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1 ~ 15>

2018. 11. 18. 20:41잡주머니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1> 패자까지 포용하는 개방성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2-21 17:19: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로마제국의 광활한 영토는 대부분 공화정시대에 확보되었다. 포에니전쟁을 끝으로 로마는 서방에서 외부의 적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고도성장을 이룩한 셈이다. 기원전 509년에 출범한 공화정 체제360여 년에 걸쳐 이룬 결과다. 로마의 영토를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 서유럽, 소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에스파냐, 마케도니아, 그리스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이 식민지가 된 것이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초라하게 출발한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당시의 교통 상황을 고려할 때 세계적인 제국을 세운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1권에서 로마제국의 성장 비결을 이렇게 소개한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 아닐까?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개방성이 아닐까?”

 

   개방성이 모든 결점을 극복하게 했고, 그 결과 영향력이 확대되어 천년제국 로마가 가능해진 것이다. 로마 건국 초기에 로마는 주변 부족에 어떻게 대응해나갔을까? 로마는 패자를 예속시키기보다 파트너십을 인정하고 공동 발전을 모색했다. 약육강식이 일반화된 고대 사회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방식이다. 전투에 패배한 부족이나 동맹국에 똑같은 시민권을 주어 로마인으로 살아가도록 포용했다.

 

   이러한 로마의 개방성은 건국 초기부터 나타나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사건을 계기로 사비니족과 합병하여 공동으로 통치했다. 전쟁에 패한 알바롱가의 모든 주민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켜 똑같이 로마 시민을 만들었다. 무력에 의해 흡수했더라도 로마는 시민권을 인정하고 동화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로마는 피정복민을 예속시켜 노예로 만들지 않고 동반자로서 개척해나간 것이다. 이런 개방성 덕택에 로마의 외연이 확대되고 다른 민족과 국가에서는 로마와 파트너로서 동행하기를 원했다. 시민의 첫째 의무는 병역이기 때문에, 동화 정책을 통해 로마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패자조차도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로마의 동화 정책은 로마인의 특성이었다. 그러면 아테네의 시민권은 어떨까? 아테네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 아니면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인도 아테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었다.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아테네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다. 

 

   시민권이란 로마인에게는 로마인과 정신을 공유하는 것인 반면에, 그리스인에게는 피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의 개방성과 아테네의 폐쇄성이 운명을 바꾼 것이다. 로마는 전쟁을 치르고 나면 패배자에 대한 포용 정책 덕택에 시민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만큼 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역량도 커졌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카이사르갈리아전쟁을 치르고 정복했다. 그러나 그들을 동반자로 인식하고 로마화의 우등생으로 만들었다. 의사와 교사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시민권의 외연이 더욱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인은 기원전에 2중 국적을 허용한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에 가면 꿈과 재능을 펼칠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 능력 있는 외국인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 도시국가를 뛰어넘어 세계 국가로 비약하는 원천이 되었다. 

 

   로마는 사회,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었다. 종교에도 다양성을 인정했다. 다신교를 믿다 보니 신이 30만이 넘었다고 한다. 속주의 종교와 문화는 인정하고 유지하도록 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어를 지식 언어로 숭상했다. 로마는 승자였지만,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승자의 언어인 라틴어와 패배자들의 공통어였던 그리스어를 대등하게 사용하여 2개 언어를 사용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점령지의 문화라도 로마에 유용하다면 수용해서 로마화했다. 훗날 중동의 작은 나라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의 종교에서 발전한 기독교를 처음에는 박해했지만, 결국 제국의 종교로 수용하고 국교로까지 인정하는 포용성을 보여줬다.

 

   개방성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개방적인 마인드에서 유연성, 포용성, 다양성이 비롯되었다. 개방성은 열린 마음, 열린 사회를 만들어 로마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천년제국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지만, 세계 최고 학부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로마는 최고 학부를 로마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로마의 지도층 인사와 자녀가 그쪽으로 유학을 가게 했다. 

 

   개방성의 결과는 놀라웠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로마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로마의 식민지였음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자긍심을 가졌다. 영국의 처칠 수상 “대영제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해협을 건넜을 때 시작되었다”며 로마와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우리의 언어를 말살하고, 심지어 창씨개명을 통해 이름까지 없애려 하지 않았는가? 식민지를 경험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감정과 비교할 때 로마의 개방성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 


기사입력 2017-12-21 17:19:00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2> 로마가도와 만리장성은 무엇이 다를까?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7-12-28 17:42: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7세기 프랑스 시인 라퐁텐의 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로마인 이야기』 12권의 제목으로 정했다. 사회 간접자본을 뜻하는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로마인이 ‘인프라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인프라를 중시했다며 인프라에 대한 정의를 종합적으로 내리고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한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인프라에는 도로, 교통, 항만, 신전, 공회당, 광장, 극장, 원형 투기장, 경기장, 공중목욕탕, 수도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다만 이것들은 하드웨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인프라이고, 소프트웨어적인 인프라에는 국방, 치안, 조세에다 의료, 교육, 우편, 통화 등의 시스템까지 포함된다.”

 

   인프라의 상징은 로마가도다. 로마가도는 오늘날 속도로와 같다. 최초의 로마가도는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다. 이 도로는 로마의 감찰관인 아피우스가 도로 건설을 입안하고 직접 총감독을 맡았다. 그는 로마 수도(水道)를 최초로 건설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피아 가도 이후에 모든 로마가도에는 그 길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아피아 가도에 이어 아우렐리아 가도, 플라미니아 가도 등이 차례로 건설되었다. 기원전 300년대에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고속도로를 닦았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로마는 영토를 확장하면 반드시 길을 먼저 만들었다. 로마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까지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는 로마가도가 놓였다. 로마가도는 1차적으로는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하고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군사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물류가 흐르는 경제적인 도로로서 상인과 무역상, 관리, 여행가가 오가며 지식과 정보가 흘렀다. 로마가도가 로마제국의 근간이 된 것이다. 

 

   군사 목적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도로는 가능한 한 평탄한 직선으로 건설되었다. 길을 평탄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반이 약한 습지대에서는 말뚝을 많이 박아 토대를 쌓고 그 위에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강이나 계곡에서는 길과 같은 높이로 다리를 만들어 도로가 지나가도록 했다. 로마가도의 포장 구조는 어떠했을까? 단면도를 보면 오늘날의 포장 구조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차도는 4미터이고 인도는 양쪽에 3미터이니 가도는 10미터 폭이었고,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여 이동 속도를 높였다. 차도의 깊이는 1미터 정도로 배수가 잘되도록 설계했다. 도로 중앙부는 높이고 가장자리는 낮게 아치형으로 만들어 비가 오면 빗물이 가장자리로 고이게 설계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기원전 120년경에 최초의 도로 관련법인 ‘셈프로니우스 도로법’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법안은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입안했다. 이 법에 따라 모든 로마가도에는 1로마마일마다 돌기둥이 세워져 표지판의 역할을 했다. 1로마마일은 로마시대에 1,000걸음에 해당하는 거리로 약 1.5킬로미터다. 1로마마일 이정표에는 가도의 출발점에서 몇 번째 표지인지 표시해놓아 수도 로마와의 거리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면 스무 번째 이정표에 이른 사람은 로마에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가까운 도시와의 거리도 표시되어 있어 다양한 정보를 알리는 게시판 역할도 했다. 

 

   로마가도의 신속성은 어느 정도일까? 인류가 로마가도의 이동 속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철도가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이었다고 하니, 로마가도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로마가도는 수도 로마를 떠날 때는 12개에서 시작했지만 로마제국 전역으로 뻗어나간 돌로 포장된 간선도로는 375개이고, 그 전체 길이는 8만 킬로미터다. 자갈로 포장된 지선을 합치면 15만 킬로미터나 된다. 로마가도는 로마제국 전체를 그물망처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도의 1차적인 목적이 신속한 군사 이동이었던 만큼, 역으로 로마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는 그만큼 불리한 환경이 되고 만다. 한니발도 로마가도를 이용하여 이탈리아반도를 유린하고 다녔다. 로마제국의 말기에 야만족이 로마를 침입할 때도 로마가도를 활용했다. 

 

   로마가도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비교된다. 만리장성기원전 215년 진시황이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21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만리장성을 재건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성벽을 쌓아 야만족의 침입을 막고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진시황 때부터 쌓아올린 성벽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건설하여 명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만리장성은 연장 길이 2,700킬로미터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6,350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성벽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기본 목적은 사람과 정보의 차단이다. 방어를 위해 소통을 막고 차단하는 폐쇄성이 기본이었다. 불로장생을 원했던 진시황기원전 210년에 사망했고, 그의 사후 농민반란 등 사회혼란이 일어나 기원전 206년진나라가 멸망했다. 성벽으로 차단의 벽을 높이 치고도 통일국가를 이룩한 후 15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로마는 아피아 가도에서 서로마가 망할 때까지 800년 동안이나 유지되었다. 나아가 로마는 망했어도 로마가 만든 가도는 오늘날까지 과거 로마제국의 전역에 남아 있으니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기사입력 2017-12-28 17:42:00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3> 벤치마킹에 뛰어난, 학습하는 사람들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1-11 16:49:47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13. 벤치마킹에 뛰어난, 학습하는 사람들

 

   로마 시민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실천하는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부족한 점을 배우지만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로마화하여 받아들이는 유연성이 있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 시찰단국인 그리스를 1년 동안 방문하여 보고 느끼고 배운 것을 로마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했다. 12표법의 제정이 대표적이다. 


   기원전 3세기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초반에 로마가 고전했다. 타 민족과의 싸움을 통해서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태도가 로마인의 특성이었던 만큼, 삼니움족이 사용한 투창의 효력에 주목하여 당장 그것을 도입했다. 전투 중에 있는 적이라도 배울 것은 배우고 실행에 옮기는 학습 능력은 놀라운 것이다. 

로마인은 1차 포에니전쟁 때 해운 강대국인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카르타고의 강점을 벤치마킹하여 배웠다. 당시에 카르타고는 5층 갤리선을 120척이나 소유하고 있었으나, 로마는 3층 갤리선 밖에 없었다. 로마는 자력으로 배를 건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카르타고를 모방하기로 했다. 마침 로마가 포획한 카르타고의 5층 갤리선이 있었다. 로마는 그 배를 분해하여 구조를 파악한 후 그대로 복제하여 5층 갤리선을 만들었다. 자신감을 얻은 로마는 5층 갤리선을 100척이나 만들었다. 누구에게든 필요하면 배우겠다는 학습하는 능력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어 1차 포에니전쟁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로마인은 속주국인 그리스의 선진 문화를 인정하고 배우려 노력했으며, 그리스의 언어와 교육을 배웠다. 그래서 노예를 자녀들의 스승으로 삼아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스 출신 노예를 고용하여 그리스어를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 카이사르갈리아 출신 노예에게 배웠다. 


   당시에 최고 학부그리스의 아테네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이곳에는 아카데미아(Academia)와 무세이온(Mouseion)이라는 세계적인 연구 기관이 있었다. 로마는 최고 학부나 연구원을 로마로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녀들을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유학시켜 학문과 문화를 배워 오도록 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찾아가 배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아카데미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철학자 플라톤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학교다. 기원전 387년경에 세워져서 서기 529년경까지 존속하면서 플라톤 학파의 교육장으로 활용되었다. 


   무세이온은 박물관을 뜻하는 영어 뮤지엄(museum)의 어원이다. 무세이온은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에 세워진 학술원으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서 장군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립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문화와 문명을 아는 인물이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대 왕들은 사비를 털어 세계적인 학자들을 초빙했고, 수당은 물론 생활비까지 제공했다. 그런 만큼 무세이온 역시 강당과 도서관, 연구동, 동물 관찰을 위한 우리, 천문 설비 등과 함께 생활에 필요한 각종 편의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로마는 상대방의 강점을 인정하고 배우며 활용하는 지혜가 있었고, 이는 경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시칠리아 섬의 밀은 질이 좋고 생산성이 높았기에 이곳에서 수입하고, 로마가 잘하는 포도, 올리브 등의 작물을 재배하도록 했다. 시장경제를 실천한 것이다.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학습 능력의 한 방법이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생생한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실패는 거쳐야 할 과정이다. 로마는 실패하면 반드시 실패로부터 배웠다. 실패를 바탕으로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장수가 전쟁에 패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어 실패를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그리스인보다 지성적으로 열등하고, 체력적으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적으로는 에트루리아인에게 밀리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에 딸린다고 인정할 만큼 열등감의 화신이었던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오노 나나미“부족한 지성을 벤치마킹으로 배웠고, 부족한 체력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보완했고, 기술력은 기술자를 포용하여 보완했고, 경제력은 시장 원리를 받아들여 극복했다”고 설명한다. 


   로마인은 공자가 말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즉 “배우고 제때 실행하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학습 능력과 학습 조직을 가진 민족이다. 상대방의 강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드는 탁월한 벤치마킹 능력, 이것이야말로 세계 제국을 만든 로마의 힘이었다. 

 











기사입력 2018-01-11 16:49:47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4> 모든 것을 매뉴얼로 만드는 사람들 본문듣기

  • 기사입력 2018-01-18 17:47: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로마의 또 다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바로 매뉴얼이었다. 매뉴얼이란 사용 설명서. 원칙과 방향을 정하고 실행 절차와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매뉴얼을 보고 움직이면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로마인은 모든 것을 매뉴얼로 만들어서 매뉴얼 공화국이라고 할 정도였다.

 

   대표적인 집단이 로마군이다. 로마군은 군인들이 할 일을 매뉴얼로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 일찍이 지식 경영을 실천한 것이다. 일본의 노나카 이쿠지로 교수지식경영에서 지식을 암묵지(暗黙知) 형식지(形式知)로 나눈다. 암묵지는 학습과 체험을 통해 개인에게 습득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의 지식이다형식지는 암묵지가 외부로 표출되어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을 말한다. 지식경영이란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막사를 짓고 행군을 하는 등 군인들의 움직임을 매뉴얼로 만들어 공유함으로써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했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2에서 로마인이 매사를 교본처럼 체계화하기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소개했다. 교본 만들기는 매뉴얼 작성을 뜻한다. 로마군은 모든 행동 지침을 교본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군대를 모집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시민군인 로마군은 지휘관부터 병사까지 해마다 바뀌었기 때문에, 누가 해도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자세한 부분까지 미리 결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교본을 너무 잘 만들어서 공화정시대의 교본을 제정시대에도 바꿀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교본의 내용은 어느 정도로 자세했을까? 하룻밤 지낼 숙영지를 만들 때도 교본을 따랐다. 해질녘이 가까워지면 숙영지를 찾는다. 숙영지는 가로 600미터, 세로 800미터로 한다. 숙영지를 양분하는 중앙로를 만들고 제물을 바치는 성화대와 연설대를 설치한다. 마구간은 숙영지의 외벽을 따라 세운다. 화장실을 설치한다. 천막 설치가 끝나면 청소를 한 후에 식사를 한다.” 설거지와 불의 처리법도 규정에 따른다.야간에 일몰부터 새벽까지의 시간을 4등분하여 4교대로 보초를 선다. 날이 밝은 후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 후의 행동과 행군 속도도 교본에 따랐다.

   “식사 후 첫 번째 나팔이 울리면 천막을 걷거나 짐을 꾸린다. 두 번째 나팔이 울리면 그것을 짐마차에 싣는다. 세 번째 나팔이 울리기 시작하면 숙영지를 떠나 행군하기 시작한다.” 하루의 행군 속도와 거리는 세 종류로 분류한다. 평상시의 행군은 5시간에 25킬로미터, 강행군 시 7시간에 30~35킬로미터, 가장 심하게 강행군할 시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의 거리를 행군한다.” 로마군의 군율상벌도 상세히 정해져 있었다.

 

   기원전에 이처럼 상세한 교본을 가지고 움직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로마군이 무적 군대라는 명성을 얻고 세계를 제패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가도를 만들 때도 매뉴얼을 따라 건설했다. 차도와 인도의 너비, 바닥 구조, 배수로 설치 등이 상세히 규정되었다. 차도 너비 4미터, 인도 양쪽 3미터의 가도를 만드는 경우 바닥 기초공사 매뉴얼을 보자.

 

   “지표면에서 1~1.5미터 깊이까지 파고 내려가 최하층 부분은 바닥을 평탄하게 고른 뒤, 최소한 30센티미터 높이로 자갈을 깐다. 2층은 돌과 자갈과 점토를 섞어서 깔고, 3층은 인위적으로 잘게 부순 돌멩이를 완만한 아치형이 되도록 채워 넣는다. 최상층은 접합면이 딱 들어맞도록 사방 70센티미터 정도로 자른 마름돌을 빈틈없이 깐다.”

 

   가도를 건설한 후 관리하는 것도 전부 매뉴얼에 따랐다. 기원전 120년에 제정한 셈프로니우스 도로법은 바로 도로 관리에 관한 매뉴얼이다. 이 법에 따라 모든 로마가도에는 1로마마일마다 돌기둥이 세워지게 되었다.

가도뿐만 아니라 다리, 수도 등 인프라를 건설하는 경우에도 매뉴얼은 필수였다. 로마인들은 기록을 통해 표준화하고, 누구든지 매뉴얼을 따라 하면 가능하도록 설계해놓았다.

 

   오늘날 미국의 항공모함을 움직이는 일반 병사들의 평균 나이는 20대 초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젊은 병사들이 거대한 함대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모든 과정이 매뉴얼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미국의 군대 조직 역시 로마의 매뉴얼 시스템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사입력 2018-01-18 17:47:00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5> 신의와 명예를 존중하는 로마인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1-25 16:36:12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로마인은 인간관계에서 신의를 중시했다. 신의는 ‘피호(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라고 불리는 로마인의 특이한 사회제도인 파트로네스(patrones)와 클리엔테스(clientes)에 잘 나타나 있다. 파트로네스는 보호자를 뜻하고,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의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피보호자를 의미한다. 클리엔테스는 고객을 뜻하는 영어 클라이언트(client)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이 피호 관계는 로마의 건국 당시부터 존재했다. 로마의 초대 왕인 로물루스가 즉위할 때 100명의 가부장을 소집하여 원로원을 창설했다. 이 100명의 원로원 의원이 파트로네스가 되고 귀족의 주류를 이룬다. 평민들은 클리엔테스가 되어 귀족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형태를 유지했다. 

 

   파트로네스인 귀족다수의 클리엔테스와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들의 경제문제, 가정 문제 등에 조언하고 도움을 주었다. 반대로 파트로네스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면 클리엔테스들이 공동으로 귀족을 지원했다. 또 파트로네스가 공직에 입후보하면 클리엔테스들은 모두 선거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이 관계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라든가 법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적이고 관습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서 가장 중시된 것이 신의였고, 가장 악덕시된 것은 배신이었다. 신의를 중시하는 태도 때문에 재판에서 서로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일을 삼갔다. 신의를 중시하는 관계를 고려할 때, 증인으로서 위증하여 벌을 받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 관계는 당대에 끝나지 않고 세습되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권에서 사례를 소개한다.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폼페이우스의 대결이 막판에 이르렀을 무렵의 일이다.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보좌관인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 편에 붙기 위해 카이사르 곁을 떠났다. 폼페이우스 쪽은 이 소식에 기뻐 날뛰었지만, 라비에누스는 정치적 신조 때문에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라비에누스는 피체도 출신의 평민이었고, 폼페이우스는 그 지방 일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이었다. 다시 말해서, 라비에누스는 조상 대대로 폼페이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품페이우스 쪽으로 간 것이다.”

 

   또한 적과의 약속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로마인들의 생각이었다. 기원전 255년 1차 포에니전쟁 집정관 레굴루스는 포로가 되었다. 카르타고에서는 레굴루스를 강화 사절단으로 로마에 보내어 “시칠리아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강화 조건을 수락받게 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로마에 카르타고의 감시단과 함께 돌아온 레굴루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카르타고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강화를 절대 맺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카르타고로 다시 돌아가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그가 죽을 줄 알면서도 적지로 다시 돌아간 이유는 신의와 명예를 중시하는 로마인의 가치관 때문이다. 그렇기에 레굴루스는 신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로마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의를 중시하는 가치관은 자연스럽게 명예 존중으로 연결된다. 명예란 로마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긍심이다. 명예와 자긍심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하며, 신의와 명예와 자긍심이 어우러져 조국애로 발전한다. 명예는 또한 용기로 나타난다. 앞의 레굴루스의 사례처럼, 죽을 줄 알면서도 적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전쟁터에서의 용기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으로 이어졌다. 로마인들은 전쟁의 승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용맹함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도적인 생각을 가졌다. 자신의 행동이 곧 로마 전체의 행동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로마를 성장하는 국가로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다.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명예를 존중하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전쟁에서 패한 것이 곧 자신의 잘못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수는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명예가 이미 땅에 떨어진 셈이다. 그러니 두 번 처벌할 이유가 없다. 대신에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었다. 실패하면 반드시 실패로부터 배우려 했던 로마인이었던 만큼, 기회가 주어지면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명예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카르타고다른 나라는 달랐다. 전투에 실패한 장군은 본국에 소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1차 포에니전쟁에서도 패전 장군사형을 당했다. 이는 로마와의 차이점이었다. 로마는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였고, 카르타고는 실패를 부인하는 문화였다. 군대는 사기를 먹고 자란다. 전쟁에 패하면 사형하는 군대와 실패하더라도 만회할 기회를 주는 군대의 동기 부여 수준은 다르지 않을까? ​ 

 



기사입력 2018-01-25 16:3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