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9 

2018. 4. 23. 10:30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9  






奉使日本時聞見錄 / 三月      ㅡ 조명채(曺命采) , 1748



初一日乙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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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夜大注。留西山寺。晨行望 闕禮于 國書奉安廳事之庭。聞第三首譯洪聖龜之言。前年渡海時。見此廳床卓上奉安殿牌。漆色甚鮮。以金字書朝鮮 國王殿下萬萬歲。而一字之大如手掌矣。今則無之。似以 國書奉安移奉他所云。島主以初吉有所贈問。慴疊扇及鏝頭也。卽分與下輩。以酊長老以詩律一冊。送示使行。而詩中有以雛鸎爲題者。怪而問之。則近來始有此鳥云。而亦未可知也。館之北隅。設烏漆架子。列煎茶器皿之屬。而有一倭終日跪坐。不離爐邊。其茶品有上下之殊。而上品則只進於三使。他人雖欲一嘗。不許之云。其倭盡削頭髮。故行中初呼以茶僧。追後聞之。則見差此任者。欲梳則離次。不梳則欠敬。故盡剃其髮云。奉行,裁判之間。不甚絶等。而奉行來坐。則裁判趨蹌出入。不敢仰視。裁判來坐。禁徒等亦如之。可見其爵次尊卑之嚴矣。倭俗本無負戴之規。而物之輕者。係於一杠之兩頭而一人荷焉。其重者。係於杠之中而兩人前後荷之。此則見諸畫中。華人亦然。時有携竹桶。行呼於街路者。問是屑糖之商。而其名物之言雖殊。其聲則可知爲行商也。




1일(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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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비가 크게 쏟아졌다. 서산사에서 묵었다.
새벽에 국서봉안청(國書奉安廳)의 뜰에서 망궐례(望闕禮)를 거행하였다. 제 3수역(首譯) 홍성귀(洪聖龜)의 말을 들으니, ‘전년에 도해(渡海)한 때에 이 청의 상탁(床卓) 위에 봉안(奉安)한 전패(殿牌)를 보니, 칠 빛이 매우 곱고 금자(金字)로 ‘조선국왕전하 만만세(朝鮮國王殿下萬萬歲)’라고 쓰되 한 자의 크기가 손바닥 만하였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없으니, 국서의 봉안을 다른 곳으로 옮겨 받든 것 같다’고 한다.

   도주(島主)가 초하룻날이라 하여 증문(贈問 물건을 보내고 위문함)하였는데, 접는 부채와 만두였다. 곧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정암 장로가 율시(律詩) 한 책을 사행(使行)에게 보내어 보여 주었는데, 시 가운데에 ‘새끼 꾀꼬리[雛鸎]’로 제(題)를 삼은 것이 있으므로 이상하여 물었더니, 근래 비로소 이 새가 있다고 하나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관소(館所)의 북쪽 모퉁이에 검은 칠을 한 선반을 설치하고 차를 끓이는 그릇붙이를 벌여 놓고서, 한 왜인이 종일 꿇어앉아 화롯가를 떠나지 않는다. 그 차의 품질에는 상하의 구별이 있어서, 상품은 세 사신에게만 바치고 다른 사람은 한 번 맛보려 하여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왜인은 머리털을 모두 깎았으므로 행중(行中)이 처음에는 다승(茶僧)이라 불렀으나, 뒤에 들으니 이 일에 뽑힌 자는, 머리 빗으려면 자리를 떠나야 하고 빗지 않자니 공경하지 못하게 되므로 그 머리를 모두 깎는다고 한다.

   봉행(奉行)과 재판(裁判) 사이는 등급이 그리 차이 나지 않는데도 봉행이 와 앉아 있으면 재판은 허리 굽혀 빠른 걸음으로 드나들고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며, 재판이 와 앉아 있으면 금도(禁徒)들이 역시 그러하니, 그 벼슬 차서의 높고 낮음이 엄한 것을 알 수 있다. 왜의 풍속에는 본디 짐을 지고 이는 법이 없어, 가벼운 물건은 한 막대기 양 끝에 걸어서 한 사람이 메고, 무거운 것은 막대기 가운데에 걸어서 두 사람이 앞뒤로 메는데, 이것은 그림에서 보면 중국인도 그러하다. 때로 대통[竹桶]을 끌고 다니며 거리에서 외치는 자가 있어 물어 보니 설탕 장사인데, 그 물건을 부르는 말은 이상하나 그 소리는 행상(行商)임을 알 수 있다.

 *** 조명채(曺命采) :  주경(疇卿), 난재(蘭齋)


요약  : 1700(숙종 26)∼1764(영조 40).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주경(疇卿), 호는 난재(蘭齋). 조한영(曺漢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헌주(曺憲周)이고, 아버지는 조하성(曺夏盛)이며, 어머니는 윤반(尹攀)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36년(영조 12)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 후 정언·지평·승지·판윤·이조참판·대사헌 등 중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1755년 예조참판이 되어 북도에 거주하고 있는 향화인(向化人) 자손들의 성관(姓貫)을 사출(査出)하여 성책(成冊)하여야 할 중요한 사명을 맡았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 때에는 옥사와 관련하여 국문을 당하였다가 곧 풀려났으나 2년 뒤에 죽었다.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공로로 국록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신사[通信使]  

 통신사[通信使]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 足利·德川幕府 )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고도 한다. 조선이 1403(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그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足利義滿) 장군도 책봉을 받자, 중국·조선·일본 간에는 사대·교린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이 되고,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권력자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으로 칭함)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신사란 용어는 적례(敵禮)적인 입장의 대등(對等)한 국가간에 신의(信義)를 통()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의 사절 왕래가 많아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에 달하였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의 호칭을 갖지는 않았으며, 이 중 장군에게 간 것은 8회 뿐이다. 예를 들면 명칭도 회례사(回禮使회례관(回禮官보빙사(報聘使경차관(敬差官통신사·통신관(通信官) 등 일정치 않았고, 목적과 편성도 다양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조건과 목적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국왕)에게 파견된다. 둘째, 일본 국왕의 길흉(吉凶) 또는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을 갖는다. 셋째,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국서(國書)와 예단(禮單)을 지참한다. 넷째, 사절단은 중앙의 고위관리인 삼사(三使) 이하로 편성한다. 다섯째, 국왕사의 칭호도 갖는다.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사절단에 통신사의 호칭을 처음 쓴 것은 고려시대인 1375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한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명칭만 통신사였을 뿐, 그 조건과 목적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13(태종 13)이었으나, 이 사행도 정사 박분(朴賁)이 중도에서 병이 났기 때문에 중지되었다. 그 뒤 통신사의 명칭을 가지고 일본에 파견된 사행은 1428(세종 10) 정사 박서생(朴瑞生) 이하의 사절단으로, 이들의 파견 목적은 장군습직의 축하와 전장군에 대한 치제(致祭)였다.
이후 통신사의 파견은 정례화되어 조·일 양국간에 우호교린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총 20(조선 전기 8, 조선 후기 12)가 이루어졌다.

   통신사의 파견 이유나 목적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 전기의 경우 일본관계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왜구문제였고,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막부장군에게 통신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의 표면적 이유는 왜구 금압의 요청과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장군습직 축하 등 주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였다.
이 점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되는 일본 국왕사가 동()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목면을 구해가는 경제적인 목적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가져가는 문화적이었던 점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조선 후기의 경우는 임진왜란 직후,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강화교섭, 피로인(被擄人) 쇄환(刷還외국에서 떠돌고 있는 동포를 데리고 돌아옴), 국정탐색, 막부장군의 습직 축하 등 역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 통신사를 파견했다. 반면 조선 후기 일본으로부터 일본 국왕사의 조선파견은 금지되었다.
조선 전기 일본 국왕사의 상경로가 임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로로 이용되는 등 피해가 심하자, 조선에서는 일본 국왕사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일본국왕사의 파견은 중단되고, 대신 막부장군에 관한 일은 차왜(差倭)가 대신하게 된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인 1607·1617·1624년에 파견된 사절단은 통신사라 하지 않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칭호를 썼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는 이 시기만 하더라도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신의를 통할 수 있는 통신국(通信國)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신사의 호칭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36년부터인데, 이러한 배경에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동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청의 세력 교체와 그에 따른 중화질서(中華秩序)의 붕괴는 조·일 양국에 새로운 연대감과 탈중화(脫中華)의 교린관계를 구축하게 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를 배제하고, ·일 양국의 독자적인 대등외교의 수립이라는 외교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러한 국제환경 속에서 통신사의 목적과 서계·예단·여정 등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통신사가 정례화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대마도와의 실질적인 통교를 위하여 문위행(問慰行)과 팔송사(八送使) 및 차왜(差倭)제도를 확립하였다.
통신사 파견이 정례화된 이후, 파견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대부분이 장군습직의 축하였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때마다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636년은 명·청의 세력 교체에 따른 일본과의 연대감 확립, 국서개작사건 이후 대마도주의 옹호와 국정탐색, 1643년은 청나라의 압력에 대한 견제와 겸대(兼帶)의 제도 이후 늘어나는 무역량의 축소 교섭, 일본의 해금정책(海禁政策)과 도원생변(島原生變)에 대한 국정탐색이었다.

   그 뒤 1655년의 통신사는 일본이 가도조선’(假道朝鮮)한다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1682년은 대마도와의 무역통제를 위한 7개 조의 조시약정(朝市約定)이었다. 1711년의 통신사는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의 외교의례 개정에 대한 국가의 체면 유지와 일본과의 계속적인 우호관계가 목적이었다. 1719년은 외교의례 복귀에 대한 조선의 외교방침 전달 및 대마도에서의 표인차왜(漂人差倭)’의 조약체결 등 구체적인 양국의 현안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자 통신사 파견도 외교적인 현안보다는 의례적이 되었다. 따라서 1748년과 1764년의 통신사는 장군습직 축하와 교린관계 확인이 주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에 들어와 통신사 파견의 외교적인 의미가 상실되면서, 1811년 통신사는 여정을 바꾸어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의례적인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막을 내리며, 이후 정례화된 통신사는 없었다.
물론 그 뒤에도 장군이 습직할 때마다 대판역지통신(大阪易地通信)’ 또는 대마역지통신(對馬易地通信)’이 결정되었지만 시행되지 않았다. 이미 이 시기가 되면 양국은 통신사 파견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다.
더구나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세계가 서구세력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부터 조·일 양국은 통신사를 통한 우호교린보다는 서로 상반된 대외인식에 의해 서구세력에 대처해 나가게 되었고, 일본에 의한 일방적인 교린체제의 파괴는 통신사의 폐절과 함께 교린관계의 종말을 가져왔다.

   통신사의 파견절차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으로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 일본에서는 大慶參判使)’를 조선에 파견하여 그 사실을 알려 온다.
곧이어 다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修聘參判使를 파견한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예조가 이 현안을 건의하면 조정에서 논의한 뒤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고, 이 사실을 왜관(倭館)에 알린다.
그 뒤 대마도주는 조선측과 통신사 일행의 도일(渡日)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또다시 신사영재판차왜(信使迎裁判差倭)’를 부산왜관에 파견한다. 이에 따라 통신사 파견의 구체적인 내용이 협의되면, 예조에서는 이를 조정에 알린다. 조정에서 의논한 뒤 결정이 나면 통신사 일행이 구성된다.
이들이 한양을 출발하여 동래부에 도착하면 다시 대마도에서 파견된 신사영빙재판차왜(信使迎聘裁判差倭)’의 인도를 받아 대마도에 도착한 뒤,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일본 국내 에도(江戶)까지 왕복한다. 이들이 임무를 마치고 대마도로 돌아오면 그 곳에서 부산까지는 다시 대마도주가 임명하는 신사송재판차왜(信使送裁判差倭)’가 이를 호행·안내한다.

   통신사 구성에 관한 절목은 1802년 사역원당상역관 김건서(金健瑞이사공(李思恭임서무(林瑞茂) 등에 의하여 편찬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5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1682(숙종 8)에 개정, 정비되어 완결된 형태로 통신사 총인원이 577인에 달했다. 그 밖에 규정된 것으로 인원편성에 관한 도구전식(都口傳式), 사행의 마필(馬匹)에 관한 마문식(馬文式), 의복을 포함하여 사행준비를 기록한 경외노수(京外路需)가 있는데, 여기에는 정사 이하 노자(奴子)에 이르기까지의 하사품이 지시되어 있고, 끝부분에는 일본 각소에의 예단이 규정되어 있다.
, 일본 국왕·약군(若君집정(執政) 이하 대마도봉행(對馬島奉行) 등의 처소에는 사신 사예단(私禮單)으로 인삼 49, 호피(虎皮) 16(), 백저포(白苧布) 62, 흑마포(黑麻布) 109, 황모필(黃毛筆) 202(), 진묵(眞墨) 360(), 부용향(芙蓉香) 310(), 소은장도(小銀粧刀) 5(), 석린(石鱗) 14, 청심원(淸心元) 109() 등이다.

   한편,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가는 배는 수군통제사영과 경상좌수사영에서 준비하였다. 이 배는 사람이 타는 기선(騎船) 3, 짐 싣는 복선(卜船) 3척 등 모두 6척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정사·부사·종사관의 3사단(使團)으로 구성된 통신사 일행은 3선단(船團)으로 편성하였다.
1선단에는 국서(國書)를 받드는 정사를 비롯하여 그 수행원인 군관·상통사·제술관에서부터 격군까지 타고, 2선단에는 정사를 받드는 부사를 비롯하여 수행원이, 3선단에는 종사관을 비롯한 그 수행원이 탔다. 이와 같이 구성된 사절단은 공식외교문서인 서계와 별폭(別幅)을 지참하였다. 막부장군에게는 조선국왕의 명의로 된 국서(國書)가 작성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대마도주나 막부의 관리들에게는 예조참판 또는 예조참의·좌랑 등 상대의 지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직명으로 서계가 작성되었다. 특히, 국서의 경우에는 규모나 격식이 정해져 있어서 그 형식을 반드시 지켜야 하였다. 여기에서 별폭이란 줄 선물의 품목을 말한다.
이것을 별폭이라고 한 것은 서계의 문서에 사절의 목적과 용건을 기재하고, 문서 끝이나 별지에 예물로 보내는 선물의 종류와 수량을 적어 완전한 문서로 작성하였기 때문이다. 별폭은 상대방의 지위에 따라 품목과 그 품목의 양이 달리 정하여졌다. 그리고 별폭은 선물내용이나 수량면에서 증여무역(贈與貿易)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중도에 연향이 베풀어졌는데, 처음에는 충주·안동·경주·부산의 4개 소에서 베풀어졌으나 후기에 와서는 민폐 때문에 부산 한곳에서만 베풀어졌다. 이들은 부산에 도착하여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이 해신제는 길일(吉日)을 택하여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바로 그날 거행되었다. 해신제는 통신사 출향 직전의 필수적인 의식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해독제(海瀆祭)에 준하여 거행되었다. , 영가대 높은 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희생과 폐백(幣帛)을 차려 놓고 집사(執事)의 사회 아래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 제전의 내용은 신유한(申維翰)해유록(海游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가대는 통신사 일행과 인연이 깊은 부산의 명승지로, 그들은 이곳에서 일본으로 떠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뒤 1614(광해군 6) 순찰사 권반(權盼)은 이곳에 못을 파고 호수를 만들어 전함을 계류(繫留)하는 장소로 하였는데, 그것은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고자 한 시책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 옆에 10여 발 되는 높은 언덕을 만들어 전형적인 건축양식의 누정(樓亭)을 세웠다. 이 누정을 영가(永嘉)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권반의 본관인 안동을 옛날에 영가라 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전함을 계류하였던 영가대 호수의 흔적은 1906년까지만 하여도 완연히 남아 있었으나, 그 뒤 일본인들의 매축(埋築: 바닷가나 강가를 메워 뭍으로 만드는 일)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낸 통신사는 국서를 받들고 기선 3척과 복선 3척에 나누어 타고 그 날로 출발하여 호위하는 대마선단에 선도되어 대마 와니우라(鰐浦)에 입항한 뒤 부중(府中)으로 들어갔다.

   대마 부중에서 도주의 연향을 받은 다음, 이정암(以酊庵) 장로(長老) 2인의 안내를 받아 이키도(壹岐島)에서 후쿠오카현(福岡縣 粕屋郡 相島)을 거쳐 아카마세키[赤間關: 下關]를 항로로 취하여 세토나이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이후 각 번의 향응과 호행을 받으면서 기다리고 있던 유자(儒者문인(文人)과의 필담창화(筆談唱和)를 하면서 해로를 따라 대판(大阪)에 이른 뒤 누선(樓船)으로 갈아타고 상륙하여 동·서본원사(東西本願寺)에 들어갔다. 그 뒤 6척의 아국선과 몇 명의 경비요원만을 남겨둔 채 여러 대명(大名)이 제공한 배를 타고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한다.
이어 인마(人馬)의 도움을 받아 육로로 교토(京都)로 향했다. 무로마치(室町) 막부 때에는 여기가 종점이었지만, 에도 막부 때에는 1617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도까지 갔다. 쿠사(草津)를 출발하여 1620년대 특별히 건설하였던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를 지나 도카이도[東海道]를 지나갔다.
그 중도에는 배다리[船橋]가 있었는데, 1682년 통신사 일행은 이 길을 가면서 다리를 놓는 데 쓰인 배가 무려 300척이나 되었다.” “열선(列船)의 비용과 철색운판(鐵索運板)의 비용이 수천여 금에 이르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오카자키[岡崎]에 도착하여서는 막부에서 보낸 사자(使者: 問安使)의 출영을 받으면서 육로로 목적지인 에도에 들어갔다.
숙사는 1682년 무렵부터 본원사로 하였으나 뒤에 동본원사(東本願寺)로 바꾸었다. 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의 교류는 한시문·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른 화려하고 사치한 향응은 결국 일본의 재정을 핍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학자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는 이 상황을 비판하여 통신사 접대에 대한 제 규정의 시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시한 시정안은 향응장소를 5개소(大阪·京都·名古屋·駿府, 왕로에는 赤間關, 귀로에는 牛窓)만으로 한정하고, 다른 곳에서는 음식만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안은 결국 한번으로 끝나고 또다시 종전의 형태로 돌아가 호화로운 향응을 계속하였다.
에도에 체류하는 동안에 1636·1643·1655년에 파견된 통신사 일행들은 도쿠가와 장군의 묘소[日光東照宮]의 참배를 강요받기도 하였다. ,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하여 곡마단(曲馬團)의 공연이 있었는데, 1680년부터는 이를 위하여 마상재(馬上才)의 파견이 항례화되었다.
막부로부터 길일이 택하여져 허락이 있으면 국서와 별폭을 건네주고는 며칠 뒤 장군의 회답·별폭, 그리고 정사 이하에게 물품과 금은이 답례로 주어지고, 다시 대마도주와 함께 왔던 길을 돌아서 귀로에 올랐다. 제후들의 향응과 접대가 처음 올 때와 마찬가지로 행하여졌으며, 대마도로부터는 신사송재판차왜가 동행하여 부산에 입항한 뒤 한양으로 돌아왔다.
통신사들의 왕래 일정에는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개는 5개월에서 8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이나 엄동이 낀 노정기간에는 2년 여에 걸친 사행도 있었다. 1428(세종 10) 장군습직 축하로부터 시작된 통신사는 1811(순조 11)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변질되었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통신사 김이교 일행 334인이 대마도에 먼저 도착하여 막부 장군이 보내 오는 사신을 기다린 것이라든가, 정하여진 규례에 따른 양국 사신간의 단조로운 행사, 일본 막부의 금령으로 일본 백성에게 통신사 일행과의 접촉을 금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인의 반응은 정치담당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무사를 비롯한 문인·묵객·서민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통신사는 그들이 방문한 곳마다 서화·시문·글씨 등을 많이 남겼으며, 그것은 병풍·회권·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기록들을 살펴보면 신유한(申維翰)해유록, 강홍중(姜弘重)동사록(東槎錄), 홍우재(洪禹載)동사록, 신숙주(申叔舟)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엄(趙曮)해사일기(海槎日記), 유상필(柳相弼)동사록, 조명채(曺命采)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김세렴(金世濂)해사록(海槎錄), 작자 미상의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남용익(南龍翼)부상록(扶桑錄)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기록들은 당시 통신사에 참여한 인물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겨 놓은 것으로, 당시 문물교류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통신사는 일본과의 관계 유지라는 외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학술·사상·기술·예술상의 문화교류라는 또 하나의 문화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출처] 통신사[通信使]|작성자 척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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