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9. 03:39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丙子胡亂期의 主和· 斥和論爭
1)金容欽*
<차 례> 차례
1. 머리말
2. 丙子胡亂期斥和論의 재등장과 變通論
1) 淸의 성립과 斥和論의 재등장
2) 斥和變通論과 主和變通論
3. 主和· 斥和논쟁과 丙子胡亂의 발발
1) 主和· 斥和논쟁과 崔鳴吉의 名實論
2) 廟堂과 臺閣의 대립과 丙子胡亂의발발
4. 맺음말
1. 머리말
한반도를 무대로 몇 천 년에 걸쳐서 활동해 온 우리 민족은 반도가 지닌 地政學的속성상 異民族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 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2천여 년 동안 독자적인 國家를 유지 발전시켜 온 저력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7세기 전반에는 滿洲族이 등장하여 反正이라는 비상한 정치 변란으로 성립된 仁祖정권을 위협하였다.
인조 정권은 光海君代明과 後金사이에서 취한 등거리 외교를 비판하고 朱子學名分論과 義理論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성립되었으므로, 華夷論에 입각하여 만주족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필연의 사세였다.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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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의 社會․經濟的現實은 그러한 지배층의 지향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왜란 이후 황폐화된 농경지는 아직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농업 생산력도 채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권문세가의 대토지 소유는 확대 일로에 있었고, 부세제도의 모순은 심화되었다. 공물 방납의 폐단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고, 각종 부가세의 징수와 요역 징발 등으로 농민들은 생산에 전념할 여유를 얻지 못하였다. 반정 이후 민심 회복을 통한 정권 안정을 위해 추진한 ‘寬民力’ 정책은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國防力이라는 것이 단순히 군사력 증가나 군사 조직의 창설로 강화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經國大典 체제 자체가 마비된 상태였으므로 새롭게 國家體制를 재정비해야만 국방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그 방향은 그 때까지 조선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양대 중심축인 兩班制와 地主制의 모순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反正初의 改革局面에서 國家의 維持保存을 통한 保民을 모색하는 變法論者들에 의해 量田과 大同, 號牌와 均役이 논의되고, 官人․儒者사이에서 점차 지지자를 확대시켜갔다. 이들은 號牌法시행에 역량을 집중시켜 나가고자 하였지만 守法論者들의 반발과 丁卯胡亂으로 호패법은 결국 결실을 보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다.1)
이것은 조선 봉건왕조가 국가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력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증강시키는 것이 이미 불가능해진 상태
에 처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이로써 인조와 그 정권의 담당자들은 反正의 名分과 現實의 괴리에 직면하였다. 인조대 主和․斥和논쟁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朱子學名分論과 義理論에 입각한 斥和論만 일방적으로
1) 金容欽, 「17세기 前半經世論의 두 경향」, 역사문화연구 24, 韓國外國語大學敎 歷史文化硏究所, 2006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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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되고, 주화론의 논리 구조에 대해서는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2) 여기에는 朱子學만을 正學으로 고집하려는 후대 양반 지배층의 입장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특히 丙子胡亂과 이어지는 丁丑年의 城下之盟은 異民族의 武力에 의해 國家權力이 제압당한 朝鮮王朝初有의 受難으로 기록된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그 사실 관계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요구된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이 미래에 다시 반복되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당시 國家權力의 담당자였던 國王을 포함한 官人․儒者일반의 思想的한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것이 政治과정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것은 결국 朱子學 政治思想이 당시의 정치 현실 속에서 어떤 문제를 낳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론이 어떻게 등장하였는가를 규명하는 일이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특히 崔鳴吉(1586~1647)의 主和論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그것이 결국 ‘國家’觀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2) 병자호란과 주화·척화 논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李泰鎭, 「中央五軍營制의 成立過程」,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
오수창, 「仁祖代政治勢力의 動向」, 韓國史論 13, 서울대 국사학과, 1985 ;
柳在城, 丙子胡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6 ;
鄭玉子, 「丙子胡亂時言官의 位相과 活動」, 韓國文化 12,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1 ;
오항녕, 「17세기 전반 서인산림의 사상 - 김장생․김상헌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8,
한국역사연구회, 1992 ; 崔韶子, 명청시대 중․한 관계사연구 , 이화여대 출판부, 1997 ;
오수창, 「최명길과 김상헌」, 역사비평 42, 역사비평사, 1998 ;
金鍾圓, 근세 동아시아 관계사 연구 , 혜안, 1999 ;
池斗煥, 「淸陰 金尙憲의 生涯와 思想- 春秋大義論을 중심으로」, 韓國學論叢 24,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01 ;
吳洙彰, 「桐溪鄭蘊의 정치활동과 그 이념」, 남명학연구 11,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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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丙子胡亂期斥和論의 재등장과 變通論
1) 淸의 성립과 斥和論의 재등장
丁卯胡亂과 그에 이은 和約에 의해 朝鮮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明에는 事大하고 後金에는 交隣한다는 원칙을 유지하여 왔다. 이로 인해 歲幣․刷還․開市등의 문제를 놓고 크고 작은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이러한 원칙이 유지되는 한 和約을 지속한다는 것이 조선 정부의 기본 입장이었다.3) 그러나 1633년 後金이 ‘중국의 사신으로 대우할 것[待以華使]’, ‘군대와 병선을 제공할 것[借兵助船]’을 요구하자 인조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던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朱子學名分論과 華夷論에 입각한 對明義理論에 어긋나는 요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國王仁祖를비롯한 官人․儒者일반의 지배적인 정서였다.
그러나 丁卯年和約은 滿洲族국가인 後金이 滿․蒙․漢을 아우르는 多民族國家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그들의 지향과 모순되는 것이었으므로, 만주족의 성장에 따라서 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이었다. 1633년에는 明將 孔有德과 耿仲明등이 투항하고, 1634년에는 尙加喜가 黃鹿島에서 항복함으로써 후금의 남쪽 도서 지방에서 明軍의 반항이 사라지자 後金은 蒙古族정벌에 역량을 집중하여 같은 해 6월에는 챠하르[察哈爾]를 정벌하여 전 몽고 부족을 병합하였고, 1635년에는 챠하르 정벌에 참여하고 있던 호쇼 베일레 多爾袞등이 元의 ‘傳國玉璽’를 입수하였다. 이들이 ‘制告之寶’라고 새겨진 이 옥새를 입수한 것에 대하여 ‘皇上의 洪福’이고 ‘一統萬年의 瑞氣’라고 흥분하였던 것은 바로 그러한 多民族國家를 지향하는 만주족의 오랜 숙원을 실현시킬 수 있는
3) 정묘호란과 그 이후의 주화․척화 논쟁에 대해서는 金容欽, 「丁卯胡亂과 主和․斥和論爭」, 韓國思想史學 26, 韓國思想史學會, 2006b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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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그러한 지향은 1636년 4월에 국호를 大淸, 홍타이지를 寬溫仁聖皇帝라고 칭하고, 建元하여 연호를 崇德이라고 칭하는 것에서 일단 성취되었다.4) 그 과정은 홍타이지의 부하들인 만주족 유력 부족들과 몽고족 등에 의한 추대의 형식을 취하였는데 후금은 여기에 朝鮮이 가담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몽고족을 평정한 이후 조선에 대한 외교 공작이 전개되었다.
후금이 傳國璽를 얻은 사실은 1635년 연말에 秋信使 박로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이어서 差人馬夫大가 와서 汗의 國書를 전하였다. 여기서는 명나라의 孔有德․耿仲明․尙加喜세 장수가 ‘歸附’하였고, 蒙古가 ‘歸來’하여 ‘서북 천하의 반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여 위력이 날로 융성’하게 되었다고 만주족의 성장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別紙에서는 ‘大明臣下’들이 ‘君上을 欺誕’한 사실을 적시하면서 인조에게 ‘大明의 國運’이 쇠퇴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고, 자신들은 명나라가 기울어져 무너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하였다.5) 즉 자신들의 국력은 성장하고 있는 반면 명나라는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朝鮮이 고수하고자 하는 對明義理論은 현실과 괴리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이때는 仁祖妃가 産室廳에서 갑자기 승하하여 國喪중인데다가 후금의 국서에 특별히 조선을 자극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조선은 答書에서 ‘근래에 후금의 국세가 날로 성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정중하게 답하고 歲幣에 대해서만 변명했을 뿐 別紙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4) 崔韶子, 앞의 책, 1997, 314~5쪽;金鍾圓, 앞의 책, 1999, 153쪽, 165쪽 참조.
5) 仁祖實錄 卷31, 仁祖13년 乙亥12월 丙午, 國史編纂委員會간행 朝鮮王朝實錄 34책 620쪽(이하 ‘34-620’으로 줄임), 76(판심쪽수) ㄱ(우측면)~ㄴ(좌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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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듬해 丙子年初에 歲幣를 증액해 주는 선에서 미봉하고자 하였다.6)
그런데 그 해 2월에 龍骨大 등이 國喪에 조문한다는 핑계로 다시와서 汗의 國書와 함께 ‘金國執政八大臣’과 ‘金國外藩蒙古’ 명의의 서신을 전달하려 하자 이의 접수를 거부하였다.7) 이때는 용골대가 황제 추대 문제를 의논하러 왔다고 義州府尹에게 미리 밝혀 둔 상태였으므로 이들이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조정에서는 斥和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司諫 趙絅은 몽고인[西㺚]을 ‘國門’에 들이지 말 것을 청하고, 掌令 洪翼漢은 金差를 효수하라고 극언하였으며, 弘文館상소에서는 拘禁하여 上京하지 못하게 하라고 청하자, 備局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金差를 접견하지 말 것을 청하여 仁祖의 동의를 이끌어냈다.8)
용골대 등이 입경한 뒤에는 조정에서 한창 그 회답할 일을 논의하는 중에 大司諫 鄭蘊은 우물쭈물 구차한 말을 하여 구실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청하였고, 太學生 金壽弘등 138인과 幼學 李亨基는 상소하여 金差를 斬하고 國書를 불태워서 大義를 밝히라고 요구하였다.9) 이때 完城君 崔鳴吉이 上箚하여 ‘관례에 따른 서신’에는 답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은 거부하면 된다면서 金差는 만나도 무방하며, 西㺚도 박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강경한 조정 분위기를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으며, 결국 금차가 도망치듯이 서울을 떠나게 만들었다.10)
6)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2월 己卯, 34-623, 5ㄱ~ㄴ.
7)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2월 己亥, 34-625, 10ㄱ~ㄴ.
8)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2월 丙申, 34-624~5, 8ㄴ~10ㄱ.
9)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2월 己亥․庚子, 34-625, 10ㄴ.
10)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2월 辛丑, 34-625~6, 10ㄴ~11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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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조야에서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졌다. 인조는 언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금차의 요구를 거부하였음을 밝히고 ‘忠義之士’와 ‘勇敢之人’의 분발을 촉구하는 下諭文을 八道에 공포하였다.11) 이어서 兩司에서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廟堂의 신하들이 대책 마련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공격하고, 군사 조발과 군량 및 군수를 마련하기 위한 제안을 쏟아내었다. 禮曹判書 金尙憲은 국가 종사의 안위를 安州城의 승부에만 걸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비변사의 무대책을 비판하였고,12) 副提學 鄭蘊은 인조에게 松都에 進駐할 것을 요구하는 차자를 거듭해서 올렸으며13) 參議 金德諴은 平壤으로 進駐할 것을 청하였다.14)
이러한 흐름은 같은 해 4월에 後金이 ‘大淸’으로 국호를 고치고 皇帝즉위식을 거행할 당시에 그 곳에 있던 春信使 羅德憲과 回答使 李廓이 義理에 의거하여 이를 거부하고 자결하지 못하였다고 이들을 梟示할 것을 주장하는 데서 절정을 이루었다.15) 인조는 淸나라가 황제를 칭한 이후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면서 ‘수천리 국토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가 한결같이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그들의 모욕을 감수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下敎로 표현하였다.16)
11)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3월 丙午, 34-626, 11ㄴ.
12)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3월 壬子, 34-627, 13ㄴ~14ㄱ.
13)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3월 庚申, 34-628, 15ㄱ.
14)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民族文化推進會 간행, 국역 연려실기술 , 제Ⅵ권 542쪽(이하 ‘Ⅳ-542’로 줄임).
15) 이때 보낸 國書는 弔祭에 대하여 정중하게 사례하고, 세폐와 함께 문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別書에서 金差가 도망치듯 서울을 떠난 일에 대하여 해명한 뒤, 황제로 추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 마침 즉위식이 있었는데 이들은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반열에의 참가를 죽기로 거부하고 황제 명의의 국서를 원본은 버리고 내용만 베껴 가지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의주에 도착하자 평안도 유생을 비롯한 평안감사 洪命耈등이 상소하여 梟示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吏曹判書 金尙憲조차도 ‘죽이기까지 할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三司와 백관, 유생들이 연이어 상소하여 목을 베기를 청하였다. 備局과 仁祖는 이들이 ‘분명히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중론에 밀려’ 羅德憲은 白馬山城에, 李廓은 劒山山城에 徒刑 3년의 定配에 처하는 것으로 이들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故事本末「丙子虜亂丁丑南漢山城」, Ⅵ-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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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나라에 答書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大司憲 金尙憲이 ‘다시 화친한다면 나라의 체통이 전도될 것이다’고 반대하고, 右議政 洪瑞鳳이 ‘답서를 보내는 것은 무익할 것 같다’고 말하여 중지되었다가 최종적으로 檄文을 보내는 것으로 결론지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작성된 장문의 檄書에서는 기존의 ‘明에는 事大하고 後金에는 交隣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强弱과 成敗를 따지지 않고 ‘中朝’에 대한 ‘臣節’을 변한 적이 없다면서 淸나라를 황제로 섬길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丁卯年에 和約을 맺은 것은 ‘국경을 보존하고 민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간 後金의 ‘강제 매매와 약탈’에 의해 ‘민의 힘이 다하고 시장에는 남은 물건이 없을 지경’이어서 兵禍를 당하여 망한 것과 다를 것이 없어지자 ‘國人’이 모두 분노하여 화친을 잘못이라고 여긴다고 비판하고, 병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兄弟之國’을 협박하니 ‘의리를 지키다가 병화를 당하는 것’은 그 兵禍가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民心이 떠나지 않을 것이므로 或 ‘國命’을 보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여 조선의 臣民이 모두 淸나라를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17)
그리고 丙子年에 主和․斥和兩진영 모두에서 變通論을 주장하는 논자가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모두 수용하지 않았다. 6월에는 尹煌과 金時讓의 變通論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윤황의 상소에서는 陵寢의 五享을 혁파하고 御供物膳을 減損하는 것만 채택되었으며, 김시양의 ‘良妻幷産之法’ 혁파에 대해서는 인조가 깊은 관심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洪瑞鳳이 ‘名分에 크게 해롭다’고
16)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5월 己巳, 34-634, 27ㄴ.
17)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6월 庚寅, 34-635~6, 30ㄱ~31ㄴ. 이 격서는 義州府尹 林慶業이 馬夫大에게 전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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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하고 金瑬역시 ‘軍役에는 충정해도 되지만 科擧를 보게 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18)
大司諫 尹煌이 8월에 다시 올린 상소를 인조가 비변사에 내리자 비변사에서는 城池, 兵器, 足食, 足兵 등의 일은 ‘民力이 감당하지 못하여 혹시 內潰에 이르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고, 宗室 이하 市民과 公私賤까지 모든 사람을 兵士로 만드는 것은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 것’이라면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인조는 만약 적군이 깊이 쳐들어온다면 ‘體臣도 重責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답하였다.19)
9월에 大司諫 李植이 올린 主和變通論을 주장한 상소에 대해서도 비변사가 난색을 표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당시 조선 정부가 전쟁에 대한 대응책을 전혀 강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武器와 병력 충원, 성지의 수축과 보수에 대해 논의하고 일부는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으며,20) 都元帥 金自點을 중심으로 서쪽 변경을 山城 中心으로 방어하는 방어 전략도 수립해 놓았다.21)
문제는 그것이 누가 보아도 淸의 침략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분명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인조 역시 점차로 이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7월에 平安監司 洪命耈가 義州와 昌城의 城池수축을 건의하는 장계를 올렸는데, 體察使 金瑬는 義州城은 수
축해야 하지만 昌城수축에는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인조는 정묘호란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제서야 성지
18)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6월 辛卯, 34-636, 31ㄴ~32ㄱ.
19)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8월 辛卯, 34-644, 14ㄴ~15ㄱ, “答曰敵若深 入則體臣亦難免重責. 愼勿如前怠忽.” 羅萬甲의 丙子錄 에서 金瑬가 본래 斥和를 주장하다가 和議로 돌아서게 만들었다는 인조의 말은 아마 이것을 지칭하는 듯 하다( 丙子錄 , 尹在瑛譯, 明文堂, 1987, 19쪽).
20) 金鍾圓, 위의 책, 1999, 179~183쪽 참조.
21) 李泰鎭, 앞의 글, 1977,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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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축을 논의한다고 비판하고 오합지졸을 갖고 평지 대성을 지킬 수 없는데 묘당이 주관도 없이 이에 따르려 한다고 비난하였다.22) 9월 초에는 김류에게 의주 방어 대책을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미리 대비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지킬 수 있다고 하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詰難하였다.23)
2) 斥和變通論과 主和變通論
그렇다면 과연 당시 인조 조정에서는 스스로 표명한 斥和論에 걸맞은 국가 방위 역량을 갖추고 있었을까? 丁卯年和約이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국방력은 거의 강화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인조를 포함한 당시 뜻 있는 識者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국방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병사를 많이 확보하고 군사 조직을 창설하는 것으로 강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위해서는 왜란 이후에 마비된 국가 체제 자체를 새롭게 정비해야만 하였으며, 그것은 制度의 變通과 改革을 요구하고 있었다.
22)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7월 乙丑, 34-640, 7ㄱ. 義州와 昌城은 병자호란 당시 淸軍이 경유한 두 경로의 요충지, 바로 그곳이었다(柳在城, 앞의 책, 1986, 143쪽, 청군의 이동경로 지도 참조). 평안감사 홍명구가 이 두 성지의 수축을 건의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미 시기를 놓친 데다가 인조의 말대로 설사 축성한다고 하더라도 平地大城이었으므로 방어를 보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3)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乙巳, 34-645, 17ㄱ. 인조가 의주성 방어대책을 묻자 김류는 白馬山城의 軍器와 軍粮및 강변의 戍卒을 의주성으로 들여보내면 지킬 수 있다고 답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실정과는 전혀 동떨어진 말이었기 때문에 인조가 김류를 힐난한 것이었다. 대체로 의주성은 성곽이 안전하고 7천의 병력이 있으면 지킬 수 있다고 말해지고 있었는데, 淸이 침략했을 당시 淸北防禦使 林慶業은 3천의 병력으로 白馬山城을 수비하고 의주성은 비워두었으므로 청군이 무혈 입성하였다(柳在城, 1986, 앞의 책, 136~137쪽 참조). 아마도 인조가 김류에게 기대한 말은 의주성은 지킬 수 없다는 솔직한 답변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것을 전제로 김류가 주화론을 책임지고 제기해 주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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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을 전후하여 李貴일파의 이를 위한 노력은 金瑬일파 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李貴․崔鳴吉 등 主和論진영에서
의 變通과 改革을 위한 시도가 守法論者들에 의해 좌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4)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국방력이 강화되지 못한 것은 그것의 필연적 귀결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斥和論진영에서도 變通論이 강하게 제기되어 주목을 요한다. 尹煌(1571~1639), 兪伯曾(1587~1646), 趙錫胤(1606~1655)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尹煌은 당시에 各樣의 弊政으로 인해 ‘국가를 좀먹고 민을 병들게’ 한 상태여서 ‘更張’하지 않으면 외적의 침입이 없더라도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절박한 위기의식을 표출하였다. 그는 인조가 위기의식을 갖고 크게 결단하여[大警動大作爲] 지금까지의 폐습을 혁파하지[痛革因循之習] 않으면 인조와 신하들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국가가 ‘멸망에 이르는 화’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25)
윤황은 일찍부터 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워 民力이 다하고 원한이 쌓여 민들이 ‘叛亂을 일으킬 생각을 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지적해 왔다.26) 그는 당시의 ‘急務’로서 부세를 경감하여 民心을 위로해야 하는데, 그 근본은 ‘헛된 비용을 없애고 누적된 폐단을 更張하는 것’에 있다면서 빨리 ‘스스로에게 죄를 돌리고 애통한 뜻을 표하는 하교’를 내려 위로 宗廟에 고하고 아래로 中外에 下諭한 뒤, 먼저 太廟奏樂과 陵寢瀆祀를 정지하여 위기에 대처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宦官과 宮妾을 내보내고 內需司의 帑藏을 열어서 節約을 몸소 실천하라고 요구하였다.
24)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金容欽, 앞의 글, 2006a 참조.
25) 八松封事 , 「論節省修攘疏」(丙子2월 초8일), 50~51쪽.
26) 八松封事 , 「擬論節省振作啓辭」(戊辰), 35~36쪽;同, 「諫院請引接臣僚啓辭」(丙子2월 초2일), 48쪽;同, 「絶虜後申論振作修攘疏」(丙子3월 초1일), 60쪽, ‘第念方今賦役煩重民力殫窮怨咨入骨思亂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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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進上貢物과 其人方物은 물론 안으로는 各司諸衙門, 밖으로는 諸道의 各營, 各官의 갖가지 헛된 비용을 모두 혁파하고, 諸 宮家의 折受에 의한 蘆田과 海澤의 免稅의 폐단 등도 일체 제거하여 전국의 백성이 國王에게 크게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분명히 알게하여 백성을 鼓舞· 振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7)
윤황의 이러한 주장은 道學的經世論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아닌듯이 보이는데 물론 그가 여기에서 그친 것은 아니었다.28) 이것은 仁祖의 ‘大有爲之志’, 즉 개혁 의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말하자면 구체적인 제도 개혁을 위한 전제로서 요구한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나아가서 軍役制度의 모순과 貢納制度의 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해소함으로써 兵士를 확보하고 軍粮을 조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軍役制度에 대해서는 그것이 편중되는 폐단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즉 外方의 營鎭을 비롯한 各衙門의 水陸諸軍에 대한 침탈이 심하여 民이 군역을 기피하므로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는 자들은 모두 빠지고 빈궁한 無告之民만 軍伍에 편성된다. 이로 인해 가정이 파산한 자가 10 중 8․9이고, 남아 있는 자들도 飢寒困苦에 시달려 怨氣가 배 속에 가득 차 있으니 이런 군대가 100만이 있다 한들 戰陣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無兵之國’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윤황은 국왕이 먼저 宮掖近習의 小壯者부터 징발하고, 이어서 宗室百官, 儒生, 胥吏, 市民, 公私賤까지 군대로 징발할 것을 제안하였다. 選兵할 때 豪門盛族에서 먼저 선발한 뒤에 小民에게 미친다면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감히 군역을 기피할 생각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고려왕조의 예를 들면서 朝臣儒士는 물론 太學生들까지도 군역을 져야 함을 분명히 하였다.29)
27) 八松封事 , 「絶虜後申論振作修攘疏」(丙子3월 초1일), 60쪽.
28) 도학적 경세론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는 金容欽, 앞의 글, 2006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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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의 田政에 대해서는, 세금은 가벼운데 공납이 무거운데다가 기타 雜徭가 貢納보다 무거운데, 田稅는 국가 수입이 되지만 貢納과 雜徭는 대부분이 防納者인 奸人猾吏에게 돌아간다면서, 모든 進上貢物을 혁파하고 중국의 예에 따라서 시중에서 사들여서 조달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大同法을 주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윤황은 여기에 冗食과 浮費를 줄여나간다면 田稅수입 중에서도 상당 부분을 절약할 수 있어 軍餉을 넉넉하게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30)
정묘호란 당시부터 尹煌과 함께 斥和論을 주장하였던 兪伯曾 역시 병자호란 직전의 國勢가 각종 제도적 모순으로 인해 ‘안팎의 모든 백성’이 ‘반란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어서 外亂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內亂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31) 당시의 ‘急務’는 ‘때에 맞추어 경장하여 일에 따라 (제도를) 적합하게’ 하는 것에 있으며, 法制를 개혁하지 않으면 아무리 도덕적 수양에 전념하더라도 국세를 만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2)
尹煌보다 한 세대의 후진이었던 趙錫胤도 당시의 상황을 弊政은 쌓여 있고 民心은 離叛되어 있어 ‘大警動大振作’이 없이는
29) 八松封事 , 「擬上疏」(辛未), 43~44쪽. 이것은 결국 士族收布論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인조초에 나온 이귀․최명길 등의 사족수포론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30) 八松封事 , 「擬上疏」(辛未), 44~45쪽. 그는 稅入과 貢物로 인한 歲出을 수치를 들어가면서 비교하여 이를 분석하기도 하고(同, 「絶虜後申論振作修攘疏」, 61~62쪽), 낭비를 줄이면 1만 석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同, 「論節省修攘疏」, 54쪽). 그렇지만 역시 이전에 시행된 大同法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한계를 갖는다. 윤황의 이러한 변통론을 대동법과 관련지어 거론한 논고로서 李廷喆, 「17세기 朝鮮의 貢納制改革論議와 大同法의 成立」, 고려대 박사논문, 2004, 77~79쪽 참조.
31) 翠軒疏箚 卷2, 「請立大志勗大臣開言路疏」(乙亥2월 5일), 1쪽.
32) 翠軒疏箚 卷1, 「請振作修攘疏」(癸酉正月초3일),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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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될 것으로 보고 制度의 變通과 更張을 주장하였다.33) 이들이 주장하는 폐정 개혁의 내용은 윤황의 주장과 대동소이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윤황의 주장을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큰 조치’34) 또는 ‘保民固國’할 수 있는 ‘忠言至計’라고 보고35) 그것의 실천을 인조에게 촉구하였다.
이들은 모두 인조를 비롯한 당시 신료들의 개혁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仁祖가 결단하여 制度改革을 실천에 옮기라고 주장하였다.36) 물론 여기에는 당시 당국하고 있던 廟堂과 大臣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주요 공격 대상이었지만, 인조의 소극적인 태도 역시 끊임없는 비판에 직면하였으며, 言官들은 물론 士類일반에 만연한 保身主義와 名分主義에 의한 무책임성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37) 이처럼 이들이 제도 개혁을 적극 주장하고 이를 거부하는 지배층 전반을 비판한 것은 斥和守舊論者와는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丁卯胡亂이후 制度改革이 이루어지지 못한 책임이 主和論에 있다고 보고 主和論者들을 비판하였다.38) 尹煌은 丁卯年講和이후 10년이 지났지만 ‘國勢가 나날이 쇠약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나빠져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和議’가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나태하게 만들고, 국가를 위한 계책을 좌절시켜 국가를 약화시켰으며’, 결국 ‘사람들의 의기를 꺾어버렸기’
33) 樂靜集 卷7, 「請責却虜使奮發修攘疏」(丙子), 叢刊105-352, 2ㄴ.
34) 翠軒疏箚 卷2, 「因辭職兼陳所懷疏」(丙子6월 3일), 30쪽.
35) 樂靜集 卷7, 「請責却虜使奮發修攘疏」(丙子), 叢刊105-353, 4ㄱ~ㄴ.
36) 八松封事 , 「論節省修攘疏」(丙子2월 초8일), 53~54쪽; 翠軒疏箚 卷1, 「請振作修攘疏」(癸酉正月초3일), 44쪽; 樂靜集 卷7, 「請責却虜使奮發修攘疏」(丙子), 叢刊105-355, 8ㄱ.
37) 八松封事 , 「擬論節省振作啓辭」(戊辰), 37~8쪽; 翠軒疏箚 卷2, 「請立大志勗大臣開言路疏」(乙亥2월 5일), 6쪽; 樂靜集 卷7, 「應旨陳時務疏」, 叢刊 105-356, 10ㄱ~ㄴ. 이들은 또한 이러한 신료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최고 통치자로서 인조의 잘못된 자세에서 연원하고 있다고 한결같이 지적하였다.
38) 八松封事 , 「命招入對啓辭」(丙子8월 초2일), 68~69쪽; 樂靜集 卷7, 「應旨陳時務疏」, 叢刊105-358, 1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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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라고 몰아부쳤다.39) 이것은 李貴․崔鳴吉등 主和論者들의 制度改革을 위한 노력을 몰각한 소치였다. 이들에게는 主和論=守舊라는 등식만이 존재할 뿐 主和變通論者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식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고 속에는 논리적 모순과 비약이 존재하였다. 丙子年을 전후한 시기의 朝鮮이 국가 체제가 마비되어 ‘안팍의 모든 백성’이 ‘난리를 일으킬 생각’[思亂]을 한 것이 이미 오래 되어, 제도 개혁이 없이는 ‘內亂이 반드시 일어날 상황’이었다면 ‘保民과 養兵’, ‘安民과 禦敵’을 병행하는 것은40)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保民과 安民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바로 養兵과 禦敵이기 때문이다. 설사 保民과 安民을 위한 제도 개혁이 착수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養兵과 禦敵을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시간적 여유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兪伯曾에게서는 이러한 모순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존재하였지만 ‘奮然히 振作’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서 ‘非常之變’을 만나면 ‘非常之擧’에 의해 安民과 禦敵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비약하였다.41) 尹煌에게서는 그러한 모순 자체에 대한 인식이 보이지 않으며, 인조가 한번 결단하기만 하면 ‘士民이 感發’하여 모두 ‘상관을 친하게 여겨 윗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이 마땅함’을 알고 ‘의리를 찾는 목소리가 바람처럼 일어나서 사기가 저절로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42)
39) 八松封事 , 「諫院請警動振作箚」(丙子8월 20일), 74쪽.
40) 八松封事 , 「論節省修攘疏」(丙子2월 초8일), 51쪽; 翠軒疏箚 卷2, 「擬玉堂箚」(丙子7월 초5일), 34쪽.
41) 翠軒疏箚 卷2, 「因辭職兼陳所懷疏」(丙子6월 3일), 30쪽;同, 「請下敎罪己感動民心疏」(丙子4월), 19쪽.
42) 八松封事 , 「論節省修攘疏」(丙子2월 초8일), 55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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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윤황과 조석윤은 江都移御論, 江都保障論을 비판하였다. 윤황은 우리나라의 土地와 人民이 ‘오랑캐보다 적지 않으며’ 自古로 ‘정예군대가 있는 곳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당시에는 약해져서 攻城이나 野戰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영토와 집안을 지키지 못할 이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작은 오랑캐에게 제압당하여’ ‘自保’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개탄하였다. 이어서 그는 ‘興發之計’를 沮害하고 ‘奮厲之意’를 꺾어 버리는 것이 바로 江都保障論이라고 단언하였다. 즉 인조의 자강을 위한 의지를 나태하게 만들고 신료들이 內修外攘을 위한 계책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43)
그래서 윤황은 강화도에 있는 군량과 무기를 모두 서북 지방으로 옮겨 배치하고 行宮을 불태워버려야만 國勢가 일어나고 民의 방어 의지가 확고해져서 ‘喪亡之禍’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서 鄭蘊의 개성에 進駐하라는 제안을 인조를 위한 ‘深計’라고 칭찬하고 자신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平壤에 進駐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면 四方의 勤王之兵과 八路의 忠義之士가 군량을 싸들고 구름같이 모여들어 병사와 군량이 부족해질 걱정이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4)
趙錫胤역시 강화도에 數萬의 精兵을 모아들여서 헛되어 무기를 쌓아놓고 군량을 낭비하는 동안 적은 內地를 유린하여 億萬生
靈이 魚肉이 된다면 국가가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느냐고 江都保障論을 비판하였다.45)
이러한 주장은 江都保障論이 鎭管體制復舊論과 함께 제기된 것이라는 점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나온 것으로서 邊方防禦論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주장이었다.46) 이것은 滿洲族의 鐵騎에 대항하여 변방방어가 불가능하다는 당시의 군사적 상식을 몰각한
43) 八松封事 , 「諫院請警動振作箚」(丙子8월 20일), 80ㄱ.
44) 위와 같음, 80ㄴ, 81ㄴ, 82ㄱ.
45) 樂靜集 卷7, 「應旨陳時務疏」, 叢刊105-365, 27ㄱ.
46) 이 시기의 방어전략과 관련하여 강도보장론․진관체제 복구론과 변방방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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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이었으며, 국가체제의 재정비 없이 국왕의 투지만 갖고도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지극히 관념적 인식의 소산이자, 자신들이 제기한 變通論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주장이었다. 丙子年당시의 斥和論은 모두 이러한 군사적 상식에 대한 몰이해와 논리적 모순에 기초한 관념적 주장이었다.
斥和變通論者들의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 대해서는 이미 李植(1584~1647)에 의해 분명하게 지적되었다. 李植은 이 시기의 여러 논자 중 修身위주 道學的 經世論의 문제점을 가장 분명하게 비판한 사람에 속한다. 反正직후부터 變通과 更張의 필요성을 극론하였던 그는47) 丙子年에도 이를 주장하면서 인조가 道德的 修養에만 치중하기 때문에 變通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變通이란 弊政을 更張하고 ‘姦蠹’를 뿌리뽑아서 ‘安民守國’하는 것이지 ‘작은 비용이나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착하기만 해서는 정치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孟子의 말을 인용하여 인조가 苟且하고 姑息적인 政治를 답습하여 ‘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나라를 병들게’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48)
이어서 軍役不均의 폐단을 극론한 뒤, 公卿이하 한 사람도 從軍하지 않는 자가 없게 하는 것을 ‘大律令’으로 삼고 정3품 이상은 將帥, 종6품 이상은 將官, 7품 이하는 朝士軍, 유생은 儒生軍, 武學은 武學軍이라 각각 칭하고, 기타 雜職諸衛와 市民, 坊民, 胥吏, 典僕 등에게도 모두 각각 호칭을 붙여 ‘모든 민을 병사로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盡民爲兵]의 대립이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에 대응되는 사정에 대해서는 金容欽, 「朝鮮後期仁祖代政治論의 分化와 變通論」, 연세대 박사논문, 2005, 제4․5장 참조.
47) 澤堂集 卷2, 「癸亥冬論邊乞自效疏」, 叢刊88-296~298;同, 「乙丑秋應旨陳時弊疏」, 叢刊88-298~303.
48)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甲寅, 34-646, 19ㄱ~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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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인조의 결단으로 ‘보름이나 한 달 사이에’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렇게 한 뒤에야
西道의 進駐나 江華島의 포기를 논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도 않았는데 斥和와 主戰을 주장하는 것은 ‘村童野夫’가 비웃을 일이라고 斥和論을 비판하였다.49) 따라서 이러한 이식의 주장은 主和變通論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식은 또한 군량의 조달 방안으로서 大同法을 명시적으로 제안하고, 조정 신료들이 變通을 꺼리고 ‘常規를 묵수하기만 힘쓴다’고 守法論者들을 비판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李貴와 함께 主和變通論을 견지하였던 崔鳴吉은 정묘호란으로 號牌法이 폐기된 이후 李曙와 함께 軍籍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하여 庚午年에 이를 완성하였다.50) 壬申年 禮曹判書로서 元宗追崇을 성사시킨 이후 癸酉年에는 吏曹判書로서 官制變通을 다시 추진하다가 金瑬의 반발을 받았으며,51) 乙亥年에는 戶曹判書로서 甲戌量田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鄭蘊의 반발에 직면하였다.52) 그리고화폐 사용을 적극적으로 건의하다가 비변사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며,53) 연말에는 결국 인조로부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비판을 받고 모든 실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54)
최명길은 丙子年 4월에 兵曹判書로 임명되었으나 더 이상 變通論을 주장하지 않고 江都移御를 건의하였지만 廟堂에 의해 거부되었다.55) 당시는 이미 變通論을 건의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본 것이 틀림없다.
49) 위와 같음, 34-647, 20ㄱ~21ㄱ.
50) 明谷集 卷29, 「先祖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行狀」, 叢刊154, 455, 12ㄱ~ㄴ.
51) 仁祖實錄 卷28, 仁祖11년 癸酉7월 壬寅, 34-527, 33ㄴ~34ㄴ.
52) 仁祖實錄 卷31, 仁祖13년 乙亥10월 癸卯, 34-613, 63ㄴ. 甲戌量田에 대해서는, 吳仁澤, 「17․18세기 量田事業硏究」, 釜山大박사논문, 1996, 55~63쪽;
崔潤晤, 「朝鮮後期土地所有權의 發達과 地主制」, 延世大박사논문, 2001, 60쪽 참조.
53) 仁祖實錄 卷31, 仁祖13년 乙亥7월 丙寅, 34-604, 45ㄱ;同, 9월 壬戌, 34-611, 58ㄴ.
54) 仁祖實錄 卷31, 仁祖13년 乙亥, 12월 丙寅, 34-616, 68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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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人 가운데 金時讓(1581~1643)은 癸酉年 體察使겸 都元帥로서 絶和를 내용으로 하는 國書를 갖고 후금에 가는 回答使 金大乾을 의주에 구류시키고 主和를 주장하였다가 처벌받은 일이 있었는데,56) 丙子年에는 특히 私賤제도의 폐단을 극론하면서 變通을 주장하였다.
그는 호패법을 시행할 당시 군역으로 정한 자가 겨우 15만여 명이었는데, 私賤은 40여만 명이었다면서, 만약 ‘良妻幷産之法’을 革罷하면 20년 안에 强兵 10여만 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당시와 같이 위급한 때에 이러한 것을 變通하지 않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려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하였다.57) 이렇게 본다면 金時讓 역시 主和 變通論者의 범주에 넣어도 좋을 것 같다.
이처럼 병자호란 직전에 조정에서는 주화론자는 물론이고 척화론자 가운데서도 변통론을 주장하는 논자가 있었지만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방어 역량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斥和義理論이 조야를 지배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주화론자들이 등장하여 어떤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55)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6월 丙戌, 34-635, 29ㄴ, “完城君崔鳴吉上箚請移御江都廟堂以爲不可事寢不行.” 이때 묘당은 金瑬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김류는 3월에 上四道都體察使가 되고(同, 34-628, 16ㄴ), 7월에 領議政이 되는 등(同, 34-639, 4ㄴ) 병자년의 비변사를 주도하였다. 이때 최명길은 兵曹判書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明谷集 卷29, 「先祖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行狀」, 叢刊154-457, 16ㄴ).
56) 金容欽, 앞의 글, 2006b, 183~4쪽 참조.
57) 仁祖實錄 卷32, 仁祖14년 丙子4월 甲午, 34-630, 19ㄴ~20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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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主和· 斥和논쟁과 丙子胡亂의 발발
1) 主和· 斥和논쟁과 崔鳴吉의 名實論
병자년 조선 조정을 지배하고 있던 斥和論 일변도의 분위기에 변화를 가져 온 것은 明나라 장수들에 의해서였다. 먼저 7월에는 副摠白 登庸이 서울에 와서 청나라 쪽 정황을 탐지해서 督府에 알려줄 것을요청하였다.58) 이어서 9월 초에는 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監軍 黃孫茂가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서울에 왔는데, 칙서 전달은 구실일 뿐이었고 사실은 斥和論 일변도인 조선 조정에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을 회피할 방도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59)
그는 칙서와 함께 자신이 생각하는 조선의 방어 전략을 개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조선이 청나라에 間諜을 파견하여 청나라 내부를 교란시키고 보다 더 정확한 정세 판단 위에서 방어 전략을 재정비할 것을 제안하였다.60)
이것은 꼭 反間計 그 자체를 성사시키고자 한 것이라기보다는 방어대책이 부실한 상황에서 무조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의 무모함을 경고하고 최소한의 방어력이 정비되기까지 외교를 통해서 시간을 끌어보라는 제안으로 이해된다.61)
58)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7월 己巳, 34-641~642, 9ㄴ~10ㄱ.
59)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壬寅, 34-644, 15ㄱ~ㄴ.
60)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甲辰, 34-644, 15ㄴ~16ㄱ.
61) 이러한 황감군의 의도는 그가 가도로 돌아가서 보낸 回帖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0월 乙未, 34-652, 30ㄱ 참조). 여기서 그는 청북 지역이 ‘沿途가 險隘’하고 ‘長江’과 ‘天塹’을 갖춘 천험의 요새지인데 신하들이 ‘經濟’에 어두워 방어 준비를 게을리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有君無臣’이라고 조선 조정의 신하들을 비판하였다. 다른 자료에서는 “見貴國人心軍容器械決難當彼强虜姑勿絶覊縻之計”( 尊周彙編 卷3, 崇禎9년 冬10월, 李離和編, 朝鮮事大斥邪關係資料集 1, 驪江出版社影印本, 1985, 230쪽
참조. 이하 尊周彙編 의 쪽수는 모두 이 영인본에 의거함)라고 황감군의 의도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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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主和論과 斥和論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副摠白登庸의 정탐 요청은 인조가 면전에서 난색을 표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칙서를 전달하면서 나온 황감군의 게첩에서 동일한 주장이 반복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심각하게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領議政 金瑬, 右議政 李弘冑, 戶曹判書 金藎國은 偵探과 行間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信使파견도 거부하였다. 兵曹判書李 聖求와 漢城判尹 崔鳴吉은 偵探과 行間은 물론 信使도 파견할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仁祖는 偵探과 行間은 시도해 볼만하다는 입장이었다.62)
그러자 崔鳴吉이 상소하여 金瑬 등의 애매한 태도를 비판하였다. 먼저 그는 斥和論 가운데 尹煌의 상소문만은 ‘언론이 매우 바르고 방략을 채탤할 만하다’고 긍정하고, 윤황이 제기한 변통론을 거부한 廟堂을 ‘定算’이 없다고 비판하였다.63) 즉 묘당은 윤황의 주장을 수용하여 ‘戰守之計’를 결정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주장을 수용하여 ‘緩禍之謀’도 도모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이 양자가 동시에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金瑬의 安州城防禦論을 비판하고, 平安兵使는 義州城에서 승부를 거는 일전에 대비해야 하며, 동시에 瀋陽에 國書를 보내서 淸의 현황을 정탐하고 반응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명길의 이 상소로 인해 비변사에서는 譯官 朴仁範과 權仁祿을 瀋陽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 이에 대해 三司言官들의 반대
62)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乙巳, 34-645, 16ㄴ~17ㄱ; 承政院日記 53冊, 仁祖14년 丙子9월 4일 乙巳, 國史編纂委員會간행 영인본 3책 445~6쪽(이하 ‘3-445~6’으로 줄임). 이 두 기사는 발언 순서나 내용에 약간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각각의 입장을 이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63)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丙午, 34-645, 17ㄱ~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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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가 잇달았다. 弘文館에서는 校理 趙贇, 修撰 吳達濟등이 상소하여 淸과 절교하여 信使를 통하지 않으니 行間의 계책은 쓸 수 없다면서 황감군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4) 司諫院에서는 獻納 李一相, 正言 兪榥․洪瑑 등이 ‘偵探한다는 명분을 빌려 差使를 오랑캐에게 보내고 國書를 부치는 것’은 위로는 ‘皇朝를 배반하는 것’[負皇朝]이고 아래로는 ‘吾民을 기만하는 것’ [欺吾民]이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司憲府의 掌令 金霱․閔光勳, 持平 閔應協, 執義 林堜등이 동조하였다.65) 삼사 언관 가운데는 司諫 鄭太和가 유일하게 역관 파견에 찬성하였는데, 그는 예로부터 교전 중에도 서로 사신을 통하여 적의 동정을 偵探하고 國書를 부치기도 했으니 묘당의 결정은 소견이 없지 않다고 주장하였다가 홍문관의 처치로 체차되었다.
삼사의 비난이 이어지자 領議政 金瑬와 右議政 李弘冑가 상차하여 ‘謀國之道’에는 한 가지만 고집할 수 없다면서 信使는 결코 들여보낼 수 없지만 역관을 보내어 정탐하는 것은 ‘權宜處變之道’인데 삼사가 ‘負皇朝欺吾民’이라고 비난하니 공무를 집행할 수 없다면서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인조는 大臣의 말이 ‘이처럼 연약해서는 안 될 것 같다’라고 그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불쾌감을 표출하였다.66) 그러나 삼사의 집요한 비판으로 결국 비변사에서는 역관을 의주에 머물게 하고 논의가 결말이 나는 것을 기다려 들여보낼 것을 주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67) 삼사에 의해 비변사의 결정이 번복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같은 날 열린 경연에서 知事 崔鳴吉은 국가의 긴급한 일이 이와 같이 지연되는 것을 개탄하고, 年少輩들의 氣節은 취할만하지만 그들의 말을 모두 들어줄 필요는 없다면서 行間을 위한 역관을 속히 파견하라고 촉구하였다.
64)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己酉, 34-645~6, 17ㄴ~18ㄱ.
65)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丙辰, 34-647~8, 21ㄴ~22ㄴ.
66)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丙辰, 34-648, 22ㄴ.
67)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庚申, 34-648, 33ㄱ~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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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군사 기밀의 중요성을 알지 못 한다’면서 앞으로는 ‘국왕이 심복 대신과 은밀히 의논하여 결정하고, 承旨나 內官도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國書에는 ‘淸國’이라고 써서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논계하였다.
그러자 동석하고 있던 侍讀官 趙贇과 檢討官 吳達濟역시 비밀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잘못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趙贇은 丁卯年和約 이후 10년간 自强策을 강구한 것은 조금도 없다면서 지금 만약 다시 和親한다면 결국은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고 반발하였다. 吳達濟는 최명길이 기필코 중론을 배척하고 사람을 보내려 한다고 비난하고 三司가 ‘正論’을 펼치고 있는데 최명길이 감히 ‘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삼사와 서로 논쟁하려 든다고 힐난하자 최명길은 쫓기듯이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68)
이때부터 삼사의 최명길 탄핵이 본격화되었다. 司諫院에서는 최명길이 경연석상에서 ‘金汗’을 ‘淸國汗’이라고 쓰자고 한 것, 국가 대사를 심복 대신과 은밀히 의논하고, 승지와 사관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은 국왕의 총명을 가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으로서 國家에 화를 미치는 것이 無所不至할 것이니 官職을 削奪하라고 청하였다.69) 이에 인조는 ‘淸國’이라는 ‘新號’ 사용은 事例에 당연한 것이고, 은밀하게 의논하라고 한 것은 경박한 무리들이 함부로 대사를 누설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하고, 최명길은 ‘元勳重臣’으로서 ‘헛된 명성을구하지 않고 오로지 실사에만 힘써서’[不求虛名專務實事] 그 忠誠과 計慮가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다고 변호한 뒤, 언관들을 ‘循私護黨’으로 몰아서 正言 洪處厚와 申恦을 체차시키고, 뒤에 각각 堤川縣監, 開城敎授로 外補하였다.
68)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庚申, 34-648~649, 23ㄴ~24ㄴ; 承政
院日記 53冊, 仁祖14년 丙子9월 19일 庚申, 3-460~461.
69)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戊辰, 34-650, 26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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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撰 吳達濟는 상소하여 臺閣의 논의는 체면이 매우 무거워서 비록 大臣이라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引咎· 辭職하여 不安之意를 보이는 것이 마땅한데 최명길이 三司의 公論이 제기되었는데도 경연석상에서 감히 ‘荒亂之說’을 진달하여 ‘위로 天聰을 현혹시키고 公議를 위협하여 억제한다’면서, 최명길의 이와 같은 ‘방자하고 기탄없는 죄’는 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가 파직당하였다.70)
副校理 尹集은 여기에 더하여 간악한 秦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라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최명길이 秦檜가 못한 일을 차마 하였다면서, ‘조정과 대각을 무시하고’, ‘밖으로 도적의 강성한 세력을 업고서 안으로 자기 임금을 겁주었다’,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독단하게 하여 義理도 돌아보지 않고 臺論도 살피지 않아서, 사특한 의논만을 따르고 간사한 신하에만 의지하여 장차 나라가 망하게 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은 모두 최명길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규탄하였다.71) 이와 같은 공격에 직면하여 최명길은 자신의 主和論을 변명하는 장문의 상소를 남기고 결국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72)
이때 斥和論의 전형을 보여준 것은 校理 趙贇의 상소였다.73) 그는 國家가 興하는 데는 반드시 그 근본이 있다고 전제하고 太祖李成桂의 威化島 回軍을 예로 들면서 조선왕조의 ‘興王之本’은 ‘尊中國攘夷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壬辰年에 明나라가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도와서 ‘再造邦國’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仁祖反正의 명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고 상기시켰다.
70)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0월 壬申, 34-650, 27ㄱ~ㄴ.
71)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戊申, 34-652~653, 30ㄴ~32ㄱ.
72)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丙午, 34-652, 30ㄱ. 그의 사직 차자는
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遲川集 卷11, 「丙子封事」第三, 叢刊89-448~455, 26
ㄱ~29ㄱ에 실려 있다. 이 차자는 최명길의 주화론을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주
는 내용인데 자세한 분석은 뒤로 미룬다.
73)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癸亥, 34-649, 24ㄴ~25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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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위화도 회군에 나타난 ‘尊周之義’를 ‘克彰’하고, 三綱을 扶植는 것이 ‘興王之業’이므로 자손으로서 이러한 道理를 배반하면 天意와 人心을 거슬러서 국가를 보존할 수 없다고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이것을 ‘天命과 民心의 去就와 離合의 기미’라고 표현하였다. 우리 人民이 이것을 조상들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天朝’를 보고 父母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그것이 敎令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丁卯年 和約에 대해서도 義士들의 ‘含憤’이 극도에 달하였는데 이제 ‘僭號’한
이후에 ‘緩兵’을 핑계로 다시 和約을 맺으려 한다면 그 분노가 어떠하겠으며, '諸侯之國'으로서 '僭號之賊'과 通使, 通書한다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이냐고 반문하였다.
우리나라에는 八路에 地方과 人衆이 있어 萬乘之富와 千里之大에 그치지 않는데, 自强하지 못하고 ‘오랑캐 보기를 호랑이처럼 여기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개탄하고, 仁祖가 忠義를 고취하고 賢才를 얻어 위임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재주를 다하고 군사들은 죽을 힘을 내어 싸울 것’이니 ‘미친 오랑캐’는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도 이들과 사신을 통한다면 光海君때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반란을 꿈꾸는 민’에게 구실을 주어 오랑캐가 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내란이 일어나 종사가 먼저 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主和誤國之說’이 君父를 不義에 빠뜨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悲憤慷慨하였다.
修撰 吳達濟․李禂는 主和論이 ‘權宜’를 칭탁하고 ‘利害’에 의해 움직여서 ‘구차스럽게 편안하기를 도모’한다, ‘自强策을 강구할 생각은 않고 오로지 姑息的인 것만 힘쓰고 義理를 돌보지 않고 恥辱을 달게 여긴다’고 비판하고 ‘僭逆之虜’에 대해서는 당연히 우리가 먼저 끊어야 한다면서 ‘역관을 통해서 국서를 보내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라고 극언하였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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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병자년 척화론자들의 주장은 中華主義와 華夷論에 기초한 對明義理論을 절대적 진리로 전제하고 조선왕조 국가는 명의 황제를 섬기는 제후의 나라[藩邦]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이 부활되었다고 보고 ‘再造’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당시 이들이 주장하는 自强策은 ‘再造藩邦’論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75)
이 시기 主和論을 대표하는 崔鳴吉역시 ‘尊中國攘夷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南宋代金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여 尊王攘夷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학자인 胡安國(1074~1138)도 斥和論을 비판한 사례가 있음을 들어서 자신의 논리적 근거로 제시하였다.76) 즉 호안국은 五代後晉에서 景延廣이 거란족의 遼에 主戰論을 주장하였다가 요의 침략으로 後晉이 멸망한 사건에 대하여, 경연광이 ‘가볍게 신뢰를 배반하고 스스로 전쟁의 꼬투리를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는 것이다.77)
74)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9월 甲子, 34-649~650, 25ㄴ~26ㄱ.
75) 당시의 斥和義理論者들이 주장하는 자강책은 道學的經世論의 범주에 머물고 있었다. ‘再造藩邦’論의 개념과 성격에 대해서는 金駿錫, 「兩亂期의 國家再造문제」, 韓國史硏究 101, 韓國史硏究會, 1998 참조.
76) 胡安國은 春秋傳 을 편찬하여 尊王攘夷라는 大義를 높이 선양하였다. 여기서 제시된 그의 春秋 해석은 ‘名實관계’라는 입장에서 春秋 의 正名思想인 尊王主義의 실체를 제시한 것이었으며, 春秋 의 華夷說을 綱常倫理와 연결시켜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다. 그가 살던 南宋시대는 金人의 남침으로 남쪽으로 옮겨 왔는데, 이에 잃었던 중원 땅을 회복하고 宋朝왕실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유학자들은 尊王을 주창함과 동시에 또한 攘夷를 강조하였는데,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 바로 그의 春秋傳 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候外廬외 지음, 박완식 옮김, 宋明理學史 1, 이론과 실천, 1993, 285~289쪽 참조.
77) 遲川集 卷11, 「丙子封事第三」, 叢刊89-450~451, 30ㄴ~32ㄱ. 五代後晉의 石敬瑭은 桑維翰의 건의를 받아들여 遼에 대해 스스로 稱臣하고 거란의 원조를 받아 後唐을 멸망시켰다. 그 이후에는 燕雲 16州를 할양하고 매년 歲幣를 바쳤었다. 그런데 석경당이 죽은 후 그의 조카 石重貴가 少帝가 되자 석경당의 거란에 대한 굴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桑維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景延廣의 ‘去臣稱孫’하라는 건의를 받아들여 거란과의 전쟁을 불사하였다가 後晉은 결국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당하였다. 五代後晉과 거란 사이의 이 사건에 대해서는 徐連達․吳浩坤․趙克堯지음, 중국사연구회 옮김, 중국통사 , 청년사, 1989, 451쪽;傅樂成著, 辛勝夏譯, 中國通史 (下), 知永社, 1998, 592~602쪽 참조.
崔鳴吉은 朱子가 資治通鑑綱目 에서 桑維翰과 景延廣 두 사람의 관직을 삭제하여 모두 폄하하였다고 밝히고, 胡安國이 경연광을 비판한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입론의 근거로 삼고 있다. 최명길이 인용한 것은 資治通鑑綱目 卷57 안에 있는 胡安國의 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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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은 ‘尊中國攘夷狄’을 一生事業으로 삼아온 호안국이 경연광을 비판한 이유는 “人臣이 자신의 主君을 위해 謀國하는데서
遠慮를 갖지 않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다가 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 일이 비록 바르더라도 그 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78)
최명길이 자신의 주화론을 뒷받침할 사례로서 또 하나 제시한 것이 倭亂 당시 牛溪 成渾(1535~98)의 主和論이었다.79) 당시 성혼은 門生에게 보낸 편지에서 ‘講和而存’보다는 ‘守義而亡’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은 人臣의 ‘절개를 지키는 말’은 되지만 ‘宗社의 存亡’은 匹夫의 일과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主和論을 옹호하였던 것이다. 최명길은 성혼의 이러한 주장은 ‘宗社’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시기와 역량을 헤아려서’ 나온 ‘時中之義’였다고 긍정하였다. 그 역시 왜란 당시 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가 구제해 준 은혜’ 덕분임을 인정하는 것은 斥和論者와 같았지만, 그는 또한 成渾을 비롯한 柳成龍, 李德馨 등이 쏟아지는 謗言을 피하지 않고 主和論을 견지한 ‘충성을 다하여 감당하려는 노력’에도 있었다고 주장하였다.80)
78) 遲川集 卷11, 「丙子封事第三」, 叢刊89-451, 32ㄱ, “盖以人臣爲其君謀國而不存遠慮果於自用以致亡人之國則其事雖正而其罪有不可逃故也.”
79) 牛溪成渾의 主和論에 대해서는 李章熙, 「牛溪成渾에 關한 史的考察」, 亞洲大學論文集 11, 亞洲大, 1989(同, 近世朝鮮史論攷 , 아세아문화사, 2000, 211~216쪽) 참조. 선조 27년 일본과의 강화가 불가피했던 사정에 대해서는 孫鍾聲,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편, 1995, 96~10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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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은 당시 ‘事勢’로 보아 主和論은 부득이한 것이었으며, 만약 이들이 ‘一切之論’만 ‘徒守’하고 ‘權宜之計’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망하고 말았을 것이라면서 ‘事’에는 ‘名美而實不然者’가 있다고 ‘名實’論을 내놓았다.
道에는 經權이 있고 事에는 輕重이 있는데 時가 있는 곳에는 義가 따르기 마련이다. 聖人이 易을 지어서 中을 正보다 貴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81)
즉 道에는 經權이 있고 事에는 輕重이 있어서 時가 있는 곳에 義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하면서 聖人이 易 을 지어서 ‘中’ 즉 ‘實’을 ‘正’ 즉 ‘名’보다 귀하게 여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名實論은 李貴의 主和論과 같이 事勢論과 經權論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보다 진일보한 측면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時가 있는 곳’에 ‘義도 또한 따르기 마련’이라고 분명히 한 점에 있다. 최명길은 자신의 主和論이 時勢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義理에 있어서도 올바른 것이라는 확신을 거듭 표명하였다.82)
李貴의 經權論은 ‘堂堂大義’와 ‘謀國之遠慮’가 각각 분리되어 존재할 수도 있다고 政治的 現實主義를 긍정하였지만, 이와 분리된 大義=義理는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었다.83) 이에 비해서 崔鳴吉의 名實論은 實과 유리된 名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政治的 現實主義그 자체에 義理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이와 괴리된 名分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80) 遲川集 卷11, 「丙子封事第三」, 叢刊89-452, 33ㄱ~34ㄱ.
81) 위와 같음, 34ㄴ, “道有經權事有輕重時之所在義亦隨之. 聖人作易中貴於正良以此也.”
82) 위와 같음;同, 叢刊89-453, 36ㄱ.
83) 정묘호란 당시 이귀의 經權論에 대해서는 金容欽, 앞의 글, 2006b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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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성혼의 주화론을 ‘종사가 중요하므로 때와 역량을 헤아려서 때에 맞는 것을 의리로 삼았다’라고 평가한 것은 ‘국가의 존립’[實]보다 우월한 명분은 존재할 수 없다는 분명한 선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84)
최명길은 이러한 자신의 主和論이 척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是非를 돌보지 않고 ‘利害之說’로 君父를 오도한 것이 아니라 ‘時勢’를 참작하고 ‘義理’를 따져서 나온 것이며, 先儒의 定論으로 증명할 수 있고 祖宗의 ‘往迹’에서도 참고하여 國家의 安危와 保民을 염두에 두고 道理에 어긋나지 않고 事宜에 합당한 것을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서’ 그 필연성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고 토로하였다.85)
그리고 斥和論과 斥和論者들의 행태를 조목조목 논파하였다. 淸이 이미 ‘僭號’하였으니 信使를 보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그들이 만약 丁卯年兄弟의 盟約을 어기고 우리에게 ‘非禮’를 강요한다면 義理에 비추어 결코 따를 수 없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그들이 隣國之禮로 대하고 있으니 그들의 僭號與否는 우리가 꼭 따져 물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兵力이 單弱하여 청나라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에게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間計를 요청한 것인데 年少輩들이 그러한 명나라의 ‘深慮’와 여기에 따르기로 한 廟堂의 ‘苦心’은 따져보지도 않고 ‘欺吾民負皇朝’ 등의 말을 朝報에 나오게 하여 遠近에 傳播되도록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우리나라는
84) 최명길의 名實論은 元宗追崇論爭에서도 제시된 적이 있어 주목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金容欽, 「仁祖代元宗追崇論爭과 王權論」, 學林 27, 2006, 60~61쪽 참조.
* 최명길의 名實論을 陽明學的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한 논자도 있다(李在喆, 「遲川崔鳴吉의 經世觀과 官制變通論」, 朝鮮史硏究 1,
1992, 56쪽 참조).
* 王陽明의 名實論에는 분명히 최명길의 그것과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王陽明의 名實論에 대해서는 張立文, 中國哲學範疇發展史 (人道篇), 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95, 제14장 名實論, 555~557쪽 참조.
85) 遲川集 卷11, 「丙子封事第三」, 叢刊89-453, 36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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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서쪽으로 瀋陽이 있고, 바로 옆에는 椵島가 있어 이들이 모두 朝報를 구해서 보고 우리나라의 國情을 엿보고 있으니 臺諫啓辭는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年少輩의 妄言으로 明의 비난을 초래하고 이웃한 敵國이 의심을 품게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는 것이다.86)
또한 羅德憲 등의 처벌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최명길은 그들에게 설사 죄가 있더라도 ‘조용히 죄를 의논하여 밖으로 노출되지 않게’ 하여 ‘나라를 위해 악을 감추는 의리’에 맞게 처리해야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천자에게 행하는) 예를 거부하고 굴복하지 않은 것’이 명백하여 처음에 廟堂에서는 褒賞할 뜻을 갖고 있기까지 하였는데, 갑자기 橫議가 ‘卒發’하여 ‘오랑캐 조정에 무릎 꿇은 죄’를 억지로 만들어 처벌하기에 이른 것도 잘못이며, 그로 인해 ‘藩國의 使臣’을 ‘참람한 역적에게 무릎 꿇은 노예’로 만들어서 ‘소란스럽게 서로 전파시킨’ 것도 잘못인데, 이러한 의견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勃然大怒’하여 말을 막아버리기까지 하는 것은 ‘人之性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87)
이러한 일들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이러한 ‘軍機重事’에 대해서만 ‘腹心大臣’과 비밀히 의논하여 처리하고 承旨와 內官도 알지 못하게 하자고 청한 것이지, 國家大小事 모두를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었는데, 年少輩들이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자신을 공격한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年少輩의 말이 한번 나오자 온 조정이 서로 ‘和附’하여, 자신이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신료들마저 ‘둘러서서 서로 바라만 볼 뿐’ 자신을 구원해 주는 자가 없었다고 폭로하고,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잘못 입을 열었다가는 ‘주화론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조정의 잘못된 논의 풍토를 비판하였다.88)
86) 遲川集 卷11, 「丙子封事第三」, 叢刊89-449~450, 28ㄴ~29ㄱ.
87) 위와 같음, 27ㄴ~28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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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은 이러한 잘못된 행태가 모두 ‘好名’에서 유래된 폐단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이러한 폐단이 ‘정치가 대각으로 돌아가는 현상’[政歸臺閣]을 조장하는 三司官制의 모순에 의해 증폭된 것이라고 제도적으로 접근하였다. 5․6품의 三司관원을 年少新進으로 충원하여 言路를 열어 준 것은 ‘이목의 민첩함’과 ‘志氣의 날카로움’에 의해 ‘治道’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일 뿐이고, 安危에 관계되는 國家大計는 老成한 大臣과 중신들이 그 마땅함을 헤아려서 국왕에게 보고하여 처치해야 하는 것이지 年少輩가 감히 관여할 일이 아닌데, 仁祖反正 이후에 지나치게 言路가 확대되어 ‘政歸臺閣’의 형세가 조성되자, 국가중대사에 대하여 大臣이 自斷하지 못하고 浮議에 제압되어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국체가 나날이 가벼워지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잘 알려진 崔鳴吉의 官制變通論이 ‘好名’, 즉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에서 초래된 정치 현실과의 모순을 제도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시도임을 알 수 있게 된다.89)
2) 廟堂과 臺閣의 대립과 丙子胡亂의 발발
삼사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청국 군대가 산해관으로 들어갔다는 첩보에 접하자 비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인조는 의주에 체류하고 있던 胡譯을 심양으로 들어가게 하였다.90) 11월에 들어서자 드디어 청국이 겨울에 침입할 것이라는 보고가 처음으로 들어왔다.91)
88) 위와 같음, 29ㄴ~30ㄱ.
89) 李在喆, 앞의 글, 1992;李綺南, 「崔鳴吉의 政治活動과 權力構造改編論」, 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 一潮閣, 1992, 476~501쪽;金容欽, 「遲川 崔鳴吉의 責務意識과 官制變通論」, 朝鮮時代史學報 37, 2006 참조.
90)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0월 丁丑, 34-650, 27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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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파견했던 胡譯이 돌아와서 이를 확인하자 조정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胡譯 朴仁範 등은 淸이 군사를 움직이려 한다는 것과 함께 朝鮮과의 和約을 지속할 의도가 있음을 전하였다.92) 그러자 조정에서는 앞서 譯官을 파견할 때와 유사한 혼란이 반복되었다.
비변사에서는 한편으로는 朴蘭英을 別使로 파견하기로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변경에서는 胡人이 아무리 ‘和好’를 칭탁하고 오더라도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논계하였다. 그런가 하면 義州城을 修築하여 변방 수비를 강화하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착수하기가 쉽지 않고, 軍粮과 兵器를 마련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양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精抄軍약 1만 8천여 명을 동원하여 변경에 진주케 하자거나, 士大夫로부터 庶人에 이르기까지 출자하여 軍需를 돕게 하자는 논계가 이어졌다.93)
그러자 散職에 물러나 있던 完城君 崔鳴吉이 다시 상소하여 비변사의 일관성 없는 시책을 비판하고, 胡譯을 통해 淸나라에서 별다른 강압적인 의사 전달이 없는 것에 주목하여 文官堂上을 秋信使로 差任하여 파견할 것을 제안하였다.94) 그는 당시 兩西지방의 凶作이 전국에서 가장 심각하고, 家畜의 전염병이 또한 참혹하여 明年의 농사가 전혀 가망이 없는데, 山城을 修築하고 將士를 供饋한다고 1결에 30여 필의 베를 내게 하였으므로 民力이 이미 고갈되고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있기 때문에 和親을 맺는
91)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甲辰, 34-652, 30ㄱ, 接伴使李必榮馳啓.
92)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壬子․癸丑, 34-653, 32ㄴ. 당시 瀋陽에서 譯官 朴仁範과 龍骨大․馬夫大 등과의 대화 내용은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Ⅵ-546 참조.
이때 淸國汗이 11월 25일로 날짜를 못박아서 和議를 다시 정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는 말과 함께 答書를 보냈다고 한다( 尊周彙編 卷3, 崇禎9년 11월, 235~236쪽). 丙子錄(앞의 책, 267쪽)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93)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癸丑․乙卯, 34-653, 32ㄴ~33ㄱ.
94)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乙卯, 34-653~4, 33ㄱ~34ㄴ.
丙子胡亂期의 主和․斥和論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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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하루가 급하다고 개진하였다. 그는 ‘謀國之道’는 ‘務在誠實’해야지 ‘文具’에 그쳐서는 안 된다면서 먼저 和親을 성사시켜 民力을 休息시키고 財用을 撙節하여 國計를 여유 있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별도의 처치가 가능해진다고 자신의 主和論이 保民論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崔鳴吉의 상소를 보고서야 秋信使 파견이 결정되었으며, 인조는 ‘부득이하여 다시 覊縻한다는 뜻을 中外에 布告’하게 하였다.95) 물론 이에 대해 吏曹參判 鄭蘊을 비롯한 三司言官들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던 것도 역관 파견 당시와 유사했다. 鄭蘊은 승지와 사관도 모르게 중신들이 결정해야 된다는 최명길의 주장과 비밀리에 역관을 파견한 일을 是非와 事理邪正을 무시한 전례가 없는 ‘奸怪之事’이며, 目前의 無事함만을 바라는 姑息之計라고 비난하고, 후일에 凶謀秘計를 꾸미는 ‘大奸慝’이 나오면 반드시 이 일로 증거 삼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96)
丁卯和約 이후 自强하지 못한 것이나 後金이 오만해지게 만든 것 등은 모두 主和論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비난하고, 그렇다
고 强弱이 판명된 것도 아니고 勝負가 결판난 것도 아닌데, 使臣을 통하면 稱臣을 요구하고, 稱臣하면 割地를 구하여 결국 온 조정 신료가 ‘야만인의 신하’가 되고 擧國人民이 ‘야만인’이 될 것이라면서 信使 파견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하였다.
校理 金益熙와 副修撰 李尙馨등은 병자년 봄의 ‘絶和之擧’는 ‘明大義尊一統’에서 나온 것으로서 애초에 戰爭의 成敗와 國家의 存亡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고 서슴지 않고 시인하였다.97)
95)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丙辰, 34-654, 34ㄴ~35ㄱ. 이때 비로소
金瑬는 지난 2월의 斥和결정을 비판하고, ‘不忠不韙’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主和論을 담당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96)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辛酉, 34-654~655, 35ㄱ~36ㄱ.
97)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辛酉, 34-655, 36ㄱ~37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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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신의 몸과 처자만을 온전하게 지키려는 신하’에 의해 國是가 변하여 正論이 꺽이고 異議가 횡행하여, 오늘은 朴仁範을, 내일은 朴蘭英을, 또 다음날에는 信使를 보내자고 청하는가 하면, 인조 역시 ‘淸’ 字를 써서 보내는 것에 동조하였으니, 장차 ‘帝’ 字를 쓰라고 협박하고 ‘臣妾之辱’을 가해 올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하고, 이처럼 ‘겁먹고 갈팡질팡하니’ 어떻게 人心을 복종시키며 衆議를 잠재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自强하지 못한 것도 다 覊縻之計때문이라면서 인조에게 ‘결단을 내려 화의를 끊고 몸소 나서서 삼군을 격려’하고 信使파견은 빨리 정지시키라고 청하였다.
인조는 이러한 三司의 반발을 모두 무시하고 비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秋信使로 박로를 파견하였다. 물론 이때 三司관원 모두가 斥和論일변도였던 것은 아니었다. 副校理 尹集이 大司諫 李敏求와 正言 李時雨를 최명길에게 아첨한다고 비난하고 掌令 李行健의 避嫌啓辭가 모호하다고 비판하였으며, 淸議에 버림받은 鄭太和를 다시 執義로 임용하였다고 인조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98)
그리고 이때는 중신들 가운데서도 信使파견을 전제로 한 상소가 나오고 있었다. 兵曹判書 李聖求는 信使 파견에는 찬성하였지만 그들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자진해서 國書에 ‘淸’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들이 항의하면 그때 논의해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大司憲 李景奭역시 이전처럼 ‘金’이라고 칭해도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信使 파견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99)
인조는 李聖求의 주장을 수용하여 추신사 박로를 파견하되, 만약 淸이 帝號를 쓰지 않은 것을 트집잡는다면 비록 兵禍를 입는 한이 있어도 단호히 거절하여 구차하게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라고 명하였다.100)
98)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戊申, 34-652, 31ㄱ, 31ㄴ.
99)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1월 甲子, 34-655, 37ㄱ~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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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司에서는 이미 심양으로 떠난 박로를 돌아오게 하라고 논계하였지만 인조가 들어주지 않자 大司諫 金槃은 臺論이 정지되기도 전에 信使를 출발시켰으니 이는 廟堂이 臺閣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01) 이를 전후하여 廟堂과 臺閣의 대립을 개탄하는 논계가 줄을 이었다. 심지어는 主和를 주장하는 廟堂과 斥和를 주장하는 臺閣은 양립할 수 없으며, 臺諫이 없으면 言路가 없고 언로가 없으면 朝廷이 없다는 극단적인 논계도 있었다.102) 그러는 가운데 秋信使가 국경에 닿기도 전에 淸軍의 선발대가 먼저 국경을 넘어왔다.103)
4. 맺음말
지금까지 병자호란기의 主和․斥和논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병자호란 당시 朝鮮 封建國家는 絶體絶命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만주족 중심 多民族국가 淸의 우세한 군사력 앞에서 국가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국왕 인조를 포함한 지배층 대부분은 국력을 결집시켜 이에 대항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였고,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丙子胡亂과 그에 이어지는 丁丑年 城下之盟은 당시 官人․儒者일반을 지배하고 있던 政治思想으로서의 朱子學, 특히 朱子學 名分論과
100)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2월 壬申, 34-656, 39ㄱ.
101)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2월 甲戌, 34-656, 39ㄴ.
102) 仁祖實錄 卷33, 仁祖14년 丙子12월 丙子, 34-656~657, 39ㄴ~40ㄴ.
103) 淸國에서는 11월 27일에 明을 칠 계획을 정하고 조선의 사신을 기다렸는데, 11월 29일까지도 도착하지 않자 먼저 조선 정벌에 나섰다고 한다(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Ⅵ-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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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理論 및 그것에 기초한 朱子學 政治論이 현실 적합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미 丁卯胡亂으로 인해 仁祖政權은 강화도로 파천하는 굴욕을 당하였고, 丁卯年의 和約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再侵에 대한 준비를 착실하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만주족의 우세한 군사력에 맞서려면 國家體制자체의 變通과 更張에 의한 국방력 강화가 절실히 요구되었지만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에 사로잡힌 지배층 일반은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거나 방해하였으며, 그로 인해 현실적인 방어 역량이 갖추어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斥和主戰論을 고집하였다.
물론 斥和論진영에서도 變通論者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尹煌, 兪伯曾, 趙錫胤 등은 병자호란기의 대표적인 斥和變通論者였는데, ‘蠹國病民’하여 ‘無不思亂’한 현실을 직시하고 制度의 變通과 改革을 통한 ‘保民固國’을 인조에게 촉구하고 이를 거부하는 士類일반에 만연한 保身主義와 名分主義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이 大同法과 士族收布論에 근접한 制度改革을 주장한 것은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의 본영인 斥和論진영에서도 당시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양대 중심축이었던 地主制와 兩班制를 일정하게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싹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丁卯胡亂 이후 制度改革이 지지부진하였던 책임을 主和論者들에게 전가한 것은 당시 變通과 更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관계, 즉 현실적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고 속에는 논리적 모순과 비약이 존재하였다. 이들이 주장한 保民과 養兵, 安民과 禦敵은 분명히 당시 국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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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주장한 保民과 養兵, 安民과 禦敵은 분명히 당시 국가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두 절실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상호 모순된 성격의 것이었으며, 그 모순을 해소하고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이들은 이 양자 사이의 모순과 긴장에 주의하지 못하였으며,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애써 회피하고 君主의 ‘결단’과 士民의 ‘분발’이라는 정신적 요인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고 비약하였다.
또한 이들이 江都保障論을 비판한 것은 邊方防禦論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의 군사적 상식과는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척화 변통론자들의 이러한 한계는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이 만약 變通論에 철저했더라면 더 이상 斥和論을 고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척화 변통론의 이러한 모순에 대해서는 당시에 이미 李植에 의해 지적되었다. 이식 역시 ‘盡民爲兵’을 주장하여 士族收布論으로의 길을 열어놓았고 大同法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실천에 옮겨져 효과를 보기 전까지는 主和論을 견지해야 될 것으로 보았다.
主和變通論이었던 李貴가 사거한 뒤에는 崔鳴吉이 變通論을 계속 견지하였고 金時讓 등에 의해서도 主和變通論이 제기되었다.
병자년에 이처럼 主和․斥和 양 진영 모두에서 變通論을 주장하는 논자가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모두 수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방어 역량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병자년 초부터 척화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했던 국왕 인조도 점차 이러한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가운데 삼사 언관들 중심으로 斥和論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조선 조정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은 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들이었다. 이들이 오히려 나서서 조선의 청에 대한 강경론의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고 화친을 유지할 것을 권고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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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등이 이를 적극 수용하자고 주장하여 主和․斥和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척화론자들은 ‘尊中國攘夷狄’=‘尊周之義’가 조선왕조의 ‘興王之本’이었으며 仁祖反正의 名分이기도 하였다고 상기시키고 對明義理論을 내세우면서 청과의 어떠한 외교적 교섭
도 반대하였다. 이들은 丁卯年이후 自强하지 못한 것은 모두 主和論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고, 君主가 忠義를 고취하고 賢才를 얻어 위임하면 청과 대항할 수 있는데, 自强策을 강구할 생각은 않고 오로지 姑息的인 것만 힘쓰고 義理를 돌보지 않고 恥辱을 달게 여긴다고 비판하였다. 당시 斥和論은 주로 三司언관들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公議’, ‘公論’이라고 내세우고, 이러한 臺閣의 논의는 大臣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士林’에 특유한 公論政治의 원칙을 상기시켰다.
이 시기 主和論을 대표하는 崔鳴吉 역시 ‘尊中國攘夷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南宋代尊王攘夷사상을 집대성한 胡安國이 遼에 대한 斥和主戰論者였던 景延廣을 비판한 것, 壬辰倭亂당시 成渾이 主和論을 주장한 것 등을 예로 들면서 事勢에 따라서는 ‘尊周之義’가 主和論과 병행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최명길은 자신의 主和論을 名實論으로 합리화하였다. 그의 名實論은 政治的 現實主義 그 자체에 義理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현실과 괴리된 名分의 존재를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丁卯胡亂期의 주화론자였던 李貴의 事勢論과 經權論보다 진일보한 논리로 간주된다. 그리고 당시 斥和論과 斥和論者들의 정치 행태를 조목조목 논파하였다.
특히 事勢․形勢는 따져보지도 않고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만을 내세우는 三司언론의 無責任性을 통렬하게 고발하고, 그러한 현실과 괴리된 三司言官들의 주장이 公議․公論으로서 조정을 지배하여 아무도 異議를 제기하지 못하는 조정의 잘못된 논의 풍토를 비판하였다.
(투고일: 2006. 4. 27 심사완료일: 2006. 6. 1)
핵심어 : 丙子胡亂, 斥和論, 主和論, 崔鳴吉, 名實論, 變通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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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러한 잘못된 행태가 모두 ‘好名’, 즉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에 함몰된 당시 官人․儒者일반의 사상적 한계에서 유래된 폐단임을 반복해서 설파하고, 이러한 폐단이 ‘政歸臺閣’을 조장하는 三司官制의 모순에 의해 증폭된 것이라고 제도적으로 접근하였다. 그의 官制變通論은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에서 초래된 이러한 정치 현실과의 모순을 제도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 시기 斥和論과 主和論의 대립은 ‘再造藩邦’論과 ‘國家再造’論의 대립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견해가 있다.104) 척화론이 倭亂 당시 明의 ‘再造之恩’을 강조하면서 朱子學名分論과 義理論을 국가의 존립 그 자체보다 중시하는 입장이었다면 주화론은 保民을 위한 국가의 존립을 우선하는 사고였다. 주화론은 後金=淸의 침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국가를 유지․보존하기 위해서는 인조 정권의 집권 명분이었던 주자학 명분론과 의리론조차도 굽힐 수 있다는 새로운 사고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經權論․事勢論․名實論 등으로 합리화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서는 華夷論에 종속된 ‘藩邦’ 관념에서 이것과 분리된 독자적인 ‘國家’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시기 주화론에서 드러난 ‘國家’觀은 ‘再造藩邦’論을 탈피하여 ‘國家再造’論으로 轉化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도 있었던것이다.
104) 金駿錫, 앞의 글, 1998, 130~13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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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Disputs between the Juhwa and Ch'eokhwa Factions during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1636
105)Kim, Yong-heum*
Although some scholars from both the Juhwa and Ch΄eokhwa factions in 1636 called for the reform of government structure(byeont΄ongnon 變通論) in order to strengthen the kingdom’s ability to respond militarily to ongoing Manchu encroachments, in the end the Joseon government refused to take such a step.
As a result of this non-action, Joseon's ability to defend itself was severely weakened. While no one was willing openly to accept the reality, the movement supporting anti-Manchu Ch΄eokhwaron(Reject the heterodox theory, 斥和論) led by remonstrance officials(ŏngwan, 言官) within the Samsa(three offices of the law, 三司) began to gain ground.
During this period, the Ch΄eokhwaron faction claimed that the notions of "respect China, defeat the barbarians"(jon Jungguk yang yijeok , 尊中國攘夷狄), which they argued represented the founding ideology of the nation, and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in 1623 meant that Chosŏn had a moral obligation to abide by the tenets of loyalty to the Ming dynasty(Daemyeong euiriron, 大明義理論) and as such opposed conducting any diplomatic negotiations with the Manchus.
While the Ch΄eokhwaron advocates viewed the neo-Confucian based theories of myeongbunnon(名分論, moral obligation) and euiriron(義理論, moral justice) to be more important than the very existence of the state itself,
* Research Professor, Institute of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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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uhwaron(Theory of Independence from China, 主和論) advocates emphasized that the moral obligation of Joseon to the Ming was based on the latter’s assistance in defending them from Japanese marauders(再造之恩), thus placing primacy on the state's role in ensuring the security of its people. In other words, the Juhwaron essentially marked the emergence of a
new ideology in which even the neo-Confucian based theories of moral obligation and moral justice, which served as the moral justification for the Injo Restoration, could be bent for the preservation of the state at a time when a national crisis raged with the Manchu invasions.
To justify their arguments, the Juhwaron faction used theories such as the gyeonggweonron(flexibility, 經權論), saseron(policies to reflect reality, 事勢論) and myeongsilron(harmony between moralism and practicality, 名實論).
We can see therefore that the notion of an “independent state” advanced by the Juhwaron faction was a clear departure from the concept of a barbarian state(蕃邦) that was subject to Sinocentric theories of revering the Chinese and expelling barbarians(華夷論) which prevailed at that time. The effects of juhwa concepts on state views eventually facilitated the development of a state restructuring theory(國家再造論) which displaced the theory of state restructuring based on moral obligations to Ming(再造藩邦論).
Keywords : Second Manchu Invasion of 1636, Ch΄eokhwaron, Juhwaron, Ch΄oe Myeong-gil, myeongsilron, byeont΄on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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