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北漢山城 성벽 아래 고려시대 산성 발견

2018. 12. 26. 23:27산 이야기

 

北漢山城 성벽 아래

고려시대 산성 발견

 

 

조축 시기 400~500년 앞당겨질 듯

 

 

북한산성에서 고려시대 성벽이 발견됐다.

 

▲ 부왕동암문 구간 성벽절개지

 

 

조선시대 축조된 부분만 남은 것으로 알려져온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에서 400~500년 소급한 고성(古城)의 흔적이 최초로 발굴된 셈이다.

①북한산성

1. 개요

북한산에 있는 산성.

북한산의 백운대,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의상봉, 원효봉 등을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2.7km이며 내부 면적은 6.2km² 정도로 여의도의 약 1/3에 달한다.

이렇게 크기 때문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우이동, 종로구 구기동, 성북구 정릉동에 걸쳐있으며, 남쪽과 동쪽 성벽이 경기도와 서울을 나누는 기점이 된다.

 

▲북한산성-1

 

 

 

▲북한산성-2

 

 

 

2. 역사적 기록

백제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때 개루왕이 한수 북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근초고왕평양성을 공격한 뒤 한강 이북으로 도성을 옮기고 이후 비류왕 때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되었고, 개로왕도림의 꼬임에 넘어가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이후 신라진흥왕 때에 북한산성에서 고구려와 피 튀기는 전쟁을 벌였다고 되어있고, 북한산순수비가 현 북한산성과 가까운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 위치에 당시에도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때에 들어서면 현종천추태후에 의해 승려가 되어 지금의 진관사인 신혈사에 유폐됐다는 기록과 왕건의 재궁(관)을 거란의 3차 침입 때 향림사로 피신시켰다는 등 북한산에 관련된 기록은 있으나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있는 중흥산성에 주둔했다는 기록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문종밀덕후군주 답게 한양주변의 요충지와 도성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 위치에 산성을 쌓자고 말했지만, 백성만 고생한다는 신료들의 만료로 무산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덕형을 보내서 북한산을 정찰하게 하는데, 이덕형은 산세가 험하고 방어에 좋고, 고려 때 주둔한 흔적이 있으니 우리도 여기에 성을 쌓자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전후 재정 빈곤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과 바로 연결되는 배후 산성이 절실하게 되어 무려 40여년간의 축성논의 끝에 숙종 37년(1711년)에 완료되는데 긴 논의 과정과는 달리 성벽을 쌓은 데에는 단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성을 쌓은 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가 왔다 갔다고 하며 사도세자는 여기에 온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정조는 왕이 되고 난 뒤로 와보지 않았으며 이후 손자인 효명세자가 중흥사를 왕실 원찰로 삼고 중창하고 후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 때는 엄귀비가 찾아와 지금의 무량사를 창건하고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엄귀비는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백일기도를 해 영친왕을 얻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량사에는 엄귀비가 모셨다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

 

그 외에도 각종문집에 북한산에서 놀고 갔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며 이중에는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있다.

 

 

3. 내부시설

성의 시설로는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에는 초루가 설치되었고,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과 수문이 설치되었다.

 

 

 

대서문과 수문 구간이라 추정 되는 곳(북한산성 12성문의 위치)

 

 

 

성곽에는 성문이외에 시단봉 위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 등 3개소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또한 주둔부대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유영지 3개소,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 3개소, 성곽의 관리와 방어를 분담한 승병들이 주둔할 승영사찰 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유사시 도성민들이 전부 들어가 항전할 때 필요 식량을 대략 계산한 결과, 무려 10만석의 곡식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이에 그 많은 곡식을 산성 내에 쌓기는 힘들다고 산 아래에 창고를 지금의 평창동에다 평창이란 이름으로 만들고 5만석을 여기에 비치하게 된다.

 

 

성벽은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는데, 고축(高築)· 반축(半築)·반반축(半半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성벽 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고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은 곳도 있다.

 

 

하지만 여장을 쌓을 시점에 이르러 겨울이 다가와 여장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다.

 

여장을 깬 돌로 쌓으면서 진흙으로 그 빈틈을 속 채움 하고 바깥에는 석회를 발랐다.

 

문제는 이러면 여장이 겨울이 지나면 수축과 팽창 덕분에 무너진다는 것...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러 원 모습이 남아있는 여장은 없으며, 정조 때도 순조 때도 걸핏하면 관리 소홀이다, 수리해야 한다, 이야기가 나와 결국 순조 때 행궁을 포함해서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있는데 복원 했다는 서울시 복원구간의 여장은 한양도성의 여장을 베껴 만들어 성 내에서 성 바깥이 안 보이는 등, 원형과 여장기능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게다가 현황파악도 매우 어려운데 북한산의 지형이 다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부 성벽잔존구간은 접근조차 힘든 절벽위에 있으며 분명 성벽 뒤편으로 나 있었을 순찰로가 침식되어 사라지고 성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성벽 잔존구간 위로 지나가게 되어 훼손이 더 심해지고 있으며 비봉능선에서 북한산으로 이르는 문수봉 구간은 심지어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성벽이 파괴되어 있다.

 

또한 성벽을 지키는 병력이 주둔할 성랑지는 등산객들의 휴식 및 식사장소로 걸핏하면 이용되어 초석의 위치가 바뀌고 지표에 남은 와전류가 훼손되는 현실이다.

 

 

성곽시설 중 암문 중에 시체를 내보내기 위한 시구문이 있는 점, 성문의 여장이 평여장[12]인 점,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동 시기 산성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산성은 축성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루지 않았고, 임금의 행차가 몇 번 있었으나 행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특징이 있다.

 

 

▲1800년대말 북한산성 대서문과 주변 전경

 

 

▲현재의 대서문

 

 

 

산성의 정문은 대성문이었으나 지형상 문제로 숙종은 대서문으로 행차했으며 영조는 대성문으로 내시 등에 업혀서 들어왔다.

 

 

 

▲웅장한 대성문의 모습

 

 

거기에 영조는 나갈 때 당시 소남문이었던 지금의 대남문으로 나가버려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으로 둘 순 없어 문을 크게 만들고 문루를 올려 지금의 대남문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북문에 있던 누각부재를 옮겨서 만들자는 의논이 실록에 남아있다.

 

 

▲지금의 대남문(옛 소남문)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연구원(원장 조유전)은 31일 현장설명회를 열고 북한산성 대서문~수문 구간과 부왕동암문 구간의 성벽 절개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숙종 37년(1711년) 축성한 현 성벽 밑에서 고려시대 세워진 중흥산성의 기저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 부왕동암문 구간 성랑

 

 

 

▲ 대서문~수문 구간 전경

 

 

 

▲ 대서문~수문 구간 성벽절개지

 

 

 

▲ 대서문~수문 구간 회곽로 전경

 

 

 

▲ 대서문~수문구간 성랑

 

 

 

북한산성은 고려 우왕 13년(1387년)에 석성(石城) 중흥산성이 세워졌고 1711년 개축되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울 일대 북쪽을 방어하는 주요 시설로 쓰였다.

②고려 우왕(일몰년도 1365(공민왕 14)~ 1389(공양왕 1), 고려의 제32대 왕(재위기간 1374~88) ※ KBS1드라마 정도전에서 자세히 방영 됨.

 

아명은 모니노(牟尼奴).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신돈(辛旽)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출생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유배되자 당시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전에 신돈의 집에 갔다가 미부(美婦)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공민왕의 아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돈이 죽자 궁중으로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으며,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스승으로 하여 학문을 익혔다.

 

1374년 9월, 죽은 궁인(宮人)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발표되었는데, 같은 달 공민왕이 암살되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종실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을 얻어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부터 북원(北元) 및 명(明)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순탄하지 못했고, 왜구(倭寇)까지 창궐하여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본성이 총명하여 처음에는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으나 점차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宦官)이나 악소배(惡少輩)들과 어울려 사냥이나 유희에 빠졌고, 이인임마저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유배되어 정치적 지지기반도 잃고 말았다.

 

 

1388년(우왕 14)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해오자 이성계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했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유배되면서 폐위되어 강화도(江華島)에 안치되었다.

 

그뒤 여흥군(驪興郡:지금의 驪州)으로 옮겨졌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고, 다음달에 그곳에서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이성계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고려사〉는 우왕의 세가를 열전(列傳) 반역전(叛逆傳)의 신우전(辛禑傳)에 넣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이성계 등이 조선 건국을 합리화시키려는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조병택 연구부장은 “이 발굴로 북한산성 축성 방법을 알 수 있게 됐고, 중흥산성 기저부의 존재를 확인해 처음 축조된 시기를 400~500년 소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어둠속의 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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