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유적 출토 도자(陶瓷)로 본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2018. 11. 26. 19:38차 이야기



소비유적 출토 도자(陶瓷)로 본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喜嘉院 : 茶 

장두강|조회 210|추천 0|2017.12.11. 20:50 



소비유적 출토 도자(陶瓷)로 본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장 남 원**


1. 머리말
2. 왕실유적 출토 청자와 다례
3. 분묘매납 도자의 구성으로 본 다례의 함축
4. 사지출토 도자와 <高麗版禪院淸規>의 사찰 行茶
5. 맺음말


1. 머리말

   본 연구에서는 고려시대 차문화의 발달과 정착이 청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국가와 사원 등 여러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다례’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청자가 어떻게 사용되었을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였다.1) 고려시대의 茶는 술과 더불어 국가의 관리품목으로서 그 공급과 판매에 국가가 관여했는데, 특히 차는 왕실로부터 일반에까지 보급이 이루어졌다.


* 이 논문은 2008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연구과제번호 : KRF-2008-354-G00058).

**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미술사학과 조교수.

1) 고려시대 차문화와 청자에 대한 입문적 검토는 졸고, 「고려시대 茶文化와 靑瓷茶具를 중심으로」, ?美術史論壇?23, 한국미술연구소, 2007, 6, pp.129-162 참조. 주요 기록사료들과 그에 대한 해석부분은 이 논문에서 제시한 것을 활용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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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도 개경에는 ‘茶店’이 생겨났고 차의 재배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茶所’도 존재했다. 왕실과 사찰의 각종 행사와 하사품으로 차가 활용되었는데, 때로는 북송의 고급 茶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 중국은 물론 고려에서도 茶具가 필요하였고 이 때 도자기로 만든 다구는 보온에 적합하고 그 색과 질감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즐길 수 있었으므로 취사 선택되고 애호되면서 그 수요가 증가하였다. 고려 이전에도 이미 중국으로부터 자기류가 수입되어 음다에 애용되고 있었지만 고
려초부터는 국내에서는 백자와 더불어 靑瓷가 다구로서 제작되었다.


   즉 이같은 수용과정에서 茶具로써 청자의 발달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한편, 차문화의 발달은 禪院과 궁궐 등 특정 수요자에게 새로운 규범과 의례를 만들게 하였다. ?禪院淸規?같은 선원의 규범을 보면 茶禮에 대한 내용이 세밀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다구들이 등장한다. 실제로 고려시대 청자의 주요 소비지였던 사찰과 궁궐터, 왕릉 등의 유적에서는 바로 茶禮와 관련이 깊었을 것으로 보이는 鼓, 碗, 注子, 唾壺 같은 기종들이 빠짐없이 동반 출토된다. 또 고려중기 이후 급격하게 증가한 민간의 분묘에서는 부장제도의 발달과 함께 위의 기종들이 셋트로 구색을 맞추어 매납되는 예들이 일반적이다. 특히 무덤에서 나타나는 이와같은 현상은 이미 당대이후 벽화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도자기 등 부장용품이 함께 발견되는 중국 唐․遼․宋․金의 벽화무덤에서는 피장자를 위한 제례준비 장면과 散樂, 備茶등이 중요한 제제로 등장한다. 고려에는 유사한 사례가 극히 드물지만 분묘 유물의 동반관계를 통해 그 용례의 공통점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또
?高麗圖經? 내용에 보이는 연회 절차와 청자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사료와 문헌자료를 통해 고려시대 行茶의 과정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공예품, 특히 청자의 사용현황을 확인한다면, 고려의 여러 소비지에서 동반되는 청자의 구체적인 쓰임과 기종의 형태 및 조형을 해석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사료된다.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391

   중국과 고려에서 가장 많은 비중으로 제작되고 있었던 청자의 경우 製茶, 行茶의 과정에서 격식이 발달하고 의례가 제정되면서 일정한 기종과 기형, 용량을 유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청자의 발달을 ‘茶禮’와의 연관성상에서 비교 연구하는 방법은 차와 器皿(특히 청자)의 불가분의 관계와 이를 향유하는 집단의 다중적 존재 및 그 수용태도를 환기시켜 줌으로써, 결국 고려시기 생활사의 단면을 복원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 왕실관련 유적 출토 청자와 다례


1) 고려왕실의 茶 하사와 進茶
   ?고려사?를 통해 보면 茶는 藥, 香 등과 함께 귀한 품목으로 여겨지며 왕실의 하사품 및 의례의 필수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우선 신하나 백성에게 하사하는 경우 각각의 신분에 의거하여 지급했다. 따라서하사하는 주체는 왕실이지만, 결국은 차를 받아 음용하는 대상은 그 이상 여러 계층에 해당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왕실에는 약을 조제하여 바치는 부서로 ‘茶房’이라는 기구를 두었으니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다례를 거행할 때 시봉하거나 또는 王의 巡幸이나 명찰 참례 등에 약 4인씩 함께 동행하면서 다례를 받들기도 하였다. 특히 외부 행차시에는 차를 끓이기 위한 火爐와 茶를 나눠 메고 가야 했는데, 行爐軍司․茶擔軍司등으로 불리는 ‘茶軍司’가 그것이다. 다방관원은 이밖에도 궁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다례에서 進茶를 주관했다.2) 실제로 고려 왕실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의례와 절차에서 다례에 대한 법도가 정해져 있었고 그 순서와 법식을 다방이 주관했던 것이다.3)

2) 金明培, ?茶道學?, 學文社, 1998, pp.256-258 ; ?高麗史?卷18, 毅宗 21年 7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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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왕실에서 이루어진 進茶의례 관련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말 기록에 따르면 성균관의 기강이 흐트러져 공부를 게을리 하고 정례적인 제사나 다례에 조차 학생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을 경고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반드시 참예하게 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통해 고려말까지도 성균관에서 정기적인 다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또 죄가 무거운 죄인을 처벌하는 의식에서 왕이 판결문의 최종 처결내용을 결정하기 직전 의례에서 “茶房과 參上員이 곁문으로 들어와 茶를 드리고 7품 내시관은 뚜껑을 연다. 이때 집례는 전의 앞 기둥 밖에 올라 와서 마주 보고 절하고 차를 권한다. 차를 마신 다음에 전 아래로 내려 간다. 다음 8품관 이하의 院房이 대신과 추밀관에게 차를 드리면 집례가 다시 올라 와서 이번에는 머리를 숙이고 차를 권하고 밖으로 나간다…” 하여 왕과 대신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進茶를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5)

   고려초 북방(거란이나 여진)의 사신이 入朝하였을 때 그들을 맞이하는 의례에서도 다례가 보인다. 사신이 가져온 예물 목록을 왕에게 드리면 왕은 그에게 인사를 전하고, 예물이 전달되는 과정을 마치면 왕은 차와 술과 음식을 대접하도록 했다. 특히 사신에게 차를 대접할 때 첫 잔을 왕이 친히 권하고 사신도 왕에게 차를 권하고 재배한 후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면 그 후 서로 일어서서 揖하고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였다.6) 이는 왕태자가 신하들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도 비슷하였다.7)

3) 이은주, 「고려시대 궁정의례에 나타난 茶禮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1.
4) ?高麗史?34卷, 世家, 忠肅王 1, 甲寅元年.
5) ?高麗史?64卷, 志 第18, 禮 6.
6) ?高麗史?65卷, 志 第19, 禮 7.
7) ?高麗史?67卷, 志 第21, 禮 9.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393

   또 설날의 元會儀, 즉 정월의식에서도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다방에서 먼저 차를 드리고 다음에 술을 땅에 뿌린 후 태자와 영공,
재신들은 왕의 좌석의 앞으로 가서 동쪽에 가까이 서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일어나서 영공은 술병을 거들어 잡고 태자가 축하의 술을 부
으면 다방원은 공손히 잔을 바친다…” 하여 춤과 차, 그리고 술 등이
차례로 절차에 따라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8)
왕의 맏아들이 태어났을 때 축하하는 의식이나9) 대관전에서 백관들
을 위한 연회 의식에서도 다례가 있었다. 특히 백관연회에서는 관직에
따라 자리를 배석하고 다방에서 차를 주관하며 의례 중간에 “飮”이라
고 외치면 차를 마셨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음악이 연주되
는데, 차와 술, 香등이 차례로 시행되었다.10)
왕자나 왕녀의 冊封의식에서도 進茶禮가 이루어졌으며11) 특히 왕실
이 주관하는 팔관회나 연등회의 의식에도 다례가 포함되었는데, 차와
술, 음악과 춤 등이 함께 어우러졌다.12) 연등회, 팔관회는 궁중내에서
예부를 위시한 都校署, 尙舍局 등에서 주관하며, 임금이나 태자가 집
례관의 도움을 받으며 의례를 진행하였다고 전한다.13) 따라서 이 경우
의례의 형식속에서도 차는 절차의 중요한 단계를 나타내는 표식이 되
었다.
차는 신라때부터 왕실의 하사품으로 사용되었는데14) 고려에 와서도
태조 14년(931) 기록에 신라왕에게 鞍馬․綾羅․綵綿을, 百官에게는 綵綿
을, 군사와 백성들에게는 茶와 幞頭를, 僧尼에게는 차와 香을 각기 차
8) ?高麗史?67卷, 志 第21.
9) ?高麗史?65卷, 志 第19.
10) ?高麗史?68卷, 志 第22.
11) ?高麗史?67卷, 志 第21.
12) ?高麗史?69卷, 志 第23.
13) 안지원,?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서울대출판부, 2005, pp.140-143.
14) ?三國遺事?卷5,「月明師兜率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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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있게 하사하고 있었다.15) 현종 9년(1018) 기록에는 海․弩 2軍의 校
尉, 船頭 이하에게 茶와 布를 차등을 두고 하사했다 하였고16), 문종 12
년(1058) 기록에도 동여진의 歸德將軍 등 33인이 와서 좋은 말을 바치
자 의복과 기명, 차 등을 차등 있게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17) 문종 21
년(1067)에는 國師 海麟이 연로하여 山으로 들어가길 청하니 왕이 몸
소 玄化寺에 나아가 전별하면서 茶와 藥, 金銀器皿, 綵段, 寶物등을 하
사했다고 한다.18) 예종 10년(1115)에는 왕이 친히 庶民의 늙은이를 불
러 毬庭에서 향연을 베풀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는 내용과, 또
國老인 平章事로 致仕한 吳壽增 등을 위해 閤門에서 연회를 베푼 후
에도 茶와 藥을 下賜하였다는 사실은 차가 왕실하사품으로서 어떠한
비중을 갖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19)
2) ?高麗圖經?기사로 본 왕실의 行茶
?고려도경?은 1123년 북송의 國信使 일행의 고려방문 여정과 고려
의 자연, 풍속, 생활, 물산, 건축, 도성, 기물, 바닷길 등을 提轄人船禮
物官 서긍(徐兢, 1091-1153)이 그림과 글을 함께 넣어 설명하는 형식
으로 작성하여 황제에게 바쳤던 기록물이다. 북송 국신사의 내방은
1122년에 薨去한 고려 예종(睿宗, 1079-1122)의 영전에 예를 올리고
조의를 표하며, 예종에 이어 고려왕으로 등극한 인종(仁宗, 1109-1146)
에게 송 徽宗의 조서를 전하는 두 가지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고려도
경?에 나타난 여행의 기록은 주로 1123년 5월 26일부터 8월 27일, 즉
약 3개월에 걸친 國信使行의 경로와 과정, 그 사이에 보고 듣고 느낀
점 등을 기록한 것이며, 여정에서 서긍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하고
15) ?高麗史?2卷, 世家2, 太祖 14年 8月.
16)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9年 2月.
17) ?高麗史?卷8, 世家4, 文宗 12年 五月.
18) ?高麗史?卷8, 世家8, 文宗 21年 9月, 丁酉.
19) ?高麗史?卷14, 世家14, 睿宗 10年 8月, 庚申.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395
그림으로 덧붙여 정리하여 1124년 8월 6일에 휘종 황제에게 바쳤다.
따라서 고려왕실 세계나 역사 등에서는 의심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여정과 개성 체류의 내용은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가운데 포함된 행다와 다구 등에 관한 내용은 고려왕실의 차에 대
한 실상을 보여준다.
사절단은 내해로 들어온 후 직항으로 개경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몇
군데 정박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인들이 내해로 들어온 상인이나 사
신 등의 선박에 물을 제공하고 차나 쌀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0) 앞
서 고려사 기록을 통해 ?고려도경?에도 연회나 의례에서 차가 이용되
었음을 살펴보았다. 또 중국에 사신 다녀온 진공사들이 桂香, 御酒, 龍
鳳茗團을 가져오자 왕이 북송의 향과 술, 그리고 차를 진설하여 연회
를 여는 내용도 있다.21) 서긍 일행이 관사에 묵는 동안 관원을 보내 연
회를 여는 경우도 있었으니, 사방의 좌석에 寶琓, 古器, 法書, 名畵,
異香과 중국산의 寄茗, 즉 진기한 차를 늘어 놓아 귀하게 취급하였음
을 알 수 있다. 인종년간에는 고려에서 음다가 더욱 유행하였다고 하
며 이 때 중국의 蠟茶와 龍鳳賜團22)이 인기였는데, 서긍은 고려의 차
가 쓰고 떫어 중국의 蠟茶와 龍鳳賜團을 귀히 여긴다고 하였다.23) 중
국으로부터 하사받은 차 외에도 중국산 차가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또 차 마시는 과정도 자못 예의가 있어 다과의 순서
와 차를 올리는 순서 등에 격식이 있었던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행다에 사용하는 기명으로는 금속기와 자기류가 사
용되었다. 茶를 끓이는 溫器로는 湯壺를 소개했는데 재질은 알 수 없
으나 형태가 花壺같고 약간 납작하며, 위에는 뚜껑이 아래는 받침이
20) ?高麗圖經?卷33 舟楫, 供水.
21) ?高麗圖經?卷6, 宮殿2, 延英殿閣,
22) 송 인종(1023-1063)대부터 제조되었으며, 차 잎을 용봉문 틀에 찍어내어 떡처
럼 만들었다.
23) ?高麗圖經?卷32, 器皿3, 茶俎.
396 ∥역사와 담론 제59집
있어 더운 기운이 새나가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24) 실물은 알 수 없으
나 청자나 금속기 가운데 뚜껑이 있고 丞盤을 덧댄 注子가 있으니, 비
슷한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음다용기에 대해서는 중국
사신이 예물로 준 것 외에 상인교류를 통해 고려에 전래된 것들이 있
다고 하였으며, 나아가 고려인들도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음다용 도구
를 여러 가지로 만들어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金花烏盞, 翡色
小甌, 銀爐湯鼎을 소개했는데 서긍이 보기에는 중국의 기물들과 유사
하다고 하였다.25) 이들은 각각 철유에 금채로 장식한 중국산 흑유다완,
고려청자 다구, 은제화로와 차솥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3) 왕실관련 유적 출토 청자와 의례
앞의 기록에서 살펴본 바, 고려는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나 연등회,
외국 사신 교빙, 죄인의 처결, 왕실혼례와 출생, 신년행사, 백관회 등
여러 행사에서 進茶가 이루어지고, 이를 위한 다방이 설치되었다. 관청
에서도 차를 마시는 茶時가 있었다고 하며 성균관에서도 정례적 다례
가 행해졌다. 따라서 현전하는 소비유적의 유물들을 다례와 직접 연결
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유적의 성격과 기종에 따라 그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왕실 및 관청 관련 유적의 현
황을 살펴보자.
강릉 臨瀛館址(고려태조 19년(936)창건)26)에서는 玉環底系 다완편
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으며 국가의 小祀터였던 영암 월출산 제사유적,
국가의 숙박시설이었던 경기도 파주 혜음원지, 개성 만월대 왕궁지 등
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월출산 제사유적은 통일
24) ?高麗圖經?卷31, 器皿2, 湯壺.
25) ?高麗圖經?卷32, 器皿3, 茶俎.
26) ?增修臨瀛誌?宮殿. 9.; 江陵大學校博物館․江陵市, ?江陵 文化遺蹟 發掘調査
報告書-試掘 및 緊急 收拾調査-?, 1996, pp.17-18.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397
<도 1> 靑瓷套盒片, 월출산제사유적 출토, 국립목포
대학교박물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활용되었지만 11-12세기 청자의 비중
이 가장 높았다. 해무리굽 청자완부터 고려중기 유형들까지 주류를 이
루는데, 특히 12세기 유물 가운데는 규석받침 청자류나 비색의 양질
청자들이 많으며 인종장릉 출토품과 같은 형식의 사각형 투합편이 2점
포함되어 있다.27) <도
1> 이것은 宋, 遼代 벽
화에서 茶차와 함께 과
일이나 과자 등을 차려
담을 때 사용했던 것으
로 그려지고 있다. 지
금까지 국내에서는 인
종왕릉과 영암 소사터
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실제로 의례에 많이 사
용했을 것으로 생각되
는 잔탁, 향로, 향완,
정병 등이 투합과 함께
출토되어 생활유적과
는 다른 특정 의례와 연관되는 용도를 짐작케 한다.28)
혜음원지는 12세기초 조성되었으며 4차의 조사를 통해 1,300여점의
자기류가 출토되었다.29) 이 가운데 청자가 가장 많은 비중으로 나타나
1,040점이 출토되었다. 기종으로는 접시, 대접, 완, 발, 잔, 뚜껑 등이
주종이며 이 가운데 접시가 40.7%를 차지한다. 이들은 대체로 질이 우
27) 목포대학교박물관․영암군, ?靈巖 月出山 祭祀遺蹟?, 목포대학교박물관,
1996, pp.39-88.
28) 장남원, 「고려시대 청자 투합(套盒)의 용도와 조형 계통」, ?미술사와 시
각문화?9, 2010,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pp.170-197.
29)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파주 혜음원지?, 2006.
398 ∥역사와 담론 제59집
<도 2> 靑瓷象嵌菊花文香爐片, 혜음원지 출토, 한
백문화재연구원 발굴
수하여 사용주체와 부합되는데 강진 사당리 생산품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 다음으로 대접은 24.1%, 완은 10.0%, 발은 9.7%, 잔은 7.7%의
비율로 출토되었다. 이들 기종은 대체로 음식기나 음다용기로 사용되
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밖에도 枕, 잔받침, 향로, 매병 등 다양한 기
종이 수습되었다.<도 2> 특히 2008년에 실시된 5차 조사에서는 연화
형 향로와 철화 청자편
이 확인되었다.30) 이 같
은 특수 기종들은 일상
생활 용기와는 달리 특
수한 용도로 추정되며
惠陰院을 이용했던 상
층부의 용례를 보여준
다. 청자외에도 백자가
함께 소량 발견되었는
데 역시 접시가 많은 비
율로 나타났으며 완류
도 있다.31) 그러나 청자
에 비하면 조질이고 지
방의 요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여, 상대적으로 왕실관련 최고급 소비
지였던 혜음원지에서는 청자가 질과 수량면에서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이 지속되고 있는 개성 왕궁지에서도 다양한 기종의 청자가 출
30) ?파주 혜음원지 5차 발굴조사 완료약보고서?, 한백문화재연구원․파주시,
2008.
31) 강경남,「파주 혜음원지 출토 고려도자 연구」, 제7회 학술세미나 발표논문집
?유적출토 고려청자?, 경기도자박물관 발표자료집, 2009, pp.6-19.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399
토되었다.32) 고려궁성에서 출토된 청자는 각 기종별로 접시, 대접, 완,
병, 뚜껑, 잔탁, 잔, 향로, 기와 등이 확인되었는데 왕궁유적이므로 왕
실내 일상의 음식에 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시기적으
로는 고려초부터 말기에 이르는 전 기간의 자기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발굴이 전면적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므로 추후 결과를 주
시해야 할 것이다.
근래에 발굴이 진행된 곳으로 왕실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는 강화 중
성지를 들 수 있다. 이곳은 강화~인화간 도로공사 구간을 발굴한 것으
로 江都時期(1232-1275) 고려왕실이 강화도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축
조된 강화중성의 유구를 조사한 것이다. 중성은 그 축조연대가 알려져
있고 해당발굴에서는 몇 군데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퇴적에서 청
자가 다수 수습되었다. 특히 2지점으로 명명된 건물지에서는 건물 기
초부가 드러나면서 인근에서 기와류와 상감, 음각, 압출양각, 투각 등
다양한 시문기법의 고급 청자편이 출토되었다. 이 청자들 가운데는 화
분, 투각대좌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중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된
왕실관련 특수 건물로 추정되었다. 출토유물의 양도 많고 특수한 기종
들이 포함되어 건물의 위상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별한 의례가
치러졌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33)
한편, 최근 발굴이 진행된 진도 용장산성의 발굴성과도 주목할 만하
다. 용장산성은 고려 원종당시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어쩔수 없이 강
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이 원종의 육
촌인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였는데, 이때 고려의
장군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삼
32) 박성진,「개성 고려궁성 출토 고려청자 연구」, 제7회 학술세미나 발표논문 ?유적출토 고려청자?, 경기도자박물관 발표자료집, 2009, pp.20-33.
33) 중원문화재연구원, 「인화-강화 도로건설공가 구간내 J구간 문화재발굴조사 1
차지도위원회 자료집」, 2009. 11.
400 ∥역사와 담론 제59집
은 섬이다. 따라서 현지에 머물었던 시간은 매우 짧으나 최근 발굴에
따르면 거대한 건물지는 계단식으로 축조되어 계곡부 경사면에 자리
잡아 개성 만월대와 파주 혜음원지 등과 유사한 입지를 보여준다. 이
곳에서는 여러 건물지에서 적지 않은 양의 청자류가 수습되었는데 완,
발 등 음식기와 특히 투각돈, 화분, 향로 등 특수한 기종이 다수를 이
루고 있었다. 그 종류와 질에서 전란 중에 갖추었다고 보기에는 매우
고급에 속하는 기종들이 확인되어 잠시나마 왕궁으로 기능하면서 일
정한 의례를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34)
위 내용과 관련하여 다례에 소요되는 음료용 다구 외에 추측해 볼
수 있는 도자기종 가운데 장고가 있다. 도자 장고는 여러 가마터와 소
비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어 왕실이나 사찰 등의 의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본다. ?高麗圖經?에는 고려 文宗이 악공을 주청하여 宋 熙寧年
間(神宗의 연호, 1068-1077)중 조서를 보내 고려로 가게 되었다고 하
였으며, 고려사신이 入貢하여 大晟雅樂과 燕樂의 하사를 청하자 조서
를 통해 모두 허락하였다고 하였다.35) 睿宗 9년(1114)에도 安稷崇이
宋에서 돌아오면서 北宋 徽宗이 하사한 악기를 가져왔는데 이 가운데
장고가 포함되어 있었다.36) ?高麗史?志 25 唐樂과 俗樂에도 역시 장
고가 기재되어 있다.37) 11세기말부터 12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송대 장
고가 유입되고 고려에서도 대부분의 의례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도자 장고가 출토되는 유적도 다례와 관련하여 유념할 필요
가 있을 것이다.
34) 목포대학교박물관, 「진도 용장산성 문화재 시·발굴조사」, 2011, 4.
35) ?高麗圖經?卷40, 樂律.
36) ?高麗史?70 志 24 樂 雅樂 宋新賜樂器.
37) ?高麗史?71 志 25 樂 唐樂 樂器 ; 이종민, 「고려 청자장고 연구」, ?시각문화
의 전통과 해석?, 정재김리나교수정년퇴임기념 미술사논문집간행위원회, 예
경, 2007, pp.299-322.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01
3. 분묘매납 도자의 구성으로 본 다례의 함축
1) 고분벽화 자료로 본 다례용 기물
다례의 내용과 구체적인 기물의 사용례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로
는 고분벽화가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벽화가운데는 사례가 거의 없으
며, 현전하는 자료는 대부분 遼, 宋代 벽화들이다. 五代이래 송, 요시기
로 들어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이전시기에 비현실적인 주제
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다분히 일상적인 장면들이
그 중심을 이룬다.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이나 내세관을 담아내던 것과
비교하면 보다 세속적 장면들이 주류인 것이다.38) 내용 중에는 차나
술 등이 매개가 되는 장례의 備茶 장면이 빠짐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실적인 기물들이 등장한다.
사실상 오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茶의 전국적 소비는 급격히 증가
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고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
다. 군자나 소인, 富貴貧賤을 막론하고 차를 음용하게 되었으며39) 쌀
과 소금처럼 필수적인 일용품이 되었다.40) 음다의 유행은 북송 元豊年
間(1078-1085)부터 官茶'․'貢茶'는 물론 전매 제도까지 생겨났으므로 그
변화 추이는 결국 차를 마시는 과정에 필수적이었던 도자 다구의 발달
과 유통에 영향을 주었다.41) 한편, 고려의 그림이나 기록자료에서는
차를 비롯한 음료용 기물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러나 고려의 음식문화에서 器物의 사용례와 종류 등에 대해 동시대 遼
38) 지민경, 「동북아 벽화무덤 전통의 쇠퇴와 고려 벽화무덤의 의의」,?고려의 미
술과 송․요․금․원과의 관계?, 미술사연구회 전국학술대회자료집,
2011, pp.49-84.
39) ?全宋文?卷905 ; 徐銀美, ?北宋 茶 專賣 硏究?, 국학자료원, 1999, p.32 재
인용.
40) 王安石, ?臨川集?卷70, 「議茶法」.
41) 徐銀美, 위의 책, 1999, p.403.
402 ∥역사와 담론 제59집
와 宋의 고분벽화 속 장면을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河南省 禹州 白沙 1호묘에는 天符 2年(1099)명이 있는 西壁에 묘주
부부가 탁자위에 茶를 나누는 장면이 얕은 부조로 표현되었다. 이때
보이는 기물의 재질은 분명치 않으나 금속기나 자기류일 것으로 보인
다. 또 다른 벽면에서는 散樂의 장면이 있다. 2호 벽화에서도 東南壁에
茶를 준비하는 장면과 묘주 부부가 차를 마시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42) 四川省 爐縣 일대에서도 남송시대 분묘들 가운데서 다수
의 石刻이 수습되었다. 그 가운데 차를 마시는 장면이 있고 탁자 위에
과일과 잔이 놓여 있다.43) 遼의 陳國公主墓(1018년 이후) 墓道 東壁에
서도 남녀 시종이 손에 다구를 든 채 대기하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무
덤에서는 실제로 차 공양구도 함께 발굴되었다.44) 유사한 장면의 구성
은 遼 大安 9년(1093) 張匡正墓45), 遼 大安 9년(1093) 張文藻墓46), 天
慶 元年(1111) 韓師訓墓47), 天慶 6년(1116)의 張世慶墓48) 등에서 모두
확인되는데, 茶托, 茶碗, 茶碾 같은 제다용 도구들과 시종들이 茶를
준비하는 모습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당시 장례과정에서 행해진 다
례의 일정한 기물 종류와 형식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 벽화묘 가운데서는 다례와 연관된 내용을 그린 사례는 찾
기 어렵다. 다만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쳐 살았던 松隱 朴翊
42) 宿 白, ?白沙宋墓?, 北京, 文物出版社, 1957 ; 考古雜誌社 篇著, ?二十世紀
中國百項考古大發見?, 北京, 2002, pp.370-373.
43) 四川省文物考古硏究所․成都市文物考古硏究所․爐州市博物館․爐縣文物管理
所, ?爐縣宋墓?, 北京: 文物出版社, 2004, pp.146-147.
44) 內蒙古自治區文物考古硏究所․哲里木盟博物館,?遼陳國公主墓?北京, 文物出
版社 1993 ; 考古雜誌社 篇,?二十世紀 中國百項考古大發見?, 北京, 2002,
pp.374-377.
45) 河北省文物硏究所,?宣化遼墓壁畵?, 北京, 文物硏究所, 2001, 그림1, 2, 3.
46) 河北省文物硏究所, 위의 책, 2001, 그림22, 23.
47) 河北省文物硏究所, 위의 책, 2001, 그림98.
48) 河北省文物硏究所, 위의 책, 2001, 그림68.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03
<도 3> 松隱 朴翊(1332~1398)墓 북서쪽 장벽 인물도, 동아대학교박물관 조사
(1332~1398)의 무덤 벽화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49) 벽화의 여러 부분
이 탈락되어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잔존하는 내용으로 보면 묘실내
양쪽 장벽에서 북쪽을 향해 가고 있는 인물의 군상이 주목된다. 박익
의 무덤은 조선초에 조성되어 복식이나 구조 등에서 고려와 다른 점이
있지만,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는 시기의 정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도 3> 즉, 이미 고려초부터 시행되었던 다례의 모습을 재현
했을 가능성 외에, 고려말 ?朱子家禮?가 유입되어 조선초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喪禮에서 靈座에 차를 바친다거나, 제례에서 點茶하여 神位
에 차를 바치는 일, 또 왕실에서는 장례 후 3년내에 魂殿과 陵所에 다
례를 지냈던 일 등, 다례가 보편화되어 있었으므로 그 내용이 그림으
로 반영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50)
49) 동아대학교박물관, 심봉근,?密陽古法理壁畵墓?, 東亞大學校博物館, 2002.
404 ∥역사와 담론 제59집
2) 분묘에 매납된 도자의 구성과 의미
중국 및 고려의 벽화에서 보여준 사실적 내용들은 실제 유물의 매장
에서는 어떨까. 특히 고려시대 분묘를 보면 11~12세기 이후 부장품의
매납이 늘어나면서51) 청자를 비롯한 특정한 기종들의 일괄 매납이 증
가하는 현상과도 맞물리는 것으로 파악된다.52) 고려시대 분묘는 석실
을 사용한 王陵에서부터 귀족이나 부유층의 石槨墓나 石棺墓, 민간의
호족과 부유층, 농민 등의 분묘였던 土壙墓가 조성되었다. 고려 무덤
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묘주의 신분적 위치와 성별 등에 차이가 있겠으
나 크게 금속, 도자, 직물류, 鐵器, 銅錢(또는 鐵錢) 등으로 구성된다.
그 가운데 청자나 백자로 나타나는 그릇류는 碗, 鉢, 甁, 壺, 접시 등이
주를 이루는데 이같은 기종의 조합은 일상에서의 식생활 또는 茶禮 등
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발굴조사를 통해 본 분묘출
토 도자의 실례를 통해 그 구성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 고려고분 출토의 주요 매납품은 청자, 백자, 도기, 금속기 등으
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일대의
127개의 분묘에 대한 세부 속성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도자류는 일
반적으로 가마에서 생산된 器種을 망라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鉢, 匙, 甁이 각각 35.9%, 21.0%, 21.9%를 차지하면서 매납품의 중심
으로 이루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53) 금속제품을 제외한 도자류의 경
우 발, 접시, 병 등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가마터에서 확인되는 생산품
50) 이동주, 「밀양 고법리 벽화묘에 대한 연구」, ?文物硏究?19, 동아시아문물연
구학술재단, pp.69-106.
51) 李羲仁, 「京畿地域 高麗古墳의 構造와 特徵」, ?고려시대의 고고학?, 서울경
기고고학회, 2006, pp.9-38.
52) 李鍾玟, 「高麗 墳墓出土 陶磁 硏究」, ?湖西史學?第46輯, 湖西史學會, 2007,
pp.1-34.
53) 玄文弼, 「高麗時代 古墳 出土 靑瓷硏究」, 東國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
文, 2005.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05
<도 4> 傳 仁宗長陵 출토 유물 일괄, 고려(1146), 국립중앙박물관
의 비중과도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들 도자의 구성은 가마터의 생산경
향에 따른 것일까, 아니면 일정한 규칙에 의해 부장하게 된 것일까?
왕릉으로는 定宗(945~949 재위) 安陵에서 청자화형발, 청자잔탁,
청자주자뚜껑 등이 동반되었다. 이는 중국 五代~宋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備茶의 장면에 등장하는 자기류와 일치한다.54) 양평 매월리 고분
에서도 청자완, 청자반구병,55) 청자철채백화문침, 청동병, 청동匙 등이
일괄 출토되었는데, 완과 병, 匙 등은 위에서 언급한 바 고려시대 고분
에서 보여주는 보편적인 매납 구성품이자 전형적인 차공양의 도구들
이다.56)
仁宗(1122-1146) 長陵에서는 皇統 6年(1146)의 仁宗 諡冊과 함께
석제함과 동제합, 청자투합, 청자과형병, 청자국판문합, 청자유개완 등
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57)<도 4> 이 일괄품들은 1916년 일본인 골동
54)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12권, 1992, p.17.
55) 이전까지 자기반구병은 도기로부터 연원하는 기형으로 인해 초기청자의 표
식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분묘출토 반구병의 동반관계와 무덤의 형식등으로
보나 고려의 전기간에 주요 기종으로 매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金賢娥, 「高
麗時代 瓷器盤口長頸甁의 硏究」, 梨花女子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2006, pp.124-126.
56) 野守健, ?高麗陶磁の硏究?, 淸閑舍, 1944, pp.12-14.
57) 野守健, 위의 책, 1944, pp.10-12.
406 ∥역사와 담론 제59집
상이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매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8) 현전하는 4점
의 청자는 모두 기벽이 얇고 유색이 차분한 전형적인 비색청자들로 강
진 사당리 일대 수습품들과 유사하다. 이 가운데 방형의 투합은 모서
리가 말려든 부분에서 안쪽을 향해 가는 돌대를 만들어 꽃잎의 경계처
럼 만들었고 안바닥 중심에도 위각 방형의 자리를 만든 형태를 보인다.
중국에 현전하는 청자 투합의 예로 보면 턱이 있어 같은 기물을 포갤
때 안정적으로 쌓을 수 있는데, 五代에는 9층 투합이 만들어진 예가
있으며 측면에 火焰紋의 透孔이나 장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河南省 寶豊縣 淸凉寺요지에서도 인종 장릉 것과 유사한 것이 만들
어진 것을 볼 수 있다.59) 따라서 현전하는 인종 장릉 투합은 1점이라
고 알려져 있지만 본래는 여러 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살펴본
소비지유적 가운데 영암의 월출산 제사유적에서도 방형의 투합편이
발견되어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60)
또, 1159년에 작고한 문공유의 무덤 출토품 가운데는 청자상감보화
문완 1점, 청자상감국화문접시 1개, 백자봉수수주 1점, 백자양각당초
문수주 1점, 백자양각화문은구완 1점, 청동팔릉원권소문경 1점 등이
있었다.61) 이 예들은 高麗産 청자와 中國産 백자를 함께 부장함으로써
생활유적에서 나타나는 고려청자와 중국백자의 동반 사용관계를 똑같
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구성품들은 碗과 注子 등 다구류로 동반 구
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58) 今西龍, 「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 ?大正午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
府, 1916, p.264 ; 국립중앙박물관, 2008, p.100 재인용.
59) 吕成龙, 「汝窑的性质及相关诸问题」, ?中国古陶瓷研究?第七辑, 中国古陶瓷研究会 编, 紫禁城出版社, 2001, pp.39-47; 金正基,「靑磁素文方形臺의 新例
와 考察」, ?考古美術?19․20합집, 한국미술사학회, 1962, pp.227-228.
60) 목포대학교박물관․영암군, ?영암 월출산 제사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1996,
pp.12-16.
61) 野守健, 위의 책, 1944, p.25.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07
<도 5> 熙宗(1204-1211) 碩陵 출토 유물 一括 고려시대
(1237 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유사한 매납
양상은 강화도의
熙宗( 1 1 8 1 ~
1237, 재위120
4~1211) 碩陵62)
<도 5> , 明宗 智
陵63)등 왕실의
분묘는 물론이고
동해시 삼화동
고분64), 충주 직
동 고분군65), 충주 호암동 고분군66), 단양 현곡리 고분군67), 상주 청리
고분군68), 경산 임당지구 고분군69)등 전국에 분포가 수많은 민간의 무
덤에서도 확인된다. 이렇듯 음식기류 가운데 직접 차로 추정되는 음료
의 飮用을 위한 도구와 저장보관용기 등이 동시에 함께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같은 분묘의 주인과 형식에 따라 부장품의 품질과
재질에도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상호 보완적이었다. 실제로 분석에 따
르면 품급에 따른 무덤의 규모나 형식이 정해져 있었으나 적어도 석곽
62) 國立文化財硏究所, ?江華碩陵?, 2003.
63) ?高麗史?卷21, 世家21, 神宗5年.
64) 鄭良謨, 「三陟郡 北坪邑 三和里出土 高麗時代 遺物一括」, ?考古美術?129․
130, 韓國美術史學會, 1976, pp.190-199.
65) 忠州工業專門大學校博物館․忠州市, ?忠州山城 및 直洞古墳群發掘調査報告
書?, 1986, 圖13, 圖28-2.
66) 忠州博物館, ?忠州 虎岩洞遺蹟 發掘調査報告書?, 1998, 사진60, 61.
67)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한국도로공사,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군」, 2008.
68) 韓國文化財保護財團․(株)韓進重工業, ?尙州靑里遺蹟(Ⅳ)?, 1998, p.295,
p.422.
69) 한국토지공사․한국문화재보호재단, ?慶山林堂遺蹟?(Ⅰ), (Ⅲ), 1980.
408 ∥역사와 담론 제59집
묘와 토광묘간에는 신분보다는 경제력에 따라 차이가 컸을 것으로 보
기도 한다.70) 고려시대의 부장 전통과 관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실
이나 사대부가에서 새로운 유교의례에 따라 ‘명기’를 준수하려는 의지
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이래로 시행하던 부장풍습을 기반으로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특히 완, 병, 타호, 시저 등으로
구성되는 일괄품들은 일상용품임과 동시에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飮茶
를 위해 사용하던 기물들의 조합과 유사하다.71) 따라서 일정한 매납품
의 구성은 다례가 치러지지 않았더라도 다례의 형식을 함축함으로써
실질적 의례를 대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4. 사지출토 도자와 <高麗版禪院淸規>의
사찰 行茶
1) 불가의 의례와 일상속의 茶
의례와 일상에서 茶가 중시되었던 고려에서 특히 불교 사찰은 그 중
심에 있었다. 국내에 차가 전래되어 본격적으로 음용되기 시작한 이래
皇龍寺址72)나 彌勒寺址73) 등 사찰 유적 조사로 보면 통일신라부터 고
려시대까지의 생활층에서는 다양한 중국산 다완류가 집중적으로 확인
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飮茶用 자기가 제작되기 이전부터 ‘玉璧底’ 양
식의 茶碗들이 활용되고 있었다. 고려초부터 자기 가마터에서 다완류
가 가장 많은 비중으로 제작된 것도 음다와 연관이 깊을 것이다.
70) 이종민, 「고려분묘 출토 도자 연구」, ?호서사학?제46집, 호서사학회, 2007,
pp.1-34.
71) 장남원, 「조선시대 喪葬 공예품의 의미와 구성: 서울,경기지역 民墓 매납품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24, 2010, pp.109-132.
72) 文化財管理局․文化財硏究所, ?黃龍寺?, 遺跡發掘報告書1, 1984.
73) 文化財管理局․文化財硏究所, ?彌勒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 1989.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09
<도 6> 靑瓷象嵌癸丑銘 鉢,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원에서 이루어지는 六法供養에서 부처나 불법승에게 올리는 공양
물로는 香, 燈, 과일, 茶, 밥, 꽃을 들고 있는데 茶는 불가의 중요한 공
양물이었다. 그 외 국가가 개설했던 백고좌회에서는 항상 3만명이라는
飯僧이 수반되었다고 하는데 이 모임은 종파를 초월한 의례로써 대규
모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원
각경 등을 강의했다고 한
다.74) 이같은 의례는 고려에
서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추
정되며 이 때 다양한 의례용
기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또 화엄종이나 법상종, 천
태종, 선종의 승려가 왕사나
국사 등에 책봉되는 경우도
의례 집전이 이루어졌을 것으
로 본다. 현전하는 유물 가운
데 국립박물관 소장의 靑瓷象
嵌‘癸丑’銘鉢을 통해 어렴풋
이 불교의례의 수반을 짐작해
볼 수 있다.<도 6> 이 청자
鉢은 구연이 내만하였으며 구
연 안쪽에 한 줄의 음각선을
두른 형태를 갖고 있다. 특징
을 보면 내저에는 흐릿한 원
각이 있으며 굽은 안굽형으로
굽 접지면에는 모래빚음 받침
74) 김수연, 「고려전기 금석문 소재 불교의례와 그 특징」, ?역사와 현실?71,한국
역사연구회, 2009, pp.33-61.
410 ∥역사와 담론 제59집
을 받쳐 전형적인 발우의 형태를 띤다. 중요한 것은 외측면 중앙부에
세로로 “癸丑年造上 大聖持鉢”이라는 상감 명문 내용이다. “癸丑”은
1073년이나 1133년, 1193년 모두 가능하다.75) 여기서 “大聖”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 鉢의 성격도 명확해질 수 있을 것
이라고 본다.
흥미롭게도 “大聖”의 용례는 ?高麗史? 전체에서 두 곳, 그리고 묘지
명 가운데 한 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고려사 기록을 보자. 肅宗 辛巳
6年(1101) , “…8월 癸巳日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元曉와 義
湘은 우리 나라의 聖人이다. 그런데 碑文도 諡號도 없어서 그 德이 알
려지지 않고 있으니 나는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원효는 大聖和靜國
師로, 의상은 大聖圓敎國師로 추증하노니 해당 관청에서는 그들이 살
던 곳에 비를 세워 공덕을 새김으로써 영원히 기념하게 하라”는 것이
다.76) 즉 “大聖”이라는 호칭은 원효와 의상 두 사람에게 주어졌던 추
증의 칭호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숙종은 관청이 관련업무를 집행하도
록 하였다. 또 하나의 기록은 大覺國師 義天의 묘지명이다. 1101년(肅
宗 6년)에 씌여진 대각국사 王煦(1055∼1101)의 묘지명 첫 구절에 “고
려국의 大聖, 日興王寺에서 돌아가신 國師, 諡號가 大覺이었던 大和尙
의 墓誌銘을 나란히 적음”이라고 하였다. 고려 문종의 아들이자 천태
종의 시조인 그에게 “大聖”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이다. 원효와 의상
은 각각 신라의 승려였고, 고려 의천의 몰년은 1101년인데, 전자를 추
증한 연대와 의천의 몰년이 일치한다. 따라서 이 유물은 아무리 일러
도 숙종 6년 (1101)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
후 계축년은 1133년 또는 1193년이다. 그런데 강진 용운리와 부안 유
천리 등 상감청자가 동반되는 고고학적 층위에서의 기형별 동반 관계
75) 높이 8.3cm, 구경 25.1cm, 저경 6.6cm. 이하 발에 대한 설명은 장남원, ?고려
중기 청자 연구?, 혜안, 2006, pp.299-302의 구체적 고증 내용을 요약하였다.
76)《高麗史》卷11, 世家11, 肅宗 辛巳6年.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11
나 번조받침 및 소비지 유적 출토 상황을 보면 위와 같은 거친 모래빚
음 받침의 사용은 12세기 중․후반의 양상으로 판단된다. 결과적으로 이
유물의 제작연대는 1193년일 가능성이 보다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시대 차는 특히 승려나 문인들의 일상에서 중요하였다. 개인의
수행과정과 여가생활, 모임과 교류에서 차는 매개체가 되었다. 華嚴僧
統을 지낸 寥一法師는 퇴직을 바라면서 명종(1171~1197재위)에게 시
를 바쳤는데, 그 시의 내용에는 찻그릇과 차의 종류가 나타난다. “오경
의 남은 꿈을 절간에 맡겨 두고 십년이나 궁궐사이를 숙이고 어정거렸
네. 새벽녘 차를 끓이니 가느다란 鸞鳳의 그림자를 머금었고 야릇한
향기나는 새로 빻은 가루는 鷓鴣새의 斑點이라(후략).” 청자의 앵무문
은 주로 음각으로 새겨지며 12세기 후반~13세기 자기류에서 애용되었
던 문양이므로, 여기서 말한 가느다란 난봉의 그림자는 어쩌면 당시
유행했던 음각앵무문일 것이며, 자고새의 반점은 역시 당시에 수입되
어 다완으로 사용되었던 중국 복건성 건요 자기의 문양일 가능성이 높
다.77)
이규보는 「雲峯에 있는 老珪禪師가 早芽茶를 얻어 나에게 보이고
孺茶라 이름을 붙이고서 시를 청하기에 지어 주다」는 시에서 차를 만
드는 과정과 차의 향미, 다구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하였다.78) 또 「
南行月日記」에서는 아버지 기일을 맞아 부안 내소사에 들렀을 때 본
선사의 외실에 대한 설명에서 “…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經机만이 있을 뿐 …”79) 이라 하여 차는 선사의 일
상이었음을 짐작케한다.
77) 김명배는 이들을 각각 길주요 잔과 건요잔으로 이해했다. 金明培 著, ?증보판
茶道學論攷? 大光文化社, 1999, p.448.
78) 李奎報, ?東國李相國集?卷第 13.
79) 李奎報, ?東國李相國集?卷第 23.
412 ∥역사와 담론 제59집
李齊賢(1287~1367)은 ?益齋亂藁?의 「松廣和尙이 차를 보내준 데
대하여 붓 가는대로 써서 丈下에 寄呈하다」라는 시에서 송광사에서
보내준 차를 끓여 향기와 맛을 음미하면서 무늬 있는 자기잔을 사용했
다고 하였다. 내용 중에는 “…고운 빛깔은 숲 속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끓는 소리 솔바람 부는 듯 자기잔에 도는 무늬 망울을 토한
다…”80)라는 글귀가 있으니 자기잔에서 무늬 망울을 토한다는 것은 아
마도 청자에 상감 등의 무늬가 있는 잔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2) 선원청규에 나타난 다례
禪家의 수행납자들이 총림이나 선원에도 지켜야 할 규칙을 淸規라
고 한다. 고려에서는 중국 宋의 청규를 기본으로 고려판 선원청규를
발간하였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高麗板 重添足本禪院淸規?가 전하는
데, 宋의 정화원년(1111)에 重添된 것을 고려 고종 41년(1254)에 重雕
한 것으로 전한다. 이 내용은 가람과 사찰내 승려들의 직위, 수행 등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으며 사찰내 의례와 일상에서의 行茶에 대해서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는 선승들이 차를 필수적으로 음용했
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의례의 도입도 ‘선원청규’의 특징 중 하나이다. 내용에는 일행의식
과 염불의식을 도입하여 모든 행례를 엄숙하고 장엄하게 진행하고 식
당작법, 다탕예법, 입실예법은 물론 하안거와 결재 해재 인사예법, 동
지와 새해의 인사예법, 염송이나 일상대화에 대한 규정 등 질서정연한
수행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폭넓은 청규들이 상세하게 담겨져 있다. 따
라서 선원에서는 청규의 내용을 선원생활의 지표로 삼아 준수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라 추정된다.81) 이 내용은 규정이었으므로 얼마나 현실
80) ?益齋亂藁?卷第 4.
81) 자각종색선사 원저․崔法慧 譯註, ?高麗板 禪院淸規 譯註?, 伽山佛敎文化硏
究院, 2001, pp.222-246.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13
에서 지켜졌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각 시대와 나라마다 현실에 맞게
그 내용이 조정되는 것이 청규의 일반적 현황이었다. 따라서 고려판의
경우도 고려사원의 현실이 반영되고 수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茶禮와 喪禮 등의 내용을 보면, 선종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차는 일상화되면서 그 행다에서 복잡한 절차들이 생겨났다. 이는 이미
북송시기 선원청규에서도 드러나는 것으로서 차 마시는 일 하나하나
를 규례로 만들고 예법으로 정리하여 형식화시킨 것이다. 이같은 형식
화는 세속이 추구했던 위계질서를 사원에 도입함으로써 전통을 전승
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라 본다. 청규를
통해 규제의 틀을 만들게 되면서 차를 마시던 일상은 공적인 행위가
되고, 공적인 행위 속의 행다와 음다에는 당연히 다양한 다구가 전제
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 선원의 조직과 등급을 만들게 되고, 다례에서
는 엄격한 형식이 적용되었다. 실제로 고려판 선원청규에서는 다분히
의례절차에 차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총림에 들고자 하는 경우 구비해야할 물품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
양한 의복과, 신발, 삿갓, 수건 등이 열거되는데, 그 가운데 小淨甁과
茶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격식에 대해서는 각자 집안의 풍검
에 따른다 하였다.82) 그러나 실제로 선원에서 이루어지는 다례의 면모
를 보면 상당히 격식이 있었다.
예컨대 방장은 茶湯儀式에 따른 煎点儀式을 거행하되 진실된 마음
으로 지극한 공경의 禮를 다해야 하는데, 이때 모든 의식은 茶湯儀禮
의 절차에 따라 행해지며 직분이나 신분에 맞는 禮를 행하도록 되어
있다. 「赴茶湯」을 보면 방장의 다탕[堂頭茶湯]을 중심으로 茶湯儀禮를
통해 究竟의 妙味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예를 들면 당
두의 다탕에 나아가는 경우에는, 대중이 모임에 시자가 인사하고 들어
82) 자각종색선사 원저․崔法慧 譯註, 위의 책, 「辨道具」, p.75-77.
414 ∥역사와 담론 제59집
가기를 청하면 문득 수좌를 따라 자리에 나가서 서고, 주지가 읍하면
가사를 거두며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신을 벗어 가지런하게 놓는다.
발을 거두되 의자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해야 한다.……항상 공경하고
조심스럽게 기다린다. 편안하게 盞橐을 거두되 두 손으로 가슴에 닿도
록 잡는다. 손을 놓되 처지게 하거나 너무 높게 쳐들어서는 안된다.
…”83) 이를 알 수 있는 사례로 盞托의 실제 예를 보자. 잔탁은 국내 유
적중 사찰터에서 발견된 예가 가장 많다.84) 잔탁은 선원청규의 내용에
서도 확인되며, 잔 아래 받침을 받친 구조로 된 이 기물의 경우 다례에
서의 위계와도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판 선원청규?에 나타난 다례의 양상을 보면 주지가 주관하는
다례의식, 승당내에서 이루어지는, 知事와 頭首가 참석하는 다례, 대중
의 蠟茶에 대한 다례, 특별한 사람을 위한 다례, 특별한 尊長을 위한
다례, 각각의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특별다례, 특별한 齋에 올리는 다례
등 그 종류가 다양하고, 또 다례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신분에 따라 의
례가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례에서는 茶器외에 香, 茶鼓,
茶盤, 茶筒, 茶罷 등 다양한 용품들이 소요되었다.85) 따라서 선원청규
내용만으로는 정확하게 다구의 재질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러 승려
및 문인들의 문집과 사지출토 실물자료를 통해 중요한 다례의 도구로
청자와 백자 등 도자기가 사용되면서 도자기의 종류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하거나, 또는 형태와 격식에 차등을 두고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3) 사찰유적 출토 도자로 본 다례와의 관계
고려초 사찰출토 청자 가운데는 碗이 주종을 이룬다. 삼국시대 이래
83) 자각종색선사 원저․崔法慧 譯註, 위의 책, 「赴茶湯」, p.114.
84) 李允珍, 「高麗時代 瓷器盞托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논
문, 2007.
85) 자각종색선사 원저․崔法慧 譯註, 위의 책, pp.222-247.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15
중국으로부터 자기 다완을 수입하여 사용했었고 고려에 이르면 이른
바 옥환저, 옥벽저의 굽을 가진 전형적인 다완들이 많은 사찰에서 발
견된다. 실제로 가마터의 제작현황을 보더라도 碗鉢類는 점유율이 절
반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했다.86) 그밖에 鉢, 楪匙, 盤, 굽달린 반구형
잔, 소호, 잔탁, 향완 등도 함께 발견되었다. 고려 초의 사찰인 충남 논
산의 개태사(940)87) 전남 화순 운주사88), 고려초 국찰이었던 충주 숭
선사지, 청주의 흥덕사지,89), 전북 남원 만복사지 등에서도 다양한 청
자완들이 출토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는 국산 청자 다완 및 鉢 등 음식기류가 주종을 이룬
다. 무문의 음식기류가 대종을 이루지만, 음각, 압출양각, 철화, 퇴화,
상감 등 다양한 기법의 청자를 포함한다. 경남 사천 본촌리 폐사지90),
경기도 안성 봉업사지91), 여주 고달사지, 미륵사지92) 등에서 비슷한
분포로 청자가 출토되었다. 사세가 컸던 봉업사지나 미륵사지 등에서
는 상당량의 자기가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미륵사지에서는 10,000점
이상의 도자기가 출토된 바 있다. 역시 완, 발, 잔, 잔탁 같은 음료 용
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일반적 음식기외에 병, 매병, 고족배, 반
구장경병, 장고, 합, 주자, 두침, 화분, 뚜껑, 연적, 항아리, 대호등 다양
해졌다. 물론 이는 고려중기 이후 전반적으로 청자의 활용범위가 확장
되는 현상과 유관하겠으나 사찰의 경우 일반 주거지나 관청 등에 비해
청자의 수량이자 질에서 단연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는
보령의 성주사지93), 여주 원향사지94)도 예외가 아니다.
86) 장남원, 앞의 책, 2006, p.144.
87) ?高麗史?世家 卷2 太祖 19年.
88) 全南大學校博物館․和順郡, ?雲住寺Ⅲ 發掘調査報告書?, 1990, pp.59-63.
89) 淸州大學校 博物館, ?淸州興德寺址?, 1986, p.88.
90) 慶尙大學校博物館, ?泗川 本村里 廢寺址?, 1997.
91) 경기도박물관․안성시, ?奉業寺?, 2002.
92) 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소, ?彌勒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도판편)
, 1989 : 전라북도 익산지구문화유적관리사업소, ?미륵사지유물전시관? 1997.
416 ∥역사와 담론 제59집
이상으로 보면 사지출토 청자류는 고려초 차의 음용을 위한 도구로
서 완을 중심으로 집중되었으나 중기 이후 후기까지 생활용 도자의 종
류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95) 그러나 기종간 상호 비중의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며, 각 기종별 수량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완이나 발, 잔 등
음료용기의 개체수가 줄어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려시대
동안 전반적으로 성행했던 다례와 일상의 음다는 사찰의 청자수용에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5. 맺음말
이 연구에서는 생활사적인 관점에서 茶를 중심으로 고려의 다양한
소비지에서 청자가 어떻게 사용되고 인식․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보려 하
였다. 따라서 기존의 양식사 위주의 접근 방법에서 벗어나 음식문화
특히 차문화를 국가의례와 사원의례 및 분묘의 부장제도 등을 통해 살
피고자 하였다.
고려시대에 茶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사회를 결집하고 신앙의 현장
에서 중요한 매개로 부상하게 되면서 일정한 의례절차 속에 포함되면
서 일반의 분묘 매장문화에까지 확산되었다. 따라서 다도구로써 청자
의 비중과 기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고려는 다원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지만 주체성을 잃지 않고, 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교류하며 문화의 폭과 깊이를 확대해 나아갔다.
이러한 고려문화의 개방적 분위기에서 ‘茶’라는 매개체는 ‘靑瓷’를 도
93) 保寧市․忠南大學校博物館, ?聖住寺?, 1998, pp.457-568.
94) 畿甸文化財硏究院․韓國道路公社, ?元香寺址?, 2003.
95) 이종민, 「高麗時代 寺址 出土 磁器의 器種과 性格」, ?丹豪文化硏究?8, 용인
대학교 박물관, 2004, pp.95-121.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17
구 삼아 동북아시아의 광범한 패러다임에 동참하게 된다. 단순한 기호
음료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와 종교, 삶과 죽음을 표징하는 과정에 중
요한 매개로 작동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음다의 방법은 다분히 형
식화되었고, 계층과 직종을 달리하면서 현실의 규범속에 적용하였다.
왕실은 내적인 예의질서와 대외적 외교관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례를 중요하게 치렀다. 다방을 설치하여 차와 다례의 과정을 주관하
게 하였고, 상하간의 하사와 예물로 교환되었다. 왕실의 가례와 책봉,
판결, 연회 등 다양한 성격의 의례에서 進茶가 행해졌다. 이 때 다양한
청자의 소비가 이루어졌는데, 실제로 여러 왕실관련 유적에서 출토되
는 다량의 청자는 이를 보여준다.
사찰에서는 다례가 더욱 발달하였다. 본래 수행의 과정에 필요한 음
료였던 차는 주지와 일반승려, 세속의 존장과 승려, 일반민 등 대상을
달리하는 의례에서 중심에 있었다. 유교적 위계질서의 편성이 사찰에
도입되면서 의례가 세분화되었고, 차를 중심으로 하는 다례의 방법과
실제도 표면적으로 형식화된 것이다. 실제 발굴조사를 통해 보면 현전
하는 소비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자기가 출토되는 곳이 바로 사
찰이다. 사찰출토품 가운데는 다완이 가장 많아 이같은 사찰내 의례의
발달과 다례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한편 분묘 매납용 청자도 다례와 밀접하였다. 매납용 기물에는 청자
외에 백자, 도기, 금속기 등이 포함되었지만 청자가 중심이었다. 피장
자가 뚜렷한 왕실의 무덤이나 일반민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기물의 건
수와 질에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완, 발, 접시, 병을 중심으로
하는 전형적 음다용 세트 구성을 보여준다. 이같은 현상은 고려외에
중국에서도 비슷하였고, 이후 조선에까지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실제
로 상장의례에 사용되었을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자기류를 종류별로
맞추어 구성함으로써 다례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418 ∥역사와 담론 제59집
[논문접수: 2011. 7. 11, 심사시작: 2011. 7. 11, 심사완료: 2011. 7. 30.]
주제어: 茶禮, 禪院淸規, 進茶, 茶具, 靑瓷
고려시대 청자의 수용과 다례(茶禮)의 관계 ∥ 419
<Abstract>
The Relations of Tea Ceremony and Celadons during
the Goryeo Dynasty
Jang, Nam-won
This study centered on the life history of tea from the applicant
perspective, how aware are consumed, and examine whether acceptance
is owned. Therefore, analysis of form-oriented approach to the country
away from the food culture, rituals, temples and rituals, especially Tea
Culture and want to stay close through the mound and was the chief
system. Goryo have a pluralistic culture, but without losing your identity,
in equal footing with foreign exchanges and proceeded to expand the
breadth and depth of culture. The 'tea' a mediator celadon as a tool to
Northeast Asia, along with the broader paradigm.
The tea is not just a favorite food, country and religion, and in the
process of sign of life and death were an important borne operation. The
internal order of th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royal family in the
course were important tea ceremony.
Established by the royal family 'Dabang(茶房)' the agency organizing
the process of tea and tea ceremony were, when the tea was a gift. A
royal wedding, the installation of the prince and princess , crime verdict,
and banquet were done by various tea ceremony. At this time various
420 ∥역사와 담론 제59집
celadon consumption were, in fact, related to the royal relics unearthed
from the many celdon is the proven.
Further development of the tea ceremony were temples. To perform
the original finish that drink tea, but the advantage gradually became
important in temple rituals. As in the ritual hierarchy of temples, the
segmentation arise, and how the tea ceremony was typed. When the
results of excavations in the ruins of the temple was excavated by the
largest amount of celadons. Among them, the proportion of teabowl
cursor allows inspectors to prove the tea ceremony.
Celadon also excavated from the tomb while the tea ceremony and
the relationship is considered deep. Was buried in the tomb furnishings
was the center of the celadon. Celadon was the chief of the grave goods
were important among the many transferable. From the tomb of the royal
tombs of ordinary people, ranging from the difference in the number and
quality, but by default, bowls, plates, tea ceremony vessel disease shows
the configuration of the set.
In addition to considering these trends are similar with China, in
Joseon until after the tradition that was inherited. That is, in fact, the
number of days or weeks have gotten used to the funeral, but to
configure different types of pottery, tea ceremony was to symbolize the
implication.
key words : tea ceremony, The Rule of Purity for Seon
service of tea, tea instrument, cela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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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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