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抗日) 의병 (義兵) 항쟁사 (抗爭史)[9]

2018. 9. 30. 22:01우리 역사 바로알기


항일 (抗日) 의병 (義兵) 항쟁사 (抗爭史)(엑박수정) [9]| 의병항쟁
항일|조회 91|추천 0|2018.06.03. 10:56


항일 (抗日) 의병 (義兵) 항쟁사 (抗爭史)(엑박수정)



나라가 없어지던 날 , (1910 년 8월 29일 ) 제국주의 (帝國主義) 일본 경복궁일장기걸어 놓고 국권찬탈 을 철저히 상징했다 . 그러나 이토록 뼈아픈 민족의  고난사 (苦難史)를 막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버리며 오직 쓰러져  가는 국가 <대한제국>을 위해 몸바친 그들이 있어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 그들의 이름은  의병 ( 義兵) 이다 .  


  실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런 이름이다 .

 

 



 

    <제 1차 항일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 >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 : 민비>를  시해한 직후 <위정척사파>의 거두 <유인석( 柳仁錫)>지휘하에 일어난 전국의 의병항쟁을  말한다 . <  제 2차 항일의병>은  1905 년 <을사보호조약> 후  전(前) 참판 < 민종식 (閔宗植)>지휘하에 강원도 홍천 에서 기병 (起兵 1906 년 3월 16일 ) 했고 , 산남 (山南) 에서 일어난  전(前) 중추원의원 정환직 (鄭煥直),  경주(慶州 ) 에서 최익현 (崔益鉉) , 태인 에서 임병찬 ( 林炳贊) , 경북평해 에서 신돌석(申乭石) , 등이 있다 .  이로 인해  일본군전국 122개소< 경무분견소> 설치해 의병들대치했다 .

 

 ( 사진은 제 1차 의병들 , 손에 든 무기는 농기구에 가깝다 . 이들은 화승총과 맞선다 .) 

 

 



 

의암 (毅庵)  유인석 (柳麟錫)                                                                                                                  

                   

   <제 1 차 의병활동> 엔 빠질수 없는 인물이 유인석 (柳 麟 錫) 의병장이다 .

 선생은 < 조선후기>의 학자 요 의병장 이다 .본관 은 < 고흥 >자 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 (毅菴) , 1842 년 강원도 춘천시에서 출생 , 


   <철종 (哲宗)>때 , 거유 (巨儒) 화서 (華西) 이항로 (李恒老) 에게 글을 배우다가 1868 년 중암(重菴) 김평묵  (金平默) 과 성재(省齋) 유중교 (柳重敎)를 스승으로 , 학문에 힘쓰고 위정척사 (衛正斥邪) 운동에도 참여 하였으며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한 존화양이 사상을 제천(提川) 에서 강학(講學) 하였다 .

 

   1876년 <고종 13년> 병자수호조약 (丙子守護 條約) 을 체결 할때 , 경기 , 강원 유생 46명 척양소 (斥洋疏)를 올려 개항반대운동 (開港反對運動)을 벌렸다 . 

 1894년  <고종 31년>  갑오개혁 (甲午改革) 후 김홍집 (金弘集) 의 친일내각들어서자 의병 (義兵)을 일으켜 충주(忠州) 제천(提川) 에서  부패관리들을 척살(斥殺) 했으나   관군 (官軍)에게 패전 (敗戰)하고 만주 (滿州) 로 망명(亡命) 하였다 . 이것이 1896년 , 제 1 차 의병활동 이다 .

 

   만주 (滿州) 회인현 (懷仁縣) 에 은신중 < 고종황제>유지(諭旨)를 받고 일시 귀국 , 1898년 다시 만주로 갔다가 1909년 (융희 3년 ) 블라디보스토크 에서  13도 의군도 총재 (13道 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헤이그 밀사로 갔던  이상설 (李相卨)등 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침공을 기도하던 중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  되었으나 , 곧 석방되었다 .

 

   1910년 <국권피탈 > 뒤에도 독립운동 을 계속 하여 <성명회 (聲明會)>를 조직 , 각나라 정부에 발송한 8.624명이 서명한 선언문 (宣言文)에는 영문 (英文)으로도 서명 하는 등 ,외교 (外交)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 1915년 <봉천성(奉天省)관전현 (寬甸縣) 방취구 >에서 74세를 임기로 병사 (病死) 하였다 . 

 

사진은  유인석 (柳麟錫) 선생 의 초상화 )( 사진은 의암 (毅菴) 유인석 선생이 기거하던 춘천의 옛집 ,   아직 현존한다 ) 

 

  

 


 

   1906 년 5월 <의병장> 민종식 (閔宗植) 의 <홍주성 >점령을 기점으로 , 전국적으로 확산된 <의병투쟁>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군>은 전국 12개소에 <경무분견소>를 설치 , 


사진은 <일본군>에게 체포된 평양 의병들 의 모습 , 가족 친지인 것 같다 .

 

 


    밑에 사진은 1905년 1월 1일 , <경부선철도>가 개통된지 2일후1월3일 , <일본군>은  철도파괴음모라는 누명을 씌워  공개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 ( 헐버트 Passing of Korea 에서 발췌 ) 

 

 


    

   1905 년 <을사보호조약>이후 민영환 선생의 자결 , 전(前)참판 홍만식 (洪萬植)의 음독자살 전(前) 의정  조병세(趙秉世) , 전(前)참판 이맹재(李孟宰)의 자결 , 그리고 전(前)참판 송병선(宋秉璿) 의 음독자살 ,등에  이어 민종식 (閔宗植) 등의 홍천(洪川)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들풀에 불 번지듯 의병항쟁이 전개 됐는데 ,  이것이 제2차 의병항쟁 이다 .

 

 ( 제 2차 의병항쟁 당시 의병들 의 모습 , 제법 화승총 을 들고 군대의 면모를 갖추었다 .

                                           (FM 메캔지 촬영 ,대한제국 의 비극에서) 

 

 



 

              면암 (勉庵)      최 익현 ( 崔 益鉉) 

 

 


 (1906 년 6월 12일 전남 순창 에서 체포되어 8월18일 대마도로 끌려가는 최익현)

 


   면암(勉庵) 최익현 (崔益鉉) 은 1833 년 12월 5일 (음력)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 (勉庵) ,  김기현 (金琦鉉) , 이항로 (李恒老) 의 제자다 .
 

   강화에서 천민처럼 성장해 왕이 된 , 철종(哲宗 6년 ) 재위중 인 1855 년 , 정시문과에 문과로 급제 , 성균관 전적 (成均館 典籍) , 사헌부 지평(司憲部 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이조정랑(吏曹正朗) ,등을 역임 , 수봉관 , 지방관 , 언관 ,을 거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 부정 을 척결하여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 (當百錢) 발행을 시도하자 , 재정의 파탄을 들어 흥선대원군 의 실정을 상소하여 중건을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

 

   1873년 , 동부승지 (同副承旨) 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 반(反) 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 , 서원철폐(書院撤廢)등 ,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자 , 다시 대원군의 실정을 낱낱히 열거 , <고종>의 친정 (親政)으로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 , 대원군 실각 의 계기를 만들었으나 ,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 괘씸죄"에 걸려 제주도 에 위리안치 (圍籬安置) 되었다가 1875 년에 풀려났다 .

 

   1876년 , 명성황후 의 척족정권 (戚族政權)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 5조  된 격렬한 척사소 (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 흑산도 (黑山島)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879년 석방되었다 . 1895년에는 을미사변과 더불어 단발령 (斷髮令)이 내려지자 , 이를 반대하다 투옥 되었다 .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라는 말을 해 그 당시 유학자(儒學者)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

 

   1905년 ,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사민 (士民) 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거부 , 철도이용 반대 , 일본상품 불매운동 , 등 항일의병운동을 촉구 했다 .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 (林秉贊) , 임락 (林樂)등 80여명과 함께 전북 태인 (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


   기일본정부 (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 16조목 따지는 의거소략 (義擧疏略)을 배포한뒤 전남 순창 (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 체포되어 쓰시마 (對馬島)섬에 유배되었다 .

 유배지 대마도에서 주는 음식은 적 (適)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부 , 단식(斷食)을 계속하다가  4개월 만에 병으로  한많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

 

 

 

태극기 (太極旗) 에 서린 애국혼 (愛國魂)

 

불원복 (不 遠 復) 이란 글이 태극기 에 써있다 .
     이 말은 " 멀지 않아  다시 돌아 온다 "
는 뜻으로 애국투쟁 의 의지 를 태극기에 써넣어 투쟁의지 와 애국정신을  기린 것이다 .

    이 태극기 는  임진왜란 때 용맹스럽게 나라를 위해 산화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 고광훈 (高 光薰 )  1862년 4월 7일 (生)- 1930 년 10월 26일 (亡) ) 의병이 형(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과  함께 전남 구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연곡사 (燕谷寺)에 본부를 두고 각지에서 일본군을 교란시켰다 . 兄이 연곡사에서 전사하자 남은 의병으로 끝까지 싸우며 태극기에 이 글을 써 넣은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체포되어 3년간  진도 (珍島)로  유배 당했지만 1930 년 10월 26일 63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 일본군 과 경찰>은 전국 각처에서 의병들을 붙잡는 대로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현장에서 이렇게 목을 메달아 공개적으로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그러나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이를 갈며 항일감정을 삭혔고 의병이란 분노를 토해냈다 .

 

 

 

 

    아랫 사진은  122개 분견소 (分遣所) 의 의병 " 현상수배 "사진과 죄목을 적은 수배자 명단을 걸어 놓았었다 .

 

 

 

 

        의병포고 격문 (義兵布告 激文)


   의병은 아무나 뽑지 않은 것 같다 .  확실한 애국심과 민족애와 국가관이 투철하지 않으면 가담도 안했고 , 뽑지도 않은 것 같다 .


 

 



 

            왕산 ( 旺山 )    허위 ( 許 蔿 )  

 

    허위 (許蔿) 선생은 1854 년 4월 1일 , 경북 선산 의 대 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 , 1895 년 , 45세 때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며 단발령 까지 실시하자 , 분개한 선생은 경북 김천 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날을 기하여 성주(聖州)에  포진 하여 관군 과 전면전을 펼쳤으나 , 협공 하는 관군 을  막을수 없어 이은찬 , 조동호 가 전사하자 충북 진천으로 진(陣)을 옮길 때 고종황제로 부터 의병 해산령이 내려져 원통하게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  1899 년 <대한제국>의 부름을 받아 영희전 (永禧殿) 참봉 , 성균관 박사 , 등에 임명되었다가 평리원 수반판사( 平理院 首班 判事) 가 되었다 .

 

    1904 년 , 한일의정서 (韓日議政書) 강제체결 사건으로 이상천 , 박규병 등과 격문을 살포하는 저항운동 을 재개하였다 . 1907 년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대한제국> 군대 가 강제해산되자 , 허위 (許蔿)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 전국 각지에 흩어진 의병들을 양주에 집결시키고  서울탈환에 박차를 가하는 대책으로 연합군13도 창의군 <총대장>에 이인영 (李麟榮) 을 임명하고 , 자신은 군사장 (軍師長)이 되어 서울 에 진입 ,  의병 2.000 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렸으나 ,  무참히 패 하고 말았다 .

 

    그 후 이완용 (李完用)이 연천(連川) 진지로 사람을 보내 < 경상도 관찰사 > <내무대신> 등의 관직으로 회유를 획책했으나  일거에 거절하고  1908년 6월 11일 <일본헌병대>의 습격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평 (永平)에서 체포 ,  그해 1908년 10월 경성감옥
 ( 서울 서대문 형무소 ) 사형수 제 1호 가 되었다 . 사형집행 시 간수가 유언을 물으니 ,  " '대의를 펴지 못했는데 유언은 무엇에 쓰랴 ' 하며  꾸짖고 교수형으로 순국하셨다" 한다 . 

 

   그러나 허위 선생은 혼자만 의병항쟁을 한 것이 아니라 , 그의 맏형은 항쟁의 필요한 군자금을 댔고 , 세째형 허겸은 의병투쟁을 함께 했다 . 일본의 국권침탈 음모에 격렬히 저항한 허위 집안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고향인 선산에 살기 힘들었고 , 견디다 못해 세째형 <허겸>은 허위의 4 남 2녀 를 데리고 1912년 < 서간도>로 망명하였으며  <사촌>들도 뒤를 따랐다 .

 

    결국 허위의 조카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나섬으로 자손들은 해외에서 뿔뿔히 흩어지며 혹독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됐다 . 해방후 <친일파>들의 득세 속에 애국자의 희생정신은 빛을 바랬고 , 훈장과 최저 생계비조로 지급되는 몇푼의 현실에 , 이들 후손들은 목이 메일 것이다 . 수많은 재산을 잃은 나라를 찾고져 의병활동으로 모두 탕진하고  자손들은 타국과  국내에서 유랑인 이 되어

 

        유리걸식 을 하는 부랑인 (浮浪人)이 됐으니 .....

                      무엇으로 이들께 보상을 해야 하나 ?


 

                                              ( 사진은   허위 (許蔿)  선생 )

 

 


호남 항일의병 투쟁 ( 湖南 抗日義兵  鬪爭 )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 해서 전국 의병들의 60.1% 교전회수의 47.3%를 차지할 만큼 ,
  호남지방 (湖南地方)은 의병투쟁 의 중심지 였다 . 일본경찰 과 헌병대가 집계한 통계에
  의하면 ,  1908년 , 교전수 에 있어서  전남 , 강원 , 황해 , 전북 , 충남 , 경북 , 등의
  순이었고 1909년 에는 전남 , 전북 , 경기 , 경북 , 충남 , 강원 , 순이 었다 . <일본>은
  1909년 9월 1일 부터 10월 10일 까지 40일간 < 보병 2개연대 > 2.260명 을 동원, 
  전남지역을 휩쓰는 남한 대토벌작전 (南韓大討伐作戰)을 벌렸다 . 이때 광주를 중심
  으로 한 전남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의병수가 17.570명으로 집계 되었다 .  


 

 


 

 일본의 남한 대토벌작전 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의병장 (湖南義兵長) 들 ,
 가슴에 포로번호 를 달고 있다 . 앞줄 왼쪽부터 ,  송병운 (宋丙雲) , 오성술 (吳成述)
 ,이강산 (李江山), 모천년 (牟千年) , 강무경 (姜武京) , 이영준  (李永俊) ,
  뒷줄 왼쪽부터 , 황장일 (黃壯一) , 김원국 (金元局) , 양진여 (梁鎭汝) , 심남일 (沈南一),
  조규문 (曺圭文),  안계홍 (安桂洪), 김병철 (金丙喆) , 강사문 (姜士文) ,
   나성화 (羅聖化) 의병장 이다 .

 



     (  아랫사진은 의병투쟁 당시 ,   의병들이 수감된 광주감옥 , 

         군산분감 ( 群山 分監) 굉장히 허술해 보인다 . )

 


 

       의병장 (義兵長)  임병찬(林 炳 贊) 선생

 

    선생은 전남 옥구 (沃溝)출신으로 ( 1851 - 1916 ) 동학혁명 때 관직을 버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 최익현 선생과 함께 의병 200명을 이끌고 순창 (淳昌)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체포 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전남 독립의군부 (獨立義軍府) 순무대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하다  1916년 <거문도>에서 단식 (斷食) , 순국 (殉國)하셨다 .

  



            ( 사진은 임병찬 의병장 의 초상 )   

 ( 이사진은 너무나 유명한 무명용사 의 사진이다 )

 

 


 

 ( 숱하게 많은 청장년 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흩날리며 사라져 갈때 , 우린 그들을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당시의  처절함이 못내 아쉽고 , 그들의 주검에 목놓아 울어줄
  연고 조차 찾을 수 없으니 ....오늘도 가슴 저미는 아픔을 억누르며 고귀한
  희생정신에 숙연한 마음으로 머리숙여 목례로 한 (恨)을 달래 봅니다 . )

 

 


 ( 호남 의병들이 사용 했던 화승총 들)

 

 (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완전무장을 갖춘 일본군이 열차 앞에서 승차준비를 하고 있다 . )
 

 

 

 

           일본인들의 잔혹한 학살 만행  

초토화된 항일의병 주둔지 . 체포된 의병들은 어찌 되었을까 ?

  

 




절한 참상이다 . 잔혹한 일본인들 ......


 

 

 

 

살해한  사람의 귀를 잡고 웃으며 들어 보이고 있다 .

 어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일까 ? 

 

 

 

  

        여기선 한술 더떠 < 작두> 로 목을 짜르고 있다 .

 

 


 

이것이 일본인의 잔혹한 국민성이다 . 이 자들의 특성은 강자에겐 

 굽실거리고 약자에겐  한없이 잔혹하다 ,  우리의 외교는

 굴욕스럽 도록 애처로운 굽신굽신 외교다 . 의연하고  

        당당한 인물이 아쉽다 .

 

 

 

이하 이완용의 변론 中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ㅡ 중략 ㅡ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2018.06.03 | 카페 > Daum카페  http://cafe.daum.net/jeju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