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國名 심층탐구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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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名 심층탐구.

멀리옴 2005-06-30 06: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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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國名의 由來는 정설이 없다.  


 - 시경 發肅愼이 나온다. -<管子>라는 책 '輕重篇' '發, 朝鮮不朝'에 처음 나온다 -조선이라는 말은 전국시대의 <管子>라는 책 '輕重篇'에 '發, 朝鮮不朝'에 처음 나온다.  


   유래설을 요약하면 

1. 水名(山-물수변 있음-水) 및 지명유래설.   장안(長安)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의 세 물이 있어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고 했다. 아마 낙랑(樂浪)이나 조선은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인 듯 싶다. 조선(朝鮮) 임금 만(滿)(漢書에 보면 滿은 燕人으로 성은 衛이다. 조선왕을 쳐서 없애고 자기가 왕노릇을 했다고 했다)이란 자는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할 때(연나라가 전성할 때란 6나라 중에 연나라가 전성해서 항상 두 나라를 침략하여 자기 나라에 붙일 때를 말함)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과 조선을 침략하여 자기 나라에 붙이고 관리를 두고 장세(瀗塞)(국경에 있는 요새)를 쌓았었다. 


2.아사달 유래설 단군조선의 도읍지이며 '아사'는 '아침' '처음' '첫' '새로운' '광명' '동녘' 동방' '태양' 등을 의미하는 고대의 우리말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아침(朝)을 '아사'라고 하는데 이 역시 고대 우리말이 그대로 옮겨 간 것임. '아사달'에서 '달'은 '땅' '벌판' '대지' '산' 등을 의미하는 말로, 현재까지도 음지를 '응달', 양지를 '양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음. 몽고어로 산山을 '타우tau'라고 하는데 이 또한 '달達'과 같은 뜻이다.   


3.肅愼유래설, ‘사기(史記)’에서는 “발(發)밝다는 뜻을 중국음(中國音)으로 나타낸 말”, “식신(息愼)”, ‘관자(管子)’에는 “발(發)”, “조선(朝鮮)”등으로 불렀고, 이외에도 중국인들은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예맥(濊貊 :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보고 있음)”등으로 불렀습니다. 앞부분에 나타나는 발(發)이나 조(朝)라는 말은 주로 뜻으로 표현한 것이고 뒷부분에 있는 ‘숙신’, ‘주신’ 등의 말은 이들 민족이 스스로를 부르던 명칭을 소리音로 나타낸 말입니다


 4.밝샌(아는 아래아. 白岳)유래설, 


5. 사람유래설 등이다. 전 세계적으로 원시 부족 및 씨족 국가는 '사람'이란 말로 그 이름을 삼았다.  고구려의 구리, 신라의 사로, 백제의 구다라, 가야의 가라, 나나이(이 땅의 사람), 몽골, 에스키모, 아이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조선은 됴션>조선이며, '됴'는 돋>돌>됴이다. '선'은 사나이, 어리산이(어리석은 사람), 산(아래아) 丁(훈몽자회), 손님 등에서 사람임을 알 수 있다."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를 볼 때마다 습수(濕水)의 습(濕)은 고어 '사', '새'에 해당하는 동(東), 열수(洌水)의 렬(洌)은 '올'(右/西)의 고어(古語)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떨굴 수가 없다. 산수(汕水)의 산(汕)은 조선(朝鮮)의 선(鮮)과 같이 '사람' 즉, '조선의 사람'의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의 위치는 산수(汕水)를 중심으로 하고, 동쪽에 습수(濕水)가, 서쪽에 열수(洌水)가 있어야 하고, 산수(汕水)는 광개토대왕의 부산(富山) 근처에서 발원하여야 할 것 같다.


 及<武王>滅<紂>, <肅愼> 來獻石 · 矢. <管>·<蔡> 畔<周>,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 

'무왕'에 이르러 '주'를 멸하자 '숙신'이 와서 석노와 고시를 바쳤다. 관숙, 채숙이 주를 배반하자, 이에 오랑캐들을 불러 유혹하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 드디어 동이를 평정했다. 


   <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前書》曰[<朝鮮王><滿>, <燕>人.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障. <漢>興屬<[燕]>, <燕王><盧 >反入<匈奴>, <滿>亡朦走, 度<浿水>, 居<秦>故空地, 稍役屬<朝鮮><蠻夷>及故<燕>·<齊>亡(任)[在]者, 王之, 都<王險>]也.}/$漢興屬[燕] 據《前書》[朝鮮傳]補.$//$及故燕齊亡(任)[在]者 據<汲>本·殿本改.$/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 於是<東夷>始通上京. <王莽>簒位, <貊>人寇邊. {《前書》<莽>發<高句麗>兵當伐<胡>, 不欲行, 郡縣彊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州郡歸咎於<高句麗侯><騶>, <嚴尤>奏言< >人犯法, 不從<騶>起, 宜慰安之.}/$因犯[法]爲寇 據《前書》[王莽傳]補.$/ <建武>之初, 復來朝貢. 時<遼東>太守<祭 >威 北方, 聲行海表, 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 故<章>·<和>已後, 使聘流通. 逮<永初>多難, 始入寇 ; <桓>·<靈>失政, 漸滋曼焉. 

   진나라가 육국을 멸하자 '회'와 '사이'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진섭'이 병사를 일으키자 천하가 무너지고 어지로웠다. 진섭이 군사를 일으키자 천하가 허물어지니, 연나라 사람 '위만'이 피하여 조선으로 가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전한서에 말하길 저선왕 '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이 전성기때 '진번'과 조선을 엮어 다스렸다. 성을 쌓아 사신이 이르는 것을 가로막았다. 한나라가 일어나 연라를 엮자, 연왕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다. '만'도 망하여 동쪽으로 갔다. '패수'를 건넜다. '진'의 옛 공지에 거하며, 옛 '연'과 '제'의 유민을 '조선'과 '만이'가 모아 왕위에 오르니 도성이 '왕검'이다. ] 그런지 백여 년이 되자 무제가 멸망시켰다. 이에 동이가 비로소 서울에 통하게 되었다. '왕망'이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맥'인이 변방을 침략하였다.[전한서에 '망'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호'를 치라 했지만 가고자 하지 않았다. 그 군현이 강하기 때문이다. 모두 망하여 변방으로 쫓겨났다. 인하여 법을 어기고 침범하였다. 고구려후 '추'가 책망하여 고을로 돌아가니 '엄우'가 '맥'인의 죄를 진언하였지만, '추'가 일어나 따르지 않고 이를 위로 하였다.] 건무 초년에 다시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 때 요동태수 '제동'이 위엄이 있으니 북방이 두려워 하였하니 그 소문이 바다 밖에까지 갔다. 이에 예맥, 왜, 한이 만 리 에서 조공을 받쳤다.  '장', '화' 이후로는 사신이 방문하고 서로 유통했고, '영초'에 어려운 일이 많아 비로소 들어와 침략하고 노략하기 시작했다. '환제'와 '영제'가 옳은 정치를 잃자, 이것은 점점 번져 나갔다 


初, <北夷><索離國>王出行,{[索]或作 [], 音度洛反.} 

처음에 '북이' '색리국'이 출행하였는데['색'은 혹은 '탁'으로 음이 '도락'으로 변했다  


<邑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읍루'는 옛날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동북쪽 천여리에 있다. 


<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前書》<元封>中,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四(部)[郡]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이로써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다. [전서에 '원봉'중에 '조선'을 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으로 하였다


< 句驪>一名<貊>(耳)

'구려'는 일명 '맥'이다.

 

自<女王國>東度海千餘里至<拘奴國>, 雖皆<倭>種, 而不屬<女王>. 自<女王國>南四千餘里至<朱儒國>, 人長三四尺. 自<朱儒>東南行船一年, 至<裸國>·<黑齒國>, 使驛所傳, 極於此矣./按:此[驛]字亦當作[譯].

 / '여왕국'으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구노국'에 이른다. 비록 '왜'의 종류이나, '여왕'에는 속하지 않았다. '여왕국' 남족으로 사천여리에 '주유국'에 이른다. 사람이 삼사척이다. '주유'에서 동남쪽으로 배로 일년을 가면 '나국'과 '흑치국'에 이른다. 사신이 전하는바 여기가 끝이다.['驛'자는 마땅히 '譯'이다] 


   - 재홍(安在鴻)의 고대사(古代史) 연구(硏究) : 고대(古代)를 영광스런 시대로 보고 고려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퇴영(退)」의 길을 밟아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중국 문헌에 보이는 이(夷)(저()) ·군자국(君子國) ·고죽국(孤竹國)(크치) ·기저국(己國)(크치), 부여의 제가(諸加) ·구태(仇台)(크치) ·간위거(簡位居)(큰우커) 등, 고구려의 을지(乙支)(우치) ·막리지(莫離支)(마리지) ·패자(沛者)(배치) · 발기(拔奇), 삼한(三韓)의 한기(韓岐) ·신지(臣智)(신지) ·읍차(邑借)(아치) ·험측(險側)(한지 ·검치 ·큰치) ·번예(樊濊)(번지) ·살해(殺奚)(살치) · 신운견지(臣雲遣支), 백제의 백제(百濟)(배치) ·아직기(阿直岐) ·백잔(百殘), 가야의 금관국(金官國)(큰기)등을 모두 기 ·지 ·치를 가리키는 위격(位格)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후세의 「촌뜨기」도 「촌따기」에서 온 것이고, 「촌따기」는 「지방의 장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비교언어적 해석방법이 언어학상(言語學上)으로 타당한 것인지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의 독창적 견해임에는 틀림없다. 예컨대 백(白) 맥(貊) 등은 「밝」의 표음(表音)이고, 발(發) 불(不)·비류(沸流)등은「발」또는 「불」의 표음이며, 예(濊)·부여(扶餘)등은「배어」의 표음이라는 것이다. 조선(朝鮮)이 수도를 백두산 부근의 백악(白岳)(아사달(阿斯達))에서 북쪽의 부여천반(扶餘川畔)으로 옮긴 이후가 곧 부여국(夫餘國)이 된다. 「가라」라는 명칭은 낙동강이라는 「가람」(강(江))에서 유래한 것이요, 그것은 또 변한(弁韓)(불한)의 이칭(異稱)이다. 가라의 정치제도와 법속은 부여(扶餘)및 삼한(三韓)과 동일한 것으로, 가령 금관국(金官國)은 「큰기」혹은 「큰치」국이며, 군자국(君子國), 기저국(己國)의 동명이칭(同名異稱)이다.- 


   - 한민족을 가르키는 가장 오래전의 종족명은 '숙신(肅愼)'이다. 그리고 한민족의 최초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의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도 바로 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한다. 말하자면, 숙신이란 조선인들이 자칭했던 종족명을 소리만을 따서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조선은 숙신과 비슷한 소리로 동쪽의 의미를 갖는 뜻을 따서 만든 국명이라는 이야기다. 이 숙신과 조선에 관한 기록을 위시해서 한민족의 조상은 예맥, 부여, 고구려, 발해 등으로 나타난다. 숙신과 같이 다원적인 의미를 갖는 종족명은 말갈과 여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예맥과 읍루, 물길만이 비교적 한 계통의 순수한 종족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이나 부여, 고구려는 종족명이었다기 보다 국명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즉, 숙신, 예맥인들이 세운 왕조가 바로 조선이나 부여, 고구려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아무튼, 숙신과 같이 말갈이나 여진도 그 종족 구성이 복합적이었다는 것은 남만주 주민들의 역사복원이라는 시각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남만주 주민들의 종족계통을 막연히 일원론적으로 생각하여, 숙신(진 이전)→읍루(한)→물길(후위)→말갈(수당)→여진(송 이후)이라 하여 이들을 모두 만주족으로 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서 역사를 이어 왔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의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고조선의 아사달(阿斯達)은 ‘밝게 빛나는 아침’, ‘광명을 가져다 주는 동방의 아침’을 뜻하며 여기에서 유래한 조선(朝鮮)이란 나라 이름도 ‘태양이 솟는 동방의 나라’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부여는 태양, 불을 의미하며, 고구려는 태양을 뜻하는 ‘고(高)’와 성스러우며 크다는 ‘구려(句麗)’를 결합한 것으로 결국 ‘태양이 솟는 신비한 나라’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또 옛말로 박달인 백제(百濟)는 ‘밝은 산’을, 신라는 ‘새 날이 밝는 곳’, ‘태양이 솟는 벌’을, 발해는 ‘밝은 해가 비치는 나라’, ‘밝은 태양이 솟는 나라’를, 고려(高麗)는 ‘태양, 신성하다, 거룩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에서 조선 때까지의 모든 국호들이 모두 꼭 같은 의미가 있다는 데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은 처음인 셈입니다. 공명성의 연구는 국호의 의미를 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각 나라 사람들의 시원(혈연적 계보), 건국 과정, 신앙과 염원, 고유 조선어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종합 분석한 것입니다. 일본말로 ‘아사(あさ)’라는 말은 아침이라는 말로 알타이어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조선이란 ‘해뜨는 밝은 아침’ 또는 ‘아침 해朝陽’, ‘동녘의 나라東國’, ‘해뜨는 나라日本’ 라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조선의 조(朝)는 뜻으로 사용된 글자이고 선(鮮)은 음으로 사용된 글자로 해뜨는 방향 또는 해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일본이라는 글자는 모두 뜻글자로 사용된 말이죠. 현대 일본어는 우리 고대의 이두(吏讀)와 유사하다는 것은 모두 아실 것입니다.


   금나라(청나라의 전신)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사기(史記)’에서는 “발(發)밝다는 뜻을 중국음(中國音)으로 나타낸 말”, “식신(息愼)”, ‘관자(管子)’에는 “발(發)”, “조선(朝鮮)”등으로 불렀고, 이외에도 중국인들은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예맥(濊貊 :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보고 있음)”등으로 불렀습니다. 앞부분에 나타나는 발(發)이나 조(朝)라는 말은 주로 뜻으로 표현한 것이고 뒷부분에 있는 ‘숙신’, ‘주신’ 등의 말은 이들 민족이 스스로를 부르던 명칭을 소리音로 나타낸 말입니다. 따라서 이제 ‘예맥’이란 ‘똥오줌이 붙은 표범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이라는 말이 아니고 ‘해뜨는 밝은 나라’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맥이라는 말이 음(音)을 빌어 표현한 말인데 이것을 오물을 의미하는 예(濊)와 이상한 짐승(貊)으로만 이해했다는 것이지요. 우스운 말이지만 의서(醫書)로 유명한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설문(說文)’, ‘남중지(南中志)’ 등에 이 맥(貊)이라는 짐승에 대해서 상세히 나와 있어 연구자들은 우리 민족이 이 맥이라는 짐승(상상의 동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니지요. 예맥이란 ‘해뜨는 동쪽의 밝은 나라(또는 그 나라 사람)’라는 말입니다(이 때 예는 ‘濊’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동쪽, 해 뜨는 곳이라는 말이죠). 참고로 예맥이라는 종족은 ‘관자(管子)’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허뻬이(河北)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선비나 동호 등도 모두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 소제기(紹帝紀)에 따르면, 예맥은 오환(烏桓)ㆍ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중원에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납니다 - 리지린의 연구에 따르면 황해 연안과 발해만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인 조이족(鳥夷族)과 예맥족이 융합하여 기원전 2천년 경에 숙신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맥족과 숙신, 선비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죠. 항상 알타이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에 이르는 민족들의 국가 명칭이나 민족 명칭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는 “밝다ㆍ밝은 태양明ㆍ새東ㆍ금같이 변치 않는 금(金)”이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서라벌’, ‘벌’, ‘서울’, ‘진국(辰國)’이라는 말도 모두 새東, 즉 해뜨는 곳을 표현한 말이라는 것입니다(양주동, ‘古歌硏究’). 


   ‘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해뜨는 곳을 의미하며(흉노열전)”, 부여는 불火 또는 明을 음독한 것이며 통상 부여 세(濊, 穢)로 불렀는데 이 세라는 말은 동쪽이라는 말을 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동이는 여러 가지 이름이 보이는데 아홉 종류를 합해 구이라 불렀다. 이들은 요동 일대에서 살다가 차츰 중국의 산동반도로 진출했고, 이어 회수 일대에서 살았다. 또 내륙 쪽으로 연달아 진출했다. 그리하여 은나라 말기에 두 차례에 걸쳐 정벌을 단행한 기록이 갑골문자에 나타난다. 그 뒤 중국 사람들은 동방의 종족을 두고 예맥(穢貊)이라 불렀다. 예맥족들은 혼하와 길림 일대,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지방, 춘천 또는 강릉지방에 살았다고도 한다. 예맥족을 부여와 고구려의 뿌리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예맥의 예는 ‘더럽다’, 맥은 ‘오소리(또는 담비)’라는 뜻이다. 야만이라는 말과 통한다. 


   이성계 조선과 화령(和寧) 두 가지를 골라서 하나를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은 옛 조선의 국명에서 빌려온 것이며 화령은 이성계가 태어난 함경도 영흥의 옛 지명이었다. 1393년 명 태조 주원장“동방 족속의 나라 이름으로는 조선이 좋을 뿐만 아니라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 이름을 본래대로 이으라”고 통고해왔다. 그동안 우리 역대 왕조에서 국명을 중국의 황제에게 지정해달라고 부탁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씨 왕조는 자주적 태도를 버리고 국명을 복수로 지정하여 승인을 요청했던 것이다. 조선의 역사=日出之也(朝鮮-아침의 고울 빛) 조선(朝鮮)=일출지야(日出之也)=일본(日本) 일본 섬의 나라들은 근세 이후에야 국명을 일본으로 부르면서 한반도 조선이 자기들 나라와 같은 나라로 취급하면서 전쟁을 시도했다 일본이 바로 조선이라는 입장이다 `아사달'에서 `조선(朝鮮)'이, `서라벌'에서 `신라(新羅)'라는 국명이 나온 것처럼 고유어의 지명에다 더욱 좋은 뜻을 가미하여 한자어 국명을 삼은 것이다. 


   고고학 자료를 보아도 고구려라고 부르는 집단이나 종족이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압록강과 혼강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철기문화와 농경을 기반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 정치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집단을 ‘나(那)’라고 불렀는데, 땅(地)이나 내(川), 또는 냇가의 평야를 뜻합니다. 곳곳에서 성장한 이들은 『삼국사기』『삼국지』조나(藻那), 주나(朱那), 소노(消奴), 절노(絶奴) 등등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돈황문서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위그르족이 남긴 기록 과거 돌궐인들이 고구려를 ‘무구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역시 ‘맥구리’와 통하는 말입니다. ‘무쿠리'라는 이름은 티베트의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서로마제국의 기록에는 무크리트(Mukruit)로, 동로마제국의 기록에는 '모굴리(Moguli)'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통상 고구려라고 부르는데, 당시에는 이를 어떻게 읽고 불렀겠습니까?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습니다만, 맥그리, 우구리의 예를 보아 아마도 ‘고구리’ 또는 ‘고우리’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비슷한 예가 중국 기록에도 보입니다. 즉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나 고우리로 부르는 것이 당시 발음에 근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구려의 뜻을 새겨 봅시다. 고구려에서는 성(城)을 ‘구루’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의 ‘구려’는 ‘구루’와 통하는 말로서 ‘성’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말의 골, 홀이란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고(高)자는 크다, 높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라는 이름은 대성, 큰 성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중원고구려비 - 고려라는 이름을 전하는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충북 중원군에 있다. ⓒ임기환      


   그런데 우리는 고구려란 이름만 알고 있는데, 고구려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도 불렀습니다. ‘고려’하면 흔히들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만을 생각하는데, 고구려도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명도 그대로 따온 셈이죠.      고구려가 언제부터 ‘고려’라고 불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5세기 이후의 중국 역사책에서부터 고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충청북도 중원 지방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에서도 고구려인 스스로가 ‘高麗’라고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비는 장수왕대왕 때 세운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아마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에서 ‘高麗’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사상 고려라고 불리운 왕조는 두 번 있었던 셈입니다. 부족의 이름을 예맥(濊貊)으로 한 것은 동쪽을 뜻하는 예와 밝음을 뜻하는 맥의 합성 한자 濊貊은 차자한 것, 朝鮮 韓 등도 그러한 광명과 관계가 있다. (예족과 맥족의 두 부족의 결합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음은 박재양 박사 2001년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한국문화연구4>"三國 遺事에 나오는 國名硏究-朝鮮을 중심으로"의 내용을 뽑아 옮긴 것이다.(출처:한국어원학회) "조선이라는 말은 전국시대의 <管子>라는 책 '輕重篇'에 '發, 朝鮮不朝'에 처음 나온다.  유래설을 요약하면 


1. 水名(山-물수변 있음-水) 및 지명유래설.  

2.아사달유래성,  

3.肅愼유래 설,  

4.밝샌(아는 아래아. 白岳)유래설,  

5. 사람유래설 등이다.  


   이 가운데 필자는 사람유래설을 지지한다.  전 세계적으로 원시 부족 및 씨족 국가는 '사람'이란 말로 그 이름을 삼았 다.  고구려의 구리, 신라의 사로, 백제의 구다라, 가야의 가라, 나나이(이 땅의 사람), 몽골, 에스키모, 아이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조선은 됴션>조선이며, '됴'는 돋>돌>됴이다. '선'은 사나이, 어리산이(어리석은 사람), 산(아래아) 丁(훈몽자회), 손님 등에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나도 조선(朝鮮)의 선(鮮)이 사람(人)을 칭함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조(朝) 즉,  '돋', '됴'는 무슨 의미일까?  '해가 돋다'의 '돋', '됴'일 가능성도 있겠고, '돌', '도'(梁), '돌', '도', '터'(地) 의 가능성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떻든,  조(朝)은 선(鮮)이 사는 지역의 특징을 의미하리 라 생각된다.  지명 조양(朝陽)의 양(陽)을 벌(땅)으로 볼 때, 위의 조(朝)와 통하리라 생각 되며, 조양(朝陽)은 조선(朝鮮)과 분명히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생각된다. 또, 이 '돋', '됴'는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부산(富山)의 부(富)의 훈(訓)으로도 추정된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아래의 경우가 보인다. "부유현(富有縣)은 본래 백제 둔지현(遁支縣)"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 두시이현(豆尸伊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 [고려]의 부리현(富利縣)이다." 이 두 경우를 보면, 부(富) 자는 둔(遁), 두시(豆尸)와 같은 음가로 현대어 '든든하다', '두툼 하다'의 '든', '둔', '둗' 정도의 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어에서도 부(富)는 도미(とみ), 부산(富山)은 도야마(とやま)로 '돔', '도'로 나타나는데, '頓に=とみに'로 볼 때, n>m의 변화 를 생각할 수 있고, 우리말의 '든', '둔', '둗' 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산(富 山)의 부(富)는 '든', '둔', '둗' 등에 가까운 음가를 지녔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경주시 건천읍 천포리(泉浦里)부산(富山) 또는 덕산(德山)으로 불리는데, 여기서도 '富=德=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고,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에 있는 부산성(富山城) 주사산성(朱砂山城)으로도 불리는데, 여기서 주사(朱砂)는 '주사>줏>줃>듇'의 변화로 보이 고, 이 성이 있는 산 이름인 '오봉산(五峯山), 오로봉산(吳老峯山), 닭벼슬산'의 오(五)는 '다 섯'의 '닫'으로 생각되며, '닭벼슬산'의 '닭'도 여기서 변화한 것이고,  오로봉산(吳老峯山)의 오(吳)는 오(五)에서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부산(富山)이 산이름인지 지명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조선(朝鮮) 의 조(朝)와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조선(朝鮮)은 '조(朝) 땅에 사는 사람'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며, 이 조(朝) 땅은 조양(朝陽), 부산(富山)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第十五章 又設朝市漁濊陽交地之腹하고 設海市於八澤하야 每歲十月에 行朝祭하니 四海諸族이 皆而方物로 供進이라.山岳諸族은 供之以鹿羊하고 海洋諸族은 供之而漁?하야 乃訟曰 -朝祭供進漁羊犧牲五味血鮮休咎蒼生하라-此謂之朝鮮祭러라.是時에 山海諸族이 多食魚肉하니 交易之物이 擧槪包具皮革之類故로 乃行犧牲之祭하야 使人反省報功也라. 揷指于血하야 省察生命하고 注血于地하야 還報育功하니 此代物而償五味之過하야 願其休咎하니 卽肉身苦衷之告白也라.每歲祭時에 物貨輻湊하니 廣開海市於津浦하고 除?潔身하야 鑑于地理하고 行交易之法하야 定其値量하며 變物性之本하야 明其利用이러라. 又象?符都八澤之形하야 報賽於典水之間하고 會燕而行濟物之儀러라. 諸族이 取五瑞之實於蓬萊圓嶠之峰하니 卽栢子也라. 謂之蓬萊海松하야 惠得五幸而歸라. 自此로 四海興産하야 交易殷盛하니 天下裕足이러라. 


   또 예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팔택(八澤)에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10월에 조제(朝祭)를 행하니, 사해의 제족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의 제족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제족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공진하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 하였다. 이를 가르켜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이 때에 산악과 해양의 제족이 물고기와 육(肉)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이 거개가 저린 어물과 조와 가죽류이기 때문에 곧 희생제(犧牲祭)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하고, 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피에 손가락을 꽂아 생명을 성찰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을 보답하니, 이는 물체가 대신 오미의 잘못을 보상하여, 재앙을 먿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즉 육친고충의 고백이었다. 언제나 세제(歲祭) 때에는 물화(物貨)가 폭주하므로 사진과 사포에 해시를 크게 열고, 몸을 깨끝하게 하여, 지리(地理)를 거울 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며, 물성(物性)의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또 부도 팔택의 모양을 본떠서 뭇을 파고, 곡수(曲水)의 사이에서 보새(報塞)를 지내고, 회연(會燕)하여 제물(濟物)하는 의식(儀式)을 행하였다. 제족이 봉래산 원교봉(圓嶠峯)에서 오서(五瑞)의 열매를 얻으니, 즉 잣나무 열매였다. 봉래 해송(海松)이라 하여, 은혜롭게 오행(五幸)을 얻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해가 산업이 일어나서 교역이 왕성하게 되므로, 천하가 유족하였다.


    곰과 호랑이의 설화흑룡강변 등지의 고아시아족의 시조신화로 남아있다. 이는 그들이 환웅족이 이동해 오기전에 만주나 한반도에 살지않았나 하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그들이 그 곳에 살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선 그들이 고아시아족이라 불리우는 이유가 바이칼 시베리아 등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 우리민족이나 다른 동이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난하, 요하, 만주 등지에 먼저 정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다음은 우리민족의 고아시아적 풍습이다(그들은 신을 가미, 감, 곰으로 말한다. 우리는 개마 고원, 임금, 닛금, 이사금, 영감, 대감, 고마나루에서 그 사용을 알 수 있고, 일본은 신을 그대로 가미라 한다. 그리고 중국북부의 벽화에 곰이 인간이 되지 못하고 호랑이가 인간이 된 벽화가 있다. 이는 호족의 그 쪽으로 이동해 갔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의 위치가 과연 어느 곳일까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일제시대 때 친일사학자들은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보통 백두산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을 일컫는 명칭이 개마산(蓋馬山), 개마태산(蓋馬太山), 도태산(徒太山), 불함산(不咸山), 장백산(長白山)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백두산에 대한 그러한 묘사를 볼 때, 태백산이라는 것은 당시에 백두산을 가리키는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구려에는 조의선인( 衣仙人), 신라에는 花郞道, 백제에는 文武道의 싸움애비(싸울아비→사무라이)들이 있었음. 화랑도는 花徒·郞徒〕徒로 나뉘는데 화도는 일반적인 학문에, 랑도는 武 곧 體練에, 道徒는 정신수련에 치중하였으며, 郞徒는 일본 무사의 기원이 되는 것임. 북부여와 삼국의 선조가 바이칼 호수와 북만주 부이루 호수 일대에서 유래했다는 사실과, 바이칼호 근방에 코리아인이라고 자칭하는 브리아트 족속들이 지금도 살고 있으며,


    대륙에 KORE (高札), KORI(句麗, 高句麗, 離國). KUR(스므러어:丘陵 hill), 가우리(Caule:한가운데, 가장자리, 고구려의 원 국명)라는 용어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 ■ 요동반도 북부의 해성(海城←검성←왕검성)이 고조선 때부터 평양으로 불려왔으며, 고구려 동천왕 때 천도한 평양은 해성이라는 사실(山上王時 서부국경신장) ■ 살수 대첩은 현재의 청천강싸움이 아니고, 옛 薩水인 만주의 대능하 싸움이라는 사실(해성과 장수왕때 천도했다는? 현 평양 연계 검토) ■ 안시성 싸움의 안시성은 요하 동쪽이 아니고 북경근처에 있다는 사실(고려진·고려성 등의 지명이 현존)과 막리지가 안시성주 양만춘 추종국과 함께 당(唐)의 수도 장안에 입성하여 이세민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양자강 이남 복건성까지 일시적으로 고구려 영토에 편입한 사실 ■ 고조선-고구려-대진국(大震國), 신라-고려 때까지 건원칭제한 사실 ■ 백제가 우리 나라 서남단(西南端)만의 백제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웅대한 대륙백제, 해양(海洋) 백제로서 양자강 이북 동해안 일대를 400년간(3-6세기) 자치 백제 지역을 두고 지배한 사실〔백제 동성왕의 묘(墓)가 산동반도 청도 서북에 있으며, 백제의 도읍이 중국 요서의 고마성과 內地에 거발성 등 2개소 였음〕 ■ 三韓이 일본을 나누어 지배하고, 신라가 일본을 정벌한 사실(신라 무열왕이 오사카 정복; 백마총 AD 654-661)과 일본에서 羅·濟간에 주도권 쟁탈싸움이 있었으며 백제가 일본국의 왕족과 지배 계급이 된 사실(역사상 황해와, 동해, 남해는 우리의 內海였으며, 日本은 우리의 식민지였음) ■ 통일신라의 강역이 한때 북경 및 열하성까지였다는 사실(AD 736 성덕 여왕때 대진국에 밀려 압록강 이남 차지) ■ 아리수가 여러 개 있다는 사실(서압록·동압록·북아리·한수·기타) ■ 대진국(발해)의 영토가 한때 산서성에서 캄차카, 베링해까지였던 사실 ■ 한단고기의 내용이 그대로 民族正史요, 민족경전이라는 사실 ■ 요·금·청을 우리의 北朝史에 포함시킨 민족사학(『신단민사』김교헌 저) 소개와, 앞으로 우리 正史에 반영하는 문제(말갈족·여진족은 먼 異族이 아니고 우리와 한 족속으로 동이의 한 갈래임) ■ 우리의 역사를 발전기-분열기-정체기의 역사주기로 교육함으로써 다시 발전기로 도약하는 역사의 순환성 교육 문제 슬프다! 우리 선조의 옛 강토가 적국의 손에 들어간 지 어느덧 천년이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니 옛 날을 회고하고 오늘을 슬퍼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北崖者의 규원사화》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설은 대동강 중심설, 요동 중심설, 이동설로 대별된다. 각각의 설이 주장하는 바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대동강 중심설-'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단군 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古記'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이라는 주석을 분명히 달고 있다. 이는, 일연은 분명히 고조선의 중심을 한반도 안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시대에 보다 명확해진다.  정약용한치윤 등 실학 시대의 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을 압록강 이북에 비정한 '요사'를 비판하면서, 고조선의 중심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고증하였고, 따라서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았다. 실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대동강 중심설은 체계화한 것이 이병도의 설이다. 그러나 이 설은 헌서지리지와 언어학적인 추리만으로 패수를 청천강으로 비정한 점이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요동 중심설-'응제시주'의 저자 권람은, 낙랑이 평양이 아닌 압록강 북쪽으로, 기자가 건국한 지역을 요동, 요서로 배정하는 요동 중심설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17,18세기의 남인 학에 의해 계승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 신채호,최남선,정인보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이어졌다. 이들의 연구는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밖에 있었다는 견해로 요약된다. 최근에는 새로운 각도에서 고조선의 강역이 서쪽으로 난하, 남쪽으로 청천강에 걸쳤다고 주장하는 윤내현의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이동설-이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동에 있었는데, 후기에는 대동강 유역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로, 요동 중심설과 대동강 중심설의 절충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설을 체계화한 이는 천관우이다. 그는 종래에 부정되어 오던 기자 조선을 동이족의 이동이라는 시각에서 재해석하여, 기자족을 동이족의 일파로 보아 은·주 교체기에 중국의 하북에서 대릉하, 남만주를 거쳐 대동강 유역에까지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최근에는 고고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고조선의 이동설이 제기되고 있다. 김정학은 요서, 요동의 비파형 동검 문화에 주목하여, 대릉하 유역의 조양(朝陽) 지방의 문화가 요동 지방보다 앞서는 것으로 이해하여, 조양 지방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룬 세력이 요동 지방에 정착하여 고조선 왕국을 건설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리의 민족명은 “”이고 국토는 “쥬신[朝鮮]”이며 국명은 “가우리"[高麗]이다. 조선의 한자표기는 朝(조=아침)과 鮮(선=빛남)의 두 자로서 “아침이 빛난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어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영문으로 LAND OF MORNING CALM”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일찍이 큰 스승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인용하여, 조선(朝鮮)의 원래 발음은 쥬신이고 그 뜻은 “주신(珠申)의 소속 관경(管境)”인데 “관경”의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살고 있는 온 누리”라고 했다.과연 옛 역사서들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영역들을 쥬신이라 표기하고 있으니, 예를 들어보면 태고의 역사를 열자마자 대뜸 朝鮮[쥬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옛 쥬신[古朝鮮]보다 훨씬 먼저 그 땅에 존재했던 肅愼[숙신-쥬신]이 바로 그것이다. 계속하여 이들 노대국들의 뒤를 이어 같은 민족으로 같은 땅에서 흥기한 여진족도 자신들을 쥬신의 방언쯤으로 보이는 朱里眞[주-ㄹ진]으로 불렀으며, 불과 20세기 초반까지도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만주족도 자신들을 스스로 珠申(주신)족이라고 청태조실록(淸太祖實錄)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황병란의 연구에 따르면 흉노(匈奴)산시(陝西) 지역의 서남지역, 서북 지역, 허베이(河北) 지역 대부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주나라 때는 융적(戎狄룽띠), 또는 견융(犬戎취엔룽)이라고 불렀고 전국시대 이후에는 호(胡) 또는 흉노(匈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즉 흉노와 호(胡)는 다른 종족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흉노는 오히려 유럽에 가까운 인종으로 치부하고 호(胡)는 만주족을 뜻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나온 말로 생각됩니다. 흉노족이란 그 명칭은 한족들이 아무렇게나 만든 명칭입니다. 따라서 흉노(匈奴 : 말이 많은 노예들)라는 명칭은 전혀 합당한 말이 아니지요. 이들은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 이르기 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부족입니다.  왕동련(王桐齡)의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는 “구려(九黎)의 임금을 치우(蚩尤)라고 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고추모(高雛牟)북부여에서 일어나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려어위복고구토(麗語謂復古舊土)’라 하여 옛 땅을 되찾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토(舊土)는 과연 어디인가’가 대쥬신 역사와 고구려 역사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고구려란 원래 ‘꼬우리(꾸리)’코리(Khori)라고 읽히기도 함족 또는 맥족(貊族)이 남하(南下)하여 만든 국가로 ‘꼬우리(꾸리)’족이란 동몽골의 광활한 대초원인 메네킨탈에 살던 민족이라고 합니다. ‘꼬우리(꾸리)’라는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케룰렌강(江)과 할흐강(江) 유역에서 동북대평원 멀리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일대를 경유하여 남하한 부족들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왕건군‘고구려민족탐원(高句麗民族探源)’에서 고구려인은 부여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도 여진족이라고 합니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형제 관계였다고 합니다. 멀리 대흥안령(大興安嶺) 남단에서 발원하는 할흐강(江)이 보이르 호수(湖水)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할힌골솜’이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는 석상(石像)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꼬우리(꾸리 : Khori)’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석상을 중심으로 서쪽은 몽골이 살고 있고 동쪽은 코리족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서로 통혼(通婚)하며 같은 풍습과 민족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몽골비사’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앞의 ‘들어가는 글’을 참고하세요). “밤마다 금색 빛을 띤 사람이 천막의 창을 타고 빛처럼 들어와 배를 비벼서 여인의 뱃속으로 들어오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이었다. 나중에 이 사람이 태어나면 대칸이 될 터인데 그 때가 되면 모든 이들이 이를 우러르게 된다.” 그리고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활의 명인(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라는 족속들로부터 몽골과 코리로 나눠진 것이라는 얘기죠(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양궁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아닐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는 초원(草原)에서 몽골과 꼬우리(꾸리) 양족(兩族)의 여자들이 오줌을 누다 서로 만나면 몽골의 여자는 왼손을, 꼬우리족의 여자는 오른손을 흔들어 형제애(兄弟愛)를 과시하곤 했다고 합니다.



< 참고>


 I. 한국사서 


金富軾, 1145. <<三國史記>> 一 然, 1278-1289. <<三國遺事>> 金宗瑞, 鄭麟趾 外, 1451. <<高麗史>> 地理志. 朝鮮王朝實錄廳, 1454. <<世宗實錄>> 地理志. 徐居正, 成俔, 李荇, 1530.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總督府 編, 1919. <<朝鮮金石總覽>> 上, 下卷, 아세아문화사(영인본, 1976). 黃壽永 編, 1976.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許興植 編, 1984. <<韓國金石全文>> 上, 中, 下卷, 亞細亞文化社. 기타 각종 發掘調査報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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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중국사서 


司馬遷, 기원전 98년경, <<史記>> 권115 朝鮮傳. 班固, 76-83. <<漢書>> 권28 地理志, 권95 朝鮮傳. 范曄, 424-445. <<後漢書>> 권23 郡國志, 권85 東夷列傳(序文,夫餘國,읍婁,高句麗,東沃沮,濊,韓,倭) 陳壽, 280-290.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序文,夫餘,高句麗,東沃沮,婁,濊,韓,倭人) 房玄齡, 644. <<晉書>> 권97 四夷傳 東夷(夫餘國,馬韓,辰韓,肅愼氏,倭人,裨離等十國) 沈弱, 488. <<宋書>> 권97 夷蠻傳 東夷(高句驪國,百濟國,倭國) 蕭子顯, 502-539. <<南齊書>> 권58 東南夷傳 東夷(高麗國,百濟國,加羅國) 姚思廉, 629. <<梁書>> 권54 諸夷傳 東夷(高句驪,百濟,新羅,倭) 魏收, 554. <<魏書>> 권100 列傳(高句麗,百濟,勿吉國,契丹國) 令狐德분, 636. <<周書>> 권49 異域傳(高麗,百濟) 長孫無忌, 魏徵, 656. <<隋書>> 권81 東夷傳(高麗,百濟,新羅,靺鞨,倭國) 권84 北狄傳(契丹) 李延壽, 659. <<南史>> 권79 夷貊傳 東夷(高句麗,百濟,新羅,倭國) 李延壽, 659. <<北史>> 권94 列傳(高句麗,百濟,新羅,勿吉國,契丹國) 張楚金, 660. <<翰苑>> 권30 蕃夷部(匈奴,烏桓,鮮卑,夫餘,三韓,高麗,新羅,百濟,肅愼,倭國,南蠻,西南夷,兩越,西羌,西域,後敍) 劉煦, 945. <<舊唐書>> 권199상 東夷傳(高麗,百濟國,新羅國,倭國,日本國) 권199하 北狄傳(契丹,靺鞨,渤海靺鞨) 歐陽修, 1060. <<唐書>> 권220 東夷列傳(高麗,百濟,新羅,日本) 권219 北狄列傳(契丹,黑水靺鞨,渤海) 杜佑, 801. <<通典>> 권185 邊防門 東夷上(序略,朝鮮,濊,馬韓,辰韓,弁辰,百濟,新羅,倭,夫餘) 권186 邊防門 東夷下(高句麗,東沃沮,挹婁,勿吉) 권200 邊防門 北狄七(契丹) 王欽若, 1013. <<冊府元龜>> 司馬光, 1084.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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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일본사서 


舍人親王, 太安萬侶, 720. <<日本書紀>> 稗田阿禮, 太安萬呂, 712. <<古事記>> 菅野眞道, 藤原繼繩, 797. <<續日本紀>> 藤原良房, 869. <<續日本後紀>> 源能有, 藤原時平, 901. <<日本三代實錄>> 萬多親王, 藤原園人, 815. <<新撰姓氏錄>> 地方各國廳, 8세기, <<風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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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史料硏究書 (集成, 索引, 譯註, 考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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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史編修會 編, 1932. <<朝鮮史 -日本史料>>, 京城: 朝鮮印刷株式會社. 延禧大學校 東方學硏究所, 1956. <<三國史記索引>>, 서울: 연희대학교 출판부. 三品彰英 遺撰, 1975, 1979. <<三國遺事考證>> 上, 中卷, 東京: 卍書房. 崔南善, 1983. <<增補三國遺事>>, 서울: 瑞文文化社. 井上秀雄 外, 1974. <<東アジア民族史 -正史東夷傳>> 1·2. 東京; 平凡社. 李丙燾, 1976. <<國譯三國史記>>, 原文篇 譯註篇, 서울: 乙酉文化社. 李丙燾, 1977. <<譯註三國遺事>>(幷原文), 서울: 廣曺出版社. 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 吉林出版社. 金哲埈·崔柄憲編, 1986. <<史料로 본 韓國文化史 -古代篇>>, 서울: 一志社. 이진희, 1987.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서울: 일조각. 崔英成, 1987. <<註解四山碑銘>>, 서울: 亞細亞文化社. 武田幸男, 1988. <<廣開土王碑原石拓本集成>>, 東京大學出版會.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編, 1988. <<高句麗史硏究>> II(史料篇), 서울: 延世大學校 出版部. 한국고대사연구회 편, 1989. <<韓國古代史硏究 2-蔚珍鳳坪新羅碑特輯號->>, 서울: 지식산업사. 한국고대사연구회 편, 1990. <<韓國古代史硏究 3-迎日冷水里新羅碑特輯號->>, 서울: 지식산업사.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韓國古代金石文>> I, II, III권(韓國古代社會硏究所 사료총서 1~3),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金泰植, 李益柱 編, 1992. <<加耶史史料集成>>(韓國古代社會硏究所 사료총서 4),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白崎昭一郞, 1993. <<廣開土王碑文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耿鐵華, 1994. <<好太王碑新考>>, 吉林: 吉林人民出版社. 林基中, 1995. <<廣開土王碑原石初期拓本集成>>, 서울: 東國大學校出版部. 鄭求福 外 9人, 1995. <<三國史記의 原典 檢討>>,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高寬敏, 1996. <<"三國史記" 原典的硏究>>, 東京: 雄山閣. 李康來, 1996. <<三國史記 典據論>>, 서울: 民族社. 村山正雄 編著, 1996. <<石上神宮 七支刀銘文圖錄>>, 東慶: 吉川弘文館. 鄭求福, 盧重國, 申東河, 金泰植, 權悳永, 1996~1998. <<譯註三國史記>> 1~5 (勘校原文篇, 번역편, 주석편, 색인편), 城南: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姜炅求, 1997. <<三國史記 原典硏究>>, 서울: 學硏文化社. 하정룡, 이근직, 1997. <<삼국유사 교감연구>>, 서울: 신서원. 권덕영, 2002. <<한국고대 금석문 종합색인>>, 서울: 학연문화사. 임세권, 이우태, 2002. <<한국금석문집성1 -광개토왕릉비>>, 안동: 한국학진흥원. 강인구 외, 2002~2003. <<역주 삼국유사>> 1~4, 서울: 이회문화사. 김현구 외, 2002~2004.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1~3, 서울: 일지사. 金泰植, 李益柱, 全德在, 姜鍾薰, 2003. <<譯註 加耶史史料集成 제1권 -高麗以前篇->>, 서울: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金泰植, 李益柱, 高慶錫, 吳定燮, 2003. <<譯註 加耶史史料集成 제2권 -朝鮮時代篇->>, 서울: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하정룡, 2003. <<교감역주 삼국유사: 원본의 복원을 위한 삼국유사전>>, 서울: 시공사. 정구복, 2004.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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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韓國古代史 硏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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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제1기-1 


(1910-1940) 津田左右吉, 1913. <<朝鮮歷史地理硏究>>,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64. 再刊(津田左右吉全集11), 東京: 岩波書店. 那珂通世, 1915. <<那珂通世遺書>>, 東京: 岩波書店(1958. 再刊. 外交釋史). 申采浩, 1929. <<朝鮮上古史>>. 白南雲, 1933. <<朝鮮社會經濟史>>. 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70. 再刊, 東京: 國書刊行會.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1970. 再刊, 東京: 國書刊行會. 池內宏, 1934.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東京大: 1960. <<滿鮮史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今西龍, 1937.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1970. 再刊, 東京: 國書刊行會. 鮎貝房之進, 1937. <<日本書紀朝鮮關係地名攷=雜攷7>> 上,下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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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제1기-2 (1940-1950년대) 


三品彰英, 1943. <<新羅花郞の硏究>>, 東京: 平凡社(1974. 再刊. 三品彰英論文集6) 孫晉泰, 1947. <<朝鮮民族史槪論>>, 서울. 金載元, 1947. <<檀君神話의 新硏究>>, 서울: 探求堂. 李德星, 1949. <<朝鮮古代社會硏究>>, 서울: 正音社. 末松保和, 1949. <<任那興亡史>>, 大八洲出版; 1956. 再版, 東京: 吉川弘文館.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京: 東洋文庫. 李丙燾, 1959. <<韓國史>> 古代篇, 서울: 震檀學會.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편, 1958.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 평양. 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卷, 東京: 吉川弘文館. 末松保和, 1965~1966. <<靑丘史草>> 1~2. 東京: 立井出版印刷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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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2기-1 (1960-1970년대) 


리지린 외 5인, 1963. <<고조선에 관한 토론 논문집>>, 평양: 과학원출판사. 리지린, 1963. <<고조선연구>>, 평양: 과학원출판사. 金哲埈, 1964. <<韓國古代國家發達史>>(春秋文庫), 서울: 한국일보사. 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평양: 과학원출판사. 김석형, 1966. <<초기조일관계연구>>, 평양: 과학원출판사. 李弘稙,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서울: 新丘文化社. 李進熙, 1972. <<廣開土王陵碑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金貞培, 1973.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서울: 고려대출판부. 三品彰英, 1973. <<古代祭政と穀靈信仰>>, 東京: 平凡社(三品彰英論文集5). 井上秀雄, 1973. <<任那日本府と倭>>, 東京: 東出版. 李基白,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서울: 一潮閣. 井上秀雄, 1974. <<新羅史基礎硏究>>, 東京: 東出版. 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 知識産業社; 1990. 再版, 서울대출판부. 북한, 1976. <<고조선문제연구논문집>>, 평양.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서울: 博英社. 國史編纂委員會, 1977~1978. <<한국사>> 1, 2, 3권, 서울: 探求堂. 坂元義種, 1978. <<百濟史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박시형, 1979. <<발해사>>,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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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제2기-2 (1980년대) 


이종욱, 1980. <<신라상대 왕위계승 연구>>, 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申瀅植, 1981. <<三國史記硏究>>, 서울: 一潮閣. 李基白·李基東, 1982. <<韓國史講座>> 1(古代篇), 서울: 一潮閣. 李鍾旭,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서울: 一潮閣. 李基東, 1984.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서울: 一潮閣. 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서울: 一潮閣. 申瀅植,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서울: 一潮閣. 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歷史學會 編, 1985.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서울: 一潮閣. 鈴木靖民, 1985.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金元龍, 1986. <<韓國考古學槪說>>(제3판), 서울: 一志社. 金貞培,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서울: 高麗大出版部. 李基白, 1986. <<新羅思想史硏究>>, 서울: 一潮閣. 李亨求, 朴魯姬, 1986. <<廣開土大王陵碑新硏究>>, 서울: 同和出版公社. 최재석, 1987. <<한국고대 사회사 연구>>, 서울: 일지사. 김석형, 조희승, 1988. <<초기조일관계사연구>> 상, 하,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서울: 一潮閣. 이병선, 1988. <<한국고대 국명 지명 연구>>, 서울: 아세아문화사. 高翊晋, 1989. <<韓國古代佛敎思想史>>, 서울: 東國大出版部. 한길역사강좌, 1988. <<韓國古代史論>>, 서울: 한길사. 千寬宇, 1989. <<古朝鮮史 三韓史硏究>>, 서울: 一潮閣. 韓國上古史學會 編, 1989. <<韓國上古史 -硏究現況과 課題->>, 서울: 民音社.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東京: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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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제3기-1 (1990년대) 


金甲童, 1990. <<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硏究>>, 서울: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정경희, 1990. <<한국고대 사회문화 연구>>, 서울: 일지사. 천관우, 1990. <<加耶史硏究>>, 서울: 一潮閣. 최재석, 1990. <<한국고대 사회사 방법론>>, 서울: 일지사. 韓國古代史硏究會 編, 1990. <<韓國古代國家의 形成>>, 서울: 民音社. 김기흥, 1991.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서울: 역사비평사. 權五重, 1992. <<樂浪郡硏究>>, 서울: 一潮閣.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と'任那'>>, 東京: 吉川弘文館.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3. <<가야사론>>, 서울: 국학자료원. 김기흥, 1993.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서울: 역사비평사. 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서울: 一潮閣. 金鉉球, 1993. <<任那日本府硏究>>, 서울: 一潮閣. 송기호, 1993. <<발해를 찾아서>>, 서울: 솔출판사. 申虎澈, 1993. <<後百濟甄萱政權硏究>>, 서울: 一潮閣. 兪元載, 1993. <<中國正史百濟傳硏究>>, 서울: 학연문화사. 李永植, 1993. <<加耶諸國と任那日本府>>, 東京: 吉川弘文館. 李仁哲, 1993. <<新羅政治制度史硏究>>, 서울: 一志社. 李鍾旭, 1993. <<古朝鮮史硏究>>, 서울: 一潮閣. 최근영, 1993. <<통일신라시대의 지방세력연구>>, 서울: 신서원. 최재석, 1993. <<통일신라, 발해와 일본의 관계>>, 서울: 일지사. 소진철, 1994. <<금석문으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 이리: 원광대출판국. 역사편집실 편, 1994.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논문집>>,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이기영, 1994. <<원효사상 연구 1>>,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井上秀雄 外(김기섭 역), 1994.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 서울: 이론과실천. 최광식, 1994.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서울: 한길사. 이형구 편, 1994. <<단군을 찾아서>>, 서울: 살림터.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1994. <<한국고대사산책>>, 서울: 역사비평사. 韓圭哲, 1994. <<渤海의 對外關係史>>, 서울: 新書苑. 한일문화교류기금 편, 1994. <<한일고대문화의 연계>>, 서울: 서울프레스. 변인석, 1994. <<白江口戰爭과 百濟-倭關係>>, 서울: 한울. 경상북도, 1995. <<가야사 연구 -대가야의 정치와 문화->>, 대구: 경상북도. 김두진, 1995. <<의상>>, 서울: 민음사. 宋基豪, 1995. <<渤海政治史硏究>>, 서울: 一潮閣. 양기선, 1995. <<孤雲 崔致遠 硏究>>, 서울: 한불문화출판. 완도문화원 편, 1995. <<장보고의 신연구 -청해진 활동을 중심으로->>, 완도: 완도문화원. 이기백, 1995. <<韓國古代史論>>, 서울: 일조각. 李道學, 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서울: 一志社. 이형구 편, 1995 <<단군과 단군조선>>, 서울: 살림터. 仁濟大 加耶文化硏究所 編, 1995. <<加耶諸國의 鐵>>, 서울: 신서원. 關晃, 1996. <<古代の歸化人>>(關晃著作集 제3권), 東京: 吉川弘文館. 金壽泰, 1996. <<新羅中代政治史硏究>>, 서울: 一潮閣. 盧鏞弼, 1996.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서울: 一潮閣. 박진석, 1996. <<고구려 호태왕비 연구>>, 서울: 아세아문화사. 부산, 경남역사연구소, 1996. <<시민을 위한 가야사>>, 서울: 집문당. 샤브꾸노프(송기호 역), 1996. <<러시아연해주와 발해역사>>, 서울: 민음사. 손보기 편, 1996. <<장보고와 청해진>>, 서울: 혜안. 鈴木英夫, 1996. <<古代倭國と朝鮮諸國>>, 東京: 靑木書店. 유원재 편, 1996. <<백제의 역사와 문화>>, 서울: 학연문화사. 이도학, 1996. <<꿈이 담긴 한국고대사 노트>> (상)·(하), 서울: 일지사. 이도학, 1996.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서울: 주류성. 李仁哲, 1996. <<新羅村落社會史硏究>>, 서울: 一志社. 이평래, 1996. <<신라불교 여래장사상 연구>>, 서울: 민족사. 全德在, 1996. <<新羅六部制硏究>>, 서울: 一潮閣. 정청주, 1996. <<신라말 고려초 호족연구>>, 서울: 일조각. 정효운, 1996. <<고대 한일 정치교섭사 연구>>, 서울: 학연문화사. 최재석, 1996. <<正倉院 소장품과 통일신라>>, 서울: 일지사. 高寬敏, 1997. <<古代朝鮮諸國と倭國>>, 東京: 雄山閣. 權悳永, 1997. <<古代韓中外交史 -遣唐使硏究->>, 서울: 一潮閣. 김종준, 1997. <<한국 고대국가의 노예와 농민>>, 춘천: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유원재, 1997. <<웅진백제사연구>>, 서울: 주류성. 李基東, 1997. <<百濟史硏究>>, 서울: 一潮閣. 李基東, 1997. <<新羅社會史硏究>>, 서울: 一潮閣. 이도학, 1997. <<새로쓰는 백제사>>, 서울: 푸른역사. 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서울: 一潮閣. 李成市, 1997. <<東アジアの王權と交易>>, 東京: 靑木書店. 이종욱, 1997. <<고조선사 연구>>, 서울: 일조각. 李昊榮, 1997. <<新羅三國統合과 麗·濟敗亡原因硏究>>, 서울: 書景文化社. 仁濟大 加耶文化硏究所 編, 1997. <<加耶諸國의 王權>>, 서울: 신서원. 최몽룡, 1997. <<한국 고대국가 형성론>>,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최재석, 1997. <<백제의 대화왜와 일본화과정>>, 서울: 일지사. 忠南大學校百濟文化硏究所, 1997. <<百濟의 中央과 地方>>, 百濟硏究叢書 第5輯, 대전: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孔錫龜, 1998. <<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서울: 書景文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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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가(86.135)

    부족하니 모두 추측이 난무하고 결국 서로 밥그릇 싸움으로 돌아가는 고대사.. 슬프다. 일본 황실도서관에 진짜 사라진 책 몇권 나왔으면 좋겠다. 화랑세기라도 나오니 얼마나 좋아...

    2005.06.30 07:06:37
  • 짜증나(143.248)

    삼성기나 조대기 터지면 대박이지.

    2005.06.30 07:24:04
  • 짜증나(143.248)

    인물부분은 좀 지워줬으면. 스크롤 압박 넘심해요.

    2005.06.30 07:32:03
  • 孤藍居士(221.147)

    '고구려의 구리, 신라의 사로, 백제의 구다라, 가야의 가라'가 사람을 지칭한다는 건 뭘로 알까.

    2005.06.30 08:23:59
  • 孤藍居士(221.147)

    '豆尸伊=富利' 富=豆 때문에 소햏도 일본어 tomi를 생각하긴 했는데, 문제는 尸가 고대 한국어 차자표기에서 ㄹ을 표시한다는 것과, 利가 거기에 대응된다는 거요. tomi하고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높소.

    2005.06.30 08:26:34
  • 孤藍居士(221.147)

    사무라이는 모시다, 지키다라는 뜻의 일본어 동사 'さむらう'의 명사형. 여기에 싸울아비가 들어갈 구석은 없소.

    2005.06.30 08:29:28
  • 孤藍居士(221.147)

    "한단고기의 내용이 그대로 民族正史요, 민족경전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주르륵.


朝鮮國名 심층탐구. - 역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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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보면 우제점법

ㅇㅇ(175.112) 2017-12-16 16: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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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소의 발굽 모양에 따라 국가의 운세를 예견했던 부여의 점법.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길흉을 판단하기 위해 소를 잡아 굽의 모양을 보았는데,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게 여겼고 굽이 붙어 있으면 길()하게 여겼다. 

   우제점법에 대한 기록은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에 기록되어 있다. 또 장초금()이 지은 한원()》권30 고려조()에 인용된 《위략()》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도 이와 비슷한 점이 행해진 것으로 전하며, 경남 창원시 웅천조개무덤에서 출토된 6점의 복골()로 보아 삼한에도 이와 유사한 점법이 있었던 듯하다. 

   우제점법은 짐승이나 거북을 죽여 껍질이나 뼈를 불에 구워 트는 모양에 따라 길흉을 점친 중국의 복()에서 유래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제점법 [牛蹄占法] (두산백과)

두산백과 보면 우제점법 - 공무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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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재자 주(註) : 초록색으로 표기된 것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재자가 보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