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나 내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석가모니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무한한 것인지 유한한 것인지, 깨달은 자는 사후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등 갖가지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러한 물음에 무기로 대답했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은 인생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식능력 범위 밖의 문제이므로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기 세상은 영원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영원하지 않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초경험적인 것을 판단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결코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침묵에 대해 집요한 추구가 있으면 석가모니는 드물게 적절한 비유를 들어 답하였다. 잘 알려진 독화살의 비유가 그렇다.
석가모니가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있을 때, 말룽카풋타라는 한 바라문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형이상학적인 여러 가지 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자와 종교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라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불교교단에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그러나 주위의 비구들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논하는 일 없이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말룽카풋타는 불만으로 가득 차 만일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단을 버리고 세속생활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어느 날 저녁 석가모니를 찾아가 해답을 구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설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을 바른 화살을 맞고 매우 위독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나 친척들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그를 구하기 위해 곧바로 의사에게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화살을 맞을 사람이 자기를 쏜 이가 사성계급 가운데 어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인지, 이름은 무엇이고, 신장은 얼마나 되며, 출신지는 어디고, 독화살의 종류가 무엇인지 등이 하나하나 판명되지 않으면 결코 독화살을 빼지 않겠다고 우긴다면, 그것들이 판명되기 전에 독은 전신에 퍼져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말룽카풋타가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불도의 수행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고 우긴다면, 그는 수행에 들어갈 기회도 없을 것이며, 윤회를 벗어나 고뇌로부터 해 탈을 얻는 일을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말룽카풋타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고뇌의 해결을 위해 성실히 불도의 수행을 닦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현재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고 시급한 문제임을 강조한다.
위의 ≪관무량수경≫의 경우는 미래를 아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한 예이다. 아들의 부모에 대한 반역 행위는 당시의 사회불안, 인간관계의 위기, 윤리 도덕적 타락 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고대 인도의 국왕 빈비사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인간으로서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인간심리의 깊은 곳에 끊임없이 잠재해 온 근원적 욕구에서 나온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사회현상이다.
불교학자들은 이 사건이 희랍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프스 전설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본다. 오이디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데베의 왕 아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이 아들의 탄생에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다'는 불길한 신의 예언이 있었으므로 버림을 받고 다른 나라의 왕자로 자란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자신에 관한 예언을 알게 되고, 예언을 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도중에 어떤 사람과 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자기 친아버지인 줄 모르고 죽여 버린다. 때마침 테베에 괴물 스핑크스가 나타나 시민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걸고 풀지 못하는 사람을 죽었는데 오이디프스가 그 수수께끼를 풀어 난을 해결하자 테베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그를 왕으로 삼고 여왕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주었다. 그들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생기지만, 왕가에서 생긴 불륜으로 인해 테베에는 괴질이 발생한다. 나중에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안 오이디프스는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뽑고 왕비는 자살하고 만다. 이것이 오이디프스 전설의 줄거리다.
이 전설도 결국은 자신의 업보는 피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위제희부인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근본 원인도 위제희부인 자신이 남편인 빈비사라왕과 모의해서 아들을 낳은 후 죽이려 한 것에 있으며, 더구나 자식을 원한 나머지 선인을 살해한 것과 점성술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원인은 위제희부인 자신에게 있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위제희부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청정한 업을 닦는 방법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위제희부인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온몸에 땅을 엎드려 통곡하며,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 숙세에 무슨 죄가 있길래 이런 악한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까? 또한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제바달다와 같은 악한 자와 친족이 되셨습니까?" 하고 투정을 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불행해진 것은 전적으로 제바달다가 내 아들을 꼬득였기 때문이며, 제바달다만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 불행의 책임을 제바달다의 사촌인 석가모니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자신의 불행과 슬픔을 석가모니에게 전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위제희부인이 비극의 원인을 석가모니에게 전가하려 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이외의 사람들 책임이나 원인으로 돌리려 하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행소년·소녀 들이 곧잘 쓰는 변명 중에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나는 나쁘지 않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게 만든 부모와 사회가 나쁘다며 본인 이외의 것에 원인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주위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잘못이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라도 전혀 다른 성격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같은 자극이나 같은 환경에 처해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반응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개성이 있고 주체가 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훌륭하고 청순하게 살아온 자도 있다.
환경이 지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물리적·생리적인 면에 국한된 것으로서, 인간에게는 그러한 조건에 맞서서 이것을 뿌리치고 변혁할 수 있는 고도의 정신력과 문화 능력이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환경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자기 자신에게 있다. 문제는 자신의 업, 즉 현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부터의 좋지 않는 습관이나 성격 등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는냐다.
불교에서는 '서원'을 세우고 '참회'하게 한다. 서원이란 기필코 목적을 이루고 말겠다는 맹세를 말하고, 참회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마음이다. 깨달음을 이루려면 먼저 업장을 소멸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필코 이 업장을 소멸하겠다는 서원이 필요하며, 이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참회가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참회가 깊으면 그 동안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이 생긴다. 참회할 줄 아는 자만이 불교를 생활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참고로 ≪관무량수경≫에서는 아자세가 어머니 위제희부인까지도 유폐해 버린 이야기로 끝나며, 그 후 아자세가 부왕을 살해해서 왕위에 오른 후부터의 이야기는 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아자세는 부왕을 살해한 죄의 가책으로 전신에 피부병이 생겨 가렵고 아프고 악취로 밤낮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위제희부인은 아자세를 열심히 간호했지만 잘 낫지 않았다. 결국 아자세는 왕실의 의사인 기바의 권유로 석가모니를 찾아가 설법을 듣고 진심으로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하니 죄의식이 사라짐과 동시에 병도 완전히 나았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에는 명왕(名王)으로 오랫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