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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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자료 

民(장달수) | 조회 487 |추천 0 | 2017.10.12. 10:51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이 종 호*


1. 서론
2. 전쟁배경과 朝·淸의 군사전략
3. 병자호란의 開戰과 전쟁과정
4.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분석
5. 전쟁의 함의와 결론




1.서 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송파의 삼전도비1) 앞에 서면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믿었던 이 말도 또 다른 의미로 새겨진다.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1)삼전도비는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에 있다.1637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현장에 청이 1639년에 건립하였고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이던 이경석(李景奭)이 비문의 내용을 적어 넣었다.비문에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고 찬미한 굴욕적인 내용을 적어 넣었다.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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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7년 2월 24일 병자호란의 승자인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높은 단상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패자인 조선 국왕 인조는 단하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이후 조선은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공물과 특산품을 상납하고 청나라가 구축한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되었다.


   한동안 조선의 지식인층은 숭명배금주의(崇明排金主義)와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대표되는 반청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을 소중화로 인식하면서 정신적 측면에서 청을 거부하였으나 북벌계획이 실패하고 청이 제국으로서의 정치적 위상이 확립됨에 따라 결국 조선에는명에 이어 청에 대한 사대주의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약 26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


   그러나 지금 조선의 한민족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새로운 국가 발전의 열망을 이어가고 있으나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 전역을 통치하였던 만주족은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동시에 17세기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변동(The Great Tranformation)의 단초가 되는 병자호란을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17세기 명·청 교체기라는 큰 변동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병자호란의 결과는 조선, 명, 몽골, 일본 그리고 청의 만주족에게 있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 내에서의 국가적 지위 변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명, 청, 몽골과 청, 명, 조선 그리고 청, 조선, 일본 등 다중 삼각관계에서 청, 몽골, 조선이 동맹관계로 결합되어 명과 대치하는 양극 관계로 변환되었다.


2)이종호,“청과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전쟁 비교연구”,「한국동북아논총」제16집 1호
(한국동북아학회,2011),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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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시대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역사발전 단계에 있어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35년간의 전란기를 매듭짓고 조선후기 근세사회로 발전해 가는 전환점이 된다. 이렇게 중요한 전쟁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주로 정치, 경제 및 사회사의 시각에서 연구되었을 뿐 정작 중요한 부분인 군사사적 접근은 미흡했다고 보인다.


   특히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양국의 군사전략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연구해왔던 성과물을 바탕으로 병자호란에 임하는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과연 당시의 국제환경과 군사력 그리고 국가적 자원과 수단을 고려해 볼 때 적절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모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함의가 무엇인지 도출해보고자 한다.



2. 전쟁배경과 朝·淸의 군사전략


가. 전쟁의 배경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의 공간에서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한(汗)에 즉위한 누루하치(奴兒哈赤)는 명에 대해서는 군사적 대결을 지속하되 조선과는 되도록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사망하여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1626년 한위(汗位)를 계승함으로써 후금의 대외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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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후금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위기에 있었다. 팔기군에 의한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요동지역을 병합하고 몽고 제부의 귀속으로 통치해야 하는 강역과 인구는 규모면에서 방대해졌으나 한인들의 동요로 후금이 주력했던 농업경영은 실패하였고 한랭 기후의 도래로 흉작이 겹쳐서 경제상황이 극한으로 내몰렸다.3)


   홍타이지는 국가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국가경영체제를 중국의 정부체제를 모방하여 재편하였다. 특히 한인관료의 도움으로 관제를 개혁하여 중국식 관제인 6부(六部)를 설치하고 대외정책에 대한 국가전략을 재편하였다. 그는 주변국 정세와 후금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한 후에 후금의 국가전략을 대명화의(對明和議)와 요동고수(遼東固守)로 결정하였다.4)


   당시 조선, 명, 후금의 삼각관계에 있어서 결정적 전환점은 명의 제국 말기적 정치, 경제, 사회혼란과 누루하치의 뒤를 이어 대조선 강경론자인 홍타이지의 등장 그리고 조선에 있어서 인조반정을 계기로 광해군을 축출한 서인정권이 기존의 중립외교노선을 부정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기 위해 설치한 가도(椵島)의 동강진에 주둔한 모문룡(毛文龍)군을 조선 정부가 지원함으로써 양국 사이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또한 당시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발생한 이괄(李适)의 난 이후 그 잔당이었던 한윤(韓潤) 등이 후금으로 망명하여 조선 내부의 정세를 제보하면서 후금의 조선 침공을 부추긴 면이 있다.
결국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결심하고 원숭환이 지휘하는 영원성 지역의 명군과는 일시적으로 휴전을 하고 나서 후금의 주력을


3)김문기,『17세기 강남의 기후변동과 명·청 교체』,부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8,
176~182쪽.
4)노기식,‘만주의 흥기와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중국사),2009.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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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전환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정묘호란에서 후금의 전쟁 목표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가도(椵島)의 모문룡 군의 세력을 제압하여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는 명의 충순한 번국(藩國)인 조선을 견제하는 것이다.

째는 조선과 교역하여 양곡 등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1627년 1월에 발발한 정묘호란은 그해 3월 정묘화약(丁卯和約)으로 종결되었다. 전쟁결과 양국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개시(開市)를 개설하여 국경무역이 시작되었다. 또한 조선은 아우의 나라로서 형의 나라인 후금에 매년 막대한 양의 세폐(歲幣), 즉 공물을 보내게 되었다. 후금의 무력에 의해 이루어진 정묘화약은 처음부터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후금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의 전략목표 중에서 두가지를 달성했으나 첫 번째 목표인 가도의 모문룡 군을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조선과 중강개시와 회령개시를 개설하고 형제관계를 맺음으로써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목표는 달성했으나 그것은 명과 조선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군신관계를 용인해 주는 바탕 위에서 수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양국 간에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까지 약 10년간 많은 외교적 분쟁과 갈등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5)



   조선은 정묘호란을 통하여 후금의 군사력을 실감하였고 정묘화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의 확대를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년간 명과 후금의 전쟁상황 속에서도 가까스로 유지하였던 불안한 평화를 깨트리고 양국은 왜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의문이다. 전쟁의 원인(遠因)과 전쟁의 근인(近因)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5)한명기,『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서울:도서출판 푸른역사,2009),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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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의 원인(遠因)

(1)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명, 후금, 몽골과 후금, 명, 조선 그리고 후금, 조선, 일본 등 다중 삼각관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립변수는 명과 후금이었으며, 두 국가의 관계가 변동되면서 다른 삼각관계도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다중 삼각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균형된 상태에서는 명을 패권국으로 하는 질서가 아직 까지는 유지될 수 있었다.


   무력충돌과 변화의 시작은 명이 장악하고 있었던 요동에서 시작되었다. 요동은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으로 중국의 지정학적 시각에서 보면 동으로 한반도를 견제하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으며, 서로는 산해관(山海關)과 접하고 있어서 북경으로 바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발해만을 끼고 있어 해양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북으로는 요하를 넘어 사막, 초원지대의 몽골과 접촉할 수 있다. 때문에 명, 청 시대에 걸쳐서 요동은 동아시아 역사 변동의 한 축이 되었다.6)


   누루하치는 1616년 한(汗)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금(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고 명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1618년 4월에는 7대한서(七大恨書)를 발표한 후 무순(撫順)과 청하(淸河)를 점령하여 명과 전면전쟁에 돌입하였다. 명은 후금의 위협이 가중되자 조선에 대해 임진왜란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원병을 요청하였다. 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은 후금의 팔기군과 사르후(薩爾滸)전투를 치르지만 모두 섬멸되어 버린다. 누루하치는 조·명 연합군을 대파한 후 요동 진출을 가속화 한다.



6)남의현,『명대 요동도사 지배의 한계에 관한 연구』,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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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1년에는 심양이 함락되고 이어서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설치되어 있는 요양이 팔기군에게 점령당한다. 누루하치가 수도를 허투알라(赫圖阿拉)에서 요양으로 천도하여 요동 경영을 본격화하자 명군은 방어선을 요하 서쪽으로 조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명과 조선의 육로 통행은 후금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다.


   요동을 중심으로 명과 후금의 군사적 충돌이 확대되면서 명은 몽골, 조선과 연합하여 후금의 팽창을 저지하려 하였다. 후금 또한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몽골과 대외경제 확대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하여 연합관계를 형성해 나갔으며, 사신의 왕래와 혼인(婚姻) 등을 통하여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오랫동안 명의 번국(藩國)이며,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조·명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을 패퇴시킨 군사동맹국이므로 후금은 이를 배후의 위협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견제와 위협 그리고 군사적 수단을 통해 조·명 관계를 단절시키려고 노력하였다.


(2) 후금의 국력신장과 제국건설의 야망: 몽골과 만주북방 제부족의 통합

   후금이 국가팽창과 생존을 위해서는 먼저 몽골을 복속하여 통합된 힘으로 대명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었으므로 누루하치 시대에는 동몽골지역의 커르친부(科爾沁部)와 내할하5부(內喀爾喀5部)를 복속하였으며, 홍타이지 시대에는 몽골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인 챠하르부(察哈爾部)를 복속하여 후금의 지배체제 안으로 흡수하였다.7)


   후금은 몽골의 통합을 위해 세력을 넓혔던 차하르부(察哈爾部)의 릭단 한에 대항하여 동몽골의 지도자들과 연맹을 결성하고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전쟁을 수행하였다. 1634년 태종 홍타이지는 릭단 한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콩고르가 복속을 해 옴에 



7)조병학,『입관전 후금의 몽골 및 만주족 통합에 관한 연구』,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0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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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몽골의 제부를 후금에 병합하고 만주 8기(滿洲 八旗)에 분편되어 있던 몽골군들을 분리하여 몽골 8기(蒙古 八旗)를 별도로 창설하였다. 더군다나 릭단 한이 가지고 있던 역대전국옥새(歷代傳國玉璽)까지 수중에 넣음으로써 천명(天命)을 획득했다는 정치적 이념을 창출할 수 있었다.8)


   또한 만주 북방지역에 대한 명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북방 제부족에 대한 복속전략을 계속 강화해 나갔다. 특히 1634년부터 복속하지 않는 흑룡강 지역의 색륜부(索倫部)와 동해 제부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전쟁을 개시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몽골지역에 대한 병합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강압적인 무력행사보다는 후금으로의 귀부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9)


   1636년 몽골의 제부(諸部)가 후금에 병합되고 만주 북방의 제부족이 대부분 후금에 귀부해 옴에 따라 후금은 통치영역 면에서나 군사력 측면에서 명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후금은 명의 내지를 공략하기 위해서 산해관 방면으로 공격할 필요 없이 동몽골의 장성지역(長城地域)으로 우회하여 침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아시아 역학관계는 명에게 매우 불리한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636년 4월 11일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만몽한(滿蒙漢)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의 위(位)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하였으며, 숭덕(崇德) 원년으로 개원하였다. 홍타이지는 동년 6월 새로이 탄생한 청조(淸朝)의 위력을 과시하고 명의 수도인 경사(京師)일대의 방어력을 탐색하기 위해 약 8만 여명의 팔기군을 장성지역으로 침입시켜 경사에 인접한 창평(昌平)을 공략하고



8)노기식,『후금시기 만주와 몽고 관계 연구』,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1999,
197~199쪽.
9)조병학,전게서,1999,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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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개월 동안 화북지역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청병은 그해 7월 약 18만의 인축(人畜)을 노략하여 퇴각하였다. 화북에서 철수한 청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선에 대해서 대규모 원정전쟁(병자호란)을 단행한다.10)


   청은 팔기군을 앞세운 우세한 기동전력으로 명의 수도 주변일대를 공략함으로써 명군이 수세적인 태세를 취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하였으며, 명의 화북지역에 대한 수회의 대규모 침공이 성공을 거두자 청은 군사적으로 대명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였다고 판단하였다.11)  이때 청은 조선이 비록 정묘화약(丁卯和約)을 통해 형제국이 되었다고 하나 아직까지 유일하게 명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명에 대해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배후의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여 양면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2) 전쟁의 근인(近因)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차이와 갈등의 확대 그리고 파국
   정묘호란이 종결되고 병자호란이 발발하기까지 10년 간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던 조선과 후금간의 갈등은 정묘화약에 대한 극명한 시각 차이가 근원이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통해서 조선과 형제관계를 수립하고 중강개시와 회령개시를 개설하여 정치·경제 전략적 이점은 획득했으나 가도의 모문룡 군의 격멸 그리고 명과 조선 간 국교를 단절시킴으로써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군사전략적 목표달성에는 실패하였다.

10)정병철,『天崩地裂의 시대,명말청초의 화북사회』,전남대학교 출판부,2008,66쪽.
11)1627년 정묘호란에서 조선에 승리한 후금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이후 명에 대해
대규모 침공을 단행하였다.제1차 침공은 1629년,제2차 침공은 1634년,그리고
제3차 침공은 1636년 대청제국을 수립한 지 4개월 후인 동년 6월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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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금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굴복시켰다는 우월감과 조선의 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지 않고 정묘화약을 통하여 전쟁을 종결시켜 주었다는 시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후금 사신의 예우를 명 사신과 동일하게 하라고 요구하였고 조선의 포로 중에서 도망한 자와 요동지역에서 만주족의 횡포로 조선경내에 들어 온 한인 망명자의 소환, 세폐의 증액 그리고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조정하자는 것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반면에 조선은 군사력의 열세를 인정하고 일단은 후금과 정묘화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의 참화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였으나, 신료와 사대부들은 소중화 의식(小中華 意識)을 바탕으로 오랑캐인 여진족 정권과 형제관계를 수립한 것에 대하여 국가적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정묘화약 이후 후금의 추가적인 요구사항에 대하여 미온적이거나 오히려 거부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극명한 인식의 차이는 이를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변경하려는 전략적 의도와 결부하여 언제든지 명과 후금의 군사적 균형의 추이와 같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관계의 파국이 현실화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팔기군의 기동전력을 이용하여 명의 화북지역에 대한 공략이 성공하고 대릉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다음 산동에서 공유덕과 경중명의 대규모 수군까지 귀순해 오자 대명관계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633년 6월 향후 대 주변국 정책에 대한 전략회의를 실시하여 조선 문제는 경제적 이득을 고려하여 당분간 포용하되 결정적인 상황의 변화를 기다려 완전히 복속시키는 것으로 확정하였다.12)


12)한명기,전게서,2009,135~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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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사적 분쟁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모문룡군은 후금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군과 연합하여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후금은 정묘호란 당시 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조선으로 하여금 명군에 대해 일체의 지원을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문룡 군에게 군량과 물자를 조달해 주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계속 강화하였다.


   그러나 명 조정의 실권을 쥐고 모문룡을 비호해 주던 위충현(魏忠賢)이 실각하자 그 파장이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모문룡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후금에 투항할 의도를 간파한 요동경략(遼東經略) 원숭환이 1629년 6월 그를 피도로 유인하여 살해하였던 것이다. 또한 1630년 유흥치(劉興治)가 가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후금은 모문룡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내 선박의 제공을 요구하였으나 인조는 대명의리론을 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13)


   결국 조선으로부터 선박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후금은 자체적으로 평안도 연안에서 선박 11척을 획득하여 가도 공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명 도독 황룡(黃龍)에게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군사작전은 실패하였다.14)
이 사건으로 조선과 후금 관계가 악화될 무렵인 1632년 산동의 등주에서 명의 장수 공유덕과 경충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의 토벌군에 의해 등주가 함락되자 이들은 여순 방면으로 도주하여 후금에 투항하였다. 이들의 규모는 병선 185척, 병력 수만 명에 이르렀으며, 후금의 홍타이지가 고대해왔던 것이 현실화된 것이다. 즉, 후금은 수군을 이용함으로써 산해관을 우회하여 천진(天津)



13)최동희,『조선의 외교정책』(서울:집문당,2004),52~53쪽.
14)『仁祖實錄』권24,인조 9년 6월,康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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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등래(登萊)를 공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후금은 확보한 수군전력을 진강(鎭江) 일대에 계류시켜 놓고 지리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조선 측에 병선을 관리하는 병력의 군량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당시 가도의 명군 총병 황룡과 부총병 심세괴도 조선 측에 군량 공급과 공유덕 군을 소탕하는데 동참할 것을 요청 하였다. 양자 사이에서 고심하던 조선은 명군의 제의를 받아들여서 가도에 군량을 공급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공유덕 일당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후금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15) 이와 같은 조선의 군사행동은 후금이 조선 문제를 군사력으로 해결하려고 결정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3) 인조의 척화유시문을 용골대 일행이 입수, 開戰의 빌미 제공

   후금은 1636년 4월 홍타이지가 만몽한(滿蒙漢)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의 위(位)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선포하기 전에 이를 조선에 알리기 위해 용골대를 사신으로 보냈다.


   조선 조정 내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큰 동요가 발생하였다. 홍타이지를 황제에 추대하기 위한 존호의 진상에 조선이 참여하는 것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고려할 때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특히 용골대가 홍타이지 명의의 국서 이외에 두 개의 별서를 가지고 왔는데 이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별서는 조선이 명을 배신하고 후금으로 귀순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청 강경론자들은 대청관계를 단절하고 용골대 등 사신들을 참수함과 동시에 서한을 불태우라고 주창하였다. 용골대는 조선의 적대적인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급히 도성을 떠나 본국으로 복귀하였다. 


15)한명기,전게서,2009,135~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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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인조는 척화를 결심하고 청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유시문을 각도에 내렸다.
그러나 평양감사에게 전달해야 하는 유시문이 용골대 일행에게 입수되어 그 내용이 노출되고 말았다.16)
인조의 유시문이 노출된 경위가 어떻든 간에 이 사건은 청이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나. 조선의 군사전략


   인조의 즉위 초에 조선은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여 중앙군의 재편성과 함께 지방군을 재정비할 목적으로 속오군(束伍軍)17) 훈련을 담당하는 전담 영장제(營將制)를 시행함으로써 군사력을 증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평안도에서 황해도, 개성으로 이어지는 서북지역 방어에 전략중점을 두고 압록강변의 의주와 창성을 제1차 방어선으로 하면서 영변, 안주, 평양을 내륙 거점방어의 중심으로 삼는 평안도 지역 방어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에 발생한 평안병사 이괄의 난으로 평안병영이 위치한 영변 일대는 초토화되고 평안도 지역의 군병의 수효는 급감하여 청북지역(청천강 이북)에 대한 실질적인 방어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전략방침이 수도권 방비를 강화하면서 예상주공로 방향에 대하여 전력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수정됨에 따라 의주대로와 내륙직로가 모이는 안주를 중심으로 청남지역(청천강 이남 지역) 방어를 강화하는 전략이 수립되었다. 이는 정묘호란 때에 후금군 주력의 진출로가 의주- 용천- 곽산 - 안주- 평양이었고 일부 병력이 창성을 공격하여 내륙직로를 견제했던



16)육군군사연구소,「한국군사사 제7권」(서울:경인문화사,2012),306~307쪽.
17)임진왜란시 유성룡의 건의로 편성된 지방군,양인과 천인이 모두 대상이며, 병농일치제로 평상시에는 농사 및 무예연습,유사시 소집됨,영장 통솔 하에 5개사(司),1사에 5개초(哨),1초에 3개기(旗),1기에 3개대(隊),1대는 화병(火兵)1명을 포함하여 11명으로 구성,1개의 영(營)은 2,475명으로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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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고려하여 현병력이 창성을 공격하여 내륙직로를 견제했던 사례를 고려하여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이다.18)


   특히 후금군이 대명전쟁을 치르면서 다양한 공성 전술을 익히게 되고 서양식 대형 화포인 홍이포를 생산하여 대규모 화포부대를 운용함에 따라 조선은 그들의 공성능력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대로상에 위치한 평지 읍성의 방어는 안주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포기하고 인근의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거점을 옮겨 방어체계를 갖추는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방침에 따라 서북지역의 방어병력은 각각 지정된 산성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의주는 백마산성, 용천은 용골산성,
선천·곽산·정주는 능한산성, 평양은 자모산성, 황주는 장수산성을 입보처로 하여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수도권 방비를 위해서는 정묘호란 전에 중앙 상비군 강화를 위해 창설했었던 호위청, 어영청 등 군영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훈련도감의 전력도 청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하여 마군(馬軍: 기병) 5초(600여 기), 보군(步軍) 25초(4,400명) 등 약 5,000여 명으로 증원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에 수어청이라는 군영을 신설하여 수도권 방위력을 확대 개편하였다.


   수도 방위를 하는 각 부대는 병력이 2교대 또는 8교대의 순환식 근무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위기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은
편제병력 중에서 12,000여 명 수준이었다.


   조선은 정묘호란을 통하여 청의 군사적 능력을 실감하고 재침공에 대비하여 서북지역의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다. 만일 이 지역에서 방어에 실패할 경우 국왕은 강화도로 이동하여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전력으로 방어하고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18)육군군사연구소,전게서,2012,311~314쪽.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57



수어청 전력으로 수도권 방어에 임하여 강화도에 대한 압력을 둔화시키다가 각 도의 속오군을 중심으로 편성된 근왕군이 도착하면 수도권에서 결전을 시도하는 방어전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군사전략의 개념에 따라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방어체제를 우선적으로 정비하였다.



〈표 1〉병자호란 직전 수도 한성 방어를 위한 상비군 현황

부 대 규 모 역 할
호위청 1,000명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한 군사들로 창설한 부대로서 국왕의 호위 임무수행
어영청 6,200명
1624년 후금군이 침공할 것에 대비하여 국왕이 친정(親征)할 때 직접 지휘하는 근위부대
총융청 20,000명
1624년 경기도의 병력을 통합하여 창설한 부대,후금 침공시 국왕은 강화도,세자는 남한산성 이동,
각 도의 군사력 집결,반격 시 주력의 역할 수행
훈련도감 5,000명
1593년 임진왜란 시 유성룡의 건의로 창설된 중앙 상비군,
정병 양성과 수도방위 임무수행,전 인원이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으로 편성됨.
수어청 12,700명
1627년 남한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설,경기도 남부지역의 각 진을 총괄 지휘하는 임무수행
총 계 45,000명
출처:유재성,「병자호란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6년,27~36쪽.연구자가 재
정리.



다. 청의 군사전략



   청 태종 홍타이지는 즉위 후 全 만주와 몽골을 정복하고 명나라로 진공한다는 전략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조선을 침공(정묘호란)하였다. 이를 통하여 배후의 위협을 해소하고 경제적 이득을 획득하였으며,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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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하르부(察哈爾部)의 릭단 한에 대항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몽골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리고 만주8기(滿洲 八旗)에 분편되어 있던 몽골군들을 중심으로 몽고 8기(蒙古 八旗)를 창설하여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였다.


   홍타이지는 1636년 몽골의 제부(諸部)를 병합되고 만주 북방의 제 부족들을 대부분 통합함에 따라 대청(大淸)의 황제의 위(位)에 올랐다. 이제 동아시아 역학관계는 명, 청, 조선의 삼각관계로 정립되었다. 청(淸)은 통치영역에서나 군사력 측면에서 이제 명과 대등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산해관 방면 뿐만 아니라 동몽골의 장성지역(長城地域)으로 우회하여 명을 침공할 수 있게 되어 군사전략 수행의 융통성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청(淸)이 명과 전면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군과 가도의 명군 전력이 있는 한 내선작전19)을 수행해야 했다.


   따라서 청 태종 홍타이지는 기동력이 우세한 팔기군을 기반으로 하여 내선작전의 이점을 활용한 선제적 공세전략을 수행하였다. 우선 1636년 6월 아지게(阿濟格)에게 약 8만의 병력을 주어 장성지역으로 우회하여 화북지역을 침공하게 하였다. 약 1개월의 전역을 통하여 청은 팔기군을 앞세운 우세한 기동력으로 명의 군사력을 수세적인 태세에 몰리게 하였으며, 획득한 물자와 인력을 활용하여 조선침공을 준비하였다. 그해 겨울 압록강이 동결되자 청은 배후의 위협이라고 인식하였던 조선군과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을 격멸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였다.20)


19)내선작전은 아군이 2개 이상의 적 사이에 위치할 경우에 수행하는 작전이다.
수개 방향의 외부로부터 위협하는 적에 대하여 아군의 후방 병참선을 내부에 확보한 가운데 실시하는 작전이다.내선작전의 핵심은 가용한 전력을 통합하여 개개의 적에 대하여 각개격파하는 것으로 전투력의 집중과 시간적 요소가 중요시된다.
20)김문기,“병자호란 전후의 조선·명·청 관계와 김육의 조경일록(朝京日錄)”, 선시대사학보,2006,89~90쪽.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59



   청 태종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조선을 공략했던 작전경험을 십분 활용하였다. 즉, 조선군이 방비하고 있는 주요 산성의 거점은 우회하고 기동로의 인접에 있는 도시는 점령하면서 조선의 중심인 한성을 향해 신속하게 공격하였으며, 기동력이 있는 선봉부대를 주력부대 앞에 먼저 진출시켜서 조선 국왕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과 남부지방으로 가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한강 이북에서 전쟁을 조기에 종결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하여 가용병력 중에서 청 팔기병 7만 8천 명, 몽고 팔기병 3만 명, 한병(漢兵) 2만 명 등 도합 12만 8천 명을 조선 원정군
으로 편성하였다. 최소한의 잔여병력을 통합하여 패륵 아파타이(阿巴泰)가 갈해성(噶海城)에서 대명전선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지게(阿濟格)가 우장(牛莊)에 주둔하여 명군이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차단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21)


   선봉부대는 호부승정 마푸다가 지휘하는 청 기병 1개기 6천 명으로 편성하여 안동에서 압록강을 도하한 다음 조선군과의 접촉을 회피하면서 신속히 기동하여 한성과 강화도의 통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좌익군은 예친왕 도도가 지휘하는 청 기병 5개기 3만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이 부대는 선봉부대를 후속하다가 한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조선 국왕의 남부지방 이동통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본군은 청 기병 5개기와 몽골 및 한병의 혼합부대로 약 7만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청 태종과 함께 좌익군을 후속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 각 성을 공략하고 한성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부부대를 기동로의 주요 도시에 잔류시켜서 병참선을 방호하게 하였다. 우익군은 예친왕 도르곤이 지휘하는 청 기병 2개기와 한병의 혼합군 2만 2천명으로 편성하였으며,

21)유재성,『병자호란사』(서울: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1986),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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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동에서 압록강을 도하한 혼합군 2만 2천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벽동에서 압록강을 도하한 다음 창성과 영변을 공략하고 평양과 개성을 거쳐 임진강을 도하하여 강화도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청군은 조선군의 방어전략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산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방어 거점은 철저히 무시하고 주요부대의 진출경로상에 있는 각 산성의 주변에는 소규모 부대를 잔류시켜서 조선군이 다른 지역으로 전환하지 못하도록 고착시키는 한편 주력부대는 수도 한성에 조기에 진입하기 위하여 신속히 남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도 한성이 위협을 받게 되면 조선 국왕이 강화도로 옮겨 가서 장기 항전을 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차단하기 위하여 마푸다를 선봉부대로 우선 투입하였던 것이다.



3. 병자호란의 開戰과 전쟁과정


가. 병자호란의 開戰


   청 태종은 마침내 조선 정벌을 공표하고 조선 원정군에 편성된 모든 병력에 대하여 1636년 12월 25일까지 심양에 집결할 것을 하달하였다. 청 태종은 개전에 앞서서 12월 21일 제신들을 이끌고 ‘조선 정벌’의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었다.22)


   심양에서 부대편성을 마친 청군은 12월 28일 새벽에 선봉부대를 필두로 하여 조선을 향해 부대기동을 개시하였다. 마푸다가 이끄는 청군의 선봉대는 1637년 1월 3일 압록강을 도하 후 의주를 우회하여 안주 방면으로 남하하였고, 좌익군도 이날 오후 압록강을 도하하여 비어있는 의주성에 입성 후 저녁에는 임경업 군이 방어하고 있던 백마산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22)한명기,전게서,2009,151쪽.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61


 청 태종의 본대는 1월 5일 압록강을 도하하여 의주-용천-곽산-정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1월 9일 안주까지 진출하였다. 안주성에는 평안병사 유림이 약 3천명의 병력으로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청 태종은 안주성 공격이 실패하자 이곳에 일부 병력만 잔류시켜 놓고 주력을 인솔하여 평양으로 직행하였다. 청군의 우익군은 압록강을 도하한 후 창주의 당아산성을 점령한 후 곧장 영변으로 진출하였다. 영변의 철옹산성에는 부원수 신경원이 약 3천명의 병력으로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도르곤이 지휘하는 청군은 이를 점령하는데 실패하고 철수하였으나 신경원이 청군을 추격하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큰 타격을 입고 철옹산성도 함락되었다. 이후 청 우익군의 주력은 중화-토산방면으로 계속 남하하였다.23)



나. 조선의 대응책과 남한산성의 포위


   1636년 11월경 청군의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정보가 조선에 입수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조정 내에서 서북지역의 방비가 아직 충분하지 못하므로 화친을 도모하자는 주화론과 청군과 일전을 겨루자는 척화론 사이에 논쟁이 오가는 중에 청군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청군의 공격에 대한 최초보고가 조선 조정에 도착한 것은 청군 선두부대가 안주까지 진출하였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1월 8일 보고서였다.24)


   조선 조정은 청군이 이미 안주까지 진출했으므로 안주-평양 선에서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도원수 김자점에게 황해도 및 개성의 군병을 황주에 집결시켜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게 하였다. 동시에 강화도, 수도 한성, 남한산성을 


23)육군군사연구소,전게서,2012,299~302쪽.
24)『仁祖實錄』권33,인조 14년 12월,癸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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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는 수도권 지역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청군의 예봉을 차단하고 나서 각 도에서 집결된 근왕병으로 반격작전을 하는 전략을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서 검찰사 김경징으로 하여금 강화도의 방어를 책임지도록 하였고,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하여 한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수어사 이시백으로 하여금 남한산성에 들어가 하삼도와 연락하면서 근왕병의 재편성에 착수하도록 하였다. 각 도의 감사와 병사에게는 병력을 인솔하여 수도권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인조는 1월 9일 강화도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이미 마푸다가 지휘하는 청군의 선봉대가 한성 근교의 양화진과 개화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강화도로 가는 통로를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 밤 늦게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였다.25)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이제 전쟁양상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주력부대가 점차 남한산성 주위를 포위하는 형태로 배치가 되어 남한산성의 조선군과 청군 사이에 공방전이 진행되었으며, 그 외곽에서는 조선 조정의 지시에 의해 각도의 조선군이 근왕군으로 남한산성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이를 차단하려는 청군과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다. 즉,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2중 포위전 형태의 전투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청 태종이 약 7만 명의 본군을 인솔하여 1월 22일 남한산성에 도달한 후 본격적인 포위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산성의 조선 수비군 1만 4천 명이 견고하게 요새화된 방어진지에서 조직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청군의 공격은 진척이 없었다. 이에 따라 청 태종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여 인조에게 조속히 출성항복을 하도록 요구하면서 각 도의 근왕군에 대한 차단작전을 시행하였다.


25)유재성,전게서,1986,144~147쪽.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63



<표 2> 병자호란 당시 근왕군과 청군의 주요전투

구 분 전투지역 근왕군의 주요 전투 결과
강원도
근왕군
검단산
(남한산성
남방 1km)
∙원주목사 이중길,원주영장 권정길이 강원도 근왕군 7천명 편성
∙원주영장 권정길이 선봉대로 1천 명을 인솔 검단산 도착,남한산성과 연락 노력
∙청군 2천 명이 좌우 측방포위공격,1차 저지
∙청군 3천 명이 2차 공격,조선군 패퇴
∙강원도 근왕군은 경기도 미원 일대로 철수
경기·
황해도
근왕군
황해도
토산
∙도원수 김자점은 5천 명으로 황주 방어 후 청군을 추적,토산까지 남하
∙청군 우익군 6천 명과 전투,조선군 패퇴
∙김자점군은 2천 명을 수습하여 미원에 전개
평안도
근왕군
경기도
김화
∙평안감사 홍명구,평안병사 유림이 5천 명의 근왕군으로 평양-평강을 거쳐 김화 일대에 전개
∙청군 6천 명과 1일차 전투에서 승리,조선군 탄약 부족
∙야간에 전투이탈하여 가평으로 이동
충청도
근왕군
험천현
(남한산성 남방 10km)
∙충청감사 정세규,충청병사 이의배,7천 명의 근왕군을 인솔,험천현까지 진출
∙청군 양굴리(楊古利)의 7천 명과 전투
∙조선군 패퇴,수원-공주 방향으로 철수
전라도
근왕군
광교산
(남한산성 남방 40km)
∙전라감사 이시방,전라병사 김준용,8천 명의 근왕군으로 경기도 광교산 진출
∙험천현에서 조선군을 격파한 양굴리의 7천 명과 전투
∙2일간 전투,조선군의 승리,청장 양굴리 전사 및 패퇴
경상도
근왕군
쌍령
(남한산성 동남방10km)
∙경상감사 심연,좌병사 허완,우병사 민영의 8천 명 근왕군이 대구-문경-여주 이동
∙허완과 민영 등 선봉대 2천 명이 쌍령 진출
∙청군 6천 명과 전투,조선군 궤멸,좌․우병사 전사
∙본대의 심연은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철수
출처:육군 군사연구소,한국군사사 제7권,2011년,302~309쪽.연구자가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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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청 태종은 인조의 출성항복을 압박하기 위하여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에게 조선 국왕의 왕자, 종실, 백관 및 그 가족들이 대부분 피난해 있는 강화도를 조기에 공략하도록 임무를 주었다.26)


   1637년 1월 내내 각 도에서 올라 온 조선 근왕군은 남한산성에 진입하기 위하여 검단산, 토산, 김화, 광교산 등에서 청군과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근왕군은 김화전투와 광교산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하기도 하였으나 전력이 미약하여 남한산성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대부분의 근왕군은 전투에서 패하고 전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철수하였다.


   특히 토산전투에서 패배한 도원수 김자점군은 경기도 미원으로 이동하여 여기서 한성을 지키다가 철수한 유도대장 심기원군 2천명, 함경도 근왕군 7천 명, 강원도 근왕군 6천 명 등 도합 1만 7천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청군의 동태를 관망하였다.
각 도의 근왕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의 외곽에 포진하여 전력을 정비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수세적인 태세를 유지하였다.



다. 강화회담과 전쟁의 종결



   조선 조정 내에서 김류와 최명길 등 주화론자들과 김상헌과 정온 등 척화론자 사이의 논란도 1637년 2월 청군의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고 조선 국왕의 비빈과 왕자, 종실, 백관 및 그 가족들이 포로가 되어 삼전도의 청 태종 본진에 억류되자 강화협상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청군도 일단 산성 공략과 같은 적극적인 공세행동은 자제하고 조선국왕의 출성항복을 계속 요구하였다. 


26)『淸太宗實錄』권28,崇德,2년 1월,甲辰.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65



강화협상의 쟁점은 항복을 둘러 싼 국서의 형식과 의례절차에 집중되어 있었다.27)


   청군이 산성 공략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명군의 배후위협이 여러 가지 요인 중의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의 발발에 따라 명 조정에서는 조선의 상황을 살피고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며, 2월 초에 명군 약 7만 명 규모를 동원하여 청의 배후를 요격하는 부대기동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28)


   조선국왕 인조는 출성항복만은 피하려고 강화협상을 계속 이어간 반면에 청 태종은 인조의 자진 출성항복만 면제해 준다면 더 많은 실리를 획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관철시켰다.


   2월 21일 인조의 출성 항복을 수락한다는 국서가 청군 측에 발송되었고 그 다음날 출성할 경우 인조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청 태종의 국서가 도착하였다. 청의 국서에는 종전 이후 조선의 의무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략 12가지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핵심적인 내용은


째 조선과 명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청과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을 것,

둘째 명에 대한 원정 시 군대를 보낼 것,
셋째 청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들과 조선에 있는 여진출신 향화인(向化人)을 송환할 것,

넷째 재무장이나 군비 강화책을 금지할 것,

다섯째, 해마다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었다.29)


   청은 조선을 직접 지배할 수도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대청체제를 수립하고 청 태종이 이제 더 이상 동북 변방에 위치한 ‘소국의 한(汗)’이 아니라 滿·蒙·漢을 아우르는 다민족국가의 황제임을 드러내는 의식행사를 대내외에 천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7)허태구,『병자호란의 정치·군사사적 연구』,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115-117쪽.
28)김영숙,『조천록을 통해 본 명청교체기 요동정세와 조명관계』,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166-167쪽.
29)허태구,“병자호란 강화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조선시대사학보,2010.78~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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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제국 통합의 상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1637년 2월 24일 조선국왕 인조를 출성항복하게 하여 삼전도에서 항례(降禮)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4.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분석


   17세기 조선과 청의 군사지도자들이 구상하고 수행하였던 군사전략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사항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군사전략의 개념적 접근방식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많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군사전략을 구성하는 기본요소 또는 세 지주라고 공감하는 군사전략 목, 군사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전략개념의 수립 그리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군사자원의 사용 외에도 그 당시에는 대명의리(對明義理)와 같은 예(禮), 명분(名分)의 문제가 군사전략 수립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30)


   그러나 현대의 군사이론가들이 2,500년 전에 저술된 손자병법의 군사사상과 군사전략적 함의를 찾아서 미래 전략과 전술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의 본질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군사적 상식이다.31)
이를 진리라고 이해한다면 약 400년 전의 병자호란에서의 군사전략을 오늘날의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본 논문에서는 당시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 기획가들이 수립하고 시행하였던 군사전략이 국가목표와 


30)이종호,“군사전략”,『군사학개론』,군사학연구회 편저(서울:플래닛미디어,2014), 192~194쪽.
31)이종호,“손자병법의 전쟁전략 연구”,『전쟁철학』,이종호 공저(서울:백산서당, 2009),110쪽.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67



국방목표 달성에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는가, 그리고 가용한 자원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었는가, 또 선정한 군사전략이 도덕적 측면과 비용 대 효과측면에서 허용될 수 있었는가?라는 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사항들을 확인하는 요소들이 소위 군사전략의 구비조건이다. 이 구비조건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요소에는 크게 적합성, 달성 가능성, 용납성 등 세 가지가 있다.32)



가. 적합성(Adaptability)

   적합성이란 군사전략이 국가목표와 국방목표에 부합하며, 기여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것은 합목적성이 주관심사이며, 군사적으로 최선의 전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목표와 국방목표에 공헌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조선군은 청의 팔기군과 사르후전투33), 정묘호란 등에서 실전을 통하여 그 능력과 위력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병과 화기 중심의 조선군이 야지에서 팔기군의 대규모 기병과 일전을 겨루는 것은 위험성이 높다는 것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을 취하여 청군을 수도권까지 축차적으로 저지하면서 유인한 후에 남한산성과 강화도, 수도 한성이 서로 연계하여 청군을 최대한 격멸하면서 시간을 획득하고, 각도에서 근왕군이 집결하면 결전을 시행한다는 개념은 합리적인 전략으로 보인다.

32)황성칠,『군사전략론』(경기:한국학술정보,2013), 269~270쪽.
33)사르후전투는 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의 지휘로 만주 팔기군과 사르후에서 격돌한 전투이다.이곳에서 명군이 참패함으로써 요동일대가 후금의 누루하치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며,조선군 1만 명은 이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잔여병력이 누루하치에게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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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조선의 국가 및 국방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적 중점이 왕실의 보존문제인데 이 당시가 되면 강화도라는 곳이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이미 명의 수군장수 공유덕과 경충명이 전선 185척을 이끌고 청에 귀순한 이후라서 청군은 해군력 면에서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조선 원정작전 간 청 태종은 이 해군 전력을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지게(阿濟格)에게 지휘하도록 하여 우장(牛莊) 일대에서 명군이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차단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가도에 위치한 명군이나 강화도를 요해처로 하여 이동하려는 조선 왕실도 이러한 청군의 능력을 간과했으므로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청군은 명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배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군과 가도의 명군 전력에 대해서 기동력이 우세한 팔기군을 기반으로 하여 내선작전의 이점을 활용한 선제적 공세전략을 수행하였다. 우선 1636년 6월 아지게(阿濟格)에게 약 8만의 병력을 주어 장성지역으로 우회하여 화북지역을 침공하게 함으로써 명의 군사력을 수세적인 태세에 몰리게 하였으며, 이때 획득한 물자와 인력을 활용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조선 침공의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선 조선국왕이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한 후에 모든 가용전력을 수도 한성일대에 집중하여 조선군을 포위 격멸하는 단기결전 개념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조선국왕과 조선군 주력이 남한산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장기 농성을 한다면 압록강으로부터 한성까지의 병참선 상에 온전하게 전개되어 있는 조선군과 지방에서 올라온 근왕군에 의해 청군은 후방이 위협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명전선에서도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대단히 우려할 만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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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달성가능성(Feasibility)
   달성 가능성이란 군사전략개념 시행으로 목표달성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 개념이 가용자원 및 능력(정신, 물질적)으로 시행이 가능한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가용자원은 현존 및 잠재 군사력 그리고 동맹국의 군사력도 포함된다.


   조선군이 가용병력과 전투력 면에서 청군에 상대적으로 열세라는 것을 군사지도자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야전에서의 조기 결전을 회피하고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청군이 수도권까지 진출하는 시간을 지연시켜야 하는데 대규모 기병집단이 산성공략을 포기하고 도로 위주로 신속히 남하한다면 이를 저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실제 전장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근왕군이 수도권 일대에 집결할 때까지 강화도, 남한산성, 수도 한성이 서로 연계하여 수도권 일대에서 적 주력을 최대한 저지해야 하는데 이 전략을 실행하기에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 즉 수도 한성은 성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제한된 병력 밖에 없는 중앙군으로서는 방어임무 수행이 곤란하고, 청군의 대규모 기동집단이 육로와 해로에서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포위 공격한다면 각개격파당할 수 있다.


   또한 청군으로서는 국왕 인조의 군대를 포위하고만 있어도 각도의 근왕군이 이동을 해오기 때문에 계획된 장소에서 결정적 시기에 조선군을 차례로 타격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전쟁 후반부에 가서는 근왕군은 모두 저지가 되고 국왕 인조만이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의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청군은 주 전장이 대명작전이었고 조선원정은 보조 전장이었다. 따라서 우수한 기동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내선작전의 이점을 최대로 활용한 단기결전으로 전쟁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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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군의 수뇌부는 정묘호란에서의 경험도 있어서 조선군의 전략을 이미 꿰뚫고 있었고 공유덕과 경충명의 수군으로 인하여 강력한 수군전력도 확보된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전략 수립에 훨씬 많은 융통성이 있었다. 또한 1636년 6월 화북 침공의 성공적인 결과에 따라 전쟁 소요물자까지 충분히 확보하였으며, 동맹군인 몽골 8기도 분편됨에 따라 추가적인 기동부대가 가용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청군은 대명전선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배cl하고 건국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원정부대를 편성함으로써 그들이 계획한 단기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다. 용납성(Acceptability)

   용납성이란 군사전략개념이 국내적·국제적으로 용납될 것인가를 검토하는 것으로 크게 도덕적 측면과 비용 대 효과 측면으로 구분하여 검토한다. 먼저 도덕적 측면은 국내외적으로 여론이 용납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비용 대 효과 측면은 여러 가지 전략개념안 중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군은 병력과 전투력 면에서 청군에 비하여 결정적인 열세에 있었으며, 요동지역이 청군에게 실함된 이후 명과의 교역, 군사적 지원 등 동맹군과의 협력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을 도와서 나라를 소생시켜 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의식과 중화문화권의 일익을 조선이 담당한다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등 국가적 명분 때문에 군사적 모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과 같은 국가적 시련기를 거치면서 인구, 농경, 산업 등이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방의 대규모 기병위주의 군사력과 대치할 정도의 군대를 편성하고 주요 방어 거점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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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재정 형편상 불가능한 사항이었다. 조선의 군사지도자들은 현실적으로 실현시키기에는 대단히 곤란한 문제에 국가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청 태종의 입장에서 조선에 대한 침공은 대명우위의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매우 중대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청군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현실에 있었다. 왜냐하면 계획했던 것보다 급격하게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몽골 및 북방의 제부마저도 병합함에 따라 이들의 경제적 문제도 해결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 태종은 1634년 몽골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원정작전을 실시하기 전에 화북지방과 산해관 일대에 대한 침공작전을 주도하여 수많은 인축과 재물을 노획하였다. 조선에 대한 원정작전을 시행하기 전에도 그해 6월 화북지방에 대한 침공작전을 수행하여 전쟁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청 내부에서 급격하게 확장되는 경제적 소요를 충당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선 침공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다. 병자호란의 전쟁양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면별로 전투는 단시간 내에 종결되고 대부분의 시간은 청군과 몽골군의 인축과 재물의 노획작전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제적, 인륜적 관점에서는 비난 받을 수 있겠으나 청군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라. 구비조건에 의한 朝·淸 군사전략의 상호 비교분석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을 구비조건으로 비교분석하면 다음의〈표 3>과 같이 도표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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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朝·淸 군사전략의 구비조건 비교분석

구 분 청(淸) 조선(朝鮮)

적합성
∙대명작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후의 위협 제거 필요
∙내선작전의 이점 최대한 활용
∙강력한 수군 확보로 육·해군 작전협력 및 전략운용의 융통성 확대
∙그러나 조선군 장기항전 시 위험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으로 청군 진출 지연 제한
∙조선 왕실과 수뇌부의 안전유지가 곤란

∙청의 수군전력 확보에 따라 강화도가 더 이상 요해처 제한

달성가능성
∙단기결전이 가능한 기동부대 편성 및 우수한 전투원 확보
∙사전 명의 화북지역 침공을 통해 대명전선을 안정시키고 전쟁수행물자를 충분히 확보
∙선봉부대의 능력으로 조선국왕의 강화도 이동 차단 가능
∙남한산성,수도 한성,강화도가 연계성 있는 방어작전 제한
∙청군이 신속히 강화도 진입로 차단시 국왕 인조 파천 불가

∙청군에 비해 근왕군의 전력이 상대적 열세,통합된 지휘체제 불비 그러나 장기전 전환 가능

용납성
∙청 태종이 滿·蒙·漢을 통합한 다민족국가의 황제로 선포
∙국가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경제적 문제 해소의 필요성 대두, 인축과 재물 노획작전 중점적 수행
∙군의 전력 열세,동맹군 지원 불가상황에서 명분론에 따른 군사적 모험 감행
∙청의 우세한 전력을 상대할 수 있는 군사력 건설,방어거점 수축을 위한 재정적 지원 제한


   조선군과 청군의 군사전략개념을 구비조건 측면에서 비교분석해 볼 때 가용전력과 능력 면에서 청군은 대체로 타당성 있는 군사전략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략개념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초래되어 전략기획가들이 구상했던 단기결전 수행이 어렵게 되었고 강화협상과 조선국왕 인조의 출성항복으로 전쟁승리를 대신하였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례(降禮)를 통해 滿·蒙·漢을 아우르는 다민족국가의 황제라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극적인 연출을 할 수 있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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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군은 상대적 전력의 열세 속에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이 실패하자 남한산성으로 계획을 조정하였다. 수도 한성을 비롯하여 국토가 청군에 의해 유린당했지만 남한산성의 방어준비의 견고함과 근왕군의 계속적인 산성 진입 노력은 오히려 청군에게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산성위주 수세적 방어전략은 대청전쟁에서 여러 가지 제한사항을 노출했다.



5. 전쟁의 함의와 결론


   병자호란은 지금까지 삼전도에서의 패배의식만이 주로 부각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역사발전 측면에서 이 사건을 들여다보면 이 단계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35년간의 전란기를 마무리하고 조선후기 근세사회로 발전해 가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17세기 명·청 교체기라는 큰 변동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병자호란의 결과는 청, 몽고, 조선이 동맹관계로 결합되어 당시의 패권국인 명과 대치하는 양극 관계로 국제질서를 변환시켰다.


   역사적 대변동 시기에 약소국 조선이 군사전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지금까지는 이렇게 중요한 전쟁에 대한 연구가 주로 정치, 경제 및 사회사의 시각에서 연구되었을 뿐 정작 중요한 부분인 군사사적 접근은 미흡했다고 보인다.


34)한명기,전게서,2009,165쪽.한명기는 여기에서 청 태종이 삼전도에서 ‘성하지맹’을 맺은 것은 끝까지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조선을 신속시킴으로써 온전한 의미에서 만·몽·한을 아우르는 ‘황제’를 표방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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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양국의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본 연구를 진행해 본 결과 병자호란에서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기획가들은 당시의 안보환경 속에서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타당성 있는 군사전략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투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조선군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청군에 비해 매우 열세한 군사력 그리고 제한된 국가적 자원과 수단을 고려하여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을 수립하여 시행하였는데 이는 대규모 기병집단의 청군에 대항하여 여러 가지 대안 중에서 조선군이 어쩔 수 없이 채택하게 된 전략개념이었다.


   조선군이 채택했던 전략개념이 청군과 대비하여 적절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모했는지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서 클라우제비츠쟁론에서 주장하였듯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 마찰 그리고 우연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35)
병자호란 초기의 전쟁양상은 조선과 청의 군사지도자들이 사전에 예측한 대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1637년 1월과 2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청군과 조선군의 2중 포위의 형세와 전쟁양상은 그 당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물론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의 입장에 처해진 인조와 조선군 수뇌부가 가장 많은 고통에 직면했겠으나 강력한 요새로 변해버린 남한산성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던 청군도 혹한 속에서 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또한 청군은 각도에서 올라 온 근왕군을 차례대로 각개격파 했으나 완전히 격멸할 수는 없었으며, 자신들도 양굴리 등 고위 군사지도자의 전사와 


35)Carlvon Clausewitz,Edited and Translated by Michael Howard and Peter Paret 8th.ed,On War(Princeton,New Jersey: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pp.156-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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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들의 피해가 막심한 반면에 청군의 외곽에 전개된 조선의 근왕군은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에 불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군과의 장기전과 불필요한 전투력의 소모는 차후 대명전역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군사력의 상대적 불균형으로 인하여 이미 전투 자체의 판정은 끝난 상황이었지만 조선군과 청군의 대치가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청이 조선을 직접 지배하려고 시도할 수는 없었으며,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협상을 조기에 타결한 후에 주전장인 대명전역으로 주 전력을 전환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군은 열세한 전력으로 청군에 대응하기 위해 차선책을 채택했으나 전쟁의 상호과정 속에서 피아 쌍방 간의 2중 포위전의 형태가 조성되었다. 변화된 상황을 잘 이용함으로써 조선은 전쟁에서는 패배하였으나 국가체제는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병자호란이 종결되고 약 400년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동아시아의 지역 국제질서는 또다시 예측 불허의 격랑 속으로 빨려가고 있다. 미국의 패권이 아직 건재하다고 하지만 G2로 격상된 중국은 지나간 한 세기를 수모와 치욕의 역사로 치부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동아시아의 질서를 확립하려고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의 순환론적인 현실 속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운명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역사로부터 지혜를 빌려야 할 때이다.



(원고투고일: 2014. 1. 1, 심사수정일: 2014. 2. 11, 게재확정일: 2014. 2. 19)
주제어 :동아시아 국제질서, 병자호란, 조선, 청, 군사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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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omparative Study on the Causes of ByeongjaHoran and the Military Strategies ofJ oseon and Qing Dynasties
Lee, Jong-ho


   This is the study on the implications for Korea in relation to the current changes happening in the U.S. and the economic-political developments of modernized China through the comparative analysis of military strategies of Joseon and Qing Dynasties focused on the ‘Byeongja Horan’(the Qing’s invasion into the Joseon territory)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from Ming dynasty to Qing dynasty.


   The international relationships in the region of East Asia had gone through a lot of dramatic changes. Within the East Asian international order in that period, all the countries in the region including Joseon, Ming, Mongol, Japan and the Manchurians of Qing faced the decisive turning point in terms of each nations’s status change. That meaned the transition from complicated triangle international relationships which had been formed among one group of Ming, Qing and Mogol, another group of Qing, Ming and Joseon, and the third group relationship of Qing, Joseon and Mogol, had been changed in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lliance of Qing, Mongol and Joseon, and relation against Ming dynasty.


   As the power struggle between Ming and Qing dynasties for taking initiative in the region of East Asia grew intense, the four countries such as Ming, Qing, Joseon and Mongol had tried to secure their countries' survival. Moreover, they made a lot of efforts to secure their own sovereignty and the hegemony of the area. As the Qing established the political status firmly as imperial country, the toadyism toward Qing dynasty instead of Ming dynasty had followed and continued until about 260 years later, the year of 1894 when Qing-Japan war brok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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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 this study, some moves and actions taken by Joseon dynasty as well as several missteps committed by the Joseon military leadership who took them during the war, are analyzed. In addition, the characteristics of war at that time are also brought up and some impacts to Korea today in terms of both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nditions are examined from the certain related theses that were already written.


   We also research and annalize the military strategies of Joseon dynasty and Qing dynasty comparably and also assess whether these two countries’ strategies are appropriate or not in consideration of international environments, military power and national resources during the period of ‘Byeongja Horan’, finally try to draw the implications and lessons learned to this day.


KeyWords:East asia international order,ByeongjaHoran,Joseon,Qing,Military strategy.



 






[중국사]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청나라' 의 입장 - 전쟁은 오직 조선 때문이 일어난 것인가?| [신불해] 최강의 군벌

신불해 | 조회 1225 |추천 1 |
2013.06.08. 16:14


 


    사적인 사건은 항상 여러 각도에서 살펴봐야 하고, 개중에 '전쟁' 같은 거대한 흐름의 이야기는 이에 얽힌 속사정이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한 전쟁은 '공격하는 자' 과 '공격 당하는 자' 이 있기 때문에, 그 서로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그 동기와 전개 과정을 모두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병자호란의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모든 전쟁은 공격하는 국가와 공격 당하는 국가, 양측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국내 역사에 있어 유명한 전쟁들 ─ 이를테면 고수전쟁, 고당전쟁, 임진왜란 등의 전쟁은 모두 양측의 입장이 고려되며, "왜 전쟁이 일어났나" 라는 질문에 당시 국내는 물론이고 상대국의 입장도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아닙니다. 물론 전문적인 학술 논문이라면 다른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인터넷 상에서 병자호란의 동기에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조선 중심적인 이야기입니다. 


   간단한 이야기 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병자호란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때 등장하는 것은 광해군, 인조, 재조지은, 중립외교 등 입니다. 즉, "조선이 이렇게 하였기에" 전쟁이 일어났고, 만일 "조선이 이렇게 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입니다. 소위 말해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조선이 개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면, 정작 공격하는 쪽은 청나라고 공격을 당한 쪽은 조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쟁의 원인에 있어 주체적인 입장은 청이라기보다 조선에 있게 됩니다. 반면에 청나라는 조선이 내린 결정에 끌려다니는, 이상한 모습이 연출됩니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이렇습니다. 전쟁의 원인에 있어 중요하게 살펴야 할 요소는 침략국과 침략을 당하는 나라 양측에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일반적인 경우라면 침략국을 더 살펴봐야 합니다. 인터넷 상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떡밥" 이 언급될 때는 그 가장 중요한 침략국의 사정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침략을 당하는 나라' 의 입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의 "침략국" 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조선사' 가 아닌 '청사' 의 흐름을 살피는 입장으로 이 전쟁을 본다면, 중요한 문제는 조선의 외교정책 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요소입니다. 


   보통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기에는, 만주에서 거대하게 세력을 일군 청나라는 당시에 이미 천하의 대세를 결정지은 셈이나 다름없고, 병자호란의 시점에 이르면 이미 청나라가 중국을 근시일 내에 지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릅니다.



   요동에서 명나라의 군사력이 완전히 괴멸되는 시기는 1641년에 이르러서 입니다. 이때의 싸움에서 명나라는 홍승주가 이끄는 10만 이상의 군대가 괴멸 당하고, 산해관에 남아있는 오삼계의 군단을 제외하고는 요동의 모든 병력이 일소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는 1636년까지는 아직 명나라의 군사력이 요동에서 건재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만주족 정권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보통 만주족에 대해 막연히 '유목민족' 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여진 ─ 만주족은 '수렵민족' 에 가깝습니다. 수렵으로 얻은 물건을 교역을 통해 팔고 필요한 물품을 사서 생활을 하는게 중요했는데, 만주 정권의 누르하치가 단시일 내에 거대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요동의 제왕이었던 이성량이 뒷배를 봐주며 무순, 청하, 관전, 애양의 4개 관에서 맹렬하게 교역을 할 수 있었던 점도 있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후금 정권명나라와 적대하게 되면서 이러한 대중국 교역은 거의 끊기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당장 만주 정권에게 닥쳐오는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누르하치 시절부터  농업 경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당대에는 전쟁이 계속 되었던데다가, 여진과 한인의 공존 문제도 있고 수도도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겨가는 등 여러모로 불확실한 면이 많아 농경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1625년 이래로 요동 한인 인구의 개편, 몽고의 귀속에 따른 대규모 인구 증가, 더구나 기상 악화까지 더해 흉작이 겹치면서 후금의 경제상황은 위풍당당한 군사적 면모와는 달리 꽤 곪아가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관련 기록 중에는 이런 언급도 있습니다.


 "나라가 굶주려 곡식 한 승(升)에 은 8량 값이나 되었다. 이 나라에 은은 많았으나 무역할 곳이 없어서 은의 값은 싸지고 여러가지 재화의 양은 비싸졌다. 좋은 말 한 필에 은 300량, 좋은 소 한 필에 은 100량, 무늬있는 비단 한 필에 은 150량, 도둑이 만연하여 사람을 죽이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영원성 전투까지 막 실패한 참이었기에,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太宗文皇帝實錄 권2 에서는, 1627년 즉위 직후 홍타이지원숭환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막대한 양의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여기까진 흔한 으름장으로 여길만하나 몇달 후 곧 액수를 반으로까지 줄이면서 또다시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의 요구는 금 십만량, 은 백만량, 비단 백만필을 주고,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는 금 일만량, 은 십만량, 비단 10만필 등을 바칠 것을 요구했으나, 이후 이런 소리를 공연히 덧붙였던 것입니다.



 "귀국이 (예물을 보내기에)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처음 화의를 맺는 예로서(예물 액수의) 반을 덜어도 됩니다."


당대 혼란에 대한 학술 논문의 묘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생략)

人蔘과 疆域 : 后 金 - 淸의 강역 인식과 대외 관계의 변화 - 김선민 中



    다음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 관련된 소위 신청사(新淸史) 학파로 분류되는 외국 학자의 언급을 일부분 보겠습니다.


   "누르하치가 국가 통합과 궁극적으로 명의 정복을 위해 전쟁 기계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자마자, 물류상의 병목현상은 극심해진다. 그가 경쟁하던 씨족 지도자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기' 로 통합했을 때, 그는 이 군대에 대한 보급 책임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쉽게 새로운 보급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인접한 조선과 랴오둥의 민족들이었다."


(중략)


   "그러나 1621년의 랴우동 정복으로 사실상 만주족과 한인 사이의 갈등이 더 극심해지고, 더 심각한 생존 위기로 어이졌다. 불평등한 대우에 항거한 한인들의 반란도 식량 공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만주족은 이웃한 한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는지 걱정하고 돼지고기, 소금, 가지, 닭 등의 생산물을 먹을 때 조심해야 했다 …… 만주족은 1621년부터 162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먹을 곡식이 없어서 곡식을 숨기려는 한인들에게서 짜내야만 했고, 긴급구호 방편으로 전면적인 식량 배급을 시행해야 했다."


(중략)


   "경제적 압박 아래에서 만주족은 자기네 가구의 한인을 착취했고, 이들을 노예로 다루면서 재산을 탈취했다. 1623년 랴오둥의 한인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건물에 불을 놓고 만주족 이웃을 독살하고 창고에서 곡물을 훔쳤다."


(중략)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 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중략)


   "1627년의 식량 위기는 가장 격심했는데, 곡물값이 만주 신(1.8석)당 여덟 냥, 즉 1623년의 여덞 배로 올랐고, 사람을 잡아먹고 강도질을 한다는 흉문이 돌았다. 새로 항복한 백성들에게 줄 양식이 없었고 곡식 창고는 비워 있었다. 게다가 새로 이주해온 한인들에게 줄 땅도 없었다.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부유한 지주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라고 권고해도 대체로 우이독경이었으며, 만주족은 그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저가에 곡식을 팔라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중략)


   "그러나 약해지는 그의 군대가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 중국의 사령관 오삼계에게 공격 받았고, 그는 오삼계의 군대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는 단지 1644년의 행운으로 구원을 받았다. …… 그때 심각한 물자 공급의 제약으로 만주 국가는 거의 무너질 뻔했다."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中




   이러한 언급을 보면, 당시 만주족 정권의 경제적 위기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의 승리 이후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한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게중에서도 온갖 자질구레할 정도의 생필품의 목록들을 일일히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조선에 요구했던 점이, 그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점으로도 보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 입니다. 그런데 여러 매체의 언급을 보면 '내부의 비판' 에 치중한 나머지(게다가 가장 최악의 접근법으로, 현실 정치를 어거지로 당대에 맞춰 이에 맞게 입맛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조선이 ‘자초한 전쟁’ 이라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   쟁은 서로의 상이한 입장이 충돌하여 발생하는 것이니, 한쪽의 입장만을 전제하고 본다면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조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 한명기

김한규 한중관계사 2권, 719~720쪽

人蔘과 疆域 : 后 金 - 淸의 강역 인식과 대외 관계의 변화 - 김선민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 피터 퍼듀

청(淸)과의 외교실상과 병자호란 ─ 오수창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청나라' 의 입장 - 전쟁은 오직...

201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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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자료
樂民(장달수)|조회 212|추천 0|2017.10.13. 06:36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박 양 리
(동의대학교)


【초록】본고는 병자호란의 기억이 야담 속에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를 역사적 트라우마와 그 서사적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병자호란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조선 사회에 정신적 상흔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트라우마와 다른, 역사적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위해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자연스레 야담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병자호란을 예견하거나, 막고자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담 속에서 이인들의 예견이나 방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은 발발한다. 즉, 병자호란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므로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는 운명론적 인식과 체념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전의 사회질서를 다시금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이념을 강조하고 절의의 가치를 선양하고자 하는 서사적 대응은 주로 열녀담, 절의담 등을 통해 드러난다. 역사적 서술과 달리 야담에서 편찬자들은 허구적인 이야기를 통해 절의를 강조하고 트라우마 극복을 시도하였다. 마지막으로,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B5A07043274)

2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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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18세기 중반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병자호란 및 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야담 속에도 드러난다. 청과 청나라 황제에 대한 야사와 북벌의 허상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 병자호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역사적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서사적 대응으로서의 나름의 모색이 야담 속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어 : 야담, 병자호란, 병자호란의 기억, 역사적 트라우마, 중화주의, 북벌론



1. 서론


   17세기 초 발생한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두 달 남짓의 기간 동안 벌어진 전쟁에 대한 기억은 오랫동안 조선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본고는 이러한 병자호란의 기억이 야담 속에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를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와 극복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병자호란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史實)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연구자의 자의적 해석을 지양하고 객관적으로 공명정대하게 기록되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역사로서의 병자호란이 아닌, 개개인 혹은 집단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기억으로서의 병자호란에 주목하였다.

   병자호란은 6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에 비하면 단기간에 종결되었으며, 전쟁의 공간도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서울‧경기 지역으로 국한되었기에 그 물질적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승리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던 임진왜란과 달리 왕이 직접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신하를 자처하는 패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정신적 충격은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자호란의 패배는 곧 중세적 질서의 전복을 의미했다.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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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로 대변되던 명의 멸망과 오랑캐인 청의 중원지라는 믿기 힘든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에는 전쟁의 원인
을 찾으려는 책임 논쟁과 잡혀간 백성들의 속환 등을 둘러싼 제반 문제가 중심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곧 흐트러진 중화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신적‧사상적 차원에서 대응이 사회 문화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변화는 문학에도 영향을 끼쳐, 실기, 전,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속에 전란의 체험과 기억이 형상화되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도 적지 않게 제출되었다.1)


   야담의 경우, 지금까지 병자호란 관련 연구는 주로 북벌론과 연계되어 이루어졌다.2)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그 범위를 확장시켜 병자호란 전반에 대한 기억3)을 담고 있는 야담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야담은 여항에 구전되던 이야기,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일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의론이나 시화 등 여러 종류의 단형 서사들을 채록, 편집한 것으로, 결국 야담의 편찬자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수록한 것이다. 

?계서야담? 서문“야담은 그가 보고 들은 것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라는 기록을 보면, 결국 야담집에 수록된 이야기는 편찬자의 의식에 따라 여과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실기, 전, 소설의 주요한 연구결과는 박양리(2015), ?병자호란의 기억, 그 서사적 형상과 의미?,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6쪽 참조.
2) 야담에 나타난 북벌론에 관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명학(1990), 「북벌론과 비판의식-관련 야담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25,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최광석
(1995), 「북벌계획의 설화화와 그 의미」, ?국어교육연구?27, 경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김수현(2013), 「야담과 시대정신」, ?영남학? 23,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3)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6일 청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가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되어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 행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둘러싼 기억의 흐름을 제대로 살피려면
훨씬 이전의 일은 물론 이후 조선 조정에서 발생한 정치 사상적 담론까지 아울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병자호란 자체는 짧은 기간 벌어진 전쟁이지만, 그 이전에 벌어진 하전투정묘호란이 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효종 즉위 후 조정 안팎에서 벌어진 북벌과 관련한 여러 논란 역시 병자호란의 기억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없다.

   더불어 이 사건들은 ‘오랑캐(夷)에게 참혹하게 패배한 치욕과 분노’라는 가장 중요한 정서적 동질성을 병자호란과 공유하고 있다. (박양리, 앞의 논문, 13쪽 참조)

4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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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이야기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에게 들은 것일 때도 있고, 가문의 사람이나 지인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은 물론 여러 문헌 등에서 읽은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야담집에는 시정세태와 관련된 민중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사대부 가문과 사대부 사회에서 형성된 이야기들이 상당수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야담 속에 나타난 병자호란 관련 기억을 살펴보는 것은, 조선 후기 시정은 물론 사대부 사회에서 병자호란을 기억하는 방식, 나아가 병자호란의 패배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그 서사적 대응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먼저 병자호란이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후대에까지 정신적 상처와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병자호란이 유발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 치유와 극복를 모색하는 담론과 서사적 대응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야담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천예록?,
?박소촌화?, ?청성잡기?, ?학산한언?, ?송천필담?, ?동패락송?, ?계서야담?, ?기문총화?, ?청구야담?4)을 대상으로 한다.4) 


   본고에서는 시기적으로 병자호란 이후에 등장한 야담집을 주 텍스트로 삼았다. 

많은 작품들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나, 필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주로 대표적인 야담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 가운데 국역된 야담집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또 저자 및 이본에 대한 검토는 기존의 연구자들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텍스트로 사용한 저서는 다음과 같다. 


임방, 김동욱·최상은 역(2003), ?천예록?, 명문당; 

이동윤, ?박소촌화?天‧地‧人(후손가장본); 

성대중, 김종태 외 역(2006), ?국역 청성잡기?, 민족문화추진회;

신돈복, 김동욱 역(2006), ?국역 학산한언? 1‧2, 보고사;

심재, 신익철 외 역(2009), ?감역주 송천필담?1‧2‧3, 보고사; 

노명흠, 김동욱 역(2012), ?국역 동패락송?, 보고사; 

희준, 유화수·이은숙 역(2003), ?계서야담?, 국학자료원; 

김동욱 역(2008), ?국역 기문총?상‧중‧하, 아세아문화사; 

이월영·시귀선 역(1995), ?청구야담?, 한국문화사.

 

  이후 작품 원문 및 해석은 위의 책을 인용하되, 텍스트를 인용할 경우 책명과 쪽수만 밝힌다.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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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


   주지하다시피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왔다. 이는 비단 국토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물질적‧육체적 피해에 그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사대부 신료는 물론 백성들까지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절을 하며 신하를 자처하는 치욕적 패배의 순간을 목도했다는 것에 있다. 더 나아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국가이자 중화질서의 수호자라고 굳건히 믿고 의지하던 명이 청에 멸망했다는 사실은 큰 충격과 패배감을 조선인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러한 병자호란의 경험은 조선인들에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상흔, 다시 말해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당사자들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트라우마와 다른 성격을 지닌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150여년이 지난 정조 24년(1800년) 강화부 유수 이경은 왕에게 체직(遞職)상소를 올린다.
강화부 유수 이경일이 상소하기를, “옛날 병자년과 정축년의 병란 당시 신의 온 가족이 강도(江都)로 피난해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신의 고조모가 갑자기 적병을 만나 칼에 찔려 돌아가셨는데, 애통하고 분한 자손의 마음으로서는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쪽 나라와 서로 관계되는 일에 혐의쩍어 간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화도 바다의 뱃길을 차마 건너지 못하겠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머무르는 것은 여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신의 사적인 의리로서는 실로 부임하기가 어렵습니다.”하니, 체직을 허락하였다.5)

   이경일은 그의 고조모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피난해 들어갔다가 적병을 만나 칼에 찔려 죽었다면서,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애통하고 분한 마음으로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저쪽 나라와 관계되는 일에 간섭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강화도에도 차마 가지 못하겠다고 한다.


5)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1800) 6월 정사.

6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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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일은 병자호란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가장 참혹한 공간이었던 강화도를 기억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기억으로 인해서 청과 관련된 일은 물론 강화도로 가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기에, 왕명조차 거부한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후대까지 기억으로 전승되고, 그것이 150년 이후의 사람에게도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역사적 트라우마’라고 한다. 역사적 트라마는 일반적인 트라우마와 달리 아무런 체험적 관련성이 없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며, 이들 비경험자는 세대를 넘어 후세대까지 연장되면서 세대를 걸쳐 유전된다. 또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조선사회에 오랫동안 역사적 트라우마로 작동했음은 자명하다.

   한편, 트라우마가 발생하면 그것에 대하여 극복과 치유를 모색하는 것이당연한 수순이다. 
이때 병자호란 트라우마는 그 원인이 되는 충격, 즉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단순히 물리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과 청의 교체, 중화질서의 붕괴 등 정치 사회적 문제와 사상과 이념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불러일으켰기에, 그 극복과 치유를 위한 대응 담론 역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병자호란 직후의 대응담론은 복수설치(復讐雪
恥)북벌론(北伐論)으로 시작되었다. 

   전쟁 직후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귀국효종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여 우리의 힘으로 어그러진 중화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이 죽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대응 방식은 점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청의 중국 대륙의 지배는 공고화되었으며, 북벌론 역시 오히려 당쟁의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했다.7) 


6) 김종곤(2013), 「‘역사적 트라우마’개념의 재구성」, ?시대와 철학? 제24권 4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1~42쪽 참조.

7) 허태용(2010), 「17‧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파의 대두」, ?대동문화연구? 69집,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참조.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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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병자호란 트라우마의 대응 담론도 점차화하기 시작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송시열과 서인들은 효종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북벌의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국가적 사업을 벌였는데 이와 함께 복수론과 북벌론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이념적인 문제로 바뀌어갔다.8) 병자호란 트라우마의 기저에는 단순히 조선이 오랑캐에게 침범을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중화질서로 대변되는 명이 청에게 멸망했다는 역사적 현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초기 북벌을 주장했던 이들은 청을 몰아내는 것과 동시에 다시금 중국 대륙에 명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명의 유민들이 세운 남명(南明)이 멸망하고 청이 중화의 주인임을 자처하며 이러한 대응은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중화는 오랑캐가 아닌 우리가 바로 세워야 한다는 담론이
힘을 얻는다. 존주대의론에 입각하여 명이 멸망한 상황에서 중화를 계승하는 것은 천하에 우리 밖에 없다는 ‘중화계승의식(中華繼承意識)’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청을 몰아내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 이념적으로 그들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태도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공고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보수적인 대응방식에 반발하여 전혀 다른 방식의 대응담론도 등장한다.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적 관점에서 번성하고 있는 청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들에게서 부국강병의 방도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홍대용,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 지식인들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는 역사적 과정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명의 멸망은 청이 아닌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명을 위해서 청을 물리칠 필요성은 없는 셈이다. 나아가 그들이 보여주는 번성의 바탕에는 오랑캐의 문물이 아닌 중화의 문물이 자리잡고 있으니 조선이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였다.9) 


8) 정옥자(1998),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참조.

9) 허태용, 앞의 논문, 400~403쪽 참조.

8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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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병자호란 트라우마는 청을 멸망시켜서 치유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들의 문물을 배워 그들보다 우리가 더욱 번성했을 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담이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한 18~19세기는 이처럼 역사적 트라우마의 원인인 병자호란의 기억에 대한 다양한 대응담론이 정치 사회 전반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러한 대응담론은 자연스레 야담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병자호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역사적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서사적 대응으로서의 나름의 모색이 작품 속에 내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야담 속에서 병자호란의 기억이 어떻게 형상화되었으며, 나아가 치유와 극복을 모색하는 서사적 대응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 야담에 나타난 트라우마 대응 양상


3.1. 운명론적 체념과 자기위안
   전쟁은 개인적 차원에서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압도적인 현실이다. 병자호란의 경우 전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청과의 외교적 마찰이 있었고, 이로 인해 문제가 야기될 소지가 분명히 있었으나, 권력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전쟁은 일어났고 청의 기마병들은 순식간에 도성을 에워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은 그저 달아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의 군대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강화도는 오히려 가장 참혹한 전장이 되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역사적 현실을 마주하고 사람들은 전쟁의 책임이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전쟁 직후에 인조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파 신료들에게 돌렸다. 그는 명분만 앞세워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임금과 종사를 불측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며 척화파 신료들을 배척하고 친청파 신료들을 대거 기용한다. 물론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온전히 떠넘기는 것은 무리한 점이 있을 터이다.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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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권력에 중심에 있던 신료들이 중국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청 교체라는 역사적 흐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척화를 주장하면서 청을 자극한 것이 양국의 평화를 위태롭게 만든데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10) 

   인조 역시 그러한 신하들을 방관한 책임은 존재했으나, 그에 대해서 인조는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였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을 위시서인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척화파 신료들은 오히려 권력에 중심에 서고 그들의 책임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병자호란의 발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사라진 것이다. 더군다나 왕조 국가에서 왕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릴 수 있을리 만무했다. 이에 사람들은 전쟁이 발생한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였다고 정신적 차원에서의 도피 즉 운명론적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받아들이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 아래에서 야담에서는 병자호란이 하늘이 정한 조선의 운수였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송천필담? 63화와 ?기문총화? 525화 병자호란은 예견한 김시양에 관한 일화이다.
1. 청나라에서 용골대가 사신으로 왔는데, 서강 선유봉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2. 김시양이 용골대가 남한산성을 염탐할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동문 밖에 장막을 치고 맞이하였다.
3. 용골대가 이에 놀라 달아나면서 관사 벽에 ‘’자 한 글자를 남겨 두었다.
4. 이해 12월에 과연 청나라 군대가 침범하였다.

?송천필담?에서는 김시양 남한산성을 염탐하고자 한 용골대의 뜻을 꺽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거의 동일한 구조의 ?기문총화?에서는 청나라 사신이 말을 씻긴다는 핑계로 10여 리를 달려 남한산성을 염탐하였고, 이에 김시양이 탄식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의 세부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전쟁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조짐이 있었다는 서사 구조는 동일하다.


10) 박양리, 앞의 논문, 15~17쪽 참조.

10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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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김시양은 청나라 사신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를 막을 계책을 내었으나 그것이 전쟁을 막거나 방비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전쟁은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고, 일어날 운명이었다는 인식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야담 속에서 병자호란을 예견한 인물로 김시양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김시양은 실제로 평안감사와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국비를 확충하고 황폐해진 산성을 수리하는 등 전쟁의 방비에 공을 들인 인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시양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몇년전 병을 얻어 장님이 되는 바람에 고향으로 내려가 전쟁 당시에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가 청의 침입을 예견하고 그러한 방비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되었든 병자호란의 기억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김시양에게 전쟁에 대해 미리 예견하였으나 끝내 막을 수는 없었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셈이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존재했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운명론적 사고는 박엽에 관한 야담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엽은 광해군 시절 평안감사를 비롯해 관서 지방의 방백으로 6년 간 역임한 인물로 병자호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앞서 국경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로 명과 청에 관련된 여러 가지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조반정 직후 참형을 당하였는데 야담 속에서는 청의 침입을 예견하고 그들의 야욕을 억제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11)

   그가 하루는 비장을 불러 술과 안주를 갖추어 주며 말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중화에 있는 구현 아래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건장한 사내 둘이 채찍을 들고 지나갈 것이다. 그들에게 내 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들이 비록 우리나라에 몇 달째 왔다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희들이 다니느라고 참으로 고달팠으리라. 그래서 술과 안주를 보내니 한 번 배불리 취한 뒤 빨리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비장이 구현에 가서 기다리니, 과연 두 사람이 지나갔다.


11) ?동패락송?, ?기문총화?, ?계서야담?에 각각 4편의 박엽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내

용은 대동소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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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이 박엽의 말을 그대로 전하니,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놀라 얼굴빛이 변하여 대답하였다. “저희들이 비록 여기에 왔으나 어찌 감히 신과 같은 장군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겠습니까? 장군님이 계신 동안은 저희들이 어찌 감히 다시 오겠습니까?” 하고는 술을 마시더니 가버렸다. 이들은 곧 용골대마부대였다. 우리나라에 몰래 들어와 허실을 탐지하기 위하여 때로는 승정원의 종으로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고 박엽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12)


   이시양용골대의 계책을 미리 눈치채고 대책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승정원에 잠입한 용골대와 마부대의 존재를 간파해 낸다. 또, 이후에 전쟁을 막기 위해서 첩과 함께 오랑캐의 진영에 가서 누르하치와 칼싸움을 하기도 한다. 부하들을 모두 잃고 박엽에게 패한 누르하치는 그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절대 조선을 넘보지 않겠노라 약조를 한다. 이렇게 박엽이 오랑캐의 야욕을 예견하고 심지어는 억눌렀지만, 그 역시 하늘이 정해 놓은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박엽은 어린 시절에 ‘천인을 죽이지 않으면 천인이 죽일 것이다.’라는 점괘를 받는다. 이에 수령이 되어서 천 명의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결국은 인조반정 이후에 구인후가 가지고 온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되는데, 구인후의 자(字)가 다름 아닌 천인이었다는 것이다. 용골대의 첩자를 간파하고, 누르하치와의 무술 대결에서 승리하는가 하면 하루에도 천리를 날아다니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박엽은 하늘이 정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전쟁의 책임이 나, 혹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늘이 정한 운수였다는 운명론적 체념을 하게 된다. 병조판였던 김시양도, 영웅적 면모를 갖추었던 박엽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전쟁을 막지 못했다. 국가도 왕과 권력자도 전쟁의 패배나 개인의 고통에 책임지지 않았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전쟁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 하늘이정한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체념의 정서가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는 하나의 방도가 되었을 것이다.


12) ?기문총화? 상, 470~471쪽.

12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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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념의 강화와 가치선양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 지배층은 우선적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전의 사회질서를 다시금 공고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 윤리적 질서의 강조를 통해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수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병자호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배층은 조선의 상하층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밖에 없는 오랑캐에게 패배했다는 정신적 충격을 완화하는 동시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념, 그 중에서도 절의(節義)를 강조하고 이러한 윤리적 가치를 선양하는 데 힘을 썼다. 송시열은 오랑캐가 천하를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 작금의 현실은 도리와 의리가 쇠한 세상이기 때문에 도리와 의리를 다시금 드높이면 세상의 질서는 다시금 바로잡아질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에 그는 다수의 전(傳)을 통하여 전란 속에서도 절의를 지킨 인물들을 부각시켜 이념을 강화하였다.13) 이러한 서사적 대응은 야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청의 조병 요청으로 참전하였으나 대명의리를 지키다가 순절한 이사룡 극적인 삶의 궤적으로 말미암아 이미 당대에 여러차례 입전된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기억은 ?청성잡기??송천필담?에서 다시금 소환된다. 심재?송천필?에서 송시열<포수이사룡전>을 간추려 기록하면서, 이야기 말미에 “우리나라가 불행히 병자년의 변란을 당함에 참으로 소중화라는 칭호가 부끄럽다고 하겠다. 벼슬아치로는 청음삼학사가 있었고, 말엽으로 임경업이 있었으며, 군중의 천한 병사로 이사룡이 있어서 의리를 지키고 굴복하지 않으며 죽음을 택하고 후회하지 않았다. 이들은 강상의 윤리를 직접 실천하여 천하를꾸짖음이 있었으니,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 어찌 여러 성군께서 배양한 소치요, 명나라의 어진 덕화가 깊이 젖어들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14)라며 병자호란은 치욕적인 기억이지만, 청음 삼학사, 임경업, 이사룡 등 절의를 지킨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말한다. 


13) 박양리, 앞의 논문, 64쪽 참조.

14) ?송천필담? 1,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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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의를 지킨 인물의 일화를 환기시킴으로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치유하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수많은 여성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앞서 강화부 유수 이경일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 여성들은 또다른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었다. 그나마 적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혹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여성들의 경우 오히려 열녀로 숭앙 받으면서 사회적 파장이 적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여성들을 둘러싸고 그들의 속환(贖還) 문제와 함께 훼절과 관련된 사회 정치적 논란이 불거졌다. 사실 그녀들은 스스로 원하지 않았으나 전쟁으로 인해 포로가 되었던 피해자였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들은 오히려 정절을 더렵혔으므로 혼인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존재이자 대의를 저버려 집안의 제사를 맡길 수 없는 여인라면서 그들을 죄인취급을 한다. 왕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결국은 해결되지 않았다.15) 사대부들은 그녀들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들의 훼절을 탓하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박소촌화? 1권 59화 <이민구성구>는 호란 때 적에게 치욕을 당하게 된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경개를 간략히 드러내면 다음과 같다.

1. 민구와 성구 형제의 처가 호란 때 절에 숨어 있다가 적에게 잡힌다.
2. 성구의 처는 자결하고 민구의 처는 끌려가게 되었다.
3. 민구의 처가 당나귀를 타고 채찍질을 하며 자못 당당하니 사람들이 욕을 하였다
4. 앞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들에게 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하였는데, 민구의 처는 죽겠다고 하고 성구의 처는 죽기 쉽지 않을 것이라 답하였다.15) 


   병자호란 직후 사대부 여인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여인들의 처우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영의정 장유인조에게 속환되어 온 며느리 김씨를 이혼시켜 달라고 청한다. 인조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그녀는 끝내 시부모에게 불손하였다는 이유로 이혼당한다. 이에 대해 당시 사대부들은 “그들이 목숨을 버려 죽지 않은 것을 책할 수 없

다 해도 남편의 집안에서 볼 때 이미 대의가 끊어진 것이니, 어찌 강제로 다시 결합하게 하여 사대부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라며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4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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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구와 성구 형제의 처는 동시에 적에게 욕을 당하게 되었는데 성구의 처는 자결하였으나, 민구의 처는 포로가 되었음에도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보여 세간의 욕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소촌화?의 저자인 이동윤은 두 여인이 일화를 시간 순으로 배열하는 대신, 사건의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원인이 되는 사건을 나중에 제시함으로써, 그녀의 행동이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를 강조하였다.16)


   청에 포로로 끌려간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같은 야담집 101화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어느 절에 선비들이 모여 각기 자신의 아내의 어짊에 대해 자랑하고 있었다. 이때 한 승려가 아내는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한다.

   소승 또한 사대부 가의 아들로서 열여섯에 아내를 맞았는데 모습이 아름답고 성품이 지혜로와 금슬이 서로 좋았습니다.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게 되자 분하여 한 마음으로 결심하기를 죽어도 잊기 어렵다 하여 몰래 심양에 들어갔지만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홀연히 집안 여종을 길에서 만났는데 그 여주인이 사는 곳을 말하고 한 민가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처가 저를 보고는 기뻐하는 빛이 없더니 밥을 지어 올린 후 한 빈 방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자물쇠를 채우고 말하기를 ”가히 사냥개의 밥을 마련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해가 저물고 한 오랑캐가 말을 달려 채찍질하고 돌아오는데 개 세 마리가 그를 따랐는데, 그 여자가 밥을 지어 올리고 함께 잤습니다. 내가 이에 활과 살 세 개를 끼고 집에 올라가 구멍으로 그들을 보니 여자와 오랑캐가 바야흐로 웃으며 장난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화살 가운데 하나로 오랑캐를 죽이고 들어가 그 여자를 보니 여자가 성난 빛이 있어 그에게 말하나 듣지 않으므로 또 쏘아 거꾸러뜨렸습니다. 숨겨진 것을 뒤져 말린 박가루를 전대에 담아 그것을 차고 또 고기 세 덩어리를 지니고 나오니 개 한 마리가 나를 쫓아오기에 고기 한 덩어리를 던져주니 그것을 물기에 쏘아 죽였지요. 또 개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쫓아오기에 모두 또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밤에 가고 낮에 숨어 박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고 겨우 조선 경계에 이르러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머리깎고 중이 되었습니다.17)


16) 조선옥(2008), ?박소촌화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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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려의 이야기 속 여인은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가서는 호의호식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남편이 찾으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표정을 보이기는 커녕, 오랑캐를 죽인 남편에게 성난 빛을 보였다. 이동윤은 어릴 적에 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노인들은 또한 노인들로부터 전하여 들은 말이라고 이야기의 출처를 밝혔다. 즉, 민간에 널리 유전되어 전해지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속에는 포로가 된 여인이란 기본적으로 실절하여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17세기에 활발하게 창작되었던 열녀전의 경우 주된 창작계층은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열녀전을 통해 ‘외적에 항거하여 정절 위해 목숨을 버리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죽음을 열행의 평가기준으로 각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18) 즉, 모범이 될만한 여성을 기리는 데 주력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야담에서는 주로 포로가 된 여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트라우마의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동시에 열행의 가치를 선양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열녀전과 변별된다.
야담에서는 이념의 강화를 위해 비현실적 요소를 적절하게 사용하기도 하였다. 

   ?학산한언?의 98화역관 정명수의로운 말의 일화이다. 인조 말엽의 청나라 역관인 정명수는 본디 우리나라 사람인데 청에 망명하여 역관이 되었는데 극히 흉악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특히 청나라 사신으로 올 때 우리나라에 재물을 많이 뜯어갔다. 어느날 그가 준마 한필을 구하여 날랜 말을 준비하였다. 정명수가 말을 타고 녹번재를 막 넘었을 때, 말이 갑자기 뛰어 올라서 그를 내동댕이 치고는 그대로 해주 수양산으로 들어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그 말을 ‘의마(義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조선 사회를 괴롭힌 것 중 하나는 조선 출신의 청나라 역관들의 횡포였다. 특히 정명수는 조선의 동향을 청 수뇌부에 전하고 조선을 압박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는 용골대 등과 유착하여 그들의 비호 아래 조선을 압박하며, 때로는 청의 칙사보다 더한 횡포를 부렸다.


17) ?박소촌화? 1책 101화

18) 홍인숙(2001), 「17세기 열녀전 연구」, ?한국고전연구? 7권, 한국고전연구학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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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의주부윤 황일호 등 11명의 처형에 직접 관여하면서 조선 신료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그에게 매번 막대한 뇌물을 안겨야만 했다.19) 이들에 대한 기억은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또다른 트라우마의 원인이었을 터이다. 실제 역사에서 그를 치죄할 수는 없었지만, 역사적 서술과 달리 야담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그 진실성 여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허구적 이야기가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사대부들의 대응이었다는 것은 ?학산한언?의 편찬자인 신돈복의 의론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아! 병자년 정축년의 호란을 당하면서 우리나라는 어디나 개돼지와 같은 수치를 안게 되었으면서도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어찌 열사의 의연한 혼백이 이 말에 의탁하여 일세에 경종을 울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말은 짐승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오랑캐를 태우는 것이 더럽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한 수양산이 마침내 돌아가 의지할 만한 땅이라는 것을 알겠는가!20)
병자호란 당시 수치를 당하면서도 감히 저항하지 못한 것이 트라우마의 원인이었다면, 미물인 말이 절의를 지켜 원수인 정명수를 땅에 떨어트렸다는 이야기는 비록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념적 가치를 드높이고 그를 통해 트라우마의 극복에 도움이 되었던 셈이다.


3.3. 객관적 역사인식과 현실비판

   청이 중원을 차지한 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천리(天理)에 따라 오랑캐가 쇠퇴하기는 커녕, 청의 국운은 오히려 융성해지기만 하자 조선사회에서는 이제 청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역사를 비롯한 특정한 대상에 대한 정보나 실물을 수집하며, 각종 기록을 남기는 것이 일종의 경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와 함께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들이 남긴 다양한 연행기록들은 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9) 한명기(200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180~182쪽, 참조.

20) ?학산한언? 1,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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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세기 중엽 서얼 출신 성대중은 그의 야담집 ?청성잡기?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야사류는 물론 청과 관련한 이야기를 다수 기록하였다. 그는 누르하치에서 황태극, 순치제 등으로 이어지는 청 황제의 가계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고, 창업 군주 누르하치의 능력이나 성품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누르하치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천하의 주인이 되지 않겠는가.”21)며 나름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이동윤 역시 청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박소촌화?에서 누르하치 집안의 연원에 대해 기술하는 가하면, 숭정, 숭덕, 순치, 강희, 옹정, 건륭제의 내력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또한 홍대용연행록을 읽고 그가 청에서 겪은 일화들을 요약하여 기술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야담집에서 보이는 청에 대한 관심이 이용후생적 관점의 북학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또 이러한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청성잡기?에서 성대중누르하치의 자식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맏아들 귀영개가 다섯째 홍태시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조선에 망명해서 곤궁하게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역사서는 물론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그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박소촌화?에 보이는 강희제의 생모 대한 이야기의 경우에는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 병자호란 당시 누르하치가 수원에서 한 여자를 데려갔는데, 그 여자가 오줌을 누니 땅에 구멍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그 여자의 능력을 알 지 못하고 칸이 데려갔는데, 그녀가 강희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강희제가 조선에 후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역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이야기가 민간과 사대부에 유전하고 있었으며, 야담집의 편찬자가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즉, 이념적인 차원에서 청을 오랑캐로 무시하거나 적대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존재이자 이웃 국가로서 청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이 생겨났으며, 이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의식의 흐름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 ?청성잡기?,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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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을 단순히 운이 좋아서 중원을 차지했을 뿐 천리에 따라 조만간 쫓겨날 오랑캐로 보지 않고 국가로 인정함과 동시에 병자호란과 그 전후의 대처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식도 나타난다. 이는 병자호란을 절의를 드러내는 이념의 장으로 인식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이러한 객관적인 인식은 야담 속에서 북벌론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로 드러난다.



   ?동패락송? ?계서야담?에는 북벌과 관련한 송시열정태화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1. 효종북벌의 일송시열에게 맡겼다.
2. 송시열이 독대를 마친 뒤 재상 정태화를 보러 갔을, 그 아우 정지화가 자리에 있다가 눈썹을 찡그리고 자리를 피하였다.
3. 송시열이 북벌에 일로 상을 만났는데, 군량을 나를 사람이 없다고 하여 대감을 천거하였다며 의향을 물었다. 이에 정태화는 군량 한 가지 일은 감당할 만하다고 하였다.
4. 그 때 곁 방에 있던 정지화가 “그 놈은 갔습니까?”라며 큰 소리로 묻자, 정태화는 미소를 지으며 “과천 산지기 놈은 벌써 갔고, 송상께서는 자리에 계시다.”고 답하였다.
5. 송시열이 간 후 정태화가 아우를 경박하다고 꾸짖으니, 아우는 형님이 사세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군량을 담당한다고 하니 어이가 없어 그리하였다 하였다.
6. 정태화가 웃으면서 병사가 압록강을 넘어가기만 하면, 군량은 내가 독려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7. 이에 형제가 한바탕 웃고서 이야기를 그쳤다.

   정태화인조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정승을 역임한 인물이다. 특히 한당과 산당의 갈등, 북벌을 둘러싼 효종과 신료들 간의 갈등, 예송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갈등 속에서 그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태화는 여러 야담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그중에 위 일화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재상인 그의 입을 빌려 북벌의 허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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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량을 맡아 달라는 송시열의 청을 허락한 정태화에게 그의 아우는 “지금 경비로 보아 어떻게 군량을 잇게 하시겠습니까? 사세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이처럼 가볍게 말씀하시니, 제가 마음 속으로 웃으며 불복하는 바입니다.”라고 불만을 표시한다. 아무리 정태화의 재주가 빼어나더라도 곡식이 없는 데에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뜻이다. 이에 대해 정태화는 “병사가 압록강을 넘어가기만 하면, 군량이야 내가 독려할 수가 있다.”며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이는 북벌을 이야기 하면서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군사적・재정적 기반이 전혀 없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웃음이면서 동시에 북벌이 사실은 이상적인 논의와 명분일 뿐이고 북벌론을 주장하는 자들조차 그것을 실재로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날카로운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야담에서는 송시열과 함께 북벌의 한 축이었던 효종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드러나기도 한다. 효종이 북벌을 수행할 만큼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인데, 주로 시정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청성잡기?에는 효종 임경업의 첩 매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임경업과 같은 장수를 얻어 북벌을 이루겠냐는 효종의 질문에 북벌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병자호란 때에 전하께서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강도(江都)로 피난 가셨습니다. 이때 전하께서는 김경징(金慶徵)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그를 참수하지 않으시고, 병사를 거느려 오랑캐를 막게 하셨습니까?  김경징을 참수하는 것은 그저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운 일이었는 데도 전하께서 하지 못하셨거늘 하물며 북벌하는 일이겠습니까. 저는 비록여자이지만 전하께서 실행하지 못하실 줄을 압니다.” 효종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22)

   김경징은 병자호란 당시 빈궁원손, 봉림대군 등 왕실 식구들을 호종하강화도로 들어가서 수비 책임을 맡았으나, 대군 등의 의견을 무시하고 안일하게 대응하다가 결국 강화도가 함락하자 방어를 포기하고 자신의 가족만 챙겨 도망간 인물이다. 후일 그 죄로 사사되기는 하였으나 인조는 끝까지 그를 옹호하였다.


22) ?청성잡기?,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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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해서 사대부는 물론 당대 민중들에게도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왕과 임경업의 첩의 대화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김경징의 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왕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계서야담?, ?동패락송?, ?기문총화?, ?삽교만록? 등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효종이 미행을 나갔다가 우연히 시정 인물들이 자신과 북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는 것을 기본적인 서사 골격으로 하고 있
는데, 이들 작품에서 등장하는 시정 인물은 궁궐의 수졸이나, 떡장수 등 그 신분은 다양하나 미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북벌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23) 벌이 허상이며, 왕와 신료들이 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은 허생이야기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현재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생이야기박지원?열하일기? 중 「옥갑야화」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러나 허생이야기는 박지원에 <허생전> 뿐만 다양하게 변주되어 조선후기 여러 야담집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청구야담?, ?계서야담?, ?기문총화?, ?동야휘집?, ?차산필담? 등 조선후기 대표 야담집에 일곱편 정도가 보이며,24) 최근 발굴된 <선유동기> 역시 허생이야기의 변주라 할 수 있다.25) 

   허생이야기는 치부와 관련된 전반부북벌과 관련된 후반부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후반부는 송시열과 함께 북벌과 관련한 주요 인물이었던 이완이 등장하여 허생에게 북벌의 계책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각편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어찌 되었든 허생은 이완에게 산야에 숨어 있는 인재 등용, 훈척 권귀 종친의 부를 빼앗아 명의 유민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종실의 딸을 시집보내는 방안, 국중자제들을 변발하고 호복을 입혀 청나라 과거에 응시하고 상업활동을 하게 만드는 방안을 내어놓는다. 그러나 이완은 이를 불가하다고 말하고, 이에 허생은 크게 화를 내고는 사라진다.


23) 김수현, 앞의 논문, 참조.
24) 기존의 연구 성과를 살펴볼 때, 박지원의 <허생전>은 그의 완전한 창작물이라기 보다는 조선 후기에 널리 유전되고 있던 허생이야기를 나름의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여 개작한 것으로 보인다.(<허생전> 정착에 관한 논의는 정출헌(1998), ?고전소설사의 구도와 시각?. 소명출판; 임형택(1978), 「한문단편 형성과정에서의 강담사」, ?창작과 비평?
제13권 3호, 창비; 장진숙(2013), ?야담 서사변개의 사회문학적 맥락과 의미?,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조)

25) 정환국(2006), 「허생고사와 북벌인식의 추이-자료 <선유동기>를 통해서」, ?한국어문학연구?47, 한국어문학연구학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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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각각의 안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든지 중요한 것은 북벌을 위한 실용적인 안이 결국은 이완으로 대변되는 지배층에 의해 부정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허생은 “너는 이 시대에 마땅한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망령되게 대사를 도모한다고 떠벌이니,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느냐?”26)고 일갈하였는데, 이 말 속에는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명분론에만 사로잡혀 있는 지배층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들 작품은 더이상 이념에만 사로잡혀 있어 허상에만 빠져 있는다고 병자호란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고, 오히려 그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북학을 통해서 청을 이겨나가야 한다는 인식과 대응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1636년 겨울, 불과 100여 일 동안의 전쟁은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남겼다.
병자호란의 충격은 비단 육체적 물질적 피해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전통적 화이론의 붕괴와 중화질서의 재편은 정신적인 상흔을 가지고 왔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당대를 넘어서 후대까지 이어져 역사적 트라우마로 고착화되었다.


   트라우마에는 자연 치유와 극복이 필요하다. 이에 조선사회는 정치 문화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대응을 모색하였다. 이는 야담에서도 드러났다.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참극인 전쟁을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다고 설명하는 야담들 속에는 운명론적 체념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26) ?기문총화? 中,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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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체념의 정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기 위안의 방편이 되었다.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사대부들을 중심으로는 보수적 이념을 강조하여 정신적 상흔을 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야담에서도 절의를 지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칭송, 훼절자에 대한 강한 비난의 이야기를 통해 병자호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모색이 보인다. 

   한편, 18세기에 이르러서 청을 배워야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병자호란과 그 이후 조선의 대응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연구를 통해 야담 속에 나타난 병자호란의 기억의 면모를 총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기억의 모습은 단일하지 않았다. 이러한 다양한 기억의 모습은 조선사회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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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리
동의대학교 문학인문교양학부
전자우편: arine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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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일: 4월 7일
심사 기간: 4월 17일 ~ 5월 10일
게재확정일: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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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emories over Byeongjahoran as Historic Trauma and Narrative response Seen through Yadam
Park Yang-ri(Dongeui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memories over Byeongjahoran were embodied within historical tales in the perspective of healing and overcoming historic trauma. It can be said that Byeongjahoran is historic trauma different from other types of trauma in that it was left as mental wounds in Chosun society even after a long period. Also, to get over that historic trauma, attempts were made socially as well as culturally. This coping discourse naturally influenced yadam, too.


   First of all, there are tales about figures who try to predict or prevent Byeongjahoran. In those stories, their prediction or prevention all went into failure, and the war occurred after all. It reflects the people’s recognition and sentiment of resignation that Byeongjahoran was doomed to happen and could not be avoided by men’s power. After Byeongjahoran, to get rid of the disturbed national state of mind and solidify social order like before, narrative response was tried for stressing ideology and elevating the value of integrity, and this was shown mainly through yeolnyeodam and jeoluidam. Unlike historic narrative, in yadam, compilers emphasized integrity and tried to get over trauma through fictional stories. Lastly, within the trends of the mid-18th century, the movement to view Byeongjahoran and Qing objectively was revealed in yadam, too.


26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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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se are mainly the critical stories about the absurdity of bukbeol and historical tales about Qing.
Through these yadam, we can see that the works are not about reproducing the memories of Byeongjahoran merely as historical facts but about looking for something as narrative coping to get over that historic trauma.


Key word : Yadam, Byeongjahoran, Memories over Byeongjahoran, Historic Trauma, Asianism, Conquest of the Northern Areas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20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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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시대 1636년
국가/대륙 한국

   후금에서 이름을 바꾼 청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했다(정묘호란 발발 참조). 후금이 정묘호란의 강화 조약 내용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이 이를 거부했고, 청 태종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확실히 무릎 꿇리기 위해 재침략을 결정했다. 압록강을 건넌 선봉대는 의주 방어를 맡은 김자점각주1) 이 임무를 소홀히 한 틈을 타 맹렬히 남하해 한성에 육박했다. 그러자 인조는 김상헌 ・ 최명길 등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의병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청나라 20만 대군이 에워싼 남한산성에 지원군이 접근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인조는 1637년 1월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항복 의식을 치렀다. 침략군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끌고 가고, 이들과 함께 척화파각주2) 대신 홍익한 ・ 윤집 ・ 오달제와 수만 명의 백성을 잡아 갔다. 이후 조선은 명나라와 완전히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됐다.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을 받아 낸 청 태종이 삼전도(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사적 제 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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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시대 구분은 한국사의 흐름에 맞추었다.
  • 서기 1년 이전의 시대는 교과서에서 쓰이는 '기원전' 대신 '서기의 앞 시기' 라는 뜻에서 '서기전'으로 표기했다.
  • 한국사의 연대는 1895년까지는 음력, 태양력을 도입한 1896년 이후는 양력으로 표기했다. 세계사의 연대 표기는 중등 교과서에 따랐다.
  •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는 중등 교과서와 국립국어원에 준하되 편집의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화를 줬다.

출처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3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3 | cp명다산북스 도서 소개

   한국사와 세계사가 동시에 펼쳐지는 신개념 통합 역사 교양서한국사, 이제는 세계사와 함께 봐야 더 깊이 보인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최고의 역사 시리즈한국사 읽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역사책.접기

전체목차
15세기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다 신문고를 설치하다 양녕대군을 세자에 책봉하다 명나라의 전성기를 연 영락제가 즉위하다 말레이반도에 말라카왕국이 들어서다 정화의 해외 원정이 시작되다 종로 시전에 좌우 행랑을 설치하다 4대 세종이 즉위하다 이종무가 쓰시마를 정벌하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인 후스가 처형되다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탐험대 후원에 나서다 영락제가 환관 중심의 비밀 경찰인 동집사창을 설치하다 화척 ・ 재인을 백정이라고 고쳐 부르다 일본에 삼포를 개항하다 농업 안내서 『농사직설』을 편찬하다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다 영락제가 죽고 대외 팽창 정책이 중단되다 베트남에 레왕조가 들어서다 잔 다르크가 백년전쟁에서 대활약하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완공하다 혼천의를 만들고 천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장악하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질 에아네스가 ‘마(魔)의 벽’ 보자도르곶을 돌파하다 훈민정음을 만들다 압록강 ・ 두만강 국경에 4군 6진을 설치하다 5대 문종이 즉위하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의 무라드 2세가 바르나에서 크리스트교 연합군을 격파하다 프랑스에서 서유럽 최초의 상비군이 창설되다 명나라 황제가 몽골족 일파인 오이라트족의 포로가 되다 포르미니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포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다 『고려사』를 완성하다 문종이 죽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이 즉위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수양대군이 권력을 쥐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끝내 목숨을 잃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다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다 잉글랜드에서 장미전쟁이 시작되다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하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다 세조가 죽고 8대 예종(재위 1468~1469)이 왕위에 오르다 병조판서 남이가 반역죄를 쓰고 죽다 예종이 죽고 9대 성종(재위 1469~1494)이 왕위에 오르다 오닌의 난을 계기로 일본이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다 유럽 인쇄술의 아버지 구텐베르크가 사망하다 조선의 의례 규정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다 서거정 등이 『동문선』을 편찬하다 왕비 윤씨를 폐하다 베네치아공화국에서 최초의 근대적 특허법이 탄생하다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이 탄생하다 모스크바대공국이 몽골족으로부터 독립하다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다 서거정 등이 우리나라 통사인 『동국통감』을 편찬하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을 공포하다 서거정 등이 우리나라 지리책인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다 유럽에서 본격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되다 잉글랜드에서 장미전쟁이 끝나고 튜더왕조가 열리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다 간편한 덧셈과 뺄셈 기호가 만들어지다 성현이 우리 음악을 정리한 『악학궤범』을 편찬하다 성종이 죽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왕위에 오르다 무오사화가 일어나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이 식민지 분할협정을 맺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하다 대항해 시대
16세기 갑자사화가 일어나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다 삼포왜란이 일어나다 흑인 노예 무역이 본격화하다 이란에 사파비왕조가 들어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완성하다 일본과 임신약조를 맺다 비변사를 설치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르네상스의 물결이 알프스 북쪽으로 퍼지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하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하다 마르틴 루터가 교황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제국을 정복하다 마젤란 함대가 3년 만에 세계를 일주하다 인도에 무굴제국이 들어서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이 합스부르크왕가의 수도 빈을 포위하다 '양명학'의 시조 왕수인이 사망하다 낙향한 사림들이 별서정원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가 사망하다 잉카제국이 에스파냐에 멸망하다 은 회취법이 일본에 전파되다 잉글랜드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다 로욜라가 가톨릭교회 개혁을 목표로 예수회를 조직하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세워지다 중종이 죽고 12대 인종(재위 1544~1545)이 즉위하다 인종이 죽고 13대 명종(재위 1545~1567)이 즉위하다 을사사화가 일어나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조총을 전하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다 남아메리카에서 포토시 은광이 발견되고 '가격혁명'이 시작되다 타타르족이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이 일어나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다 이황과 기대승이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다 명나라가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보다 아우크스부르크화의로 루터파 신교가 공인을 받다 무굴제국에서 악바르가 즉위하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가 각각 즉위하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가 각각 즉위하다 문정왕후가 죽고 '여인천하'가 막을 내리다 명종이 죽고 14대 선조(재위 1567~1608)가 즉위하다 이황이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바치다 프랑스에서 위그노전쟁이 일어나다 잉글랜드에서 구빈법이 제정되다 네덜란드독립전쟁이 일어나다 네덜란드의 지리학자 메르카토르가 메르카토르도법을 고안하다 이이가 성혼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이 레판토해전에서 크리스트교 연합 함대에 패배하다 장거정이 개혁 정치를 시작하다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바쿠후를 멸망시키다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잡다 정여립의 난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다 황윤길, 김성일이 일본 정세를 살피러 가다 그레고리력이 만들어지다 마테오리치가 명나라에 도착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패배하다 프랑스에서 부르봉왕조가 시작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 실험을 하다 프랑스에서 낭트칙령이 발표돼 위그노전쟁이 막을 내리다 잉글랜드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다
17세기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들어오다 사명대사가 일본과 국교 재개를 논의하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쓰다 선조가 죽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즉위하다 대동법을 실시하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쓰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쓰다 중국 '4대 고전 문학'의 하나인 『금병매』가 완성되다 네덜란드에 세계 최초의 근대적 증권 거래소가 설립되다 일본에서 에도 시대가 시작되다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최초의 신문이 발간되다 북아메리카에 잉글랜드 최초의 영구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이 건설되다 영창대군이 유배를 가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곡예를 펼치다 러시아에서 로마노프왕조가 일어나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완성하다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다 독일 지방에서 30년전쟁이 시작되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자와섬에 자카르타를 건설하다 독일 지방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하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이주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다 정묘호란이 일어나다 환관 위충현이 동림당을 탄압하다 휘호 더 흐로트가 『전쟁과 평화의 법』을 쓰다 페테르 루벤스가 바로크 미술의 걸작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를 그리다 귀납법을 주창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사망하다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권리청원」을 승인하다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서양 문물을 가지고 들어오다 상평통보를 주조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다 로마에서 갈릴레이 재판이 벌어지다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이라 바꾸다 네덜란드에서 튤립 투기가 일어나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쓰다 소현세자가 죽자 독살설이 퍼지다 청나라에서 송환된 임경업이 매를 맞고 죽다 인조가 죽고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이 즉위하다 잉글랜드에서 청교도혁명이 일어나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황금기를 연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즉위하다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차지하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30년전쟁이 끝나다 하멜이 제주도에 떠내려 오다 청나라의 러시아 정벌에 동참하다 (제1차 나선 정벌) 조선 후기의 종합 농업 서적인 『농가집성』이 발간되다 효종이 죽고 18대 현종(재위 1659~1674)이 왕위에 오르다 효종의 상례를 놓고 제1차 예송 논쟁이 벌어지다 크롬웰이 항해법을 발표하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쓰다 무굴제국에서 아우랑제브가 즉위하다 잉글랜드에서 왕립학회가 창설되다 하멜이 탈출하다 스웨덴에서 최초의 은행권이 발행되다 강희제가 즉위하다 프랑스에서 콜베르가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펴다 뉴턴이 미적분을 창안하다 제2차 예송 논쟁이 벌어져 남인이 정권을 잡다 현종이 죽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이 왕위에 오르다 경신환국(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다 프랑스 ・ 네덜란드전쟁이 시작되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다 잉글랜드에 그리니치 천문대가 세워지다 스피노자가 사망하다 잉글랜드에 휘그당과 토리당이 등장하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다 희빈 장씨 아들이 원자가 되고, 남인이 집권하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철회하다 잉글랜드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다 청나라와 러시아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다 로크가 『시민정부론』을 쓰다 사육신이 복권되다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남인이 몰락하다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다 고증학자 황종희가 사망하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가 서유럽을 돌아보다 북방전쟁이 일어나다
18세기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다 병역 문제를 처리하는 양역이정청을 설치하다 에스파냐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다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이 성립하다 영국에서 최초의 저작권법이 만들어지다 영국에서 코크스가 발명되다 북한산성을 새로 쌓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다 숙종이 죽고, 20대 경종(재위 1720~1724)이 즉위하다 뉴커먼이 증기 기관을 만들다 영국에서 하노버왕조가 시작되다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을 쓰다 중국에서 『강희자전』이 완성되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과 남해회사 거품 사건이 일어나다 발생 연잉군(영조)이 왕세제에 책봉되다 경종이 죽고 21대 영조(재위 1724~1776)가 즉위하다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이 붕괴하다 영국에서 내각책임제가 확립되다 가브리엘 파렌하이트가 수은 온도계를 발명하다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이 완성되다 지정은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다 영조가 거듭 금주령을 내리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다 정선이 <금강전도>를 그리다 케이가 방직기를 발명하다 건륭제가 즉위하다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 (1740~1748)이 일어나다 바흐가 「평균율클라비어곡집」을 완성하다 이조전랑 통청법을 폐지하다 『속대전』을 편찬하다 균역법을 실시하다 아라비아에서 와하브 운동이 시작되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쓰다 영국에서 제2차 인클로저 운동이 시작되다 선비가 살기 좋은 곳을 제시한 『택리지』가 간행되다 나주벽서 사건이 일어나다(을해옥사) 임금의 언동을 『일성록』으로 기록하기 시작하다 프랑스에서 '백과전서파'가 활동을 개시하다 프렌치인디언전쟁이 발발하다 영국이 플라시전투에서 승리해 인도의 벵골 지방을 장악하다 '분류학의 아버지' 린네가 이명법을 제시하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굶어 죽다 김수장이 『해동가요』를 편찬하다 조선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오다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가 발간되다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다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쓰다 『홍루몽』의 작가 조점이 사망하다 프로이센에서 의무교육법이 제정되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 개량에 착수하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대상으로 인지세법을 제정하다 산업혁명, 근대 산업의 문을 열다 영조가 죽고 22대 정조(재위 1776~1800)가 즉위하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쓰다 영국과 인도 사이에 마라타전쟁이 시작되다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되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다 『맹자자의소증』의 저자 대진이 사망하다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완성하다 이승훈이 조선 최초로 가톨릭 영세를 받다 중인 문인들이 송석원에서 시사를 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쓰다 실러가 『군도』를 쓰다 『사고전서』가 완성되다 파리평화조약으로 미국 독립이 승인되다 라부아지에가 연소의 비밀을 풀다 벤담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을 쓰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다 민간의 상업 활동을 허용하다(신해통공)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한양에 들어오다 화성을 완공하다 정조가 죽고 23대 순조(재위 1800~1834)가 즉위하다 프랑스가 공화정을 선포하다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다 제너가 종두법을 발명하다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미터법을 채택하다 볼타가 전지를 발명하다 시민혁명의 시대
19세기 가톨릭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다 (신유박해) 한치윤이 한국 통사인 『해동역사』를 쓰기 시작하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기틀이 마련되다 『나폴레옹 법전』이 만들어지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다 흑인 노예들이 아이티공화국을 건설하다 이긍익이 역사책 『연려실기술』을 남기고 죽다 빙허각 이씨가 생활 경제 백과사전 『규합총서』를 쓰다 미국에서 증기선이 실용화되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쓰다 나폴레옹이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다 마지막 조선통신사가 쓰시마를 방문하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다 정약용이 고조선부터 발해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역대 영역을 고증한 『아방강역고』를 쓰다 영국에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나다 빈 회의가 열리다 김정희가 북한산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히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쓰다 아르헨티나가 독립하다 리카도가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를 쓰다 오언이 협동조합 운동을 제창하다 유생들이 서얼을 차별하지 말라는 만인소를 올리다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가 정계에 복귀하다 멕시코, 대(大)콜롬비아가 각각 건국되다 멕시코, 대(大)콜롬비아가 각각 건국되다 미국이 먼로주의를 선언하다 영국에서 철도가 개통되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가 완성되다 '잭슨민주주의'가 시작되다 그리스가 독립하다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나다 로마 교황청이 조선교구를 창설하다 순조가 죽고 24대 헌종(재위 1834~1849)이 즉위하다 주세페 마치니가 청년이탈리아당을 결성하다 패러데이가 전자기유도법칙을 발견하다 영국에서 공장법이 개정되다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하다 최한기의 유학 철학서 『기측체의』가 중국에서 발행되다 기해박해가 일어나 풍양 조씨가 세도 정치를 하다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다 오스만튀르크제국에서 근대화 개혁 정책인 탄지마트가 시작되다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다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리다 김대건이 조선 최초의 신부가 되다 리스트가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를 쓰다 콩트가 『실증철학강의』를 쓰다 영국에서 철도 거품이 절정에 이르다 아일랜드에서 감자 기근이 일어나다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 정치를 하다 서양과 최초로 외교 문서를 주고받다 헌종이 죽고 25대 철종(재위 1849~1863)이 즉위하다 영국에서 곡물법이 폐지되다 『공산당선언』이 발표되다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다 미국에서 골드러시가 시작되다 중인들이 주요 관직에 임명해 달라고 건의하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다 일본이 개항하다 조선 시대 백과사전의 종합편인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자 이규경이 죽다 최한기가 『지구전요』를 쓰다 최제우가 동학(東學)을 창시하다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다 인도에서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나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다 임술민란이 전국을 휩쓸다 철종이 죽고 26대 고종(재위 1863~1907)이 즉위하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다 러시아에서 농노 해방령이 내려지다 국제노동자협회가 창설되다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하다 평양에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다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치다(병인양요) 경복궁을 다시 짓다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다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다 미국의 강화도 침략으로 신미양요가 일어나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다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다 독일이 통일되고 정부 주도의 공업화가 이뤄지다 프랑스 노동자들이 파리코뮌을 수립하다 만국우편연합이 결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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