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7 북한산 (이옥과의 동행)

2018. 12. 26. 22:39산 이야기

 

1793년 음력 8월 26일, 아침 일찍 이옥(李玉)은 일행 3명(성균관 동료 김려와 그의 아우 김선, 선배 원모보)과 함께 동자를 앞세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백악(북악산)과 인왕산사이에 있는 창의문을 나섰다.  

 

나는 2월 7일 일요일 아침 늦게 광화문에서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를 넘어갔다. 

 

 <동국여도(東國輿圖)中 도성도(都城圖) - 규장각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中 도성연융북한합도(都城鍊戎北漢合圖) - 규장각소장>

앞부분의 도성부터 뒤로 탕춘대성과 연융대, 북한산성을 함께 나타낸 지도.

오른편 상단에 도봉산이 훔쳐보듯 서있다.

 

 <동국여도(東國輿圖)中 도성연융북한합도(都城鍊戎北漢合圖)>의 일부분.

앞의 탕춘대성과 연융대 지역(현재 평창동, 구기동 지역),

그 뒤로 북한산 봉우리들을 향해 이옥일행은 나섰다.

 

 

이옥일행이 북한산으로 나서는 그날은 맑은 날씨의 이른 가을 날이었다.

모두들 단풍을 보기에 너무 이르다고 예상하며 나섰다.

 

 

 영하의 기온에서 벗어난 따뜻한 겨울 날, 맑은 날씨에 나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옥이 김려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취하였는데, 김려가 이옥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가? 가을 기운이 사람의 폐부에 스며들고 성시(城市)에서의 나날은 우울하여 스스로 즐겁지가 않다. 나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을 보러 가고자 하는데, 함께 가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내 아우 홍(鴻)(김선)이 실제 이번 산행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대도 함께 가기를 원한다.”

라고 하니, 이옥이 말하기를,

“그러세. 날짜를 정하게.”

라고 하니,

“27일이 길(吉)한 듯 하네.”

라고 하였다. 이에,

“늦네, 엊그제 얘기했다는 날이 있지 않은가?”

하니, 김려가 말하기를,

“좋네.”

라고 하여 26일 산에 들어가는 날을 잡고 유람할 의논을 정하였다.

다른 날, 이옥은 성균관(成均館) 동구에서 원모보를 만나 동행키로 약속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말 북한산에 오르는 습관대로 오늘도 역시 북한산이다.

다만 주말이 임박하면 나타나는 습관적인 고민- 이번엔 어느 코스로 갈까?-을 하다가,

오늘은 200여년전 북한산을 유람하고 아름다운 유람기를 남긴 이옥의 발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성시(城市)에서의 나날은 우울하여 스스로 즐겁지가 않아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보러 나서는 이옥과 김려.

성균관 유생신분의 동료인 두 사람은 그 당시 즐겁지 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고자 한는 정조대왕은 1년전 이옥 등을 지목하여

문체를 올바르게 고칠 것을 명하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도하였는데

그당시 유행하는 명청(明淸) 소설의 수입을 금지하고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구사하는

'열하일기'의 박지원과 서얼출신 유생 이옥 등에게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글을 지어 문체를 바꿀 것을 지시했다.

전통적인 문장을 벗어나 소설체 문장으로 임금에게 대표적으로 찍힌(?) 이옥은

원치않는 글쓰기 숙제를 하던 기간중이었는데 

비슷한 성향의 김려와 이심전심으로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북한산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옥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멀리 교외로 나가는 자를 보니

계획을 거듭하고 돌아올 날짜를 망설이면서 며칠 동안 심신을 허비하여 행장을 꾸렸는데도

매양 미흡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라고 하였으니,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척촉장(躑躅杖)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班竹) 시통(詩筒) 하나, 통 속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권(詩卷) 하나,

채전축(彩牋軸) 하나, 일인용(一人用) 찬합 하나, 유의(油衣)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하였다.

일행에게는 짧은 담뱃대 두 개, 허리에 차는 작은 칼 두 개, 담배주머니 셋, 화겸(火鎌) 세 개,

천수필(天水筆) 한 자루, 견지(蠲紙) 세 폭이 있었다.

사람마다 각자 갈아 신을 미투리 한 켤레씩을 신었으며, 손에 접는 부채 하나씩을 쥐었고,

주머니 속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 오십 전뿐이었다,

스스로 잘 정돈되었다고 여겨 흐뭇해했는데

5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

 

내 산행 준비물은 작은 배낭에 넣어도 공간이 넉넉할 정도로 양이 적고 가볍다.

항상 배낭에 담겨있는 우산, 헤드랜턴, 작은 칼, 휴지, 비닐봉투

그리고 매주 새로 챙기는 것으로 보리차 가득 채운 물통과 수건과 디카

그리고 아직 녹지않은 눈길을 대비한 아이젠과 장갑, 쵸코렛, 맥주 한 캔,

핸드폰과 약간의 현금을 준비했다.

 

산에서 이틀 머물기로 한 이옥일행은 머무는 만큼이나 준비물도 많았다.

5리쯤 가다 생각난 챙기지 못한 붓과 먹과 벼루는 어찌 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떠난 후에 빼먹은 준비물이 문득 생각나는 ‘아뿔싸 현상’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

 

이번 걸음 전후로, 세검정에서 인왕산(仁王山)을 따라 한번 나선 적이 있고,

종이를 사기 위해 나선 적이 있으며,

임금의 거둥을 맞이하기 위해 나선 적이 있고,

승가사(僧伽寺)에 들어가기 위해 나선 적이 있다.

이번을 포함하여 나선 것이 다섯 번이다.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홍지문 근처 상명대앞에서 내렸다.

오늘은 세검정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구기계곡으로 여러번 올랐었고 두어번 탕춘대능선을 따라 올랐었다.

 

 

 

 

 

연융대(練戎臺)에 세검정(洗劍亭)이 있다.

 

세검정은 도성에 가깝고 비록 이름난 곳이기는 하지만

돌은 너무 평평하고 물살은 너무 빠르며 땅은 너무 환하게 밝고 산의 모습은 너무 경쾌하기만 하여

단지 귀족층 공자(公子) 소년이 갈 만한 곳이다.

 

 

이옥과 동시대를 살았던 정약용-그해 이옥은 34세이었고 정약용은 두살 어린 32세였다- 도

세검정을 자주 찾았다.

 

어느 여름날 도성안에서 검은 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고, 마른 천둥소리가 은은히 들리자

'

세검정의 뛰어난 경치는 소나기가 쏟아질 때 폭포를 보는 것뿐이다' 라며  

 

친구들과 말에 올라타고 부리나케 세검정으로 달려갔다.

 

소나기에 산골 물이 갑자기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물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였고

흘러내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이 내리치는 물 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물은 정자의 초석(楚石)을 할퀴고 지나갔다.

정약용이  묻기를,

“어떻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고 했다.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하고 익살스런 농담을 하며 즐겼다.

 

조금 있자니 비도 그치고 구름도 걷혔으며 산골 물도 점점 잔잔해졌다.

 

석양이 나무에 걸리니, 붉으락푸르락 천태만상이었다.

 

서로를 베고 누워서 시를 읊조렸다.

 

- 다산시문집 <세검정(洗劍亭)에서 노닌 기(記)>중에서 - 

 

세검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던 정약용과

 너무 환하게 밝고 경쾌하기만 하여 단지 귀족층 공자(公子) 소년이 갈 만한 곳이다던 이옥.

정조의 투터운 신임으로 장원급제후 정통 엘리트 관료코스를 밟고 있던 수재 정약용과

정조에게 문체를 지적받아 곤란한 입장에 처한 성균관유생 신분의 이옥이 말하는 세검정은

세검정 계곡에 투영되었던 그들이 처지를 말하였던 것은 아닐까...

 

 

 

인조반정시 광해군 폐위를 모의할 때와 쿠테타에 성공한 후 검을 씻었다는 세검정(洗劍亭).

실록편찬 과정의 원고를 모아 물에 깨끗이 씻는 세초(洗草)작업을 하고 재생지(환지)를 만들었던 세검정.

병자호란때 청나라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들(환향녀)의 더럽혀진 몸을 씻게 했다는 세검정.

세검정계곡 물이 깨끗해서 일까 유독 세탁, 세례의식이 많았던 곳이었다.

 

 

1883년 미국 천문학자 Percival Lowell이 촬영한 세검정

세검정 뒤편 완만한 기슭에 세초작업중인 한지가 널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여러 기록이 남아있는 곳.

현재 세검정 정자 주변에는 주택이 들어서고 계곡안으로 도로와 산책로가 침범하여 

아름다웠던 경관이 다 망가지고 정자와 평평한 계곡 바위 흔적만 남아 있다.  

 

 

 

시멘콘크리트로 계곡을 좁히고 그것도 모자라 돌을 깔고 산책로를 만들었다.

아무리 정성들인 인공 조형물일지라도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을 이길 수 없거늘

인간의 부질없는 삽질은 계속되고 있다. 

 

 

세검정이 있는 지역은 북한산성과 도성사이를 잇는 탕춘대성 안쪽지역-현재의 평창동과 구기동 지역-으로

북한산성 방비를 위한 군시설과 종이제조기관인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탕춘대성은 북한산성 축조후 도성 북쪽을 보강하기위해 숙종 44년(1718)에 축성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인왕산에서 북한산 향로봉까지 약 4km를 완성하였다.

탕춘대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동국여도(東國輿圖)中  연융대도(鍊戎臺圖) - 규장각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中  연융대도(鍊戎臺圖)>의 일부분.

 

이옥일행은 창의문밖을 나서서 조지서 고개를 내려와 탕춘대성을 바라보며

한북문(漢北門,현재의 홍지문)위 세검정을 지나 종이를 사기위해 왔던 조지서 앞 길로 지나갔다.

 

 <동국여도中 연융대도>의 일부분.

이옥일행은 조지서 앞을 지나 계곡 길로 접어들어 승가사가 있는 비봉방향으로 갔다.

 

맹교(孟嶠)에서 자고 아침 일찍 도성을 나서 승가사(僧伽寺)에서 밥을 먹고,

또 태고사(太古寺)에서 밥을 먹고 거기서 잤다.

아침은 잔 곳에서 먹고 저녁은 부왕사(扶旺寺)에서 먹고 진국사(鎭國寺)에서 잤다.

밥은 전처럼 잔 데서 먹었다.

돌아와 성균관에서 밥을 먹고 다시 맹교에서 잤다.

모두 나흘 밤을 자고 일곱 끼를 먹었다.

 

보통 등산로입구에서 김밥을 마련해서 올라가는데 점심시간(12시)이라

기동 입구에 있는 할머니두부집에 들러 콩비지를 먹고 난 후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이옥이 아침밥 먹었던 승가사로...

 

 

 

 

구기계곡으로 오르다가 계곡 중간쯤 휴게터에서 왼쪽 사모바위 방향으로

숨을 몰아 쉬며 올라가자 승가사 나타났다. 삼각산 승가사.

 

 

  

산성 서남쪽에 지장암(地藏菴), 옥천암(玉泉菴) 등이 있는데 승가사(僧伽寺)가 거느린 암자들이다.

승가사의 명부전(冥府殿)과 극락전은 둘이지만 한 건물로 되어 있었고, 장수전(長壽殿)이 있고,

재실(齋室)이 있고, 부도사(浮屠舍)가 있고, 승료(僧寮)가 있어 꽤 넓었다.

문루(門樓)는 모두 새로 손질한 것인데, 단청을 하고 도벽(塗壁)을 한 솜씨가

성중에서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없을 것 같다.....

 

화려한 단청을 뽐내고 있는 승가사.

 

 

 

 

대웅전 좌측에 있는 명부전, 코앞에 커다란 바위가 가로 막고 있다.

 

 

승가사는 유독 다섯의 불상을 봉안했는데,

그 하나를 장수불(長壽佛)이라 하여 옥을 갈아 만들고

금을 상감(象嵌)하여 호사스럽게 꾸며 놓았다.

몇 해 전에 북경의 사찰로부터 온 것으로 말미암아 설치한 것이다.

불실(佛室)에 들어가니 오방(五方)이 모두 그림이었다.

부처를 그린 것은 아름다웠고, 나한을 그린 것은 어지러웠고,

시왕(十王)을 그린 것은 교만스럽게 되어 있고, 귀신을 그린 것은 불똥이 튀듯 하고,

옥녀(玉女)를 그린 것은 부박했고, 용을 그린 것은 산란스러웠고,

난봉(鸞鳳)을 그린 것은 빼어났고, 지옥을 그린 것은 처참한 느낌을 주면서도 묘했고,

윤회를 그린 것은 분잡한 듯했지만 또렷했다.

들은 바로 인해 상상하고, 상상한 것으로 인해 형상화시키고,

형상화시킴으로 인해 실체를 잃게 되어 이와 같이 멍하고 어렴풋하게 된다.

군자(君子)는 몸을 더럽힐까 하여 감상하지 않고, 소인(小人)은 그것을 공경하여 이마를 조아린다.

 

   

 

 

 

대웅전 뒷편에 있는 석가마애좌불(보물215호)

 

 

 

 

 여러 절에는 불교경전이 전혀 없었는데

오직 승가사(僧伽寺)와 부왕사(扶旺寺)에만은 약간 남아 있었는데,

비록 있기는 하지만 책장이 떨어져 나가고 꿰맨 실이 흩어져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은 ‘결수문(結手文)’과 《은중경(恩重經)》,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여섯 묶음뿐이다. 경전에 통한 승려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 불교의 실상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승가사에는 승려 십여 명이 있었는데 천열(天烈)은 길을 안내하였고 경흡(敬洽)은 경을 강설하였다.

또 이제 막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명(法名)을 아직 받지 못한 자도 있었는데

자못 곱고 슬기롭게 보였다. 그는 절 뒤채로 몸을 숨겨 사람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승가사 경내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전경

 

승가사를 우회하여 오르면 사모바위가나타난다.

사모관대 모양의 사모바위

 

사모바위에서 바라본 의상능선과 능선너머 백운대

 

 

승가봉에서 바라본 비봉과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승가사

  

승가봉에서 바라본 구기계곡과 구기동 평창동지역, 그 뒤로 서울시내 전경

 

승가봉에서 바라본 문수봉 방향 - 왼쪽부터 나한봉, 715봉, 문수봉. 

지금은 등산객들이 능선을 따라 철봉에 의지하여 문수봉에 오르지만

이옥일행은 능선 왼쪽 715봉과 문수봉사이 계곡을 따라 청수동암문을 향해 올라갔다.

 

                      가파른 계곡을 오르면 사진 오른쪽 푹 꺼진 부분에 청수동암문이 나타난다.

 

 

 

 

                                                       가파른 계곡위에 있는 청수동암문. 

 

 

 

 

 북한산으로 들어가는 서남쪽 작은 문이 문수암문(文殊暗門)이며,

산에서 나오는 동남쪽 작은 문이 보국암문(輔國暗門)이다.

암문(暗門)이란 초루(譙樓)를 세우지 않고 성에 구멍, 즉 출입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수봉과 715봉 사이의 청수동암문(이옥은 문수봉밑에 있는 문수암문이라고 했다)

이옥일행은 드디어 문수암문을 통과하며 북한산성에 들어섰다.

 

 <동국여도(東國輿圖)中 북한성도(北漢城圖) - 규장각소장>

 

지도 밑부분에 비봉능선의 주요 봉우리인 향로봉과 비봉 그리고 승가사를 품은 승가봉이 그려져 있고

능선을 따라 성곽으로 둘러쌓인 북한산성과 산성안에 여러 건물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동국여도(東國輿圖)中 북한성도(北漢城圖)>의 일부분

 

 이옥일행은 문수봉을 지나 대남문을 향했다.

 

산성 안은 모두 산이니, 그 때문에 절이 있는 것이 무릇 열두 곳이다.

문수사(文殊寺)가 있었는데 없어졌고, 중흥사, 태고사(太古寺), 용암사(龍巖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부왕사(扶旺寺), 진국사(鎭國寺), 보국사(輔國寺)가 있는데,

이 순서는 내가 본대로 적은 것이다.

원각사(圓覺寺), 국녕사(國寧寺), 보광사(普光寺)는 내가 보지 못했는데,

보았더라도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을 것이다.

 

이옥은 문수사가 없어진 절로 기록했는데 현재 문수사는 대남문밖 문수봉 바로 아래에 있다.

이옥이 성밖의 문수사를 보지 못해 없어진 절로 판단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승려들이 이옥일행을 줄곳 안내했던 것으로 보아 절에 관한한 착오가 있을리 없는데...

미스테리한 문수사다.

 

나는 문수봉에 올라 잠시 숨을 돌렸다.

 

문수봉에서 본 보현봉과 문수사 지붕 끄트머리.

 

 

1911년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수도회 원장 베버(Norbert Weber)신부가 촬영한 문수사

 

문수봉에서 바라본 백운대

 

그리고 백운대와 건배.

 

이옥일행은 도성(都城) 문을 나서며 삼장(三章)의 법-세가지 규칙-을 세웠다.

시와 술과 몸가짐 세가지 인데, 그 중 술에 대한 다짐은 다음과 같이 했다.

 

둘째, 술에 대한 규율이다.

산골짜기나 개울가에 다행히 주막이 있거든 술이 붉은지 누런지 묻지 말 것이며,

맑은지 걸쭉한지 묻지 말 것이며, 술파는 여자가 어떠한지 묻지 말 일이다.

우리가 숫자가 많다고 허용하지 않으면 마시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술이란 한 잔을 마시면 화기가 돌고 두 잔을 마시면 취기가 오르게 되고,

석 잔을 마시면 노래하게 되어, 말이 많아지지 않으면 비틀거리게 되는 것이니

술을 마시기는 하되 석 잔에 이르는 것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석가여래가 이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증명해 줄 것이다.

 

지나치게 마시는 것을 삼가하되 여유있게 즐기는 술을 다짐하고는 이옥은 꼼꼼하게 술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맹교에서 두 번 마셨는데 전후로 모두 네 잔이었다.

행궁(行宮) 앞 주막에서 한 잔 반을 마시고, 태고사(太古寺)에서 반잔을 마시고,

상운사(祥雲寺)에서 한 잔을 마시고, 훈국창(訓局倉) 주막에서 한 잔을 마셨다.

아침에 안개가 너무 껴서 승려를 보내 술을 받아오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손가장에서 한 잔을 마시고, 약사전에서 한 잔을 마시고,

혜화문(惠化門)에서 청포차림에 나귀를 타고 오는 이를 맞아 함께 마셨는데,

마신 것이 한 종(鍾)이었다.

성균관에서 두 잔을 마시고, 계자항(桂子巷)에서 한 잔을 마셨다.

종(鍾)이라 한 것은 맑은 술이고, 완(碗)이라고 한 것은 흰 술이고,

상(觴)은 진국 술을 말한다. 다른 말로 배(杯)라고 한 것은 홍로(紅露)를 말한다. 

산에 갈 때는 술이 진실로 없을 수 없으나, 또한 진실로 많아서도 안 된다.

 

 

산밖에서와 같이 술을 퍼마시다가 떠들고 소리지르고 노래부르다가 비틀거리고 엎어지고 깨지고 부러져서

마침내 헬기타고 하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옥의 산과 술의 규율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을만 하다.

 

진실로 많지않은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대남문으로 내려왔다.

 

 

직접 지나다니며 본 것은 대남문(大南門), 대서문(大西門) 그리고 동북암문(東北暗門)으로

성 가운데 관문(關門)을 만들어 한어문(捍禦門)이라 한 것이고,

멀리 바라보기만 한 것은 외성(外城)의 한북문(漢北門)과 대동문(大東門), 동장대(東將臺)이다.

성가퀴〔雉堞〕은 도성에 비하여 비록 낮고 얕지만 초루는 모두 새로 단장하여 산뜻하다.

성곽과 회랑(回廊)은 규모 있게 되어 있어, 창졸간에 일이 생겨도 외적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여장과 문루는 도성에 비해 낮고 얕지만 성곽은 높고 험해서

외침에 대비하기에 알맞은 산성임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근래에 새로 복원한 성곽과 대남문.

 

 

 

이옥일행은 대남문을 거쳐 산성안쪽 계곡으로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대남문 오른쪽으로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순으로 문이 있는데

이옥일행은 대남문은 직접 보고 대동문은 멀리서 보고 보국문으로 성을 나왔다고 하였다.

이옥은 대성문에 대한 언급은 하지않았는데 대남문아래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오른쪽 능선에 있는 대성문은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임금의 북한산성 행차시 도성뒷산 백악을 출발하여 형제능선을 넘어 행궁에 이르는

어도(御道-임금의 길)를 사용하는데 대성문(大成門)은 어도에 특별히 설치한 임금 출입용 성문으로 

산성의 4개 성문보다 규모가 크다.

 

산성 안쪽에서 본 대성문.

 

 

1911년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수도회 원장 베버(Norbert Weber)신부가 촬영한 대성문

초루(문루)는 전부 파손되어 흔적이 없다. 일제시대 누구도 돌보지 않는채 허물어져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옥이행이 내려 간 계곡은 흐르던 물이 얼어 겨울색을 드러내고 있다. 

 

 

 

 

어영청이 있던 자리, 어영청 유영지

 

금위영이 있던 자리, 금위영유영지

 

금위영 축대와 물흐르는 누조석이 금위영 규모의 방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허물어져 가는 금위영 축대.

 

북한산성 축조 4년후인 숙종 41년(1715년) 금위영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사실을 기록한

비(금위영이건기비)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보호하고 있으나 형편이 말이 아니다.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산성을 관장하는 세 장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중 금위영과 여영청을 지나

중흥사 방향으로 내려가며  행궁과 창고, 무기고 등 관아 건물을 둘러보고 기록을 남겼다.

 

산성 안에는 행궁(行宮)이 있는데 석림헌(昔臨軒)이라고 한다.

선원첩(璿源牒)을 보관하는 곳이 있고, 산성을 관장하는 장영(將營)이 있고 훈국창(訓局倉)이 있고

금영창(禁營倉)이 있고 어영창(御營倉)이 있는데 모두 한 곳이 아니다.

화약고(火藥庫)와 총섭영(總攝營)은 중흥사(重興寺) 옆에 있는 데 군량과 갑옷, 병기를 보관하여

산성을 지키는 방책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대남문에서 내려가는 길에 절과 관아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북한성도. 

 <동국여도(東國輿圖)中 북한성도(北漢城圖)>의 일부분

이옥일행은 사진 아래부분 대남문에서 빨간선의 길을 따라 내려갔다.

 

경리청상창(經理廳上倉)이 있던 자리, 경리청상창지  

 

 

북한산성내에는 창고가 4개 있었다. 군량미 비축창고인 경리청 상창, 중창(중흥사), 하창(대서문안)과

어공미를 보관하던 호조창이 있었다.

 

 

임금의 북한산성에 행차시 머무는 곳, 행궁(行宮)

임금의 처소인 외전(外殿) 왕비가 머무르는 내전(內殿), 기타 건물로 구성되어

왕실족보인 선원첩(璿源牒)을 보관하고 있고

면적은 1만1,388㎡ 규모로 석림헌(昔臨軒)이라고 한다.

 

 

이옥은 이 길을 지나며 삼각산 봉우리와 동장대를 멀리서 보았을 것이다. 

 

 이옥일행의 삼장(三章)의 법중 하나는 산을 오르는 자세에 대한 다짐이었다. 

 

셋째, 몸가짐에 대한 규율이다.

이미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어 준비를 마쳤고 이미 옷을 걷어 올렸으니,

몸을 기울여 올라도 되고, 험한 비탈을 올라도 되며, 무너진 다리를 뛰어 건너도 되고,

험한 구렁을 누벼도 된다.

그러나 백운대(白雲臺)에 오르려는 것은 안 된다.

올라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올라가면 안 된다.

이 말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산신(山神)이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산을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양반 체면은 거두어 버리고 온몸을 자유자재로 산하를 누비되

정상인 백운대만은 오르지 않기로 하였다.

옥황상제에 이어 산신의 이름을 거명하며...

왜 백운대 정상에 오르지 않기로 했을까?

이옥은 불화(佛畵)를 보며 '들은 바로 인해 상상하고, 상상한 것으로 인해 형상화시키고,

형상화시킴으로 인해 실체를 잃게 된다'고 했다.

 

실체를 봄으로 인해 형상화 되는 백운대보다 상상속의 백운대로 남겨두기로 한 것 같다.  

 

오르지 않은 백운대는 이옥에게 신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로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리라...

 

기어이 정상에 올라야만 자타가 산에 올랐다고 인정하는 등산습관과

기필코 정상을 올라야만 하는 정복욕에 일침을 가하는 규율이 아닐까...

 

 

이윽고 도달한 중흥사.

 

북한산성 축조시 중흥사외 12개 사찰을 짓거나 복원, 중창하여 전국의 승병를 모았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방어를 위한 승병군영(緇營)이 있는 절로써 

팔도도도총섭(八道都摠攝, 전국승병의 총사령관)의 지휘로 운영되었다.

 

도성 문을 나서며 이미 승려를 만났고 북한산에 이르러 점점 많이 만났는데

절에 들어서는 승려를 다 만나게 되었다.

눈으로 본 승려가 무릇 이백여 명이고, 말을 주고받은 승려는 겨우 십여 명이었다.

사일(獅馹)은 일찍이 호종천교 정각보혜(護宗闡敎正覺普慧) 팔로제방 대주지(八路諸方大住持)

팔도승병 도총섭(八道僧兵都摠攝)이 되었는데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의 총섭이기도 하였다.

그는 조포사(造泡寺)에서 자리를 옮겨 북한산성의 총섭이 된 것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 호남인으로 어느 씨족에 속해 있다고 했는데,

반나절 동안 말을 해보니 매우 분명하고 막힘이 없었다.

그래도 때때로 남도(南道) 사투리를 썼다.

 

절에서 이틀을 묵는 동안 밤이면 문득 범패(梵唄)를 부르는 자와 《병학지남(兵學指南)》 및

‘대장청도도(大將淸道圖)’를 외우는 자가 있었는데

등불이 꺼져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알지 못하였다.

 

 

 북한산의 승려들은 산성방어를 위한 승병이라 불경보다 군사서적을 더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여러 절에는 불교경전이 전혀 없었는데 오직 승가사(僧伽寺)와 부왕사(扶旺寺)에만은

약간 남아 있었는데, 비록 있기는 하지만 책장이 떨어져 나가고 꿰맨 실이 흩어져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은 ‘결수문(結手文)’과 《은중경(恩重經)》,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여섯 묶음뿐이다. 경전에 통한 승려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중흥사는 폐허가 되어 있는데 중흥사 복원을 위해 기도정진하고 있다.

 

 

이옥은 첫 날은 태고사에서 머물고 둘째 날은 진국사에 머물며 산성내 곳곳을 유람하였다.

 

 

 

천석(泉石)은 탕춘대(蕩春臺)는 번잡하고 상운사(祥雲寺) 염폭(簾瀑)은 시원스럽고,

서수구(西水口)는 엄숙하고, 칠유암(七游巖)은 명랑하고,

산영루(山暎樓)는 풍요롭고, 손가장(孫家莊)은 밝으며 환했다.

모두가 아름다운 풍광으로서 우열을 쉽게 결정지을 수 없었다.

 

계곡을 따라 걸으며 계곡과 바위, 누각을 묘사했는데 그중 산영루(山暎樓)는 각별했다.

 

 

 

산중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산영루에 오른 것이 세 번이었다.

낮에 오르고 저녁에 또 오르고 다음날 아침에 지나면서 또 올랐다.

낮부터 저녁까지 날씨가 맑더니 이튿날 아침에는 구름이 끼었다.

산색의 어둡고 밝음과 수기(水氣)의 흐림과 맑음을 이번 걸음에서 모두 파악하게 되었다.

다시 보니 저녁 산은 마치 아양을 떠는 것 같아 고운 단풍잎이 일제히 취(醉)한 모양이요,

아침 산은 마치 조는 것 같아 아련히 푸르름이 젖어드는 모양이다.

저녁의 물은 매우 빠르게 흘러 모래와 돌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며,

아침의 물은 기(氣)가 있어 바위와 구렁이 비에 적셔진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아침저녁 산수(山水)의 변화는 누(樓)의 기문(記文)으로 남길 만한 것이다.

 

 

산영루가 복원된다면 이옥의 글을 기문으로 남겼으면 좋겠다.

현재의 산영루는 초석만 남아 있다.

 

 

 

 

 

 

이옥일행이 다녀가고 100여년이 지난 후인 구한말시기의 산영루와 일제시기의 산영루 사진이

최근에 알려졌다.

 

 

 1885년 주한미국대리공사 조지 클레이튼 포크(Foulk,1856~1893)가 촬영한 산영루

이 사진은  미국 위스콘신대 밀워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최근에야 알려졌다.

(http://blog.ohmynews.com/arts/251882)

 

누각위에 포크공사 일행인듯한 사람들이 주변 경치를 구경하고 있고 누각밑에는  일꾼들이 쉬고 있다.

이옥일행의 유람 모습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1911년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수도회 원장 베버(Norbert Weber)신부가 촬영한 산영루.

비석거리앞에 날렵하게 서있는 산영루.

한 아이가 산영루를 등지고 앉아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듯...

 

 

이옥일행은 계곡을 따라 계곡아래 대서문까지 갔다.

 

북한산성의 계곡방향의 방어를 보완하기위해 설치한 성문인 중성문. 

 

 

 

중성문의 튼튼한 방비를 위해 노적봉까지 성곽을 구축했고 바로옆 계곡에는 수구문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홍수에 쓸려가 흔적이 사라졌다.

 

북한산성중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 대서문.

이곳에 군량창고인 하창이 있었고

계곡에는 수구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유실되었고 양옆으로 성곽만 남아있다.

 

 

 

 

 

 대서문에서 바라본 원효봉과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이옥일행은  북한산의 경치를 만끽하며 북한산의 가을색을 묘사하였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모두들 단풍은 너무 이르다고 말하였는데 산에 들어와 보니

단풍과 낙석(絡石)과 나무로서 의당 붉어질 것은 이미 다 붉어져 있었다.

석류화(石榴花)의 붉음, 연지의 붉음, 분(粉)의 붉음, 꼭두서니의 붉음, 성혈(猩血)의 붉음,

짙게 붉기도 하고 옅게 붉기도 한 것이 이르는 곳마다 빛깔이 같지 않았다.

그것은 위치가 구별되고 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옥일행은 북한산에서 이틀밤을 머물고 금위영뒤 보국문을 넘어 도성으로 들어 갔다.

 

나는 이옥일행과 헤어져 대남문을 나섰다.

 

이옥일행의 삼장(三章)의 법중 나머지 하나는 시(글)에 대한 다짐이었다. 

 

첫째, 시(詩)에 대한 규율이다.

시 속의 사람을 지을 것이고, 사람 속의 시를 지어서는 안 되며,

시 속의 경치가 되게 할 것이고 경치 속의 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詩)안에 북한산을 담고자 다짐하며

이옥은 북한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은 잔잔하고 이슬은 정결(淨潔)하니 8월은 아름다운 계절이고,

물은 흘러 움직이고 산은 고요하니 북한산은 아름다운 지경(地境)이며,

개제순미(豈弟洵美)한 몇몇 친구는 모두 아름다운 선비이다.

이런 아름다운 선비들로서 이런 아름다운 경계에 노니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자동(紫峒)을 지나니 경치가 아름답고,

세검정(洗劍亭)에 오르니 이름답고,

승가사(僧伽寺)의 문루(門樓)에 오르니 아름답고,

문수사(文殊寺)의 문에 오르니 아름답고,

대성문(大成門)에 임하니 아름답고,

중흥사(重興寺) 동구(峒口)에 들어가니 아름답고,

용암봉(龍岩峰)에 오르니 아름답고,

백운대(白雲臺) 아래 기슭에 임하니 아름답고,

상운사(祥雲寺) 동구가 아름답고,

폭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대서문(大西門) 또한 아름답고,

서수구(西水口)가 아름답고,

칠유암(七游岩)이 매우 아름답고,

백운동문(白雲峒門)과 청하동문(靑霞峒門)이 아름답고,

산영루(山暎樓)가 대단히 아름답고,

손가장(孫家莊)이 아름다웠다.

정릉동구(貞陵洞口)가 아름답고,

동성(東城) 바깥 모래펄에서 여러 마리 내달리는 말을 보니 아름답고,

3일 만에 다시 도성에 들어와 취렴(翠帘), 방사(坊肆), 홍진(紅塵), 거마(車馬)를 보게 되니

더욱 아름다웠다.

아침도 아름답고 저녁도 아름답고,

날씨가 맑은 것도 아름답고 날씨가 흐린 것도 아름다웠다.

산도 아름답고 물도 아름답고,

단풍도 아름답고 돌도 아름다웠다.

멀리서 조망해도 아름답고 가까이 가서 보아도 아름답고

불상도 아름답고 승려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안주가 없어도 탁주가 또한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람이 없어도 초가(樵歌)가 또한 아름다웠다.

요컨대 그윽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밝아서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탁 트여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높아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담담(淡淡)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번다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고요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누구와 함께 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이 이와 같이 많을 수 있단 말인가?

이자(李子)(이옥)는 말하노라.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옥은 북한산을 유람한 이후 소설체 문장을 고치지 않아 정조로부터 많은 제재를 받았다.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정거(停擧) 처분을 받고와 군대에 복무하는 형벌(충군,充軍)을 두 번 받고 성균관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당했다. 충군처벌중 응시한 별시 초시의 1등 합격이 문체의 격으로 인해 꼴등으로  합격 처분되었지만 이마저도 충군이 사면되지 못하여 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젊은 세월을 다 보내고 40세가 넘게된 후 칩거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과거급제로 가문을 세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문체를 포기할 수 없기에 번번이 정조의 반정(反正)의 표적이 되었던 이옥은 “나는 요즘 세상의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선진양한(先秦兩漢)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위진삼당(魏晉三唐)에 무어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라고 스스로의 글에 자부하며 시대를 앞서갔지만 왕의 절대권력앞에 일개 서얼출신의 유생신분으로 맞설 수는 없었기에 불이익을 감수한 채 문체를 고치지 않으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글은 친구 김려가 <담정총서>에 담아  역었고, 2001년 번역본 <완역이옥전집>이 출간되었다.

그 양의 무려 5권에 2,600쪽의 방대한 분량에 달한다.   

 

 

출처 : 도성과 북한산성 이야기 그리고
글쓴이 : 구구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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