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문인들의 교유시를 통한 雙井茶연구

2018. 11. 26. 19:01차 이야기



북송 문인들의 교유시를 통한 雙井茶연구*| 중국인문과학
樂民(장달수)|조회 62|추천 0|2018.06.08. 18:53


북송 문인들의 교유시를 통한 雙井茶연구*


송 해 경**


――――― < 目次> ――――――
Ⅰ. 서론
Ⅱ. 북송대 문인사회와 쌍정차
Ⅲ. 쌍정차를 매개로 한 교유시 분석
Ⅳ. 결론
――――――――――――――――

Ⅰ. 서론

   宋代는 중국에서 차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였고, 중국에서 차가 일상다반사로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된 시기였다. 강남지방의 개발로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과거제도가 실시됨으로써 신흥사대부들의 정계진출이 가능하게 되면서 사회 핵심계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詩賦에 재능이 있는 강남의 지식인들은 과거시험 중 가장 중요한 진사과에서 유리했기 때문에 남인 출신 관료가 정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신흥사대부들은 정치가이면서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비유나 은유 등 우회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당시에 새로운 사상 풍조라고 할 수 있는 신유학이 등장함으로써 道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文을 경시하는 풍조를 바로잡고자 구양수는 새로운 ‘古文革新運動’을 주창하였다. 구양수의 이러한 사상은 왕안석과 소식, 황정견 등이 뒤를 이어 하나의 큰 사조로 발전시켰다. 화려한 언어 사용을 배격하고 내용 전달에 충실한 산문체를 도입하여 표현의 散文化, 議論化를 시도하였다. 詩분야에서도 엄격하고 정형화된 律詩에서 벗어나 古詩형태로 된 교유시가 유행하였다. 酬唱, 和答, 贈答, 次韻詩등이 증가하였으며, 생활주변의 신변잡기가 시의 제재로 등장하였다. 차문화의 보급 확산과 더불어 문인들은 차와관련된 많은 시문을 남겼다.


* 이 논문은 2014년 원광디지털대학교의 교비 지원에 의해서 수행됨..

**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 경영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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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에는 고형차의 틀을 깬 새로운 제다법으로 만든 산차(초차)가 점차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초차는 외형적으로나 맛과 향 등이 기존의 고형차와는 차별화된 차로서 쌍정차와 일주차가 쌍벽을 이루었다. 특히 쌍정차가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것은 황정견의 역할이 컸다. 황정견은 자신의 고향에서 생산되는 쌍정차를 시문과 함께 동봉하여 주위의 문인들에게 소개하였던 것이다. 당시 상류층이었던 문인들은 연고차인 납차나 단차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황정견은 초차인 쌍정차의 음다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쌍정차는 주로 북송시대에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을 했지만 중국 차문화가 고형차에서 산차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나타난 차로서 중국 茶史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북송대의 구양수와 매요신, 황정견, 소식 등의 쌍정차를 제재로 한 시문을 분석함으로써 북송대 문인사회의 특징과 송대의 차 중에서 쌍정차가 차문화사에서 갖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북송대 문인사회와 쌍정차


1. 북송 문인사회의 특징

   중국에서 당․송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唐宋變革期’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획기적인 시기였다. 그 중 당대는 중국 세력의 외형적 확장에 주력하였다면, 송대는 황제를 중심으로 과거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문치주의를 지향하였다.1) 또한 급격한 기후변화2)와 인구증가는 남쪽으로의 대규모 인구이동을 가져왔고, 당대 중기부터 시작되었던 강남개발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시장을 형성하고 상업도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중국의 경제중심은 점차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로 농민과 상인 등 중소 지주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 재능있는 지식인들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신흥사대3)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신흥사대부들은 정치가이면서 사상가이고 또한 문학가로서 송대 사회의 핵심계층이었다.


1) 이춘식,≪중국사서설≫, 교보문고, 2005, p. 303.
2) 중국은 지금까지 약 5000여 년 동안 대체로 4번의 온난기와 4번의 한랭기를 거쳤다. 당송변혁기에는 3차 온난기(600년~1000년)에서 3차 한랭기(1000~1200)로 이어지면서 기후변화가 극심하였다. (류제헌,≪중국의 역사지리≫, 문학과 지성사, 2000, pp. 45~53.)
3) 사대부란 중국 특유의 지배층을 범주화하려고 할 때 선진 문헌에서부터 주로 관료를 가리키면서도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지식인․ 교양인을 포괄하는데, 송대 사대부란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협의의 사대부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송대의 사대부가 서민으로부터
성장한 까닭에 생기가 있는 동시에 군주에게 예속된 피동성을 지니고 있어 모순되는 듯한 양면성이 협의의 사대부를 특징짓고 있다. (하원수,〈송대사대부론〉,≪강좌중국사≫Ⅲ, 지식산업사, 2002, pp. 72~73., 堀敏一,≪中國通史≫, 講談社學術文庫, 2001, pp. 24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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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송대에는 신유학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도학이 발전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 지식인들이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그들만의 고답한 세계에 안주하였다면, 송대 사대부들은 현실세계에 깊이 고민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모색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도가와 불교의 자극으로 공자 사후에 전해지지 못한 유학의 도를 부흥시키고자 신유가들은 강한 역사적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송대 사대부의 모범이라고 일컬어지는 범중엄 “세상 사람들에 앞서서 근심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하라(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歟)”4)고 하였다.

   특히 북송 시기는 중국의 고전문학이 시문뿐만 아니라 민중문예에 있어서도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이다. 북송 초에는 당대의 영향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거이를 추존하는 香山派, 가도를 추존하는 晩唐派, 이상은을 추존하는 西昆派의 세 부류가 시단을 주도했는데, 그 중에서도≪西崑酬唱集≫으로 유명한 양억, 전유연, 유균 등이 이끄는 서곤파 세력이 가장 컸었다.5)

   한유의 문학정신을 이어받은 북송의 구양수는 道를 중시하고 文을 경시하는 경향을 바로 잡고자 고문혁신운동6)을 주도하였다. 내용 없는 화려한 언어 사용을 배격하였으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문에서도 산문체의 글쓰기를 적용하였다. 시의 散文化및 議論化는 당대와 다른 새로운 예술적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송시의 내용과 체제 그리고 서술적 측면에서 새로운 성장을 가능케 하였다.7) 구양수의 뒤를 이은 소식의 ‘以俗爲雅以故爲新’의 點化論8)은 문학 개혁운동을 종합하고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는 옛것을 본받아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點鐵成金換骨奪胎의 방법을 제시했다. 點鐵成金은 옛사람의 별것 아닌 평범한표현을 자기 시에 활용함으로써 본인의 시에서 빛나는 표현과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換骨奪胎는 황정견의 용어인데 옛사람의 뜻을 바꾸지 않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는 것을 ‘환골’이라 하고 옛사람의 뜻을 본받아서 그려내는 것을 ‘탈태’라 한다. 그러나 황정견의 이러한 시론은 시가 언어의 기교적 측면에 치중한 것으로서 후대의 시론가들에게 표절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9)


4) 范仲淹,≪湖廣通志≫卷105〈岳陽樓記〉
5) 오태석,≪황정견시연구≫, 경북대출판부, 1992, pp. 23~27.
6) 당대의 고문운동은 만당 오대를 거치는 동안 쇠퇴하다가 북송대에 이르러 다시 부흥되었는데 이것을 제2차 고문운동이라고 한다.
7) 오태석, 앞의 책, p. 25.
8) 點化는 이미 존재하는 작품의 생각과 뜻을 교묘하게 차용하여 자기의 시 작품에 쓰는 것을 말한다. 비속한 것을 우아하게 하고(以俗爲雅), 옛것을 사용하여 새롭게 하여(以故爲新) 발전적으로 변화를 시키는 것을 점화하고 한다.
9) 김원중,≪중국 문화의 이해≫, 을유문화사, 1998, p.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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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의 또 다른 특징은 시인들이 일기를 쓰듯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신변잡사를 다
루고 있어 당대에 비해 시인의 수와 작품의 수10)가 크게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형식면에
서는 오언보다 칠언이 많았고 정형화된 율시보다 고시로 된 교유시가 성행하였다. 송대
문인들은 공사간의 많은 내용들을 시문 형식으로 상호 교감하였는데, 이러한 성향은 酬
唱, 贈答, 次韻詩의 엄청난 증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11)
송대의 차문화는 황실에서부터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어 일상화되는 시기였다.
일곱 가지 생활필수품인 開門七件事12)에 차가 들어갈 정도로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차문
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대부터 이어졌던 강남개발과 과거를 통한 남방인들
의 중앙관직 진출이 큰 역할을 하였다. 차나무는 아열대성 식물이므로 따뜻한 남쪽지방
에서 잘 자랐기 때문에 남방의 문인들은 자연스럽게 차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강남 출
신 관료이자 북송시대 문인으로는 丁謂(966~1037), 范仲淹(989~1052)13), 梅堯臣
(1002~1060), 歐陽脩(1007~1072), 蔡襄(1012~1067), 司馬光(1019~1086), 王安石(1021~1086),
蘇軾(1037~1101), 黃庭堅(1045~1105), 蔡京(1047~1126), 葉夢得(1077~1148)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차를 즐기는 차인으로서 많은 다시를 남겼다. 다시의 제재는 유명 명차, 차 끓
이는 법, 차 마시기, 물, 차도구, 차산지, 공차, 투차 등으로 매우 다양하였다.
2. 송대 草茶와 雙井茶
송대 이전에는 찻잎을 시루에 쪄서 절구에 찧어 덩어리로 만든 고형차가 주류를 이루
었다. 삼국시대 장읍의≪광아≫와 당대 육우≪다경≫에서 餠茶가 그것이다. 그러나≪송
사≫〈식화지〉에는 송대의 차를 크게 片茶와 散茶로 나누고 있다.14) 편차는 편으로 세
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고형차를 총칭하는데,15) 당대부터 있었던 병차와 송대의
硏膏茶가 여기에 해당된다. 연고차에는 고급 臘茶와 황실에 진공했던 龍鳳團茶가 이에
속한다.16) 송대 다서의 대부분은 황실에 바쳐진 공차 즉 북원지방의 단차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에 비해 송대의 산차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러나 산차는 唐代에도 존재하였고,17) 당대의 산차를 이어받은 것이 송대 산차인 草茶이
10) 당대의 다작 시인은 백거이가 3,000여수, 두보 1,400수, 이백 900수, 왕유, 한유 수 백수이나 송
대의 육유 10,000수, 양만리 4,000수, 소식 3,000수, 매요신 2,900수, 왕안석 1600수, 황정견 2,000
수 등이다.(오태석,≪중국시의 문예심미적 지형≫, 글누림, 2014, p. 219.)
11) 송용준,〈송시형성과정연구〉,≪중국문학≫Vol 34, 2000, p. 59.
12) 땔감(柴), 쌀(米), 기름(油), 소금(鹽), 간장(醬), 식초(醋), 차(茶)를 말한다.
13) 范仲淹,≪范文正集≫卷2〈和章岷從事鬪茶歌〉“장안의 술값은 천만이 싸졌고 성도의 약시장은
한산하다(長安酒價減千萬成都藥市無光輝)”
14) ≪宋史≫卷183〈茶上〉“茶有二類曰片茶曰散茶”
15) 서은미,≪북송 차 전매 연구≫, 국학자료원, 1999, p. 60.
16) 拙稿,〈송대 차문화와 초차의 재조명〉,≪한국차학회≫제19권, 2013, p. 27.
17) 육우≪다경≫〈육지음〉에서 차의 종류를 추차, 산차, 말차, 병차의 4가지로 들고 있지만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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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송대에 산차라는 명칭은≪송사≫〈식화지〉에만 잠깐 등장할 뿐 산차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초차라는 이름으로 문인들의 시문과 水磨茶法에서 대중적으로 마시는 末茶
원료로 등장할 뿐이다.18) 초차는 양절지방에서 생산되므로 江茶라고 불리웠고, 연고차에
해당되는 납차와 단차는 복건 건안지방에서 생산되므로 建茶로 불리웠다.19) 강차로 유명
했던 강서성의 쌍정차20)와 절강성의 일주차21)는 고급초차였다. 그 외에 보운, 아산, 고
저, 몽정, 건계, 천목, 와룡서초 등 여러 곳에서 생산되면서 점차 대중화되었지만 본 논
문에서는 주로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고급초차인 쌍정차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초차와 쌍정차에 관해서는 歐陽修(1007~1072)는≪歸田錄≫과 남송 葉夢得(1077~1148)
의≪避暑錄話≫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납차는 검과 건에서 나고, 초차는 양절에서 난다. 양절의 제품 중에서 일주가 제
일이다. 景祐년간 이래로 홍주의 쌍정백아가 점점 성하여 근래에는 더욱 정교해졌
다. 紅絲주머니로 한두 냥에 불과하지만 정상으로 자라면 보통 차 십 여근을 만들
수 있다. 더위와 습기를 피하여 쌍정백아가 멀리까지 알려지게 되어 일주보다 위가
되었으며, 초차 중 제일이 되었다.22)
초차의 극품은 오직 쌍정, 고저에서 나는데 불과 수무에 불과하다. 雙井은 分寧縣
에 있는데 그곳에 황노직의 집이 있다. 원우 년간에는 황정견이 추천하여 수도에서
상을 받았고 친척들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해마다 생산되는 것은 겨우 한 두 근 뿐
이다.23)
병차 제다법과 음다법에 대해서만 상세히 논하고 나머지 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
마도 당대에 육우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차는 병차였지만 기타 다른 종류의 차들이 존재했음
을 알 수 있다.
18) 송대 차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던 산차를 초차로 규정하는데 있어서 학계에서는 정확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廖寶秀는 양절 일대의 초차를 협의의 산차로 보고, 그
밖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차를 광의의 산차로 정의하고 있다.(廖寶秀,≪宋代喫茶法與茶器之硏
究≫, 國立古宮博物院, 1996, p. 18.) 본 연구자는 쌍정차나 일주차와 같이 고급초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대중적으로 마셨던 대중초차로 구분하여 논의한 바 있다.(졸고, 앞의
글)
19) 강차와 건차에 대해서는 조여려의≪북원별록≫과 황유의≪품다요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20) 쌍정차의 별칭으로는 洪州雙井、黄隆雙井、雙井白芽등으로 불리우며 分寧(지금의 江西修水)
과 洪州(지금의 江西南昌)에서 생산되었다.
21) 日注는 日鑄라고도 하며 절강성 紹興日鑄嶺에서 나는데 당대에 이미 유명하였고, 송대에는 산
차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공적인 기록과 채군모, 소동파 등은 모두 日鑄라고 표기하고 있으
나 구양수만이 日注라고 쓰고 있다.
22) 歐陽修,≪歸田錄≫卷1 “臘茶出于劍建草茶成于兩浙兩浙之品日注爲第一. 自景祐以後洪州雙井
白芽漸盛. 近世製作尤精囊以紅絲不過一二兩以常茶十數斤養之用辟暑濕之氣其品遠出日注上
遂爲草茶第一”
23) 葉夢得,≪避暑錄話≫卷下〈茶評〉“草茶極品惟雙井顧渚﹐亦不過數畝。雙井在分寧縣﹐其地即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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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구양수는 차의 종류로 납차와 초차 두 가지를 들고 있다.≪송사≫〈식화
지〉에 있는 차와 비교한다면 납차는 편차에 속하는 고급차로서 지금의 복건성에 속한
검주와 건주에서 생산되었고, 초차는 산차로서 지금의 강서성 절강성 지방인 양절에서
생산된 차이다. 초차가 생산된 양절지방은 당대부터 御茶園이 있었던 곳으로 공차 생산
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송대에 어차원이 복건성 건안지방으로 옮겨가면서 양절지방에
서는 연고차 대신 초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북송 葛常之(? ~1165)는 “건차가 입공된
이래 양선에서 다시는 연고차를 만들지 않았고 초차를 만들었다.”24)라고 언급하였다. 또
한 초차인 쌍정백아차가 점차 유명해진 것은 景祐년간(1034~1037)이다. 그 기간은 仁宗
황제의 재임기간(1022~1063)으로 丁謂(966~1037)와 蔡襄(1012~1067)이 새롭게 개발한 연
고차의 한 종류인 용봉단차가 탄생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초차는 병차와 단차가 유행하
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차이다.
쌍정은 황정견의 고향으로 分寧縣(지금의 강서 修水)에 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쌍정
차는 초차의 극품으로 생산량이 겨우 한 두근 뿐이므로 일반 대중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차였다. 그러므로 쌍정차는 황정견과 친분관계가 있는 일부 문인들 사이에서만 알려졌
다. 일주차는 쌍정차보다 먼저 개발되어 초차의 원조로 널리 알려진 차이다. 그러나 구
양수의 말처럼 초차가 만들어진 초기에는 일주차가 으뜸이었지만 景祐년간 이래로 홍
주에서 만든 쌍정백아차는 더위와 습기를 피하여 보관에 신경을 써서 품질을 향상시켜
초차 중 제일의 차가 되었다. 결국 元祐년간(1086~1093)에 수도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
은 쌍정차가 貢茶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으로 황정견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25) 그러나
쌍정차는 북송 문인들의 시문에 주로 나타나지만 일주차는 북송에서부터 남송시대에 이
르기까지 많은 문인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실제로 문인들의 시문에는 쌍정차보다 일
주차에 대한 기록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대의 초차인 쌍정차는 중국차문화
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초차는 蒸靑에 의한 고형차 제다에서 炒靑산차 제다로 넘어갔던 과도기에 나타난 송대
의 蒸靑散茶이다. 고형차 중에서도 연고차(납차, 단차)는 제다방법이 까다롭고 만들기 어
렵기 때문에 값이 비싼 것이 흠이었다. 더군다나 희고 아름다운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茶膏를 제거하였고, 차 본연의 맛과 향이 부족하므로 공차에는 용뇌나 사향을 섞어 만들
기도 하였다.26) 연고차의 결정적인 단점은 맛과 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고차
를 만드는 원료싹을 가지고 제다법을 달리하여 만든 것이 초차였다. 시루에 찐 차싹을
(손으로 약간 비비거나 그대로) 건조시킨 산차 형태였고 맛과 향이 좋았다. 그러므로 구
魯直家也元祐間﹐魯直力推賞于京師﹐族人交致之然歲僅得一二斤爾”
24) 葛常之,≪增修詩話總龜後集≫卷31 “自建茶入貢陽羨不復硏膏謂之草茶而已”
25) 康乃主編,≪中國茶文化趣談≫, 中國旅遊出版社, p. 119.
26) 蔡襄,≪茶錄≫〈香〉“茶有眞香而入貢者微以龍腦和膏欲助其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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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는〈雙井茶〉에서 “장안의 돈 많은 다섯 갑부는 한 모금 마시고 삼일 간 자랑하였
네(長安富貴五侯家一啜尤須三日誇)”라고 하였다. 고급초차였던 쌍정차와 일주차는 새로
운 제다법을 적용한 신개념의 산차였다. 즉 고형차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맛과 향이 부족
한 연고차의 단점을 보완하여 만들었다. 쌍정차는 보관에도 신경을 써서 일주차보다 훨
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올이 촘촘한 비단 주머니에 싸서 더위와 습기를 최대한 차단하
여 오랫동안 좋은 품질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보관법의 차이가 훗날 초차 제일의 차가
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귀전록≫에서 “홍사 주머니로 한두 냥에 불과하지만 정상으로 자라면 보통
차 십여 근을 만들 수 있다(囊以紅絲不過一二兩以常茶十數斤養之)”고 한 것처럼 생산
량이 적고 매우 비싸서 대중화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린 싹이 아닌 1창
1기 혹은 1창 2기의 싹과 잎으로 만든 대중초차로 이행 보급되었다. 실제로 송대 산차의
대부분이 대중초차였다. 만들기도 쉽고 맛과 향도 뛰어난 대중초차는 값도 싸고 생산량
도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초차는 중국의 차사에서 산차가 대세를 이루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평민출신이었던 명 태조 주원장은 ‘團茶廢止令(1391)’을 내려 다농들의 노고를 덜어주고
자 단차제조를 법으로 금하고 대신 산차를 진공하게 하였다.27) 명대 이후 오늘날까지 차
인들이 마시는 대부분의 차가 산차인 점을 고려한다면 송대의 초차, 그 중에서도 쌍정차
의 차사에서 위상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Ⅲ. 쌍정차를 매개로 한 교유시 분석
북송 중기 구양수는 매요신, 소순흠과 더불어 古文運動을 주창하였다. 고문운동은 지나
친 수사 위주의 문장을 배격하고 한유, 유종원 이후 일시 쇠퇴한 고문을 부흥시키고 정
치적 혁신을 해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구양수의 사상을 이어받은 인물이 바로 왕안석과
소식이었고, 황정견의 江西詩派가 이후 중국 문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갔다.
쌍정차는 이들 북송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차이다. 전기한 바와 같이 쌍정차는 황
정견의 고향에서 새로운 제다법으로 만든 차였다. 그러므로 황정견은 영향력 있는 문인
들과 시문을 주고받을 때마다 차를 동봉하여 고향의 차를 소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
나 차를 받고 쓴 감사의 시문과 쌍정차에 대한 사람간의 품평이 상당히 달라 새롭게 출
시된 쌍정차에 대한 문인들의 냉정한 시선이 흥미롭다.
본 논문에서는 구양수, 매요신, 소식, 황정견의 쌍정차와 관련된 대표적인 시문을 상호
대비 분석함으로써 쌍정차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며, 당시 문인들의 쌍정차에 대한 견
27) 布目潮渢,≪綠芽十片≫, 岩波書店, 1989, p.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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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양수의〈雙井茶〉
歐陽修(1007-1072)는 북송 때의 시인· 사학자· 정치가로서 자는 永叔, 호는 醉翁혹은
六一居士, 시호는 文忠으로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이다. 중국 사천성 성도 북부 지역인
綿陽에서 태어났으나 구양수는 강서성 길주 廬陵사람으로 자칭하기를 좋아하였다.28) 한
유의 문학정신을 이어받아 화려한 수식어를 배격하고 고문의 부흥을 주장하는 시문혁신
운동을 제창하고, 정치 혁신을 통한 문풍의 변혁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9) 따라
서 청렴한 재상으로 존경받았던 범중엄의 신정치를 지지하다가 때로는 좌천당하기도 했
다. 고문체로 쓰여진 그의 문장은 이후 많은 문인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왕안석, 소식,
황정견, 양만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구양수는 인종대에 관리로 지내면서≪龍茶錄後序≫≪歸田錄≫≪浮槎山水記≫≪大明水
記≫등 차와 관계된 저술도 하였다. 차 중에서도 주로 공차였던 건안지방의 단차와 관련
된 내용이 많고, 차를 끓이기 위해서 필요한 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구양수는≪귀전록≫115개조의 고사 중에서 차에 관한 내용을 3개조에서 적고 있다.30) 당
시 귀했던 용봉단차와 새롭게 만들어진 초차와 쌍정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황정견이
평소 존경하는 구양수와 소식에게 자신의 고향에서 생산되는 쌍정차를 시문과 함께 보
냈던 것이다.≪귀전록≫에서는 양절지방의 대표적 초차인 일주차와 쌍정차를 소개하면서
일주차가 먼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景祐년간 이래로 쌍정차가 더욱 정교하게 만
들어져 초차 중 제일의 차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 후 구양수는〈雙井茶〉라는 시문
을 남겼으며 쌍정차가 유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西江水淸江石老서강수 맑은 물이 흐르는 해묵은 바위
(2)石上生茶如鳳爪돌 위에 자라는 차, 봉황 발톱 같구나.
(3)窮臘不寒春氣早섣달의 추위를 견디고 이른 봄기운이 오면
(4)雙井芽生先百草쌍정차 어린잎은 뭇 풀보다 일찍 나오네.
(5)白毛囊以紅碧絲흰털에 쌓인 차 붉은 비단 주머니에 넣어
28) 구양수의 15대조 歐陽琮이 당나라 때에 吉州(지금의 江西省吉安) 자사를 지내면서 정착한 이
래 길주 廬陵의 大族이 되었다. 그러므로 구양수는 사천에서 태어났어도 그 자신은 여릉사람이
라고 자칭하기를 좋아하여 이후 ‘여릉 구양수’라고 부르게 되었다.(오태석,≪황정견시연구≫, 경
북대출판부, 1992, pp. 21.)
29) 송용준, 앞의 글, p. 54.
30) 구양수의≪귀전록≫은 치평 4년(1067년) 60세에 관직에 있으면서 저술한 책으로 주제가 다양
하고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다. 24조에서는 草茶, 74조에서는 龍鳳團茶, 88조에
서는 떡차인 香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강민경 역,≪귀전록≫, 학고방, 2008. 참조)
북송 문인들의 교유시를 통한 雙井茶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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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十斤茶養一兩芽한 두냥의 싹을 길러 열 근의 차를 만들 수 있는데
(7)長安富貴五侯家장안의 돈 많은 다섯 갑부는
(8)一啜尤須三日誇한 모금 마시고 삼일 간 자랑한다네.
(9)寶雲日注非不精보운차 일주차도 정성껏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닌데
(10)爭新棄舊世人情새것을 찾고 옛것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라.
(11)豈知君子有常德군자에겐 한결같은 덕 있음을 어찌 알리오!
(12)至寶不隨時變易매우 귀한 것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13)君不見建溪龍鳳團그대는 건계 용봉단을 통해 보지 못했는가?
(14)不改舊時香味色예전의 향·미·색이 그대로인 것을31)
위 시는 정형화된 율시가 아닌 산문체 고시의 형식으로 (1)~(4)구에서는 쌍정차를 만드
는 원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쌍정차는 이른 봄 풀들이 나오기 전에 바위틈에서 자
란 봉황의 발톱[鳳爪]같은 차싹으로 만들었다. 노동은〈茶歌〉에서 “천자가 양선차를 맛
보시게 하려고 뭇 풀들은 감히 먼저 나오지 않았다(天子須嘗陽羨茶百草不敢先開化)”고
하였다. 쌍정차는 건안 북원지방의 연고차 만드는 차싹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어차원
이 있었던 무이산은 차나무가 돌 틈에서 자라는 岩茶로서 배수성이 뛰어나 맛과 향이
좋았다. (6)구에서는 한 두냥(37.3g~72.6g)의 싹을 키워서 차를 만들면 열 근(5,968.2g)은
족히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만큼 어리고 작은 싹을 사용하였다는 뜻인데, 이런 어린
차싹은 鳳爪, 麥顆, 雀舌, 鷹爪, 鳥嘴등 다양하게 불렸다.
(5),(6)구를 보면 고형차가 아닌 산차인 쌍정차는 紅碧絲의 비단 주머니에 넣어 보관한
것을 알 수 있다. 쌍정차가 보운차나 일주차보다 품질 경쟁력이 있게 된 계기는 올이 촘
촘한 비단 주머니에 보관함으로써 냄새와 습기를 최대한 차단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분석된다.32) 따라서 (7),(8)구에서 돈이 많은 사람들은 차의 맛과 향이 오랫동안 지속되
었던 신제품인 비싼 쌍정차를 구입해서 마시고 삼일간이나 자랑하였던 것이다. 이상
(1)~(8)구의 분석을 통해 쌍정차가 맛과 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간에서 새롭게 유행하
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9),(10)구에서는 보운차나 일주차가 쌍정차와 같은 초차임에도 불구하고 나중
에 만들어진 쌍정차가 초차 제일이 된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즉 새것을 찾고 옛
것을 쉽게 버리는 세상인심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11)~(14)구에서 군자의 덕이 한결
같음을 강조하면서 예전부터 있었던 건계지방의 용봉단차를 칭찬하고 있다. 구양수는 오
랫동안 고급 명차의 위치를 지켜 왔던 용봉단차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군자의 덕에 비유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예전부터 있었던 보운차와 일주차에 비해 뒤늦게 만들어진 쌍
31) 歐陽修,≪文忠集≫卷9
32) 졸고, 앞의 글,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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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차가 유행하는 것이 마뜩찮은 듯 구양수는 장안의 졸부에 비유하며 폄하하고 있다.
구양수의 위 시를 보았던 王子厚는 황정견에게 시를 보냈던 것 같다. 구양수의 시를
본 황정견은 답신에서 “보내주신 구양수의 쌍정시는 쌍정차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구양수의 작품이 아닐 것이다.”33)라며
재차 쌍정차의 음다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쌍정차가 훌륭한 맛과 향을 지녔음에
도 구양수는 여전히 건안의 용봉단차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매요신의〈晏成續太祝遺双井茶五品茶具四枚近詩六十篇因以爲謝〉
梅堯臣(1002~1060)의 자는 聖兪, 호는 宛陵으로 안휘성 선성현 출신이다. 문단에 데뷔
한 초기에는 서곤파의 화려한 시로 시작활동을 시작하였으나 후에 구양수, 소순흠과 함
께 시문혁신운동에 참여하였다. 2,900여 수의 많은 시를 남겼으며, 시의 제재로는 이전까
지 거의 취하지 않았던 모기, 복어, 이, 벼룩, 지렁이, 구더기, 배 끄는 사람, 장마, 옛날
돈 등 다양한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였다.34)
매요신은 구양수와 동년배로서 매우 절친했고 많은 교유시를 남겼다. 구양수가〈嘗新
茶呈聖兪〉를 읊으면 매요신이〈次韻和〉를 짓고, 구양수가 다시 운을 따라〈次韻再拜〉
를 지으면 매요신은〈次韻和再拜〉의 답시를 주고 받았다. 주로 구양수가 건안지방의 햇
차를 맛보고 매요신에게 보낸 것에 대해 서로 차운하며 화답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매요
신은〈晏成續太祝遺双井茶五品茶具四枚近詩六十篇因以爲謝〉에서 쌍정차에 대해 언급하
고 있다.
始於歐陽永叔席구양수의 자리에서 시작하여
乃識双井絶品茶좋은 품질의 쌍정차를 알게 되었네.
次逢江東許子春다음에 만난 강동의 자춘차도
又出鷹爪與露芽응조와 로아 차싹으로 만들었다네
鷹爪斷之中有光손톱으로 끊어 딴 응조 차싹은 빛이 나고
碾成雪色浮乳花맷돌에 갈아 눈같은 차가루는 유화로 떠오르네
…35)
이 시는 안성속이 쌍정차 5품과 다구 4점을 보내온 것에 크게 감사하며 쓴 답시다. 매
요신은 구양수를 통해서 이미 쌍정차의 맛을 보았고, 선물로 받은 차에 대해 품질이 좋
다고 칭찬하고 있다. 매요신 역시 쌍정차의 원료인 어린 차싹을 구양수가〈雙井茶〉에서
33) 黃庭堅,≪山谷全書≫卷14〈答王子厚書〉“所寄歐陽文忠双井詩詞意未當双井之價或恐非文忠所作”
34) 송용준, 앞의 글, pp. 9~15.
35) 梅堯臣,≪宛陵集≫卷36
북송 문인들의 교유시를 통한 雙井茶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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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것과 같이 매발톱[鷹爪]과 이슬 맞은 어린 차싹[露芽]으로 표현하고 있다. 쌍정차를
만드는 찻잎은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 어린 차싹을 손톱으로 끊어 땄다. 조여려의≪북
원별록≫에서도 “손톱이 아닌 손가락으로 따면 높은 체온에 의해 손상되기 쉽고, 손가락
이 아닌 손톱으로 따면 빨리 끊어지므로 비틀지 않아도 된다.”36)고 하였다. 그러나 어린
싹이 보리 낱알처럼 작았기 때문에 손톱으로 끊어 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시문에서 발견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초차인 쌍정차의 음다법은 오늘날과
같이 우려 마시지 않았고, 고형차와 마찬가지로 맷돌에 가루내어 點茶하여 마셨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3. 황정견의〈以雙井茶送子瞻〉과 쌍정차 관련 시문
黃庭堅(1045~1105)은 강서성 홍주 분령현 수수에서 태어났다. 자는 魯直호는 山谷道人
혹은 涪翁이다. 23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리로 나갔으나 40대의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신구간의 정치적 갈등 때문에 불안정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다. 元豊원년(1078) 황정견
은 소식에게 편지와 함께〈古風二首上蘇子瞻〉라는 시를 보냈고, 소식으로부터 대단한
찬사와 함께 화답시를 받으면서 교유가 시작되었다.
황정견은 소식 문하에서 활동하였으므로 張耒, 晁補之, 秦觀과 더불어 ‘蘇門四學士’로
불리운다. 소식이 일찍이 황정견의 시문을 보고 세상에 다시없을 빼어난 작품이라고 칭
찬하였으며, 나중에는 소식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蘇․黃’이라 불리기도 하였다.37) 서예
에도 능하여 화단에서는 채양, 소식, 미불과 함께 북송 4대 서예가로 손꼽힌다. 문단에서
는 스스로 일가를 이루는데 주력하여 江西詩派의 종주가 되었다. 황정견의 시론은 두보
를 계승하고자 독서와 시학적 학습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반어와 역설적 표현 그리고 전
고를 많이 인용하여 읽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황정견의 차에 관한 초기 시문에는 건안 단차에 대한 기록이 많다. 그러나 자신의 고
향에서 기존의 것과 다른 초차(쌍정차)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쌍정차와 관련된 기록들이
≪山谷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은 주위 문인들에게 시문과 함께 쌍정차를 보냈
고, 쌍정차는 구양수가≪귀전록≫에서 언급함으로써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의
〈以雙井茶送子瞻〉은 황정견이 한림원에 있는 소식에게 쌍정차를 보내면서 쓴 시이다.
(1)人問風日不到處세상의 바람과 해가 미치지 않는 곳
(2)天上玉堂森寶書천상 옥당에는 귀한 책이 가득하네.
(3)想見東坡舊居士생각해 보면 예전에 동파에서 거주하실 때
(4)揮毫百斛瀉明珠붓을 들어 백곡이나 되는 진주를 쏟아내셨네
36) 趙汝礪,≪北苑別錄≫〈採茶〉“蓋以指而不以甲則多溫而易損以甲而不以指則速斷而不柔”
37) 김학주,≪중국문학사≫, 신아사, 2011, p.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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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我家江南摘雲腴내 고향 강남에서 운유 같은 차를 따서
(6)落磑霏霏雪不如맷돌에 갈면 흰 눈서리처럼 차가루 날리네.
(7)爲君喚起黃州夢그대 위해 황주의 꿈 일깨워주러
(8)獨載扁舟向五湖홀로 배를 타고 오호로 향하네.38)
위 시는 황정견이 元祐2년(1087) 소식에게 어린 싹으로 만든 쌍정차를 보내며 안부를
묻는 글이다. 당시에 황정견은 著作佐郞이었고, 소식은 元豊2년(1079) 鳥臺詩案문자
옥39)으로 황주에서 4년 4개월간 혹독한 유배생활을 하다가 다시 복귀하여 翰林學士40)
를 지내고 있었다. (1),(2)구에서 天上玉堂은 소식이 근무했던 한림원을 가리키며, 한림학
사라는 황제의 고문에 해당하는 높은 직위에 있었으므로 반대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임을 말하고 있다. 특히 한림원은 특별조서나 명령문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도
서관처럼 책이 많았던 곳이었다.
(3),(4)구에서는 소식의 황주 유배생활을 적고 있다. 황주에서 소식은 東坡에서 홀로 농
사를 지으며 살았고, 스스로를 ‘東坡居士’라 칭하였다. 후에 소식이라는 이름보다 동파라
는 호가 훨씬 사랑받는 명칭이 되었다. 즉 동파에서의 유배생활은 비참했지만 주옥같은
글들이 탄생하였고 ‘赤壁賦’와 같은 불후의 명작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그를 은
근히 위로하고 있다.
(5),(6)구에서는 황정견이 쌍정차를 동봉하면서 소식의 안부를 묻고 있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제다된 쌍정차를 알리고자 쓴 글로 보인다. 황정견의 고향은 따뜻한 강
남에 있으므로 아열대성인 차나무가 잘 자란다. 그 차나무에서 ‘雲腴’의 차싹을 따서 쌍
정차를 만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雲腴는 튼실하고 살진 차싹을 말하는데 앞에서 언급
했던 鳳爪, 鷹爪, 露芽와 같은 차싹이다. 운유는 이전까지 북원공차인 용봉단차에 관한
책이나 시문에서 보이지 않았던 용어로서 황정견이 쌍정차를 만드는 차싹의 원료로서
처음 언급하고 있다. 산차인 쌍정차를 맷돌에 갈면 흰 눈처럼 가루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차를 말차로 갈 때와 다르지 않다.41) 송대에는 ‘茶色貴白’42)이라 하여 단차의 흰
색 차가루를 귀히 여겼는데 실제로 증청산차인 쌍정차 가루가 흰색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단차를 귀히 여기는 문화에서는 흰색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어린 찻잎으로 만든
38) 黃庭堅,≪山谷集≫卷3
39) 신법에 반대하여 조정의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의 시를 써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 소식은 이
사건으로 御史臺(鳥臺)에 100일간 투옥된 후 호북성 황주에만 거주하는 비참한 유배생활을 하
였다.
40) 한림학사는 天子의 私人으로서 고문역할을 담당하여 중대한 詔勅을 기초하거나 기밀문서를 작
성했으며, 천자의 行幸때는 시종으로서 호종하는 등 중요직이었고, 中書省과 中樞院의 집정으
로 승진할 수 있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4h2855a)
41) 高橋忠彦,〈宋詩より見た宋代の茶文化〉,≪東洋文化硏究所紀要≫第百十五冊, 1991, p. 77.
42) 蔡襄,≪茶錄≫〈色〉
북송 문인들의 교유시를 통한 雙井茶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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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색깔은 어느 정도 자란 찻잎으로 만든 차에 비해 흰색에 가까우므로 차가루가 희
다는 문학적 표현을 쓴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차를 마시기 위해 가루를 내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황정
견은〈答王子厚書〉다른 답시에서 “쌍정법은 노포로 수건을 만들어 잔 하나를 두껍게
싸서 그 안에 차를 넣고 손으로 누른다. 하얀 털을 체로 쳐서 제거하고, 차를 골라내어
맷돌에 갈면 차의 색과 맛이 모두 훌륭하다.”43) 고 하여 가루내기 전에 흰털을 제거하는
독특한 주장을 하고 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晁補之에게 보낸 두 편의〈答瀘州安撫王
補之〉에서도 가루내는 방법과 물 끓이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7),(8)구에서는 鳥臺詩案사건으로 황정견 역시 元豊3년(1080) 고향 홍주 남쪽
에 있는 吉州太和縣知事로 좌천되었었기 때문에44) 소식과 동병상린의 아픔을 공유하
면서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고향의 쌍정차를 가루내어 소식에게 끓여 주고 싶음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황주 유배와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소식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마음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황정견의 쌍정차와 관련된 다른 시로는 元祐2년(1087)에 孔常父에게 쌍정차를 보내면
서 쓴〈以雙井茶送孔常父〉가 있다.
故持茗椀澆舌本찻잔을 입에 대니 혀 끝부터 젖어들고
要聽六經如貫珠육경의 내용이 구슬처럼 꿰어져 들려오네
心知韻勝舌知腴마음으로 차의 운을 느끼고 혀로서 두터움을 아네.
何似寶雲與真如어찌 보운차와 더불어 같다고 하겠는가?45)
이 시에서 황정견은 쌍정차의 맛과 기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차를 한 모금 입에 넣
었을 때 혀에 젖어오는 감촉으로는 차의 맛을 느끼지만 마음으로는 차의 기운을 느껴
六經의 많은 내용이 귓가에 들리는듯하다고 하였다. 마치 노동의〈茶歌〉에서 “첫째 잔
은 목구멍과 입술을 적시고, 셋째 잔은 메마른 지식을 채워 영감이 떠올라 문자가 오천
권이라네(一碗喉吻潤三碗搜枯腸唯有文字五千卷)”라는 구절과 유사한 내용이다. 황정견
은 쌍정차, 일주차, 보운차가 다 같은 초차이지만 쌍정차는 氣感이 있어서 보운차 보다
훨씬 좋은 차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인 晁補之(1053~1110)에게 보낸 두 편의 편지 내용이다.
43) 黃庭堅,≪山谷全書≫卷14〈答王子厚書〉“雙井法當以蘆布作巾裹厚垍盞一隻置茶其中每用手頓
之盡篩去白毛幷揀去茶子乃硙之則茶色味皆勝也.”
44) 오태석, 앞의 책, p. 235.
45) 黃庭堅,≪山谷集≫卷3〈以雙井茶送孔常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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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쌍정차는 잘 숙성되어 맛이 깊습니다. 외람되지만 멀리있는 차들도 능히 따
를 만한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루내는 방법은 차꽃이나 작고 누런 잎을 먼저 골라
내고, 촉촉한 헝겊에 가볍게 싸서 흰털을 털어 버리십시오. 약하게 배화한 후 맷돌에
갑니다. 그러면 맷돌면에 눈같이 아름다운 가루가 나옵니다. 대체적으로 건계차의 탕
은 펄펄 끓이지만, 쌍정차는 끓기 시작한 탕을 사용합니다. 이 법대로 끓이면 차색이
푸르고 맛이 떫지 않습니다.46)
올해 만든 쌍정차는 예년보다 품질이 좋습니다. 백아차를 등급에 따라 각각 5봉지
에 담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맛은 매우 좋습니다. 맷돌에 갈 때에는 이전에
갈았던 차를 깨끗이 씻어내고 햇볕에 널어 말려야 향과 맛을 해치지 않습니다.47)
두 편의 편지는 각각 해를 달리하여 보낸 것 같다. 내용으로 보면 해마다 쌍정차의 품
질이 좋아졌고, 주위의 차 중에서 최고의 차라고 자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어린 싹으로만 만든 백아차도 품질에 따라 5봉지로 조금씩 나누어 담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떻게 마셔야 차의 진가를 알 수 있는지 쌍정차 음다법에 대해서도 재차 설명하
고 있다. 차를 가루내는 방법은 첫째, 차꽃이나 누런 잎을 먼저 골라내고 마른 찻잎이
부서지지 않도록 젖은 헝겊에 싸서 비빈 후 체에 쳐서 흰털을 제거한다. 둘째, 젖은 헝
겊에다 쌌기 때문에 차에 습기가 있으므로 약한 불에서 건조하는 배화과정을 거친다. 셋
째, 맷돌은 깨끗이 씻어 햇볕에 말려 두었던 맷돌에 갈아야 맛과 향을 해치지 않는다.
물끓임에 대해서도 “건계차의 탕은 펄펄 끓이지만, 쌍정차는 끓기 시작한 탕을 사용한
다(建溪湯欲極滾雙井則用才沸湯)”고 하였다. 채양은≪다록≫에서 “물이 설 끓으면 찻가
루가 뜨고 지나치게 끓으면 찻가루가 가라앉는다. 전 시대의 蟹眼도 지나치게 끓은 물이
다.”48)라고 하여 가루차는 대부분 설 끓인 물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쌍정차는 오늘날의
末茶와 같이 증청하여 건조시킨 찻잎이므로 차가루도 흰색이 아닌 푸른색이고, 끓기 시
작한 물을 사용하여야 차의 거품이 골고루 잘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황정견의 고향에서 생산된 쌍정차에 대해 채다에서부터 만드
는 과정 그리고 가루내어 마시는 음다과정에 대한 내용 등 쌍정차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차싹을 쪄서 茶膏를 짜낸 후 硏膏상태로 갈아서 틀에 넣어 굳힌 연고차(납차, 단
차)와는 달리 초차인 쌍정차는 차고를 짜내지 않고 만들었기 때문에 차의 성분을 온전히
46) 黃庭堅,≪山谷全書≫卷3〈答瀘州安撫王補之〉“雙井今年似火齊太熟味差厚,謾分上來遠不能多
也硙之法皆擇去茶花及小黃葉以微潤布中摵去白毛略焙之乃硙 其出硙面如雪乃佳耳大率建溪
湯欲極滾雙井則用才沸湯治擇如法則不復色靑味澁”
47) 黃庭堅,≪山谷全書≫卷3〈答瀘州安撫王補之〉“雙井今歲製作似勝常年今分上白芽等各五囊雖在
社後數日味殊勝也磨時須洗去舊茶曬乾乃不敗其香味”
48) 蔡襄,≪茶錄≫〈候湯〉“未熟則末浮過熟則茶沈前世謂之蟹眼者過熟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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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쌍정차는 색깔도 푸르고 차 고유의 맛과 향이
단차에 비해 훨씬 더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황정견은 쌍정차를 차의 기운까지 함유한
좋은 차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의 말차 원료가 산차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오늘날 말차의 원형은 쌍정차를 가루내
어 마시는 음다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쌍정차는 북송시대에 주로 유행했지만
차사에서 쌍정차의 역할과 의의는 크다고 본다.
4. 소식의〈黃魯直以詩饋雙井茶次韻爲謝〉
蘇軾(1036~1101)은 중국 송나라 때의 대문호로서 자는 子瞻, 호는 東坡, 시호는 文忠이
다. 아버지 蘇洵동생 蘇轍과 더불어 ‘三蘇'로 불리우며, 3부자가 모두 당송팔대가에 들
어갈 정도로 문장가 집안이지만 그 중에서도 소식이 가장 뛰어나다. 소식은 구양수가 嘉
祐2년(1057) 知禮部貢擧로 있던 시절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소식은
구양수의 사상을 이어받게 되었다. 소식이 살았던 북송시대는 비교적 안정된 시대였지만
보수와 혁신이라는 정치적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소동파는 元豊2年(1079) 신법에 반대
하여 호남성 黃州로 유배되었다가 哲宗에게 다시 중용되어 歐陽脩, 司馬光과 함께 舊法
黨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소식의 정치적 생애는 순탄치 못하였지만 잦은 유배로 이
어진 곤궁한 생활은 문학창작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치
세의 유교사상을 근간으로 난세의 도교사상과 도가사상 그리고 불교적인 은일문학 사상
까지 습합하면서 유불도 삼교의 사상을 융합하였다.49) 그의 문학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
이 바로 황정견을 비롯한 蘇門四學士이다.
소식은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했지만 40여년의 출사를 통해 상류층의 고급 단차문화를
향유하였다. 또한 가전체 산문의 효시인≪葉家傳≫에서는 일상다반사가 된 차를 의인화
하여 부국강병의 국가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다.50) 그러
나 소식과 쌍정차의 인연은 황정견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소식과 황정견은 元祐원
년(1086)에서부터 4년간 함께 入朝하여 당시 수도였던 開封에 머물렀다.51) 元祐2년
(1087) 황정견은〈以雙井茶送子瞻〉이라는 시와 함께 쌍정차를 소식에게 보냈고, 소식은
차운하여 감사의 답시〈黃魯直以詩饋雙井茶次韻爲謝〉를 황정견에게 보냈다. 전문은 다
음과 같다.
(1)江夏無雙種奇茗강하에 둘도 없는 기이한 차를
(2)汝陰六一誇新書여음의 육일거사가 새로 쓴 책에서 칭찬하였네
49) 문명숙,〈소식시에 나타난 사상〉,≪중국어문학≫11권, 1986, p. 118.
50) 오창화,〈蘇軾의 <葉家傳> 考論〉,≪중국학≫제43집, 2012, p. 176.
51) 전가람,〈蘇門四學士含意硏究〉, 전북대 석사학위논문, 2012,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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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磨成不敢付童僕감히 동자를 시키지 못하고 직접 갈았네
(4)自看雪湯生璣珠탕에 하얀 구슬 맺히는 것을 바라보네
(5)列仙之儒瘠不腴신선 반열에 오른 선비들은 수척하고
(6)只有病渴同相如사마상여와 같은 소갈병을 앓는다네.
(7)明年我欲東南去내년에는 내가 동남쪽에 갈 것인데
(8)畵舫何妨宿太湖유람선을 타고 가서 태호에 묵는 것도 좋겠네52)
소식은 쌍정차를 받고 기쁜 마음에서 화답시를 보낸다. 2구, 4구, 6구, 8구에 있는 ‘書’,
‘珠’, ‘如’, ‘湖’를 次韻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1),(2)구에서는 황정견의 고향에서
생산된 쌍정차를 기이한 차[奇茗]라고 하였다. 외형도 지금까지 유명세를 떨쳤던 고형차
가 아닌 散茶이고, 품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앞에서 구양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쌍정
차는 장안의 돈 많은 갑부들이 앞 다투어 마실 정도로 향과 맛이 뛰어난 신제품 차였던
것이다.
(2)汝陰六一誇新書에서 汝陰은 潁州(지금의 안휘성 阜陽)의 옛 명칭으로 구양수가 43
세(1049)에 눈병이 나고 병이 깊었을 때 潁州知州로 갔던 곳인데,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
나면 영주 서호에서 살자고 매요신과 약속했던 곳이기도 하다.53) 熙寧3년(1070) 구양
수는≪六一居士傳≫54)을 짓고 스스로 호를 ‘六一居士’라 하였다. 이듬해 은퇴하여 영주에
서 여생을 보내다가 1072년 세상을 떠났다. 구양수가 만년에 썼던≪六一居士傳≫(1070)
이지만 쌍정차에 관한 내용은≪귀전록≫(1067)에 나온다. 즉 소식은 구양수가 쓴≪귀전
록≫에서 쌍정차의 명성을 이미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3),(4)구에서 값이 비싸
고 귀한 쌍정차를 시동을 시키지 않고 직접 맷돌에 갈아 가루내었던 것이다. 이어서 정
성스럽게 물이 끓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소식은 구양수의 말을 빌어 쌍정차를 칭찬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폄하하고 있다.〈和錢安道寄惠建茶〉에서 “초차는 헛된 이름으로 신뢰할 수
없어 높을 것은 요사하고 차등품은 우둔하고 공허하다.…작은 봉단을 헐뜻고 소단을 벗
하여 일주는 노예되고 쌍정은 신하되네”55)라고 하여 겉으로는 칭찬하는 듯 하지만 실제
로 쌍정차의 평가는 자못 엄격하다.
(5),(6)구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차를 지나치게 즐기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위진남북
52) 蘇軾,≪東坡全集≫卷26
53) 노장시 역주,≪구양수산문선≫, 명문당, 2004, p. 491.
54) ≪六一居士傳≫은 주객이 문답을 나누는 형식의 전기문으로 은일자적하는 선비를 꿈꾸며 구양
수는 만년의 즐거움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육일은 내 집의 장서 일만 권, 삼대
이래의 금석유문이 일천 권, 거문고 한 대, 바둑 한 국, 늘 술 한 병, 그리고 이 다섯 가지 물
건들 사이에서 늙어가는 구양수를 말한다.
55) 蘇軾,≪東坡全集≫卷5〈和錢安道寄惠建茶〉“草茶無賴空有名高者妖邪次頑曠…訿糠團鳳友小龍
奴隸日注臣雙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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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대 이래로 선비들은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은일자적한 삶을 갈구해왔다. 당나라 노동
의〈茶歌〉에서 “일곱 번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일어난다네(七
碗喫不得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羽化登仙하는 모습이 후대 문
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었다. 송대 사대부의 모범인 범중엄의〈和章岷從事鬪茶歌〉에
서도 “이기면 그 기상이 신선처럼 하늘을 날듯하고, 지면 그 심경이 패장처럼 부끄럽다
네(勝若登仙不可攀, 輸同降將無窮恥)”56) 라고 하였다. 따라서 신선이 되고자 차를 지나치
게 많이 마신 사람들이 야위다 못해 수척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司馬相如(B.C 179~B.C 117)는 漢武帝때 孝文園令을 지냈는데 평소에 消渴症을 앓았
는데 소갈병은 糖尿病에 해당된다. 사마상여는 소갈증으로 평생을 고생했기 때문에 약재
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고 있다.≪凡將篇≫에 있는 22종류의 약재 중 ‘荈詫’가 바로 차를
뜻한다.57) 그러나 (6)只有病渴同相如(사마상여와 같은 소갈병을 앓는다네)의 해석은 두
가지로 할 수 있다. 첫째는 선비들이 사마상여의 소갈증처럼 차를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수척해졌다고 보는 것과 둘째는 사마상여와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다면 차를 많이 마
셔 수척해져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文園病, 文園渴등은 후대 문인들의 글에
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차를 지나치게 마시면 해가 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차를 너무
좋아하는 것을 사마상여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7),(8)구에서는 황정견의 시문에서 소식을 만나러 五湖로 오겠다고 한 말에 대해 내년
에 太湖에서 만나자는 내용으로 답하고 있다.
이상 구양수, 매요신, 황정견, 소동파의 쌍정차와 관련된 다시들을 살펴보았다. 구양
수의 시문을 통해서 송대의 초차 중 대표적인 쌍정차와 일주차의 특징에 대해 알 수 있
었다. 황정견의 시문에서는 쌍정차 채다와 제다 그리고 음다법과 보관법에 대한 구체적
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매요신과 소식의 시문을 통해서는 쌍정차를 선물받고 쓴
시이므로 표면적으로는 예를 갖추어 칭찬하고 있지만 쌍정차에 대한 나름대로의 다른
해석을 느낄 수 있었다.
쌍정차는 송대에 만들어진 증청산차로서 초청산차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생산되었던
차이다. 차의 기나 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고형차를 밀어 내고
대부분의 차인들이 산차를 마시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새롭게 등장한
초차와 쌍정차에 대해서 문인들 사이에 미묘한 품평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도 중요한 시사점이라고 생각된다.
56) 范仲淹,〈和章岷從事鬪茶歌〉(김길자,≪중국의 다시≫, 현암사, 1999, pp. 45~50.)
57) 짱유화,≪煮茶學≫, 국차미디어, 2011,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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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결론
쌍정차는 고형차 위주에서 산차로 이행되는 초기에 송대에 나타났던 산차(초차)이다.
쌍정차는 북송시기 일부 문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차였지만 차문화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황정견의 고향에서 생산되었던 쌍정차를 매개로 주고 받았던 교유시들을 분
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송대는 시가 散文化, 議論化되면서, 당대에 비해 시의 작자와 수가 크게 증가하였
다. 형식면에서는 오언보다는 칠언이 많았고 정형화된 율시보다는 고시 형태의 산문시가
성행하였다. 그리고 문인들간 酬唱, 贈答, 次韻詩등의 교유시도 많았다.
2.≪송사≫〈식화지〉에서는 송대 차를 片茶와 散茶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편차는
고형차로서 餠茶, 硏膏茶(臘茶, 團茶) 등이 여기에 속하고, 산차에는 草茶가 해당된다. 쌍
정차는 송대 초기에 나타난 고급 초차로서 제다법상 과거의 증청 고형차에서 초청산차
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증청산차이다
3. 쌍정차가 처음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구양수의≪귀전록≫이다. 실제로 쌍정차가 뒤
늦게 만들어졌음에도 북송 제일의 초차가 되었던 이유는 더위와 습기를 피한 보관법이
었다. 공기와의 접촉을 최대한 막고자 올이 촘촘한 비단 주머니에 넣어 풍미를 유지시켰
던 것이다. 또한 쌍정차가 문인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황정견의 영향
력이 컸다. 한편, 황정견으로부터 쌍정차를 직접 주고 받았을 때의 시문에서는 찬사하였
으나, 개인적인 글에서는 쌍정차를 폄하하는 등 다양한 평가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
다.
4. 구양수, 매요신, 소식, 황정견 등의 시문 분석을 통해 드러난 쌍정차의 구체적 특징
은 다음과 같다. 첫째, 쌍정차는 증청산차(초차)였다. 둘째, 산차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우
려 마시는 것이 아닌, 고형차처럼 가루내어 點茶하여 마셨다. 셋째, 차의 진액을 짜내 버
리는 착즙과정을 거치지 않음으로서 차의 맛과 향기를 보존할 수 있었다. 넷째, 어린 차
싹을 사용하는 것은 연고차와 비슷하지만 연고차처럼 복잡한 제다 과정을 거치지 않음
으로서 비교적 생산이 용이하였다.
5. 초차인 쌍정차의 차문화사적 위상은 매우 크다. 송대 문인들이 귀하게 여겼던 건차
와 달리 쌍정차는 강차로서 초차이다. 풍미는 건차에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하면서도 제
다법이 간편하였기 때문에 명대 이후 산차가 대중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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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ong and Tang Dynasties are two most victorious periods in Chinese history.
Tang dynasty, however endeavored more to extend externally, Song Dynasty tried to
put more energy to govern internally based on the centralized system. SSangJungCha
is one of the leaf teas that produced short period during Song dynasty. But
SSangJungCha has very important meaning in tea history. Leaf tea and cake tea
both were produced and being loved very long time. However, cake tea was far more
standing out than leaf tea. There could be many reasons, but most important reason
might be that cake tea was mainly consumed by higher bureaucratic including
emperors. After Ming dynasty and till now most people drinks leaf tea.
SSangJungCha did very important role in this dramatic change. Manufacturing
method of cake tea is very complicated, hard to make, hard to make in mass
production, and naturally very expensive. In contrasting to cake tea, SSangJungCha is
leaf tea and very easy to produce. Just picking the tea leaves and roasting are all
needed procedure. Very simple to make, so mass production was possible and
naturally very chief. So the average Chinese can drink the leaf tea in their every day
life. If there was no leaf tea, there would be no public tea culture in China.
SSangJungCha did the bridge role between changing from the cake tea to leaf tea.
Unfortunately, however making leaf tea method is not clearly written down in
professional tea related books. The reason may be that leaf tea manufacturing method
is relatively simple and being consumed by average person. To compensate this
insufficiency, this study analyzed the poems of North Song Dynasty, and try to find
북송 문인들의 교유시를 통한 雙井茶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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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ducing method of SSangJungCha. SSangJungCha used same very young tea
leaves like cake tea. And also it needs steaming procedure and powdering process to
drink. But similarities stop here. SSangJungCha did not require squeezing procedure
to extracting the essence of tea. Also just putting the prepared tea leaves into the
hot water is all needed procedure to drink. Simple to make, simple to prepare, mass
production is possible, very chief and most importantly leaf tea can keep good aroma
and taste of original tea has. Modern leaf tea does not require steaming procedure,
instead it needs roasting in the hot pan. More simple but better aroma and taste.
Without leaf tea there would no public tea culture in tea history. This study tries to
find epic role and manufacturing method of SSangJungCha. Future works may be
made on the finding the differences of appraisal between higher bureaucrats about
the SSangJungCha which was newly introduced at that time.
【Key Word】SSangJungCha, Song dynasty, Tang dynasty, Cake tea, Leaf tea,
Manufacturing method
접수일자 2014.11.13 심사완료일 2014.12.12 게재확정일 2014. 12.16


 

2018.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