 승진될 것입니다.”
하더니, 문익공이 과연 승진되었다. 신용개는 문익공의 척질(戚姪)이었다. 그후에 정승 한 자리가 또 비자, 또 처음과 같이 묻는 사람이 있었다. 신용개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나만한 사람도 없으니, 내가 반드시 하게 되리라.”
하더니, 신용개도 또한 승진되었다. 여기에서 어려워하고 조심하여 반드시 가리던 뜻을 알 수 있다. 근세 이래로는 비록 정승을 뽑는 명목은 있으나, 정승을 뽑는 실상은 없다. 오직 관직 품계가 그 차서에 닿으면 되는 것으로 여겨, 일반 벼슬자리가 빈 것같이 여기니, 다른 일이야 알 만하다.

○ 반역(叛逆)은 천하에 큰 죄악으로,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발견하여 변(變)을 알린 사람에게 논공(論功)할 적에 후하게 상을 줌이 비록 토지를 나누어서 봉한다 하여도 법으로 볼 때 당연하고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추국(推鞫)한 관원에 있어서는, 다만 여러 사람의 초사(招辭)에 따라 캐어물어 하나로 귀착시킨 다음, 위에 아뢰어서 죄를 정할 따름이니,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음이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추국하는 관원이 죄인의 비밀을 잘 밝혀내고 숨긴 것을 잘 끄집어내는 것을 공이라 한다면 지금 죄상이 잘 드러나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은 논할 것도 없지만, 만약 후세에 불행히 의심스러워 밝히기가 어려운 일에 모함을 당한 사람이 끼어 있다면, 어찌 옥(玉)인지 돌인지를 가릴 수가 있겠는가? 상 받으려고 한 짓이라고 하여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근래의 일은 또 이와 같지 않다. 역적은 외부에서 일어나고 고발한 자는 내부에 있는데, 추국하는 관원이 다만 예에 따라 참석하여도 모두 논공하게 되며, 금부 옥졸(禁府獄卒)도 형장(刑杖)을 잘 쳤다는 것으로써 상을 받기도 한다. 세정(世情)에 어두운 선비의 못난 소견으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왕자(王者)의 정사가 아닌 듯하다.

○ 고려는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이다. 만 가지 조목이 비록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선조(先祖)의 법은 그대로 지켜, 감히 분수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못하였다. 가사(家舍)에 대한 한 가지 일로 말하건대, 말엽에 국력이 쇠하여 장차 망하게 되어서도 임견미(林堅味)같이 권세를 지니고 신돈(辛旽)과 같이 간악하여 극도로 호사를 부리던 자들도 그들의 집이 굉장하거나 화려하지가 않았던 것은, 아직도 국법(國法)을 두려워해서였다. 우리 나라는 세운 법이 더욱 엄하여 위로 공경에서 아래로 서인까지 가사(家舍)의 칸 수에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었다. 혹 정해진 분수를 넘을 것같으면, 한성부(漢城府)에서 가끔 순찰하고 제도를 어기고 더 지은 수는 허물어 버렸다.
   나의 외삼촌 원 상사(元上舍 상사는 진사의 별칭임)의 집이 인왕산(仁旺山)내섬동(內贍洞)에 있었다. 그 집 칸 수를 지금 생각해 보면 많다 할 것도 없는데,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 31) 무렵에, 정해진 칸 수 이외의 것이라 하여 여러 차례 철거당했으니, 국법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중엽 이래로는 나라에서 능히 금하지 못했고, 사람들도 법을 꺼리지 않았다. 구름같은 처마가 골목에 자리하고 있고 큰 집이 길에 우뚝하게 서 있어 공경의 집이 궁궐과 비길 만하였다. 서인의 집은 관청 집같아 분수를 어기고 제도를 넘는 것이 끝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진년 왜적의 난리에, 도성(都城) 안 크고 작은 집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부서진 기와와 흩어진 주춧돌이 눈에 띄는 것마다 모두 참혹하였다. 물(物)이 성한 다음에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 관상감 정(觀象監正) 이번신(李翻身)은 나의 선조 문렬공(文烈公)의 서증손(庶曾孫)이며, 할아버지 한성군(韓城君)의 종제(從弟)이다. 음양ㆍ지리(地理)ㆍ복서(卜筮)ㆍ술수[數學]ㆍ율려(律呂) 등 학문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천문(天文)에 대해서는 더욱 정통하여, 그가 말한 바는 모두 징험이 있었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1567~1572) 연간에 나의 집에 왔다가 천문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다. 내가,
“천문에 관한 말은 미묘하여 알기 어렵습니다.”
하니, 공은,
“어찌하여 알기 어렵다 하는가? 재앙과 상서란 모두 인사의 선악과 기수(氣數)의 굴신(屈伸)에서 감응(感應)하는 것으로 밝게 보이는 것이 매우 엄하고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데, 다만 사람들이 살피지를 못할 뿐이다.”
하여, 내가 말하기를,
모재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나라는 천하를 놓고 본다면, 금천(衿川 과천(果川)의 고호)이 동방(東方 우리 나라)에 있는 것과 같다. 하늘은 반드시 금천 때문에 상서나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실언(失言)이라 하여 선비들에게 나무람을 받았습니다. 이 말이 어떠합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해와 달이 기울고 일식, 월식이 있는 것은 비록 이와 같이 말해도 오히려 가하거니와, 분야(分野)에서 별들의 도수가 잘못 되는 것과, 아침과 낮에 구름과 안개가 이상스레 탁한 것은, 다른 나라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하였다. 나는,
“지금 천문의 역(逆)과 순(順)은 어떠하고, 후일에 응할 길흉(吉凶)은 어떠합니까?”
하니, 공이 한참 동안 찡그리더니,
“화가 닥치는 고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재앙이 닥치는 고비라는 것은, 변방에 문제가 생겨, 성이 함락되고 군사가 무너지는 근심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변경 지역이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웠다 안정되었다 하고,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는 것은 어느 나라인들 그렇지 않으랴? 이것을 두고 재앙이 닥쳐오는 고비라고는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렇다면 조정에 간신이 죄를 교묘하게 얽고, 서로 다투어서 선비들을 다 타도하는 재앙이 있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그라지고 늘어남은 벼슬아치들의 보통 있는 일이요, 나라를 가진 자로서 능히 면치 못할 바이니, 이것을 두고 재앙이 닥치는 고비라 할 수는 없다.”
하였다. 나는 비참하여 말하기조차 어려웠다. 다시 묻기를,
“그 징험이 어느 때에 나타나겠습니까?”
하니, 공이 답하기를,
“천체(天體)가 지극히 무겁고, 느낌을 쌓은 지 벌써 오래이니, 그 노여움을 나타내는 것을 아침 저녁도 기약하기가 어렵다. 가까우면 20년 지나서이고, 멀어도 30년 안에는 화가 닥치는 고비가 다가올 것이니, 사대부로서 턱없이 나서고자 할 때가 아니다.”
하였다. 나는 공의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다. 그후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 22)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의 말이 비로소 징험되었다. 그리고 임진년 왜적의 난리에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가고 종묘사직은 빈 터가 된 다음에 그의 말이 더욱 징험되었다. 하늘의 꾸지람이 이와 같이 두렵다. 또한 공이 추보(推步 천체의 운행을 관측함)를 잘한 것도 지금에야 알 수 있다.
○ 중국 과거의 제도를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3년만에 보이는 대비(大比) 외에 특별히 과거를 보이는 법은 전혀 없다. 외방 각도(各道)의 초시(初試)는 자ㆍ오ㆍ묘ㆍ유(子午卯酉)가 드는 해에, 경사(京師)의 회시(會試)ㆍ전시(殿試)는 진ㆍ술ㆍ축ㆍ미(辰戌丑未)가 드는 해에 보인다. 연월일도 조종조에서 한번 정한 후로는, 비록 국가에 큰 연고가 있어도 당기거나 물리지 않고, 뽑는 수효도 또한 전일에 정한 것이 있다. 지금 2백여 년이나 오래되었으나 예전 법규를 그대로 지켜, 조금도 흔들리거나 고침이 없다. 이것은 중국이기에 될 수 있는 것이었고, 좁고 작은 외국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 내가 만력 기묘년(1579, 선조 12)에 중국으로 가던 날, 노소재(盧蘇齋) 상공(相公)이 나에게,
“금년은 순천부(順天府)에서 과거 보이는 해이니, 그 형식과 조목을 상세하게 알아 오시오.”
하였다. 나는 8월 초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다.
26일에 순천부 방목(榜目)을 얻어보니, 과거본 사람의 수효가 1백 35명인데, 첫째로 뽑힌 사람은 이름이 풍가우(馮加遇)로서 직예성(直隸省) 백향현(柏鄕縣) 학생이었다. 각자 전공한 경서를 이름 밑에 기록하였는데, 《시경(詩經)》 53명, 《역경(易經)》 39명, 《서경(書經)》 28명이고, 《춘추(春秋)》는 9명, 《예경(禮經)》은 6명이었다.

   역관(譯官)을 시켜 시험하는 규칙을 서반(序班)에게 물어보니, ‘소속된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 과거보는 사람이 정해진 수효가 있는데, 그들을 모아 다시 가려낸 다음, 시정(試庭)에는 각각 한 칸씩 되도록 미리 대자리로 둘러서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한다. 그 안에는 붓ㆍ벼루ㆍ종이와 그 사람이 먹을 떡ㆍ차 따위 물품을 고루 갖추어 두는데 소변 그릇까지 함께 둔다. 시험하는 날 새벽에는 하나하나 수색하여 유생은 홑옷과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문제에 해답을 쓴 다음 나온다. 초장(初場)에는 오경(五經) 및 사서의의(四書疑義)를, 중장(中場)에는 논문(論文)과 표문(表文)을, 종장(終場)에는 대책(對策)을 시험하는데, 모두 이틀 간격으로 본다. 본월(本月) 9일, 12일, 15일 해서 삼장이라.’는 것이다. 서반의 말이 이와 같았고, 딴 사람에게 물었으나 대개 이와 같았다. 초시 및 회시ㆍ전시에 관한 규칙은 들을 길이 없으니 한스럽다.

○ 우리 나라에서 과거로 사람을 뽑는 제도는, 삼국 때는 물을 필요도 없고, 고려도 5백년이나 오래된 나라여서 그 처음은 자세하게 알지 못하며, 중엽 이후 다만 3년만에 한 번씩 33인을 뽑는 외에 또 다른 과거는 없었다.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전조(前朝 고려)의 규칙에 의하여 식년(式年)에 33인을 시험해서 뽑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때그때 뽑으므로 당기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여 처음부터 정해진 날짜가 없었다. 영묘(英廟 세종) 때에 이르러서 문학을 숭상하여, 비로소 학궁(學宮 성균관)에 거둥하여 제술(製述) 시험을 치르고 몇 사람을 뽑아, 홍패(紅牌)를 하사하였다. 이뒤부터는 드디어 특별 규정이 되어서 점점 성하게 되었고, 연산 중묘 때에 와서는 극도로 범람하였다. 명종조에 또 점수를 주고 과시(科試)에 나아가게 하여 그 점수를 통계하는 규칙이 있어, 혹은 바로 회시(會試)에 나아가게 하고, 또는 바로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하였다. 식년시(式年試) 외에도 별시(別試)ㆍ행학(幸學)ㆍ정시(庭試)라는 명목으로 혹 행사에 따라 거행하기도 하고, 혹은 예(例)를 들어 베풀었다. 봄ㆍ가을에 각각 거행하기도 하고, 한 달에 두 번 거행하기도 하며, 혹 해마다 특별히 베풀고, 혹은 한 해에 세 번이나 거행하기도 하였다. 사방에 알리지 않으며 많은 선비를 모으지도 않고, 오직 표문ㆍ전문(箋文) 두어 문구(文句)를 한정된 시간 안에 짓게 하는데, 이를 촉각(燭刻)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루 동안에 문득 높은 과거에 오르게 되니, 요행을 바라는 문이 활짝 열렸다. 선비들은 모두 분주하게 짧은 글귀를 뽑아 외워서 높은 벼슬을 도모하게 되어 3년만에 보이는, 경서에 통하고 글을 제술하던 대비(大比)의 법도가 점차 예전 같지 못하였다. 정시의 방을 낸 뒤에 보면, 모두가 벼슬아치의 나이 어린 자제이고 시골에서 학문을 깊이 연구한 무리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아! 지금 본다면 전조 때에는 과거가 매우 드물어, 어진 인재가 많이 빠졌을 터인데도, 유명한 공경(公卿)과 웅대(雄大)한 문필가가 모두 과거를 통해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 와서는 과거가 매우 잦았으니, 어진 인재가 무리지어 나올 듯한데, 재주가 빛나고 덕이 있는 선비는 거의 없으며, 여염집과 시골에 사는 사람으로 문채가 빛나서 등용(登用)할 만한 사람이 빠져 있는 탄식을 면치 못한다. 과거는 더욱 번거로우면서도 선비의 풍습이 더욱 경박해지고, 인재는 날이 갈수록 수준이 떨어지니, 진실로 한스럽다.

○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은 문과ㆍ무과 두 과거를 통해서 출신(出身)한 사람 외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는 선인(選人 뽑힌 사람)이라 해서 임용(任用)하고, 효자이거나 순손(順孫)한 사람과 문학ㆍ덕행이 있는 선비는 유일(遺逸)이라 하여 천거하게 한다. 관리(官吏)까지도 합당한 사람은 해조(該曹)의 천거에 의해, 재주를 시험하고 합격한 다음에 가려서 서용(敍用)한다. 까닭에 씨족 관계가 분명하지 못하거나 문벌이 비천한 자는 동ㆍ서반(東西班) 정직(正職)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심의겸(沈義謙)이이(李珥)가 함께 국론(國論)을 맡아 어진이를 등용한다는 핑계로 문음(門蔭)으로 뽑는 규정을 만들어,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마음대로 등용하니, 조종의 옛 제도가 크게 바뀌고 벼슬길도 점차 혼잡하여졌다. 지금은 또 왜적의 난리를 겪음으로 인해서, 시골에 사는 미천한 자와 항오(行伍)를 따르던 뭇 졸개와 관부(官府)의 하예(下隸)와 공사(公私)의 서얼(庶孼)도, 혹은 의병이라 하여, 혹은 군공(軍功)이 있다 하여, 혹은 양식을 바쳤다 하여, 혹은 전쟁에 나가 죽은 사람의 자손이라 하여, 혹은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한 사람의 자제(子弟)라 하여,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 않고 각사(各司)에 서용(敍用)하여 동료(同僚)끼리 손가락질하고 전복(典僕)이 업신여기며, 상하가 서로 능멸하여 일에 체계가 서지 않으니, 이것도 쇠망하는 형상의 하나이다.

○ 옛말에, 실상은 없으면서 그 말만 전해 오는 것이 있으니, 야다시(夜茶時)같은 것이 이것이다. 전중(殿中 옛날 전중어사(殿中御史)로 감찰(監察)을 뜻함) 관원도 모두가 대관(臺官)인데, 본부(本府)에 출사(出仕)하지 않는 날에는, 대장(臺長)으로서, 성상소(城上所)를 맡은 자가 여러 전중을 한곳에 모아서 대관을 분간만 하고 파하는 것을 다시(茶時)라 한다. 차를 마시고 그만 파한다는 말이다.

○ 조종 때에, 재상이나 혹 낮은 벼슬아치로서 간사하거나, 부세(賦稅)를 많이 거두어서 백성을 해치거나, 재물을 탐내어서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여러 전중이 야다시(夜茶時)를 이용하여 그 사람의 집 근처에서 그 탐악(貪惡)함을 조사하고 흰 판자에다 적어서 그 집 문위에 걸었다. 그리고 가시덤불로 그 집 문간을 막아서 굳게 봉하고 봉한 것에 표시를 한 다음에 물러갔다. 그러면 그 사람은 드디어 세상에서 버림받아, 다시는 의관 반열(衣冠班列)에 참여하지 못하고 영구히 버려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갑자기 공격하는 환란을 당하는 것을 ‘야다시’라 하는데, 이 말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쓰인다.

감찰(監察)은 옛날 전중어사(殿中御史)로서, 온 관료(官僚)를 규찰(糾察)한다. 그래서 자기의 처신(處身)이 반드시 검소한 다음이라야 남의 재물 탐내는 것과 분수에 넘치는 짓 하는 것을 책망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추한 옷을 입거나 더러운 얼굴을 한 사람과 둔(鈍)한 말에 망가진 안장을 한 사람과 짧은 모자, 해진 띠를 맨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전중인 줄을 알게 된다. 고려조에는 어떠했는지는 비록 상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1백 70여 년이란 오랜 기간, 아무리 귀족의 자제와 유명한 문사라도 전중이 되기만 하면, 그 복색(服色)은 예전 규칙을 그대로 지키고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

  말년 무렵에 와서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인심이 사치하여졌다. 더럽고 추한 것을 싫어하고 사치하기를 좋아하여 전중들까지도 모두 복색을 바꾸겠다고 청원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심의겸(沈義謙)ㆍ박순(朴淳)ㆍ박응남(朴應南) 등이 당시의 논의를 가지고서, 드디어 그들의 소원에 따라 고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전중의 복색 제도가 시종(侍從)의 복색보다 몇 배나 더 화사하고 선명해졌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상대(霜臺 사헌부)의 옛 풍습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존양(存羊)의 뜻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아!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는 것은 국정 중에 큰 것인데, 위에 아뢰지도 않고 여러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스스로 고쳐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권신(權臣)의 방자하며 꺼림 없음이 이와 같으니, 그들의 행위가 참으로 두렵도다.
   ‘양한적(養漢的)이라는 명칭이 중국에서는 유행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없다. 대개 중국의 양한적이라는 것은 특히 항산(恒山)ㆍ대산(岱山)의 옛 풍습에서 나온 것인데, 당초부터 금수같은 행실을 즐겨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길러주는 부모가 없고 의탁할 만한 친척이 없으므로, 추위와 굶주림에 부대끼다가, 서로 모여서 머리 빗고 화장하고 남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계책을 삼은 데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각자가 본남편이 있고, 또한 높고 낮고 헐하고 중한 값이 있어, 남편이 허락하지 않거나, 값이 자기에게 적당하지 않으면 또한 서로 관계를 맺지 않았으니, 오히려 저들이 우리보다 낫다. 우리 나라에는 비록 양한적이라는 명칭은 없으나, 음탕한 풍습은 크게 성하여, 길가에 있는 관창(官娼)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집의 여종과 여염집의 천한 계집으로서 음란한 짓을 일삼는 자는 값이 있건 없건 사람이 귀하건 천하건 밤낮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취한 듯 미친 듯하여, 그 하간(河間)의 계집이 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다. 이것을 보면, 우리 나라의 음탕한 풍습이 중국보다 심하다 하겠다. 남의 윗사람이 되어 교화하는 권리를 잡은 자는 막아내는 대책을 세우는 데 태만해서야 되겠는가?

○ 나라 풍속에 대변(大便)과 소변(小便)을 대마(大馬)ㆍ소마(小馬)라 한다. 나는 이 말이 무슨 일과 관련된 것이며, 어느 때에 나온 것인지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양산묵담(兩山墨談)》을 열람하다가, ‘귀빈(貴嬪)의 집에서 오줌 그릇을 만들 때에, 복판은 비게 하고 말 모양같이 굽게 한다. 등 위에 구멍이 있고 그 등에 걸터앉아서 변을 보는데 이것을 「수자(獸子)」라 한다.’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그 말이 중국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고, 똥을 누면서 마(馬) 본다는 것도 또한 의심이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 ‘마요(馬腰 마렵다는 말)’라고 하는 것도 또한 ‘수자’와 관련해서 한 말이었다.

성종 때에 재상 이영은(李永垠)ㆍ이곤(李坤) 두 사람은 한 창기(娼妓)를 함께 관계하고는 서로 빼앗게 되었다. 언관(言官)이 그들의 죄를 논란하여 파직하기를 청한 지 여러 날 되었으나, 성종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궐에 나아가 스스로 변명하는데, 서로에게 허물을 돌리고 각자 옳다고 하면서 두세 번 아뢰었다. 성종이 비답하기를,
“옛부터 사대부끼리 서로 처첩을 훔치는 것은 망해 가는 세대의 일이었소. 나는 이 세대를 차마 쇠망하는 세대로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대간(臺諫)의 말을 윤허하지 않는 것이지, 경등에게 죄가 없어서가 아니니, 물러가서 반성하시오.”
하였다. 여기에서 그때 임금과 신하 사이가 부자간 같을 뿐만이 아니었으며 성주(聖主)의 한 말씀이 도끼로 베어 죽이는 것보다 더 엄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극하여라.

양 남원(梁南原 남원은 지명으로, 양성지(梁誠之)의 봉호 남원군(南原君)을 가리킴)성묘(成廟) 때에 오랫동안 풍헌(風憲)을 맡았는데, 그는 돈을 밝히는 버릇이 있었고 꿋꿋하게 바른 말을 하는 절조가 없었다. 하루는 연석(宴席)에서 성종이 양성지에게 이르기를,
“경은 법관(法官)이 된 지 8년이나 되었으나 나를 향해 한번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매우 장하게 여기오.”
하였다. 성주가 한 마디 풍자로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뜻이 깊다.

○ 조종조에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분담시켰는데, 관은 통제하는 바가 있고 직은 맡은 바가 있었다. 6조(曹)는 정부의 통제를 받고 각사(各司)는 6조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관원이 많아서 맡기고 부리는 것은 예비 없음을 염려하지 않았으니, 만약 길사(吉事)와 흉사(凶事)ㆍ군사(軍事)와 빈객에 관한 일이 있으면 해조(該曹)가 소속 각사를 거느려서 책임지고 완성하였다. 큰 일이면 입계(入啓)하여 왕지(王旨)를 받고, 작은 일이면 대신(大臣)에게서 결정하였다. 전적으로 위임을 하여 각각 그 직에만 전력하게 하였으므로, 기강이 문란하지 않고 다스림도 질서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태평한 날이 오래되니, 안일한 것이 버릇이 되어 사물(事物)을 밝히는 정사는 나날이 없어지고 겉치레만 꾸미는 절차가 점점 번거로워져, 조금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다. 난리를 겪은 후로는 기율이 없어져서, 온갖 법도(法度)를 새로 만들기 시작하여 해사(該司)에 책임지우지 않고 새 관청을 설립하기에 힘썼다. 군공(軍功)ㆍ양향(糧餉)ㆍ모속(募粟)ㆍ복수(復讐)ㆍ훈련(訓鍊)ㆍ청용(廳用)ㆍ포수(砲手)ㆍ염초(焰焇)ㆍ주성(鑄成)ㆍ안집(安集)ㆍ둔전(屯田) 등 한때 도감이 여러 가지여서 다 기록하기도 어렵다. 모두 1품(品) 아문(衙門)으로 불렸으며, 관청을 설치한 것이 많을수록 일은 더욱 계통이 서지 않아 그럭저럭 날만 보내니, 누가 허물을 잡고 일의 성과가 있도록 책임지려 하겠는가? 회복될 기일이 더욱 멀어져 가니, 어찌 인사(人事)가 극진하지 못한 것이 실로 천운(天運)이 이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통분해 한들 어찌하겠는가?

평양 영귀루(詠歸樓)는 남쪽 성 함구문(含毬門) 밖 10 리 되는 지점에 있는데, 지나가는 곳에 정전(井田)하였던 터가 있다. 밭두둑과 도랑이 분명하고 동서로 뻗친 이랑과 종횡(縱橫)으로 뚫렸던 길이 모두 곧고, 비스듬하지 않아 정전의 모습과 제도가 완연히 남아 있다. 길 북쪽에 있는 민가(民家) 담 밖에 우물이 있는데 기자정(箕子井)이라 한다. 입구는 작고, 가운데는 넓은데 깊이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때에 여덟 집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우물로서 없는 곳이 없었지만, 천 년을 지난 오늘날에, 어떤 것은 메워져도 쓸 수 없고, 어떤 것은 아직도 주민(住民)이 식수로 이용하고 있는데, 오직 이 우물만을 기자정이라 한것은,기자가 이 우물을 설치하던 날에 고국(故國)을 떠난 시름을 한번 씻어버리고 유민(遺民)에게 존모를 받음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내가 부(府)의 하리(下吏)에게 묻기를,
“정전 제도는, 도랑을 나누는 데 있어 반드시 크거나 작음이 없는데, 밭 모양이 어떤 것은 넓고 어떤 것은 좁은 것은 왜 그런가?”
하니, 하리는 대답하기를,
“때가 가고 해가 바뀌어서, 그 참모양이 점점 없어지는데, 더구나 경계를 수리하지 않아서 토호(土豪)가 침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에 간직된 문안(文案)에 기재된 결부(結負)의 경중(輕重)은 밭의 크기와 상관없이 하나같이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농부는 같은데 밭이 작은 자는 지금 밭두둑이 침범되었다는 송사를 합니다.”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가, 시골집 서당에 도둑이 들어 벽을 뚫고 서책(書冊)을 다 훔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었다.

평생 사 모은 것이 겨우 천 권이니 / 平生購聚纔千卷
공택의 산방에 감히 비길손가 / 公擇山房敢擬乎
자취는 제법 양상군자 같구나 / 蹤迹頗同樑上賊
시서는 구중주도 아니거늘 / 詩書非是口中珠
배워서 몸 위하면 용서하지만 / 學之爲己猶相恕
팔아서 돈 만들면 어찌 우리 무리랴 / 賣以求財豈我徒
담과 문 조심 않은 연고이거니 / 不謹垣墉與扃鐍
집 지킨 종이나 벌을 주겠네 / 惟當深罪守家奴


○ 내가 전에 초록(抄錄)한 글 중에서 당시(唐詩) 오언 절구 한 수를 보았다.

다리에 임하거든 말에서 내리고 / 臨橋須下馬
길이 있거든 배 타지 말라 / 有路莫乘船
저물지 않아서 숙소에 들고 / 未暮先投宿
닭소리 들려도 하늘을 다시 보라 / 聞鷄更看天

이 시는 해(李瀣) 멀리 가는 아들을 전송하면서 지은 것이다. 간절한 훈계가 어찌 이와 같이 두터울 수 있겠는가?


운곡공(耘谷公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깊고 몸가짐이 곧았다. 젊은 나이에 아내 상(喪)을 당했으나,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후취(後娶)를 하지 않고, 첩(妾)도 두지 않고서 21년을 쓸쓸히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도를 지키고 궁함을 견디는 군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어미 잃은 아이들이 눈앞에 있어 / 失母兒童在眼前
곤궁 속에 20여년 분수를 지켰네 / 困窮知分卄餘年
시렁 위에 쌓아 둔 천 권 책을 의지했고 / 但憑架上堆千卷
주머니에 일 전 없어도 운명에 맡겼네 / 也任囊中欠一錢
늙기까지 새 살림 장만하지 못했는데 / 到老不成新活計
죽게 되어 옛 인연 공연히 생각하네 / 殘生空憶舊寅緣
혼인을 다 시켰으니 남은 한은 없어라 / 已終婚嫁無遺恨
이제는 편안하게 구천을 향할 수 있으리 / 方得安然向九泉

공이 아내 상을 당했을 때는 37세였다.


○판서 이현보(李賢輔)예안(禮安)에 살았고 호는 농암(聾岩)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외방(外方) 선비로서 조정에서 벼슬한 자가, 나이가 많아지면 물러가려는 뜻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당초에 먼 후일을 생각하지 않고 서울에서 자녀의 혼사를 치렀기 때문에 늘그막에 돌아가려 해도, 인정에 얽매이고 생각에 끌려서 능히 떠나지 못한다.”
하였다. 공은 조정에 있으면서 자녀의 혼사를 모두 같은 고을에서 치렀다. 나이 70이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와서 자그마한 집을 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하였다. 자손이 많고 나이와 덕이 모두 높아 사람들이 모두 곽 분양(郭汾陽)ㆍ배 사도(裵司徒)라고 일컬었다. 인간의 즐거움과 임천(林泉)의 경치를 오래도록 편하게 누리다가 89세에 죽었다.

이희보(李希輔) 선생은 자는 백익(伯益), 호는 안분당(安分堂)이고, 주계군(朱溪君)에게서 배웠다. 천성이 영리하고 총명이 뛰어나서, 책을 두루 읽고 기억을 썩 잘하여, 통하지 못한 글이 없었다. 신기재(申企齋 신광한의 호)ㆍ소 찬성(蘇贊成 이름은 세양(世讓))ㆍ정호음(鄭湖陰 정사룡의 호)과 더불어, 당세에 이름을 나란히 했으나, 사람들은 유독 공을 박학(博學)하다 하였다. 이조 낭관이 되었다가 옥당(玉堂)을 거쳐, 당상으로 승진하였다. 중년에 운수가 불행하여 한직(閑職)에 눌러 있었으므로 오로지 후진을 훈도하는 것을 일삼아서, 공의 문하에서 수업한 선비 중에 학업을 성취한 자가 매우 많았다. 만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사문 노성(斯文老成)으로 운수가 사나웠던 것이 가석하다.’고 아뢰어서, 특별히 가선(嘉善)에 승급되고 동지(同知)를 제수받았다. 나이 76세에 죽었다.

전우치(田禹治)해서(海西) 사람이다. 배우지 않고서도 글에 능하며 시어(詩語)가 시원스러워 사람들은 모두 그가 도술(道術)이 있어서 귀신을 부린다고 말하였다. 현감 이길(李佶)은 전우치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이길의 전장(田莊)이 부평(富平)에 있었는데,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역질(疫疾)이 크게 성하여, 이길의 종과 이웃집 10여 인이 몹시 심하게 앓아 누웠었다. 이길이 전우치에게 병을 물리쳐 주기를 청하니, 전우치는 허락하면서,
“그 지역에 앉을 만한 높은 언덕이 있소?”
하고 물었다.
“숲에 앉을 만한 정자가 있소”
하니, 전우치는
“아무 날에 갈 터이니, 미리 정자에 좌석을 마련하고 기다리시오.”
하였다. 그날이 되어 전우치는 숲 밑에 앉아서 두어 마디 소리로 무엇을 부르는 것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온 이웃의 앓던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일어나 앉으며 일시에 ‘나았다.’ 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병이 나아서, 다시 전염되는 걱정이 없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집현전 교리가 되었을 때이다. 휴가를 받아,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광산(光山)에서 방백(方伯)을 만났다. 방백은 공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그리고 세 젊은 기생에게 각자 잔을 잡고 앞에 나서게 한 다음에 공에게 스스로 고르라고 하였다. 공이 고른 기생은 이름은 승양비(勝楊妃)였다. 술이 오르자, 방백은 그 기생에게 전지(箋紙)를 가지고 시를 청하게 하였다. 공은 곧 붓을 휘둘렀다.

아름답고 가냘픈 양씨 딸보다 / 婥妁楊家女
천 년 지나 네가 감히 낫다 하는가 / 千年汝敢優
쪽머리는 방장산 비인 듯하고 / 鬟述方丈雨
눈동자 굴리니 한궁의 가을일레 / 眸轉漢宮秋
처음엔 석 잔 술로 희롱하더니 / 初作三盃戲
끝내는 한바탕 웃어 주노라 / 終成一笑留
호사자가 누굴 위해 / 誰爲好事者
청루에 승양비를 부쳐준 걸까 / 傳勝付靑樓

공의 여러 시가 정묘하고 화려하여 당시에 따라갈 만한 자가 드물었다.


왕부(王裒)《시경(詩經)》을 읽다가 ‘슬프고 슬프다 우리 부모여! 나를 낳아 기르느라 수고하셨네.’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세 번을 거듭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적이 없으니,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모두 육아편(蓼莪篇 시경의 편명)은 읽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간옹(艮翁)이 말년에 《소학(小學)》을 읽다가, ‘인생이 백 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병들 적이 있고,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가 있다. 어버이가 이미 죽었으니 비록 효도하고 싶어도 누굴 위해서 효도하며, 자신이 이미 늙었으니 비록 우애하고 싶어도 누굴 위해 우애하랴? 그러므로 효도를 하려 해도 미치지 못함이 있고, 우애를 하려 해도 그때가 아님이 있다.’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책을 덮고 눈물 흘리고 종일토록 강개한 마음을 능히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성현(聖賢)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킴이 또한 이와 같다.

○ 국상(國喪) 3년 안에는 풍악(風樂)을 그친다. 만약 왕후(王后)의 상이면 신하로서 기년복(朞年服)을 벗은 다음에도 풍악은 들을 수 있어도, 잔치하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임금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으므로 신하의 정의(情義)로 감히 그러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지금 우리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상이 기년은 비록 지났으나 상제(祥制)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 경성에서, 밖으로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히 풍악을 울리지 못하였다. 내가 출발한 후에 각 고을에서 접대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비록 해서(海西)와 기경(箕京 평양) 두 곳 방백의 간곡한 정으로도 오히려 색다른 것이 없었고, 상을 들 때나 술을 칠 때도 모두 작은 아이를 시켰다. 그러나 안흥관(安興館)에 도착하여 병사(兵使)와 고을 원과 만나 이야기하던 날 저녁에 비로소 기생이 있어 짤막한 노래로 술을 권하였다. 이 다음부터는 참(站)이 있는 곳에는 모두 여인(女人)이 나왔다. 신안(新安)에 이르니 노래와 북을 아울러 연주하였고, 용만(龍灣)에 이르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변경 지역이어서 풍교와 예법이 없고 풍속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 옛날에 박효종(朴孝宗)이란 사람이 충주(忠州)에 살았는데, 힘이 몹시 셌다. 젊었을 때 일이다. 일가집에서 계집종이 문안차로 와서 기둥 주추 곁에 앉아 있었다. 박효종은 기둥 옆에 섰다가 한 손으로 가만히 기둥을 들고 계집종의 옷깃을 기둥 밑에 넣어서 눌러두었다. 계집종은 처음에는 모르고 있다가 돌아가려는데 기둥이 옷을 당기는 것이었다. 일어났다가는 다시 주저앉기를 두어 번 하고 나서는 귀신이 옷깃을 잡았는가 의심하여 당황해서 낯빛이 변하므로 주인되는 부인이 곧 효종을 불러서 풀어주게 하였다.
   박효종은 평소에 개암[榛]과 잣의 껍질을 모두 두 손으로 비빈 다음 껍질을 불어버리고 먹었다. 박효종의 아들 박염(朴恬)도 힘이 뛰어나서 능히 백근짜리 활을 당겼다. 그런데 글자를 전혀 몰라서, 초시(初試)에서는 반드시 장원을 하였으나, 회시에서는 매번 낙방(落榜)했다. 마침 강서(講書)는 제외(除外)하는 별시(別試)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의심할 것도 없이 박염이 장원할 것이라 하여, 모두들 와서 축하해 주었다. 과거 날짜가 다가오자, 응시(應試)할 여러 사람은 새 줄과 강한 활을 박염에게 먼저 시험해 보도록 청하였다. 박염은 힘을 자랑하여 사양하지 않고 모두 시험했다가 과장(科場)을 개시할 때에는 두 팔이 붓고 아파서 약한 활도 능히 당기지 못하였고, 끝내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천명(天命)이 없으면 인력으로는 취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 상공 이준경(李浚慶)은 엄숙 정직하고, 효우와 충신(忠信)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말소리는 큰 쇠북같고 눈빛은 자색 번개같았다. 청렴하고 결백하여 공정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으며, 학문이 해박(該博)하여 일을 만나면 즉시 결단하였다. 명종이 승하(昇遐)하던날, 왕비의 친척이 정권을 잡으니,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의젓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조야(朝野)가 믿어서 걱정하지 않았다. 본조(本朝)의 어진 정승으로서, 황희(黃喜)ㆍ허조(許稠)ㆍ정광필(鄭光弼) 외에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

‘천 리를 지나면 풍기(風氣)가 같지 않고 백 리를 지나면 습속이 같지 않다.’는 것은, 예부터 전해 오는 보통 있는 말이다. 중국에 있어서는 평평한 언덕과 넓은 들이 사방으로 바라보아도 끝이 없어, 반드시 천 리를 지난 다음에 풍기가 같지 아니하고, 백 리를 지난 다음에 습속에 차이가 난다. 옛날 춘추(春秋) 13국이 숭상하던 바가 같지 않았음은 《시경(詩經)》을 상고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다. 천 리 되는 강이 없고 백 리 되는 들이 없다. 한 고을 안에도 높은 산이 겹쳐 있고, 큰 마을 안에도 강물이 서로 굽이쳐 있다. 산 안팎의 물맛이 한쪽은 짜고 한쪽은 쓰며, 강 남북쪽에도 풍기가 순하기도 하고 역하기도 하여, 곳곳이 다 그렇다. 풍기의 후하고 박함과 습성의 아름답고 악함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니, 백성의 풍속을 살피는 자는 마땅히 유의할 바이다.

‘너[爾汝]’란 것은 가볍게 여기는 호칭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또한 짐승으로서 부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중국은 인심이 순후하여, 내가 일찍이 사신으로 왕래하며 가는 길을 죽 보았으나, 감히 남에게 폭언(暴言)을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 나라는 인심이 간사하고 완악하여, 예의(禮義)로 양보하기는 생각하지 않고, 거만하고 업신여기기를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자기와 뜻이 맞지 않으면 문득 이 자식 저 자식이라 부르고, 혹 남의 어미와 아내를 들어서 꾸짖고 욕한다. 심지어 아이들과 심부름하는 졸개들은 보통 하는 말에도 더럽고 나쁜 말을 못하는 소리 없이 한다. 기명(器皿)을 나무랄 때도 반드시 ‘이놈의 그릇’이라 하고, 마소에게 성이 나도 반드시 ‘이놈의 말, 이놈의 소’라 한다. 버릇이 성품으로 된 것이 이와 같으니, 예의의 풍속을 어찌 볼 수 있겠느냐? 내가 일찍이 선배에게 들으니, ‘이런 부끄럽고 나쁜 말이 조종조에는 전혀 없었는데, 연산군 말년과 정릉(靖陵 중종) 초년에 호남의 영광(靈光)ㆍ만경(萬頃) 지방에서 처음 나와서 사방으로 전해졌다.’ 한다.

○ 원성읍(原城邑) 서쪽 30리 밖에 안창관(安昌館)이라는 역관(驛館)이 있는데, 역관 남쪽에 강이 있고 강 동쪽에 산이 있다. 세상에서 건등산(建登山)이라 부르는데 왕건(王建)이 올랐던 산이라는 것이다. 한가운데가 높고 둘레가 커서, 새가 날개를 편 것같다. 그 위에는 넓고 평평하여 백여 명이 앉을 만하며, 찬 샘물이 있어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는, ‘고려 태조(太祖)가 태봉(泰封)에게 벼슬하면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정벌하던 날에, 좌우 군사를 산 남쪽과 북쪽 들판에 머물러 두고, 이 산에 올라 기를 꽂았다.’ 한다. 고려는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로 문물과 예법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시조의 이름을 피하지 않고 건등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민속(民俗)의 야비(野鄙)함이 심하기도 하다.

원성(原城) 치악산(雉岳山) 쪽에 각림사(覺林寺)가 있다. 처음에는 띠집 두어 칸이 숲속에 황폐하게 있었는데, 헌릉(獻陵 태종의 능으로 태종을 지칭)이 즉위하기 전에 오가며 머물렀다. 절 남쪽으로 3~4리쯤에 용추(龍湫)가 있고 그 위에 대암(臺巖 대바위)이 산에 기대어 서 있는데, 헌릉이 때때로 책을 끼고 바위 위에서 읊조렸다 한다. 등극(登極)한 후에 특별히 명을 내려 고쳐 짓게 하여 드디어 큰 절이 되었으며, 주민은 대바위태종대(太宗臺)라 불렀다. 임진년 왜적의 난리에 절은 다 타서 없어졌으나 대바위는 우뚝히 서 있다.

○ 고려 말, 진사(進士) 원천석(元天錫)은 나의 외조부의 고조로 호는 운곡(耘谷)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해박하였는데, 원주(原州) 변암촌(弁巖村)에 살았다. 고을 동북쪽 5리쯤에 영천(靈泉)이라는 절이 있었다. 현릉이 즉위하기 전에 이 절에 묵으면서, 공에게 자문(咨問)하여 공의 깨우침[啓沃]이 자못 많았다. 대개 평창군(平昌郡)목조(穆祖)의 외가(外家) 고을이고, 고비(考妣)의 능(陵)이 삼척(三陟)에 있었으므로, 헌릉이 가끔 삼척에 왕래하였던 것이다. 헌릉이 즉위하자, 역말[驛馬]을 달려보내, 공의 안부를 물으니, 공은 죽은 지 벌써 오래였고, 공의 아들 원통(元侗)이 있었다. 편전(便殿)으로 불러와서 특별히 기천 현감(基川縣監)에 제수하였으니, 성주(聖主)께서 스승의 옛 정을 잊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절이 허물어진 지 몇 해 인지 모르나 세 탑은 지금도 오똑하게 남아 있다.

영묘(英廟 세종) 때에 광묘(光廟 세조)는 아직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잠저(潛邸)에 있었는데, 길례(吉禮 혼인)를 치르기 전의 일이다. 처음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와 혼인 말이 있어 감찰각씨[監察可氏]가 그의 집에 가니, 주부인(主夫人)이 처녀와 함께 나와서 마주 앉았다. 그때 정희왕후는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짧은 옷과 땋은 머리로 주부인의 뒤에 숨어서 보는 것이었다. 주부인이 밀어 들어가라 하면서,
“너의 좌차(坐次)는 아직도 멀다. 어찌 감히 나왔느냐?”
하였다. 감찰각씨는 주부인에게,
“그 아기의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과 겨눌 바가 아니니, 다시 보기를 청합니다.”
하고, 아름답게 여겨 마지않고 대궐에 들어와서 아뢰어 드디어 정혼 하였다. 각씨의 사람 알아보는 안목을 지금까지도 일컫는다.

○ 조종 때에 궁중 아기씨[阿只氏]가 피접(避接) 나가는 곳은 반드시 종실(宗室)이나 혹은 외족(外族)의 집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군(君) 및 옹주(翁主) 등이 피접하는 일을 여염 사람은 전연 몰랐다. 금상(今上) 때에 와서는 궁중각씨와 별감(別監) 등이 농간을 부려서 ‘아무 방위, 아무 지역이 가장 좋으니 아무날 아무 시에 아무 집으로 가는 것이 좋다.’ 하고 갑자기 사족(士族)의 집에 와서 바깥 문에다 표를 붙이고 그날로 당장 비우라고 독촉을 한다. 주인집은 당황하여 살림살이 할 것도 제대로 거두어 간수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버리고 간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자도 많았다. 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혹은 수십 일만에, 혹은 반 달만에 문득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긴다. 이리하여 시끄럽게 구는 폐단으로 원망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건마는, 성상(聖上)께서 알지 못하니, 한스럽다.

춘방 하번(春坊下番)으로 입시(入侍)하는 관원은 세자(世子)가 배운 글과 좌우에서 강론(講論)한 말을, 나와서 단자(單子)에 기록하여 정원(政院)에 바쳐서 대전(大殿)에 전계(轉啓)하는 것이 예전부터 전해 오는 규례(規例)였다. 인묘(仁廟 인종)는 무려 수삼십 년을 동궁에 있으면서 학문이 나날이 진보하였다. 삼시 서연(三時書筵 삼시는 아침ㆍ낮ㆍ저녁. 즉 조ㆍ주ㆍ석강(朝晝夕講)) 외에 또 야대(夜對)가 있고, 또 불시에 접견(接見)하는 일도 있었으므로, 하번(下番)은 추가하여 기록하기가 어려워서 붓과 벼루를 가지고 입시하기를 마치 대전에 사관(史官)이 있는 것같이 하였다. 하루는 빈객(賓客) 임권(任權)이 동궁에게 고하기를,
“서연의 말을 빠뜨리더라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는데, 붓을 가지고 입시하는 것은 윗전[上殿]에서 하는 일입니다. 윗전과 같이 하는 일은 비록 작은 일이라도 참람되이 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붓을 가지고 입시하는 일은 드디어 없어지고 거행하지 않았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36세 적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 제1명(第一名)에 합격하고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드디어 제과(制科)에 뽑혔다. 이에 앞서 본국 사람으로서 비록 제과에 합격하였으나 죄다 하열(下列)이었는데, 공이 지은 대책(對策)은 독권관(讀券官)이 크게 칭찬하여 제2갑(第二甲)에 들어,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로 제수되었다가, 중서성 좌우사 낭중(中書省左右司郞中) 벼슬까지 하였다.

○ 선조(先祖) 목은(牧隱)은 무진생(戊辰生)이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원년 신사(辛巳 1341, 고려 충혜왕2)에 송당 선생(松堂先生) 김광재(金光載)가 과시(科試)를 주장할 적에 공이 14세로서 시과(詩科)에 합격하였다. 무자년에는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서 중국 서울에 가서 입학하였다. 기축년에는 학궁(學宮)에 있었고, 경인년에는 분학(分學)으로서 상도(上都)에 갔다가 겨울에는 학궁으로 돌아왔다. 신묘년 정월(正月)에 가정(稼亭)의 부음(訃音)을 받고 분상(奔喪)하여 본국에 돌아왔고, 계사년 여름에 상기(喪期)를 마쳤다. 5월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과거를 개설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지공거(知貢擧)로, 양파 선생(陽坡先生) 홍언박(洪彦博)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있었는데, 공이 제1인(第一人)으로 합격하였으며, 가을에는 정동성시(征東省試) 제1명(第一名)으로 합격하였다. 갑오년에 공의 나이 27세로,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아주 훌륭하게 여겨서, 처음에는 장원으로 매기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논의가, 외국 사람이라는 것으로써 어렵게 여겼다. 그리하여 제2갑 제2명(第二甲第二名)으로 내려 결정되었고, 응봉한림문학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學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가 중국 과거에 오른 후부터 천하가 모두 동국에 한산(韓山)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목은의 화상(畵像) 제용동(濟用洞) 종가(宗家)에 간직되어 있다. 사모(紗帽)와 홍포(紅袍)와 서대(犀帶)를 착용하였고, 권양촌(權陽村 이름은 근(近))이 찬(贊)을 지었는데, 고려 말년에 조정에 있을 때의 화상이었다. 내가 괴원(槐院 승문원의 별칭)에 있을 적에 박식(博識)한 선비 하나가 나에게 말하기를,
“선정(先正)에게 들으니, 혁명(革命)한 후에 공은 항상 초립(草笠)을 쓰고 흰옷에다 가는 실띠를 띠고 거상(居喪)하는 옷차림을 하였는데, 그 화상이 도성(都城) 안에 남아 있어, 직접 보았다 하였습니다.”
하므로, 나는 널리 물어보았으나 볼 수 없었고, 항상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였다. 왜적의 난리를 겪은 후에는 대성 거족(大姓巨族)이 서로 전해 오던 문헌(文獻)도 씻은 듯 없어져 남음이 없으니, 내가 그의 흰옷 차림의 화상을 볼 수 없음이 확실하다. 한탄스럽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고려 말기에 적성 훈도(積城訓導)로 있었다. 적성에서 송경(松京)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노옹(老翁)을 만났다. 노옹은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를 이끌고 밭을 갈다가 방금 쟁기를 벗기고 숲 밑에서 쉬던 참이었다. 공도 또한 그 곁에서 말을 쉬이고, 노옹과 서로 말하게 되었다. 공은,
“노옹의 두 마리 소가 모두 살지고 크며 건장합니다. 밭 가는 힘에는 우열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노옹은 옆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낮은 말소리로,
“어떤 색 소가 낫고 어떤 색 소가 못하오.”
라고 말하였다. 공이,
“노옹은 어찌 소를 두려워하여 이같이 가만히 말하오.”
하니, 노옹은,
“그대가 나이 젊어서 들은 것이 없음이 심하구려! 짐승이 비록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사람의 말의 좋고 나쁜 것은 모두 알아듣는다. 만약 제가 못나서 남만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에 불평스러운 것이 어찌 사람과 다르겠나? 그대가 나이가 젊어서 들은 것이 없구려!”
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공의 평생에 겸후(謙厚)한 도량은 이 노옹의 한 마디 말에서 얻은 것이었다. 고려가 망하려 하자, 군자(君子)로서 숨어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노옹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황 익성공이 수상이 되어 정부에 나가는데, 의복이 남루한 노옹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앞에 와 서서 익성공의 자를 부르면서,
“내가 그대를 보기 위해서 왔는데, 어디로 가는가?”
하였다. 공이 수레를 멈추고,
“마침 공사(公事)가 있어 나가나 오래지 않아서 돌아올 것이니, 그대는 우리집에 가서 밥을 청해 먹고 우선 머물러 있게.”
하였다. 노옹은 공의 집에 가서 공의 자제에게,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 집에 가서 기다리라 하였다. 밥을 지어다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말에 따라 밥을 지어주었다. 조금 후에 공이 돌아와 노옹과 함께 한방에 들어가서 수일 동안 같이 있었다. 너나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나 그들이 의논한 바가 어떤 것인지는 비록 집안 사람과 그 자제들도 또한 알지 못하였다. 노옹이 떠날 무렵에 공에게,
“근래에 양식과 찬이 다 떨어져 걱정이니, 그대가 도와주겠나?”
하였다. 공은 간략하게 두어 가지를 전대에 담고 청지기를 시켜 노옹이 가는 곳을 따라가게 하였다. 옹은 노량진(鷺梁津)을 건너 관악산(冠岳山) 밑으로 가는 것이었다. 빙빙 돌아서 오르다가 산 중턱에 와서 청지기에게,
“아침밥을 먹었는가?”
하고 물었다.
“아직 먹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노옹은
“갈길이 아직 머니, 먹지 않고서는 안 된다.”
하며, 산밑 인가(人家)를 가리키면서,
“저 집 주인은 나와 평소에 친한 사람이다. 네가 가서 내 말을 하고 밥을 요구하면 반드시 후하게 대접할 것이다. 나는 우선 이 나무 밑에 앉아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
하였다. 청지기가 그 집에 가서 노옹의 말을 전하니, 그 집에서는 꾸짖으면서,
“노옹이란 자가 누구냐? 너는 뭐하는 놈이길래 나에게 밥을 요구하는 것이냐?”
하면서, 지팡이를 들고 쫓아내는 것이었다. 청지기는 허망하여 노옹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오니, 노옹과 메고 갔던 물건이 모두 없었고, 마침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황 익성공영묘(英廟 세종)가 좋은 정사를 하는 때를 만나서 예법을 마련하고 악(樂)을 지으며, 큰일을 논하고 큰 논의를 결단하였다. 날마다 임금을 돕는 것만 생각하였고 집안 대소사는 모두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루는 계집종들 간에 서로 싸워서 한동안 떠들썩하였다. 한 계집종이 공의 앞에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아무 계집이 나와 서로 싸웠는데 이렇게 극악하게 저를 해쳤습니다.”
하고 아뢰니 공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 계집종이 또 와서 자리를 두드리며, 꼭 같이 호소 하였다. 공은 또,
“네 말이 옳다.”
하였다. 공의 조카가 공의 옆에 있다가 마땅치 않은 기색으로 나서며,
“아저씨는 몹시 흐리멍텅합니다. 한 사람은 저렇고 한 사람은 이와 같으니,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릅니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심합니다.”
하니 공은,
“너의 말도 또한 옳다.”
하면서, 글읽기를 그치지 않고 끝내 분변하는 말이 없었다.
○ 찬성(贊成) 손순효(孫舜孝)는 옛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겨하였다. 관동 방백(關東方伯)이 되어서는 무릇, 효자ㆍ열녀의 정려각(旌閭閣)을 만나면 반드시 예(禮)를 올리고 지나갔다. 원주(原州)에서 횡성(橫城)으로 향해 10리를 들어가면 길가에 고려 원종량(元宗亮)의 효자비(孝子碑)가 있는데, 순찰(巡察)하던 날 마침 비가 와서 길이 진흙탕이었다. 공이 그 비석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도롱이를 땅에다 깔고 절하였다. 절한 다음에 보니 도사(都事)는 도롱이를 둘러쓰고 똑바로 서 있는 것이었다. 돌아보면서,
“도사도 절하였는가?”
하니,
“먼저 절하였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자는, 절하지 않았다 하여도 될 일인데 먼저 절하였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가소롭다 하였다.

○ 상공 이극배(李克培)는 어진 덕과 깨끗한 명망이 당시에 높았다. 그의 아우 이극돈(李克墩)도 또한 재상 반열에 있었는데, 재물을 탐낸다는 것으로써 꽤 나무람을 받았다. 하루는 이극돈이 공에게,
“언제가 저의 생일입니다. 집사람이 간략한 술자리를 베풀고자 하니, 잠깐 왕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므로, 공이 허락하였다. 그날이 되어 공이 정부(政府)에서 바로 아우의 집으로 갔다. 바깥 문간에 들어가다가 새로운 숙마(熟麻) 새끼줄이 처마밑에서 담 위에까지 뻗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공은 물러서면서, ‘이 새끼줄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누구에게서 얻은 것인가?’ 물었다. 이극돈은 숨기지 못하고, 바른대로 고하여,
“사복시(司僕寺) 관원 중에 서로 아는 자가 있어 빨래하는 데에 쓰라고 보내 왔습니다.”
하였다. 공은 성을 내며 말하기를,
“사복시의 새끼는 사복시의 말을 매는 데 써야지 어찌해서 너의 뜰에 걸려 있느냐?”
하고, 드디어 초헌을 타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그의 엄한 가법(家法)은 두려워할 만하다. 조종조 재상이 이와 같았으니, 백성이 어찌 부유하지 않겠으며, 나라의 창고가 어찌 가득하지 않겠는가?

○ 근세 유명한 경상(卿相) 중에 우애로 칭찬받는 이는 오직 상공 안현(安玹 상공은 재상의 높임말)이준경(李浚慶) 두 집뿐이다. 안현은 공경하는 것을 주로 하여, 그의 형 판서 안위(安瑋)를 엄부(嚴父)같이 섬겼다. 형이 말을 탔으면 자기는 말에서 내려서 가고, 형이 앉았으면 반드시 평상 앞에 나아가서 절하여, 응답(應答)하기를 매우 조심하였다.
   이 정승은 사랑하는 것을 중시하여, 그의 형 판서 이윤경(李潤慶)과 친구처럼 지내며 우애하였다.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베개를 가지런하게 하였다. 말하며 웃을 적에는 너나 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두 정승의 가풍은 비록 같지 않았으나 모두 당시 진신(搢紳)들의 흠모(欽慕)하는 바 되었다. 그러나 이윤경이 죽자 상공은 제복(制服)을 입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슬퍼하였고, 안 정승의 죽음에 안위는 조문(吊問)받고 곡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어, 상공 평생의 두텁던 우애를 저버린 듯하였다. 안위는 이것으로써 식자들의 나무람을 면치 못하였다.

○ 판서 조사수(趙士秀)는 문과에 제1등으로 올랐다. 처음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으로 제수 되었는데, 그때 나라가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 각사(各司)의 관원도 국고에 간직한 물건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공이 숙직하던 날 밤에 벗 두세 명이 달빛을 받으며 와서 향온주(香醞酒) 맛보이라고 요구하였다. 공은 그들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였다. 한참 후에 본집에서 하인이 좋은 술과 맛난 고기를 싣고 와 서로 권하며 즐기다가 마쳤다. 공이 평생에 청렴하고 결백하여, 구차하지 않던 절조가 처음 벼슬하던 때부터 의젓하였으니, 아! 숭상할 만하도다.
황형(黃衡)은 명장(名將)이고, 벼슬이 형조 판서까지 올랐다. 서사(書史) 읽기를 좋아하고 작은 예절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엄숙하고 침착하여 시위(侍衛)하는 졸개들이 두려워하였다. 사는 집을 짓는데, 청사 마루를 층지어 낮추었다. 그래서 낭료(郞僚)로서 공사를 가지고 오는 자는 비록 문사(文士)라 하더라도 반드시 아래층에서 절하게 하여 감히 방자히 굴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상하의 체모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 참판 윤부지(尹釜之)관동 방백(關東方伯)이 되어 원주로 하계(下界)하여 평창군(平昌郡)을 지나고 강릉(江陵) 월정사(月精寺)에 이르렀다. 비로 인해 머물러 묵게 되었는데, 거기에 기개(氣槪)가 너그럽고 활달한 눈썹이 많은 노승(老僧)이 있었다. 공은 한자리에 앉히고 서로 말을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그대는 오랫동안 길옆 절에 있었으니, 감사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어떤 일인지 알 것이오.”
하니, 노승은,
“빈도(貧道 중이 자기를 낮추어 일컫는 말)가 비록 말할 것이 있으나, 상공이 능히 곧이 듣고 가려서 시행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우선 말해 보시오.”
하니,
“상공은 보장사(報狀使)가 지체한 죄를 벌하지 말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완악하고 게으른 버릇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각 고을 보장사는 으레 가난한 관속(官屬)을 보냅니다. 입은 것이 몸을 가리지 못하고 먹는 것이 배를 채우지 못하므로, 얼고 굶어서 엎어지고 자빠지느라 능히 달리지 못합니다.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런데, 하물며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인 날에 능히 강을 날아 건너고 나무를 뛰어 넘어서 가겠습니까? 하루만 지체하여도 책망과 형벌이 따르니, 실로 어질고 너그러운 정사가 아닙니다.”
공이 말하기를,
“또 말할 만한 것이 있소?”
하니, 중이 말하기를,
“상공은 순행하는 날짜는 반드시 먼저 보낸 문서에 따르고, 당기거나 물리지 말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하니, 중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관리가 경계에서 오래 머무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 끓이고 국수를 삶아놓고서 목을 빼고 기다리는데, 오늘도 행차가 정지되고 내일도 오지 않아 밤을 넘긴 음식물을 두고 쓸 수 없으므로 다시 마을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구해 들이기를 몹시 급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이 해를 입는 것이 또한 큽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또 할 말이 있소?”
하니, 중이 말하기를,
“원컨대, 상공은 기생을 싣고 다니지 마소서.”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사(大師)의 말이 이에 이르니,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미인[尤物]이 정치를 방해하는 것은 진실로 산인(山人)으로서 알바가 못 되나, 기생 하나가 다니는 데에는 반드시 방에서 부리는 계집종과 따르는 사내종이 있습니다. 여러 고을에서 음식을 마련하고 뇌물을 주는 폐단과 각 역에서 짐바리를 실어 나르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너의 말을 따르리라.”
하였다. 공은 임기 내에 너그럽고 간략한 것으로 다스려 폐단을 없애기에 힘써서 백성이 지금까지 일컫는다.

○ 조종조에는 사대부(士大夫)의 옷 빛깔은 토홍(土紅)을 상등 빛깔이라 하였다. 대개 붉은 흙을 물에 담가서 찌꺼기는 버리고 정하게 만들어서 준비 하였다가 아교를 타서 물들이는데, 그 빛이 찬란하였다. 우리 나라 풍속에 토홍 직령(土紅直領)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말세(末世)에 와서는 천한 하리(下吏)들도 모두 홍화(紅花)로 물들인 빛을 입는다. 홍화는 이시(利市 이익(利益))인데, 이시라는 말은 그 값이 중하고 귀하다는 것이다. 또 당사(唐絲)를 섞어서 짠 베는 곱고 쫀쫀하여, 짜기가 어려워서 공력이 백 배나 든다. 재상 외에 당하관(堂下官 통훈(通訓) 정3품 이하) 이하는 착용할 수 없음은 국법으로 금하던 것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진년(1556, 명종 11) 여름에 괴원 정자(槐院正字) 정담(鄭䃫)이 일과(日課)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가 종루(鐘樓) 거리에서 사헌부(司憲府)의 금난리(禁亂吏)에게 걸렸다. 정담은 죽은 정승 정순붕(鄭順朋)의 아들로서, 젊은 나이에 명망이 높던 문관이었는데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으니, 국법이 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십 년 이래로는 하천(下賤)한 무리가 모두 무늬 있는 비단을 입어도 나라에서 능히 금하지 못하여 참람한 습속이 바로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아! 탄식할 일이다.

○ 고려 때 무과의 제도는 비록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우리 나라 식년(式年)의 규칙은, 인ㆍ신ㆍ사ㆍ해년(寅申巳亥年)에 문과(文科)와 함께 서울 및 각도에 초시(初試)를 실행한다. 각도에는 정해진 수효가 있고, 과거본 사람이 맞힌 화살의 많고 적은 수효에 따라서 방(榜)을 낸다. 다음 자ㆍ오ㆍ묘ㆍ유년(子午卯酉年)에는 초시에 합격한 사람을 서울에다 모아서, 육량전(六兩箭)ㆍ편전(片箭)을 쏘게 하고, 말타기와 창쏘기에 합격한 다음에 《장감박의(將鑑博議)》무경(武經) 중에서 하나, 사서(四書) 중에서 하나와 대전(大典)을 강하게 한다. 그리하여 조통(粗通) 이상을 맞힌 사람을, 맞힌 화살의 수효와 강서(講書)한 점수를 합계하여 높고 낮은 등수를 분간하며 다만 28인을 뽑는 것을 회시(會試)라 한다. 또 회시한 사람의 재주를 임금이 직접 시험하고 그 좌차(座次)를 정하는 것을 전시(殿試)라 한다.

   묘(光廟 세조)가 즉위한 지 6년 되는 경진년(1460)에는 사방을 순행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무과를 시행하였다. 초시를 하지 않고 규정에 제한도 없이, 맞힌 화살 수효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뽑았는데, 1년 동안에 뽑은 사람을 통계하면 1천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까지도 무사(武士)로서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활을 당기지 못하는 자를 ‘경진년 무과’라 한다. 이후부터는 무과도 또한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성묘ㆍ중묘 때는 별과의 규칙이 반드시 육량전(六兩箭)을 말을 타고 20보 밖에서 쏘게 하여 네 번 맞혀야 하고, 강(講)도 조통(粗通)한 다음이라야 방(榜)에 올랐다. 그런 까닭에, 뽑힌 무사는 모두 헌걸차서 쓸 만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계미년(1583, 선조 16)에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가 변경(邊境)에 들어와서 성을 함락시켰던 그때, 이이(李珥)가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나라를 지키다가 전장에 나가게 하는 계책을 건의(建議)하여 드디어 특별 과거를 설행하여 무사 6백여 명을 뽑았으며, 그후 해마다 뽑는 것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조종조부터 내려온 과거 규칙은 이때에 와서 씻은 듯이 없어져서 온갖 소임과 여러 군사로서 조금이라도 활을 집을 줄 아는 자는 모두 방에 올랐다. 그러나 왕궁을 시위(侍衛)하는 갑사(甲士)와 별시위(別侍衛)ㆍ정로위(定虜衛)의 무리와 외방 여러 진(鎭)에 기병(騎兵)ㆍ보병과 수군(水軍)을 새로 뽑는 데에는 수효가 많이 부족하였다.

○ 임진년 왜란 때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간 후 관서(關西)와 황해도에는 해마다 무과를 실시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동궁(東宮)이 주재하던 전주(全州)의 무군소(撫軍所)영남(嶺南)의 도원수부(都元帥府)와 각도에서 뽑은 것도 매우 많았다. 계사년에 대가가 도성에 돌아온 뒤부터 정유년까지 5년 동안에 여러 차례 대과[大擧]를 실시하였는데, 강서(講書)는 하지 않고 다만 화살 하나를 맞혀도 입격시켰으니, 명목은 과거라 하지만 실상은 군목(軍目)과 같았다. 신은방(新恩榜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의 방)을 발표하던 날에는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홍패(紅牌)를 잡고 미투리를 신고 걸어서 가는 자가 많았다. 왜란 이래로 앞서 출신(出身)한 자가 무려 수만 명인데, 그 중에는 한량(閑良)ㆍ사족(士族) 이외에, 서얼(庶孼)ㆍ공천(公賤)ㆍ사천(私賤)ㆍ백정(白丁) 따위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뽑은 사람이 많을수록 장수 재목은 더욱 모자랐다. 용렬하고 어리석어 거의 모두가 활도 당기지 못하며, 글자 한자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이들로써 굳세고 사나운 적을 막고자 하였으니, 국사를 꾀하는 자가 생각지 못한 것이 심하도다.

중묘(中廟)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여염(閭閻) 동구(洞口)에서 병을 요양하고 있었는데, 시골 사람 하나가 거의 열흘동안을 아침 저녁으로 문앞을 지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하루는 그 사람이 비를 만나, 중묘가 요양하고 있는 집 문안에 들어왔다. 중묘는 당(堂)에 오르게 하고, 이어서 누구의 아들이며, 무슨 일로 어디를 그렇게 부지런히 가고 오는가를 물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성명을 말하고 이어서,
“이 동리 안에 사는 이조 서리가 나에게 증산 훈도(甑傘訓導)를 시켜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오래도록 비답이 내리지 않으므로, 자주 가서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중묘는 편지를 써주면서,
“내가 참의를 안다. 이 편지를 그에게 주면 반드시 소원대로 될 것이니, 다시 고생하지 말라.”
하였다. 그 사람은 편지를 받아갔으나, 처음부터 대군(大君)이 요양하고 있는 곳인 줄을 몰랐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반정하고 중묘가 즉위한 다음에, 그 사람이 참의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 사람의 말하는 바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고, 또 어휘(御諱)가 있었다. 참의는 곧 대궐에 들어가서 아뢰었다. 중묘는 전교(傳敎)하기를,
“이것은 내가 직접 쓴 것이나 그가 말한 것은 잊었으니, 그 사람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정원(政院)이 패초(牌招)하여 물으니, 곧 증산 훈도를 원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특명으로 제수하였다.

팔도하(八渡河) 북쪽에 답동(沓洞)이 있다. 내가 전에, ‘중국에는 산도(山稻)만 있고 쌀[玉粒]이 없는 것은, 남방 구석진 곳 외에는 모두 대륙(大陸)이어서 높고 건조하며, 하수(河水)는 깊고 넓어서 관개(灌漑)할 수 없으므로 그런 것이라.’ 하였다. 그후 강을 건너 지나가는 곳을 두루 살펴보니, 산세(山勢)가 빙 돌았고 물 흐름도 느려서, 물기 있고 기름진 땅이 많이 있었다. 고려 때에 이런 곳을 논으로 만들려고 하였다면 안 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또 답(沓)으로 동네 이름을 지어 지금까지 그러한데도 오히려 논이 없는 것은 갈고 심으며 김매는 공력이 밭보다 백배나 더 들므로, 힘든 것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임금만이 옥식(玉食 하얀 쌀밥)하는 것이므로 서민(庶民)은 감히 참람히 할 수 없어서 심지도 못하여 그런 것인가? 이것은 알 수 없다.

   또 농기(農器)를 보더라도 우리 나라의 호미라는 것은 자루 길이가 불과 반 자이고, 날이 좁고 끝이 날카로워서 새의 부리와 같다. 이랑 사이에 앉아서 잡풀을 뽑는 것인데, 쓰기에 편리하다. 관내(關內)와 남방에도 호미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모양은 또 우리 나라의 예자(刈子)라는 것과 다르다. 자루 길이는 거의 두 발[丈]이고 날은 넓고 커서, 우리 나라의 가래와 같은 점이 있다. 이것은 모두 밭에 서서 가꾸기에 알맞고 논에 쓰는 것은 아니다. 대저 중국은 흙이 두터워서 밭일이 그리 고되지 않은데, 우리 나라는 땅이 메마른데다가 논농사를 하여 그 노동하는 고됨이 반드시 밭보다 곱절이나 힘을 들여야만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 나라 농민의 괴로움을 알 수 있다.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은 천성이 순후(醇厚)하고 문장이 풍부하여, 성묘가 가장 중하게 여겼다. 공이 집현전 교리로 있을 적에 부모를 편하게 봉양할 뜻으로 고을살이를 청해서 함양(咸陽) 원으로 나갔다. 공이 학문을 강론(講論)하는 데에는 밝았으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서툴렀다. 여러 학생과 학사루(學士樓)에 올라 날마다 경서와 《사기(史記)》를 토론하였는데, 시골 백정 한 사람이 단(壇) 밖에서 호소하기를,
“소장(訴狀)을 바친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까지 처분이 없으니, 극히 민망합니다.”
하였다. 안전 아전(案前衙前)이 머리를 들어 묻기를,
“네가 바친 것이 며칠이나 되느냐?”
하니, 백성은,
“지금 벌써 사흘이오”
하였다. 아전이 꾸짖으며,
“5~6일 전의 것도 아직 판결이 없는데, 너는 어찌 바쁘게 구느냐? 우선 물러가서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여러 학생이 서로 돌아보고 웃으니, 공은,
“사람마다 가소로운 일이 있다. 너희들은 나의 정사를 웃거니와, 나는 또 너희들의 제술(製述)을 웃는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뇌계는 함양 사람인데, 어찌 본 고을에 원으로 나왔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합천(陜川) 원으로 있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기록하는 자의 잘못일 것이다.

호남(湖南) 변산(邊山) 근처에 조 상사(曺上舍 상사는 진사임)라 부르는 자가 살았다. 이웃에 양수척(楊水尺 무자리)이 있었는데, 조씨(曺氏)의 집 재물을 꾸어 쓰고 오랫동안 갚지 못하였다. 하루는 버들을 베려고 산밑에 갔다가, 큰 호랑이가 네 발을 벌리고 바위 밑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호랑이가 개를 잡아 먹고 잠에 취해서 곤하게 잠든 것이었다. 양수척은 바라보고 죽은 호랑이로 여겨, 상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갚지 못한 빚이 있는데 지금 큰 호랑이를 잡았으니, 가져다가 쓰십시오.”
하였다. 상사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날뛰었다. 양수척과 서로 의논하되 ‘싣거나 끌어오거나 하면 털이 상할 염려가 있다.’ 하고, 곧 떠메고 올 틀을 만들어서 건장한 종 5~6명을 거느리고 양수척이 지시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상사는 빙빙 돌아서 바위에 올라, 호랑이를 굽어보고 앉았고, 종들은 틀을 가지고, 바로 호랑이 곁에 가서 소리를 치면서 틀을 놓았다. 그러자 호랑이는 놀라 일어나서 으르렁대며 모래를 날리고 나무 끝을 후리쳤다. 소리를 질러 골짜기를 울리면서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상사는 황급하여 바위 밑에 떨어졌는데 얼굴과 사지를 모두 다쳐 말을 타지 못하고 틀 위에 뉘여서 메고 돌아왔다. 그때는 중춘(仲春)이어서 상사는 누른 삼베 새 홑옷을 입고 있었다. 집에 있던 자제들은 문에 나서서 바라보고 서로 돌아보며 가리키면서,
“이번 호랑이는 얼룩 무늬 호랑이가 아니고 누른 호랑이다.”
하였다. 집에 이르자, 상사가 끙끙대면서 틀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온 집안이 혀를 내둘렀다. 상사는 집에 누워 두어 달 동안 약을 먹은 뒤에야 겨우 소생하였으니, 재물을 탐내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 코피 흘리는 증세에는 참먹[眞墨]을 삼키고, 개에게 물린 상처에는 호(虎) 자를 진한 먹으로 쓰고, 말에게 물린 상처에는 말채찍을 태워서 붙이고, 물고기 뼈가 걸린 목에는 고깃 그물을 걸고서 노자(鸕鷀)를 부른다 한다. 의서(醫書)에 기재된 이런 처방이 하나뿐이 아니거니와, 그 이치는 실로 알 수가 없다.

○ 성묘조(成廟朝)에 환관(宦官)이 휴가를 받고 관서(關西)에 갔다가 돌아온 자가 있었다. 성묘가 하루는 편전(便殿)에서 묻기를,
“네가 가는 길에서 들은 것과 본 것이 있으면 숨김없이 아뢰어라.”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달리 보고 들은 일은 없고, 다만 돌아올 적에, 하루 동안에 청천강(菁川江)을 아홉 번이나 건넜습니다.”
하였다. 성묘가,
“어찌해서 그랬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가산(嘉山)에서 안주(安州)를 향해 오는데 청천강에 와서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서변(西邊)의 소임으로 있다가 돌아온다는 만호(萬戶)가 방지기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강변에서 서로 작별하려 하더니 방지기가 말하기를, ‘어찌 차마 여기에서 작별하겠습니까? 저쪽 언덕에 가서 이별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저쪽 언덕에 오게 되자, 만호는, ‘네가 강을 넘어서까지 나를 전송하는데, 나도 여기에서 너만 홀로 보낼 수가 없다.’ 하며, 드디어 상앗대를 서쪽 언덕으로 돌렸습니다. 방지기는, ‘도로 와서 전송하는 두터운 정을 내가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함께 돌아왔습니다. 만호는 또,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이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 아니다.’ 하고 또 함께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배 안에서 제 마음재로 할 수 없어, 같이 갔다가 같이 왔다가 하였는데, 가고 오고한 회수가 아홉 번이나 되었습니다. 겨우 뭍에 내려서자, 날이 벌써 저물어서, 멀리 가지 못하고 강변에서 잤습니다.”
하고, 만호의 성명을 아뢰었다. 두어 해 뒤에 그 사람이 변장(邊將) 말망(末望)에 참여하였는데, 성묘는 미소를 지으며,
“이 사람이 청천강을 아홉 번 건너던 사람인가?”
하고, 드디어 붓을 휘둘러서 낙점(落點)하였다.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광묘(光廟)에게 총애를 받아, 여러번 훈적(勳籍)에 참여하였고, 벼슬이 수상(首相)에 이르러, 권세가 혁혁(赫赫)하였다. 성묘(成廟) 초년에도 선조(先朝)의 옛 신하로서 세력이 성하여 온 조정이 감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왕자(王子) 오산군(烏山君)이 일찍이 그의 기세를 꺾어서 욕보이고자 하였다. 하루는 비가 와서 길이 수렁이었다. 인산(仁山)이 대궐에 나아가는데 영추문(迎秋門)으로 가는 것을 틈타서, 오산군은 종각(鐘閣) 모퉁이 돌다리 남쪽에 숨어 있다가, 짚자리를 길 위에 깔고 그 위에 서 있었다. 인산이 수레를 몰아 달려오다가 왕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수레에서 내렸다. 오산은 손을 마주 잡고 읍하였다. 인산은 한참 동안 걸어서 지나가는데 진흙 수렁에 목화[鞾]가 빠지고 옷이 다 더러워졌다. 인산은 낯빛이 흙빛으로 변하였는데, 보는 사람은 모두가 통쾌하게 여겼다. 대궐 문에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차비문(差備門)에서, 오산이 자기를 모욕한 정상을 아뢰었다.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크게 노하여 오산을 대궐에 불러들여서 꾸짖었다. 오산은,
“홍윤성의 호소는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정희왕후는 사람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 감사 송흠(宋欽)은 늙어서 호남 방백이 되었으나, 미인[尤物]에 대한 생각은 능히 잊지 못하였다. 순찰하다가 기생 없는 고을에 이르면, 저녁에는 반드시 훈도(訓導)를 방안에 불러들여서 나그네의 잠자리가 쓸쓸하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면 훈도는 나가서 원과 의논하여 관비(官婢) 중에 얼굴이 조금 쓸 만한 자를 골라서 잠자리를 모시게 하였다. 공이 순찰하다가 하루는 아주 궁벽진 고을에 도착하여 역시 훈도를 불렀다. 훈도는 산증(疝症)이 재발(再發)하여 능히 굴신(屈伸)하지 못하던 참이었다. 새벽이 되어 지팡이를 잡고 가서 창밖에 엎드려, 소리(小吏)를 시켜 아뢰기를,
“저녁에 부르심을 받았으나 마침 병을 앓아서, 거의 죽을 뻔하다 요행히 살아나 이제야 왔습니다.”
하니 공은,
“훈도는 나의 병은 모르는 자로다. 저녁 훈도는 서로 접견하지마는 새벽 훈도는 본디부터 보기를 즐기지 않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김안로(金安老)는 오랫동안 정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간사하고 탐심(貪心)이 많아서, 뇌물의 양에 따라 반드시 얼굴빛이 달라졌다. 황침(黃琛)충청 병사(忠淸兵史)가 되어, 참깨 20말을 김안로에게 보냈다. 그후 임기가 다 되어 돌아와, 첫새벽에 안로의 집에 가서 명함을 들여보냈으나 김안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황침은 오랫동안 문밖에 서서 피로하게 바라보며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해가 높이 오르자, 임천손(林千孫)이 또한 충청 수사(忠淸水使)로서 벼슬이 갈려서 왔다. 명함을 들여보내자 김안로는 곧 청사에 나와서 맞이하였다. 황침도 따라서 들어갔는데 김안로가 임천손을 향해서는 정답게 웃고 말하며 다소 덕스러운 기색이 있었으나, 황침에게는 쌀쌀하게 한마디 위로하는 말조차 없었다. 그후에 황침은 총부(摠府)에 부총관(副摠管)으로 되었고, 임천손도 삼청 위장(三廳衛將)으로 가게 되었다. 황침이 맞이하여 서로 이야기하다가,
“전에 정승이 그대를 향해서 지극히 은근한 뜻을 표시하였는데, 반드시 한 일이 있었을 것이오. 숨기지 말고 말해 보시오.”
하였다. 임천손이 처음에는 말을 숨겼으나 황침이 강요하자, 임천손이 웃으면서,
“내가 수영(水營)에 있을 때에, 정승이 혼수감을 요구하기에, 큰 나무를 베어서 큰 배를 만들고 모든 소용되는 일체의 물건을 가득 실어서 배째로 보냈는데, 반드시 이 때문에 기뻐한 것이오. 그 밖에는 딴 것이 없소.”
하였다. 황침은 손벽을 치고 땅에 넘어지면서,
“나의 참깨 스무 말은, 큰 바다에 던진 것이었구나.”
하였다. 이는 사소한 물건이어서 그 욕심에 차지 않았을 것이므로, 자취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조종조는 육조(六曹)에 숙직하는 낭관들은 달밤에 창기(娼妓)들과 어울려서 광화문 밖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불러 밤새도록 마시고 담소하였으니, 이것은 태평 시대의 일이다. 한갓 육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미원(薇垣 사간원의 별칭)의 관원도 또한 곡회(曲會 이리저리 꾸며대서 모임)를 일삼았고, 입직하는 밤에는 반드시 기생을 끼고 잤다. 새벽녘이면,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창밖에 서서 뵙기를 청하는데, 이것은 계집을 일찍 내어 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후에는 세상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금법(禁法)이 점점 세밀하여져서, 육조에 숙직하는 풍습이 아주 바뀌고 미원에서 밤놀이하던 것도 또한 없어졌다. 그런데 숙직하는 날 밤에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뵙기를 청하는 고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남소문동(南小門洞)사족(士族)의 과부(寡婦)가 있었다. 선대(先代)부터 보화(寶貨)를 많이 모았고, 또 항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을 모아, 특별히 나무궤 하나에 따로 보관해 두었는데, 무게가 열 섬이나 되었다. 매우 단단히 봉하고 얽고 잠그어서 다락 위 처마 밑에 두었다. 도둑떼가 그 소문을 듣고 들고 가려 하여도 무거워서 옮길 수 없고, 꺼내 가려 해도 잠근 것이 단단하여서 열 수가 없었다. 서로 돌아보고 침만 흘릴 뿐, 어쩔 방도가 없었다.

   어떤 한 도적이 열쇠 10여 개를 만들었는데, 크기가 서로 같지 않고 모양도 각각 달랐다. 하루는 주인집에서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부하 두세 사람을 거느리고 담을 넘어서 들어갔다. 여러 열쇠를 죽 시험해서 맞추어 열고 감추어 둔 것을 다 찾아내었다. 그리고 스스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궤안에 들어가 누운 다음, 열쇠를 전과 같이 채우게 하였다. 도둑은 궤안에서 가지고 있던 열쇠로 긁어서 쥐가 씹는 소리를 내었다. 여종들이 그 소리를 듣고 주모(主母)에게 알리니, 주모는 불을 밝혀 들고 궤문을 열었다. 도둑도 궤안에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치면서 뛰쳐나왔다. 종들은 놀라서 등불을 던지고 땅에 넘어졌는데, 도둑은 몸을 솟구쳐서 혹 뜰에 내리기도 하고, 혹 마루 위에 오르기도 하며 온갖 괴상한 소리를 다 내었다. 온 집이 놀라서 혼이 나가 반쯤 죽어 있었다. 도둑은 한참 뒤에 창을 열고 도망쳐 버렸다. 그 집에서 날이 밝은 뒤에 궤안을 살펴보니, 텅텅 비었고 한 가지 물건도 없었다. 그러자 진기(珍奇)한 보배가 오래되면 반드시 말썽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런 몹쓸 귀신이 되어서 갔다고 여겨, 무당을 부르고 소경을 맞아다가 빌고 액막이를 하여 장차 올 화만 면하여 하였고, 도둑의 짓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도둑의 꾀가 이토록 측량하기 어려우니, 참으로 큰 도둑이라 하겠다.

○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순초(金順初)는 내가 괴원(槐院)에 있을 때의 옛 동료로,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군자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가 되었을 적에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나자, 공은 고을 군사를 모으고 동남쪽을 가로막아 서로(西路)를 지킬 것을 계획하였다. 나는 호소근왕사(號召勤王使)로서 원주의 흥원창(興原倉)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공은 가리령(加里嶺) 영원성(鴒原城)에 들어가서 웅거하였다. 나는 정병 약간을 가려 보내서 원조해 주었다. 왜적이 성에 오르게 되자 민병(民兵)은 무너져 흩어졌고, 공은 부인과 차자(次子)와 함께 살해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염습(殮襲)하여 주천강(酒泉江) 동남쪽 산기슭에다 임시로 장사하였다가, 계사년 가을에 왜적이 물러가자, 여주(驪州) 땅으로 발인(發靷)하였다. 공의 맏아들 정랑 김시헌(金時獻)씨가 만사(挽辭)를 굳이 청하므로, 나는 사양하지 못하여 짧은 율시 3장을 지어 종이에 적어서 사람을 시켜 보냈다.
1
시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 勤苦詩書業
재주가 온전하고 덕 또한 많네 / 才全德又純
태평할 때는 뜻만을 즐기더니 / 時平唯樂志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몸 바쳐 인을 이루었네 / 世難却成仁
싸움에 패해 달아나니 장수 없음 부끄러워라 / 棄甲慚無將
관문에 이르니 사람 있음 기쁘네 / 當關喜有人
당당한 천고의 절개는 / 堂堂千古節
장순보다 못지 않으리 / 未必後張巡
1
백성은 청렴한 태수를 곡하고 / 民哭還珠守
조정은 높은 절의를 기렸네 / 朝褒死節隆
청렴 절의 다 이루고 아들 있으니 / 雙成又有子
온전한 아름다움 누군들 공과 같으리 / 全美孰如公
늠름한 기개는 안고경의 지조요 / 凜凜杲卿
건건한 마음은 왕촉의 충성일세 / 乾乾王蠋
산하같이 장하고 곧은 기개 / 山下壯直氣
때때로 긴 무지개 되리 / 時有化長虹
1
다섯 해나 승문원 옛 동료였고 / 五載承文舊
양대 조정에 묵은 정분 깊었네 / 二天宿契深
원래부터 좋아하여 상종함이 있었고 / 相從元有好
막역한 사이여서 서로 맘을 알았네 / 莫逆共知心
간절한 책선은 천 년의 가락이었고 / 偲切千年調
형제간의 우애는 백 대의 소리였네 / 壎篪百世音
기약을 같이 하고 함께 죽지 못했기에 / 同期未同死
저버림 부끄러워 눈물 흘리네 / 愧負淚盈衿


○ 실상이 없는 말을 헛말이라 하며, 말하고서 행하지 않는 것도 헛말이라 한다. 옛날에 사명(司命)이, ‘구천 상제(九天上帝)의 옆은, 뭇 별이 있는 곳이다.’ 하여, 실상이 없는 헛말을 부대 세 개에다 담고 하계(下界)에 던져서 길에 버려두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이원(梨園) 노기(老妓)가 차지하고 그 다음은 길 옆 수령(守令)이 차지하고, 또 그 다음 것은 이조 판서가 차지하였다 한다. 이것은 세상에 보통 있는 이야기로, 잘 비유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이 세 사람은 지위(地位)도 같지 아니하고, 행하는 것도 다르되, 그 승낙한 것을 하나하나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형세가 저절로 그렇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러나 헛말이라는 나무람은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

○ 상공 이동고(李東皐 이름은 준경)가 수상이 되어, 도당(都堂)의 홍문록(弘文錄) 회의 때에 당초에는 몇 권(圈)으로 하기로 정했는데, 권을 다 거둘 무렵에 공은 다시 한 권을 추가하게 하였다. 그것은 공의 아들 이덕열(李德悅)이 초권(初圈)에 들었던 까닭에 한 권을 더한 것이다. 전후 수십 년 이래로 함께 참여한 당상(堂上)들이 모두 기를 부리고 마음으로 사귀어, 젖냄새 나는 그들의 자제도 권에 들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권세 잡은 간신의 방자하게 군 것이었다. 이 상공이 비록 당초 약속을 어겼으나, 그의 정대(正大)한 기상은 따를 수 없다.
   근자에 홍문록을 가릴 때에, 처음은 다섯 권으로 한정하였는데, 권을 수합한 뒤에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가 다섯 권으로는 인원수가 모자라니, 한 권을 줄여서 4점 이상은 수용(收用)하도록 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윤훤(尹暄)과 이조 참판 강신(姜紳)의 아들 강홍립(姜弘立)이 모두 4점으로써 홍문록에 참여하였다. 그 일처리가 이동고와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박영(朴永)이라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근본은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에 우거(寓居)하여,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까닭에 가끔 서로 만났다. 사람됨이 온당하고 활달하여 모나지 않고, 또한 속된 무리와 섞이지 않았다. 초립(草笠) 만드는 것이 직업이었으나, 또한 부지런히 하지 않았다. 의식(衣食)이 자주 곤궁해졌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고, 술수학에 능통하여 말한 것에 맞는 것이 많았다. 중간에 소식이 오래도록 들리지 않다가 만력 정ㆍ무년간에 기쁜 얼굴로 와서 보고는,
   “거의 10년을 관서 지방에서 생계를 꾸려 오다가 이제야 서울에 돌아오니, 인심과 풍속이 전과 크게 다릅니다. 위로 조사(朝士)로부터 아래로 일반 선비까지 모두 남을 깔보고 스스로 잘난 체하는 버릇이 있어 이미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영공(令公)이 비록 풍헌(風憲)을 맡았으나,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이 반드시 믿고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 견해만을 고집하면 저들은 반드시 이론(異論)을 세울 것이고, 나의 올바른 뜻을 굽혀 저들을 따르면 도리어 사체(事體)를 해치게 될 터이니, 차라리 산야(山野)에 물러가서 편하게 누워 있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내가 그의 말에 깊이 감복하였으나, 능히 따르지 못하였다. 그후 역옥(逆獄)의 변이 일어나서 3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고, 왜적의 난리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 이기(墍)  :  가의(可依), 송와(松窩), 장정(莊貞)

요약  : 1522(중종 17)∼1600(선조 33).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자는 가의(可依), 호는 송와(松窩). 이장윤(李長潤)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질(李秩)이다. 아버지는 이지란(李之蘭)이며, 어머니는 원선(元璿)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했다. 생원시에 이어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장령(掌令), 1567년 수찬(修撰)을 역임한 뒤 전한(典翰)이 되어 편수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1년(선조 4) 직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에 올랐으나 노모가 원주에서 병으로 눕자 이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노모를 봉양하도록 1573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승지가 되었다. 1578년에 다시 양주목사로 내려갔는데, 이 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경기감사가 조정에 보고했다. 1583년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부제학을 역임했다. 이어 장흥부사를 거쳐 1591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화군 이보(順和君 李보)를 보필하면서 강원도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5년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 해 대사간·대사헌·동지중추부사를 차례로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올랐다. 1597년에 다시 지중추부사·대사헌·지돈녕부사·예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이듬해 지돈녕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 1603년에 2품 이상 재신을 청백리로 뽑는데 녹선되었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로 네거리를 지나는데 말이 너무 말라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이기는 개의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훗날 말이 피곤해 땅에 주저앉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대사헌의 말’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기는 이처럼 청빈하여 한사(寒士)나 다름없이 직책을 맡아보았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번암집(樊巖集)』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기(墍) <송와잡설(松窩雜說 )>은 일종의 야담집으로 <대동야승>에 수록되어 있다.  기자조선 부터 조선조 선조 때 까지의 설화를 수록한 책이다.

 

* 註:「松窩雜說(송와잡설)」은 조선중기의 문신 이기(李墍 1522~1600)가 쓴 시화잡록(詩話雜錄)으로『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있다. 이기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호는 송와(松窩)이다.

이 책에는 기자조선 때로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의 기록 130여건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는 수령들의 탐오(貪汚)함을 비판하거나 개가 금지법의 부당함을 지적한 것도 있고, 신식 병기의 편리함을 인정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농기구를 용도에 따라 설명하는 등 언어,풍속상에 참고가 될 만한 사항들도 실려있다.

   또한 이 책에는 저자의 선조인 이곡(李穀)과 이색(李穡) 부자에 관한 이야기와 그 밖의 조상에 관한 일도 들어 있다. 특히 이곡과 이색이 원나라에 가서 부자가 중국 과거에 오름으로써 동국(東國)에 한산(韓山)이라는 고을이 있음을 천하가 알리게 되었다고 기록하여, 저자의 문벌(門閥)을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