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薰时光】25幅流失海外的国宝级国画

2018. 10. 9. 00:47美學 이야기



【香薰时光】25幅流失海外的国宝级国画

原标题:【香薰时光】25幅流失海外的国宝级国画

《疏松幽岫亭》 曹知白


   元代 立轴 纸本水墨 纵48厘米 横36.4厘米 (法)吉美国立东方美术馆藏

前景是挂满藤蔓的参天松柏,中景、远景的山峰层叠而巍峨。山间有飞流的瀑布,瀑布下有平常的人家。

虽然仍能找到宋代山水画的遗风,但曹知白也将自己的个性色彩加了进去。


   由于家中雄厚的财力,曹知白的日子过得舒心如意,与倪瓒等人同为太湖一带的著名文人。

传世之作有《疏松幽岫亭》《群山雪霁图》《溪山泛艇图》等。




《花卉图》 陈遵


   明代 立轴 绢本设色 纵136.8厘米 横57.8厘米 (日)泉屋博古馆藏。

溪流自左至右贯穿着画面,岸边繁花似锦,色彩缤纷。花草以没骨法画成,色彩浓淡层次丰富。轻柔的笔法,完美地表现出小溪边的清新景致。


  陈遵,生平不详,明代画家。字汝循,浙江嘉兴人。擅长描绘花鸟,栩栩如生。传世作品有《三友图》《枇杷图》《蓼花蛱蝶图》




《陶渊明故事图》陈洪绶



   明末清初 长卷 绢本设色 纵30.3厘米 横308厘米 (美)火奴鲁鲁艺术学院藏 (호노룰루?)

  陶渊明是东晋时期的诗人、名士,不阿权贵,嗜酒安贫,喜好在宁静中体会生活的乐趣。这幅画抓取解印、种秫、归去、无酒等几个特写镜头来描绘陶渊明辞官归田后的清馨生活(此选两幅)。


  作者陈洪绶(1598—1652)是明末清初的人物画家,少年时得到北宋李公麟所作《孔门七十二贤》的拓本,关门在家终日鉴习。到晚年已突破前人陈规,自成一派。




《仙山图》陈汝言


   元代 长卷 绢本设色 纵33厘米 横102.9厘米 (美)克利夫兰艺术博物馆藏  클리브랜드?

  山峦层叠起伏,错落有致。山顶和山脚都配以墨色厚重的松树,它们压住了山峰鲜亮的绿色,使画面趋于沉稳。山峦中安排了小桥、村落、浮云、人物,左下角两人正在看山羊戏耍,右边有高士童子,一片世外仙境的境象


   陈汝言,元末画家,和元四家之一的王蒙是好友。传世之作有《仙山图》《百丈泉图》《荆溪图》等。




《猿图》 法常


   宋代 立轴 绢本水墨 纵173.9厘米 横98.8厘米 (日)京都大德寺藏

   一棵枯松斜插天际,猿猴的重色稳定了画面的重心。

作者用浓墨画猿猴的躯干、脚爪,然后用笔反复皴擦,使毛皮的质感十分强烈。猿猴面部留白,眉眼用焦墨随意点出。松树枝干的描绘狂乱泼辣,是作者常用的“蔗渣草结”式的笔法。


  法常(?—1281)是南宋西湖长庆寺和尚,早年是儒生,中年出家。与当时来中国的日本僧人关系不错,许多画作流传到日本,对日本绘画产生很大影响。

传世作品有《猿图》《渔村夕照图》,另有《龙、虎》对幅 等。




《明妃出塞图》宫素然


  宋代 长卷 纸本水墨 纵30.2厘米 横160.2厘米 (日)大阪市立美术馆藏

  图中描绘西汉宫女昭君远嫁出塞的情形。寒风迎面,景色荒凉,人物形象刻画极为真实生动,笔墨技巧纯熟,线条勾画细致流畅,淡墨略染衣褶、马匹,将塞外苍茫萧瑟的环境特点表现出来。

此画的构图和人物造型与金代画家张踽《文姬归汉图》极为相似,后世普遍认为作者参考了《文姬归汉图》


   宫素然,宋代女画家,事迹不详,根据《明妃出塞图》的题款,可以知道她是宋高宗贵州镇远女道士




《中山出游图》龚开


   宋末元初 长卷 纸本水墨 纵32.8厘米 横169.5厘米 (美)弗利尔美术馆藏 (프리어미술관)  

Freer Gallery of Art and Arthur M. Sackler Gallery

此图插绘的是钟馗妹妹率众小鬼一起出游的场景。从题诗中可知,他们一行正在为途中没有食物而发愁。小鬼们都望着钟馗,希望他能有办法。但钟馗也无计可施,回头无奈地看着妹妹。

通过他们目光的牵引,我们自然地浏览了全图,也体会了画中的情趣。


   龚开(1222—1304),宋末元初画家,宋朝末年曾任官职,入元后卖画为生。擅画人物和马。他的传世之作有《中山出游图》《骏骨图》等。


  *** 전재자 註 : 당 현종 이전 중국 기록에서 귀신을 잡는 역활을 하는 종규(鐘馗)와 같은 신이설화(神異說話)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종규(鐘馗)는 신라의 처용설화가 당나라 유학생이나, 유학승 또는 사신 등의 신라인을 통하여 중국에 전하여진 후에 새로이 만들어진 신(神)으로 짐작된다.


   나당연합군의 백제와 고구려 정벌( 660 ~668년) 후 양국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역병과 정변 등이 창궐 또는 속출하자 이반하는 민심을 잡기 위한 정략적인 홍보와 정훈용(精訓用) 설화로 당황실에서 현종의 꿈에 가탁하여 당시 화괴(畵怪)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오도자(吳道子)에게 명하여 이를 그리게 하고, 정초에 액막이용 세화(歲畵)로 대신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신라에서 처용그림을 세화로 활용한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중국의 기후와 장강이 발달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음력 5월에 역병이 창궐하고, 홍수와 기근으로 인한 민란이 일어나기 쉬운 계절임을 감안하여, 당초 당나라에서 정월에 나누어주던 세화용 종규그림을 음5월에 나누어주는 것으로 바꾼 것으로 볼 때, 신라의 처용설화가 중국에 전해져 종규설화로 재탄생하였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十六罗汉图•诺距罗》贯休


   唐代 立轴 绢本设色 纵129.1厘米 横65.7厘米 (日)高台寺藏

   传说中的诺距罗原是一位勇猛的战士,出家后佛主让他静坐修行,摒弃粗野的性格。图中的诺距罗虽双手合什,但双眉紧锁,气宇轩昂,仍然透着一股威猛之气。


  贯休唐末画家,和安寺和尚,所以绘画以佛像居多。《十六罗汉图》中的罗汉都是高鼻、深眼窝,可能是根据印度人的长相所作。传世作品有《十六罗汉图》《释迦十弟子》,另著有《禅月诗集》




《罗汉图》归庄


   明末清初 册页 纸本水墨淡设色 纵26厘米 横35.3厘米 (美)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클리브랜드?)

这两个罗汉虽然一把年岁,仍然对坐嬉戏,传达出天真淡泊的禅意。衣纹信笔草草,一波三折欲飞欲狂,就在这看似潦草的挥洒中却准确地刻画出了人物的形体和姿态。


   归庄(1613—1673),原名祚明,是明末清初的书画家。归隐于山庄之中,所以才改名归庄。他山水、花鸟、兰竹无不擅长,且深得元代大家的遗韵。

传世作品有《罗汉图》《墨竹诗翰》




《日暮归渔图》江参


   宋代 团扇 绢本水墨 纵24.2厘米 横25厘米 (美)波士顿艺术博物馆藏 (보스턴)

一位渔夫在日暮时分,肩扛渔具,从桥上蹒跚经过,走在归家途中。过不了多久,他的身影就将消失在后面的山林中,而这一片清淡的风景也要隐退在茫茫的夜色里。扇面背后还有宋高宗亲笔所题的诗章。


   江参,生平不详,南宋画家。山水学董源、巨然,笔墨细润,擅用水墨写江南景色,由于受文学家叶梦得称道,声名鹊起。




《寒山拾得图》蒋贵


   明代 立轴绢本 水墨淡设色 纵173.5厘米 横105.5厘米 (美)普林斯顿大学美术馆藏 (프린스턴)

“寒山”和“拾得”是唐代的两位高僧。寒山好吟词偈,神情疯癫。拾得是孤儿,为寺庙僧人拾到收养,在寺里伙房打杂,与寒山友善。历代画家喜欢以此为画题。两位人物,一人染淡墨,一人用白描,以战笔和铁线描写衣纹。


   蒋贵明代画家,生平不详。号青山江苏仪征人。师法同代人物画家吴伟,作品细致逼真。




《孔子圣迹图》焦秉贞


   清代 册页 绢本设色 纵29.2厘米 横35.7厘米 (美)圣路易斯美术馆藏(칼루이스?)

孔子席地而坐,俯身拱手,正推销自己的治国之道。国君慵懒地坐在红木椅上,似乎已经听得不耐烦了。孔圣人也面露难色,转过脸来,不知道说什么好。国王身后三五个随臣,交头接耳。


   焦秉贞,生平不详,清代画家。康熙时供奉宫廷之中,任钦天监五官正,擅画人物、山水、花卉和楼阁。画法工细,设色鲜丽,画风受到西方绘画的影响




《横竿晴翠图》柯九思


   元代 立轴 纸本水墨 纵51.7厘米 横32.5厘米 (日)大阪市立美术馆藏

竹枝一竿,自上倾下,又翻转而上,用笔苍劲,竹叶用浓墨画出,主干用墨稍淡,将人的注意力全部集中在长势劲猛的竹叶上,表现出自在而顽强的精神境界


   柯九思(1290—1343),元代画家。号丹丘生浙江台州人。博学能文,曾任职奎章阁鉴书博士。精鉴赏古物书画,墨竹师法文同,亦擅画墨花、山水。




《藻鱼图》赖庵


   年代不详 立轴 绢本水墨 纵89.6厘米 横48.3厘米 (美)波士顿艺术博物馆藏(보스턴)

这条大鱼突然掉转身来面对观者,嘴巴大张, 目光犀 利。鱼几乎占据了画面的全部空间,作者用细线精心描绘了片片鱼鳞,通过晕染来显示质感和立体感,以淡墨写水草,并通过鱼尾的摆动和水草的摇晃增加了画面的动感。


   赖庵僧人,生平事迹不详。擅画鱼藻。




《读碑窠石图》李成


   五代宋初 立轴 绢本水墨 纵126.3厘米 横104.9厘米 (日)大阪市立美术馆藏

古碑压在石雕巨龟的背上,掩映在枯树之后。薄雾将斑驳的石碑与读碑的二人一起遮盖得影影绰绰。枯木的枝条扭曲如怪爪,似乎在命运的颠沛中挣扎生长。


  李成(919—967),五代宋初画家,祖上为唐代贵族,五代时为避乱而流离四方。他才学过人却时运不济,纵情诗酒、寄兴书画,最后醉死在他乡。与同代画家范宽一起形成了北方山水画派的主流




《枯木竹石图》李衎


   元代 立轴 绢本水墨 纵160.1厘米 横85.8厘米 (美)印第安纳波利斯艺术博物馆藏 (린제 안느 팰리스?)

高大而枯老的松树穿透了画面的山下两端,两枝横干上挂满了深色的藤蔓,像一个象征性的符号,充满压迫感。


   李衎元代画家。 号息斋道人。少年孤贫,从20岁开始在太常寺作小吏,后来官至吏部尚书、集贤殿大学士。擅画墨竹,在当时享有盛名,曾奉命绘制宫殿、寺院壁画。传世作品有《枯木竹石图》《双钩竹图》《墨竹图》




《东丹王出行图》李赞华


   辽代 长卷 绢本设色 纵27.8厘米 横125.1厘米 (美)波士顿艺术博物馆藏 (보스턴)

图中人物都是胡人形象,但各具姿态,衣冠、服饰、佩带各有不同,马匹肥硕矫健。画面中,东丹王李赞华却神情忧郁,若有所思。人物与马的描绘技法非常出色。


   李赞华契丹人,辽代开国皇帝耶律阿保机长子,封东丹王,公元 930 年投后唐明宗,赐姓名李赞华。后来他被唐明宗养子遣人杀害。李赞华通音律,善文章,擅画契丹人物,画风对后世影响很大。




《五星二十八宿神形图》梁令瓒


   唐代 长卷 绢本设色 纵28厘米 横491.2厘米 (日)大阪市立美术馆藏

这本《五星二十八宿神形图》册中的形象,将天文、传说、世俗理念等糅为一体,形成独特的艺术效果。此画的画法是唐代吴道子人物画的典型画风,以至于后世董其昌在题跋中误定为是吴道子所作。


   梁令瓒唐代天文学家画家。精通天文、数学,曾参加改造新历的活动。后又与同代著名天文学家僧一行共同创制了“浑天仪”




《落花游鱼图》刘寀


   宋代长卷 绢本水墨淡设色 纵26.4厘米 横252.2厘米 (美)圣路易斯艺术博物馆藏 (칼 루이스?)

画面以俯视的角度描绘了动态轻盈的水底游鱼,看似杂乱无章,实则各方有序,深具匠心。虽然对水不着一笔,但通过游鱼的自由穿梭,我们仍然感到它的柔滑清凉。


   刘寀北宋画家。年少时流离失所,寓住京都,性格豪放,流连于诗酒之中,过着放荡不羁的生活,这也是他选择自由自在的鱼作为抒情寄托的原因。上图为《落花游鱼图》局部。




《消夏图》刘贯道


   元代 长卷 绢本水墨淡设色 纵29.3厘米 横71.2厘米(美)纳尔逊•艾京斯艺术博物馆藏

图中一位士大夫正斜倚在木榻上消磨夏季湿热烦闷的时光,木榻后的屏风上画一高士正在童子陪伴下读书,高士的背后又有一面绘有山水的屏风。左手执一画轴,画虽然没有打开,但他只是想想画的内容就已心旷神怡。


   刘贯道元代画家。擅长人物道释画,是当时的名家高手。传世之作有《消夏图》《元世祖出猎图》《积雪图》




《狩猎人物图》赵雍


   元代 长卷 绢本设色 纵39厘米 横尺寸不详 (美)圣路易斯美术馆藏 (칼 루이스?)

此图以高丽(朝鲜)国诞生的神话为画题。长卷分为三部:中部画王者与随从,白袍红缨,造型威武,色彩明艳;右部为幽静的山路,仆人抬着朱蒙所射猎物;左边朱蒙策马渡河,回望河岸。


   赵雍(1289—1360),元代画家、书法家赵孟与第二任妻子之子,功力不逊于父亲。传世之作有《狩猎人物图》《兰竹图》《溪山渔隐》


  

*** 전재자 註 : 옹(趙雍)은 서예가 조맹부의 서자로 원대의 서예가이자 화가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북부여국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에게 쫓겨 오이 등 세사람의 신료들과 함께 엄수(淹水)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다. 오늘 도망하고 있는데 뒤쫓는 자가 따라오니 어찌하리오?"

하니, 물고기와 자라 등이 다리를 놓아주어 무사히 강을 건너 졸본(卒本 : 초본의 한자표기 ㅡ 초본 : 샛별 금성을 뜻하는 옛말)에 다달아 졸본부여 즉 고구려를 개국하였다는 동명왕 신화 <수렵인물도>라는 이름으로 그렸다.


   송(宋)을 창건하였던 조광윤의 11대손인 아버지 조맹부(趙孟頫)와 그의 아들(趙雍)과 손자(趙麟)들이 송(宋)의 왕족이면서 몽고족이 세운 원(元)에 출사(出仕)하였다 하여, 후대 명(明)의 한족(漢族) 성리학자들이 서체(書體)인 송설체(松雪體) 조차도 배척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수렵인물도>는 팍스유라시대를 열어간 몽고족들이 그 뿌리를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두고 그를 숭배하고 있었다는 산 증거가 되는 귀중한 그림이다.



동명왕 신화(東明王神話) (주몽 신화)


    고구려(高句麗)는 곧 졸본 부여(卒本扶餘)다. 

혹 지금의 화주(和州)성주(成州)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다. 


   <국사> 고려 본기(本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시조 동명왕(東明王)은 성(姓)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 보다 앞서,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가 동부여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그 때 한 여자를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만나 물으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를 만나 웅신산(熊神山) 압록(鴨祿)가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중매 없이 남을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여기에 귀양 보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금와(金蛙)가 이상히 여겨 유화를 집에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몸을 피해도 좇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들이나 되었다. 왕이 버려서 개,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으며, 길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으니 도로 어미에게 주었다. 어미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여 7세에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다.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에게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주몽과 같이 놀면 그 재주가 늘 따라가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 말하되,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약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조금씩 먹여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것을 타고 여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의 어미가 왕의 다른 아들들이 여러 장수와 함께 주몽을 장차 해치려 함을 알고,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로 간들 안 되겠느냐? 속히 일을 꾸며라."

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오이(烏伊) 등 세 사람의 벗과 엄수(淹水)에 이르러 고하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다. 오늘 도망하고 있는데 뒤쫓는 자가 따라오니 어찌하리오?"

하니,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다. 주몽이 건너자 다리는 사라지고 쫓아오는 군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에 이르러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으니, 그 때 나이 12세였다.


         ㅡ  삼국유사(三國遺事)


《人马图》赵麟


   元代 长卷 纸本设色 尺寸不详 (美)大都会艺术博物馆藏 (워싱턴?)

此图为《赵氏三世人马图卷》之一。图绘身着唐装的奚官双手握缰牵一匹花斑骏马奚官神态安详马亦温驯。线描匀净文雅,沉稳平实,画风显然承袭了家学。


   赵麟元代画家。生卒年不详,字彦徵浙江湖州人,赵雍之子。擅画人马、山水。




《番王礼佛图》赵光辅


   宋代 长卷 绢本设色 纵28.6厘米 横103.5厘米 (美)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클리브랜드?)

图为中国周边的少数民族酋长番王正朝拜佛祖。

众番王作礼拜之状,服饰都为异域装束。画面气势宏大,人物安排疏密有致,表情各异,生动自然,是宋代人物画的一幅杰作。


   赵光辅宋代画家。陕西耀县人。宋太祖时期为画院学生,擅画佛像、人物。


   *** 전재자 註 :  번왕이 봉황을 닮았다는 장미계(長尾鷄)의 꼬리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 전래 후에 고구려 황제나 발해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번왕의 뒤에 서 있는 수행관료들의 의상이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와 발해가 다민족 국가였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猴侍水星神图》张思恭


   宋代 立轴 绢本设色 纵121.4厘米 横55.9厘米 (美)波士顿艺术博物馆藏 (보스턴)

美丽的水星神坐在榻上,右手执笔,正要书写。旁边一只小猴已经高举起石砚,供她填笔。小猴全用没骨法,极富质感,表情天真有趣。


   这幅画早年流传到日本,十九世纪晚期被英国人威廉购得,原被当做佛教画,后经考证为中国五星神像。相传南朝梁张僧繇和唐代中期何长寿都画水星神,此图是南宋时期仅存的一幅水星神图,极其珍贵。




《杨贵妃上马图》 钱选


   宋末元初 长卷 纸本设色 纵29.5厘米 横117厘米 (美)弗利尔美术馆藏  (프리어미술관 소장)

图中的唐玄宗一袭白衣,回头正脉脉含情地望着,杨贵妃脚踩着凳子上马。画中的人物似乎也被这一对恋人所感染,每个人的眼中都流露着温情。就连玄宗名马照夜白”也驻足不前,为贵妃的美而心醉。


   钱选(1239—1299),宋末元初画家,南宋时的进士。进入元代后,归隐从事绘画。力图摆脱南宋画院风格,追寻唐代遗风。擅画人物、花鸟。



主办单位:

主编:

九曲黄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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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의 '근대적' 만주한반도 고대사관 15: <구이(九夷)>와 <제하(諸夏)>, 그리고 조선 <숙신(肅愼)> | 성찰적 근대화 

진송 眞松 2018.09.26 11:57

 

   -<고동이(古東夷)>서경(書經)이나 논어 같은 유교의 경전의 고대 황하 중심의 중원(中原) 족속, 곧 화하(華夏)족의 동쪽에 살던 고대 문명의 담당자 였다. <고동이(古東夷)>라고 고 자를 붙인 이유는 신석기 기-청동기 시대는 동이(東夷) 혹은 <구이(九夷)>화하(華夏) 혹은 <제하(諸夏)>와 병존하는 문명의 담당자였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기원전 5~6세기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 형성시 중원 사회가 발전하면서 변경(boundary)을 확대하여 동이(東夷) 개념이 계속 황하에서 동심원적으로 확장되었다.

 

   -<구이(九夷)> <제하(諸夏)>를 같은 위상에 놓고 고고학적으로나 문명론적으로 동북아시아 신석기 후기와 청동기를 살펴 보는 고대사관이 중요하다. 용어를 정리해 보면 '황하문명(Yellow River Civilization)'은 화하족의 <제하(諸夏)>가 발전시켰고 지리적으로는 중원(中原, China Proper)에서 시작되었다. '만주한반도 문명(Mancuro-Korean Civilization)'은 고동이족의 <구이(九夷)>가 발전시켰고 요하에서 시작되어 발해연안과 그 동쪽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후기에서 청동기 전 시대는 '만주한반도 문명'에 대한 인식이 기존의 '황하문명'과 같은 위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또한 중원 문헌의 신석기 후기 및 청동기 식신(息愼), 숙신(肅愼)의 문화적 정체성(cultural identity)을 올바로 정립하여 문헌 연구가 심화되어야 한다.

 

   -'만주한반도 문명'의 고고학적 데이타 문헌은 이형구, 이기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성안당 2009),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궈다순,장싱더 <동북문화와 유연문명>(김정열 옮김, 동뷱아역사재단, 2008), 우실하<동북공정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2007), 이종호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글로연, 2017) 이다. 역사 이론의 측면에서 이 저서들의 저자들의 주장을 살펴보기 보다는 그 데이타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신석기후기에서 청동기 전체에 이르는 시기는 기원전 35세기 부터 기원전 5세기 정도 까지의 3천년에 해당한다.

 

-<서경(書經)><상서(尙書)>라고도 부르는 유교 경전인데 편집이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서는 순임금의 나라 이름이고 삼대(三代)인 하(夏), 상(商), 주(周)나라 각각의 주요 인물들의 선언과 언급 및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상(商)상서(商書)의 경우는 후대의 공자와 맹자의 논어맹자에서는 '은(殷)'이라고 하여 삼대를 '하상주' 혹은 '하은주'라고도 하지만, 상서의 경우는 은서(殷書)라고 하지 않는다. 유교의 다른 경전인 <시경(詩經)> 혹은 <모시(毛詩)>의 경우 송(頌)이라는 장르의 제사 시가를 '상송(商頌)'이라고 하여 시경과 같은 비교문헌학적 일관성(philological coherence)가 존재한다.

 

   -<서경(書經)>의 '우공(禹貢)'은 순임금이 나라를 물려 주어 하(夏)나라라는 황하문명의 천자 혹은 맹주가 되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 우(禹)임금의 황하범람 문제 해결과 지리를 밝힌 텍스트이다. 그래서 하우씨(夏禹氏)라고도 하는 화하족의 조상 중의 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후의 중원의 여러 나라와 족속은 <제하(諸夏)>라고 하는 것이다.

 

   -<서경(書經)>의 '우공(禹貢)'편은 기원전 3세기 역사가 사마천<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다음의 하본기(夏本紀)에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다. <고동이(古東夷)> 혹은 <구이(九夷)>와 관련하여 제하가 동이로 구분하던 5 족속들의 명칭이 등장한다. 그것은 북쪽 '기주' 갈석과 관련하여 조이(혹은 오이), 산동성 지역(청주)에 우이 래이, 회수 지역(서주, 양주)에 회이도이로서 산서성-하남성-산동성 이하에 5개의 고동이 5족속이 파악된다. 공자<구이>를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4개의 <고동이족>의 명칭은 잘 파악되지 않는다. 숙신 지역인 만주와 한반도에 존재한 '알타이어족(Altai language family) 언어'를 쓰는 <고동이족>은 현재의 산동성과 절강성, 강소성 지역 중국의 동해안의 원주민, 고대 족속이기도 했던 것이다.

 

   -중원 역사서인 <섬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열전의 '서문'에는 "우(虞)나라로 부터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동이에서는 숙신(肅愼)의 공물(貢物)이 있었다(東夷有肅愼之貢)"라는 문장이 있어서 숙신<고동이족>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동안 문맥과 역사적 인식 부족으로 이 문장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았기에 교정한다]

 

   -<숙신(肅愼)>이라는 중원 문헌의 용어는 이와 같이 시대를 올바로 지정하여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적용하면 모두가 <제왕운기>전조선(단군조선)후조선(기자조선)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조선 <숙신(肅愼)>이라는 것이다.


모바일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blog.daum.net/sylvanus/13724513<   진송 眞松 Pine of Tr..






   *** 참고자료 : 

1.  

2018.04.07

    blog.naver.com/blisskim47/221247032577   식생활문화연구가 김..







東夷는 九夷| 語原
붉은까마귀|조회 24|추천 0|2018.09.12. 07:36


畎夷於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를 일명 "九夷"라 하는 것입니다.


東夷=九夷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우리를 東夷라 하면 東夷는 모두 우리와 같은 종족이였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나 古代의 東夷동아시아의 모든 부족들이 夷일 뿐이다 라는 것이지요.


특히 古代 또는 上古時代에도 韓半島와 日本列島를 東夷라는 개념속에 넣어 東夷 또는 九夷라고는 부르지 않은 것만은 분명 합니다.


   현재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가 착각하는 역사의 오류가 한반도가 고대 기록 속의 東夷였다 라는 착각 입니다,


   흔히 中原을 지배하던 세력이 中原의 변방에 살던 種族들을 지칭하여 "夷"라고 했을 것이라는 固定觀念을 가지고 역사를 이해하지만 "黃夷"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黃"이란 글자는 中原을 뜻하는 글자이며, 중원의 지배지들까지도 스스로를 夷라고 표현하는 것으로도 夷라는 글자는 단순히 오랑캐라는 뜻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지요.


   옥편에서 "夷"라는 글자를 찿아 보면 "무리, 동료"라는 의미이며 "평범하다"라는 의미로 "夷"라는 글자의 쓰임새를 알 수 있습니다.


즉 夷라는 글자가 처음 만들어 질때의 의미가 시대가 바뀌면서 "오랑캐"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여지면서 이것을 해석하는 우리가 너무 오랑캐라는 의미에 집착한 결과로 보여 집니다.



   또한 東夷이라는 글자의 뜻은 "主人" 즉 "" 또는 "우리" 라는 의미의 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東夷라는 의미는 "우리'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九夷"란 동이를 方位를 나타내는 八卦(팔궤)의 방향과 中央을 합쳐서 九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東이란 동녘. 동쪽. 으로 , 계절로는 , 오색으로는 해당하므로 결국 東夷九族(동이구족)이란 중원의 동쪽에 居(거)하는 오랑캐를 지칭하는 것이다.


즉, 지금의 산동반도의 靑州의 "靑"은 동쪽을 나타내는 표현이지요.


동이 구족이 정확히 위치가 각각 어디에 존재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古代 九州와 九夷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동아시아 모두가 九夷의 영역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위 지도를 보면 한반도는 九州의 범위 밖이지요.


   고대 중원의 사람들의 사람들의 방위에 대한 사상을 이해해야 우리 고대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중워을 지배하던 사람들은 色으로 방위를 구분했습니다.


   黃은 5 하나이며. 方位로는 中央, 5으로 土, 계절로는 여름 해당하며. 중국에서 가장 고귀한 으로 여기는 색이며 중국인들이 황금색에 죽고 못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黃帝軒轅(황제헌원)은 중국의 始祖이며 우리식으로는 단군 정도를 일컷는 사람이며 황제헌원의 "黃"이란 바로 중국의 임금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黃夷란 중원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스스로도 중원의 지배자가 자신을 "夷"라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도 夷라는 글자가 단순히 변방의 오랑캐라는 뜻만으로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三皇五帝와 殷, 周 時代에도 지금의 中原이 당시의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상이지만 三皇五帝, 殷, 周 時代에의 중심은 지금의 오도로스 平原(陝西省,甘肅省 一帶) 였음을 간과 하는 것입니다.


白이란 五色의 하나이며 方位로는 西쪽 입니다.


"고구리는 白夷라 했다."라는 기록으로 고구리는 서쪽 東夷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玄"이란 북쪽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赤"은 남쪽을 말하며 京畿, 즉 서울을 뜻하는 글자이며 지금의 중국인들이 황금색과 더불어 붉은 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漢族 사람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종족 정체성이 남쪽 즉 南方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靑은 동쪽을 가리키는 글자인데 "靑夷"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靑""東"은 같은 의미의 글자이기 때문이다.


畎(견)은 밭고랑이나 골짜기의 시냇물이나 계곡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於는 범의 또 다른 표현이며까마귀를 뜻하기도 하며, 

方은 藥을,

風은 바람

그리고 陽은 볕을 뜻하는 글자 입니다.


   따라서 구이의 이름들은 각기 방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종족의 구분은 아닌 것이 분명 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九夷是玄菟乐浪高骊满饰凫臾索家东屠倭人天鄙。”

구이가 다스리는 곳은 현도, 낙랑, 고리, 만식, 부유, 삭가, 동도, 왜인, 천비이며

동이가 사는 곳은 산서성과 중원과 중원의 동쪽 해안가에 살던 종족들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 구이 하나 하나의 규모는 500여호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500여호라면 상고 시대의 국가에 해당되는 규모 입니다.


강태공의 齊나라 地境은 사방에서 닭우는 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들리는 규모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도 낙랑은 한무제가 설치하여 만든 행정구역의 地名이 아니라 이미 한무제 이전의 오래 전부터 존재해 있었던 地名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高骊(고리) 부유(부여의 옛 표현)으로도 고구리의 존재는 아주 오래전 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骊(리)라는 글자는 지명으로 쓸때에는 骊山이라는 산만을 표현하기 위한 글자인데

"리산"이란 陝西省 西安市 臨潼縣(섬서성 시안시 임동현)에 있는 산입니다.


骊山位于陕西省西安市临潼区环城东路3号


임동현시안(長安)시 동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진시황릉이 발견된 곳이지요.


   결국 古代 初期 고구리의 위치는 지금의 西安이였다는 주장을 뒷받쳐 주는 글자가 高骊(고리)의 "리"라는 글자이며 高句麗의 마을을 뜻하는 麗(리) 즉 마을은 지금의 중국 西安임을 알 수 있는 글자인 것입니다.


   혹자들은 骊와 麗는 다른 글자가 아닌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고구리를 뜻하는 글자는 20여가지에 이르며, 이렇게 많은 이름으로 불리우는 고구리의 역사는 우리 국사가 주장하는 기원전 28년으로는 어림없는 소리 입니다.

흉노의 이름이 時代에 따라 달리 표현되 듯이 고구리의 이름은 기록하는 史書마다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麗라는 글자를 "리"음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고구麗의 "麗"를 "리'음으로 읽어야만 고구리를 지칭하는 수많은 이름들과의 관련성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며

"구리"라는 이름은 三帝 시절의 치우천왕과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



Location of Xi'an Prefecture within Shaanxi (China).png

西安


   尔雅中有“九夷、八狄七戎六蛮”之说。

<이아> "구이는 팔적, 칠융, 육만의 가운데에 있다"

구이의 범위는 위지도가 설정하는 만큼의 큰  규모는 아니엿을 것입니다.


고대 중원의 역사는 실제 보다 풍선 부풀리듯 부풀려져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尔雅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事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제작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즉 팔적과 칠융 육만의 가운데에 있다는 구이는

           지금의 역사학계가 당연시 하는 산동반도와 하북 지역을

           동이의 위치가 아니라 고대 중원임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진 시대 사람인 郭璞(276年-324年)은

아래와 같이 동이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郭璞《尔雅注》云:“九夷在东”,泛指中國东部夷人。

곽박<이아주>전하기를 "구이는 동쪽에 있다

중국 동부에 널리 퍼져 있는 오랑캐들이다 ."


현재의 동이에 관련된 해석은 모두 곽박의 해석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아>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곽박의 주장과는 달리 "九夷"란 동아시아 모든 종족과 부족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廣開土太王 碑文"구이를 쓸어 버렸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구성(九姓), 구이(九夷), 구주(九州)|역사토론방(출처있는글)
김홍필|조회 391|추천 0|2010.05.28. 17:47                                           http://cafe.daum.net/chosunsa/POVo/5331 


   중국인(中國人) 학자(學者) 주학연(朱學淵; 学渊; zhū xué yuān; 주쉬에위엔)이 저술(著述) <진시황(秦始皇)은 몽골어(蒙古語)를 하는 여진족(女眞族)이었다>(2009, 우리역사연구재단)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句節)이 나옵니다.

 


i) 퉁구스’(Tungus)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설(異說)이 분분(紛紛)하다. 어떤 서양(西洋) 학자(學者)동호(東胡)의 또 다른 발음(發音)이라고 주장(主張)하기도 하였지만, 그 같은 추정(推定)은 명백(明白)히 잘못된 것이다. 동호(東胡) 오환(烏桓)-선비(鮮卑) 등의 몽골어족(蒙古語族)에 대한 별칭(別稱)이지, 여진(女眞)-말갈(靺鞨) 등의 동이(東夷)를 지칭(指稱)하는 말이 아니다.

ii) ‘퉁구스’(Tungus)도 알고 보면 의미(意味)가 아주 간단(簡單)해서, 투르크(Turk)()에서 아홉’()을 뜻하는 말 – ‘Tughuz’(투구스)이다.

iii) 투르크(Turk)()에서 아홉’()‘Tughuz’(투구스), ‘’()‘Auun’()이므로, ‘투구스 위구르온 위구르 <당서(唐書)><회골전(回鶻傳)>에 등장(登場)하는 구성’(九姓) 십성’(十姓)의 회홀(回紇)을 가리키는 셈이다.

iv) ‘퉁구스’(Tungus)구성’(九姓) – ‘아홉() 씨족(氏族)’을 뜻한다면, 퉁구스 계통(系統)의 민족(民族)이 동북(東北)아시아에만 정주(定住)하던 토착(土着) 민족(民族)이라는 전통적(傳統的)인 선입견(先入見)은 수정(修正)이 불가피(不可避)해진다. 사실(事實), 구성(九姓)막북(漠北)뿐만 아니라 중앙(中央)아시아에도 있었다.

v) 투르크(Turk)어족(語族)은 여진(女眞) 계통(系統)의 민족(民族)투구스-구르’(Tughuz-ghur)로 불렀지만, 이들 역시(亦是) 혈연적(血緣的)으로 여진(女眞) 계통(系統)과 무관(無關)하지 않았다. 특이(特異)한 점은, 이들이 때로는 심지어 중국(中國)까지 투구스-구르’(Tughuz-ghur)로 불렀다는 사실(事實)이다.

[출처=<진시황(秦始皇)은 몽골어(蒙古語)를 하는 여진족(女眞族)이었다>; pp.116~119]

 

 

   여기서 주학연(朱學淵)동호(東胡)동이(東夷)를 구별(區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퉁구스’(Tungus)여진(女眞)-말갈(靺鞨) 등의 동이(東夷)를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퉁구스’(Tungus)아홉’()을 뜻하는 ‘Tughuz’(투구스)이며, ‘구성’(九姓) 아홉() 씨족(氏族)’을 가리킨다는 주장(主張)입니다.

 

   참고(參考)로 언급(言及)하면,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서북부(西北部)에 살던 터키(Turkey) 계통(系統)의 유목민(遊牧民) 회홀인(回紇人)들은 원래(元來) 불교도(佛敎徒)이었습니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이슬람(Islam)()로 개종(改宗)하였는데, 중국(中國)에서는 회홀인(回紇人)들이 믿는 종교(宗敎)라고 해서 이슬람(Islam)()회교’(回敎)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구이’(九夷)구성’(九姓)과 무슨 관계(關係)가 있을까요?

사전적(辭典的)으로 구이’(九夷)아홉() 오랑캐()’라는 뜻인데, 일반적(一般的)으로 동이족’(東夷族)의 별칭(別稱)이라고 합니다.

 


박용숙(朴容淑) <샤먼 제국>(2010, 소동)이라는 책()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內容)을 알 수 있습니다.

 

i) 고대(古代) 샤머니즘(Shamanism)이라는 종교(宗敎) 지중해(地中海) 일대(一帶)에서 동진(東進)하여 대륙(大陸)을 거쳐 한반도(韓半島)에 이르렀다.

ii) 흑해(黑海; Black Sea)코카서스(Caucasus) 산맥(山脈) 사이의 땅 고조선(古朝鮮)의 환인(桓因)과 구이(九夷)가 활동(活動)한 곳이었다.

iii) 고대(古代) 샤머니즘(Shamanism)은 인종(人種)을 초월(超越)하는 세계관(世界觀)을 가졌으며, 미신(迷信)이 아니라 천문학(天文學)과 같은 과학(科學)이었다.

iv) 샤먼(Shaman)들의 낙원(樂園)이었고, 태양신전(太陽神殿)이 있었던 조선(朝鮮)천하(天下)의 공도(公都)이자 부도(符都)이었으며, 이른바 세차운동(歲差運動)과 같은 천문(天文) 이치(理致)에 따라 부도(符都)는 그 자리를 옮겼다.

v) 황하(黃河) 문명(文明)동이(東夷)의 샤먼(Shaman) 문명(文明)이었으며, 계속적(繼續的)인 동진(東進)의 결과(結果), 대략(大略) 기원후(紀元後) 5세기(五世紀) 무렵에 샤머니즘(Shamanism) 관련(關聯) 유물(遺物)들이 동극(東極) 또는 극동(極東)의 한반도(韓半島) 땅에 묻혔다.

[출처=<샤먼 제국>]

 

 

여기서는 고조선(古朝鮮)의 환인(桓因)과 구이(九夷)가 나옵니다.

박용숙(朴容淑)은 고조선(古朝鮮)의 무대(舞臺)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 Black Sea) 일대(一帶)이었다고 주장(主張)합니다.

 

   환인(桓因)백산(白山) 곧 삼위태백(三危太伯)에 있었는데, 이곳은 샤머니즘(Shamanism) 시대(時代)의 신전(神殿) 천문대(天文臺) 기능(機能)을 하였던 피라미드(Pyramid)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현재(現在) 지구(地球) 곳곳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Pyramid)들은 대개(大槪) 태양신(太陽神)을 숭배(崇拜)하는 집단(集團)이 만든 것들이라고 보입니다.

 

   고대(古代) 천문학(天文學) 자체(自體)가 토착(土着) 원시(原始) 지구인(地球人) 스스로 터득(攄得)한 것이 아니라면, 혹시(或是) 고대(古代)에 외계인(外界人)이 지구인(地球人)에게 전수(傳授)한 우주(宇宙) 과학(科學)이었을까요?

환인(桓因)과 구이(九夷)의 정체(正體) 또는 실체(實體)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스(Greece) 역사가(歷史家)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 천문(天文)을 직접(直接) 관찰(觀察)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존재(存在)이었던 이집트(Egypt)의 아홉() 신관(神官) 곧 사제단(司祭團) 언급(言及)하였는데, 구이(九夷) 또한 그와 같은 사제(司祭) 계급(階級)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용어(用語)로 말하면 샤먼(Shaman)들입니다.

 

   샤먼(Shaman)들은 부도’(符都)바다()라고 하였으며, 부도(符都)는 곧 조선(朝鮮)이었습니다. 이른바 사해’(四海)라는 것은 그 바다’()와 다름이 없었으며, 이는 곧 조선(朝鮮)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초(最初)의 종교(宗敎)는 샤머니즘(Shamanism)과 마찬가지로 천문신(天文神)을 숭상(崇尙)하는 동이교’(東夷敎)이었다고 박용숙(朴容淑)은 주장(主張)합니다.

 

   또한 박용숙(朴容淑) 신단수’(神壇樹)의 의미(意味)를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아홉() ()의 황금(黃金) 가지는 천간(天干)의 수() ‘’() 자리에서 ’()을 허수(虛數)로 친 도상(圖像)이라고 합니다.

허수(虛數) 제로(Zero)는 태양신(太陽神)이며, 보이는 수() ‘아홉’()을 동이(東夷) 또는 구이(九夷)라고 합니다.

종교적(宗敎的)으로 말하면, 구이(九夷)는 천사(天使)이며 천국(天國)의 지배자(支配者)들입니다.

 

   중국(中國) 고전(古典)에서는 고대(古代) 세계(世界)구주(九州)로 나누었습니다.

구주(九州) 구이(九夷)의 땅을 가리킵니다. 결국(結局), 구주(九州)동이(東夷)의 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사해’(四海)는 곧 구주’(九州)이므로, 구주(九州)는 곧 조선(朝鮮)이었습니다.

 

    1883 10 31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호(創刊號) 순보서(旬報序)에는,()는 구정(九鼎)을 만들어 구주(九州)를 형상(形象)하였고, 주관(周官)에는 국토(國土)를 구분(區分)하였으나, 요복(要服)과 황복(荒服) 이외(以外)는 조금도 언급(言及)하지 않은 것은, 산천(山川)이 막히고, 문물(文物) 제도(制度)가 달라 덕()이 베풀어지지 않고,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선왕(先王)들이 먼 곳까지 경략(經略)하는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내용(內容)이 나옵니다.

[출처=http://blog.naver.com/hahnsudang?Redirect=Log&logNo=20060655542]

 

   <네이버 한자사전>에 따르면, 구정(九鼎)은 중국(中國) 우왕(禹王) 때에 구주(九州)에서 금()을 모아 만든 솥이며, ()-() 이래(以來)로 천자(天子)에게 전()하여 오는 보물(寶物)이라고 합니다.

 

   필자(筆者)가 생각하기에, <당서(唐書)><회골전(回鶻傳)>에 등장(登場)하는 구성(九姓) 아홉 씨족(氏族)’의 근본(根本), 환인(桓因)이 흑수(黑水)와 백산(白山) 사이의 땅으로 갈 때에 대동(帶同)구이’(九夷)와 관계(關係)된다고 보입니다.

 

 

   여담(餘談)으로 ‘9’()에 관하여 다른 사례(事例)를 들면,

주역(周易)과 불교(佛敎)의 윤회(輪廻) 사상(思想) 등의 원리(原理)가 담겨있는 일본인(日本人) ‘이치모쿠산진(一目山人; いちもくさんじん; 일목산인)일목균형표’(一目均衡表)라는 기술적(技術的) 분석(分析) 기법(技法)이 있습니다.

혹시(或是), 금융업(金融業) 계통(系統)에 종사(從事)하시는 분이라면 그 명칭(名稱)을 들어보신 경험(經驗)이 있으실 것입니다.

 

   본명(本名) ‘호소다 고이치’(細田悟一; ほそだ ごいち, 1898~1982) 곧 필명(筆名)이치모쿠산진’(一目山人) <시간론(時間論)>에서 주가(株價)는 시간(時間)이 결정(決定)한다고 말하였으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구성(構成)하는 기본(基本) 수치(數値) 가운데 하나는 ‘9’()라고 주장(主張)하였습니다.

<시간론(時間論)>에서 기본(基本) 수치(數値)9, 17, 26, 33, 42, 65, 76, 129, 172, 226 등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구성(九姓)-구이(九夷)-구주(九州)와 같은 낱말들에는 ‘9’()라는 수()가 들어갑니다. 그 뜻이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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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려가 구이(九夷) 의 간악한 오랑캐를 다 정벌함| 회원의 새 력사 목소리 

호근|조회 246|추천 0|2013.11.21. 14:40

   강상원 박사동이(東夷) 조선인라고 했는데 과연 동이(東夷)는 조선인이 맞을까요?

또한 구이()라는 용어도 조선인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아래 사료를 보면, 동사강목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서도  조선은  구이()아홉개의 간악한 오랑캐라고 칭하며, 구이()를 정벌했다는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구이()라는 말은 조선의 동쪽에 사는 9종류의 오랑캐이고 동이(東夷)는  바로 그 구이(夷)를 지칭합니다.

저는 여러번 동이(東夷)가 동쪽에 사는 왜족이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구이()또한 오랑캐임이  분명합니다. 왜 학자들은 이 내용을 묵과하고 있을까요?

 



 

동사강목 제3상


갑신년 신라 지증왕 5년, 고구려 문자왕 13년, 백제 무령왕 4년(북위 선무제 정시(正始) 원년, 504)


하4월 고구려가 위(魏)에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조공을 바치니, 위주(魏主)가 동당(東堂)에서 접견하였다. 실불이 나아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천자에게 정성을 바쳐 여러 때를 두고 변함이 없었으며, 금백[地産土毛]을 조공함에 잘못됨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자개[珂]는 [섭라(涉羅) 지금은 미상 ]에서 생산되었는데, 이제 부여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 되었고, 섭라백제에게 병합되었으니, 황금과 자개를 바치지 못하는 것을 실로 물길과 백제 두 도둑 때문입니다.”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고구려가 대대로 천자의 권장을 받아서 해외를 견제하고, 구이(九夷) 의 간악한 오랑캐를 다 정벌하였는데, 병에 술이 없는 것은 술통의 부끄러움[甁罄罍恥]이라는 격이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나의 이런 뜻을 그대의 왕(王)에게 알려서 다시 옛 강토를 회복하도록 하고, 항상 바치는 조공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신라가 처음으로 상복(喪服)의 제도를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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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구절을 보면  저수량(褚遂良)이 말하기를 개소문(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구이(九夷)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매우 부도덕하고 천륜에 반하는 사건인데 그런 무모한 짓은 오랑캐인 구이(九夷)에서조차도 용납되지않는 대역죄라고 해석됩니다



동사강목 제3하

갑진년 신라 선덕여주 13년, 고구려 왕장 3년, 백제 왕 의자 4년(당 태종 정관 18, 644)

 

춘정월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당(唐)에 조빙하였다.

 

                                                 (중략)

 

추9월고구려 개소문이 당에 백금(白金 은(銀))을 바쳤으나 조명으로 물리치고 그 사신을 가두었다.

 

저수량(褚遂良)이 말하기를,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구이(九夷)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이제 장차 토벌하려는데 그 금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고정(郜鼎 고국(郜國)의 대정(大鼎))의 유(類)입니다.”
하니, 황제가 받지 않았다. 사신이 또 말하기를,
“막리지(莫離支)가 관인 50명을 보내어 숙위(宿衛)하려 합니다.”
하니,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 희가 다 고무(高武 영류왕(榮留王)를 섬겨 관작(官爵)을 가졌었는데, 개소문이 시역(弑逆)하였는데도 능히 복수할 생각은 않고 이제 다시 유세(遊說)하여 대국(大國)을 기만하니 죄가 누구보다도 크다. 모두 대리(大理 형옥(刑獄)을 다스리는 벼슬 이름)에 넘기라.”
하였다.

○ 신라 장수 김유신(金庾信)백제를 공격하여 가혜(加兮) 등 7성(城)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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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문장을 보게되면, 선조때 왜적들이 조선의 왕자들을 돌려보내지않아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성토하고 있는데, 그 왜적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있습니다.


선조 26년 계사(1593,만력 21)


4월24일 (무신)

성영이 보고한 선릉 등을 봉심한 결과. 경략에게 적의 토벌을 청하는 자문을 올리다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치계하기를,
선릉정릉을 봉심하니 선릉은 광중(壙中)이 이미 비어 있고 정릉은 염습(斂龒)한 옷은 없어지고 옥체(玉體)는 광중에 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궐정(闕庭)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였다. 이어 대신들에게 하교하기를,
“경략은 매번 왜적이 왕자를 돌려보내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적을 치지 않고 놓아 주었다. 당당한 황제의 위엄으로 도리어 왜적에게 강화를 구하여 끝내는 왜적들로 하여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우리 나라 군신들은 산들 무엇하겠으며 황제의 위엄을 손상시킴도 심하지 않은가. 이제 자문을 하나 작성하여 급히 관원을 보내어 경략에게 치사(致辭)하기를 ‘전일 여러번 존교(尊敎)를 받았었는데 「기필코 왕자를 돌려보내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 통판(王通判)이 왔을 때에도 반복해서 글로 보여주기를 「왕자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진병으로 적들을 초멸시킬 것이다.」 하였다. 우리 나라의 군신들은 오로지 이 약속만을 믿고 있었는데 지금 왜적은 왕자는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고 돌아갔으니 우리가 전일 바라던 것은 틀려지고 말았다. 원하건대 전일의 말대로 급히 진병하여 적을 초멸함으로써 위는 황조(皇朝)의 위엄을 펴고 아래로는 우리 나라의 원수를 갚아달라. 그리고 이번의 일거(一擧)는 사방에 있는 이민족들이 바라보는 바이다. 만일 악한 짓을 한 자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가 다시는 징계를 받지 않게 된다면 권선 징악(勸善懲惡)의 도리에 위배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구이(九夷)팔만(八蠻)들이 장차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과거 영락(永樂) 연간에
(安南)의 적신(賊臣)이었던 여계리(黎季犛) 등은 자기들끼리 난리를 일으켰는데도 성조 황제(成祖皇帝)가 장수들에게 명하여 세 차례나 정벌하게 해서 군현(郡縣)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는데 하물며 무도한 왜적들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하라. 대개 이러한 뜻으로 글을 잘 지어 자문을 보내라. 그리고 우리의 말이 옳으면 잘못은 저쪽에 있는 것이니 저들은 반드시 부끄러워하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속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대신이 회계하기를,
의 분부를 받들고 신들은 매우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슴니다. 가령 왜적이 중국 장수의 약속대로 왕자와 배신들을 돌려보낸다 하더라도 그들이 황제의 위엄을 손상키기고 우리 나라에 애통을 끼친 것이 심합니다. 하물며 왕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포로로 잡혀 있는 자녀들을 풀어 보내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그들이 거만 패역하여 황제의 조정을 모욕하고도 조금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니, 죄를 성토함에 어찌 할 말이 없겠습니까. 이러한 내용으로 자문을 작성하여 경략과 제독에게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러나 사례하는 자문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먼저 사례하는 자문을 올리고 난 뒤에 이 자문을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례하는 자문과 토벌을 청하는 자문을 동시에 작성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21 집 693 면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종친(宗親)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고구려가 구이(九夷) 의 간악한 오랑캐를 다 정벌함

2013.11.21

cafe.daum.net/coreahistech/L00c/318  아시아=조선





[스크랩] 九夷,九韓,九皇,九貊,九黎 등에 대해서<23>| [좋은나라 바로찾기]
스말|조회 10|추천 0|2006.10.28. 08:40



   동이(東夷) 구이(九夷)라고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①견이( 夷) ②우이(于夷) ③방이(方夷) ④황이(黃夷) ⑤백이(白夷) ⑥적이(赤夷) ⑦현이(玄夷) ⑧풍이(風夷) ⑨양이(陽夷)이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①현도(玄 ) ②낙랑(樂浪) ③고려(高麗) ④만식(滿飾) ⑤부유(鳧臾) ⑥소가(素家) ⑦동도(東屠) ⑧왜인(倭人) ⑨천비(天鄙) 등이다.

 

  그리고 아홉의 한국이 三國遺事 馬韓편에 실려있다.

 

①일본(日本) ②중화(中華) ③오월(吳越) ④둔라(屯羅) ⑤응유(鷹遊) ⑥말갈(靺鞨) ⑦단국(丹國) ⑧여진(女眞) ⑨예맥(濊貊)으로 되어있다.

 

이 장에서는 구이(九夷), 구한(九韓), 구황(九皇), 구맥(九貊), 구려(九黎) 등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의 성인(聖人)들은 우주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9數를 사용했다

 

. 예를 들어 우임금(禹壬儉)은 치수(홍수를 다스리는 일)에 성공한 후에 전국을 구주(九州)로 나누고 또한 구도(九道), 구택(九澤) 그리고 구산(九山)에 길을 뚫는 등의 일을 했다.

 

 당시 구주기주(冀州) 연주( 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형주(荊州) 양주(揚州) 예주(豫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라고 기록되어 있다. (虞夏書)

 

   천부경은 가로아홉글자 × 세로아홉글자로 기록되었으며 황룡사 목조구층탑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절탑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우주의 數가 九 이며 우주는 9층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공간세계에도 수(數)가 있고 자연계에도 수(數)가 있다.

 

 공(空)의 세계는 9로 규정했고, 자연계의 수는 12로 규정했으며, 인간의 수는 10으로 규정했다.

 

  공의 세계의 9라는 숫자는 근본을 따져보면 보이지 않는 숫자라 형이상학적 숫자이고 사람(人)의 수인 10의 수는 형이중학(形而中學)이기 때문에 기(氣)의 수(數)라고 할 수 있다.

 

 땅(地)의 수는 따지고 보면 물질을 분별하는 색(色)의 수 즉, 십이지(十二支)를 말한다.

 

그래서 지(支)의 수(數)는 일 십 백 천 만 억 조 경 해 자 양 겁까지 12단계로 되어있는데, 인간이 대체로 사용하는 수는 조(兆)까지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가 아직까지는 조(兆)의 7단계까지 밖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겁(劫)이라는 12단계까지 쓰려면 비겁(比劫)의 도(道)의 세계에 오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한다.

앞으로는 인간의 지혜가 어마어마하게 발전할지도 모를 일이다.

 

  황룡사구층탑의 각층에 아홉한국(九韓)을 색인한 것(삼국유사)은 신라의 주변국들이 모두 아홉한국(九韓)이 있었으며 신라는 아홉한국(九韓)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고자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홉한국(九韓)의 1은 일본(日本), 2는 중화(中華), 3은 오월(吳越), 4는 둔라(屯羅), 5는 응유(鷹遊), 6은 말갈(靺鞨), 7은 단국(丹國), 8은 여진(如眞), 9는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아홉한국이란 것은 특정국가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어떤 그룹을 대표하여 이르는 명칭인 듯 하다. 따라서 아홉한국은 중원의 대륙전체를 이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아홉한국이 생기게 된 것은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편에 의하면 "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의 무리가 서로 다투던 세상이 있었는데 그 시대는 한웅천왕(桓雄天王)께서 군임하시기전 환족(桓族)은 고산족(高山族)으로 유목과 농경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이들 환족은 모두 구황(九皇)으로 한세대 이며 묘족의 후예이다....중략 "

 

여기서 구황(九皇)이란 반고환인시대 이후 天皇氏의 형제가 아홉으로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천황시대(天皇時代)를 이어왔음을 말한다. (역대신선통감)

 

"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이라고도 불렀다. ...중략 "

 

약 4300여년전 단군왕검께서 웅백다를 봉하였다고 되어있다. 즉, 삼한과 마한(馬韓)은 이때 생겨난 것이다.

 

소도경전(蘇塗經典) 본훈(本訓)〔蘇塗經典本訓第五, 三一神誥 第五章 人物篇〕

 

故地有三韓爲辰弁馬三京之韓, 韓卽皇也, 皇卽大也, 大卽一也.

옛날 삼한이 있었는데,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즉 삼경(三京)의 한이다.

한(韓)은 황(皇)인데, 황은 대(大)며, 대는 일(一)이다.

 

설명 : 하나(一)란 일기(一氣)를 말하며, 일기(一氣)는 공(空)인 동시에 하늘이다. 하늘은 곧 허(虛)한 것이며, 일신(一神)인 동시에 만유(萬有)의 본체이다.

 

   한(韓)은 황(皇)이라고 한 것은 앞서 말한 구황(九皇)을 말하며 개벽이후 천황시대(天皇時代)를 말한다. 즉, 한(韓)은 환(桓)에서 유래된 말이며 한(汗)도 같은 맥으로 이어졌다.

즉, 아홉한국은 구황(九皇)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一)은 天을 낳고, 天은 간(干)으로 발전하였고, 간(干)은 환(桓)으로 이어졌다.

환(桓)은 한(韓)으로 되었고, 한(韓)은 한(漢)과 한(汗)으로 변천하고 발전했다. 고산족에서 유목생활로 발전해가면서 한(韓)자가 생기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나라때 韓國이 있었다. 사기사전(史記辭典)에 의하면 본시 무왕의 아들에게 봉해진 나라 라고 했고 나라를 세운이가 大夫한만(韓万) 이었다.

 

   주무왕(周武王)의 아들 대부한만(大夫韓万)과 성왕(成王)의 동생 진당숙우(晉唐叔虞)가 제후왕 때 합하여 진(晉)나라를 세운 후 주(周)나라 말기 진(晋)나라에서 위(魏)나라와 조(趙)나라가 독립하여 세운 나라가 한(韓)나라이다. 이어서 많은 나라들이 갈라지면서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항우가 한국(韓國)을 세웠다. 다음이 한왕신(韓王信) 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韓國)이며 진한(秦韓)계통이다.

 

   진한(辰韓은 秦韓) 마한은 함께 있었으며 또 가까이 경계선을 두고 서로 사이좋게 살았다고 진서(晉書)에 기록하고 있으며, 진국(晉國)과 魏, 趙나라는 원래 진한(秦韓) 또는 진한(辰韓)이었다.

 

   그리고 주(周)나라가 망할 무렵 진(秦)·한(韓)·조(趙)·위(魏)·초(楚)·연(燕)·제(齊)의 칠웅(七雄)이 난립하다가, 진(秦)이 6국(六國)을 통일한 과정이 신라가 6촌을 병합하여 나라를 세운 것과 똑같기 때문에

 

혹, 김부식이 이 부분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여하간 신라도 秦나라의 유민이라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상 아홉한국(九韓) 이외에 구려(九黎)가 있다.

 

   구려는 치우의 무리로 려족(黎族)의 나라가 아홉이란 뜻이다.

 혹자는 구려(九黎)를 구한(九韓)과 똑같은 것으로 해설하였지만 잘못된 것이다.

 구려(九黎)는 부여(夫餘)로 발전된다.

 

그외 삼국유사에서는 구맥(九貊)을 언급하고 있다.

 

<삼국사(三國史) 삼국사기가 아님>를 인용하여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라고 하였다. 구맥(九貊)은 잘 알려진바 없지만 맥이(貊夷)의 종족이 아홉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알게한다.

 

그러면 아홉한국이 특정국가를 지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은 고대에는 아홉개의 나라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수백개의 국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된다.

 

   이십오사(二十五史)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는 양서를 인용하여 진한은 처음 6국이 있었으나, 점차 12국으로 갈라졌다. 신라가 그 중 한 나라다.

 

 마한은 54개국이 있는데, 백제는 그 중 한 나라다.

 

(梁書, 辰韓始有六國, 梢分爲十二, 新羅其一也, 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

  


   해동역사(海東繹史) 世紀四, 三韓편에는 "...한은 3종이 있다.

 

 하나는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서쪽으로는 54개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낙랑이 있고, 남쪽으로는 왜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었는데 12국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예맥이 접해 있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었는데, 역시 12국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역시 왜와 접해 있었는데, 두루 78국이 있었다.

 

그 중 한 나라가 백제다. 큰 나라는 1만 여호를 갖고 있었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이들은 모두 산이나 바다 지간의 땅에 살았다. 방경은 모두 4천여 리이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在西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南與倭接, 辰韓在東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有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 合方四千餘里...)

 


   이승휴제왕운기(帝王韻紀) 하권(下卷)에는 " 진한·마한·변한의 세발솥과 같은 형세가 기울게되자,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점차 일어났다. 신라가 일어날 당시에는 72개국이 난립했다."

 (...辰馬弁人終鼎峙, 羅與麗濟相次興, 自分爲郡至羅起, 計七十二算零...)

 


   양서(梁書) 권54, 열전(列傳) 제48, 동이(東夷)편에는 " 백제의 선조는 동이로, 삼한국이 있었다.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 12개국이 있었다. 마한에는 54개국이 있었다. 큰 나라는 1만여 호였으며,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총 십여 만 호였으며, 백제는 그중 하나였는데, 그후 점차 강대해졌다.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疆大...)

 


   환단고기 단군세기 왕검(王儉) 단제기 93년(B.C 2241년), "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5가 64족을 포함하였다..." (...於是 區劃天下之地 分統三韓 三韓皆有五加六十四族...)

 


   이상 예를 든 것과 같이 고대에는 수 많은 국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홉개의 나라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구이(九夷)는 해동(海東)이나, 동방(東方)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대동소이하다.

 

   해동(海東), 동방(東方), 동이(東夷)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천을 거듭했다. 마치 요동. 요서의 위치가 변천하듯이 부른는 사람의 의식이나 시대적 이해관계가 바뀌면서 해동(海東), 동방(東方), 동이(東夷)의 위치도 바뀌어 왔다.

 

동방(東方)은 해가 뜨는 땅으로 인류는 모두가 동방(東方)을 경외 했으며 ' 빛은 동방으로부터.. ' 라는 말도 생겨나게 되었던 것처럼 동방(東方)은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 이라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해동(海東)이나 동방(東方), 동이(東夷)는 서쪽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두렵고 부러운 곳이었다. 

 


   고대의 해동(海東)은 서역의 사막이 있는 곳 즉, 천해(天海)의  동쪽이며 동이(東夷)는 최초로 천산이 있는 동이지(東夷地)에서 신시(神市)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후대로 오면서 해동은 차츰 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는 역사와 문화의 발전이 차츰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되며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본(日本)이 해가 뜨는 나라가 되어 동방(東方)이며 해동(海東)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 천해(天海)는 흑해, 카스피해, 아랄해, 발하시호를 말함.

 

따라서 구이(九夷)는 동이(東夷)의 구이(九夷)이며 동이(東夷)와 구이(九夷)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구이(九夷)후한서(後漢書)에서 이르기를 견이( 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운이(芸夷) 백이(白夷) (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 적이(赤夷)라 하였다. 이는 동이(東夷)의 각각 종족의 특징에 따라 분류한 것이며 이에 대한 설명은 아직 연구하지 못하여서 생략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구이(九夷)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 ...중략...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란, 1은 현토(玄토), 2는 낙랑(樂浪), 3은 고려(高麗), 4는 만식(萬飾), 5는 부유(鳧臾), 6은 소가(嘯歌), 7은 동도(同屠), 8은 왜인(倭人), 9는 천비(天鄙)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자면 현도, 낙랑, 부유는 부여를 말하고, 만식(萬飾)은 위만(魏滿)의 후예이며 고려(高麗)는 고구려를 말하는 것이고 왜인(倭人)은 일본이 아닌 魏나라가 망한 후 남쪽으로 내려가 호남성, 강소성, 복건성, 대만, 구주 등에 흩어져서 활동하던 무리를 말하는 것 같다.

 

    그외 소가(嘯歌), 동도(同屠), 천비(天鄙)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중화, 말갈, 숙신, 읍누, 물길, 여진, 예맥 등이 그기에 해당하는 것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紀)>에는, "구한(九韓)이란, 1은 일본(日本), 2는 중화(中華), 3은 오월(吳越), 4는 둔라(屯羅 또는 탁羅), 5는 응유(鷹遊), 6은 말갈(靺鞨), 7은 단국(丹國), 8은 여진(如眞), 9는 예맥(穢貊)이다"라고 했는데... (삼국유사)

 

   일본(日本)은 황룡사구층탑이 세워질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탑의 1층에는 왜(倭)라고 적혀있었다고 해야 순리에 맞을 것이다. 이는 일연선사의 실수이다.

 

   일본이 아닌 왜(倭)는 당시 신라와 백제에 의해서 완전히 망한 魏나라의 잔존세력들이 대륙의 남부와 남해바다를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 이다.

 이들은 신라에 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바다에서는 해적으로 날뛰고 있었다. 일개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고 여러 곳으로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고 생각이되며 일부는 뱃길로 유구열도를 장악하여 지금의 일본(日本)으로 진출하게 된다.

 

   두 번째가 중화인데 중화는 어느 하나를 꼭 집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화라고 하였다.

 중화(中華)는 중원(또는 중앙)에서 티격태격 다투는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세력들이 마치 깨어진 유리알 처럼 반짝 반짝 빛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다.

 남조(송, 제, 량, 진, 후량)와, 북조(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를 포함하여 수, 당, 고구려, 백제 등을 말한다.

 

세 번째 오월吳나라와 越나라를 이르듯이 주로 강소성인 상해지방과 남부지방 월남 국경지대에 흩어져 있던 소국들 이다.

 

네 번째 둔라(屯羅 원본에 따라 탁라인 것도 있음)는 둔유현(屯有縣)이 있었던 곳으로 옛조선의 평양 남쪽이라 되어있어 고조선시대의 평양은 지금 서안 부근이므로 섬서성 안강(安康) 근처라고 추정됨.

 

다섯 번째 응유응유산(應遊山)이 있는 곳 강소성 동해현 동북 103리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적고 있어 그렇다면 응유국은 강소성 최북쪽과 산동성 경계지역인 해주지방과 동해지방에 있었던 소국이라고 추정.


여섯 번째 말갈은 큰나라이다.

 

지명사전 1,139쪽에 있는 그대로 풀어보면 " 지금 송화강의 동쪽바다 경계에 있다. 혼동강(混同江) 이남 가까이 장백산에서 길림성 산맥으로 뻗은 길림성 땅이다. 옛날 숙신이다.

漢나라, 魏나라가 있을 때 읍루(揖婁)의 기름진 옛 땅이다. 북위는 물길(勿吉)이다. '북사'(北史)에 의하면 일명 말갈이며 일곱부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후 서로가 뒤엉켜 합쳐져서 당나라 초에 흑수말갈과 속말 이렇게 이부(二部)로 나누어졌다. 속말과 말갈은 스스로 천하를 통하고 만세를 부를 정도였다. 그후 이름을 고쳐 발해(渤海)라 하였다." 魏나라가 읍루와 물길이었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말갈은 제곡고신氏의 장남인 후직에서 뿌리가 내려져 직신(稷愼)이 되며, 직신은 백신(帛愼) 또는 식신(息愼)이라고도 했고 식신의 후손이 숙신국(肅愼國)을 세우게 된다.

숙신국은 일명 주신(珠申) 이라고도 불렀으며 주신은 만주라는 주자와 음이 같고, 신(愼)은 신(申)자와 같으므로, 만주에 숙신이 거대한 강역을 갖고 있었다고 하여 별칭으로 후일에 주신(珠申)이라는 말이 생겼다. 주신은 별칭일 뿐 나라이름은 아니다.

 

   숙신의 뒤를 이은 것이 읍누(揖婁)이며 또한 숙신의 뿌리는 부여(扶餘)로도 갈라지게 되었다. 읍누 다음이 물길(勿吉)이며, 흑수말갈(黑水靺鞨)로 이어지고 말갈이 되며, 여진(女眞)으로 뿌리가 갈라지게된다.

흑수말갈은 해(奚)를 격파한 후,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발해(渤海)를 건국하게 되었다.

숙신의 후예가 부여로 갈라지고, 고구려도 부여에서 갈라져나왔으므로, 따지고보면 고구려도 숙신의 후예이다.

 

KBS에서 황룡사를 방송할 때 말갈이 강원도에 있는 것으로 방송 했다. 우리나라 강원도에 말갈국이 있었다고 고증해준 대학 교수가 누구인지 한심하고 멍텅구리 엉터리 사학자이다.


일곱 번째 단국(丹國)은 글란(契丹)이다. 


여덟 번째 여진(如眞)


아홉번째 예맥(穢貊)은 말갈과는 대치된 지역으로 주로 서역쪽(西北) 이다. 


이들은 유목민족 대국가연합이다. 그 속에는 수 많은 국가들이 산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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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夷,九韓,九皇,九貊,九黎 등에 대해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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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이(畎夷)는 서융(西戎)이며, 구이(九夷)!| 문무의 조선사 해설
|조회 276|추천 1|2013.01.19. 22:39

 

         견이(畎夷)는 서융(西戎)이며, 구이(九夷)!

조선(朝鮮)이 사이(四夷)를 다스렸다. 고 하는 말은 대륙조선(大陸朝鮮)이 아닌, 일반(一般) 사학계(史學界)에서는 인정(認定)치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成宗)” 조에 있는 말이며, 사해(四海)란 사방(四方)이며, 동서남북(東西南北)지방을 말하며, 그 중심(中心) 신주(神州)인 황도(皇都)” 이다.

  사이(四夷)란 곧 신주(神州)를 중심(中心)으로, 신주(神州)를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東西南北)지방에 살고 있는 종족(種族)을 말하며, 그 영역(領域)()쪽으로 열도(列島)에 이르고, (西)쪽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구라파(歐羅巴)의 일부(一部)까지를, ()쪽은 러시아를 지나 북쪽의 바다를 아우르며, ()쪽 역시 바다 가운데 있는 섬까지를 아우르는 거대(巨大)한 땅이다.

   여기서 구이(九夷)란 말이 역사서(歷史書)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학자(史學者), 일반인(一般人)도 잘못 알고 있는 사실(事實)이 있다. 곧 구이(九夷)동방(東方)을 지칭(指稱)하며, 동방(東方)에 살고 있는 이족(夷族)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동방(東方)이란 말은 하늘을 떠 바치고 있는 중앙(中央)의 천주(天柱)가 있다.”는 곳이 곤륜산(崑崙山)이다. 이 천주(天柱)가 곤륜산(崑崙山)을 중심으로 그 동()쪽 지방을 공안국(孔安國)의 말을 빌리면 소위 동표(東表)지칭(之稱)”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후대(後代)소위(所謂) “요서(遼西)지방(地方)”이다라 하였는데, 천하(天下)의 중앙(中央), 곧 천주(天柱)가 있다는 곤륜산(崑崙山)이 현 하북성(河北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방(東方)구이(九夷) 조선(朝鮮)”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며, 조선(朝鮮)은 동방(東方) 땅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 구이(九夷)는 세력(勢力)이 확장될 때에는 자신들의 영역(領域)을 벗어나 동서남북(東西南北) 각 방향으로 진출(進出), 확장(擴張)되었으며, 오늘날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외몽골, 남방(南方)지역 등의 각지(各地)에서 발견되는 유적(遺跡)유물(遺物)은 바로 그 증거물(證據物)인 것이다.

   사이(四夷)구이(九夷)를 정확(正確)하게 구분(區分)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이(四夷)가 구이(九夷)도 될 수 있으며, 구이(九夷)가 사이(四夷)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학자(學者)들이 시대적(時代的)으로 그들을 구분(區分)했을 뿐이다. 중심(中心)이 되는 신주(神州)에서 그 서(西)쪽은 서융(西戎)으로, ()쪽은 북적(北狄)으로, ()쪽은 동이(東夷), ()쪽은 만()으로, 천자(天子)의 교화(敎化)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미개(未開)한 종족(種族)들이라 해서 낮춰 부르는 비하(卑下)성 호칭(呼稱)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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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東方) 구이(九夷),

반도사학(半島史學)구이(九夷)”가 대륙(大陸) 땅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認定)치 않고 있으며,

일부(一部) 재야사학(在野史學)은 현 대륙(大陸)의 산동성(山東省)을 포함(包含)한 동해안(東海岸) 연안(沿岸) 땅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한다.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외치는 본인(本人), 구이(九夷)란 대륙(大陸)에 살고 있었던 당시(當時)의 대부분(大部分) 종족(種族)을 말하며, 그 영역(領域)은 중앙아시아지방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과 러시아의 우랄 산맥(山脈)과 흑해(黑海)의 동()쪽 지방(地方)을 아우른다.고 주장(主張)한다.

   이러한 구이(九夷)의 영역(領域)에 대한 주장(主張), 문헌적(文獻的) 고증(考證)으로 그 사실(事實)을 입증(立證)하는 것이다. 문헌적(文獻的) 고증(考證)과 함께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方向), 특이지형(特異地形), 기후(氣候) 및 토산물(土産物)과 종족(種族)의 관계(關係)등을 망라(網羅)한 것이다. 단편적(斷片的)인 국수주의(國粹主義)나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반영(反映)치 않은, 순수(純粹)한 역사학(歷史學)의 입장(立場)에서 보는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主張)한 것들이 모두 위에서 말한 순수(純粹)한 역사학(歷史學)의 입장(立場)에서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반도(半島) 곧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구성원(構成員)인 국민(國民)들은 일제(日帝) 치하(治下)로부터 지금까지 한 세기(世紀 : 100)”에 걸친 반도사학(半島史學)”에 물들여져, 길들여진 양떼와 같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이나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왜 비판(批判)하는지 조차 분별(分別)하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大部分)이며, 왜 비판(批判)하는가? 반대로 되묻기를 주저(躊躇)하지 않는다. 이러한 처지(處地)이고 보니, 재야사학(在野史學)으로 조선(朝鮮)의 대륙(大陸) 영토(領土)”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수주의자(國粹主義者)나 과대망상(誇大妄想),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무리 등등으로 매도(罵倒)해 버리는 것이 일상(日常)사다.

더하여 민족(民族)()”자존심(自尊心)”을 몽땅 팔아먹었던 자()들과 매국노(賣國奴)들을 추앙(推仰)하거나, 그들을 대한민국(大韓民國)명가(名家)”로 인식(認識)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現實)이다. 도대체 이 나라의 정체성(正體性)”은 무엇인가? 그저 권력(權力)만 움켜잡으려 하는, 그저 곡간에 돈만 쌓아 놓으려 하는, 이런 자()들을 영웅(英雄)시하고, 이러한 집안을 명가(名家)”로 만들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敎育)을 시킬 것인가? 그러다보니 도덕(道德)교육도, 역사(歷史)교육도 한 발, 한 발 뒤쳐져 이제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것이 되어버리는 현실(現實)이 되어 버렸다. 허기야 <형님, 누님, 부모님>들이 그런 교육(敎育)을 받고 자랐으니, 어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이 있단 말인가? 오늘의 주제(主題)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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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九夷)란 수없이 설명(說明)한 것이다. 대표적(代表的)인 것이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夷 有 九 種 曰 畎 夷 于 夷 方 夷 黃 夷 白 夷 赤 夷 玄 夷 風 夷 陽 夷 등의 아홉 종류 이족(夷族)”을 칭하는 것인데,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 동방(東方)의 땅이라 하여 동이(東夷)라 호칭(呼稱)한 것이다.

동방(東方)”이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참 답답한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自身)이 서있는 땅에서, ()쪽이면 모두 동방(東方)이 되니 말이다!!!!!!!!!

이럴 때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方法)구이(九夷)”가 살고 있었던 곳, 곧 땅을 찾으면 될 것이며, 당시(當時)의 중심(中心) 곧 기준(基準)이 되는 곳을 문헌(文獻)”에서 찾으면 될 일이다.

천지(天地)를 설명할 때, 지세(地勢)를 설명할 때, “곤륜산(崑崙山)을 기준(基準)하여 모든 지세(地勢)를 말한다.

산해(山海經)의 곽박(郭璞) 주석(註釋)에서는, 대택(大澤)의 동()쪽에 동호東胡=동이(東夷)가 있었다고 하였다. 대택(大澤)이란 지중해(地中海)흑해(黑海)카스피해(), 또는 포창해(蒲昌海) 등의 과거(過去) 내륙(內陸)의 큰 호수(湖水)를 지칭한다. 바이칼 호수(湖水)는 해당(該當)사항(事項)이 없다. 그곳의 북()쪽과 동()쪽 땅은 동토(凍土)의 땅이기 때문이다.

견이(畎夷)는 구이(九夷)의 한 종류(種類)로써, “서융(西戎)과 서강(西羌)에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점을 보면, 이들은 서융(西戎)으로, 구이(九夷)의 한 종류(種類)이다.

우이(嵎夷)는 본래(本來) (郁夷)’요서(遼西)지방에 있었다. 요서(遼西)지방이란 바로 서융(西戎)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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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重要)한 포인트는 당시(當時) 사람들의 인식(認識)이며, 이는 곧 당시(當時) 사람들의 사상(思想)과 철학(哲學)이다. 문헌적(文獻的)으로 볼 때, 곤륜산(崑崙山)에 큰 기둥()이 있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 하였으며, 이곳 곤륜산(崑崙山)의 동북(東北) 모퉁이에서 나오는 물이 포창해(蒲昌海)에 들어갔다가 다시 지하(地下)로 숨어들어 흐르다가, 청해(靑海省)적석積石山 : ()임금이 홍수(洪水)를 조절(調節)하기 위해, 치산치수(治山治水)가 이루어진 곳이다.에서 용출(湧出)하여, 내지(內地)로 흐른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며, 당시(當時) 사람들의 인식(認識)이었다.

따라서 곤륜산(崑崙山)”천하(天下)의 중심(中心)”이라 하였으므로, 이 서(西)쪽은 서방(西方)이요, 그 동()쪽은 동방(東方)이 된 것이다. 이는 지형지리(地形地理) 및 방향(方向) 및 당시(當時) 사람들의 인식(認識)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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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서강(西羌),  

昔 夏 后 氏 太 康 失 國 四 夷 背 叛 : 옛날 하 후(夏后)씨 태강이 나라를 잃자, 사이(四夷)가 모두 배반하였다. 及 后 相 即 位 乃 征 畎 夷 七 年 然 後 來 賓. : 후상后相 : 태강(太康)의 손자로 중강(仲康)의 아들이다.이 즉위하여, 이에 견이畎夷 :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된 것을 보면,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 첫 번째로 기록된 이족(夷族)이다.를 쳤다. 7년이 지난 뒤에 초대되어왔다. 至 于 后 泄 始 加 爵 命 由 是 服 從 。 〔 : 후설后泄 : ‘로도 읽음 : 제망(帝芒)의 아들이다.때에 이르러, 처음 벼슬이 더하여지자, 이로 말미암아 복종(服從)하였다. 后 桀 之 亂 畎 夷 入 居 邠 岐 之 閒 成 湯 既 興 伐 而 攘 之 : 후걸(后桀)의 난리 때, 견이(畎夷)가 빈()과 기()사이로 들어왔다. ()은 빈주(豳州)이다. ()는 곧 기주(岐州)이다.성탕(成湯)이 일어나 이윽고, 쳐서 물리쳤다. 及 殷 室 中 衰 諸 夷 皆 叛 至 于 武 丁 征 西 戎 鬼 方 三 年 乃 克 。 〔 : ()의 왕실이 쇠약(衰弱)해지자, 여러 이()가 모두 배반하였다. 무정武丁 : ()의 왕이다.때에 이르러, 서융(西戎), 귀방(鬼方)을 쳐서 3년에 이겼다. 귀방(鬼方)은 원방(遠方)이다.

위의 원전(原典)후한서(後漢書) 서강(西羌)본문(本文)중의 한 구절(句節)이다. 동방(東方)의 구이(九夷) 황제(黃帝) 헌 원(軒轅)’가 있기 전()부터 이미, 대륙(大陸)의 대부분(大部分) 땅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해주며, 특히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영역(領域)을 살펴보는데 아주 좋은 자료(資料)라 할 수 있다.

이들 구이(九夷) 중의 첫 번째에 기록된 견이(畎夷)”는 은()나라 이전(以前)에 이미, 빈주(豳州)와 기주(岐州)사이로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이들은 (西)쪽 지방에서 동방(東方)으로 진출(進出) 한 것이다.

또 이것은 전대(前代)의 죽간(竹簡)문서(文書)죽서기년(竹書紀年) ()편의 주석(註釋)에도 설명(說明)되어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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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11 / <劉 玄 劉 盆 子 列 傳 第 一> 편의 글 중에서

 

大 司 徒 鄧 禹 時 在 長 安 遣 兵 擊 之 於 郁 夷 : 대사도 등 우(登禹)가 이때 장안(長安)에 있었는데, 군사를 보내어 (郁夷) 쳤다.고 하였는데, 욱이(郁夷)우이(嵎夷)와 같다. 또한 욱이(郁夷)는 현의 이름이며, 우부풍에 속해 있었다. <郁 夷, , 屬 右 扶 風 也>고 하였다.

 

사기(史記)에서는, 史 記 ; <堯 命 義 仲居 郁 夷> - 五 帝 本 紀. <集 解> ; “, 郁 夷, “尙 書嵎 夷孔 安 國 曰, 東 表 之 地 稱 (嵎 夷). <索 隱> ; 郁 夷 亦 地 之 別 名 也. (五 帝 本 紀) 嵎 夷, "今 文 尙 書 及 帝 命 驗 竝 作“. “禺 銕”, 在 遼 西. “字 也. <正 義> ; 禹 貢 靑 州 云. 嵎 夷 旣 略. , 嵎 夷, 靑 州 也. (五 帝 本紀)

 

(郁夷) 상서(尙書)에서 우이(嵎夷)”이다. 공안국(孔安國)의 말에 의하면, ()쪽의 땅을 지칭(指稱)한다. 욱이(郁夷)는 또한 땅의 별명(別名)이다. 여기서 욱이(郁夷) 우부풍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견이(犬夷)는 빈주(豳州)와 기주(岐州)사이로 들어왔다는 위 서강(西羌)전 기록을 주시(注視)해야 한다. 결국 우이(嵎夷)와 견이(畎夷)는 같다고 볼 수 있다.정의(正義) / 우공(禹貢) 청주(靑州)에 다르면, 이미 우이(嵎夷)가 다스렸다. 우이(嵎夷)는 곧 청주(靑州).

 

위의 설명(說明), () 대륙(大陸)의 동해안(東海岸) 연안(沿岸)지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륙(內陸)의 깊숙한 곳을 말하는 곳으로, 최소(最小)장안(長安)의 서(西)쪽 지방을 지칭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우이(嵎夷)를 말 할 때, 빼놓지 않고 함께 설명(說明)하는 것이 (래이)인데, 우공서(禹貢書)를 보면, 萊 夷 作 牧이라 했으며, 胡 謂 禹 貢을 보면 登 州, 萊 州 之 地, 禹 貢 萊 州 之 地, 三 面 濱 海, 皆 爲 斥 鹵, 五 穀 不 生. 中略. 亦 稱 萊 子 國이라 했다. 이는등주, 래주는 모두 우공(禹貢)의 래주(萊州)의 땅이다. 삼면(三面)이 바다에 붙어있다. 이 지역 모두는 소금기가 땅위에 드러나는 곳으로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한다. 이곳이 래자국(萊子國)이다. 라고 하였는데, “래이(萊夷)”들이 살고 있던 땅은, 척박하고 염기(鹽氣)가 있어, 농사(農事)를 할 수 없는 곳이니, 가축(家畜)을 기르며 살아가는 유목민(遊牧民)들이라는 이야기다. 이들 또한 조선(朝鮮)의 한 일원(一員)이다.

 

이러한 선대(先代) 구이(九夷)의 한 부류(部類)를 산동성(山東省) 바다 가에 몰아넣고,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산동성(山東省) 바다 가에서, 우부풍(右扶風) 속현(屬縣)까지는 직선거리(直線距離)1500km 이상(以上) 떨어져 있으며, 이들이 그 서쪽으로부터 동진(東進)했다면, 그들은 산동성(山東省)으로부터 5-6천리 서(西)쪽의 신강(新疆)의 동쪽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러다보니 서강(西羌)에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엉뚱한 곳에 조선(朝鮮)의 여러 종족(種族)들을 몰아넣고, 조선사(朝鮮史)를 연구하다보니, 자꾸 동쪽으로 이동(移動)되는 것이다.

 

래자국(萊子國)은 또 래산국(萊山國)이라고 하는데, 나라 이름을 래산(萊山)에서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래산(萊 山)”산해(山海經)에서 말하기를, 화산(華山)으로부터 서(西)쪽으로 3천리(千里) 밖에 있었던 산()의 이름이란 것을 알면 이 나라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다. 역사(歷史)연구(硏究)을 할 때, 역사(歷史)의 전개(展開)과정(科程)도 중요(重要)하겠으나, 그 영역(領域)과 영역(領域)이 있었던 곳의 지형지리(地形地理)는 필수적(必須的)인 대상(對象)이므로, 아주 세밀(細密)한 관찰(觀察)과 추적(追跡)이 요구(要求)된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이렇게 조선(朝鮮)과 관계(關係)되는 조선사(朝鮮史)는 조선인(朝鮮人) 스스로 왜곡(歪曲), 조작(造作)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대륙(大陸)의 학자(學者)들은 이러한 점을 100% 활용(活用), 조선(朝鮮)의 역사를 야금야금 좀 먹고 있으며, 과거(過去) 조선사(朝鮮史)를 자신(自身)들의 역사(歷史)로 새롭게 편입(編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간과(看過)하고 있는 우리들은 상대(相對)에게 비난(非難)만을 퍼붓고 있을 뿐,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로 식민사학(植民史學)과 반도사학(半島史學)의 폐해(弊害)이며, 이미 왜곡(歪曲) 식민사학(植民史學)에 물들여진 탓이다.

 

                                         20130119<글쓴이 : 문무(文武)>


                                        견이(畎夷)는 서융(西戎)이며, 구이(九夷)!

201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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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光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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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元10世纪中-11世纪初)〔北宋〕耀州华原(今陕西耀县)人,五代南唐时布衣,北宋初为图画院学生,故乡里呼为“赵评事”,生卒年不详。

本    名
赵光辅
所处时代
北宋
主要作品
《蛮王礼佛图》
职    业
画家

工画道释人物,兼精蕃马走兽,亦工竹木花卉,笔锋劲利,名“刀头燕尾”。所作线条流畅,人物形象清楚,骨骼厚重,刻画细致入微,设色典雅沉稳,有唐吴道子遗风。曾在许昌开元、龙兴两寺创作壁画,在开元寺所画之《五百罗汉图》,“姿质风度互有意思,坐立瞻听皆得其妙,貌若悲觉以动观者”。据北宋绍圣元年(1094)著名金石、书画家游师雄《题赵光辅画壁》碑云:“云阳(今陕西泾阳县)孟店镇西寺殿后画《自在观音》一壁,曲尽端严闲暇态度。其左有外国胡王与人从焚香状,貌极恭虔;其右有衣王者服,罄瞻礼之容,旁有衔花野兽,麋鹿虎豹各尽
 
驯伏情状。至于竹木花卉,无不精至,南向画魔女恼佛,云雷震电,其势可怖;魔女变形,揽镜自照,遽作惊惭自失之状,尤为奇绝。然后知光辅不独工于马也。……”碑今存泾阳县文化馆。传世作品有《蛮王礼佛图》卷,绢本,设色,纵28.6厘米,横103.5厘米,相传为其作品,现藏美国克里夫兰艺术博物馆。画艺活动在宋太祖、太宗、真宗(960-1022)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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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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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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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推荐》记——中国民间私人许芳芳博物馆藏赏析-赵光辅[番王礼佛图] 阅读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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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光辅(公元10世纪中-11世纪初)〔北宋〕耀州华原(今陕西耀县)人,五代南唐时布衣,北宋初为图画院学生,故乡里呼为“赵评事”,

工画道释人物,兼精蕃马走兽,亦工竹木花卉,笔锋劲利,名“刀头燕尾”。所作线条流畅,人物形象清楚,骨骼厚重,刻画细致入微,设色典雅沉稳,有唐吴道子遗风。
曾在许昌开元、龙兴两寺创作壁画,在开元寺所画之《五百罗汉图》,“姿质风度互有意思,坐立瞻听皆得其妙,貌若悲觉以动观者”。
据北宋绍圣元年(1094)著名金石、书画家游师雄《题赵光辅画壁》碑云:“云阳(今陕西泾阳县)孟店镇西寺殿后画《自在观音》一壁,曲尽端严闲暇态度。其左有外国胡王与人从焚香状,貌极恭虔;其右有衣王者服,罄瞻礼之容,旁有衔花野兽,麋鹿虎豹各尽驯伏情状。至于竹木花卉,无不精至,南向画魔女恼佛,云雷震电,其势可怖;魔女变形,揽镜自照,遽作惊惭自失之状,尤为奇绝。然后知光辅不独工于马也。……”碑今存泾阳县文化馆。
传世作品有《蛮王礼佛图》卷,绢本,设色,纵28.6厘米,横103.5厘米,相传为其作品,现藏美国克里夫兰艺术博物馆。画艺活动在宋太祖、太宗、真宗(960-1022)间。

中国民间私人许芳芳博物馆藏品为赵光铺[番王礼佛图]为册页纵19厘米横89厘米全长209厘米,郭畀题跋元代书画家,天锡印。

赵孟頫书画家题跋印。

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


20岁时任镇江儒学学录。历任饶州路鄱阳书院山长、处州青田县腊原巡检,后调任平江路(今苏州)儒学教授,未及赴任,又改解为江浙行省丞相府掾吏。

工书画,书法学赵孟頫,曾代孟頫书写《松雪斋集》。孟頫作跋称许。画仿米芾,又师事高克恭,得其笔法,与无锡画家倪瓒为好友。
酒后作画,兴到神来,为人所宝。山水有米家风范,尤善竹木窠石,极富天趣。著有《退思集》,身后由其子郭启裒集编成,有俞希鲁序。另有《云山日记》,记载他在镇江和游历杭州一年之事,其中有不少乡邦文献资料。清代节选为《客杭日记》刊行。传世作品有藏于日本京都国立博物馆的《幽篁枯木图》卷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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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是一座城市的灵魂,而博物馆则是能够感知城市灵魂的窗户透过博物馆,我们能清晰地触摸这座城市的脉搏感受到它的心跳与情感这个博物馆开创了“政府搭台、藏家管理、市场化运营社会力量进入”的博物馆运营新模式这一模式是对保护国家文物弘扬传统文化挖掘城市文化内涵盘活民间文化资源所做的具有创新意义的大胆尝试是对提高城市文化底蕴活跃市民文化生活摸索出的新渠道,也是对民营博物馆生存与发展探索出的新途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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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王礼佛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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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王礼佛图》,宋代赵光辅作,卷绢本,设色,纵28.6厘米,横103.5厘米。现藏美国克里夫兰艺术博物馆。
图画中国周边少数民族酋长、番王朝拜佛祖的形象。佛祖高坐莲台,诸番王作礼拜、贡献之状,服饰皆异域装束。画面气势宏大,人物安排疏密有致,表情各异,生动自然,是宋代人物画的一幅杰作。

中文名
番王礼佛图
年    代
宋代
作    者
赵光辅
年    代
纵28.6厘米,横103.5厘米
收    藏
现藏美国克里夫兰艺术博物馆。

基本信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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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称】 《番王礼佛图》 [1] 
番王礼佛图 番王礼佛图 [2]

【年代】宋代

【作者】赵光辅

【年代】卷绢本,设色,纵28.6厘米横103.5厘米

【收藏】现藏美国克里夫兰艺术博物馆

作者简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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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光辅(生卒不详):活动于960至975年左右。华原(今陕
番王礼佛图
番王礼佛图(2张)
西耀县)人。五代南唐时布衣,北宋初为图画院学生,故乡里呼为“赵评事”。工画道释人物,兼精蕃马走兽,亦工竹木花卉,笔锋劲利,名“刀头燕尾”。所作线条流畅,人物形象清楚,骨骼厚重,刻画细致入微,设色典雅沉稳,有唐吴道子遗风。

曾在许昌开元、龙兴两寺创作壁画,在开元寺所画之《五百罗汉图》,“姿质风度互有意思,坐立瞻听皆得其妙,貌若悲觉以动观者”。

据北宋绍圣元年(1094)著名金石、书画家游师雄《题赵光辅画壁》碑云:“云阳(今陕西泾阳县)孟店镇西寺殿后画《自在观音》一壁,曲尽端严闲暇态度。其左有外国胡王与人从焚香状,貌极恭虔;其右有衣王者服,罄瞻礼之容,旁有衔花野兽,麋鹿虎豹各尽驯伏情状。至于竹木花卉,无不精至,南向画魔女恼佛,云雷震电,其势可怖。魔女变形,揽镜自照,遽作惊惭自失之状,尤为奇绝。然后知光辅不独工于马也。……”碑今存泾阳县文化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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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赵光辅番王礼佛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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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畀《跋赵光辅番王礼佛图》,楷书,泰定二年(1325)书。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中文名
《跋赵光辅番王礼佛图》
作    者
郭畀
年    代
泰定二年(1325)
现    状
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作者简介


郭畀(1280-1335)字天锡,号云山、退思,祖籍洺水(今属河
《跋赵光辅番王礼佛图》 《跋赵光辅番王礼佛图》
北),靖康之变后祖上居于京口(今江苏镇江)。业承家学,擅长辩论,通晓蒙文,身材魁梧,蓄有长须,人称郭髯。


20岁时任镇江儒学学录。历任饶州路鄱阳书院山长、处州青田县腊原巡检,后调任平江路(今苏州)儒学教授,未及赴任,又改解为江浙行省丞相府掾吏。


工书画,书法学赵孟頫,曾代孟頫书写《松雪斋集》。孟頫作跋称许。画仿米芾,又师事高克恭,得其笔法,与无锡画家倪瓒为好友。


酒后作画,兴到神来,为人所宝。山水有米家风范,尤善竹木窠石,极富天趣。著有《退思集》,身后由其子郭启裒集编成,有俞希鲁序。另有《云山日记》,记载他在镇江和游历杭州一年之事,其中有不少乡邦文献资料。清代节选为《客杭日记》刊行。传世作品有藏于日本京都国立博物馆的《幽篁枯木图》卷等。


郭畀字天锡,历代著录中常将他与元代初年的鉴藏家郭天锡(字佑之,号北山)混淆。二人实相差四十多年。 [1] 


跋赵光辅番王礼佛图_百度百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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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孟书法:《垂虹亭》、《跋赵光辅番王礼佛图》,美啊美啊!

海星传媒

百家号17-09-2016:12

本次小编分享:赵孟右米南宫诗垂虹亭、垂虹亭图卷尾为虞集隶书题跋、赵孟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图不多总共6张图,喜欢的朋友可以收藏欣赏~顺便关注小编哦!

小编今天心情不好,所以话不多说。

有人说:赵子昂书法自成一体,人说其书柔媚,缺乏阳刚,谓其奴颜媚骨字品如人品,窃以为乃牵强附会……

也有人说:这是那些写不好字的人对子昂的污蔑,比如康有为。


也有人说:自己写不好,才污蔑别人。说子昂不好的人,典型的文人相轻。


有人说:没有二王,你就是书圣。

袁芳上场一个顶俩!小编不做评论......

翻译:

斷雲一片洞庭帆,玉破鱸魚金破柑。好作新詩繼桑苧,垂虹秋色滿東南。

泛泛五湖霜氣清,漫漫不辨水天形。何須織女支機石,且戲常娥稱客星。

揚帆載月遠相過,佳氣蔥蔥聽頌歌。路不拾遺知政肅,野多滯穗是時和。

天分秋暑資吟興,晴獻溪山入醉哦。便捉蟾蜍共研墨,彩笺書盡剪江波。

垂虹亭图卷尾为虞集隶书题跋




赵孟行书题跋《跋赵光辅番王礼佛图》

赵孟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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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孟书法:《垂虹亭》、《跋赵光辅番王礼佛图》,美啊美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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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

时间:2016-2-12 7:42:32   作者:书法欣赏   来源:www.yac8.com   阅读:28347   评论:1



内容摘要: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克里夫兰艺术博物馆藏



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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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孟頫行书题跋欣赏《跋赵光辅番王礼佛图》_颜柳欧赵_书法欣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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赵孟頫右米南宫诗垂虹亭等(2)

时间:2016-1-31 7:37:51   作者:书法欣赏   来源:www.yac8.com   阅读:43912   评论:0



内容摘要:赵孟頫右米南宫(米芾)诗垂虹亭等,来源于宋代佚名-垂虹亭图卷赵子昂书法题跋。美国大都会博物馆藏。斷雲一片洞庭帆,玉破鱸魚金破柑。好作新詩繼桑苧,垂虹秋色滿東南。泛泛五湖霜氣清,漫漫不辨水天形。何須織女支機石,且戲常娥稱客星。揚帆載月遠相過,佳氣蔥蔥聽頌歌。路不拾遺知政肅,野多滯穗...

赵孟頫右米南宫诗垂虹亭等

赵孟頫右米南宫诗垂虹亭等

斷雲一片洞庭帆,玉破鱸魚金破柑。好作新詩繼桑苧,垂虹秋色滿東南。
泛泛五湖霜氣清,漫漫不辨水天形。何須織女支機石,且戲常娥稱客星。
揚帆載月遠相過,佳氣蔥蔥聽頌歌。路不拾遺知政肅,野多滯穗是時和。
天分秋暑資吟興,晴獻溪山入醉哦。便捉蟾蜍共研墨,彩笺書盡剪江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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