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토기

2018. 12. 19. 23:28美學 이야기



삼국시대 토기 | 민족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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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백제 토기를 감상 

 

 

 

 




검은간토기

대전 서구 괴정동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 괴정동 출토 검은간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이미지 사이즈 618x960 | 한국학중앙연구원



성주 예산리 목관묘 출토 흑도장경호




흑도장경호 [黑陶長頸壺 ] 토기

黑陶長頸壺는 장란호형 [長卵壺形 ].유견호 [有肩壺 ]와 함께 백제 토기 출현기를 알려주는 대표적 토기이다. 

뚜껑과 어깨 부분에 사격자문 [斜格子文] 음각선문 [陰刻線文 ] 연주문 [蓮珠文 ]파상문 [波狀文 ]  등 문양이 있다. 

표면에 흑연 등 광물질을 바르고 목제 도구를 이용하여 문지르고 구운 토기이다. 

분포 지역은 한강유역에서 금강 [金江]유역까지 한성 백제의 세력범위와 일치한다. 

용도는 일반적 토기는 아니고 특수한 목적을 지닌 위세품으로 백제 중앙 정권이 지방의 유력자에게 사여한 물품의 하나로 추정한다 




그릇 받침대

   그릇의 표면을 두드려 만드는 타날문 [打捺文 ]수법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 가야와 함께 남한지역과 공통적 제작기법이다 .

3세기 중 후반 고이왕 [古爾王]시기 부터 고대국가의 틀을 성립하고 

한강유역에서 보이던 앞선 시기의 土器와는 다른 새로운 土器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본격적인 백제 토기로 본다 .  




굽다리 접시

백제 5~6세기 높이 25.6cm 지름 30.4cm



벼루 




항아리 




토기 甁




백제의 토기는 신라 토기에 비하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면서 실용적이고 우아하다. 




신라 6세기

굽다리 잔 .토기영락장식투각고배 [土器瓔珞裝飾高杯]

 




한국의 고대토기- 백제토기


   백제토기는 이전의 전통적인 제작기법을 바탕으로 낙랑과 고구려의 토기제작기술을 받아들였다. 금강 이남 지역에서는 가야토기의 영향도 보이며 5세기부터 중국 육조시대의 토기의 영향도 보인다.

신라의 토기가 직선적이고 꾸밈이 많다면 백제의 토기는 소박하고 실용적이며 부드럽고 우아하다. 백제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세발토기와 장고형의 그릇받침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삿무늬가 보편화되었고 납작바닥이 성행하였다. 세발토기는 백제토기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몽촌토성에서 많이 출토되며 한성백제가 성립되던 3세기 중후반 무렵에 등장하며, 중국 진(晉)대의 청동제 삼족반에 기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 토기의 최초단계에서 ‘흑색마연토기’가 나타나는데 이는 그 이전시대인 삼한시대의 칠기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칠기가 토기에 비해 고급품이기 때문에 칠기의 재질감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옻칠이 된 백제토기도 확인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제도술에 기반을 둔 회색 연질토기와 이를 더욱 발전시킨 높은온도에서 소성한 회청색경질토기, 취사용으로 쓰인 낮은온도의 산화소성으로 구운 적갈색 연질토기등이 있다.

시대별로 살펴보면

 

 

백제의 변기(便器)


   부여 군수리에서는 동물모양의 남자용 변기와 납작하고 긴 여자용 변기가 발견되었다. 이 중 남자용 변기로 보이는

 호자는 중국 호자의 모양을 변화시킨 것으로 백제의 독창적인 면을 짐작하게 한다. 호자는 원래 호랑이 등 동물

모양으로 만든 용기를 의미하는데 중국에서는 술그릇, 찻그릇, 명기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백제시대 변기
여성용변기와 남성용변기, 한성백제박물관 소장

 

 

한국의 고대토기- 백제토기


미륵사지와 왕궁리 백제토기 사진을 올리다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느낌이 들어서

일반적인 백제토기 사진을 추가로 올립니다.    퍼옴 


 

  

 

 

 

 

 

 

 

 

 

 

 

 

 

 

 

아래의 오리모양 토기는 삼국시대(신라)에 만든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국보 제 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陶器 騎馬人物形 明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경주시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주인상은 높이 23.4㎝, 길이 29.4㎝이고, 하인상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하여 저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두 인물상은 두꺼운 직사각형 판(板)위에 다리가 짧은 조랑말을 탄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 모습이다. 말 엉덩이 위에는 아래로 구멍이 뚫린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긴 부리가 돌출되어 있어 비어있는 말의 뱃속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인물상의 모습은 말 장식이 화려한 주인상의 경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三角帽)를 쓰고 다리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하인상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짐을 메고 오른손에 방울같은 것을 들고 있어 길을 안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인물상 형태의 토기는 신라인의 영혼관과 당시의 복식,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工藝意匠) 등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출처 : 문화재청)






국보 91-2 기마인물형토기 하인상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보91-1 기마인물형토기 주인상

출처: https://carefree09.tistory.com/955 [태평한 바보]





흙으로 빚은 우리 민족의 마음 : 토기, 도기

(강우방 선생의 논문에서 인용)


   토기나 도기는 대부분 日常用器로 쓰는 그릇이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된 그릇은 비일상적인 그릇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은 자는 神이 되고 그는 신의 나라로 간다.

여기에서 祭禮가 생기고, 제례에서 쓰이는 그릇은 일상용기와는 다른 형태 즉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들려는 의지가 생긴다. 우리는 흔히 그러한 것을 예술품이라 하고 미술사 연구의 주요대상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고분벽화, 백제무덤에서의 발굴품, 가야나 신라무덤에서 나오는 그릇, 이들 대부분은 일상생활에서 쓰던 것들이 아니라 무덤에 넣기 위하여 다른 차원의 의식에서 따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가야토기건 신라토기건 절묘하게 술잔을 기마인물과 결합시켜 死者에 바쳐진 祭器의 성격을 띤다고 하겠다. 지배계층의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제기들이었기에 이런 명품들이 만들어 졌다. 아무래도 예술품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재력을 떠나서는 훌륭한 것이 만들어질 수 없었나 보다.

위대한 예술품은 제례와 관련된 것이 역사시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 근원은 수만 년 전 선사사대로 거슬러 간다. 그 후 인지가 개발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내세보다는 현세를 더 중요시하게 되면서, 오히려 이 땅위에 크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남겨 놓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예술작품으로 만든 왕릉의 외형, 수많은 장엄한 사원, 성덕대왕신종 같은 공예품, 수많은 금동불과 석불, 이 모두는 제례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현실을 이상세계로 만들려 했고 향유하려 했고, 마침내 부장품은 사라졌으며 火葬재도 산하에 뿌려졌다.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다시 극단의 세속적인 상태로 변하여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토기든 도기든 자기든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흙이다. 모든 것은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간다. 창조의 터전이다. 어머니다. 大母地神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마인물형토기 2점을 감상해보자.


1. 국보 제275호 :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국립경주박물관


  삼국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의 인물형 토기이다.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직사각형의 편평한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를 올려 놓았다. 받침은 가야의 굽다리 접시(고배)와 동일한 형태로, 두 줄로 구멍이 뚫려 있다. 받침의 4모서리에는 손으로 빚어 깎아낸 말 다리가 있다.

말 몸에는 갑옷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말갈기는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다. 말 등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무사를 앉혀 놓았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표면에 무늬가 채워져 있다. 특히 아직까지 실물이 전하지 않는 방패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무사의 등 뒤쪽에는 쌍 뿔모양의 잔을 세워놓았다.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가야의 말갖춤(마구)과 무기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강우방의 해설) 가야시대 도기 중 명품을 꼽자면 우선 작고한 이양선 박사가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기마인물형도기(국보 제275호, 가야 5세기, 높이 23.2cm) 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인물 뒤 말 등에는 두 뿔처럼 힘차게 솟구친 角杯가 이 조형을 힘차게 마무리 짓고 있다.

이 때 각배는 원래의 용도가 아닌 즉 일상의 차원에서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하였다.

이 도기는 전체구성이 조화롭고 조각이 견고하며 부분적으로 사실에 충실하면서, 황갈색 표면에 녹색유(綠色釉)가 자연스럽게 입혀져서 아름답다. 가야미술의 백미(白眉)이다.


2. 국보 제91호 : 도제기마인물상(陶製騎馬人物像) 국립중앙박물관





   경주시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인상은 높이 23.4㎝, 길이 29.4㎝이고, 하인상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경주시에 있는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하여 저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주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두 인물상은 두꺼운 직사각형 판(板)위에 다리가 짧은 조랑말을 탄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 모습이다.

말 엉덩이 위에는 아래로 구멍이 뚫린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긴 부리가 돌출되어 있어 비어있는 말의 뱃속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인물상의 모습은 말 장식이 화려한 주인상의 경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三角帽)를 쓰고 다리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하인상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짐을 메고 오른손에 방울같은 것을 들어 길 안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인물상은 신라인의 영혼관과 당시의 복식,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工藝意匠) 등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강우방 해설)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나온 신라시대의 기마인물형도기(국보 제91호, 높이 29.4cm)는 만듦새가 견고하거나 추상화되지 않았으나 훨씬 평화스럽고 유머스러하다. 이 점이 가야와 신라의 차이점이다. 도기의 인물은 투구나 갑옷을 입지 않았고 눈지긋이 감고 있다.

말에도 갑옷이 없다보니 당시에 마구들을 어떻게 장식했는지 소상히 표현되고 있다.

등 뒤에는 잔이 놓여 있고 그 잔에 술을 부으면 속이 빈 말의 몸 안에 가득차게 되며 말 앞의 대롱을 통해 술이 나오게 된다.


(주인상)



(하인상)



*** (참고사항)


1. 우선 용어의 정의를 확실히 해두자

(1)토기(土器)는 노천가마에서

(2)도기(陶器)는 지하굴식 가마에서

(3)자기(瓷器)는 지상에 경사지게 올리는 터널형 가마에서 만들어 지는데, 

이는 굽는 온도를 각각 훨씬 올리는 과정에서 고안된 가마 형태들이다.

토기는 신석기시대에서 삼한시대에 만들어 졌고 600-700도에서 구워진다.

도기는 경질토기라고도 하며 삼국시대에 만들어 졌고 1,000도 이상에서 구워진다.

그리고 자기는 1,250-1,300도에서 구워졌다. (즉 굽는 온도에 따른 硬度를 기준으로 함)


2. 신라도기는 활발하고 量感이 넘친 가야토기에 비해 형태가 옹색하고 器形이 다양하지 않아 획일적인 느낌이 짙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다른 고에서는 볼 수 없는 도용(陶俑)이 붙은 도기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져서 흥미롭기 짝이 없다.

(학계에서는 토우와 도용을 분리하였으나, 偶나 俑은 모두 인형의 뜻이며 사전에 의하면 殉葬하는 사람의 대신으로 쓰는 인형이 俑이므로 같은 의미로 본다.)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한때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도용이 붙은 도기들은 제례용 도기임이 분명하며, 신라도용은 모두 고배(高杯)나 장경호(長頸壺) 등에 붙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국보 제195호, 높이 34cm, 경주 노동동 11호분 출토)이다.


   도용(혹은 토우)은 기마상, 배를 젓는 상, 사냥하는 상, 성교하는 상, 악기를 연주하는 상 등 인간생활의 모든 모습들이 진흙으로 빚어 매우 즉흥적으로 특색을 살려서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또 동물들도 용을 빼고는 신라인들이 본 모든 동물들을 도용으로 만들었다.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국보 제195호)


   그러면 왜 현실의 모든 것을 도용으로 만들었을까.

신라인들은 죽은 후에도 현실의 생활이 그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을 염원하는 마음이었으리라.

(같은 마음을 고구려인들은 고분벽화로 남기었다.) 도용이나 고분벽화를 통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보이는 미의식을 우리민족의 영원한 原形質로 보며 그 전통은 근세의 民畵에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끝)

|작성자 김영한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목 항아리이다.                            

신라 목 항아리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단지


                           

단지


                            

굽다리 접시

신라와 가야의 굽다리 접시로 왼쪽은 가야의 굽다리 접시, 오른쪽은 신라의 굽다리 접시


                            
신라 목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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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구분서 5세기 집모양 토기 발굴


부산 기장 고분서 5세기 집모양 토기 발굴

부산 기장서 5세기 집모양 토기 발굴
부산 기장서 5세기 집모양 토기 발굴
(부산=연합뉴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일대에서 발견된 집모양 토기. 삼국시대인 5세기 중후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모양 토기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완벽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삼국시대때의 집모양 토기가 부산 기장군에서 출토됐다.

문화재 발굴·조사 전문기관인 부경문물연구원은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부산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일대 9천123㎡에 대한 문화재(고분군) 발굴 조사 과정에서 높이 18㎝, 너비 17㎝의 집모양(家刑) 토기 1점을

발굴했다고 17일 밝혔다.

삼국시대인 5세기 중후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모양 토기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완벽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부산 기장서 5세기 집모양 토기 발굴

  








부산 첫 출토 '집모양토기' 전시


 


부산 기장서 5세기 집모양 토기 발굴
(부산=연합뉴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일대에서 발견된 집모양 토기. 삼국시대인 5세기
중후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모양 토기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완벽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집모양 토기는 정면에서 볼 때 두 개의 기둥(하나는 일부 유실)이 있으며 기둥 뒤 평면 벽을 중심으로

 반원형 형태를 이룬다.

정면 반대편의 반원형에는 12개의 작은 기둥이 별도로 배치됐고 지붕은 맞배형과 유사하다.

이 토기가 발굴된 지역은 4~6세기 대규모 집터 등이 발견된 가동유적지와 바로 접해 있다.

최종혁 부경문물연구원장은 "삼국시대 집단주거지와 공동묘지가 한 곳에서 발견돼 당시 주거공간 배치와

매장문화 등 실생활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며 "이 지역 주변에는 농경지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야유물 집모양 토기

 

 

고대 초가귀틀집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이형토기입니다. 집은 정면 두칸, 측면 한칸에 맛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측면

한쪽에 출입구를 만들고, 그 위의 지붕에 이엉을 덧대 빗물이 출입구 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출입구의

기둥은 원목(圓木)이나 나머지는 각재(角材)로 표현되어 있고, 지붕에는 횡으로 점토띠를 가로질러 새끼줄로 이엉을

얽어 맨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내부를 비우고 지붕의 한쪽에 원통형의 아가리를 붙여 굴뚝을 표현함과 동시에

용기(容器)로서 기능하도록 하였으며, 토기의 전면에 지그재그 또는 X자상의 점열문을 장식하였습니다. 이러한 집모양

토기는 죽은 영혼이 편안히 기거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준다는 내세관념(來世觀念)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한 당시

가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최근 발굴된 삼한·삼국시대 주거지에서 이와 비슷한

가옥구조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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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형토기(家形土器)(집모양토기)

가야(伽耶)
경질(硬質)
높이 : 12.5Cm
용(俑)
慶北 達城郡 安東郡 일대
* 한국의 미 5 토기, 한병삼 외 편, 중앙일보사, 1981, 도87
국립중앙박물관

신수(新收) 1108

 

2층을 이룬 고상 가옥(高床家屋)을 본떠 만든 토기이다. 고상 가옥은 강우량이 많고 습기가 많은 남방 아시아 지역의 가옥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가 유행하지 않았으나 가야 지역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를 취한 토기가 많이발견되어 주목된다. 이 토기로 미루어 당시 이러한 건축 양식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볏집 또는 억새로 이엉을 만들어 덮은 지붕은 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얽어 맸다.

지붕 꼭대기에는 고양이로 보이는 짐승이 올라앉아 있다.

지붕 아래에는 나무 기둥이 보인다. 지붕 한쪽 측면에는 굴뚝 모양의 큰 원통형이 붙어 있다. 이와 같은 집 모양 토기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듯하다. 즉 평소 안식하던 집을 만들어, 죽은이가 내세에서도 그와 같이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명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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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을 이룬 고상 가옥(高床家屋)을 본떠 만든 토기이다. 고상 가옥은 강우량이 많고 습기가 많은 남방

아시아 지역의 가옥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가 유행하지 않았으나 가야 지역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를 취한 토기가 많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 토기로 미루어 당시 이러한 건축 양식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볏집 또는 억새로 이엉을 만들어 덮은 지붕은 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얽어 맸다.

지붕 꼭대기에는 고양이로 보이는 짐승이 올라앉아 있다.

지붕 아래에는 나무 기둥이 보인다. 지붕 한쪽 측면에는 굴뚝 모양의 큰 원통형이 붙어 있다. 이와 같은

집 모양 토기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듯하다. 즉 평소 안식하던 집을 만들어, 죽은이가 내세에서도 그와 같이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명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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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사진
  • 쇠뿔 모양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위풍당당한 걸작이다. 2세기. 높이 42.3 입지름 21.0 바닥지름 13.5cm. 호림박물관 제공
  •  

     

     

    ▲ © 울산여성신문

     

    독특한 백제의 토기

    백제토기란 백제의 주민들에 의해서 제작되고 사용된 백제 고유의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토기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기원 후 3세기경부터 백제의 멸망시점인 660년까지이다. 백제토기는 백제의 영역

     변천과정에 따라 그 공간적인 분포가 변화하고 있는데, 토기 양식의 공간분포와 정치적 영역과의

    일치현상은 백제와 더불어 동시대에 서로 경쟁적인 관계에 놓여 있던 신라나 고구려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a. 제작기술: 두드림무늬 수법으로 만든 후 환원번조로 제작되었다. 이 기술은 남한지역 역사시대

    토기의 공통적 특징으로 중국 전국시대의 도자기 제작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한강유역의 백제나

    그 이남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시점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로 드러나고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한대의

    토기제작기술과 연관된다.

    우각형파수부삼족토기






    소뿔형(牛角形)의 손잡이가 있고, 다리 세개가 달린 토기이다. 삼국(三國) 중 백제(百濟)에서만 만들어진 토기로서 실생활용기가 아니고 무덤에 부장(副葬)하는 등 의기(儀器)로 사용된 것이다.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이 토기는 서울의 몽촌토성(夢村土城)을 비롯하여 백제의 전 유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입지름(입지름) : 9.1 cm / 입지름(입지름) : 9.1 cm /
    최대지름(最大지름) : 19.6 cm / 높이(높이) : 14 cm

     

     

     

     

     

     

     

     

     

     

     

     


    전형적인 삼족토기(三足土器)는 배(杯)가 얕고 아가리는 직립되었으며, 아래에 3개의 다라를 붙이는데

    다리의 형태가 둥글거나 육각(六角)으로 깎아 뾰족한 형태를 보이나 이 토기는 이러한 정형에서

    벗어난 것이다. 즉 배(杯)는 깊으며, 다리는 바닥이 넓고 쇠뿔형 손잡이가 부착되었다. 몸체는

    삿자리무늬(繩席文)가 타날(打捺)된 회청색경질(灰靑色硬質)이다.

    var articleno = "15908666";

    [가야 토기]가야토기와 삼국시대 역사

    - 국립박물관 가야실 이주헌 학예사의 해설 -

     

    가야토기(伽倻土器)란 낙동강의 서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삼국시대의 토기를 말한다. 특히 고령, 함안, 고성, 김해, 성주, 창령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토기들은 각각의 지역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야인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예술 공예품을 남겨놓았는데, 거의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이다. 이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토기류다. 토기는 재료의 풍부함과 가소성(可塑性)으로 인해 가장 다양하다. 또한 제작자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는 공예품이다.
    ⓒ뉴스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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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갈색의 경·연질계토기 제작하다
    가야토기의 제작방법과 소성, 기형, 문양 등의 특징으로 볼 때 ‘연질계적갈색토기’와 ‘경질계토질토기’로

     양분된다. 연질계적갈색토기는 생활유적인 패총과 주거지, 매장유구 등에서 주로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생산기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파악된다.

    정선된 점토에 약간의 모래알갱이를 섞어 손으로 빚어 형태를 만든 후 물레에 걸어 그릇의 형태를 다듬은

    것이다. 그늘에서 잘 말린 후 700~800℃의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어서 그 색깔은 적갈색으로 나타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산화염에 의한 흑색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토기의 질감은 무문토기보다 표면이 매끈한 편이며 흡수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주로 시루, 소형발,

    단경호 등 취사와 관련된 실생활용기로 많이 제작되었다. 중대형의 장란형 옹(항아리)은 옹관 등 매장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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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청색의 도질토기 제작의 매력
    결질제의 도질토기는 영남지역의 삼국시대 고분과 남해안지역의 패총유적 그리고 낙동강 유역의 토기요지

     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새로운 한식토기 제작기술의 영향으로 그릇의 형태는 주로 윤적법으로 성형하며

    타봉으로 기벽을 두드려 단단하게 하고 대형토기의 경우는 부위별로 나누어 성형하여 각 부분을 접착한다.

    물레를 사용하여 물손지를 해서 표면을 잘 다듬고 문양을 새긴 다음 그늘에 잘 말린 토기는 등요에서 1,000~1,300℃가량의 높은 온도로 소성하여 완성한다. 이때 가마에 공급되는 공기가 부족하게 되어

    일산화탄소가스가 발생하면서 토기의 소지에 함유된 철분에서 산소를 빼내 산화제이철이 산화제일철로

    바뀌면서 회청색의 도질토기로 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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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이나 배모양의 이형토기
    도질토기는 가야토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만큼 그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소형 원저광구호,

     장경호, 고배, 기대 등이 있다. 동물모양이나 집, 배 모양 등으로 형상화시킨 이형토기가 많이 발견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야토기는 모두 신라토기의 종류와 비슷하나 기형이 곡선적이며 세련되었다. 도질토기는 3세기 후반 이후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에서 처음 출현했고, 4세기 중엽 이후 가야의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일상의 생활용기며 당시대의 예술품으로 무덤에 묻는 부장용 제기로 사용됐다.

    이러한 가야토기는 초기에는 둥근 밑항아리, 귀달린항아리 등의 크고 작은 항아리가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5세기대에 이르러 점차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생산되면서 이단 굽구멍에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이는 고배와 같은 세련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는 가야 토기로 발전했다.

    또한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5세기초 무렵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고분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쓰에키의 발생과 전개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일본의 토기제작 기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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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야토기의 유래와 지리적 특성사
    가야토기의 출현은 김해 대성동 29호와 양동리 235호묘 출토품으로 보아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며 그 기원은 기형, 자연유, 성형법 등으로 보아 한나라 회유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파악된다.

    가야의 제작기술면에서 이전시기의 토기들과는 차이를 보이며 점토의 선택이나 제작면에서 원삼국시대의 와질토기와는 달리 전업적인 생산체계에서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로 5세기 이후 가야토기는 영남지역을 관통하는 낙동강이라는 지리적 경계와 일치하여 신라토기와 그 양식적 차이가 뚜렷하다.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양식토기가 분포하고, 그 이동지역은 신라양식토기가 분포한다. 이와 같이 가야와 신라토기는 영남지방을 가야권과 신라권으로 구분해주는 기준이 된다. 또한 가야권 내에서도 여러 세력권을 구분하는 주요기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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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부침에 따라 변화한 가야토기
    가야양식토기는 가야 각국의 중심지역에 따라 그릇의 모양과 무늬 등의 세부적인 면에서뚜렷한 차이가 인정되며 몇 개의 소지역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경계는 대체로 가야각국의 지배 범위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금관가야가 있던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역, 아라가야의 옛 지역인 함안지역, 대가야의 옛터인 고령과 그 주변지역, 소가야로 비정되는 고성, 사천, 진주지역 등으로 나누어 진다. 이처럼 가야의 각국이 존재하던 지역마다 독특한 토기문화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가야토기는 독자적인 원형을 잃어보리고 신라토기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통일양식토기문화로 변화되어 낮은 굽다리접시, 꺾인목항아리 등과 같은 형태로 변한다.

    가야시대 '말모양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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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馬形象土器",伽耶時代

     

     


    뿔잔 , 角杯
    소나 물소와 같은 짐승의 뿔을 이용해 만든 잔. 혹은 흙이나 금속을 이용해 만든 쇠뿔처럼 생긴 그릇.`각배(角杯)`라고도 한다.

    뿔잔은 문자 그대로 소나 코뿔소 등 짐승의 뿔을 잘라 술과 같은 음료를 마시던 습관에서 유래된 용기로 처음에는 실제로 뿔을 이용하였겠지만 점차 상아나 금속, 옥으로도 만들어졌다.
    각배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2000년경, 이란의 아케메네스조에서부터 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릇의 모양은 짐승뿔을 충실히 모방한 것과 하반부에 짐승의 머리모양을 표현한 것, 받침을 붙인 것 등으로 다양하다.
    뿔잔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천마총에서 칠기제 또는 금동제의 각배형 용기와 함께 20개의 쇠뿔이 실물로 출토되어 우리의 뿔잔이 북방 유목계 민족들이 사용하였던 원래의 뿔잔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토기 또는 청동, 금동, 칠기제의 불잔은 출토지가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 않으나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김해, 부산, 창녕, 달성 등지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물의 뿔을 잘라 잔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힘이 뛰어난 자이므로 각배나 각형배의 사용자는 지배층 인사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일상생활용품으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매장의식 등 특수한 의례에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뿔잔(角杯)은 주로 삼국시대 신라.가야 영역의 4-5세기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회청색경질토기의 한 기종으로, 이외에 고려시대 청자각배(靑磁角杯)나 조선시대 백자각배(白磁角杯)도 있으며, 어느 특정한 시대에 한정된 유물은 아니다.

    이것은 가야의 토기로 김해에서 출토. 겉면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이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원뿔을 뒤집어놓은 모양이다. 뿔잔의 4/1되는 지점부터 끝부분이 약간 휜 모양을 하고 잇다. 원래는 따로 만들어져 있는 그릇받침이나 다리 위에 놓여져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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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삼국시대 토기(도자기) 역사

    1. 신석기 시대

    토기를 빚는 방법은 손빚음법(수타법;手捺法),테쌓기법(윤적법;輪積法, ringmethod),서리기법(권상법;法, coiling method)이 이용되고 있으며, 물레는 사용되지 않았다. 소형의 토기는 손빚음법을 쓰고 있으나 그릇 벽면의 테자국 관찰과 X-ray 사진분석 결과 대부분의 선사토기는 테쌓기법과 서리기법으로 빚었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이다.
    빗살무늬토기라는 용어는 일본의 고고학자 후지다가 Kammkeramik(comb pottery)라는 독일어를 즐목무늬토기라고 직역한데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토기가운데 빗살무늬토기가 제작되기 이전에 무늬가 없는 무문토기, 즉 민무늬토기가 있는데 빗살무늬토기보다 하층에 있다. 형태는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어 V자 혹은 U자와 같고 아가리는 직립해 있다. 제작방법은 그릇을 엎어 놓은 상태에서 아가리부터 만들어 위로 올라가므로 그릇을 거꾸로 제작된다.

    무늬는 큰 생선의 등뼈 같은 도구를 가지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르듯이 토기 표면을 긁어 빗살무늬를 나타냈 는데 지역에 따라서 특징이 다르다.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의 식량 채집 단계와는 달리 식량 생산 단계에 돌입하였다는 사실이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고,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 토기의 존재이며 토기의 제작은 불을 발견하여 사용하게 된 사실과 표리를 이룬다. 생활용기로서의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는 단순한 용기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빗살무늬의 세련된 양상은 그들의 미적 표현의 대상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종 류

    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즐문토기]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 신석기 시대. 토기의 겉면에 빗같은 무늬새기개[施 文具]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그린 토기. 대체로 나무,뼈 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면에 짤막한 줄을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 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선,점선로 된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뼈처럼 생긴 것이다. 그릇 모양은 밑창이 달걀처럼 생긴 것과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鉢]처럼 생긴 것 이 대표적인데, 그릇 종류에는 독모양이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 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바탕흙에는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그릇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 로 섭씨 600~700 °C 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 시대의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隆起文土器)

    토기의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맞집어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부산 동삼동, 통영 상노대도, 연대도 조개더미 등에서 빗살무늬토기층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에서 주로 출토되지만 북으로는 양양 오산리, 서북으로는 신안 흑산도, 내륙지방으로는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조사가 진행되면 분포범위가 더 넓어질 가능성도 있다.
    ※덧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는 달리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점차 북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처음에 어디에서 이러한 토기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이나 해안을 통한 전파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2. 청동기 시대

    청동은 구리, 주석, 납이 주로 들어가며 이와같은 청동제품을 사용하던 시대를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청동기를 사용한 곳은 B.C 3700년경의 이집트이지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상한년을 약 B.C 1000경으로 본다.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 하는 것과 같이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도 한다.

    민무늬토기라 함은 그릇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모든 토기를 가리킨다.민무늬토기는 대체로 갈색 혹은 황갈색을 띠고 장석, 석영립등 굵은 모래가 섞인 태토를 사용하였으며 민무늬의 평저(평평한) 기형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는 상당히 발달된 사회구조를 형성하여, 고조선 부여같은 부족연맹체를 이루었던 시대로서 고도의 정치적 사회가 운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밭농사를 주로 한 정착된 농경사회였으므로 안정된 생활은 토기 제작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릇의 형태면에서도 전에 볼 수 없었던 실용적인 항아리, 속이 깊은 사발 등과 같은 모양을 기본으로 하여 대전, 굽다리잔 등 일상 용기의 일면을 보여주며 양측면에 손잡이가 달려 물, 술과 같은 음식을 나르는데 편리하도록 된 기형도 있다. 때로는 칠무늬토기와 같이 장식적인 무늬가 시문된다. 이것은 그릇에 채색을 넣음으로써 특수한 용도로서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일면을 공예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민무늬토기 종류

    구멍무늬토기(공열토기 孔列土器) : 아가리 바로 아래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1줄 내지 2줄 로 돌아가며 배치된 토기.

    골아가리토기(구순각목토기 口脣刻目土器) : 아가리에 눈금을 새긴 토기.

    붉은간토기(적색마연토기 赤色磨硏土器) : 겉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彩文土器) : 어깨부분에 검은색의 가지무늬가 베풀어진 토기.

    검은간토기(흑색마연토기 黑色磨硏土器) : 겉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 : 화분 모양의 토기.

    송국리식토기 : 기원전 5~4세기의 토기로 충남 부여군 송국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기 문화는 우리나라 민무늬토기시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이 시기부터 벼농사가 이전의 밭농사에서 논농사로 전환되었으며, 논농사는 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인구 증가, 급속한 사회분화의 촉진 등을 유발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철기 시대

    철기시대는 크게 두시기로 구분된다. B.C 300년경으로부터 서력기원 전후까지 '초기철기시대' 서력기원 전후로부터 A.D 300년경까지의 '원삼국시대'이다. 원삼국시대는 청동기의 제작은 사라지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는 시기이다.

    초기철기시대는 청동기 후기와 겹치는 시기이므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형식이 그대로 계속 되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의 전통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 한(漢)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이 받아들여져 보다 단단하고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학계에서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고 부른다.

    원삼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연질 또는 경질의 타날무늬(두둘긴 무늬)회색토기와 적갈색 타날무늬토기이다. 제작환경은 개방된 노천가마가 아니라 밀폐된 실요, 즉 지하굴식 혹은 터널식 오름가마이다. 이와 같은 제작 환경은 산소의 공급이 차단된 환원염(還元焰) 상태이고 밀폐된 공간이므로 소성온도를 전보다 올릴 수 있어 어떤 것은 쇠붙이 소리가 날 정도의 상태를 보이는 것이 있으니 토기의 일대 혁명이라 볼수있다.

    ※한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은...
    민무늬토기가 한데가마(노천요 露天窯)에서 굽는 것인데 비해 한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은 굴가마(등요 登窯)에서 굽는다.그리고 토기를 만들 때 돌림판(도차 陶車) 위에 흙을 올려 놓고 두르림판(박자 拍子)을 사용하여 두드림무늬를 내므로 보다 단단하고 치밀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4. 삼국시대

    1)고구려

    고구려는 지리상 북방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독특한 창조력과 강인한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 배부른 단지, 갚은 바리모양이 대표적인데 대부분 납작밑이다. 서기 3세기 이전, 초기단계에는 모래섞인 바탕흙으로 빚은 어두운 갈색 또는 검은색 토기 등이 있고, 그릇형태로는 단지, 항아리. 잔이 있다.

    중기인 4-5세기 경에는 고운 점토질로 제작되며 회색, 황갈색에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있으며 병, 독, 뚜껑있는 대접, 손잡이 달린 잔, 솥, 화덕 등의 실용품이 있다. 또 한 6세기 이후에는 더욱 다양해져 벼루, 베게, 등이 출토 되었는데, 도자기처럼 유약이 발려 지기도 하였다.고구려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 개 달린 항아리(사이호 四耳壺), 배부른 단지, 깊은바리, 시루가 대표적인데 거의 납작밑(평저 平底)이다.

    고구려 토기는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물레를 써서 만들고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회색,황갈색,검은색을 띠며 토기의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베풀어지거나 마연한 암문(暗文)이 나타나기도 한다.

    세발항아리

    맞귀단지

    항아리

    고구려 토기의 특징

    첫째, 토기에는 연질 종류와 흑색 계통의 경질토기가 있다. 항아리 종류가 많으며 어깨에는 네 귀가 달리고 간단한 몇 줄의 횡선이나 점렬이 시문된다.

    둘째, 중국의 영향은 받은 연유가 시유된 황갈유 도기가 있다.

    세째, 기형은 다양하며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여 항아리가 많고 아가리는 넓고 밖으로 벌어지며 밑은 편평하다.

    네째, 무늬는 돗자리무늬나 타날무늬 계통은 거의 없고 항아리 어깨부분에 무늬대를 만들고 간단한 물결무늬 톱니무늬, 노끈무늬 등이 음각되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계가 깊은 압록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초기 무덤인 적석총이산재해 있으며, 이들 적석총에서는 흑색 계통의 연질토기도 발견되었다.

    고구려토기의 변천

    고구려의 건국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압록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초기 무덤인 적석총이 산재해 있으며 이들 적석총에서는 흑색 계통의 연질토기들이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는 바닥이 편평하고 배가 둥글며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항아리와 양측에 물동이모양 손잡이가 아가리가 넓은 그릇과 접시들이 출토된다. 이들은 대체로 4세기 이전의 토기이며, 이 시기의 것으로는 중강군 토성리, 시중군 노남리 남파동 주거지 유적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다.

    평양 대성산 유적에서는 밑이 편평하고 아가리가 넓게 밖으로 벌어진 둥근항아리 짧은목에 뚜껑이 있는 둥근항아리의 안팎 한쌍과 도제 벼루가 출토된 예가 있다.

    평양시 만달산 제 14호 석실 무덤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회백색의 둥근 몸에 밖으로 휜 아가리와 편평한 밑을 가지고 있고 어깨에는 깊은 횡선을 하나 긋고 그 상.하에 각각 점렬무늬와 네 줄의 파상선 무늬를 시문한 고구려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연질계 토기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송산리 고정호에서 출토된 맞귀단지는 흑색 계통의 경질토기로서 아가리가 벌어진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어께 부분에는 얕은 선무늬가 보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흑색토기이다.

    고구려토기에는 황갈유 도기가 또한 특징을 이룬다. 이것은 중국 육조 칠무늬토기의 영향으로 간주되며 대동군 토포리 출토 황유네귀항아리, 일본 교토대학교 소장의 황유네귀항아리. 화유반 등이 알려져 있다.

    집모양토기 (家形土器)

    황유토기

    도제벼루

    2)백제

    백제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나 원삼국시대의 회색토기(와질토기) 등을 만드는 전통적인 제작방법의 바탕 위세 낙랑(樂浪)과 고구려의 토기제작 기술의 영향으로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이룩하여 고구려, 신라와는 구별되는 토기공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제토기는 중국의 한나라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 전후 원삼국시대부터 경질토기의 제작이 이루어졌고, 금강이남 지역은 가야와 신라의 영향을 받아 가야.신라식 토기가 만들어진다.

    백제토기는 색상 및 경도에 따라 적갈색연질토기, 회색토기, 회청색 경질토기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적갈색 연질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에서부터 발전 변화해 온 것으로 바탕흙이 거칠고 질이 좋지 않으며 화분모양의 그룻이 비교적 많으며 대체로 두드림 수법에 의한 삿무늬가 많이 남아있다. 회색토기는 백제토기부터 말기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경도는 다소 약하고 흡수성이 강하다. 회청색 경질토기는 위 토기보다는 약간 늦게 나타나지만 1000oc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진 토기로써, 금강이남지역세서는 형태적으로 가야토기와 비슷한 기종도 있다.

    백제토기의 그릇 종류를 살펴보면, 연질 적갈색토기, 경질 회청색토기, 황갈유도기 등으로 구분되며 약 20여종의 다양한 기종이 있다. 또 신라와 비교하였을 때 소성기술이 다양하여 고화도, 저화도로 소성하였고 시유토기도 간혹 나온다. 6세기 이전에는 중국의 남조풍이, 7세기에 들어서면서는 당풍의 영향을 받아 기형이 변하고 있으며,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물레성형 기술이 매우 익숙하다.

    초기에는 밑이 둥근 단지와 항아리가 많지만, 생활용기인 바리,대접,잔,접시,합,시루,병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또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세발토기 방울잔 그릇받침 등의 의례용(儀禮用)토기도 있으며, 벼루 등잔 변기 등 특수용기도 있어 그릇 종류가 매우 다양함을 보여 준다.

    중기 이후부터는 납작바닥 그릇이 많이 쓰였으며, 사비백제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이 유행하게 되면서 크고 작은 뼈단지도 많이 만들어 졌다.

    백제토기의 특색을 삼국시대의 다른 나라 토기와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진 점은 삿무늬[繩席文]의 보편적인 사용, 세발토기[三足土器], 납작바닥토기, 특이한 형태의 그릇받침(器臺)등을 들 수 있다.

    이형토기 - 단지 항아리 병 등 일반적인 용기가 아닌 어떤 형태를 본따 만든 토기를 말한다. 이형토기에는 사람이나 동물을 표현한 형상토기와 일반용기를 모양을 약간 다르게 만든 이형용기(異形用器)로 나눌 수 있는데, 이형용기에는 접시병 단지 등을 변형시킨 것이 많다. 그리고 발견된 예가 드물기는 하지만 부소산성,
    부여 군수리절터, 서산 남정리 등에서 호자와 닭모양토기도 발견되고 있다.

    세발토기 - 보통 접시에 세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토기를 가리킨다. 중국 육조(六朝)문화의 영향으로 발생된 것으로 여겨지며, 다리의 모양도 중국 청동기의 동물다리모양장식에서 점차 바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토기는 주로 백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백제토기의 독특한 기형으로 분류된다.

    도기 제조술

    백제의 도기 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 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綠釉)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 국가를 압도했다.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窯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 부여 정암리(7세 기), 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 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 등에 남아있다. 이들 가마터는 모두 80년대와 90 년대에 접어들어 발견되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사비시대 가마들은 거의가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 축조한 반지하식 등요(登窯)로 이루어졌다. 이는 고화도(高火度)를 효 율적으로 유지, 보다 견고한 도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청양 본의리 등요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사기가마처럼 계단식 등요로 밝혀졌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 거의가 평요(平窯)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익산 신용리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천정 평면은 독사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일본의 스에무라(陶邑) 가마군으로 연결되었다. 영암 구림리에서 발굴된 가마 역시 반지하식이고 평면은 독사머리를 했다. 다만 영암 구림리 가마는 고화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불구멍을 낸 것으로 조사되어 기능상 한단계 더 발전한 가마로 여겨진다.사비시대 이전의 가마터도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남 승주 대곡리(3-4세기), 충북 진천 산수리(4세기)등이 이 시대의 가마다. 이러한 최근의 발굴자료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 도기가마의 변천 및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 토기의 종류

    승석문항아리 (土製繩蓆文壺)
    높이 : 34.0 cm /입지름 : 18.4 cm /너비 : 35.5 cm

    영암(靈巖) 신연리(新燕里) 9호분 5호 토광(土壙)에서 출토되었다. 몸통이 공처럼 둥그나 바닥은 약간 편평하다. 어깨 위에 목이 약간 바라(外反)져 올라가다 아가리 끝에서 살짝 바라졌다. 전체적으로 연한 회청색(灰靑色)을 띠며 바탕흙(胎土)은 굵은 모래알갱이가 많이 섞인 진흙을 사용하였다. 어깨부분에서부터 삿무늬(繩文)가 거칠게 베풀(施文)어졌는데 둥근 두들개(打板) 흔적이 나타나 있다. 안면에 받침모루(內拍子) 흔적, 안팎면에 회전 물손질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치미
    높이 : 90.9 cm

    암기와편(片)으로 세로로 긴 장방형의 구획을 나란히 2개 만들고 '공도작(工徒作)'이란 명문을 종으로 양각하였다. 상단부가 파손되어 앞에 부가된 내용이 있었는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구획된면 주변은 어골문(魚骨文)을 성글게 양각하고 있다. 내면(內面)에는 격자상의 포목흔과 함께 와통에서 분리시 포목을 잡아당기면서 형성된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태토는 사립을 정선한 점토질로 회백색을 띄는 연질소성이다.

    도용 (陶俑)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도용(陶俑)의 수부(首部) 7점이다. 출토 도용은 모두 수부(首部)와 신체(身體)가 분리된 채 발견되었는데 총 63점중 수부는 13점이다. 쌍계로 묶은 형태 및 용관의 인물, 곱슬머리의 호인형(胡人形) 인물등 도용(陶俑)은 대체로 이국적인 관모 및 관식(冠飾)을 보여주는데 이목구비가 얼굴 중앙에 몰린 풍만한 안면(顔面)에 둥근 눈, 유난히 강조한 오똑한 코와 작은 입술을 지니고 있다. 파손된 목의 절단면에는 목심(木心)을 꽂아 몸체와 연결시키기 위한 소공(小孔)이 뚫려있는데 이러한 제작방식 및 이국적인 용모는 중앙아시아 및 중국 북수귀(北垂鬼) 도용 양식과 연관되어 백제의 국제적인 문화 교류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변기 (便器)
    높이 : 16.3 cm /길이 : 36.0 cm /너비 : 26.2 cm

    변기(便器)로서 완형이다. 경질(硬質)으로 연한 회청색을 띤다. 소성이 양호하며 태토는 정선되었다. 저부(底部)는 원형인데, 구연쪽으로 올라갈수록 한 쪽이 넓어져 구연은 타원형을 이룬다. 구연 가까이에는 1조(條)의 침선문이 돌려져 있으며, 양쪽에는 대상파수(帶狀把手)가 1조(條)식 붙어있다. 기면 곳곳에 기포가 부푼 흔적이 있다. 형태로 미루어 보다 여성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옹관 (甕棺)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상염부락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부여지방에서 발견된 독무덤은 주검을 매장하기 위하여 독널을 특별히 제작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항아리를 그대로 쓴다하여 일종의 호관묘(壺棺墓)라고도 불리운다. 이 옹관은 뚜껑부, 항아리로 구분된다. 파손·복원된 상태이고, 항아리는 밑이 둥글며 짧은 목과 구연은 외반된 상태이다. 어깨부에서 최대로 벌어져 서서히 좁아지는 상태이며, 기면에는 소성이 열에 의해 발생되는 기포(氣泡)가 있다. 기면(器面)의 전면(全面)에는 방향없이 조잡하게 타날된 선문이 나타나있다. 항아리 바닥부분의 중앙부에는 관통된 구멍이 있는데 이는 독널로 사용할때 배수를 목적으로 뚫은 것으로 보인다. 색조는 회청색 경질토기이며, 뚜껑부는 자배기와 흡사하고 둥근 바닥에 몸통은 약간 넓어지며 올라가다 한단 좁혀 매우 짧은 목을 만들었다. 구연은 두툼하게 접어 돌리고, 몸통 전면에 선문이 교차된 상태이다. 색조는 회갈색 연질(와질)토기이며, 항아리, 뚜껑등은 모두 고운 점토로 제작된 대형급 옹관이다.

    3)신라

    신라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국가로 그 모체는 진한 12개 소국의 하나였던 사로(斯盧)이다. 사로가 중심이 되어 그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여 내물마립간 때에는 큰 연맹왕국으로 성장하며 내물마립간 이후 신라는 김씨의 전제왕권이 수립된다.

    낙동강 하류에는 변한 12개국을 이루고 있던 독립된 가야연맹체가 있었다. 가야연맹체는 현재의 김해에 수로(首露)를 시조로 한 미오사마국이 지금의 고령 지방을 중심으로 대가야로 발전하여 신흥 신라와 대치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후원을 받아 법흥왕 19년과 진흥왕 23년에 본가야와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명실공히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신라의 국호를 정식으로 개칭한 지증왕과 법흥왕 이후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 율령을 반포, 불교의 공인 등으로 통치체제를 갖추게 되며 대내외적인 안정도 얻게 된다. 이를 배경으로 진흥왕은 계속적인 정복 사업을 벌여 경기도, 함경도 일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한다.

    이와 같이 안정된 귀족문화는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고도의 문화를 창출하였다. 특히 전제왕권의 표상인 5-6세기의 대형 적석목곽식고분의 구조적인 특징으로 해서 이로부터 출토되는 막대한 양의 부장토기는 당시 신라문화의 일면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신라토기 특징
    신라토기는 신라 영역내에서 출토되는 회청색의 경질토기와 적갈색의 연질토기를 가리킨다. 토기의 형태로는 목이 길거나 짧은 항아리와 굽다리접시가 기본형태이며, 이밖에 손잡이 달 린 잔, 뚜껑접시, 그릇받침등의 생활용기와 동물, 배, 수레, 등잔모양의 특수한 목적의 이형 토기등이 있다. 무늬는 물결무늬, 점줄무늬에서 차츰 줄무늬, 고리점무늬,세모무늬,톱날무늬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로 바뀐다. 그러나 7세기부터는 갖가지 무늬가 새겨진 도장을 이용한 도장무늬가 유행 되는데 후기가 되면 전반적으로 굽다리가 낮아지고 모양도 단순해져 통일신라토기로의 이행 이 일어난다.

    초기의 신라토기는 가야토기와 동일한 형태로 제작되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지만 5세기가 되면 토기의 색깔이 회색을 띠며 그릇이 얇아지는 등 신라토기로서의 특징이 뚜렷해진다. 목항아리는 가야토기가 곡선미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목과 어깨의 이음새가 각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고, 굽다리접시는 대체로 굽이 날씬하다. 그리고 가야토기와 구별되는 보다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가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굽에 나 있는 구멍으로 가야토기는 아래위 일렬로 배치되는 경향이 많은데 비해, 신라토기는 네모난 구멍을 서로 엇갈리게 뚫은 것이 많다.

    또한 가야토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토우장식토기와 상형토기가 신라토기에도 많으나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뚜껑에 동물이나 인물을 조그맣게 만들어 붙이는 것이 신라토기만의 특징이다.

    신라 토기의 종류

    녹유사천왕상 벽돌(塼)
    50cm × 70cm

    문무왕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됨. 반조각만 발견되었으나, 전면(塼面)에 사천왕상을 조각하고, 그 위에 황록 유약을 발라 구웠다.

    서수형토기 (瑞獸形土器)
    높이 : 14.0 cm /길이 : 13.5 cm /지름 : 3.6 cm /바닥지름 : 5.5 cm

    이 유물은 경주시내 황남동(皇南洞) 고분군(古墳群) 내의 미추왕릉지구(味鄒王陵地區) C지구 3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서수(瑞獸)'는 상서러운 동물이라는 뜻이며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둥근 그릇 받침 위에 거북의 모체(母體), 용의 머리와 꼬리 등이 복합된 상상의 동물이다. 몸체는 속이 빈 용기로 등에는 주입구(注入口)가 있고 가슴부분에는 위로 치솟은 긴 대롱형의 출수구(出水口)가 있다. 몸체에는 영락(瓔珞)이 달려 있고 머리에서 꼬리까지 날카로운 이[齒]가 솟아 있다. 매우 특수한 형태의 이형토기(異形土器)로 주입구, 몸체, 출수구가 관통되어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용기의 역할도 가지고 있으나, 무덤 부장용의 명기(明器)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대각(臺脚)의 형태로 보아 5~6세기에 만들어진 토기로 여겨진다.

    수레모양 토기 (車形土器 )
    높이 : 13.0 cm /전체길이 : 12.8 cm /너비 : 7.5 cm

    이 유물은 경주(慶州) 시내의 계림로고분군(鷄林路古墳群)의 25호 독무덤[甕棺] 안에서 소형토기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살이 촘촘한 2개의 바퀴사이에 적재함(積載函)이 있다. 적재함은 띠를 대고 못을 박아 튼튼하게 하였고 적재함 가운데에는 소나 말이 끌 수 있는 긴 이음대가 나와 있다. 당시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수레을 축소한 것으로 작은 토기들과 함께 무덤의 주인인 어린 아이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경주를 포함한 영남지방의 독무덤은 두 개의 독으로 입구를 맞닿게 한 형태가 많으며 그 크기가 작아 주로 유아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얼굴무늬수막새 (人面文圓瓦當)
    현재지름 : 11.5 cm /지름 : 14.0 c

    신라시대 수막새 기와의 무늬는 연화무늬[蓮華文]이 대부분이며, 보상화(寶相華), 당초(唐草), 천인(天人)과 문자(文字)가 있는 것도 있어 실로 다양하다. 여기에 소개코자 하는 영묘사터[靈廟寺址] 출토 얼굴무늬 수막새는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무늬들과 달리 사람의 얼굴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사람의 얼굴을 막새기와에 쓴 것으로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수막새 1점과 황룡사지 출토의 대형(大形) 망새가 있다. 그러나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것은 수막새에 사람의 얼굴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제작된 지역이 다르며 작품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황룡사지 출토 치미에 새겨진 얼굴무늬는 비록 수막새에 된 것은 아니지만 출토 지역이 같고 제작수법과 제작 연대가 비슷한 것 등으로 볼 때 상통되는 점이 많다. 이 기와는 지름 14.0cm로 보통 크기이며, 비교적 두터운 주연대(周緣帶) 안쪽의 둥근 공감에다 눈,코,입, 양볼 만을 만들고, 귀,머리는 생략하는 등 얼굴의 특징을 강조하였다.

    콧대는 오똑하며 그 좌우에는 행실형(杏實形)의 눈을 만들었는데 삼국말 석조불상의 눈과 흡사하다. 입은 얼굴 왼쪽 턱이 결실되어 확실한 모양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오른쪽 볼이 왼쪽 볼보다 튀어나온 점과 그 아래쪽 입 모양으로 보아 수줍음이 흡뿍 담긴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의 표면을 깨끗하게 고르지 않았으면서도 천진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기와로 사용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 뒤쪽에 수키와를 접합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 연대는 얼굴의 전체적인 형태나 분위기가 남산 장창곡(長倉谷) 출토 삼존석불의 협시보살상과 유사한 점과 주연부에 연주문이 없이 돌출되어 있는 점, 황룡사지 출토 치미의 얼굴무늬와 관계 등을 볼 때 삼국말 무렵[7세기]이라 생각된다. 이 기와가 발견된 것은 일정 때의 일이며, 발견장소로 알려진 흥륜사지는 이후의 연구성과에서 신라시대의 흥륜사가 있던 곳이 아닌 영묘사지로 밝혀졌다. 발견 직후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이 기와는
    광복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에 당시 경주박물관의 박일훈(朴日薰) 관장이 여러 곳에 소재를 수소문하던 중, 일본 후쿠오까현[福岡縣] 북구주시(北九州市)에 살고 있는 田中敏信씨가 소장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박관장은 전중씨에게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얼굴무늬 수막새라는 점을 감안하여 경주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편지로 문의하였고 얼마 후인 1972년 10월 14일 다나까 씨가 방한하여 우리 관에 기증함으로써 경주1564번으로 국고귀속되었다.

    4)가야

    아라가야 아라가야(阿羅加耶)는 삼국지에 전하는 변한 안야국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 발전한 가야이다. 아나가야, 안라국, 아시라국으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었던 세력이다. 바다와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함안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이다. 아라가야는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었으며,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 힘을 갖추고 있었던 큰 세력이었다.

    아라가야의 유적과 유물들은 함안지역을 비롯해서 인근의 마산, 의령, 진주 일대에서도 다수 확인되고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에서 나타난다. 아라가야의 고분문화는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눌 수 있고, 중기의 무덤양식과 유물의 특징에 따라 다시 2단계로 세분이 가능하다. 전기는 서기 3세기경에서 4세기 말에 해당되는데, 길이 4m이내의 소형 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룬 시기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황사리 고분군, 윤외리 고분군, 회산리 신산고분군, 말이산 고분군 북쪽 능선부의 발굴유구 등이 있다.

    중기는 아라가야의 전성기로서 서기 5세기대의 약 100년 동안이며, 무덤양식과 출토유물의 형식차이에 따라 대형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의 유행단계로 나누어진다. 말이산 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며, 5세기 초에서 중엽에 걸친 시기에는 길이 4m이상의 대형덧널무덤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덧널의 규모가 커지면서 불꽃무늬굽다리접시가 출현하며, 다량의 토기와 말갑옷, 고리자루큰칼, 미늘쇠 등의 풍부한 철기가 부장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지역 통치자의 형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즉 말이산 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세력집단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다. 5세기 후반에는 구덩식돌덧널무덤이 크게 유행하며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하여 가야리, 신음리 등지의 대형고분군이 조영된다. 돌덧널은 길이가 10m에 이르는 대형이 만들어지고 봉토의 규모도 지름 20m, 높이 6m이상으로 커진다. 순장(殉葬)도 이루어지는데 여섯 사람이나 되는 순장자가 있는 무덤도 있다.


    함인 말이산 고분군

    아마도 이 무렵이 아라가야의 최전성기로 여겨지며 그 영역은 현재의 함안군 일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남강 연안의 의령, 진주지역까지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후기는 6세기 전반대로서 이전 단계까지 산발적으로 축조되어 왔던 덧널무덤이 자취를 감추고 앞 단계에 유행한 대형구덩식돌덧널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무덤양식인 옆트기식돌방무덤의 축조가 성행한다. 토기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나 불꽃무늬굽다리접시가 완전히 사라지고 뚜껑접시, 한 줄의 네모진 굽구멍이 뚫린 손잡이굽다리접시와 고령지방 양식의 토기가 유입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시기는 고령의 대가야와 함께 후기 가야연맹의 핵심적인 존재로서 남부 가야지역에서 맹위를 자랑하던 아라가야는 말이산고분군의 지속적인 축조로 보아 독자적인 정치체를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라가야는 6세기 이후 가야세력에 대한 신라의 계속적인 압박에 대항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가야세력의 결속을 꾀하고 밖으로는 백제, 왜와도 손잡아 부흥에 앞장서게 된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강력한 정복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사라지고 만다.

    [수레바퀴모양 토기]

    금관가야

    금관가야(金官加耶)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시조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나라를 세운 후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10대 490년간 존속하였다고 한다. 다른 역사책에서는 가야, 남가야, 금관국, 가락국, 남가라 등으로도 나타난다. 금관가야는 김해지역에 있던 변한의 구야국이 성장, 발전하여 서기 300년 무렵 성립된 나라로, 철(鐵)을 매개로 한 대외교역권을 장악하면서 전기가야를 주도하게 된다. 금관가야의 영역은 손잡이가 달린 화로형토기와 아가리가 꺾인 굽다리접시의 분포를 통해 볼 때, 김해를 비롯하여 동쪽으로 부산지역, 서쪽으로는 창원 동읍, 진영일대로 추정된다.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통치자들의 묘역인 대성동 고분군과 왕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봉황대 유적이 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길이가 8m 이상인 대형의 덧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이 무덤들에서는 주인공과 함께 순장자(殉葬者)와 대형덩이쇠, 갑옷과 투구, 무기, 각종 말갖춤새 등 다양한 철기와 화로형토기, 굽다리 접시, 굽다리손잡이단지, 항아리, 그릇받침 등의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로 볼 때,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가야의 통치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동솥, 청동거울, 청동거울편으로 만든 목걸이, 창끝꾸미개, 방패꾸미개, 화살촉모양 석제품, 방추차모양 석제품, 벽옥제옥장(壁玉製玉杖), 호랑이모양 고리띠 등의 외래계 유물도 출토되어, 금관가야의 통치자들이 대외교역권을 장악하여 중국, 왜(倭)는 물론 북방지역까지도 교역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김해 예안리, 칠산, 양동, 퇴래리, 창원 다호리 등지에서는 중소형 고분군이 많이 분포한다. 400년경 고구려의 남정(南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금관가야는 더 이상 여러 가야의 중심역할을 못한 채, 명맥을 유지하다가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하므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대가야

    대가야(大加耶)는 삼국사기 지리 고령군조(地理 高靈郡條)에 기록되기를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무릇 16대, 520년에 이르렀다"라고 한다. 삼한 때까지 반로국(半路國)으로 불린 고령 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기반 위에 있었다. 고령 반운리유적의 와질토기가 영남지방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점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4세기대에 접어들면서, 고령의 세력은 야로면 일대의 철광을 개발하고 힘을 키워 가야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가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세력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주산성과 지산동 고분군



    지산동의 여라가지 토기

    이 틈에 낙동강 중류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고령세력이 가야의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이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 때부터의 역사를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전기가야(前期加耶)와 구별하여 후기가야(後期加耶)라고 한다. 대가야는 이웃의 합천지역을 통합한 이후, 전성기에는 남해안의 일부와 아라가야의 영역을 제외한 함양, 남원, 임실, 섬진강유역에까지 영향력을 넓혀 당당히 후기가야의 맹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대가야의 영향 아래 들어간 지역은 문화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어 이를 대가야문화권(大加耶文化圈)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고령 지산동 32호출토 금동관

    합천 저포리 E-4호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하부(下部)"라는 글씨를 통해, 대가야가 통합한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기 479년 대가야의 왕 하지(荷知)가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서기 522년에는 대가야와 신라의 왕족 사이에 결혼도 이루어졌다. "대왕(大王)"이라는 글씨를 새긴 토기라든가 맹주국 왕의 상징인 금관도 이 즈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통해 대가야가 후기가야의 맹주로서 다른 가야들보다 한단계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집권국가(集權國家)로 다가서는 기틀을 다진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와 백제의 전쟁 틈바구니에 낀 대가야는 낙동강유역을 장악한 신라의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기 562년에 멸망하였다.


    고령에는 대가야의 왕성(王城) 및 왕궁터와 통치자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고령의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주산(主山)에는 왕성인 주산성이 있고, 그 아래 편평한 곳에 왕궁터가 남아있다. 왕궁터에서는 전돌과 기와가 출토되어 화려한 궁궐을 짓고 생활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왕성과 왕궁 사이에 길게 뻗어내린 능선에 위치하는 중심고분군으로 대가야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며, 구덩식의 돌덧널과 돌방무덤이 주된 묘제이다. 무덤은 가운데에 주인공이 묻힌 구덩식돌방을 두고, 그 가장자리에 여러 개의 돌덧널을 만들어 순장자를 함께 묻은 다음, 하나의 거대한 봉분을 쌓은 형태이다. 하나의 봉분 속에 무덤 주인공과 순장자를 구분하여 묻은 것은 대가야 장례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가야문화의 동질성은 무덤양식과 다불어 유물에도 잘 나타나있다. 얕은 접시에 작은 네모투창을 뚫은 굽다리접시와 잘록한 목과 뚜껑받이 턱이 있는 목항아리, 몸통에 긴 띠를 장식한 원통형그릇받침 드림장식을 사슬로 엮어 늘어뜨린 귀걸이 등이 대가야문화의 특징을 잘 모여주는 유물이다. 이 가운데 원통형그릇받침은 장례(裝禮)와 나라의 큰 행사 때 제사를 끝내고 깨뜨린 다음, 묻거나 주변에 뿌리기도 한다. 대가야의 영향력 아래 들어온 지역에서도 지역의 지배자들이 하사(下賜)받은 그릇받침을 무덤에 껴묻거나 제사를 지낸 흔적이 보인다.

    소가야

    소가야(小加耶)는 고성(固城)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에 자리한 가야이다. 삼한시기의 고성지역에는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이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고자국(古自國)" 또는 "고사포국(古史浦國)"으로, "일본서기"에는 "구차(久嗟)", "고차(古嵯)"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고자국"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이다.

    고성은 경상남도의 남부해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으로는 마산, 서로는 사천, 북으로는 함안, 남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어 해로와 육로를 이어주는 교역망 확보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고성읍 주위에는 바다와 인접하면서도 비교적 넓은 농경지인 고성평야가 위치한다. 고자국은 이와 같은 고성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해상교역을 통해 소가야로 성장, 발전하였다.

    "삼국사기" 물계자전(勿稽子傳)에는 3세기 무렵 고사포를 비롯한 남해안에 기반을 둔 포상8국(浦上八國)이 힘을 합쳐 아라국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남해안의 해상교역권을 놓고 낙동강하류권역 세력과의 다툼이 있었음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소가야는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6세기 중엽까지도 여전히 유력한 가야 세력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음이 "일본서기"에 보인다.


    연당리 토기

    연당리 토기들 소가야의 근거지인 고성지역에는 이곳을 중심지로 하는 하나의 토기분포권이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의 표지적인 토기 형태로는 납작한 몸체에 긴네모꼴굽구멍을 가진 굽다리뚜껑접시와 아가리 끝이 수평을 이루며 퍼진 목항아리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의 토기는 5세기 중엽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유행하다 6세기 중엽 이후 사라진다.

    이 토기의 분포는 고성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거제, 북쪽으로는 거창과 남원, 동쪽으로는 창원, 서쪽으로는 하동에 걸친 넓은 범위이다. 이 분포법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령지역 토기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5세기 후반경에 넓게 퍼져 있던 고령지역 토기의 분포범위는 6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고령지역 토기의 확산으로 상당히 축소되게 된다. 이 밖에 고성지역에서는 함안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보이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토기의 분포와 시기에 따른 변화는 소가야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성 연당리 고분군

    다른 가야의 중심지에 비해 고성지역은 조사가 활발하지 못해 소가야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특히 여러 가야지역에서 보이는 뚜렷한 지배계층의 고분군이 아직 조사되지 않아 소가야문화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출처: http://chinkim.cafe24.com/dojagi/index.htm

    신리 가형(집모양)토기의 발견과정

    매장문화재를 발굴한 사람들

    경주 사라리출토 집모양토기

    매장문화재의 발견을 큰 횡재로 여기고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많은 돈을 받고 팔아먹으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1963년 6월 22일 경북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높이 44cm에 둘레가 46X50cm나 되는 최초의 대형 가형토기를 우연히 발견한 황모 노인의 경우가 그러한 예의 하나였다.

    황노인은 장마비가 쑤셔놓은 저수지 북쪽의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눈앞에 시커멓고 이상한 물건 하나가 모래 위로 솟아나와 있었다.다가가서 조심스럽게 파내어 보니 완전한 형태의 큼직한 기와집 토기였다. 노인은 크게 값나갈 옛날 물건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꿈을 잘 꾼 횡재라 생각하면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경주의 골동상을 찾아갔다. 경주에서는 윤아무개(그 후 수차 문화재 도굴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구속되었고, 한때는 복역까지 한 골동상)가 4만 원을 집어주고 물건을 잡았다. 물론 불법적인 거래였다. 법적으로 그것은 장물이었다.

    귀중한 대형 가형토기의 출토 사실과 그것이 불법적으로 거래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당시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이 장물을 산 윤아무개를 찾아가 문화재 보호법의 매장문화재 규정에 입각한 국가 귀속을 주장했으나 그는 그 자리에서 15만 원을 요구했다. 마땅히 국가에 귀속돼야 할 물건을 움켜쥐고 흥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법을 냉소하고 있었다. 경찰에 고발할 수 있었지만 경주박물관은 좋게 물건을 입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일단 문제의 가형토기를 인수하여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갖고 왔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그것을 불법적인 장물 취득자로부터 살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 안 사주겠다면 딴 곳에 팔겠다."고 호언하는 윤아무개가 물건을 다시 찾아가자. 박물관 측에서 할 수 없이 경찰에 협조를 의뢰했다. 끝가지 버티려던 윤아무개는 가형토기를 경주에서 다시 서울로 갖고 올라와서 팔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서울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희귀한 물건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수집가들에게 안전하게 팔아주고 구전을 먹는 이를테면 거물급 골동상인들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윤아무개는 그들과 접선하고 있었다. 반면 경주박물관측에선 그의 행동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서울로 뒤쫓아온 한 박물관 직원이 그의 거처를 찾아냈을 때에는 모처에 50만 원을 받고 팔기로 이미 계약이 돼 있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지명수배하고 있는 사실을 알자 그는 기가 죽었다. 그는 체념한 듯이 물건을 내놓았다. 7월 19일의 일이었다. 결국 국가가 매장문화재로 압수한 그때의 대형 가형토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다.

    1963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경남 밀양읍 용평일에 살던 김락화(당시 23세) 들 3명의 청년이 가까운 호성리의 형원사 절터 쪽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부도탑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반쯤 흙에 묻혀 있는 기단부 석재를 호기심으로 들춰보다가 깜짝 놀랐다. 밑에서 석실이 나타나고, 그 안에는 온갖 무늬를 가진 파란 빛깔의 눈부신 옛날 그릇들이 들어있었다. 세어 보니 사기 그릇이 모두 8점, 그리고 유기그릇이 하나였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희한한 옛날 그릇들이었다.

    청년들이 발견한 그릇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상감청자로 '죽조화초문매병'하나, '운봉문'과 '모란학국연화문'의 대접이 둘, 나머지는 팔각접시들이었따. 유기그릇은 뚜껑이 있는 합이었다.

    순간적인 호기심에 발견해낸 이 매장문화재들이 어떤 경로로 신고됐는지는 상세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후 경북대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문화재 관리국이 출토경위를 조사 확인한 후 국가 귀속물로 접수했다. 그리고 정부는 1년후 발견자인 3명의 청년에게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보상규정'에 따라 물건의 가치평가로 책정한 10만원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받은 매우 고무적인 사례의 하나였다.

    국보 119호 고구려 연가칠년명불.

    1963년 7월 경남 의녕군 대의면 하촌리에 사는 강갑순(姜甲順)씨가 발견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칠순 고령의 시어머니와 5남매를 거느리고 막벌이 가장 노릇을 하던 가난한 강갑순 여인(당시 41세)이 18세의 큰아들 전병철 군을 데리고 마을 밖의 도로공사장에 나가 돌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장은 야산 비탈이었다.

    강여인이 아들과 둘이서 묵묵히 돌무더기를 헤치고 있을 때였다. 곡괭이에 널찍한 잡석하나가 덜컥 걸려 젖혀지면서 무심히 그 밑으로 시선을 보내던 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빛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눕혀져 있는 공간은 폭 30cm, 길이 40cm, 그리고 깊이가 30cm가량이었다. 잡석으로 급히, 그러나 정성껏 꾸며진 작은 석실이었다.

    부처님은 배모양의 광배를 뒤로 붙이고 있는 높이 약 16cm의 완전한 '금동여래입상'으로 광배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발견자인 촌부와 소년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옛날 유물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금으로 만든 부처님인가보다고 속으로 마음을 설레고 흥분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수상쩍은 흥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날의 품일이 끝났을 때 강여인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품속에 소중히 품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강여인은 부처님을 집안 깊숙한 곳에 꼭 간직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법에 따라 경찰에 가서 발견경위를 신고하고 물건도 바쳐야 할 것이라고 타일렀다. 가난했으나 그지없이 순박하기만 했던 강여인은 동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의면 지서에 신고된 강여인 발견의 매장문화재 금동불은 곧 경남 도당국에 보내진 후, 즉각 문교부에 보고 되었다. 그리고 수차에 걸친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와 불상의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유일한 고구려불로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뛰어난 조각미와 균형을 가진 이 의외의 고구려불은 특히 광배에 새겨진 '연가 7년' 으로 시작되는 4행 47자의 아주 귀중한 명문을 지닌 최대의 국보급이었다. 관계학계는 해방 후 땅 속에서 출현한 불상으로는 가장 큰 발견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다만 출토지가 그런 불상이 나타날 만한 절터도 아니며, 그럴 수 있는 불교 유적지도 아닌 점이 수수께끼로 남았다.

    불상은 그해 12월 4일, 서울로 올라와 즉시 국보 제 119호로 지정된 후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동안의 법적 공시기간이 지난 1964년 10월 14일, 발견자인 강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특별히 문교부 장관이 수교하는 보상금 20만원을 받았다. 그때 불상이 출토된 땅의 임자였던 전형진(당시 56세)도 20만 원을 보상받았다. 지하 출토유물인 매장문화재의 국가 귀속과 함께 정부가 책정한 40만 원을 법에 따라 발견자와 반씩 나눈 금액이었다. 그것은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된 후 최대 액수의 보상이었다.

    한편 강여인이 즉각 국보로 지정될 만큼 참으로 귀중한 '연가 7년명'의 고구려 불상을 돌더니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키던 무렵, 같은 의령군의 봉수면 서암리에서도 높이 12.5cm의 '금동여래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다. 서암리에 사는 농부 엄필섭(당시 50세)이 강우술 소유의 논바닥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헤치다가 뜻밖에 발견했던 것인데, 발견자는 마땅히 자기 소유물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 불상을 2년 이상 집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자, 경찰이 매장문화재의 불법 점유를 들어 법적으로 압수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2월의 일이었다. 불상은 곧 서울로 보내져 국립박물관에 들어갔다. 국가 귀속이었다. 비록 스스로 신고하지 않았던 압수물건이긴 했으나 정부는 법을 몰랐던 발견자와 출토지 임자에게 12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중요한 매장문화재를 출토시켜 정부로부터 10만 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는 사례가 날로 잦아졌다. 그것은 일반의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반증이었다. 정부 행정망과 매스컴의 계몽도 컸다.

    1964년 4월 12일에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향교리의 논에서 고려시대의 청동범종 하나와 기타 청동향로, 쇠솥,고려청자 등 모두 6점을 출토시킨 윤성복, 박광선 등 4명은 발견 유물을 곧장 당국에 신고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후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같은해 5월 27일엔 대구 시내의 육군 503방첩대 건물의 대장실 마루밑에서 전기 누전방지공사를 하던 전기공 백승원 씨가 8.15때 일본인들이 숨겨두고 갔던 삼국시대의 와당과 토기, 그밖에 고려자기 조선자기 청동자기 등 142점의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여 1년 후에 14만 4천 원의 정부 보상금을 받았다.

    백씨가 발견한 물건들은 지난날 대구의 그 건물에 살았던 악명높은 일본인 수집가 오구라가 8.15을 전후해서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갖고 가고, 미처 가져갈 수 없었던 나머지를 마루밑에 감쪽같이 감춰두었던 것으로 해방 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일본에 살아 있던 오구라(당시 96세)의 반응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예전에 내가 살고 있던 집에서 찾아냈다는 물건들 중 일본 그림을 포함한 59점을 돌려달라"는 수작이었다. 그해 10월에 그런 뻔뻔스러운 요구를 적은 오구라의 편지를 친절하게도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에 전해준 재일 교포가 있었다. 그때 "일본 물건을 돌려받고 싶으면 오구라 자신이 일본에 반출해 간 수천 점의 중요한 한국문화재부터 먼저 돌려 보내야 할 게 아니냐?"고 누가 반문하자 이아무개라는 쓸개 없는 교포는 자기가 답변할 성질이 아니라고 회피하여 빈축을 샀다.

    20년 가까이 교묘하게 은닉돼 있던 오구라 수집품의 일부는 그것들이 발견됨과 동시에 과거의 적산문화재로 국가에 귀속되어 경주박물관에서 모두 인수했다.

    고철수집상이던 윤태진, 윤석진 형제가 휴전선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원당리의 영농지역에서 높이 약 37cm의 고려동종과 1369년에 만들어 졌다는 44자의 귀중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반자'를 철물탐지기로 출토시킨 것은 1966년 1월 17일이었다. 경기도 파주에 주소를 둔 잡상인이었던 윤씨 형제는 비록 생활은 가난했으나 마음씨가 착했다. 그들은 철물탐지기에 걸려 나온 옛날 유물인 동종과 반자를 들고 자진해서 서울의 덕수궁미술관(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됨)을 찾아갔다.

    "보통 고철로 팔아넘기기엔 좀 아까운 귀중한 옛날 물건 같아서 갖고 왔으니 중요한 것이면 나라에 바치겠다."

    윤씨 형제의 선량하고 소박한 말이었다. 미술관엔 마침 이호관 연구관이 있다가 물건을 인수하고 그들에게 국가 보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1년 후, 그들은 35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윤씨 형제가 고려동종과 반자를 출토시킨 지 8개월 후인 9월 6일에는 또 전남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서 돌담을 헤치던 정병임이란 사람이 역시 고려시대의 동종 하나를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한 수 1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5월 9일에는 '연가 7년명' 의 고구려 불상과 또 하나의 '금동여래입상' 을 출토시킨 경남 의령지방의 칠곡면 외조리 뒷산에서 조선 중종 23년(1528)에 꾸며졌던 왕자 숭수아지씨의 태실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왕실의 백자항아리와 태의 주인공을 기록한 태지판이 2장이 나타났다.

    발견자는 마을의 전용중 씨였다. 그는 산을 개간하다가 우연히 태신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 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고스란히 당국에 신고하여 12만원의 보상금을 탔다. 1964년 10월에 서울의 김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박아무개 등의 도굴꾼을 시켜 전국의 조선 왕실태릉을 계획적으로 도굴, 수십 점의 품질 좋은 백자항아리를 불법적으로 꺼내 암매해 먹다가 적발당해 모두 구속되었던 사건을 상기할 때 잊혀졌던 의령태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법적인 수습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삼각형 모양의 관에 작은 부처 하나를 새기고 있는 점과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관음보살이 분명하다

    매장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기록적인 보상은 1967년 1월 28일에 서울 성북구 삼양 1동 108번지의 산비탈에서 백제불로 추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었을 때였다. 발견자는 6년 전에 제기동 집을 화재로 잃은 후 삼양동 골짜기의 국유지에 집을 마련하고 살던 박용출 씨(당시 52세)였다.

    전날 밤 꿈에 집 뒤의 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 식구가 깔려 죽는 일을 당했던 박씨는 아침에 눈을 뜨고도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아 장남과 함께 새삼스럽게 위험이 느껴진 쪽으로 깊게 하수도 공사를 착수했었다. 1m쯤 땅을 파 내려갔을 때였다. 괭이 끝이 금속물에 닿는 예리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출토되자마자 국보 제 127호로 지정되어 120만 원이라는 기록적인 보상금을 책정케 한 삼국시대의 걸작 불상인 높이 20.7cm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던 순간이었다.

    박씨가 꿈 때문에 출토시킨 금빛 찬란한 보살상은 괭이로 맞은 옷자락 부분이 약간 부서졌을 뿐 완전한 상태였다. 떨어졌던 부분도 흙속에서 찾아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박씨는 며칠간 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가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불상전무가인 황수영 교수를 찾아가 평가를 요청했다. 황교수는 그 자리에서, '국보급의 놀라운 불상' 이라고 경탄하고, 속히 법적 절차를 밟아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발견자는 황교수의 말을 따랐다.

    2월 7일, 서울지역에서 출토된 놀라운 삼국시대 불상은 발견자의 자진 신고에 따라 매장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되었고, 이어서 즉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발견자 박씨는 문화재보호법 제 47조(매장문화재) 규정에 의한 1년동안의 유실물 공고기간이 지나자 책정 보상액이었던 120만 원의 절반인 60만 원을 받았다. (나머지 절반은 법적으로 출토지의 땅임자가 받게 돼있다).

    1967년엔 100만원대의 보상금을 받은 매장문화재의 발견 신고자가 잇달아 나왔따. 정초에 서울에서 국보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데 뒤이어 4월 18일에는 고철수집상 이영주 씨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철물탐지기로 동종 하나와 기타 유물을 출토시켜 당국에 신고하고 1년후 1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7월 6일에는 충남 대전시 괴정동 244-4에서 밭을 일구던 손용갑 씨가 땅 속에서 뜻밖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을 발견 신고하여 1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11월 10일엔 또 경북 금릉군 부항면 사등 1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주목할 만한 '금동보살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이때의 발견 신고자인 마을의 이관하 씨와 땅임자에게는 새로운 보상기록인 140만 원이 1년 후에 지급되었다.

    문화재 관리국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1996년 7월 현재가지의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 건수는 모두 4,304건이고, 보상 총액은 6억 4,850만 8,595원에 이르고 있다. 그중 한 사례로 1970년대 초반에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에서 13세의 어린이가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금동여래입상'(높이 13cm)을 출토시켜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인 80만 원을 보상받은 일을 들 수 잇다.

    행운의 어린이는 임계국민학교 6년생이었던 이춘달군으로 불상을 출토시킨 날짜는 1971년 6월 21일이었다. 이군은 그날 마을 뒷산에서 놀이터를 만드느라 땅을 파다가 불상이 나타나자 소중히 들고 산을 내려와서 아버지(당시 62세)에게 가져다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 불상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를 알지 못했다. 당국에 신고하면 정당한 보상금이 나온다는 문화재보호법 상식도 없었다.

    이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우연히 캐 온 불상을 갖고 있다가 엿장수에게 단돈 2천 원을 받고 팔았다. 그 사실이 강원도 공보실에 뒤늦게 신고되었다. 도 공보실에서는 즉시 불상의 행방을 수배한 끝에 마침내 그것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불상은 곧 서울의 문화재 관리국으로 올라왔고, 평가심의회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불상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발견자인 이군과 땅임자에게는 80만 원의 보상액이 책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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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개삼족토기

    삼족배(三足杯)는 백제에서만 만들어지던 일종의 의기(儀器)이다. 서울의 몽촌토성(夢村土城)을 비롯,

    백제의 전 유적지에서 출토되는데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점토질의 태토(胎土

    )를 사용하여 높은 온도로 구워 회청색을 나타낸다. 형태는 낮은 몸에 세 다리를 붙이고 다리는 각을

    지게 만들어 끝을 뾰족하게 깎은 것과 둥글게 손질하여 뾰족하게 만든 것 두 종류가 있다. 배(杯)는 얕고

    구연(口緣)은 직립되었으며, 뚜껑을 받칠 수 있는 턱이 있다. 뚜껑 위에는 둥근 꼭지가 붙어 있고 뚜껑과

    배는 대체로 무문(無文)이다.


    회흑색 경질의 뚜껑이 있는 삼족토기이다. 뚜껑은 파손된 곳이 없는 완형이며 윗면에는 단추형의 꼭지가 부착되어 있다. 뚜껑 윗면은 단을 이룬 형태이다. 몸통의 입구 부분은 직립되다 살짝 좁아 들었다.

    다리 세 개의 높이가 각각 달라 전체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전체높이 : 9.4 cm / 뚜껑지름 : 5.3 cm / 높이 : 4.1 cm / 몸통지름 : 12.8 cm

     

     

     


    구멍단지


    구멍단지란 둥근 몸체위로 긴 목이 달린 목긴 항아리에 작은 원형의 구멍이 뚫린 형태를 말한다. 주로 백제토기에서 만들어진 기형이다.

    구멍은 몸체의 중간 부분에 있다. 따라서 물이나 액체를 몸체의 하단부분밖에 담을 수 없다. 백제에 왜 이런 구멍토기가 출현하였으며,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좀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넓은 입 작은 목항아리( 대부광구소호)


    회색 경질의 대부광구소호이다. 목부분(경부)은 크게 벌어져 있으며 입술주변은 둥글다. 목의 아래부분에는 10치구(齒具)를 이용한 물결무늬가 시문되어 있다. 동체는 납작한 구형(球形)이며 중위에 고사리모양의 귀(耳) 두 개가 대칭적으로 부착되어 있다.

    대각은 八자상으로 크게 벌어지며 한 조의 돌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첨 백제 토기 중에는 입구가 넓고 굽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특징을 가진 것이 많다.


    구멍지름 : 7.0 cm / 입지름 : 12.1 cm / 몸통지름 : 11.5 cm / 바닥지름 : 10.3 cm / 높이 : 14 cm

     

     

     

    뚜껑있는 접시 (유개합)


    몸체바닥과 뚜껑의 상단이 모두 둥글고 납작하다. 뚜껑이 접시를 덮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내외면 모두에는 연한 질감을 내는 회백색을 띠고 있다. 태토는 거친 입자가 섞여 있으나 경질이다. 접시는 굽이 없고 둥근 모양으로 입구부분이 직립하고 있으며 뚜껑에는 꼭지가 없다.

    입지름 : 11 cm / 바닥지름 : 10 cm / 전체높이 : 6 cm / 뚜껑지름 : 9.5 cm / 뚜껑높이 : 4 cm

     

     


    < 백제 토기의 발달과정과 역사>

    백제토기로 인식될 수 있는 한성기의 특징적인 기종들로는 세발토기(三足土器), 검은색으로 마연한

    입곧은항아리류(直口壺類)와 굽다리접시(高杯), 합(盒), 원통형 그릇받침(圓筒形 器臺), 목부분이 비교적

    길지 않은 입큰목긴항아리(廣口長頸壺), 몸체에는 새끼문(승문繩文)이 저부에는 격자문이 타날된 장란형

    토기(長卵形土器)와 돗자리문양(승석繩蓆文)이 시문된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토기에 대한 비교적 체계적인 편년안은 몽촌토성 조사보고서에서, 토기질의 차이를

    시기구분의 기준으로 삼아 회색연질 기종군과 회청색경질 기종군이 제작되는 단계를 나누어 전자를

    몽촌Ⅰ기, 후자를 몽촌Ⅱ기로 구분하였다.

    몽촌Ⅰ기는 3세기 중후엽-4세기 중엽, Ⅱ기는 4세기 중엽-475년까지로 하였다. 그리고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고구려토기들은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 이후의 소산물로 파악하였다.

    최근 조사된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서진(西晉)대의 전문도기(錢文陶器)와 백제토기가 같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토기의 형성 시점이 3세기대로 소급될 가능성이 보다 확실하여 졌다. 이와 함께 4세기 중엽

    무렵부터 조영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천안 용원리 고분군에서 한성기 백제토기가 공반되어 그 연대를

    파악하는데 주요한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웅진기와 사비기의 백제토기는 한성기 토기의 기종이 대체로 이어지면서 몇

    가지 새로운 기종이 추가되고 기형적 변화를 하게 된다. 그릇받침의 경우 한성기의 원통형그릇받침에

    이어 장고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장식성이 더욱 높아진 그릇받침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발토기는 반형(盤形)이 사라지고 뚜껑이 있는 접시모양세발토기만 제작되는데 사비기에

    들어와서는 배신 깊이가 현저히 낮아지는 대신 다리 길이가 길어져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입곧은항아리도 계속 제작되지만 보다 경질화되어 있고 몸체가 둥글며, 어깨의 문양대가 거의

    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한성기 말에 등장한 뚜껑접시(蓋杯)가 보편적으로 제작·사용되는 것이

    이 시기 백제토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낮은 굽이 달린 크고 작은 접시와 뚜껑들도 사용된다.

    뚜껑에서는 이전의 단추형이나 사다리꼴형(梯形)·보주형(寶珠形)꼭지에 둥근 윤형(輪形) 꼭지가

    웅진기에 추가되며, 뚜껑에 턱받침이 있는 것이 많다

     


                                                              삼국시대 토기
    201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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