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5> 이규보.<6> 차 문화 전성기 11~12세기 [차(茶)와 사람]

2018. 10. 4. 02:08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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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고려 귀족 우아한 茶 문화 뒤엔 백성들의 피와 땀

 

<5> 이규보

 

 

차 문화가 번성한 고려 시대에는 뜻이 맞는 벗에게 차를 가는 맷돌이나 물 끓일 때 쓰는 철주전자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규보도 맷돌을 받고 감사의 뜻으로 『사인증다마(謝人贈茶磨)』라는 시를 썼다. [교토국립박물관]

 

 

고려 무신정권의 격변기를 살던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30여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그 시대는 동시에 차 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이미 연고차인 유차(孺茶)나 조아차(早芽茶) 같은 극품의 차가 생산되었고, 흰 다말(茶沫)의 예술미를 감상할 수 있는 흑유(黑鍮: 검은 바탕에 금을 상감한 것) 계통의 금화오잔(金花烏盞)이나 청자 다완(茶碗)이 널리 사용되었다.

사원에서는 차품을 감상하거나 차 맛을 겨루는 명전(茗戰: 차를 다루는 솜씨를 겨루는 놀이)이 성행한다. 고려 중기의 문인 이연종(李衍宗)은 『사박치암혜차(謝朴恥庵惠茶)』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명전을 이렇게 썼다.

 

 

젊은 시절, 영남의 절에 손님으로 가서(少年爲客嶺南寺)

여러 번 스님 따라 명전 놀이 했었지(茗戰屢從方外戱)

용암의 바위 가장자리, 봉산의 기슭에서(龍巖巖畔鳳山麓)

대나무 사이로 스님 따라 매부리만 한 차를 땄네(竹裏隨僧摘鷹觜)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고 하는데(火前試焙云最佳)

더구나 용천과 봉정의 물이 있음에랴(況有龍泉鳳井水)

사미승, (차 다루는)삼매의 날랜 솜씨(沙彌自快三昧手)

백설 같은 다말(茶沫), 찻잔에 따르기를 그치지 않네(雪乳飜甌點不已)

 

『동문선』권7

  

 

이규보 영정.

 

 

차 문화를 주도했던 승려들은 좋은 차와 물을 감식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차 전문가들이었다. 이규보는 『화숙덕연원(和宿德淵院)』에서 ‘늙은 승려 일도 많구나/차를 평하다가 다시 물맛을 평하려니(老衲渾多事 評茶復品泉)’라고 썼다. 고려 시대엔 승원(僧院)에서 명전 놀이를 즐겼는데, 이는 음다 풍류의 극치였고, 도락이었다. 시에선 특히 젊은 시절 이연종이 영남의 절에서 명전 놀이를 했고, 스님을 따라 차를 땄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가 말한 용암이나 봉산, ‘대나무 사이’는 최상의 차 잎을 얻을 수 있는 생육환경을 말한 것이다.

사원에서 만든 극품의 연고차가 매부리만 한 작은 차 싹으로 만든 것이라는 점도 확인된다. 사미승의 차 다루는 솜씨를 ‘삼매의 날랜 솜씨’라 한 것도 재미있다.

 

명전 놀이가 언제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중국 송(宋)대에 유행했던 투차(鬪茶) 놀이가 고려에 소개된 뒤 성행했을 것이라 짐작될 뿐이다. 중국의 투차 놀이는 상인이나 백성들도 즐겼던 일반적인 차 유희였던 반면 고려의 명전 놀이는 승려나 문인들로 제한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차 문화가 귀족사대부를 중심으로 발전한 문화였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자신과 가까운 문인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규보의 『연보』에 따르면 혜문 스님과 희 선사가 이규보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숯과 쌀, 솜을 보내 도움을 줬다. 이규보는 약관의 나이에 죽림고회(竹林高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무인난 이후 출세를 단념한 일부 문인이 산림에 은둔해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모임이 유행했으니 이것은 바로 진(晉)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한 것이다. 그의 『칠현설(七賢說)』은 죽림고회의 결성 내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아무개 등 일곱 사람이 스스로 당대의 호걸이라 하면서 마침내 서로 어울려서 칠현이라 하니 대개 진의 7현을 사모한 것이다.

늘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자기들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했다. 세상에서 비방하는 말이 많아지자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내 나이는 바야흐로 19세였다.

(先輩有以文名世者某某等七人 自以爲一時豪俊 遂相與爲七賢 蓋慕晉之七賢也

每相會飮酒賦詩 旁若無人 世多譏之 然後稍沮 時予年方十九)”

 

당시 죽림고회에 참석한 인사는 모두 7명이었다. 당대에 문장가인 오세재(吳世才·1133~?), 임춘(林椿), 이인로(李仁老·1152~1220), 조통(趙通), 황보항(黃甫抗), 함순(咸淳·1155~1211), 이담지(李湛之)등이 참여했다. 특히 무신난 이후 가장 명망이 높았던 이인로와 임춘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며 죽림고회의 일원이 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차 마시는 즐거움을 쓴 시가 수록돼 있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규보는 11세 때 이미 글 잘하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거듭 과거에 낙방해 40세에 한림원 관리가 된다. 그의 이러한 어려움은 그의 말대로 ‘4~5년 동안 술로 기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살면서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는 것만 일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쓴 ‘연보’에서 이규보가 ‘주필이당백(走筆李唐白)’이라 칭송돼 시선(詩仙) 이백(李白)에 비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그의 시가 탁마를 통해 갈고닦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술 취해 붓을 들면 호연(浩然)한 장부의 흉중만어(胸中滿語)가 물처럼 흘렀으리니 시학에 뜻을 둔 자라면 누구인들 흠모하지 않으랴.

 

그가 남긴 다시(茶詩)에서 음다의 즐거움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를 차의 깊은 심연(深淵)으로 안내한 것은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칠완다가(七碗茶歌)』였다. 이 글은 당시 사대부라면 읽는 보편적인 도서였던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숙빈강촌사(宿瀕江村舍)』의 ‘묵은 책은 다 흩어져 『약보』만 남았고, 모아둔 물건 뒤져보니 『다경』이 있네(散盡舊書留藥譜 檢來餘蓄有茶經)’라는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승원을 찾아 그와 교유했던 방장스님의 담담하고 청빈한 음다 풍모를 『부용전운증지(復用前韻贈之)』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초연한 방장스님, 물건 하나 없는데도(蕭然方丈無一物)

솥에서 물 끓는 소리 듣기 좋구나(愛聽笙聲號鼎裏)

차와 물을 평하는 것이 불교의 가풍이니(評茶品水是家風)

양생 위해 천년의 복령(茯笭)이 필요하지 않네(不要養生千歲虆)

사랑스럽게 막 돋아난 차 싹, 빨리 따서(憐渠給給抽早芽)

늙은 스님에게 먼저 올리려는 듯(似欲先供老衲子)

잠꾸러기 종놈이 훔쳐 맛보고(睡鄕癡漢亦偸嘗)

지난번 우레처럼 코 골던 소리 잠잠하구나(失却從前雷鼾鼻)

 

『동국이상국전집』 권13

 

 

이 시는 수행이 깊어 물욕조차 끊어지고 소유품이 단지 물 끓이는 솥단지뿐인 늙은 스님의 담담한 경지를 보여준다. 원래 차의 심오함은 수행자가 터득한 이치다. 그러므로 물과 차 맛의 품평은 본래 스님들의 일상사였다. 차는 원래 맑음을 상징한다.

 

이는 차의 진실한 가치다.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위해 신선들은 차를 즐겼던 것. 그러므로 차를 즐기는 승려, 무슨 연유로 불로초를 구하려 했겠는가. 세상에 귀한 차는 부처님과 스님들께 올리는 법이다. 귀한 차가 좋다는 걸, 잠꾸러기 종놈인들이 모르랴. 노스님, 맛을 보기 전에 종놈이 먼저 차 맛을 보고, 차의 황홀한 경지에 빠져버렸다. 차의 담백한 선미(禪味)란 원래 이런 것. 이규보는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듯, 시 한 수로 이런 차의 세계를 잘도 드러냈다.

 

고려시대 차의 생산지는 전라도와 경상도였다. 화계와 순천 지역에서 고급 차가 생산된 듯하다. 당시도 나름의 차의 포장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맑은 향취 새어 나갈까 염려하여 상자 속에 겹겹이 넣고 칡덩굴로 묶었네(爲恐淸香先發洩 牢鎖縹箱纏紫蘽)”라고 한 것이나 이규보의 벗 일암거사 정분이 보낸 차가 ‘하얀 종이 바른 함에 붉은 실로 얽어 있다(粉牋糊櫃絳絲纏)’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에도 습기나 잡향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자 속에 넣어 보관했다.

차 보관의 중요성은 이규보의 『고우가(苦雨歌)』에서도 드러나는데 ‘상자 속의 좋은 차는 맛이 많이 변했으니 (차를)달여 먹은들 잠을 쫓지는 못하리(箱底芳茶貿味多 不堪烹煮驅眠魔)’라고 한 것이다. 차가 한번 오염되면 정기를 잃는다는 사실을 ‘잠을 쫓지는 못하리’로 에둘러 표현했다.

 

고려시대엔 뜻이 맞는 벗에게 차를 가는 맷돌이나 물을 끓일 때 필요한 철병(鐵甁: 철로 만든 주전자)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규보가 남쪽 사람이 철병을 보냈기에 차를 달이며 쓴 『득남인소향철병시차(得南人所餉鐵甁試茶)』와 차 맷돌을 보낸 사람에게 감사하며 쓴 『사인증다마(謝人贈茶磨)』에서 확인된다.

 

한편 음다 풍속이 사치해지고, 다양한 다회가 열렸던 고려중·후기에는 관부의 차세(茶稅) 핍박이 대단했다. 이런 가렴주구(苛斂誅求)는 날로 가혹해졌던 듯하다.

당시 이규보는 손한장에게 ‘과도한 차세를 금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내용의 시를 보낸다. 바로 『孫翰長復和次韻寄之(손한장부화차운기지)』는 차세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고통을 나타낸 것이다.

 

 ‘관에서 감독하여 늙은이와 어린아이까지 징발하였네(官督家丁無老稚)’라고 개탄했다. 차를 만들기 위해 노인과 어린이까지 차출하고, 만든 차는 서울까지 등짐으로 날라야 했다. 일정량의 차를 해마다 바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차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이니,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얻은 것(此是蒼生膏與肉 臠割萬人方得至)’이라고 정의했다. 당시 농민들은 차세를 피해 차나무에 불을 지르고, 차가 나는 산림을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해 이규보는 ‘산림과 들판을 불살라 차의 공납을 금한다면 남녘 백성들이 차세 면함은 이로부터 시작되리(焚山燎野禁稅茶 唱作南民息肩始)’라고 했다.

 

차로 인한 원성이 얼마나 깊었던지 조선이 건국된 뒤 왕실에선 차는 퇴출됐다. 하지만 차의 맑고 고상한 풍류는 원래 그런 것은 아니다. 이 폐단은 호사가의 욕심이 불러온 것일 뿐이다.

 

 

 

 

[차(茶)와 사람]

고려 왕실, 식은 차 마신 후 뜨거운 물에 우려낸 탕 즐겨

 

<6> 차 문화 전성기 11~12세기

 

 

고려시대 차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중국 북송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서긍은 휘종의 국신사절로 12세기 초 개경을 방문했다. [사진 박동춘]

 

 

고려시대는 차 문화의 전성기였다. 11~12세기 무렵, 고려 차의 품질이나 다구(茶具)는 이미 화려한 차 문화를 꽃피웠던 송(宋)과 비견할 만큼 발전됐다. 고려적인 색채가 두드러진, 맑고 그윽한 아름다운 비색이 또렷한 청자 다완(茶碗)은 찻잔의 극치미를 드러냈다. 이러한 찻잔의 출현은 이미 이 시기의 차 문화가 절정기였음을 나타낸다. 더구나 왕실과 사대부·승려들이 즐겨 사용했던 청자 다완은 눈처럼 희디흰 백차의 다말(茶沫)이 돋보이도록 설계된 것이며, 섬세한 다말이 부드럽게 입안으로 넘어가도록 고안된 과학적이고도 완벽한 다구였다. 고려인의 독창적인 차에 대한 미감과 안목은 이렇게 빛났다. 특히 이 시기에 유행했던 백차(白茶)는 섬세하며, 절정의 미적 감수성을 가졌던 송 휘종(1100~1125)이 가장 먼저 즐겼던 차다. 이후 백차는 귀품의 차로 상징됐다. 송대의 건요 찻잔이나 흑유 찻잔의 출현은 백차의 미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검은 흑유 잔에 담긴 희디흰 다말! 흑색과 백색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조화의 극치를 이룬 차의 세계, 이는 휘종의 안목이 만들어낸 극치미의 예술세계였다. 이로부터 차는 정신을 맑게 하는 음료에서 숭고미를 간직한 예술로 승화됐다. 따라서 고려시대 청자 다완은 당시 유행했던 차의 예술적 감수성을 극대화한 찻잔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서긍(徐兢·1101~1153)은 이러한 풍요로운 차 문화를 구가하던 시기에 고려를 방문했다. 북송 휘종의 국신 사절로 파견된 것이다. 그는 개경을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엮어 휘종에게 사행보고서(使行報告書)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약칭 『고려도경』)이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사회·문화·제도·풍물·음다문화·해로 등을 사실대로 기록했다. 이는 고려의 차 문화뿐 아니라 제도·문물·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도경』이 저술된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보자. 서긍의 사절단은 선화 5년(1123) 2월부터 사행을 준비해 특별히 건조한 관선, 신주 2척과 민간 소유인 객주 6척으로 선단을 구성해 3월 14일 배편으로 변경을 떠나 5월 4일 명주에 도착했다. 정사와 부사 및 사무를 관장하는 도활관(都轄官)과 제활관(諸轄官), 뱃사람 등 대략 200명이 넘는 규모였다. 이들은 명주에서 출발, 군산도에 도착한 후 다시 예성항으로 입항해 개경으로 들어갔다. 고려에 올 때는 남풍을 이용하고, 송으로 돌아갈 때는 북풍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은제 금도금주자 ▼중국 송대 찻잔인 토호잔. [미국 보스턴 미술관]

 

 

서긍은 인종(1122~1146)이 즉위한 이듬해 개경을 다녀갔다. 서화에 비상한 재주를 지녔던 그는 특히 산수화와 인물화에 능했다고 한다. 그가 짧은 사행기간 동안에 풍부한 내용뿐 아니라 그림까지 곁들인 『고려도경』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예리한 관찰력과 문장력, 그리고 빼어난 서화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사행 길에 오른 시기는 암울했다. 북쪽으로는 요(遼)와 금(金)의 압박과 서남쪽으로 서하(西夏)의 독립으로 인해 북송의 위세는 더욱 약화됐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 예종(1106~1122)은 금과 요를 적절히 이용해 국내 안정을 도모했으며, 북송과의 교류를 통해 문치의 터전을 닦았다. 이렇게 대외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북송은 고려와의 친교를 굳건히 하고자 여러 차례 사절단을 파견한다. 서긍이 국신 사절단으로 고려에 파견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러나 북송 휘종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진을 통일한 금은 요를 멸망시킨 후 1127년 송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킨다. 이런 와중에 휘종은 금의 포로가 되어 불고(不顧)의 혼이 됐다.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것은 북송이 금에 멸망되기 4년 전이었다.

 

서긍은 화주(和州) 역양(歷陽) 사람이며, 권문세가 출신이다. 그의 자(字)는 명숙(明叔)이며, 호는 자신거사(自信居士)다. 정화 4년(1114)에 장사랑에 임명됐고, 선화 5년(1123) 국신사 중에 소제할인선예물관(所提轄人船禮物官)으로 고려에 파견됐다. 그는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 국신소 사절단(國信所 使節團)의 일환으로 파견됐으나 예종의 서거로 제전(祭奠)과 조위(弔慰)의 임무를 함께 수행했다. 그가 개경에 머문 기간은 대략 한 달 정도다. 공무에 시달리고 행동의 제약 속에서도 『고려도경』을 엮을 자료를 수집, 소묘와 비망기를 적어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이 보고서는 그가 개경을 다녀간 후 대략 1년 만인 선화 6년(1124)에 완성된다. 휘종은 이 보고서를 보고 기뻐하여 그에게 관직과 지위를 올려주었다.

원래 『고려도경』은 원본과 부본 두 본을 만들어 원본은 휘종에게 올리고, 부분은 그의 집에 보관했는데 마을 사람 서주빈이 서긍이 보관했던 부분을 빌려갔다가 정강의 난(1126)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서긍의 아들 서천(徐蕆)이 아버지를 따라 강서 홍주(지금의 남창)에 있을 때 북쪽에서 온 상관생에게 『고려도경』을 얻었는데, ‘해도’ 두 권만이 원래대로 그림과 글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그림은 유실된 채 글만 남아 있었다. 이것을 저본으로 건도 3년(1167)에 『고려도경』40권을 판각했으니 이것이 초판본 『고려도경』이다. 혹자는 고려본의 『고려도경』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이 책의 소재는 알려진 적이 없다.

 

당시 서긍은 송 황실의 회사품(回賜品)인 용봉단(龍鳳團)을 가져왔으리라 짐작된다. 용봉단차가 송의 회사품으로 고려에 처음 하사된 것은 문종32년(1078)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편에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 정묘일 태자를 순천관에 보내 송나라 사신을 인도하여 오게 하였다

…별도로 보내 온 용봉차가 10근인데 한 근씩 금으로 도금한 은 죽절합자에 넣어 밝은 금 오채로 장식하고 요화판 주칠갑에 담아 붉은 꽃무늬 놓은 비단 겹보로 각각 쌌는데, 용차가 5근이고 봉차가 5근이었다.

(六月丁卯 命太子詣順天館導宋使

…別賜龍鳳茶一十斤 每斤用金鍍銀竹節 合子 明金五綵 裝腰花板朱漆匣盛 紅花羅夾帕複 龍五斤鳳五斤)

『고려사』 ‘세가’

 

 

순천관은 바로 송나라 사신이 묵었던 전각의 이름이다. 당시 송 사신은 신종(神宗)이 보낸 용봉단차를 문종에게 전했다. 용봉단차는 원래 용차와 봉차를 합성해 부르는 차 이름이다. 용차는 황제가 마시는 차이고, 봉차는 공주나 왕자, 왕실 귀족들이 즐기는 차다. 이 차를 금 도금한 은 죽절합자에 담아 보낸 것인데 한 근씩 별도로 포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송 황제는 변방을 회유하기 위해 귀품의 차를 전례대로 하사한 것이다.

 

고려 왕실에서는 연회를 열어 사신들에게 차를 대접했다. 이때 마셔본 고려차를 평하여 “고려에서 생산된 차는 쓰고 떫어 마실 수 없다(土産茶 味苦澁不可入口)”라 하였다.

이어 “연회 때면 뜰에서 차를 끓여 은하(銀河)로 덮어 천천히 내 오면 시중드는 사람이 ‘차를 다 돌렸습니다’라고 한 후에야 마실 수 있었으니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凡宴則 烹於廷中 覆以銀荷 徐步而進候 贊者云 茶遍乃得飮 未嘗不飮冷茶矣)”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이는 서긍이 고려에서 생산된 차를 마신 후 차 맛을 평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품평이 정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신 차가 쓰고 떫었던 것은 차가 식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따라서 그가 고려에서 생산된 차는 “쓰고 떫어 마실 수 없다”고 한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더구나 그가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 증언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케 한다.

 

그렇다면 당시 서긍은 무슨 연유로 식은 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는 고려 왕실 궁중의례의 독특한 절차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고려에서는 백차를 즐길 수 있는 다완이 생산됐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근래 차 마시기를 제법 좋아해 다구를 더욱 잘 만든다. 금화오잔이나 비색소구, 은로탕정 같은 다구는 모두 중국 것을 은근히 모방한 것이다(邇來 頗喜飮茶益治茶具 金花烏盞,翡色小甌 銀露湯鼎 皆窃效中國制度)”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금화오잔(金花烏盞)은 송에서 유행했던 흑유잔(黑釉盞)이나 토호잔(兎毫盞)처럼 차의 미감(美感)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찻잔이다. 또한 왕실에는 다구를 갖추어 언제나 차를 즐길 수 있었으니 이는 “관사 안에는 붉은 찻상을 놓고, 그 위에다 차를 마실 때 쓰는 도구를 두루 진열한 다음 홍사건으로 덮었다(館中以紅俎布列茶具於其中 而以紅紗巾冪之)”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당시 서긍이 관찰했던 고려 왕실의 음다 풍속은 다음과 같았다.

 

 

"하루 세 차례 올린 차를 마신다. 이어서 탕이 나온다. 고려인들은 탕(湯)을 약(藥)이라고 한다. 매번 사신들이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만약 다 마시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여겨 불쾌히 여기며 가 버리기 때문에 항상 억지로라도 마셨다."

(日嘗三供茶而繼之以湯  麗人謂湯爲藥  每見使人飮盡必喜 或不能以爲慢己 必怏怏而去故 常勉强爲之啜也)『고려도경』 ‘기명(器皿)3, 다조(茶俎)’

 

 

이는 왕실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됐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차를 마신 후 탕이 나오고, 이것을 약이라고 한 것을 주목해 보자. 이 탕법은 중국에서는 상용된 적이 없었다.

탕은 뜨거운 물이나 잎차를 우린 차를 마신 것으로 보인다. 식은 차를 마신 후 탕을 마시는 것은 차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탕을 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독특하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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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 동국이상국전집 제13권 > 고율시(古律詩)

 

손 한장(孫翰長)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기증하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문장가들이 / 古今作者雲紛紛

초목을 품제(品題)하여 호탕한 기개 발휘했네 / 調戲草木騁豪氣

장구(章句)를 마탁하여 스스로 기이함을 자랑했는데 / 磨章琢句自謂奇

사람들의 읊조림은 취미 각각 다르구나 / 到人牙頰甘苦異

장원의 시 홀로 대중에서 뛰어났으니 / 壯元詩獨窮芳腴

아름다운 문장 뉘라서 찬탄하지 않으리 / 美如熊掌誰不嗜

임금님이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불러들여 / 玉皇召入蓬萊宮

은대 001]의 요직(要職)에 등용하였네 / 揮毫吮墨銀臺裏

그대는 낙락한 천길 소나무라면 / 君材落落千丈松

불초한 이 몸은 칡덩굴 같으이 / 攀附如吾類縈虆<그대와 동료(同僚)가 아니므로 언급(言及)하였다.>

 

우연히 유다의 시를 지었는데 / 率然著出孺茶詩

그대에게 전해짐을 어이 뜻했으리 / 豈意流傳到吾子

시를 보자 화계 놀이 홀연히 추억되구려 / 見之忽憶花溪遊

<화계(花溪)는 차의 소산지(所産地)인데, 그대가 진양(晉陽)에서 부기(簿記)를 맡아 볼 때 찾아가 보았으므로 화답한 시(詩)에 언급(言及)하였다. >

 

옛일 생각하니 서럽게 눈물이 나네 / 懷舊悽然爲酸鼻

운봉의 독특한 향취 맡아보니 / 品此雲峯未嗅香

남방에서 마시던 맛 완연하구나 / 宛如南國曾嘗味

따라서 화계에서 차 따던 일 논하네 / 因論花溪採茶時

관에서 감독하여 노약(老弱)까지도 징발(徵發)하였네 / 官督家丁無老稚

험준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 / 瘴嶺千重眩手收

머나먼 서울에 등짐 져 날랐네 / 玉京萬里頳肩致

이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膏血)이니 / 此是蒼生膏與肉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바야흐로 이르렀네 / 臠割萬人方得至

한 편 한 구절이 모두 뜻 있으니 / 一篇一句皆寓意

시의 육의002] 이에 갖추었구나 / 詩之六義於此備

농서의 거사는 참으로 미치광이라 / 隴西居士眞狂客

한평생을 이미 술 나라에 붙였다오 / 此生已向糟丘寄

술 얼근하매 낮잠이 달콤하니 / 酒酣謀睡業已甘

어이 차 달여 부질없이 물 허비할쏜가 / 安用煎茶空費水

일천 가지 망가뜨려 한 모금 차 마련했으니 / 破却千枝供一啜

이 이치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이없구려 / 細思此理眞害耳

그대 다른 날 간원에 들어가거든 / 知君異日到諫垣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게나 / 記我詩中微有旨

산림과 들판 불살라 차의 공납(貢納) 금지한다면 / 焚山燎野禁稅茶

남녘 백성들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 / 唱作南民息肩始

 

 

[주D-001]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의 별칭(別稱)으로,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담당하였다.

[주D-002]육의(六義) : 풍(風)ㆍ아(雅)ㆍ송(頌)ㆍ부(賦)ㆍ비(比)ㆍ흥(興)을 가리켜 말한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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