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7)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外

2018. 10. 12. 15:12美學 이야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7)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입력 : ㅣ 수정 : 1970-01-02 00:00






세종이 당호를 지어준 비해당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혼인하면서 경복궁에서 살림을 내어 나간 뒤에, 인왕산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1442년 6월 어느날 경복궁에 들어가자 세종이 물었다.

“네 당호(堂號)가 무엇이냐?”

안평대군이 대답을 못하자, 세종이 시경에서 증민(蒸民)편을 외워 주었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됨을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이 시는 노나라 헌왕(獻王)의 둘째 아들인 중산보(仲山甫)주나라 선왕(宣王)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날 때에 윤길보(尹吉甫)가 전송하며 지어준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원문은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인데, 세종이 여기서 두 글자를 따 “편액을 ‘비해(匪懈)’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장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이 즉위한 뒤에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비해(匪懈)’ 두 글자에 담아 집 이름으로 내려준 것이다.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비해당을 지은 뒤에 안평대군은 집 안팎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찾아냈다.

   중국에서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짓는 문인들의 관습이 유행하자 조선에서도 그런 풍조가 생겼는데, 안평대군은 무려 48가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냈다.48경은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매화 핀 창가에 흰 달빛(梅窓素月)” “대나무 길에 맑은 바람(竹逕淸風)” 등의 네 글자로 명명되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먼저 그리고 안평대군이 칠언 화제시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당대의 문인학자들을 인왕산 기슭 비해당으로 초청하여 48경을 함께 즐기며 차운시를 짓게 했다. 우리 조상들은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 그대로 산과 물을 즐겼는데, 안평대군은 한강가에도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담담정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경 시문을 지었으며,48영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

   안평대군은 서적만 1만권을 소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서화·골동품을 수집하였다. 신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畵記)’를 보면 안견(安堅)의 그림 30점, 일본 화승 철관(鐵關)의 그림 4점,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 명품 188점을 소장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곽희(郭熙)의 작품이 17점이나 되는데, 이 그림은 안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문인 학자들에게 인심을 얻자, 수양대군 김종서황보인을 죽이고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 안평대군까지 처형하고는 이 정자를 빼앗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다.

   안평대군이 주택이나 별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상하던 취미는 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성종 때에는 호화주택과 별장을 금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가 되었다.

몽유도원도를 인왕산에 실현한 별장 무계정사

   1447년 4월20일 밤에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가, 수십 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밖에서 여러 갈래로 갈리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桃源)입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몇 굽이 시냇물을 따라 벼랑길을 돌아가자 신선마을이 나타났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산을 오르내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글로 소개한 뒤에, 무릉도원은 중국과 조선 문인들에게 이상향으로 널리 알려졌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처음 가본 곳이지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깨닫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그림이 바로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도연명 이후에 많은 문인들이 무릉도원을 꿈꾸었고,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 청학동(靑鶴洞)을 찾아 글을 지었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 된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에 치지정(致知亭)에 올라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유영봉 교수 번역)

세간의 어느 곳을 무릉도원으로 꿈꾸었던가?

산관의 차림새가 오히려 눈에 선하더니 그림으로 보게 되니 정녕 호사로다

천년을 전해질 수 있다면 ‘내가 참 현명했구나’ 하리니.

   안평대군은 꿈속에 거닐던 복사꽃 동산을 인왕산 기슭에서 실제로 찾아 별장을 지었다. 안평대군과 사육신의 문장은 상당수 없어졌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이 그 별장에서 지은 시 아래에 안평대군의 글이 덧붙어 있어, 별장 지은 사연을 알 수 있다.

   “나는 정묘년(1447) 4월에 무릉도원을 꿈꾼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칡넝쿨과 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들과 비교해 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칸으로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이에 잡언시 5편을 지어 뒷날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비하고자 한다.” (유영봉 교수 번역)

안평대군 죽은뒤 무계정사 철거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집 이름은 글자 그대로 ‘무릉계에 자리한 정사’라는 뜻인데, 한시 5수 뒤에 “경태(景泰) 2년 신미”라고 쓰여 있어 1451년에 창건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연대는 유영봉 교수가 최근의 논문 ‘비해당 사십팔영의 성립 배경과 체제’라는 논문에서 밝혀냈다.

수성동에 있던 비해당에서 인왕산 기슭을 넘어 무계정사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 안평대군은 꿈속에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별장을 지어 문인학자들을 초청하고 시를 읊거나 활을 쏘며 놀았다. 하지만 단종실록 원년 5월19일 기사에는 이곳을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라고 하며 안평대군을 비난했다.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란 뜻이다. 계유정난 직전에도 수양대군 파에선 안평대군이 무계정사 지은 뜻을 왕권탈취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인 10월12일에는 “처음부터 지을 장소가 아니었으니 무계정사를 철거하라.”사간원에서 아뢰었으며,10월25일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고 아뢴 죄목 가운데 첫번째가 바로 이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의 문신 23명이 참여하여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6년 뒤에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종과 안평대군이 아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김종서는 목숨을 잃었으며, 성삼문·이개·박팽년 등의 사육신은 3년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모두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현전까지 폐지되었다.

   무계정사는 곧 무너지고, 지금은 안평대군의 예언 그대로 그림만 1000년을 남아 전한다. 자하문터널 위 부암동사무소 뒷길을 따라 올라가다 돌계단을 오르면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긴 바위가 나타나고, 그 뒤에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오래된 건물이 서있다.

주소로는 종로구 부암동 329-1,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인데, 이곳이 바로 무계정사 터이다.

2007-02-13 26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213026003#csidx5322787f7a60e26af243d9cb2d9b9af   





안평대군


안평대군[安平大君] 몽유도원도에 담긴 조선 왕자의 꿈

1418년(태종 18) ~ 1453년(단종 1)

안평대군 대표 이미지
1 세종의 세 아들 –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세종의 아들들 중 가장 출중한 셋을 꼽으라고 한다면 별로 주저하지 않고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일찍이 장남(훗날 문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대리청정을 맡기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도 국정을 보필하게 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각별히 아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또 세종의 특별 지도를 받으며 박학다식하고 시서화악(詩書畵樂)을 두루 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였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이 즉위한 지 한 달 여 만인 1418년(세종 즉위년) 9월 태어났다. 위로는 큰형 문종과 한 살 위의 형인 수양대군이 있었다. 1421년(세종 3) 네 살 때 요절한 숙부 성녕대군의 양자로 들어갔고, 1428년(세종 10) 열한 살에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이듬해인 열두 살에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의 장인 정연은 세종조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세종의 측근 총신이었다. 이처럼 안평대군은 안팎으로 든든한 배경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왕실의 주요 일원이었다.

2 안평대군, 예능과 재력으로 일세를 풍미하다

세종시대는 조선 500여 년 역사의 첫 번째 태평성대라고 할만하다. 부왕 태종이 다져놓은 조선의 기틀 위에 수성을 맡은 성군 세종이 선도하여 정치, 사회, 문화 발전을 이루어나간 시기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안평대군이 왕실의 일원으로서 물려받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그의 예술혼과 감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안평대군은 시서화 삼절로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택인 인왕산 기슭의 비해당(匪懈堂)과 별장인 담담정(淡淡亭), 꿈속에 본 도원과 비슷한 곳을 찾아 지은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시제(詩題)로 하여 집현전 문인들과 수창하며 비해당사십팔영, 담담정십이영, 무계수창시와 같은 연작시를 비롯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시 작품은 거의 소실되었고 몇 편만이 다른 사람의 문집에 흩어져서 전해질 뿐이다. 안평대군의 시에 대해서는 ‘깊이 체득하여 독실히 좋아했으므로 그 시법의 오묘함이 월등하였다.’고 박팽년이 극찬한 바 있다. 관련사료

안평대군은 시도 뛰어났지만 글씨는 더욱 일품이었다. 원나라 조맹부의 글씨인 송설체를 따르면서도 그를 능가하여 ‘안평체’라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정조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국조의 명필 중에서 으뜸이라고 평가하고 나서 이 글자가 매우 좋아 활자로 주조하고 싶다는 뜻을 그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관련사료 앞서 문종이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모사하여 ‘경오자(안평대군자)’를 주조하였지만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처형된 후 바로 녹여졌다.

안평대군의 그림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그의 그림을 보았다는 당시의 기록들이 있다.

안평대군은 본인이 직접 예술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귀한 작품들을 널리 수집하였다. 1445년(세종 27) 10여 년간 모은 자신의 서화 소장품을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이를 기록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화기(畵記)」가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실물은 남아 있지 않더라도 안평대군이 갖고 있던 최고 걸작들의 목록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다. 관련사료

안평대군의 값지고 방대한 소장품들은 당대 문인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신숙주의 「화기」에는, “안견(安堅)이 고화를 많이 열람하여 그 요령을 다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아서 모두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관련사료

이와 같이 안평대군이 조선초 문화예술계의 중심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였던 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안평대군에 대한 인물평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었다. 다소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면모도 그려져 있으나 안평대군이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은 더욱 뛰어났으며 서법은 천하제일이고 또 그림과 음악도 잘했다는 평가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단종실록』에 나오는 안평대군 평가는 다소 악의적이다. “(안평대군) 이용은 시문과 서화를 좋아하고 소예에 능한 것이 많았으며 세종 조 때부터 권세 있는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간사한 소인이 이에 아부했는데 이현로(李賢老)가 으뜸이었다.” 관련사료 계유정난으로 처형된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매도해야 했던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듯하다.

최항(崔恒)은 명나라 사신 예겸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찬양하여 지은 시에 조선 문인들이 화답한 비해당 시축(詩軸) 서문에서 ‘영웅호걸의 자태로서 존경할 만큼 지극한 부귀를 지녔음에도 담박함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선함으로 즐기며 인에 의해 예를 즐기는 자’라고 하여 안평대군의 인품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3 안평대군의 꿈, 몽유도원도는 말한다

〈몽유도원도〉는 오늘날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시서화 작품이다. 1447년(세종 29)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노니는 꿈을 꾸고 나서 가깝게 교유하고 있던 당대 최고의 화원 안견에게 그 꿈을 그리게 하였다. 안견은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하였고, 거기에 안평대군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담은 도원기를 썼다. 도원도와 도원기가 완성된 후 안평대군은 꿈에서 자신과 동행했던 박팽년을 불러 서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인 21명에게 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몽유도원도〉는 길이가 20여 미터에 달하는 거작으로 완성되었다. 현재 표구된 순서는 신숙주, 이개(李塏),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金守溫), 만우, 최수의 순이다.

유토피아 즉 이상향의 모태는 도연명의 「도화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상향을 꿈꾸고 노래하고 그렸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도 그 수많은 유토피아 환상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너머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안평대군 자신도 도원기에서 마치 예지몽인양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와 무릉도원을 동행한 자는 박팽년, 신숙주, 최항이다. 그들 중 신숙주와 최항은 안평대군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섰는데 〈몽유도원도〉 찬문에서 가장 상세하게 도원을 묘사하며 은거하고자 하는 안평대군의 선택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은거의 꿈을 접고 정치 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린 단종을 남기고 문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어린 임금을 지키는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급선무이자 중대한 일이었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 등이 단종의 보호세력이 된 상황에서 안평대군은 이들과 연대하였다. 단종의 편에 선 연대세력의 가장 큰 난관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고, 안평대군은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안평대군과 손잡은 김종서, 황보인 일당의 반역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사를 단행한 것이었다. 그날 밤 김종서와 황보인은 죽임을 당했고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압송되었다가 며칠 후 교동도로 이송되어 사사되었다. 안평대군은 시신이나 무덤도 발견되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고, 안평대군의 자취들 역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의 저택 비해당은 물론 그곳에 수집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서적과 서화 작품들이 남김없이 사라졌고, 그가 직접 쓰고 그렸던 시문서화 작품들 역시 거의 다 사라졌다. 무계정사도 파괴되었다. 문인과 예술가로서의 그를 평가하고 기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4 안평대군을 추억하는 길

안평대군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복권되었다. 숙종 대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계유정난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던 것에 힘입었다.

영조는, “안평대군은 다만 글 잘하여 이름이 드높았고, 따르는 선비들을 모아 연회를 즐긴 것이 화가 됐을 뿐입니다. 그가 어찌 왕이 되겠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이 있어 반역을 꾀했겠습니까? 이미 김종서, 황보인 등의 관작이 회복됐으니 마땅히 안평대군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라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요청을 듣고 숙종도 안평대군의 글씨를 사랑하였다고 하며 복권을 허락하였다. 관련사료 이어 영조는 안평대군에게 ‘장소(章昭)’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희생된 자들을 직접 선정하여 이들의 위패를 영월 단종의 장릉에 모시고 단종과 함께 제사 지내게 했다. 특히 순절한 왕자와 대신, 사육신 등 충신 32인의 관작과 시호를 적은 위패를 ‘충신지위(忠臣之位)’라 명명하고 안평대군을 제일 앞에 모셨다. 또 안평대군의 제단에 바치는 치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관련사료

안평대군의 복권과 추모는 이렇게 이루어졌지만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몽유도원도〉가 있어서 안평대군의 꿈과 생각을 느낄 수 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우리는 쉽게 볼 수 없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유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일본에서 빌려와 특별전시할 때에만 애태우며 간절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때 약탈당하여 어느 시점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뒤 일본의 유력 가문을 전전하며 유랑하다가 현재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된 것으로 밝혀졌다.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사사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몽유도원도〉는 일본 월간지 『동양미술』 1929년 9월호에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현존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당시 〈몽유도원도〉는 일본 정부에 등록된 중요 예술품이었고, 그 논문은 〈몽유도원도〉를 ‘조선 고금을 통틀어 제일의 화가 안견과 서가 안평대군 그리고 조선 제일의 문사, 충신, 명신, 명인이 모두 등장하는 대작’ 이라고 평가하였다. 안평대군의 작품이 거의 다 사라진 상황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시서화 작품 〈몽유도원도〉의 가치를 우리가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안평대군을 올바로 추억하는 길일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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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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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平大君[1]
조선
세종소헌왕후 심씨의 셋째아들.

1418년(태종 18년) 음력 9월 19일 ~ 1453년(단종 1년) 음력 10월 8일

1. 개요2. 생애
2.1. 먼치킨 문인 왕자2.2. 계유정난과 사사2.3. 사후와 후사(?)
3. 대중 문화에서의 안평대군

1. 개요[편집]

이름 용(瑢). 자 청지(淸之). 호 비해당(匪懈堂)[2]·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2. 생애[편집]

2.1. 먼치킨 문인 왕자[편집]

3살 때, 14살에 요절한 작은아버지 성녕대군(태종의 막내아들)의 양자로 들어간다.

서예, 시문, 그림에 뛰어나 삼절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중국의 고서화를 수집했는데 조맹부와 소식(소동파)등의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의 서예들을 수집해서 그것을 보고 많이 연마했는지 중국에서도 사라진 조맹부체를 가장 잘 구사하는 명필로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안평대군에게 달려가서 글을 써달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고.

이외에도 가야금 등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등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랐다고 한다.

그의 작품으로 몽유도원도 발문 등이 유명한데, 몽유도원도는 그가 꾼 꿈을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안견은 유일하게 안평대군이 총애한 조선화가였다고. 때문에, 안평대군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중국 전통화단 대가들의 그림을 안견에게 많이 보여주며, 익힐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한편 안견은 보신을 위해 안평대군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3]

또한 제주도 제주시에 위치한 관덕정에는 그가 썼던 현판이 걸렸으나 불에 타 사라지고 이후 선조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쓴 현판이 남아 전해진다.출처

그의 글씨 중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본으로 국보 238호로 지정된 소원화개첩이 있었으나 2001년 도난당하였다.

2.2. 계유정난과 사사[편집]

단종 때는 종친과 문사를 바탕으로 힘 있는 종친으로서 수양대군, 황보인이나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과 3각 구도를 이뤄서 한가락을 하였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안평대군을 끌어들이면서 다수파의 한축으로서 사실상 형보다 앞서나갔다. 하지만 계유정난에서 이복동생 계양군 이증의 무고로 인하여, 형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일 때 강화도로 귀양을 갔으며, 그 후 교동도로 유배되고 36세에 사사(사약을 받음)되었다.

계유정난의 명분이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모반을 꾀한 걸 미리 때려잡았다...라는 것이지만 안평대군이 그랬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게 대체적인 견해다.[4] 결국 형의 앞길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제거된 것. 할아버지도 친형제는 안 죽였는데...

한편 성녕대군의 부인, 즉 양어머니인 삼한국대부인 성씨는 훗날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이 유배 및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폐출되고 경주로 귀양가게 되었다. 몇년 뒤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본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가 죽었다. 그후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편과 같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2.3. 사후와 후사(?)[편집]

생전에 시문서화에 능통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여러 작품을 남겼을 듯 하지만, 역사의 패배자인 탓인지 안평대군이 수집한 고서화나 그의 서예 작품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문이나 글씨교본 그리고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 뿐이다. 그나마도 몽유도원도의 발문은 일본 톈리대학에 전시되어 있으며 소원화개첩은 2001년 소장자가 도둑맞은 이후 10여 년간 경찰의 수사가 이뤄졌지만 끝내 범인은 물론 소원화개첩의 행방도 묘연해, 결국 지난 2010년 이 작품을 인터폴에 국제 수배하는 선에서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겨졌으니, 안평대군이 주목을 받을 날은 요원한 듯. 그나마 그와 친밀한 사이였다가 돌아서버린[5] 신숙주가 자신의 문집에 안평대군이 수집했던 고서화의 목록을 남기고 있어서 그가 어떤 작품들을 모았는지는 알 수 있긴 하지만.

영조 23년(1747년) 때야 복호되어 장소(章昭)라는 시호를 받았다.

똑같이 친형의 쿠데타에 반기를 든 금성대군은 그 후손이 현재에도 남아 있어 금성대군파를 형성하고 있다.[6] 그러나 안평대군은 딸 하나를 제외하고 아들들도 주멸되는 바람에 후사가 완전히 끊어져 현재 직계 후손이 공식적으로 없다.[7]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안평대군파보[8]를 보면, 안평대군의 맏아들인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에게 이운생(李雲生)[9]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계유정난으로 인해서 평안도 태천으로 은거했다고 한다.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숙종 이후에 사후복권이 이루어졌지만 1930년대까지 약 230년 간 안평대군의 자손임을 숨기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주이씨대동종약원 홈페이지에 안평대군에 대한 정보는 없다.[10]

아내 정씨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바로 죽는 해인 1453년 1월 28일(1452년 음력 12월 19일) 아들 이우량(友諒)이 병사하였고 1453년 5월 31일(음력 4월 23일) 그의 아내가 죽자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하였다.

내가 불사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세종대왕소헌왕후문종(文宗) 대행왕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 아들 우량도 또 따라서 죽고, 이제 또 아내도 죽으니 비로소 불사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덕을 드리는 것을 중단한다. 어쩜 죽음을 예견한 것일지도? 하지만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이라 욕을 꽤나 먹었다.

3. 대중 문화에서의 안평대군[편집]

묘하게도 안평대군을 우호적으로 그린 사극은 없다시피 하다. 그럼 공주의 남자는?

우선 사육신 쪽을 띄워주는 방향으로 보면 초기에 수양대군과 같이 종친으로서 권력적 속성을 보인 부분을 커버쳐 줄 방법이 없다. 나중에 김종서와 손잡은 부분을 개과천선이라고 부르면 또 너무 막나가는 거고... 반대로 세조와 계유정난을 우호적으로 그린 경우에는 안평대군은 빼도 박도 못하는 권력을 탐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특히 왕과 비에서는 악역 전문 배우인 정성모가 안평대군을 연기했으니 말 다했다(...). 세종의 왕자들 배역.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신검 이광기가 연기하였다. 책사인 이현로는 김규철(...). 노영국이 드라마 한명회에서 분하기도 했다. 대왕 세종에도 나오긴 한다. 1990년도에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파천무에서는 현직 동신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차두옥 씨가 안평대군을 연기한 적이 있다.

세조가 악역인 공주의 남자에서 취급이 그나마 나았던 듯... 이기는 한데, 이주석이란 배우가 분위기나 비중이 상당히 약해서 그랬다는 것이 문제. 위키에 추가도 안 됐다. 여기도 금성대군 포스가 더 크다.

고전소설인 운영전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배경이 되는 수성궁의 주인이다. 운영을 비롯하여 자신이 데리고 있는 궁녀들에게 각종 재주들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연애를 금지하여 운영을 죽게 만드는 엄하고 못된 주인으로 나온다.[11] 그나마 운영전이 예술가적 기질이 있던 안평대군을 어느정도 묘사했다는 점에선 사극들 보단 낫나?

어린이 과학동아에 연재된 만화 조선 과학 삼총사에서는 5살 꼬마로 등장한다. 어린 나이지만 서화에 관심이 많아 부왕을 졸라서 명나라행을 허락받았다.

영화 관상에선 문종이 역모를 일으킬만한 인물들 리스트안에 있었으나, 왕가에서 태어났지만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해를 품은 달과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작가 정은궐 씨의 소설 홍천기에서는 제법 비중있게 나온다.

[1] 군호는 충남 홍성군의 옛 지명인 안평(安平)에서 유래했다[2] 원래 안평대군의 군호가 안평(安平)이라 게을러질 것을 염려한 세종대왕이 게으름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비해당이라고 호를 내려주었다고 한다.[3] 안평대군이 아끼던 용매묵이라는 비싼 먹을 훔치려다 들켜서 눈 밖에 나고, 대군을 볼 낯이 없다며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그 이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과 친하던 사람들이 봉변을 당했는데 안견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4] 왜냐하면 다수파였던 김종서, 황보인 세력과 합작한 것이 결국 숙이고 들어간 형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난하게 잘나가는 종친의 위치가 바뀌기 어렵다. 왕이 되면 오히려 신하들에 의해서 옹립된 휘둘리는 왕이 되니 더 괴로워질 지경이고. 또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 신하들 입장에서도 안평대군을 옹립할 이유가 없는 게 어린 단종과 다르게 안평대군은 성인이므로 친정을 할 수 있으므로 신하들 입장에서도 좋은 게 없다.[5] 신숙주는 물론이고 사육신들까지 포함해서 집현전 소장학자들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노대신들이 고명대신으로서 정사를 좌우하는 것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계유정난은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소장학자들과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포섭되지 않은 종친세력이 서로 손을 잡고 김종서 세력을 쳐버린 것이라는 평이 많다.[6] 이렇게 된 이유가 세조가 금성대군의 아들들은 죽이지 않고 관노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어찌어찌 대를 잇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면, 이복동생인 영풍군은? [7] 조선왕조실록 1518년(중종 13년) 6월 7일 2번째 기사.[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에도 소장돼 있다.[9]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구글링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10] 안평대군의 이복동생으로 역시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영풍군에 대한 정보는 존재한다.[11] 그렇지만 사실 당대 궁녀들 사이에서 외간남자와의 연애는 원래부터 금지된 사항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냥 궁궐 내의 규칙을 잘 준수하는 주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솔까말 궁녀들은 거의 왕의 여자 취급인데 외간남자가 궁녀 하나를 건드리면 그야말로 난리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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