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1. 12:37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10월 3일 개천절의 올바른 이해
4대 국경일인 개천절은 일본의 강점통치에서 광복한(4282(서기1948)년 제헌국회에서 상해임시정부의(단기 4252,서기1919)년의 법통에 따라 군주제인 대한제국을 버리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국가기원을 “삼국유사 기이 고조선편”에 근거하여 단군왕검 황제가 세운 고조선으로 정하였으며 헌법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이라고 명시된바 같이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요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으로서의 자부하면서 개국기념일로 인식되어져야 할 것이다.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역사를 신화(神話)로 왜곡시킨 일본의 반도식민사관의 그릇된 역사 인식을 벗어나 민족이 뿌리를 찾고 그간의 시련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개국 기념일인 개천절을 하늘이 열린 날이라고( 4343년10월3일) 기념하는 행사들을 보면서 역사의식의 바른 이해와 바른 인식 그리고 바른 교육이 절실함이 더해 졌다.
단기 4278(서기1948)년 제헌국회에서 일본이 계획적으로 변조한 (삼국유사 기이(紀異)고조선 편)에 의하여 국가기원을 고조선 편)에 두고 국가연호를 단기(檀紀)로 한바 있었으나 5,16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한 서구화를 표방하면서 단군신화운운하며, 국가연호인 단기의 공식사용을 폐지하고 서기연호만을 공식사용토록(연호에 관한 법률 제77호) 했는데 이제라도 개천절을 개국기념일이라 하고 단기연호도 복원, 서기와 병용토록하면 어떨까 한다.
이제는 변조되지 않은 원본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편”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는 원문에 의거하여 환국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나라로 인식되어졌으면 한다. 애국은 국사를 바로 아는데 있으며, 민족의 혼과 민족정기가 되살아나야 민족화합과 공생 발전하는 조국통일의 염원도 성취 되리라 믿기 때문 이다.
일본이 변조하기 전 원본 표지 (고려대학교 도서실 과 국립 도서관에 소장)
환단고기 어떻게 볼것인가? 박성수교수 강좌(한국학중앙연구회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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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단고기』의 범례와 구성
『환단고기』에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등 네 고기가 들어 있다. 첫째 <삼성기>는 상하 두 질인데
하나는 安含老 다른 하나의 元董仲이 찬한 것이다. 둘째 <단군세기>는 홍행촌 이암의 저술이다. 북부여기는 범장
<태백일사>는 이맥이 지었다. 이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이암과 이맥이다. 행촌 시중 이암(1297~1364)은 고려 말 몽고의 침략을 받고
권신들이 고려를 몽고의 속국(행성)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여 상소하기를
1) 하늘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 나라를 가지고 나라로 삼고 또 각기 그 풍속을 가지고 자기풍속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國界를 헐어 섞지 말라. 민속 또한 마찬가지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 이래로 天子를 칭하여 祭天行事를 지내왔다. 지금 일시 남의 수레 밑에 있으나 이미 혼과 정과 혈육이 같고 그 근원이 한 조상을 모시고 있다. (天下之人 各以其國爲國 以其俗爲俗 國界不可破也 民俗亦不可混 항我國桓檀以來 皆稱天帝之子 行祭天之事 自與分封諸侯元不相同 今雖一時爲人轅下 旣有魂精血肉 而得一源之祖---)
2)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어찌 국호까지 폐할 수 있는가.
(我國雖小 國號何可廢也) 우리天授太祖께서 창업하시면서 고구려의 다물정신을 이어받았으나 아직 幽營의 땅(중국의 산동성과 하북성)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보수적인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위서론을
폈다. 아래 글 가운데 原始國家란 말이 있어 위서라는 것이다.
杏村侍中有著書三種 其著檀君世紀 以明原始國家之體統
又著太白眞訓
그러나 위 글은 원시국가라 번역해서는 안 된다.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하여 “국가체통의 시작과 뿌리를 밝혔다“고 읽어야 한다.
이암의 저술가운데 農桑輯要이 있는데 이색이 서문에서 좋은 책이라
추천하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 되는 것은 이명과 범장이다.
이암은 寶山 太素庵에서 素佺이 神書를 많이 가졌다는 소리를 듣고 李茗, 范樟과 같이 글 찾아 가서 환단 시대의 眞訣을 얻어 읽고 단군세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다. 이명은 진역유기를 썼고 이 책을 읽고 숙종 때 규원사화가 나왔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소전의 신서에서 유래한 책이다. 범장은 신라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이암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북부여기> 되었던 고기로 휴애 거사 范樟이 찬한 책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李陌이 찬한 책으로 한 말의
선비 해학 이기가 감수한 책이다. <태백일사>에는 천부경을 비롯하여 삼일신고, 가림토, 치우천황 등 진귀한 기록이 담겨있다. 특히 이
고기들을 撰한 사람이 이암 이맥 등 고성 이 씨지만 진사 白寬? (태천 사람) 등 백씨도 집안에 물려받았고 이 진사 亨拭(삭주) 그리고
桂延壽(선천) 등 모두 서도와 북도의 북한 사람들이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도는 지역차별을 받던 곳이다.
진사란 향시에 합격한 지방의 유생들로서 과거 합격을 포기한 지식인들 요즘으로 말하면 세상 돌아가는 데 비판적인 재야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저항심이
강하고 사회적인 불만이 가득 찼던 지방의 지식인으로서 조선왕조가 망하자 주자학에 물든 기호와 영남의 세도가와 유학자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이념에 입각한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 주자학의 정통을 이은 위정척사파와 서학을 받아들인 개화파가 일찍부터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새로운 세력이다.
김구와 이승만 같은 사람을 연상하면 되지만 나철, 이기 그리고 단군
사상을 그것은 일반적인 개화사상이 아니라 모화도 반대요 개화도 반대하는 사람들로서 우리 고유문화를 기초로 한 근대화를 바라던 민족주의
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의 사상을 대변하는 역사가 환단고기 범례에 명시되어 있다. 그 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1) 자아인간의 발견이요 이를 인간의 主性이라
하였다.
自我人間之發見主性而大賀也 자아 인간의 主性 발견이
기쁘며
2) 민족문화와 민족의 이념의
발견이다.
民族文化之表出理念而大賀也 민족 문화의 이념을
표출하여 크게 기쁘며
3) 세계인류 공존 평화의
발견이다.
世界人類之對合共存而大賀也 세계 인류의 대합공존으로
크게 기쁘도다.
4) 그 중심에 환단 시대 이래로 전수되어 온
우리 고유의 31心法과 太白眞敎가 있었다. 오호라 환단 이래로 三一心法이 相傳하여 太白眞敎로 중흥하자.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우리 민족의 고유정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냐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고기가 대부분 북한에서 보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평양은 고려시대에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곳이요 단재가 이 난을 1천년 래 대사건이라 하였다. 사대파와 자주파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두가 북한 땅에서 보존되었던 고기인데 그중 단군세기와 고성 이씨 가문에서 보존해 왔던 것을 桂延壽란 평안도
선비가 발견하고 이를 해학 이기에게 가서 감수를 받아 홍범도 오동진이 도와서 출판했다는 것이다.
북한 땅은 선비들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이들이 유배지에서 살면서
독서로 무료한 세월을 보냈고 그 중에는 별아 별 기서와 참서가 많았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귀경할 때는 모두 현지에 두고
떠났다.
2. 민안부와
천부경
고려 말 농은 민안부(農隱 閔安富)가 소장했던 「천부경」이다. 민안부는 조선건국을 반대한 두문동 72현의 한 분이었다. 작자 미상의 杜門洞書院志를 보면 閔安富 號農隱 麗興人 入頭流山 官禮儀判書, 初入杜門洞 後遁居 湖南이라 적혀 있다. 한자 이전의 갑골문자로 쓴 「천부경」말고도 「삼일신고」「소도경전본기」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말의 역사를 남긴 또 한분인 元天錫은 호를 耘谷이라 치악산에 들어가 기록을 남긴 분이다.
농은 민안부 천부경
고려 말 조선 초에 많은 사서가 없어졌다. 발해가 망하면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은 유명하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많은 고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일부 나오는 고기가 수록되어 있으니 이맥의
『太白逸史』에서는 表訓天詞 大辯經 高麗八觀記 (환국본기 제1 ) 朝代記 1 2 3 4 三聖密記 密記 1 2 (환국본기 제2)
震域留記의 神市紀 1 2 三聖密記 朝代記 1 2 密記 大辯經 1 2 三韓秘記 1 2 晉 天文誌 高麗八觀記 그리고 史記의 封禪書 魏書의
勿吉傳 (이상 시시본기 제3) 이 그것이다.
3. 환국과 단국
『환단고기』의 역사 세계는 환국과 단국에서 시작된다. 일연도 昔有桓國)이라고 하였으나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환단고기??는 파내류波奈留산 아래에 환인씨가 세운 나라로 천해(바이킬호) 동쪽의 땅이며 그 넓이가 남북이 5만 리요 동서는 2만 여리에 이르렀다. 거기다 환국의 역년歷年은 3,301년 또는 63,182년이라 하였다. 이어 환웅이 환인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오늘의 동북삼성)에 신시를 세웠다. 일명 배달국이라고도 한 신시는 18세를 전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비로소 단군이 단군(神人)으로 아사달에 수도를 정하여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단군은 환인이 환웅에게 가르친 현묘지도를 득도得道하여 백성을 교화(接化群生)하였다고 라 하였다. 현묘지도는 본시 환인이 환웅에게 교시였한 가르침이었다.
『환단고기』의 이 기록을 허황하다고 하여 국내 역사가들은 믿지
않았고 지금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로는 인류의 역사는 10만년이나 된다고 하며 지금 인류는 그 수명을 다 살아서 멸종 위기에
있다. 그리고 지구는 그 형성과정에서 지형과 지도를 여러 차례 바꾸어 舊大陸에서 新大陸으로 그 자도를 바꾸었다. 지금의 지도는 신대륙의
지도이다. 구대륙 시대에는 오늘의 희마라야(흰 머리) 산맥이 깊은 바다였다. 또 그 동안 여러 차례 빙하기가 지나고 지금은 간빙기間氷期에
해당하는데 앞으로 기후가 다시 추워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니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매우 불안한 것이다. 이같이 길고 긴 10만년 인류
역사에서 5000년 역사란 20분지 1에 지나지 않는다.
4. 치우 환웅 그리고 고구려 백제의중원 평정
신시의 14대 환웅 치우천황蚩尤天皇이 중원을 정복했다. 치우가 싸운 상대는 漢族의 시조인 黃帝(軒轅)이었다. 치우를 인정하게 되면 중원이 漢族의 영토가 아니라 본시 우리 민족의 강역이 된다. 환웅의 생존연대는 중국의 삼황시대에 해당하며 중국의 오제시대 이전에 우리가 중원을 지배했던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중국사의 시초는 엉망이 된다.
그러나 중원은 당시 한족의 땅이 아니라 동이족인 염제炎帝와
신농神農 그리고 치우의 땅이었다. 그런데 헌원(황제)이 등장하여 신농 땅을 침략하였다. 그 때문에 神農이 쇠퇴하여 같은 동이족인 치우가 맞서니
치우와 환제의 싸움은 최초의 동서양 전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동서양 전쟁이란 동이족과 서하족의 싸움을 말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도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최치원의 글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그 전성기에 강병 1백만 대군을 발동하여 남중국의 오와 월(吳越)과 북중국의 제와 노(齊魯)
나라를 정벌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을 점령한 사실은 『환단고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치우 환웅이 중국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을 점령한 것은 그 이전의 환웅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25사 동이전을 보면 동이족이 매우 무강한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기사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부여인은
활과 창칼로 무기를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 “옥저와 예맥인은 매우 씩씩하고 보전步戰에 능하다.“ “삼한 사람들은 성질이
몹시 강인하고 용맹하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성곽을 쌓아놓고 늘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적이 침략해 오면 모든 벼슬아치들이 스스로 나아가
싸운다. 백성들은 후방에서 군량을 날라 병사들을 먹였다.”
5. 민족 고유문화의 발견
1) 홍익인간 이화세계
『환단고기』는 또 우리나라에 민족고유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간혹 간접적으로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으나 『환단고기』처럼 자상하고 많지 않다. 가령 『환단고기』의 「삼한관경
본기」에 보면 천황天皇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경계하기를
첫째 부모를 공경하라(父母可敬) 둘째 처자를 보호하라(妻子可護) 셋째
형제를 사랑하라(兄弟可愛) 넷째 장로를 존경하라(老長可隆) 다섯째 약소한 자는 은혜를 베풀어라(小弱可惠) 여섯째 백성을 믿어라(庶衆可信)고
하였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의 풍류도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의 뿌리이고 환인 환웅 그리고 단군의 가르침에 유래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천범天範을 내리시기를 너희가 태어난 것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부모를 옳게 모시는 것이 하늘을 모시는 것이다. 또 그것이 나라까지 그 힘을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충효이니라. 도道는 반드시 하늘(天)에 있으니 화가 있어도 먼저 벗어나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헤진 신발에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는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이 없고 질투함이 없고 음란하지 마라야 한다. 『환단고기』에는 또 산목算木과 투전목鬪佃目 서산書算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가림다加臨多 38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다, 신시(배달국)에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에는 書算이 있었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의 옥진총담玉塵叢談 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었던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 하였고 남해각서南海刻書를 설명하고 있다.
환국에서 신시와 단군조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현묘지도 즉 선도仙道가 발전하였다. 일명 신교神敎라고도 하는 우리 고유의 종교가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의 선인도로 이어져 발전하다가 외래삼교를
수용하여 한국화韓國化하였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선도는 가야국으로도 계승되었고 가야의 참시선인?始仙人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부시도武士道를 전하였다. 가야금도 일본으로 건너가 샤미셍三味線이 되었다.
2) 선도문화의 계승 발전
우리나라 민속은 대부분 단국문화의 유속이었다. 삼국시대에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삼교의 유속이 아니었다. 설혹 외래 유속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단군유속에 귀화하여 혼합된 것이다. 그 하나가 아기를 얻은 후
이 아이가 잘 자라게 해달라고 삼신할머니에게 비는 습속이다. 그리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여 가을에 추수한 신곡을 그릇에 담아 농신農神에게 제사
지내는 습속이 그것이다. 또 새로 터를 잡아 집을 지을 때 행하는 성조 굿도 우리나라 고유의 유속이다.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이라 하고 벼 익은 것을 축하하여
업業이라 하였다. 산을 군생통력群生通力의 장소라 하고 업을 생산 작업의 신이라 한다. 때문에 또한 업주가리라고도 한다. 집터에 빌기를 또한 터주
대감土主大監이라 하고 집에 빌기를 성조대군成造大君이라 하니 또한 해마다 좋은 복을 이루는 신이다. 그밖에도 부모가 죽어서 장례를 지내는데
마지막 하관 때 산신제가 있고 먼 길을 떠날 때 신단수 아래에서 지내는 이별의 제사가 있다. 먼 길을 떠날 때 무사하기를 비는 일이나 여비에
보태 쓰라고 주는 풍습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선물로 화답하는 행위가 다 예부터 내려오는 유습인데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묘 자리를 쓸 때 고기잡이를 나갈 때 진을 칠 때 길을 떠날 때
각기 제祭가 있으니 제는 반드시 날짜와 재齋를 골라 올려야 복을 이루는 것이다. 풍어제는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소도가 서면 반듯이 다섯 가지 계율은 읊었으니 이것을 오상五常이라
했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堂을 세워서 글을 읽고 활을 쏘는 연습讀書習射를 시켰다. 그리고 말을 타고 치마예절馳馬禮節 격투하고 검술을
익히며 노래와 권박 그리고 도술(歌樂拳撲 竝 刀術) 을 익혔으니 이것을 육예六藝라 하였다.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었나니 충, 효, 신, 용勇, 인仁의
오상이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혼인하지 않는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며 예절을 익히며 노래 부르며 격투와 검술을 익히는 것 등 여섯 가지 기예였다.
상고시대에는 모든 읍락에 삼노三老가 있어 지도자로 모셨고 나라에서는
육정六正이 있어 국사國士로 모셨다. 모든 읍락에서는 자율적으로 三老를 모셨는데 삼로는 일명 삼사三師라고도 하였다. 삼로는 덕을 갖춘 자와
재물을 베푸는 자 그리고 지혜 있는 자忠臣 양장良將 용졸勇卒 명사名師 덕우德友가 그들이다. 또한 육정이 있었으니 모가 이들에게
사사하였다.
상고사회에서는 또 화랑花郞과 여랑女郞이 있어 나라의 기둥 역할을
담당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이들을 국수國粹라 하였다. 박은식은 국수가 죽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특수한 의상을 입고 환웅의 신상에
경배를 하고 살생유택의 계율 등 세속오계의 가르침에 따랐다.
원화源花는 여랑을 말하며 남자를 화랑이라 하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 받았다. 모자를 쓰는데 있어서도 의식이 있는데 “큰 나무를 모시어 환웅의 신상神像이라
하고 이에 경배한다. 이 신령스런 나무를 웅상雄常(환웅상)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常은 환웅이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살생에 법이
있었으니 살생을 함에 있어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었다. 예부터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지 않고 방생한다 함은 역시 이런 뜻에서였다.
살생유택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 나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신라 때 생긴 오계가 아니라 그 이전의 환국과 신시 그리고 단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습이었다.
6. 맺 는
말
『환단고기』는 1만 년 전 太始이후 환국의 역사와 신시의 역사를 거처 단군조선 부여 그리고 삼한 등 여러 나라시대와 고구려와 대진국의 역사를 거쳐 高麗國 本紀까지의 상고사, 중고사 그리고 하고사를 모두 관통하고 있다. 史學이란 말이 나온다고 해서 위서라 한 사람도 있다. 經學에 대해 사학이라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의 관례이다, 단재가 말했듯이『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시야에서 역사를 보는 것은 콩알만 한 눈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통해 보는 우리의 역사는 엄청나게 크고 긴 역사세계를 보는 것이다. 콩알만 한 눈으로 보는 역사관을 小韓史觀이라 한다면 『환단고기』라는 확대경으로 보는 역사는 大韓史觀이라 할 것이다. 두 사관은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역사처럼 보이나 둘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제왕운기』 등 사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환단고기』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두 계열의 사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둘로 둘 것인가. 하나는 재야 하나는 강단 사학이라 하면서 언제까지나 외면하도록 버려 둘 것인가.
물론 『환단고기』에 기술된 역사세계를 일자 일획도 고치지 않고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단지 위서라는 한 마디 말로 외면하고 2000년사를 수정 없이 받아 들여라
고 강요는 것은 보다 더 옳지 않다.『환단고기』의 역사 세계도 가필된 부분이 있으면 도려내야 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흑수와 백산 사이에
자리했던 神市(배달국)를 덮어놓고 부정할 것이 아니다. 중국 桓仁에 한 번 가 본 사람은 거기 고구려가 나라를 세워 환인이라 명명한 사연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밖에도 반성할 점이 많다. 오늘의 한국사는 너무나 작고 좁고
연약한 소국사이다. 한 발작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 소한국사요 유불도 외래삼교가 들어온 뒤의 2천년사이다. 이런 민족의 이력서를 가지고
어디에다 명암이나 내놓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역사를 가지고 힘깨나 쓸 수 있겠으며 땅에 떨어진 국민의 사기士氣를 북돋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소한국이 아니라 대한국에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제 소한국사 삼서(小韓國史 三書 즉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의 역사세계를 걷어차고
『환단고기』가 그린 동북아 대국의 6000년 역사를 읽어 우리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
힘차게 사대주의와 일제식민사관의 족쇄를 벗어 버리고 올바른 민족사의
틀을 잡아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앞문으로 공격해 오는 중국과 뒷문에서 으르렁대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하며 또 그보다 더 무서운 서구중심사관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익 우익을 따질 때가 아니다. 지금 여당과 야당으로 갈리어 與是野非의 싸움을
되풀이 할 때가 아니다. 미지근하고 하품 나고 졸음까지 오는 기록의 연속. 이것이 조선 역사의 외형이다. 거기다 오늘의 우리들은 역사를
모르는 불구자요 미성년자이다. 육당 최남선이 한 말이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서 하품하는 오늘의 정치 언론 경제를 모두 털어버리고 지금이야 말로
『환단고기』의 역사 세계와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것을 젊고 발랄한 우리들의 다음 세대에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 어떤 다른 물질적
유산보다 더 소중할 것이다. - 이상-
서기 2012년 단기 4345년 1월 10일 국학원 국민강좌
박성수/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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