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3/14 북한산 (박문호와의 동행 2 )

2018. 12. 26. 22:36산 이야기

  

 

마침내 시내를 따라 내려와 중흥사에 이르니, 절은 비었고 승려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북한산에 승대장(僧大將)이 있어, 팔도의 승병을 총섭하였으니,

여기가 그 치소(治所)이다.

러므로 일을 오직 북한성 내의 승려만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성 밖의 유력자(有力者)에게 열 세 개의 사찰을 빼앗겨서,

모든 승려들이 서로 더불어 절을 비우고 쏟아져 나와 다투었다.”
라고 하였다. 우림이,
“산문의 사람도 벼슬을 다투는가?”
라고 하였다.

 

박문호 일행은 북한산성의 중심지인 중흥사 - 중흥사는 북한산성방어를 위해 모인 

팔도승병을 지휘, 감독하는 팔도도총섭이 머물며 산성내 12개 사찰과 승병들을 관리하던

중심 사찰이었다 - 에 도착하였다.

 

중흥사(1892~1893년)

 

이폴리트 프랑뎅의 중흥사(Jungheungsa temple Mt. Bukhan fortress), '먼 나라 꼬레(Coree)' 전재

 

중흥사 대웅전

 중흥사 대웅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전재.

 

'한북중흥사대웅보전'이 쓰인 대웅전 편액이 걸려 있는 이사진도 이폴리트 프랑뎅의 사진으로 보인다.

 

 

 

박문호 일행보다 먼저 북한산에 갔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 곳 승려들의 안내를 받고 사찰에 머물며 유람을 즐겼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박문호 일행이 도착한 때에는 사찰에 승려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박문호 일행보다 2년 앞선 1880년에 이곳을 찾은 이계서는 유북한기(遊北漢記)에서,

'...불사(佛舍) 12곳을 세워 승려를 모집하여 충당하고 모두 병적(兵籍)에 예속(隸屬)시켜

창고의 곡식으로 먹이며 활쏘기를 익혔다.

런 까닭으로 북한산은 북쪽을 막는 금성탕지(金城湯池)였다.

먼지 대흥사(大興寺)(중흥사의 오기로 보임)로 가니 총섭(摠攝)이 거처하던 곳이다.

그 인장(印章)과 부서(簿書)가 마치 관아같고 아전들이 달리며 불렀는데

다만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을 뿐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불과 2년전 방문한 이계서는

북한산 승려들이 복장만 승려이지 하는 일은 관아의 아전과 같다고 묘사하였으나,

박문호 일행이 방문하였을 즈음에는

북한산성 방어를 위해 건립한 사찰들의 소유권이 누군가에게 넘어가게 되어

승려들의 반발이 컸던 것 같다.

 

현재의 중흥사터 

 

중흥사 축대와 그 앞의 저수조 흔적

  

북한산성내에 전쟁을 대비한 시설중의 하나로 저수지 26개와 우물 99개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저수지의 흔적으로 보인다.

 

 

마침내 절을 나와 산영루(山影樓)에 오르니, 바로 북한 서문(西門) 안이다.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다우니, 지는 해가 빛을 발하는 것이 볼 만하였다.

 

산영루(山影樓)는 서문(대서문)이 아닌 중성문 바로 안에 있다.

산선 방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계곡방향에 있는 대서문의 이중방어를 위해

축성한 내성의 문이 중성문인데,

산영루는 중성문 안쪽 계곡에 위치한 아름다운 누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영루를 찾아 그 정취를 만끽하며 즐겼듯이

박문호 일행도 저녁녘 석양놀 산그림자 비추는 계곡의 아름다음에 취해 갔다.

 

박문호 일행이 산영루를 찾은 때(1882년)와 거의 같은 시기(1884~1885년)의 산영루.

 포크의 산영루(Pleasure Pavilion in the Pukhan), 위스콘신대학 밀워키 도서관 소장 자료 전재.

 

 

위 사진은 1884년부터 주한미국 대리공사를 역임했던

포크(George C. Foulk ,福久)가 남긴 사진으로

최근에 재미한인 이충렬씨가 소개하여 알려진 산영루 사진중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지금은 주춧돌만 쓸쓸이 남아 잡풀과 뒤석여 있다.

 

 

 

산영루의 주춧돌

 

산영루 뒷 편에 늘어선 선정비들.

 

 

 

  

 

이어 민가를 빌려 자고


중흥사 인근 어느 민가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는 박문호와 김택영과 황 현.

 

 

박문호는 37세 충북 보은출신으로 

뛰어난 문재임에도 과거에 거듭 실패하자

올해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 몰두키로 한 정통성리학자이다.

 

김택영는 33세 황해 개성출신으로

17세때 성균관 초시에 합격하고  빼어난 시문을 알렸으나 

고려유민출신의 한계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현 가장 젊은 28세 전남 광양출신으로

 21세에 서울에 올라와 뛰어난 시와 문장을 알리고

당대의 명문장가와 교유하며 과거를 준비하고 있다.

 

이날 셋과 같이 산에 오지 못한 벗 이건창을 빼놓을 수 없다.

이건창은 31세 경기 강화출신으로

 15세인 1866년 강화도에서 격은 병인양요때 할아버지의 자결을 목도하고

강직한 가문과 양명학의 영향으로

19세부터 관직에 올라

엄정한 관료로 이름을 떨치며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정통성리학자 박문호와

3대 명문장가로 평가받을

김택영, 황 현, 이건창...

 

 가렴주구와 부정부패로 나라가 피폐하고 외세의 침략이 거세져 가던 조선후기

학문과 역사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30세 전후의 젊은 이들이

중흥사아에서 잠들던 이날은

그들에게 앞으로 파란만장하게 닥쳐올 자신들의 인생을

미처 모르고 잠들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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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태고사(太古寺)를 거쳐, 용암사(龍巖寺)에 오르니,

바로 용롱봉(龍瀧峯)(용암봉)의 남쪽이다. 드디어 두 귀 사이로 나와서

 

다음날 아침 박문호 일행은 백운대를 향해 나서 태고사 뒷편 용암사(현재는 없음)를 거쳐

용암봉을 지나 두 귀(노적봉과 만경대)사이로 지나갔다.

 

박문호 일행이 다녀간 10년후의 삼각산 모습(1892~1893년)

이폴리트 프랑뎅의 북한산 근경(The front view of  Mt. Bukhan),  '먼 나라 꼬레(Coree)' 전재

 

맨 오른쪽 능선에 작전지휘소인 동장대가 반쯤 보인다.

이 당시 북한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 모습이다.

성밖 10리까지 벌목을 금지하던 조치(사산금표 四山禁票)의 구역이

현재의 북한산성 주능선까지라서 능선 안쪽은 나무 한그루 없는 황량한 모습이다.

 

용암봉 남쪽에 있는 암문인 용암문 

 

 

 

용암문에 바라본 용암봉과 뒤쪽의 만경대.

 

 

 

 

용암문에서 바라몬 보현봉, 문수봉, 남장대지, 의상능선...

  

용암봉밑에서 바라본 만경대

  

만경대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뒷모습

  

만경대와 노적봉사이로 보이는 보현봉, 문수봉....

 

 

노적봉 건너편에 의상능선

 

 

백운대밑의 염초봉과 원효봉(아래)

 

만경대에서 바라본 백운대의 위용.

 

 

 

  

나무꾼을 만나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여 벼랑을 따라 동북쪽으로 가니

또 두 귀가 있는 곳을 만났다.

우림이,

“여기가 백운대인가?”

라고 하니, 나무꾼이,

“맞습니다. 바로 용암봉(만경대)과 백운대 사이입니다.

 

박문호 일행은 나무꾼의 안내에 따라 용암봉을 지나

두 귀가 있는 곳(노적봉과 만경대 사이)를 거쳐

다시 두 귀가 있는 만경대와 백운대 사이에 도착하여

앞에 보이는 백운대를 확인하고 있다.

 

 

이곳은 현재 위문(衛門, 일제시대에 개명된 명칭)으로 불리는 백운봉암문이 있는 곳으로

북한산성 성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백운봉암문에서 백운대 오르는 길.

 

 

 

 

 이곳에서 삼각산에 대한 나무꾼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산이 도봉산 서쪽에서 오다가 한 번 솟아 용암봉(만경대로 보임)이 되었으니,

이것이 남각(南角)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장(萬丈) 마을의 노래에 ‘나라를 진호(鎭護)하는 명산 만장봉〔國名山萬丈峯〕’이라

하니, 이것입니다. 삼면이 깎아 만든 듯한데, 동쪽에 흙이 꽤 얹혀 있어

초목이 자라고 있으므로 잡고 오를 수 있습니다.

서쪽은 노적봉이요, 남쪽으로 뻗은 것은 부악산과 인왕산 등 여러 산이 되었습니다.

 

  

 백운대쪽에서 바라본 남각 만경대

 

 

 

두 번째 솟아 서북쪽으로 백운대가 되었으니, 이것이 중각(中角)입니다.

용암봉(만경대로 보임)에 비해 더욱 험하니, 사면이 깎아 만든 듯한데,

위는 평평하고 흙이 얹혀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중각 백운대 

  

 

세 번째 솟아서 동북쪽으로 인수봉(仁壽峯)이 되었으니, 이것이 북각(北角)입니다.

백운대와 더불어 두 귀가 됩니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귀인이 또 말하기를, ‘독석(獨石)이 백운대에 비해 더욱 기이하고 험합니다.

전체에 바위가 서 있어서 연꽃이 물속에서 나왔으나 아직 피지 않은 것 같으니,

참으로 천하의 기이한 볼거리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삼각(三角)입니다.”라고 하였다. 

 

 

 

북각 인수봉

 

 

삼각을 북각, 중각, 남각으로 구분하며 각각의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는

전문가이드(나무꾼)을 따라 이윽고 백운대에 오른다.

 

 

장차 백운대에 오르는데, 나무꾼이 앞에 서고, 우림이 그 다음에,

내가 또 그 다음에 서고, 운경이 뒤에 섰다.

백운봉 중간에 이르니, 가장 험한 곳이다.

 

 

 인수봉을 보며 오르는 급경사 백운대 

 

 

 

 

나무꾼, 김택영, 박문호, 황현 순으로 가파른 암벽을 기어올라 

결단암이라는 부르는 백운대 중간에 이르렀다.

 

 

세속에서는 ‘결단암(決斷巖)’이라고 부르니,

올라가는 자와 오르지 못하는 자가

이곳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지금은 정상까지 철봉과 철제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백운대를 오르는게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박문호 일행이 오르던 그 당시는  7~80도의 깍아지른 절벽을

맨몸으로 올라야 했기때문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고

그 용기의 시험대가 결단암이라 부르는 백운대 중턱이었다.

 

 

 

박문호 일행보다 앞선 170년전,

북한산성 축성 이듬해인 1712년에 북한산 유람을 떠난 성호 이익은, 

'...노적봉일대를 경유하며 북한산성에 올라 인수봉을 관망하고

백운중대(白雲中臺)에 이르러 길이 위험하여 산행을 중단하였다...'

라고 기록 하였다.

 

 

이익이 길이 위험하여 산행을 중단한 백운중대는 결단암임을 말하고 있다.

 

이익이 다녀간 몇 십년이 지난 1779년

문신 이엽은 3일간 북한도봉산을 유람하고,

'...백운대는 험하고 높아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웅장하다.

산 중턱 바위틈을 따라 구멍을 파서 위험한 좁은 길을 내었는데,

몸이 가볍고 발이 단단한 사람은 암벽을 더위잡고 기어서

겨우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한번 미끄러지면 곧장 천길 절벽이니

목숨을 버린 자가 아니라면 올라갈 수 없다...'

라고 기록 하였고, 동행한 유광천도,

'...산허리에 옛날부터 바위에 구멍을 뚫어 발을 댈 수 있는 곳이 있는데,

한 번 미끄러지면 천길 낭떨어지라 결코 목숨을 아끼는 자가 아니라야

감히 다리로 버틸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올려다보는데,

오직 모골이 서늘질뿐이다...'

라고 기록 하였다.

 

 

 

1858년 유학자 양의영은 유북한기(遊北漢記)에서,

'...절의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으로부터 백운대(白雲臺)를 올라가면 길은 빠른데 약간 평평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돌을 깎아 움푹 파이게 만들어 발을 디디고 올라가야 할 것이

모두 수천 척(尺)입니다.

결암(決巖)이 있는데,

두 바위가 마주보고 있고 그 가운데는 구덩이가 있습니다.

넓이가 한 척이 넘고 깊이는 수천 장(丈)입니다.

능히 뛰어서 이 구덩이를 건너가는 자는 백운대에 올라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자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정하는 의미에서 결암이라고 부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옷을 걷고 올라가려고 하니,

자흥과 원견이 위험한 곳을 지나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모두,

“아래로부터 위를 바라보는 것이 또한 높은 곳을 올라 아래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필이면 험준한 곳을 지나 뾰쪽한 바위를 오른 뒤에야 아름다운 경치를 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만 두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각산 백운대를 오르는 이들은 모두 

백운대의 모골 송연한 결단암 코스에 혀를 내두르며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드디어 옷과 삿갓, 신발, 버선을 벗고, 손발을 구멍 속에 넣고 기어서 나아갔다.

운경이 멈추고 오르지 못했다. 나무꾼이,
“원래 여기를 오르는 자들은 서넛에서 백십 명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중에 한 사람은 오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여기에서 옷가지를 지키는 자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명산 정토(淨土)에서도 도둑에 대비해야 하는가?”
라고 하였다.

 

  

백운대 중간까지 오른 후 

깍아지른 바위사이에 뚫은 구멍을 밟고 기어 올라야 하기에 

유학자들이 체면불구하고 옷과 신발 버선을 모두 벗고 암벽을 기어 오르는데 

가장 젊은 겁쟁이 광양 촌놈 황현은 오르기를 포기하고

무리중 한 명은 반드시 오르지 못하는 전통(?)에 따라

 옷지키는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가파른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이 곳이 결단암이 아닐까? 

 

 

 

처음에 우림과 백운대에 오르기로 약속할 때는 호방하게 노래했는데,

이윽고 정신이 어질해져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통곡한 것은 다 까닭이 있었고,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가 백운대에 오르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그 또한 일찍이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 징계한 것이었다.

 

간신히 정상에 오른 일행은

정신이 아찔하고 오금이 저려 잠깐 머물다 곧바로 하산하였다.

박문호는 '이우의 통곡과 이덕무의 경계'를 떠올리며 자신들의 호기를 책망하고 있다. 

 

장차 내려가는데 누운 채 구멍에 수족을 넣고 조금씩 내려왔다.

이윽고 운경과 서로 붙잡고 크게 웃었다. 운경이,

“금강산(金剛山)의 비로봉(毘盧峯)과 망군봉(望軍峯)도 이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라고 하였다. 우림이,

“송악산(松嶽山)과 천마산(天馬山)도 이곳에 비하면 도리어 평지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속리산의 문장대(文藏臺)와 관악산(冠岳山)의 연주대(戀主臺)도 이렇지 않다.”

라고 하였다.

 

간신히 내려 온 일행은 황현과의 해후를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한 해전 금강산을 다녀온 황현과

개성 출신으로 송악산을 아는 김택영과

충청 출신으로 과천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 박문호가

각자 자기가 경험한 산을 비교하며

백운대의 험한 산세에 놀라운을 금치 못하고 있다.

 

 

마침내 성을 나와 동쪽으로 가서 도선암(道詵菴)에 이르러 묵고,

다음날 혜화문(惠化門)을 경유하여 들어가 봉조(鳳藻) 학사를 찾아갔다.

봉조(이건창)가,
“나 또한 일찍이 백운대에 간 적이 있었다. 청컨대 삼각의 우열을 논해 보자.

 

박문호 일행이 돌아온 혜화문(1911년) 

독일인 신부 Norbert Weber의 혜화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전재.

 

백운봉암문 밑 도선암에서 하루 묵은 일행은

다음날 도성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을 거쳐 돌아와

그들의 친구인 봉조학사(영재 이건창)를 찾아가

이건창의 삼각론(?)으로 북한산행을 정리한다. 

 

용암봉(만경대)은 여럿 중에서 뛰어나기는 하나 뛰어나게 기이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모두 그 꼭대기에 이를 수 있으니, 또한 싫어서 버리고 이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암봉을 버리면 삼각은 완전하지 않으니, 이것이 또 삼각의 장점이다.

비유하면 문장에 재주는 부족하나 역량이 뛰어난 자와 같으니,

경모(景謨) 박문호(朴文鎬)의 문장이 이와 비슷하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역량이 있어 꼭 필요한  만경대는 박문호의 문장이고,

 

백운대는 기이함으로 그 기이함 만드는 것을 이겨서,

자못 사람을 떠나고자 하나 이르는 자가 항상 많다.

비유하면 문장에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자와 같으니,

운경의 문장이 이와 비슷하다.

 

 재주는 넘치나 역량이 못미치는 백운대는 황 현의 문장이고,

 

인수봉은 세상을 떨치고 홀로 서서, 사람을 막지 않으나 사람이 저절로 이를 수 없다.

비유하면 문장에 천품이 매우 높아 재력으로 논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우림의 문장이 이와 비슷하다.”
라고 하였다.

 

사람이 넘보기 힘든 품격을 지닌 인수봉은 김택영의 문장이라고

이건창이 삼각과 세친구의 문장을 평한다. 

 

 북한지(北漢誌)에 수록된 '북한도2'

 

이에 기록한다. 임오년(1882년, 고종 19년) 3월 3일이다.

 

 나는 기록한다. 박문호일행과 동행한 날은  2010년 3월 1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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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은 어린 나이부터 관직에 올라 지행합일의 양명학 학풍을 견지하여

불의와 부정을 용납하지 않고 백성구휼에 힘쓴 결과 

두번의 유배생활을 격고 각처 백성들의 감사의 불망비(不忘碑)가 세워졌다.

갑오경장이후 모든 관직제의를 거절하고 1896년 해주관찰사를 거부하여 세번째 귀양을 갔다.

이후 고향 강화에 내려와 2년후인 1898년 47세의 나이로 가장 먼저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록한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남겼다.

 

김택영은 

북한산 산행 이듬 해(1883년)중국의 진보적 지식인 장첸(張騫)과의 교류로 시문을 인정받았다.

출신성분으로 관직에 못 오르다 뒤늦은 42세(1891년) 진사가 되고

그후 1905년까지  중추원 서기관, 홍문관 통정대부, 학부 편집위원을 지냈다.

1908년 을사조약에 나라의 운명을 통탄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장첸의 도움으로 한문학에 대한 정리와 역사서술에 힘썼다.

1927년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중국에서 숨을 놓았다.

역사서 <한사경 韓史警>, 시문집 <소호당집 韶護堂集> 등을 남겼다.

 

황 현

북한산 산행 이듬 해(1883년)에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2등으로 강등되어

벼슬길을 단념하고 귀향했다.

1888년 부친의 간청으로 성균관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만연한 부정부패에 실망하고 낙향하여

중앙에 개혁방안을 제시하거나 매국노를 성토하거나 애국지사를 애도하였다.

1908년 사립학교인 호양학교를 세워 신학문으로 가르치던중

1910년 56세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구한말 격동의 역사현장을 기록한 <매천야록 梅泉野錄>을 남겼다.

 

박문호는 고향 보은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몰두하며 <호산집 壺山集 >을 비롯하여

260여권의 방대한 성리학서를 남겨 정통성리학의 큰 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벗들의 죽음과 망명을 지켜보며 일제시대 중반 1918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박문호는 먼저 간 황현의 묘표(墓表:무덤앞에 세우는 푯말)에 황현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썼으며

김택영은 황현의 글을 모아 중국에서 <매천집 梅泉集>을 편집 간행하였다.

 

후세에 이건창, 김택영, 황 현 세사람을 한말 3대 명문장가로 칭한다.

 

 

 

 

출처 : 도성과 북한산성 이야기 그리고
글쓴이 : 구구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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