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복희와 여와, 주역, 프리메이슨 그리고 뱀

2018. 7. 11. 06:15잡주머니

[부두교 및 이방종교] 복희와 여와, 주역, 프리메이슨 그리고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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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의 그림은 바코드를 괘로써 전환한 그림이다. 바코드는 빨간 레이저 빛을 쏘일 때 빛이 반사(1) 하는가 흡수(0)하는가를 코드화 한 시스템이다. 디지털 부호로서 1이 컴퓨터에 입력될 때는 양, 0이 입력될 때는 음의 부호로 전환하면 바코드가 바로 괘가 된다. 바코드도 이진법의 디지털 부호이고 괘도 이진법의 디지털 부호이니 서로 전환될 수 있다.
 서양에서는 라이프니츠가 18세기에 이진법을 발표하기 전에 이진법의 부호를 사용하는 디지털 코딩시스템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5000년 전에 이미 역경에서 디지털 코딩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디지털 코딩 시스템을 사용하면 사물과 사물의 구분을 정확히 할 수 있고 사물을 코드로서 입력시켜 놓으면 그 사물의 전체적 동향을 파악하기 쉽다. 이것이 역경에서 디지털 코딩 시스템을 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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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그림은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을 발표했을 때 중국의 선교사로 가있던 그의 친구 부베가 이 도해를 보내 주었다. 이 도해는 역경의 64괘를 원(동적인 배열-양)과 정사각형(정적인 배열-음)으로 배열한 그림으로 주희가 쓴 '주역본의' 앞 부분에 나오는 도해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도해를 받아보고 5000여년 전부터 이진법이 동양에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이 도해에 번호와 글을 적어 놓았다.
역경이나 역경의 중심 이론은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당나라 때 연단술(후에 연금술로 변환)과 함께 서양으로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연금술의 신비한 그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역경에서 힌트를 얻어 이진법의 디지털 이론을 발표했고 이진법은 십진법의 수학보다 단순 명확하게 사물과 사물을 구분할 수 있으므로 기계화하기 쉬워 (스위치의 on & 0ff) 컴퓨터가 발명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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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레코드 판에서 나오는 아날로그 음보다 CD에서 나오는 디지털 음을 들을 때 더 명확한 음의 구분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감각기와 뇌, 신경의 작동 원리가 디지털적이기 때문이다. 좌측의 그림은 몸의 위치를 감지라는 기관인 세 반고리관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세개의 반고리관은 x좌표, y좌표, z좌표를 따라 배열되어 좌우, 상하, 전후의 디지털적 정보를 얻는다.
역경의 효가 3개씩 배열된 것은 3차원적 디지털 정보를 인식하고 표현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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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의 그림은 7세기경 트루판(중국의 서쪽, 돈황의 동쪽)에 있던 고창국의 왕묘에서 출토된 복희와 여와의 그림이다. 복희는 역경의 괘를 처음 만든 신이며 황제이고 여와는 흙으로 사람 인형을 빚어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들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복희와 여와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뱀으로 알려져 있다. 복희는 최초의 남자로서 만물 창조에 필요한 직각자를 들고 있고 여와는 최초의 여자로서 분도기를 들고 있다. 이 최초 부부의 하체는 서로 꼬여있다. 주위에는 별들이 그려져 있고 상하 중심에는 수레바퀴들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은 천에 그려졌거나 돌에 새겨진 형태로 자주 출토된다.
이 그림은 글자 한자 없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복희는 양을 상징하고 여와는 음을 상징한다. 서로 꼬여진 하체는 음양의 화합, 태극을 상징한다. 주위의 별들과 복희와 여와가 들고 있는 직각자(양)와 분도기(음)는 복희와 여와가 태극, 음양의 원리로 우주만물을 창조했음을 뜻한다. 상하에 그려진 수레바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태양과 달을 괘도까지 그렸을 가능성도 있고 주역의 괘를 원으로 배열한 것일 수도 있다.
우주만물 창조의 코드로서 괘를 만든 복희는 유전자 코드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그림이다. 복희와 여와가 서로 꼬여 있는 것이 수정란의 DNA에서 아버지로 부터온 DNA 한 가닥과 어머니로부터 온 DNA 한 가닥과 꼬여 있는 것 같다.

 
복희는 태어날 때부터 모습이 기괴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효경위 원신계(孝經緯 援神契)》에 이르길, “복희는 큰 눈에, 산처럼 큰 코에, 일각이었으며, 눈두덩은 구슬을 꿴 것 같았다.(伏犧, 大目, 山准, 日角, 衡而連珠.)”고 했다. (《태평어람(太平御覽)》권 367 참조.)  

《춘추위 원명포(春秋緯 元命苞)》에 이르길,

“복희는 큰 눈에, 큰 코에, 용의 얼굴이었다.(伏羲大目, 山准, 龍顔.)”고 했다. (《고미서(古微書)》참조.)

《춘추위 합성도(春秋緯 合誠圖)》에 이르길,

“복희는 용의 몸에 소의 머리, 큰 어깨, 큰 겨드랑이, 산처럼 큰 코, 일각에, 큰 눈에, 둥근 눈두덩, 가늘고 뾰족한 털, 노인의 수염, 용의 입술, 거북이 이빨이었다.(伏羲龍身牛首, 渠肩, 大腋, 山准, 日角, 大目, 珠衡, 駿毫, 翁鬣, 龍脣, 龜齒.)”

라고 했다.

《춘추위 합성도(春秋緯 合誠圖)》에 또 이르길,

“복희는 키가 9척 1촌으로, 넓게 바라보고 집중하여 보았다.(伏羲長九尺一寸, 望之廣, 視之專.)”라고 했다. (《초단기(初學記)》권9.)

여러 위서(緯書)에 기록된 바, 복희는 큰 눈과 큰 코, 일각(日角), 용안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옛날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하던 제왕의 형상이었다. 복희는 용의 몸에 소의 머리 혹은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중화민족의 시조는 용을 토템으로 한다.

《삼황본기》에 이르길, 복희는 태어날 때

“용서(龍瑞)가 있어 용으로써 관직을 기재하여 용사라 하였다(有龍瑞, 以龍紀官, 號曰龍師)”

라고 하였다. 따라서 현재 중화민족은 곧 용의 후계자이다. 천수(天水)는 용성(龍城)이라 할 수 있고, 회양(淮陽)은 용도(龍都)라 할 수 있다. 주의할 만한 것은 복
희와 여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복희가 팔괘를 그린 전설
    

복희가 팔괘를 그렸다는 이야기는 대략 전국(戰國)시기에 시작되는데, 정식 문헌으로는 《주역 계사하전(周易 系辭下傳)》에

“옛날에 포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위로는 우러러 하늘의 모양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굽어 땅의 모범을 관찰하였으며, 옆으로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현상과 땅의 마땅함을 살펴 가까이는 자신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모든 사물에서 비유를 취하여 팔괘를 처음으로 그림으로써 신명의 덕과 통하게 하여 만물의 상황을 종류대로 분류하였다.(古者庖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于天, 俯則觀法于地; 觀鳥獸之文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于是始作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고 한 것이다. 《시자(尸子)》에서 또 말하길,

“복희가 처음으로 팔괘를 그렸다(伏犧始畵八卦).”

고 하였다. 《역전(易傳)》후에도 잇달아 각종 위서가 출현하여 다투어 이 이야기를 상세히 서술하였다. 《역위 건착도(易緯 乾鑿度)》의 말은 《계사하전(系辭下傳)》과 대체로 일치한다.

“공자가 이르길: 상고시대에는 백성들의 차이가 없고 여러 가지 물질이 특별함이 없었으며 아직  의식과 그릇의 이로움을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복희는 이에 위로는 우러러 하늘의 모양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굽어 땅의 모범을 관찰하였으며, 가운데로 만물의 마땅함을 살펴 팔괘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신명의 덕과 통하게 하여 만물의 상황을 종류대로 분류하였다.(孔子曰: 方上古之時, 人民無別, 群物无殊, 未有衣食器用之利. 于是伏犧乃仰觀象于天, 俯觀法于地; 中觀萬物之宜, 始作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역전(易傳)》에서는 《역위(易緯)》와 같이 모두 복희가 팔괘를 그린 것이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대해 우러러 보고 굽어 관찰한 후의 추상적인 총괄이며 팔괘를 그린 목적과 효용은

“신명의 덕과 통하게 하여 만물의 상황을 종류대로 분류(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하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주희(朱熹)는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이에 대해 해석하기를


굽어보고 우러러보고 멀리보고 가까이 보아 서로 다른 것을 취한 것은 (俯仰遠近, 所取不一, 然不過以驗陰陽消息兩端而已. ‘神明之德’, 如健順動止之性; ‘萬物之情’, 如雷風山澤之象.)”

라고 하였다. 《춘추위(春秋緯)》에서는 공자의 권위를 빌어 복희가 괘를 그린 것을 긍정하며 말하길, “공자가 이르길, 복희가 팔괘를 만들고 그 현상을 모아 상세히 설명하고 그 신비함을 읽어 드러내었다.(孔子曰: 伏犧作八卦, 互合而演其文, 讀而出其神.)”고 하였다. (《공양전 은공원년(公羊傳 隱公元年)》소(疏))

복희가 팔괘를 그리고 기호로 결승의 사무를 대신한 것은 인류의 인식에 있어 일대 비약적인 발전이다. 위로 우러러 관찰하고 아래로 굽어 관찰하여 괘를 그린 것은 그다지 신비성은 없다. 하지만 《역전 계사상전(易傳 系辭上傳)》에는 또 다른 견해가 제기되었다.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책이 나왔으니, 성인이 이를 본받았다.(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

위서는 이에 근거하여 크게 과장을 섞어 괘를 그린 이야기를 신비한 길로 이끌었다.

《예위 함문가(禮緯 含文嘉)》에서 말하길, “복희가 덕으로 상하를 다스리자 하늘이 조수의 문장으로써 응하고 땅은 귀서로써 응하니, 이에 형상을 본받아 《역》을 만들어 처음으로 팔괘를 그렸다.(伏犧德治上下, 天應以鳥獸文章, 地應以龜書, 乃則象作《易》, 始畵八卦.)”고 하였다. (《예문류취(藝文類聚)》권11 참고.)

《상서중후 악하기(尙書中候 握河紀)》에서 말하길,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황하에서 용마가 등에 그림을 가지고 나왔는데, 곧 이를 본받아 팔괘를 그렸다.(伏犧氏有天下, 龍馬負圖出于河, 遂法之以畵八卦.)”

고 하였다.

《춘추위(春秋緯)》에서 말하길,

“황하에서는 건(乾)과 통하여 천포(天苞)가 나오고, 낙수에서는 곤(坤)이 흘러 지부(地符)가 나왔다. 황하에서는 용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낙수에서는 거북이가 책으로 감동을 주었다. 하도는 9장이 있고 낙서는 6편이 있다.(河以通乾出天苞, 洛以流坤吐地符. 河龍圖發, 洛龜書感. 河圖有九章, 洛書有六篇.)”

고 하였다.

《황씨일서고(黃氏逸書考)》에는 또

“황하에서 신룡이 등에 그림을 가지고 나왔는데, 복희가 이를 받아 그 문양으로 팔괘를 그렸다(神龍負圖出于河, 宓犧受之, 以其文畵八卦).”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는 팔괘가 우러러 하늘의 모양을 관찰하고 굽어 땅의 이치를 관찰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신비한 계시를 받은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는 팔괘의 탄생에 신비한 색채를 더한 것이다.

삼국시기에 또 다른 괘를 그린 것에 대한 전설이 출현했다. 《삼국지 위서 고귀향공전(三國志 魏書 高貴鄕公傳)》에 이르길,

“《역(易)》박사 순우준(淳于俊)이 말하길, 포희는 수황(燧皇)의 그림에 근거하여 팔괘를 만들었다고 한다.(《易》博士淳于俊曰:包犧因燧皇之圖而制八卦.)”

고 하였다. 이는 팔괘의 문화 연원을 포희 이전의 수황시대로 올린 것이다. ‘수황의 그림’은 막연하고 근거가 없어 박사들의 옛것을 숭상하는 심리를 반영하였다. 호북(湖北) 민간에 유전하는 《흑암전(黑暗傳)》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복희가 그와 여와의 중매인인 남생이(金龜)의 등 문양에서 계시를 얻어 팔괘를 그렸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복희가 남생이를 보았는데, 남생이의 등 위에 문양이 있었다.
곧 남생이의 문양으로써 팔괘를 그려, 태극 팔괘문을 그려내었다.
복희와 여와는 하늘의 모양을 보고, 또 산과 시내, 해와 달, 별을 관찰하였다.
그는 천지를 둘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양이요 하나는 음이었다.
또 두 기(機)는 네 가지 형상으로 나누었고, 네 형상은 또 팔괘를 생기게 하였다.
이름을 취하니 건감(乾坎)과 간진(艮震), 그리고 손이(巽離)와 태곤(兑坤)이었다.
음양이 순탄하고 거스르면서 오늘에 이르러 선천의 팔괘가 형성되었다.


(伏犧他把金龜看, 金龜背上有花紋. 就以龜紋畵八卦, 畵出太極八卦文.
伏犧女媧觀天相, 又觀山川日月星. 他把天地分兩儀, 一個陽來一個陰.
又以兩機分四相, 四相又把八卦生. 取名乾坎與艮震, 還有巽離與兑坤.
陰陽順逆到如今, 先天八卦已形成.)

복희씨가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 관찰하여 팔괘를 그렸든 아니면 하도낙서나 남생이의 등 문양에서 계시를 받아 팔괘를 그렸든, 팔괘의 탄생은 분명 중화민족문화사상 위대한 시도이며 또한 세계문화사상 보기 드문 것에 속한다. 이것은 중국, 더 나아가 동방문화사상의 한 중용한 특징을 다졌으며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 창조의 공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계속) 

 

풍이와 구려



 

풍이가 한국을 세웠다. 이들은 뱀이라는 아이콘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였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이들이 남긴 뱀 문장이 세계 방방곡곡 어디든지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이들은 몸이 크고 발이 큰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나타나면 대부분의 토착민들은 이들이 하늘에서 온 사람들로 맞아들이고 거인이라고 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간 것이 뱀이란 인종 아이콘이었다. 

이들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하늘이었다. 그래서 뱀을 하늘에 올려 뱀으로 천문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용별자리, 북두칠성 별자리, 북극오성별자리 등은 풍이가 뱀 아이콘을 별 아이콘으로 바꾸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들이 뱀을 하늘에 올려 별로 바꾸면서 키포인트가 된 별이 직녀성과 구진성이라는 별이다. 직녀성은 모계시대의 북극성이고 구진성은 부계시대의 북극성이다. 직녀성이 북극성이던 시대에 남자들은 구진일 만을 도맡아 하였다. 그래서 남자들의 북극성을 구진별-구진성이라고 한 것이다.  

구진별을 숭상하기 시작한 남자들 사이에서 특출한 사람들이 뱀을 버리고 구진별을 아이콘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뱀 아이콘이 구진별 아이콘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뱀족임을 나타내는 풍이라는 명칭도 북극성을 나타내는 구진별을 아이콘으로 쓰는 인종을 뜻하는 구려로 바뀌었다. 구려는 ‘아름다운 구진별’이라는 뜻이다.



 

풍이라는 명칭을 구려라는 명칭으로 바꾸어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배달나라이다. 한웅은 웅족 출신인데, 배달나라의 천왕이 되어, 구려족 중에서 처음으로 북두칠성을 자신의 별로 정하였다. 한웅의 한자가 “크다는 뜻이고, 웅자는 곰이라는 뜻이고, 또한 북두칠성이라는 뜻”이라,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북두칠성을 자신의 별로 썼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다.



 

곰은 어머니의 조상이 마고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어머니 조상 마고를 칠성으로 숭상한다는 의미가 있다. 칠성에는 작은곰(소웅성)과 큰곰(대웅성)이라는 2가지 뜻이 있다. 작은곰이라고 할 때는 마고를 의미하고, 큰곰이라고 할 때는 한웅천왕을 의미한다. 마고가 천추(하나님)의 씨를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서자(한웅)이다. 작은곰 별자리에는 이러한 역사가 별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이 천추· 황후· 서자이다. 


이렇게 구려의 중심에는 작은곰과 큰곰이 있다. 이 두 곰을 하늘에 올리고 북극오성이라고 하였다. 구려가 한웅족의 최고 어른으로 모시고 웅상雄常이라고 하였다. 웅상은 지금도 강릉단오제의 전야제 때 현신한다. 무당이 신목을 베어다 신당 마당에 두고 동침하고 행사가 끝난 다음에 태워버리는 행사가 바로 ‘무당이 신목 동침하기’이다. 



 



 

2 한웅이 세운 배달나라에 태어난 伏羲



 

한웅천왕의 5세 손 태우의한웅은 서역지방으로 정벌을 나섰다. 그가 화서華胥에 도착했을 때, 화서족의 여왕 화서가 태우의한웅천왕의 발이 크다는 이유로 무조건 그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발이 크다는 것은 그가 대인이라는 뜻이고, 대인이 곧 이夷(춘분의 기)에서 태어났다고 믿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모신 것이었다. 

물고기 2 마리가 교미하는 모양이라고 하여 <쌍어교미문>이라고 하는 태극무늬이다. 복희가 창안했다고 전해 온다. 한웅천왕이 만든 삼태극사상을 양태극사상으로 줄이기 위하여 만들어낸 문양이다. 삼태극사상은 천문에서 나온다. 양태극사상은 음양대립의 사상이다.



이리하여 태우의한웅천왕과 화서 사이에서 다의발한웅이 태어났다. 다의발한웅은 신통력이 있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천왕으로 등극하면서,  백성들에게 그물을 짜아 물고기를 잡게 하였고, 한웅천왕이 만든 삼태극사상을 양태극사상으로 바꾸었다. 말하자면 3을 사유체계로 하는 세상을 2를 사유체계로 하는 세상으로 바꾼 것이다.



 

지나의 땅 천수天水는 의황고리義皇故里라고 하는데, 의황고리는 다의발한웅천왕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다의발한웅천황을 훔쳐다가 제멋대로 의화응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다의발을 숨기기 위하여 의로 바꾼 것이다.  하화는 다의발한웅천왕을 의황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다시 복희伏羲로 바꾸어 불렀다. 복희의 희羲자에는 다의발의 의儀자와 의황의 의義자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지나에서 복희가 다의발한웅천왕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지나에서 복희라고 주장하는 복희는 다의발한웅천왕이다.

다의발한웅천왕(복희)은 삼태극(3개의 태극)사상에서 양태극(2개의 태극)사상을 만들어내었다. 삼태극사상을 처음 만든 분은 한웅천왕이고, 한태극(1개의 태극)사상을 만든 사람은 다의발한웅천왕의 아버지 태우의한웅천왕이다. 그가 한태극사상을 만들어냈음을 그의 휘諱 태우의太虞儀를 보면 알 수 있다. 태우의는 하나, 즉 1은 태극으로 볼 수 있는 말이다.



삼태극사상의 이론적인 근거는 <천부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이다. 일석삼극은 하나가 셋으로 분화한다는 자연의 생성하는 이치이다. 이 이치에 의하여 우주가 운행한다고 본다. 이를 음양조화라고도 말한다.



 

복희와 여왜의 성은 풍風이다. (<복희문화> 王彦俊 1994. 5.) 이들의 성이 풍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풍이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지나에서는 풍이족에서 복희와 여왜(와)가 태어나는 그림인 <복희와 여왜(와) 교미도>가 전해온다. 이들을 인두사신人頭蛇身-사람 머리에 뱀의 몸의 인간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이러한 인간이 태어나는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복희가 풍이족 출신임을 모르기 때문에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몸이 뱀으로 표현되는 것은, 한인천제와 그의 비 항영의 몸이 뱀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들이 모두 풍이족 출신임을 뜻하는 것이다.

한인천제의 후손에 강희强熙가 있었다. 그는 한인천제의 29세손이었다. 그는 태산이 있는 동부東部의 왕이 되어 화서華胥를 봉지로 받아 부임하였다. (<부소보서>) 강희와 화서의 여자로 볼 수 있는 그림이 위에 인용한 그림이다. 인두사신그림으로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상의 그림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주인공을 한국시대의 풍이족 출신의 강희와 화서족의 여자로 보는 것이다.  

신정은 황하 중류 쪽에 있는 도시로, 한인천제의 후손 위홍衛弘이 남쪽으로 4천여 리를 가서 도읍한 곳으로 <부소보서>에 기록된 곳이다. 당시에 이곳을 청원靑原(후대에 靑城)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제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제기에 암수 2 마리의 뱀이 엉켜 있는 문양이 각인되어 있다. 2 마리의 뱀은 이 제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풍이임을 나타낸다. 이 2 마리의 뱀의 머리를 사람의 머리로 바꿈으로써 그들이 풍이임을 확고히 하였다.

한대에 그려진 복희와 여왜(와)교미도. <한인과 항영도>를 관복을 갖추고 규거를 들고 자손들이 번성하게 하는 유교적인 그림으로 변형시켰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복희가 복희의 희羲(또는 犧)자에 반영된 다의발한웅천왕의 의儀자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한유漢儒가 풍이족출신인 다의발한웅천왕을 한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두사신으로 표현된 뱀이라는 풍이족의 근원적인 주제를 유교적 통치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키지는 못하였다.



 

복희(다의발한웅천왕)의 능은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에 있다. 어대현은 물고기문양인 쌍어교미문양과 관련이 있고, 마고를 상징하는 오리는 솟대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한국의 남한강 수계에는 음력 정월 보름 날 바가지에 식구 수대로 밥 한 숱씩을 담아 떠나보내는 어부심(슴) 신앙이 전해 오는데, 복희(다의발한웅천왕)에게 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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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천국의 서기관
글쓴이 : 시온산 열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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