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북한산 순수비와 風水

2018. 12. 26. 23:26산 이야기



북한산 비봉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16년은 丙子年이었다. 그해 7월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북한산 비봉에 올라 마침내 옛 비석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 비석은 조선 무학대사 또는 신라 말 도선 국사의 비석이라고 입으로 전해오던 것이었다. 김정희는 북한산의 그 비석이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했다 비석을 세운 이래 1200여년 동안 잊혀져 오다가 조선 순조 16(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해 비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원래 순수비 위치 표석 

 

++ 그런데 이 비는 몸체 아래쪽이 떨어져 나가고 뒷면에는 26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등 보존대책이 필요해 1972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전시되고 있다. 현재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던 자리에는 비석을 꼽았던 홈과 이전 당시 순수비의 옛터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표석이 남아 있다.



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원형 순수비

 

++ 巡狩(순수)’는 중국의 황제인 天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관들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던 고대 중국의 풍습인데 순수를 처음으로 시작한 임금은 秦 始皇帝였다. 그는 중국 전체를 통일한 후에 매년 한번씩 각 지방을 순수했고 그 순행길에서 죽었다. 특히 태산 등 동쪽 지방을 순행할 때는 각지의 산에 올라 산천에 제사를 지낸 뒤에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덕을 찬양하게 했는데, 이 비석을 巡狩碑라고 한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신라 정복군주로서 진흥왕은 그보다 약 800년 전 先人이었던 진시황을 사모했으리라. 그래서 6세기 중엽 영토를 크게 넓히고 새로운 영토 즉 당시 신라의 국경 지방을 직접 돌아보면서 진시황이 하던대로 여러 곳에 비를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순수비는 총 4개로서 전부 진흥왕이 세운 것이다. 이들 지역은 경상도 창녕, 함경도 함흥(황초령과 마운령), 서울의 북한산인데 이들은 각각 가야, 고구려, 백제와 싸워 그들로부터 취득한 새로운 영토를 과시하기 위해서 세운 것임이 밝혀졌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북한산비는 그 가운데 하나로, 550년대에 현재의 서울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세운 것으로 진흥왕이 신하를 데리고 이 지역을 시찰한 사실을 적고 있다.

 

진흥왕은 재위 36년간 신라 융성의 주춧돌을 놓은 임금이었다. 그는 청소년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대규모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면서 나라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 신라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선진 문물의 수용이 늦었고 이에 따라 불교 전래도 고구려 등에 비해 약 150년 이상 늦었음은 물론 고구려, 백제와 다르게 불교의 공인도 이차돈의 순교 등 어려운 과정을 거쳐 실현되었지만, 공인된 뒤로는 왕의 이름까지 불교식으로 지을 정도로 신라 왕실의 불교 장려 정책은 대단했다. 眞興王은 불법으로 세계를 통일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아들들의 이름을 銅輪, 金輪으로 정했는데 동륜, 금륜은 불법의 바퀴를 굴리며 천하를 다스린 불교 왕인 전륜성왕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고, 또 진흥왕의 후대 임금으로서 銅輪의 아들인 眞平王은 가족 전체의 이름을 아예 석가모니 가족의 이름에서 따왔다. 진평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淨飯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으며, 부인은 석가모니 어머니 이름인 마야’, 형제들은 석가모니 작은 아버지들인 백반국반에서 이름을 취했다. 이렇게 진평왕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父母 이름과 동일하게 짓고 응당 석가모니로 이름을 지을 아들을 기다렸지만, 재미있는 것은 진평왕은 보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그 당시 법도로서는 왕위계승은 오직 聖骨출신만이 가능하였으므로따라서 신라는 딸이지만 유일한 성골의 혈육에게 보위를 계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진평왕의 딸인 善德女王도 마찬가지였다. 선덕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부처의 진리를 전하는 뛰어난 사람의 이름이며 선덕여왕의 사촌 동생이며 그 다음 보위를 이은 眞德女王 또한 불교에서 온 이름이다. 이처럼 신라 왕실은 불교를 공인한 이후에 불교를 홍보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으며, 신라를 부처님의 나라(佛國)로 변신시키려 노력을 다했고 이는 신라 왕실이 불교를 적극 신봉함으로서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이익이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진흥왕은 또한 정복 활동에도 적극 나서서 한강 자락을 신라 영토로 만들었다. 한강 유역은 본래 신라와 백제 땅이었는데,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밀려 고구려에 빼앗겼던 땅이다. 진흥왕은 백제의 聖王과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이 땅을 다시 빼앗아 남한강 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하지만 진흥왕은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다. 남한강 상류 지역(지금의 단양. 제천지역) 회복에 머무르지 않고 동맹국인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지금의 서울을 포함 경기지역)까지 신라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으로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체결된 지 백여 년 만에 깨져 버렸는데, 그렇다고 백제가 신라의 한강 하류 점령을 넋 놓고 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왕은 554년에 대가야와 왜의 군사들까지 끌어들여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했지만 성왕은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신라군을 공격하다 전사했으며, 이로서 한강하류는 영원한 신라 땅이 되고 말았고 이때부터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사이는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동창간에 북한산 산행을 한 회수는 얼마나 될까. 아마 두자리수 이상일 것이다. 산행을 하면서 북한산 순수비를 볼 때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 3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렸던 사실을 상기해 보는 것도 아주 의미없는 일은 아니리라.

 

++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후 聖王만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 또한 그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平原王 때 군대를 파견하는데, 그 때 파견군사의 최고 장수가 바로 평원왕의 사위 평강공주의 남편인 溫達이다. 삼국사기의 해당기록에 의하면 그가 길을 떠나며 맹세하였다(臨行誓曰)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鷄立峴竹嶺已西)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不歸於我) 돌아오지 않겠습니다(則不返也).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爲流矢所中) 전사하였다(路而死)”

 

++ 온달이 전사한 阿旦城(아단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광진구에 있는 峨嵯山(아차산)에 있는 阿且山城(아차산성)이라는 주장과 충청북도 단양의 溫達山城(온달산성)이라는 주장으로 엇갈린다. 두곳 모두 온달과 관련된 유적과 설화가 전해지지만 당시 삼국의 형세로 볼 때 일반적으로 阿且山城阿旦城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 지리서로 꼽히며 수백 년 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 온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다. 일반적인 지리서와 달리 이 책에는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함께 민담 · 풍속 · 역사 등 인문적 교양도 함께 담겨 있는데, 그 이유를 이중환의 순탄하지 못했던 삶에서 찾는 이가 많다. 아무튼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이 비석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漢陽府 편을 보면,

 

昔羅僧道詵留記以爲繼王者李 而都於漢陽

故 麗中葉 使尹瓘 相地於白岳之南 仍種李 及繁茂 輒芟伐之 以壓勝

及我朝受禪 使僧無學 定都邑之地 無學 自白雲臺 尋脈到萬景 西南行

至碑峰 見一石碑 大刻 有無學誤尋到此六字 卽道詵所立也 無學遂改路

從萬景正南脈 直到白岳下 見三脈合爲一坪 遂定宮城之兆 卽麗時種李處也

 

이를 번역하면,

 

옛날 신라시대 중 도선의 [留記]에서, “王氏를 이어 이 될 사람은 李氏인데, 漢陽에 도읍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다 터를 잡아 오얏을 심게 하고는, 무성하게 자라면 문득 잘라서 왕성해지려는 기운을 눌렀다. 그러다가 우리 왕조에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중 무학을 시켜 도읍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줄기를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비봉에 이르렀는데, 한 비석을 보니, 무학이 잘못 찾아 이곳에 오다.”라는 여섯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바로 도선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이 그제서야 길을 바꾸어, 만경대에서 정남쪽 줄기를 따라 곧 바로 백악산 아래에 이르렀다. 세 줄기가 합쳐져 한 들판이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터로 정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고려 때에 오얏을 심은 곳이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無學誤尋到此(무학오심도차: 무학이 잘못 찾아 이곳에 오다)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비봉에 세워져 있으며 그 비석을 세운 이는 도선국사라고 택리지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청나라와 일찍이 교류하여 금석학과 고증학에 관심이 많았던 추사는 친구(김경연)와 북한산에 놀러갔다 당시까지만 해도道詵國師碑(도선국사비)라 알려져오던 이 비석를  별다른 기대없이 찾았다가 호기심에 세밀히 들여다 보다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판독 결과 진흥왕 순수비로 드러난 것이다. 감흥이 너무 컷기에 비석 오른쪽 측면에 이 비는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1816)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오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 라고 자신이 비석을 판독했음을 새겨놓았다.



순수비 옆면의 탁본(추사와 조인영이 68자를 해독했음을 음각)

 

사실 이중환도 택리지를 저술할 때 비봉 꼭대기에 올라가 그 비의 내력을 확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단지 지리학을 저술하는 그로서 그 진위를 확인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로서는 그당시 사회가 공유하던 민담이나 역사를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기술하면 족한 것이었다. 이로서 진흥왕순수비가 도선국사비로 오인된 세월은 이중환의 저술년도를 넘어 실로 오랜 오랜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비석이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뜻하지 않게 판독한 추사의 놀라움과 감격은 얼마나 컷을까. 금석학을 하는 이로서 그보다 큰 뿌듯함과 행복은 아마 없으리라.

 

진흥왕 시대의 주변 역사연구를 포함 금석학 관련 준비를 사전에 꼼꼼히 챙긴 후 추사는 이듬해 여름 181768일에 同道의 길을 걷던 절친한 조인영과 함께와서 오실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68자를 심밀하게 가려냈고 그 사실을 이 비에 다시 새겨 넣었다.   "정축년 6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같이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자를 자세히 살피어 판독하다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榮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라고.



조인영

 

 

++ 趙寅永(조인영: 1782~1850)은 추사보다 4년 연상이다. 추사와는 同榜及第(대과에 함께 급제한 것. 즉 요즘으로 말하자면 고시 동기생이란 뜻)이나 대과에서 장원급제를 함으로서 시작부터 종4품 그것도 淸要職인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 대과에 급제하면 통상 종9품 벼슬로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교할 때 비상히 파격적인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순조의 외아들인 효명세자의 妻叔. 헌종의 외종조부가 된다. 추사와 함께 진흥왕순수비를 해독한 때는 대과 급제 전이다. 머리가 좋았음일까 과거를 준비하면서도 요즘 고시생처럼 절이나 고시촌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영의정을 지냈고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니,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무학대사가 만경대에서 일단 비봉까지 갔다가 되돌아 와 보현봉을 거쳐 백악산앞에 도읍을 정했단다)

 

 

아무튼 택리지에 의하면 무학대사는 無學誤尋到此(무학오심도차: 무학이 잘못 찾아 이곳에 오다)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비봉에 세워진 것을 보고 ! 잘못 왔구나. 뒤로 돌아가야겠네. 그런데 도선국사 정말 용하기도 하시네. 어찌 육칠백년 전에 내가 여기 잘못 올 지를 미리 아셨나. 정말 신통도 하시네하며 길을 바꾸어, 만경대에서 정남쪽 줄기를 따라 곧 바로 백악산 아래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궁성터로 정하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학대사는 한양을 정하기 전에 보현봉을 지나쳤다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 보현봉이 풍수지리상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을 무학대사 또한 어찌 알았으랴!



보현봉(규봉)

 

광화문에서 경복궁과 청와대의 주산격인 북악산을 바라보면 능선 뒤로 빼꼼히 보이는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그런데 보현봉은 窺峰(규봉)이라는 별난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자는 '엿볼 규'이다. 보현봉이 규봉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목을 안으로 빼고 북악산 넘어로 서울을 넌지시 엿보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 앞산 능선너머로 뒷산의 봉우리만 쪼끔만 보이는 봉우리로 흡사 엿보는듯한 봉우리라해서 엿볼 窺字를 쓴다고 하는 것이다. 규봉은 담장 밖에서 누군가가 뜰 안을 숨어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봉우리이므로 주인에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주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연히 풍수에서는 규봉을 꺼리며 풍수상으로는 도둑 맞을 상이라해서 매우 좋지않게 여긴다. 중요한 복덕을 쌓는대로 모두 도둑맞을 수있다는 ....



보현봉이 서울을 빼꼼히 엿보고 있다

 

광해군은 풍수에 밝은 군주였다. 아무래도 보현봉이 규봉으로서 꺼림직했다. 그렇지만 보현봉을 어떻게 하겠는가. 옮길 수는 없지 않은가. 왕권을 도둑 맞지 않기 위해서 그 비보책의 일환으로 규봉의 기를 상쇄할 수 있는 ()에 경희궁. 인경궁을 연거푸 지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 廢母殺弟(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것). 再造報恩(명나라를 섬기는 것)을 하지 않은 이유와 더불어 바로 그 경희궁 등의 토목공사를 한 것이 仁祖反正의 구실이 될 줄을. 이렇듯 풍수의 여파는 정권의 변동까지 초래할지 누가 알았으리.

 

이중환(1690.12.15 ~ 1756.1.2.)은 어릴 때부터 박학했다. 그는 8촌간인 실학자 성호 이익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극심한 당쟁 탓에 유배되었는가 하면 30여 년간 전국을 방랑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그토록 긴 고난의 세월을 살면서도 살 만한 땅이 어디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며 끊임없이 조선 천하의 福地를 탐색했다. 이토록 福地를 찾음에 있어서는 신라시대 이래 민중의 신앙으로까지 자리잡은 풍수이론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당장 위에서 인용한 몇줄의 문장 가운데에서도 壓勝(압승)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 용어가 풍수설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차제에 풍수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이나마 일별해 보고자 한다.

 

 

風水라는 말은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뜻인 藏風 得水(장풍득수)를 줄인 말로, 생명을 불어 넣는 地氣(땅 기운)를 살피는 것이다. 자연에서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물로 생명체를 이루고 있다. 바람과 물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지리적인 조건에 맞춰 해석하는데 山勢(산의 모양과 기), 地勢(땅의 모양과 기), 水勢(물의 흐름과 기)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켰다. 그것에 의해서 생활하는 인간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 풍수다(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 민음사)

 

 

風水는 중국으로부터 언제 도입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신라말에 도입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며, 한국풍수의 원조는 道詵(도선)으로 알려져 있다. 도선의 풍수는 본질적으로 중국의 풍수와는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론풍수는 생기가 聚集(취집)된 명당을 구하는 것이지만, 도선의 풍수는 문제가 있는 땅을 裨補(비보)壓勝(압승)으로 고쳐 인간이 살 만한 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땅에 대한 인식이 중국의 풍수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온 우리의 풍수관이라는 것이다.

 

 

도선풍수의 가장 큰 특징은 비보와 압승이다. 비보란 땅의 기가 허()한 곳을 북돋우는 것이며, 압승은 땅의 강한 것을 억눌러 주는 것이다. 이러한 비보와 압승은 중국에서도 이따금 적용된 사례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전 지역과 마을에서 사용되었던 우리 풍수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다. 그 이유는 중국은 국토의 면적이 넓기 때문에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좋은 환경(소위 明堂)을 찾으면 되는 것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좁은 국토에서 땅에 대한 선택의 기회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에 이를 인위적으로 명당화 하려는 과정에서 비보와 압승이 폭넓게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비보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완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하며, 압승이란 불리하게 작용하는 강한 힘, 또는 기운을 누르거나 꺾기 위한 주술이다. 이 압승이 발전하여 특정한 인물, 집안, 문중, 지역 혹은 국가를 흥하게 또는 망하게 할 목적으로 행하는 풍수술이 생기게 되었는데, 압승은 넓은 의미에서 비보의 한 범주로 취급되며, 따라서 압승과 비보를 총괄하여 비보풍수로 통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비보풍수와 관련하여 위에서 인용한 [택리지]의 해당구절을 다시 살펴보면 옛날 신라시대 중 도선의 [留記]에서, “王氏를 이어 이 될 사람은 李氏인데, 漢陽에 도읍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다 터를 잡아 오얏()을 심게 하고는, 무성하게 자라면 문득 잘라서() 왕성해지려는 기운을 눌렀다(壓勝). , 오얏나무를 잘라서, 다시 말해 伐李하는 압승술이라는 풍수술을 사용함으로서 고려 때 李氏의 득세를 방지했다는 이야기인 것이렷다.

 

++현재 서울시 강북구 번동을 조선시대는 "벌리(伐李)"라고 칭하였고 후에 "번리(樊里)"가 되었다. 당시 번동의 자연 마을은 지명까지 伐李로 명명함으로서 地氣를 눌렀던 것인 바, 위치에 따라 윗벌리가운데벌리아랫벌리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는 번1.2.3동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풍수는 1990년대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CNN 등 주요 언론에 풍수에 관한 기사가 실리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뉴스 코리아 2010.8.6.). 미국인들은 풍수의 개념을 중국인들에게 배웠기 때문에 풍수의 중국어 발음인 Feng Shui(팽슈이)라고 말하며, 상당수의 사람들이 집과 사무실, 가구 등의 방향과 위치에 있어 풍수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인데, 워싱턴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등장하는 용어로서 최고의 명당을 의미하는 紫微垣國(자미원국)의 형상으로 풍수가 빼어났다는 평가이다. 문화해설을 듣는 미국인들에게 실제로 나는 풍수지리에 대한 설명을 이따금 하는데 거의 대부분 쉽게 이해하는 것을 확인하곤 한다.

 

 

인간이 부닥치는 문제들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존하려 한다. 여기에는 통상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원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전자와 같이 신의 힘을 빌지 않고 후자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을 주술이라 하는데, 압승도 주술의 한 방법이며, 그 중에서도 인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힘을 누르거나 꺾는 방법이다. 압승은 고대에서부터 행해졌으며, 전통시대를 통하여 인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압승을 포함 비보이론은 표면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한낱 미신으로 치부하는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를 믿고 따른다는데 흥미가 없을 수 없다.

 

++소위 고급종교라는 것을 믿는 아낙네들의 상당수가 아직도 점집을 수시로 드나든다던지 남자들도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선거철을 앞두곤 점집을 은근히 순례하는 예는 아직도 흔한 정경이 아닌가. 표면적으론 과학적 합리성을 표방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아직도 미신이라고 배격하는 관습.주술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들 아닐까.

 

++일제가 물러간지 70년도 지났다. 아직도 무슨 산에 쇠말뚝이 박혀 있으니 캐내야 한다고 들 하고 실제로 몇 십개씩 캐낸 쇠말뚝의 사진이 심심치 않게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더 나아가 어떤 지방단체에서는 예산을 투입하여 그러한 쇠발뚝 제거작업에 나서기도 한다. 쇠말뚝이 그 지방의 정기나 맥을 끊어 놓는다나 뭐라나 하며.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커다란 산이나 봉우리에 쇠말뚝이 수십개 박혀있더라도 뭐 대수로운 일일까. 큰 산에 티끌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에 불과 한 것을. 그러나 찜찜하다는 것이다. 찜찜한 것은 뭘까. 결국 그 미신을 그 압승풍수론을 믿는다는 것일게다. 이와 같이 비보풍수론은 아직도 우리 옆에서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러면 비보풍수를 우리들 주위에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이용했으며 그것은 현재 우리의 실생활에 어떤 형태로 용해되어 있는가에 대해 이하 살펴본다.

 

먼저 서울을 본다.

 

국보 1호 남대문이다. 원래 이름은 崇禮門(숭례문). 한양 도성의 문의 扁額(편액)은 대부분 가로로 쓰여져 있는데 반해 숭례문은 세로로 쓰여져 있다.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火山에 대응하는 맞불을 질러 火氣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관악산은 마치 그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부터 이 산을 불의 산(火山) 또는 火形山이라 했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성을 범한다고 보았다.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방책이 필요했다. 풍수에서 화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지만 관악산에서 뿜어내는 화기를 漢江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하게 했다. 그리고 문의 현판을 縱書(종서)로 써 세로로 세우게 하였다. 숭례문의 자는 오행으로 볼 때 에 해당된다. 여기에 '높인다', '가득 차다'라는 뜻을 가진 '' 자와 함께 써서 수직으로 달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이 되도록 했다.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는 화재방지책인 셈이다.



남대문(숭례문)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관악산이 火山이라는 것까지는 동의해 보자. 그런데 그 화기가 넘쳐 한강물을 건너 올 정도로 맹렬할진대 겨우 남대문에 숭례문이라는 편액을 세로로 달랑 하나 달아놓음으로서 火氣를 잡는다는 이론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비보풍수론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조상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역사의 아이러니! 화기를 다스리고자 했던 숭례문이 정작 자신의 몸은 화재로 소실됐으니 중이 제머리 못깍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함일까.



동대문(흥인지문)

 

 

보물 1호 동대문은 어떨까. 한양은 서쪽이 동쪽보다 지형적으로 높다. 그래서 청계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일게다. 그래서 동대문의 지대는 비교적 저지대에 위치하게 될 수 밖에 없고 그 근처에 미나리깡이 있을 정도로 지반도 물렀다. 따라서 동대문은 다른 성문과는 달리 甕城(옹성)을 추가함으로서 구조적으로 튼튼히 대비했다고는 하지만 동쪽의 산세 또한 약하여 비보를 함으로서 地勢를 강화하였다. 이번에도 편액을 이용하도록 한 것이다. 興仁門으로 하지 않고 와 동음인 갈지()자를 더하여 興仁之門으로 하였는데 그로 인해 동대문 지역의 풍수적인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한 것이다. 이 또한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믿어지지 않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4짜리 현판 하나로 심리적으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보풍수란 어찌 보면 매우 경제적인 문제 해결책의 하나가 아닐까도 생각된다.



아미산

 

비보풍수는 경복궁의 건설에도 여기저기 적용되었다. 즉 경복궁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서 대궐 정문인 光化門 앞에 해태 상을 세운다던지, 한양의 內得水가 약하므로 경회루에 커다란 연못을 판다던지, 그 연못을 조성함으로서 토출되는 흙을 왕비 처소인 교태전 뒤뜰에 아미산이라는 假山(가산)을 조성함으로서 좌청룡의 용맥을 보강한다던지 등등. 그런데 궁궐이란 어떤 곳인가. 당시 최고 권력의 지도자와 그를 보좌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이 운집하여 일국의 국정을 운영하던 정치 공간이 아니던가. 그 궁궐공간을 조성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비보풍수가 이곳저곳 스며듦에 따라 사회 지도층인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 서민들의 생활속으로도 비보풍수는 곳곳이 배어들게 된 것인데, 전국의 수없이 많은 사례중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유산 중에서 몇가지 예만 살펴보자면,

 

먼저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경우를 보자. 어떤 터라 할지라도 풍수상 하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도 비보풍수는 발견된다. 이곳 소수서원은 원래 절터였다. 그 때는 東面을 하였으므로 죽계천이 앞쪽의 臨水得水가 되어 문제가 없었으나 서원으로 설립되면서 죽계천 得水는 강당의 남면 앞으로 빠져나가 버리니 재물운에 불리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퇴계가 소수서원을 사액으로 선정되도록 함으로서 재정의 자립은 일단 이루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수서원 앞 敬字바위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남면한 소수서원의 좌청룡 자리에 호랑이머리 형상의 바위(소위 지금의 敬字바위)가 소수서원을 향하고 있어 풍수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창건 당시에도 저렇게 소수서원을 노리고 있었던 호랑이 바위 이였기에 창건주 주세붕은 호랑이 아가리에다 자물통을 달아버렸다. 백운동이라고 써서 말이다.그 후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 군수로 부임해 와서 그것도 부족하였던지 붉은 글씨로 자를 떠억 새겨 놓았다. 두분 다 호랑이에게 재갈을 물린 것이다(서울 풍수. 장영훈저).  이로서 좌청룡의 地勢는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회마을 만송림 전경

 

 

비보풍수의 또 다른 예를 우리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볼 수 있다. 하회마을을 제대로 조망하려면 마을 강 건너 부용대라는 언덕에 서면 과연 하회마을을 풍수학에서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연꽃 모양의 蓮花浮水形 내지 떠있는 배 형상의 行舟形이라고 말하는 풍수용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니까. 그런데 하회마을에서 또 풍수적 의미가 큰 것은 萬松林이다. 마을 서쪽에서 불어오는 殺風을 막기 위해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는 울창한 숲이다. 서애 유성룡의 형님 유운룡의 비보책이었다는데 아무튼 유씨 문중의 풍수관을 엿볼 수 있는 비보풍수의 현장이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풍수관이 豐山 柳氏의 유산을 가족을 넘어 世界遺産(세계유산)으로 까지 떠오르게 했다면 과장일까.


하회마을 만송림

 

신라시대 도선국사로부터 비롯된 우리나라의 비보풍수는 고려에서는 크게 유행하여 풍수를 다루는 국가기관이 있을 정도였지만 조선조에 들어와 이전 왕조의 구습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도선의 비기뿐만 아니라 고려왕조에서 전해지던 많은 음양서들을 소각하였음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고 있다. 즉 고려의 압승술은 조선에 와서 공식적으로 탄압을 받아 사라진다. 그 대신 국가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의 민간의 압승술이 행해진다.

그렇다면 실록에 나타난 비보풍수에 관한 것들 중 몇개를 살펴보면,

 

가뭄이 계속될 때는 국가에서 북 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비가 오려면 하늘에 음기가 가득차야 하는데 북소리로 말미암아 북돋아질 수 있는 양기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즉 북소리는 양기를 키운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인가. 과거 전투에서 보면 군사를 모으고 진격하도록 함에 있어서 북소리를 주로 이용한 것은 양기를 북돋기 위함이었을까. 조선왕조에서는 이기적 목적의 압승을 범죄로 간주하였으며, 왕실에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예컨대 세종 때는 남편(문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압승을 한 세자비 휘빈 김씨를 폐위했으며, 광해군 때는 인목대비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의 능에 뼈를 파묻고 광해군의 이름을 쓴 고기 조각을 솔개나 까마귀에게 먹였다고 하여 西宮으로 축출됐다. 그리고 성종의 왕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의 경우는 다른 비빈들이 자신에게 압승했다고 모함하다가 오히려 폐비를 당하기도 했다.

 

위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비보풍수는 고려 때와는 달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국가 단위로는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압승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조선시대를 통하여 압승은 근절되지 않고 비밀리에 계속 행해졌다. 그러므로 민간에서 압승술은 쇠말뚝 박기, 맥자르기 등의 형태로 계속 전해졌다. 이를 꿰뚫어 본 일제는 조선 사람의 비보풍수관을 오히려 역이용함으로서 그들의 식민통치에 이용했다. 즉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우리 산천 여기저기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은근히 공표함으로서 다시 말해 조선의 압승술을 적극 이용함으로서 조선의 를 꺽고 조선은 풍수지리적으로 일본에 대항할 수 없다는 無力感을 민간에 유포함으로 식민지배의 영구화를 꾀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택리지]에는 벌리(伐李)를 한 고려 때의 尹瓘(윤관)장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윤관장군의 묘지와 관련해서는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간에 400년 가까이 끌어온 山訟(산송. 묘지에 관한 다툼)이 유명한데, 두 문중간 묘지 다툼은 음택풍수로서 한때 英祖가 직접 중재에 나서기도 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한 조선시대 山訟의 대표적인 사건으로서 이 란에 소개하려 했으나 지면관계상 오늘은 일단 접고 후일 기회있을 때 쓰기로 하겠다.

 

                                                             ( 2016.3.15. )

 

 

 

 

 

 

 

 

 




출처 : 독서당 산책
글쓴이 : 대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