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국립중앙박물관 표암 강세황 특별전

2018. 12. 28. 12:31美學 이야기







자화상

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소장, 국박기탁, 보물 제590-1호

강세황이 손수 그린 자신의 모습을 그린 초상이다. 관모(오사모烏紗帽)에 평상복을 입은
모습은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出仕와 隱逸을 동시에 지양하는 사대부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며,
초상화를 그리는 관행을 넘어선 문인화가로서의 당당한 기개를 보여준다.
맑은 담채로 그린 하늘색 袍와 金泥로 장식된 다홍색 細條帶가 어울려져, 담백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준다.



자화상에 자기 스스로 지은 발문

彼何仁斯 鬚眉皓白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섭이 하얗구나.)
頂烏紗 披野服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야복을 걸쳤으니)
於以見心山林而名朝籍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다.)
胸藏二酉 筆搖五嶽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을 흔드니)
人那得知 我自爲樂      (세상 사람이야 어찌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翁年七十 翁號露竹      (노인의 나이 일흔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라.)
其眞自寫 其贊自作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쓰네.)
歲在玄黑弋攝提格       (때는 임인壬寅, 1782년(정조 6)이다.)







강세황 초상 姜世晃肖像

李命基,1783년(정조7),비단에 색,보물 제590-2호

강세황의 집안은 할아버지 강백년,아버지 강현,그리고 강세황까지 삼대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다. 이를 기념하여 정조가 1783년 5월 28세의
젊은화원이었던 이명기(1756~?)로 하여금 지고한 강세황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초상화의 題跋

豹菴 姜公七十一歲眞
御製祭文
疎襟雅韻 粗跡雲煙 揮毫萬紙 內屛宮牋 卿官不冷 三絶則虔 北槎華國
西樓踵先 才難之思 薄酹是宣 曹允亨 謹書

탁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소탈한 자취는 자연을 벗하네.붓을 휘둘러 수만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경대부의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나라 정건鄭虔의
삼절을 본받았네. 중국에 사신으로 가니 서루에서 앞 다투어 찾아오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 삼가 쓰다.

* 조윤형은 정조때 명필이며 화성행궁의 봉수당 편액과 마곡사 심검당편액글씨가 전해준다











강세황 초상,부채그림

韓宗裕, 1781년(정조5),종이에 옅은 색,

부채에 그린 69세 때의 초상이다.정조가 강세황에게 어진을 그려줄 것을 분부했으나
눈이 어둡다고 정중히 거절하고 그 대신 한종유, 申漢枰,金弘道에게 그리게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강세황은 한종유를 궁중에서 만나게 되어 강세황이 자신의 초상화를
한종유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오른쪽 발문에는 "豹菴姜公 六十九歲小像"
왼쪽 발문에는 "辛丑九月十一日 余以御容圖寫監董官 赴奎章閣 使畫師韓宗裕
               圖余小眞於便面上 頗得髣髴 余庶孫彝大"

신축년(1781) 9월11일 내가 어용도사 감동관으로 규장각에 가서 화사 한종유에게 부탁하여
부채위에 나의 작은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제법 비슷하였는데,
이를 서손 이대(1761~1834)에게 준다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김정희, 19세기, 개인소장

강백년姜栢年, 강현姜金+見의 뒤를 이어 강세황까지 연이어 耆老所에 입소했던 영광을 기리며
김정희(1786~1856)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70세가 넘고, 관직이 정2품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기로소에 들어 갈 수 있었다.3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다섯 가문 정도에 불과했다.





강세황의 할아버지 강백년의 증시교지

교지

숭록대부판중추부사겸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예문관제학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강백년
증시문정공자

강희사십오년이월초오일(1706년,숙종 32년)



강세황 영릉참봉 교지

1773(영조 49),강우식소장

강세황이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은 1773년 윤3월14일 벼슬은 영릉참봉이었다.
그 해 윤 3월6일, 영조가 양로연에서 강세황의 큰 아들 강인을 보고 그의 할아버지 강현(1650~1733)을
떠올리며 60세가 넘도록 벼슬이 없던 강세황에게 첫 벼슬을 내린 것이다.

이조건륭삼십팔년윤삼월십사일봉
교통덕랑강세황위통덕량행
영릉참봉자

건륭삼십팔년윤삼월 일(1773년,영조 49)

통덕랑은 정5품 품계인데도 종9품 영릉(세종대왕릉)참봉 직책을 주었다.



강세황 홍패교지

1744년(영조20),강우식소장

61세였던 1773년에 영릉참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강세황은 1776년 2월13일
영조가 연로한 유생들애개 과거(耆老庭試)를 실시하였을 때, 한성부판관으로 여러 유생을 인솔하고
시험을 치러 문과 중 수석으로 급제하여 동부승지(정3품)에 임명되었으며, 1778년 文臣庭試에서
장원급제하여 한성부우윤(종2품)과 부총관이 됐다. 이 교지는 1776년 받은 紅牌이다.

교지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행(현직)한성부판관강세황문과갑과제1인급제(장원급제)출신자

건륭41년2월13일(1776년,영조52)



강세황 증시교지贈諡敎旨

1845년(헌종11년), 종이에 먹, 강동식소장

교지

정헌대부(정2품)한성부판윤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강세황증시헌정공자

도광25년9월 일(1845년,헌종 11년)

博聞多能曰憲(넓게 많이 듣고 알아서 본 받을 만하다 하여 헌이라 하고)
寬樂令終曰靖(너그럽고 즐거우며 그로 하여금 편안하다 하여 정이라 짓는다)

시호는 諡號望單子를 올리고 그 중에 선택하여 諡號書經을 마친후에 諡號敎旨가 내려온다.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강세황, 종이에 옅은 색, 삼성박물관 Leeum

이 그림은 <芥子園畫傳>의 '沈石田碧梧淸署圖'를 모방한 작품이지만
방작이 원작보다 뛰어난 창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한 쌍의 오동나무 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선비를 그린 그림으로
벽오청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종종 그려졌던 주제다.'첨재忝齋'라는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초기작임을 알수 있다.

題跋

碧梧淸署仿沈石田
忝齋









노송도老松圖

강세황 그림, 허필 글,烟客評畫帖,종이에 옅은 색,

경기도 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강세황과 연객 허필(許佖,1709~1768)은 이른바
'안산15학사'로 불리며 함께 교유하였던 사이로, 서로의 글과 그림에 평을 써주거나
합작품을 꾸미는 등 예술로 더욱 교감을 나눈 벗이였다.

노송의 오른쪽의 발문은 허필이 쓴 것으로

蒼翁偃蹇 如避秦官 白雪空山 默保歲寒

쓰러질 듯 굽어 있는 늙은 소나무는 높은 벼슬을 피하려는 듯하고
흰 눈 쌓인 고요한 산속에서 묵묵히 세한을 견디고 있구나.

노송의 왼쪽 발문은 강세황이 쓴 것으로

秦淮春水泛桃花 簾幕輕寒燕子斜 一曲洞簫雙鳳下 月明人醉莫愁家

진회에는 봄물에 떨어진 복숭아꽃 흐르고, 장막에 스며드는 가벼운 한기에 제비가 날개 기울이네.
퉁소 한 가락이 쌍봉아래 울리고, 밝은 달밤 사람은 막수의 집에서 취하네.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강세황, 종이에 먹, 개인소장

문인으로서 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면서 현재까지 조사된 기년작 중에서
가장 앞서는 것으로 1747년 35세때의 작품이다. 당시 안산에서 친구들과 모여 시도 읊고
거문고도 연주하며 풍류를 즐기는 장면을 기념으로 그린 작품이다.

















피금정도披襟亭圖

강세황, 1788년경(정조12), 종이에 먹, 삼성미술관 Leeum

1788년 강세황의 장남 인이 강원도 회양부사로 임명되자, 강세황은 가을에
회양에 내려와 잠시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그는 그토록 직접 오르고 싶어 했던
금강산을 비롯하여 강원도의 명승지를 여러 차례 유람하였다.
피금정은 강원도 금화군 금성 남대천변에 위치한 정자인데, 과거 금강산에
오르려면 반드시 거쳤던 곡으로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남겼던  곳이기도 하다.

발문을 읽어보면

戊申秋 余過金城之披襟亭 江岸陰陰古木齊 征車暫駐夕陽低 悤悤未暇披襟坐
後約留憑短句題 來坐淮廨之臥治軒 追寫此圖 豹翁

무신년(1788)가을에 나는 금성의 피금정에 들렸다. 강 건너 그늘 짙은 고목이 가지런한데,
가던 수레 멈추니 석양이 나지막하네. 바뻐서 옷깃 헤치고 앉아 있을 겨를 없으니,
뒷날 난간에 기대어 짧은 시구 지을 것을 기약해 보네. 회양 관아의 와치헌에 와서 앉아
기억을 더듬어 이 그림을 그린다. 표옹 쓰다.











표암첩豹菴帖

강세황

총 2권에 26폭의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수록된 화첨으로, 강세황이 다양한 화목을
섭렵하고 담채 구사에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세황은 산수 뿐 아니라
화조영모화도 다수 남기고 있는데, 특히 <十竹齋畫譜> 나 <芥子園畫傳> 등과 같은
중국의 화보를 끊임없이 그림을 연마하였다.작은 화첩에 수록된 만큼 근경 위주의
생략된 표현들이 주로 이루며 채색에 잇어 분홍,노랑,연두,파랑 등 맑고 선명한
채색을 사용하여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표암 강세황 탄신 300주년 기념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전시기간(2013.6.25~8.25)
간추려 전,후편으로 편집하여 올리겠습니다.

전편을 마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도슨트 권진순 올림

2013년 7월15일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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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시인|조회 175|추천 0|2013.07.16. 20:13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 강세황,1781(정조 5년),종이에 먹 사로삼기첩은 말 그대로 사행길 중 본 세 가지 기이한 경관을 뜻하는 것으로 계주薊州 <薊門烟樹>, 북경 頤和園 인근 <西山>, 그리고 이제묘夷齊廟가 있는 <孤竹城>을 말한다. 여기에 산해관 근처에 위치한 <姜女廟>가 추가되었는데, 이들 모두 역대 연행사신들이 사행기록에서 자주 언급된 곳이자, 빼놓지 않고 들렸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강세황, 1784(정조8년), 종이에 먹 강세황은 1784년 10월 72세의 나이로 고대하였던 중국 연행에 副使로 참가하였고, 이 때 본 경관과 중국인들과의 만남 등을 다양한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노년에 다녀온 연행이 그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대기관첩과 사로삼기첩은 삼사가 연행중에 접한 경치를 부사 강세황이 그림을 그리고 正使 李徽之(1715~?), 書狀官 李泰永(1744~1803)과 함께 시로 읊은 시화첩을 제작한 것이다. 천수연 사물 녹두패 千叟宴 賜物 綠頭牌 1784년(정조 8년), 27.6 X 3.6cm, 강우식 소장 강세황이 연행 중 천수연행사에 참석했을 때 받은 명찰의 일종인 녹두패이다. 얋게 깍은 나무로 만든 앞면에는 "朝鮮國副使姜世晃", 뒷면에는 "千叟宴賜物綠頭牌"라 적혀있고 위에는 진청색으로 색을 입혔다.중국을 방문한 사신들에게 일괄로 나누어 준 것으로 보이며, 온전한 상태로 현존하는 녹두패가 매우 드문 편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우금암도禹金巖圖 강세황, 1770~1771(영조46~47), 종이에 먹 아들 완 부안현감으로 재직할 시기, 강세황이 이틀에 걸쳐 부안의 변산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변산 특유의 巖山의 분위기를 굵은 渴筆로 표현하였고, 특히 직각으로 가늘게 쪼개진 벽의 무늬가 마치 비단과 같다고 기록한 '우금암'에 깊은 인상을 받아 묘사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이 영조의 어명으로 절필을 선언했던 기간 중에 그려진 실경산수화이면서, 명승지를 지나며 빠른 필치로 각 장소의 특징을 사생한 보기 드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상편도에 발문 -유경종柳慶種이 쓰다 戊辰首夏小望雨中 此卷鋪置忒好 筆勢超逸 政不愧樂天其人 而樂天其文也 王元美倩友人作此圖 書此篇 恨無以見之 此卷可以賞之 或以不並着妻孥鷄犬爲病 此苛論也 禿毫書本文又奇 如顔魯公祭姪文矣 嗟歎不足 遂書以識之 1748년 초여름에 이 두루마리 그림은 구성이 좋고 필치가 뛰어나 실제로 백거이의 인품과 시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구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이 벗에게 부탁하여 이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썼지만 보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 두루마리는 정말 감상할 만하다. 혹 누군가가 아내와 자식, 개와 닭이 나란히 그려지지 않은 것을 흠으로 잡는다면 이는 혹독한 평가이다. 모지랑이 붓으로 본문을 쓴 것은 더욱 기묘하여 마치 안진경(顔眞卿,709~785)이 조카딸에게 써 준 제목과 같다. 감탄만으로는 부족하니, 이렇게 글로 써 남긴다. 지상편도池上篇圖 강세황, 1748(영조24), 개인소장 중국 당대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지상편池上篇> 을 묘사한 그림으로, 화면 왼쪽부터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이 쓴 제목과 발문, 지상편도, 그리고 강세황이 쓴 지상편이 긴 두루마리로 함께 엮어있다. 강세황이 처남 유경종의 사촌 유경용에게 그려준 것으로, 유경용<玄亭勝集圖>의 배경이자 진주 유씨 가문의 고택인 '淸聞堂'의 주인이었다. 강세황은 이 그림을 '鷲巖書堂(취암서당)'에서 그렸다고 밝히고 있는데, 취암은 안산 수암봉의 옛 이름으로 , 이 곳 역시 그들의 근거지인 안산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지상편'은 조선의 문인들이 꿈꾸는 정원으로, 백거이는 17마지기 땅에 1/3은 집을 짓고, 1/5은 연못을 파고, 1/9은 대나무를 심었고, 여기에 학과 괴암,흰 연꽃 등을 배치하여 이곳에서 평생토록 늙어가고 싶다고 노래하였다. 池上篇 十畝之宅 五畝之園 有水一池 有竹千竿 勿謂土狹 勿謂地偏 足以容膝 足以息肩 有堂有庭 有橋有船 有書有酒 有歌有弦 有叟在中 白髮飄然 識分知足 外無求焉 如鳥擇木 姑務巢安 如蛙居坎 不知海寬 靈鶴怪石 紫菱白蓮 皆吾所好 盡在吾前 時飮一盃 或吟一篇 妻孥熙熙 鷄犬閑閑 優哉游哉 吾將終老乎其間 戊辰四月 忝齋爲有受兄 寫于鷲巖書堂 과옹십취도瓜翁十趣圖 강세황, 1758(영조34), 종이에 옅은 색, 개인소장 이 작품은 강세황이 46세 되던 1758년에 瓜川翁이라는 사람에게 그려준 것으로 10가지 풍치를 나타낸 十景圖이다. 그 중 제2면 家釀催漉(가양최진, 집에서 담근 술을 걸러오라고 재촉한다)이다. 題跋 家釀催漉 (집에서 담근 술을 걸러오라고 재촉한다) 床醅適趂杏花辰 (담근 술이 살구꽃 필 때 마침 익고) 眞率鹽蔬事饌新 (담백한 김치도 새로 담갔으니) 今夜月明誰肯過 (달 밝은 오늘 밤 누가 기꺼이 들르려나.) 樽前倍想意中人 (술 주전자 앞에서 의중에 있는 사람을 열심히 꼽아보네.) 국화 菊花圖 강세황, 종이에 옅은 색 중앙 하단에 넓적한 바위를 배치하고 그 위로 만개한 국화와 한 마리 나비를 묘사한 부채 그림으로, 국화에 묽게 베풀어진 노란색은 단조로운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면서도 전체적인 수묵의 농담과 조화를 이룬다. '가을꽃에 아름다운 색깔의 나비 秋花彩蝶'라고 호제를 쓰고 '박암이 그렸다 樸菴寫'고 하였다. '박암'은 강세황이 30대 무렵에 사용한 호로 알려져 있다. 이 화첩에는 조선시대 여러 화가들의 작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강세황이 중국 사행 여정 중에 그린 '枯木竹石圖'도 실려 있다. 해당화도海棠花圖 강세황, 종이에 먹 그림과 글씨가 편화로 나뉘어 한 액자에 넣어져 있는데, 화면 도처에 얼룩이 있다. 한국회화의 소재로는 드물게 해당화 가지를 화면 가운데 부각시키고 있는데, 화면 우 상단에 '해당海棠'이라고 화제가 묵서되어 있고 그 아래 '표옹豹翁'이라는 주문타원인朱文橢圓印과 반대편 좌 하단에 '강세황인'의 백문방인白文方人이 찍혀있다. 강세황의 題詩 玉頰深紅漸淺紅 (옥 같은 뺨에 짙은 붉은색이 차츰 엷어지며,) 睡痕酣態兩朦朧 (잠잔 흔적 술 취한 모습 모두 몽롱하네.) 無情子美今休恨 (무정한 두보라고 이제 한탄하지 말지니,) 東去芳名擅城中 (동쪽으로 와 아름다운 이름 온 지방을 독차지하네.) 豹翁 강남춘의도江南春意圖 강세황 글 심사정그림, 비단에 옅은 색 심사정 沈師正(1707~1769)과 강세황은 안산시절 함께 만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강남춘의도>에는 다음과 같은 평이 실려 있다. 曾與玄齋對坐 見其臨寫杜士良江南春意 今覽此於數十年後 感而題次 豹翁 과거에 현재와 마주 앉아서 그가 두사랑강남춘의를 모방해서 그리는 것을 보았는데 수십 년 후에 이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느껴 이것을 쓴다. 표옹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강세황, 검은 종이에 금니,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강세황의 작품중 유일하게 금니(金泥)로 그려져 있다. 근경에 몇 그루의 나무와 함께 모정茅亭이 그려져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원산이 보인다. 丹靑萬木秋風老 (붉고 푸른 여러 나무는 가을바람으로 무르익고) 金翠千峰落照開 豹菴 (금빛 푸른빛 모든 봉우리는 낙조로 피었네. 표암) 도산도陶山圖 강세황, 1751(영조27),종이에 옅은 색 그의 나이 39세 때의 작품.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병중에 계신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부탁으로 武夷九曲圖와 함께 그리게 되었으며 도산을 가보지 않고 이익이 가지고 있던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하편도 마칩니다.읽고 보고 공부하시느랴 수고 많았습니다. 오는 8월 25일까지 중앙박물관 전시실 1층 특별전시실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매일 10시와 오후 2시에는 훌륭하신 도슨트님한테서 설명도 들을수 있습니다.(월요일 휴관) 많은 참관 바랍니다. 권진순올림 201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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