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內蒙古 集寧路 窖藏 출토 龜龍形靑瓷硯滴을 중심으로

2018. 11. 26. 19:41차 이야기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內蒙古 集寧路 窖藏 출토 龜龍形靑瓷硯滴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樂民(장달수) | 조회 1227 |추천 0 | 2017.12.02. 13:14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內蒙古 集寧路 窖藏 출토 龜龍形靑瓷硯滴을 중심으로


장 남 원*


Ⅰ. 머리말
Ⅱ. 集寧路 窖藏의 자기출토 현황
Ⅲ. 청자연적의 造形과 제작특징 및 제작지
Ⅳ. 청자연적의 제작시기 추정
Ⅴ. 맺음말


Ⅰ. 머리말
고려시대 중국지역과 고려의 도자교류는 지속되었다. 실제로 국내
왕실과 사찰은 물론 일반에 이르기까지 중국도자의 출토 예는 많지
않았지만 광범하며, 중국에도 고려도자가 전해져 몇 몇 유적에서 고려
청자들이 출토된다. 양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양질의 고려청자들이 중
국에서 사용된 증거이다. 그 가운데 몇 년 전 內蒙古自治區의 集寧路
元代 窖藏1)유적에서는 고려산으로 추정되는 청자 상형연적이 발굴되
었다.
集寧路 유적은 內蒙古自治區 馬蘭察布 盟察右前旗 巴音塔拉 絲土


* 이화여자대학교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강사
1) 窖藏이란 움처럼 파들어가 물건을 보관․매장했던 시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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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子村에 위치한다. 본래는 金代에 集寧縣에 속했었으나 원대에 集寧
路가 설치되었다. 이미 1958년, 집녕로지역에 철로 공사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유적에 대한 수습발굴이 이루어지면서 27기의 분묘가 알
려졌다. 또 1976년 집녕로의 옛 성터 부근에서 織物類 窖藏이 한 곳
발굴되었는데, “集寧路達鸕花赤總管府”의 글자가 문양으로 새겨진 비
단이 발견되면서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 후 여러차
례 발굴이 이어졌고, 2002년 5월부터 2005년 7월까지 內蒙古自治區考
古硏究所, 馬蘭察布博物館, 察右前旗文物管理所의 集寧路考古工作隊
등의 합작에 의해 약 22,045㎡의 면적에 달하는 성터와 도시유적이 드
러났다.2)
그런데 바로 그 가운데 26호窖藏에서 중국산 도자기들과 함께 고려
산으로 추정되는 매우 질이 좋은 청자연적 1점이 동반 출토되어 주목
하게 된 것이다. 연적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국적의 문제와 더불어 제
작시기 또한 해명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연적과 함께 발견되는 중국
산 도자기와 금속기들은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제
작된 것들로 파악되고 있다.3) 하지만 연적은 국내 학계에서는 일반적
으로 12세기 제작품일 것으로 보는 龜龍形의 상형청자였기 때문이
다.4)
2005년 내몽고자치구에서는 集寧路출토 도자기에 대한 국제학술대
회가 개최되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몇 학자가 이 연적에 대한 제작
지와 편년을 언급한 바 있다.5) 그러나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그다
2) 陳永志, 「內蒙古集寧路古城遺址出土瓷器槪述」, 內蒙古集寧路古城遺址出
土瓷器, 文物出版社, pp.9-26.
3) 劉 毅, 「集寧路元代窖藏出土的龜形硯滴與高麗瓷斷代」, 內蒙古自治區出
土遼金元瓷器國際學術硏討會, 中國古陶瓷學會編印, 2005, p.5.
4) 상형청자의 제작시기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본고 Ⅳ장 참조.
5) 2005년 7월 內蒙古自治區 呼和浩特市에서는〈內蒙古自治區出土遼金元瓷
器國際學術硏討會〉가 개최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11
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며, 자료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集寧路 유적의 중국도자 출토현황과 더불어 고려산으로 추
정되는 청자연적을 살펴 제작지와 그 시기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특히
최근까지 14세기초 新安船에 탑재되었던 고려청자가 전세품인지 또는
동시대품인지의 문제가 학계의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6) 元代窖藏
출토 고려청자에 대한 검토는 고려청자의 소비유통과 편년에 또 다른
연구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Ⅱ. 集寧路 窖藏의 자기출토 현황
1. 자기출토 교장의 성격
집녕로 유적에서는 총 4,800여건의 자기 파편과 200여점의 완형자
기가 출토되었으며 그밖에 다량의 도기와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중국
의 전역에서는 많은 窖藏이 발견되고 있는데, 내몽골 지역에는 집녕로
를 포함하여 10여 곳 이상에서 자기를 매장했던 교장유적이 알려져 있
다.7) 그렇다면 왜 窖藏에 갖가지 물건들을 넣어 매장하는 것일까. 이
에 대해서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적인 관습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
된 바 있다.
6) 鄭良謨,「新安發見陶磁器の種類と諸問題」, 東洋陶磁10․11, 東洋陶磁學會,
1984 ; 崔淳雨,「韓半 島出土宋元陶磁と新安引揚の高麗陶磁」, 國際シンポ
ジウム新安海底引揚げ文物報告書,中日新聞社, 1983 ; 香本不苦治,「新安
海底遺物の高麗靑瓷について-- その生産窯推論時代」, 貿易陶磁硏究 9,
日本貿易陶磁硏究會, 1989.  
7) 呂 軍, 「內蒙古出土的元代窖藏瓷器硏究」, 中國古陶瓷硏究第11輯, 中國
古陶瓷學會編, 紫禁城出版社, 2005, 11, pp.44-52. 내몽골지역에서는 集寧路
외에 呼和浩特市, 赤峰大營子, 開魯三叉丼, 林西縣, 卓資山縣 등지에서 자
기를 매장했던 교장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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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자기류나 유물이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매납되는 경우는 戰
亂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특히 집녕로의
경우 유적의 성격상 평민들의 주거지와 상업지구 등이 있었던 성터였
으므로 중요도에 따라서나 혹은 携帶의 輕重에 따라 무겁고 당장 필요
하지는 않은 자기류의 경우 가져가지 않고 교장에 매납하는 방식을 택
했을 것이라 본다. 특히 당시 내몽골지역에서는 중원으로부터 전래된
자기류가 귀중한 물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본다면, 각지에서 들어
온 자기류를 사용하다가 매납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8) 현재 유적
발굴 담당자에 따르면 집녕로 유적은 14세기 중엽, 1358년 홍건적이
침입해 들어왔고, 1368년 明의 장군 徐達이 두 차례에 걸쳐 集寧路 바
로 앞까지 진압을 위해 진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지
역 전체가 쇠락하였고, 窖藏도 이 때 조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
서 교장내의 도자기나 각종 집기들의 사용 및 제작시기를 元代末에 해
당할 것으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다.9)
2. 교장출토 자기의 산지와 특징
집녕로 지역은 몽골초원지대와 중원농경지대가 만나는 경계부에 위
치한다. 따라서 중국대륙 북방에 위치한 유적들 가운데 비교적 질좋은
중원지역의 도자기들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더욱이 원의 지배에 들어
가게 된 이후로는 초원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상의 요지가 되었다. 세
조 쿠빌라이가 至元 28년(1291) 中書省에 명하여 6곳에 驛站을 두고
驛路를 개설하게 한 이래, 집녕로지역에도 역참이 개설되어 중요한 교
8) 陸明華, 「對元集寧路出土瓷器的初步認識」, 中國古陶瓷硏究第 11輯, 中
國古陶瓷學會編, 紫禁城出版社, 2005, 11, pp.53-70.
9) 劉 毅,「元集寧路窖藏出土的鱉形硯滴與高麗靑瓷斷代」,中國古陶瓷硏究第
11輯, 中國古陶瓷學會編, 紫禁城出版社, 2005, 11,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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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로 활용되었다.10) 역로의 개설로 중앙정부와의 소통이 원활해졌으
며 물자의 이동도 수월해졌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지역 교장에서
당시 중원지역의 다양한 도자기들이 출토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1)
집녕로의 여러 교장에서는 당시 중국의 남북방에서 만들어지던 名
窯의 대표적 자기들을 망라하고 있어 磁州窯系, 鈞窯系, 定窯系, 龍泉
窯系, 耀州窯系, 建窯系, 景德鎭系 등 다양한 자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것은 자주요계 도자기이다. 서민용
식기가 위주인데 白釉, 綠釉, 三彩를 비롯 白地黑花, 交胎器 등도 발견
된다. 하북성에 위치한 자주요와 그 窯系가 한창 융성하던 시기에 해
당하며, 집녕로에서는 그 시기 대표 유물들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하남성의 균요계 자기 또한 많은 수량을 차지한다. 완, 반, 접시 같
은 일상용 식기류가 대다수이며 瓘도 포함되어 있다. 균요계 특유의
銅呈色에 의한 窯變 자기들이 많다. 그러나 13-14세기 균요에서 생산
되는 일반적인 자기들에 비해 집녕로 출토품들은 질이 거친 것이 많다.
정요계의 자기 중에는 무문과 더불어 대부분 입출양각으로 성형․시
문한 접시가 많다. 백색 또는 회백색의 釉胎와 얇은 기벽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하북성의 定窯외에 霍州窯 산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섞여
있다.
용천요계 청자는 원대 용천요의 대표적인 것들이 발견된다. 碗, 盤,
洗, 高足碗, 爐, 荷葉瓘 같은 기종들이 주류이며, 기벽이 두텁고 유층
이 깊은 녹색을 띠는 것들이다. 특히 유층이 두텁고 은은한 광택이 나
는 것들은 우리나라 신안선의 용천요 자기 가운데 고급에 속하는 것들
10) 元史卷100, 兵志.
11) 이하 집녕로 교장출토 도자의 종류와 성격에 대해서는 內蒙古自治區文物考
古硏究所․陳永志 主編, 內蒙古集寧路古城遺址出土瓷器, 文物出版社,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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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매우 유사하다. 양각, 첩화외에 음각으로 화문이나 장식적인 문양을
그린 것들이 다수 있다.
요주요계는 집녕로 유적 전체 자기 유물 가운데 적은 비중을 차지한
다. 대부분이 청자색을 띠지만 일부에 月白釉 자기가 포함되어있다.
건요계 자기는 종류가 많고 질도 좋은 편이다. 크기가 큰 완들도 있
으며 대체로 질이 좋고 정교하게 구워진 것들이다. 남방에서 건요의
생산이 확대되고 중국내륙과 일본 등지로 활발하게 수출되던 상황과
부합된다.
경덕진계 자기는 질이 좋은 편이다. 기벽이 두텁거나 얇은 것들이
섞여 있으나 대개 유색이 맑고 문양도 정교한 것들이다. 청백자류 외
에 釉裏紅, 樞府백자, 소량의 청화백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발견
상태도 좋아 다른 자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좋고 질이 좋
은 것으로 파악된다.
Ⅲ. 청자연적의 造形과 제작특징 및 제작지
1. 청자연적의 형태와 제작특징12)
집녕로 26호교장에서 출토된 청자연적은 이른바 ‘龜龍形’이다. 머리
는 용의 모습이고 몸체는 거북인 龍首龜身형이다.<그림1> 전체 길이
는 약 10.5cm, 높이는 7.3cm로 자그마한 크기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청녹색 유약에 태토가 치밀한 느낌을 준다. 바닥 일부에 규석받침 흔
12) 유물은 현재 呼和浩特市에 있는 內蒙古考古硏究所에 진열되어 있다. 유물에
대한 소견은 기존의 출간도록과 현지에서 필자가 실견한 것을 토대로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정식 보고서가 출간되지 않아 현장에서 유물촬영을 할
수 없었고, 눈으로 보고 기록하였다.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15
<그림1> 內蒙古 集寧路 26號窖藏 출토 靑瓷龜龍形硯滴,
內蒙古自治區考古硏究所
<그림2> 內蒙古 集寧路 26號窖藏 출토 靑瓷龜
龍形硯滴(부분)
적이 남아있다. 용의 입술
은 위쪽이 뾰족하여 새의
부리와 유사하고, 양쪽 뺨
뒤쪽으로는 새의 깃털처
럼 펼쳐진 갈기가 있다.
턱 아래로는 긴 수염이 목
을 따라 흘러 내렸으나 수
염의 끝부분은 缺失되어
남아 있지 않다. 이마위에
는 뿔이 있으며 얼굴과 목,
다리에는 비늘이 음각되어 있다. 눈은 鐵砂로 점을 찍어 검게 표시하
였다.
한편, 몸체는 둥글고 풍만한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등에는 두 줄
음각선으로 귀갑문을 그렸고 각각의 귀갑문 구역안에는 역시 음각으
로 “王”字를 써 넣었다. 4개의 다리는 구부린 채 바닥에 앉은 모습이
다. 몸통은 비어 있으며, 입과 등
의 정상부에 각각 구멍이 있어 汲
水와 出水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연화줄기를 물
고 헤엄치는 모습으로 줄기 끝에
는 연봉오리와 연잎이 매달려 있
다. 정상부 汲水部에도 연잎이 벌
어진 형상을 貼花하였다. 이처럼
연줄기는 물고 가는 형상은 구룡
형 외에 오리형 연적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표현이다.<그
림2>
316 湖西史學 第48輯
고려시대 청자 가운데 상형의 장식이 부착되었거나 또는 기물 자체
가 상형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龍이나 거북도 여
러 점 있다. 특히 용과 거북이 결합된 형식을 띠는 ‘구룡형’은 주로 향
로․주자․연적 등의 기물들이 많다.
집녕로 교장출토 청자 연적 역시 일반적인 고려의 일반적인 구룡형
상형청자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턱밑 수염과 ‘王’자 새김 등은 부
도 탑비의 龜趺에서 먼저 나타나며,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귀부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위 두가지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1085년의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가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의거하여 이들 구룡형 청자의 시
작을 11세기 후반경 부터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살펴보
면 귀부에서는 거북의 얼굴을 띠고 있는데 반해 상형청자에서는 얼굴
은 용으로 몸체만 거북으로 나타내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13)
2. 傳世 유물과의 비교
현전하는 유물들과 비교를 통해 집녕로 출토 청자연적의 특징을 살
펴보자. 우선 동물이나 인물형의 상형기에 눈을 鐵砂로 표시한 점은
구룡형 자기 외에도 여러 예에서 확인된다. 간송미술관 소장(국보 270
호) 靑瓷母子猿形硯滴은 어미 원숭이가 앉아서 두 무릎을 구부린 채
두 팔을 뻗어 새끼를 마주보며 안고 있는 모습을 상형한 것인데, 어미
원숭이의 눈과 코, 새끼 원숭이의 눈에는 철사(鐵砂) 안료를 발라 검게
나타내었다. 그러나 여섯 군데 백색 내화토빚음 받침을 대고 구워 비
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림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靑瓷人形注子(국보 167호)는 높이 28.0cm로
13) 백은경,「高麗 象形靑磁 硏究」, 弘益大學校大學院 美術史學科 韓國美術史專
攻, 2004. p.55.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17
<그림3> 청자원숭이형연적, 국보
270호,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4> 청자사자장식향로, 국보80
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5> 청자오리형연적, 국보74호,
간송미술관 소장
비교적 크기가 큰데 새와 인물의 눈에 각각
鐵砂로 점을 찍어 검게 표현하였다. 머리의
보관과 목에 두른 띠장식 가장자리, 복숭아,
주구, 그리고 손톱에는 백토로 점을 찍는 白
畵[堆花]기법이 사용된 점이나 모래빚음 받
침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12-13세기 제작으
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靑瓷獅
子鈕蓋香爐(국보 60호)나 간송미술관 소장
靑瓷麒麟鈕蓋香爐(국보 제65호)에도 각각
사자의 눈과 기린의 눈동자에 철분 함량이
많은 赭土를 살짝 발라 검게 나타내어 실
감나도록 하였다.<그림4>
한편, 간송미술관 소장의 靑瓷鴨形水滴
(국보 74호)은 높이 8.0cm, 길이 13.1cm로
집녕로 연적과 크기가 유사한데 형상이
오리라는 점에서 다르다. 한가롭게 입에
연꽃 줄기를 뜯어 물고 고요히 노니는 모
습을 상형한 연적이다. 유사한 점은 오리
가 두가닥으로 꼬인 연꽃 줄기를 물고 있
는데 연 줄기 끝에는 작은 연잎과 연 꽃봉
오리가 달린 채 오리의 목 뒤로 자연스럽
게 얹혀져 있는 모습이다. 규석받침을 대
고 구운 점도 집녕로 연적과 비슷하다.
동물의 종류가 다를 뿐 구조와 구성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그림5>
구룡형 상형청자 가운데는 주자도 있
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靑瓷龜龍形水
318 湖西史學 第48輯
<그림6> 청자구형수주, 국보96호. 국립중
앙박물관 소장
<그림7> 청자구룡형연적, 국립중앙박
물관 소장
甁(국보 96호)은 용도가 주자임으로
연적에 비해 크다. 소담스럽게 피어난
연꽃 위에 앉은 거북을 상형한 것으로
등쪽으로 물을 담고 입을 통해 물을
따르도록 만들어졌다. 얼굴은 용의 모
습인데 이마 위의 뿔과 턱아래로 늘어
진 수염과 흩날리는 갈기가 유연하면
서도 힘이 있고, 정면을 뚫어보는 듯
한 눈과 날카로운 이빨, 힘이 응축된
발은 생명감을 더해 준다. 비늘과 六角의 龜甲文, 그 안에 새긴 ‘王’字
는 가늘게 음각하였고 등에 붙인 작은 연잎은 가장자리가 말려 올라간
것이며, 세세한 잎맥이 섬세하다. 손잡이는 두 가닥의 흙 띠를 꼬아 거
북의 등 뒷편에 붙여 올려서 蓮花座로 연결시켜 만들었는데 손잡이에
는 뚜껑과 연결할 수 있는 작은 고리도 붙여 놓았다. 이 주자 역시 거
북의 눈과 손잡이에는 赭土로 점을 찍어 장식하였다.<그림6>
집녕로 청자 연적과 가장 비슷한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
자구룡형연적과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청자 구룡형 연적, 그
리고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청자구룡형 향로뚜껑(보물 1027)등이 있다.
국박소장 연적은 높이 5.9cm로 집녕로 연적보다 약간 작으나 용의 윗
입술은 뾰족하고, 양쪽 뺨 뒤쪽의 깃털모양 갈기 등에서 매우 유사하
다. 턱 아래로는 수염이, 이마위에는 뿔이, 얼굴과 목, 다리에는 비늘이
음각되어 있다. 눈은 鐵砂로 점을 찍어
검게 표시하였다. 몸체는 둥글고 넓은 풍
만한 거북의 형태이고 등에는 두 겹 음각
선으로 귀갑문을 그렸다. 귀갑문안에는
역시 음각으로 “王”字를 써 넣었다.<그림
7>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19
<그림9> 靑瓷龜龍形裝飾香爐,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구룡형 향로는 높이 약9cm로 전체 높
이는 높지만 용머리 부분이 우뚝 솟아 있다.<그림8-1> 두 줄로 꼬인
연줄기를 물고 있는 점, 등에 “王”자가 새겨진 귀갑문이 있는 점 등에
서 유사하지만 뺨에서 목 뒤쪽으로 나있는 깃털모양의 갈기가 없고,
목과 다리에 비늘무늬가 없고, 거북의 발톱이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은
점 등에서 결정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저부에도 검은모래 섞인 내화토
빚음받침을 사용하여 규석받침을 사용한 다른 연적들과 차이가 있다.
<그림8-2>
<그림8-1> 청자구룡형연적, 오사카시립동양도
자미술관 소장
<그림8-2> 청자구룡형연적, 오사카시립동
양도자미술관 소장(저부)
기종은 다르지만 구룡형의 유사한 표현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향
로 뚜껑에서 볼 수 있다. 넓은 수평의 전이 있고 사자머리 모양 다리가
3곳에 있는 향로 위에 덮는 뚜껑장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체의 높이가 20.4cm 이
고 향로가 10.2cm라고 알려져 있는데, 납작
한 원형의 뚜껑부분이 약 2.5.cm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면 구룡형 장식부의 높이는
약 7.5cm 가량 될 것으로 추측된다.<그림9>
뾰족한 윗 입술, 깃털모양 갈기, 날카로운
발톱, 목부터 가슴, 그리고 다리에 새겨진
320 湖西史學 第48輯
비늘 등이 집녕로 출토 연적과 매우 흡사하다. 다만, 연적이 아님으로
동체 정상부에 구멍을 만들 필요가 없었으므로 연잎모양의 水口座가
없다. 일반적으로 연적에 보이는 등의 정상부 연잎 장식은 입에 물고
있는 두가닥의 연줄기에서 이어지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리움 소장품
은 연적이 아님으로 그같은 장식이 배제된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크
기와 구성에서 상당히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향로 뚜껑과 火舍
는 규석받침으로 받쳐 구워, 번조방법에서도 유사함을 볼 수 있다.
Ⅳ. 청자연적의 제작시기 추정
1. 상형청자의 제작시기에 대한기존 견해
집녕로 교장출토 구룡형 연적의 제작시기를 추정하기에 앞서 유사
한 상형 청자류의 제작시기에 대한 기존의 견해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현재까지 상형청자들 가운데 명문이 있거나 기년자료를 동반하는 예
는 알려진 바 없다. 또 현전하는 유물의 수량도 많지 않다. 따라서 제
작시기 및 제작지 등에 대한 추정은 쉽지 않다.
일찍이 노모리 켄(野守 健)은 청자를 素文․陰刻․陽刻․彫刻 으로 나
누고 그 가운데 彫刻의 범주안에서 상형청자를 다루었다.14) 高裕燮은
상형청자를 翡色靑瓷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고15), 秦弘燮은 純靑瓷의
범위 안에서 ‘象形靑瓷’를 다루었다.16) 정양모는 12세기 전반의 50년
간을 순청자의 절정기로 보고 이 시기 청자를 소문청자·상형청자·양
각·투각청자 등으로 나누었다. 특히 상형청자들은 12세기초부터 본격
14) 野守建, 高麗陶磁の硏究, 國書刊行會, 1944.
15) 高裕燮 著․秦弘燮 譯, 高麗靑瓷, 乙酉文化社, 1954.
16) 진홍섭, 청자와 백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pp.63-64.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21
등장하여 12세기 중엽에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17)
강경숙은 고려청자의 편년을 여명기(800년대), 발전기(제1단계 : 통
일신라말~981/ 제2단계 : 982~1122/ 제3단계 : 1123~1259), 변화기
(제1단계 : 1260~1351/ 제2단계 : 1352~1432)로 나누었는데, 상형청
자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으나 대략 발전기의 제 3단계를 비색청자
의 절정으로 보았다.18)
윤용이는 청자의 종류를 순청자․상감청자 그리고 안료를 사용하여
시문하는 청자로 구분하였는데, 상형청자는 순청자의 하위 개념으로
무문․음각․양각․투각 등과 함께 장식기법으로 기준으로 구분하였다.19)
전승창은 고려의 조각향로, 특히 강진 용운리에서 발견되는 상형향
로들이 중국 耀州窯 상형장식 향로들과 유사하다고 보고, 이들 상형장
식 향로들이 요주요에서 11세기 전반경부터 제작되기 시작하는 점을
감안하여 고려 상형청자의 제작시기를 비정하였다. 그러나 용운리 10
호Ⅱ층의 연대를 보고서에 제시한 10세기후반부터 11세기라는 기준을
참조하면서 요주요 향로의 층위 년대와 맞추어 다시 조정하면서 용운
리 10호Ⅱ층의 시기를 11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로 보았다. 따라서
고려에서도 상형의 조각향로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가 11세기 말경일
것이라고 하였다.20)
상형청자를 주제로 한 논문에서 백은경은 고려의 상형청자들이 11
17) 鄭良謨, 韓國의 陶磁器, 文藝出版社, 1991, p.205.
18) 강경숙, 한국 도자사의 연구, 시공사, 2000, p.120. 한편 韓國陶磁史에서
는 고려청자의 변천을 초기, 중기, 후기, 말기의 4시기로 나누고 중기에 해당
하는 1047년경부터 1146년경의 도자특징에서 상형 청자들을 포함시켜 언급
하였다. 姜敬淑,韓國陶磁史, 一志社, 1989, pp.178-187.
19) 尹龍二, 韓國陶磁史硏究, 文藝出版社, 1993, p.120.
20) 전승창, 「靑磁彫刻裝飾 香爐 考察」, 고려청자와 종교(康津靑磁資料博物
館, 2002), pp.77-91. 그러나 요주요의 고고학적 편년 문제는 현재 연구자들
사이에 異論이 있고, 강진 용운리 역시 보고서의 편년 또한 이미 상당부분 새
로운 논문들에 의해 재검토 된 바 있으므로 편년에 대한 재고를 요한다.
322 湖西史學 第48輯
세기 후반경에는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12세기 전, 중반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고, 12세기 후반에도 우수한 기물이 제작되었으며, 13세기
의 일정시점까지 존속되다가 쇠퇴한 것으로 보았다.21)
2. 窖藏內동반유물과 청자연적의 제작시기
집녕로 출토 구룡형 청자연적의 제작지가 고려였을 것이라고 보는
데에 현재 이견은 없다.22) 다만 제작시기가 문제 되는데, 동반되는 중
국도자의 편년이 대체로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에 해당되어 기존
한국도자사의 편년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앞 절에서 살펴본 바대로
동물형 상형장식의 향로나 연적등이 대체로 12세기를 중심으로 제작
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던데 기인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12세기경의 연적이 약 100년간 傳世되어 집녕로에 남
게 된 경우, 또는 이 연적의 제작시기가 생각보다 늦어 동반되는 중국
도자들과 그다지 시기차이가 나지 않을 경우가 그것이다. 본 절에서는
동반되는 중국자기들의 현황을 살펴보고 국내의 가마터와 소비유적출
토 유물들의 편년 참고자료들을 통해 집녕로 출토 청자연적의 제작시
기를 추정하고자 한다.
21) 백은경, 「高麗 象形靑磁 硏究」, 弘益大學校大學院 美術史學科 韓國美術史
專攻, 2004. p.55.
22) 2005년 7월 내몽골 열렸던 〈內蒙古自治區出土遼金元瓷器國際學術硏討
會〉당시 이 연적이 진열장에 전시된 채로 공개되었는데, 함께 실견했던 중
국 전문가들은 중국유물은 아니라는데 대부분 동의했다. 內蒙古自治區文物
考古硏究所․陳永志 主編, 內蒙古集寧路古城遺址出土瓷器, 文物出版社,
2004, p.89 ; 陸明華,「對元集寧路出土瓷器的初步認識」,中國古陶瓷硏究
第 11輯, 中國古陶瓷學會編, 紫禁城出版社, 2005, 11, pp.53-70 ; 劉 毅,「元
集寧路窖藏出土的鱉形硯滴與高麗靑瓷斷代」, 中國古陶瓷硏究第 11輯,
中國古陶瓷學會編, 紫禁城出版社, 2005, 11, pp.81-91.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23
<그림10> 內蒙古 集寧路 26號窖藏 발굴당시 유구
노출상황
<그림11> 內蒙古 集寧路 26號窖藏
출토 銅製甁, 內蒙古自治區
考古硏究所
(1) 동반 자기류의 비교
구룡형 청자연적은 집녕로 유적의 26호 窖藏 내부에서 출토되었다.
아직까지 집녕로 발굴에 대한 정식보고서가 출간되지 않아 정확한 상
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록과 중국측 자료들을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26호 교장에서는 대형의 도기질 항아리 안에서 도자기와
금속기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대형의 도기 항아리 안에는 커
다란 龍泉靑 産瓷條文蓋罐이
놓여 있었는데, 항아리는 뚜껑
은 벗겨진 채 열려 있었다. 청
자항아리 안에는 鈞窯盤 1점,
銅製貫耳四角甁 2점, 陶製八
卦紋雙耳甁 1점이 함께 있었
다고 한다.23)<그림10>
이 가운데 균요산 盤은 전형적인 원대 13-14세기 생산품으로 가마와
유적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타입이다.
더구나 집녕로 일대에서 수습된 균요자
기는 대체로 질이 보통에 속하는 것들로
알려져 있다. 동제병은 일반적인 유적에
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것으로 銅이라고
하는 질 자체가 도자기에 비해 특수한 용
도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그림11>
제사나 특별한 의례 등과 관계가 있었을
기물이라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이같은
유물이 매장되었다는 것은 이들 기물의
23) 陸明華, 「對元集寧路出土瓷器的初步認識」, 中國古陶瓷硏究第 11輯, 中
國古陶瓷學會編, 紫禁城出版社, 2005, 11, pp.60-61.
324 湖西史學 第48輯
<그림12> 수종사 사리구 동반출토 靑瓷荷葉蓋
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래 주인이 일반이라기보다 관원이나 부호 같은 특수 계층의 누군가
였을 가능성이 높다.24)
그러나 이 가운데 년대 및 사용자에 대한 추정을 가능케 하는 유물
은 용천요산 靑瓷荷葉蓋瓘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양된 신안선에서는
크고 작은 여러점이 발굴되었고, 신안선에서는 1323년의 명문이 있는
木簡이 수습되어 유물들의 연대를 알려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정작
생활유적에서 발견되는 예가 드물다. 알려진 바로는 남송대 말기의 窖
藏으로 알려진 四川省 遂寧窖藏에서 이와 유사한 荷葉蓋瓘이 발견되
었고25), 대부분은 박물관 소장 전세품들이다. 日本에서는 神奈縣 橫濱
市의 稱名寺내 金澤墓에서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어 13세기 후반~14
세기 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26) 그러나 집녕로 출토품에 비
하면 크기가 10여cm나 작아 비례나 형태를 정확히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국내에서는 신안해저 인양품 외에 경기도의 수종사에서 사리기 일
괄 유물로 전하는 예가 있다. 높이 31.4cm, 구경 25.7cm로 함께 출토
된 금속제 사리구들의 양식으로 보아 대략 14세기 후반품으로 추정하
고 있다.27) 크기와 몸체의 형태가
유사하지만 수종사 항아리는 뚜껑
의 윗면이 간략한 劃花紋으로 장
식되어 있다.<그림12> 이와 비교
하면 집녕로 항아리는 어깨가 풍
만하고 直口이며, 연잎형의 너울
진 뚜껑을 갖춘 항아리는 동체와
24) 陸明華, 앞 글, p.60.
25) 封印された南宋陶磁殿, 東京 : 朝日新聞社, 1998.
26) 高美京, 신안해저 출토 용천요 靑瓷 硏究, 明知大學校大學院 美術史學科
碩士論文, 2005, P.140.
27) 사리장엄구, 국립중앙박물관, 1991, 그림 56.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25
<그림15> 河北省 石家庄市 后太保의 史天澤
(1202-1275)墓 출토 靑瓷荷葉瓘盖,
龍泉窯
뚜껑 전체에는 양각의 가는 줄무늬가 있다. 크기는 최대지름 34.6cm,
뚜껑지름 32.2cm, 전체높이 32.5cm이다.<그림13-1><그림13-2> 크기
는 수종사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뚜껑 및 전체적인 유색 등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안출토 항아리가 가장 유사하다.
높이 30.7cm 가량되므로 집녕로 것과 크기에서도 비슷하다. 신안선의
연대를 대략 1323년 이후로 보고 있으므로 인양된 항아리의 연대를 14
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크기는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형태의
신안출토 항아리는 국립광주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그림14>
<그림13-1> 內蒙古 集寧路
26號窖藏 출토 靑
瓷荷葉蓋瓘, 龍泉
窯, 內蒙古自治區
考古硏究所
<그림13-2> 內蒙古 集寧路 26號窖藏
출토 靑瓷荷葉蓋瓘, 龍泉
窯, 內蒙古自治區考古硏究

<그림14> 신안해저인양 靑
瓷荷葉蓋瓘, 용
천요, 국립광주
박물관 소장
유사한 양식을 가진 항아리의 제작년대를 추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국측 자료는 河北省 石家庄市 后太保의 史天澤(1202-1275)墓에서
출토된 荷葉形 靑瓷瓘盖[항아리
뚜껑]이다. 뚜껑은 직경이 33.0cm
이며 周緣이 너울지듯 花形이며
둥그스름한 윗면에는 가늘게 양
각의 선문으로 장식한 후 연줄기
모양의 꼭지를 붙였다.<그림15>
그 형태와 크기가 집녕로 출토품
과 거의 같다. 그런데 사천택 묘
326 湖西史學 第48輯
<그림16> 河北省 石家庄市
后太保의 史天澤
(1202-1275)墓 출
토된 靑瓷象嵌菊
花紋梅甁, 高麗
에서는 荷葉形 瓘蓋외에 고려산 상감청자 매병
도 함께 발견되어 용천요 청자와 고려청자의 동
반매납 상황을 보여준다.<그림16>
사천택은 1213년 아버지와 함께 일가가 몽골
군에게 투항하였고, 아버지와 형이 죽은 후 河北
省 正定縣에서 史家의 우두머리로 살았다. 漢族
이었지만 몽골에 투항하여 권세를 누렸다. 더욱
이 그가 살던 正定縣 지역은 칭기즈칸의 막내아
들 툴루이의 영지가 되어 원 황실과 친밀한 관계
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툴루이의 아들
쿠빌라이가 元의 황제가 되면서 사천택은 宰相
에 등용되었다. 그와 같은 배경으로 볼 때 그의
무덤에서 용천요산 청자와 고려산 상감청자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용천요 청자와 고려청자가 상당히 귀한 물품으로 인식되고 있었
을 것으로 추청된다. 집녕로 26호 교장의 동반 유물들이 예사롭지 않
다고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천택묘의 조성연대와 고려
청자의 제작시기는 언제일까. 사천택묘는 河北省 石家庄市 后太保의
사씨집안 가족묘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이들 유물의 연대
는 13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유천리산 상감청자가 중국에 전해져 13세
기 후반에 매장되었다고 보거나28) 제작시기는 밝히지 않았지만 사천
택이 元 中書省의 丞相을 역임하는 1260년 이후에 입수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29) 또 매병의 형식과 문양등을 통해 13세기
중반경에 제작되었을 것이며, 하한은 1275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30)
28) 崔 健, 「中國 元代墓 出土 靑瓷象嵌牧丹雲鶴紋梅甁」, 古美術43, 1997,
pp.3-37.
29) 金允貞, 「高麗後期에서 朝鮮初期 象嵌靑磁에 나타난 元代磁器의 影響」,
2003, 弘益大學校大學院 美術史學科 韓國美術史專攻 碩士論文.
30) 이종민, 「고려시대 靑磁 梅甁 연구」, 講座美術史27, 韓國美術史硏究所,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27
그러나 사천택묘에서는 1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유골이 함께 발견되
었다. 따라서 1명의 남자를 사천택이라고 하면, 사천택의 沒年은 1275
년이 되겠지만, 나머지 2명의 여자들이 같은 해에 죽은 것인지 또는 나
중에 죽어 다시 합장된 것인지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중국측 연구
자들은 이 합장된 여자들의 유골을 조사한 바 사천택이 죽은지 3~4년
이상을 넘지는 않는 것으로 보고 있어, 부장품의 하한을 1300년 전후
까지도 늦춰 볼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다.31) 가령, 사천택묘에서 출토
된 고려 상감청자 매병과 용천요산 靑瓷荷葉形 瓘蓋가 동시대품이라
고 가정한다면 이들은 대략 13세기후반부터 14세기 전반 사이의 제작
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국내의 생산과 소비 현황으로 본 제작시기
고려시대 가마터에서 상형의 연적이 출토되는 예는 거의 드물다. 정
식 발굴을 통해 보고서가 출간된 유적 가운데는 강진 용운리 10호 요
지와 부안 유천리 7구역(27, 28호)요지에서 극소량의 연적편과 기종을
명확히 알 수는 없는 상형의 파편이 발견된다. 용운리 10호는Ⅱ층위에
서 상형청자편이 나타나는데 용운리 10호 Ⅱ층의 (가)유형은 11세기말
부터 12세기 전반경으로, (나)(다)유형은 13세기 중반까지 내려가는 것
으로 추정된다.32) 따라서 이들 퇴적에서 출토되는 상형의 연적편과 향
로 뚜껑의 상형장식등의 제작시기는 13세기 중반까지도 설정이 가능
하다. 특히 용운리 퇴적에서 발견되는 상형편들은 기벽이 거칠고 두터
우며, 빙렬도 많고 유면도 투명하고 맑다. 10호 Ⅱ층의 (가)유형이 보
여주는 기벽이 얇고 유층도 얇은 특징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들
2006, 12, pp.157-190.
31) 劉 毅, 「元集寧路窖藏出土的鱉形硯滴與高麗靑瓷斷代」, 中國古陶瓷硏究
第 11輯, 中國古陶瓷學會編, 紫禁城出版社, 2005, 11, pp.81-91.
32) 장남원, 고려중기 청자 연구, 혜안, 2006, pp.315-335.
328 湖西史學 第48輯
<그림17> 靑瓷龜龍形裝飾香爐,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상형편들의 년대는 13세기경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구룡
형 장식이 붙은 뚜껑을 가진 향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향로의 구
룡형 장식은 향로의 뚜껑장식이라는 점에서 집녕로 연적과 구조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크기와 세부표현에서 집녕로 것과 매우 흡사했다. 이
향로는 火舍에 수평의 전이 있었고
몸체에는 음각의 운문이, 다리는
사자머리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17> 강진 용운리에서는 상형
장식 뚜껑을 동반하는 수평의 전달
린 향로 몸체들이 주로 10호 Ⅱ층
의 (나)(다)유형에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그 하한은 13세기 이후로
내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유천리 7구역 역시 용운리에 비해 제작기간
이 짧고 집중되어 있는데 주로 10호 Ⅱ층의 (나)(다)와 중복되는 유물
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므로, 시기적으로 일치할 것으로 본다.33)
한편 강진 삼흥리에서도 전달린 삼족 향로편이 출토되었는데 근래
에 발굴 조사된 강화도의 坤陵(사적 371호)34)출토품과 비교된다. 곤릉
의 석실 막음석 앞쪽에서는 靑瓷三足香爐, 역상감문 매병뚜껑, 청자압
출양각 화형접시, 청자압출양각상감문 鉢등이 함께 발굴되었다. 곤릉
의 축조연대는 1239년경으로 추정되므로 희종 석릉(1237년) 출토품과
함께 13세기 전반경의 청자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곤릉 출토
향로의 경우 다소 거친 느낌은 들지만 삼흥리의 그것과는 시간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35) 따라서 집녕로의 연적도 그 제작시기
33) 圓光大學校 博物館․全羅北道 扶安郡, 扶安 柳川里 7區域 靑瓷窯址群 發掘
調査報告書, 2001.
34)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위치한 고려 22대 康宗(재위 1211∼
1213)의 妃 원덕태후(1212년에 왕비가 되었고, 1253년에 시호를 받음)의 능.
35) 장남원, 「강진 삼흥리 도요지의 성격과 출토유물」, 강진삼흥리 가마터, 국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29
<그림18> 靑瓷象形裝飾香爐蓋, 보령원산
도 인양,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조사
가 일러도 13세기 이후가 될 것이다. 그밖에 지표조사를 통해서는 강
진 사당리 등지에서도 상형기의 파편이 수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마터는 아니지만 2005년도에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근
해에서 다량의 도자기 파편이 발견․신고되어,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조
사팀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에서 인양된 청자편은 삼족사자항
로, 쌍앵무문대접, 참외형주자, 도철문鼎, 연판문통형잔, 잔뚜껑, 연판
문대접, 잔탁, 모란문각접시, 枕, 墩 등으로 그 기종과 문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삼족사자항로편은 강화도 곤릉출토의
삼족사자향로와 유사하고 잔탁, 청자연판문대접편, 모란문각접시편 등
은 강화도 석릉 출토품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나머지 유물들 가
운데는 군산 비안도 인양청자들과
비슷한 기종 및 장식을 가진 것들이
어서 대체로 유물의 중심연대는 13
세기 경으로 생각된다.36) 이들과 함
께 거북형 향로 뚜껑 장식으로 추정
되는 편이 수습되어 비교해볼 수 있
다.<그림18>
또, 木簡이 출토되어 1323년(至治
參年) 중국 慶元항[영파]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임이 확인
된 ‘新安船’역시 그 편년에 새로운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20,000여점의
도자기들 가운데 7점의 고려청자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7점은 각각 靑
瓷象嵌雲鶴紋碗, 靑瓷象嵌菊花紋盞托, 靑瓷象嵌牡蘭唐草紋盞托, 靑瓷
象嵌菊花紋蓋, 靑瓷陰刻蓮花紋梅甁, 靑瓷象嵌雲鶴菊蝶紋枕, 靑瓷獬豸
形硯滴<그림19> 등이다. 이들 청자의 생산지는 대략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음각문과 상감문 청자
립광주박물관, 2006, p.80.
36)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보령원산도 수중발굴조사 약보고서」, 2005.
330 湖西史學 第48輯
<그림19> 靑瓷獬豸形硯滴, 신안
해저인양, 고려, 국립중
앙박물관 소장
가 함께 발견되고 있어 그동안 이들의 제작
시기가 12세기~14세기에 이르는 전세품일
것으로 추정되어왔다. 그러나 앞서 살펴 본
국내유적의 동반출토 상황과 비교할 때, 13
세기 중 후반 내지 14세기까지도 그 제작시
기를 늦추어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
다.37)
생활유적 가운데는 寺址에서 상형편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여주의 高達寺址38)
에서는 질이 좋은 靑瓷鴛鴦片이 발견되며,
여주 元香寺址에서는 오리형 연적으로 추
정되는 연적의 잔편과, 섬세한 모란문이 양각된 소형의 접시도 발견되
었다.39) 중국 景德鎭窯산으로 추정되는 影靑의 음각문과 압출양각문
백자들이 동반 출토되었다. 이처럼 내면에 압출양각으로 무늬를 찍은
얇은 경덕진계 청백자 접시는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대략 13세기 중
반을 전후한 유적에서 용천요 청자 등과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아
동반품인 청자상형기의 연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40)
그밖에 13세기의 편년에 참고가 되는 자료로는 1257년에 죽은 崔沆
37) 한성욱, 신안선 출토 고려청자의 성격, 14세기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신안해저
유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6, pp.337-349.
38) 764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고달사지는 고려초기 3대 禪院의 하나로 꼽혔던
사찰로서 966년(光宗 17) 원종대사의 入寂 이후 문헌 기록이 간략하게 처리
됨으로써 10세기말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9) 畿甸文化財硏究院, 驪州 元香寺址 2次 發堀調査 指導委員會議 資料,
2001, 7. 원향사지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소재. 중부 고속도로 공사
로 2차에 걸친 발굴조사 실시. 澄曉大師塔碑에 의거 선종 계열의 사찰로 늦
어도 9세기 경에는 건립되었으며 12세기부터 13세기를 거치는 동안 폐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40) 그 대표적인 동반관계를 보여주는 곳이 13세기 窖藏으로 알려진 四川省 遂寧
유적이다. 封印された南宋陶磁殿, 東京: 朝日新聞社, 1998.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31
의 묘지석과 함께 출토된 靑瓷陽刻蓮瓣紋銅彩瓢形注子가 있다.41) 차
분하고 균일한 비색조의 유색과 번조상태를 통해 13세기 중․후반경 도
자質의 일면을 볼 수 있다.
1271년경에 몽골과의 전쟁으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도 龍藏
城址 출토 청자편들도 이 시기에 해당되는 자료이다. 비교적 안정된
층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데, 종류로는 청자상감연판문참외꽃병,
청자상감국화문통형잔 등 질좋은 상감청자 외에 투각돈, 화형접시편
같은 무문청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유색이 맑고 투명하며
기벽이 얇은, 기형이 완정한 고급의 청자들이다.42) 용장성으로 국가의
史庫를 옮긴 것이 1269년이고, 1270년에 배중손이 삼별초를 이끌고 왕
족인 承化候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용장에 도읍하여 대몽 항쟁을 계속
하였으며 1271년에 바로 여몽연합군에 의해 토벌된 것으로 보아, 이들
고급 자기의 제작시기는 유적이 함락되기 전인 13세기 후반일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상형연적이나 향로의 상형장식에 대해 高麗圖經의 狻猊
出香“43) 기록을 근거로 대략 12세기전반 내지 중반으로 보는 說이 유
력했으나 위와 같은 국내의 가마터와 국내 및 해저유적 출토품들의 동
반예로 보면 13세기 후반에도 고급의 상감, 양각 및 상형청자들이 생
산․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집녕로 출토 구룡형 상형
연적의 제작시기도 13세기 후반까지 가능할 것으로 본다.
(3) 려원 관계와 도자교류로 본 제작시기 검토
그렇다면 13세기 중 후반이후 고려청자가 중국으로 전래될 수 있는
정황을 살펴 집녕로 유적에서 청자상형 연적이 발견될 수 있는 배경과
41) 높이 32.5cm, 밑지름 11.2cm.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국보 113호.
42) 崔盛洛, 珍島龍藏城, 목포대학교박물관, 1989.
43) 高麗陶經卷32, 器皿, 陶爐, “…狻猊出香亦翡色也上有蹲獸下有仰蓮…”
332 湖西史學 第48輯
가능성을 추론해보자.
高麗史에는 고려가 원에 자기를 바쳤던 상황을 보여주는 “畵金靑
瓷”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인규가 일찍이 화금자기를 바치니 원 세조
가 ‘화금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냐?’ 하고 묻되, 인규가 대
답하기를 ‘단지 설채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다시 묻기를 ‘그
금은 다시 쓸 수 있느냐’ 하니, 인규가 대답하기를 ‘자기는 깨지기 쉬
운 것이며 자기가 깨지면 따라서 금도 떨어지는 것이니 어찌 다시 쓸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세조가 그 대답을 훌륭하다 하고 이후로는
자기에 화금하지 말고 진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이다.44) 이 기록에
서 조인규와 세조의 문답을 통역한 사람은 大寧摠管 康守衡(? - 1289)
이었다 하므로 위의 일은 강수형의 재임시기였던 1278년 5월부터
1284년 5월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45) 즉 13세기
말 화금자기를 원에 바치면서 세조가 이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 세조의 화금자기 進獻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 후 다시 화
금자기를 바쳤던 것같다. 충렬왕 23년(1297) 기사를 보면, “正月 壬午
에 낭장 황서를 원나라에 보내어 金畵甕器를 바쳤다”는 것이다.46) 실
제로 개성 만월대 궁궐터에서는 靑瓷象嵌猿兎紋 畵金扁壺나 청자상감
당초문 화금대접 등이 출토되었다고 전한다.47) 도자기에 金彩를 하는
것은 이미 중국에서 성행하였고 원 왕실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선
호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48) 이같은 정황으로 보아 1290
년을 전후로 하여 중국에 바치는 고려자기에는 원 황실의 취향에 맞
는 도자의 기형과 문양이 반영되기 시작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고,
아울러 기존 고려산 청자의 중국유입이 늘어났을 가능성도 충분히 짐
44) 高麗史제105, 列傳, 趙仁規傳
45) 김윤정, 앞 글, p.8.
46) 高麗史世家, 卷 第31, 忠烈王23年(1297) 正月 壬午.
4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8) 김윤정, 앞 글, p.7.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33
작할 수 있다.49)
중국유적 출토되는 13세기이후 고려청자를 보면, 그 경향을 살필 수
있다.50) 특히 遼寧省을 비롯한 중국 북방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고려청자의 발견예가 많아 주목된다. 遼陽市 北園 5호묘, 遼陽縣藍家
卿石灰窯村 분묘, 遼陽市寵來河 1호묘, 遼陽市北園 6호묘 등이고 이외
에 北京, 江蘇, 浙江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51) 遼陽縣藍家卿石灰窯
村 분묘에서는 靑瓷象嵌菊唐草紋枕이 출토된다. 함께 동반된 것으로
는 大平通寶(976-983)와 白釉鐵畵四耳罐片, 銅鉢, 銅匙 등으로 알려진
다. 상감문 枕은 흑백상감의 국화절지문이 시문된 예로서 형태나 문양
의 구성등에서 대체로 13세기 유형에 속한다.52) 遼陽市寵來河 1호묘
에서는 靑瓷象嵌唐草荔枝紋碗(구경 19cm, 높이 9cm, 저경 6.9cm)이
출토되었다. 구연 아래에는 당초문대를 내측면에는 荔枝折枝紋을 외측
면에는 전체에 역상감으로 당초문을 베풀었다. 문양의 구성으로 보면
明宗智陵 출토 여지문 대접(구경 20.3cm, 높이 8.4cm)과 구경 및 높이
가 거의 비슷하여 13세기 作으로 추정할 수 있다. 遼陽市 北園 5호묘
에서는 靑瓷象嵌菊花紋盒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동반되었다. 盒의 윗
49) 金紅男,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소장 扶安柳川里출토 高麗象嵌靑瓷人物畵
紋의 주제 ‘趙孟管道昇四樂圖‘--麗元문화교류의 産物로서」, 미술사논단1
6․17, 한국미술연구소, 2003, pp.7-77 ; 이대박물관 소장 인문화문 매병의 등
장인물은 조맹부와 관도승 고사와 연계시켜, 조맹부와 忠宣王이교류한1311
년에서1319 년사이에 고려 매병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50) 耿宝昌, 「闲话朝鲜高丽青瓷」, 博物馆研究1985-3, 吉林省博物馆, pp.91-94
; 冯先铭,「中国出土朝鲜․伊郎古代陶瓷」, 中国古代陶瓷论文集, 紫禁城出
版社, 1987, pp.329-330 ; 陆明华,「略谈上海博物馆所藏高丽瓷」, 文物,
1988年 6期, 文物出版社, pp.80-85. 김재열, 「중국으로 건너간 고려자기」, 
湖巖美術館 硏究論文集4號, 1999, pp.16-35.
51) 森達也,「高麗靑磁の二つの道」, 海を渡つた翡色のやきもの, 大阪市學藝
員共同硏究 심포지움발표집, 2001, pp.53-55.
52) 高正龍, 「京都出土の高麗象嵌方枕について」, 京都埋藏文化財硏究所硏究
紀要第2號, 京都市埋葬化財硏究所, 1995, pp.127-144.
334 湖西史學 第48輯
면에는 黑白象嵌으로 菊花折枝紋을, 뚜껑과 측면에 백상감 雷紋을 돌
렸다.53) 遼陽市 北園 6호묘에서는 구연이 약간 내만된 형식의 청자잔
이 출토되었다. 구연 외부와 동체 중심부에 각각 백상감으로 뇌문대와
국화문을 넣었다. 이와 같은 잔의 형태와 상감 장식은 용운리 10호와
유천리 7구역의 최상층에서 발견되고 있어 13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54)
한편, 1226년경 중국에서 편찬된《寶慶四明志》에는 당시에 明州
[寧波]를 통해 수입되었던 각종 외국의 물품이 기록되어 있다. 이당시
고려에서는 人蔘, 織物, 螺鈿, 靑器55) 銅器 등이 수출되었는데 이 가운
데 銀子, 人蔘, 麝香, 紅花, 茯笭, 蠟 등 6개 항목은 “細色”56)으로, 나
머지 36종은 “麤色”57)으로 분류되어 있다.58) 실제로 남송대 도읍이었
던 杭州 등지에서는 근래 고려청자가 건물터나 황궁터 주변에서 출토
되고 있어 이를 증명해준다.59) 그런데 위 내용에는 100년전《高麗圖
經(1123-24)》에서 고려 측 수출품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靑器가 “麤
色”으로 분류되어 추가되고 있어 주목된다. 적어도《고려도경》이 집
필․출간되었던 12세기 전반경에는 아직 고려청자의 국외 수출이 빈번
한 상황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전반에
도 고려에서는 유색과 태질이 좋은 음․양각 및 상감 청자들이 한창 생
53) 丁 丽,「辽阳出土的高丽青瓷」, 辽海文物学刊, 1994年 2期, 辽阳省博物馆,
pp.102-103.
54) 冯先铭, 「中国出土朝鲜․伊郎古代陶瓷」, 中国古代陶瓷论文集, 紫禁城出版
社, 1987, pp.329-330.
55) “靑器”는 청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56) 만듦새가 섬세한 고급품, 또는 질이 좋은 물품
57) 粗色이라고도 함. 만듦새가 거칠고 소략한 물품. 무거운 물품.
58) 장동익, 「宋代 明州 地方志에 수록된 高麗關係記事 硏究」, 역사교육논문집 22, 1997.
59) 陆明华, 「略谈上海博物馆所藏高丽瓷」, 文物, 1988年 6期, 文物出版社,
pp.80-85.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35
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려청자를 麤色에 분류하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숙고해야겠으나 중국 자체가 龍泉窯와 같은 수준 높은 청자
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아직 고려청자에 대한 중국측의 관심
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寶慶四明志》보다 100년 늦게 편찬된《至正四明續志
(1342)》에는 청자가 다시 麤色에서 細色으로 바뀌어 취급되고 있는 점
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정황은 원대 후반으로 가면서 고려청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거나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기 때
문으로 볼 수 있다. 사실 《寶慶四明志》가 출간되는 13세기 전반은 중
국이 南宋官窯, 龍泉窯, 耀州窯 등의 질 좋은 청자를 생산하고 있었던
데 반해, 14세기에 이르면 이들 가마가 쇠퇴하고 용천요가 주로 활동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국외 수출품 수요가 많아지면서
황실에서는 경덕진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백자를 사용하게 된다. 따라
서 고려 중․후기에 생산되는 청자들과 특히 상감청자는 중국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수입품이었을 것이다.60) 이와 관련하여 格古要論에서
“고려자기 가운데 粉靑은 용천자기에 흰 꽃이 있는 것과 같은데 그 가
치를 매길 수 없다”61)고 한 대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용천자기
처럼 푸른색 자기에 흰색의 문양이 있었다는 설명이고, 그렇다면 元에
수출되었던 고려의 청자가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대목
이다. 따라서 새삼 細色으로 취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교통의 요지에 있었던 집녕로 유적에서 드물지만 고려산 청
자연적이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고, 연적의 제작시점도 유적에서 일정
60) 김재열은 이에 대해 14세기 고려청자가 쇠퇴기에 들어 품질이 조잡해졌는데
이를 細色으로 취급한 것과 관련하여 고려청자의 문양․기형의 격이 저하된
것이 元 지배층의 기호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았다. 金載悅, 「중국으로 건너
간 고려자기」, 湖巖美術館 硏究論文集4號, 1999, pp.16-35.
61) 朱 琰,《陶說》卷2, 說古, 高麗窯, “注格古論, 古高麗器, 粉靑似龍天, 有白
花朶者, 不甚値錢.”
336 湖西史學 第48輯
기간 사용되다가 매납되었다고 본다면 13세기 중․후반 이후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中國 內蒙古自治區 集寧路 元代 古城遺跡에서 출토된 高
麗産 靑瓷龜龍形 연적의 제작시기에 대해 검토에 보았다. 다소 거친
자료들이었지만 중국출토 고려자기의 제작배경과 시기에 대해 구체적
으로 살펴보았다. 지속적으로 중국에서 발견되는 고려산 도자기들이
국내 연구편년과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결과 대부분을 상
당기간 전세된 것으로 해석해 온 측면이 있었다.
집녕로 청자연적의 제작지가 고려였다는 점에는 이견은 없지만, 동
물형 상형장식의 향로나 연적등이 대체로 12세기를 중심으로 제작된
것이라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제작시기에서 100여년의 견해 차이를
보인다. 동반되는 중국도자의 편년이 대체로 13세기 후반~14세기 전
반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본 고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 즉 12세기경의
연적이 약 100년간 傳世되어 집녕로에 남게 된 경우와 또는 이 연적의
제작시기가 유적의 연대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동시대품일 경우를 염
두에 두고 살펴보았다.
집녕로지역의 驛站 개설은 중앙정부와의 소통은 물론, 물자의 이동
이 수월했을 것이므로 중원지역의 다양한 동시대 도자기들이 발견되
는 것이라 볼 수 있었고, 따라서 청자연적도 원활한 유통과정에서 유
입된 것이라 생각된다. 14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홍건적이 진입과 明
軍의 진압이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유적이 해체되었을 것이라고 추
정된다. 그렇다면 窖藏내 유물들의 하한은 대략 14세기 전반경에 해당
될 것이다.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37
고려시대 가마터 층위에 대한 새로운 자료에 근거한 편년과 소비유
적, 중국측 유적의 연대와 동반유물, 그리고 사료에 나타난 麗元의 관
계변화에서 고려청자의 중국 북방지역 전래의 배경을 살펴본 바 상형
청자의 제작이 실물과 문헌으로 보아 13세기 후반까지도 지속되고 있
다고 판단되었다. 또, 집녕로 출토 연적이 만약 전세품이라 하더라도
중국 유적 및 동반도자기의 제작 년대와 시기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
라고 생각된다. 향후 집녕로 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학술보고와 발굴정
황이 알려지고, 고려자기의 출토예가 집적되면, 보다 섬세한 논증이 가
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논문접수: 2007. 11. 20, 심사시작: 2007. 11. 20, 심사완료: 2007. 12. 10.]
주제어: 내몽골, 집녕로(集寧路), 교장(窖藏), 靑瓷龜龍形硯滴, 상형청자
338 湖西史學 第48輯
<Abstract>
The research of manufacturing period for Goryeo
Celadon excavated in the ruins of the Yuen Dynasty
―Study through an 'water-dropper shaped turtle-dragon'
found in the storage of Ji-ning-lu in Inner Mongolia
Jang Nam-won
This is to research of manufacturing period of Goryeo Celadon which
is an 'water-dropper shaped turtle-dragon' found in the ruins of the Yuen
Dynasty in Inner Mongolia. So far, Goryeo Celadon excavated in China
has not been fit with the chronological study in Korea. As a result, there
could be some works misjudging the date, about 100 years.
There is no doubt that this 'water-dropper shaped turtle-dragon' was
made in Goryeo. Yet, while most of works such as 'Incense burners' as
well as 'water-droppers' has been considered making in the 12th
centuries', this artwork has been regarded in the late 13th centuries and
the early 14th centuries. These 2 points of view would be deliberated
in this paper that is.
Constructing the post in Ji-ning-lu of Inner Mongolia was necessary
to connect with the central government as well as to deliver the goods
to the central parts of Asia, which caused variety of celadon producing.
This water-dropper could be one of them. Through the attack of the Red
Scarves and the defence of the Ming Dynasty were back and forth in
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 339
the mid and the late 14th centuries, it was assumed that most of artworks
were destroyed that is the reason the works kept inside of the storage
can be considered to be made in the early 14th centuries.
The fact that the production of Figurative-celadons still continuously
done even until the late 13th centuries is estimated by the influence of
Goryeo Celadon into the northern part of China throughout the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the Yuen Dyansty according to the
historical document as well as the new chronological study and the ruins
of Goryeo and those of China. Furthermore, although this 'water-dropper
shaped turtle-dragon' found in the storage of Ji-ning-lu was considered
making 100 years earlier than the works of the same period of China,
there has not been so much time gap each other. Further study at this
research is expected when more studies on 'water-dropper shaped
turtle-dragon' found in the storage of Ji-ning-lu would continue on and
more works would be excavated.
key words : Inner Mongolia, Ji-ning-lu, the storage, water-dropper shaped
turtle-dragon

2017.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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