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6. 02:30ㆍ잡주머니
*** 전재자 註 : 동영상을 재생할 수 없음.
cafe.daum.net/Kcinema/8iaB/10 한국영상문학의이해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 1921년~1930년
192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이 등장하고, 한국의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이 손을 잡다.
1920년대의 한국과 세계
파시즘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했으며,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당도 세를 키워 갔다. 한편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은 내전에서 승리한 뒤 한동안 점진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 국가 주도의 급속한 공업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에서는 화려한 영상 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했다. 영화 산업이 발전하고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이뤄졌다. 그러나 불시에 찾아온 대공황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하루 아침에 붕괴 직전으로 몰아갔다.
식민지인들의 저항은 더욱 과감하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어 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국민연합이 결성되고,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이 조직됐다. 인도의 간디가 이끈 소금행진은 인도 독립의 당위를 전 세계에 알렸다.
한국에서도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을 향한 의지가 꺾일 줄 몰랐다. 독립운동 세력 안에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고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도 결성됐다. 신간회의 결성과 민족유일당 운동은 성장한 사회주의 진영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이 손을 잡은 좌우합작의 산물이었다.
연대 | 한국사 | 세계사 | |
---|---|---|---|
대륙/국가 | 사건 | ||
1921년 | 무장 독립운동 세력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판하다 | 유럽 | 러시아 신경제정책 도입 |
자유시사건과 독립군의 희생 | 아시아 | 중국공산당 설립 | |
루쉰의 <아Q정전> 연재 | |||
1922년 | 사회주의 확산과 사상 단체 결성 | 유럽 | 아일랜드 내전 발발 |
한국 최초 노동절 행사 |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에 오르다 | ||
어린이날의 선포 | 소련의 결성 | ||
한국인 최초 비행사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 |||
1923년 | 대한민국임시정부 분열 | 아메리카 | 월트디즈니 설립 |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발표 | 유럽 |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 | |
조선형평사 결성 | |||
간토대지진과 한국인 학살 | |||
1924년 | 이광수 〈민족적 경륜〉 발표 | 아시아 | 제1차 국공합작 체결 |
각각 청년 운동과 노동 ・ 농민 운동의 대표임을 자임하는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다 | 유럽 | 페트로그라드가 레닌그라드로 이름을 바꾸다 | |
암태도 소작쟁의 마무리 | 아메리카 | 에드윈 허블, 은하계의 존재 입증 | |
1925년 | 이승만 대통령 탄핵 | 아메리카 | 스콥스재판 |
조선공산당 설립 | 유럽 | 영화에 몽타주 기법 도입 | |
사회 운동을 강도 높게 탄압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한반도에도 시행되다 | |||
을축년 대홍수 피해 | |||
1926년 | 6・10만세운동 발발 | 유럽 | 텔레비전의 발명 |
영화 <아리랑> 개봉 | 아메리카 |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발사 | |
〈가갸날〉 제정 | 아시아 | 일본 쇼와 천황 즉위 | |
1927년 | 신간회 창설 | 아메리카 | 린드버그, 비행기로 대서양 횡단 성공 |
경성방송국, 한반도 최초의 방송 전파 송출 | 아시아 | 인도네시아국민연합 결성 | |
제4대 조선총독 임명 | 유럽 |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 발표 | |
1928년 | 경성 시내버스 등장 | 아시아 | 만주 군벌 장쭤린의 폭사 |
전민족유일당회의 개최 | 유럽 | 소련의 5개년계획과 농업집단화 | |
홍명희 〈임꺽정〉 연재 | 항생제 페니실린의 개발 | ||
1929년 | 원산총파업 선언 | 아시아 | 터키 라틴 문자 도입 |
제5대 조선총독의 부임 | 유럽 | 바티칸시국의 수립 | |
광주학생운동의 전국 확산 | 아프리카 | 이집트 무슬림형제단 결성 | |
아메리카 |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개최 | ||
세계 대공황 | |||
1930년 | 최승희 제1회 창작무용발표회 개최 | 아시아 | 인도 간디의 소금행진 |
평양고무농장 노동자들의 파업 | 아메리카 | 제1회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 | |
세계 최초의 슈퍼마켓 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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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시대 구분은 한국사의 흐름에 맞추었다.
- 서기 1년 이전의 시대는 교과서에서 쓰이는 '기원전' 대신 '서기의 앞 시기' 라는 뜻에서 '서기전'으로 표기했다.
- 한국사의 연대는 1895년까지는 음력, 태양력을 도입한 1896년 이후는 양력으로 표기했다. 세계사의 연대 표기는 중등 교과서에 따랐다.
-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는 중등 교과서와 국립국어원에 준하되 편집의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화를 줬다.
출처
한국사와 세계사가 동시에 펼쳐지는 신개념 통합 역사 교양서한국사, 이제는 세계사와 함께 봐야 더 깊이 보인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최고의 역사 시리즈한국사 읽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역사책.접기
전체목차
'미션' 속 격변의 조선, 충무로에서 '씨 유 어게인'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 행간 읽기 3] <미스터 션샤인>과 주사 서병달 사건 (하)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문턱까지 갔던 게 사실인 듯하다. 해방 전 식민지 수탈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절 진고개길이었고 지금은 충무로인, 당시 혼마치로 불리는 거리 사진들을 보면 여기가 과연 우리나라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눈을 의심케 한다.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일본 여성들이 보일 뿐 아니라 도회화된 조선인들도 양장이나 양복을 입고 다닌다. 그 사이로 여전히 흰색의 한복을 입은 우리 선조들도 보인다. 적어도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신마치(묵정동)-혼마치(충무로)-남대문로'길은 지금의 종로보다 더 서울의 중심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일제시대 혼마찌(진고개길)과 2018년의 충무로 거리(1가 인근) 경술국치 이후 진고개길은 혼마찌로 바뀌었고 식민지 시절 내내 번화했다. 해방 직후 바로 혼마찌라는 이름은 충무로로 바뀌었다. 2018년 촬영한 진고개길 입구 충무로 1가는 아이러니하게 관광객의 거리가 되어 그시절의 분위기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 |
ⓒ 박성호 |
일본은 자국 거류민들의 상권 확대의 출발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고개길(충무로)과 선은전 광장이라 불렸던 지금의 서울 중앙우체국 앞 분수광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고 경술국치 이후 이곳의 북쪽인 지금의 시청 그리고 심지어 광화문까지 진출해 갔다.
전차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자면 tvN의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진고개 거리 중앙으로 전차들이 오가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심지어 진고개 가로등 점등식 당시에도 전차가 오고 간다. 아무래도 신문물이 넘쳐나는 격변기였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데는 전차만 한 것도 없어서일 거다.
이 전차를 인정한다면 아마도 한성전기회사가 1899년부터 운영하던 용산선일 거다. 용산선은 종로에서 을지로 입구, 진고개 입구를 거쳐 남대문, 구용산으로 갔다. 그렇다면 <미스터 션샤인>의 극중 장면처럼 진고개 길 안쪽으로 전차가 다녔을까?
1885년 일본의 곤도 대리공사가 조선정부로부터 명동성당 후문 또는 진고개 일대를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임진왜란 때 한성을 공격하는 왜군의 주둔지가 남산에 있었고 그곳이 왜성터라고 불렸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일대를 거류 지역으로 정한 이유가 짐작이 된다.
이곳은 소위 말하는 남촌인데 남산골 샌님을 '딸깍발이'라고 부른 것이 샌님들이 신고 다니던 나막신 소리 때문이었다. 다만 짚신 살 돈도 없어서 나막신을 신었다는 설도 있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맨날 진흙탕을 다녀야 하기에 나막신을 신을 수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북촌에 조선의 잘 나가는 양반들이 살았다면 이곳 남촌에는 샌님들이 살았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남촌의 주인공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진흙 때문에 장사는 물론이거니와 거주마저 힘들 지경이어서 공사관이 주도를 해 상인들로부터 자금을 모금하여 진고개의 흙을 2.5미터 가량 파내어 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도로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길 아래에 지름 1.5미터 정도의 하수관로를 파묻어 물을 흘려보냈다.
이로 인해 진고개의 고질적인 진흙탕 문제는 해결이 되자 일본인들은 진고개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황금정(현 을지로 4가), 동쪽으로는 신마치(현 묵정동, 소피텔엠버서드호텔 인근), 서쪽으로는 남대문까지 상권을 넓혀갔다. 남산 아래에 국한되어 있던 일본인들의 활동무대가 서울 주요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 1920년대 ‘경성유람안내도’ 검은색으로 표시된 도로가 진고개길(일제시대 혼마찌)이며 빨간색이 전차노선도인데 진고개길 안쪽으로는 전차길이 없다. | |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
이곳에 본정선이 들어온 것은 황금정 신마치가 혼마찌에 이어 일본인들의 중심가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별 전차 노선도를 확인해보면 진고개 길을 따라 운행된 전차노선은 결국 생기지 않았다. 이윤에 민감한 미국인들의 주도하에 진행된 전차 사업이 요금 때문에 대한제국 백성들의 구매 저항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면 일본인 승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극중 시점에서 진고개를 가는 사람들이 하차를 해야 하는 곳은 어디일까?
일본의 조선수탈 중심지 '선은전 광장'
진고개를 전차로 가려면 하차를 해야 하는 곳은 현 한국은행(화폐박물관)과 서울중앙우체국, 신세계백화점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선은전(鮮銀前)광장'이다. 선은전 광장이란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앞 광장이라는 뜻으로 식민지 시절 내내 센긴마에히로바라고 불렸다. 이곳에 내리면 진고개 입구 혹은 혼마찌 입구로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광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903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간된 '한국경성전도'를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 일제시대 ‘선은전 광장’과 1903년도 발행 ‘한국경성전도’ 분수광장인 일제시대 ‘선은전 광장’은 한성의 구조를 감안하면 상당히 넓게 잘 닦여진 거리였으며 경술국치 이전인 1903년도 모습은 ‘경성전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다음 그림 참조) | |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
광장의 규모는 당시 한성의 도시 구조를 감안하면 꽤 넓었으며 남대문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기에 전차 선로를 이곳으로 깔기에 좋았을 것이다. 남대문로는 종로 보신각(종로구 관철동 45번지)에서 시작해서 남대문(남창동 20-1번지)까지 1500여 미터 이어진다. 애초 조선 한양 천도 이후 경복궁 앞 주작대로가 세종로 사거리에서 종로길과 만나고 다시 종로길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졌지만, 이 길이 확장되고 활성화된 것은 일본의 조선 침탈 계획의 일환이었다.
▲ 1903년 당시 서울 중앙우체국 앞 ‘분수광장’ 인근 모습(경성전도 확대) 조선은행은 아직 지어지기 전으로 인근에 영사관, 거류민역소, 우편전신국, 경찰서 등이 집중되어 있다. | |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
1년 뒤 일본 공사관은 임오군란으로 청수관이 불에 타자 성안으로 진출해 이종승 금위대장 집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바로 박영효 대감의 집(현 천도교회관 옆) 자리에 공사관을 지었다. 이때 공사를 빌미로 일본인 인부 70여 명이 한성에 들어왔는데 이들은 기존 일본인들과 달리 민간인 거주자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일부 완공하여 사용 중이던 공사관 건물이 또 불에 타 버리자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에 생떼를 써 1885년 2월 일본인들의 성내 거주를 허락받게 되었다.
예장골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술 연습장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한양을 공격하기 위해 왜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녹천정은 철종이 세운 정자였는데 이때 일본에 의해 강제로 빼앗겨 허물어져 사라졌다.
일본인들은 임진란의 기억을 잊지 않고 그 곳을 중심으로 조선 수탈을 본격화해갔다. 남산의 일본공사관은 이후 통감부로 바뀌었고 통감부 인원이 늘어나면서 현재의 서울에니메이션센터 자리에 새로운 통감부 건물을 지었다. 기존 건물을 통감관저로 사용했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가끔 등장한 일본 공사의 사무실은 바로 녹천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의 소방 방재청 인근일 것이다.
▲ 남산 녹천정(예장골)에 자리 잡은 일본공사관(통감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공사관이 통감부로 바뀌었으며 1906년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초등학교였던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했다. 왼쪽 검은색 원안의 건물이 남산에 중턱에 있던 일본 공사관 건물이다. 오른쪽 사진은 1906년 당시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11월3일)인 ‘천장절’을 맞이하여 학생들을 동원하여 거행한 기념식 장면이다. | |
ⓒ 인터넷수집후 편집 |
일본 영사관은 공사관 내에 있다가 1885년 현 남산 1호 터널에서 명동방향으로 내려와 만나는 사거리 우측 주자동 6번지, 즉 녹천정 자리의 일본 공사관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거주자 관련 업무가 많았던 영사관은 진고개 일대 일본인 거주자가 늘어나자 1896년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 즉 진고개길 입구 건너편에 2층 양옥을 지어 이전하였으며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영사관은 경성이사청으로, 경술국치 후 경성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경성부 청사가 현 서울시청으로 신축해서 옮기자 그 자리에 미쓰코씨 백화점이 들어서게 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해방 후 미군정 시절 적산불하 과정에서 불하되어 백화점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 경성이사청(이전 일본영사관)과 이후에 같은 자리에 세워진 미쓰코시 백화점 분수광장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2층 양옥의 일본 영사관건물은 경성이사청, 경성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1930년 일본의 ‘미쓰코시 백화점’이 세워졌다. | |
ⓒ 인터넷수집후 편집 |
고사흥 대감의 밀지와 모리 다카시의 전보
일본인들의 활동의 중심지가 된 진고개 입구 선은전 광장엔 1903년 당시 영사관과 거류민 역소 외 또 하나의 중요한 시설이 있었는데 바로 훗날 경성의 중앙 우체국 역할을 하는 '경성우편국'의 전신 '일본 우편전신국'이다. 당시엔 전화도 보급이 잘 안되어 있던 시절이라 우편과 전보는 조선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정부기관이든 조선 땅에서 돈을 벌려는 일본 기업과 장사꾼들에겐 더 없이 중요했던 시설이었다.
<미스터 선샤인> 13화에서 우국충절 고사홍 대감은 일제가 제일은행권으로 조선의 경제를 유린하고 물자를 수탈하고 있음에 개탄하여 전국의 뜻있는 유생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밀지를 발송하는데, 친일파 우체국 책임자가 가로채서 친일파 수장인 외부대신 이완익에게 넘긴다.
그리고 20화에는 조선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일본군 장교 모리 다카시가 조선의 정세와 반일 인사 및 항일의병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수집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유진초이가 한성 우체사의 전보 수발신 내역을 조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둘 다 한성의 우편시설에 관련된 이야기들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옥에 티이거나 허구의 정도가 좀 심하다.
▲ 2층으로 지어진 초기 ‘일본우편전신국’ 건물과 3층으로 지어진 ‘경성우편국’ 건물 ‘일본우편전신국’은 1900년에 현 분수광장이자 진고개 입구인 충무로 1가 일본거류민역소 뒤편에 지어졌고, 이후 1915년 거류민역소를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최신식 ‘경성우편국’ 건물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2층 건물은 경성우편국 부속건물로 사용하였다. | |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
일본 우편전신국은 일본인들이 본국이나 제물포항까지의 교신을 위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하던 시설이어서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다카시나 밀정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면 한성 우체사를 이용했을 리가 없다. 유진초이가 다카시의 밀정들을 찾고 싶었다면 구동매의 힘을 이용해 진고개 입구 '일본 우편전신국'을 조사했어야 말이 된다.
▲ 한성우체사와 통신원 총판 민상호 대감 1895년 다시 우정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 한성에 개설한 한성우체사 모습과 1900년 우정사업을 관장하는 통신원이 생기면서 총판을 맡은 민상호 대감(1898년 미국화가 휴버트보스가 그린 초상화) | |
ⓒ 인터넷수집후편집 |
<미스터 션샤인>에서 친일파 이완익에게 붙어 고사홍 대감의 밀지를 불태우고 다시 변절하여 구동매에게 밀지 중 남아 있던 마지막 본을 전하는 '윤총판'이라는 자는 우체사 총판이 아니라 통신원의 총판이어야 맞다.
친절하게도 드라마에선 총판이 우체사의 최고 직위라는 자막까지 제공하고 있지만 이는 옥에 티다. 우정총국의 최고 책임자가 총판이었듯이 당시 총판은 통신원의 최고 책임자 관직이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보면 고사홍 대감의 밀지가 총판에 의해 친일파에게 넘겨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 미스터 선샤인 윤총판과 한성우체국 실내 모습 극중에서 우체사의 최고 책임자로 표시되지만 당시는 통신원 책임자가 총판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구동매와 유진초이가 한성우체사에서 일본인 장교 모리 다카시와 관련된 전보수발신 내역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은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 |
ⓒ tvn |
당시 실제 총판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반일 친미파 민상호 대감이었다. 이 사실을 기초로 극이 전개되었다면 고사홍 대감의 편지를 총판이 가로채 이완익에게 넘겨주는 스토리는 성립될 수가 없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반일성향이 강했던 민상호 대감 대신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 친일파인 가상의 인물을 만든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의 통신원은 일본의 침략이 더욱 거세져 1905년 한일통신합동조약이 체결되고 12월 20일 통감부 통신관서제도가 발표되면서 통신관리국하의 우편소가 관장하게 되었지만 일제에게 통신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1906년 7월 통감부령에 의해 통신원은 완전 폐지되고 만다.
통신원이 폐지되면서 한성우체사를 흡수한 진고개 입구의 '일본우편전신국'은 1905년 이미 '경성우편국'으로 바뀌었고 그 해에 2층 양옥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1915년에는 이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3층에 벽면은 붉은색과 흰색 화강석으로 올리고 옥상은 돔형태를 취한 연면적 4400여 평방미터 새로운 우편국 건물이 완공되어 바로 옆 혼마치(진고개길)와 함께 일제시대 동안 일본인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그대로 사용되다가 1949년에 서울 중앙우체국 간판을 달았지만 한국전쟁 때 반파되었고, 휴전 후 반파된 건물을 복구하여 사용하다가 1957년에 완전히 허물어 3층짜리 새 우체국 건물을 세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우정사업을 방해한 것은 결국 고사흥 대감의 밀지처럼 조선의 의병이나 항일 세력의 성장을 막기 위한 치밀함이었다.
아쉬운 역사의 순간, 구한말
갓 쓰고 도포 두르고 다니던 대한제국에서 고작해야 마차나 인력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전차의 도입은 일본의 교토와 도쿄 다음이었다. 전등이 점화된 것은 에디슨이 전구를 개발하고 8년 후였다니 꽤나 혁신적인 사건들이었다. 문호개방이라는 명목 하에 청나라와 더불어 서구열강의 이권 쟁탈전이 치열했던 조선에서 새로운 사업으로 부상하고 있던 전기서비스를 둘러싼 이야기는 그만큼 우여곡절로 가득 차 있다.
실제 전차를 도입하자마자 바로 어린아이가 치여 죽는 사고가 있었고 조선 인력거꾼들은 손님이 떨어져 불만이 엄청났다. 심지어 공중에 떠 있는 전선줄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헛소문까지 나돌고 전차 운전수나 매표원들에 대한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전차도입 초기 운전수였던 일본인들이 총을 소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조선인들이 무서워 이들 일본 전차 운전수들이 모두 그만두는 바람에 한동안 전차 운행이 정지되기도 했다.
전차 사업의 주축세력은 미국 공사 알렌의 비호를 받고 있던 미국인들이었고 한동안 한성은 전차를 둘러싼 잡음과 반발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전차나 전등, 우정사업 등이 대한제국 정부의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만큼 독자적인 근대화의 열망이 엄청났음에도 외세 침략에 전전긍긍하는 면만을 그려낸 것이 아쉽다.
당시는 아직 경술국치 이전이어서 식산흥업 정책을 펼쳐가고 있던 대한제국이 주도가 되어 전기사업이 도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꿈을 망친 국가가 바로 일본과 미국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일본에 비해 미국을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로만 그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서울대 출판부, 2007)책 표지와 저자 캐롤 카메룬쇼(Carole Cameron Shwa, 72세) | |
ⓒ 캐롤카메론쇼,서울대출판부 |
신문물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직접 도입하거나 운영할 능력이 없어서 대한제국이 외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당시 상황과 사건, 개입 인물들을 조사하다 보면 국가의 발전에서 신문물이 하게 될 역할과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한 막연히 미국이나 러시아와 관계를 잘 맺으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거라는 미성숙한 외교 감각이 문제였던 것 같다. 실제로 2007년에 국내 출간된 미국 재야 사학자 캐롤 카메룬쇼(Carole Cameron Shwa, 72세)의 <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서울대 출판부)에 의하면 경술국치 이전 이미 미국은 한반도의 일제 강점을 묵인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일본은 철강회사 카네기, 제피모건 등 미국 대기업으로부터 7억 엔(현재 가치 14조 원)에 달하는 전쟁차관을 조달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는 일까지 나중에 벌어졌지만 적어도 미국은 일본의 전세계를 상대로 한 식민지 전쟁을 지원한 셈이었다.
후세에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서병달 주사 같은 분이 이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물 운영의 주도권을 외세에 넘겨 줄 수 없다는 순수한 그의 애국심은 이후 항일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간접자본과 같은 기간산업은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깨우침도 주었을 것이다.
뜨거웠던 화제의 드라마를 보면서 그 시대의 우리 선조들의 삶의 고뇌와 아픈 경험을 다시금 새겨보게 된다. 매천 황현 선생이 그 긴 세월동안 손수 그 시대를 기록하고 남긴 것도 당대 사람들보다 후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전기사]
①이병헌-김태리가 전등 점등식에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니다
②이병헌-김태리 첫 대면, 결정적 옥에 티
[참고문헌]
1. <한전국기통신 100년사>, 1984년 전기통신공사
2. <한국근대 전기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주)>, 오진석, 2006년
3. <대한제국의 전기사업-한성전기회사를 중심으로>, 김연희
4. <관광안내로 본 근대 도시 경성 -1920~30년대 도해 이미지를 중심으로>, 김선정, 2017년
5. <도시 '본정통'의 장소 기억 -충무로·명동 일대의 사례>, 전종한, 2013년
6. 전우용의 서울탐사 블로그-센긴마에히로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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