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자사 진의 출신지는?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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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자사 진의 출신지는?

  • 임기환
  • 입력 : 2017.08.31 15:45
덕흥리고분 진의 묘지명
▲ 덕흥리고분 진의 묘지명

[고구려사 명장면-27] 덕흥리 고분이 던진 파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은 무덤 주인공의 출신 국적이 어디냐, 그리고 그가 지낸 유주자사라는 관직의 수여 주체가 누구이냐, 혹은 유주자사가 실직이냐 허구이냐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아래에 묘지명 전문을 제시한다.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감]리(□[甘]里) 사람으로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饟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使)였다. 진은 77세로 죽어 영락18년 무신년(戊申年)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보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武王)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유함은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이 되기를. 무덤을 만드는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을 찾는 이가 끊이지 않기를.

   묘지명의 절반에 해당하는 뒷부분 길상을 기원하는 문장을 제외하고 보면, 무덤 주인공에 대한 기술은 성명과 출신지, 역임한 관직, 사망과 무덤 안장 관련 내용뿐으로 매우 단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문장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그 주된 이유는 무덤의 위치와 묘지명의 내용이 서로 잘 안어울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 묘지명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무덤 주인공이 역임한 유주자사란 관직이다. 유주(幽州)는 그 치소(治所)가 지금의 북경 일대이며, 관할 구역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대략 북경 일대에서 요동에 이르렀던 지방행정 단위이다.

   4세기 말에는 무덤 주인공이 유주자사로서 다스렸던 지역과 그가 묻힌 평양 일대 사이에는 서로 다른 왕조 간의 국경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게 통설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문헌 자료가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은 유주, 즉 북경과 평양이 한나라, 즉 고구려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자료인가.

   덕흥리 고분을 발견한 북한 역사학계는 무엇보다 무덤 주인공 유주자사 진(鎭)의 출신지 파악에 주력했다. 그리고 진이 고구려 출신이라고 결론지었다. 묘지명에는 진의 출신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안타깝게 일부 글자가 잘 안보인다. 군(郡) 이름과 리(里) 이름은 모르지만 다행스럽게 신도현(信都縣)이란 현 이름이 명확하다.

   북한 연구자들은 '고려사' 지리지3에서 "가주는 본래 고려 신도군이다(嘉州 本高麗信都郡)"라는 기사를 찾았다. 군과 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기사에 의거하여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평안북도 운전·박천 일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가 다소 미약하다. 무엇보다 고려사 지리지의 '고려'가 고구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이 기사는 고려 초기의 신도군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학계는 리(里) 앞의 글자를 '감(甘)'으로 읽으면서 현재의 평북 운전군 삼광리에 중감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을 들어 신도군이 고구려의 지명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진의 출신지를 통상 유주자사를 설치한 중원 왕조의 범위에서 찾아보니, '진서(晉書)' 지리지에 '기주 안평국 신도현(冀州 安平國 信都縣)'이란 기사가 나온다. 그래서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중국 하북의 안평(安平)군에 있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게다가 잘 보이지 않는 군 이름의 첫 글자에서는 '宀'에 가까운 획이, 두 번째 글자에서는 '一'의 획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安平'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다만 안평은 284년 이후에는 장락(長樂)으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잘 맞지 않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출신 군(郡)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여서 양쪽 설의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 이럴 때는 무덤주인공의 성씨도 그 출신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진의 묘지명에서는 이름 앞의 성씨가 쓰여졌을 두 글자가 심하게 흐려져 읽을 수 없는 상태이다. 이처럼 출신 지역명도 일부만 확인되고, 성씨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진의 출신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논란이 계속된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자료로 접근할 수도 있다. 위 묘지명 중 도향(都鄕)은 군이나 현의 중심 관청이 있던 향을 가리킨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군-현-향-리의 지방행정 조직을 갖추고 있는 지역 출신이다. 이는 중원왕조에서 내내 시행하고 있던 군현제 단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4세기 말에 고구려에서도 이러한 행정단위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도입하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자료로서는 이런 사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같은 광개토왕시대의 사정을 전하는 '모두루묘지'에는 '성민곡민(城民谷民)'이라는 기사가 있어서, 성-곡이라는 통치 단위를 상정케 한다. 물론 그렇다고 고구려가 군-현-향-리제를 도입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다. 과거 낙랑군이 있던 이 지역에 특별히 중국왕조식의 행정단위를 도입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덕흥리 고분에서 진의 묘지명이 발견되고 거기에 출신지와 성씨까지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요한 글자 몇몇이 잘 보이지 않음으로써 국제적인 논쟁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처럼 고대 금석문의 경우 꼭 중요한 부분이 판독되지 않아 많은 논쟁을 낳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 회에서 살펴본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도 이에 해당한다. 그 덕분에 필자 같은 역사학자들도 이래저래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명료한 증거는 부족하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로서 최대한 합리적인 추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학자들이 진의 출신지를 하북의 안평군 신도현으로 본다. 그가 고구려지역 출신이 아니라면 어느 시기엔가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일 터인데, 그 망명 시기는 언제일까?

   또 진이 고구려 지역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그가 유주자사를 지낸 것 조차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가 역임한 유주자사는 망명한 뒤 지낸 고구려의 유주자사인가 아니면 망명하기 이전에 다른 왕조에 역임한 유주자사인가? 또한 실직인가, 허직인가?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둘러싼 논쟁은 그 출신지 논쟁보다 더 뜨거우니, 다음 회에 말씀드리겠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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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의 노다지, 덕흥리고분

  • 임기환
  • 입력 : 2017.08.17 15:02


[고구려사 명장면-26] 1976년 12월 8일,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옛 지명: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서편 옥녀봉의 남쪽 자락. 향금산이라고 불리는 구릉에서 관개수로 공사 중 고구려 시대 벽화고분 1기가 발견되었다. 한겨울임에도 발굴단은 부랴부랴 12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까지 한 달여 동안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덕흥리고분 전경. 덕흥리고분 주변에는 유명한 강서 3묘 고분이 1.8㎞ 거리에 있고,  그밖에도 약수리고분, 수산리고분 등  벽화고분 10여 기가 밀집되어 있다./출처=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 덕흥리고분 전경. 덕흥리고분 주변에는 유명한 강서 3묘 고분이 1.8㎞ 거리에 있고, 그밖에도 약수리고분, 수산리고분 등 벽화고분 10여 기가 밀집되어 있다./출처=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무덤은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었다. 각 방은 방형이며, 앞방 천장은 궁륭고임 위에 2단 평행고임을 얹었고, 널방 천장은 궁륭고임 위에 4~5단 평행고임을 얹었다. 그리 크지 않은 넓이의 무덤방이지만 높은 천장으로 공간은 제법 넉넉했다. 사방 벽면과 천장에 가득하게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생활풍속도 그림으로서 마치 고구려 시대로 돌아간 듯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사실 벽화만으로도 고구려 벽화고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도 풍성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묵서가 무덤 벽면 곳곳 56군데에 쓰여 있었다. 묵서 글자만도 600여 자. 게다가 무덤 주인의 묘지명도 있었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120여 기 중에서 무덤 주인을 알려주는 묘지명이 쓰여 있는 고분이 몇 기나 되는지? 여기서도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는 안악3호분(무덤주인공이 고구려왕인가, 동수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지만), 그리고 모두루고분(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딱 2기뿐이다. 범위를 삼국 전체로 넓혀도 단지 백제의 무령왕릉만 추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묘지명에 의하면 이 무덤의 완성 일시가 영락(永樂) 18년 무신(戊申)년 초하루가 신유(辛酉)일인 12월 25일 을유(乙酉)라고 밝혀져 있다. 양력으로 따지면 409년 1월 26일이다. 이렇게 보면 이 무덤은 무덤의 주인공과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 무덤인 셈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 덕흥리고분의 발견은 안악3호분 발견 이후 고구려 고고발굴 역사에서 최고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덤의 묵서 중에는 날짜와 관련된 묵서가 하나 더 있었다. 널길 서벽에는 "태세재기유이월이일(太歲在己酉二月二日)"이라는 묵서가 쓰여 있었다. 음력 409년 2월 2일이며, 양력으로 3월 4일이다. 이 날짜는 무엇일까? 널길에 쓰여져 있고, 무덤 완성 일자보다 뒤인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무덤을 폐쇄한 시점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렇다면 무덤을 완성하고 무덤 주인을 안장하고 장례 절차 등이 한 달 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고구려의 장례문화를 추적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처럼 무덤을 폐쇄한 날짜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이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묵서의 사료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

덕흥리고분 투시도 동→서.두방 무덤에 평행궁륭고임 천장이다.
▲ 덕흥리고분 투시도 동→서.두방 무덤에 평행궁륭고임 천장이다.


   묘주의 묘지명에 쓰여 있는 영락(永樂) 18년이란 기년 묵서 또한 쉬이 지나칠 수 없다. 영락(永樂)이 광개토왕 연호임은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비문에는 광개토왕 생시의 칭호를 '영락(永樂)태왕'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비문의 영락을 영락태왕 몇 년이라는 재위년을 표시하는 것이지 연호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실 비문만으로 영락을 연호로 '확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덕흥리고분이 발견되어 묘지명의 영락(永樂) 18년 사례에 근거해 영락이 광개토왕 연호임을 '확정'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몇몇 사례만으로도 덕흥리고분의 묵서가 갖는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벽화 제재의 풍부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림의 대상과 내용에 대해 그 이름과 설명이 묵서로 밝혀져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벽화 내용이 무엇인지 그냥 짐작해보는 것과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고구려인의 의식과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명료한 '표지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벽화와 묵서 등 이 무덤에 담겨 있는 역사 자료의 가치로 볼 때 덕흥리고분을 현존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첫 자리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덕흥리고분의 벽화와 묵서 내용이 모두 다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고, 이를 통해 고구려 역사의 단면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표지판'은 있지만 그 길로 들어서서 무엇을 찾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몫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덕흥리고분은 더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무덤을 만든 고구려인은 자신들이 담고자 하는 많은 사실과 생각, 관념들을 그림과 묵서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들이 그 분명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덕흥리고분은 여러 치열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묘주는 고구려인인가, 망명객인가? 유주는 고구려의 영토였나? 등등이 대표적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런 논쟁점들을 짚어보겠다. 어쩌면 이런 논쟁점보다는 고구려인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더 귀중한 자료인 벽화 명장면들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덕흥리고분의 구석구석,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마치 고구려 역사의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 것으로 믿는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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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칭제 안한 고구려, 자주의식 반영 '태왕' 때문

  • 임기환



    광개토대왕명 청동그릇, 고구려 415년, 높이 19.4 cm.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와 바닥에 쓰여진 명문. 명문을 풀이하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www.museum.go.kr )
    ▲ 광개토대왕명 청동그릇, 고구려 415년, 높이 19.4 cm.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와 바닥에 쓰여진 명문. 명문을 풀이하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www.museum.go.kr )
    [고구려사 명장면-23] 왕조시대에는 왕(王)의 권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왕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
    도 결코 작지 않다. 따라서 어느 왕조든 그 사회에서 모범적이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왕의 모습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대부분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이라면 아마도 광개토왕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광개토왕은 고구려 당시에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추앙을 받았을까?

    광개토왕의 본래 시호는 매우 길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여기
    서 '국강상'은 왕의 무덤이 국강상이란 곳에 있다는 의미이다. 광개토왕 이전 대부분 왕들의 시호는 왕릉이 입지한 장지명을 따서
     지어졌는데, 그러한 전통에서 나온 시호이다. 예컨대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장지가 고국원인데, 고국원은 국강상으로
    도 불리었기에 국강상왕이라고도 했다. '국강상'이라는 장지명으로 보아 고국원왕과 광개토왕의 왕릉은 아마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을 것이다.

    다음 '광개토경'은 땅을 널리 개척하였다는 왕의 업적을 보여주는 칭호이다. '평안'은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다는 칭송쯤 될 터이고
    , '호태왕'은 이런 뛰어난 업적을 쌓은 왕에 대한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12자나 되는 긴 이름에서 광개토왕은 당시에도 
    크게 존경을 받은 왕이라는 점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광개토경'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왕의 정복활동이 당시에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잘 알다시피 
    고구려는 군사활동과 정복전쟁이 두드러진 나라였다. 그것이 고구려국가 발전의 중요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왕이 가져야 
    할 덕목에는 군사적 능력이 필수였다.

    예컨대 광개토왕은 군사를 부리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당시 백제인들이 몹시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능력은 고구려 
    왕실의 내력이었다. 시조 주몽왕은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는데, 주몽이란 이름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대무신왕도 
    설화에 의하면 7세에 군사를 지휘하여 부여군을 격파하여 왕이 될 자질을 인정받았고, 장성한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부여 정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왕의 신체 조건에 대해서도 체격이 장대하다거나 힘이 세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고구려왕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수렵행사를 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배양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또 전쟁을 할 때에도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진두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무신왕이나 동천왕 등이 좋은 예이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이는 
    국왕이 앞장서서 전투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사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왕이 전투에서 사망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이런 점이 고구려 국왕이 갖는 독특한 덕목의 하나였다. 광개토왕비문을 보아도 7회의 전쟁 기사 중 4회의 정벌전에서는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왕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그것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전쟁은 
    땅이나 주민 등을 획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는데, 전쟁의 승리는 자연스럽게 국왕의 업적으로 칭송될 수 있고, 전쟁의 성과물을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국왕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따라서 영토를 넓혔던 광개토왕은 강대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태왕(太王)을 
    칭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광개토경'이란 시호와 연관되는 '태왕' 칭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군주의 칭호 중에 황제(皇帝) 
    왕(王)의 구분이 있는데, 왕보다는 황제가 격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의 통치자는 황제를 칭하는데, 우리 역사에서 
    왕이라 칭한 것은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황제라 칭하였는데, 후일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의 눈치를 보면
    서 황제를 모두 왕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면서, 동명성제(帝), 광개토대제, 장수대제라는 식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북방의 
    유목국가들이 처음에는 왕(王)을 칭하다가 세력이 커지면 황제를 칭한 경우가 많은데, 대제국인 고구려도 황제를 칭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으리란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고구려에서는 결코 황제라 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황제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에 사대한다거나 중국 왕조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고구려에서는 다른 칭호를 사용하였다. 바로 
    '태왕(太王)'이라고 불렀다. '광개토호태왕' 이렇게 칭한 것이다. 이 태왕은 황제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칭호였다. 황제는
     중국의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의 칭호이다. 고구려인들은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천하와는
     다른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고구려의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가 바로 '태왕'이다.

    태왕이라는 칭호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모두루묘지에서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
    '이라고 칭한 사례가 처음이다. 아마도 고국원왕 때부터 태왕이라 칭한 듯하다. 그러면 태왕은 왕보다 높을까? 꼭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광개토왕비문에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이라 하고, 모두루묘지에도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 
    하여 초기 3왕의 왕명을 굳이 태왕이라고 바꾸지 않은 것을 보면 태왕이 왕보다 높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 듯하다. 만약 태왕과 
    왕을 위계상으로 구분하였다면, 자신은 태왕이라고 부르고 선조 왕들을 그대로 왕이라고 부른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고구려에서 처음 등장한 태왕이라는 칭호는 백제, 신라에 전해지고 계속 이어지면서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도 
    사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세종대왕'이라는 칭호가 바로 그러하다.

    광개토왕의 '태왕'은 바로 고구려적 천하를 대표하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용어이다.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고구려의 자존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왕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는 것은 바로 고구려에 대한 모독이 된다.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고구려 태왕을 황제로 만든 이들이야말로 '태왕'보다 '황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대주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렇게 내면화된 사대주의나 식민주의가 훨씬 더 위험한 법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을 재평가한다
    • 임기환


    요동성총의 요동성 성곽도. 고구려는 요동 지배의 거점인 양평(襄平)을 차지한 후 요동성(遼東城)으로 이름하였다. 요동성 성곽도는 1953년에 평안남도 순천시 북창면 용봉리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4세기말 5세기초 요동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동성총의 요동성 성곽도. 고구려는 요동 지배의 거점인 양평(襄平)을 차지한 후 요동성(遼東城)으로 이름하였다. 요동성 성곽도는 1953년에 평안남도 순천시 북창면 용봉리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4세기말 5세기초 요동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사 명장면-17] 고구려 중흥의 기틀을 만든 소수림왕,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자리 잡게 한 광개토왕. 이 
    두 왕 사이에 고국양왕이 있다. 소수림왕의 아우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과 아들이 워낙 빛나는 업적을 쌓아서인
    지, 역사책에서 고국양왕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게다가 고국양왕은 불과 8년 동안만 왕 노릇을 했다. 사실 8년이라면 
    뭐라도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어내기에 그리 충분한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물론 소수림왕은 불과 재위 5년 안에 
    율령 반포, 불교 공인 등을 다 해치웠지만 말이다.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소수림왕의 아우인데 고국양왕이 그리 무력한 인물일 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기록에는 없지만 소수림왕의 개혁 정치에서 형을 도와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또 아들 광개토왕이 18세에 
    즉위한 이후 이룬 행적을 보면 태자 시절에 충분히 왕자 수업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즉 아버지 고국양왕이 태자를 잘 
    훈육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니, 고국양왕도 범상치 않은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흔히 광개토왕을 마케도니아의 정복군주 알렉산더와 비교하곤 하는데, 알렉산더도 저 혼자 잘난 게 아니다. 아버지 
    필리포스 왕은 마케도니아 왕국을 부흥시키고 그리스를 무릎 꿇린 출중한 야망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는 
    아버지를 계승하고 그를 넘어서려는 욕망으로 위대한 정복군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고국양왕 역시 형이나 아들 못지않은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국양왕의 이름은 이련(伊連) 혹은 어지지(於只支)인데, 소수림왕이 재위 14년 만인 384년 11월에 별세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국양왕의 재위 기간이 짧았던 것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이때 제법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국양왕이 즉위할 때에 아들 광개토왕이 불과 열 살 남짓이었으니, 아버지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국양왕의 아버지 고국원왕이 41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또 형인 소수림왕이 16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른 
    만큼, 이때 고국양왕의 나이가 결코 적을 수는 없겠다. 그리고 소수림왕도 아들이 없었음을 보면 당시 고구려 왕실에 
    아들이 귀했을 수도 있겠다. 혹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이 뒤늦게 본 귀한 아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고국양왕을 다시 평가하려면 결국 그가 뭘 했는가가 중요하다. 고국양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인 
    385년 6월에 군사 4만명을 내어 요동을 공격하였다. 당시 중국 대륙은 화북을 통일하였던 전진(前秦)이 383년에 비수 
    전투에서 동진(東晋)에 대패하면서 다시금 화북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있었다.

    전진의 부견 아래에 귀의하였던 모용수(慕容垂)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전연(前燕)이 망한 지 14년 만에 다시 연나라의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384년 정월에 연왕(燕王)에 올랐다. 후연의 등장이다. 이후 모용수는 전연의 고토를 회복하는 
    전쟁을 벌이면서, 모용 선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요서, 요동으로 진출하였다. 모용수는 대방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요동 관할의 책임을 맡겼다. 이때 후연이 요동지역을 다스리는 치소는 요서의 용성(龍城·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이었다. 
    즉 당시 후연은 요서지방은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지만, 요동지역에 대한 통할력은 상대적으로 약했을 것이다.

    고국양왕의 요동 공격은 이런 국제 정세와 힘의 공백을 이용한 시의적절한 군사행동이었다. 이에 모용좌는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였지만, 고구려군은 이를 격파하고 요동군과 현도군을 함락시키고 남녀 1만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거두었
    다. 그러나 후연은 고구려의 요동 점령에 대해 곧바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북중국 내에서 여전히 전진의 잔여세력이나 
    주변 세력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85년 10월에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慕容農)이 3만 군대를 이끌고 용성에 이르러, 지난 7월에 반란을 일으켰던 
    부여계 유민 여암(餘巖) 형제를 참하였고, 내친김에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요동군과 현도군을 다시 회복한 후 용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모용농은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양평(襄平·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에 주둔시켰다. 후연은 
    평주자사(平州刺史)를 평곽(平郭·지금의 랴오닝성 가이저우)에 전진 배치하고, 요동태수를 임명해 요동 지역 경영을 
    본격화하였다. 즉 385년 고구려의 요동반도 진출은 후연의 반격으로 인해 불과 5개월 만에 좌절된 셈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고국양왕 때 요동을 둘러싼 정세를 보여주는 기록은 모두 중국 측 기록이다. 즉 후연의 입장만 
    반영하고 있을 뿐, 고구려 측의 공세나 정세 변화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기록을 차지한 자가 역사의 승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후의 정세를 보면 곧이은 고구려의 공세를 추정할 수 있다. 우선 후연이 요동태수 방연을 임명한 기록을 
    특기하면서도 현도태수 임명 기록이 없는 점을 고려하면 모용농이 귀환한 뒤 다시 고구려의 반격으로 현도군을 
    상실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385년 당시에 고구려는 신성(新城·지금의 랴오닝성 푸순)에서 한걸음 더 전진하여 
    지금의 선양 일대를 거점으로 양평에 있는 후연의 요동군과 대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가 
    요동반도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광개토왕비문의 영락(永樂) 5년조 기사에 
    보인다.

       이 기사는 395년에 광개토왕이 거란족의 일부인 비려(稗麗)를 정벌하고 '양평도(襄平道)'를 통해 귀환하면서 영토를 순수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비문에서 양평도를 통해 역성(力城), 북풍(北豊·지금의 요령성 슈옌) 등을 거치는 광개토왕이 
    귀환한 경로는 어디일까? 광개토왕의 순수길은 당시 고구려의 요동지역 지배 양상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이를 양평에서 평곽 부근으로 남하하다가 북풍을 거쳐 압록강 하구 일대를 경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경로는 
    요동반도 중부 일대를 두루 거치는 것으로 영역 통치권의 확인 행위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무렵에는 아직 고구려가 양평과 평곽 일대를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 즉 후연이 평곽과 양평을 차지하고 
    있고 고구려가 후성과 북풍의 동쪽 지역을 차지하여 요동반도를 양국이 분점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400년 이후에야 
    고구려가 요동을 장악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위 영락 5년 기사처럼 광개토왕이 양평도를 통해 순수한 것을 보면 
    이때는 요동반도 대부분을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광개토왕이 5년에 요동 일대를 순수할 수 있음은 그 이전 언젠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언제일까? 흔히 
    요동 장악을 광개토왕의 업적으로 알고 있는데, 요동의 영역을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실 
    광개토왕비문이나 <삼국사기>에는 즉위 초에 광개토왕이 요동지역으로 군사 행동을 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즉 
    광개토왕 즉위 이전에 요동반도 일대가 이미 고구려 영역 내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는 고국양왕 때 앞서 본 요동군,
     현도군에 대한 공격 이후일 것이다. 모용농이 이를 다시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고구려도 다시 반격에 나서서 
    요동반도 대부분을 장악해갔을 것이고, 후연은 평곽 일대에서 요동군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요동이 갖는 경제적, 인적,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장차 고구려 국가 기반의 핵심 
    지역이 되는 요동 지역에 대해 공세를 취하고 이를 차지했다는 성과만으로도 고국양왕은 소수림왕 못지않은 업적을 쌓았
    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왕도 이때 아버지에게 배운 바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재평가해야 할 인물이 많지만, 
    그 첫자리에 고국양왕을 충분히 꼽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형과 아들 사이에 끼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인물, 그에게 역사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곧 요동 정복의 사실을 탐색하는 길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국가 대개조작업 성공한 소수림왕 리더십의 실체

    • 임기환
    필자가 소수림왕 왕릉으로 비정하는 천추묘. 국내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규모가 큰 왕릉이다. 계단식 석실무덤으로 왕릉의 무덤 양식도 새롭게 바뀌어서 소수림왕 때 새로운 문풍이 일어났음을 짐작케 한다.
    ▲ 필자가 소수림왕 왕릉으로 비정하는 천추묘. 국내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규모가 큰 왕릉이다. 계단식 석실무덤으로 왕릉의 무덤 양식도 새롭게 바뀌어서 소수림왕 때 새로운 문풍이 일어났음을 짐작케 한다.
    [고구려사 명장면-16]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오늘날 우리가 주변 국가와 전쟁을 여러 차례 치르고 두 번이나 큰 패배를 
    당하였다고 해보자. 그것도 보통 패배가 아니라 한 번은 서울이 적에게 함락돼 황폐화되고 서울 사는 주민 상당수가 적국으로 
    끌려갈 정도로 충격적 패배였다. 그 뒤 겨우 힘을 회복해서 다시 또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나라 또한 강력하게 
    반격해와 내 땅에서 국가 지도자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였다고 치자. 이런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딱 그랬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고 주민 5만명이 
    끌려갔으며,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평양으로 쳐들어온 근초고왕의 군대와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아들 소수림왕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소수림왕에 대해 "키가 크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말은 다소 상투적이기 
    때문에 그리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지만, 소수림왕이 재위 기간에 성취한 업적을 보면 웅대한 지략을 갖추었다는 말이 그저 
    상투적 칭송의 말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한국사 교과서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조건들로 소수림왕 때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성립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를 그냥 고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으레 갖추어야 할 통과의례 정도로만 외우는 데 그치곤 한다. 
    필자도 본격적으로 고대사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고대국가 만들기의 필수 조건 정도로만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이런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데 얼마만 한 사회적 진통과 갈등이 일어났을지, 또 
    이런 정책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을지를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림왕 때의 정책이 어느 정도의 큰 변화를 초래하는 개혁인지 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잠시 오늘 우리 현실과 대응해서 
    생각해보자. 요즘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나온다. 시급하게는 개헌 이야기도 나오고, 멀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나 4차 산업혁명도 운운된다. 그런데 아직 구체적인 면이 작아서 별로 현안 문제로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른바 IMF 사태라고 하는 외환위기가 주었던 우리 사회의 충격과 불안을 떠올려 보자. 아마도 근자에 한국 사회가 
    경험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름 잘 대처했다고들 하지만, 한편으로 양극화 등 많은 문제가 그때의 대응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렇게 위기에 대처하는 법은 그리 쉽지 않고, 전혀 새로운 방식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어렵다.

     그런데 소수림왕대의 고구려는 달랐다. 즉위 초부터 바로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성립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들 정책이 당시에 어느 정도 새롭고 어느 정도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

     먼저 율령 반포부터 살펴보자. 율(律)은 죄를 정하는 형벌법, 영(令)은 교령법(敎令法), 즉 일반행정규정으로서, 율령은 곧 
    국가체제를 운영하는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수림왕 재위 3년(373년)에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것이 
    그때까지 고구려가 율과 영에 해당되는 법제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고구려 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통일되고 일원적인 율과 
    영을 정비하고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아쉽게 고구려의 율령을 전하는 자료가 없어서 그 전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중국 왕조의 선진적인 율령을 고구려에 
    맞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율령 반포는 전혀 새로운 국가 운영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이야기하는 
    개헌 수준이 아니다. 국가 운영체제를 통째로 바꾸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헌법, 형법, 민법 등등을 몽땅 바꾸는 것이라고 생
    각해보면, '율령 반포' 네 글자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 공인도 마찬가지다. 재위 2년(372년)에 전진으로부터 승려와 불상, 불경을 받아들이고, 5년에는 처음으로 수도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서 외국인 승려 순도(順道)와 아도(阿道)를 머무르게 하였다. 불교의 수용이란 
    새로운 종교와 사상, 사유체계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교 의례 행위나 생활양식의 
    변화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또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면 도성의 경관도 달라지게 된다. 1898년 서울 명동성동이 처음 지어졌을 때 
    한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하나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사실도 상기해보자. 고구려 국내성에 불교 사찰이 처음 지어졌을 때도 
    이와 사정이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가 처음 수용되고 공인될 때,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 설화에서 보여주듯이 상당한 갈등이 나타났던 것이다. 
    가까이는 조선 말에 서학 즉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일어났던 갈등과 탄압 등을 생각해보면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수용이 어떤 
    충격을 일으키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고구려라고 그렇지 않았겠는가?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 이는 거의 국가 개조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마도 이 정도면 정책 시행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을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소수림왕은 즉위 초 5년 내에 이런 개혁을 모두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개혁이 
    올바른 방향이었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음은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광개토왕, 장수왕 때 화려한 전성기가 펼쳐졌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너무 단순하게 보수냐 진보냐로 구분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의미에서 보자면 
    보수와 진보는 사회의 양면이다. 보수만 있으면 정체될 터이고, 진보만 추구한다면 불안할 터이다. 보수나 진보 내에서도 다양한 
    층위가 있음은 물론이다. 중요한 점은 어느 시점에서 보수의 길을 택해 사회를 단단하게 안정시킬 것인지, 또는 진보의 방향으로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개혁과 활력의 바람을 일으킬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이 올바르다고
     판단했으면 그 길을 충실히 실천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과 진통을 해결해가는 것이 이른바 
    리더십이다.

     이렇게 볼 때 소수림왕이나 당시 고구려 지도층이 가졌던 리더십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한다. 커다란 위기에 
    대처하고 이를 빠르게 극복해간 좋은 사례로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모범이다. 소수림왕 그는 위기의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관련 사료가 거의 없이 단지 한두 단어나 한두 줄 문장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몇 가지 작은 단서를 가지고도 그 시대 사람들이 겪었을 생각과 삶의 태도에 대해 깊이 통찰해보고, 이를 
    오늘 우리의 상황과 연관 지어 상상해 본다면, 사료가 보여주지 않는 역사상도 우리는 넉넉히 그려볼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광개토태왕비 내용 해석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

    • 임기환
    • 입력 : 2017.04.27 15:01
    [고구려사 명장면-18] 1972년 10월 재일 사학자 이진희 씨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비를 변조했다"고 충격적인 
    주장을 했다. 그가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란 책에서 밝힌 변조의 전말은 이렇다. 1880년 가을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사카오(酒勾景信) 중위를 중국에 파견했다. 사카오는 북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밀정 임무를 수행하면서 1883년 4~7월 무렵에 
    집안 일대에 들어가 광개토왕릉비를 보게 됐다. 비문의 이용 가치가 큰 것을 알게 된 사카오는 일본에 유리하도록 신묘년조 기사 
    등 25자를 변조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131장을 만들고, 1883년 10월에 귀국해 이를 육군참모본부에 제출했다.

    쌍구가묵본
    ▲ 쌍구가묵본
    이 탁본을 토대로 육군참모본부는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 5집을 '고구려
    고비(高句麗古碑)' 특집호로 발간했는데, 여기서 이른바 '신묘년(辛卯年)조' 
    기사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 사이 육군참모본부는 여러 
    차례 스파이를 파견해 능비를 조사했으며, 1899년 이전 어느 해에 사카오의 
    변조를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발라 변조했다는 것이다.

    이진희의 연구는 광개토태왕비문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촉발하
    는 계기가 되었지만, 현지 연구가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문 연구는 여전
    히 답보 상태였다. 그러다가 1981년 중국의 왕건군(王健群)이 현지 조사를 통
    해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란 책을 발간했다. 그는 현지의 중국인 탁본
    공이 탁본을 쉽게 하기 위해 비문의 여기저기에 회칠을 하는 과정에서 변조됐
    을 가능성은 있으나 비문 발견 초기부터 조직적인 비문 변조가 있었던 흔적은
     없다고 하여, 이진희에 의해 제기된 일제 육군참모본부 변조설을 부정했다.

    탁본에만 근거한 이진희의 주장보다는 현지 조사라는 장점을 갖고 있는 왕건
    군의 연구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변조 여부의 타당성을 떠나서
     이진희의 연구는 무엇보다 근대 일본 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양태에 대해 
    진진한 반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 제기로서 의미를 잃지 
    않는다고 본다.

    이진희에 의해 환기됐듯이 일제 관학은 비문의 신묘년 기사를 일본의 백제, 신라, 가야에 대한 정복으로 해석하고, 이를 
    '일본서기'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과 결합해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설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征韓論)의 역사적 근거로 활용됐다. 이렇게 광개토왕비문은 처음부터 
    정치적 의도를 갖고 역사 왜곡과 결합해 그 연구가 출발하게 되면서 이후 비문 연구는 근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구성하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결과를 낳게 됐다.

    광개토태왕비문 중에서 집중적인 논란의 대상은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다. 비문 변조설 역시 이 구절에 집중돼 있다. 
    왜냐하면 그 문장에는 고구려와 백제·신라 및 왜가 맺고 있는 국제적인 관계가 21자(字)란 아주 짧은 문장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대의 한일 관계가 아주 달라져버리기 때문이었다.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 이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다. 단락을 어떻게 끊어 읽을 것인가, 보이지 않는 글자를 무슨 자로 볼 것인가, 
    변조된 글자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우선 변조설이 등장하기 이전에 일단 이 신묘년 문장은 
    이렇게 판독됐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斤]羅以爲臣民."

    일제 시기에 일본 관학자들은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斤]羅(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당연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다.

    민족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 말에 이런 일제 관학자의 해석을 비판하는 견해를 제기했으나 공표하지는 못했고, 1955년에야 
    비로소 발표됐다. 정인보는 신묘년 문장의 주어는 고구려인데, 주어가 생략된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
    에, [영락6년 병신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정인보는 당대 한학의 최고 대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해석은 좀 궁색해 보인다. 짧은 문장에서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어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런 정인보의 해석법은 아무래도 민족적인 관점이 깊이 개입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정인보의 
    고구려 주어설은 그 뒤 북한과 한국 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여러 다양한 형태의 해석을 낳았다.

    김석형은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패수)를 건너 백잔 □□신라를 격파하여 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문맥과 뜻이 순조로워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 뒤를 이어 정두희, 이기백 등도 또 다른 해석법을 제시했다. "(고구려가) 왜를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 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즉, 문장 서두의 
    왜를 목적어로 보고 또 '以辛卯年來'를 '신묘년 이래'로 해석했는데, 앞뒤 문장의 논리적 연결이란 점에서 문맥이 잘 통하지만, 
    '渡海破'의 주어와 목적어가 도치돼 다소 작위적인 문장이 된다.

    이른바 고구려 주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견해들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결코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이 반드시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비문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오랜 속민(屬民)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결코 백제는 고구려의 속민이 된 적이 없었으며, 신라도 광개토왕대에 들어 고구려에 
    신속하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비문 내용이 전부 사실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면, 상황론에 입각한 위와 같은 해석은 또 다른 
    선입관을 드러내는 셈이다.

    앞의 두 견해는 모두 위 판독문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한 해석이다. 그러나 비문이 변조됐다면 새로운 판독이 먼저 시도돼야 
    한다. 특히 신묘년 글자 중에서도 기왕에 '海'자로 판독됐던 글자는 변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982년에 중국 주운대
    (周雲台)가 찍은 탁본에서도 다른 글자와 칸이 맞지 않고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쳐 '氵'자가 세로로 그은 선에 겹쳐 있다.

    사실 비가 알려진 초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돼 비면의 상태가 나빠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이 유행했을 뿐이다. 
    1887년께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정교한 탁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뒤 비문에 석회가 발라지고 탁본이 만들어졌다. 
    석회로 비문이 변조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탁본을 '원석(原石)탁본'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비문 연구의 주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원석탁본에서도 '海'자로 판독된 글자는 불분명하며, 변조됐다는 근거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기왕의 판독문을 인정
    하고, 또 문장 해석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되, 이는 고구려 측에서 백제 정벌의 명분으로 내세우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됐다. 즉 신묘년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 당대 고구려인의 비문 필법에 따른 허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묘년 기사는 일부 문자의 변조 여부를 의심받고 있으며, 그 문장 해석이나 역사상에 대한 이해도 매우 다양하다. 그런 
    다양한 주장의 이면에는 오늘날 근대국가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원석탁본이나 비에 대한 
    현지 연구를 통해 정확한 판독이 진행돼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 비문을 당대 고구려인의 관념에서 접근하려는 시각이 전제돼야 
    하겠다.

    1500년 전 고구려인이 쓴 광개토태왕비문을 근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구성하는 텍스트에서 해방시켜야 비문이 만들어진 그 시대,
     고구려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텍스트로서 제자리에 바로 세울 수 있다. 광개토태왕의 시대에 고구려인들이 만들어간 역
    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광개토왕비문이 어떻게 읽히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본 이유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광개토왕비문 분석해보니 정교한 건물 설계도 수준

    • 임기환
    • 입력 : 2017.05.25 15:01


    광개토태왕비문 1면 주운태 탁본. 비문의 첫머리를 건국신화로 시작하여 고구려 역사의 신성함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 광개토태왕비문 1면 주운태 탁본. 비문의 첫머리를 건국신화로 시작하여 고구려 역사의 신성함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고구려사 명장면-20] 보통 광개토왕비문에서 정복기사, 전쟁기사에 많이들 주목하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당대 고구려인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사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역사관도 그런 내용 중 하나다. 고구려인들은 
    어떤 역사관을 가졌을까? 그들도 오늘 우리들처럼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했을까? 우리들이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통해 자부심을 갖고자 하듯이, 그들도 자신의 역사에서 긍지를 가졌을까?

    광개토왕비문에는 과거-현재-미래에 해당하는 '시제(時制)'들이 문장 곳곳에 사용되고 있다. 비문 문장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부각하기 위해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비문의 시제 구성 방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광개토왕비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 추모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龍)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셨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비문의 1부에 해당하는 위 문장은 전체가 과거-현재-미래의 시제 구성을 하고 있다. 첫 문장은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탄생과 
    건국을 담은 건국신화로 시작하여 2대 유류왕(유리왕)와 3대 대주류왕(대무신왕)으로 이어지는 왕실 계보를 기술하고 있는 과거 
    시제다. 즉 광개토왕의 혈통적 정통성, 나아가서는 천(天)과의 연결성을 통한 고구려 역사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다음은 17세손인 광개토왕의 즉위와 훈적, 사망 기사가 이어지는데 이는 곧 현재 시제다. 그 뒤를 잇는 문장은 비를 세워 광개토왕
    의 공훈을 후세에 전한다는 미래 시제를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1부의 문장 전체는 시제상으로 볼 때 고구려의 과거(건국 및 초기 3왕의 훈적)-현재(광개토왕의 훈적)-미래("후세에 
    전한다")라는 시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장 구성을 하고 있다. 비문 내에서 현양하려는 주인공인 광개토왕의 치세가 곧 
    '현재'다. 이 현재를 중심으로 고구려 역사의 '과거'와 '미래'를 연관 짓는 문장 서술 방식이다.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기로 기술하고 있는 2부의 문장은 시제 구성에서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대부분 기년(紀年) 
    기사인데, 어떤 기사는 과거, 현재, 미래 중 2개 이상의 시제를 포함하고 있고, 어떤 기사는 현재 시제만을 기술하고 있다. 왜 
    이렇게 구분하였을까?

    유명한 신묘년조 기사를 포함하여 영락 6년조 문장을 살펴보자.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라는 과거 시제가 먼저 등장한다. 그 뒤에 신묘년조 문장이 이어지고, 다시 영락 6년 백제정벌전 기사가 이어진다. 이 부분은 
    광개토왕 당시의 군사 행동을 보여주는 현재 시제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백제왕이 "이제부터 앞으로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미래 시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다음 영락 20년 동부여 정벌 기사도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동부여는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 이는 과거 시제다. 이어서 언젠가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 광개토왕이 정벌하고
     은덕을 베풀었으며 5압로(鴨盧)가 왕의 교화를 따라왔다는 현재 시제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위 문장들의 과거 시제처런 과연 백제와 신라, 동부여가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을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백제는 4세기 후반 이후 광개토왕대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 승패를 주고받았던 대상이다. 신라는 377년과
     382년(혹은 381년)에 고구려의 도움으로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한 사례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신라의 외교 활동에 다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볼 수는 있으나 당시 양국 관계를 속민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속민은 조공(朝貢)을 전제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문에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예부터 속민"이라는 표현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광개토왕의 정벌 명분으로 제시하기 
    위해 설정된 허구다. 오히려 광개토왕의 군사활동을 통해 백제와 신라, 동부여는 고구려에 '속민'의 지위와 같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상황을 과거 상황으로 소급 적용하여 정벌의 명분으로 삼는 기술 방식이다.

    이와는 달리 현재 시제 즉 광개토왕에 의한 정토만 강조되는 문장도 있다. 영락 5년조의 비려(稗麗) 정벌, 영락 10년조와 14년조의
     왜(倭) 정토, 영락 17년조의 후연 정토 등에 대한 기사다. 영락 17년조의 대상을 백제로 보는 견해가 다수지만 필자는 후연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2부 정토 기사에서는 다양한 대상이 등장하는데, 현재 시제만으로 정토 내용을 기술한 대상은 비려, 왜, 후연 등이며, 
    과거와 현재 시제를 통해 광개토왕의 정토 명분을 부각시키는 대상은 백제, 신라, 동부여 등이다. 이렇게 비문 문장의 시제 
    구성이 정토 대상 성격에 따라 차별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후자인 백제, 신라, 동부여는 고구려 천하관의 
    구성 대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니 다음에 다시 살펴보도록 한다.

    그러면 왜 백제와 신라, 동부여의 경우에만 "예부터 속민(舊是屬民)" 등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고구려의 천하 
    즉 태왕의 은덕을 베푸는 대상이 단지 광개토왕 당대에 광개토왕의 무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광개토왕의 
    조상들에 의해 구축된 천하 질서 속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광개토왕은 이를 다시 복원하는 업적을 쌓았다는 식의 서술법이다.

    즉 광개토왕 자신만이 아니라 광개토왕까지 이어지는 고구려 왕실 전체의 정통성을 드러내려는 서술로 짐작된다. 광개토왕 
    무훈의 역사적 정통성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읽어볼 수 있으며, 이런 문장 구성으로 이전의 역사를 계승하면서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군주로서 광개토왕의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광개토왕비문의 시제 기술은 고구려인의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는 광개토왕 조상들의 영광과 신성함이며, 현재 
    시제는 그러한 과거를 계승하여 구현하는 광개토왕의 훈적이다. 광개토왕의 훈적을 후대에 전하려는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미래는 새로운 현실의 구현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연장과 유지라는 인식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광개토왕의 훈적을 매개로 하여 '과거'의 신성한 전통이 광개토왕에 의해 계승된 '현재'가 후세에도 이어지는 상황이 고구려인이 
    전망하는 '미래'다.

    고구려인의 시간관, 역사관에서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현재-미래에 흐르는 발전의 관념은 찾아볼 수 없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현재, 현재의 연속인 미래라는 역사관은 의고적인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과거-현재-미래의 맥락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고구려인의 역사의식은 과거를 되돌아보기를 게을리하고 미래를 고민하기보다는 당장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오늘 우리에게 
    적잖은 교훈을 준다.

    더욱 시제를 통해 잠시 살펴보았듯이 광개토왕비문은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구성된 매우 짜임새 있는 문장이다. 구석구석 
    허투루 쓰인 단어와 문장은 없다. 단어와 단어들이, 문장과 문장들이 서로 의미를 긴밀하게 연관 짓고 있는 명문장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들은 비문을 우리식대로 보고, 보고 싶은 면도 본다. 명문장을 오독하고 있지 않을까 반성할 일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