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임금들의 패턴(3)

2018. 5. 5. 15:22우리 역사 바로알기



       조선조 임금들의 패턴(3)



15. 광해군 : 세자가 되기 전부터 유력한 후계로 꼽히다가, 왜란이 발발하자 세자로 책봉.
왜란 초반에 적 점령지를 다니며 전황 지휘, 실무 경험을 쌓으며 실질적인 국가의 구심점 역할을 함.
세자 시절 보여준 포텐셜로는 광해군이 조선조에서 1등입니다. 견줄만한 세자는 대군을 친위대로 삼은 세종시절 문종 정도랄까요?

① 버림받은 세자 시절
   왜란이 끝난 후에는 선조의 견제+중국의 후계문제+나이 어린 새 어머니와 그 아들 영창대군+대신들의 외면으로
10년간 기수열외(?) 세자생활을 해야했습니다.
   이 때 세자 대접 못받은 세자시절의 기억이 광해군을 선조보다도 더욱 극단적으로 보위에 집착하는 인물로 빚어냅니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 시작하죠.

② 줄잇는 대형 옥사
   선조를 능가하는 의심병환자가 된 것인지, 아닌 줄 알면서도 왕권강화에 혈안이 된 것인지
깜도 안되는 풍문조차 반역떡밥만 섞여있으면 대대적으로 옥사,
그러면서도 맨 먼저 자백하는 사람은 사면해줬기 때문에
나중에는 동네양아치들이 이것을 악용해서 거짓반역자백하고는 죄없는 사람에게 반역혐의 뒤집어 씌우고 자기는 풀려났음.

   있지도 않은 반역이므로 증거를 찾아도 있을리가 없지만, 땅 파보고 아무 것도 안 나오면 "등신이 아니면 벌써 숨겼겠지" 이런 식;;;;;;;
집권 내내 반역떡밥에는 과민반응한 것은 결국 후대에 잔혹한 인물로 기억되는 원인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엉성하기 그지없는 인조반정에 뒤통수를 맞은 것은 뭐라고 해야할지...

③ 지나치게 커진 대북세력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쩔쩔맸다는 정황은
연산군에 비견할 만한 잦은 옥사+한 번도 존호를 못받는 임금도 허다한데 무려 존호를 6번이나 받았다는 점(48자)에서 포착됨.
존호는 신하들이 특별히 존경하는 임금에게 올려주는 상장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됨.

   광해군은 고발자를 신임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툭하면 광역 모함을 시전하며 광해군의 신임을 얻은 것이 이이첨..광해군이 옥사를 멈추지 않으면서 이이첨의 권력도 브레이크 없이 커져서 이이첨은 광해군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이이첨은 광해군 옥사작업의 아바타이면서도 중립외교는 방해).
   왕당파랍시고 키운 대북이 껄끄러운 상대가 된 거죠. (홍길동의 작자로 일컬어지는) 허균이 처형되는 것을 기점으로
광해군이 이이첨이 너무 막강해진 것을 알아챈 것 같습니다.
 
   이 점이 선조가 끝없는 물갈이를 통해 임금한테 개기는 분위기를 근절시킨 것과는 대비됩니다.
대북은 옥사를 통한 정권장악에 있어서는 광해군과 한 통속이었지만 중립외교에는 찬성하지 않은 겁니다.

④ 광해군의 국정운영
   국정능력도 평가의 여지가 교차하는 편. 신하들의 반대(이이첨 마저 반대)에도 중립외교를 펼친 점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초월.
국방을 강화하는데 힘을 쏟았고, 즉위년부터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 시행확대를 금지한 것이나 그칠 줄 모르는 SimPalace는 명백한 실책.
대동법시행확대를 금지한 것은 자칫하면 꺼질 줄 모르는 대동법의 촛불을 지키기 위한 1보 후퇴였다는 해석도 있음.

⑤ 몰락
   인조반정 명분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이어가겠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광해군의 광범위 숙청이 두려운 나머지
'당하기 전에 친다!'는 식으로 이판사판의 도박을 한 거임. 반정은 준비부터 허접하기 짝이 없어 중간과정에 2차례나 뽀록나지만 광해군은 보고를 받고도 '그럴 리가 없다' 그래도 명색이 반란인데 동원된 군대도 대대급 이하 규모. 이괄이 정예북방군을 다 뽑아쓰고도 망한 것에 비하면.....;;

⑥ 총평
   광해군의 정세판단이나 국정운영이 전반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만
과오가 뚜렷한 부분을 꼽으라면 역시 거듭되는 옥사와 궁궐신축이겠죠. 2개 다 왕권강화와 긴밀한 관련이 있고
이는 세자시절 기수열외 당했던 소외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선조처럼 조였다 풀었다하는 노련함이 아쉬운 대목이랄까요.
광해군은 노무현대통령과도 종종 비교되는 편인데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16. 인조 : 서인세력과 동업하여 반정했지만, 정작 반정공신 중 대주주라 할만한 이(이괄, 심기원, 김자점)들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게 자연인 인조의 인간성을 말해준다고 봅니다. 김자점은 병자호란 때 합참의장을 맡아 북방으로 가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보고를 늦추어 병자호란 패배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합니다. 김자점이 "청나라군대 쳐들어옴요" 보고 올린 다음날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도착했죠-_-;;;;; 애초에 적이 중간기점을 내버려두고 수도로 돌진하는 전격전을 펼치는데 보고가 늦었다는 게 참....김자점만 제 때 보고올렸어도 병자호란은 안 졌다고 봅니다. 그러고도 소현세자와 그 일가에게 한 짓, 효종대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까지 보자면 이 인간은 개새끼of개새끼지만 일이 잘 됐다면 이성계2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① 반정 후의 정치지형
   인조는 조선조 최다 파천 경험자입니다. 이괄+정묘+병자.
인조는 광해군이 대북만 믿다가 망하는 걸 보고 여러 당을 두루 기용할 것을 천명했고, 어느 정도는 실천했음.
그래도 역시 실세는 서인. 인조 대의 정치지형은 대체로 다수당 서인이 여당으로 있으면서 야당남인은 명맥을 유지.

   청나라에게 항복 이후 사대부 사회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 머무르는 풍조가 생겼는데, 이를 山林이라 하고
효종현종대에 山黨이 되어 정계를 장악하게 됩니다.

② 격변하는 시대에서
   병자호란을 두고 통념적 시각은 친명배금정책을 펼치며 외교정책을 잘못 잡은데서 찾고, 기본적으로는 이게 맞음.
근데 인조가 '친명'한 것은 맞지만 '배금'한 것은 아니고 홍타이지가 워낙 反조선파였기 때문인데다 병자호란에 진 것에 운이 억세게 없었기 때문이라는 반박도 제법 많이 쌓여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게 맞는지 판단을 내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아직은 양 견해에 대해 더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통적인 통설인 외교정책실패설은 다들 아실테니
그에 대한 반박을 조금만 말하자면 청이 명을 무너뜨리는 과정도 로또에 로또에 로또를 맞는 과정이 있었는데
누르하치도 죽고, 홍타이지도 실패하고, 인구도 조선보다 적었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은, 우연적인 요소나 극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희한하다고 느껴질 지경입니다. 하다못해 이괄이 북방군만 안 들어먹었어도+원숭환만 안 죽었어도+김자점만 보고를 제대로 했어도+임경업한테 기회만 있었어도+오삼계가 역주행만 안 했어도 등등...

   만주족이 조선이랑 맞짱뜨기에 부담스러운 상대였던 건 분명하지만, 대세는 청나라!라고 하기엔 부족했습니다.
정묘호란 때 형제관계를 맺고 인조 때에도 비교적 훈훈하던 양국관계가 파탄일로를 걸은 것은 홍타이지가 칭제를 하는데 조선에서 협력을 거부(협력이고 자시고 만주대기근 때문에 협력했더라도 조선침공을 했을 거라는 분석도 있습니다)한 것에 기원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청군은 산해관에 가로막혀 골골 거렸고 사실 산해관은 저절로 열린 것이지, 힘으로 열 수 있었던 게 결코 아닙니다.

   명분론상으로도 만주족에게 황제칭호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산해관도 못 넘고 있는 홍타이지를 황제를 인정했다가 만주족이 그대로 찌그러지고 나면 명나라 뒷감당은 어떻게-_-;; 성리학자들이라고 바보는 아니죠. 목사들이 더 약삭빠른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_-;;;;

③ 인조의 컴플렉스
   정통성에 컴플렉스를 느꼈는지 친부와 친모를 대원군과 대비로 추숭하려고 했지만 동업자 서인들조차 생깠습니다. "니 주제에 무슨.." 뭐 이런 거죠.
   삼전도굴욕 당시 홍타이지가 '너 새끼가 말 안들으면 인질로 잡아간 소현세자한테 왕 시키면 그만'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이 기억에 남았는지 이후 소현세자에 대한 태도는 마치 라이벌을 대하는 것같습니다.
소현세자의 급사는 <실록>조차 강력한 의심을 보내는 실정이라 요즘은 아예 독살설이 상식 비슷하게 된 것 같습니다.

④ 의외의 면모
   국정운영은 그런대로 중타는 친 편입니다. 인조를 순도 100%의 개새끼로 단정짓지 않는 이유가 바로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성의껏 임하는 자세 때문입니다. 17C 전제군주라는 한계를 감안하고서 본다면, 나름 백성걱정도 많이 하고 백성들이 힘들다고 할 때에는 반성문을 써서 발표도 하고 하는, 의외의 면모도 보여줍니다. 뭐............국가안보가 파탄난 상태에서 내정을 중박을 쳐봤자 살기 좋을리 있나요.

⑤ 총평
   광해군이 대북과 밀월관계를 유지한 것과는 달리 서인중심으로 조정을 짜면서 남인들에게는 숨쉴 공간만 줬습니다. 나름 광해군의 실책을 반면교사로 삼은 점이죠.
광해군이 대형옥사를 치루는 것에 대한 나름의 반성으로 대형옥사는 되도록 피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소현세자 일가족에게 얄짤없는 모습은 광해군보다 더한 것같습니다. 광해군의 정적은 원수같은 계모와 형제들이지만(특히 동복형제 임해군은 흔한 명문가 오렌지족이라 차라리 통쾌하기까지 함) 인조가 숙청한 건 친며느리 친손자거든요.


엘레사르(2011-07-20 17:16:00)(탈퇴)112.201.***.93추천 0

   개인적으로 광해군은 정말 선조 아들이라 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뒤에서 서포트해주겠다던 인목왕후를 지 손으로 적으로 돌려버린 걸로도 모자라서(광해군 손에 죽어나간 혈육들에게 애도를.. 흔히들(ex영규옹ㅋ) 태종을 예로들며 '왕권강화'라고 하죠.), 왜란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전결 파악도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청기와 올린 호화스러운 궁궐을 비롯한 토목공사 강행.. 그것도 북방에서 한참 여진족에 의한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비 빼서.. 근데 더 웃긴 건 광해군 미화가 시작된 게 일제 시대(인간은 재밌는 동물ㅋ).. 세자때 활약들은 좀 멋있긴 한데, 수양대군, 안평대군같은 인물들을 쥐락벼락하던 문종과 비교는 좀 아닌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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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사르(2011-07-20 17:18:19)(탈퇴)112.201.***.93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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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문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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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사르(2011-07-20 17:21:18)(탈퇴)112.201.***.93추천 0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三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이 때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였고, 도독이 중간에 있었으며 뒤이어 우리 나라 좌·우영이 전진하였고, 원수는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뒤에 있었습니다. 적은 패한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回軍)하여 동쪽으로 나와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앞장서 가다가〉 갑자기 【부거(富車) 지방에서 노추(奴酋)의 복병을】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 뭉개고 죽여대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 나라의 오랑캐말 역관인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경서(金景瑞)가 먼저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약속을 하고 돌아왔는데 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와서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중국의 패잔병 수백 명이 언덕에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이 우리 군대에다 대고 ‘너희 진영에 있는 중국인을 모두 내보내라.’고 소리치고, 또 ‘중국 진영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때 교 유격이 아군에게 와서 몸을 숨기려고 하다가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강화를 맺으려는 것을 보고는 즉시 태도가 달라져 작은 쪽지에다 글을 써서 자신의 가정(家丁)에게 주면서 요동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고는 즉시 활시위로 목을 매었는데, 우리 나라의 장수가 구해내자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홍립 등이 중국 군사를 다 찾아내어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자 적은 그들을 마구 때려서 죽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홍립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경서는 투구와 갑옷을 벗어 〈오랑캐 깃발 아래에 세워 두고〉 오랑캐 진영으로 갔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로 하여금 삼군(三軍)을 타일러 갑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게 하였습니다.

   백(白)씨 성을 가진 호남(湖南)의 무사가 이민환(李民寏)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항복할 뜻을 이미 정했다면 공은 막부의 계책에 참여했었으면서 어찌하여 군막으로 나아가 대의로써 꾸짖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두 원수를 목베어 삼군을 격려하여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노추에게 무릎을 꿇어 천하 만세의 욕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지만, 민환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부하 장수 이일원(李一元)·안여눌(安汝訥)·문희성(文希聖)·박난영(朴蘭英)·정응정(鄭應井)·김원복(金元福)·오신남(吳信男) 등과 함께 제각기 거느린 군졸과 말을 인솔하여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은 채로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항복했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와 장수들로 하여금 군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고 적병으로 둘러싼 채로 노추(奴酋)의 목책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노추는 홍립과 경서만 목책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밖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성밖에 두고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싸움에 개철 총병(開鐵摠兵) 두송(杜松)이 공을 탐내어 경솔히 전진하는 바람에 전군이 패몰함으로써 적병이 동쪽 방면에 전념하게 되어 끝내는 사방의 군대가 모두 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후 오랑캐에게 잡혔던 장수와 군사들이 대부분 달아나 동쪽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굶주림으로 골짜기에서 뒹굴거나 오랑캐에게 잡혀 거의 다 죽고 돌아온 자는 겨우 수천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3책 217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軍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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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흔히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명령을 내려 미리 항복시켜 수 많은 병력을 구했다고 알고 있는데, 실제론 전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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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사르(2011-07-20 17:23:16)(탈퇴)112.201.***.93추천 1
   그냥 인조라는 병신중의 상병신 덕분에 앞에 있던 광해군이 좀 빛나 보이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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