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지배체제(羈縻支配體制)


   수(隋)에 의해 그 지배를 받게된 주변 제민족은 수말의 반란으로 다시 독립하였으나, 628년 당(唐)이 국내를 통일한 후 이후 고종기(高宗期)까지 걸쳐 약 40년간에 당은 괄목할 정도의 대외발전을 이룬다.

   당의 대외관계는 주로 돌궐서역, 그리고 고구려의 관계로서 설명할 수 있다.

   돌궐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관계는 630년 태종(太宗)은 동돌궐을 1)멸망시켰고, 그 후 철륵제부(鐵勒諸部)의 맹주인 설연타(薛延陀)를 복속시키고, 647년에는 사막 북쪽의 지역에 6도독부(都督部) 7기미주(羈州)를, 이어서 연연도호부(燕然都護部)를 두어 이들을 통할했다.

   도호부에 의한 주변지역의 경략이 기미지배의 주요한 내용이다.

   기(羈)란 말을, 미(縻)란 소의 고삐를 끄는 의미로서 이 용어가 전화하여 완만한 이민족지배 즉 복속시킨 제민족과 제부족의 군장등에게 도독과 자사 등의 당조의 관작을 주어 조공 등을 요구하지만, 그들의 전통적인 부족통치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고, 종래의 부족체제를 용인하는 느슨한 지배방식을 말한다.


   당의 세력이 최고점에 달한 7세기 중엽에는 800개 전후의 기미주가 설치되어 6도호부에 의한 광범위한 지역이 통할된 것이다. 동돌궐이 편정된후, 635년에는 청해(淸海) 지방의 토욕혼(吐谷渾)을 항복시키고, 이어 티베트고원의 토번(吐蕃)도 세력하에 두었다.

   그러나 당과 토번과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여, 당조는 화번공주(和蕃公主)를 출가시키는등 회유에 부심하였다. 그리고 안사난(安史亂)후에 토번은 그 세력이 커져 당은 그의 동방진출을 막지 못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이 점거되고, 장안조차도 일시 점령되는 등 토번대책에는 고심했다.


   당의 서역경영은 640년에 고창(高昌 투르판; 漢人오아시스국가)을 멸망시킨후, 언기(焉耆카라샬), 구자(龜玆구차), 소륵(疏勒카슈가르), 우전(于 ; 호탄) 등의 타림분지의 오아시스국가를 차례로 쓰러트리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部)를 두고 기미지배하였다.

   이러한 기미지배권의 확대와 함께 제국의 여러지역으로부터 다수의 유학생이 장안에 보내져, 당의 문물·제도가 적극적으로 흡수되어 당의 문화가 주변부에 파급되었다.

   640년경의 정황으로서 8000인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이 장안의 국자학(國子學)에서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관계는 한반도에서는 당시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하는 가운데, 수의 공격을 3차례나 물리친 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고, 신라는 당에 접근하여 이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당은 624년에 고구려왕 고무(高武, 영류왕榮留王7년)요동군왕(遼東郡王)에, 백제왕부여장(百濟王扶餘璋, 무왕武王7년)대방군왕(帶方郡王)에, 신라왕김진평(新羅王金眞平, 眞平王46년)낙랑군왕(樂浪郡王)에 2)책봉(冊封)하여, 명의상으로는 동등의 작호를 내려 한반도의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太宗이 고구려에 대해 원정군을 일으킨 것은,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당의 책봉을 받은 영류왕을 죽이고, 그 아우 보장왕(寶藏王)을 옹립해 실권을 잡은 것,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당에의 입공로(入貢路)를 저지하고 있다는 신라로부터의 항의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수 그리고 당이라는 중화제국에 반항하는 번이(蕃夷)라는 의식이 그 근저에 있었을 것. 태종에 의한 3차례에 걸친 고구려원정(645/647/648)은 모두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지만, 다만 수와 비하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다.


   그러나 고종대가 되어 신라는 당과의 관계 강화를 적극적으로 3)취하였고,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60년에는 이를 멸망시켜 그 지역에 웅진(熊津) 등의 5도독부를 두었다.

   이리하여 고립된 고구려에 대해 당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공세를 퍼부어 668년 멸망시켰다. 당은 평양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9도독부의 아래에 주현(州縣)을 두어 기미지배를 하였다.


   당의 기미지배를 지탱한 6도호부의 명칭 중, 안동·안서·안북·안남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처럼 당의 주변을 안정케 하는 것, 즉 중화적 천하관에 기초한 명칭이다


1) 그 복속 하에 있던 철득제부(鐵勒諸部)의 군장(君長)들이 장안에서 조견(朝見)하여 태종(太宗) 천가한(天可汗) (탱그라카한;Tangri Khaghan의 음역)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한다. 이것은 유목세계의 당의 지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즉 황제로서 중국사회에, (天可汗)으로서 유목사회에 군림하는 번한(蕃漢) 공통의 천자로 된 것을 의미한다.


2) 중국왕조가 외국의 군주에 왕등의 작호를 주는 것을 책봉이라하며, 책봉(冊封)이란 왕작(王爵)의 수여가 책서(冊書)를 사용한 책수(冊授)로 행해지는 것과, 본래 작호(爵號)의 수여가 일정한 토지의 영유를 인정하는 봉건적인 의미를 갖는 용어이다. 이처람 책봉은 군주(君主)에 작호(爵號)를 내리는 것에 의해 중국과 이민족과의 사이에 군신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기미체제가 명목적으로도 중국의 주현을 설정하는 것에 대하여, 책봉체제는 보다 간접적인 이민족지배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그 한가지로 신라는 650년 독자의 년호를 폐하여 당의 정삭(正朔)을 받고 복속하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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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장 , 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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