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조영의 역사

2018. 11. 17. 03:46우리 역사 바로알기

이진성에 고립된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과 고구려 병사

고구려의 패망기에 제왕지운(왕이 될 운명)을 가지고 요동에서 태어난 대조영은 역모의 운명이라는 의심 속에서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다.
하지만 놀라운 정신력과 지혜, 각오로 스스로 무장의 길로 나아간다.

안시성을 두고 싸웠던 1차 고,당전쟁 이후 다시 당나라의 전면적인 도발이 일어나자 만리장성 북쪽의 이진성(고려성)에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과 고구려 병사들이 고립된다.

대조영은 그를 만나기 위해 사선을 뚫고 내닫는다. 이때 거란 부족의 습격을 받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대조영은 거란족 추장, 이진충의 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니 그녀가 바로 대조영의 첫사랑이자 비련의 연인인 초린이다.

이때, 초린을 사랑하던 한 남자와 조우하니 훗날 대조영과 연적으로, 요동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필생의 라이벌로 대립하는 이해고였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분열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고구려는 급격한 분열을 맞게 된다.
이 와중에 평양성의 정치세력과 요동 군부세력의 반목을 해결하기 위해 중재자로 평양성으로 들어간 대조영은 오히려 평양세력의 핵심, 부기원에 의해 옥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그를 마음에 품고 있던 보장왕의 조카인 숙영의 도움으로 옥서를 탈출하게 되고..
한편 혼란에 빠진 고구려 정벌를 위한 당의 계책은 더욱 치밀해지고 결국 내부 반역자로 인해 평양성의 문은 자진하여 열리고 고구려의 천년 사직은 막을 내린다.


민초들의 삶을 고민하며 역동적으로 투쟁해 나가는 인간 대조영

이후 고구려정벌 과정에서 급부상한 당장수 설인귀와 고구려 부흥운동의 핵심이 된 대조영의 대립 속에 요동의 앞날은 한치 앞을 알 수 없게 되는데..

드라마 속 대조영은 각종 문헌들이 보여주는 발해 건국사 속 묘사나 해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 드라마적 상상력을 더해 문헌 속 박제되어 있는 대조영이 아닌, 다해 가는 국운을 떠 안으며 민초들의 삶을 고민하며 역동적으로 투쟁해 나가는 인간 대조영을 그려낼 것이다.

 

 


고구려유민 중국으로 강제 이주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멸망시킨 이후 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을 펼쳐 많은 고구려유민이 중국으로 강제 이주된다.

요하 서쪽 영주 지방에서 이진충이 이끄는 거란족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혼란 속에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빠져나와 건국을 꾀한다.

하지만 당 측천무후는 돌궐, 해족, 습족 등의 주변민족을 통해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대조영을 추격하기에 이른다.
당나라군의 지휘관은 당나라에 귀화한 거란출신의 이해고였다.


고구려 계승을 스스로 선언한 발해

첫 싸움에서 그는 걸사비우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지만 천문령에서 대조영에게 대패하고 만다.
천문령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송화강 상류 휘발하를 건너 동모산 인근에 발해국을 세우게 된다.

이후 발해국은 태조 대조영, 무왕 대무예, 문왕 대흠무 이후 계속적인 국가 정비를 갖춰가던 발해는 선왕 대인수에 이르러 최대의 판도를 형성, 이에 맞추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된다.

발해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과 우리의 문헌 뿐 아니라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 일본문헌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다.

하지만 서로 배치되는 부분이 있을 정도로 각기 시대에 따른 사관으로 발해를 기록 통일된 면모를 볼 수 없다.
그렇지만 통일된 면은 발해 스스로 고구려계승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출처 : 요것저것 정보가 가득한곳
글쓴이 : 행복미소 원글보기
메모 :



대조영의 혼魂, 승천하다

대조영 드라마에서는 동모산으로 유민들을 데리고 가서 발해를 건국하려 한다.
그것을 안 당나라는 이해고에게 20만 대군으로 대조영의 목을 가져오라고 한다.

‘김홍신의 대발해’ 책에서는 대조영은 유민들을 살리고자 애을 쓰지만 수많은 군사와 유민들의 희생이 따른다. 결국 최후의 목숨을 건 천문령전투에서 대조영의 전략으로 이해고에게 대승을 거두게 되며 그때 이해고는 얼마 안되는 병사를 데리고 당나라로 다시 가게 된다.
(드라마에서는 이해고와 이문도 천문령 전투에서 죽는다고 하는데…?)
참고로 ‘김홍신의 대발해’ 에서는 대중상의 죽음은 전장에서가 아니라 병으로 이 시점에 죽었다.

역사에서는 이때의 죽음을 맞게 되는 역사인물은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이다. 드라마에서는 어쩌면 검이가 거란족을 데리고 이해고와 맞선 상황 일거다.
앞으로 대조영 드라마에서는 금란도 같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이렇게 대승을 거두고 동모산에서 686년 발해를 건국하고 대조영은 발해 황제가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불같은 결단력과 얼음 같은 판단,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불사하면서도 작은 것을 위해서 목숨도 초개같이 내놓을 줄 아는 진정한
영웅.
고구려의 패망기에 태어나 전란 속에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탁월한 리더십으로 고구려 유민을 당에서 탈출시키고 요동을 통합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

대제국 발해를 세운 고구려 유장, 고구려 멸망 후 영주성에서 거란 이진층과 연합, 당나라군을 깨뜨린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한다. 당과의 천문령 싸움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국가 건설의 기반을 굳히고 698년 동모산에 도웁하여 발해를
세운다. 개국 황제로 치세 22년, 성수 예순아홉에 눈을 감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발해는 총 15명의 황제가 있었으며 약 230년간 만주와 연해주 지역(러시아 최동남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다고 한다.

대조영은 마지막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를(대조영에서는 어찌 그려질지 모르나 실제 이해고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나라
장수가 되었음) 대파하고 마침내 698년 2천리(약 800킬로미터)의 대장정을 마치고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에 있는 동모산에
도읍을 세운 후 국호를 진震, 연호를 천통으로 정함으로써 칭제하고 황위에 올라 719년까지 22년간 재위하며 대발해제국을
통치합니다. 죽은 후 아들 무왕에 의해 고왕(태조 성무고황제)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아마 발해 건국 전에 세상을 떠난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도 대조영 생전에 추존(진국열황제)된 것이다. – 지식인 참조

대조영의 죽음
모두 들으시라! 만디를 다스린들 한 줌 흙을 면할 수는 없도다. 상전벽해가 어찌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능인들 마침내 짐승의 구멍으로 파이기 마련이니, 공연히 수많은 백성들의 노고를 하찮게 여기어 역사하지 말라. 짐이 세상과 연을 끊거든 이레를 넘지않게 장례를 치르되, 상례는 힘써 검약하라. 짐의 부황께서 그러하셨듯 화장하여 이 땅에 고루 뿌려, 짐의 혼이 누대에 번영을 누리는 것을 지켜보게 하라. 이를 적어 준칙으로 포고하고 영승하라! – <김홍신의 대발해 4권 173p>

그 이후 대조영은 용산으로 처소를 옮긴 지 하루 만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대중상의 죽음에서도 화장을 하라고 지시했다.  어쩌면 그래서 현재의 대조영의 무덤이 없는걸까? (??)

sshong.com/archives/8003    혜민아빠  





다음백과

대조영

동의어 발해 고왕, 渤海 高王 다른 표기 언어 大祚榮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719(천통 21)
국적 한국, 발해
종교 불교
본관 협계(俠溪, 지금의 황해도 신계군)

요약 699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지린성에 나라를 세운 발해의 시조. 왕호는 고왕이며 이외의 정보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 정확하지 않지만 여러 기록에 의해 고구려의 후예로 추정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혼란하던 중 이를 기회로 삼아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 말갈족을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당 군대가 이를 알아채고 추격해오자 적군을 천문령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해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로 인해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됐고, 당 역시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됐다. 713년 최흔에 의해 발해군왕으로 봉해졌고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국으로 고쳤다. 사망 후 아들인 대무예가 왕위를 계승해 무왕이 됐다.

개요

왕호는 고왕(高王).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나 고구려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구당서 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그를 고구려인의 별종이라고 했고,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원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족속인데 나중에 고구려에 부속되었다고 했으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渤海考〉를 비롯한 우리의 선인들은 모두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고 있다.

주변정세

은 668년(고구려 보장왕 27)에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사실상 당이 장악한 곳은 요동(遼東) 일대에 불과했고,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 고종은 고구려가 망한 그해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고자 했고, 아울러 고구려의 잔여세력을 강제로 분산시켜 거세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강행하여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요하(遼河) 서쪽인 당의 영주(營州) 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3만 호 중에 대조영의 일가도 끼어 있었다. 즉 그는 당의 전후(戰後) 수습책에 희생되어 요하의 서쪽 영주에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영주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방은 일찍부터 지정학적 또는 국방상의 가치 때문에 전국시대 연(燕)의 진개(秦開)가 정복한 이후 역대 한민족 왕조에서 동북과 서북에서 남하하려는 비한족세력(非漢族勢力)을 가로막는 요충지였으며 동방 침략의 근거지였다. 마침 이무렵의 영주 부근에는 고비 사막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동남으로 세력을 뻗치려 하던 투르크족의 돌궐과 동쪽의 고구려 세력에 시달리며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을 방황하던 거란족이 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

ⓒ Kmusser/wikipedia | CC BY-SA 3.0

당은 이들 이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인 통치방법을 써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억압했다. 당은 거란족의 추장 이진충(李盡忠)에게 송막도호(松漠都護), 손만영(孫萬榮)에게는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의 직함을 주어 무마하면서 통치하고 있었으나, 당시 영주도독 조홰(趙翽)는 잔인함과 거란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그들을 자극했다.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이진충과 손만영은 696년 요서지방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예속민들이 굶주리자, 거란의 무리를 이끌고 예속민의 호응을 받아 조홰를 죽인 뒤 당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당은 토벌군을 보내어 그해 10월에 이진충을 죽였으나, 손만영 등은 반항을 계속하여 이듬해 3월 하북(河北)의 영평(永平) 부근에서 왕효걸(王孝傑)이 이끈 당 군대를 격파했다. 이 난은 돌궐의 힘을 빌려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당시 영주 부근에서 당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민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발해 건국과정

대조영은 이와 같은 당나라 동북정책의 혼란과 이진충의 반란을 기회로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황한 당의 측천무후는 회유책으로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조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다시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당하자 당은 추격군을 파견했다. 거란족 출신 장군인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 군사가 공격해오자 말갈족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했으며,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 군대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이동하면서 한편으로는 흩어진 말갈족을 규합했다. 당 군대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훈허 강[渾河]과 휘발하(輝發河)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이해고는 겨우 몸을 피해 되돌아갔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대조영으로 하여금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천문령 전투). 그리고 요서지역 거란족의 난으로 신성(新城)의 안동도호부가 공격을 받게 되어,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돌궐의 힘을 빌렸던 당이 결국 이 지역에 있어서 거란 및 해족(奚族)까지 포용한 돌궐의 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당 본국과 요동의 교통이 두절되면서 당으로서도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천문령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발해 건국의 객관적 정세를 형성한 것이었다.

천문령 전투

전쟁기념관에서 소장하고있는 천문령 전투 기록화이다.

ⓒ Zingu0418/wikipedia | CC BY-SA 4.0

천문령 전투 후, 대조영은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699년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정한 것은 고구려의 고토(故土)라는 점도 있지만, 요서의 영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밀림지대여서 방어상 유리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만주의 지리적 가치는 비단 전략상의 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는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노성(盧城)의 벼와 고대 전쟁에서 최대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솔빈(率賓)의 말, 위성(位城)의 철(鐵) 등의 특산물 생산지였다. 대조영은 동으로 빠져나와 먼저 이 철의 생산지였던 위성부터 점령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진국을 세우고 자립하자 곧 돌궐과 손을 잡았다.

돌궐과 손을 잡음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당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돌궐을 통해 당의 침략야욕을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으로서는 대조영의 자립을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무력으로 적대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에 당 중종(中宗)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長行岌)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다. 이에 양국 간의 화해가 성립되어 대조영의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가 당의 수도에 가서 입시(入侍)하게 되었으며, 당과의 평화적 외교의 기틀이 잡혔다.

당과의 화해는 대조영으로서도 호전적인 유목민족인 돌궐과의 불안한 동맹에서 벗어나 왕국의 영속성을 찾고 발전된 당의 문화 유입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후 에서는 대조영을 곧 책립(冊立)하려 하였으나, 거란·돌궐의 침구가 잦아 진국과의 교통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3년(당 예종 2) 최흔(崔忻)이 해로를 통해 요동반도의 뤼순[旅順]에 상륙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였다.

이에 대조영은 곧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국으로 고쳤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