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몽>, 백제를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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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주몽>, 백제를 죽이다

df 2007-02-14 00: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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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주몽>, 백제를 죽이다 주몽이 간과하는 점들...중국의 역사왜곡과 비등하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2007-01-08 14:05:10   MBC 드라마 <주몽>은 부여를 부정하고, 고구려 중심의 시각을 극화하여 부여는 물론 백제까지도 죽여 버렸다. 또한 발해의 정신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는 우리 역사 자체를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드라마 <주몽>은 고조선이 무너지고 각 부족으로 흩어진 유민들을 최초로 결합한 것이 고구려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여(夫餘)는 고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 나라와 친교의 관계에 있으므로 철저하게 부정의 대상이 된다. 드라마는 어떻게 해서든지 고구려가 부여와 관계없는 독자적인 국가였음을 부각하기 위해 주몽이 고조선의 영웅 해모수의 아들이라며 부여와 적대적인 관계로만 설정 했다. 오로지 고구려만이 고조선을 이은 적통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는 고조선에 이은 두 번째 통합 국가라고 보아야 한다. <동사강목>은 “단군의 후손이 북쪽으로 옮겨 부여국이라고 하고 해(解)로 씨(氏)를 삼았다”라고 했다. 단군의 후손은 고조선의 후손이며, 부여가 고조선의 맥을 이었음을 뜻한다. 고구려는 물론 백제도 이 부여의 일족이다. < 후한서>는 “동이족들 서로 간에 전해오기를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으로 여기는데 그 까닭은 언어와 법칙 등이 매우 많이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위서>에는 “백제국은 그 조상이 부여서 나왔다, 위나라 연흥 2년에 그 백제왕이 처음 사신을 보내와 표를 올려 말하길 ´고구려와 같이 백제는 원래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라고 했다”고 적혀 있다. <구당서><신당서>는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의미다. 즉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를 계승했다는 증거로 고구려와 백제가 동명왕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동명왕을 주몽이 아니라 북부여의 시조로 보았고, 주몽이 이 동명왕 칭호를 이은 것이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북부여의 시조 동명왕은 본래 북적 색리국에서 난을 피해 부여에 이르렀다. 주몽이 신비롭고 이상한 이야기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더니 부여가 망하자, 고구려 사람이 성스러운 조짐이라 동명왕 이야기를 훔치고 중국 사람임을 자랑했다. 이에 중국사가들이 그 말에 따라 역사책에 기록을 남겼으니, 그 황당함은 구구히 말할 것이 없으나 동명이라는 이름의 두 글자는 분명히 북부여의 시조 이름이요, 주몽과 관련이 없다”라고 했다. < 후한서>의 부여 조에는 부여가 “처음에 ´북이´의 ´색리국´에서 나왔다”고 했다. 또한 부여의 시조가 동명이며, 동명은 알에서 나왔다고 했다. 또한 “자신을 죽이려는 왕을 피해 동명이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라고 했다. 만약 정약용의 말대로 주몽이 동명의 이름을 훔쳤다면, 주몽은 동명왕이 아니며 다만, 북부여를 주몽의 고구려가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명이 반드시 북부여의 시조가 아니라 부여의 시조일 가능성도 크다. 항상 계승자들이 시조를 차용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의 손자 대무신왕(3년)이 동명왕 사당을 지었다. 이후 고구려왕들은 서울을 평양성으로 옮긴 뒤에도 동명묘가 있는 환인(고구려 건국지)까지 가서 참배했다. <삼국사기>는 “온조왕의 아들 다루왕이 시조 동명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며 백제도 동명왕을 시조로 삼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간 많은 사서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동명성왕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 때문에 백제의 비류와 온조를 주몽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생겼다. <삼국사기>에도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는 비류와 온조가 동명왕 주몽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삼국사기>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우태)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隋書)>에서 “구태(우태)는 동명왕의 후손”이라고 했다. 당(唐)나라 장초금(張楚金)의 <한원(翰苑)> ‘백제조(百濟條)’는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구태(우태)는 소서노의 남편이다. 결국 백제는 부여의 일족이다. 또한 소서노도 이러한 점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드라마 <주몽>에서 우태는 상단의 호위무사로 등장했고, 소서노와 결혼은 하지만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일찍 죽어버린다. 무엇인가 했다면 소서노에게 일편단심의 사랑만 보여준다. 한줄기 비극적 감동을 위해 사라져갔다. 적어도 부여의 동명왕을 계승한 자 였다는 점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소서노는 이러한 부여 계승을 의식을 젼혀 보여주지 않는다. 연정으로 고주몽을 위해 나라를 세우는 조력자일 뿐이다. 여하튼 백제의 온조왕과 비류는 주몽의 아들은 아니며 부여의 계승자들이다. 김부식이 혼동스럽게 기록한 것은 아마도 이전의 동명왕 주몽이라는 기록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북부여)의 시조를 계승했다. 이렇게 된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피를 나눈 형제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서로 자신들이 부여의 적절한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경쟁적으로 싸운 것이다. 동부여의 대소와 졸본부여-고구려의 주몽이 치열하게 싸운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일 것이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 ‘졸본고’ 에서 부여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밝혔다. 즉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그리고 남부여다. 부여에서 갈라진 북부여가 처음이며, 다시 북부여에서 동부여가 나왔는데 해부루왕이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로 가섭원(迦葉原)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남쪽으로 졸본 부여가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고구려다. < 동사강목 제 상(上)>, ‘고구려 시조 고주몽 원년’을 보면 “’국호(國號)를 고구려, 혹은 졸본부여(卒本扶餘)로 했다.”고 적혀 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는 졸본 부여다...북부여를 계승하여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이것이 고구려다”라고 했다. 고구려와 부여는 밀접한 맥락을 가진 일족의 성격이므로, 고구려와 부여를 분리하여 적대적으로 설정한 드라마 <주몽>의 설정은 타당하지 않다. 부여와 언어, 풍습이 같고 시조도 같다면 부여를 애써 부정할 근거는 없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드라마 <주몽>이 부여를 부정하고, 고구려의 독자성만을 내세울수록 부여(夫餘)를 명백하게 계승했다는 백제가 죽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우선, 남부여는 백제이며, 백제의 왕족 성씨는 부여(夫餘)씨이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했다. 1929년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에서 백제 부흥군의 장수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는데, 심지어 그도 부여 씨였다. < 삼국유사>에는 “백제는 남부여라고도 하는데 곧 사비다”라고 했다. 538년(성왕 16) 봄 성왕은 수도를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고구려를 견제해 명백하게 남부여라고 밝힌 것은 그만큼 부여가 대단한 국가였음을 뜻하며 자신들이 부여의 계승자임을 선포한 것이다. 교토대 우에다마 사아끼(上田正昭) 명예교수는 “백제 성왕이 일본 왕을 겸했다”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즉, 일본도 결국 후기 부여의 세력 범위였던 것이다. 백제가 남부여 경영론을 통해 중국은 물론 일본, 동남아시아까지 경영한 것으로 최근 밝혀지고 있다. 우선, 백제가 대륙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어왔다. 양서(良書)에 이르길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격하므로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했다. < 송서(宋書) 열전>은 “백제는 요동의 동쪽 천 여리에 있다. 뒤에 ´고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가 ´요서´를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일컫는다.”라고 했다. 남사(南史)에서도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 여리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역시 백제도 요소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라고 했다. 중국의 <중국역사지명사전>에서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다는데, 광서(廣西) 경계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광서성 장족자치구 창오현 일대에는 백제향이라는 마을이 남아있고 이곳이 진평군으로 추측되고 있다. 여기에서 전남지역의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방아 등이 발견된 바도 있다. 백제 태수들의 임지가 중국의 해안을 따라 형성되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고, 중국전역에 관리를 보냈다는데, 이를 남조에 파견한 백제의 사신 관직에서 짐작된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서하태수(산서성 분양현), 광양태수(북경 서남), 조선태수(하북성 노룡현), 광릉태수(강소성 양주시), 청하태수(하북성 청하현), 성양태수(하남성 비양현)이 대표적이다. <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최치원이 지은 <상대사시중장>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1백만 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고 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백제)근구수 왕이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과 부씨의 진을 정벌,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성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했다.”라고 했다. 또한 백제는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경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일본서기>에는 “부남(扶南-현재 캄보디아)에서 나는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 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말레이반도 남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다는 기록도 있다.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에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 지방산이 있었다. 이런 동아시아 경영에서 담로 제도가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담로(擔魯)는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인데 백제의 22담로는 국제적인 각 지역 통치 사신 파견 제도였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흑치상지 묘지석에는 “흑치상지는 부여 씨에서 나와 흑치국에 봉해졌다”라고 했는데 필리핀의 이름이 흑치국이었고, 흑치상지는 담로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흑치국은 통킹灣(베트남, 북동부해안) 연안에서 중국 廣西 서남방 지역(해남도 포함)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또한 각종 사서는 백제의 호수(戶數)를 76만호로 기록하고 있다는데, 조선시대 초기의 호수 조사에는 옛 백제권(경기· 충청· 전라의 삼도)의 인구가 6만호 남짓에 불과했다. 고대의 충청, 전라도의 지역에서 나올 수 없는 수치다. 이는 그만큼 백제가 경영하고 통치한 지역이 넓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드라마 <주몽>과 같이 중국 대륙을 호령했다는 고구려의 독자성만 인정하고, 부여의 정통성을 죽인다면 부여를 비롯한 백제의 역사가 사라진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라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여를 인정하는 전개일 때 우리의 역사는 더욱더 넓어진다. 처음부터 드라마 <주몽>은 매우 잘못된 설정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 진서> ‘동이전’과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부여(夫餘)가 사방 2,000리, 호(戶)가 80,000이었다”고 적었다. 또한 “동이의 지역 중에 가장 평평하며. 사람들의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갈 줄 알고,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특히 “국가에서 흰색 옷을 숭상하여, 백색 옷에 소개가 넓고, 도포와 바지가 있다”라고 한 점은 조선의 특징과 결부된다. 이러한 점은 드라마 <주몽>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중국식 복색만 화려하게 보여준다. 부여는 고구려·백제·옥저·예 등이 분파되어 나간 모체이며, 고조선을 계승한 최초의 국가다. 부여(夫餘)의 부정은 무엇보다 단순히 백제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727년 발해 무왕은 왜에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유속은 정신적인 가치를 말한다. 발해마저 부여의 정신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강대했던 땅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은 부여에 있으며 그 정신은 고조선에 닿아있는 것이다. 드라마 <주몽>은 이러한 점들을 너무나 간과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 왜곡과 비등하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KBS 드라마 <대조영>도 고구려의 계승성만 강조하지 부여는 흔적조차 없다. SBS <연개소문>에도 부여의 흔적은 없다. 백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서동요>에서도 부여 계승성을 털끝도 보이지 않았으니, 다른 드라마에서 애초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지 모른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200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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