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6 ~10> 회분

2018. 11. 17. 11:49잡주머니



칼럼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6>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탄생한 호민관 제도(기원전 …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1-16 16:55:00 최종수정 2017-11-22 10:29:26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공화정 초기 로마의 국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로마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는 로마 시를 흐르는 테베레 강 주변에서 하구까지 좁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탈리아반도의 북쪽에서는 에트루리아인이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남쪽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 타렌툼시라쿠사가 있었다. 또 선진국인 그리스의 아테네와 카르타고는 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한 로마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로마는 공화정을 도입한 후 곧바로 주변 국가들의 침입을 받았다. 왕정을 유지하는 인근 부족 국가들이 공화정으로 갓 태어난 로마를 얕잡아보고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쳐들어온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귀족과 평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주변 국가들 역시 로마의 저력을 알고 무력으로 지배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면서, 로마는 일단 공화정 체제의 위기를 넘겼다. 

 

   외부의 적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고 나니 내부의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정치적으로 집정관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은 귀족들이 독차지했다. 이에 따라 평민들의 정치적 소외감이 점점 높아졌다. 

로마에서 귀족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로마 시민은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된다. 토머스 R. 마틴 『고대 로마사』에서 로마 귀족은 왕정 초기에 약 130개 가문으로 소수에 속했다고 소개한다. 귀족들은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비는 종교 의례를 집전할 특별한 권리를 가지면서 배타적인 집단이 되었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높은 신분과 막대한 재산을 가진 덕택에 로마 최초의 사회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대규모의 추종자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지휘관이 되었다. 

 

   한편 평민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전쟁을 통해 체감했다. 매년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평민의 참여 없이는 공화정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힘의 역학 관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에든 갈등은 존재하고, 계기가 있으면 표면화된다. 평민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자, 그 갈등은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화정 초기 10여 년 동안 해마다 전쟁이 일어난 까닭에 평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인 농토나 가게를 장기간 비우게 되었다. 오랫동안 생업을 떠나 있다 보니 개인 경제는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귀족들은 넓은 농토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도 경제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은 귀족과 평민에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로마인 이야기』 1권에는 60세가 다 된 노인이 포로 로마노에 모인 군중들에게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농노로 전락한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농토가 있는 지역이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농토도 집도 불타버리고, 불타지 않은 가축은 도둑맞았소. 그 재산을 다시 일구기 위해서는 빚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이자는 너무 비싸고 수확은 예상 밖으로 적어서 빚을 갚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나는 법에 정해진 대로 채권자의 소유가 되어 로마 시민이면서도 노예보다 더 혹사당하는 농노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오.” 

 

   이 하소연을 들은 민중들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고 공감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평민들은 원로원에 “로마 시민권자가 노예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집정관이 약속을 하고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파업을 결정했다.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집정관이 군대 소집을 명령했으나, 평민들은 이에 불응하고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전쟁터로 나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로마 최초의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협상이 이루어져 평민들은 파업을 풀었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빚을 갚지 못한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법안은 민회에서 부결되었다. 민회는 경제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많은 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귀족 계급이 민회의 의결을 좌우할 수 있었다. 법안이 부결되었을 때 다시 평민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갈등이 반복되면서 귀족 계급의 지도자들은 마침내 기원전 494년에 평민들의 대표호민관(tribune) 제도를 도입하기로 양보한다. 

 

   호민관은 평민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민회는 귀족과 평민이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귀족 계급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평민회는 평민만 참석할 수 있으므로 명실공히 평민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다. 호민관은 2명이 선출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호민관의 임무는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으로, 그 신분은 신성불가침이며, 집정관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또 면책특권도 부여되었다. 호민관의 정원은 나중에 10명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과의 관계가 위기를 맞았다가 회복되고 다시 위기를 맞는 관계가 반복된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은 공화정 창설 이후 200년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이 시기를 ‘계급 간의 갈등 시기’라고 한다. <계속>​ 

 


기사입력 2017-11-16 16:55:00 최종수정 2017-11-22 10:29:26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7> 리키니우스 법,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하다(기원…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1-23 17:38: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단결과 분열의 악순환’은 어느덧 로마 공화정의 특징이 되었다. 공화정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로마는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면 귀족과 평민이 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위기를 넘기고 나면 다시 귀족과 평민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것이 관행이 되다시피 했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이 침입할 때도 귀족과 평민의 내분이 계속되고 있었다. 켈트족은 북유럽의 삼림지대에 사는 부족으로 ‘갈리아인’이라고 불렸는데, 이탈리아반도의 북부에 있는 에트루리아 민족의 힘이 약화되면서 켈트족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켈트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목민이고 호전적이어서 짐승으로 불릴 만큼 야만스럽다고 소문나 있었다. 켈트족이 로마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쳐들어오고 있을 때 로마군의 지휘관이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원색적으로 호소하는 모습을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1권에서 이렇게 전한다.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가 끝난 뒤에도 우리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이다. 이번 적은 흉포한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기 때문에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켈트족에 패배하여 7개월 동안 로마 시를 야만족의 손에 무방비 상태로 넘겨주었다. 켈트족은 로마 시내를 무법천지로 만들면서 폭행과 살생과 약탈을 일삼았다. 로마 시내가 적에게 짓밟힌 것은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800년 후인 서기 410년 로마제국이 멸망할 무렵에 야만족인 서고트족 점령당한 것이었다. 켈트족의 침입은 그만큼 로마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로마인은 켈트족에 “몸값을 지불할 테니 로마를 떠나달라”고 협상을 제의했다. 다행히 켈트족은 도시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받고 순순히 로마를 떠났다. 

 

   그러나 로마가 입은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로마인의 명예 실추는 말할 것도 없고, 야만족에게 어이없이 굴복한 로마에 다른 부족들이 등을 돌려 라틴동맹’이 공중 분해되는 외교상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라틴동맹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국가끼리 적이 침입하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함께 싸울 동맹군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가 힘이 없어지니 동맹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로마는 바닥까지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켈트족의 침입은 로마인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야만족의 침입에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국론 분열이었으므로, 국론이 통일되지 않으면 또다시 이런 치욕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모두 공감하게 되었다. 이렇듯, 로마인의 강점은 패배로부터 배우는 학습 능력이다.

로마인들이 지혜를 모아 만든 법률이 바로 기원전 367년에 제정‘리키니우스 법’이다. 허승일 교수 『로마 공화정』에서 리키니우스 법의 발전 과정을 설명한다. “기원전 367년에는 평민이 집정관에 입후보할 자격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첫 번째 평민 집정관이 366년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342년부터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한다. 결국에는 평민들도 모든 정치적·종교적 직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의 취지는 귀족이 평민에게 정치적으로 양보함으로써 평민의 지지를 얻어 이민족과의 항쟁 능력을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민이 집정관이 되어 정치에 참여한 것은 사실상 소수의 일부 평민층에 불과했다. 

 

   또 주요 공직을 거친 사람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법률도 제정했다. 집정관뿐만 아니라 평민 계급을 옹호하는 호민관도 원로원 의원이 되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는 호민관이 급진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스스로 견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또한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의 관계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설계되었다. 집정관은 매년 민회에서 선거를 통해 뽑히므로 단기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원로원의 의원은 선거를 통하지 않고 요직을 경험한 자로 뽑다 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관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같은 제도 개혁은 보수와 진보, 단기와 장기 정책이 균형을 이루게 해주었다. 그 결과 로마인은 귀족과 평민이 소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을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토머스 R. 마틴 『고대 로마사』에서 “로마의 정치사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통치권을 공유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벌어진 팽팽하면서도 때로는 폭력적인 역사였다”고 규정한다. 로마인들은 로마 시내의 요지에 리키니우스 법의 제정을 기념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 신전을 세웠다. 귀족과 평민에게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균등을 가슴속에 새기며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자는 염원을 담고 신전을 건축한 것이다. 리키니우스 법이 제정되고 80년 후인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 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호르텐시우스가 제정한 법으로, 평민들만 참여하는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국법으로 효력을 지니게 하여 평민회의 독자적인 입법권을 보장한 것이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법적 평등을 보장하여 기원전 5세기 이후 계속된 신분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와 같이 로마 공화정은 필요할 때마다 민의를 반영하여 제도를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자존심을 정치 제도의 개혁을 통해 보란 듯이 일으켜 세웠다. 이것이 바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로마인의 저력이다. 이제 귀족과 평민은 국정의 동반자로서 손을 잡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주변의 국가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키며 로마제국을 건설해나가는 일만 남았다. 단합된 로마의 힘 앞에 대적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사입력 2017-11-23 17:38:00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8> 드디어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다(기원전 270)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1-30 17:31: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정치 개혁으로 귀족과 평민의 단합을 이룬 로마는 타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내치의 안정을 이루었으니 다음 순서로 외치의 안정을 목표로 삼았다. 이 역시 켈트족의 침입에서 뼈저리게 느낀 교훈을 현실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로마는 이미 왕정시대부터 이웃 부족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라틴동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의 문제점은 로마의 힘이 강할 때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로마의 힘이 약해지면 동맹국의 이탈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켈트족의 침입이 좋은 사례다. 

 

   라틴동맹은 로마가 강할 때는 괜찮았지만 약할 때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흔히 외교 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성립된 개념이 ‘로마연합’이다. 라틴동맹과 로마연합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라틴동맹은 동맹국끼리도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로마연합’은 로마와 가맹국 사이에만 외교적 협정을 맺고, 가맹국과 가맹국 사이에는 어떤 협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가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로마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연합한 동맹국들의 안전과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이다. 로마연합에 참여한 국가들은 로마와의 전쟁에 패배했거나 로마의 힘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로마는 패자를 대하는 방식이 달랐다. 패자를 지배하여 군림하는 대신에 패자를 파트너로 인식하고 공동 경영자의 자세를 취했다. 당시에는 전쟁에 지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파격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패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신 로마에 대한 강력한 충성을 요구했고, 로마가 요청할 때 동맹군을 파병해야 했다. 이는 나중에 로마가 제국을 건설할 때 큰 자산이 된다. 로마 시민과 동맹군을 한없이 끌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연합은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었다. 로마가 영토를 넓혀가면서 로마의 지령이나 파병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 시절에는 통신 시설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는 고속도로인 로마가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로마가도기원전 312년에 개설된 ‘아피아 가도’다. 감찰관 아피우스의 명령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후 로마가도는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로명을 지었다. 로마가도는 단순히 행정 도로였던 것은 아니다. 정치, 군사, 행정을 비롯한 다목적용으로 건설되어 로마제국 통치의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먼저 가도부터 만들어 속주국들을 신속하게 지배했다. 

 

   로마가 이탈리아 중남부를 제패하는 데 소요된 기간은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26년까지 14년이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동방원정으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걸린 세월이 기원전 334년부터 기원전 323년까지 11년이다. 

 

   리비우스 “만약 로마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전쟁을 벌였다면 로마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로마와 싸웠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군대에는 지휘관이 대왕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로마군에는 적어도 11명의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에는 지휘관 자리가 비어도 항상 대체할 지도자가 있었다. 로마군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에 따라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개인의 전략과 전술이 뛰어나 개인의 리더십으로 움직였으니, 대왕의 유고시에 그를 대신할 지도자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의 대결은 개인과 조직의 대결인 까닭에 최종 승리는 조직의 승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도자의 ‘승계 시스템의 차이’가 알렉산드로스와 로마의 운명을 갈라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의 차이 때문에 로마군은 전투에 지더라도 다른 지도자가 대신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군은 전투에서 지면 전쟁에서도 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로마가 반도를 통일할 때 가장 어려움을 겪은 민족이 삼니움족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산악지대에 거주한 민족으로, 조직력이 강하고 게릴라 전술에 뛰어났다. 이 민족을 상대로 로마군은 기원전 343년부터 290년까지 3차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고, 정복하는 데 무려 50여 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로마군을 괴롭힌 적은 이탈리아반도의 발뒤꿈치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식민시 타렌툼과의 대결이었다. 타렌툼의 그리스인들은 북부 그리스의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로스는 한니발 장군이 병법의 스승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였다. 기원전 280년 전쟁이 시작되자 피로스는 이탈리아로 쳐들어와 로마군을 두 차례나 크게 패배시켜 로마군을 긴장시켰다.

 

   사이먼 베이커 『로마의 역사』에서 ‘피로스의 승리’를 소개했다. 피로스는 그리스제국을 이룩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승리를 위해 너무 많은 군사가 희생되어 피로스 왕은 “이런 식으로 한 번만 더 승리한다면 우리가 끝장나겠군!”이라고 말했다. 이후 겉으로 이기고 속으로 치명상을 입는 허울뿐인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비유하게 되었다. 

 

   피로스는 초반에는 승리하여 로마인들을 긴장시켰지만, 기원전 275년 로마군과 로마연합군의 협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로마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주목받기 시작했고, 드디어 기원전 270년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꿈을 이루었다. 이제 로마는 지중해로 힘차게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 

 





기사입력 2017-11-30 17:31:00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9>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 장군(기원전 2…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2-08 10:54:00 최종수정 2017-12-08 10:57:57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전쟁, 전쟁 그리고 또 전쟁.” 

   전쟁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주변 국가들을 장악하여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계속된다.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전쟁이 없었다면 로마 역사도 세계적으로 조명받지 못하지 않았을까? 전쟁을 끝내려면 평화를 선언해야 한다. 이 평화는 로마가 더 이상 넓힐 영토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했다. 로마 공화정은 전쟁을 통해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갔으니, 전쟁은 로마의 성장 엔진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270년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지중해의 강자인 카르타고와 운명적으로 부딪혔다. 원래 로마와 카르타고는 오래전부터 평화조약을 맺은 관계였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에만 머물렀다면 이 조약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반도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로마가 지중해의 승자가 되려면 카르타고와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카르타고와는 3차에 걸쳐 전쟁을 치른다. 반도를 통일한 6년 후인 기원전 264년에 시작해서 기원전 146년에 끝났으니 무려 120년 동안이나 계속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포에니전쟁’이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의 주민(페니키아인)’을 포에니라고 불렀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경 페니키아인들이 지금의 튀니스 만에 세운 나라로, 리비아에서 지브롤터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한 후 에스파냐와 시칠리아 섬까지 식민지로 만들어 지중해의 패권을 쥔 해상 강국이었다. 

 

   1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64~241)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중간에 있는 시칠리아의 영토와 제해권을 수호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을 무대로 일어났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패하여 시칠리아를 로마에 빼앗기고 만다. 2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18~201년)한니발 장군이 주인공이다. 그는 이미 9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에스파냐로 향하면서 “평생 동안 로마를 원수로 생각하고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해 헌신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키우며 전쟁 준비를 하여 2차 포에니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 역시 17년 동안 계속되면서 로마를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리비우스 “한니발의 리더십하에 치러진 2차 포에니전쟁은 전쟁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이다”고 할 정도였다.

 

   한니발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로마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그는 역발상으로 로마를 공격했다. 로마와 지중해에서 국지전을 벌이는 것은 불리하다는 판단하에 로마의 심장부에 직접 뛰어들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군대를 이끌고 역사상 처음으로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가 이끈 군대는 보병 5만 명, 기병 9,000명, 전투용 코끼리 37마리였다. 당시에 코끼리는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신무기였다. 한니발은 자신의 그리스어 교사실레노스를 기록자로 대동했다. 그가 역사와 기록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과정 등이 알려진 것은 바로 실레노스의 기록 덕택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니발의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한니발은 부하들을 어떻게 감동시켰을까? 병사들이 추위에 떨면 그들과 함께 같은 막사에서 밤을 새우며 따뜻한 인간미를 나누었다. 병사들이 탈진하여 휘청거리고 쓰러질 때 “고지가 저기인데 여기서 쓰러질 수 없다”며 장차 받을 기쁨과 영광과 보상을 상기시켰다. 이렇게 해서 15일 만에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했고, 마주치는 로마 군대마다 쳐부수며 로마인의 간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승승장구하던 한니발칸나이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둔다. 군사적 천재성, 전략, 용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역사에 남을 만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함정에 빠진 로마군은 학살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참패했다. 몸젠『몸젠의 로마사』에서 로마군이 완벽하게 전멸한 사례라고 평가하면서 양쪽의 피해 상황을 기술했다.한니발은 6,000명이 채 못 되는 병력을 잃었다. 하지만 로마군은 7만 6,000명 중에서 집정관 루키우스 파울루스와 대리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장교들의 3분의 2, 원로원 의원 80명을 포함한 시신 7만 구가 전장을 뒤덮었다.” 이 소식이 로마와 동맹국들에 전해지자, 일부 동맹국과 식민시가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다. 한니발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다. 소수의 정예부대만으로 적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는 승리를 바탕으로 동맹국들의 이탈을 노려 합류하는 전략을 구사하려 했는데, 그것이 일단은 맞아떨어진 셈이다. 

 

   로마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항복 조건을 제시하는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싸울 것을 결의했다. 로마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항상 단결하여 승리를 이끌어내는 인내와 도전과 희생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니발을 맞아서도 장기전으로 맞서는 전략을 세웠다. 

 

   지구전을 지휘하는 리더파비우스 장군이었다. 오늘날 전투에서 지구전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가 장기전으로 전환하자,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 남부로 방향을 틀어 동맹국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몇몇 동맹 도시들이 한니발 쪽으로 돌아섰지만, 대부분의 동맹 도시들이 로마와 의리를 지키며 협조했다. 이것이 한니발에게는 오산이고, 로마에는 저력이 되었다.




 

 


기사입력 2017-12-08 10:54:00 최종수정 2017-12-08 10:57:57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0> 한니발을 패장으로 만든 젊은 스키피오 장군(기원전…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2-14 17:23: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한니발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라.” 


   한니발은 병법의 천재이기에 정공법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로마가 택한 전법은 지구전으로, 한니발은 피하고 한니발이 없는 다른 부대는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한니발을 뒤따라가되 제 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이다. 

 

   지구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로마는 두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첫째는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하는 일이다. 둘째는 다른 동맹국들이 한니발에 동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연합의 결속을 강화해나갔다. 로마의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에 한니발은 17년간 외로운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때로는 조용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움직였다. 한니발이 움직이면 로마군도 따라서 움직이지만, 정면으로 싸우지는 않으니 한니발도 기운이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니발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남부 지역에 틀어박혀 있던 한니발기원전 211년 로마로 이동했다. 로마 시내를 바라보며 싸움을 걸었지만 로마군은 방어만 할 뿐이라서 한니발은 단념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로마인들 사이에 “한니발이 문밖에 와 있다”는 말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시대 때 “순사가 온다”고 말하면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쳤듯이, 한니발이 로마인들에게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한니발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지구전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젊은 스키피오 장군이다. 스키피오는 24세 때 에스파냐에서 한니발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지루한 공방전을 끝내려면 한니발이 로마를 침략한 방식인 ‘한니발의 전략’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역발상이었다. 스키피오는 발상을 전환하여 로마군을 이끌고 한니발의 터전인 에스파냐 고국인 카르타고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한니발이 로마에 있는 틈을 이용해 에스파냐를 공략했고, 카르타고인을 그곳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한니발의 고국인 카르타고를 공략하자고 제안했다. 

 

   로마 원로원은 선뜻 스키피오의 주장을 수용하지는 않았으나, 스키피오를 집정관으로 삼아 제한적으로 권한을 주어 카르타고를 공격하도록 했다.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공격하자, 스키피오의 예상대로 카르타고 본국에서 한니발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다. 기원전 202년, 한니발은 고국으로 건너와 스키피오의 군대를 맞아 싸운다. 운명의 결전이 그 유명한 자마전투다. 전투에 앞서 한니발의 요청에 의해 스키피오와의 평화회담이 이루어졌다. 이때 한니발은 더 이상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를 휘저으며 다니던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리비우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경험에 의해 운명의 여신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배웠소. 그대는 아직 젊고,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에서 항상 승리가 그대와 함께해왔기에 운명의 저편을 아직 모르고, 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까 염려하오. 그러나 그것들은 기억해둘 가치가 있을 것이오.”


   한니발이 말을 마치자 스키피오가 입을 열었다.


   “장군은 일전에 깨어진 조약에서 이미 카르타고가 수락했던 것보다 더 약한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소. 그런 알맹이 없는 양보를 로마에 내놓는 것은 무의미하오. 그러나 만약 장군이 원래의 조약을 인정하고 휴전 동안에 발생한 수송 선단의 약탈과 특사들에게 가해진 폭력 행위를 배상한다면, 원로원에 제안할 명분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권할 수밖에 없소.”

 

   참으로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까지 천하를 호령하던 한니발의 기개와 용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회담은 성과 없이 끝이 났고, 이제 양측의 전투만이 남았다. 다음 날 자마전투에서 로마군의 전사자는 1,500명에 불과했으나 한니발 쪽 전사자는 2만 명이 넘었고, 한니발 역시 초라한 모습으로 간신히 도망쳤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201년 로마의 승인 없이는 어디서든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강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로마는 두 차례의 포에니전쟁을 통해 기원전 201년 지중해 서부의 강대국 카르타고를 무너뜨렸다. 이어서 지중해 동부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원전 197년에 마케도니아, 기원전 190년에 시리아를 정복했다. 아프리카의 이집트는 포에니전쟁 때부터 로마의 충실한 우방이었다. 이제 지중해는 로마의 안마당이 되었고, 로마인들은 ‘우리 바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중해의 지배자가 된 로마는 50년 동안 속주 국가에 관용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의 지도층들은 관용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온건한 제국주의’‘엄격한 제국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당시 정치계의 거물인 카토가 앞장서서 주장했다.


   “카르타고에 제2의 한니발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카르타고를 완전히 궤멸시켜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가 용병을 모집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빌미를 잡아 강화조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원전 149년 3차 포에니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를 함락시켰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땅을 가래로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려 ‘신들에게 저주받은 땅’으로 낙인찍어 역사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한편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카르타고가 멸망하던 기원전 146년 로마의 속주가 된다. 기원전 146년은 로마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다. 카르타고가 멸망하여 로마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니, 로마가 사실상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지중해 주변 국가들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 로마제국을 건설했다. 한니발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는 데 걸린 시간은 50여 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니발전쟁이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니발은 평생 로마에 원한을 품고 로마의 멸망을 바라고 살았으나, 결과적으로 로마의 제국 건설에 일등공신이 되고 말았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권 서문에서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폴리비오스기원전 167년 그리스에서 1,000명의 인질과 함께 로마로 끌려왔다. 그는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의 조카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맡겨져 피보호인이 되었다. 기원전 150년, 그리스 인질들은 조국으로 귀환을 허락받고 폴리비오스도 돌아갔다. 그는 귀국 후에도 자주 로마를 방문했고, 3차 포에니전쟁 때는 총사령관에 선출된 스키피오를 따라 카르타고 종말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로마에 관한 최초의 신뢰할 만한 역사서인 『역사』를 저술했다. “왜 그리스는 스스로 무너져갔는데 로마는 계속해서 융성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역사서를 집필하게 된 배경을 서문에서 밝혔다. 

 

   “어지간히 어리석은 게으름뱅이가 아닌 한, 불과 53년 만에 로마인이 이룩한 이 위업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또한 어떤 정치체제 아래서 가능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폴리비오스의 책기원전 1세기 말 역사가인 리비우스『로마사』를 저술할 때 참고하기도 했다.

 








기사입력 2017-12-14 17: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