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5. 04:56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유주자사 진의 출신지는?
묘지명의 절반에 해당하는 뒷부분 길상을 기원하는 문장을 제외하고 보면, 무덤 주인공에 대한 기술은 성명과 출신지, 역임한 관직, 사망과 무덤 안장 관련 내용뿐으로 매우 단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문장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그 주된 이유는 무덤의 위치와 묘지명의 내용이 서로 잘 안어울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 묘지명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무덤 주인공이 역임한 유주자사란 관직이다. 유주(幽州)는 그 치소(治所)가 지금의 북경 일대이며, 관할 구역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대략 북경 일대에서 요동에 이르렀던 지방행정 단위이다.
4세기 말에는 무덤 주인공이 유주자사로서 다스렸던 지역과 그가 묻힌 평양 일대 사이에는 서로 다른 왕조 간의 국경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게 통설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문헌 자료가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은 유주, 즉 북경과 평양이 한나라, 즉 고구려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자료인가.
덕흥리 고분을 발견한 북한 역사학계는 무엇보다 무덤 주인공 유주자사 진(鎭)의 출신지 파악에 주력했다. 그리고 진이 고구려 출신이라고 결론지었다. 묘지명에는 진의 출신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안타깝게 일부 글자가 잘 안보인다. 군(郡) 이름과 리(里) 이름은 모르지만 다행스럽게 신도현(信都縣)이란 현 이름이 명확하다.
북한 연구자들은 '고려사' 지리지3에서 "가주는 본래 고려 신도군이다(嘉州 本高麗信都郡)"라는 기사를 찾았다. 군과 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기사에 의거하여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평안북도 운전·박천 일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가 다소 미약하다. 무엇보다 고려사 지리지의 '고려'가 고구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이 기사는 고려 초기의 신도군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학계는 리(里) 앞의 글자를 '감(甘)'으로 읽으면서 현재의 평북 운전군 삼광리에 중감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을 들어 신도군이 고구려의 지명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진의 출신지를 통상 유주자사를 설치한 중원 왕조의 범위에서 찾아보니, '진서(晉書)' 지리지에 '기주 안평국 신도현(冀州 安平國 信都縣)'이란 기사가 나온다. 그래서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중국 하북의 안평(安平)군에 있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게다가 잘 보이지 않는 군 이름의 첫 글자에서는 '宀'에 가까운 획이, 두 번째 글자에서는 '一'의 획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安平'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다만 안평은 284년 이후에는 장락(長樂)으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잘 맞지 않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출신 군(郡)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여서 양쪽 설의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 이럴 때는 무덤주인공의 성씨도 그 출신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진의 묘지명에서는 이름 앞의 성씨가 쓰여졌을 두 글자가 심하게 흐려져 읽을 수 없는 상태이다. 이처럼 출신 지역명도 일부만 확인되고, 성씨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진의 출신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논란이 계속된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자료로 접근할 수도 있다. 위 묘지명 중 도향(都鄕)은 군이나 현의 중심 관청이 있던 향을 가리킨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군-현-향-리의 지방행정 조직을 갖추고 있는 지역 출신이다. 이는 중원왕조에서 내내 시행하고 있던 군현제 단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4세기 말에 고구려에서도 이러한 행정단위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도입하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자료로서는 이런 사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같은 광개토왕시대의 사정을 전하는 '모두루묘지'에는 '성민곡민(城民谷民)'이라는 기사가 있어서, 성-곡이라는 통치 단위를 상정케 한다. 물론 그렇다고 고구려가 군-현-향-리제를 도입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다. 과거 낙랑군이 있던 이 지역에 특별히 중국왕조식의 행정단위를 도입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덕흥리 고분에서 진의 묘지명이 발견되고 거기에 출신지와 성씨까지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요한 글자 몇몇이 잘 보이지 않음으로써 국제적인 논쟁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처럼 고대 금석문의 경우 꼭 중요한 부분이 판독되지 않아 많은 논쟁을 낳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 회에서 살펴본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도 이에 해당한다. 그 덕분에 필자 같은 역사학자들도 이래저래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명료한 증거는 부족하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로서 최대한 합리적인 추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학자들이 진의 출신지를 하북의 안평군 신도현으로 본다. 그가 고구려지역 출신이 아니라면 어느 시기엔가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일 터인데, 그 망명 시기는 언제일까?
또 진이 고구려 지역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그가 유주자사를 지낸 것 조차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가 역임한 유주자사는 망명한 뒤 지낸 고구려의 유주자사인가 아니면 망명하기 이전에 다른 왕조에 역임한 유주자사인가? 또한 실직인가, 허직인가?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둘러싼 논쟁은 그 출신지 논쟁보다 더 뜨거우니, 다음 회에 말씀드리겠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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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의 노다지, 덕흥리고분
[고구려사 명장면-26] 1976년 12월 8일,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옛 지명: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서편 옥녀봉의 남쪽 자락. 향금산이라고 불리는 구릉에서 관개수로 공사 중 고구려 시대 벽화고분 1기가 발견되었다. 한겨울임에도 발굴단은 부랴부랴 12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까지 한 달여 동안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무덤은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었다. 각 방은 방형이며, 앞방 천장은 궁륭고임 위에 2단 평행고임을 얹었고, 널방 천장은 궁륭고임 위에 4~5단 평행고임을 얹었다. 그리 크지 않은 넓이의 무덤방이지만 높은 천장으로 공간은 제법 넉넉했다. 사방 벽면과 천장에 가득하게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생활풍속도 그림으로서 마치 고구려 시대로 돌아간 듯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사실 벽화만으로도 고구려 벽화고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도 풍성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묵서가 무덤 벽면 곳곳 56군데에 쓰여 있었다. 묵서 글자만도 600여 자. 게다가 무덤 주인의 묘지명도 있었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120여 기 중에서 무덤 주인을 알려주는 묘지명이 쓰여 있는 고분이 몇 기나 되는지? 여기서도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는 안악3호분(무덤주인공이 고구려왕인가, 동수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지만), 그리고 모두루고분(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딱 2기뿐이다. 범위를 삼국 전체로 넓혀도 단지 백제의 무령왕릉만 추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묘지명에 의하면 이 무덤의 완성 일시가 영락(永樂) 18년 무신(戊申)년 초하루가 신유(辛酉)일인 12월 25일 을유(乙酉)라고 밝혀져 있다. 양력으로 따지면 409년 1월 26일이다. 이렇게 보면 이 무덤은 무덤의 주인공과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 무덤인 셈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 덕흥리고분의 발견은 안악3호분 발견 이후 고구려 고고발굴 역사에서 최고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덤의 묵서 중에는 날짜와 관련된 묵서가 하나 더 있었다. 널길 서벽에는 "태세재기유이월이일(太歲在己酉二月二日)"이라는 묵서가 쓰여 있었다. 음력 409년 2월 2일이며, 양력으로 3월 4일이다. 이 날짜는 무엇일까? 널길에 쓰여져 있고, 무덤 완성 일자보다 뒤인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무덤을 폐쇄한 시점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렇다면 무덤을 완성하고 무덤 주인을 안장하고 장례 절차 등이 한 달 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고구려의 장례문화를 추적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처럼 무덤을 폐쇄한 날짜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이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묵서의 사료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
묘주의 묘지명에 쓰여 있는 영락(永樂) 18년이란 기년 묵서 또한 쉬이 지나칠 수 없다. 영락(永樂)이 광개토왕 연호임은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비문에는 광개토왕 생시의 칭호를 '영락(永樂)태왕'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비문의 영락을 영락태왕 몇 년이라는 재위년을 표시하는 것이지 연호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실 비문만으로 영락을 연호로 '확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덕흥리고분이 발견되어 묘지명의 영락(永樂) 18년 사례에 근거해 영락이 광개토왕 연호임을 '확정'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몇몇 사례만으로도 덕흥리고분의 묵서가 갖는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벽화 제재의 풍부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림의 대상과 내용에 대해 그 이름과 설명이 묵서로 밝혀져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벽화 내용이 무엇인지 그냥 짐작해보는 것과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고구려인의 의식과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명료한 '표지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벽화와 묵서 등 이 무덤에 담겨 있는 역사 자료의 가치로 볼 때 덕흥리고분을 현존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첫 자리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덕흥리고분의 벽화와 묵서 내용이 모두 다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고, 이를 통해 고구려 역사의 단면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표지판'은 있지만 그 길로 들어서서 무엇을 찾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몫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덕흥리고분은 더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무덤을 만든 고구려인은 자신들이 담고자 하는 많은 사실과 생각, 관념들을 그림과 묵서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들이 그 분명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덕흥리고분은 여러 치열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묘주는 고구려인인가, 망명객인가? 유주는 고구려의 영토였나? 등등이 대표적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런 논쟁점들을 짚어보겠다. 어쩌면 이런 논쟁점보다는 고구려인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더 귀중한 자료인 벽화 명장면들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덕흥리고분의 구석구석,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마치 고구려 역사의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 것으로 믿는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황제 칭제 안한 고구려, 자주의식 반영 '태왕' 때문
광개토왕의 본래 시호는 매우 길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여기
다음 '광개토경'은 땅을 널리 개척하였다는 왕의 업적을 보여주는 칭호이다. '평안'은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다는 칭송쯤 될 터이고
그중에서도 '광개토경'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왕의 정복활동이 당시에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잘 알다시피
예컨대 광개토왕은 군사를 부리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당시 백제인들이 몹시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능력은 고구려
또 전쟁을 할 때에도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진두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무신왕이나 동천왕 등이 좋은 예이지만 구체적인
이처럼 고구려왕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그것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전쟁은
이렇게 '광개토경'이란 시호와 연관되는 '태왕' 칭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군주의 칭호 중에 황제(皇帝)
어떤 이는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황제라 칭하였는데, 후일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의 눈치를 보면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고구려에서는 결코 황제라 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황제라고
태왕이라는 칭호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모두루묘지에서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
어쨌든 이렇게 고구려에서 처음 등장한 태왕이라는 칭호는 백제, 신라에 전해지고 계속 이어지면서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도
광개토왕의 '태왕'은 바로 고구려적 천하를 대표하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용어이다.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소수림왕의 아우인데 고국양왕이 그리 무력한 인물일 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흔히 광개토왕을 마케도니아의 정복군주 알렉산더와 비교하곤 하는데, 알렉산더도 저 혼자 잘난 게 아니다. 아버지
이런 정황으로 보면 고국양왕 역시 형이나 아들 못지않은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국양왕의 재위 기간이 짧았던 것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이때 제법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고국양왕을 다시 평가하려면 결국 그가 뭘 했는가가 중요하다. 고국양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인
전진의 부견 아래에 귀의하였던 모용수(慕容垂)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전연(前燕)이 망한 지 14년 만에 다시 연나라의
고국양왕의 요동 공격은 이런 국제 정세와 힘의 공백을 이용한 시의적절한 군사행동이었다. 이에 모용좌는 군대를 보내어
그러다가 385년 10월에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慕容農)이 3만 군대를 이끌고 용성에 이르러, 지난 7월에 반란을 일으켰던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고국양왕 때 요동을 둘러싼 정세를 보여주는 기록은 모두 중국 측 기록이다. 즉 후연의 입장만
그러나 이후의 정세를 보면 곧이은 고구려의 공세를 추정할 수 있다. 우선 후연이 요동태수 방연을 임명한 기록을
이 기사는 395년에 광개토왕이 거란족의 일부인 비려(稗麗)를 정벌하고 '양평도(襄平道)'를 통해 귀환하면서 영토를 순수
물론 이 무렵에는 아직 고구려가 양평과 평곽 일대를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 즉 후연이 평곽과 양평을 차지하고
광개토왕이 5년에 요동 일대를 순수할 수 있음은 그 이전 언젠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언제일까? 흔히
요동이 갖는 경제적, 인적,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장차 고구려 국가 기반의 핵심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국가 대개조작업 성공한 소수림왕 리더십의 실체
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딱 그랬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고 주민 5만명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소수림왕에 대해 "키가 크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말은 다소 상투적이기
고등학교 때까지 한국사 교과서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조건들로 소수림왕 때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성립 등을
과연 그럴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이런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데 얼마만 한 사회적 진통과 갈등이 일어났을지, 또
소수림왕 때의 정책이 어느 정도의 큰 변화를 초래하는 개혁인지 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잠시 오늘 우리 현실과 대응해서
그러면 이른바 IMF 사태라고 하는 외환위기가 주었던 우리 사회의 충격과 불안을 떠올려 보자. 아마도 근자에 한국 사회가
그런데 소수림왕대의 고구려는 달랐다. 즉위 초부터 바로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성립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먼저 율령 반포부터 살펴보자. 율(律)은 죄를 정하는 형벌법, 영(令)은 교령법(敎令法), 즉 일반행정규정으로서, 율령은 곧
아쉽게 고구려의 율령을 전하는 자료가 없어서 그 전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중국 왕조의 선진적인 율령을 고구려에
불교 공인도 마찬가지다. 재위 2년(372년)에 전진으로부터 승려와 불상, 불경을 받아들이고, 5년에는 처음으로 수도에
그렇기에 불교가 처음 수용되고 공인될 때,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 설화에서 보여주듯이 상당한 갈등이 나타났던 것이다.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 이는 거의 국가 개조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마도 이 정도면 정책 시행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너무 단순하게 보수냐 진보냐로 구분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의미에서 보자면
이렇게 볼 때 소수림왕이나 당시 고구려 지도층이 가졌던 리더십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한다. 커다란 위기에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이진희의 연구는 광개토태왕비문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촉발하
탁본에만 근거한 이진희의 주장보다는 현지 조사라는 장점을 갖고 있는 왕건
이진희에 의해 환기됐듯이 일제 관학은 비문의 신묘년 기사를 일본의 백제, 신라, 가야에 대한 정복으로 해석하고, 이를
광개토태왕비문 중에서 집중적인 논란의 대상은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다. 비문 변조설 역시 이 구절에 집중돼 있다.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 이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다. 단락을 어떻게 끊어 읽을 것인가, 보이지 않는 글자를 무슨 자로 볼 것인가,
일제 시기에 일본 관학자들은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斤]羅(가라,
민족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 말에 이런 일제 관학자의 해석을 비판하는 견해를 제기했으나 공표하지는 못했고, 1955년에야
정인보는 당대 한학의 최고 대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해석은 좀 궁색해 보인다. 짧은 문장에서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어
김석형은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패수)를 건너 백잔 □□신라를 격파하여 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이른바 고구려 주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견해들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결코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앞의 두 견해는 모두 위 판독문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한 해석이다. 그러나 비문이 변조됐다면 새로운 판독이 먼저 시도돼야
사실 비가 알려진 초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돼 비면의 상태가 나빠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이 유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원석탁본에서도 '海'자로 판독된 글자는 불분명하며, 변조됐다는 근거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기왕의 판독문을 인정
이렇게 신묘년 기사는 일부 문자의 변조 여부를 의심받고 있으며, 그 문장 해석이나 역사상에 대한 이해도 매우 다양하다. 그런
1500년 전 고구려인이 쓴 광개토태왕비문을 근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구성하는 텍스트에서 해방시켜야 비문이 만들어진 그 시대,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광개토왕비문 분석해보니 정교한 건물 설계도 수준
광개토왕비문에는 과거-현재-미래에 해당하는 '시제(時制)'들이 문장 곳곳에 사용되고 있다. 비문 문장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비문의 1부에 해당하는 위 문장은 전체가 과거-현재-미래의 시제 구성을 하고 있다. 첫 문장은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탄생과
이렇게 1부의 문장 전체는 시제상으로 볼 때 고구려의 과거(건국 및 초기 3왕의 훈적)-현재(광개토왕의 훈적)-미래("후세에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기로 기술하고 있는 2부의 문장은 시제 구성에서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대부분 기년(紀年)
유명한 신묘년조 기사를 포함하여 영락 6년조 문장을 살펴보자.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다음 영락 20년 동부여 정벌 기사도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그러면 위 문장들의 과거 시제처런 과연 백제와 신라, 동부여가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을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비문에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예부터 속민"이라는 표현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광개토왕의 정벌 명분으로 제시하기
이와는 달리 현재 시제 즉 광개토왕에 의한 정토만 강조되는 문장도 있다. 영락 5년조의 비려(稗麗) 정벌, 영락 10년조와 14년조의
이처럼 2부 정토 기사에서는 다양한 대상이 등장하는데, 현재 시제만으로 정토 내용을 기술한 대상은 비려, 왜, 후연 등이며,
그러면 왜 백제와 신라, 동부여의 경우에만 "예부터 속민(舊是屬民)" 등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고구려의 천하
즉 광개토왕 자신만이 아니라 광개토왕까지 이어지는 고구려 왕실 전체의 정통성을 드러내려는 서술로 짐작된다. 광개토왕
이렇게 광개토왕비문의 시제 기술은 고구려인의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는 광개토왕 조상들의 영광과 신성함이며, 현재
고구려인의 시간관, 역사관에서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현재-미래에 흐르는 발전의 관념은 찾아볼 수 없다. 과거의 영광을
더욱 시제를 통해 잠시 살펴보았듯이 광개토왕비문은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구성된 매우 짜임새 있는 문장이다. 구석구석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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