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사상 外

2018. 11. 20. 00:53우리 역사 바로알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신선사상

다른 표기 언어神仙思想 


요약 테이블
유형 개념용어
분야 종교·철학/도교

요약 속세를 떠나서 선계에 살며 젊음을 유지한 채 장생불사한다는 신선의 존재를 믿고 그에 이르기를 바라며 추구하는 사상.


연원

   사람은 본래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게 마련이나, 그런 숙명에서 벗어나 젊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확대되어 불로장생을 갈구하는 신선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신선사상은 지역·인종·시대 등에 따라 그 개념이나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주로 제왕이나 제후 등 현세적인 권력과 쾌락의 영속을 바라는 계층에서 적극적으로 신선을 갈구하여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조식(調息)·복이(服餌)·도인(導引)·방중(房中) 따위의 신체단련 내지 생리조절의 방법을 개발하고 불사약을 구하거나 금단(金丹)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방사(方士)가 생겨나 술수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상고시대 민족 형성 내지 국가 창건의 단계에서 신선사상이 형성되었으면서도 천계와의 관련을 중요시하여,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 민족 발전의 방향을 조정하며 개인생활의 품위를 높이는 목표를 찾아내는 등 공동체의 향상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의 신선사상


1. 한국 신선설의 시원

  한국 신선사상은 단군의 건국과 연결되는 신관(神觀)에서 전개된다. 이 신관에는 두 계열이 있다. 다 유일신을 숭봉하기는 하나,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을 유일신으로 받든다. 이것을 환인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다른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 또는 仁)도 태고의 군장인 감군(監群)으로 다루고 신은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따로 있는 것으로 받든다. 이것을 사백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이 두 계열에서는 사상 전개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환인 계열에서는 환인의 4차례의 명령을 받들어 환웅(桓雄)이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수수십만 년에 걸쳐 천지부판(天地剖判)을 비롯하여 일월성신과 동식만물에 인류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만들고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여 그 군장이 되었다.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한 환웅은 환인이 하늘에 임어(臨御)하는 신향(神鄕)으로 올라간다.

이것이 한국 신선설의 요점 가운데 하나인 공완조천(功完朝天), 곧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는 하늘로 올라간 실례로 꼽힐 수 있는 일이다.

그 뒤를 이어 초대 단군 왕검이 군장으로 추대되어 조선을 창업하고 신시의 법도를 계승하여 국가의 규모를 갖추고 천제를 올리고는 <대고 大誥>를 반포하여 사람이 지킬 도리를 일러준다. 이 단군의 <대고>는, 사백 계열에서는 ≪삼일신고 三一神誥≫로 조정하게 되어, 결국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 부분을 이룬다.


   단군조선왕검 한 사람이 1,500년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47대의 단군이 계승하였고, 또 반드시 부자상전하지만은 않았다. 사백 계열에서는 최고일신(最古一神)이니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니 하여 유일신을 따로 내세운다.

환인은 그 아래에서 한 감군으로 환국(桓國)을 창건하여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7대를, 제7대 환인 때 서자부의 환웅이 태백으로 파견되어 신시를 세우고 그 군장이 되어 18대를 이어 내려오고, 그 뒤를 이어 단군 왕검이 조선을 창업하여 47대를 계승한 후 부여-고구려-대진(大震:渤海)으로 정통이 이어진 것으로 하였다.

한국 신선사상의 엄격한 기원은 탐색해 낼 문헌자료가 부실하나, 그러한 사상은 한민족의 기원을 추구하는 데서 나와 유일신을 받드는 신앙에서 추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환인 계열의 사상이 순박한 원초성을 띠고 있고 사백 계열은 환인 계열의 사상을 수정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2. 환인 계열의 신관

   ≪규원사화 揆園史話≫의 <조판기 肇判記>에는, 암흑 혼돈한 태고 시절을 말하고 그와는 별도로 원래부터 존재해 있는 환인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을 부각시켰다.

   “상계(上界)에는 따로 일대주신이 있어 그를 환인이라고 하는데, 전세계를 통치하는 한량없는 지능을 지니고 있지만, 그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고 그의 거처는 수만 리이고 항시 광명을 크게 드러내고 휘하에는 또 무수한 작은 신들이 있다. 환이라는 것은 광명이고 그 체모를 형상한 것이며, 인이라는 것은 본원으로 만물이 그것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동서 <단군기 檀君記>에는 단군 왕검이 반포했다는 <대고>의 서단인 앞부분에 유황일신(惟皇一神)이 최상일위에 임어함이 강조되고, 하늘의 궁전에 거처함과 만선만덕의 근원임이 밝혀지며, 그 권능과 섭리가 언급되고, 신향(神鄕) 곧 유황일신이 임어하는 고장이 대길상(大吉祥) 대광명한 곳으로 제시된다.

이 신향은 한국 신선가의 궁극적인 지향으로, 성통공완(性通功完)하면 조천(朝天:입궐하는 것)하여 신향으로 귀속되는 것으로 확정지어져 있다. 성통이라고 함은 사람이 타고난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이르는데, 유황일신과 불가분의 관련이 내포되어 있다. 공완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받은 사명을 완수함을 이른다.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이 표명되어 있는 기술이다.

천신에 대한 외경과 순수하고 성실한 노력을 통해 천상에 있는 신향의 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신선가 뿐 아니라 한민족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던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3. 사백 계열의 신관

   한민족의 태고시대의 한 국체로 환국(桓國)을 제시하고 최고일신사백력의 하늘에 있음과 그 일신의 성격 내지 상황을 설명하고 환인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일신을 독화지신(獨化之神),독자적으로 자기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절대자인 신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마치 공행(功行)이 차서 득도 승천한 신선같이 느껴지게 한다.


   ≪환단고기≫<삼성기전 상 三聖記全上>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환이 나라를 세움에, 최고의 일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는데 독화하는 신이다. 그 광명은 우주를 비추며, 변통자재한 변화는 만물을 생성하고, 죽지 않고 오래 살며, 항상 쾌락해질 수 있고, 지극한 기운을 타고 놀며, 자연과 묘하게 합치하고, 작위함 없이 일하며, 말없이 행하고, 매일 동녀 동남 8백을 흑수(黑水)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보낸다. 이에 환인 역시 감군으로 천계에 살면서, 돌을 쳐서 불을 내어 처음으로 익혀 먹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그것을 환국이라 하고, 그를 천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 하며, 안파견(安巴堅)이라 칭하기도 한다. 7대를 지내 내려왔으니 그 연대는 알아볼 수 없다.”


   사백력은 시베리아(Siberia)를 연상하게 하고 안파견은 ‘아바지’의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 흑수백산흑룡강장백산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장백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다. 백산은 천산(天山)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인다.

사백 계열에서는 유일신을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라 하여 일신이면서 3가지 공능을 발휘한다는 신관을 견지하는데, 그 공능은 다시 5가지로 확대되어 오제설(五帝說)로 이어진다.


   삼신의 작용① 천일:조화, ② 지일:교화, ③ 태일:치화로 나누고, 이것이 다시 오제로 분화되어 동서남북 중의 사명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용이 분화되나 신이 복수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백 계열에서 내세우는 인류의 시조 이름 나반(那般),배필아만(阿曼)이고, 환족은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다. 환국의 초대 군장 환인은 본래 천산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4. 득도장생

   사백 계열에서는 초대 환인“득도장생하여 온몸에 병이 없다.”고 하였으나 자신의 불로장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해서 교화를 일으키고 무기 없이 평화롭게 살도록 만들어 사람들이 모두 근면하게 일하고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여 득도장생의 공용성이 강조되었다. 환국이 7대 3301년 또는 6만3182년이라고 하였으니 역대의 환인은 대단한 장수를 누린 것이 된다.


   태우의환웅(太虞儀桓雄)사람들에게 묵묵히 생각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호흡을 조절해서 정기를 보존하여 장생구시(長生久視)하는 술법을 가르쳐 신선술을 실천하도록 하였다.

   신시씨(神市氏)본성에 통달하여 참됨을 이룩하는 것을 지향해서 전(佺)으로 수행 재계하게 하고, 청구씨(靑丘氏) 천명을 알고 선(仙)을 넓힘을 지향하여 선(仙)으로 법을 세웠고, 조선씨 정기를 보존하여 수명을 연장함을 지향하여 종(倧)으로 왕업을 세웠다고 하는 것들도 다 신선술을 시행한 예이다.


   환웅시대선인 발귀리(發貴理)는 천신을 제사하는 뜻을 밝힌 송축문(頌祝文)을 지어 삼신즉일상제의 체용과 권능을 설명하였다. 중국 전설의 복희(伏羲)가 그었다는 희역(羲易)은, 발귀리와 동문수학한 복희환족의 우사(雨師)가 전하는 환역(桓易)을 본받아 그어 낸 것이라고 한다. 환과 희는 같은 뜻이고, 복희는 한족의 인물이었다.

   자부(紫府) 선생발귀리의 후예로 득도하여 천계로 날아올라간 신선으로, 칠성력(七星曆)의 시초인 <칠정운천도 七政運天圖>를 제작해 냈다. 이러한 칠성력의 원리와 오행치수법신시≪황부중경 黃部中經≫에서 나왔고, 중국 신선가<황제내문 黃帝內文>·<음부경 陰符經> 등을 포함한 ≪황제중경≫도 신시씨 이래의 전승이며, 단군 왕검의 태자 부루(夫婁)가 오행치수법을 우(禹)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중국 문화의 연원을 한족에서 구하는 한국 신선가의 논법이다.


5. 단군신화와 환인

   신선사상은 산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한 예로, ≪장자 莊子≫의 <재유편 在宥篇>을 보면 황제(黃帝)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 장생의 도리를 배우는 대목도 공동산(崆峒山)이라는 산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산악으로 뒤덮인 우리 땅에서 퍽 일찍부터 신선사상이 싹텄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능화(李能和)공동산이 우리 나라인 청구(靑丘)의 땅에 있었다고 보고, 중국 도교의 조종 격인 장량(張良)도 우리 나라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봄으로써 중국의 신선설 내지 도교의 연원이 우리 땅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유사≫≪제왕운기≫ 등에 나오는 단군에 관한 기사는 이러한 산악신앙과 신선사상이 얽혀 있는 예로 들 수 있다.


   환인(桓因)제석(帝釋) 또는 상제(上帝)로 주석되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또 제석천주(天主)라고도 하여 천상계의 통치자로 이해되어 왔다.

천상의 통치자인 환인은 우리 먼 조상들에 의해 매우 친근해질 수 있는 인간성을 갖춘 존재로 인식되었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홍익인간’으로 표현되듯이 그 권능을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행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환인 내지 하느님의 관념은 우리 겨레의 가슴 깊이 자리잡고 내려오면서 그 공통된 경외심이 외래 종교의 최고신 또는 유일신을 받아들여 합치시키는 경지까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세의 선가(仙家)‘환’은 광명으로 ‘인’은 본원으로 풀이하여, 환인 일대주신(一大主神)으로 한량없는 권능을 가지고 전세계를 통치하지만,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규원사화≫의 <조판기>에 따르면, 사람은 불멸하는 영명한 영혼이 있어서 선을 돕고 악을 멸함으로써 본성에 통달하여 공업(功業)을 완성하면 하늘에 올라 일대주신, 곧 환인의 고장인 신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6. 환웅의 사업

   환인서자인 환웅(桓雄)은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3,000도중을 거느린 채 천상으로부터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다. 환웅은 신웅(神雄)이라고도 하고, 그가 건설한 도성을 신시(神市)라 하며, 그곳의 나무를 신단수(神壇樹)라고 부르는 등 ‘신’ 자를 붙인 것은 그것들을 신성시하는 뜻 외에 환웅과 그가 거느린 도중이 지상의 인간들과 달리 장생불사하는 신선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군의 기사에는 환웅이 강림하여 신시를 건설하고 단군을 탄생시킨 일만 쓰여 있고 다른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의 선가들은, 환웅이 이 밖에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무위자연의 도리에 따라 다스려 만대의 기틀을 잡아 놓고 신선이 되어 천상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하였다.


   환웅환인의 명을 받들어 하늘과 땅을 갈라 놓고 신시를 건설하여 설교치세(設敎治世)하다가 단군에게 계승시키기까지 수십만 년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대라고 하면, 그 이전의 궐천세는 중국 전설상의 시대보다 오히려 오래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한족(漢族)이나 그 밖의 민족과는 별도로 독립된, 그리고 장구한 문화의 연원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단군의 기사는 극히 간략하지만 그러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환웅의 사업을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은 이 땅의 선파들에 의해서 예로부터 전승해 온 것이지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7. 제천행사

   강화 마리산(摩利山)의 참성단(塹星壇) 제천을 위한 제단이었다. 단군 왕검 초기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의 옛 이름)가 남이(南夷)의 관경(管境)이었고, 남이가 반란하자 아들 부여(夫餘)를 파견하여 평정하고 축성까지 했는데, 단군 왕검이 남순길에 마리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 단군 왕검의 세 아들(夫餘, 夫蘇, 夫虞)을 시켜 축조했다 하여 그 성을 삼랑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마리산 참성단에서의 제천행사는 고려시대 이후는 도교의 재초(齋醮)의식으로 거행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참성단의 상방하원(上方下圓:상부는 네모나고 하부는 둥금.)의 형모에 대한 의미 부여도 시도되었다.


   마리산의 마리‘머리’의 취음으로 보고 마니산(摩尼山)으로도 불리는데, ‘니(尼)’는 후에 고쳐진 것이다. ‘塹星壇’은 본래 삼랑성 안에 개토(開土)하여 만든 제단이라는 뜻‘참성단(塹城壇)’이었고, ‘星’은 후에 도교의 영향을 받아 고쳐진 것이라 여겨진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국왕이 마리산에서 제천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환단고기 桓檀古記≫에 들어 있는 이맥(李陌)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조에서 마리산에 당도하여 참성단에 올라가 삼신을 제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고구려에서 단군 왕검이 시작한 제천행사를 이어받았다는 것한국 신선가의 전승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18년(408) 8월왕이 남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강화도보다 훨씬 남쪽인 광양만 근처까지였으므로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제천할 수는 있었다. 이맥의 기술에 따르면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삼신을 제사할 때 천악(天樂)이라는 음악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천하는 일은 국왕의 권한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 복희(伏羲)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제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복희는 후에 서토(西土, 지금의 중국 중부)로 진출하여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해서 천하를 호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고구려 영양왕(590∼617 재위) 때 침입한 수나라의 대군을 격멸한 명장인데, 경건한 마음이 있어 입산수도 끝에 꿈에 천신이 현몽하여 대오 각성하기에 이르렀고, 매년 3월 16일에는 마리산에 달려가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였으며,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는 것이다.


8. 단군과 선파의 도맥

   단군 왕검 태백산정의 신시에서 내려와 정식으로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었다. 왕검은 현실적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아사달(阿斯達)로 천도하였고, 1500년 뒤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아사달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은 거기서 산신이 되었고, 무려 1,908세의 수명을 누린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일설에 신선이 되어 죽지 않았다고도 한다. 단군 47대설이 있기는 하나 단군이 2,000세에 가까운 수명을 누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선설을 연상시키기에 족한 일이어서 이 땅의 선파에서 환인·환웅과 함께 단군을 도맥의 조종 가운데 하나로 편입시킨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다.


   ≪청학집 靑鶴集≫에 따르면, 단군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된 뒤에 문박씨(文朴氏)라는 사람이 아사달에 살면서 단군의 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또 ≪백악총설 白岳叢說≫에 인용된 영랑(永郎:向彌山人)남랑(南郎:南石行)의 말에 따르면, 문박씨환인의 도의 원류를 터득하고 결청지학(潔淸之學:깨끗하고 맑게 사는 가르침)을 전하였고, 환인은 본래 대왕씨(大往氏)를 시켜서 ≪시서 始書≫를 저술하게 하고 자기는 ≪종서 終書≫ 1권을 지었다고 하였다.

≪시서≫ 풍우·오곡·음식 및 연양(練養)의 도를 주관하고 무엇보다도 성신(誠信)과 불투불음(不偸不淫)을 인간의 선한 일로 쳤다는 것이고, ≪종서≫ 일월·성신·천지·산천의 이치, 성명(性命)의 본원 및 신도(神道)와 묘덕(妙德)의 교훈을 주관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대왕씨를 시켜 중외의 선관(仙官)들에게 ≪종서≫를 반포하게 하였고, 대왕씨는 그 도중들과 함께 환인을 문조씨(文祖氏)로 불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환인의 도는 그 책들과 함께 문박씨에게 전해지고, 다시 을밀(乙密)·영랑·안류(晏留)·보덕(普德) 등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것이다. ≪백악총설≫의 저자는 그 책들을 태백산인에게서 얻어 보았다고 하였다.

이렇듯 환인과 환웅을 계승한 단군신선이 되었고, 그 교훈은 결청지학으로 요약되어 문박씨를 거쳐 신라 사선(四仙)의 인물에게로 전해 내려간 것으로 되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이 땅의 모든 군장들이 누구의 후예인가 하면 그들의 세계는 역시 단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의 신선사상


1. 해모수와 동명왕

   고구려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보면, 그 건국에 얽힌 신이한 사적이 적지 않다. 고구려는 동맹(東盟)이라는 풍습이 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하늘을 경외하고 신을 숭상하는 기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조 동명왕 고주몽(高朱蒙)천제(天帝)의 손자로 되어 있고,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解慕漱) 천제의 태자기원전 59년에 천제에 의하여 부여왕의 고도(古都)로 파견된다.


   해모수가 천상에서 강림할 때 오룡(五龍)의 수레를 탔고, 흰 따오기를 탄 수행인원이 100여 인이나 되었다. 하늘에는 채색구름이 떠 있고 그 구름 속에서 음악이 울려 나왔다.

이 경우에도 웅심산(熊心山)이라는 산악에 강림하여 10여 일이 지나서야 지상에 내려와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물녘에는 하늘로 올라가곤 하였다. 해모수유화(柳花)의 몸에 주몽을 잉태시키고는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천제의 손자인 주몽은 많은 이적(異蹟)을 행하였는데, 그 자신 개사수(蓋斯水)에서 어별교(魚鼈橋)를 얻을 때와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천제의 손자임을 내세웠다.

그는 고구려를 창건하여 18년 동안 재위하다가 40세 되던 해 가을에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였던 유리(類利:瑠璃)는 부왕 주몽이 남기고 간 옥편(玉鞭)용산(龍山)에 묻어 장례를 지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해모수와 주몽의 신이성(神異性)은 단군에 관련된 그것과 얼마쯤 유사한 점이 있다. 천제 내지 상제의 자손을 칭하면서 국가의 시조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이적에 대한 순박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겨레가 하늘을 숭경하고 천제와의 혈연을 믿어 긍지를 지니고 산 일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모수가 천상에서 많은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하강하는 상황은 마치 도교에서 신선의 거동을 형용하는 경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동명왕 주몽 단군 왕검같이 지상에서 장수하지는 못하였으나 하늘로 올라갔다. 이렇듯 고구려의 건국신화도, 단군신화와는 별도 신선사상과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의 한 지파가 세운 백제해모수주몽의 고사(故事)를 전승하였다고 하겠다.


2. 신라 사선과 선풍

   신라시대에는 선풍(仙風)이 성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군에 의해 전해진 환인 이래의 도문박씨로부터 계승했다는 영랑(永郎)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 등과 함께 신라 사선으로 불린다. 이들은 영남인 혹은 영동인이라고 하여 종잡을 수 없고, 일설에는 신라 이전의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결청지학이라는 이 땅 고유의 선풍을 계승한 영랑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다니는데, 90세가 되어서도 신색이 어린아이 같고 행색이 기괴했다고 한다.

사선의 유적장연(長淵)의 아랑포(阿郎浦), 지리산의 영랑호(永郎岵) 등에도 있으나 고성(高城)의 삼일포·사선정·단혈(丹穴), 통천의 사선봉, 개성의 선유담·영랑호, 금강산의 영랑봉, 강릉의 한송정 등 주로 영동에 몰려 있다. 한송정에는 신선이 선단을 연조하던 돌아궁이와 돌절구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이들 사선은 대낮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고 한다.


   선단 연조나 백일승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세속적인 일에 상관하지 않고 호방불기하게 산수간을 오유(娛遊)하는 것이 결국은 사선의 행태라고 하겠는데, 속세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들 사선은 추종자가 많아 도중 3,000인과 함께 다녔다고 한다. 이 3,000의 도중은 환웅이 강림할 때 거느린 도중의 수와 같다. 이들 도중 역시 속세로부터 초탈하여 자유스러운 생활을 즐겼을 것이고, 수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청지학으로 요약된 선도체득(仙道體得)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3. 화랑도와 신선사상

   사선이 일으킨 선풍신라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굳건한 전통을 이루었다. 최치원<난랑비서 鸞郎碑序> 첫머리에, 신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어 그것을 풍류라 하고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 仙史≫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풍류도가 있었고, 그 기원이 선가의 역사를 다룬 책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풍류도는 결국 신라 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의 지도이념 내지 기본 사상이었다. 신라의 ≪선사≫가 전해지지 않아 풍류도의 내용을 적확하게 알아보기는 힘드나 풍류라는 말뜻만을 가지고 본다면, 세속적인 일에서 초탈하여 고상하게 산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어, 풍류도는 그러한 정신을 내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도결청지학과도 의미상으로 합치되고, 신라 사선의 행태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어쩌면 한국의 멋의 연원도 이 신라의 풍류도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576년(진흥왕 37)에 시작된 화랑제도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고 거기에 유·불·도의 덕목들을 보충하여 인재 양성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선·지선·선 등의 별칭이 있는 화랑은 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원근의 산수에 노닐면서 도의도 연마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으니 사선의 행태와 매우 방불하다. 그래서 후세에는 사선까지도 신라의 화랑으로 여기는 사례가 생겼다.

   신선사상화랑의 단계에 와서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의 제도에 수렴되어 이전의 소극적인 의의를 지양하고 신체의 단련, 무예의 연마, 대의의 각성, 관용과 희생을 앞세운 기개의 함양 등 적극적인 방향으로 그 수련내용이 확대되었다.


4. 선풍과 선속

   공완조천의 관념을 생각해 본다면, 인재의 선발이나 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이와 연결하여 신라의 화랑제도를 생각하게 된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 13대 단군 흘달(屹達) 무술 20년조미혼 자제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그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고 그들의 행색을 두고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다만 진흥왕(眞興王, 539∼576 재위) 때 화랑도가 비로소 제도화되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동떨어진 느낌을 갖게 한다.

한편, 고구려고국천왕 13년(191) 을파소(乙巴素, ?∼203)가 국상(國相)으로 선인도랑(仙人徒郞)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한 사례가 있어 화랑제도의 선성이 되었다는 것이 사백 계열의 견해이다. 을파소의 선인도랑제도 교화[文]를 다루는 참전(參佺)과 무예[武]를 다루는 조의(皁衣)로 2분되어 있다. 정사에도 고구려의 선인 관직이 나온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신선가 계통의 인물로, 도로 천신을 섬기고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아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도리를 터득함.)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을 말한 바 있다.


   신라의 화랑제도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여 이렇게 조정된 신라의 선풍은 고려시대에까지도 이어져 내려갔다. 예종1116년 5월 경진일에 내린 제서(制書)에서 신라 사선의 유적을 영광되게 받들 것과 국선, 즉 화랑의 일을 대관의 자손을 시켜 행할 것을 명하였다. 의종1168년 3월 무자일에 신령(新令)을 반포하고, 그 제5조에서 선풍을 숭상하도록 명하였다.


5. 신라 선가의 특색

  이곡(李穀)<동유기 東遊記>신라 사선이 오유한 강릉 경포대에서는 달밤이면 사선이 즐기는 생소(笙簫)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사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여전히 악기를 연주하고 명승지를 소요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선의 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 그 도중과 함께 노래와 음악을 즐겼다. 이렇듯 신라의 선가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선의 중심 인물인 영랑의 도를 계승하였다는 여류선가 보덕(寶德) 거문고[琴]를 안고 다니며 그것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보덕은 선녀로도 불렸는데, 용모가 물에 뜬 연꽃 같았고 바람을 타고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가락국왕에게 자연의 순리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일깨워 주었다감시선인(旵始仙人) 금선(琴仙) 또는 칠점선인(七點仙人)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한옥(寒玉) 같은 용모를 지닌 그는 역시 거문고를 안고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내해왕(재위 196∼230) 때의 공신 물계자(勿稽子)나중에 속세를 버리고, 거문고를 안고 사체산(師彘山)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효공왕 도선(道詵)금강산에서 그를 만났는데,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눈같은 살결을 하고 물병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 나이를 알아보았더니 800세에 가까웠다고 하였다.


   거문고[玄琴]의 창제자옥보고(玉寶高)경덕왕(재위 742∼764) 사찬(沙粲) 공홍(恭汞)의 아들로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워 선도를 터득하였는데, 학금선인(學琴仙人)·옥부선인(玉府仙人) 등의 별칭이 있다.

가야금의 명수 우륵(于勒) 또한 신선으로 지목된다. 이 밖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일로 향가(鄕歌)와 그 신통력으로 알려진 월명사(月明師) 융천사(融天師)의 작가고사(作歌故事)가 있다.


   <도솔가 兜率歌>두 개의 태양이 나타난 괴변을 소멸시켰다든지, <혜성가 彗星歌>성괴(星怪)를 양제하고 침범해 온 왜병을 제 발로 돌아가게 했다든지 하는 고사는, 신라 사람들의 음악관 내지 가요관의 독특한 면을 나타낸 사례이다.

신라시대의 음악이 드러내는 이러한 예술적 신비성 선도가 지닌 초월적 오묘성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기풍은 허황된 방술의 미망(迷妄)을 초극하여 세련된 새로운 의식의 경지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우리 겨레의 예술인에 대한 순직한 경애심을 함양하는 힘이 되었다고도 하겠다.

   이 밖에 신라의 왕손이었던 대세(大世)신라가 좁다고 생각하여 중국의 오월(吳越) 땅으로 건너가 환골탈태하고 신선이 되는 길을 배우기 위하여, 586년(진평왕 8)에 그의 벗인 구칠(仇柒)과 함께 남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버렸다. 이들도 선가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신선사상의 변천


1. 수련적인 도교와의 습합

   대세·구칠이 신선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을 향해 떠난 것은 이미 중국 도교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교는 본래 신선설을 골간으로 하여 형성된 종교이므로 한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습합하기가 쉬웠다.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와의 내왕이 빈번해짐에 따라 중국 도교와 접촉이 깊어지면서 도교의 내단(內丹:丹學) 수련법도 도입되었다.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 등의 기록을 보면, 신라 말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최치원(崔致遠), 그리고 승려 현준(玄俊)·자혜(慈惠) 유당학인(留唐學人)들이 중국의 수련적인 도교를 이 땅에 도입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수련도교가 우리 고유의 선풍과 혼합되면서도 선파의 맥락은 그대로 유지된 사실이 홍만종(洪萬宗)≪해동이적 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다. 그는 고려시대의 선파 인물이명(李茗)·곽여(郭輿)·최당(崔讜)·한유한(韓惟漢)·한식(韓湜) 등을 비롯하여 혜륵(惠勒)·아도(阿道)·흑호(黑胡)·혹산(翯山)·정호(丁皓)승려까지 합하여 여럿을 꼽고 있다.

다만, 강감찬(姜邯贊) 같은 경우는 거란 토벌이라는 큰 공도 있고 하여, 문곡성(文曲星)의 현신이라느니, 호환(虎患)을 물리치는 방술을 지녔느니, 또 선도를 터득하여 대낮에 등선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84세의 장수를 누린 그가 어느 정도의 선도 수련을 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지식인들이 도서(道書)를 애독하여 그 계통의 양생법의학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런 계층과는 달리 몰락한 선비나 비천한 지식인들이 도술의 수련을 빙자하여 산수간을 오유하면서 시를 읊는 등 세속에서 초연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낙방거사 조여적(趙汝籍)도 그런 부류의 하나인데, 그가 편술한 ≪청학집 靑鶴集≫에는 위한조(魏漢祚)를 중심으로 10여 인이 모여 지냈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선파(仙派)들은 도술도 뛰어나 수련도교를 신봉한 듯한 일면이 있으나, 환인동방선파의 조종으로 받들고 환웅단군을 높이며, 단군의 후예가 박(朴)·백(白)의 성을 쓰기도 하므로 신라의 박혁거세도 그 후예일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여 수련도교의 도맥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 조선 선파의 역사관

   조선시대의 선파들은 당시 유가 계통의 지식인들과는 판이한 역사관이나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륙과 일본 각지를 편력하여 대국(大局)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명나라의 멸망과 만주족의 발흥을 예견하였고, 한족(漢族)에 대하여 뚜렷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것을 통박하고, 한문화를 숭상하는 해독을 역설하였다. 그들은 당시 임진·병자의 두 큰 난리를 겪어 국력이 쇠진한 데다가 한문화에 기대어 성리의 공론에만 매달려 지도력을 상실한 상층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구세의 이념선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천운이 동북에 있었으나 장차 그것이 백두산 이남으로 옮겨지면 우리 나라가 일본을 병탄하고 중국을 제압하여 천하를 평정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공허한 글에 빠져 쇠약함에 익숙해지고, 자기의 도는 버리고 송유(宋儒)의 여타(餘唾)를 씹으며 자기의 임금을 깎아 내려 외국의 신복(臣僕)에 견주고 있다.”당시 지도층의 사대주의적인 패배의식을 비판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이 대두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일으킨 것도 이러한 선파의 사고방식을 계승, 발전시킨 데서 얻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영·정조시대사학자 이종휘(李種徽)사대적인 패배의식을 탈피하여 자주적인 사관을 확립하려고 노력한 점에서 선파의 역사관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수산집 修山集≫ 가운데 <단군본기>·<신사지 神事志> 등에서 단군의 사적을 속설까지 수합하고 마니산 제천을 곁들여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이를 국사의 발단으로 삼아 고유 문화의 긍지를 보였고, 단군 이래의 구강(舊疆) 내지 고구려·발해의 판도 회복에 대한 의욕이 없음을 개탄하는 한편, 역대 사가들의 사대적 근성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패배의식을 배격하고 주체성을 고양하려는 선파의 사관한말의 사가들에게도 받아들여졌으니, 박은식·신채호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중국의 신선설


1. 신선설의 발생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후기(기원전 403∼221)부터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초사 楚辭≫, ≪한비자 韓非子≫ 등에 불사도 불사약 연년불사 무사 등의 말이 나온다. 중국 신선설은 일반적으로 북방인 연·제(燕齊) 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보나 신선설은 당시 중국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다.

이러한 신선설은 중국의 원초 신앙형태인 무술, 자연숭배 등 다소간 초능력적인 요소들과 혼합되어 불사약을 연조하고 죽은 혼령을 불러내고 하는 등의 방술과 그것을 행사하는 방사가 당시 중국 상하에 두루 알려졌다.


2. 선(僊)과 선(仙)의 의미

   송무기(宋毋忌)·정백교(正伯僑)·충상(充尙)·선문고(羨門高)방선도(方僊道)를 따르는 신선가들은 다 연 출신이었으나 에도 방선도를 따르는 신선가들이 많았다.

한편, 신선설은 산악신앙과 관계가 깊다. 산악은 상제가 임어하는 천계와 가깝다는 관념에서 산악신앙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僊人’‘僊’가볍게 들려 올라간다는 뜻으로, 천상을 유행함을 이르는 말이고, ‘仙人’ ‘仙’‘屳’으로도 쓰는데 산의 정상에 있는 사람으로 천계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신선과 천상이 연결되는 것은, 죽음과 노쇠와 곤고를 부정하는, 피안사상이 희박한, 현세적인 이익의 영속을 지향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사후생활로의 전이와 연결된다.


3. 불사약

   신선은 본래부터 따로 있는, 선천적인 특이한 존재로 여겨서 그들에게는 복용하면 장생불사하는 영약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삼신산의 전설이 있다. 삼신산산동 연안에 연결된 발해 가운데 있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라는 3개의 산으로 된 바다섬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삼신산신선들이 사는 별천지이고 불로초나 불사약이 있다고 하여 진시황은 처음에는 방사 서불(徐巿, 또는 徐福)을 시켰다가 다시 방사 노생(盧生)을 시켜 각각 다수의 수종인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한다.

삼신산신선들이 사는 별천지같이 알려진 것은 산동 연안에 나타나는 신기루를 보고 상상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물론 ≪산해경 山海經≫ 같은 선진시대의 환상적인 지리서는 곤륜허(崑崙墟)의 신선 서왕모(西王母)와 불사약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가까운 발해에 있다는 삼신산이 주의를 더 끌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漢武帝)도 역시 방사를 시켜 바다에 들어가 봉래산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무제 건장궁(建章宮)에다 20여 길이나 되는 높은 누대를 세워, 무위로 끝났으나, 방사들로 하여금 신선의 강림을 기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진시황한무제는 다 봉선(封禪)이라는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 신선이 되기를 기원했다.


   불사약의 수탐과 아울러 방사들불사약인 선단의 연조를 계속 시도하였다. 선단의 연조방법은 후한 때 좌자(左慈)로부터 갈현(葛玄) 정은(鄭隱)을 거쳐 진(晉)갈홍(葛洪)에게까지 전승되었다.

후한 때 오지방 사람 위백양(魏伯陽)선단을 연조하여 그 선단을 먹고 진인(眞人)이 되어 제자와 애견과 함께 선계에 올라갔고, 그 방법을 기술한 ≪주역참동계 周易參同契≫도교경전의 하나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당나라 때도, 실효는 거두지 못했으나 도사들에 의해 선단이 연조되기는 하였다.


   유하(流霞) 신선술로, 한 잔만 마셔도 기갈이 없어진다고 한다. 항만도(項曼都)신선을 만나 유하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기갈을 느끼지 않고 10년 만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했다.

천주(天酒)라고도 하는 감로(甘露)하늘에서 내리는 맛이 단 이슬로, 마시면 하고 싶은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무제감로를 받으려고 금속 선인장을 설치하였다.

선도(仙桃)곤륜허에 수천 리를 덮고 도사려 있는 복숭아나무에서 3천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는, 반도(蟠桃)라고도 하는 복숭아로, 7월 7일이면 서왕모선도를 따다가 잔치를 베푸는데 주목왕(周穆王)이 그 잔치에 나가 선도 4개를 먹었다고 한다. 한무제방사 이소군(李少君) 선인 안기생(安期生)선과(仙果)인 참외만한 대추를 먹더라고 했다.


4. 불로장생을 위한 수행과 방기

   불사약을 먹고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것은 외물에 의한 방법이다. 외물의 힘이 아닌,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얻는 방도가 강구되었다. 노자 ≪도덕경≫ 제59장장생구시지도(長生久視之道)낭비하지 않는 뜻인 색(嗇)의 수행으로 불로장생을 얻는 방법이다.

기력이나 정력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왕성한 활기를 쉽게 되찾는다는 것으로, 뿌리를 깊이 밖고 열매꼭지를 단단하게 하여 무한한 저력을 가꾸어 불로장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장자≫<재유>편의, 광성자(廣成子)가 황제에게 장생의 지극한 도리를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수일처화(守一處和)로, 한결같은 자연의 도를 지켜 만사에 조화롭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광성자는, “1천2백 년 동안 몸을 닦았는데도 내 몸은 전연 노쇠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자력을 통한 추구여서 진일보한 측면을 보여준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끝없이 오래 산다는 일은 실현하기 어렵고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욕구는 단념하기 어렵다.


   신선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고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려고 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약칭:漢志)≫의 마지막 <방기략 方技略>에는 신선가에 앞서 의경(醫經)·경방(經方)·방중(房中)이라는 3가지 방기가 나온다.

의경은 의학의 이론이고, 경방은 대증을 치료하는 방법이고, 방중은 성생활을 조절하는 방법인데, 다 무병장수를 이룩하는 방편이다. 신선가방기인데, 앞의 의경 등 3가지까지 포괄할 수 있다.


   ≪한지≫신선가에 대한 해설, “신선이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서 그 밖의 여기저기서 무엇인가를 찾는 방법이다. 잠시 그것으로 생각과 마음을 가라앉혀 죽음과 삶의 경지를 같게 하여서 가슴속에서 두려움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주안점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

   ≪한지≫ 신선가의 책이름에는 ≪황제잡자보인 黃帝雜子步引≫·≪황제잡자지균 黃帝雜子芝菌≫·≪신농잡자기도 神農雜子技道≫·≪태일잡자황야 泰壹雜子黃冶≫ 등이 나온다.


   ‘步引’‘步捨游引’의 준말로 혼백이 육신에서 걸어 나가 천상 선계를 유행하다가 시신 등 남겨 두었던 것을 끌어가서 신선이 된다는 시해(尸解)와 유사한 방법이다. 기도(技道)는 글자 그대로 기예의 방법이다. 황야 단사를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이다.

   ≪한서≫<교사지 郊祀志>에 따르면, 지방 출신들인 이소옹(李少翁)·공손경(公孫卿)·난대(欒大) 등은 다 한무제방사황야를 향했다. 갈홍은 선단 연조의 재료를 준비할 재력이 없어서 연조에 손을 대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불로장생이나 무병장수에도 재력이 필요하므로 황야의 방술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밖에 또 ≪황제기백안마 黃帝岐伯按摩≫가 있는데 안마는 몸을 누르고 문지르고 하여 적절한 자극을 주어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는 기예이다. 남이 해주는 안마와는 달리 자신이 하는 운동으로는 도인(導引)이 있는데, 몸을 여러 가지로 굽혀 가며 호흡을 하는 도수체조 같은 것이다.


   신선가들이 행하던 주요한 기예 중에는 또 태식(胎息)과 벽곡(辟穀)이 있다.

태식 태아가 모태 안에서 탯줄을 통해 배로 숨쉬는 것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것을 뱃속에 가두어 오래 참아내는 폐기법(閉氣法)으로, 건강에만 좋을 뿐 아니라 잘하면 불로장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벽곡곡식을 먹지 않고 음수 식기(食氣)를 위주로 하고 백출(白朮)·산약(山藥:마)·황정(黃精)·거승(巨勝:흑임자)·복령(茯苓)·영지(靈芝) 등의 보조약품을 복용한다.

   ≪황제잡자지균≫지균은 몸에 좋은 버섯을 가려서 먹는 방법으로, 고래로 영지 자지(紫芝) 같은 것을 먹으면 불로장생을 가능케 한다는 버섯이 있다. 이 밖에 두꺼비·박쥐·거북·제비 같은 동물 가운데서도 가려서 먹으면 장수하게 된다 하여 그런 것을 육지(肉芝)라고 부른다. 도교 성립 후에도 이러한 방기가 받아들여졌다.


5. 선화

   신선이 된다는 것은 황당하기는 하나, 인간은 크게는 불로장생을 작게는 무병장수를 바라는 생각을 지워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선 이야기에 관심을 모아 왔다. 서왕모천상에서 금령(金靈)의 기를 주관하고 서방을 다스리는 천선으로, 황제에게 병부(兵符)도책(圖策)을 주어 치우(蚩尤)를 이기게 해 주었고, 신궁(神弓)인 예(羿)에게 준 불사약을 그의 항아(姮娥)가 훔쳐먹고 달로 달아났다는 등등의 설화가 전해진다.


   황제는 도인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끝에 득도하여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형산(荊山)에서 보정(寶鼎)을 만든 다음, 거기에다 선단을 연조하여 그것을 먹고 신선이 되어, 선계에서 정호(鼎湖) 가로 내려보낸 용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올라타고 선계로 올라갔다.


   노자 ≪사기≫ 본전에 따르면 춘추 말기 주실(周室)의 주하사(柱下史, 국립도서관장 격)로 있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주실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을 나가 서쪽 땅으로 가 버렸다. 신선가들은 노자태초부터의 신선이라 하고 노자 ≪도덕경≫ 81장에 준하여 노자의 변화를 말하기까지 하였다.

   노자호화설(老子胡化說)은,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노자는 선계의 높은 지위에 있던 신선으로 살고 있었다. 황제 노자는 신선가들 사이에서 황로사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신선들을 다룬 유향(劉向) ≪열선전 列仙傳≫, 간보(干寶)의 ≪수신기 搜神記≫, 갈홍의 ≪신선전≫, 심분(沈汾)의 ≪속선전≫ 등이 나왔고, ≪도장≫ ≪역세진선체도통감 歷世眞仙體道通鑑≫과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 雲笈七籤≫에도 선화가 많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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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도서 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한국의  풍류사상과  기독교를  선맥사상으로  융합한  사상가의  복원
 
  • 승인 2017.12.18 10:56
   한
상일 전 한신대 교수·철학
 


  • 변찬린: 『한밝 변찬린: 한국종교사상가』 이호재 지음, 문사철, 792쪽, 33,000원
     

     

       필자는 1988년 『한밝문명론』(지식산업사)을 출판한 직후 ‘邊燦麟’(1934~1985)이란 분을 처음 알게 됐다. 이 분의 호가 ‘한밝’인 것이 인연이 된 것 같다. 『성경의 원리』 그리고 『禪밭, 그 에서 주은 이삭들』을 그 무렵부터 접할 수 있었다. 은퇴 한 후 서재 정리할 때와 미국으로 책들을 가져 갈 때에도 빼놓지 않고 꼭 챙긴 책이 이 두 책이다.


       2017년 10월 저자로부터 『한밝 변찬린: 한국종교사상가』(한밝은 편의상 ‘한밝’으로 표기함-편집자)를 받게 됐다. 30년 전 그 변찬린, 그리고 앞으로 쓰려고 하는 단신학에서 반드시 다루려고 했던 그 분에 관한 책이었다. 그것도 잠시 미국에서 나와 머무는 동안 이런 만남을 갖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고 나로 하여금 책을 쓰도록 박차를 가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아직 우리 귀에 생소한 변찬린은 누구이고 그의 주 사상은 무엇인가?

     

         변찬린은 그의 주저 『성경의 원리』를 쓰고 나서 옛날 원효와 고운과 퇴계와 율곡에게 지혜를 주셨던 아버지께서 제게 번갯불을 주셨고 청자 빛 비색의 하늘을 향해 개안 시켜 주시고 본래의 대도와 풍류도의 선맥의 하늘을 開天시켜 동방의 지혜(동양의 지혜가 아님)로 『성경원리』라는 각서를 쓰게 했음을 감사한다”고 적었다. 저자의 글 안에 인용된 변찬린의 이 말은 가장 감동을 주는 말이다. 기독교 성경 해석서를 쓰고 나서 변찬린이 한 말은 한국 어느 신학자의 글에서도 읽을 수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이나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 칼 바르트나 폴 틸리히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 토속 사상가들 변찬린의 뇌리 속번갯불 같은 섬광을 던져 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쓴 저술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65년부터 구도의 영성일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1988), 유언시집 『禪房戀歌』(1972), 또한 성경을 조직해석학적으로 논술『성경의 원리(상)』(1979), 구약사건을 해석『성경의 원리(중)』(1980), 신약사건을 해석『성경의 원리(하)』(1982), 요한계시록을 성구마다 해석『요한계시록 신해』(1986)등의 저술이 있다.

       변찬린의 신학 사상“성경은 선맥이다”로 요약 된다. 저자는 이 요약에 근거해 무려 800여 쪽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통해 변찬린 사상을 고찰하고 있다. 철학도로서 저자는 변찬린과 한 때 이웃에 같이 살았다는 인연 하나 만으로 말 그대로 만리장성을 쌓은 것이다. 이 책은 5편으로 구성돼 있지만, 크게 보면 세 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변찬린의 종교적 생애를 다룬다. 변찬린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유영모, 함석헌, 배용덕당대 선각자와의 교류, 방대한 동서양의 종교사상을 회통한 후 세계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겠다 ‘한밝경전해석학’구상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변찬린의 사상을 ‘한밝사상’으로 명명해 체계화한다. 저자는 변찬린을 그리스도교 계통의 종교연구가로 자리매김하지 않는다. 변찬린은 세계 종교경전과 유불도 사상을 회통한 다음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전개한다. 한밝사상영성우주시공우주가 서로 교류한다는 장대한 한밝우주역사관을 바탕으로 성경의 부활사상과 동방의 신선사상을 이해지평에서 융합시킨다.  

       셋째 『성경의 원리』한밝성경해석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한밝성경해석학이라는 성경해석의 체계로 범주화하여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를 독자에게 소개한다. 한밝사상과 한밝성경해석학실존적 인간의 구도자적 정신의 회복, 종교간의 대화, 사회변혁운동을 추구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으며, 이를 곧 축 시대의 사유체계를 통섭하고 새로운 문명의 사유체계의 대안적 사유로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호재 교수는 수십 년의 연구를 통해 한밝 변찬린을 이번 대작으로 복원시켰다. 특히 변찬린이 한국을 종교혁명의 기지로 삼아, 이를 인류역사의 새 문명을 만들겠다는 처절한 구도의 의지를 가진 영원의 구도자이자 종교사상가라는 측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변찬린한국의 풍류사상을 신학의 지평에서 거론한 최초의 사람이다. 혹자들은 유동식풍류신학의 선구자인 것처럼 알고 있지만, 저자는 변찬린이 “한국의 풍류신학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유동식의 풍류신학’과 유동식보다 몇 년 전에 이미 풍류사상에 주목해 한밝성경해석학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성경의 원리』를 썼다”(253~310쪽, 569~602쪽 참조)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선맥기독교의 부활사상을 상호 교차적이며, 융합적으로 이해한 것은 변찬린이 세계 종교계에서 최초라고 평가된다. 어느 누구도 변찬린과 같이 “성경은 선맥이다”라는 논지를 초지일관 주장하지 못했다.

       변찬린동시기원광대 유병덕한국의 仙과 巫를 구별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유병덕에 의하면 지구상 위도가 33도~43도 사이의 지역에서 무가 선으로 변한다고 했다. 熱帶도 아니고 寒帶도 아닌 지역에서만 무가 선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란 흔히 말하는 샤머니즘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는 빙의 같은 현상을 통해 ‘신내림’을 수의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선은 스스로 안에서 ‘신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선은 각고한 경험 즉, 고행, 기도, 금식 같은 것을 통해, 내면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신이 안에서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무와 구별한다.

       은 그 성격상 철학그 안에 태동하고 있었다. 선층차축시대 철학이 등장하기 직전 그리스의 호머시대, 인도의 리그베다시대,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직전, 인간이 신과 직접 통로를 열어 놓고 있을 때다. 그러나 차축시대의 공자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이 신과 직접 교류하는 것을 금했으며 박해하고 철폐까지 했다. 이것이 선층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차축시대 보다 500여 년 후에 등장한 예수의 언행은 선과 무층의 것을 다시 가져오고 있었다. 점에서 변찬린은 기독교를 선맥으로 본 것이다. 예수의 언행과 행각은 거의 선맥에서 이른바 신선이라고 하던 인물들과 유사해 보인다. 병든 사람을 기적으로 고치고 무엇보다 산 사람이 그대로 산몸으로 승천할 수 있는 데 이를 우화등선이라고 한다. 길선주 목사가 선맥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 만큼 선맥이 기름이라면 기독교는 불과 같다.

       그러면 왜 한국에서만 유독 기독교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강세인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다. 그것은 선맥이 굵게 자라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변찬린의 선구자적 통찰이다. 한국에서 선맥이 강세인 이유는 차축시대 인간의 합리적 자아가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그 이전의 무와 선을 말살하거나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상 어느 곳보다 선맥이 그대로 유지됐고 기독교가 도래했을 때 이웃사촌이나 만난 듯이 한국 문화와 기독교는 말 그대로 찰떡궁합이었다. 이 점을 변찬린은 천재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변찬린은 한국적 화합에 의해 기독교를 통해 ‘선맥’을 다시 찾으려 했다.  『성경의 원리』 상권은 신선사상인 도맥론과 불교의 윤회론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변찬린이 선맥을 통해 쉽게 차축시대의 불교나 도가 사상과 화합시켰음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특히 성경에 숨겨져 있던 ‘윤회론’을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 체계가 발굴하지 못했던 연구영역을 개척한 공로”라고 평가했다.

       변찬린인류 문명사에는 두 가지 맥이 흐르고 있는데 하나는 살아서 우화등선하는 선맥(僊脈)과 죽어서 시해선해 우화등선하는 선맥(仙脈)으로 분류한다. 이 두 종류의 구별은 변찬린 사상의 등록표와도 같다. 전자인 僊脈은 단군, 최치원, 에녹, 엘리야가 간 영성통로이며, 후자인 仙脈는 모세와 예수가 개척한 영성통로로 이해한다. 이런 측면에서 변찬린현 세계 종교의 신앙체계는 피안신앙이라고 비판하면서, 동방의 신선사상 풍류사상이 바로 영생신앙이라고 논변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지나 영성시대를 조명하면서 세계 경전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변찬린의 풍류도맥론영성시대의 대안적인 사유체계로 세계 학계에 내놓을 수 있는 훌륭한 종교적 자산이다.

       저자는 종교학과 신학의 학제간 교류, 한국 종교사상가의 기독교 신학이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변찬린의 사유체계’로 증명해냈다. 앞으로 한국의 사상세계 학문과 교류할 수 있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역작이다. 저자의 후속작업에서 변찬린의 사상적·학문적 계보가 좀더 충실하게 밝혀지길 기대한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철학
    필자는 미국의 필립스 대학원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으며, 한신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수운과 화이트헤드』, 『초공간과 한국문화』, 『한 철학』 한국의 사대주의 학문을 극복하는 대안적 학문체계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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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 손호현 박사| 천부경과 함께하는 나의 삶

    팔봉산 |

    | 조회 41 |추천 0 | 2014.06.01. 15:23



       풍류신학이라 해서 들여다보니, 기독교 선교, 토착화를 위해, 하나민족의 핵심사상은?

    하나다. 그리고 풍류로 화랑도다고 합니다만, 이것으로 기독교선교의 토착화를 위한 화랑도는 유다기독사상을 위한 영적 새로움을 주는 하나민족 자생적인 靈으로 성령의 충만으로 가득찬 기독교의 접목, 접생군화를 위한 한국신학, 한국기독교신학의 주요한 개념이자, 한국의 민속종교의 대단한 발견으로 "풍류신학" 즉 한국토착의 유다기독신학론...


       조금은 다행인 것은 유불선이 아니고 유불도다고 했는데, 손호현 박사"풍류"에서 한국적 기독교의 길을 찾다, 한국종교연구 기독교의 토착화 노력. 그러면서 종교의 공통분모, "삼태극"을 찾아내, 십자가 대신 "삼태극"(천지인)기를 높이 쳐들자는 내용을 읽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래종교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무교, 백랑무교, 삼신일교, 삼신교, 신교, 풍류교가 아닌, 그냥 풍류(도), 민족의 자생종교라고 하는 동학교에서 천도교, 한울사상, 단군사상의 대종교.. 이들은 왜 스르르 없어져야만 하는지.. 학계에서도 우리민족의 역사, 언어, 철학, 사상 그리고 논리도 하나 펼 수 없는 실정인 현재의 유다기독사상의 토착화를 넘어선 삼태극마져 기독사상의 선교목적으로, 윷놀이도, 천로역정이고, 유다기독을 믿지 않는 것은 불신지옥자라, 이단이고 사탄이다는 논리.. 이제는 화랑정신까지, 풍류까지 한류까지 모두 유다의 기독사상이 이 세상천지를 창조하고 움직였다는 학자와 지식층, 그리고 사회지도층이라는 목사들까지.. 자신들끼리 침례냐, 장로냐, 성공회냐 싸우는 것은 좋지만, 하나민족의 영혼과 정신을 겨우 이야기하면 윷놀이는 천로역정, 십자가 대신 삼태극을.. 


       그래도 손호현박사말과 용어의 정확도가 높다는 것을 말하면서, 열심히 유다기독의 한국토착과 선교를 위해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이가 없는 개화파(일제 기독교와 독일, 러시아 기독사상의 개화).. 이제는 무위자연 노자의 도교 및 태극론과 삼태극까지 그러니, 무교인 자가, 어느날, 기독교와 손잡고, 몰랐지.. 이게 인생이고, 정치를 위해서는 시민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공동, 기부, 탈무드에 무위자연행정론에, 기독교 진보와도 손잡고. 아장아장 걸어가자.. 시민기독사회구축을 위하야. 그래도 코멘트는 달자... 이곳은 천부경과 함께 하는 삶이니, 천부경의 민속잡설로 취급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http://theologia.kr/zeroboard/zboard.php?id=koreatheo&page=1&sn1=&divpage=1&category=47&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53&PHPSESSID=ef76532f692c1a000c2314dd4a1d4762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 손호현 박사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우리 시대의 명저 50] '풍류'에서 한국적 기독교의 길을 찾다

    한국 종교 연구 기독교의 토착화 노력
    종교의 공통분모 '삼태극'을 찾아내 "속죄의 상징 십자가는 우리와 안어울려"


    한국일보 2006.1.17

       여러 불교 종파들로 어지럽던 7세기, 화엄의 원효가 했다는 말 ‘규천위관’(窺天葦管ㆍ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도 그가 교조신학ㆍ수입신학의 틀을 벗어날 수 있게 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형 교회의 세습제나 ‘노사모’와 정(情)의 정치를 우리 민족의 오랜 문화전통과 영성의 특성으로 풀어 비판하면서 “그렇지만 문화란 타락 속에서 재생하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120여 년이 흘렀다. 근대화와 보조를 맞춰가며 이 땅 방방곡곡의 밤하늘은 희고 붉은 불빛으로 물들어갔고, 복음 역시 전래의 무교(巫敎)와 유ㆍ불ㆍ도 삼교(三敎)와 대립하고 조화하며 한국인의 심성에 충실히 스며왔다.
    (산) 2006년.. 개신교가 들어온 지 120년, 2014년 현재, 13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복음 역시 전래의 무교(巫敎)와 유불도 삼교.. 정확하게 유불도라고 하여 유불이 아니라는 것만 해도 상당히 정련이 된 개념의 정립입니다. 무교가 바로 선교에서, 신선교, 신교라고 하는 용어에서 나온 말이기에, 仙교=전래의 무교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박수...



       그렇다면 이 히브리의 영적 씨앗이 한국인의 심성과 동아시아 문화의 토양에 어떻게 뿌리내렸고, 지금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이 질문은 선교적 관심때문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주체적 역량에 대한 반추 위에서, 영적 주체의 응답으로서 절실하다. 그 물음에 답한 이가 “교회마다 십자가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태극’의 상징을 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도그마 너머의 신학자, 소금(素琴) 유동식(85)이다


    (산) 황당한 이야기...   한국인의 심성과 동아시아 문화의 토양에 어떻게 뿌리내렸고, 지금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선교적 관심이라, 현재 북미 및 해외교포사회에서는 90%가 개신교도로 선교가 완료되었고, 아메리카 인디언 선교, 남미선교, 불교국교인 지역 선교활동(네팔, 인도 등) 그리고 이슬람교의 국가까지 중동지역,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터키, 이집트 등등.. 기부와 자선으로 선교할 자금이 마련되었으므로 도움을 준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의 한국인 선교에 도움을 준 것을 이제는 한인유다개신교인들의 적극 선교에 나서고 있습니다. 한국토착을 위한 선교가 아닌 한국유다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하여 모든 개신교 교회에는 세계선교회의 지원으로 선교활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에 한층 한국기독교의 선교와 토착을 위해, 단순 풍류신학만이 아닌, "십자가 대신 "천지인" - '삼태극'의 상징을 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유는? 유다민족이 되기 위해서.. 참으로 소탈한 거문고의 선교논리와 개신교의 풍류, 한류화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서글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왜 민족종교, 전래의 무교는 물론이고 불교도, 무너지고 있는가? 돈이 없어서다..고 해볼까? 아니면, 사상과 철학이 없는 미개민족이어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이 천부코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 하나가 유일이라고 떠드는 사람들.. 우리언어의 위대함을 모르니까, 그냥 이야기한다, 윷놀이, 바둑, 역(서양력, 태양력,요일력 모두 서양이란다), 과학, 산업, 지식 거기에 영적자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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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그는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으로 보스턴 유학길에 오른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 소외에 시달려온 34세의 만학도는 그곳에서 또 한 번 근원적인 소외감, 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경전과 신학체계 전체가 서구 문화의 틀 안에서 형성됐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로써만 성서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누릴 수 있다면, 기독 신학자와 신앙인에게 반만 년 한국의 종교문화는 단지 미망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신앙이란, 절대자 안에서 우리의 모든 소외감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아닌가.(<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 84쪽)


       (산)   경전과 신학체계가 서구문화와 그들의 언어와 문화로써만 성서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했어야 하는데, 그래야 왜, 하나님은 그들 언어인 히브리어로 번역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 반만년 한국의 종교문화는 단지 미망함을 인식할 수 있었을텐데.. 마치 민족종교지도자처럼, 반만년역사라고 말은 하는데, 그러면서 단군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라고 말한다. 언어도단이라고 하는 말로, 민족의 자존심과 자수심을 높이는 것처럼, 역사의 시간이 반만년이 되다고 하지만, 겨우, 2000년의 종교철학이 어떻게 5000년 민족종교철학과 비교가 되냐고 하면 아마도 당장, 우리의 역사는 썰화였다고 할 것이고, 단지 고운 최치원이 난랑비서문도 만들었다고 할 것이기에.. 신앙이란 있슴이고 진리란 있슴을 아는 것으로 이를 깨달으면 도를 깨달은 것이고, 정성(소망), 믿음, 사랑중에 모두가 중요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정성입니다. 하나이지요. 정성, 믿음, 사랑은 모두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니, 자유와 평등은 하나라는 무부재 부불용 허허공공이나, 시작이고 마침이면서 무시무종의 하나라는 민족 무교의 종교관과 철학관을 이해라도 해주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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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즈음 신학의 양식사(樣式史)적 연구,진리의 절대성과 병행하는 문화의 상대성을 해명독일 신학자 불트만(1884~1976)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밝혀준 빛이었다.진리를 담는 그릇’인 역사와 문화의 상대성 연구, 종교를 담아온 우리 민족 고유의 마음 틀을 찾아가는 그의 길이 열린 것이다.


       (산)    모든 철학과 신학은 독일 신학자, 철학자에서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진리를 담는 그릇이 "역사"와 문화의 상대성 연구.. 종교를 담아온 우리 민족의 고유의 마음 틀.. 이것이 하나경이고, 천부경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독일철학과 종교학의 "신은 죽었다"는 칸트의 철학이 신학에 필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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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초 그는 국내 기독교 ‘토착화 논쟁’을 선도하며 한국학 연구에 몰두한다. 절대자를 인식함으로써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 종교라면, 기독교의 복음원리와 우리 고유의 영성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민족적 영성의 문학예술적 표현으로서의 ‘신화’와 그 영성의 종교의례적 표출로서의 ‘제례’에서 시작한 그의 한국 종교사 연구단군ㆍ주몽ㆍ혁거세 신화고대의 제천의례, 신라의 화랑도(풍월도), 최치원의 풍류도, 원효의 불교사상, 율곡의 유교사상, 수운의 동학사상으로 이어진다. 그 시절 집필한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1975) 등의 저서는 한국 종교, 특히 무교에 대한 본격 연구서로서 지금도 거대한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산) 그러니까 국내 기독교 "토착화 논쟁"을 선도하면서 한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풍월도(화랑도) 최치원의 풍류도(무슨 최치원의 풍류도인지? 난랑의 화랑의 풍류지), 단군, 주몽, 혁거세까지 모든 씬화라고 하지 않는가? 동학교사상까지..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1975년).. 무교에 대한 본격 연구서로, 지금도 거대한 지분을 확보했다함은 잠재적 무교인들의 개종이 가능하고 이를 이용한 토착선교가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지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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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의 토대 위에서 한국 종교사상사 연구로 나아간 그가 ‘풍류 신학’이라는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개념을 정립한 것은 80년대 중반이다. 60년대 <삼국사기>에서 최치원 난랑비문의 한 구절 -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는 삼교를 포함한 것이요’ - 을 읽은 이래 어슴푸레하게 감지되던 실체를 붙든 것이다. 그는 고대 종교문화를 형성한 한국인의 원초적 영성이 유ㆍ불ㆍ도의 외래 종교와 어울려 맺은 것이 화랑제도요, 풍류도라고 밝힌다


       (산) 풍류신학이라는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개념을 정립한 것이 80년중반이었다. 그러니까 박원순역사문제연구소 설립80년대 중반.. 삼국사기최치원의 난랑비문의 한구절.. 최치원이 아니고 난랑(진흥왕조의 화랑이 쓴 서문)이라고 하는데도 마치 최치원이 만들어낸 화랑도는 풍류다고 합니다만, 전혀 화랑과 풍류라는 것이 그 수련집단과 철학사이에 관련이 있는가를 연구한 것이 아니고, 화랑들만의 종교철학이 풍류다고 단정하여, 이것이 우리민족의 전통종교사상이다고 하는데, 그건, 풍류라는 말은 삼신교의 하늘의 도(하나)이고, 화랑은 천지화랑(하나랑)의 신라시절의 교육집단체제로 현재의 대학에 해당하는 민족교육집단, 민족사관학교로 사상과, 육신의 강건함 그리고 인륜의 실천이라는 귀족자제들의 국가관형성과 무관의 자질함양집단 교육기관입니다. 도리어 개신교면서, 귀족에 해당하는 노블들의 자제는 전부 검은머리 외국인에, 병역기피에, 하는 현실적인 종교에 편승한 사함, 죄를 사함받다 구제받는다는 것으로 토착민족정신의 쇠퇴가 문제입니다. 화랑과 풍류를 이용하여 개신교의 토착화와 선교를 하겠다는 것이 정말 참신하고 독창적인 것이란 말인가? 학자로서의 양심이라도 있는지? 하나민족의 한 사람으로 학생들을 자유와 평등에 의해, 공평한 사고의 논리적인 전개를 가르쳤는지? 아니다고 본다. 단순, 유다개신교의 토착화와 선교를 위해 민족정신의 말살 혹은 접목, 군생접화.. 민중과 접하여 기독교만 선교하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유다적인 유일철학의 발로는 아닌가? 사랑이란 개념도, 자심지자연이고 인성지본질이라는 사랑, 동양사상의 기본 측은지심, 어짊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고는 이러한 풍류신학이라고 풍류, 멋드러진, 예술의 감성의 창조가 유다기독교의 영적 감성의 접목이라는 가이소리가 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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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무강신(歌舞降神)하여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소원을 성취한다는 구조”(<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48쪽)다. 화랑의 가무는 예술적 차원 너머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삼국유사>, 위 책에서 재인용)는 행위였고, “산수를 찾아 노니는 것 역시 자연의 정기를 호흡하고 그곳에 강림한 하늘의 영과 교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위 책 53쪽)었다.


       (산) 가무강신하여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소원을 성취한다. 잡신 개잡아먹는 소리를 한다..

    가와 무는 율려로, 인간의 소리를 듣고 빛을 들어, 즉 소리는 하늘의 광명을 파장으로 듣고, 춤을 추어 율동에 맞추는 신명나야, 강신하는 것으로 이는 신명을 그냥 참나와 신명할 수 없기에, 가무를 통한 굿으로 강신의 경지, 무의 경지에 들어, 참나인 신명을 만나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바른 신명이 자신의 뇌에 내려와 있어, 이를 통한 소원이 아닌, 바른 길을 찾는다는 일신강충, 성통광명의 신교, 풍류의 기본 일곱과 여덟에 대한 이야기를 난도질 해놓았다.. 화랑의 가무는 예술적 차원을 너머,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종교라는 것은 이미 풍류로, 우리는 이것이 마루고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는다. 있슴의 도는 깨달아야하고, 가르침은 선사의 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것으로 서적과 무술연마로 육신의 강건함을 키우는 것이지, 가무가 마치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이 보다는 천제시 가무를 하여, 하나님, 천신과 지신 인신의 합일을 맞이하여,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합일을 이룬다함은 바로 이것이 일신강충이고 성통광명의 의식일 뿐입니다. 사유를 통한 각성대오도 가능하고, 지감, 조식, 금촉으로도 종교적이라고 하는 성명정의 삼진의 보존, 앎 그리고 깨달음의 삼진일체를 알고자하는 수련법. 산수를 창자 노닌다고 하는 것은 놀고 있다고 보이나, 산천의 정기와 하나됨으로써 정신과 육신이 지신과 하나됨을 배우는 것이고, 그래야, 자신의 뇌(심장이 아니고)에 강림한 하나님(속마음, 참나)와 천지가 합일되는지를 검증하는 수련법으로 선인수련법이라고 합니다. 화랑만의 수련법이 아니고 고구려의 조의선인이 되는 수련법도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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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과 ‘풍류’에 대한 그의 사유는 의미의 깊이로 파고들어, ‘멋진 한 삶’의 사상으로 여물어간다. ‘멋’은 이상적 미의식이자, 초월적 자유, 원융무애한 조화다. ‘한’은 크디 큰 하나의 포월적 ‘한’이고, 사람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구체적 일상의 ‘삶’이다. 거기서 그는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하나됨, 곧 ‘삼태극’의 형상을 발견한다.


       (산) 마치 풍류가 주색잡기 바람도라고 생각하나보다. 멋진 한 삶.. 마치 멋, 한, 삶이 삼진이라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멋이 이상적인 미의식(?) 그러니 멋은 정이라는 이야기고, 초월적인 자유, 원융무해한 조화다 맞지도 않는 아무말이나 아무곳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원융무애한 조화고 초월적인 자유라면 그것은 일적십거 무괘화삼으로 性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삼진의 성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즉 이는 멋이 아니고 "한"입니다. 하나가 원융무애한 조화고 초월적 자유고 眞(참)이라고 하는 것이고, 멋은 성명정 삼진의 정으로 멋짐, 미학, 아름다음으로 美라는 이야기로, 이는 지킴해야 한다는 하철의 精입니다. 삶은 다스림, 치화로, 이것은 삶 그자체로, 이 또한 명정, 명을 알고, 정을 지키라는 것으로 멋, 한, 삶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천지인도 아닙니다. 즉 삼태극도 아니라는 이야기.. 멋과 삶이 하나로 이것은 삶의 일모양입니다.


       태극은 삼극으로 삶입니다. 무극은 천지도로 하나(한)이고, 반극은 무위자연, 양의 조화입니다. 이것 중에 삼태극이 아니고 태극이 삼극으로 무한창조가 셋으로 태극입니다... 화랑의 풍류라고 하면 하나로 천도이며, 하늘의 도입니다. 태극은 화랑의 하나랑으로 삶으로 태극자체로, 사람의 도를 실천하는 삶 자체를 의미하고 이는 전부 하나로, 풍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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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의 가무강신과 ‘멋진 한 삶’은 유교의 극기복례나 불교의 무아열반,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 상징과 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종교의식의 본질이자 종교적 진리의 공통 구조인 ‘자기부정’을 통한 초월적 세계, 절대자 인식이다. 훗날 그는 ‘멋’을 중시하는 우리 고유 영성의 심미적ㆍ미학적 특성을 돋워, ‘예술 신학’이라는 또 하나의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다.


       (산)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이 화랑의 가무강신과 멋진 한 삶이 한 뿌리를 공유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유선악, 유청탁, 유후박은 화랑의 기본사상인 무선악, 무청탁, 무후박과는 정반대의 사상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예술신학은 자유의 형이상학과 신학의 표시이나, 이것이 예술신학으로 화랑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재질이 있어 예술(술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의 창조적인 감성의 수련이라고 하는 것은 화랑정신이 그냥 가무강신하고, 산천유람하는 자유스러운 예술인의 멋이다는 것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한류의 기본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전혀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괘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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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학자가 대학 퇴임 후인 95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마련한 <다산기념강좌>에서 교수 및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이다. 우리 민족 5,000년 종교사상사의 높은 봉우리들을 두루 꿰며 서양 정신사의 정수인 신학과 합류하는 물길을 연, 소금 신학사상의 정수를 담은 책이다.


       1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연치가 의심스러울 만치 강건했다. 그는 서양 복음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적 계약관계’ 위에서 성립된 반면 우리 종교사상은 ‘절대자와 내가 땅 위에서 하나’라는 삼태극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며, 십자가의 상징(죄와 대속)이 과연 우리에게 어울리는지 반문했다.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라고 했어요.


       (산) 서약복음십계명이라는 율법적인 계약관계로, 주종, 주인과 노예에 의한 계약관계로 한번 맺으면 영생, 죽을때까지 죽어서도 무시로 영향을 미친다는 독재 노동계약서인 반면, 우리 종교는 절대자와 내가 땅위에 하나가 아니고, 절대자와 내가 바로 속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합일이 됨을 깨달아야 한다는, 인내천보다는 일신강충의 의미에 기초를 두고 있고, 이것이 삼태극이 아니고, 성통광명, 재세이화, 그리고 홍익인간태극인데, 이 것은 홍익세상, 홍법의 이익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내용.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일신강충을 이야기하여 하나님이 내 속마음에 내려와 계심을 친히 알게 될 것이다와 같은 말로 들리지만, 우리의 삼신일체는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고, 너희들이 하나님과 같으며, 하나님이 너희들과 우리에게 모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재세이화니 홍익인간 유니크라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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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된다는 게 바로 삼태극의 원리죠. 신 앞에서의 죄의식을 일깨우는 십자가보다 삼태극의 상징이 우리 교회에는 더 어울려요.” 그가 성직자 안수를 받지않은 평신도 신학자였고, 교권(혹은 도그마)의 바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던 점도 저 우람하고도 자유로운 ‘영성의 성채’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일 것이다.


       (산) 그리스도를 매개로 여호와와 자신이 하나된다는 것이 삼위일체(Trinity)이나, 이것은 성신과 성자 그리고 매개로 성령이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개신교의 어느 신칭에도 들어가지 않는 순우리말입니다. 하나님자체의 말씀이 하나이고, 이는 석삼극하여 조화, 교화, 치화로 나뉘더라고 하나다 그것이 태극이고, 이는 석삼극 무진본으로 그 무진본이 하나임을 알게 되리라.. 신앞에서 원죄가 있다는 것은 유선악(심망)으로 우리 민족하나철학은 무선악으로 태어나, 이를 깨달음하면 상철로 광명공완자라고 하여, 태극이 아니 무극의 경지의 하나철학은 최고경지인 성통광명, 무극으로 태양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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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시절의 한학 스승이던 전주의 고득순 목사가 그에게 준 호가 ‘소석’(素石ㆍ<계시록>에 나오는, 새로운 이름이 적힌 흰 돌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의 호 ‘소금’(素琴ㆍ줄 없는 거문고)은 고희 어름에 스스로 바꾼 것이다. “소리 안 나는 거문고이니, 미욱하다는 의미죠.

    무거운 ‘돌’을 내려놓으니 마음은 가볍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싶다는 꿈마저 놓을 수 없어 들고는 다니는 거문고요.” 지난 해 후학들이 <소금전집편찬위원회>를 결성해 성서신학-풍류신학-예술신학으로 이어지는 그의 신학사상사를 정리하려는 참인데, 그는 연전의 강연자료들을 정리해 내년쯤 또 책을 묶을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교회의 삼태극 상징도 그 책에서 하고싶은 얘기입니다. 살아있음은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고, 젊고 늙음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력으로 나뉩니다.”


       (산) 개신교의 토착화와 선교를 위해 이렇게 창조를 하는 것은 좋지만, 풍류신학(풍류도 기독교를 위한 도구일 뿐), 삼태극도 교회의 특히 유다 쥬이쉬 사상과 철학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세계종교, 신학의 발전에 무차별적인 독선과 아집의 자아도취형 꼰대(노자)의 행위입니다.. 혼자 다 알고, 혼자 만유인력의 창조자고, 혼자 전지전능한 영생의 교주라,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구원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유동식

    1922년

    황해 평산군 남천 출생. 춘천고 감리교신학대 졸업

    48~56년 공주여사범ㆍ전주사범ㆍ배화여고 교사

    56~72년 미 보스턴대, 스위스 에큐메니칼연구원, 일본 도쿄대ㆍ국학원대학 수학

    59~67년 감리교신학대 교수

    73~88년 연세대 신과대 교수

    <한국종교와 기독교>(65) <민속종교와 한국문화>(77) <한국신학의 광맥>(82) <풍류신학으로의 여로>(88) <풍류도와 한국신학>(1992) 등 저.

    76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98년 3ㆍ1문화상 학술상



       한국이 죽어야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외래 종교인 기독교와 토착적인 한국문화의 비극적 충돌을 생생하게 문학적으로 증언한다. 한국문화가 서양에서 전해진 기독교를 버려야 한국적인 정신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혹은 기독교가 불필요한 불순물로서의 한국문화를 버려야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유동식 선생<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은 이러한 번역신학이나 수입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좋은 한국인이 될 때 좋은 기독교인도 될 수 있다토착화신학의 화두를 던진다. 한국문화의 뿌리를 망각하고 서양을 서투르게 모방만 하려는 종교나 신학은 마치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으로 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  한국이 죽거야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 이는 상생의 원리보다는 불상생으로 서로의 합일점이 없다는 점으로 유불도의 근거기준점이 우리나라 민족종교의 시원임을 인정할 때 상생의 도가 나오고 태극이 나옵니다. 도리어, 기독교의 순수성, 독창성, 유일성으로 풍류도 기독교사상이고, 태극도 기독교선전복음을 위한 것이다는 것은, 민족종교를 죽여야 기독교가 산다는 말로,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도용하여, 갈취해갔고, 정신머리 없는 얼빠진 미개인이라고 하고 있고, 풍류도 화랑도 없고, 삼태극도 태극도 전부 기독교를 위한 도구일 뿐, 선교와 토착을 위해서는 징용, 강제징발을 통해서라도 신식민지종교론으로 눌러야 한다는 언어도단의 폭거적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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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은 한국문화의 바탕을 풍류도로 본다. 민족의 얼로서의 풍류도는 유교ㆍ불교ㆍ도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마음의 틀이다. 즉 풍류도는 어떤 구체적인 고대 종교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 바탕과 얼을 구성하는 불변의 원리이며 보편적인 영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풍류도의 핵심에는 종교와 예술과 인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한 멋진 삶'의 추구가 있다.

       '한'은 크다는 뜻으로, 종교에서는 거기에 인격적 존칭을 붙여 한님 곧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종교들이 담이 없이, 더 나아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담이 없이 한 전체로 어우러진 삼매경신라의 석학 최치원포함삼교(包含三敎)라 불렀고, 이를 한국 기독교는 타 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종교신학으로 발전시켰다.


       '멋'이란 단순히 자연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개입된 예술적 미를 뜻한다. 삶 자체를 예술로 보고 이러한 흥ㆍ자유ㆍ조화의 멋을 추구한 우리 민족의 예술문화를 최치원은 좁은 의미에서의 풍류(風流)라 불렀고, 이를 한국 기독교는 이른바 예술신학으로 계승하고 있다.

       '삶'이란 살림살이의 뜻으로, 사람의 준말이다. 사람다운 삶, 사람다운 사람을 이룩하려는 우리 민족의 생명존중사상을 최치원은 접화군생(接化郡生)이라 불렀고, 이러한 생명살림의 요구를 한국 기독교는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신학으로 발전시켰다.


       (산) 마치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이 교주인 풍류도가 아닙니다. 그 시원은 기원전 7000년전의 환인시부터 천부경이 나왔고, 이것이 조화경으로 말씀이고, 삼일신고는 교화경으로 배달한국시 가르침경이고, 참전계경도 배달의 큰스님의 가르침보다는 다스림경으로 이를 직접 다스림한 것이 단군조선입니다. 삼신랑(천지화랑, 국자랑)은 백랑무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사제도고, 이러한 선인정치 및 종교의 귀일을 하려면 태자감, 경당의 일정교육기관을 준수해야 하는데, 이 때 문하생을 천지화랑(하나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한이기에 님을 붙여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이기에 하늘의 도이기에 하나에 님을 붙이면 하나님이요, 한(하나)에 하나는 알로 한알이고, 하나의 둘은 한얼이며, 하나의 셋(우리)는 한울입니다. 한알, 한얼, 한울이  셋극(태극)이나, 이는 모두 핵심이 하나(한)이니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풍류는 멋, 한 , 삶이 아니고, 하나도로 천도라고 할 수 있으나 파람의 도는 셋으로 하나둘셋, 성명정으로 진선미, 조화, 교화, 치화의 풍수(천문), 지리, 인리(사랑)의 말씀, 지표 그리고 삶이라는 인생의 목표와 운행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우치는 우리 아리(하나)랑들의 교육시스템입니다. 기독교선교를 위해 기부하라는 말은, 조금 너무 한 것이 아니고 많이 너무 한 무상기부요구입니다.




       한국이 살아야 기독교가 살고, 기독교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고 선생은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서양 선교사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 아니다. 그는 한울 우주를 창조하고 실현한 예술가이며, 우주 만물의 포월자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이러한 풍류도'한 멋진 삶'의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실로 선생은 하나님이 보여준 바람의 길을 걸으며 땅에서 하늘을 산 나그네이다.


       (산) 한국이 살아야 기독교가 살고, 기독교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 알겠습니다. 민족의 얼이 없는 얼빠진 한국이 살아야 기독교가 살고, 기독교가 살아야만, 얼빠진 한국이 유다한국이 된다..

    하나님은 서양선교사와 함께 오신 분이 아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에게 선교하는 교육자라고.. 하나님은 하나민족의 머리속에 박혀서 뺄 수없는 영원한 하나민족의 시조요, 시원으로 하나는 하늘의 나로 빛이요, 시작이요, 마침이라, 알파요 오메가다. 그러니, 여호와와는 다른다. 이유는 하나님은 무시무종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무에서 시작하고 무로 끝나니 절대적 영원멸의 존재가 아니고, 사람과 함께 하는 태극하나기 때문입니다.


       풍류도 한과 멋 그리고 삶의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고, 조교치, 군사부 이것이 일체(하나님)입니다. 서로의 언어의 사용과 의미가 틀리기에 내가 나그네가 아니고, 그대가 바람따라 멋부리면서 남의 사상과 언어를 난도하는 나그네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교화, 선교, 복음의 근착하려 하지 말고, 빈손으로 가시기를 부탁드리옵니다. 무소유, 법정스님의 말씀.



    호현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Re: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 손호현 박사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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