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奴]을 축출하는 글 - 정약용/다산시문집22권

2018. 4. 23. 10:18잡주머니



       

종[奴]을 축출하는 글 - 정약용/다산시문집22권|고문고사(古文故事)
허현 | 조회 114 |추천 0 |2018.04.11. 07:04 http://cafe.daum.net/heocheonik/N1Hi/1518 

   옛날에 왕포(王褒)는 종[奴]을 부릴 때 참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밤에는 잠을 잘 수 없고 낮에는 쉴 수 없게 하였다. 주밀한 법도는 쇠털과 같았고 잔소리는 모기 소리와 같아 종의 근골(筋骨)을 괴롭게 하고 능력의 한계를 다하게 함으로써 눈물과 콧물이 턱을 거쳐 가슴을 적시었다.


   대개 그 일시적인 꾸지람도 군자가 본 받을 일이 못 되었다. 나는 종과 약속하되 그 조항을 너그럽게 하여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 뜰을 쓸고 여기저기 진흙이 엉겨 막힌 곳을 터놓은 다음, 천천히 조반을 짓되 대략 왕겨나 뉘만을 제거하고 오직 잘 익히기만을 기할 뿐, 맛있고 연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조반 식사가 끝난 후에는 정원을 가꾸되, 죽은 나뭇가지는 잘라내고 더부룩하게 자란 것을 솎아내며,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고, 감나무를 이식하고 벗나무를 접붙이며, 가지를 따고 파를 솎으며, 아욱을 꺾고 부추를 베어내며, 토란에 거름주고 감자에 북을 주며, 배추를 갈고 겨자를 말리며, 오이에 북을 주고 물을 주되 그 꼭지를 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또 통(筒)을 이어서 연꽃에 물을 대고, 초석자리로 파초를 보호하되 치자나무와 유자나무까지도 같이하여 간혹 북을 주기도 하고 물을 주기도 하며, 풀을 베어내 길을 통하게 하며, 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보수하기도 하고 큰소리로 아이들을 쫓아 함부로 꼴을 베지 못하게 하라.


   너는 과히 두려워하지 말라. 이 모든 조항을 4계절에 안배하여 하라는 것이요, 하루아침에 다하라고 책임 지우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산사(山寺)에 양식을 운반하는 것이라든지, 바닷가 저자에 가서 마른 고기를 사오는 것이라든지, 읍내에서 약(藥)을 사오는 것이라든지, 이웃에서 생강이나 대추를 빌려오는 것 같은 일들은 모두 10 리나 5 리의 거리로서 과히 먼 길이 아니다.


   배가 고프면 떡을 먹을 것이요, 함부로 술을 마셔서 취해 넘어지지 말라. 그리고 여가에 마른 섶나무를 베어다가 저장하여 장마비를 대비하라. 또 너에게 전토를 주어 콩과 벼 등의 곡식을 가꾸게 할 것이니 농사철이 되면 아뢰고, 김도 매고 잡초도 베되 이것은 너의 사적(私積)으로서 내가 간섭하여 따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 지시를 듣지 아니하면 너의 직업을 보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계문(戒文) 읽기를 마치자, 종놈은 좋아 날뛰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경건히 정 대부(丁大夫)의 은혜에 감사하며 얼굴에 즐거운 빛을 띄고 입으로 맹세하면서 말하기를,

“미천하고 못생긴 절름발이로서 근실히 받들어 모시기에는 비록 부족하나 약속과 같이 아니하는 일이 있거든 저의 볼기를 치소서.”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보니 행동이 말과 같지 않고 늦추어줄수록 점점 태만해져서 바람에 티끌이 날아들어 어지러이 널렸으되 전연 물 뿌리고 쓸어버리는 일이 없고, 쑥대와 명아주대가 무성하고 가시풀이 우거져 뱀이 꾐으로써 어린 아이들이 놀라곤 하며, 채소와 오이가 말라 꽃망울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몰래 외부 사람과 결탁하여 제마음대로 벌채(伐採)를 허락하며, 조반만 끝나면 달아나 있다가 저녁때야 돌아오며, 저자거리에 쏘다니면서 만취했다가 술이 깨면 돌아와 나무 밑에서 코를 골곤 한다. 게다가 옷은 고운 갈포를 입고 먹는 것도 어육(魚肉)을 겸비하여 오직 우둔하고 교만 방자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거칠고 방탕하여 날로 죄를 짓고 있다. 이에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 깨우쳐 주었으나 고치지 않는다. 이리하여 관주인(館主人) 윤자(尹子)가 종놈을 불러 앞에 꿇리고 엄히 꾸짖기를,


   “나라에서 예우함에 경상(卿相)보다 더 높은 것이 없다. 그러나 혹시라도 자리만 지키고 앉아 녹봉만 도둑질하면 여지없이 쫓아내 여망에 부응한다. 목민관에 있어서도 혹은 나약하여 간호(奸豪)한 무리를 제거하지 못하거나, 혹은 탐색하고 비열하여 능히 위에서 걱정하고 노력하는 마음을 본받지 못하면 하나같이 모두 내쫓아 백성들의 고혈을 빨지 못하게 한다. 하물며 너는 부엌일이나 하는 종놈으로서 감히 네 죄를 도망하랴, 네가 먹은 요미(料米)를 모두 내놓고 함부로 눌러 있을 생각을 말라.”


하였다. 종놈은 이 분부를 듣고 손을 비비고 가슴을 치면서 콧물을 석 자나 흘리고 눈물을 가을비처럼 번지레하게 흘렸다. (이 글은 태만한 종을 들어 당시의 무책임하고 횡포가 심한 관리를 풍자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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