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 ~ 5 >회분

2018. 11. 17. 02:06잡주머니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 연재를 시작하며 : 천년제국 로마의 원동력, 개…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0-13 11:44:00 최종수정 2017-10-13 11:44:37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행복한 로마인 이야기, 너무 재미있어요.”

“한눈에 정리가 되니 천년제국 로마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어요.”

필자는 몇 년 전 인간개발연구원 원장 시절에 주마다 ‘행복한 로마인 이야기’를 이메일로 회원들에게 발송했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독자나 로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게 된 것은 『로마인 이야기』를 가지고 리더십 코스를 개발하여 운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필자로 하여금 천년제국 로마에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로마인의 개방성과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접목할 수 있다면 선진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라는 고도성장의 기적을 이루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게다가 한류 열풍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2%가 있다. 바로 개방성과 시스템 구축이다. 천년제국 로마에 그 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당시 베스트셀러인 『로마인 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박원순 상임이사(아름다운 재단), 공병호 소장(공병호경영연구소), 배동만 사장(제일기획), 강영철 부사장(풀무원), 김언호 사장(한길사) 그리고 필자가 공동으로 리더십 코스를 개발하게 되었다. 2004년, 리더십 전문 교육기관인 인간개발연구원이 주관하여 “천년제국을 건설한 로마인들의 인간경영, 조직경영, 국가경영을 배운다”라는 주제로 <로마인 이야기 리더십 코스> 6주 과정이 개설되었다. 뜨거운 관심과 참여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몇 회만 진행한 후 아쉽게도 중단되었다. 6명의 저명 강사가 참여하다 보니 서로 바빠서 일정을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후 주로 필자가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왔다.

 

   필자는 강의를 계속하면서 천년제국 로마에 매료되었다. 로마에 관한 책이나 기사는 무엇이든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천년제국의 역사를 통해 서양의 과거와 현재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유익한 일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로마를 읽으면 행복해진다며 ‘행복한 로마 읽기’를 역설했다. 

 

   또한 로마와 우리나라가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반도 국가라는 점과 사람 외에는 자산이 부족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주변 국가들에 비해 열등감이 많았던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가 된 성공 요인을 본받으면 우리도 로마처럼 세계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이 솟아났다. 천년제국 속에 우리가 겪는 문제와 고민에 대한 해답이 있었다. 로마가 흥한 요인을 보면 우리의 발전이 보였다. 로마가 쇠망하는 요인을 보니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이 보였다. 

 

   필자가 리더십 코스를 개발하고 강의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와 리더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번에 한 권으로 정리하기로 결심한 데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천년제국 로마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다. 

로마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국인 만큼 책도 많고 자료도 많다. 쉽고 편하게 접근하여 천년제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요약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한 권으로 읽는 천년제국 로마’라는 주제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도록 했다. 로마를 알아야 서양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개방성과 시스템을 통해 글로벌 마인드를 얻기 위해서다. 

고도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등을 통해 고도성장, 압축 성장의 약점이 드러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글로벌 마인드가 절실히 필요하다. 로마 공화정의 성공 요인의 핵심개방성과 시스템이다. 로마 공화정의 강점을 보완하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창업과 승계의 리더십 관점에서 정리하기 위해서다. 

천년제국 로마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어 서기 476년서로마가 멸망했으니, 정확히 말하면 1,229년 동안 존속했다. 건국 초기 왕정시대 244년, 공화정시기 482년, 제정시기 503년이다. 이렇게 정치체제가 확립되어가는 과정을 ‘창업과 승계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았다. 역사는 창업과 승계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승계는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중요하다. 

 

넷째,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정신과 방법을 참고하기 위해서다. 

창업과 승계에 있어서 가장 성공한 모델이 창업자 카이사르후계자 아우구스투스 초대 황제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의 강점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로마가 공화정 체제였기 때문에 카이사르갈리아전쟁을 통해 영웅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매년 정권이 바뀌는 공화정의 한계를 깨닫고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帝政) 체제를 설계했다. 아우구스투스14년 동안의 권력투쟁을 통해 제정 체제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두 주인공을 통해 개혁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는 동시에 창업과 승계의 관점에서도 분석하려 한다. 

 

   그 밖에도 ‘팍스 로마나’ 200년과 로마의 쇠망 과정을 통해 흥하는 요인과 쇠망하는 요인을 비교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필자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닌 까닭에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로마 역사를 리더십 전문가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창업과 승계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동시에 오늘날의 인사 관리, 조직 관리, 자기계발 등과 연계하여 조직의 경영과 관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천년제국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에 관한 내용은 로마사 개론서로 정평이 나 있는 프리츠 하이켈하임『로마사』를 중심으로 하고,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테오도르 몸젠『몸젠의 로마사』, 에드워드 기번『로마제국 쇠망사』를 참고했다. 이 책들을 바탕으로 천년제국을 정리하면서 다른 자료도 참고했다. 

 

   로마사 연구의 권위자인 군산대학교 사학과 정기문 교수님께서 원고를 꼼꼼히 읽고 감수를 해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 이번에 『행복한 로마 읽기』 책의 중요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의 글을 통해 로마를 이해하고 공부하면서 천년제국의 성공 요인이 우리나라에 접목되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





기사입력 2017-10-13 11:44:00 최종수정 2017-10-13 11:44:37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 로마와 한국의 닮은 점은 무엇일까?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0-19 16:27:5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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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로마’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나요?” 

필자가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이란 주제로 강연을 시작할 때 처음 던지는 질문이다. 로마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다. 

 

   그러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와 같은 속담부터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와 같은 역사적인 한마디를 이야기한다. 또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황제, 로마법, 공중목욕탕처럼 로마의 위인이나 업적을 떠올리기도 하고, 〈벤허〉나 〈쿼바디스〉처럼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말하는가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로마에서 비롯된 관습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나라에 대해 이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에 대한 여러분들의 평소 생각이 바로 오늘 강의하려는 주제입니다. 그만큼 여러분들은 로마에 대해 조예가 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한 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스갯소리로 덧붙인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들은 ‘로사모’ 회원이 되셨습니다. ‘로마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로마사』 『로마제국 쇠망사』 등 로마에 관한 책을 읽었거나 로마에 관심을 갖고 로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로사모 회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와 한국의 닮은 점은 무엇일까? 

 

우선 둘 다 반도 국가라는 특성이 있다. 로마는 유럽대륙을 떠받치고 있는 장화 같은 모습이고, 한국은 아시아대륙을 짊어지고 있는 호랑이처럼 생겼다. 일제시대의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라고 비하하긴 했지만 말이다. 

 

   반도 국가는 대륙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으므로 대륙과 바다를 아우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인 동시에, 대양으로 진출하는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이 솟아난다.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무한한 꿈과 가능성을 키우게 된다. 로마는 이러한 반도 국가의 이점을 살려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광활한 만주벌판을 누비며 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천도 반도 국가와 대륙 세력의 장점을 살린 덕택이다. 통일신라 때 해상왕 장보고가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동방 무역의 패권을 잡고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 역시 반도 국가였기에 가능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국호를 고려라고 붙인 이유도 고구려의 옛 땅과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 국가는 대륙의 거대한 힘에 눌리면 왜소해지는 약점이 있다. 조선왕조가 대국인 명나라에 사대주의를 표방한 배경도 반도 국가의 현실을 받아들인 탓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로마와 한국은 반도 국가라는 숙명 속에서, 강점이 부각될 때는 융성했고 약점에 얽매일 때는 왜소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마와 한국의 또 다른 유사점은 세계화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경제에서 비교우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주식인 밀을 더 싼 곳에서 수입하고, 대신 비싸게 팔 수 있는 다른 작물을 심어 경제 효용을 높이는 전략을 채택했다.

 

혼자서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없기 때문에 교역을 통해 생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같은 현실은 로마인들이 끊임없이 영토를 넓히게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지정학적인 위치와 나라가 처한 환경을 제대로 인식한 까닭에 힘을 합쳐서 로마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자급자족하기에는 자원이 많이 부족한 나라다. 특히 오늘날처럼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한국은 시대적인 상황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며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다닌 것도 세계화 전략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어느 나라든 흥망성쇠가 있다. 천년제국 로마 역시 흥왕기가 있었고 쇠망기가 있었다. 역사란 어느 부분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개인에게 중요성이 달라진다. 로마의 흥왕기에 집중함으로써 지식정보화 시대인 오늘날의 문제를 인식하고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와 리더십을 찾아보자. <계속>​ 

 




기사입력 2017-10-19 16:27:50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3> 천년제국 로마의 역사 개관(기원전 753~서기 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0-26 17:14: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로마를 흔히 천년제국이라고 부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로마제국의 역사는 약 1,200년 정도가 된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고, 서로마제국이 476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정확하게 계산하면 1,229년간 존속했다. 『로마사』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등 많은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서로마제국에 국한해서 언급한다. 실제로 동로마제국1453년에 멸망하는 시기까지 포함한다면 2,200년이 넘지만, 필자 역시 서로마제국에 국한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국가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제국, 칭기즈칸의 몽고제국, 페르시아왕국, 청나라 등 인류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국가는 많았지만, 대개 300년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로마는 오랫동안 강성함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로마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다. 

 

   프리츠 하이켈하임『로마사』에서 로마 역사를 3단계로 구분했는데, 1,229년의 로마 역사를 왕정시대 244년, 공화정시대 482년, 제정시대 503년으로 나누었다. 왕정시대(기원전 753~509)는 로마의 건국 초창기로, 7명의 왕이 다스렸던 시기다. 로마 건국의 시조로물루스(Romulus) 왕인데, 로마(Rome)의 어원은 바로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대 왕 로물루스는 혼자서 독단으로 처리하는 전제국가를 선택하는 대신, 국정을 왕, 원로원, 민회로 구분하여 3권분립을 이루었다. 왕을 투표로 선출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 세습제가 아니라 종신제가 되도록 했다. 세습제는 왕위가 혈통에 의해 계승되지만, 종신제는 왕이 죽으면 다시 왕을 선출한다. 왕은 민회에서 선거에 의해 뽑고, 죽을 때까지 권력을 맡겼다. 

 

   그러나 로마 왕정7대 왕인 타르퀴니우스가 시민들의 신뢰를 잃으면서 붕괴된다. 그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이미 정통성을 잃었다. 선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 된 후에도 원로원민회를 무시하고 정치를 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를 ‘거만한 왕’이라고 불렀다. 결정적으로 왕정 붕괴는 그의 아들 섹스투스가 일으킨 유부녀 강간 사건으로 일어났다. 강간당한 당사자가 자결하자 시민들이 분노하여 궐기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로마 왕정은 건국 후 244년이 지난 기원전 509년종말을 맞았다. 

 

   그 후 로마는 공화정시대로 진입했다. 공화정이란 공공의 이익 또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국가라는 뜻이다. 공화정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1인 지배에 대한 거부감이 표출된 결과다. 로마인들은 일단 왕이 선출된 후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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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화정기원전 509년에 시작하여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하는 기원전 27년까지다. 공화정과 왕정의 차이점은 왕을 대신하여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왕정과 마찬가지로 민회에서 집정관을 선출하되, 임기가 1년밖에 되지 않고 2명씩 선출했다. 공화정집정관, 원로원, 민회라는 권력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로마는 공화정시대에 영토를 넓혀 제국을 건설했다. 공화정시대의 최대의 사건은 포에니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 시작하여 120년 동안 3차에 걸쳐 일어났다. 포에니전쟁을 끝으로 로마는 외부의 적을 모두 복속시켜 통합한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카르타고점령하여 명실공히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고,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전부 식민지로 만들었다. 로마를 위협할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사라지고 나니 내부 분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과 민중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이다.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 혜택은 귀족에게만 돌아갔다.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후퇴했다. 민중들은 토지 문제를 가지고 싸워야 했다. 이후 100년 동안 민중과 귀족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지루한 싸움이 지속된다. 집권 세력이 바뀌면 피의 숙청이 일어났고 살생부가 등장했다. 이때, 피로 얼룩진 숙청의 악순환을 끊겠다고 생각한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광활한 제국의 영토를 통치하려면 매년 정권이 바뀌어서는 안정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황제 체제를 구상했다. 원로원파의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고 한다며 암살 음모를 꾸몄고,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결국 브루투스 일파에게 암살당한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원로원과의 갈등으로 암살당하는 것을 보고, 원로원과 화해 무드를 조성하여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함으로써 원로원의 환심을 산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와 방향은 같지만 방법이 달랐다. 결국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황제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탄생했고, 기원전 27년제정시대가 열려 서기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 황제 체제가 이어진다.

 

   제정시대는 다시 원수정시대전제정시대로 구분된다. 원수정시대는 1인자, 즉 원수가 원로원의 승인을 얻은 체제로 동양의 전제군주제와는 달랐는데,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서기 284년까지 계속된다. 전제정시대서기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시작하여 서기 476년까지 지속된다. 전제정시대는 절대군주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이에 따라 원로원의 입법 기능은 사라지고, 황제가 집정관을 직접 임명하고, 법안을 제정할 때도 원로원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황제의 칙령으로 바뀌었다. 이 체제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 것이다.  <계속>​ 



기사입력 2017-10-26 17:14:00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4>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주식회사 로마(기원전 753~…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1-02 16:20:07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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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민족이든 전승(傳承)이나 전설이 있다.” 

우리 민족에게 단군 신화가 있듯이 로마에도 건국 신화가 있다. 이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이며 자연스러운 소망이다. 로마의 탄생도 전설과 함께 시작된다. 프리츠 하이켈하임『로마사』에서 “초기 로마에 관한 고대 역사 전승에는 진실과 허구, 전설과 애국적 발상이 뒤섞여 있다”며 그 한계를 지적한다. 

 

   이는 초기 로마에 관한 자료를 보면 자명해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로는 리비우스 『로마사(Ab Urbe Condita Liber)』, 그리스 역사가 디오니소스 『고대 로마사』, 그리스인 디오도루스 시쿨루스 『세계사』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은 기원전 1세기 말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글을 썼다. 고대 로마에서 왕정시대 공화정시대에 관한 자료 리비우스『로마사』가 가장 중요하다. 리비우스는 로마인들의 뿌리를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던 ‘트로이전쟁’에서 찾는다. 

 

   “트로이의 패장 아이네이아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달아나 로마 근처의 해안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트로이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알바롱가 왕조를 창건한다. 그러나 12대 누미토르 왕 동생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비극이 일어난다. 누미토르에게는 레아 실비아라는 딸이 있었다. 아물리우스는 형의 핏줄인 레아 실비아가 후손을 갖지 못하도록 신전의 제사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실비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에 의해 임신하여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를 낳았다.”


   아물리우스는 시종에게 쌍둥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불쌍히 여겨서 테베레 강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신화는 계속된다. 

“이들은 떠내려가다가 암늑대에게 발견되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양치기에게 발견되어 인간 세계에서 양육되었다. 이들은 성장하여 아물리우스 왕을 몰아내고 할아버지에게 왕위를 되찾아준 후 새롭게 나라를 건설했다.” 

 

   그 나라가 바로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진 로마 왕국이다. 로물루스에게는 쌍둥이 동생 레무스가 있었다. 이들은 쌍둥이여서 누구를 왕으로 삼을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약속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에 세력 기반을 두었다. 로물루스는 언덕 주변에 고랑을 파고 성벽을 쌓은 후 “이 경계를 넘어오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공포했다. 그런데 레무스가 이를 무시하고 경계선을 넘었고, 물루스는 동생을 살해하여 골육상쟁의 비극을 낳았다. 

 

   로물루스는 우선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국정을 왕, 원로원, 민회로 구분하여 3권분립을 이룬 것이다.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되어 종교 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담당했다. 투표로 결정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습제가 아니라 종신제가 되었다. 또한 100명의 가부장들을 모아서 원로원을 창설했고,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원로원은 왕에게 자문을 해주었고, 민회에서는 왕과 정부 관리를 선출할 뿐 아니라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 타 부족과의 전쟁, 외국과의 강화조약 등을 승인했다. 

 

   정치체제를 구축한 후에 왕이 실천에 옮긴 또 하나의 과제는 이민족 여인을 강제로 데리고 오는 일이었다. 새 도시에는 인구가 부족했고, 로물루스는 노예든 방랑자든 원하는 사람 모두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새로운 로마 시민은 여자보다 남자가 많았다. 결혼을 하지 못한 총각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로물루스는 이웃 부족을 습격해 여자를 강탈해 오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강탈한 여자들을 돌려달라는 사비니족의 요구에 로물루스는 여인들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삼게 하겠다고 제안한다. 사비니족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고, 그 전투에서 로마 남자와 사비니 남자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때 사비니족 출신의 여인들이 싸움하는 두 무리 사이에 뛰어들어 평화조약을 호소했다. 

“평화조약을 맺지 않으려면 로마인들의 아내이자 사비니인들의 딸이며 누이인 우리를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주세요.” 

여자들의 눈물 어린 호소에 부끄러움을 느낀 남자들은 평화조약을 맺었고, 두 민족은 합병하여 더 큰 로마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로물루스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사비니족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시민권을 부여하고 원로원 의석도 제공했다. 로물루스가 취한 개방적인 자세는 미약하게 출발한 로마가 훗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초석이 된다. 

 

   『로마처럼 경영하라』의 저자인 스탠리 빙은 로마의 건국을 벤처기업의 창업에 비유했다. 또 사비니족과 통합한 것을 로마 역사상 최초의 기업 인수 합병으로 보았으며,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인 것은 경영권 다툼으로 해석했다. 사비니족과의 인수 합병은 우호적인 자세로 접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벤처기업이 성공하는 이유는 구성원들과 비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참여와 협력을 관계의 기반으로 삼기에 출발은 미약해도 결과적으로 창대할 수 있다. 로마라는 벤처기업은 점점 규모를 넓혀 ‘주식회사 로마’가 되어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로마제국을 건설하면서 인류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해나가게 된다. 

 

   로마의 역사는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기업 집단으로 발전한 글로벌 대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국가나 기업이 성장하고 생존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어느 기업이나 국가도 로마처럼 강대하면서도 장기간 존속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토록 장기간 동안 지속된 원리를 찾는다면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유익한 성장 전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기사입력 2017-11-02 16:20:07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5>시스템과 도덕성이 만든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1-09 17:15: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리비우스로마 공화정시대의 특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기원전 509년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왕의 역할은 매년 민회에서 선출되는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 집정관이 왕을 대신하게 되었으니, 집정관은 ‘1년짜리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집정관에는 누가 선출되었을까? 왕자의 강간 사건을 활용하여 왕정 타도까지 몰고 간 브루투스가 선출되었다. 또 다른 집정관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가 차지했다. 브루투스는 시민들에게 “로마는 앞으로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도록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함으로써 왕정 폐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브루투스공화정의 창시자가 되었다. 공화정이란 공공의 이익 또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부 시스템을 뜻한다. 당시에 왕정을 종식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브루투스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브루투스는 추방당한 타르퀴니우스 왕의 조카로, 브루투스의 어머니가 타르퀴니우스의 누이였으니 왕과 브루투스는 외숙부와 생질의 관계다. 

 

    브루투스란 이름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바보’를 뜻하는 말에서 생겨난 별명이라고 한다. 마지막 왕이 제멋대로 미친 사람처럼 권력을 휘두를 때 바보처럼 참고 견뎠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의 외척으로 누구보다도 왕정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독단적으로 통치하는 왕을 보면서 그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수없이 자문자답하며 나름대로 국가의 개혁 방안을 놓고 고심했을 것이다. 마침내 인내한 보람이 있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 역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개혁에 성공하자 브루투스라는 별명은 자랑스러운 성이 되었다. 혁명이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은 많지만 결실을 맺기는 어렵다. 브루투스는 이 점에서 진정한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두 가지다. 

 

첫째,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1년 임기의 집정관 민회에서 직접 선출하여 민심을 그때 그때 반영하도록 했다. 집정관은 콘술(consul)이라고 하는데 ‘함께 쟁기를 끄는 사람’이란 뜻으로 2명의 집정관을 선발하여 서로 협력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두 집정관은 매달 주요 행정 업무를 교대로 맡아 담당했다. 집정관은 움직일 때 경호관(릭토르) 12명의 호위를 받았다. 이들은 처형과 형벌권을 상징하는 파스케스(fasces), 즉 막대기 다발에 묶인 양날 선 도끼를 들고 다녔다. 

 

또한 원로원의 기능과 역할을 강화했다. 예전에는 왕의 자문 기구에 불과했으나, 원로원을 권위 있는 기관으로 격상시켰다. 원로원 의원 수초대 로물루스 왕 100명이던 것을 5대 타르퀴니우스 왕 200명으로 늘렸고, 공화정 출범 이후에는 300명까지 증가했다. 신흥 세력이 원로원에 참여한 결과, 젊은 사람과 새로운 귀족이 탄생했다. 

 

   원로원 출신 중에서 집정관을 비롯한 공직자가 선출되고 원로원의 신임을 받지 못하면 공직자로서 성공할 수 없었기에, 원로원은 실질적으로 정치의 중심 역할을 했다. 민회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고 선거와 입법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는 중요한 의사결정 기관이 되었다. 

 

둘째, 브루투스는 도덕성을 바탕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신구 세대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었고, 공화정을 반대하는 젊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성세대는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기에 공화정을 선호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기회가 줄어들었다. 왕정은 왕이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발탁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명문 집안의 젊은이들은 공화정에서는 그런 기회가 잘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서 국외로 추방된 왕을 복위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다. 음모자 중에는 집정관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있었다. 주위에서는 적당히 마무리하려 했지만, 이를 안 브루투스의 입장은 단호했다. 아들 둘을 냉정하게 신문한 후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가 아들을 법대로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과 지도자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브루투스는 해외로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에트루리아 동맹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최전선에 나서서 왕의 아들과 일대일로 싸우다 왕자를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500년 동안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집정관이 수없이 나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리더십 전통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브루투스의 위대한 점은 바로 공화정 시스템을 세웠을 뿐 아니라 도덕성을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브루투스를 강철처럼 엄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브루투스는 단련된 강철처럼 엄격하고 타협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대쪽 같은 그의 기질은 명상이나 교육으로도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독재 군주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힌 나머지, 심지어 독재 군주와 공모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들들까지 처형했다.”

 

   브루투스에 대한 좋은 평판과는 달리 동료 집정관인 콜라티누스는 시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도중에 하차했다. 그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는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진실성을 의심받으면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해외로 망명했다. 

공석이 된 자리에 발레리우스보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솔선수범한 브루투스를 본받아 공화정 제도를 더욱 보완하고 도덕성을 실천하여 공화정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기사입력 2017-11-09 17: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