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8

2018. 4. 22. 16:34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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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卷之七十五 / 記     

   

負暄堂記    ㅡ 이색(李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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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嶽上人。懶翁弟子也。師之卓錫神光。移于圓寂于露骨于淸平于五臺。而住松廣。自松廣而檜巖。由檜巖而瑞雲吉祥諸山。然後復住檜巖也。上人皆從之。朝夕熏炙。頗有所得。其與一宿。覺雖曰異調。然非日用而不知者所敢望也。求予名其堂。予之▣▣▣神勒。上人在群中。目其貌秀而靜。耳其言簡而當。予心奇之矣。故不復讓。乃以負暄塞責而告之曰。師之師。號師以雪嶽。盖取千山鳥飛絶。萬徑人蹤滅之氣象也。纖塵不立。全體獨露。逈出雲表。非陰陽寒暑之所可得而凌鑠也明矣。然血氣之所在。性命之所存。淡飡以實其腹。麤衣以掩其體。則雖絶學無爲者。亦所不免也。吾想雪嶽。冬居甁水凍。爐火灰。井冰合。寒冽甚矣。朝日出高峯入短簷。溫溫乎其可親也。負之瞑目。氣舒而神融。雖犀帷鳳炭。深閨之燠。無以過之。扁之堂不爲虛美矣。夫至道無形。因物可見。而物與我又非二也。雪則寒。日則暄。暄氣舒。寒氣縮。非獨吾身也。天地之道也。而其至理存乎其間。心焉而已矣。心之微雖曰方寸。至道之所在也。故不以寒熱故有小變。堂堂全體。蓋天蓋地矣。上人宴坐。所求不在斯歟。不在斯歟。予之熱惱熾甚。對師煎茶。未知何日也。




부훤당기(負暄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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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설악상인(雪嶽上人)은 나옹(懶翁)의 제자이다. 스승의 석장(錫杖)의 신광(神光)이 원적(圓寂)ㆍ노골(露骨)ㆍ청평(淸平)ㆍ오대(五臺)로 옮겨 송광(松廣)에 머무르고, 송광으로부터 회암(檜巖), 회암에서 서운(瑞雲) 길상(吉祥) 등 여러 산을 거친 뒤에 다시 회암에 머물렀었다. 상인이 모두 따라가서 조석으로 감화받아 자못 얻은 바 있었으니, 그 하룻밤에 깨달은 것과는 비록 다르다 하겠으나,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하는 자가 감히 바라볼 바는 아니다. 나에게 그 집을 이름해 주기를 구한다.
나의 □□□ 신륵상인(神勒上人)이 군중 속에서 그 외모가 빼어 나고도 진중함을 보았고,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사리에 합당함을 듣고서는 내 마음에 기이하게 여겼기 때문에, 다시 사양하지 않고 이에 부훤(負暄)으로써 말막음을 하여 고하기를, “대사의 스승이 대사를 설악으로 호(號)를 한 것은 아마, ‘일천 산에 새 날아 끊어지고, 일만 산길에 사람의 자취 사라졌다.[千山鳥飛絶 萬徑人縱滅]’는 그 기상을 취했을 것이다. 한 점의 티끌도 날지 않고, 전체를 홀로 드러내어 멀리 구름 밖에 솟아 있으니, 음양(陰陽)과 한서(寒暑)가 가히 침범하고 녹일 바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나 핏기가 있고 생명이 있는 바에 담담한 밥으로 그 배를 채우고, 거친 옷으로 그 몸을 가리는 것은 비록 세속의 학문을 끊고 아무 근심없는 경지에 도달한 자일지라도 또한 면하지 못하는 바이다.
   내 상상하건대 설악상인이 겨우살이에 방안의 병물이 얼고, 화롯불이 꺼지며, 샘물이 얼어붙어 맵도록 추울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해가 높은 산봉우리에 나와 짧은 처마에 들어오면 따스함은 가히 친할 만할 것이다. 그 햇살을 등지고 눈을 감으면 기운이 오르고 정신이 융화하여 비록 향기로운 장막을 치고 숯불에 고기 구워 먹는 깊은 규중(閨中)의 더운 기운일지라도 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집에 편제(扁題)하는 것이 헛된 미사(美辭)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저 가장 높은 도(道)는 형체가 없고 만물로 인하여 볼 수 있는 것이요, 만물이 나와 더불어 또한 둘이 아닌 것이다. 눈이 오면 차고 볕이 나면 따뜻하며, 따뜻한 기운엔 피어나게 되고, 찬 기운엔 움츠리는 것은 홀로 내 몸뿐이 아니요, 천지의 도(道)이나, 지묘(至妙)한 이치가 그 사이에 있으니, 마음에 있을 따름이다. 사람 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의 작음이 비록 사방 한 치[一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가장 높은 도가 존재한 바이기 때문에, 한열(寒熱)로 인하여 짐짓 조금이라도 변함이 없어 당당(堂堂)한 도의 전체가 하늘도 덮고 땅도 덮는 것이다.
상인이 고요히 앉아 구하는 바가 바로 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열에 찬 두뇌가 더욱 심하다. 대사와 더불어 차를 달여 마실 날은 어느 날에 있겠는가.

  ***  이색(李穡)1328(충숙왕 15)  ~  1396(태조 5)


요약  : 려 말의 학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대표작으로 <부벽루>, <독두시>가 있다.


이색

이색 영정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색의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자신과 관계를 맺은 부류와 타협하게 되었다. 1357년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를 논했다.

   새로이 별감을 파견하면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릴 것이며 별감은 세포(稅布)를 많이 거두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반 민은 소금을 받지도 못하고 포만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왕이 재추(宰樞)와 대성관리(臺省官吏)를 모은 가운데 별감 파견의 가부를 물으려 하자 병을 칭하여 피했다. 이는 염제신과 같은 권세가가 별감 파견을 주장한 것에 대한 이색의 타협으로서, 다른 간관(諫官)이 이 일로 좌천된 것과 달리 이색은 중임되었다.

   또한 1362년 성균시의 합격자를 뽑던 중 왕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색은 처음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찍었다. 사패는 국왕이 충성의 대가로 공신이나 기타 사원에게 설정해주는 토지의 증빙문서였는데, 당시에는 권세가의 토지확대방법으로 이용되어 토지겸병과 수취체계 중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색은 국왕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계속 관철시키지 못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359, 1361년 홍건족이 침입했을 때 왕을 시종하여 호종공신 1등에 책봉되어 전(田) 100결(結),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토지·노비와 관직을 통해 얻은 수조지,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이색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유신들을 길러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후 1375년(우왕 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정도전(鄭道傳)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종학(種學)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변안렬·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저서로 〈목은유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 다음백과 >



卽事(즉사)柳方善(유방선). 낙서장

2018. 3. 24.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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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事(즉사)柳方善(유방선).本貫:瑞山(서산=文化문화).字:子繼(자계). 號:泰齋(태재).          朝鮮前期(조선전기) 學者(학자).

   高麗(고려)禑王(우왕)14년(1388∼1443)朝鮮(조선)世宗(세종) 25年.       


                                   

                           -菁華 張源善. 辛巳生 -



晩歲愛幽獨(만세애유독) 만년(晩年)에 궁벽(窮僻)한 곳 좋아하여

卜居投遠山(복거투원산) 인적(人跡) 드문 산에 거처(去處)를 잡았네.

種茶開藥圃(종차개약포) 차(茶)를 심고 약초밭을 일구며

栽竹製漁竿(재죽제어간) 대나무 심어 낚싯대 만드네.

 

春色惱無睡(춘색뇌무수) 봄빛에 (마음이) 산란(散亂)하여 잠이 오지 않는데

鳥聲啼破閑(조성제파한) 지저귀는 새소리가 적막(寂寞)함을 깨누나.

誰知茅屋下(수지모옥하) 누가 알리오. 초가집 아래에

自有臥遊寬(자유와유관) 한가하게 즐길 느긋함이 있는 것을.


blog.naver.com/ayjg02145/221236035744   修心訣(수심결)







東文選卷之八十一 / 記     

白蓮庵記    ㅡ 유방선(柳方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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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圓明谷之南來也。卓錫于永之還歸寺數年。以其地隘陋。其近里閈。欲更卜其所居而未得。手橫短藤。歷觀諸峯。至安德縣之母子山。得一地。境幽而谷深。淸泉白石。人迹罕少。朝嵐暮靄。氣象萬殊。髣髴乎廬山香爐峯矣。明谷欣得之。自辛卯秋八月。始營治之。越壬辰春。工告訖。自以白蓮額之。請余記。吾聞白蓮之爲庵也。不妄工作。止營佛殿。飾以黝堊。無一點塵。掛瞿曇氏肖像。以設香火。外作小楹。以爲出定偃息之所。制度有足而不費。眞善爲堂構者矣。想夫積雪盈其庭。擁衲瞑目。入定面壁。不覺寒暑之切肌。明月滿其榻。披襟露骨。煎茶一啜。淡然方寸。已無嗜欲之感情。可謂遺外聲利而樂空虛者也。使具眼者品其高。亦可以頡頏於山惠遠公矣。出定之暇。與達者兩三人。芒鞋短筇。携手往來於淸泉白石之間。使善畫者傳其神。未必讓廬山三笑圖矣。然則上人之得其地。地之得其庵。庵之得其號。豈不幸又幸耶。嗟夫閑居則鮮有莊厲而持守之或懈。亦吾儒所不免而警懼者也。上人則不然。雖衣衲啖蔬。而觀空樂道之心無改。雖離世絶俗。而壽君福國之念不怠。必不爲宴安之所勝矣。其不亦善乎。是可書也。若夫山中之景翫。營費之多少。非上人所欲伐而吾亦不敢以頌云。待其春風暢岩冰解。杖屨而往。開竹窓。倚松欞。俯看八極之表。一盪十年之塵胷。然後一麾筆以爲記矣。
[주-D001] 盧 : 


백련암 기(白蓮庵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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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선(柳方善)

   원명곡(圓明谷)이 남으로 와서 영천(永川) 환귀사(還歸寺)에 수년간 석장(錫杖)을 멈추었었다. 수년 후에 그 땅이 비좁고 또 촌락이 누추해서 다시 살 곳을 택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손수 단장을 짚고 여러 산을 두루 헤맨 뒤에 안덕현(安德縣)의 모자산(母子山)에 이르러 한 곳을 얻었는데, 지경이 깊숙하고 골짝은 깊으며, 샘물은 맑고 돌은 하얀데, 인적은 드물고 아침 안개 저녁 아지랑이는 기상이 갖가지 달라져서, 여산(盧山)의 향로봉(香爐峰)과 방불하니, 원명곡은 이를 얻은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래서 신묘년 가을 8월부터 암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임진년 봄에 공역(工役)이 끝마치게 되자 스스로 백련(白蓮)이라 편액의 명칭을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들으니, 백련암은 공사를 거창하게 하지 않고 불전(佛殿)을 짓는 데에 그쳤으며, 흙으로 장식하여 먼지 한 점 없고 구담(瞿曇)씨의 초상을 걸어서 향화(香火)를 베풀고, 밖으로 조그마한 난간을 만들어 거처할 곳을 삼았다. 규모가 만족스럽고 물력을 허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집을 잘 지었다고 이를 만하다. 생각하건대 하얀 눈이 뜰 아래에 쌓이면 납의(納衣)를 입고 눈을 감고 정(定)에 들어가 벽을 향하면 추위가 피부에 스며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밖에 달이 탑(榻) 자리에 가득하면 가슴을 헤치고 육체를 드러내며, 끓는 차를 한 잔 마시면 마음이 담담하여 이미 탐욕의 정감이 없어질 것이니, 가히 명리(名利)를 도외시하고 공허(空虛)를 즐긴다 할 수 있다. 안목이 열린 자로 하여금 그 높이를 품평한다면 또한 여산의 혜원(惠遠)공에 필적할 것이며, 출정(出定)하는 여가에 달자(達者) 두세 사람과 더불어 짧은 지팡이와 짚신을 신고 손을 마주잡고 청천(淸泉) 백석(白石)의 사이에 왕래하며, 그림을 잘 그리는 자로 하여금 그 정신을 전사(傳寫)하게 한다면 반드시 여산 삼소도(三笑圖)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인(上人)이 그 땅을 얻은 것이나, 땅이 그 암자를 얻은 것이나, 암자가 그 호를 얻은 것이 어찌 다행에 또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 한가히 거할 적이면 장엄한 기운이 적은 동시에, 몸가짐을 잘하는 것이 혹 게으를 수도 있다. 이 점은 우리 유가(儒家)에서도 면치 못해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상인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납의를 입고 나물을 먹어도 공(空)을 보고 도를 즐기는 마음은 변함이 없고, 비록 세속과 떨어져 있어도 임금을 장수하게 하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생각은 태만하지 아니하며, 반드시 연안(宴安)에 휘감기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니, 그 역시 착하지 않은가. 쓸 만한 점이다. 이를테면 산중의 경치와 비용의 다소는 상인이 자랑하는 것이 아니니, 나도 감히 찬송하지 못하는 바다. 봄바람이 화창하고 언덕에 얼음이 풀리면 막대를 끌고 가서 죽창을 열고 소나무 난간에 기대어 팔극(八極)의 밖을 굽어보며 10년의 때묻은 가슴을 탕척하고 한 번 붓을 휘둘러 기를 만들어 보겠다.

 *** 유방선(柳方善) :  자계(子繼), 태재(泰齋)

 요약  :  1388(우왕 14)∼1443(세종 25). 조선 전기의 학자.

개설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할아버지는 관찰사 유후(柳厚)이고, 아버지는 유기(柳沂)이다. 어머니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된 것으로 연좌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영천에 이배되었다.

   1415년 풀려나 원주에서 지내던 중, 참소로 인하여 다시 영천에 유배되었으나 1427년(세종 9)에 풀려났다. 유배생활 중의 학행이 높이 드러나 유일(遺逸: 과거를 거치지않고 높은 관직에 천거될 수 있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추천되어 주부(主簿)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는 유배지 영천의 명승지에 ‘태재(泰齋)’라는 서재를 지었다. 그리고 당시에 유배 또는 은둔생활을 하던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 등 문사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고, 주변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이보흠(李甫欽)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즉, 정몽주(鄭夢周)·권근·변계량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 발전시키는 구실을 담당한 것이다. 원주에서 생활하는 동안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강효문(康孝文) 등 문하생을 길러내었으며, 특히 시학(詩學)에 뛰어났다. 경현원(景賢院)과 영천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태재집』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東文選卷之一百三 / 跋

書蘭坡先生詩卷後 居仁    ㅡ 권근(權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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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川李相國。吾父執也。蘭坡其號。壽父其字。甞求詩文於名公卿間。志尙甚高。苟非其人。誰工不取。故其所得。杏村書。益齋,樵隱,牧隱二三公詩若文數篇而已。一日。不鄙予。携以示之。命以文。余以不才。敢踵諸先正之後而爲之說。非所宜也。然公有命。敢不敬從。惟公先世。勳德相襲。始祖國公及文貞公。尤其傑然者也。公自幼嗜尙異俗。爲家不問有無。所蓄者。書畫琴碁。所植者。梅蘭松竹。所畜者。或鹿或鶴。有一物不備則歉然。必求而致之。然後快於心。客至。必洒掃焚香。設酒煎茶。吟哦唱酬。酒酣。或令女奴絃歌。懽洽而罷。不至亂。揚歷淸顯。出入中外。所之必守法。不阿勳。有聲績。及至晚年。位登侯伯。寵遇益隆。聲望益尊。而其所尙不變。澹然有出塵之想。且公風神淸朗。儀表洒落。白鬚紅頰。霜輝玉潔。望若神仙。無一點塵累。觀其貌。可以得其心也。昔前朝毅王。謂文貞公以秋宵明月。擬其胷襟。觀公風致。可謂無忝文貞矣。自今公之子若孫。亦必以公淸高雅。尙爲法而謹守之。則公世德之傳。當無窮矣。



서 난파선생 시권후 거인 (書蘭坡先生詩卷後 居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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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

   청천(淸川) 이상국(李相國)은 나의 부집(父執 아버지와 친한 동지)이니, 난파는 그의 호이며, 수보(壽父)는 그의 자이다. 일찍이 시문(詩文)을 유명한 공경들에게 구하였는데, 지취가 매우 높아서 진실로 그가 허여 하는 사람이 아니면, 비록 능하고 교묘하다 할지라도 이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가 얻은 것은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글씨와 익재(益齋)ㆍ초은(樵隱)ㆍ목은(牧隱) 두서너 분의 시와 문 두어 편 뿐이었다. 하루는 나를 비루하다 하지 않고, 가지고 와서 보이고는 글을 쓰라 명하는 것이다. 내가 재능 없는 사람으로 감히 여러 선정(先正 선대의 어진 신하)의 뒤를 따라서 말한다는 것은 마땅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공의 명함이 있으니, 감히 받들어 좇지 않으리요. 공은 선대로부터 공훈과 덕업을 서로 이어 받았으나 시조(始祖) 국공(國公)과 문정공(文貞公)은 더욱 그 뛰어난 분이었다. 공이 어려서부터 세속과 다른 것을 좋아하고 숭상하며, 집을 다스리는 데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고, 모으고 쌓는 바가 서화와 금기(琴碁)요, 심는 것은 매ㆍ란ㆍ송ㆍ죽이며, 기르는 것은 혹은 사슴, 혹은 학이었는데, 한 가지 물건이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있으면 한스러워하고 불만하게 생각하여, 반드시 구하여 이루었고 그런 뒤에야 마음이 쾌하였던 것이다. 손이 오면 반드시 물 뿌려 쓸고 향불을 피우고는 술상을 베풀고 차[茶]를 달여놓고, 시를 지으며 서로 부르고 수답하였으며, 술자리가 한창 즐겁게 어울리면, 혹은 계집종으로 하여금 거문고도 뜯고 시도 짓게하여 환락을 흡족히 한 연후에 파하였으나, 난잡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 깨끗하고 현달한 요직을 역임하고, 중외(中外)에 출입하면서 가는 곳마다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으니 언제나 명성과 업적이 따랐다. 만년에 이르러 벼슬이 후백(侯伯)에 오르니 총애와 대우가 더욱 융숭하고, 명성과 덕망이 더욱 높았으나, 그 숭상하는 바는 변치 않아 담담하게 세속을 초월하는 사상이 있었다. 또 공이 풍신은 맑고 명랑하였으며 용모와 태도가 쇄락하여 흰 수염은 서릿발 같이 빛나고, 붉은 안색은 옥같이 순결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같이 보여, 한 점의 티끌만한 누도 없으니 그 용모를 보면 가히 그 마음을 얻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전조(前朝)의 의왕(毅王)이 문정공을 일러 ‘추소명월(秋宵明月 가을 밤의 밝은 달)’ 이라 하여 그의 흉금에 비의(比擬)하였다 하거니와 이제 공의 풍신을 보니 문정공을 욕되게 함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부터 공의 자손들은 또한 반드시 공의 맑고 높은 취상(趣尙)을 법받아 근신하여 지킨다면 공의 세덕(世德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덕업)의 전함이란 마땅히 무궁할 것이다.





夢經堂日史編[一] 達城 徐慶淳公善  / 十一月   ㅡ 서경순(徐慶淳)

初十日。己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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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暄。歷一板門。市井之櫛比。與新民屯相上下矣。至二道井午飯。見一小兒。衣服整楚。儀容淸峻。料非常賤。問其姓。曰宗親。其名祥焜。其父文恪以瀋陽刑部主司。瓜遞還京。內眷追發抵此。兒年九齡。能通三經。好馳馬云。曾聞店壁上有題五言古詩一篇矣。今十餘年之間。無以訪其處。且其詩。卽飽經世故。習知俗態者之所作。而何人何時所題與其寄托之本意。莫有傳焉。甚可歎也。詩曰。妾着石榴裙。艶色侔花片。爲郞作羹湯。點汚幾欲遍。未肯令郞知。棄擲復偸換。非不重羅紈。恩深命且賤。其下有淚泉二字。行數十里。有一小峴。問其名。曰月峰山。遼野八百里。未見培塿。而獨此地有山。路出山腰。下車登頂。俯覽四野。胸襟爽然。北望毉巫閭山。橫亘千餘里。卽周禮幽州之鎭。皇明時。賀欽先生之所隱處。起伏天際。馳騖雲端。其北則蒙古鮮卑之地。可謂天限南北。余見毉巫而有感於懷。仍拈韵曰。
巫閭大幹白頭來。來作長城抵海廻。天造此山分華界。如今華界孰分開。
從者曰。遼陽白塔見於東方雲際。而老眼霧花。未能遠窮。過烟臺站。自此始有烟臺。制如我國烽臺。但築在平地。高爲數十丈。圍亦如之。所以置守兵而通警急者。世傳戚繼光所築。或云。袁崇煥爲防建州而設此。五里七里。纍纍相望。而見今頹圮。幾夷其半。可知其無所事兵矣。夕抵小黑山止宿。學究張振鏞。字立武。號臨溪。保定府人。年今四十八。有子四人。率家眷住此二十餘年。與其弟子劉廣泉來訪。余患感苦劇。不能久話。勸送於三房。約以回還時往謝。東八站水味不甚惡。自老邊城以後。鹹如和漿。色又深黃。煎茶灌器。津流如涎。飮到胸膈。便覺燥閼痰盛。余謂書狀曰。自此至皇城水品如此云。將何以堪之。曰。我東順天,黃州。最稱水土之惡。而人皆求其倅。君將厭避黃州之萬兩乎。余曰。兩邑之水。洗錢而飮。故非但無病。病貧者潤。病痿者肥。黃州錢流涎無益。黑山水飽喫添病。冤乎冤乎。烟臺站有詩曰。
五里一墩七里臺。墩臺烟燧覘兵來。覘兵無救崇禎禍。戚帥當時枉費才。


10일(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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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고 따뜻하였다.
일판문(板門)을 지나니, 시가의 즐비함이 신민둔과 막상막하이다. 이도정(二道井)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의복이 깨끗하고 얼굴이 청준(淸俊)해서 상천민이 아닌 것 같아 성명을 물으니, 나라의 종친(宗親)으로 이름은 상혼(祥焜)이며, 아버지 문각(文恪)이 심양의 형부 주사(刑部主事)로 있다가 만기가 되어 갈려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며 식구들이 뒤따라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아이의 나이는 9세이며 삼경(三經)에 능통하고 말달리기도 좋아한다고 한다. 전에 들으니 점(店) 벽에 오언 고시(五言古詩) 한 편을 써 붙인 것이 있었다 하나, 지금 10년 사이여서 그곳을 알 수가 없으며, 또 그 시는 세상 일을 많이 겪고 세태를 익히 아는 자의 소작이라 하나, 어떤 사람이 언제 지은 것인지, 뜻을 붙인 본의조차 전하지 않으니, 심히 한탄할 일이다. 그 시에는,

석류빛 고운 이내 치마 / 妾着石榴裙
그 고운 꽃잎 본떴네 / 艷色侔花片
낭군을 위해서 국을 끓이다가 / 爲郞作羮湯
몇 번이나 옷을 더럽혔던가 / 點汚幾欲遍

낭군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 未肯令郞知
버리고 또다시 바꾸었네 / 棄擲復偸換
비단 치마 소중하지 않은 것 같으나 / 非不重羅紈
은혜는 깊고 나의 목숨 천하네 / 恩深命且賤

하고 그 아래에 ‘누천(淚泉)’이란 2자가 있다.

   수십 리를 가다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고개 이름을 물으니, 월봉산(月峯山)이라 한다. 요동벌 800리에 언덕 하나 보지 못했더니, 유독 이곳에 산길이 산 중턱에 나 있다. 수레를 내려서 산마루에 올라가서 사방 들판을 굽어보니, 가슴이 쾌활하다. 북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바라보니 1000여 리를 가로 뻗쳐 있는데 즉 《주례(周禮)》에 있는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명 나라 때에 하흠(賀欽) 선생이 은거하던 곳이다. 하늘 끝에서 일어나 구름까지 치솟았다. 그 북쪽은 몽고 선비(鮮卑)의 땅이니 하늘이 남북을 한계하였다고 할 만하다. 내가 의무려산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운자를 달았다.

의무려산 큰 줄기 백두산에서 갈려 / 巫閭大幹白頭來
우줄우줄 장성이 되어 바다를 둘렀네 / 來作長城抵海迴
하늘이 이 산을 만들어 경계를 지었으되 / 天造此山分華界
이제 와서 그 누가 경계를 분간할소냐 / 如今華界孰分開

종자가 말하기를,
“요양의 백탑이 저 동쪽 구름 사이로 보이나 늙은 눈에는 침침해서 멀리 보이지 않습니다.”
한다. 연대참(煙臺站)을 지나니 여기서부터 연대의 근원이 있다. 연대의 제도는 마치 우리나라 봉수대 같은데, 다만 평지에 있어서 높이가 수십 길 되게 쌓았고 둘레는 그만큼 크게 되어 있으니, 파수병을 두고 급한 일을 알리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척계광(戚繼光)이 쌓은 것이라 하며, 혹은 원숭환(袁崇煥)이 건주(建州)를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 전한다. 이것이 5리마다 7리마다 듬성듬성 서로 바라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허물어져서 반이나 평평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군사 쓸 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저녁에 소흑산(小黑山)에 도착하여 묵었다. 학구(學究) 장진용(張振鏞)의 자는 입무(立武), 호는 임계(臨溪)이고, 보정부(保定府) 사람이다. 금년에 나이 48세이며 네 아들이 있고 가솔을 데리고 여기에 거주한 지 20여 년이라 한다. 그 제자 유광천(劉廣泉)을 데리고 찾아왔으나, 내가 감기를 앓아 오랫동안 담화를 할 수 없어 서장관의 방으로 권해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회사(回謝)하기로 약속하였다.
   동팔참(東八站)은 물맛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으나 노변성(老邊城) 이후부터는 간장을 타놓은 것처럼 짜고 빛이 또 심황색(深黃色)이었다. 차를 달여서 그릇에 부으면 진액이 침 흘리는 것 같으며, 마시어 가슴에 내려가면 갈증이 생기고 가래가 성해서 막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서장관에게 말하기를,
“여기서 황성까지 수질이 이렇다 하니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하니 서장관의 말이,
“우리나라 순천(順天)황주(黃州)가 제일 수토(水土)가 나쁘다 하는데도 모두 그 고을 원을 구하네. 자네는 장차 황주의 만 냥을 싫어서 피하겠는가?”
한다. 내가 대답하기를,
순천ㆍ황주의 물은 돈[錢]을 씻어서 마시므로 병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는 살림을 윤택하게 하고 병든 사람은 살이 찌게 됩니다. 황주 돈은 침을 흘려보아야 쓸데없는데 흑산(黑山)의 물만 잔뜩 마시고 병만 더하게 되니 원통하고 원통합니다.”
하였다. 연대참에서 시를 읊었다.

오 리에 돈 하나 칠 리에 대 하나 / 五里一墩七里臺
돈대의 봉화가 적군을 엿보누나 / 墩臺煙燧覘兵來
적병을 엿보아도 숭정의 병화 못 막았으니 / 覘兵無救崇禎禍
척 장군의 당시에 헛수고 부질없네 / 戚帥當時枉費才



No. 19229 [수정요청] 서경순(徐慶淳)
이름 : 안재중   등록일 : 2017-06-09   조회수 : 190   

근거 1.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1979) 권1 丙編(上) pp.27 (徐宗悌)-2子:徐命休-徐魯修-3子:徐有豊-(徐永輔)

https://familysearch.org/ark:/61903/3:1:3QS7-L977-2X8M?mode=g&i=163&wc=QDYT-CDN%3A1589984937%2C1589982393%2C1589984939%2C1589984905%2C1589982392%2C960780001&cc=1398522

근거 2.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1979) 권1 丙編(中) pp.304 (徐有豊)-徐永輔-徐慶淳

https://familysearch.org/ark:/61903/3:1:3QS7-9977-2XKP?i=302&wc=QDYT-CDN%3A1589984937%2C1589982393%2C1589984939%2C1589984905%2C1589982392%2C960780001&cc=1398522

 


徐文道


徐宗惕

 

 

 

 

 

 

 

徐宗悌

徐命伯

徐仁修

徐有寧:出

 

 

 

 

徐信修

系:徐有寧

女:金魯翊

金錫載

女:徐慶淳

 

徐命休

徐魯修

徐有謙

徐璟輔

系:徐會淳

 

 

徐有鼎

系:徐兢輔

 

 

 

徐有豊

徐永輔

徐慶淳

徐相雨

徐光肅

(徐丙炎)

徐相洛:出

 

徐相冕:出

 

女:宋璟仁

宋憲范

宋憲卿:出

宋憲良

宋憲舜

徐亮輔

 

 

 

徐兢輔

 

 

 

徐政輔

 

 

 

徐中輔

 

 

 

徐戊輔

 

 

 

徐有晋:出

 

 

 

 

徐有升

徐京輔

徐英淳

 

 

徐會淳:出

 

 

徐耆淳:出

 

 

徐玉淳

 

 

徐有臨

 

 

 

 

徐宗愼

徐命九

系:徐孝修

徐有隣

徐俊輔

系:徐耆淳

 

 

徐宗恊

 

 

 

 

 

 

 

徐宗一:出

 

 

 

 

 

 

 

 

서경순(徐慶淳) 1837년 사마방목(생원시) 보완

자 공선(公善)

생년 계해(癸亥) 1803년(순조 3)

졸년 기미(己未) 1859년(철종 10)

본인본관 대구(大丘)

거주지 한성([京])

[부] 성명 : 서영보(徐永輔)〔文〕, 관직 : 행사간원정언(行司諫院正言)

[처부] 성명 : 김석재(金錫載)[進:1803], 본관 : 경주(慶州)

 

 

 

근거 :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1979) 권1 丙編(中) pp.307 (徐慶淳)-女:宋璟仁-子:宋憲卿(2),宋憲良(3)

https://familysearch.org/ark:/61903/3:1:3QS7-9977-2XK6?i=303&wc=QDYT-CDN%3A1589984937%2C1589982393%2C1589984939%2C1589984905%2C1589982392%2C960780001&cc=1398522

 

송경인(宋璟仁) 1856년 사마방목(생원시) 보완

생년 기해(己亥) 1839년(헌종 5)

본인본관 은진(恩津)

[부] 성명 : 송일준(宋一雋)[進:1828], 관직 : 행호조정랑(行戶曹正郞)

[생부] 성명 : 송일영(宋一偀), 관직 : 유학(幼學)

[처부] 성명 : 서경순(徐慶淳)[生:1837], 본관 : 대구(大邱)

 

송헌경(宋憲卿) [음관]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보완

자 공익(公翊)

생년 경오(庚午) 1895년(고종 32)->경신(庚申) 1860년(철종 11) : 宋憲卿[文:1887] 榜目 참고

본인본관 은진(恩津)

[이력사항]

관직 대교(待敎)

타과 정해(丁亥) 감(柑)

[관련정보]~~[링크연결] 宋憲卿[文:1887]

[부] 성명 : 송희인(宋羲仁)

[생부] 성명 : 송경인(宋璟仁)[生:1856]

[조부 - 조부1:부의 부] 성명 : 송일호(宋一儫)

[증조부 - 증조부1:조부1의 부] 성명 : 송기정(宋基鼎)[生:1810], 관직 : 목사(牧使)

[77대 - 현조]->[7대 - 현조] 성명 : 송규렴(宋奎濂)[文:1654], 호 : 제월당(霽月堂), 시호 : 문희(文僖), 관직 : 이조판서(吏曹判書)

[처부] 성명 : 민응식(閔應植)[文:1882], 본관 여흥(驪興)

송헌경(宋憲卿) 1887년 정해(丁亥) 정시2(庭試2) 문과방목 보완

생년 경신(庚申) 1860년(철종 11)

본인본관 은진(恩津)

거주지 회덕(懷德)

[부] 성명 : 송희인(宋羲仁)

[생부] 성명 : 송경인(宋璟仁)〔生〕

[조부] 성명 : 송○○(宋○○)->송일호(宋一儫) : 宋憲卿[文蔭縉紳譜] 참고

[증조부] 성명 : 송○○(宋○○)->송기정(宋基鼎)[生:1810] : 宋憲卿[文蔭縉紳譜] 참고

[생외조부] 성명 : 서경순(徐慶淳)[生:1837], 본관 : 대구(大邱)

[처부] 성명 : 민응식(閔應植)[文:1882], 본관 여흥(驪興)

[안항:형제]

본생가 형 : 송헌범(宋憲范)

본생가 제 : 송헌량(宋憲良)[進:1891]

본생가 제 : 송헌순(宋憲舜)

 

송헌량(宋憲良) 1891년 사마방목(진사시) 보완

본인본관 미상(未詳)->은진(恩津)

[부] 성명 : 송경인(宋璟仁)[生:1856]

[처부] 성명 : 김영일(金永一)

[안항:형제]

형 : 송헌범(宋憲范)

형 : 송헌경(宋憲卿)[文:1887]

제 : 송헌순(宋憲舜)

 

첨부파일 : 첨부파일 없음







몽경당일사 서문 [夢經堂日史序] - 서경순(徐慶淳)| 고문고사(古文故事)

허현 | 조회 83

| 조회 83 |추천 0 | 2017.12.04. 06:55


  몽경당(夢經堂.서경순의 당호)이라 하였는가, 꿈을 기록한 까닭이다. 무슨 꿈인가, 석경(石經.비석에 새긴 경서)의 꿈이다. 왜 일사(日史)라 하였느냐 하면 여행을 기록한 까닭이며, 어디를 갔었느냐 하면 북경[燕]에 갔었다. 왜 사(史)라 하고 당(堂)을 관련시켰느냐 하면 역사를 당에서 수찬(修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록한 것을 왜 사(史)라 하는가? 보고 들은 것을 고르고 주워 모아서 뒷날에 권장하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여, 패사(稗史)와 외사(外史)의 한 부분에 들어가게 하는 까닭에 사(史)라 하였다.


   내가 을묘년(1855, 철종 6) 정월 보름날 밤 꿈에 중국에 들어가서 어떤 곳에 이르니, 현판을 태학(太學)이라 하였고 돌이 여기저기 서 있었으니, 곧 백개(伯喈.채옹의 석경)인데, 석면(石面)이 깎이고 패여서 글자 획이 뭉개지고 돌결이 부스러져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고 손으로 여러 번 만져 보고, 두 기둥 사이로 올라가서 절하니, 엄연히 공부자(孔夫子.공자)께서 앉아 계신 것 같았다. 사당 모습이 황량(荒涼)하고 잡초가 우거져서 탄식이 일어났다. 옷소매로 벽에 붙은 먼지를 털고 배회하면서 탄식하다가 한참 만에 깨어나 보니, 곧 꿈이었다.


   혼자서 마음속으로 ‘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꿈이란 원인이 있고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도 양을 치면서 곡개(曲蓋.자루가 꼬부라진 일산으로 태공망이 만든 것)를 두드리거나 부는 꿈은 있었으되, 일찍이 수레를 타고 구멍으로 들어가거나 부추풀을 가지고서 쇠[鐵]를 씹는 꿈은 없었으니, 인연도 없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나의 꿈은 과연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 혹은 인연에서 나온 것일까? 전일에 인연도 없었고 금일에 생각도 없었는데 이런 꿈이 어째서 있었을까?


   이해 10월에 삼종형(三從兄) 우란공(友蘭公)이 상사(上使.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명을 받드니, 내가 종사관으로 따라갔다. 연경에 들어간 지 열 아흐레 만에 태학에 가서 공부자의 사당에 참배하니, 사당 앞에 있는 석경 92개가 별같이 벌여 있고 바둑같이 퍼져 있었다. 내가 문득 전날의 꿈을 생각하고 기뻐서 다가가 살펴보니, 곧 건륭(乾隆) 때에 새로 새긴 것이고, 한(漢) 나라 때 홍도문(鴻都門) 앞에 새겨 있던 것이 아니어서 내 마음에 섭섭하여 무엇을 잃은것 같았다. 관(館)으로 돌아오니, 마침 회령(懷寧) 사람 방삭소동(方朔小東)의 서신이 왔는데, 백개 채옹의 석경 탑본(搨本) 6장을 함께 보내어 나에게 보여 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틀림없이 꿈에 본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감탄하여, ‘이상도 하다 꿈이여’ 하고, 그런 뒤에야 꿈이란 인연이 없어도 인연이 있게 되고, 생각함이 없어도 생각이 있게 됨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산천(山川)ㆍ풍속(風俗)ㆍ성시(城市)ㆍ인물(人物)의 볼만하고 느낄 만하고, 놀랄 만하고 기꺼울 만한 것을 대략 기록해 엮어서 《몽경당일사》라 하였다. 이 일사가 역시 황록(隍鹿.해자 속의 사슴이란 말로 인생의 득실이 꿈과 같다는 비유)이나 장접(莊蝶.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가 깬 뒤에, 장주가 나비로 되었는지 또는 나비가 장주가 되었는지 판단하기에 애썼다는 고사) 같은 꿈 가운데의 꿈이 아닌 줄 어찌 알까 보냐!

이듬해 병진(1856)년 삼월 삼짇날에 몽경당 주인 해관생(海觀生)은 스스로 서문을 쓰노라.


: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는 조선 철종 6년(1855) 연행 사신(燕行使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수행했던 해관 서경순(徐慶淳)의 사적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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