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3> 차향에 취한 고려.<4>불교와 차 문화 [차(茶)와 사람]

2018. 10. 4. 02:09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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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고려 땐 왕이 몸소 차 준비 … 최승로, 시무 28조서 폐단 지적

 

<3> 차향에 취한 고려

 

 

한국을 대표하는 불보승찰(佛寶僧刹)인 경남 양산의 통도사. 이 사찰에서 옛 고승들은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 스님들이 부처님 진신사리탑 주변을 돌며 참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경남 양산의 통도사. 한국을 대표하는 불보승찰(佛寶僧刹)이다. 그곳에서 옛 고승들이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는 걸 후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절터는 사방 둘레가 4만7000여 보(步:단위) 정도이다. 각각 탑과 장생표(長生標:경계를 나타내는 표지물)가 모두 12개이다… 앞의 사방 장생표 안에 동쪽으로 조일방이 있고, 서쪽으로 자장방과 월명방이 있다. 남쪽으로 적운방과 호응방이 있고, 북쪽으로 백운방과 곡성방이 있다. 모두 통도사에 속한 암자들이다

… 북쪽 동을산(冬乙山)의 다소촌(茶所村·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장소이다. 절에 바치던(차를 만들던) 차밭과 다천(茶泉)은 지금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후인들은 (이곳을) 다소촌이라 여겼다.”『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娑事蹟略錄)』

 

그 다촌의 흔적을 지금 찾을 길은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통도사에는 다촌이 있었다. 구한말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은 『다고사(茶故事)』에서 다촌의 형성 시기를 ‘고려 정종(靖宗)께’로 잡았다. 통도사 다촌은 지금의 울산 언양군인데 그렇게 보는 근거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있다. ‘북쪽의 다촌은 평교이니 곧 거화군의 경계이다(北茶村坪郊乃居火郡之境也)’라는 기록은 거화군(居火郡)은 언양(彦陽)임을 보여준다.

통도사의 다원은 11세기 무렵에 형성됐고 관리자는 통도사 승려였음을 밝히는 이 기록은 사찰이 차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후삼국의 호족 세력이 건국한 고려시대는 차 문화의 꽃을 피웠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기며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중시하라 했는데, 왕실이 주관하는 이들 의례에는 차를 공양했다. 그게 민가에도 흘러가 제사에 차를 올리는 풍속이 생겼다. 다례 혹은 차례(茶禮)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귀족 중심 차 문화 불교계가 허물어

 

기록상으론 태조 14년(931), 군민(軍民)과 승려에게 처음 하사됐다. 이후 고려 초기 5품에서 9품 이상 관리와 관료 중에 80세 어머니와 처를 둔 자에게 차가 하사됐다. 이로 인해 음다층은 확산되었지만 여전히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차 문화의 중심은 여전히 왕실 귀족층과 승려, 관료, 문인이었다. 차나무가 추운 곳에선 자라지 않고, 차가 왕의 하사품으로 권위를 상징한 것도 차 문화가 귀족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벽을 불교계가 허물었다. 사상계를 주도했던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승려와 교류했던 문인들에게도 차가 스며들어갔다. 왕실 후원으로 경제가 탄탄해진 사원은 귀품 차를 만들 수 있었다. 귀한 차를 즐기고, 차와 물을 품평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승려들은 절을 찾는 문인들과 시를 짓고, 차를 품평했다. 그런 자리가 거듭되면서 격조 있는 모임으로 정착된다. 당시 문인들의 시에는 승려들과 차를 즐기며 시를 짓던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시가 자주 등장한다. 이규보(1168~1241)의 ‘화숙덕연(和宿德淵)’이 이런 정황을 잘 그려냈다.

 

 

잔잔한 호수, 파란 물결 넘실거리고

(碧湖晴瀲灩)

여린 풀이 아득히 우거졌네

(芳草遠芊綿)

삼천리 곳곳에서 길을 물으니

(問路三千里)

이름이 알려진 지 이미 사십 년

(知名四十年)

서늘함이 좋아 난간에 기댔고

(愛凉憑水檻)

먼 곳을 보려고 높은 봉우리에 오르네

(眺遠上雲巓)

늙은 승려 일도 많구나

(老衲渾多事)

차를 평하다가 다시 샘물을 평가하려니

(評茶復品泉)

(『동국이상국전집』 권 7)

 

 

그런 귀품 차를 어느 사찰에서 누가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위에서 언급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이다. 이 귀중한 기록을 통해 다소(茶所)가 설치됐음을 알 수 있고, 이로써 당시 차의 전문가는 승려였으며 수행생활에 필요한 차를 자급자족하는 것이 선종 사찰의 전통이란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다촌은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됐을 것이다.

 

고려 색채 띤 차, 왕실 후원으로 생산

 

차 씨는 9세기 유입됐다. 왕실용 차를 생산하는 어차원(御茶園:왕실용 차를 만드는 곳)은 이미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급화와 고려다운 색채를 띤 차품의 생산은 왕실의 후원으로 사원의 공소(工所)에서 이뤄졌다. 고려의 차품이 완성된 시기는 대략 10세기 말께다. 『고려사절요』가 이를 보여준다.

 

“성종 8년(989) 5월, 시중(侍中) 벼슬하던 최승로가 죽었다… (최승로가) 누차 표를 올려 사직을 요청했지만 그럴 때마다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989년)에 이르러 병으로 죽으니 나이 63세이다. 왕이 슬퍼하여 교서를 내려 그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로 추증했다. 부의(賻儀)로 베 1000필과 밀가루 300석, 갱미(粳米) 500백, 유향(乳香) 100냥, 뇌원차(腦原茶) 200각(角), 대차(大茶) 10근(斤)을 내렸다.”

『고려사절요』권 2, ‘성종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이때 하사된 차는 고려에서 생산된 토산차다. 뇌원차는 단차(團茶:잎을 쪄서 찧은 뒤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든 뒤 굳힌 차)이고, 대차는 산차(散茶:잎차)로 짐작된다. 각(角)이나 근(斤)은 당시 차의 단위. 차종에 따라 달리 쓰였다. 그렇다면 각과 근은 어떤 차를 표시한 것일까. 9세기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답이 있다.

 

도당(渡唐) 구법승인 엔닌은 순례기에 차의 단위를 근(斤)과 곶(串)으로 기록해 두었는데, 산차 종류인 세차(細茶)나 몽정차(蒙頂茶)는 근으로, 단차는 곶(串:꿰미)으로 기록했다. 곶(串)과 각(角)은 모두 단차의 단위다. 그래서 10세기 말 성종이 하사한, 각으로 표시한 뇌원차는 단차이고, 근을 사용한 대차는 산차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처럼 단차와 산차를 모두 만들었다. 뇌원차와 대차는 주로 공신들에게 하사된 귀한 차였다. 정종 4년(1038) 거란에서 돌아온 김원충(金元沖)에게 뇌원차와 대차를 내렸다. 이 밖에도 고려에서는 유차(孺茶:어린 차 잎으로 만든 귀한 차), 선차(仙茶:차의 이름), 조명(早茗:어린 차 잎으로 만든 차) 같은 귀품의 차가 생산되었다.

 

실제 명품 차가 완성된 시기는 대략 11세기 이후이며 고려 차품과 다구의 격조는 송나라와 견줄 만했다. 강경숙 전 충북대 교수는 청자 다완의 질적 완성미와 예술미는 11세기에 절정에 올랐다고 하니 차품도 이때 완성됐다고 본다. 아름다운 다완의 출현은 고귀한 차를 담기 위한 것이었다. 차품이 완성되면서 다완의 예술미도 완결된 것이다.

 

 

고려 성종 원년(982) 왕명으로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 28조 가운데 2조. 왕이 몸소 차를 준비하는 폐단을 지적한다.

 

 

“국사 중시해야 할 왕이 차 갈아서야…”

 

얘기가 돌아가지만 최승로(927~989)는 차와 관련이 깊었다. 최승로는 성종 원년(982) 왕명으로 ‘시무책’ 28조를 올린다. 이상적 국가론을 담은 상소문은 지방 호족의 힘이 조정의 힘을 해칠 수 있으니 이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이 몸소 차를 준비하는 폐단도 아울러 지적했다.

 

“전하께서는 공덕재를 베풀고, 혹은 몸소 차를 갈고, 맥차를 연마한다고 하시는데, 저의 우매한 생각에는 전하의 몸이 피로해질까 염려됩니다

(竊聞 聖上爲設功德齋 或親碾茶 或親磨麥 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 

 

‘시무책’ 28조 가운데 2조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공덕재는 불교의 공덕신앙에서 비롯됐다. 공덕을 쌓기 위해 승려들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법회였다. 최승로는 “폐단이 광종에게서 시작됐다”면서 “항상 백성의 기름과 피를 짜내어 재를 베푸니 부처의 신령함이 있다면 어찌 즐거이 공양에 응하겠습니까”라고 나무랐다. 그러면서 “그런 공덕재에서 몸소 차를 갈고(연차), 맥차를 가는 것(마맥)은 국사를 중시해야 할 왕의 일이 아니다”라 했다.

 

여기 작지만 연구자들의 의견이 갈리는 문제가 있다. 연차(碾茶)나 마맥(磨麥) 모두 차를 갈아 가루로 만드는 일인데, 최승로는 왜 굳이 차(茶)와 맥(麥)으로 구분했을까. 지금까지는 대개 글자의 뜻을 따라 ‘차를 갈고, 보리를 갈다’로 해석했다.

 

하지만 10세기 말, 고려산 차는 단차와 산차였다. 게다가 당시는 제다술도 뛰어났다. 그런데도 보리를 갈아 올렸다는 것은 제다 변천사를 고려할 때 의문이다. 보리를 갈아 차 가루와 함께 음용한 사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시인 모문석(毛文錫)의 『다보(茶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10세기께 저술된 『다보』에는 ‘촉주의 진원·동구·횡원·미강·청성에서 차가 난다.

횡원에서는 작설·조자·맥과가 생산되는데, 대개 어린 차 싹을 따서 만든 것(蜀州晉原, 洞口橫源 味江, 靑城. 其橫源 雀舌 鳥觜, 麥顆. 蓋取其嫩芽所造)’이란 기록이 있다. 오대에 맥과(麥顆)라는 명차가 있었으므로 맥(麥)은 차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맥은 이른 봄 보리쌀처럼 어린 차의 싹을 따서 만든 귀품 차를 가리킨 것이다. 최승로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말은 고려 초기 왕실 의례에서 차가 얼마나 귀한 공양물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차(茶)와 사람]

당 유학승들이 신라에 차 소개 … 사찰 공양물로 자리 잡아

 

<4> 불교와 차 문화

 

 

8세기 연기(緣起)법사의 발원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엔 부처님에게 바치는 여섯 가지 공양물의 하나로 차가 나온다. 사진은 경주 신선사에 있는 비석. 차를 바치는 모습이 나온다. [사진 박동춘]

 

 

신라 말 차 문화는 도당(渡唐) 경험이 있는 수행승들이 주도했다. 차를 잘 다루는 전문가이며, 차의 실질적 수요자였다. 이들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으로 차를 올렸다. 공양은 ‘존경과 숭배’를 뜻한다. 계문의 묶음인 『오분계본(五分戒本)』은 공양을 ‘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화엄경』은 의미를 확대해 ‘모든 것을 바치고, 회향하는 것’이라도 했다. 초기 교단의 공양은 의복이나 음식·탕약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점차 집이나 토지를 올리는 것으로 변했다. 이는 승단 경제의 토대가 된다.

 

그럼 차는 어떻게 공양됐을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흔치 않지만 해석의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선종의 유입이 차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 볼 때, 한반도에서 처음 차가 공양된 사례는 『삼국유사』에서 확인된다.

 

“(정신 태자 보질도(寶叱徒)와 그의 아우 효명 태자) 두 태자는 나란히 예배하고 늘 이른 아침, 우통수(于洞水)를 길어다 차를 달여 (오대산) 일만 진신 문수보살께 차를 공양하였다.”(『삼국유사』 권3,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

 

우통수는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와 함께 한강의 발원지로 일컫는 그 우통수(于筒水)의 물이다. 처음으로 문수보살에게 차를 올렸던 인물인 보질도와 효명 태자는 늘 이른 아침, 이 물로 차를 달여 올렸다고 한다. 이들은 향기로운 차를 달이는 데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터득하고 있었다. 후일 초의선사(1786~1866)가 ‘물은 차의 몸’이라고 한 견해는 오래전부터 수행자의 이런 경험이 축적돼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신라 말부터 커지기 시작한 불교는 차가 널리 유포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승려들, 휴대용 다구 ‘앵통’ 지니고 다녀

 

보질도와 효명 태자는 왕자였음에도 성의와 존경·숭배라는 공양의 의미를 실천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차를 공양물로 사용했다. 그럼 두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연구자들은 정신 태자 보질도는 7세기 인물인 보천(寶川) 태자이며, 효명 태자는 천수 3년(692)에 즉위해 장안 2년(702)에 죽은 효소왕(孝昭王)으로 본다. 이를 근거로 차가 처음 공양물로 사용돼 부처님이나 문수보살에게 공양된 것은 7세기였음이 확인된다. 기록상으론 이게 처음이다.

 

실제 불전의 공양물이 구체적으로 열거된 사례는 8세기께 쓴 연기(緣起)법사의 발원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에 나온다. 발원문엔 육법공양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부처님께 올리는 여섯 가지 공양물, 향(香)· 등(燈)· 차(茶)· 꽃· 과일· 쌀이다.

따라서 8세기께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이 규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양물은 이렇게 규격화됐지만 한편으론 공양의 원형도 지속된다. 충담선사가 미륵세존에게 올린 차 공양이 그 예다.

그가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했던 시기는 연기법사의 발원문 제작 때와 같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차 공양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내용이 『삼국유사』에서 확인된다.

 

“(경덕왕 24년(764년)) 3월 3일 (경덕)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에 납시어 좌우(신하)에게 이르기를 ‘누가 위엄 있는 스님을 모셔 올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낡은 헝겊을 기워 만든 옷)를 입고, 앵통(櫻筒·다구를 담는 통)을 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이 기뻐하면서 맞이했다. 왕이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하자 승려는 ‘충담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으니 승려가 ‘저는 늘 삼월 삼일과 구월 구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지금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나에게도 차를 한잔 줄 수 있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달여 올렸다. 차의 향과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는 기이한 향기가 진동했다.”

 

3월 3일은 삼짇날, 9월 9일은 중구날이다. 경주 남산에 있었다는 삼화령의 미륵세존은 경주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돼 있다. 충담이 차를 올린 현장은 원형을 잃었지만 이 기록은 8세기 차 문화의 유입 초기, 차의 유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특히 그의 앵통은 당시 차 도구의 형태와 수행승의 차 생활을 나타낸다. 그가 다구가 든 앵통을 지고 납의를 입었다는 것으로 보아 선종(禪宗)의 수행승(修行僧)이라 짐작된다.

 

당시 선종의 수행승은 새로운 문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당으로 들어가 새로운 수행법을 익혔던 이들은 마조(馬祖·709~788)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를 원했다.

마조계의 선사상(禪思想)이 화엄과 상통하면서도 관념적인 허식을 부정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마조의 문하에 모여든 것은 신라 말, 불교계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마조의 선사상으로 현학적인 교학(敎學)을 부정하고 이를 뛰어넘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귀국한 수행승들 앞에 놓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당시 득세하고 있던 교종은 선종 수행승의 활동 영역을 위축시켰다. 선종 수행승은 그러나 차를 마시는 전통과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일은 수행의 일과로 보고 빠뜨리지 않았다. 충담 스님은 이런 수행 풍토를 유지했던 승려로, 정해진 날에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일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이 차를 청하자 곧바로 앵통에서 다구를 꺼내 차를 올렸다. 그가 올린 차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진동한 것으로 미루어 귀한 차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아울러 그가 지닌 앵통은 휴대용 다구인데 왜 휴대용 다구까지 갖고 다녔을까. 이는 선종 승단의 생활 규범을 의례화했던 ‘청규(淸規)’와 관련이 깊다. 당의 고승이었던 백장선사(720~814)가 만든 ‘청규’에 의하면 선종의 수행승들은 출타할 때 점차 차와 경전, 휴대용 불상을 꼭 갖고 다녀야 했다. 이는 차와 수행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충담이 앵통을 지녔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덕왕(742~765)도 차와 관련이 깊다. 충담선사나 월명 스님과 관련된 차 이야기도 경덕왕 때의 일이다. 어진 임금이었던 그가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는 해엔 오악(五嶽·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부악(父岳))의 산신(山神)들이 나타나 그를 모셨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완품 차 수입 탓 9세기께 신라서 첫 생산

 

이런 통치자였던 경덕왕이 3월 3일 귀정문 누각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충담 같은 위엄을 갖춘 수행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또 충담에게 차를 청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차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충담은 자다법(煮茶法)으로 달인 차를 임금에게 올렸을 것이라 짐작된다. 당시 당에서도 유행했던 이 방법은 선승들에 의해 신라에 소개되었다.

 

자다법으로 차를 달이는 과정을 살펴보자.

당시 찻잎은 시루에 쪘다. 찐 찻잎을 절구에 넣고 찧은 다음 떡처럼 틀에 찍어 낸 후 은근한 불에 말린다.

이를 병차(餠茶·떡처럼 틀에 찍어 만든 차)라 부른다.

병차를 약한 불에 몇 차례 반복해 구운 후 가루로 만든다. 이 차 가루를 끓는 물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차 거품이 일어나는데, 이게 말발(沫餑)이다.

찻잔에 말발과 우려진 차를 함께 담아 마셨다. 말발은 차의 백미다. 당시 차는 귀품이었다. 수행승들이 완품의 차를 당에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신라에서의 차 생산은 9세기께에나 이뤄진다.

특히 8세기 신라에서는 차를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하사품으로도 사용했다. 이는 『삼국유사』의 월명 스님과 도솔가에 얽힌 이야기에서 확인된다.

 

“경덕왕 19년(760)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인연이 있는 스님을 청해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치리라’ 했다.

… 왕이 사자를 보내 월명 스님을 불러 제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 했다. 월명이 아뢰길 ‘승려인 저는 다만 국선도(國仙徒)에 속해 향가만을 알 뿐이요, 범패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이미 인연 있는 스님으로 뽑혔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다’고 하였다. 이에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

… 곧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왕이 칭찬하고 차 한 상자와 수정으로 만든 108염주를 내렸다.”

 

 

월명은 승려이지만 국선의 무리였다. 국선은 사선(四仙) 중 하나다.

사선은 안상·영랑·술랑·남랑 등 네 명의 화랑을 말한다. 이들은 3000명의 낭도를 이끌고, 명승지를 유람하며 도의를 연마하고, 음악을 즐기며, 심신을 수련하면서 차를 즐겼다.

월명은 한민족 고유사상인 풍류도를 수련했던 국선이었다. 사선들이 산천을 유람하면서 차를 즐겼던 현장은 이곡(李穀·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에 ‘이 정자(한송정)도 사선이 노닐던 곳인데… 지금은 석조와 석지(石池), 두 개의 석정(石井)이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도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새로운 수행법을 받아들인 승려 가운데 풍류도를 함께 수련했던 수행자도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차는 수행승들의 수행음료, 공양의 대상물이었으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사품이었다.

그러다 고려 건국 뒤 선종의 교세가 확산되면서 차 문화는 화려한 꽃을 피운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중앙SUNDAY

 

 

 

 

최승로-

시무28조 時務二十八條

 

竊聞聖上。爲設功德齋。或親碾茶。或親磨麥。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

此弊始於光宗。崇信讒邪。多殺無辜。惑於浮屠果報之說。欲除罪業。浚民膏血。多作佛事.

或設毗盧遮那懺悔法。或齋僧於毬庭。或設無遮水陸會於歸法寺。

每値佛齋日。必供乞食僧。或以內道場餠果。出施丏者. 或以新池穴口與摩利山等處魚梁。爲放生所。一歲四遣使。就其界寺院。開演佛經。又禁殺生。御廚肉膳。不使宰夫屠殺。市買以獻.

至令大小臣民。悉皆懺悔。擔負米穀。柴炭蒭豆。施與中外道路者。不可勝紀.

然以旣信讒愬。視人如草莽。誅殺者堆積如山。常竭百姓膏血。以供齋設。佛如有靈。豈肯應供.

當是時。子背父母。奴婢背主。諸犯罪者。變形爲僧及遊行丏乞之徒。來與諸僧。相雜赴齋者亦多。有何利益. 今聖上在位。所行之事。與彼不同。但此數事。只勞聖體。無所得利。願正君王之體。不爲無益之事,

 

제가 듣건대 전하께서는 공덕재(功德齋)를 베풀고 혹은 몸소 차(茶)를 갈기도 하시며 혹은 친히 밀(麥)도 찧으신다 하는데 저의 우매한 생각에는 전하의 몸을 근로하시는 것은 깊이 애석한 일입니다.

이 폐단은 광종 때부터 시작된 일인바 그는 참소를 믿고 무죄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불교의 인과보응설에 미혹되어 자신의 죄악(罪業)을 제거하고자 백성의 고혈을 짜내서 불교 행사를 많이 거행하였으며

혹은 비로자나참회법(毗盧遮那懺悔法)을 베풀거나 혹은 구정(毬庭)에서 중들에게 음식을 먹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귀법사에서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도 베풀었습니다.

매양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에는 반드시 걸식승들에게 밥을 먹였으며 또는 내도량(內道場)의 떡과 실과를 가져다가 거지에게 주었으며 혹은 혈구산(穴口)과 마리산(摩利山) 등처에 새로 못을 파서 어량(魚梁)을 설하고 물고기들을 방생(放生)하는 장소로 만들었으며 1년에 네 차례씩 사신을 파견하여 그곳의 사원들로 하여금 불경을 개강하게 하고 또한 살생을 금지하며 궁중에서 쓰는 육류를 도살부에게 도살시키지 않고 시장에서 사다가 쓰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대소 신민들로 하여금 모두 다 “참회(懺悔)”를 시켰으므로 미곡과 시탄, 건초, 콩(豆)을 메며 지고 가서 서울과 지방의 길가에서 나누어주게 한 것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러나 벌써 참소를 믿고 사람을 초개 같이 보고 죽인 그 시체가 쌓이고 쌓여 산과 같았고 항상 백성들의 고혈이 마르도록 짜냄으로써 불공과 재를 베푸는데 이바지했으니, 부처가 신령함이 있다면 어찌 즐거이 공양에 응하겠습니까.

벌써 이때에는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노비들이 상전을 배척하며 가지각색의 범죄자들은 중으로 변형하고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여 먹는 무리들이 진짜 중들과 함께 섞여서 재 드리는 곳으로 오는 자도 또한 많았으니 불공을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제 성상이 즉위하신 후 하신 일들이 그때와는 같지 않으나 다만 이 몇 가지 일은 전하의 몸만 괴롭게 할 뿐이요, 이를 얻은 바는 없으니 원컨대 군왕의 체통을 정대하게 가지시고 무익한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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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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